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근대철학의 비판 |
◆ 근대철학비판의 다양한 담론들
오늘 할 내용은 막스-레닌의 입장을 이어서 완전히 정치적으로 아예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킨 경우들이 많죠.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서구 자체 내에서, 자유주의 정책을 갖는 지역들 내에서 이루어진 자본주의 비판, 또는 좀 넓게 말하면 근대성 비판이죠. 근대성의 핵심이 자본주의니까요. 좁게 말하면 자본주의 비판이고, 좀 넓게 말하면 자본주의, 과학기술 문명 등등 전반적인 근대문명에 대한, 근대성(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죠. 그런 내용을 이번 학기 마지막으로 보려고 합니다. 크게 프랑크푸르트 학파하고, 미셀 푸코 두 개를 봅시다. 근대성은, 서구 16세기 말 이래에 서서히 형성되어 발달한 삶과 사유 양태를 뜻하는데, 오늘날의 사회는 바로 이 근대성이 극에 달한 초근대성의 사회죠. 과학 기술이라든가, 개인주의라든가, 자본주의라든가, 대중 사회라든가 등등의 모더니티 문화가 아주 극에 달한 사회를 볼 수 있고요. 근대성과 현대성을 연속으로 본다면, 근대성 비판은 과거의 근대성만 비판한 게 아니라 지금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는 근대성 비판이죠. 그러면서 그것은 곧 우리 시대 비판하고 똑같은 거죠. 사실 오늘날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서양은 원래부터 대개 비판적인 성격을 띠어요. 그러면서 유독 오늘날에 탈근대성, 근대성 비판이 문제가 된다면, 왜 그러느냐 묻는다면 서구에서 생겨난 근대성(모더니티)이 다른 모든 지역에서의 삶의 모범답안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장 귀가 아프게 듣는 것 중 하나가 근대화에요. 눈 뜨면 근대화야, 근대화해야 한다, 산업화해야 한다,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 이걸 귀가 아프게 들었죠. 그래서 ‘근대화‘는 서구 문명뿐만 아니라 지난 몇 백 년 동안에 세계사 전체를 추동해온 하나의 힘이었다. 그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진행되어 왔죠. 서구에서는 서구 문명 자체에 대한 반성의 형태로, 그다음 비서구 지역에서는 서구에 대한 맹목적 추종에 대한 반성의 형태로 탈근대 사상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탈근대 사상이 사실은 오늘날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생긴 건 물론 아니고 19세기 중반 되면 이미 대체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모습이 잡히죠. 물론 지금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말이에요. 지금에 비하면 빌딩도 낮고 여러 면에서 소박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문명의 기본 모델이 19세기 중반에 형성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19세기 후반 되면 벌써 근대성 비판이 등장하죠. 맑스도 일종의 근대성 비판이죠. 니체도 그렇고요. 아, 그 전에 서구에서 더욱 본격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명이 겪었던 비극들, 아우슈비츠 같은 비극들이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고, 그래서 그 전에도 이미 탈근대적인 사상들이 꾸준히 등장했지만 전반적 사상사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역시 20세기 후반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한국으로 말하면, 군사 정권이 무너지면서지요. 군사 정권의 성격이 일종의 국가자본주의죠. 국가가 나서서 만드는 자본주의지. 그리고 파시즘적이고 근대적인 통치 방식을 통해서 전 국민을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로 집어넣는 게, 군사정권의 모습이었고 그걸 상징하는 게 새마을 운동이죠. 그러다가 1987년 6월 혁명 이래로, 우리 사회도 군정 시대를 종식하고 상당히 속성이긴 하지만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었죠. 그러면서 사상의 흐름도 근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를 비판하는 사상이 등장했죠. 19세기 말에 등장한 대표적인 근대성 비판은 맑스와 니체의 사유인데,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19세기에 이르러 뚜렷이 모습을 나타낸 부르주아 사회, 관료 사회, 기술문명 사회, 대중사회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죠. 그리고 우리가 지지난 시간에 배웠던 구조주의도 역시 탈근대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 사유가, 근대성을 떠받쳐온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개념이 주체, 더 정확히는 ‘선험적 주체 개념’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죠. 근데 구조주의 입장에서 볼 적에는 맑시즘도 상당히 근대적인 사상이에요. 왜냐하면 자연을 대상화하고, 합리성을 중시하고,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근대적인 사상이죠. 그래서 맑스 같은 경우는, 근대 사회의 폐단을 수정하려는 탈근대적인 요소와, 그 방법이나 사유 양태에서의 근대적인 요소를 같이 가지고 있죠. 그래서 구조주의는 상당히 탈근대적인 성격이 상당히 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조주의 할 때 얘기 했죠. 탈근대 성격을 갖고 있지만, 과학성, 합리성을 그 방법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근대적인 면이 있다. 근데 그것까지 비판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후기 구조주의라고 했죠. 우선 먼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보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20세기 중엽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를 사회학적, 철학적으로 비판해 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사회를 고도의 합리성과 고도의 반합리성이 기묘하게 결합된 사회라고 보았다. 참 아이러니하죠. 컴퓨터 같은 고도의 합리성과, 동시에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게 그토록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사회로 보는 거죠. 이 점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니체의 사유와 대립하며 간접적으로 맑시즘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체는, 그러니까 근대적 합리성을 공격하면서, 반합리성을 자신의 주된 사유로 삼고, 거기에서 합리성을 넘어서는 쪽으로 갔다고 한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반합리성을 주로 폭력이나 광기, 전쟁 같은 데서 보죠. 그러니까 니체가 합리성을 '넘어서는' 반합리성을 얘기한다면, 이 사람들은 아주 비판적인, 합리성에 대한 안티체제로서의 반합리성을 이야기하죠.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말하자면 맑시즘은 아니지만, 서구 사회 내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역할을 하죠. 근데 프랑크 푸르트 학파는 유물론이자 경제중심주의인 맑시즘과는 달리 ‘문화’, 즉 맑스가 말한 상부구조에 관심을 가져요. 그러니까 맑시즘의 강점은 하부구조를 분석하는 거죠. 경제, 자본의 움직임, 노동, 공장, 생산 등등을 분석함으로써, 굉장한 사상의 발전을 보여줬는데, 그러다 보니까 인간의 의식이라든가, 사상, 문화, 정치 등은 결국 그런 생산양식의 결과나 경제의 한 효과일 뿐인 것으로 얘기되고 있죠. 맑스는 사실 그렇게까지 상부구조를 폄하하지는 않았어요. 강한 형태의 맑시즘은 하부구조 중심인데, 그래서 그 후에 나온 많은 사람들이 경제나 하부구조 말고 상부구조, 그러니까 정치라든가, 문화라든가, 인간의 의식구조 같은 걸 파고들죠. 대표적인 사람들이 막스 베버, 프랑크푸르트 학파, 미셀 푸코, 일본의 마루야마 마사오와 같은 사람들이 맑시즘을 보완해 나간 사람들이죠. 맑시즘이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적인 전복을 꿈꾼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서구 사회 내에 좀 더 부드러운 문화혁명을 꿈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격 차이는 한국사회에도 반영되었죠. 한국 사회에서도 이른바 ‘운동권‘, 아주 강한 형태의 운동권들이 맑시즘에 경도되었다면 화이트칼라지식인들은 상당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였죠. 말하자면 중산층은 프랑 학파에 경도되고, 하층민이라든가 완전히 운동권들은 맑시즘이죠.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출발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유는 흔히 이제 비판학이라고 불려요. 이 학파는 1923년 창설되었으나, 처음에는 맑시즘과 실증주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였다. 이 학파는 본격적으로 포르카이머가 2대 소장으로 취임한 1930년부터 뚜렷한 형태를 가지죠. 포르카이머는 이 학파의 성격을 사회 철학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1932년에 마르쿠제가, 38년에 아도르노가 들어오면서 활기를 띄죠. 그러면서 정신분석학이 또 하나의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맑스와 프로이트의 회통이 모색된 거죠. 1933년에 나치가 집권하면서 탄압을 받게 되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가요. 우리가 분석철학 할 때 이야기 했던가요? 유럽 지식인들의 사상이 나치즘 때 미국으로 다 건너가죠. 그러면서 미국 문화가 발달하죠. 미술도 그렇고 과학도 그렇죠. 그래서 1950년에 고국으로 돌아왔죠.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실증주의, 이른바 검증 가능한 것만이 진리라고 볼 수 있다는 실증주의를 비판하고 변증법적 사유 형태를 구사했다. 현대 과학 기술 문명은 고도의 합리성을 구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학자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지식인이 자본주의와 지배 권력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고 본다. 이른바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현대 사회죠. 합리성은 합리성인데 고대 그리스처럼 로고스, 진리와 윤리와 아름다움이 혼합된 로고스가 아니라 모든 걸 대상화하고 수량화하고 도식화하고 몰개성화 하는 종류의 도구적인 합리성만이 발달했다는 거죠. 이것은 곧 다른 말로 하면 기술 관료(테크노크라트)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지식인, 지성인이 아니라 기술관료(테크노그라트)가 지배하는 사회로 이어진다. 포르카이머와 마르쿠제는 그람시나 루카치오와 달리, 현대의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졌으며, 혁명 세력으로 역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노동자들이 19세기에는 혁명 세력의 주체였지만 이미 현대에 와서 보면 (물론 서구 이야기지만) 노동자 자체가 자본주의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혁명 세력이 되기 힘들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혁명 세력이냐?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비판적 지식인들이 혁명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이후에 벌어진 이른바 학생운동(student movement)의 기초를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생운동, 학생들이 사회 변혁의 주체, 중심 세력이 된 것이 이 때 즈음 해서지요. 그 전에는 노동자 세력이 혁명을 주도했고 오늘날에 와서는 학생운동이 사양길에 접어들었죠. 학생운동이 가장 뜨거웠던 때가 50, 60, 70년 , 80년이고 우리 같은 경우는 80년대가 가장 뜨거웠죠. 아도르노는 문화가 하나같이 산업이 되는 것을 비판하고 - 문화라는 게 순수한 문화가 아니라 산업이 되죠. 그야말로 돈을 목적으로 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2,30년 전만 해도 문화 상품이란 단어들이 굉장히 어색했고, 그런 단어 자체는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누가 그런 말 썼으면 너무 어색하게 느꼈겠죠. 말이 안 된다고요. 지금은 ‘문화상품’이란 말 아무 거부반응 없이 자연스럽게 듣죠. 근데 서구 같은 경우 20세기 중엽에 그런 현상이 도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대중문화가 모든 걸 장악하게 되죠. 어떤 학문이나 예술이 세계를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대중 매체와 대중문화가 모든 걸 장악하는 시대가 도래 합니다. 한국 같은 경우 1990년대가 그런 시대죠. 80년대만 해도 대중매체나 대중문화가 이렇게 세상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1990년대 들어오면서 완전히 모든 걸 대중문화가 지배하는 사회가 도래했죠. 근데 벤야민 같은 사람은 거꾸로 현대 대중문화, 예컨대 사진, 영화 같은 것이, 기존 예술이 가지던 아우라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미학을 창조한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히려 영화, 사진을 긍정적 측면에서 접근해요. 왜? 기존의 예술은 우뚝 선 아우라, 오리지날리티 같은 신성 불가침의 분위기 같은 거죠.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예술이 되죠. 그러면서 벤야민 같은 사람은 대중문화를 사회운동에 연결시킵니다. 오히려 그것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문화적 힘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아도르노와 벤야민은 대중문화에 대한 상반된 이해를 통해 갈라졌다. 아도르노는 대중문화가 사람들을 천박하게 만들고, 영혼을 파괴하고, 문화를 돈놀이로 만드는 상품으로 봤다면, 벤야민은 거꾸로 대중문화가 대중들에게 강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고, 그런 강한 전파력이 정치의식과 연결될 경우에 굉장히 근본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사회의 대중 의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히 정신분석학에 주목하게 된다. 요것이 맑시즘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중요한 차이에요. 맑시즘이 볼 적에 정신분석학은 굉장히 부정적인 담론이죠. 인간 존재를 주체성이 아닌 밑에 있는 불투명한 무의식에 지배되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라 뭔가 불합리하고 어둡고 음침하고 병적인 존재로 자꾸 인간을 바라보고, 사회과학적인 투명성이 아니라 굉장히 신비적인 불투명성을 자꾸 조장하는 담론이기 때문에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보죠. 그런데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사회의 경제 구조나 과학적 법칙이나 프롤레타리아의 주체성 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관심을 많이 가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맑스만이 아니라 프로이트를 봐야 되겠다. 그러면서 맑스와 프로이트를 결합하려고 하죠. 그러면서 이른바 프로이트-막시즘 흐름이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서 왜 독일 대중이 나치즘을 환영했느냐는 거죠. 어떻게 괴테와 쉴러의 나라에서, 베토벤과 모짜르트와 칸트, 헤겔의 나라에서 어떻게 국민들이 나치즘의 광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느냐, 그 심리가 뭐냐는 거예요. 파시즘의 대중 심리가 뭐냐는 거죠. 그래서 그 심리를 파고들죠. 그래서 왜 대중은 복종받기를 원할까? 거꾸로 이런 물음을 던지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왜 사람들이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가지게 되느냐, 그 심리를 분석해 봐야한다는 거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초기에는 비합리적인 성격 때문에 배척했던 정신분석학, 생철학, 실존주의가 맑시즘과 결합하게 되죠. 강한 맑시즘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했던 것들이 맑시즘하고도 결합을 하게 되죠. 마르쿠제라든가 에히리 프롬 등이 그런 사람들이고요.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60년대 전성기를 맞았고, 그 후에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하버마스 등을 통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버메스는 특히 코뮤니카치옹, 소통의 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쏟은 사람이죠. |
◆ 근대철학의 비판과 푸코 그 다음 푸코를 봅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하고 푸코 사이에 알튀세르를 하면 좋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알튀세르는 맑시즘의 일부로 해서 넘어가고 푸코를 봅시다. ‘푸코는 그의 스승인 조르주 깡귀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깡귀렘의 인식론을 넓은 지평으로 발전시켰다. 깡귀렘은 그의 학위 논문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이 문제는 그대로 푸코의 문제가 된다.’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가 19세기 문제의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굉장히 많은 관심을 쏟은 문제에요. 왜냐하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없으면 병이란 개념이 성립하지 않잖아? 그러면 의학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이렇게 복잡한 문제이죠. 푸코는 한 사회에서의 나눔의 메커니즘, 좀 더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존재론적 분절의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정상인과 광인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가? 합법적 인간과 불법적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푸코의 사유는 늘 이를 나누는 문제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점에서 피상적인 이와는 달리 푸코는 존재론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한 평생 문제의식은 나눔의 문제에요. ‘나누다'의 개념이 가장 중요 포인트가 되는 학문이 생물학이죠. 생물학은 분류하죠. 척추, 무척추, 양서류, 절취동물, 환형동물로 분류하잖아. '나눈다'라는 게 사회과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데요. 특히 사회에서의 나눔, 그러니까 미쳤다는 것과 안 미쳤다는 것, 이 사람은 옳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그른 사람이다, 합법적이다 불법적이다,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이런 문제들의 기준이 뭐냐는 거죠. 말하자면 우리의 사유라는 게 전부 나눔으로 되어 있잖아. 이 나눔의 존재론적인 근거가 뭐냐고 묻는 거죠. 그러면서 나눔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파고들면 거기에는 객관성보다는 권력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게 푸코의 기본적인 출발점이에요. 나눔이 정말 과학적 객관성이 있는 게 아니라,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겠죠. 비교적 근거가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고, 정도가 다르겠지만, 보통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식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이 있냐? 꼭 그렇지 않다. 대부분이 권력의 문제가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에서의 나눔, 사회에서의 나눔은 항상 배제(exclusion)의 문제를 함축하는 거지. 나눈다는 건 어떤 거에서 선을 긋는 거죠. 그리고 선긋기는 선의 어느 한 쪽은 배제하는(exclude) 거죠. 그걸 이 사람은, 사회를 지배하는 나무의 기본 작동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예컨대 정상적인 사람과 광인, 광인이 배제되고, 병자가 배제되고, 그 다음 소외된 담론들이 배제되고, 수인, 여성, 노동자, 어린이 등이 다 배제되죠. 그래서 이 사람이 평생 사유한 건 바로 배제의 문제이고, 이렇게 배제되는 존재들을 타자들(the Others)이라고 불러요. 푸코는 한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그물망, 주체와 세계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무의식적 지층의 규명에 나섰다. 우리가 배제의 체제, 분류의 체제에 살지만, 그것들이 우리 의식 속에서 살아있는 게 아니라 우리 무의식 속으로 그걸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는 거지. 그런 것들을 캐내야 한다는 거죠. 이 사람은 '고고학'(archeology)이라 그래. 고고학자들이 캐듯이, 위를 지배하는 심층을 파서 드러내는 거지. 그걸 이 사람은 고고학 또는 계보학이라고 하죠.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은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푸코는 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았지만 또 비판하는데, 첫째로, 구조주의가 구조를 실체화하려 했다면, 즉 그것을 자연법칙과 같은 객관적 법칙으로 파악하려 했다면, 푸코는 구조를 인위적인 거, 자위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하죠. 그러니까 강한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자들은, 마치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물이 중력법칙에 따라 떨어지듯이, 자연법칙처럼 구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거죠. 근데 푸코는 아니라고 보는 거죠. 구조는 물론 그런 강한 구조도 있지. 생물학적인 건, 우리가 만든 건 아니니까요. 유전자 DNA 같은 걸 우리가 만든 건 아니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구조라고 부르는 게 자연법칙처럼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가 역사 속에서 만든 거라는 거야. 어떤 집단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걸 만드는 거예요. 사실 근데 뭡니까? 일단 만들어 놓으면, 마치 그것이 영원히 주어진 법칙처럼 느껴지죠. 사실은 그게 만든 건데. 그래서 그의 구조주의는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평범한 구조주의나 탈정치적 기호학에서 탐구하는 구조주의가 아니라 정치, 권력, 배제, 탄압, 저항 같은 내용들로 채워진 역동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주의다. 예컨대, 아주 쉬운 예로, 우리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아니죠.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별 생각 안 하죠. 그런 건가 보다 하고 그냥 사는 거지. 사실은 아니지. 그게 자연법칙처럼 떨어진 게 아니잖아. 누군가가 언제, 어떤 대목에서, 어떤 시점에서 만든 거죠. 근데 일단 만들어 놓으면 마치 그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우리가 구상하게 되는 거지. 그래서 이 사람은 구조를 너무나 실체화하고 법칙화하는 것에 대해서 강력한 제동을 겁니다. 그건 바로 정치라는 차원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깡귀렘, 니체, 발떼르 같은 사람의 사유에서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특히 니체가 굉장히 큰 영향을 주게 되죠. 푸코는 한 사회의 무의식지적 지층을 인정합니다. 무의식적 지층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하죠. 그러나 그 무의식이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리얼리티, 실재, 본질 그런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무의식은 쉽게 잘 안 보여서 그렇지, 사실은 우리가 날카롭게 사유하면 찾아낼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점에서 푸코는 말하자면 실증적 구조주의에요. 구조를 인정하지만, 구조가 깊은 데 들어있는 리얼리티가 아니라, 우리한테 쉽게 안 보여서 그렇지, 현실 속에서 실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의 탐구 영역, 탐구 스타일을 인류학이나 정신분석학 등등이 아니라, 역사로 잡죠. 역사라고 하는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걸로 잡습니다. 마지막으로 푸코는 구조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라캉처럼 인간의 무의식 구조를 탐구하는 것은, 푸코 입장에서는 매우 추상적인 사유, 칸트와 다를 바 없는 사유다. 인간 무의식은 ‘이렇게 생겼다!’ 하고 마치 자연과학자가 알루미늄은 이거다 하는 식으로, 보편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중국 문화가 갖는 무의식적 메커니즘, 서구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 메커니즘, 아프리카가 갖고 있는 무의식 메커니즘이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그걸 ‘인간의 무의식은 이렇게 생겼다’고 보편적인 자연과학 법칙처럼 말하는 것이 라캉 같은 사람의 문제다. 구조는 문화적으로도 다르고, 시대마다 다른 것이다. 중국과 프랑스의 구조는 다르며, 르네상스의 구조와 근대의 구조는 다르다. 이 점에서 푸코 사유는 다원론적 역사 구조주의다. 이런 식의 생각은 아날 학파 역사학자와 통합니다. 그래서 푸코는 구조주의가 가져온 성과를 받아들이되, 거기에 결여된 정치적인 차원, 역사적인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사유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이 쭉 있는데, 그야말로 간단하게 개요만 본다면 『광기의 역사』는 아마 철학사 중에서 가장 독선적인 책일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철학자가 광기를 다뤘으니까요. 옛날로 말하면 광기는 철학의 적인데, ‘광기의 철학’이니까 전통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아이러니해요. 그래서 만약에 지금의 우리 사회, 현대인으로 이야기되는 사유의 출발점을 이룬 책이 뭐라고 묻는다면, 우문일 수도 잇겠지만, 굳이 묻는 다면 광기의 역사가 현대 사상의 출발점이에요. 광기의 역사를 읽으면 철학하는 방식, 스타일, 글쓰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요. 그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철학하고는 너무너무 다른 거죠. 그러니까 철학의 개념을 바꿔 버린 거지. 철학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완전히 바꿔 버렸어요. 여기서 푸코는 비본질주의를 이야기하죠. 요거의 본질은 이거다, 남자의 본질은 이거다, 여자의 본질은 이거다, 국가의 본질은 이거다, 동물의 본질은 이거다, 식물의 본질은 이거다 등등 이런 식의 본질주의를 거부하죠. 그런 식의 본질은 역사 속에서, 특정한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변해가는 것이고, 규정하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 그 본질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게 투쟁의 대상인 거지. 이런 비본질주의 문제를 다뤘어요. 그 다음에 지식(knowledge)의 문제를 다뤘죠. knowledge를 순수 학문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사실 근대 문화에서 knowledge는 권력(power)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특히 행정학, 범죄학, 사회학, 통계학, 인구학, 위생학 이런 종류의 담론들은 특히 그렇다는 거야. 그 다음 타자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아까 말한 타자들이 어떻게 형성되는가하는 문제죠. 동일자의 눈길을 보면, 배제되는 게 타자고, 배제하는 게 동일자이죠. 그러니까 타자가 무엇인가라는 건 타자 자신들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니죠. 동일자가 타자들에게 너희는 이런 거야라고 규정하는 거죠. 그리고 너희는 이런 거니까 한 쪽으로 가 있어 하고 배제하는 거죠. 무엇인가를 definition 하는 자체가 그런 식의 권력의 작동을 함축하죠. 이건 주체성(subjectivity)의 문제죠. 인간의 주체성(subjectivity)이 옛날 철학자들, 근대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하늘에서 뚝 덜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거야. 이정우의 주체성은 그가 태어난 나라, 배운 언어, 만난 사람들, 환경 등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지. 그렇죠? 이거하고 주체성하고 마찬가지죠. 환경 등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지. 주체성이라는 것을 근대 철학자들은 굉장히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죠. 인식론적으로라든지 등으로요. 우리가 그 때 영국 경험론의 칸트 배웠죠? 완전히 추상적이죠. 푸코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인간은 누구나 길들여지는 존재에요. 그러나 길들여지기만 하는 건 아니지. 나이가 어느 정도 되고 인식의 눈을 뜨면 내 subjectivity가 이렇게 길들여진다는 걸 깨닫게 되죠. 그러면서 저항을 하게 되지. 그러니까 나는 길들여지면서, 동시에 그것과 끝없이 싸우게 되죠. 길들여지는 나와, 내가 만들려고 하는 '나'와의 끝없는 투쟁의 장이 되요. 결코 근대 철학자들이 만드는 칸트처럼 무언가가 딱 있는 게 아니다. 그 다음에 이 책이 특히 비서구 지역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비서구적 사람들은 '서구'하면 합리적이고 자유, 평등, 박애 이렇게 생각하는데, 푸코는 서구의 근대성이란 게 이렇게 타자를 배제하고 지식을 만들어서 억압하고, 부르주아들이 사람들의 주체성을 조작해 나간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더니티를 완전히 뒤집어버리지. ‘모더니티‘하면 그 전에는 자유, 평등, 박애, 합리성, 과학, 민주주의 이렇게 했는데, 이 사람은 이걸 완전히 뒤집어 버리지. 그런 점에서 푸코를 탈근대 사유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서구 근대의 지하실에 들어가 음모, 고문 도구 등의 교활한 훈계체계 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래서 광기의 역사를 읽으면 엄청 잔혹한 내용이 많아요. 그래서 이탈리아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죠. 광기의 역사가 이탈리아어로 번역이 되었어요. 그래서 서점에 꽂혔는데, 이게 SF 코너에 꽂혔다고 해요. 그래서 카피가 뭐냐면, 서구 문명의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들어가는 모험이 출판사 카피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유명한 에피소드죠. 『임상 의학의 탄생』은 주제가 의학적이어서인지 일반적으로 덜 논의되고 있지만 푸코 사유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푸코는 여기에서 봄과 앎의 관계를 임상 의학이 탄생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또한 죽음에 대한 뒤샹의 중요한 통찰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말과 사물』은 서구 담론사에서 특히 생명, 노동, 언어라는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는 르네상스, 고전 시대, 근대 그리고 오늘날을 추적하면서 박물학, 자연사가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정치 경제학으로, 일반문법이 비교언어학으로 변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러한 과학사적 논의를 통해서 푸코는 서구 담론사에서의 언어와 주체의 관계를 파헤친다. 르네상스 시대, 고전 시대, 근대 , 현대로 변환되면서 언어와 주체가 어떤 연관을 가지는지 그리고 말과 사물이 어떤 굴곡을 켜는지를 다루고 있다. 푸코는 칸트에서 실존주의 소극적 주체철학을, 인간학적 자위에 빠졌다고 비판하며, 유명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서양 근대 문화는 인간의 자아도취다. 인간이 완전히 자아도취에 빠져서 (세상을) 다 말아먹으려 하는 거다. 이게 중요한 비판이죠. 물론 이 때 '인간'은 추상적인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서구 근대 철학이 말하는 인간을 뜻하죠. 대단한 의미를 부여받은 선험적 주체를 말하죠. 감시와 처벌은 서구 사회에서 죄의 개념과 처벌 양식이 어떻게 변했는가, 근대 휴머니즘이 표방하는 처벌의 인간관은 과연 어떤 성격을 띠는가, 법의학, 헌법학 등 ‘근대적 지식들과 부르주아 사회의 권력은 어떤 상호관계를 지니는가’ 등을 탐구했다. 이 책은 또한 .지정학에 큰 시사를 주었으며 - 지정학은 지리정치학이죠? 지리학을 그냥 평범하게 사과는 한국에서 나오고, 등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지리가 엄청 정치적이라는 거지. 우리 나라의 경상도, 전라도 관계가 할 때 그건 전형적인 지정학적 관계였죠. 이 책을 쓸 때 푸코 자신이 엄청 열정적으로 사회참여 하죠. 현대 20 세기 지식인 중에서 가장 뜨겁게 사회참여를 한 사람 중의 하나에요. 그 다음 『성의 역사』 1부와 ‘감시의 처벌’을 이어서 서구사회에서 성이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가를 논한다. 섹슈얼리티가 서구 문화에서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다뤄졌는가를 쭉 이야기하죠. 묘한 건 원래 여섯 권으로 기획되었죠. 심지어 소년 십자군 같은 게 들어가 있고,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이 사람이 1 권만 낸 다음, 갑자기 8년 동안 침묵을 지키죠. 가끔 인터뷰나 하면서 가만히 있죠. 왜냐하면 자기가 지금까지 주체를 길들이는 장치들이라든가, 인간을 지배해온 지식 권력의 그물망을 주로 이야기했는데요. 관점이 어떻게 변하느냐면 인간의 주체성이 어떻게 그에 대해 저항하는가로 관심이 바뀌어요. 그러니까 우리를 만드는 게 무엇인가가 주관심사 였는데, 이제는 우리가 거기에서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관점이 주체 중심으로 바뀌어요. 그걸 모색하기 위해서 무려 8년간이나 침묵하죠. 그리고 나온 게 바로 『쾌락의 선유』, 『자기의 테크놀로지』이죠. 여기에서 권력이 주체를 어떻게 모양 지우는지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주체가 권력의 장 안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주체화 하는지를 다루게 시작한다. 그것은 예속과 주체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과정이죠. 또 하나 독특한 것은 그 때까지 언제나 근대를 다뤄오던 푸코가 이젠 고대로 영역을 바꿨다는 거예요. 고대 그리스가 어떻게 자기네들을 주체(subjectivity)로 만들어 갔는가를 연구해요. 사실 그건 서론이고, 진짜 기대가 되는 건 근대부터 얘기해야 되는데, 이 양반이 그 전에 에이즈로 죽었다 그러지. 이 사람이 동성애자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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