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존재론과 개체성
▲ 지난 시간에 맨 처음 한 것이 존재론(ontology)이죠. 존재론은 이 세계를 일반적인, 가장 추상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거죠. 예컨대, ‘존재와 무’라든가, ‘이 세계는 필연적으로 움직이는가?’, ‘우연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이렇게 가장 추상적이고도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이것이 가장 좁은 의미의 철학이죠. 철학을 가장 좁게 정의했을 때, 존재론이 핵심적인 철학이고요. 두 번째 말씀드린 것은 자연철학이에요. 자연철학은 자연에 대해서 물질 생명에 대한 것으로 두 번째 시간에 한 것이죠. 이 두 개(존재론과 자연철학)는 넓게 보면 자연철학이 존재론에 포함될 수 있죠. ontology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완해주는 것이 자연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죠. ▲ 인간존재론
그 다음에 오늘부터 할 것은 존재론과 자연철학이 세계 전체를 두고 한 것이라면, 오늘부터 할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것으로 인간존재론이에요. 일반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존재론인데, 인간존재론, 즉 인간을 탐구하는 방식,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방식이 있어요. 첫 번째는 자연과의 연관성 속에서 사유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실체는 다른 물체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에게는 mind라는 것이 있는데, 인간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다른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다루는 것이 하나의 범주가 되고, 두 번째는 첫 번째처럼 인간을 자연과의 맥락에서 보기 보다는 인간 주체성에 좀 더 직접적으로 주목하는 방식이 있다. 예컨대 이것은 심리라든가, 무의식이라든가, 개별적 체험을 다루죠. 첫 번째 방식이 자연철학과 연관이 있다면, 두 번째 방식은 심리학이라든가 문학, 정신분석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죠. 그리고 세 번째로 인간을 사회에 놓고 보는 것이죠. 개별적으로 추상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것을 전제하고서 해명하는 거죠. 인류학, 사회학, 역사학 이런 것들과 연관해서 볼 수 있죠. 다시 말하면, 첫째 인간이라는 것이 워낙 복합적이고 묘한 존재이다 보니까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죠. 자연과학과의 연관선상에서 볼 수도 있죠. 뇌의 기능이 뭐냐? 마음과 뇌는 다르냐? 동물과 인간은 어떻게 다르냐? 인간은 진화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느냐 등등. 두 번째는 인간의 주체성에 직접 호소하는 거죠. 인간의 체험, 실존, 고독, 소외, 신체에 직접 호소하는 거죠. 정신분석학, 문학 이런 거하고 연관되죠. 그다음 세 번째 것은 사회구조, 문화구조에 입각에서 인간을 보는 거죠. 인류학이라든가, 언어학, 사회학, 기호학, 역사 등등이 있고. 이렇게 인간을 탐구하는 방식에는 크게 3가지 연구 흐름이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 특별한 것이 인식론이죠. 인간은 인식하는 존재이니까. 인식이라는 특별한 기능을 하는 거죠. 왜냐면 인간이 인식이라는 게 없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도 않겠죠.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죠. 그래서 인식론은 별도의 대접을 받는 그런 분야죠. 이런 구도로 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로 인간을 자연과학과의 연관성을 이야기 하고, 다음 시간에는 인식론,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해 나갑니다. ▲ 인간과 자연과학 - 개체, 물질, 보편자
오늘 주제가 동물, 인간, 기계인데요. 맨 처음 이에 대한 주제는 개체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죠. 인간은 우선 개체(individual). individual이 뭐냐 하면, 그냥 물질(matter)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편자들(universals)도 아니라는 거죠. 그냥 물질은, 여기서 물질을 에네르기라고 하든 힘이라고 하든 기라고 하든 이런 것들은 개체성이 없는 것들이죠. 하나로 마름질 되어서 끊어진 것이 없는 거죠. 공기나 물은 개체성이 없는 거죠. 물론 한강 같은 것은 개체성이 있죠. 한강이라는 하나의 강이 있는 거죠. 그래서 물 자체가 개체성이 있다기보다는 땅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 것을 인간이 하나의 개체로 보는 거죠. 그래서 물질차원은 개체가 없는 차원이에요. 그냥 어떤 flux, 흐름만 있는 차원이죠. 저런 존재들은 언어적으로 말하면 관사나 수사가 없죠. 물질명사엔 관사가 없어요. a water, two water라는 말은 없죠. a cup of water라고 하죠. 개체성이 없으니까 저런 것에 개체성을 부여할 때는 인간이 고체를 사용하는 거죠. 그럴 때만 개체가 되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보편자들이에요. 가족, 어떤 학교, 어떤 나라, 어떤 지역, 무슨 회사, 무슨 생물학적 종이나 류, 이런 것들 전부 다 개체가 아니죠. 물질을 가리키는 것들이 개체이하라면 보편자들은 개체이상인 거죠. 예컨대 한국은 하나의 보편자이죠. 철수나 영희는 개체들이지만 그런 사람이 모인 수 천 명의 사람은 보편자죠. 그다음에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뽀삐, 해피, 바둑이는 개체들이지만 개는 보편자죠. 생물학이 말하는 종류도 역시 보편자죠. 그러니까 만약 이 세상에 물질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심심하겠죠. 흐름만 있을 테니까. 만약 보편자만 있다면 이 세상이 허여멀겋기만 하겠죠. 몸과 마음을 가진 개체는 없고 보편자만 있으니까. 뽀삐, 해피. 멍멍이는 없는데 ‘개’라는 보편자만 있다고 생각해봐. 그것은 마치 수학적인 세계겠죠. 색깔도 형태도 맛도 향기도 없는 논리와 추상만 있는 그런 세계, 개념만 있는 세계겠죠. 이런 세계가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요. 그러니까 뽀삐는 꼬리를 흔들지만, 개한테는 꼬리가 없죠. 개라는 보편자에 꼬리라는 규정은 들어가 있지만 개라는 보편자한테는 꼬리가 없어요. 사람들은 웃지만 인간이라는 보편자는 웃지 않죠. 보편자만 있는 세계, 이런 세계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죠. ▲ 개체를 둘러싼 논쟁(개체 vs 보편자, 개체 vs 물질)
철학사를 가만 살펴보면 여러분 중세철학에서 배운 보편자논쟁 기억납니까? 뽀삐, 해피, 멍멍이만 실재한다. 개는 그런 개체들을 한꺼번에 부르려고 쓰는 말에 불과하다. 이것이 어떤 입장입니까? 유명론이죠. 오로지 이름밖에 없다. 유명론(唯名論). 또는 명목론(nominalism)이라고도 쓰죠. 이것이 유명론이다. 이것에 반대되는 것이 뭡니까? 아니다. 뽀삐, 해피, 멍멍이와 별도로 ‘개’라는 보편자가 실재한다. 실재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개체들보다 오히려 더 참된 존재라고 하는 것이 realism, 실재론이죠. 그러니까 중세철학의 최대 논쟁이 보편자 논쟁이죠. 보편자가 이름에 불과한 것이냐, 참된 실재냐에 대한 논쟁이죠. 그 다음에 근대와 현대에서 철학자들이 무엇을 가지고 논쟁하고 싸웠습니까? 개체를 물질로 환원하려는 입장과 환원하면 안 된다는 입장의 싸움이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체들을 물질로 에너지로 세포로 유전자로 등등으로 환원하려고 설명하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 개체는 고유명사를 가진 고유한 존재다. 고중세 철학자들이 개체와 보편자를 가지고 논쟁했다면, 근현대 철학자들은 개체와 물질을 가지고 논쟁한 것이죠. 결국 철학사를 유심히 보면 개체 이하의 물질, 개체 이상의 보편자, 그리고 개체, 이것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이죠. 그러나 만약에 특히 인간이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거나 보편자로 환원될 수 있다면 개체들이 가진 체험이나 감정이나 고유한 삶은 허상이 되어버리겠죠. 그러니까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나 자연과학적 환원주의나 개체의 위상을 폄하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문제들이 철학사를 관통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죠. ▲ 개체 중심적 입장
개체들은 세계 전체를 살아있게 만드는 주인공들이죠. 만약에 개체라는 게 없고, 물질적인 것만 존재하거나 보편자만 존재한다면 세상이 엄청 심심하겠지. 사람도 있고, 개체들이 있느니 개도 있고 코끼리도 있고 식물도 있으니까 이 세상이 재미있는 것이지. 물질의 흐름만 있거나 뻥한 보편자만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심심하겠어? 내 개인적 입장에서는 개체들을 무시하는 이론들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봐. 나도 하나의 개체지만 물질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죠. 개체라는 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소박한 생각이지만, 개체라고 하는 것을 자꾸만 그것이 유전자든 보편자든 구조든 뭐든 이런 것으로 완전히 환원시키려는 입장에는 상당히 의구심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물질도 있고, 보편자도 있지만, 역시 개체라는 게 있기에 세계, 세상이라는 것이 성립하는 거죠. 세상은 인간중심적인 개념이고, 좀 더 일반화하면 세계죠. 개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거대한 흐름, 물질성을 거슬러 가는 매듭들이죠. ▲ 모든 개체는 물질과 생명의 투쟁의 결과이다
그러니까 물질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지금 하나로 이야기 했지만, 이것을 다시 두 개로 크게 나누면, 물질이 있고 생명이 있죠. 물질이라는 차원은 quality들이 점점 다 소멸해가는 성격을 띠어요. 이 A4용지를 봅시다. 직사각형이고 하얀색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천년만년 흘러가면 공중분해 되겠죠. 예컨대 나도 여러분도 물질인 이상 다 죽죠. 이 색깔, 목소리 다 흩어지겠죠. 물질은 항상 죽음으로 가요. 언제나 소멸의 방향으로 가죠. 공간에 퍼져있는 물질로만 남는 거지. 그런데 생명은 반대죠. 생명은 quality들을 끝없이 창조하는 방향으로 가요. 신화를 보면 옛날에는 물질 밖에 없죠. 거기서 조그만 뭐가 생겨서 물고기가 되어 헤엄도 치고, 날개가 생겨서 새가 되고, 다리가 생겨서 포유류가 되고, 사람이 나와서 말도 하고, 점점 더 quality들이 생겨나는 거죠. 물질과는 거꾸로. 점점 더 복잡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이 창조되는 역사죠. 우주라는 것은. 진화라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우주의 생명체라는 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점점 더 복잡하고 풍부한 존재로 발전해나가는 역사죠. 그러니까 물질성을 한 차원으로 이야기 했지만, 그 안의 물질차원과 생명차원은 상당히 다른 거죠. 그리고 생명차원을 전제하지 않으면 개체들은 성립할 수가 없죠. 물질만 있으니까. 여기서 내가 quality가 없어진다는 말을 조금 더 과학적으로 하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quality가 없어지는 거죠. 이것이 물질의 흐름인데, 이런 물질의 흐름과 반대방향으로,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 생명이죠. 베르그송이 유명한 말이 있죠. 생명이라는 것이 뭐냐? “생명이라는 것은 엔트리피의 사면(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운동이다.” 마치 연어처럼. 엔트로피는 그 사면에서 모든 것을 죽음으로 끌어내리는 거죠. 여기서 생명이 물질의 엔트로피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오는 것들이 개체들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철수든 뽀삐든 저 개미든 소나무든 모든 개체들은 물질과 생명의 투쟁의 결과에요.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는 물질과 진화의 법칙에 따르는 생명의 투쟁이 결과들이죠. ◆ 인식론적 관점으로 본 인간존재론
▲ 유전자 결정론 vs 주체성 그렇다면 그 엔트로피라는 물리법칙과 진화라는 생명법칙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복잡하고 흥미로운 것이죠. 개체라는 것은 생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물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은 생명의 저장고에 불과한 것이에요. 예컨대 여기 아버지, 아들, 손자가 있다면, 그 개체들은 뭐냐? 생명을 운반하는 그릇이죠. 정말 이 세계의 주인공은 개체들을 통해 옮겨가는 어떤 놈이고, 개체들은 그 놈이 머물다 건너가는 징검다리들이죠. 그렇게 보는 입장이 유전자 환원주의야, 유전자 결정주의. 예컨대 어머니와 아버지의 합작으로 나에게 A라는 유전자를 줬어. 그리고 내가 결혼해서 A란 유전자를 넘겨줬다면, 주인공은 A란 놈이고 개체들은 뭐냐? A를 운반하는 통로죠. 유전자 결정론이죠. 이 세상의 주인공은 유전자다. 개체는 그 유전자가 잠시 빌리는 저장고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개체는 별 게 아니지. 그런데 그 반대 입장에서 보면, 각 개체들한테는 '나'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죠. 이 '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유전자로도 형상으로도 물질로도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거지. 개체 입장에서 볼 적에 그냥 나는 나죠. 자기가 철수이면 나는 그냥 철수인 거야. 나는 무슨 에너지도 아니고 이데아도 아니고 신의 창작품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죠. 나는 그냥 나죠. 그것이 뭐냐 하면 주체성이죠. 나의 주체성(subjectivity). 이게 개체를 바라보는 양 극단이에요. 개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물질이나 에너지, 유전자가 실체고 개체는 그 실체의 그릇일 뿐 이라는 것이 하나의 극단적 입장이고, 또 하나의 극단적 입장은 뭐냐 하면 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거지. 나는 그냥 나라는 거지. 웃고 울고 화내고 기뻐하고 이야기하고, 심지어 나는 유전자라고 말하는 그것도 나인거지. 또 나를 없애려는 것도 나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것도 나지. 내가 나를 버리려고 애쓰는 거 아냐.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주체가 제1원리죠. 모든 사고라고 하는 것이 이 양극단 사이에서 움직이는 거죠. 여러 입장들이. 재미있는 것은 생물학은 생물학인데 유전자 결정론과는 조금 다른 입장, 상당히 다른 것이 면역학의 입장이에요. 면역에서 보면 생물학에서도 ‘나’가 핵심이다. 철수한테 다른 이물질이 들어가면 반발하죠. 면역이 작동하죠.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봐도 개체성이 중요하다는 거죠. 면역을 통해서 자와 타가 구별되죠. 생물학 내에서도 개체를 중시하는 입장이 면역의 입장이에요. ▲ 사회적 주체성 vs 결정론(자연과학적 결정론, 사회적 결정론)
또 하나는 인간은 생물학적 주체성, 면역을 넘어서 사회적 주체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주체성은 자연과는 다른 사회세계, 문화세계를 만들어가면서 이 세계를 만들어간다. 내가 생물학적으로 어떤 면역을 갖고 있고, 어떤 호르몬을 갖고 있고 등등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죠. 내가 어디서 태어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있고 등등 인간으로서 또 다른 주체성을 갖고 있죠. 그런데 그 주체성도 뭐냐 하면, 또 두 개로 갈려요. 존재론적으로 이야기할 때 물질로 환원하는 입장과 ‘나’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듯이,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도 나를 강조하는 입장과 사회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어요. 그러니까 전자가 자연과학적 결정론이라면 후자는 일종의 사회적 결정론이죠. 한 인간의 주체성은 결국 그의 사회적 존재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지역에서 태어나서 어떤 언어를 배우고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부모 밑에서 자라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자연과학적 결정론이나 사회과학적 결정론은 똑 같죠. 그 개체를 고유한 것으로 보지 않고 어떤 객관성으로 환원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자연과학적 결정론은 자연과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죠. 유전자니 뭐니 하는 걸로. 사회과학적 결정론은 사회과학으로 환원시키는 거죠. 둘 다 공통적으로 결정론적이에요. 자연과학적 결정론에도 여러 가지가 있죠. 개체를 유전자로 환원시키는 사람, 물질로 환원시키는 사람, 에네르기로 환원시키는 사람 등 많죠. 사회과학적 결정론도 마찬가지에요. 윤리에 의한 결정론, 사회에 의한 결정론, 계급에 의한 결정론, 언어에 의한 결정론 등등 많죠. 그런데 또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나를 강조하는 입장이 또 있죠. 나를 아주 고유한 개별성, 고유한 주체성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나를 자연과학적이든 사회과학적 이든 결정론적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 거죠. 이 결정론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그런데 전자는 너무 유아론적이고 후자는 너무 환원론적이다. 우리 삶의 진실은 그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 주체성과 객관성
예컨대 푸코는 생의 전반에 걸쳐 한 개체가 어떻게 한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결정되는지를 많이 연구했죠. 특히 ‘지식과 권력’에 의해서. 그런데 생의 말년에 가면 주체가 그 그런 객관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주체의 문제라고 보았다. 인간이라는 것이 객관성 속에서 살아가지만 주체가 객관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객관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개별 주체의 문제라는 거죠.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결정되죠. 이미 이 말에 의해서, 사회풍습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결정되죠. 자연과학적으로 말하면 물질에 의해 결정되는 거죠. 그러나 그런 것을 어떻게 내면화하는가는 일관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체성에 따라 생각을 바꾸기도 하죠. 어쨌든 객관성과 주체성 문제, 객관적 세계와 인간 주체의 문제는 인간이 영원히 사유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죠. 객관적 환원주의로 너무 가면 인간 고유의 것을 무시하게 되고, 인간을 너무 고유한 것으로 보면 너무 순진한 발상이 되기 쉽죠. 사실 인간은 객관적 조건에 의해 많은 부분 결정이 되죠. ▲ 영혼론
자연전체를 놓고 인간을 생각할 때에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혼, 정신, 의식, 마음, 주체성, 이성, 사유, 감정 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동물들, 다른 존재와 비교할 적에 인간의 특징은 이런 것들에 있다. 물론 언어라든가 문명이라든가 사회라든가 이런 것들을 들 수 있죠. 만약 인간한테 이런 차원이 없다면, 그것을 마음이나 영혼, 정신 등등 뭐라 부르든 간에 인간이 물리적 존재이기만 하고 그런 차원이 없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거죠. 그래서 옛날부터 형이상학내지 존재론의 가장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가 바로 영혼론이에요.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 3개를 보통 Metaphysica(형이상학), Physica(자연철학), De Anima(영혼론) 이 세 가지를 들죠. 형이상학은 이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구조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Physica는 지금으로 말하면 자연과학이죠. 자연과학 중에서 원리론이죠. De Anima, 영어로는 on the Soul이라 그러죠. 영혼론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다루죠. 동양으로 말하면 심(心)내지 성(性)을 말하죠. 그래서 De Anima, Psyche, 영혼이라는 것은 동양에서는 심 또는 성, 심성을 다루는 것이 존재론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의 자기이해죠. 이런 것을 이야기하다보면 자연스레 다른 동물들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가게 되죠. 다른 동물들과 인간의 관계가 무엇인가? 인간을 전혀 다른 존재로 보면 너무 인간중심주의적이죠. 사실 기본적인 것은 다 똑같은데 말이죠. 그렇다고 너무 똑같이 보면 인간의 고유성을 이해할 수 없게 되죠. 문화를 건설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등등. 이것도 역시 인간의 고유성과 환원주의 사이에서 많은 입장들이 있죠. 이런 문제는 워낙 중요해서 웬만한 철학자들은 다 건드리게 되요. 플라톤에서 오늘날 들뢰즈까지 이런 문제가 다루어져 왔죠. ▲ 이원론
플라톤의 이원론이 가장 기본적인 입장이죠. 몸과 마음, 신체와 정신은 전혀 다른 실체다. 그런 입장은 근대에 와서 데카르트로 이어지죠. 데카르트에 따르면 몸은 res extensa, 영어로 extended thing, 연장, 외연을 가진 존재이고, 정신은 les cogito, 사유하는 존재죠. 조심할 것은 ‘사유하는 존재’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에요. 데카르트가 cogito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꼭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느끼는 것, 감정도도 포함됩니다. 보통 cogito하면, ‘I think’라고 번역하는데 좁은 번역이죠. ‘I think’만이 아니죠. 나는 생각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고, 회의하기도 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죠. 하여튼 데카르트에게서 중요한 것은 이 사유 실체인 les Cogitans와 연장을 가진 실체인 les extensa는 구별된다는 거죠. 그리고 이 les extensa는 기하학으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죠. 심지어 데카르트는 맛까지도 기하학적으로 설명하죠. 약을 먹으면 왜 쓰냐? 약 입자가 뾰족하게 생겨가지고 혀를 콕 찌른다는 거지. 무지개는 왜 뜨냐? 빛의 입자 때문에 그렇게 생긴다는 거죠. 이 우주를 완벽하게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인간의 영혼, 마음은 연장이 없는 존재죠. 인간의 마음은 몇 센티인지 몇 그램인지 말할 수 없다. 완전히 다른 실체다. 전혀 구분해서 봐야한다. 이런 것이 real distinction, 실재적 구분이죠. ▲ 껍질 속의 유령
그런데 이런 식의 이분법에는 무슨 문제가 생기냐 하면, 몸과 마음의 관계는 도대체 뭐냐고 묻게 되죠. 만약에 전혀 다른 실체라면 어떻게 서로 관계를 어떻게 맺을 수 있겠어요?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관계 맺는 두 존재가 적어도 공통의 지표 위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인데 말이죠. 완벽하게 다른 실체라면 관계를 맺을 수가 없죠.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보통 이런 데카르트적인 생각을 ‘ghost in the shell’, ‘껍질 속의 유령’이라고 표현해요. 예컨대 여기 사람이 있다면, 어쨌든 몸도 마음도 여기 그 사람 안에 있어야 하죠. 그런데 몸과 마음이 완벽히 다른 실체라면 어떻게 같이 있겠어요? 그러면 마음에 대해서 몸은 껍질 이상 아무것도 아니겠죠. 내가 마음이라면 이 교실이 몸이겠죠. 내가 몸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이 교실을 나가면 되죠. 여기 껍질이 있고 마음이라는 것이 이 안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 몸, 껍질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것이죠. 다른 실체니까. 이 영혼에서 보면 육체는 그냥 껍질에 불구한 거죠.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껍질에 불과한 거죠. 거꾸로 말하면 이 마음은 뭡니까? 이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물질성이 전혀 없는 거야. materiality가 완벽하게 없는 거죠. 일종의 ghost같은 거죠. 그래서 이걸 보고 ‘ghost in the shell’ 그래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영화 <공각기동대>가 있어요. 이 영화의 영어제목이 바로 ‘ghost in the shell’이죠. 영화 보면, 몸과 마음이 완벽히 따로 놀죠. 여기서 마음이 뭐죠? 정보의 집적체, bit의 집합체죠.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형사가 뭐죠? 알고 보니 이놈이 프로그램이죠. 그러니까 컴퓨터 프로그램이 하나의 개체였던 거야.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자기를 뭐라고 소개해요?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하나의 생명체다’ 라고 하죠. 그러니까 그 정보는 껍데기와 완전 별개지. 예를 들어서 내 속에 있다가, 내가 껍질이고 인형이다 말이지, 내 안에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코드를 꽂으면 그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거지. A라는 껍질에서 B라는 껍질로 옮겨가는 거죠. 이 영화에서는 몸과 마음이 완벽히 다른 실체죠. 그래서 그 영화의 영어제목이 ‘ghost in the shell’인 거죠. 그 영화 꼭 보세요. ▲ 유물론
그런데 이원론으로는 몸과 마음의 관계가 도저히 설명이 안돼요. 그래서 이원론과는 다른 입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물론이에요. 유물론, 말 그대로 정신, 마음 영혼은 원래 실체가 아니다. 이 세상의 실체는 물질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물질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 정신이다 이거야. 물질에 딸려 나온 것이 정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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