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자연철학과 근대과학 |
◆ 자연철학의 부활과 카오스 이론 오늘 이야기할 내용은 자연철학이에요. 원래 철학의 출발점이 자연철학이죠. 특히 서구철학의 출발점은 탈레스를 비롯한 자연철학자들에서 출발했죠. physica에서. physica가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natura가 되고, 이 말이 오늘날 nature(自然)이 되었죠. 그런데 17세기가 되면 자연철학이 형이상학에서 독립을 해요. 자연철학은 Physica죠. 지금의 물리학의 어원인데, 이때는 좁은 의미의 물리학이 아니라, 자연과학 전체를 말하죠. 그리고 형이상학은 meta-physica죠. physica는 현상적인 세계를 연구하는 것이고, meta-physica에서 meta는 ‘beyond'죠. 현상세계를 넘어서는 세계를 연구하죠. Physica는 형(形)의 세계를 연구한다면, meta-physica는, 형(形) 이상(而上)의 세계를 연구하죠. 그래서 형이상학(形而上學)이죠. ▲ 17C 자연과학의 독립 그런데 17세기 되면 physica가 meta-physica의 그림자를 벗어나려고 하죠. 더 이상 meta-physica의 그림자에 머물려고 하지 않죠. 다른 말로 하면, 서구철학사에서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신학(theologia)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이 있죠. 그래서 physica는 형이상학 내지는 신학의 그림자 아래 있었어요. 17세기가 되면 자연과학이 더 이상 형이상학이나 신학의 그림자 아래 있으려 하지 않고 독립하죠. 독립해서 물리학, 생물학, 화학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독립하게 되요. 그러면서 자연‘과학(科學)’이 되죠. 과(科)로 나누어 하는 학문이 된 거죠. 그러니까 자연을 총체적, 사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나누어 구체적으로 실험을 통해서 연구하는 담론으로 바뀌게 되죠. 그렇게 된 다음에 자연철학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 폄하적인 의미로 바뀌었죠. 아주 구닥다리 학문, 이미 지나간 취급을 받아요. 자연철학 하면 아주 옛날 그리스철학이나 동양의 음양오행설을 떠올리게 되는 거죠.
그런데 20세기에 오면 다시 자연철학이 부활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분과과학으로 나눠서 많은 지식을 쌓았지만 그와 같은 지식이 파편적으로만 존재할 경우에 인식이라는 면에서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 관점이 상실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고, 또 윤리적으로는 개별적인 과학이 사회와 맺는 관계성이 상실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17세기 분위기와 달리, 사실 19세기까지만 해도 과학이 형이상학을 멀리하고 독립하려고 했지만, 20세기에 들어오면 다시 파편적인 자연과학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자연철학을 시도하게 되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자연에 대한 상당히 중요한 통찰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20세기 후반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신의 이론적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은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이에요.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일종의 카오스로 대표되는 카오스모스(Chaosmos)라는 개념으로 자연철학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카오스(chaos)와 코스모스(cosmos)는 대립개념, 반대개념이죠. 그런데 현대에 와서 큰 변화가 발생하는데,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단순한 대립항으로 보는 게 아니라, 카오스가 좀 더 근본적인 실재이고 코스모스는 그 카오스로부터 등장하는 것이다.
카오스이론의 대표자인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책 이름이 『Order out of Chaos』, 즉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죠. 벌써 표현 자체가 우리의 상식을 반하는 면이 있죠. 왜냐면 Order와 Chaos는 대립개념인데, Chaos에서 질서(Order)가 나왔다. Chaos와 Cosmos는 더 이상 더 이상 단순한 대립개념이 아니라, 서로 일종의 보완관계에 있다. 카오스가 좀 더 근본적인 장으로서 여기서 질서가 탄생하는 그런 개념으로 보게 되는 거죠. 이런 세계관은 우리가 이름 붙인다면 Chaos와 Cosmos를 합해서 카오스모스의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겠죠. 전통적인 세계관은 대체로 카오스를 상당히 불길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카오스를 극복 했을 때 코스모스가 성립하죠. 카오스라는 것은 불길하고 어두운 빛이 없는 것으로, 어둠이 극복되어 등장하는 것이 Cosmos에요. 그리고 카오스가 극복되고 코스모스로 가려면 뭐가 있어야 되는데, Chaos를 넘어서 Cosmos로 나아가게 해주는 그 어떤 빛, 이데아, 신 , 왕 , 이성, 로고스 이런 것들이 존재해야 해요. 카오스라고 하는 것은 무질서고 어둡고 무섭고 불길한 것인데, 거기에 빛이 들어가야지 코스모스가 탄생하는 것이다. 기독교 경전에 보면,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이런 말이 나오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같은 대화편에 보면, 카오스가 물질로 표상되죠. 그런데 이 물질에 이데아가 가해져야지, 이데아라는 빛이 비추어져야지 코스모스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살과 뼈와 피가 있어도 인간의 형상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질료 덩어리에 불과한 거예요.
돌멩이는 카오스에 불과한 거예요. 거기에 조각가가 어떤 형상을 부여할 때, 그때 돌멩이는 하나의 질서를 갖는 코스모스가 되는 거예요. 또 그렇게 하는 조각가가 조물주요. 조물주(造物主)라는 말이 의미심장하죠. 물질 자체는 카오스다. 아무 질서도, 비례도, 로고스도, 형태도 없는 그것을 주물러서 어떤 형태를 갖추게 하는 것이 조물주죠. 플라톤은 물질의 이데아를 비춰주는 것이 조물주라고 했죠. 좀 더 현실적인 맥락으로 보면 왕이죠. 아무 법도 질서도 이성도 제도도 없는 그런 혼돈스런 삶에 법, 제도, 질서를 부과하는 거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떤 이성을 전제로 합니다. 이 칠판도 그 자체로는 혼돈인 나무 조각에 일정한 로고스가 부여된 거죠. 이런 개념입니다. 카오스는 하나의 혼돈이오, 아무런 형상도 부여받지 못한 터인데, 거기에 이데아가, 빛이, 이성이 비춰질 적에 일정한 질서를 갖춘 코스모스가 되죠. 우주(宇宙)가 되죠. 우주에서 우(宇)는 질서 지워진 공간이고, 주(宙)는 질서 지워진 시간이죠. 그래서 우주(宇宙)가 되죠. 유명한 화장품 가게에 가면 뭐라고 씌어있죠? ‘cosmetics’라고 하죠. 여자의 얼굴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거죠. 저런 세계관을 극복한 것이 근대 이후의 유물론적 세계관이에요. 유물론적 세계관이란 것이 뭐냐? 물론 유물론도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렇지만 유물론의 대전제 뭐냐? 카오스가 그 자체로 이 세계 전부라는 것이죠. 물질이라고 하든, 기라고 하든, 생명이라고 하든, 에네르기라고 하든 카오스가 그냥 우주 전체 자체에요. 그리고 질서나 개체는, 그러니까 이렇게 척추가 있고 눈이 두 개고 코가 하나로 질서 지워진 개체를 비롯한 우주 전체의 질서는 카오스가 변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카오스는 무한한 잠제성인 거죠. 이 카오스 바깥에는 이데아도 신도 로고스도 없는 것이죠.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카오스 안에 잠재해 있는 것이에요. 이 카오스에서 강도 생기고, 물도 생기고,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다 생기는 거죠. 그래서 카오스는 유일무이의 실재죠.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다듬어지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죠. 그 가운데 특히 물리화학적으로 파악되는 것 중 하나가 카오스 이론이에요. 조심할 것은 물리학과 화학을 같이 부르는 물리? 화학이 있고, 물리화학이라는 과목이 따로 있어요. 화학 중에 유기화학, 무기화학처럼 물리화학이 있는 거죠. 여기서는 이걸 말해요. Physical Chemistry. 여하튼 물리화학이라는 분과에서 이런 식의 사고가 등장한 게 카오스 이론이죠. 그러니까 우리 동양식으로 말하면 기일원론(氣一元論)이죠. 리(理)가 먼저 있어서 그 리(理)의 주재 하에 기(氣)가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기(氣) 자체가 스스로 조직되는 것이죠.
이런 사고방식을 현대과학에선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autopoiesis)라고 합니다. 예컨대 어떤 질료 덩어리가 그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의 명령을 받아서 이렇게 조직된 것이 아니라, 물질이 조직된 것들 중에 하나가 이렇게 된 거라는 사고죠.
19세기가 되면 ‘열역학’과 ‘진화론’이 등장해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했던 니체라든가,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열역학’과 ‘진화론’을 굉장히 중시했어요. 20세기 초가 되면 양자역학이 나오죠. 그 다음에 20세기 후반이 되면 카오스이론이 나옵니다. 19세기 열역학과 진화론, 20세기 전반의 양자역학 20세기 후반의 카오스 이론들은 굉장히 중요한 흐름입니다. 양자역학도 그렇지만 카오스 이론도 역시 어떤 세계관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등장하는가 하면 바로 근대의 결정론적 세계관(determinism)을 비판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세계가 결정론적 성격이 없다면 과학적 탐구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학적 탐구를 한다는 것은 그 탐구를 통해서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결정성을 발견하려는 것이죠. 천문학자들은 별들을 움직이는 법칙성을 연구하고, 물리학자는 물질의 운동을, 생물학자는 생명의 운동을, 경제학자는 경제현상의 운동을, 사회학자는 사회운동을 탐구합니다. 만약 그 운동에 법칙성이 없다면 연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죠. 뭔가 있다고 믿으니까 연구를 하죠. 그래서 결정론은 과학의 대전제에요. 과학적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결정론을 전제하는 것이죠. 이것이 없으면 과학이란 행위가 아예 성립할 수 없죠.
◆ 근대과학의 성격 결정론이라는 것은 어떤 함축을 주느냐 하면, 시간을 넘어서는 법칙성, 규칙성이 있다는 거지. 만약에 모든 것이, 모든 현상이 시간의 절대적 지배를 받는다면 매순간 세상은 달라질 거예요. 그렇다면 법칙을 연구할 필요가 없겠지. 만약에 천문학자가 지구와 달이 어떻게 도는지를 연구하는데, 달이 궤도를 수시로 바꾼다면 천문학은 연구할 필요가 없겠죠. 천문학이 성립하지 않겠죠. 시간이 가도 그 시간을 극복하는 어떤 규칙성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과학이 중요하다. 그런 것들이 바로 결정론이다. 결정론과 시간, 우연, 자유, 책임이 다 연계되어있어요. 예컨대 내가 말하는 것이 이미 내 뇌세포 속에 결정되어 있다면 나는 지금 테이프 트는 거겠지. 결정론과 연계된 자유문제죠. 또 누가 나쁜 짓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미리 나쁜 짓을 하도록 유전자 속에서 나쁜 짓을 하도록 코드화 되어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넌 나쁜 놈이야 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없잖아요. 결정론과 관련된 책임의 문제죠. 결정론은 이런 문제들과 다 연계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가능과 필연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는데, 철학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아마 이 문제가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될 겁니다. 이 결정론이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형태로 등장하는 것이 서구 근대에요. 근대과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결정론은 어떤 형태로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상당히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방식으로 존재했죠. 그것을 이야기 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섭리죠. 또는 하늘의 뜻(天之意), 또는 운명이죠. 이런 게 뭐냐면 “다 하늘의 뜻이지”, “그것이 너의 운명이야”, “모든 게 다 신의 섭리지” 이런 이야기들이 바로 형이상학적, 종교적 방식의 결정론이죠. 현대에 들어오면 이것은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죠. 이것을 대신해서 등장한 전혀 다른 성격의 결정론이 근대과학의 결정론이죠. 이 근대과학 결정론이 대체적으로 19세기 전반까지 과학사상을 지배하게 되죠.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런 식의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식의 반론들이 등장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 결정론이 가장 무겁게 군림했던 것이 서구근대과학, 특히 물리학적 패러다임이 다른 모든 담론을 지배했을 때였죠. 그때가 결정론이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때죠. 그런데 이제 현대과학은 근대과학의 결정론을 비판하면서 등장하는데, 에밀 메이에르송(Emile Meyerson)같은 사람은 유명한 책인 ,『동일성과 실재』(『identity and reality』)를 썼죠. 이 사람이 이 책에서 어떤 테제를 제시하나 하면, 고전과학에는 적어도 19세기 중엽에 결정론 중에서도 극에 달한 라플라스의 결정론에 이르기까지의 서양고전과학에는 변화 또는 운동, 多(다양성)를 외관으로 폄하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확인되는 운동과 다양성은 하나의 illusion, 환상이다. 그러면 진짜 실재, reality가 뭐냐? 그것은 ‘영원부동의 일자’다. 여러분이 서구철학사 책을 읽을 적에 대문자로 나오는 ‘the one', 그게 바로 일자(一者)죠. 이렇게 엘레아학파와 파르메이데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리스철학을 공부한 분은 알겠지만 엘레아학파, 특히 파르메이데스는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이 세계는 다양성, 즉 무수한 존재들이 있고, 운동, 즉 끝없이 변하는 세상이라고 설명하죠. 그런데 참 놀랍게도 그 다양성과 운동은 하나의 환각이며 판타지라고 말합니다. 진짜 실재는 ’영원부동의 일자’,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단 하나라고 하죠. 그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사람이 제논이죠. 제논은 ‘아킬레스와 거북이’같은 예를 들면서, 만약 이 세계에 운동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봐라. 그러면 바로 ‘아킬레스와 거북이’같은 역설(paradox)이 발생하지 않냐. 이렇게 이야기 하죠. 그게 엘레야 학파인데요.
그런데 메이에르송은 엘레야 학파의 그림자가 우리가 생각한 이상으로 서구사회를 지배해왔다고 말하죠. 고대 그리스에 영향을 끼친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헤겔 같은 사람들까지. 또 사람만 아니라 과학까지도. 근대과학이라는 것도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 그 껍질을 벗겨보면 그 알맹이는 여전히 엘레아학파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죠. 사실 과학이라는 것은 그런 성격을 띠죠. 이 세계의 본질, essence를 발견하려고 애쓰잖아요. 물론 파르메이데스처럼 모두 illusion이고 하나(the one)밖에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엘레아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침에 먹는 식수든, 얼굴 씻는 물이든, 한강 물이든, 구룡폭포의 폭포물이든 물의 화학적 성분은 다 'H2O'다. 무수히 많은 물들이 존재하죠. 현상학적으로는 다 다르죠. 고요한 호수 물과 웅장한 폭포수는 현상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르죠. 그러나 화학적 눈으로 볼 적엔 똑같이 H2O다. 또 예컨대, 언어학 같은 경우,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나 음색, 표정 다 다르죠. 그러나 언어학은 그와 같은 파롤(Parole)의 차원은 비본질적 차원이고, 더 본질적인 차원은 그 모든 파롤을 지배하는 랑그(Langue)죠. 쉽게 예를 들면 문법 같은 거죠. 철수가 말하든 영회가 말하든, 날카로운 소리로 말하든 부드러운 소리로 말하든, 쉰 목소리로 말하든 맑은 목소리로 말하든 말의 문법은 다 동일하다는 거죠.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하는 다양성과 운동 아래에서, 그것들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essence, 법칙성, 본질, 구조,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죠. 예컨대, 화학식 같은 것을 보면, NaOH(수산화나트륨)+HCL(염화수소), 쉬운 말로 양잿물과 염산이죠. 이것을 더하면 NaCL + H2O, 소금물이 나오죠. 현상적으로는 냄새, 맛, 빛깔 다 다르죠. 완전히 변했죠.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Na 1개, CL 1개, H 2개, O 1개’로 똑 같죠. 하나도 변한 것이 없죠. 현상학적으로는 완전히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죠. 과학은 이런 것을 읽어냅니다. 그래서 메이에르송은 ‘학문의 역사가 많이 진행이 되고 다양한 방식의 여러 발견들이 이뤄졌음에도 그 밑에서 작동하는 근본원리는 엘레아적인 것이다’라고 본다. 그런데 열역학이라든가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오랫동안 서구학문을 지배해왔던 엘레아학파의 그림자가 비로소 떼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 메이에르송의 유명한 테제에요. 상당히 근거 있는 이야기 같아요.
우리는 이와 같은 점들을 과학적 활동이 가진 여러 성격으로 짚어낼 수 있는데, 분석, 양화화, 함수화, 기계론, 결정론 등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먼저 환원주의는 현상적인 다양성을 본질적인 하나로 환원시키는 것이죠. 현상학적으로 전혀 다른 숱한 물(水)들이 화학적으로 모두 H20로 환원되는 거죠. 그 다음에 분석(analysis)인데, 과학은 기본적으로 분석을 하죠. 물리학자는 물질을 분석하고, 화학자는 화학물질을, 생물학자는 생명체를, 언어학자는 언어를, 경제학자는 경제현상을 분석하죠. 과학적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것 중의 하나가 분석하는 거죠. 왜 분석하죠? 역설적으로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죠. 물리학자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찾죠. 화학자들은 화학물질의 최소단위를 찾죠. 원소 같은 것. 언어학자는 언어의 최소단위를 찾죠. 음소같은 것. 분석한다는 역설적으로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거지. 시계를 막 분석하는데,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마지막 부품까지 분석을 하죠.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것이 그 과학의 근본실재, 근본 reality죠. 그리고 바로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그 근본실재에 입각해서 그 존재를 이해할 때 과학자들은 설명되었다고 이야기하죠. 분석이라고 하는 것은 과학적 활동을 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 중에 하나이다. 그 다음은 양화와 함수화인데, quantification, function 만들기, 이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왜 양화하는가? 과학자들은 양을 좋아하죠. 보통 사람들은 질을 더 좋아하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상식적으로 예쁜 색깔을 보거나 예쁜 모양을 보는 것을 좋아하죠. 양은 아무 색깔도 맛도 촉감도 빛깔도 아무것도 없는 수(數)죠. 과학은 질이 아니라 양에 관심을 두죠. 왜? 양이야말로 그 사람들의 동일성(identity)을 전달해주는 것이니까. 질은 인간 주관에 의존하죠. 색깔도 흐린 날 보는 것과 밝은 날 보는 것이 다르죠. 촉감도 기분 따라 몸 상태 따라 다르고. 질이라는 것은 주관적이라서 자주 바뀌죠. 이건 차이가 자꾸만 떨리는 것이에요. 자주 왔다 갔다 한다는 거죠.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려면 양화 해야죠. 내 키가 어떤 때는 작게 보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크게 보일 수도 있죠. 그러나 자로 재보면 딱 나오죠. 그래서 양화하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근대과학의 중요한 성취는 양을 재는데 있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양을 재는데 있어요. 고대문명에도 양은 다 있었죠. 숫자를 센다거나 키를 표시하는 것이 그런 거죠. 그런데 근대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양(변량)을 사고하는데 있는 거죠.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변량이죠. 변화하는 양이지. 각도가 계속 바뀌죠. 경제학에서 수요와 공급도 변량이죠. 딱 하나의 수요를 말하는 게 아니죠. 시간 속에서 변하는 수요를 말하는 것이다. 근대과학에서 말하는 양은 변화하는 양, 변량이라는 거죠. 그 변량을 이야기 하려다보니까 수학적으로 상수 외에 뭐가 필요해요? 상수 외에 변수가 필요하죠. 3, 5 하는 상수가 아니라 변화하는 수를 대표하는 수, 그게 변수죠. 경제학에서 수요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계속 변하죠. 변화하는 전체를 대변하는 수가 x라는 변수죠. 변량을 쟀다는 것은 다르게 수학적으로 말하면 변수가 등장했다. variable이 등장했다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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