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근대철학은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
◆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 - 근대철학
이런 (유물론적) 입장은 특히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강력하게 대두 되는데, 생명과학의 발달과 맞물려있어요. 예컨대, 뇌과학, 신경생리학(neuro-biology), 로보트학(Robotics), 분자생물학(DNA, 유전자 연구), 동물행동학과 같은 별의별 학문이 등장하게 되죠. 생명과학이 발달하면서 과거에 정신활동이라고 불렀던 활동들도 알고 보니 물질적인 것이더라. 예컨대 뇌과학으로 말하면, 뇌의 어디를 찌르면 웃고 어디를 찌르면 울더라. 그러니까 슬픔과 기쁨이라는 마음의 작용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뇌의 어디에 자극이 가는가의 문제라는 거죠. 사실은 엄청 복잡하지만 이건 거칠게 설명한 거죠. 내가 예전에 대덕연구단지에 간 적이 있어서, 거기서 뇌지도를 본 적이 있는데, 아주 복잡해. 서울시 지도보다 더 복잡해. P1 P2..., Q1 Q2 번호가 좍 붙어있어. 어디를 찌르면 어떻게 작동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야. 단순하게 작동하는 게 아니야. 엄청 복잡하게 작동하는 회로야. 이렇게 복잡하게 회로가 연결되면 울고, 저렇게 복잡하게 회로가 연결되면 웃는 것이라는 식으로 지도를 그려놓았어요. 물론 그 복잡한 지도도 사실은 뇌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되죠.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게 작동한다는 거죠. 예컨대 행동주의(behaviorism)가 있죠. 이건 좀 심리학에서 나온 이론이죠. 행동주의는 인간에게 이런 자극(stimulus)을 주면 저런 반응(response)이 나온다는 건데요. 한 때는 엄청 유행했지만 지금은 아니죠. 인간 행동의 맥락이 엄청 복잡하니까. ‘목마른 사람은 물을 먹는다’, 그런데 그 사람이 황제이면 누가 독을 타지 않았을까 해서 안 먹을 수도 있는 거지. 인간의 행동이라는 것이 맥락과 상황과 분위기, 기억 등 모든 것이 같이 작동하는 건데, 어떤 모델을 딱 만들어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다는 거지. 요새는 행동주의를 별로 이야기 한 하죠. 물리주의라든가 심신동일성은 유물론이에요. 정신이라는 것은 물질작용에 부대하는 것이다. 따라 나오는 것이다. 물질이 변화하는데 물질 변화에 상응해서 부대하는 것이 정신활동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이론들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모든 이론들엔 한계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실체주의 또는 환원주의라는 거죠. 뇌과학 같은 학문들은 너무 실체주의예요. 예컨대 어떤 것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것이 유전자든 뇌든 뭐든 하나를 둔 다음에, 모든 것을 거기로 환원하는 거지. 그런데 여러분과 내가 만나서 공부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이 우리 유전자에 써있나요? 그런 모든 결정론들, 옛날로 말하면 신이죠. 옛날에는 모두 신의 뜻이라고 하잖아. 여하튼 에너지든 유전자든 뇌든 뭐든 간에 이런 모든 이론들은 내가 볼 때 모두 환원주의이자 실체주의다. 옛날 사람들은 신의 뜻, 섭리, 운명, 하늘 어쩌구 하면서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현대인들은 유전자로 뇌로 말하지만,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실체주의라는 거지. 모든 만남은 우발적이야, 우발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지. 인간의 모든 만남이 결정되어 있다면, 그것이 하늘의 뜻이든 유전자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전혀 예상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만난거지. 그러니까 소중한 거야. 모든 실체주의는 환원주의는 이런 문제를 갖고 있어요. 과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성격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보통 과학이라는 것을 이상하게 숭앙하지만, 그것이 물리학이든 심리학이든 경제학이든 뭐든 간에 모든 과학은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적, 실체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다만 환원하는 게 무엇이냐가 다른 거지. 생물학자는 유전자라 그러고, 생리학자들은 뇌라 그러고, 사회학자들은 사회계급이라 그러고, 모든 과학은 환원주의, 실체주의적 한계를 갖고 있죠. 그래서 과학이라는 것을 너무 믿으면 안 돼. 그건 아주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것도 문제죠. 왜냐 분명 그런 측면이 있기 때문이죠. 분명 우리는 유전자, 사회구조, 경제로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죠. 자기가 타고난 유전자, 뇌가 어느 정도는 있죠. 사회구조, 경제, 유전자로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그 중에 어느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는 거죠. 그런 것들이 다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거기에 우발성이라는 게 있는 거죠. 그런데 자꾸 그 가운데 하나로 환원해서 말하는 것은 담론을 위한 담론일 뿐이죠.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다보면 헛갈리죠. 생물학자 책 읽으면 다 유전자 탓이라 그러고, 정신분석학자 책 읽으면 다 무의식 때문이라 그러잖아요. 그럼 누가 맞는 거야? 요즘 도킨스란 사람이 ‘이기적 유전자’ 이야기 하죠.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겉으로는 엄청 세련된 이론 같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아주 고전적인 환원주의에 불과한 거야.
이런 실체주의와 조금 다른 입장이 기능주의(functionalism)죠. 기능주의는 what에서 찾는 것을 거부하는 거죠. 앞에서 말한 실체주의나 환원주의는 what에서 찾는 거죠. '무엇'이 우리의 정신을 결정하느냐 설명하느냐죠. 옛날의 신부터 현대의 유전자까지 what, 이것을 물어보는 거죠. 기능주의는 'what' 자체를 거부하고 'how'로 설명하죠. 예를 들어, 로봇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상상으로 인간 같은 로봇을 만들었어. 눈물도 흘리고 화도 내요. 그런데 실체는 다른 거지. 뜯어보면 쇠, 실리콘 뭐 이런 거 아냐? 그렇다고 이 로봇이 유전자로 태어났나? 아니죠. 만들었죠. 그런데 그 놈이 우리와 똑같이 행동해. 그럼 그 놈이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만약 실체주의로 말하면 인간이 아니죠. 생명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기계로 만든 거니까. 그런데 what으로 말하면 아니지만, how로 말하면 인간과 똑같다고 할 수 있죠. 화내고, 이야기 하고, 웃고 이게 인간 아니냐 이거죠.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what이 아니라 how로 물어보는 것, 이것이 바로 기능주의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능주의가 발달한 맥락이 컴퓨터의 발달과 관련이 있어요. 여러분 아이작 아시모프 아시죠. 러시아의 과학자이지만 SF소설가로 더 성공했지. 그 사람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작품이 있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도 나왔지. 나는 영화로만 봤는데요. 거기 보면 컴퓨터 Hel이란 놈이 나와요. 그 Hel이 나중에 우주비행사들 죽이고 그러잖아. 사람과 체스도 두고. 그 영화 대사에 이런 말이 나와. “헬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람과 대화도 하고 체스도 두고 심지어는 계략을 꾸며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죠. 그럼 마음이 있을까? 앞에서 말한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마음이 있는 거지. ‘I think’, 생각하니까. ‘Gost in the Shell’, 몸이 없는 것은 문제가 안 돼지. 그 놈이 인간처럼 작동하는거야. 그러니까 이 기능주의의 등장배경이 만약 컴퓨터가 엄청 발달해서 지금처럼 연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도 하고 감정까지 가진다면 그것은 마음이 있는 것 아니냐?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무엇으로 되어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거야.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냐? 사람의 마음처럼 작동하면 그것이 마음 아니냐? 라는 입장이 기능주의에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 과학과 기술이 어떻게 발전하는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로봇이 과연 어디까지 만들어질 것인지, 감정을 가진 기계가 가능할지 뭐 이런 문제들은 두고 봐야죠. 단정내리기 힘든 문제죠. 그런데 기능주의에도 한계가 있어. 실체주의가 너무 what으로 갔다면, 기능주의는 너무 how로 가서 문제가 돼지. 기능주의는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만 이야기 하지, 몸이란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기 때문이죠. 기능주의는 마음만 딱 떼서 설명하는 거지. 그게 문제야.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이 몸하고 떼어놓고 어떻게 설명할거야? 유물론이 마음을 너무나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면, 기능주의는 마음을 너무 똑 떼어서 이야기 하죠. 앞에서 말한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컴퓨터가 우주선 안에서 기능을 통해 작동할 수는 있어도, 몸이 없으니까 그 기계만 꺼버리면 이놈은 움직일 수 없는 거지. 컴퓨터가 잘난 척하면 코드를 뽑으면 돼. 나중에 로봇이 발달해서 이놈이 까불면 코드 뽑아버리면 끝나지. 아니면 배터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든지. 몸이란 것을 무시할 수 없죠. 또 앞에서 말한 <공각기동대>에서도 인형사가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2501’과 같은 부호를 부여받은 프로그램이었죠. 이 프로그램이 엄청 발달하다보니 마음이 된 거지. 프로그램 정보가 무한히 집적되어 어느 순간 의식을 갖게 된 거죠. 거기 나오는 어떤 사람이 “너를 어떻게 생명처럼 이야기할 수 있느냐?”라고 물어보니까,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다” 이렇게 말하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DNA가 뭡니까?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DNA를 물질로 보죠. 그건 잘못 생각한 거야. 물론 1차적으로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 등으로 이루어진 물질이지만, 핵심은 그 물질이 아니야. 그 염기들이 어떻게 배열되었느냐 하는 정보에요. 정보. 물질이 아니에요. 물론 정보는 떼어낼 수 없으니 그 물질 안에 들어있지만, 중요한 것은, DNA를 구성하는 물질인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배열인 A-T-G-T-C냐 T-A-C-A-G냐 하는 정보가 핵심이에요. 그것이 이놈의 identity야. 이렇게 보면 <공각기동대> ‘2501’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지. 이 영화에 보면, ‘2501’ 이 놈이 자꾸 쿠사나기소령과 합체하려고 그래. 나중에 왜 자꾸 그러냐고 물으니까, “니 몸이 필요하다”는 거야. “나한텐 몸이 없으니까” 결국 ‘2501’은 유령이죠. 그러니까 <공각기동대>란 영화가 첨단의 영화지만 핵심구조는 <전설의 고향>과 똑같다. <전설의 고향>의 주제가 뭐예요? 귀신은 마음만 있고 몸은 없는 거야. 그러니까 자꾸 몸을 얻으려는 거지. 그러니까 <공각기동대>가 아주 현대적인 영화 같지만, 핵심을 딱 보면, 귀신영화에요. 귀신영화. 귀신은 마음만 있고 몸은 없는 거지. 그래서 쿠사나기에게 접근해서 몸을 가지려는 거야. 상태의 것이니까. 현대적인 영화 같지만 내러티브를 보면 귀신영화이다. 그래서 몸을 가지고 접근을 한다. 그래서 실체주의가 특정한 물질로 모든 것을 환원시킨다면, 기능주의는 몸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자연과학을 배경으로 하는 심신이론들은 대체적으로 문제가 너무나 환원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어떤 모델을 만들어 설명하는 이런 식의 이론이라는 것들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과는 거리가 너무 먼 거죠.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와 같은 자연과학적 설명방식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현상학적 접근이죠. 인간의 활동이나 정신의 성격을 자연과학적인 여러 가지 지식들을 동원하여 설명하는 방식과 구분되는 것이 인간의 주체성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입장이에요. 사실 학문적으로 그런 입장을 취하기 전에 이미 그런 입장에서 인간의 마음을 담론화한 것이 문학이죠. 문학은 인간의 체험을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체험을 설명(explain)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담고 있는 일상 언어로 서술(describe)하는 것이죠. 그것을 어떤 다른 것을 끌고 들어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그대로 기술, 서술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인간의 마음을 그냥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학문적 방식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문학에 의해 실천되어 온 것예요. 그것이 철학적인 방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현상학이죠. 그래서 현상학은 문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죠. 사르트르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죠. 거기에 비해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현상학과 심리학 둘 모두와 구분되는 것이 정신분석학이죠. 심리학과도 조금 다르고, 현상학과도 조금 다르죠. 정신분석학은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거니까 현상학에 비해서는 과학적이지만, 그 설명방식이 과학과는 상당히 다르죠. 아주 독자적인 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 정신분석학이에요. |
◆ 현상학
오늘은 현상학을 살펴보고, 다음 시간엔 정신분석학을 살펴보겠어요. 현상학이 볼 적에 앞에서 살펴본 담론들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봐요. 어떤 담론이든 인간을 대상화, 사물화하고 있다는 거죠. 예컨대 내가 과학자이고 이 A4용지가 있다고 합시다. 내가 이것을 대상화해서 찢어도 보고 하면서 분석한단 말이죠. 그런데 현상학이라는 것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인간을 대상화해서 설명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체험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첫째, 인간의 활동을, 또는 인간과 사물들과의 관계를 주체성, 의식을 가지고 보다는 거지. 일단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호르몬 때문인지 유전자 때문인지로 설명하지 않고, 자기가 사랑에 빠진 느낌들 체험들 상황들 그것을 그대로 보는 거죠. 일상 언어로. 사실은 내가 볼 적에 이것은 소박한 측면이 있어요. 일상 언어 자체가 순수한 것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어떤 것을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미 이론에 물든 것이고, 일상 언어로 서술하는 것은 이론에 물든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 사실은 단순한 생각이거든. 우리 일상 언어가 이미 함축하고 전제하는 존재론이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래서 이런 현상학적 입장에 대해서 나는 비판적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나중 문제고 일단 현상학이라는 것은 살펴보죠. 현상학은 수식이라든가 기호라든가 그래프라든가 현미경이라든가 망원경 같은 것들을 일체 배제하고, 신의 섭리라든가 하는 형이상학적 전제도 일체 배제하고, 모든 것을 배제하고 그냥 내가 체험하는 그대로 바라보는 거죠. 장미가 뭐냐? 수술이 몇 개냐? 암술이 몇 개냐? 입이 언제 떨어지냐? 가 아니라 내가 장미를 볼 때의 체험 자체에 주목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그냥 일상 언어로 표현하는 거죠. 그래서 두 개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첫째 주체가 경험하는 그대로 한다는 것. 둘째는 그것을 어떤 기계나 수식 등등을 동원하지 않고 서술, describe한다는 것. 그런데 무엇을 describe한다는 거냐? 무엇을 이야기 한다는 거냐? ‘의미’죠. 의미를 서술하는 거죠. 화학식도 아니고 특정한 양도 아니고, 함수관계도 아닌 의미를 말하는 거죠. 장미꽃을 바라볼 때의 의미, 사랑할 때의 의미, 싸움할 때의 의미, 예컨대 봄이다 그러면 봄을 기상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라는 체험에 대해 주목하는 거지. 봄의 의미에 주목하는 거지. 그러니까 자연과학적으로 보는 사물이라는 것과 현상학적으로 보는 사물은 엄청나게 다른 거죠. 프랑스의 시인 중에 뽕듀라는 사랑이 있어요. 뽕듀의 시를 보면 아 이것이 현상학적인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뽕듀의 시하고 훗설의 현상학 하고딱 통하죠. 한 개인에게서 자기형성, 인칭의 형성을 탐구하는 방식 중 하나는 한 개인이 자라나면서 자기의식 가지기까지를 관찰하는 거죠. 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인문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한 인간이 태어나 자기라는 의식, 자기의식을 가질 때까지의 과정을 관찰하는 거예요. 예컨대 장 피아제의 발달심리학이라든가 라깡의 정신분석학, 현상학도 이런 방식을 자주 취하진 않지만, 이런 접근 방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죠. 예컨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죠. 워즈워드의 시구에. 이 말을 앞에서 이야기한 방식으로 말하면 ‘아이가 어른의 원인’이라는 뜻이에요. 뒤의 이야기방식으로는 ‘어린이가 어른의 원래 모습’이라는 거지.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상학이라는 담론이 의식의 특징으로, 가장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의도(intention) 또는 지향성(intentionality)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 주체성, 의식은, 주로 이 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의식’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런 것들은 항상 무언가를 향해서 열린다는 거죠. 예컨대 내가 지금 이것을 생각할 수도 있고, 어제 일을 생각할 수도 있고, 미래를 생각할 수도 있죠. 여하튼 의식은 항상 자기 바깥으로 열려있다는 거죠. 이게 지향성(intentionality)이에요. 이것이 뭘 말하는 것이냐? 의식이라는 것이 그냥 X라는 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칠판은 칠판이고, 지우개은 지우개, 백묵은 백묵인데, 의식은 이것들처럼 닫힌 무엇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바깥으로 열려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내 의식은 계속 달라지죠. 이것이 뭐냐 하면 지향성이에요.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 어떤 실체, 어떤 본질, 어떤 사물X가 아니라 항상 자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끝없이 열려가면서 변화하는데 의식이라는 거지. 그것을 뭐라 그러죠? 주체성(subjectivity)인 거죠. 그리고 때로는 이 열림이 자기 자신한테도 가죠. 이게 자기의식이지. 그래서 사르트르는 의식을 대자(對自; pour-soi)라고 했죠. 자기 스스로를 대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처음에 말한 것으로, 현상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주체성으로 보는 것은, 의식을 대상처럼 딱 떼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열려가면서 체험하는 그 주체성 자체를 봐야한다는 거지. 플라스크에 든 실험물처럼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저렇게 자기 아닌 것으로 열려가고 관계 맺으면서 체험하고, 그 체험 속에서 의미를 읽어내죠. 그것을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 현상학이에요. 그러니까 소설 중에서 염상섭의 『만세전』이라는 게 있죠. 참 현상학적인 소설인데,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주인공이 아내의 사망소식을 듣고 오는데, 몇 번 보지도 않았으니까 별 애정은 없겠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 거쳐서 서울로 오는데, 오는 과정에서 의식에 들어오는 것들, 또는 거꾸로 말하면 자기의식이 지향하는 것들을 좍 서술하고 있어요. 픽처레스크 소설이라고 하죠. 또 예를 들어 그리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소설도 있죠. 주인공은 실업자야. 할 일이 없으니까 산보가 유일한 취미야. 그래서 경성을 계속 배회하는 거지. 배회하면서 의식에 들어오는 것들, 거꾸로 말하면 지향성이 가는 것을 죽 서술해놓은 거죠. 이런 소설들이 지향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되겠죠. 그래서 이 개념이 욕망이라든가 표현, 행위, 상호주관성, 인칭 같은 개념들과 복잡하게 연결돼요. 연결되면서 인간이란 것을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의 소외, 고독, 불안, 초조, 기분, 타인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파악하는 거죠. 재미있는 것은 이 현상학이나 실존주의가 상당히 어두운 시대에 나온 담론이기 때문에, 주로 즐거운 체험보다는 즐겁지 않은 체험들을 주로 이야기 하죠.
인간 주체는 대상에 의해 일깨워지기도 하고, 의도를 가지고 대상에 접근하기도 한다. 현상학은 의도의 지향성, 의식의 지향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죠. 그러나 주체를 일깨우는, 주체에게 부딪혀오는 새로운 경험의 실마리도 물론 중요합니다. 전자가 일상적 경험에서 중요하다면, 후자는 창조적 경험에 의해 중요하다. 그러니까 주체가 자기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을 죽 서술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체를 탁 깨우고 들어오는 것도 있어요. 칸트 같은 경우는 의식이, 주체가 대상을 구성하는 거예요. 마음의 형식, 범주를 가지고 대상을 구성한다고 봤어요. 엄밀히 말하면, 칸트는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을 해야 경험이 되는 거야. 구성작용이 안 들어가면 내 경험은 그야말로 아무 의미도 없는, 칸트에 따르면 잡다(雜多)에 불과한 거죠. 그러니까 칸트는 굉장히 주체중심적인 인물이에요. 내 틀을 가지고 경험을 해야 그것이 의미가 되고 인식이 되는 거죠. 후설은 대상과 주체가 운명적으로 맞물려있다고 보았다. 대상에 작동하는 noesis라는 주체의 작용과 대상이 가진 noema라는 본질이 스파크를 일으켜야, 같이 작동해야 의미가 생긴다고 본 거죠. 그러니까 칸트가 후설보다 더 주체 중심적이죠. 후설은 주체와 대상 두 개를 설정하죠. 물론 주인공은 주체죠. 들뢰즈의 강조점은 칸트와 반대이다. 내가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나를 탁하고 파고들어오는 것을 강조하죠. 들뢰즈의 말로, rencontre, 마주침을 강조하죠. 내 틀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바깥에서 들어온 놈이 내 틀을 뒤흔들어 놓는 거지. 들뢰즈는 이런 체험을 상당히 강조를 해요. 의식의 지향성은 마치 밤에 비추는 탐조등처럼 자신의 의도, 대상의 잠재적 규정, 흐릿하나마 미래에 대한 이해, 자신과 대상의 상호관련성, 타인들과의 상호주체성과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일정한 장을 만들면서 활동한다. 행동주의는 관찰자과 대상을 상정하며, 따라서 대상은 늘 관찰자의 외부의 미지의 X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관찰자도 역시 타자의 X로 전락한다. 그 관찰하는 사람이 또 관찰의 대상이 될 때, 그 사람은 다시 관찰의 대상으로 전락하죠. 이런 식의 사고는 유아론을 벗어나지 못하죠.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죠. 자신을 영원히 대상으로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의식의 지향성을 절대시할 때, 의식자체를 규정하고 있는 타자를 도외시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상학의 문제점은 자기의식 속에 들어온 것, 의식이 파악하는 것에 절대성을 두기 때문에 너무나 주체중심주의다. 어떤 기계로 우리가 작아졌다. 그러면 그때 나타나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우리가 의식에 들어온다는 얘기도 이 신체조건과 상관적인 거죠. 만약 우리 눈의 구조가 다르면, 가시광선의 범위도 달라지겠죠. 의식의 현상 속에 나타난 세계를 제1원리로 삼는다는 것은 내가 볼 적에 너무 인간중심적인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의식이 만들어가는 장이라는 것도 사실은 의식 바깥의 내적, 외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죠. 객체성과 주체성이 순환하게 되는 거죠. 물론 그 인간의 조건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고, 예컨대 우리가 두 눈을 가지고 있고, 코를 가지고 있고, 이런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1억년 뒤에는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죠. 그런 면에서 현상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식의 삶의 어떤 차원, dimension을 서술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주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실체화할 때는 문제가 있죠. 내가 볼 때. 어쨌든 이번 시간에 인간이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들에 대해서 죽 이야기 하고, 객관성과 주관성, 즉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 객관성하고 인간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이야기 했는데, 항상 이 두 가지가 순환을 하게 되죠. 사유하다보면. 그런데 그 순환이라는 게 무조건 공허한 순환은 아니죠. 왜냐면 그 삶의 조건이 바뀌니까. 그 객관적 조건이 실체로 주어진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자연과학만 가지고 인간을 설명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인간의 자연과학적 조건은 별로 안 변하거든. 아 물론 변하기는 하죠. 기상학도 변하고 지구도 변하고 하지만 인간의 유전자 같은 것은 쉽게 안 변하는 거거든. 그런데 사회와 문화는 많이 변하죠. 조선시대 같으면 이렇게 남녀가 같이 앉아서 공부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 그러니까 자연과학만 가지고 설명하는 것의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의 사회와 문화는 계속 변하거든. 산업시대가 되면 또 사회가 변하는 것이고, 건축물이 생기면 인간의 지각구조가 바뀌는 것이고. 영화가 생기면 또 우리가 사유하는 것도 달라지고. 사유라는 것도 달라지는 거예요. 사유는 실체가 아니야. 사유도 환경이 달라지면 달라지는 거야 이것도. 이렇게 달라지는데 인간의 자연적 조건은 쉽게 안 바뀌죠. 우리 몸이 금방 바뀌겠어요? 이런 구조가? 그런데 쉽게 안 바뀌는 것만 모델로 해서 설명하니까 문제가 생기죠. 사실 거기에 더해서 바뀌는 것도 같이 가야하는데. 그러니까 그 객체성으로 환원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객체성 자체가 변한다는 거죠. 객관성이라 해도 객관성 자체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변하는 객체성과 그 속에서 자기도 변하는 인간주체성이 항상 맞물려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구조적인 이해를 돕기는 하지만 그 문제를 이런 식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딱 실체화해서 설명하는 모든 이론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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