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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현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0. 3. 31. 23:57

제1강 현대철학이란 무엇인가?

◆ 근대철학의 이성중심주의


▲ 오늘날의 철학의 범주

세계철학사 시간을 죽 해왔는데, 이번 학기에는 세계철학사의 마지막 시간이죠. 제목은 오늘날의 철학입니다. '오늘날'이란 것을 어떻게 잡아야하는가는 쉽지 않은 문제죠. 언제까지가 오늘날이냐? 오늘날이란 것을 잡으려면 '무엇을 기준으로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되겠죠.

그런데 여러 가지 정치사적 변화라든가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든가 문화의 전반적 변동에 비추어 볼 적에 대체적으로 서구의 경우에는 1970년대 이후 정도, 우리 같은 경우는 1980년대 후반 정도의 상황을 오늘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지금부터 2, 30년 전부터의 철학을 오늘날의 철학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여러분들과 같이 오늘날의 철학에서 주로 어떤 철학들이 다루어지는가? 핵심적인 주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주제를 놓고서 이야기 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 주장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리고 각 주장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또 각 주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기본개념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점들을 하나씩 짚어보려 합니다.


▲ 근대의 극복으로서의 현대철학

맨 첫 시간은 현대철학, 오늘날 철학 중에서 존재론 분야를 하려고 합니다. 존재론은 주로 들뢰즈(Gilles Deleuze)를 중심으로 해서 오늘날 존재론의 연구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연구 맥락은 무엇인가를 알아보려 합니다.

현대철학이라는 것은 결국 근대문명이 우리에게 가져온 갖가지 문제점들을 붙들고서 그것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그런 성격이 강하죠. 그래서 보통 현대철학을 탈근대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17세기라는 시대를 탈중세의 흐름이 일어났던 시대로 봅니다. 17세기에는 중세로부터 벗어나가지고 어떤 새로운 문화, 새로운 문명을 추구했던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20세기는 탈중세를 통해 이루어진 근대라는 시대를 극복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구를 중심으로 발전해가지고 지금까지도 계속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근대, 근대문화 또는 근대성에 대한 하나의 극복으로서 제지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17세기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17세기에는 아주 독특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 새로운 시대를 열었는데 20세기에도 대단히 복잡한, 도저히 정리하기 쉽지 않은 많은 인물들이 나와서 각자의 사상을 펼쳤죠. 지난 학기에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형이상학적인 흐름도 있고, 현상학과 해석학, 맑시즘같은 정치철학도 있고, 또 구조주이나 후기구조주의, 또 과학철학 등 여러 가지 갈래들이 등장하죠.

오늘날의 철학은 20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학문방법론들을 이미 전제하고 있어요. 예컨대 맑시즘, 니체, 정신분석학, 현상학, 해석학, 구조주의, 과학철학 등 이미 이루어진 많은 방법론들을 전제하고 이것들이 얽히면서 갑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겠습니다.


▲ 이성중심주의의 근대 철학 - 알 수 없는 것들을 이성의 안으로 내부화 시킨다

단순화의 오류를 무릅쓰면서 근대철학이 갖고 있는 특징을 이야기 해 보자면요. 삶의 우연성이라든가 불투명성이라든가 또 시간이 가져오는 생성과 해체, 시간, 세계를 채우고 있는 존재들의 다양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대체적으로 인간의 이성으로 극복하고 해소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근대철학을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이성중심주의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 철학이나 일반 사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 내부와 외부라는 말입니다. 내부성과 외부성, 내부화와 외부화 라고 하죠. 이것을 이미지화 해보면, 여기 이런 존재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해서 원을 그리는 거죠. 그러면 그 안은 내부화되죠.

약간 정치적 예를 들어보면, 이 중심이 한 정부라면 여기에 대항하는 한 집단이 원 바깥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집단은 이 정부에 대해 외부를 형성하죠. 그런데 저 집단에 돈을 많이 준다거나 설득을 하든가 해서 선을 넓게 그으면 이 집단도 시스템에 내부화됩니다.

현대철학은 항상 안과 바깥, 내부와 외부, 동일자와 타자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내부화한다는 것은 어떤 중심이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순치시키는 것입니다. 순치라는 말 아시죠. 쉽게 말하면 길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바깥을 어떠하든 자기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자, 지금 한 이야기의 범위를 크게 생각해보세요. 인생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알기 힘든 그 무엇이라는 불투명성, 그 다음에 우리 삶을 수놓고 있는 우연들, (공간은 비교적 순치가 잘 되는데 반해) 시간은 인간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죠. 이런 것들, 우연이나 불투명성, 시간 등 등 등.

그런 것들, 인생을 이성이라는 것 안으로 이렇게 내부화 시키는 거죠. 그런 존재들은 우리 이성으로 이해가능하고 우리 이성의 언어로 표현가능하고, 분석가능하고, 한 마디로 우리 이성이 빛 아래에 딱 놓음으로서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는 외부가 아닌 그 무엇으로 순치시키는 거죠. 내부화한다는 것이 뭔지 아시겠죠.

이성이 그 이성의 타자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불가해한 것들인 우연, 시간, 분석 되지 않는 것, 연역되지 않는 것, 베케트식으로 말하면 이름붙일 수 없는 것, 이런 것들을 이성이라고 하는 빛 속으로 이렇게 끌어들이는 거죠. 쉽게 말하면 순치시키는 거예요. 그런 작업이 근대철학의 중요한 성격을 이루고 있죠. 그럴 때는 우리가 보통 이성중심주의라고 하는 거죠.


▲ 근대철학 안에도 근대성의 타자들이 존재했다

물론 조심할 것은 근대철학이라고 무조건 덮어놓고 이성중심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왜냐면 근대 자체 내에도 이미 그런 근대성의 일반적 경향과는 다른, 시류를 역행하는, 니체식으로 말하면 untimely한, 탈시대적 사유도 물론 있죠.

예를 들어, 데이비드 흄 같은 사람은 보편성, 객관성, 필연성 등 등 전통학자들이 중시하는 개념들이 상당히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다. 정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흄은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자의적인 개념임을 강조합니다. 또 우리가 계몽사상하면 무조건 합리성이나 이성 등등의 이야기로 생각하지만, 프랑스 계몽사상은 그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욕망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근대 자체 내에도 쉽게 일반화하고 단순화시킬 수 없는 근대성의 타자들이 존재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가 근대철학을 너무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난 전반적으로 봤을 때, 근대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그 이성의 타자들을 내부하고 순치시키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 이성중심주의 데카르트 - 모든 사물의 본질은 외연이다

그 예로서 데카르트의 res extensa(extended thing)는 연장, 외연을 가진 것이죠. 내 외연은 지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모습이고, 백묵의 외연도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모습입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곤충이든 어떤 물체든지 아무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은 무조건 공간적 외연에 있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은 신과 영혼 두 개만 빼면 모두 완벽하게 기하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겠죠. 모든 사물의 본질은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색이나 맛도 마찬가지죠. 예들 들어 매운 맛은 그 음식물의 입자들이 뾰족해서 내 혀를 콕콕 찌르는 것이다. 또한 A색과 B색의 차이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기하학적 차이라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에게 색은 색의 입자들이 빛의 입자들과 부딪히는 메커니즘의 차이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신과 영혼 두 가지만 빼고 우주는 기하학적으로 파악합니다. 전형적인 우리의 합리적 이성 속으로 우주를 내부화하는 것이죠.


▲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을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우리가 아는 모든 행동들은 신이 이 우주를 만들 때 이미 프로그램 한 것처럼 예정되어 있는 하모니, 조화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이성에 의해서죠. 재미있는 것은 이 이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신이에요.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아주 아름답게 조화롭게 미리 짜 맞추어진 질서가 죽 펼쳐지는 거죠. 마치 컴퓨터에다가 프로그램을 다 해놓으면 가만히 놓아두어도 순서대로 쫙 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물론 신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하는 그 작업을 인간만이 알 수 있죠. 왜?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을 신이 보장해주는 거지. 역으로 말하면, 이성을 가진 우리 인간만이 신을 알 수 있는 거죠. 신과 인간의 기묘한 공모관계죠. 신도 인간도 아닌 것들은 별거 아닌 거죠. 이런 식의 종교적 신 개념과 인간중심주의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죠.


▲ 근대철학의 이성주의의 잔재 - 칸트의 종합과 구성, 헤겔의 노동

그런데 18세기, 19세기가 되면 이제 ‘신’이라는 것은 적어도 철학적 담론에서는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철학의 이성중심주의는 남아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칸트가 말하는 종합(syntheis)과 구성(construction)이죠.

칸트에 의하면 아무리 감각적 경험을 해도, 즉 무엇인가를 보고 만지고 해도 그런 놈들이 우리 이성의 종합 또는 구성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감각의 다발들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런 감각의 다발들이, 더미들이 우리가 가진 이성의 틀, 양이라든가 질이라든가, 관계, 양상 같은 틀로 종합이 되고, 구성이 되어야 그런 놈들이 어떤 경험으로 성립하고 인식이 되죠.

헤겔은 종합과 구성 개념들을 노동(Arbeit) 개념으로 바꾸죠.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주체가 그 사물에 작용하여 변형시키고 또 그 사물의 변형이 자기한테 변화를 가져오죠. 그런 과정을 헤겔은 노동이라 했죠. 그러니까 칸트의 종합, 구성 개념보다 헤겔의 개념은 훨씬 더 역동적이죠. 그냥 감각해서 종합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과 내가 실제로 교류를 하는 거니까.

자 이것을 하나하나 하는 것은 우리 시간의 목적이 아니고, 저것은 근대철학에서 배운 내용의 몇 가지 예를 든 거예요.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 우리가 근대철학의 거장들이라 부르는 사라들을 유심히 보면 이 우주의 복잡성이나 다양성, 우연, 시간, 불투명성 등을 기하학으로, 신의 어떤 섭리로, 인간 주체의 구성작용으로, 인간이 사물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 것으로 파악을 한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서양 근대철학은, 물론 예외도 있고 복잡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적에 이성중심적이고 주체중심적 성격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죠.

 

◆ 현대철학의 성격


▲ 현대 존재론의 성향 - 존재 자체를 그대로 대면하라

자, 여러분 두 번째 페이지, 새로운 문단을 봅시다. 현대철학에는 분명 시간성, 우연, 다양성, 차이에 대한 감수성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기존의 철학적 선입견으로 본다면 우리의 인식을 방해하는 것, 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데 영 껄끄러운 것들이 이성에 대한 타자고 철학으로서는 어떻게든 배척해야하고 소화해야할 것들이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오히려 현대철학에서는 그런 것들을 그 자체로 직면하려는, 직시하려는 그런 경향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근대철학은 과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죠.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는 수학자면서 과학자들이잖아요.

근대철학이 과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비해서 현대철학은 예술과 훨씬 더 밀접 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 이유가 뭘까? 보편성, 합리성, 객관성 등을 추구한 근대 이성주의가 자연히 과학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현대철학은 삶의 불투명성이나 우연, 다양성, 차이, 감각 이런 것들을 그것 자체로써 대면하려고 하는 경향, 즉 이해를 하기는 하되 그것을 이성에 순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그대로 드러내주려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거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대철학은 오히려 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 생성존재론 - 현대존재론의 출발점은 생성과 시간에 있다

물론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경우들이 많지만, 기존의 많은 철학체계들이 우연이나 이런 것들을 inessential한, 비본질적인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정말 본질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한 것이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인데, 이런 우연한 것들은 뭔가 이 세계의 껍데기, 그림자, 비본질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아니면 그런 본질적인 것으로 흡수시키려고 노력한 거죠.

이렇게 볼 때, 왜 현대존재론의 출발점이 생성과 시간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대존재론의 출발점은 becoming이예요. 그래서 당연히 시간에 관한 것이 됩니다. 전통 존재론이 ‘be’의 존재론이라면 현대 존재론은 ‘becoming’입니다. 전통존재론이 ‘영원’을 추구하는 철학이라면 현대존재론은 ‘시간’을 사유하는 철학입니다.

그래서 현대존재론은 기본적으로 생성존재론이죠. 왜냐면 이성이 가장 소화하기 힘든 것이 시간이거든. 공간은 나름대로 정복하기 쉽죠. 예컨대 내가 종로에 갔다가 여기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가역적입니다. 그런데 시간은 한번가면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 비가역적인 시간을 인간의 이성으로 내부화시키는 방법들

공간은 이렇게 종이를 반으로 접을 수 있는 것처럼 조작이 가능합니다. 그만큼 만만하죠. 그런데 시간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시간을 순치시키는 방식이 많죠. 그 중 하나가 시계입니다. 시간을 시간 자체로 감당이 안 되니까 시간을 공간으로 바꾼 거죠. 각도를 보면서 시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법칙을 읽어내려는 시도들이 있죠. 이 세계가 변화하지만 그 변화가 무대포인 것이 아니고 패턴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패턴을 읽어내어 미래에 대처하는 것이죠. 시간을 순치시키는 한국인 특유의 방식이 점치는 것입니다.

점을 친다는 것은 나의 타자인 불투명한 감당이 안 되는 시간을 순치시키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이 어떻게든 시간을 내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예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언어는 흘러가는 말들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레코드판도 마찬가지죠.

한 번 들으면 사라지는 것이 음악인데 음악을 붙잡아 둡니다. 컴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다루기 힘든 그 시간을 어떠하든 잡아보려는 노력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과학기술은 시간을 순치시키는데 노력을 쏟고, 인문학은 시간을 순치시키려하지 않고, 시간이라는 것을 직시하려고 하죠.


▲ ‘경험’ 자체를 중시하는 현대 생성존재론

어떻게하든 시간을 직시하고 그 의미에 주목하는 것이 인문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대하는 방식,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간을 전제하는, 시간을 핵심에 놓고 나가는 존재론이 생성존재론이다.

그런 생성존재론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 산으로 말하자만 봉우리에 해당하는 사람으로는 니체라든가,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 니체와 베르그송을 했죠. 이번 학기에는 화이트헤드는 시간이 없어서 못하고, 들뢰즈를 중심으로 현대존재론을 합니다.

그러니까 니체와 베르그송이 현대생성 존재론의 기초를 놓았다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그것을 발전시킨 사람들이에요. 하이데거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맥락 속에 위치시킬 수 있죠. 그래서 니체가 말한 생성,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 화이트헤드가 말한 과정, 들뢰즈가 말한 차이나 사건 등 이런 개념들이 바로 전통적 존재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생성존재론의 개념이죠.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그 개념들이 지향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향점은 같죠. 존재론을 생성과 시간으로 파악하려는 그런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대 형이상학자들 또는 존재론자들은 경험을 종합하거나 구성하기보다 그것의 생생한 존재 자체로서 만나고자 했습니다.

전통적인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을 넘어서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경험이란 투명하지는 않잖아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누구를 만날 수도 있고, 갑자기 내 머리에 뭐가 떨어질 수도 있고, 내가 우연히 어떤 일에 휩쓸려 가지고 우왕좌왕 할 수도 있죠. 경험이란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죠. 불투명하고. 그래서 우리가 흔히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야 경험을 이해할 때가 많죠.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데 현대 존재론자들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런 경험들을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추상적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거예요. 현대 존재론자들은 그것을 거부하는 거죠. 그 이전에 (전통적 존재론에서)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것에 도달하려면 바로 그런 경험을 벗어나야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죠.

현대 존재론은 오히려 그런 경험에 충실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완벽하게 충실한 것은 불가능하죠. 여기 학생이 4,50명 되는데 경험이 다 다르잖아요. 자기만 아는 경험이 많잖아. 물론 그렇다고 그것을 추적하자는 것은 아니죠. 그것은 개개인의 삶의 차원이고 개별적 차원이죠.

이 사람들(현대 존재론자들)이 하려는 것은 경험을 경험 자체로 만나게 되는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죠. 인간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경험이라는 것을 어떤 구성적 틀에 속에 복속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경험자체로 만나게 되는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하죠.


▲ 경험자체로 만나기 - 들뢰즈의 ‘마주침’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가 자주 쓰는 말 중 하나가 불어로 rencontre, 영어로 encounter, '마주침'이죠. 자! 이 마주침이라는 것을 왜 이야기할까?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이 방에 들어올 적에 진정한 의미의 마주침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왜?

우리가 만나는 사물들은 이미 우리에게 내부화되었기 때문에. 그냥 들어와서 칠판, 지우개, 의자, 탁자, 선풍기가 있는데 그것들은 아무 이상할 것이 없죠.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리고 단적으로 말하면, 사물을 만난 적이 없는 거야. 만났지만 만나지 않은 거죠.

이미 우리 지각체계 속에, 우리 기호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지. 여기 이 기호체계들.. 칠판, 지우개, 탁자. 우리는 상징계 속에 또는 기호체계 속에 순치된 것들만 만나는 거죠. 그러니까 조금 시적으로 표현하면, ‘봐도 보는 게 아니고 들어도 듣는 게 아니로다.’

우린 사물을 만난 적이 없어요. 어떤 기호, 어떤 하나의 sign을 만나는 거지. 그것은 왜냐? 우리는 이미 이 세계를 완벽하게 우리의 상징계 속에 넣고 살아가기 때문이죠. 들뢰즈는 진정한 경험은 마주침에 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어떤 놈이 나를 톡 때리는 것이죠.


▲ <프루스트와 기호들>속의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기호’

들뢰즈가 젊은 시절에 쓴 책 중에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란 책이 있어요. <Proust et les signes>.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책을 보면, ‘rencontre’, ‘마주침’이란 말이 많이 나와요. 내가 마들렌이란 과자를 먹을 때, 그 과자가 내 혀끝에서 탁! 하고 스파크를 일으키는 거죠.

그런데 평소 같으면 내가 이미 그 맛을 아니까 그 맛을 기대하고 먹죠. 내가 콜라를 마시면 콜라 맛을 기대하고 먹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놈이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자기한테 마주쳐오는 거죠. 또 예컨대 마차를 타고 가는데, 유럽은 바닥이 우리 인사동처럼 되어 있잖아.

거기서 톡 튀어나온 부분, 나무, 피아노 소리, 벵퇴유 소나타 이런 것들이 자기한테 하나의 마주침이죠. 그러니까 <프루스트와 기호들>라고 할 때, 이 기호들은 우리가 쓰는 기호들이 아니에요. 이 기호들은 마들렌의 맛, 바닥에 깔린 그 포도의 흔들림, 나무의 모습들, 피아노의 음색 그런 거예요.

이 때 sign이란 것은, 흔히 말하는 sign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들뢰즈는 다른 말로도 쓰는데, symptomes, 징후라고 하죠. 그런데 그런 놈들은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나를 톡 쳐서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 쉽게 말하면.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죠. 그런 경험의 차원 속으로 이 사람들은 우리를 데려가는 거죠.


▲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칸트의 -현대철학의 타자와는 다른 의미의-타자’

칸트에게도 타자가 있어요. 칸트는 근대 주체철학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체가 구성하고 종합하는 철학자죠. 그런 점에서 칸트에게는 앞에서 말한 ‘주체의 내부화’라는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도 타자는 있죠.

그게 뭘까요? 물자체죠. 칸트의 물자체. 그렇게 주체를 구성하고 종합해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 뿐입니까? 현상계뿐입니다. 현상계만, 우리에게 나타난, 우리가 감각으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현상계만 종합하고 구성할 수 있죠. 사물 그 자체(thing itself), 사물의 본질은 영원히 우리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거죠.

그러면서 이것(물자체)은 칸트에게서 어떤 타자에요.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이렇게 들어오는 게 있다면, 영원히 안 들어오는 저편이 있는 거죠. 물자체죠. 그런 점에서 칸트에게는 분명히 타자가 있어요. 이런 것을 강조하는 사람이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죠.

이런 사람은 칸트를 해석하되, 칸트야말로 타자를 이야기 한 사람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칸트를 공격하는데, 그거 아니다 이렇게 보죠. 그러나 이런 식의 타자는 현대철학이 말하는 타자하고는 많이 다른 거예요.

(현대철학이 말하는 타자는) 우리에게 세계가 어디까지는 다 들어오되 그 후부터는 아예 안 들어온다. 우리 이성의 빛이 비치는데 까지는 들어오고, 그 다음은 어둠이라는 (칸트식의) 이런 의미의 타자가 아니다. 현대철학에는 (현상계와 물자체 사이의) 이런 경계선은 없어요. 물자체라든가 세계의 본체 이런 것은 이야기 하지 않아요. 현대철학은 이런 타자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