제9강 인식, 소통, 그리고 지각에 대한 담론들 |
◆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오늘은 인식, 언어, 담론, 소통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그래요. 인간에 대해서 첫 번째 시간에는 ‘생명체로서의 인간’, ‘하나의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야기 했고, 두 번째 시간에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욕망과 향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한 것이고요.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인식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과학이든 문학이든 사상이든 담론을 창출하는 존재 그리고 그것을 소통하는 존재 그리고 문화를 만들어내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식은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특권적인 위상을 부여받았죠. 사실 인간이 인식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도 성립하지 않겠죠. 인간이 그냥 생물학적 존재이거나 욕망과 감정의 존재라면,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사유하고 그것을 언어화하고 학문적인 담론으로 체계화하고 소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 자체가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거죠.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우리의 인식조건, 인간의 인식조건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죠. 예컨대, 우리가 실재, 존재라고 할 때도 이미 우리에게 나타난, 우리가 알 수 있는, 우리가 논하는 존재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존재하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 자신하고는 계속 순환관계를 이루죠.
전통인식론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플라토니즘이죠. 플라토니즘을 아주 간단하게 거칠게 이야기하면 the sensible과 the intelligible로 나눌 수 있어요. 감각적인 것과 지적인 것, 가지적인 것으로 나누죠. 감각적인 것은 우리의 sense를 가지고 인식하는 거죠. 내 눈으로 본 것, 내 귀로 들은 것, 내 손으로 만진 것, 코로 냄새 맡은 것, 입으로 맛본 것, 오감을 가지고 인식한 것이 감각이에요. sensible한 것들이에요. 내 눈을 가지고 본 사물의 형태, 색깔, 거리, 모양 이런 것이 sensible한 거지. 내 귀로 들은 소리들, 내 입으로 본 맛, 내 코로 맡은 냄새, 내 속은 확인한 물체의 촉감 이런 것이 모두 sensible한 것들이죠. 그것과 대비되는 것이 intelligible한 것이다. 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데 내가 인식하는 것이다. 예컨대 공기돌 5개가 있으면 모양 크기는 내 눈에 보이죠. 손으로 던지면 촉감이 느껴지죠. 입에 대면 돌멩이 맛이 나겠지. 그리고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그런데 공기돌이 ‘5개’라고 하는 것은 sensible한 것이 아니지. 이건 볼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는 거지. 그리고 또 다른 예는 영희나 철수가 있다. 우리는 그 사람 생긴 것을 볼 수도 있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죠. 악수를 할 수도 있고 다 할 수 있죠. 맛을 보는 것은 식인종이 아니니까 좀 그렇고.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 내 눈 앞에 있는 철수와 영희라는 개별자가 아니고, 인간과 같은 것을 철학용어로 ‘보편자’라 그러죠. 보편자들은 눈에 안 보이는 거지. 철수와 영희를 본 적은 있어도 인간을 본 적은 없죠. 뽀삐나 해피를 본 적은 있어도 ‘강아지’란 것을 본 적은 없죠. ‘생명’, ‘생명체’란 것을 본 적은 없죠. 그것은 보편자들이죠. 그 다음에 또 하나만 예를 들자면, 원 같은 거, 반지름이 5미터인 원. 물론 나는 칠판에 그려진 원은 본 적인 있죠. 그러나 수학적 존재(mathematical entity)인 원은 본 적이 없죠. 여기서 entity는 being과 같은 말이죠. 원, 삼각형, 함수 이런 것은 모두 수학적 존재죠. 이것들을 안보이죠. 칠판에 그려진 원은 수학적 원이 아니에요. 이것은 수학적 원을 sensible하게 표현한 거죠. 내가 이 원을 노란색 백묵으로 그리든, 파란색 백묵으로 그리든 아무 관계없죠. 내가 이것을 좀 두껍게 그리든, 가늘게 그리든 관계없죠. 이런 sensible한 것들, 내가 그린 원의 색깔, 두께, 불완전한 모양은 엄밀하게 말하면, 원의 본질이 아니죠. 지름5m인 원 자체는 intelligible한 거야. 이 색깔, 모양은 이 intelligible을 눈에 보이게 그린 거지. 그러니까 이것을 내가 무슨 색으로 그리든 별 관계가 없는 거지. 이런 것들이 가지적인 거예요. 플라톤은 이런 가지적인 것들 중에서도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intelligible한 것이 idea에요.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것을 유심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조금 도식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 이 세계는 우리의 sense에 나타나는 sensible한 것이 있죠.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귀에 들리는 것, 인식주체로 말하면 sense를 가지고 있고, 눈과 귀를 가지고 있죠. 그리고 우리의 sense에 나타난 것이 sensible한 거죠. 그런데 sensible하지 않은 intelligible한 것도 분명히 있죠. 그럼 우리한테도 사물을 감각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저 intelligible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있겠지. sense가 아닌 능력이 있을 것 아니야. 그것을 이성(理性), logos라 그러죠. 그런데 logos는 좀 넓은 의미이고, 여기에 플라톤이 전문적으로 쓴 말은 noesis죠. 더 정확히 말하면 nous에요. nous의 활동이 noesis야. 우리가 눈코귀입 외에 가지고 있는 것이 logos인데, logos는 아주 일반적인 말이고, 인식한다는 것으로 특화해서 말하면, nous죠. 그리고 그 nous의 활동이 noesis죠. 희랍어에서 -is, sis로 끝나는 것들이 모두 어떤 활동, 작용, 어떤 화(化),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변신이 metamorphosis죠. 이런 말이 화학에 많이 나오죠. 이런 구도가 서구인식론의 가장 전형적인 구도에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에는 플라톤보다 물론 훨씬 더 경험적이고 다르긴 하지만, 플라톤적 구도를 잇고 있어요.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 같은 유물론자들을 조금 예외로 한다면, 거의 17세기까지는 이런 플라톤적 사유구도가 계속 내려왔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여러 변화를 겪어왔지만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저런 플라톤적 사유구도를 깔고 있는 것은 오히려 철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이에요. 우리가 잘못생각하면 플라톤을 자연과학과 엄청 거리가 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 사변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 보죠. 그런데 그런 식의 플라톤 상은 중세에 만들어진 거예요. 중세기독교를 거치면서 일조의 신학적 이미지가 덧씌워진 플라톤이죠. 물론 플라톤에게 그런 대목도 있어요.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플라톤은 지금의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같은 과목들이 플라토닉한 구도를 가지고 있죠. 그러니까 무지개는 우리의 sensible한 차원에서 보면, 빨주노초파남보지만 그러나 우리의 노에시스로 보면 파동이죠. 수학적 구조죠. 그래서 오히려 자연과학이 플라토닉한 구조에요.
데카르트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비슷한 구조에요. 우리가 sense로 파악한 것을 데카르트는 뭐라 그래요? 제2성질(second qualities)이지. 이것은 real한 것이 아니야. 우리 주관 때문에 그런거야. 예컨대 내가 사탕을 먹으면 달고 약을 먹으면 쓰죠. 이것은 객관적으로 reaal 것이 아니야. real한 존재는 어디까지나 intelligible한 것, 데카르트한테는 기하학적인 거죠. 그러니까 내가 감각으로 느끼는 sensible은 이 기하학적인 것의 한 효과에 불과한 거야. 예컨대 내가 혀에 사탕은 동그랗게 생겨서 부드럽게 다가오지만, 쓴 약은 뾰족하게 생겨서 콕콕 찌른다는 식이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reality는 오로지 기하학적인 것이죠. 데카르트가 볼 적에 그것이 이 세계의 reality야. reality는 다 기학학적으로 되어 있어. 우리 몸도 기하학적으로 되어있고. 감각적인 것, 색깔, 소리, 맛 이런 것들은 그 기하학적인 것의 입자와 입자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서 우리가 쓰고 달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sense를 가지고 파악하는 sensible한 것들은 판타지죠. 우리가 느끼는 일종의 판타지야. 진짜 real한 것은 사물의 기하학적 구조죠.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이성, 수학을 통해서 이 reality를 파악해야하는 거죠.
자 그런데 칸트에 가면은 아주 중요한 변화가 옵니다. 플라톤이든 데카르트든 간에 전통적인 철학자들에게 어떤 전제가 있냐면, 플라톤을 이어받고 있는 전통적인 철학자들 대부분은 어떤 대전제를 깔고 있냐 하면, 인간이 sense로 파악하는 sensible한 세계를 넘어는 세계, 이 reality, 이데아의 차원이죠. 데카르트에게는 수학적 차원인 res extensa, 외연, 연장의 차원이죠. 이것을 우리 이성으로 알 수 있다는 대전제가 있죠. 물론 방법은 다르고 내용상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칸트 이전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대전제는 우리가 감각 외에 어떤 이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이 이성을 통해서 이 사물의 보이고 들리는 감각적 차원 그 이상의 intelligible한 차원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대전제예요. 그러나 저런 식의 사고는 칸트 이후 현대철학자들이 볼 적에는 아주 소박한 사유죠. 굉장히 사변적이고 근거 없는 거죠. 인간이 감각을 뛰어넘어서 감각 이후의 어떤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은, 특히 intelligible한 것 중에서도 수학적인 것은 몰라도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 또는 중세에서 말하는 신 같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현대철학은 sense로 sensible한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reason으로 intelligible한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거죠. reason과 intelligible한 세계의 관계를 잘라버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는 sense와 sensible인 거지. 이 차원을 칸트는 뭐라 그러죠? 현상계죠. ph?nomenon. 그렇다면 알 수 없는 이 차원은 뭡니까? 물자체죠. Ding an sich. 또는 Numenon이죠. 보통 본체계라고 번역하죠. 그런데 칸트의 문제는, 만약에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감각적인 세계의 저편에 있는 무슨 본질이나 형상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이 하나의 고대인들의 소박한 생각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은 내가 직접 감각한 것들밖에 없잖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과학이 가능할까? 칸트는 이렇게 물어본 거야.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를 알 수 있다는 형이상학은 부정합니다. 물론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형이상학을 다시 끌어오지만 말이죠. 니체의 표현을 빌면, 뒷문으로 형이상학을 끌고 들어오지만, 일단은 형이상학을 부정하죠. 그런데 과학은 부정할 수가 없잖아. 실제 설명력이 있으니까. 그래서 형이상학은 부정하지만 과학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는 설명해야 하잖아. 우리가 저 본체계를 알 수 있다는 식의 고대 형이상학은 부정하더라도, 근대에 와서 성립한 과학은 인정해줘야 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하는 현상계만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단순한 사실들(facts)밖에 없잖아. 영희는 키가 크다. 시청 앞에는 분수가 있다. 비가 오니까 땅이 촉촉해지더라. 바늘에 찔리면 아프더라. 그런 것 외에 무엇을 알 수 있겠어? 만약에 우리가 현상계밖에 모른다면 감각으로 확인하는 잡다한 의미 없는 사실들 외에 뭘 알겠어? 그런데 아니거든. 그냥 우리가 사실의 더미만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분명 이 세계에 대해서 그것을 법칙이라 그러든 뭐든 분명히 파악을 한단 말이야. 자 그러면, 잘 보세요.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현상계를 넘어서 인식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칸트의 핵심적 물음입니다. 거기에 대한 칸트의 대답이 뭐냐? 그래 맞다. 우리가 감각을 가지고, 칸트의 표현에 따르면 감성(sinnlichkeit)을 가지고 파악할 적에는 그냥 의미도 없는 무수한 ‘잡다’밖에 없다는 거야. 그야말로 단순한 정보 외에 아무것도 없는 거죠. 이것을 칸트는 ‘잡다'라고 하죠. 그런데 이 잡다 이상의 것은 우리에게 있다는 거야. 우리 인간이 그것을 갖고 있다는 거야. 본질이든 형상이든 그것이 감각 너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대상에 투영하는 것이죠. 다시 정리하면, 세계는 현상계와 물자체 또는 본체계로 이루어져 있죠. 그리고 현상계를 알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감성이죠. 여기까지는 누구나 똑같아요. 누구나 확인 가능하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런데 칸트 이야기는 간단해요. 결론만 이야기 하면, 우리의 ‘이성’, 칸트의 전문용어로는 ‘오성(Verstand; understanding)’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은 잡다한 것들을 뛰어넘어서 물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고, 이 잡다를 우리가 갖고 있는 오성으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종합하고 구성한다는 거지. 칸트이론의 핵심은 이거에요. 종합과 구성.
예컨대, causality, 인과를 봅시다.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옛날 철학자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 하겠죠.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땅이 젖는 것을 보겠죠. 그것 자체는 감각이죠. 그런데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뭡니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비가 오고 땅이 젖는 것 만이 아니라 인간은 그 이상을 알 수 있다는 거지. 그 이상이라는 것이 뭡니까. 플라톤으로 말하면, 땅의 이데아, 비의 이데아, 젖음의 이데아가 있고, 그것들이 서로 관계 맺으면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사실은 그 이데아들의 작용의 결과일 뿐인 거지. 그것을 종교적으로 단순화하면 섭리인 거지. 그 뒤에 신이 있어가지고 이렇게 했다는 거지. 데카르트 같으면 뭐예요? 땅의 기하학적 본질이 있고, 비의 본질이 있고, 그것들이 작용한 그 결과를 우리가 보는 거지. 그런데 칸트가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그 뒤에 아무 것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거죠. 그 뒤에 뭐가 있어서 이렇게 이렇게 하는지는 우리가 절대 말할 수 없다는 거지. 우리가 모르는 거라는 거지. 칸트는. 그런데 그 다음에 우리가 뭐라고 이야기하죠? 알 수 없는데, “비가 왔기 때문에 땅이 젖었다”고 이야기하잖아? |
◆ 전통철학자들과 근대철학자들의 세계 인식의 차이
다시 한 번 설명하죠. 비가 와서 땅이 젖었습니다. 이것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거죠.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거기에 대해 전통철학자들은 뭐라 그러는 거죠? 내 눈에 보이는 그 감각적 사실들이 왜 그렇게 되는지는 그 감각적 사실 뒤에 뭔가 더 본질적인 것이 있어서, 더 essential한 것이 있어서, 더 real한 것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는 거야. 그게 형상의 작용이든 신의 섭리든 기하학적 실체의 작용이든지 간에, 그것이 뭐든지 간에 뒤에 더 심오하고 essential한 것이 있어가지고 그놈이 이렇게 만든 것이고, 그놈이 뭔지 인간인 우리가 안다는 거 아냐. 플라톤 경우는 우리가 감각을 넘어서 형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거지. 플라톤 경우는 감각을 넘어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이성, nous죠. 종교 같은 경우는 계시지. 내가 감각하는 것 이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계시를 통해서 이지. 데카르트 경우는 수학을 통해서 내가 파악하는 거지. 그런데 칸트 이야기는 뭐냐? 그 뒤에 뭔가 있겠지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냐 이거지. 모른다는 거지.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다는 거지. 왜 알 수 없죠? 근거 있는 인식은 반드시 감각으로 확인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칸트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죠. “그런데 우리가 비가 오고 땅이 젖는 것을 그냥 보이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 왔기 때문에 땅이 젖는다고 연결시켜서 이야기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이 잡다를 그냥 그렇다고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 비와 젖은 땅과는 어떤 인과가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냐 지금? 형상이나 신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그것까지는 당신 말이 맞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냥 감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냐 이거야. 이걸 설명해줘야 할 것 아니야 칸트가. 어떤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면 그것 때문에 설명해야할 것이 나오는 것이거든. 어떤 사람이 무엇을 전제하면 항상 설명해야할 것이 나오는 거야. 모든 이론이. 그러니까 칸트 당신 말대로 우리가 잡다밖에 알 수가 없다면, 칸트는 뭘 설명해줘야 해요? 그렇다면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fact들 이상의 법칙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여기에 대한 칸트의 답은 뭐냐? 그것은 현상계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거지. 우리가 정말로 세계에 인과가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인간이 인과라는 틀을 가지고 그것을 보는 거라는 거죠. 비가 내리는 것과 땅이 젖는 것을 종합을 하고, 그런 사실들을 구성을 하는 거지. 우리 자신이. 그러니까 이것은 전통철학과는 어마어마하게 다른 거지. 우리가 감각적인 것 이상으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우리 의식의 틀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우리가 그런 틀을 가지고 사물을 그렇게 봐서 구성을 하는 거예요. 물론 칸트는 나중에 가면 또 ‘물자체’의 세계를 다시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도덕을 위해, 도덕의 차원에서죠. 이론적으로는 물자체를 알 수 없지만, 도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물자체의 차원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건 실천이성 입장이지. 이건 여기서 접어두죠.
우리가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칸트조차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죠.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말할 것도 없고, 칸트조차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죠. 대전제가 뭡니까? 칸트의 사유체계 내에서는 ‘아 그렇구나’ 설명이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칸트 안에서 였고, 이제 칸트 바깥에서 칸트에 대해서 어떤 물음을 제기할 수 있죠? 그렇죠. 선험성이죠. 우리가 그 틀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죠? 강하게 이야기하면 플라톤이나 데카르트가 말하는 이성, nous이고, 조금 약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범주들, 칸트가 우리가 대상에 투영한다고 했던 그 틀, 그 인간의 인식틀은 어디서 온 거죠? 칸트처럼 우리가 세계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세계의 현상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틀로 구성해서 받아들인다. 아 좋다 그거야. 근데 그 틀은 어디서 온 거예요?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이런 몸, 얼굴, 이런 틀을 어떻게 해서 가지게 된 거죠? 그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죠. 아이들을 보세요. 경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죠. 말 가르쳐줘봐. 하나 가르쳐주면 휙 알잖아. “수박이 딸기보다 커”라고 이야기해줬다고 합시다. 우리가 하나 하나 다 이야기 해주지는 않죠. 하나 하나 이야기 해주면 끝이 없겠지. 엄마는 “수박이 딸기보다 커”라고 한 경우만 이야기해줬는데 아기는 그것을 어떻게 일반화합니까? A가 B보다 크다는 틀로 스스로 확장시키죠. 좋아해 싫어해도 마찬가지죠. “난 아이스크림 좋아해, 난 딸기 좋아해” 이걸 전부 가르쳐 줍니까? 웨하스는 좋아하고, 딸기웨하스는 싫어하고. 이렇게 다 안 가르쳐 주죠. 한번 딱 이야기 해주면, 다 알아서 하잖아 모든 걸. 그것은 뭘 말 하냐 하면,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틀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 그게 어디서 왔냐는 거죠? 그게 가장 어려운 문제에요.
그런데 이 문제는 ‘진화론’이라는 것이 나오면서 이야기가 완전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죠. 이야기가 완전히 한 차원 다르게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느냐? 옛날 철학자들은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가 어떻게 이 세계를 인식하는지? 도대체 어떻게 사물들을 그렇게 파악해가지고 언어를 만들고 문화를 만들고 학문을 하고 법칙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는지 참 신기한 거죠. 그거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거예요. 그냥 우리가 그렇구나 하고 살아서 그렇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너무너무 신비한 거거든 그게. 그런데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의 모든 사유들은 본질주의 사고야. 본질주의. 인간은 이렇게 본질로서 딱 주어져 있는 거야. 본연으로 원래 그냥 그렇게. 그러니까 우리 모습, 우리 틀도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간이 옛날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가 서서히 가지게 되었다는 사고를 할 수 없죠. 본질주의적 사고 속에서. 옛날 사람들이 볼 적에 이건 말도 안되는 거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죠.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딱 주어진 거지. 이것이 진화론이 나오기 전 모든 철학의 대전제죠. 그러니까 플라톤 같은 경우는 신화적으로 로맨틱하게 설명하죠. 옛날 옛날에 인간이 이데아의 세계에 마차를 타고 갔는데, 말 한 놈은 얌전하고, 다른 한 놈은 말썽꾸러기죠. 그래서 이데아의 세계에 막 들어가려는데, 분명히 이데아의 세계를 보긴 봤어. 인간이 봤는데, 이 말썽꾸러기 말이 뒤엎어서 마차에서 떨어져서, 레테라는 강에 퐁당 빠져버렸어. 그런데 레테라는 강은 망각의 강이야. 그래서 이데아를 잊어버렸어.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옛날에 알았었는데 잊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거죠. 그것이 플라톤의 상기설이죠. 그것은 하나의 신화적 설명이죠. 궁색한 설명이죠. 얼마나 설명하기 어려우면 그렇게 설명하겠어. 그 다음에 데카르트나 중제는 간단해. 신이 그렇게 준거야. 신이 인간을 만들 적에 인간이 그런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영혼에 심어준 거야. 아주 간단하지. 그런데 이건 플라톤보다도 못한 설명이죠. 칸트 같은 경우는 뭡니까? 아예 설명을 안 하죠. 전통철학자들이 보는 이성은 어마어마하고 위대한 것이죠. 전통철학자들에게 이성은 항상 인간을 하늘에 이어주는 것이거든. 항상 그래요. 플라톤도 그렇고, 중세도, 동양철학도 다 똑같아. 인간은 몸과 영혼, 이성으로 이루어져 있죠. 여기서 몸은 현실적인 이 세계로 연결되는 것이고 영혼은 하늘로 이어지는 거죠. 이 구도는 플라톤의 인식론과 딱 맞아떨어지죠. 인간에게는 sensible한 차원이 있고, intelligible한 차원이 있는데, 우리의 sensible한 차원은 이런 현실세계 속으로 연결되는 것이고, 우리의 영혼, 마음은 하늘과 연결되는 거죠. 이건 사실 인간의 자아도취죠. 이렇게 인간한테 이성이라는 것은 대단한 거지. 인간에게 초월성의 받침대거든. 그런데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이성이라는 것은 생명체가 죽 발달하면서 원숭이니 인간이니 이런 것들이 생겨나죠. 최근에는 우리가 원숭이의 직계자손이 아니라며? 그 위에 선배가 있는데, 거기서 하나는 인간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원숭이로 같다고 하죠. 맞는지 모르겠어. 이게 모두 가설이니까. 확인할 수 없는 거니까. 하여튼 이 이성이라는 것은 이데아를 가보았든 신이 되었든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고, 생명체가 계속 진화해온 과정 중에 서서히 만들어진 거야. 이성이라는 것은. 이 이야기를 가장 심오하게 전개한 사람이 베르그송(Bergson)이죠.
1+1이 왜 2가 될까? 만약에 우리가 돌멩이를 두 개 합치면 분명 2죠. 그런데 물을 합치면 여전히 하나 아니야. 애초에 물에 하나가 어디 있어? 물 하나라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물을 컵이나 그릇에 떴을 때 성립하는 거지. 물에는 하나가 없지. 물 한 컵이 있는 거지. 무슨 이야기냐? 베르그송은 아주 간단히 이야기해요. 우리가 이성의 틀, 논리, 이성의 작동 방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체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체한테서는 1+1이 성립하죠. 액체에서는 성립하지 않죠. 기체는 말할 것도 없고. 유체에서는 애초에 1이니 2가 성립하지 않죠. 이런 고체에서만 성립하는 거죠. 한 장 두 장이. 공기에 하나 두 개가 어디 있어? 조금 더 넓게 말하면 분석적 사고, 우리 이성은 분석하죠. 우리 이성이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분석이지. 그런데 분석이라는 것은 고체에서만 가능하죠. 베르그송은 이런 이야기를 하죠. 우리 이성은 intelligence는 유심히 보면 그 작동방식이 고체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면 일단 일차적인 설명은 된 거죠. 칸트에 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생명체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작동하는 방식을 유심히 보니 참 고체적이더라. 그 다음에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왜 인간의 이성은 유체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고체 방식으로 작동할까? 베르그송의 설명은 아주 간단합니다. 베르그송의 설명은 어떤 신비한 가설도 없어. 아주 효율적으로 설명하죠. 그것은 이 인간이라는 이 종이, 생명체가 지구에서,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체를 정복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체를 정복함으로써 인간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죠. 돌을 깎아 집을 짓고, 돌을 비벼서 숟가락을 만들고, 유체를 막기 위해 땜을 쌓고, 전부다 고체죠. 우리 문명은 모두 고체죠. 이 칠판, 탁자 모두 고체문명이죠. 우리가 가진 이성이라는 것은 고체를 다루고 고체를 주물럭거리면서, 고체의 모델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거지. 베르그송에게 우리 이성은 전혀 대단한 것도 위대한 것도 아니야. 단순한 거야. 그런데 베르그송 설명은 고개가 갸우뚱한 측면이 있죠. 아주 간단한 것에서는 이해가 가요. 예컨대 이 종이를 보세요. 이렇게 사물을 자르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어. 이 집을 짓기 위해서는 나무를 자르고 돌을 잘라야 돼. 탁자를 만들려면 나무를 잘라야 돼. 이 A4용지를 들려면 종이를 잘라야 돼. 옷을 만들려면 헝겊을 잘라야 돼. 그것이 분석, analysis야. 베르그송에게는 인간의 분석이 대단한 것이 아니야. 인간은 살기위해서 분석을 해야 돼. 이런 정도는 이해가 가죠. 그러나 아주 고차원적인 수학 같은 것, 미분방정식 이런 것은 베르그송 방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죠. 어떻게 인간이 미분방정식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 그런 측면에서 베르그송의 설명도 분명 한계가 있어요. 어쨌든 베르그송의 인식론은 이전의 인식론과는, 칸트보다 더 완벽하게 전혀 다른 인식론이죠. 그러니까 베르그송은 옛날 철학자들과 반대로 이야기해. 옛날 철학자들은 현실이 잡다하기 때문에 현실을 넘어선 본질을 봐야한다 했지만, 베르그송은 거꾸로야. 우리 인간은 고체로 모델링 되어 있기 때문에 자꾸 모든 것을 고체로 보려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 세계의 진실은 유체라는 거지. 흐름이란 거예요. 인상파하고 베르그송하고 딱 물려있는 거예요. 옛날에 다빈치나 라파엘로는 뭘 그린 겁니까? 딱 어떤 본질을 그린 거지. 현실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겼나요? 현실세계 여자들이 모나리자처럼 생겼어요? 그렇게 생겼으면 접근하기가 좀 그렇죠? 그림으로 보니까 예쁘지, 진짜 보면 안 예쁠 것 같아. 오히려 현상세계를 넘어선 어떤 인간, 여인의 본질을 그린 거지. 인상파회화는 뭡니까? 그런 고체적인 것들이 흐물흐물 다 무너지는 거죠. 이 세계는 생성이라는 것, 흐름이라는 것, 풍부하고 추상적이고 막막한 적연부동의 본질이 아니라, 생생한 질, qualitiy들이야. quality라는 것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식의 주관적이고 판타지가 아니라, 그런 quality들의 생생한 명멸하는 장이다. 우주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 인간의 이성은 그것들을 자꾸만 그것들을 자르고 붙이고 측정하고 이름붙이고 자꾸만 공간적인 것으로 조작한다. 왜? 인간은 자꾸만 그렇게 하나? 인간이 지구에서 고체를 그렇게 조작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죠.
진화론이라는 것도 말이 진화론이지, 진화론 안에도 엄청나게 많은 형태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제 진화론의 갈래 중 하나는 진화라는 것을 어떤 발전, 진보, 목적, 방향성을 분명하게 부여해서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화라는 것은 어떤 미개한 상태에서 고도의 발전되고 어떤 목적으로 가는 것으로 이해해온 것이 하나의 진화론이었죠.
이런 진화론은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이런 진화론이 이른바 사회진화론으로 갔을 때 굉장히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요. 왜 그럴까요? 인간의 삶에 어떤 것은 더 발전된 형태고 어떤 것은 발전되지 않은 형태라는 말을 하잖아. 서양 사람들이 볼 적에 자기네들은 진화가 잘 된 것이고, 서양이 아닌 저 미개한 나라 사람들은 진화가 영 안 된 거지. 그러니까 모든 것이 서양식으로 바뀌어야지. 그 사람들 식으로 보면. 경제도 구닥다리가 아니라 자본주의로 바뀌어야 하고, 한의학도 양의로 바뀌어야 하고, 옷도 양복으로 바꾸어야 하고, 종교도 기독교로 바꾸어야 하고, 교육도 과학도 다 서양식으로 바꾸어야 하죠. 전부다 그렇게 바뀌는 거죠. 진화론이라는 것을 어떤 목적론적으로, 미개한 것에서 어떤 단계를 거쳐서 가는 식의 진화론은 19세기 말 20세기 전반에 제국주의의 기초가 되요. 이렇게 단계를 설정해놓고서 저 미개인들은 한참 낮은 것이고 동양은 중간쯤 되는 것이고 서양은 제일 위에 있는 식의 이런 것이 이른바 사회진화론이죠. 그러니까 그 판타지가 묻어있는 것이 근대화란 말이죠.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아침에 딱 일어나면 노랫소리가 들려요.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우리모두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아 그거 듣기 싫어서. 맨 날 아침에 눈만 뜨면 스피커에서 노래가 나와서 얼마나 지겹던지. 눈만 뜨면 근대화야. 그런데 근대화 되가지고 옛날 사람들 비해가지고 현대인들이 뭐가 그렇게 행복해? 내가 어릴 때가 더 행복했지. 이사 오면 떡도 돌리고. 같이 모여 놀고. 아이들과 저 벌판에 나가서 ‘다방구’도 하고. 저런 식의 목적론적 진화론은 상당히 위험한 이데올로기적인 사고죠. 이건 이제 생물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저쪽으로 갔을 때 이야기고.
생물학 자체 차원에서 학문적으로 이야기해도 오늘날의 진화론은 저것보다 훨신 복잡하죠. 저렇게 선형적이지 않고 아주 복잡하죠. 예를 들어서, 핵전쟁이 났어요. 사람은 거의 다 죽었어. 그런데 벌레들은 잘 안 죽거든. 그럼 벌레가 인간보다 고등동물 아니야? 앞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잖아 인간은 환경에 적응 못해서 다 죽었고 벌레들은 펄펄 살아있으면 벌레가 더 고등동물이잖아. 그러니까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생물학 자체로 놓고 볼 적에도 진화론이라는 것이 굉장히 복잡한 문제다. 그렇게 산뜻하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 진화론이 엄청 복잡해요. 진화라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힘들어요. 그거는 뭐 우리가 가진 많은 지식을 총동원 해볼 적에 1억 년, 2억 년 전에 인간이 이렇게 생겼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거죠. 이상한 형이상학적인 것을 끌고 와서 어떤 억지를 부리지 않는 이상은 설득력이 없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진화해왔냐 하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19세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도식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거지. 그래서 여담으로 이야기 하면, Evolution이라는 말이 맨 처음에 등장했을 적에 천연(天演)으로 번역했어요.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진화(進化)라는 번역으로 바뀌었어요. |
◆ 바슐라르와 세르의 인식론
인식론에서 여러 가지 형태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까지의 이원론적 구도, 그 다음에 칸트의 구성주의적 생각, 베르그송의 진화론적 생각까지 봤는데, 우리가 보통 서양의 고전적 입장, 그러니까 진화론이 나오기 이전의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인식론을 합리주의, rationalism 이라고 볼 수 있어요. 베르그송이 등장하면서 합리주의가 조락을 하게 되죠. 그 이후에 상당히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합리주의를 재건한 인물이 바슐라르에요. 바슐라르를 한번 봅시다. 바슐라르는 베르그송의 연속의 존재론에 맞서 순간의 존재론을 제시했다. 시간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특정한 순간들의 마치 촛불처럼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예컨대 신은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베르그송은 뭐라 그랬나 하면, 우리가 사물들을 불연속적으로 자르고 오려붙이는 것은 실재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체적인 틀에 맞추는 거죠. 실재 자체는 흐르는 것이고, 생동하는 이미지들의 명멸인데 그것을 인간이 자기가 가진 틀로 자르는 거죠. 분석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베르그송은 연속의 철학자이고, 흐름의 철학자에요.
바슐라르는 베르그송의 반합리주의에 다시 반기를 드는데, 그 때 등장하는 중요한 존재론적 논의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불연속성이에요. 모든 합리적인 이해는 불연속을 필요로 하죠. 불연속이 되어야지 우리가 그것을 딱 끊어서 이해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지. 연속적으로 흘러가면 자를 수도 없고, 잴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잖아. (컵과 종이를 들며) 이놈과 이놈이 불연속이 되어야, ‘이놈은 컵이고, 이놈은 종이야’라는 거죠. 이것들이 흐물흐물 해가지고 섞여버리면 이야기할 수가 없잖아. 불연속이 되어야 이것은 몇 센티, 저것은 몇 센티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는 거지.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죠. 인간관계도 그렇죠. 사람이라는 것도 그렇죠. 딱 딱 딱 불연속이 있기 때문에 철수가 있고 영희가 있는 거지. 그런데 만약 완벽한 불연속이라면, 우리 사회는 어떤 관계도 성립하지 않겠죠. 만약 완벽한 연속이라면 그냥 한 덩어리겠지. 불연속적인 데 연속된 면이 있기 때문에, 너는 너고 나는 난데 말이 통하고 감정이 통하는 거지. 연속, 불연속 문제가 참 중요한 문제죠.
베르그송은 유체의 철학자고 연속의 철학자다. 바슐라르는 다시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의 문제, 시간의 불연속의 문제를 들고 들어옵니다. 베르그송이 볼 때 과학은 추상적인 거죠. 명멸하는 질들의 바다에서 뭔가를 딱 꺼낸 그런 추상적인 것이지만, 바슐라르에게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질적인 차원, 감각의 차원, 이미지의 차원을 넘어서는 수학적 본질들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과학이에요. 바슐라르 이야기는, 현대과학이라는 것은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그 정도의 과학이 아니라는 거야. 특히 현대물리학은 그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수학적 세계다 이거죠. 그것을 인간이 고체에 적응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이거지. 그래서 베르그송이 수학이나 논리학이나 이성의 추상적인 세계를 비판하면서 이 quality의 세계, 감각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어떤 생동하는 흐름의 세계, 시간의 세계를 다시 복구시킨 사람이야. 베르그송이. 복구시켰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강조한 사람이지. 원래 서양전통철학이 그런 것을 하찮게 보는 거니까.
그런데 바슐라르는 다시 고전적 입장으로 돌아가는 거야. 이미지의 세계, 감각의 세계는 피상적인 세계다 이거죠. 정말 이 세계의 본질은 수학적으로 되어있고 그렇기 때문에 수학적 물리학, mathematical physics가 이 세계의 본질을 보여주는 거다. 이것을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말로 표현했죠. 중요한 개념이야. 아인슈타인의 공간론, 양자역학의 물질개념, 이런 것은 우리의 경험의 세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라고. 예컨대 4차원 공간, 리만이 말하는 n차원공간, 예컨대 10차원 공간은 3차원공간에서 사는 우리의 이미지나 감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거지. 우리는 뭔지 몰라. 오로지 순순한 이성만으로 수학적 이성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세계야. 그래서 현대과학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감각이나 이미지의 세계에서 완전히 인식론적으로 단절해야 돼. 펑 뛰어넘어야 한다는 거지. 참 복잡하죠. 이 사람 이야기 들으면 이 사람이 맞는 거 같고, 저 사람 이야기 들으면 저 사람이 맞는 거 같고.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전적인 인식론의 한계는 분명해요. 그런데 베르그송과 바슐라르의 관계는 복잡미묘하지. 바슐라르가 확실히 베르그송을 극복했다고 보기엔 반드시 그렇지는 않죠. 어떤 면에서는 바슐라르가 베르그송보다 낫죠. 분명히 베르그송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공부하다 이런 게 들어오면 확실히 이 사람이 맞다싶을 때도 있고, 진짜 막상막하일 때가 있어요. 왔다갔다 할 때가 있어요. 베르그송과 바슐라르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비교를 해 볼만 한 그런 사람들이죠.
재미있는 것은 바슐라르가 과학철학을 할 적에는 우리가 경험하는 sensible한 세계는 real한 게 아니고 고도의 수학으로 파악한 세계가 reality다. 무지개로 말하면 내가 본 것은 껍데기고 진짜는 파동방정식이다 이거지. 재미있는 것은 말년에 가면 자신이 피상적이라고 말했던 이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해. 그러면서 이 사람이 4원소를 이야기하는데, 4원소가 뭡니까? 물, 불, 공기, 땅, 地水和風이죠. 과학철학적으로 보면 이 지수화풍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들이죠. 직접 경험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지금의 화학으로 보면, 이것들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는 참 소박한 이야기죠. 옛날에 엠페도클레스는 이 네 가지가 우주의 본질이라고 봤거든. 그런데 오늘날 바슐라르의 철학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지로 확인하는 차원이고, 오늘날의 화학으로 보면 현상적인 거죠. 지금은 산소, 수소에서 더 내려 가가지고 산소와 수소의 결합각도와 길이까지 재죠. 그러니까 지수화풍은 옛날 구닥다리 이야기죠. 지금 지수화풍가지고 우주를 설명하면 사람들이 모두 웃겠죠. 이것은 과학이고. 그런데 시학적으로 보면 지수화풍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가 더 중요하죠. 땅, 대지의 건강한 세계. <물과 꿈>이라는 책이 있죠. 불은 우리가 어릴 때 논둑에 불을 놓잖아. 그리고 공기. 이런 세계를 시학적으로 이야기를 해요. 재미있는 것은 이 과학의 세계에서도 imagination이 중요하죠. 재미있는 것은 옛날 과학에서는 상상력이 나쁜 거죠. 어떻하면 상상력을 없앨까를 고민했죠. 어떻게 우리가 상상하지 않고 진짜를 볼까를 고민했는데 지금 과학철학에서는 상상력이 중요하거든. 그렇다면 이 시적 상상력과 물리학적 상상력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죠. 그런 것을 죽 탐구한 것이 바슐라르의 상상력의 철학이죠. 바슐라르에게 철학이라는 것은 시학과 물리학을 연결시켜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영혼의 남성적 아니무스의 얼굴은 과학적 얼굴이고 여성적 얼굴인 아니마의 얼굴은 시적인 얼굴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죠.
오늘날 인식론을 대표하는 사람은 미셀 세르(Michel Serres)죠. 지금 살아있죠. 미셀 세르가 쓴 책에 중요한 책이 <헤르메스> 연작이 있어요. 헤르메스는 여행의 신이자 메신저이기도 하다. 세르는 담론의 세계를 여행하는 순례자이다. 수학에서 시로, 물리학에서 철학으로, 미술에서 소설로, 무수한 담론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지치지 않고 여행하는 타고난 여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여행을 통해서 세르는 담론과 담론 사이에 다리를 놓고, 서로 상관없이 보이는 담론들을 개입시키고, 하나의 담론을 다른 담론으로 번역하고, 다채로운 담론을 보다 넓은 공간에 분배하기도 한다. 또한 세르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한 담론에서 얻은 통찰을 다른 담론으로 건네주고, 교류를 펼치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해서 세르는 방대한 담론의 장 사이를 오가며 각 담론들 사이를 응시한다. 가장 기본적인 담론의 구분은 역시 자연과학과 인문학이죠. 물리학이나 시같이 정확하게 구분되는 담론들이 아니라 그 구획이 배제한, 그 구획 때문에 인식의 저편으로 밀려난 그 어두운 사이를 응시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여행자이면서 동시에 발견자이다.
바슐라르와 세르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바슐라르는 시와 물리학을 딱 갈라서 이원적으로 설명했다면, 세르는 그런 구분 자체를 세밀하게 바라보는 거죠. 그런 구분의 근거는 무엇인지, 도대체 담론들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담론들 사이를 여행하는 거지. 세르는 그의 스승 바슐라르와는 달리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긋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신화와 예술 등 모든 형태의 담론들을 평등하게 바라본다. 그런데 평등하다는 것이 대등하다는 것은 아니죠. 조금 다른 개념이죠. 분명히 못한 이론이 있고, 더 나은 이론이 있죠. 그러나 이들 모두는 어쨌든 인식론적 장, 담론의 공간이라는 지평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물리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생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철학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간에 전혀 상관없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담론의 공간, 어떤 인식론적 장, epistemological field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거죠. 물론 어떤 구체적인 차이점은 당연히 있죠. 만약 구체적인 차이점들이 없다면 우리가 그 이름을 달리 부를 필요가 없겠지. 이름이 다 다르다는 것은 뭔가 다르다는 거죠.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구분을 너무 날카롭게 긋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라는 거죠. 모든 담론이 속해있는 공간, 이 공간이 다양한 담론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험적 조건이다. 때로는 이 선험적 조건, 우리가 객관적 선험이라고 부르는 것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세르의 생각 역시 구조주의적 바탕을 띠고 있는데, 세르는 이 객관적 선험을 총체화해서 파악할 수는 없다고 보죠. 오히려 이 선험은 각 담론을 파악하게 해주는 개별적 조건들을 비교하고 보다 넓은 관점에서 통합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래서 세르의 총체성은 헤겔의 총체성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거죠.
세르 철학에는 여러 국면이 있어요. 헤르메스 연작도 있고, 과학철학도 있고, 에밀 졸라에 대한 연구도 있고, 감각론도 있고 엄청나게 다양한데, 역시 세르는 헤르메스 연작에서 나타나듯이 평생 주제는 소통이죠. communication. 소통하면 또 유명한 인물이 하버마스죠. 그런데 세르와 하버마스는 재미있게도 대조적이에요. 하버마스는 소통을 잘 하려면 여러 조건을 이야기 하죠. 정직해야하고 개방, 열려 있어야 하고 바깥의 개입이 없어야 되고 등등 죽 이야기하죠. 전통적인 이성주의적 입장이지. 우리가 소통을 잘 하려면 우리의 이성을 잘 사용해야 하고, 이성 외적인 여러 요소를 가지고 와가지고 소통을 방해하면 안된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소통상황을 이야기 하죠. 세르는 정확히 반대이야기를 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가를 이야기해 이 사람은. 왜 소통이 잘 안될까? 무엇 때문에? 거꾸로 묻는 거지 이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왜 소통이 안 될까를 물어보죠. 특히 세르가 평생에 걸쳐서 한 작업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이예요. science라는 과학, humanity라는 인문학, 넓게 보면 literature라는 문학의 소통을 어떻게 가져갈 수 있을까를 세르는 평생 과제로 삼았죠. 이런 소통은 잘못하면 완전히 뒤죽박죽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세르는 이런 소통을 매우 위험한 항로인 ‘북서간의 여행’으로 비유한다.
세르의 소통이론은 하버마스와 대조적인데 하버마스는 소통의 이상적 상황을 찾았고, 이상적 조건을 사유했다. 반면에 세르는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늘 소통은 완벽하지 못할까? 이런 물음을 제기했고, 우리가 이것은 소통의 장해물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세르는 이런 장애물들을 뭐라 불렀느냐면 ‘노이즈’라고 불렀다. 우리가 대화를 하고, 신호를 보내면서 커뮤니케이션 할 적에 반드시 노이즈가 동반된다는 거야. 반드시. 여러분이 라디오를 들을 적에 주파수를 맞추죠. 그것은 전체가 노이즈죠. 거기서 잘 찾아야 소통이 되죠. 사람관계도 마찬가지에요. 항상 인간은 노이즈에 둘러싸여 있어. 그 노이즈 사이에서 어떻게 주파수를 잘 맞출 것인가가 중요하죠. 조금 이론적으로 말하면, 담론과 담론 사이에 노이즈가 끼어드는 것은 담론의 공간이 평평한 유클리드적 공간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위상공간이기 때문이다. 위상공간은 특이성이 분포된 공간이고, 이 공간형태를 연구한다는 것은 곧 특이성들이 분포를 연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공간을 탐구하는데 세르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도구를 사용하죠. 하나는 라이프니츠에서 비롯된 논리학, 수학, 현대정보이론과 같은 이른바 형식과학들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이 상당히 구조주의적인 발상인데, 담론들이 아주 다양하지만 담론들이 구사하는 그 logic이라고 할까? 그 담론들이 구사하는 formal한 방식들은 통하는 게 많다는 거야. 그러니까 전에 신화 한번 이야기한 적 있죠. 레비 스트로스 이야기하면서. 신화가 어마 어마 하게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유심히 보면, 여러 신화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format이 있죠. 그런 format들을 잡아내는 거지. 그래서 다른 언어, 다른 방식, 다른 주제로 활용되고 있지만 유심히 보면, 어떤 공통된 format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format을 잡아내는 거지. 또 하나는 신화죠. 인류문명을 유심히 보면 좁은 의미 신화가 있고 넓은 의미 신화가 있는데, 좁은 의미의 그 신화만이 아니라 그 후의 인류문명도 유심히 보면 신화를 활용한 거라는 거야. 웬만한 것은 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외디푸스 신화를 활용한 거죠. 그런 식이죠. 그러니까 인류문명이라는 것이 옛날 신화가 갖고 있는 틀 있죠. 그 서사구조를 끝없이 재활용하는 역사라는 거지 이 사람은.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물론 아주 고급소설은 안 그렇지, 카프카 이런 것은 내러티브가 아니니까, 웬만한 우리가 많이 보는 그런 것들은 보면 다 format이 있지. 그 format이 어디서 왔나? 다 옛날 신화에서 온 거야. 그러니까 미셀 세르 책을 보면 신화가 어마어마하게 나와. 별라별 신화가 다 나오지. 나도 그리스철학을 공부하면서 웬만큼 신화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 책을 읽으면 정말 희한한 것이 많이 나와. 듣도 보도 못한 그런 것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세르는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까지도 신화로 봐요. 예컨대 대폭발이론 같은 것도 신화구조에 있다는 거야. 웬만한 과학이론도. 물론 그것이 수학적으로 표현되고 실험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 가장 기본적인 구조나 패턴들은 신화와 너무나 유사하다는 거야. 예컨대 우리가 두 번째 자연과학 시간에 이야기한 카오스이론은 옛날에 루크레티우스가 시로 한 이야기와 너무나 일치한다. 물론 차이도 이야기해야 하겠지. 너무 같다고 이야기하면 동일시하는 거니까. 그렇지는 않지. 뭔가 동일한 지평 위에서 움직이는 것도 이야기해줘야 하고, 그런데 그게 왜 다른 지도 이야기해줘야 하죠.
노이즈는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노이즈는 소통의 필수적 조건이다. 노이즈는 명료한 메시지가 그로부터 마름질되어 나오는 장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노이즈가 없으면 주파수를 맞춘다는 개념 자체가 없겠지. 주파수를 맞춘다는 말 자체가 노이즈를 전제하는 거겠지. 우리 소통이라는 것이 노이즈가 없으면 인생이 좀 심심하겠지. 오해도 있고 그래야 뭐 화도 내고 울고 화해하고 그럴 텐데, 소통이 백퍼센트 된다면, 인생이 별로 재미가 없을 거 같아요. 노이즈가 있으니까 막 복잡해지는 거지. 이야깃거리도 많아지고. 그래서 노이즈에 저항하는 메시지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이즈는 두 사람의 소통 사이에 끼어드는 제3자와도 같다. 이 제3자를 배제함으로써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진다. 모든 형식적 체계도 제3자 배제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거지. 그러니까 세르한테서는 묘하게 베르그송적인 측면도 있고, 또 합리적인 면도 있어요. 왜냐? 이 세계가 노이즈라는 것, 좀 나쁘게 말하면 노이즈고, 좋게 말하면 뭡니까? 베르그송이 말하는 질적인 명멸하는 세계죠. quality들이 명멸하는 질적인 세계지. 그리고 우리가 ration하다고 부르는 것,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뭡니까? 그 풍요로운 세계에서 마름질해내는 거지. 마치 지지직대는 노이즈의 세계에서 주파수를 딱 마름질해내듯이. 이 세계는 풍요로운 질적인 세계고 그 세계로부터 어떤 formal한 틀들을 마름질해내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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