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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구조주의와 라캉

하나님아들 2020. 4. 1. 00:02

제7강 구조주의와 라캉

◆ 정신분석학-자크 라깡


▲ 자크 라깡

주체의 새로운 얼굴에 대해서 알아보죠. 지난번에 구조주의에 대해 이야기 했었는데, 구조주의 사고라는 것은 근대의 사상들이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다. anthropocentrism.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삼음으로써 거기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고, 주체라는 것의 상당부분이 무의식적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구조주의의 중요한 한 테마죠.

자크 라캉(Jacques Lacan)같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구조주의 이런 흐름에 있으면서도, 주체라는 것을 단지 극복해야할, 좀 강하게 표현하면 소거해야할 그 무엇으로가 아니라, 주체라는 문제를 훨씬 더 집중적이고 세밀하게 파고든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가 주체라는 문제을 파고든다는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계승하고 있죠.

프로이트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의사였고 철학적인 문제의식이나 지적배경은 희박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으면서도 철학적인 문제의식으로 이어갑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을 어떤 철학적 담론으로 변경시켜나가고, 반대방향으로 말하면 철학의 문제들을 정신분석학을 동원해서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사람이죠.

그런 면에서 현대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에요. 프로이트와 라캉 이후에 지젝(Slavoj Zizek)이나 그의 슬로베니아 동료들을 통해서 라깡의 사상이 오늘날 좀 더 풍성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죠. 오늘은 구조주의를 거친 이후의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라는 문제의식으로 라깡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 라캉의 한국도입

라캉은 사르트르라든가, 메를로 퐁티, 레비 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활동했죠. 우리느낌으로는 사르트르는 아주 옛날 사람 같고, 라캉은 요새 사람 같은데, 사실은 동시대 사람이에요. 우리나라에 관심을 끌게 된 순서가 훨씬 이전에, 전쟁 이전, 1945년 이전부터 유명해서 세계적으로 논의가 되었고, 라캉 같은 경우는 빨리 잡아봐야 1980년대 말에나 되어야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논의가 된 사람이죠.

우리에겐 한참 뒤의 사람 같은데 사실은 동시대 사람이죠. 사르트르는 국내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죠. 내가 대학 다닐 때가 80년대인데 그때는 라캉이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어떤 때는 라캉이 영어인줄 알고 레이컨으로 읽히던 때도 있었죠.

라캉은 상당히 늦게 들어왔고, 어떻게 보면 지금 라캉이 열광을 받고 있는데, 왜 과연 그럴까?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이 보통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삶의 방식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이야기가 되죠. 유럽 같은 경우도 맑시즘이 쇠락 하고난 후에 꼭 프로이트와 니체가 등장하는 것이 어찌 보면, 마치 무슨 법칙이 있는 것처럼, 우리 같은 경우도 80년대 맑스였다가 지금 프로이트와 니체가 많이 이야기가 되죠. 무슨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세계사적으로 항상 이런 흐름이 있어요. 여겨지고 있다. 우리는 뒤늦게 그런 과정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죠.


▲ 라캉의 출발점 - 정상과 비정상

라캉 사고의 출발점 중에 하나는 정상과 비정상이죠.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는 이미 19세기에 많이 논의된 거예요. 우리가 보통 병리학(pathologie)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죠. 19세기에 각종형태의 인간과학이 등장하죠.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 등등 수많은 형태의 인간과학들이 등장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과거의 종교나 형이상학에서 규정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죠. 그럴 때 등장했던 중요한 문제가 정상적인 의미의 인간이 뭐냐는 거죠.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적에 정상적인 인간을 떠올리죠.

그러면 정상적인 인간은 무엇인가? 결국 정상적인 인간을 병리적인 인간과 연관하여 사유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면서 병리학이 각광을 받고, 프로이트 역시 프랑스로 유학하여 병리학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이죠.

깡길렘이나 푸코는 병리학을 주로 인식론적, 과학사적 방식으로 접근했죠. 그러니까 그런 과학이 왜 탄생했느냐? 어떤 맥락에서 그런 식의 담론들이 이 사회에 등장하게 되었느냐? 그리고 병리학은 정상과 비정상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등등.

또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저런식의 담론들이 어떤 권력이나 사회적 메커니즘들을 함축하는가? 이런 방식으로 끌고가죠. 가장 유명한 책이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란 책이죠. 그리고 조금 어려운 책이지만 깡길렘의 <정상과 병리학>이라는 책도 있어요.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둘 다.

거기에 비해서 라캉은 인식론적, 과학사적 접근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굳이 말한다면 존재론적으로 접근해 들어간 사람이죠. 라깡의 대전제는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기보다는, 인간 전체가 다 우리가 흔히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바의 것들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들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헤겔식으로 말하면 원래 인간은 아픈 존재다. 어떤 병에 걸렸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란 자체가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이 우주와 합일하지 못하고 다른 존재들과 겉도는 그런 존재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인간은 원초적으로 아픈 존재다. 그런 점에서 볼 적에 라캉의 사고는 레비트로스처럼 투명하고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구조, 마치 자연과학에 버금가는 그런 구조를 찾아서 그 안에서 주체를 해소시키려는 작업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띠게 되죠.

라깡 역시 구조주의자고, 어떤 면에서는 합리주의자고, 계몽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라깡의 사유 속에는 인간 존재의 그 복잡미묘한 굴곡들에 대한 사유가 있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식의 구조주의와는 상당히 성격을 달리한다는 거죠.


▲ 무의식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무의식인데, 라깡의 공헌을 약간 도식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프로이트를 이으면서도 거기에 구조주의의 성과를 도입하는 측면이 있다. 이것은 마치 알튀세가 마치 마르크스를 이으면서도 구조주의적 마르크스를 전개하듯이, 쉽게 말하면 라깡은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을 전개한 거죠.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이라는 것은 어떤 장소에요. 이것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실체, 물리적이든 아니든 어떤 형태의 실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무의식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럼 무의식은 뭐냐? 어떤 이론적 개념, 이론적 대상이에요. 마치 여러분은 에네르기를 본적은 없죠.

그렇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에네르기라는 가설을 가지고 들어가는 거죠. 많은 것들이 그렇죠. 실증주의는 참 단순한 생각이죠.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세계에서 심오하게 발견해낸 것들 치고 실증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실증할 수 있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검증할 수 있는 거지.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과의 복잡한 연관성 속에서 설득력을 갖추는 것이지, 그것이 즉물적으로 검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에너지조차도 경험 못 하죠. 에너지라는 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이 발현되는 방식을 경험한 거죠. 그것을 보고서 에너지를 이야기 하는 거죠. 무의식도 마찬가지에요. 무의식을 보여 달라는 말은 우문이에요.


▲ 징후

그러면 무의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근거는 뭐냐? 어떤 근거로 무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정신분석학의 제 1의 원리는 ‘억압된 것의 회귀’죠. 이게 정신분석학의 제 1원리에요.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징후가 나타난다. 그러면 실증적인 출발점은 징후에요. 무의식이 아니에요.

무의식은 이런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고, 실증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징후죠. 히치콕의 영화 중에 <마니(Marnie)>라는 영화가 있죠. 여주인공이 부자인데 자꾸 도둑질을 해. 부자인데 왜 도둑질을 해? 그런 것이 징후죠. 우리도 그런 징후를 하나씩 다 갖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꼭 노란 백묵만 쓰는 사람이라든가, 수건을 똑바로 안 걸면 잠이 안 오는 사람, 어떤 색깔을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나쁜 사람도 있고 자기는 그런 말 안하려고 하는데 그런 말이 나오는 경우도 있죠. 유명한 예가 있죠. 오스트리아의 국회의장이 ‘개회를 선언합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폐회를 선언합니다’라고 한 것도 있죠. 이런 것들을 뭐라 그래요? 징후라 그래요.


▲ 억압

징후란 뭘까? 그래서 징후 다음에 나온 개념이 억압이죠. 징후라고 하는 것은 뭔가 억압된 것이 있다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어떤 경험을 했는데, 그 경험이 자기의 투명한 의식 속에 있었다면 이렇게 안나왔겠지. 오스트리아 국회의장이 ‘빨리 끝내고 싶은데’라고 스스로 의식했다면 폐회하고 싶지만, ‘폐회를 선언합니다’라고 하지 않았겠죠.

<마니>에서도 여주인공이 자기가 도벽이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알고 있다면 안 했겠죠. 그런데 어떤 경험을 했는데 그 경험이 내 의식 속에서 투명하게 정리가 안 되고 억압된 거죠. 눌려있는 거야. 그렇게 눌려있는 장소가 무의식이에요. 억압되어 있는 장소가. 그래서 무의식은 장소에요.

그런데 실재론적으로 말하면 무(無)에요. 어디서 발견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무의식은 무의 장소(non-place)에요. 무의식 속에 경험이 억압되어 있다가 그것이 나타나는 게 징후죠. 그래서 ‘억압된 것의 회귀’죠. 또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죠. 그러니까 무의식은 의식의 공백이요 의식의 배면이죠.

그런데 이 대목에서 본격적으로 라캉식의 사유를 접하게 되는데, 라캉에게서 무의식이란 것이 왜 생기냐? 무의식은 어떤 경험이 억압되면 생기는 거죠. 그런데 그 경험을 개별적인 경험이나 특정한 경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경험,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무의식은 어떤 억압적인 경험에서 생겨난 것인데, 앞에서 든 국회의장이나 마니의 예는 개별적인 예들이죠. 라캉이 지금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반드시 겪게 마련인 어떤 경험을 말하는 거죠.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무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뭐냐? 바로 언어의 세계에 진입하는 경험이에요.


▲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

언어의 세계는 다시 말해 사회죠. 또는 세상, 문화 등등. 그래서 인간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문화적 차원으로 진입한다는 이 사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경험이에요. 가장 근본적인 경험이죠. 그리고 언어의 세계에 진입하는 이 경험이 라깡에게는 엄청나게 어렵고 복잡하고 힘든 경험이에요.

그런데 어릴 적엔 이 경험은 잘 모르겠지. 이것이 시간으로 말하면, 6개월에서 18개월까지죠. 6개월 지나면 아기가 뭘 합니까? 옹알이를 하죠. 18개월 지나면 뭘 합니까? 서서히 말을 하죠. 6개월과 18개월 사이에 인간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일이 벌어진다는 거죠. 아기는 잘 모르죠. 엄청나게 많이 벌어진 그 경험이 우리 무의식 속에 남아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불현듯 튀어나온다는 거죠.


▲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는 과정

그런데 언어라는 경험의 선(생후 6개월, 옹알이 시기)을 넘어서기 전의 세계를 라캉은 상상의 세계, 상상계(imaginaire)라고 한다. 그리고 언어라는 경험의 선(생후 18개월)을 넘어선 세계를 라캉은 상징계(symbolique)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언어라는 경험의 선을 넘어간다는 것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는 거죠.

상상계는 엄마와 아기의 연속적이고 합일된 이자(二者)관계의 세계에요. 상징계는 엄마와 아기의 연속적 세계가 갈라지면서 불연속이 되고, 그 사이에 제3자가 들어오는 삼자(三者)관계의 세계에요. 엄마와 나 외에 아빠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세계가 바로 삼자의 세계죠.


▲ 정신분석학 : 문자 그대로의 의미 vs 은유적인 의미

그런데 정신분석학의 세계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하고 은유적인 의미가 계속 오락가락하는 세계에요. 그래서 정신분석학 책을 읽다보면 굉장히 헷갈릴 때가 많죠. 잘못 들으면, 말놀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인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론을 전개할 수도 있고 아주 은유적으로도 전개할 수 있어서 혼돈스럽다.

예를 들어서, 문자그대로의 세계에서 엄마와 아기 관계는 이자관계이고, 나중에 아버지가 들어오겠지만, 안 들어올 수도 있어요. 아빠가 실업자고 엄마가 직장을 다닌다면 아버지가 아기를 보겠죠. 그리고 옛날에는 반드시 아기에게 엄마의 젖을 먹였단 말이야.

여성에게 젖이 있다는 이유가 아기는 엄마에게 붙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죠. 만일 아기를 낳다가 엄마가 죽으면, 아빠가 아기를 안고 쫓아다녔죠. 젖을 얻어 먹이려고. 그러니까 대부분의 돈 있는 사람들은 유모를 쓰죠. 말 그대로 유모, 젖을 주는 사람이죠. 유모라는 개념이 그렇게 해서 생긴 거죠.

지금은 다 우유를 먹이거든. 엄마들이 젖을 안 먹이거든. 그리고 요즘 엄마들은 젖이 잘 나와. 건강이 안 좋기 때문에. 그래서 앞에서 말한 실업자 아빠가 우유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아빠가 엄마일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거꾸로 엄마가 아버지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또 현실로 본다면 한국에서는 아기를 할머니가 보는 경우가 많거든. 요즘은 직장 다니는 여자들이 많다보니 자기가 잘 안보고 친정어머니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죠. 그러면 대충 외할머니가 아기를 키우는 경우가 많죠.

그러니까 라캉의 이야기를 너무 문자 그대로만 이해해서는 안돼. 라캉의 모든 이야기는 구조(structure)를 이야기 하는 거야. 그런데 그 구조가 문자 그대로 현실에 잘 맞는 경우도 있고, 즉 아기에게서 엄마가 먼저 등장하고 아빠는 나중에 등장하는 경우죠.

이 경우가 훨신 많겠지만, 안 그런 경우도 있죠. 예컨대 엄마가 아기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훨씬 더 복잡하죠. 일단은 구조를 말하는 거죠. 물론 그 구조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경우를 모델로 하고 있죠. 그러나 그 구조자체를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다.

 

◆ 정신분석학 - 자크 라깡(거울이론과 상징계)


▲ 주체의 형성

이렇게 아기가 언어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 상징계에 진입한다는 것, 거기서 많은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라캉 정신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사유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캉이 주력하고 있는 문제는 결국 주체의 형성이에요.

근대철학자들처럼 방법적 회의를 통해, cogito, 나는 생각한다. 넓게 말해 나는 정신활동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사유하는 나를 끄집어낸다거나, 칸트처럼 애초에 인간이 보편적,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험적 주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의 문제의식은 주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주체라는 것이 통짜로 주어진다면, 그 주체는 당연히 보편적이고 초시간적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주체라는 것이 구체적 시간 속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나간다면 그 형성과정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주체는 달라지지 않겠어요? 빵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죠. 그러면 밀가루반죽을 얼마나 했느냐, 불을 얼마나 세게 했느냐, 시간을 얼마나 했느냐 등등에 따라서 빵이 당연히 달라지겠죠.

우리 주체도 마찬가지야. 우리 주체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죠.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남자의 주체와 여자의 주체는 다른 겁니다. 그리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적에 어떤 과정을 겪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달라질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라캉의 주체 개념은 근대적 주체 개념과는 상당히 판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 동일성의 확보

처음에 우리는 간난 아기 때 조각난 몸의 환상을 가진다고 해요. 그러니까 어린 아기는 마치 우리가 한여름 밤에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자기의 몸이 조각나 있는 환상을 가진다는 거예요. 자기 몸은 하나인데 자기 팔다리가 잘려져 있는 그런 식의 환상을 가진다는 겁니다.

이것은 라캉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구결과인데요. 물론 이것은 있는 그대로 실재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죠. 하나의 가설이죠. 이렇게 조각난 몸의 환상을 가진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나는 하나다!’ 팔 다리 머리가 조각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라는 사실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죠.

그것을 뭐라 하냐면 identification, 자기의 동일성을 만드는 거죠. 동일화죠. 자기가 조각나있다는 환상을 극복하려면 나의 identity, 나는 하나다, 나는 동일하다는 identity를 확보해야겠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각난 몸에 환상을 극복하여 자기 identity를 형성하는 과정은 오로지 자기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요. 여기에서 헤겔적인 테마가 등장하죠.


▲ 라캉과 헤겔

재미있는 것은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등 많은 현대철학자들이 헤겔에 대해서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라캉은 헤겔을 자기 사유의 중요한 원천으로 삼고 있어요. 그것이 특징이죠. 그러니까 스피노자에서 맑스로 가는 라인, 스피노자에서 니체로 가는 라인, 이 두 라인이 현대 현대사유의 기본 흐름인데, 라캉은 스피노자에서 헤겔을 경유하고 있어요.

이것은 철학사적인 맥락이고 라캉이 헤겔에게서 무엇을 끌고 오느냐? 헤겔의 중요한 테마는 뭐냐 하면 자(自)라는 것은 자(自) 안에서는 성립이 안 된다는 거야. 항상 타(他)와 부딪쳐서 돌아올 적에 자(自)가 성립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자기라는 것은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어요. 타자와 부딪쳐서 자(自)가 흔들리고 깨지겠죠. 어떤 식으로든. 타(他)와 관계를 맺으면 자(自)의 identity를 확보할 수 없겠죠. identity가 무너지죠. 그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서 나라는 것이 성립한다는 거죠.

‘나’라는 identity는 관계를 통해서 계속 흔들리면서 만들어가는 거예요. 특히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정’이죠. 인간의 삶이란 인정을 둘러싼 투쟁이다. 헤겔은 이것을 두고 ‘인정투쟁’이라 그래요. 쉽게 생각해서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남들이 나를 인정해줄 때죠.

맛있는 것을 먹을 때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인정해줄 때죠. 중요한 것은 인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저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길 원하는 것이고, 저 사람은 내가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거죠. A는 B가 나를 인정해주었으면 하고 욕망하는 것이고, B는 A가 나를 인정해주었으면 하고 욕망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생이라는 것은 인정을 둘러싼 투쟁이다. 그리고 이 자(自)라는 것은 인정투쟁을 통해 성립할 수밖에 없다. 인정투쟁을 거치지 않은 자기는 말 그대로 자기의 환타지에 불과한 거죠.


▲ 거울단계

어쨌든 라캉은 이 사유구도를 이용하는데, 아기가 조각난 몸의 환상을 극복을 하고, 자기라고 하는 것, 아직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identity라고 하는 것,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생물학적인 원초적 identity는 반드시 타자를 경유해야 하는 거죠. 여기서 타자는 거울과 같은 거죠.

내 얼굴에 때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는 나는 안 보이는 거지. 거울을 보고 타자를 경유해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확인하는 거지. 그래서 라캉은 이 단계를 거울단계(mirror stage)라 그래요. 내가 내 안에서 확인할 수 없는 거지.

타자라는 거울, 그것이 문자 그대로 거울일 수도 있고, 엄마일 수도 있죠. 우리가 아기를 키울 때 일상생활에서 앞에서 말한 헤겔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모빌이 바로 그거죠. 애가 누워서 모빌을 본다 말이야. 그러면서 자기를 스스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모빌을 보면서 모빌의 통일성을 경유해서 자기를 끼워 맞추는 것이죠.

자기가 이렇게 조각나 있는데, 엄마의 통일성을 보고서, 또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통일성을 보고서, 또는 모빌의 통일성을 보고서 자기의 조각을 끼워 맞추는 거죠. 환상을 벗어나는 거죠. 이게 동일화의 과정이죠. 그래서 모빌을 걸어주는 거죠. 이런 단계가 뭐냐 하면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과해서 자기의 identity를 확보하는 거울단계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까지는 본격적 의미에서 주체가 되는 단계는 아니다. 왜? 아기는 여전히 어머니와의 이자(二者)관계, 양자관계 속에 합일 되어 있기 때문이죠. 주체가 되려면 그것을 올라서야 하죠. 아기는 엄마와 연속적으로 합일되어 있으니까 아직 나라는 것이 없지. 아직까지 주체란 것이 없는 거죠. 몸의 identity는 확보했지만 주체라기보다는 생성적 존재인 거죠. imaginary한 존재인 거죠.

이 단계는 나르시스의 단계야. 물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보면서 행복해하는 단계, 그래서 물에 비친 그 존재와 자기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단계죠.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인생의 출발점은 오인에서 출발한다고 보았죠. 자기에 대한 오인에서 출발한다는 거죠.

그러던 아기가 상징계에 들어가면서 하나의 주체가 되죠. 그러니까 한 사람의 주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고통스러운 거죠. 어머니와 완벽히 우주적 합일을 하고 있는 이자적 관계에서, 그 관계가 깨지고 불연속이 도래하고, 아버지와 언어와 사회가 등장하면서 주체가 되는 거니까, 주체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 상징계

언어란 타인과의 관계 하에서 성립하는 것이고, 상징계로의 진입은 자기소외 과정이기도 하죠. 상징계로의 진입은 이제 내가 그냥 상징계의 구속을 안 받는 내가 아니라, 또한 내가 상징계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내가 아니라 그 상징계의 룰에 의해서, 상징계의 코드에 의해서,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는 나죠.

라캉이 언어유희를 많이 한 사람인데, ‘nom du pere’, 아버지의 이름으로 인데, ‘이름’이라는 뜻의 ‘nom’은 ‘안돼’라는 뜻의 ‘non’과 ‘농’으로 발음이 같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아버지의 안돼’인 것이죠. 인생이라는 것이 ‘안돼’, ‘금지’로부터 출발하는 거죠. ‘하지마’, ‘나쁜 거야’ 에서 출발하죠. 자기는 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내가 법의 세계, 언어의 세계, 상징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들어간다는 것이죠. 우리 조선시대에는 더 했죠. 그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부터 벌써 그 아기는 ‘아버지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 있는 거죠. 전주 이씨냐? 어디 이씨냐? 김씨냐? 박씨냐? 머슴의 아들이냐? 양반의 아들이냐? 라는 ‘아버지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 있는 거죠.

이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안돼’죠. 그러니까 벌써 내가 상징계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나’라는 것과 ‘너는 이렇게 해야 돼’하는 상징계가 분열하는 거예요. 참 재미있죠. 인간이 주체가 되는 출발 자체가 분열에서 출발해. 그러니까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로서의 주체’와 ‘상징계 속의 나’로서 갈라지는 거죠. 그러니까 상징계로 들어가면서 나는 비로소 주체가 되죠.

그런데 이 주체가 되는 출발 자체가 분열로부터 시작하죠. 무슨 이야기냐? 상징계의 룰,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는 칠판으로 불러야 하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이 칠판일 이유는 없는 거죠. 칠판을 백묵이라 부르고, 백묵을 칠판이라고 불러서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러나 내가 바꿔서 부르고 다니면 바보취급 당하겠지. 그리고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죠. 그러니까 내가 상징계로 들어가는 순간, 내 주체는 이미 상징계의 주체야. 어느 집 자식, 남자 애, 아니면 여자 애, 어느 지방 사람, 이미 상징계에 들어가는 순간으로부터 나는 ‘이름’을 피할 수 없어.

내 모든 것은 이름에서 시작돼요. 내가 경상도냐 전라도냐, 남자냐 여자냐, 어느 집 자식이냐, 어느 동네 사람이냐, 거기서 이미 ‘나’는 결정된 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상징의 집합이죠. 예컨대 A라는 사람이 있다. A는 남자거나 여자겠죠. 그리고 한국아니면 미국, 아니면 포르투칼이겠죠. 거기다 키 큰 사람 아니면 작은 사람이겠지. 거기다 기독교도 아니면 불교도 아니면 무신론자 겠죠.

이처럼 한 인간은 상징의 집합이지. 저 사람은 뭐고 뭐고 뭐고 뭐고로 이루어진, 수백 개 수천 개의 상징의 집합이죠. 그런데 분명히 내가 그 무수한 상징의 집합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고 하는 게 그 상징계의 집합으로 완전하게 해소가 되는 것 같지 않죠. 만약 완전히 해소가 된다면, 나는 아무런 욕망도 없는 인간이 되겠지. 아무런 불일치도, 소외감도, 불안도, 미래에 대한 꿈도 없고 딱 정지 되겠지. 그대로.

나는 뭐고 뭐고 뭐고 뭐고 라는 상징의 집합으로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그 뭔가가 있는 거지 나한테. 그리고 이 상징의 집합인 ‘나’와 그것으로 해소되지 않는 ‘나’가 내 인생에서 끝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상징계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그 상징계는 이미 나의 타자야.

내가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잖아. 내가 이것을 칠판으로 부르자고 한 게 아니잖아. 내가 원해서 그 많은 나라 중에서 한국에 태어난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삶 자체가 나에겐 타자인 거야. 애초부터. 주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소외에서 출발하는 거지.

이제 아기는 상징계라는 타자, 사회라는 타자 속에 들어가 동일시의 환상에서 깨어나 차가운 자기 소외의 장으로 들어선다. 소외의 장으로 들어선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는 거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은 상징계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어릴 적에 부모가 ‘너는 커서 거지가 되어야해’하는 사람은 없죠. ‘너는 커서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어야 해’ 라고 하는 것은 이미 상징계라고 하는 ‘이름-자리의 체계’, 언어로 말하면 ‘이름’, 그러니까 과장 부장 대령 소령 중령이든 뭐뭐든 간에 ‘이름’이고, real하게 말하면 ‘자리’죠. 그 신체가 있는 자리.

어떤 건물에서 회장이 지하실에 있는 거 못 봤죠. 제일 위층에 있잖아 수위가 제일 아래층에 있고. 그러니까 몸으로 하면 ‘자리’고, 언어로 하면 ‘이름’이죠. 그래서 상징계는 이름-자리의 시스템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나는 상징계 속에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거죠. 결혼할 적에도 저 사람과 나의 관계보다도, 저 사람과 나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를 신경 쓰는 거죠. 결혼이라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타인의 욕망에 이해 매개된 것이죠. 모든 것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죠.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그 이름-자리들, 사람들은 그 이름-자리들을 따기 위해서 사는 거죠. 소령을 중령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고, 시간강사는 교수가 되기 우해서 사는 것이고, 과장은 부장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고 등등. 다시 말해서 타인의 시선을 매개해서 사는 거죠.

이럴 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선이죠. 눈길. 이름-자리가 나타나는 중요한 방식이 시선이죠. 내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은, 내가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길 욕망하는 거죠. 시선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거죠.

이제 아기는 상상적인 과정을 통과하면서 자기와 타자를 뚜렷하게 구분하면서 하나의 주체가 정립된다. 그러나 그 주체로 정립된다는 말은, 우리가 주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연상되는 주체와는 반대의 것이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미 그 상징계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근대적 뉘앙스의 주체하고는 너무나도 판이한 주체가 형성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