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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근대과학과 카오스이론

하나님아들 2020. 3. 31. 23:59

제4강 근대과학과 카오스이론

◆ 카오스이론의 개념들


▲ 근대과학의 성격 - 기계론, 결정론

함수란 무엇일까? 우리가 번역할 적에 가장 자주 오역하는 말 베스트10을 꼽으면 들어갈 것 같은데, 보통 function을 ‘기능’이라고 번역하는데, 여기서는 함수에요. 수학적 함수. 그런데 함수는 5가 3보다 크다는 식의 서있는 양과의 관계가 아니라, 변화하는 양(변량)들 사이의 관계에요.

변량들 사이의 함수라고 하죠. 수요도 변량, 공급도 변량이죠. 변화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변수로 나타낸 것이 함수죠. Y=aX⁴에서 a는 상수죠. X와 Y는 계속 변하는 어떤 수, 변수죠. 이 변하는 수가 Y=aX⁴라는 관계를 맺는다는 거죠.

과학책을 보면 온통 함수로 되어 있죠. 과학은 함수를 찾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에요. 함수는 핵심적이죠. 이것은 같은 법칙성이지만 고대의 플라톤적인 이데아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규칙성을 갖고 있죠. 함수는 운동을 포착하는 훨씬 더 역동적인 규칙성을 갖고 있죠.

다음은 기계론, Mechanism인데, 메커니즘이라는 말은 오늘날 일상어가 되어있죠. 어떤 존재의 움직이는 원리를 기계를 모델로 해서 보는 것이죠. 예컨대 인간 신체도 자동차와 같은 것과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 몸도 엄청 복잡해서 그렇지 기계와 같다고 보죠.

사물들의 운동방식을 기계로 보는 것이 기계론이죠. 그러니까 불필요한 관념들을 버리고 기계를 생각할 때 쓰는 개념만 사용해서 설명하는 것이 기계론이죠. 시간, 공간, 힘, 질량, 진리, 속도 이런 개념만 사용하죠. 기계론은 데카르트가 명확하게 제시했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까 이야기한 결정론인데, 결정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근대과학의 존립근거죠. 그러나 열역학, 진화론,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을 비롯해서 19세기 후반에 나온 많은 과학이론들은 기존의 이런 근대과학의 여러 전제들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방식의 세계관을 제시했던 거죠.

그 가운데 현재도 논의가 되고 있고 중요한 것이 카오스 이론, 혼돈이론입니다.


▲ 카오스 - 로렌츠의 방정식

카오스 현상은 1960년대 영국 기상학자 로렌츠(Lorents)에 의해 발견되었죠. 아까 과학이라는 것은 규칙성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모든 과학 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과학이 기상학이죠. 전혀 예측이 안 되거든. 법칙성이 안 통하잖아. 갑자기 비가 내리고.

그래서 카오스이론이 가장 예측하기 힘들다는 기상학에서 나온 이유이기도 하죠. 이 사람이 대기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나 하고 방정식을 많이 만들었어요. 근데 이 방정식 자체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여기서 Xt는 대류의 세기(흐름의 강도), Yt는 오르내리는 두 개 흐름의 온도차에 대한 함수, Ze는 온도분포의 차가 모형으로부터 떨어진 정도, a는 유체의 확산계수와 열전도 계수의 비, b,c는 용기의 모양, 유체의 성질 등에 따른 계수들이죠.

로렌츠가 이 방정식을 만들어 놓았는데, 잘 안 풀려요. 연립방정식이란 게 풀릴 때도 있고, 안 풀릴 때도 있는데, 방정식이 자꾸 안 풀려요. 안 풀리면 어떻게 해요? 여러분이 고등학교 때 미적분을 공부했을 텐데, 시험 볼 때 안 풀리면 어떻게 해요?

그래프를 풀어서 최대치, 최소치의 해를 구해야할 텐데 안 풀리면? 무식하게 X, Y에 다 대입하는 방식을 썼죠. 옛날엔 그게 방정식을 풀다가 정 안되면 하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그 무대포 방식을 많이 써요.

왜? 컴퓨터가 해주거든. 이렇게 해라 하고 지시하면 좍 해주거든. 방정식이 안 풀리면 컴퓨터가 해줘요 지금은.


▲ 초기조건의 민감성

그런데 로렌츠가 컴퓨터에 대입한 다음에 밥 먹으러 나갔어요. 그런데 초기조건(initial condition)이란 것이 있어요. 내가 백묵을 확 던질 때, 이 궤적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죠. 갈릴레오가 많이 얘기한 거지. 맨 처음에 던지는 각도가 얼마고, 힘이 얼마냐 하는 것이 초기조건이에요.

초기조건을 어떻게 잡는가는 방정식을 대입하는 맥락에 따라 다른데, 이 사람은 그 초기조건을 0.506127이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빨리하려고 0.000127 뒤에 것을 빼버렸어요. 그리고 밥 먹고 왔더니 컴퓨터가 그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는 거죠.

요즘은 컴퓨터가 발달해서 모든 것을 컴퓨터가 해요. 옛날과 개념이 달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색감이 없어. 색깔도 옛날에는 다 눈으로 확인했는데, 지금은 컴퓨터가 다 해주죠. 빨간색만 해도 빨간색1, 빨간색2 해서 수 십 가지가 되죠.

요즘엔 진맥도 컴퓨터로 해요. 옛날에 손목을 잡고 자신의 기와 상대방의 기를 몸으로 느꼈는데, 이제는 손목을 묶은 다음에 컴퓨터에 연결시키면 맥박이 바로 나오거든. 그러니까 인간의 센스라는 것이 점점 무뎌지죠. 점점 소거되어 버려요. 센스라는 것이 기를 통해 몸 전체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기계장치의 일부로 통합되어버린 거지.

요즘은 건축도 건축가가 직접 선을 그어서 만들지 않죠. 컴퓨터들이 다 합니다. 그림이 잘 나와요. 지금은 건축공부를 안한 사람들도 할 수 있어. 건축설계에 대한 자기 아이디어만 있으면. 참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거의 모든 것이 컴퓨터로 환원되어가죠.

로렌츠의 경우도 마찬가진데, 컴퓨터를 조작해서 프로그램을 만들어두면 컴퓨터가 다 알아서 해줘요. 그런데 로렌츠가 나갔다 왔더니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그래프가 있더라는 거죠. 나비와 비슷하게 생겼죠.

이게 뭐지 해서 로렌츠가 이것을 논문으로 발표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어요. 한 10년 정도 걸려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서서히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죠. 이 현상을 유심히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등장하는데, 첫째 초기조건의 민감성이죠. 무슨 얘기입니까?

처음에 약간의 차이를 이 정도 쯤이야 하고 잘랐는데, 거기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발생했다는 거죠. 옛날에는 떼어낸 오차만큼 결과도 그만큼 남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거죠. 조금의 오차가 엄청난 결과를 부르더라는 거죠.

* 참고자료



<로렌츠의 기이한 끌개 (Winfract v.18.21에 의해 생성)>


▲ 나비효과, 카타스트로피 이론

이것이 보통 대중문화로 나타난 것이 나비효과죠.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서 영화도 나왔죠. 이 점에서 카오스 이론과 더불어 중요한 이론인 급변론, 카타스트로피 이론과 연결되죠. 카타스로피 이론이라는 것은 주식시장처럼 어떤 변화가 가다가 일정한 점에서 폭락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거죠. 카타스트로피입니다. 이것은 르네 톰이라는 분이 많이 발전시켰죠. 벌써 결정론하고는 판이한 세계상이죠. 어떤 초기조건이 정해지면 법칙 따라 쫙 가는데 약간 미세한 차이만 있어도 결과가 확 달라진다는 거죠.


▲ 자유도의 증폭

그 다음에 자유도(Degree Of Freedom)의 증폭이에요. 통계학 배운 사람들은 ‘Degree Of Freedom’을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쉽게 말하면, 개미가 철사 줄 위에 있다고 합시다. 여기서 개미가 운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철사 줄 움직이는 것뿐이죠. 정확히 일치합니다.

‘Degree Of Freedom’가 1이에요. 그런데 개미를 종이에 놔두면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죠. ‘Degree Of Freedom’이 2에요. dimension이 2차원이에요. 그 다음에 파리가 방에 날아다니면 ‘Degree Of Freedom’가 3이에요. 그런데 이 차원(dimension)을 일반화하면 앞의 예는 공간의 차원만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개미가 3차원 공간에 있는데, 색이라는 요소가 들어가면 또 하나의 선택의 여지가 생기죠. 4차원입니다. 여기에 공기의 맛이 존재한다면 5차원이 되죠. 그런데 자유도가 더 많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말하면 무슨 뜻일까요? 변수가 그만큼 더 많이 필요한 거지. 그런데 카오스 이론은 처음 시작할 때 사태와 사태가 진행된 변수가 증폭이 되요.

옛날에는 이 사태를 서술하려면 변수는 일정한 것이었거든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수 내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변수자체가 증폭이 돼 버려. 이것은 근대과학이 볼 때는 정말 희한한 현상이지. 변수가 허용하는 내에서 변화가 아니라 자유도 자체, 변수 그 자체가 증폭이 되요. 놀라운 거죠.


▲ 비선형

세 번째는 비선형성(nonlinearity). 여기서 선형적이라는 것은 직선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의미야. 수학적이라는 말이 뭐냐면, 1개 시스템을 서술하는 수학의 변수의 차수가 1차원을 가리킨다는 거죠. 또는 차수가 같다는 거지.

예를 들어 이런 거죠. X+3Y+2Z, X²+Y²+7Z²이런 거. 변수가 제곱이 되는 것들도 있고 그 외에도 변수와 차수가 다 다르게 증폭되기 때문이죠. 20세기 초에 어떤 화학공장 주인이 생산력을 높이려고 화학탱크를 정확히 두 배로 늘렸어요. ‘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단순한 생각인데, 똑같은 모양으로 두 배로 키우면 당연히 생산량도 2배가 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기계는 고장 나고 생산도 안 되고 엉망진창이 되었어.

왜 그랬을까요? 각 기계를 구성하는 차수가 다르거든. 어떤 놈은 X³고 어떤 놈은 Y²이고, 어떤 놈은 그냥 Z거든. 그래서 같은 크기로 만들지만, 어떤 놈은 이 만큼 커지고, 다른 놈은 훨씬 더 커지는 거지.

우리 몸을 생각해봅시다. 우리 몸은 아기였죠. 거기서 점점 커지는데, 아기의 모든 부분이 똑같은 차수로 큰다면, 우리 몸이 지금과는 다른 형태가 되겠지. 만약 키가 크는 만큼 몸이 커진다면, 인간이란 존재의 신체가 달라지겠지.

그러면 이 세상에 스포츠라는 게 없어지겠죠.. 그런데 사실 키가 X³이라면 옆으로 불어나는 것은 X¹정도밖에 안 되죠. 이게 뭐냐면 비선형이에요. 변수의 차수가 똑같은 것이 선형적인 거고, 근데 차수 X³, Y²으로 다 다르니까 같은 정도로 커도 결과적으로는 다 다른 거죠. 그것이 비선형적인 거예요.


▲ 로렌츠의 끌개

로렌츠에 의해서 어떤 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비선형적으로 변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비선형 미분방정식이 기본적인 방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죠. 이런 개념들이 전통적인 개념들과는 다른 독특한 개념들을 등장시키면서 우주와 물질에 대한 개념도 상당 부분 달라지게 됩니다.

또한 카오스 현상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상한 끌개(Starange Attractor)에요. 끌개가 뭐냐? 이렇게 진자가 운동하고 있는데, 고전역할시스템으로 본다면 여기서 계(System) 전체의 동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은 이 진자가 끝없이 왔다 갔다 한다는 거죠. 이 역학, 즉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자기운동을 하는 이런 것이 어찌 보면, 근대문명의 상징이었어요.

 

◆ 카오스모스 - 근대과학의 극복


▲ 근대문명의 상징 - 진자운동

<블레이드 러너>를 만든 리들리 스콧(Ridley Scott)라는 감독이 있죠. 그 감독이 콜럼버스를 다룬 <1492년 콜럼버스>라는 영화도 만들었는데요. 영화자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이사벨여왕에게 개선행진 장면을 보면 길 위로 어마어마하게 큰 화로가 왔다 갔다 진동운동을 하고 있어요.

이 거대한 화로가 공중에서 끝없이 천천히 움직인다는 사실이 17세기 서구인들이 새로운 물질문명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심볼이에요. 그것을 정확하게 이 영화가 표현하고 있죠.


▲ 열역학의 등장 : 근대과학의 극복

근대과학이 생각하는 동일성이란 세계는 열역학이 등장하면서 무너지게 되죠. 근대과학을 상징해주는 이미지가 시계, 즉 영원히 왔다 갔다 하는 진자였죠. 그러나 그런 세계상은 열역학적 관점에서는 핵심이 빠져있어요.

근대 과학자들의 세계상은 신학적인 세계상이죠. 우리는 그 근본에 깔려있는 것을 잘 봐야하는데, 근대과학의 근본에 깔려있는 것은 여전히 중세적이에요. 신학적인 거지. 그런데 19세기 열역학이 등장하면서 그런 식의 근대적 신학적 사고에서 빠진 것을 지적하게 되죠.

그것은 우주의 모든 운동은 에너지를 소비해야한다는 거죠. 에너지 하락. 근대과학에는 이 개념이 없죠. 그러니까 영원히 돌아가는 시계, 신에 의해 지탱되는 세계, 써도 써도 닳지 않는 그 힘 이라는 개념들이 이제 사라지죠. 그럴 경우 어떤 진실이 나타나는가?

이 세상 어떤 운동도 에너지 하락을 동반한다는 거죠. 그래프로 그린다면 진자의 최대각도를 θ(theta; 세타)라 하면, 그 최대치에서 속도는 0이 된다. 거기서 θ가 줄기 시작하면 속도는 늘어나죠. 진자가 가운데 와서 속도가 최고치가 되면 θ는 0가 되죠.

그리고 진자가 가운데를 지나 속도가 점점 줄어들면서 θ가 마이너스(-) 최대가 되죠. 그 궤적을 따라 선을 그리면 완전한 원환을 이룹니다. 이런 모델은 근대적 모델이죠. ideal한 모델을 뒷받침할 신학적, 형이상학적 배경이 사라지면 이것은 20세기에서 보면 말 그대로 ideal한 모델에 불과한 것이 되었죠.

실제는 어떻습니까?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운동은 에너지가 하락하죠. 그래프에서 보면 진자는 진동운동을 하면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에너지가 하락하기 때문에 θ의 최대치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죠. 그리고 나중에는 멈추겠죠. 진자는 어디서 출발해도 원점으로 와서 섭니다.

궤적은 완전한 원환이 아니라 점점 줄어드는 나선형운동을 합니다. 마치 마지막의 이 원점이 끌어당기는 것 같죠. 그래서 끌개에요. 진자가 몇 Kg이든 θ가 얼마든, 미는 힘이 얼마든 마지막에는 멈추는 점으로 온다. 이 점이 끌개죠.


▲ 새로운 끌개의 등장 - ‘이상한 끌개’

그런데 고전적인 과학에서는 저런 끌개가 세 개있었어요. 점 끌개, 원 끌개, 도넛모양의 끌개에요. 원 끌개는 우리가 어릴 때 사발에 구슬을 넣고 돌리면 구슬이 위로 올라가서 돌다가 다시 내려가죠. 그릇을 계속 돌리면 사발 제일 위의 원이 끌개가 되죠. 도넛모양의 끌개는 복잡하죠.

그 때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끌개는 세 가지였는데 로렌츠가 컴퓨터 화면을 보니 난생 처음 보는 끌개가 있더라는 거죠. 그것을 ‘이상한 끌개’라고 한 거죠. 초기 조건이 조금 달라지니까 이런 이상한 끌개가 생기더라는 거죠. 그래프를 보세요. 그래프가 어떻게 돌든 무한대 모양으로 계속 가죠.


▲ 프랙털 구조

또 하나는 이 구조가 프랙털 구조를 하고 있더라는 거죠. 전체가 ‘소’인데, 그 안에도 ‘소’로 이루어져 있고, 사실은 그 ‘소’도 더 작은 ‘소’로 이루어져 있는 것, 부분 속에 전체가 있는 것이 프랙털이죠. 눈송이에 각각의 부분이 또 눈송이 모양으로 되어 있다. 로렌츠의 이 그림도 프랙털 구조이다.

이런 식으로 카오스 이론이 등장하는 몇 가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초기조건의 민감성, 자유도의 증폭, 비선형성, 이상한 끌개. 이런 것을 통해서 기존 과학에서 못 보던 어떤 새로운 사고, 현상, 원리가 등장하면서, 자기조직화를 비롯한 많은 것들을 설명하면서 카오스이론이 발전해갑니다.


▲ 카오스, 더 복잡한 질서

지금까지 이야기는 카오스 이론이 맨 처음 개발한 몇 가지 기본개념만 설명한 거죠.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철학적으로 짚어볼 문제는 뭐냐? 여기에서 카오스는 질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복잡한 질서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확인한 간단한 질서는 사실 복잡한 질서의 어떤 한 측면, 어떤 한 갈래, 그것의 어떤 단순화된(simplified) 얼굴에 불과한 것이죠.

다시 한 번 말하면 카오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옛날에는 ‘저건 카오스야 무의미해. 질서가 없어’라고 했던 것이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훨씬 복잡한 질서를 몰라서 그렇지, 사실 무질서는 아니더라, 우리가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이 없어서 그럴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던 기존의 질서는 이 복잡한 질서의 간단한 형태이다. 이제 우리의 세계관은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대립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러니까 무질서가 아니라, 엄청나게 복잡한 질서로서의 카오스 위에서 단순한 질서가 등장하는 그런 카오스모스의 세계더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거죠.

이 문제를 좀 더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형상, 법칙, 구조를 추구했죠. 그것이 그리스철학자들의 형상이든, 근대과학자들의 법칙이든, 오늘날 레비스트로스 같은 구조주의자들의 구조이든, 이들이 추구하는 형상, 법칙, 구조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넘어서 있는, 시간을 초월해 있는 것들이죠.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열역학과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시간을 초월한 질서라는 개념에 의구심이 생겼죠. 시간과 질서가 무조건 양자택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훨씬 더 복잡한 질서를 함축한다는 거죠.

이것을 인식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제는 어떤 형이상학적 질서, 전제, 세계관을 따라 암암리에 그 틀에 맞추어 과학이 발달하는 게 아니고, 이제 과학은 각자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 각자 자기의 법칙을 가지고 따로 따로 전개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이 등장한 거죠. 또 철학적으로는 유한성, 유한성의 이미지, 즉 인간이 어떤 무한이나 신과 직접 소통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의 심층은 어떤 사변적인 존재들이 아닌 무한히 복잡한 카오스라는 거죠.

질서가 없는 게 아니라 무한히 복잡한 질서가 카오스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가까이 갈 수 는 있어도 닿을 수는 없죠. 그런 면에서 유한성이 맞죠. 19세기부터 등장한 이런 사고들, 시간이 별다른 역할을 못한다는 사상이 아니라,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19세기 다양한 사조들을 흡수해서 종합한 사람이 베르그송입니다. 지난 학기 강의한 베르그송의 지속의 철학은 바로 이런 맥락, 바로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죠.

또 역으로 카오스이론의 대표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은 베르그송의 연장선상에서 카오스이론을 설명해요. 프리고진이 젊은 시절에 베르그송을 읽었다고 그러죠. 베르그송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자기가 교과서에서 과학시간에 배웠던 그 시간하고 베르그송이 말하는 시간이 너무나 다르다는 거야.

그래서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나 해서 카오스를 연구했다. 이렇게 베르그송의 철학이라거나 카오스이론은 19세기 이후에 등장했던 시간이라는 것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렇게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존재론, 형이상학과 카오스이론이 맞닿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지난 시간에 말한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를 이어서 들뢰즈를 이야기 했잖아. 들뢰즈를 이야기하면서 차이, 사건, 생성을 이야기했죠? 바로 그런 들뢰즈의 존재론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런 자연철학과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 카오스모스의 미학

카오스모스 개념을 미학적으로도 음미할 수 있는데, 전통적인 미학, 특히 그리스에서 연원한 미학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틀에서 보면, 코스모스 미학이에요. 질서, 균형, 조화, 비례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죠. 음악으로 말하면 고전주의죠. 일정한 형식에 formal 한 음악을 하죠.

베토벤 같은 사람의 음악을 들으면, 표층적으로는 웅장하고 파토스가 몰아치는데, 그 심층을 보면 아주 규칙적이에요. 표면을 들으면 불타는 열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음악적 형식은 너무나 도식적이지. 그래서 베토벤은 계속 들으면 지겨워요.

그런데 현대음악이라는 것은 음악 자체가 열정적이고 비합리적인 게 아니고, 음악은 조용할 수 있다고 생각 하죠. 라벨이나 드뷔시 음악이 베토벤보다 더 하지는 않죠. 그런데 표면적으로 그 음악이 몰아치거나 아주 로맨틱한 것과 그 로맨틱한 것을 표현하는 형식과는 다른 문제이다. 아주 도식적인 형식으로 파토스 넘치는 음악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혁명적인 형식으로 굉장히 따분한 음악을 할 수도 있어요.

이건 다른 문제죠. 쇤베르크 음악은 얼마나 졸려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카오스의 미학은 표면적 카오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접했을 때 느끼는 sensible 카오스가 아니죠.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 그 자체가 카오스입니다. 현대미학이라는 것은 바로 코스모스 미학에 카오스를 집어넣는 것이죠.

노래 같은 것도 현대인들은 엘비스 프레슬리 목소리 안 좋아하죠. 매끈한 목소리 안 좋아 하거든. 목소리가 좀 찢어져야 좋아하거든. 옛날에는 코스모스하면, 아주 예쁘고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것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되게 따분해하죠. 지금은 좀 갈라지고 찢어지고 복잡하고 앞뒤가 안 맞는 것을 좋아하죠. 예컨대 옛날 문학에선 앞뒤가 안 맞으면 잘못된 것이라고 했죠.

지금은 일부러 앞뒤가 안 맞게 하는데. 원래 organic이 아직 안 된 것이 inorganic인데, 들뢰즈는 inorganic이 아니고, 일부러 organic한 것을 흐트러트리는 것을 no-organic라 그래요. 유기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탈유기적인 거죠.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 별로 좋은 번역이 아닌데, 이런 것이 바로 탈유기적인 거죠. 그러니까 음악 같은 것도 근대음악을 듣다가 드비쉬의 ‘바다(La Mer)’를 들으면, 이놈의 음악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종잡을 수가 없죠.

이렇게 카오스라는 개념은 정리하자면 과거에는 코스모스의 대립이고, 극복해야할 것으로 봤다면, 지금은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대립이 아니라 코스모스 아래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질서로써의 카오스를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카오스모스로 생각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