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세계와 국가 그리고 현대정치철학 |
◆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 오늘은 현대정치철학 중에서 오늘날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있고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리좀학(Rhizomatique)과 코뮤니즘(Communism)을 보려고 합니다. 리좀(Rhizome)은 뿌리인데 여러 가지 뿌리 중에 접속이 자유롭고 복잡하게 이어진 뿌리라고 볼 수 있죠. 가지는 뻗어나가는 것이 정해져 있죠. 이것을 tree, 나무형, 수목형이라고 한다면 리좀은 관계(connexion)들이 훨씬 더 자유롭고 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리좀이라고 하는 것은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가 제시한 개념이죠. 현대적 사유의 개념으로 제시한 것이죠. 이 리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리좀학(Rhizomatique)이라고 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노마디즘(Nomadism)이라고도 하죠. 유목적인 것이죠. 그래서 기존의 어떤 정치철학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른 새로운 방식의 삶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죠. 리좀이라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어떤 삶의 모델인데, 리좀이 반드시 긍정적인 방식으로만 진행하는 것은 아니죠. 접속해서 뭔가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갈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안 좋은 방식으로 갈 수도 있어요. 그래서 리좀을 이어가는 코뮤니즘(Communism), 즉 맑스 엥겔스의 코뮤니즘을 이으면서도, 기존의 교조적인 공산주의가 아니라, 리좀학을 전제하는 상태에서 다시 한번 코뮤니즘을 구성해보려는 것이 현대의 코뮤니즘이죠. 그래서 이것을 공산주의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코뮤니즘이라고 음역하죠. 이것은 네그리(Negri)와 하트(Hardt) 두 사람이 제시한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20세기 철학의 총결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주 종합적이고 다채로운 사고를 전개했는데, 들뢰즈는 일종의 철학사가로서 활동한 중후한 사상가고 가타리는 정치활동에 열정을 투자한 정신의학자죠. 두 사람이 1972년에 만나서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을 펴냈는데, 출간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지죠. 제목에서도 시사하고 있듯이 니체가 <안티 크라이스트>를 썼듯이 이 사람들은 <안티 오이디푸스>를 썼죠. 여기서의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오이디푸스’에요. 이 <안티 오이디푸스>를 두고 68혁명의 철학적 형상화하고 부릅니다. 우리가 전 시간에 68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라는 이분법이 무너지고, 전혀 새로운 정치적 지형도가 도래했다고 했죠. 단순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식으로 말하면 1987년 6월 항쟁 이후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책의 제목을 <안티 오이디푸스>라고 한 것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욕망개념을 비판하기 위한 거예요. 전 시간에 라캉을 했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갈 때 겪는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죠. 이렇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상징계로 진입을 하고, 이 상징계에서 가지게 되는 것은 욕망이죠. 다시 말해서 아버지, 어머니, 나라는 오이디푸스 트라이앵글을 거치면서 우리는 거세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 근친상간의 욕망을 제거하게 되죠. 그러면서 상징계에 들어서게 되고, 욕망을 가지게 되는데, 이 상징계에서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기표의 성격을 띤다고 그랬죠. 회사로 말하면 사장, 부장, 과장 이런 것이 기표죠. 기표들이라는 것은 환유적으로 움직인다. 들뢰즈, 가타리는 이런 식의 욕망, 상징계의 기표체계에 포획된, 그러면서 결핍으로 이해되는, 항상 모자라기 때문에 채워야 하는 것, 그러니까 환유죠. 모자라는 것을 계속 채워 나가야 하니까. 그러면서 욕망은 상징계를 돌아다니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프로이트,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상징계에서의 욕망, 환유적인 욕망, 그 욕망이 함축하는 결핍 개념을 아주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 사실 라캉의 사유는 상징계에서 끝나지 않고 실재계로 가죠.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라캉의 실재계는 충분히 소화하고 있지 않아요.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로 겨냥하고 있는 이야기는 상징계에 대한 이야기죠.
그러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왜 저런 욕망 개념을 비판하느냐? 첫째로 그들은 프로이트, 라캉이 말하는 인간 욕망의 형성은 아빠, 엄마, 나라고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속에 가둔다고 보았죠. 인간의 욕망을 넓게 사회적 역사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가족드라마, family romance 안에 가둔다는 거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라고 하는 것을 그런 관점이 아니라, 끝없이 분출하는 생명력, 어떤 결핍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창조하고 만들어가는 창조력, 생명력으로 해석하죠.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라캉의 욕망은 어떤 기표 속에 가두는 것이다. 그런 식의 비판은 넓게 보면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이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구조에 따라 이루어지고, 욕망이라는 것이 기표체계 속에서 움직인다는 견해에 대한 반론이죠. 우리의 욕망이 기표체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새롭게 만들기도 하고 뒤흔들어놓는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의 이런 식의 낙관적 견해 밑바닥에는 바로 68혁명의 체험이 깔려있는 거죠. 우리들의 삶의 방식은 기표들의 체계화다. 이 사람들은 이런 맥락에서는 signification이라는 말을 잘 안 쓰고, signifiance, 기표화란 말이죠. <천의 고원> 번역에서는 이것을 ‘의미생성’이라고 했죠. 이것은 아주 곤란한 번역이에요. 거꾸로 우리의 삶을 ‘기표화’하는 것을 말하죠. 모든 것을 다 기표화하는 것을 말하죠. 그러니까 좀 단적으로 말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이름을 따기 위해서 사는 거지. 대위는 소령 되기 위해서 살고, 과장은 부장되기 위해서 살고 이런 거죠. 그런 기표들의 체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의 욕망은 그 기표들의 체계에 저항하고 구멍을 내고, 적어도 보다 합리적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또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힘으로 보는 거지. 그 기표체계를 떠날 수는 없어요. 떠난다는 것은 낭만적인 이야기지.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욕망은 유교나 무슨 종교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라캉의 결핍도 아니고, 하나의 창조력, 생산의 힘으로 보죠. 이들이 말하는 욕망은 결국 차이, 생명, 역능, 창조, 긍정과 거의 동의어로 볼 수 있죠. 욕망이 고정되는 순간 권력으로 화하죠. 설사 그 욕망이 의미 있는 욕망, 우리의 삶을 바꿔나가는 욕망이라도 그것이 딱 자리를 잡고 고착화되는 순간, 더 이상이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욕망이 아니라 권력으로 화해버리죠. 그래서 말하자면 역능의지, 니체가 말하는 힘의 의지가 권력의 의지로 몰락하는 거죠.
그래서 한 사회는 기존의 삶의 방식, 기존의 코드를 유지하려는 힘과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힘 사이의 영원한 투쟁이죠. 코드는 우리 삶에 홈을 파요. ‘홈패인 공간’이죠.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하고,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 홈을 파버리죠. <영웅>이라는 영화를 보면, 첫 장면에 주인공이 마차타고 궁궐에 들어가잖아. 자세히 보면 마차가 가는 길이 파여 있잖아. 심지어는 마차의 폭을 재서 바퀴의 홈은 판 거죠. 이것이 바로 홈패인 공간이야. 이것은 구상적인 예고, 눈에 보이는 것이고. 우리 삶은 홈이 파여 있죠. 이렇게 이렇게 하도록 홈이 파여 있고, 우리는 그 홈 따라 사는 거죠.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삶은 탈주하는 삶이예요. 원래 삶이라는 것이 그렇죠. 조심할 것은, 오해하기 쉬운데 탈주라는 것은 우리 삶이 이렇게 홈이 파여 있기 때문에 탈주한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이런 당위나 목적 개념이 아니라, 원래 우리 삶은 ‘탈주’인데, 권력이 권력이 홈을 판다는 말이죠. 원래 ‘탈주’라는 말은 낭만적이고 당위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박한 개념이죠. 그런데 원래 권력체계라고 하는 것이 탈주하는 거기에 홈을 파는 거죠. 도시가 하나의 홈이고, 계층이 하나의 홈이고 모든 것에 홈을 파죠.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탈주나 리좀 위에 홈을 파서 코드를 만드는 어떤 힘으로서의 권력과 거기서 탈주하려고 하는 힘을 같이 보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탈주 개념은 조금 다르죠. 원래 탈주는 그냥 존재의 성격이라면, 코드가 이미 파여져 있는 데서 탈주하는 것은 그 코드 전체로부터의 의식적인 탈주죠. 성격이 좀 다르죠. 이런 식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과 코드, 탈주와 홈 파인 공간 이런 것들을 대조시키면서 자기들 사상을 그리고 있죠. 그런데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욕망이라는 것이 어떻게 바뀌어 왔고, 그 욕망을 코드화 하는, 욕망에 홈을 파는 권력의 코드는 어떻게 바뀌어왔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역사철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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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와 자본주의
우리 삶의 홈을 파는, 우리 삶을 코드화 하는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장치는 뭘까?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층을 만들고 홈을 파고 조직을 하는 가장 거대한 장치가 무엇일까? 국가지, 국가. 우리는 전부 다 주민번호가 있고, 세금을 내고, 신호위반을 하면 벌금을 내고, 모든 집은 번지수가 붙어있죠. 우리 삶이 완벽하게 코드화 되어있죠. 그런데 이 수억 수만의 사람들, 사람마다 다 욕망이 다르고 자기 자존심이 있고 자기 삶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코드화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힘이죠. 믿을 수 없는 힘이 있는 거죠. 주민등록증을 내가 왜 가지고 다녀야해요. 내 자유지. 이유가 없잖아. 내 욕망과 아무 상관 없잖아. 내가 사는 집에 번지수를 왜 붙여? 그냥 내가 사는 건데. 그런데 그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일제히 코드화되어있죠. 이 어마어마한 힘이 국가라는 거야. 우리는 힘이 너무 크면 아예 잊어버리죠. 그 강력한 장치가 국가장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삶의 방식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죠. 국가이전, 국가시대, 국가가 흔들리는 시대 세 가지죠. 국가라는 것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가 미개사회죠. 국가가 등장한 시기가 전통사회고. 왕이란 존재가 생겨나고, 관료조직, 성을 쌓고, 문자를 발명하고, 역사를 쓰고, 화폐를 만들고, 세금을 거두고 하는 것이 국가죠. 물론 국가는 지금도 강건하게 있지만 국가라는 것이 예전처럼 우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사회가 도래하죠. 그것이 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왕과 관료조직이 생기고 화폐가 생기면서 국가가 생겨난다. 국가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국가가 등장하기 이전, 국가가 등장한 다음, 그리고 자본주의가 등장한 시대 이렇게 역사를 크게 세 개로 나누어 보죠. 어떻게 보면 역사를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 어찌 보면 사고가 거칠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이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해서 그렇게 보는 거예요. 국가의 힘이 막강할 때는 rhizomatic한 삶이 불가능하죠. 홈이 강력하게 패어있으니 홈을 따라 움직여야죠. 있으나 관점에 따라 이렇게 나눌 수 있다. 국가가 강력할 때는 리조마틱한 삶이 어렵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rhizomatic한 삶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렇게 오랫동안 인간의 삶을 지배해오던 그 코드가 흔들리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물자체도 그렇죠. 성전환 수술을 해서 성도 바꾸는 시대죠. 머리카락 색깔도 바꾸죠. 이제 몇 년 만 더 가면 눈 색깔도 바꾸겠죠. 오늘 무슨 색 낄까? 파란색 낄까 그러겠지. 여자들은 밤에 다닐 때 치한을 방지하기 위해서 손에다가 오늘은 무슨 쇠팔을 낄까? 갈고리. 이러겠죠. 20년만 지나면. 이제는 정치적인 의미에서만 rhizomatic한 것이 아니에요. 이 세계 자체가 rhizomatic한 세계가 되요. 그 rhizomatic한 세계가 지금 가장 실감나는 세계는 인터넷 공간이죠. 진짜 rhizomatic하죠. 그런데 이런 오프라인 세계는 아직은 아니죠. 그래도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세계로 간다는 거죠. 이런 세계가 말하자면 코드가 무너지진 세계죠.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욕망을 찬양하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들뜬 분위기에서 얘기했다면, <천의 고원>에 가면 그런 것들을 여과하고 그것을 더욱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루고 분석한 책이죠. 리좀으로 간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니까. 엉터리로 막 갔다 붙이면 엉망이 되겠죠. 리좀이란 말을 너무 당위적으로 이해하면 안되요. 파시즘도 리좀적인 거죠. 이상한 힘이 결집해서 물결치는 공포스러운 리좀이죠. 또 우리 몸의 암이 굉장히 rhizomatic하죠. 리좀이라고 모두 좋은 게 아니죠. 리좀은 생각의 모델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해가는 가는 주제에 따라 대상에 따라 맥락에 따라 모두 이야기 되어야 하죠. 리좀이라는 그 가치만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향이나 분위기죠. 일종의 logic이죠. 그래서 1980년에 <천의 고원>이라고 하는 책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자세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고, <천의 고원>이 20세기에 나온 책 중에 가장 영향이 큰 책 중에 하나에요. 어쩌면 가장 영향이 클지도 모르겠어요. 얼마나 영향이 큰지 록 아티스트들이 <천의 고원>이라는 음반도 만들었어. 전자음악으로 지금 판매하고 있죠. 나한테 <천의 고원>을 영화로 만든다고 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돈이 많이 들어서 잘 안됐어. 좀 아쉬운데, 언젠가는 영화로 나오지 싶어. 나도 돈만 있으면 만들어보고 싶어, 옴니버스 영화로 해서, 여러분 그리피스가 만든 <Intolerance>란 영화 봤나? <Intolerance> 분위기로 만들면 딱 좋죠. 옴니버스로 해가지고. 이 책은 재미있는 영감으로 가득한 책이죠.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기서 구사하고 있는 많은 개념들이 있는데, <천의 고원>은 개념들의 보물창고야. 별 희한한 개념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주요개념만 100개정도 될 거야. 이 사람들의 철학관 자체가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철학이 뭘 하는 것이냐?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 개념을 통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고, 또 여러 분야에서 그 개념을 통해서 영감을 받는 개념들, 우리 삶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을 이 사람들은 철학의 과제로 보죠.
그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영토화와 탈영토화죠. 영토화와 탈영토화는 기본적으로 동물행동학의 개념이죠. 수달이 진흙, 나무, 돌을 모아서 집을 짓는 것이 영토화 하는 거죠. 사물들을 접속시켜서 영토화하는 거죠. 수달의 몸 자체도 하나의 사물이죠. 이 사람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되게 싫어해. 인간을 구분되어야할 무엇으로 보는 것을 싫어하죠. 인간도 접속하는 무엇으로 봐요. 내 몸은 백묵하고 접속하고 있는 것이고, 내 목소리는 마이크와 접속하고 있는 거죠. 삶이라는 것이 접속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일정하게 접속해가지고 뭘 만듭니까? 영토를 만들죠. 그것이 삶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죠. 그러니까 아이들이 장난감가지고 노는 것을 유심히 보세요. 영토를 구축하는 거 아니야. 레고라든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 소꿉놀이 대부분이 영토를 구축하는 거거든. 너는 아빠 해, 나는 엄마 하께. 여기는 밥그릇, 여기는 부엌이야. 영토를 만들죠. 그러니까 영토를 만든다는 것이 동물적 삶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인데, 영토화에는 항상 탈영토화가 따르죠. 탈영토화는 뭡니까? 어떤 영토에 귀속되어있던 사물들이 떨어져 나와서 다른 것과 접속하는 것이죠. 내가 이 백묵을 칠판과 접속해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받침대로 쓸 수도 있는 거죠. 강의에서 탈영토화해서 받침대로 들어가는 거죠. 거의 무한한 탈영토화가 가능한 사물은 무엇일까요? 무한한 탈영토화를 하면서 움직이는 사물은, 기계는 바로 우리 몸이죠. 아침에는 버스에 영토화 되었다가, 낮에는 다방에 영토화 되었다가, 지금은 강의라고 하는 배치에 영토화 되어 있는 거죠. 끝나면 또 맥주집에 영토화 되겠죠. 이런 식으로 끝없니 탈영토화되죠. 접속의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이 인간의 몸이지. 다른 것들과 접속해서 어떤 배치를 만들어 가는데, 가장 다채롭게 끝없이 접속을 바꿔 가면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 몸이죠. 어찌 보면 산다는 것은 끝없이 그런 배치를 만들어가는 거죠.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끝없이 배치를 바꾸어 나가는 거죠.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 하죠.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전반적인 개요고,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의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를 특화해서, 다루어야할 개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전쟁기계 개념이죠.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삶을 코드화하는 무수한 방식들이 존재하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존재는 국가죠. 이 국가를 현대철학에서는 국가장치라 그래요. 알튀세가 말한 국가장치죠. 법, 국가, 군대, 교육기관 전부 국가장치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구성하는 것, 이 때 ‘외부’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해요. 여기의 바깥, 이런 뜻이 아니라, 국가장치의 ‘외부’는 국가장치에 포획되지 않는 거지. 그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라고 하죠. 여기서의 전쟁은 좁은 의미의 ‘전쟁’이 아니에요. 총칼 들고 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어떤 맥락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런 뜻이 아니라 국가장치로부터의 탈주를 말하는 거지. 예를 들어서 유목민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장치를 만들기를 거부했던 민족입니다. 유목민들은 삶의 거대한 홈을 파서 하나의 국가장치를 만드는 대신에 끝없는 탈주를 하면서 살아갔죠. 그래서 전쟁기계를 대변하는 존재는 유목민들로 보죠. 물론 유목민들이 전쟁기계를 포기하고 국가장치로 포섭되는 경우도 많지. 예컨대 어떤 국가의 용병이 되거나, 칭기즈 칸처럼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것도 그렇죠. 티무르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원래 유목민의 본질은 그런 국가장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국가장치와 전쟁기계의 투쟁이죠. 재미있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은 원래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자본주의는 유통회로가 없으면 불가능하죠. 자본주의는 국가장치에 대립한다고 하지만 사실 자본주의는 국가장치 덕분에 생긴 것이다. 국가장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전국적인 교통망이 형성되고, 유통망이 가능해지면서 자본주의가 활성화되죠. 그것이 17세기죠. 그러나 자본주의는 점점 더 국가라는 장치에 도전하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국가보다 더 막강한 장치가 되어 있죠.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이중적이죠. 하나는 뭐냐 하면 국가장치가 만들어 놓은 홈을 모두 파괴해버리고 어떤 욕망의 회로를 따라 막 흘러가죠.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전쟁기계에요. 그런데 다른 한편, 막 흘러가는 그 욕망이 엄청나게 다채롭고 자유롭고 역동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화폐회로를 따라가죠. 쉽게 말하면 ‘돈길’이죠. 국가장치의 홈패인 공간을 벗어나서 흘러간다는 점에서는 전쟁기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자체의 화폐회로를 돌게 되죠.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유심히 보면, 전부 ‘돈길’을 따라 움직여요.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왜 벌어질까? 그것을 추적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뭡니까? ‘돈길’을 추적하는 거예요. ‘돈길’을 추적하면 다 나와. 모든 삶이 돈을 따라, 화폐를 따라 움직이는 거죠. 그 회로가 굉장히 여러 가지죠. 초등학교 앞에서 도는 돈은 그 앞에서 역할을 하고, 대기업의 회로는 다른 회로죠. 같은 회로가 아닙니다. 그 회로라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입체적인 구조로 되어 있죠. 가장 큰 회로는 금융자본의 회로죠, 그 다음에 기업들의 회로, 그 다음에 여러 가지 다양한 회로들이 있죠. 그러니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굉장히 리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리좀적이 아닌. ‘돈길’따라 돌아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폐쇄된 회로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런 삶 속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와 국가장치로 구성된 그런 삶 속에서 어떤 리좀을 만들어갈 것인가? 어떤 탈주를 찾을 것인가가 <천의 고원>에서 전개하는 중요한 내용들이죠. |
◆ 네그리와 하트가 본 제국과 현대정치이념
들뢰즈, 가타리의 리좀학을 흡수하면서 코뮤니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려는 사람이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eart) 예요.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내가 글을 써둔 게 있으니까 그냥 죽 한번 읽어볼게요. 코뮤니즘은 공산주의로 번역이 되지만, 발음 그대로 번역할 때 이 사조의 특정한 국면을 제시하고 있죠. 가타리와 네그리는 이 말에 새로운 뉘앙스를 적어 넣음으로써 현시대의 이해를 위한 하나의 개념적 모색을 시도했습니다. 이 번역어는 공산주의라는 말이 함축하는 맥락에서 코뮨 개념이 함축하는 맥락으로의 이행을 담고 있다. 이것은 1968년 이후 역사적 사상적 흐름을 배경으로 하고, 다른 한편 이것은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염두에 둔 개념이며, 또 한편 20세기 후반 주체성 이론의 매개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에는 반 정신의학의 투사 가타리가 들뢰즈와 함께 이룩한 사유혁명, 네그리가 전개한 자율주의의 성과들이 교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유는 그 뒤에 이어서 등장한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 및 다중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만남, 가타리와 네그리의 만남, 네그리와 하트의 만남, 이 만남의 연쇄를 통해서 현대정치 이념에 중요한 갈래가 형성되었다. 우리가 코뮤니즘이라고 말할 때 이런 이론적 흐름을 함축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87년 이후가 그 현실적 맥락이라 할 수 있고, 맑시즘의 변형과 후기 구조주의 사유의 획득을 배경으로 하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획장치와 전쟁기계를 논하는 끝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여기서 포획장치라고 하는 것은 국가장치보다 조금 넓은 일반적인 개념인데 거의 같은 개념입니다. 자본주의의 실현 모델을 제공해준 것이 근대국가라면, 이렇게 해서 실현된 것은 세계적 규모의 독립된 공리계로서 유일한 도시, 거대 도시 또는 거대 기계가 되어, 국가는 이것의 일부분, 시의 한 구역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거대 기계를 제국, Empire로 재개념화 해서 현 시대 정치상황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펼친다. 제국은 혼합된 정체, 그러니까 귀족정, 민주정 등의 정체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거죠. 제국은 혼합된 정체, 탈중심성, 외부의 부제라는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정체들이 혼합되어 있고, 과거의 제국처럼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탈중심 되어 있고, 그리고 더 이상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다는 거죠. 제국은 국민국가의 정치와는 달리,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작동하는 혼합된 정체를 특징으로 한다. 또 제국은 이전의 제국처럼 영토의 분할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탈중심화, 탈영토화, 노마디즘를 특징으로 하며 매끄러운 공간을 움직이면서 다시 그것을 포획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오늘날 제국의 외부는 없다. 그것은 전지구화, globalization의 경제적 문화적 교환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는 정치적 주체, 세계를 통치하는 지고한 권력이다. 쉽게 말하면, 네그리와 하트의 정치철학은 globalization을 배경으로 한 정치철학이에요. 마치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이 68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네그리와 하트의 사상은 1980년대 이후의 globalization, 지구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말하자면 그것은 맑스가 이야기했던 실질적 포섭이 완성된 시대라고 할 수 있죠.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을 단지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가 더 커진 것으로 보지 않는 근거는 그것이 새로운 사법적 질서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마치 국민국가를 통해서 자본주의가 성립했듯이, 앞에서 말했죠. 17세기 절대왕정이 들어서고 전국규모의 유통망이 자본주의 형성의 토대가 되었듯이, 제국은 사법적 질서, 다시 말해서 WTO, GATT, NATO, NAFTA, FIFA, IMF 등으로 구체화된, 이른바 초국적 주권을 바탕으로 성립했다. 이 초국적 주권은 근대에 이르러 갈라진 국제법과 영구평화사상을 통합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제국은 힘 자체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권리와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형성되기에 이른다. UN이나 미국 이런 애들이 평화를 위한다, 정의를 위한다는 이유로 무력개입을 하죠. 그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걸프전쟁에서 표명되었던 ‘정의로운 전쟁’, 네그리와 하트는 Empire가 도래하게 되는 어떤 결정적인 실마리를 걸프전으로 봐요. 걸프전에서 표명되었던 ‘정의로운 전쟁’은 힘에 도덕성을 부여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다. 제국은 초국적 사법장치들을 동원해서 예외적인 개입, 이른바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예외적인 개입을 할 수 있는 거죠. 경찰 내지 군대 투입을 정당화한다.
네그리, 하트는 맑스,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미셀 푸코의 생체정치학, 들뢰즈와 가타리의 포획장치, 전쟁기계론를 기반으로 하여 이탈리아 자율주의 정치학을 이어서 이 제국을 파헤치고자 한다. 이런 작업은 제국의 일차적 주체인 초국적 기업들, 그리고 대중의 주체성, 욕망, 신체, 사회관계, 마음을 생산 조작하는 커뮤니케이션 산업을 비롯한 제국의 여러 구성 성분들의 해부를 포함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제국에 맞서는 대안을 다중에서 찾고 있다. 우리가 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인민, 민중, 대중, 군중 등으로 다르게 부르는데, 이 사람들은 다중의 개념으로 부르고 있죠. 다중은 기표, 소주체로서의 인민, 이것은 주민등록번호로 지시되는 그런 사람들로서의 인민이죠. 커뮤니케이션 산업에 포획된 어리석은 우중, 매일 TV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죠. 우르르 몰려다니며 두려운 욕망을 표출하는 군중 등과는 구별되는 다중, 즉 새로운 민중을 제국에 맞세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서 코드와 욕망의 투쟁처럼, 네그리와 하트에게는 제국의 권력과 다중의 역능이 부딪치는 전선들이 적대의 존재론적 기반이다. 조심할 것은 제국이 먼저 존재하고 제국의 안티 테제로써 다중이 생긴 것이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탈주선이 일차적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지적에 근거하여 다중이 제국을 낳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제국 때문에 다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중으로 변함으로써 그 다중에 걸맞은 장치로서 제국이 등장했다고 보는 겁니다. 19세기 이래 반복을 동반하는 차이로서의 리토르넬로는 투쟁의 국제적 주기를 만들어왔으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대한 반응으로서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목적론과 기계론의 역사가 그렇듯이 권력과 반권력은 서로를 변화시키며 진화해온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을 하나의 거대한 집합체로 보지 않는다. 과거 프롤레타리아트처럼 단결된 하나의 집합체로 보지 않는 거죠. 다중이라는 것은 다원성을 전제하고 있다. 광화문 촛불시위 때 모인 사람들은 무슨 특정한 당도 아니고, 특정한 지역도 아니고, 특정한 계급도 아니죠. 굉장히 이질적인 사람들이죠. 이질적인 사람들이 촛불시위에 모인 거죠. 천안문 사건, 인티파타운동, LA 폭동, 치피아스봉기, 프랑스와 한국에서의 파업 같은 사건들은 이질적이며 상호 번역불가능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을 제국을 겨냥한 것이며 이런 사건들에 대한 대항으로서 제국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국이라는 공통의 적의 실체를 분명히 밝혀내는 일이고, 다른 한편 이질적인 투쟁들의 소통을 통해, anti-Empire, counter-Empire, 반제국의 길을 여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이 제국의 형성과 구조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해명하는 일인데, 네그리와 하트는 근대를 장식한 계약론적 정치철학들인 홉스, 루소, 칸트, 헤겔 등을 르네상스기에 수립되었던 역능, 욕망, 사랑을 양도 및 대의 개념을 통해서 국가장치 안에 가두려는 사상으로 파악한다. 특히 욕망과 복수성을 핵심으로 하는 시민사회를 국가 이성으로 흡수시키고, 유럽의 타자들을 매개로 유럽의 정체성을 구축했던 헤겔이 그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과정의 끝에서 통치성에 입각한 국민이, 또는 주민이 등장하게 되며 봉건적인 시민의 질서가 훈육적 시민의 질서로 이행되었다. 그러니까 네그리와 하트에게 ‘시민’은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니에요. 왜냐? 여기서 시민은 현금의 어떤 훈육장치에 의해서 성립한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이로써 근대국민국가 모델이 탄생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런 흐름에 맞서 다중의 역능과 연대가능성의 정치학을 펼친 인물로 스피노자를 꼽는다. 그리고 다중의 역능을 프롤레타리아의 역능에 잇는다. 이런 구도에 입각하여 홉스 이래 대의정치적 흐름과 그에 맞선 스피노자, 맑스의 역능정치학이 대비된다. 근대 부르주아 정치의 극단에서 진행된 제국주의는 1945년 이후에 와해되었다. 그러나 민족해방은 약이자 독으로서 작용한다. 해방된 지역들은 이제 국제 경제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해방된 그 순간, 경제적으로 다시 속박이 되는 거지. 왜? 그동안 지배받았기 때문에 기댈 수밖에 없었거든. 옛날에는 물리쳐야할 적이지만, 일단 물리치고 나면 경쟁을 위해서는 그 나라에 기댈 수밖에 없지. 다 그 나라가 만들어놓은 장치들이니까. 정치적으로 해방된 식민지들은 이제 경제 측면에서나, 문화 측면에서나 이전에는 원수였던 본국을 충실히 재현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것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특정국가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거대한 세계시장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로 이행한 현실에서 해방된 국가들은 이전의 본국들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날 정치적 지형도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콜로리얼리즘, 근본주의로 분리해서 이해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리오타르 같은 사람들에 의한 거대서사들에 대한 비판,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에 대한 긍정,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분법적 사상들을 비판하고 차이의 정치학을 세우고 복수성을 긍정하고 전체주의를 고발한 긍정적인 공에도 불구하고, 네그리와 하트는 이제 이것은 제국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보았다. 즉 제국은 이미 이런 비판들에 면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흡수해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근본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잡종성, 이종성, 차이, 탈역사화와 대비되는 순수성, 지역성, 동일성 역사를 근간으로 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마찬가지로 서구 중심적 근대성을 공격한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포스트콜로리얼리즘은 식민지시대의 위계를 전복시키고 차이와 잡종성을 긍정하고자 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경우에도 역시 제국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에 관련하여 주장하는 핵심적인 테마 중 하나는 바깥은 없다는 것이죠. 더 이상 바깥은 없다는 겁니다. 첫째, 제국에서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은 폐지된다. 자연이라는 바깥은 더 이상 없다는 거죠. 이 지구상에 누군가에 소유가 아닌 어떤 이름도 붙어있지 않는 자연이 존재하나요? 거의 없다는 거야. 이미. 둘째, 제국에는 소유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죠. 우리 경험이 여실히 보여주죠.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 그냥 산에 올라가서 손으로 물을 떠 마셨어. 처음 물을 사먹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소유에, 등록에 면제된 것은 없다. 셋째, 제국 바깥에 존재하는 큰 군사적 힘은 없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정부에 반대한다고 해가지고 국군에 대항하는 양산박이나 청석골이 존재할 수 없지. 이제는. 제국내에서의 전쟁만 존재할 뿐이다. 권력의 작동은 유목적이다. 날카로운 경계선이 사라지고 들뢰즈가 지적했듯 권력은 매끄러운 공간에 미끄러지면서 요동친다. 이 제국의 디아그람은 곧 세계시장이죠. 세계시장이라는 디아그람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자체의 디아그람이다. 예컨대 ‘흑인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 같은 인간이야. 다만 조금 못난 인간이야’ 이렇게 이야기 하죠. 영화에서도, 헐리우드 영화를 유심히 보면 흑인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흑인을 꼳 넣죠. 그런데 항상 백인 둘 흑인 하나 이런 꼴로 들어가죠. 어느 영화를 보더라도 그래요. 흑인 둘 백인 하나 나오는 영화는 거의 없죠. 다섯 명이면 백인 셋, 흑인 둘. 여섯 명이면 백인 셋, 흑인 둘, 황인종 하나 이런 식이죠. 요새는 가끔 황인종을 끼워주죠. 옛날에는 아예 황인종이 안 나와. 백인하고 흑인이야. 그런데 요즘에는 황인종이 가끔 하나씩 끼죠. 배제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관리하는 것이다. 이제 현대사회는 사람을 억압하지 않아요. 그건 무식한 방법이고. 오히려 관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죠. 어쩌다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저 사람 이상한 사람이네. 왜 저러지. 성격 참 이상하네. 이 즐거운 세상에 왜 그럴까’ 이렇게 이야기 하죠. 옛날에는 배제하고 억압하니까 오히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비판의식이 살아있었죠. 맞서 싸우고 저항하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그 시대가 의식이 깨어있었죠. 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그게 아니다. 지금은 다 관리를 하고 있죠. 사회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죠.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괜히 성격이상하다 그러죠.
그래서 이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계시장의 작동방식을 해명하는 일이다. 네그리 하트는 제국의 세계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노동조직화에서의 테일러이즘, 임금체제를 통한 포디즘, 그리고 거시경제적 사회조직에서의 케인즈주의에서 찾는다. 여기서 포디즘은 확대 재생산한 잉여가치를 적당히 떼어 줌으로써 자회사의 노동자들이 자기 제품을 소비하게 만들죠. 옛날처럼 무식하게 떼먹으면 자기 회사 것을 소비를 안 한다. 적당히 떼 줘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다시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포디즘 임금체제죠. 브레튼우즈협정은 전후 미국지배의 초석을 깔았죠. 브레튼우즈협정은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삼는 거예요. 군사적 중장비가 아니라 달러를 통해서 국민국가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1980년대 이르게 되면 초국적 기업의 지배가 현실화 된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이전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제국이 형성되었다고 네그리 하트는 판단하였다. 1945년에 해방된 이른바 제3세계 국가들의 경우 식민지 상태에서 왜곡된 근대화를 겪다가 해방이 되자 짧은 근대화 과정을 거친 후 곧바로 제국의 전반적 체제에 흡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서비스, 문화상품, 지식생산, 커뮤니케이션 산업 등 비물질적인 노동이 등장하게 되고 컴퓨터가 이런 과정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맑스가 이야기했던 추상노동이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이런 전반적인 흐름이 불평등과 배제의 새로운 분화를 가져왔으며 또한 동시에 불확실한 고용산업에 따라 비정규직을 양산해낸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구사한 전략 전술 중에 하나 비정규직을 만든 것이었죠. 오늘날에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은 비정규직에 더 어울리는 말이라고 봐야 해요. 삼성 노동자가 무슨 프롤레타리아야? 보너스 받아, 의료서비스 확실히 받아 그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죠. 비정규직이 오늘날의 프롤레타리트야. 언어적 소통적 감흥 네트워크를 통한 협동상호 작용이 새로운 형태의 생활양식으로 등장하는 것을 지적한다. 비물질적 노동이 스스로 창조적 에네르기를 표현함으로써 일종의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코뮤니즘을 형성하게 된다.
네그리 하트에 따르면 결국 초국적 기업들이 국민국가를 초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가 자본을 견제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거나 해방된 자본을 찬양한다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로 퇴행할 수도 없고 국가 없는 자본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날에 이르러 국민국가는 제국의 행정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국가라는 것은 이 지구제국의 행정부가 된 거야. 제국은 초국적 기업들과 국민국가들의 Hybrid를 이룬다. 미국과 G8, 파리와 런던클럽, 다보스 등 숱한 이질적 단체들과 훈육장치들이 제국의 위계적 구조를 형성한다. 전반으로 볼 때 국가의 홈 패인 공간은 자본의 매끄러운 공간에 굴복하게 되었다. 아울러 근대적인 훈육사회는 포스트모던시대에 관리사회로 이행했다. 이 관리사회에서 주체화는 잡종적 성격을 띠게 되며 삶은 관리되기에 이른다. 폭력, 빈곤, 실업에 대한 공포가 기존의 분할선들을 새로운 분할선들로 대체하고 있다. 제국은 수소폭탄, 화폐, 분위기라는 세 장치들을 통해 지구를 관리한다.
마지막 그렇다면 이제 이와 같은 제국의 시대에 걸맞은 실천적 지향은 무엇이 되겠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날의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 유목적인 시대, 초월적인 코드가 와해된 시대라고 판단한다. 바로 이런 장,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내재성의 장 안에서 다중의 역능이 피어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 역능은 들뢰즈적 의미에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The Actual)’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재적인 것( The Real)’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화, 현실화 한다. 반면 ‘가능적인 것(The Possible)’은 상상적인 것이다. 가능적인, 상상적인 것은 경우에 따라 실재화 된다. 네그리와 하트는 베르그송, 들뢰즈적인 잠재성 개념을 활용하지만 ‘가능적, 상상적인 것에 좀 더 적극적 가치를 부여한다.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가능적인 것을 통과하여 실재적인,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이행은 근본적으로 창조행위이다. 산 노동은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성을 실어 나른다. 산 노동이 공통의 활동력을 발휘함으로써 다중의 권력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이 생각의 핵심적인 것이다. 노동, 지성, 열정, 감흥의 공통적 행위들이 구성적 권력을 형성한다. 여기서 권력은 긍정적인 권력, 다중의 권력을 말하죠. 이런 맥락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현대 정치철학을 핵심문제로써 다음 물음을 제기한다. 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다중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네그리, 하트는 다중이 자율적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을 통해 전체 생활세계를 재생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중들은 주어진 코드에 매몰되기보다 스스로를 그 코드가 변환되는 지점, 즉 특이점으로 만들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특히 시간적 맥락에서 다중의 역능을 정교화한다. 이들에 따르면 시간은 집합적 실존과 소통 네트워크들을 통해서 다중들에 의해 재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시간은 신체와 노동의 시간이다. 오늘날에 다중은 근대에 걸려있던 노동자들의 삶을 옥죄는 그 시계가 아닌 보다 다원적이고 복잡한 시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을 분리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 근대적 시간의 해체는 사회적 임금권의 개념을 생각하게 만든다. 즉 개인노동, 가족임금 같은 개별화된 임금이 해체되고 사회적 임금의 권리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지구적 시민권 및 사회적 임금과 더불어 재점유권이 중요하다. 재점유권은 자본이 앗아간 자율적 자기 생산의 권리이다. 자기 관리 및 자율적 자기 생산이란 만들어지는 주체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주체의 특성이다. 이런 주체는 '~이다.'가 아닌 '~할 수 있다.'를 전제한다. 할 수 있음을 통한 자율적 주체 성립, 그런 주체들의 협동이라는 가치야말로 미래의 가치일 것이다. 스스로를 주체로써 정립한다는 것은 모든 형태의 훈육장치들과의 투쟁을 함축한다. 때문에 자율적 주체는 투쟁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네그리, 하트는 코뮤니즘을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으로서 규정한다. 실질적 포섭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제국의 시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소유의 개념으로 파악되는 시대에 코뮤니즘은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코뮤니즘은 공동체주의지만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복고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 생각은 버려야 한다. 다만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가야 할 뿐이다. |
제12강 세계와 국가 그리고 현대정치철학
◆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
▲ 리좀학(Rhizomatique)과 코뮤니즘(Communism)
오늘은 현대정치철학 중에서 오늘날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있고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리좀학(Rhizomatique)과 코뮤니즘(Communism)을 보려고 합니다. 리좀(Rhizome)은 뿌리인데 여러 가지 뿌리 중에 접속이 자유롭고 복잡하게 이어진 뿌리라고 볼 수 있죠.
가지는 뻗어나가는 것이 정해져 있죠. 이것을 tree, 나무형, 수목형이라고 한다면 리좀은 관계(connexion)들이 훨씬 더 자유롭고 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리좀이라고 하는 것은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가 제시한 개념이죠.
현대적 사유의 개념으로 제시한 것이죠. 이 리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리좀학(Rhizomatique)이라고 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노마디즘(Nomadism)이라고도 하죠. 유목적인 것이죠. 그래서 기존의 어떤 정치철학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른 새로운 방식의 삶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죠.
리좀이라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어떤 삶의 모델인데, 리좀이 반드시 긍정적인 방식으로만 진행하는 것은 아니죠. 접속해서 뭔가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갈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안 좋은 방식으로 갈 수도 있어요.
그래서 리좀을 이어가는 코뮤니즘(Communism), 즉 맑스 엥겔스의 코뮤니즘을 이으면서도, 기존의 교조적인 공산주의가 아니라, 리좀학을 전제하는 상태에서 다시 한번 코뮤니즘을 구성해보려는 것이 현대의 코뮤니즘이죠. 그래서 이것을 공산주의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코뮤니즘이라고 음역하죠. 이것은 네그리(Negri)와 하트(Hardt) 두 사람이 제시한 것입니다.
▲ 안티 오이디푸스
들뢰즈와 가타리는 20세기 철학의 총결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주 종합적이고 다채로운 사고를 전개했는데, 들뢰즈는 일종의 철학사가로서 활동한 중후한 사상가고 가타리는 정치활동에 열정을 투자한 정신의학자죠.
두 사람이 1972년에 만나서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을 펴냈는데, 출간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지죠. 제목에서도 시사하고 있듯이 니체가 <안티 크라이스트>를 썼듯이 이 사람들은 <안티 오이디푸스>를 썼죠. 여기서의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오이디푸스’에요.
이 <안티 오이디푸스>를 두고 68혁명의 철학적 형상화하고 부릅니다. 우리가 전 시간에 68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라는 이분법이 무너지고, 전혀 새로운 정치적 지형도가 도래했다고 했죠. 단순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식으로 말하면 1987년 6월 항쟁 이후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책의 제목을 <안티 오이디푸스>라고 한 것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욕망개념을 비판하기 위한 거예요. 전 시간에 라캉을 했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갈 때 겪는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죠. 이렇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상징계로 진입을 하고, 이 상징계에서 가지게 되는 것은 욕망이죠. 다시 말해서 아버지, 어머니, 나라는 오이디푸스 트라이앵글을 거치면서 우리는 거세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 근친상간의 욕망을 제거하게 되죠.
그러면서 상징계에 들어서게 되고, 욕망을 가지게 되는데, 이 상징계에서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기표의 성격을 띤다고 그랬죠. 회사로 말하면 사장, 부장, 과장 이런 것이 기표죠. 기표들이라는 것은 환유적으로 움직인다. 들뢰즈, 가타리는 이런 식의 욕망, 상징계의 기표체계에 포획된, 그러면서 결핍으로 이해되는, 항상 모자라기 때문에 채워야 하는 것, 그러니까 환유죠.
모자라는 것을 계속 채워 나가야 하니까. 그러면서 욕망은 상징계를 돌아다니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프로이트,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상징계에서의 욕망, 환유적인 욕망, 그 욕망이 함축하는 결핍 개념을 아주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
사실 라캉의 사유는 상징계에서 끝나지 않고 실재계로 가죠.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라캉의 실재계는 충분히 소화하고 있지 않아요.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로 겨냥하고 있는 이야기는 상징계에 대한 이야기죠.
▲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학 비판
그러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왜 저런 욕망 개념을 비판하느냐? 첫째로 그들은 프로이트, 라캉이 말하는 인간 욕망의 형성은 아빠, 엄마, 나라고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속에 가둔다고 보았죠. 인간의 욕망을 넓게 사회적 역사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가족드라마, family romance 안에 가둔다는 거죠.
둘째로 저런 식의 욕망개념에서 사회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를 억압하는 것, 억누르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죠. 윤리나 사회, 혁명 이런 것은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한 가족의 로맨스를 억누르는 것 밖에는 표상이 안 되고 있어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라고 하는 것을 그런 관점이 아니라, 끝없이 분출하는 생명력, 어떤 결핍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창조하고 만들어가는 창조력, 생명력으로 해석하죠.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라캉의 욕망은 어떤 기표 속에 가두는 것이다.
그런 식의 비판은 넓게 보면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이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구조에 따라 이루어지고, 욕망이라는 것이 기표체계 속에서 움직인다는 견해에 대한 반론이죠. 우리의 욕망이 기표체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새롭게 만들기도 하고 뒤흔들어놓는다는 거예요.
▲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
이 사람들의 이런 식의 낙관적 견해 밑바닥에는 바로 68혁명의 체험이 깔려있는 거죠. 우리들의 삶의 방식은 기표들의 체계화다. 이 사람들은 이런 맥락에서는 signification이라는 말을 잘 안 쓰고, signifiance, 기표화란 말이죠. <천의 고원> 번역에서는 이것을 ‘의미생성’이라고 했죠.
이것은 아주 곤란한 번역이에요. 거꾸로 우리의 삶을 ‘기표화’하는 것을 말하죠. 모든 것을 다 기표화하는 것을 말하죠. 그러니까 좀 단적으로 말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이름을 따기 위해서 사는 거지. 대위는 소령 되기 위해서 살고, 과장은 부장되기 위해서 살고 이런 거죠.
그런 기표들의 체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의 욕망은 그 기표들의 체계에 저항하고 구멍을 내고, 적어도 보다 합리적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또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힘으로 보는 거지. 그 기표체계를 떠날 수는 없어요. 떠난다는 것은 낭만적인 이야기지.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욕망은 유교나 무슨 종교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라캉의 결핍도 아니고, 하나의 창조력, 생산의 힘으로 보죠. 이들이 말하는 욕망은 결국 차이, 생명, 역능, 창조, 긍정과 거의 동의어로 볼 수 있죠.
욕망이 고정되는 순간 권력으로 화하죠. 설사 그 욕망이 의미 있는 욕망, 우리의 삶을 바꿔나가는 욕망이라도 그것이 딱 자리를 잡고 고착화되는 순간, 더 이상이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욕망이 아니라 권력으로 화해버리죠. 그래서 말하자면 역능의지, 니체가 말하는 힘의 의지가 권력의 의지로 몰락하는 거죠.
▲ 홈패인 공간
그래서 한 사회는 기존의 삶의 방식, 기존의 코드를 유지하려는 힘과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힘 사이의 영원한 투쟁이죠. 코드는 우리 삶에 홈을 파요. ‘홈패인 공간’이죠.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하고,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 홈을 파버리죠. <영웅>이라는 영화를 보면, 첫 장면에 주인공이 마차타고 궁궐에 들어가잖아.
자세히 보면 마차가 가는 길이 파여 있잖아. 심지어는 마차의 폭을 재서 바퀴의 홈은 판 거죠. 이것이 바로 홈패인 공간이야. 이것은 구상적인 예고, 눈에 보이는 것이고. 우리 삶은 홈이 파여 있죠. 이렇게 이렇게 하도록 홈이 파여 있고, 우리는 그 홈 따라 사는 거죠.
▲ 탈주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삶은 탈주하는 삶이예요. 원래 삶이라는 것이 그렇죠. 조심할 것은, 오해하기 쉬운데 탈주라는 것은 우리 삶이 이렇게 홈이 파여 있기 때문에 탈주한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이런 당위나 목적 개념이 아니라, 원래 우리 삶은 ‘탈주’인데, 권력이 권력이 홈을 판다는 말이죠. 원래 ‘탈주’라는 말은 낭만적이고 당위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박한 개념이죠.
동물들의 삶을 보세요. 동물들의 삶이 기본적으로 탈주로 이루어져 있거든, 포획 동물이 오면 도망가야죠. 가뭄이 나면 물 찾아 떠나야죠. 홍수나면 또 도망가야죠. 햇볕이 강하면 동굴에 들어가 햇볕을 피해야죠. 그러니까 탈주라는 것은 당위하거나 낭만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물적인 삶의 방식이에요. 동물적인 삶은 기본적으로 탈주하는 삶이에요.
그런데 원래 권력체계라고 하는 것이 탈주하는 거기에 홈을 파는 거죠. 도시가 하나의 홈이고, 계층이 하나의 홈이고 모든 것에 홈을 파죠.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탈주나 리좀 위에 홈을 파서 코드를 만드는 어떤 힘으로서의 권력과 거기서 탈주하려고 하는 힘을 같이 보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탈주 개념은 조금 다르죠.
원래 탈주는 그냥 존재의 성격이라면, 코드가 이미 파여져 있는 데서 탈주하는 것은 그 코드 전체로부터의 의식적인 탈주죠. 성격이 좀 다르죠. 이런 식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과 코드, 탈주와 홈 파인 공간 이런 것들을 대조시키면서 자기들 사상을 그리고 있죠. 그런데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욕망이라는 것이 어떻게 바뀌어 왔고, 그 욕망을 코드화 하는, 욕망에 홈을 파는 권력의 코드는 어떻게 바뀌어왔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역사철학이에요.
◆ 국가와 자본주의
▲ 국가
우리 삶의 홈을 파는, 우리 삶을 코드화 하는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장치는 뭘까?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층을 만들고 홈을 파고 조직을 하는 가장 거대한 장치가 무엇일까? 국가지, 국가. 우리는 전부 다 주민번호가 있고, 세금을 내고, 신호위반을 하면 벌금을 내고, 모든 집은 번지수가 붙어있죠. 우리 삶이 완벽하게 코드화 되어있죠.
그런데 이 수억 수만의 사람들, 사람마다 다 욕망이 다르고 자기 자존심이 있고 자기 삶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코드화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힘이죠. 믿을 수 없는 힘이 있는 거죠. 주민등록증을 내가 왜 가지고 다녀야해요. 내 자유지. 이유가 없잖아. 내 욕망과 아무 상관 없잖아.
내가 사는 집에 번지수를 왜 붙여? 그냥 내가 사는 건데. 그런데 그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일제히 코드화되어있죠. 이 어마어마한 힘이 국가라는 거야. 우리는 힘이 너무 크면 아예 잊어버리죠. 그 강력한 장치가 국가장치다.
▲ 미개사회, 전통사회, 자본주의 사회
들뢰즈와 가타리는 삶의 방식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죠. 국가이전, 국가시대, 국가가 흔들리는 시대 세 가지죠. 국가라는 것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가 미개사회죠. 국가가 등장한 시기가 전통사회고. 왕이란 존재가 생겨나고, 관료조직, 성을 쌓고, 문자를 발명하고, 역사를 쓰고, 화폐를 만들고, 세금을 거두고 하는 것이 국가죠. 물론 국가는 지금도 강건하게 있지만 국가라는 것이 예전처럼 우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사회가 도래하죠.
그것이 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왕과 관료조직이 생기고 화폐가 생기면서 국가가 생겨난다. 국가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국가가 등장하기 이전, 국가가 등장한 다음, 그리고 자본주의가 등장한 시대 이렇게 역사를 크게 세 개로 나누어 보죠.
어떻게 보면 역사를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 어찌 보면 사고가 거칠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이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해서 그렇게 보는 거예요. 국가의 힘이 막강할 때는 rhizomatic한 삶이 불가능하죠. 홈이 강력하게 패어있으니 홈을 따라 움직여야죠. 있으나 관점에 따라 이렇게 나눌 수 있다. 국가가 강력할 때는 리조마틱한 삶이 어렵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rhizomatic한 삶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렇게 오랫동안 인간의 삶을 지배해오던 그 코드가 흔들리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물자체도 그렇죠. 성전환 수술을 해서 성도 바꾸는 시대죠. 머리카락 색깔도 바꾸죠.
이제 몇 년 만 더 가면 눈 색깔도 바꾸겠죠. 오늘 무슨 색 낄까? 파란색 낄까 그러겠지. 여자들은 밤에 다닐 때 치한을 방지하기 위해서 손에다가 오늘은 무슨 쇠팔을 낄까? 갈고리. 이러겠죠. 20년만 지나면.
이제는 정치적인 의미에서만 rhizomatic한 것이 아니에요. 이 세계 자체가 rhizomatic한 세계가 되요. 그 rhizomatic한 세계가 지금 가장 실감나는 세계는 인터넷 공간이죠. 진짜 rhizomatic하죠. 그런데 이런 오프라인 세계는 아직은 아니죠. 그래도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세계로 간다는 거죠. 이런 세계가 말하자면 코드가 무너지진 세계죠.
▲ <천의 고원>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욕망을 찬양하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들뜬 분위기에서 얘기했다면, <천의 고원>에 가면 그런 것들을 여과하고 그것을 더욱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루고 분석한 책이죠. 리좀으로 간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니까. 엉터리로 막 갔다 붙이면 엉망이 되겠죠. 리좀이란 말을 너무 당위적으로 이해하면 안되요.
파시즘도 리좀적인 거죠. 이상한 힘이 결집해서 물결치는 공포스러운 리좀이죠. 또 우리 몸의 암이 굉장히 rhizomatic하죠. 리좀이라고 모두 좋은 게 아니죠. 리좀은 생각의 모델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해가는 가는 주제에 따라 대상에 따라 맥락에 따라 모두 이야기 되어야 하죠. 리좀이라는 그 가치만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향이나 분위기죠. 일종의 logic이죠.
그래서 1980년에 <천의 고원>이라고 하는 책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자세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고, <천의 고원>이 20세기에 나온 책 중에 가장 영향이 큰 책 중에 하나에요. 어쩌면 가장 영향이 클지도 모르겠어요. 얼마나 영향이 큰지 록 아티스트들이 <천의 고원>이라는 음반도 만들었어.
전자음악으로 지금 판매하고 있죠. 나한테 <천의 고원>을 영화로 만든다고 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돈이 많이 들어서 잘 안됐어. 좀 아쉬운데, 언젠가는 영화로 나오지 싶어. 나도 돈만 있으면 만들어보고 싶어, 옴니버스 영화로 해서, 여러분 그리피스가 만든 <Intolerance>란 영화 봤나? <Intolerance> 분위기로 만들면 딱 좋죠. 옴니버스로 해가지고.
이 책은 재미있는 영감으로 가득한 책이죠.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기서 구사하고 있는 많은 개념들이 있는데, <천의 고원>은 개념들의 보물창고야. 별 희한한 개념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주요개념만 100개정도 될 거야. 이 사람들의 철학관 자체가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철학이 뭘 하는 것이냐?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 개념을 통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고, 또 여러 분야에서 그 개념을 통해서 영감을 받는 개념들, 우리 삶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을 이 사람들은 철학의 과제로 보죠.
▲ 영토화와 탈영토화
그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영토화와 탈영토화죠. 영토화와 탈영토화는 기본적으로 동물행동학의 개념이죠. 수달이 진흙, 나무, 돌을 모아서 집을 짓는 것이 영토화 하는 거죠. 사물들을 접속시켜서 영토화하는 거죠. 수달의 몸 자체도 하나의 사물이죠.
이 사람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되게 싫어해. 인간을 구분되어야할 무엇으로 보는 것을 싫어하죠. 인간도 접속하는 무엇으로 봐요. 내 몸은 백묵하고 접속하고 있는 것이고, 내 목소리는 마이크와 접속하고 있는 거죠. 삶이라는 것이 접속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일정하게 접속해가지고 뭘 만듭니까? 영토를 만들죠. 그것이 삶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죠. 그러니까 아이들이 장난감가지고 노는 것을 유심히 보세요. 영토를 구축하는 거 아니야.
레고라든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 소꿉놀이 대부분이 영토를 구축하는 거거든. 너는 아빠 해, 나는 엄마 하께. 여기는 밥그릇, 여기는 부엌이야. 영토를 만들죠. 그러니까 영토를 만든다는 것이 동물적 삶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인데, 영토화에는 항상 탈영토화가 따르죠. 탈영토화는 뭡니까? 어떤 영토에 귀속되어있던 사물들이 떨어져 나와서 다른 것과 접속하는 것이죠.
내가 이 백묵을 칠판과 접속해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받침대로 쓸 수도 있는 거죠. 강의에서 탈영토화해서 받침대로 들어가는 거죠. 거의 무한한 탈영토화가 가능한 사물은 무엇일까요? 무한한 탈영토화를 하면서 움직이는 사물은, 기계는 바로 우리 몸이죠.
아침에는 버스에 영토화 되었다가, 낮에는 다방에 영토화 되었다가, 지금은 강의라고 하는 배치에 영토화 되어 있는 거죠. 끝나면 또 맥주집에 영토화 되겠죠. 이런 식으로 끝없니 탈영토화되죠. 접속의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이 인간의 몸이지.
다른 것들과 접속해서 어떤 배치를 만들어 가는데, 가장 다채롭게 끝없이 접속을 바꿔 가면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 몸이죠. 어찌 보면 산다는 것은 끝없이 그런 배치를 만들어가는 거죠.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끝없이 배치를 바꾸어 나가는 거죠.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 하죠.
▲ 전쟁기계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전반적인 개요고,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의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를 특화해서, 다루어야할 개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전쟁기계 개념이죠.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삶을 코드화하는 무수한 방식들이 존재하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존재는 국가죠.
이 국가를 현대철학에서는 국가장치라 그래요. 알튀세가 말한 국가장치죠. 법, 국가, 군대, 교육기관 전부 국가장치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구성하는 것, 이 때 ‘외부’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해요. 여기의 바깥, 이런 뜻이 아니라, 국가장치의 ‘외부’는 국가장치에 포획되지 않는 거지. 그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라고 하죠.
여기서의 전쟁은 좁은 의미의 ‘전쟁’이 아니에요. 총칼 들고 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어떤 맥락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런 뜻이 아니라 국가장치로부터의 탈주를 말하는 거지.
예를 들어서 유목민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장치를 만들기를 거부했던 민족입니다. 유목민들은 삶의 거대한 홈을 파서 하나의 국가장치를 만드는 대신에 끝없는 탈주를 하면서 살아갔죠. 그래서 전쟁기계를 대변하는 존재는 유목민들로 보죠. 물론 유목민들이 전쟁기계를 포기하고 국가장치로 포섭되는 경우도 많지.
예컨대 어떤 국가의 용병이 되거나, 칭기즈 칸처럼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것도 그렇죠. 티무르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원래 유목민의 본질은 그런 국가장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국가장치와 전쟁기계의 투쟁이죠.
▲ 자본주의와 국가장치
재미있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은 원래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자본주의는 유통회로가 없으면 불가능하죠. 자본주의는 국가장치에 대립한다고 하지만 사실 자본주의는 국가장치 덕분에 생긴 것이다.
국가장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전국적인 교통망이 형성되고, 유통망이 가능해지면서 자본주의가 활성화되죠. 그것이 17세기죠. 그러나 자본주의는 점점 더 국가라는 장치에 도전하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국가보다 더 막강한 장치가 되어 있죠.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이중적이죠. 하나는 뭐냐 하면 국가장치가 만들어 놓은 홈을 모두 파괴해버리고 어떤 욕망의 회로를 따라 막 흘러가죠.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전쟁기계에요. 그런데 다른 한편, 막 흘러가는 그 욕망이 엄청나게 다채롭고 자유롭고 역동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화폐회로를 따라가죠. 쉽게 말하면 ‘돈길’이죠.
국가장치의 홈패인 공간을 벗어나서 흘러간다는 점에서는 전쟁기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자체의 화폐회로를 돌게 되죠.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유심히 보면, 전부 ‘돈길’을 따라 움직여요.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왜 벌어질까? 그것을 추적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뭡니까? ‘돈길’을 추적하는 거예요. ‘돈길’을 추적하면 다 나와. 모든 삶이 돈을 따라, 화폐를 따라 움직이는 거죠. 그 회로가 굉장히 여러 가지죠. 초등학교 앞에서 도는 돈은 그 앞에서 역할을 하고, 대기업의 회로는 다른 회로죠.
같은 회로가 아닙니다. 그 회로라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입체적인 구조로 되어 있죠. 가장 큰 회로는 금융자본의 회로죠, 그 다음에 기업들의 회로, 그 다음에 여러 가지 다양한 회로들이 있죠. 그러니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굉장히 리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리좀적이 아닌. ‘돈길’따라 돌아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폐쇄된 회로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런 삶 속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와 국가장치로 구성된 그런 삶 속에서 어떤 리좀을 만들어갈 것인가? 어떤 탈주를 찾을 것인가가 <천의 고원>에서 전개하는 중요한 내용들이죠.
◆ 네그리와 하트가 본 제국과 현대정치이념
▲ 네그리와 하트 : 코뮤니즘
들뢰즈, 가타리의 리좀학을 흡수하면서 코뮤니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려는 사람이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eart) 예요.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내가 글을 써둔 게 있으니까 그냥 죽 한번 읽어볼게요.
코뮤니즘은 공산주의로 번역이 되지만, 발음 그대로 번역할 때 이 사조의 특정한 국면을 제시하고 있죠. 가타리와 네그리는 이 말에 새로운 뉘앙스를 적어 넣음으로써 현시대의 이해를 위한 하나의 개념적 모색을 시도했습니다. 이 번역어는 공산주의라는 말이 함축하는 맥락에서 코뮨 개념이 함축하는 맥락으로의 이행을 담고 있다.
이것은 1968년 이후 역사적 사상적 흐름을 배경으로 하고, 다른 한편 이것은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염두에 둔 개념이며, 또 한편 20세기 후반 주체성 이론의 매개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에는 반 정신의학의 투사 가타리가 들뢰즈와 함께 이룩한 사유혁명, 네그리가 전개한 자율주의의 성과들이 교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유는 그 뒤에 이어서 등장한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 및 다중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만남, 가타리와 네그리의 만남, 네그리와 하트의 만남, 이 만남의 연쇄를 통해서 현대정치 이념에 중요한 갈래가 형성되었다. 우리가 코뮤니즘이라고 말할 때 이런 이론적 흐름을 함축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87년 이후가 그 현실적 맥락이라 할 수 있고, 맑시즘의 변형과 후기 구조주의 사유의 획득을 배경으로 하죠.
▲ 제국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획장치와 전쟁기계를 논하는 끝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여기서 포획장치라고 하는 것은 국가장치보다 조금 넓은 일반적인 개념인데 거의 같은 개념입니다. 자본주의의 실현 모델을 제공해준 것이 근대국가라면, 이렇게 해서 실현된 것은 세계적 규모의 독립된 공리계로서 유일한 도시, 거대 도시 또는 거대 기계가 되어, 국가는 이것의 일부분, 시의 한 구역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거대 기계를 제국, Empire로 재개념화 해서 현 시대 정치상황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펼친다. 제국은 혼합된 정체, 그러니까 귀족정, 민주정 등의 정체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거죠. 제국은 혼합된 정체, 탈중심성, 외부의 부제라는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정체들이 혼합되어 있고, 과거의 제국처럼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탈중심 되어 있고, 그리고 더 이상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다는 거죠. 제국은 국민국가의 정치와는 달리,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작동하는 혼합된 정체를 특징으로 한다. 또 제국은 이전의 제국처럼 영토의 분할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탈중심화, 탈영토화, 노마디즘를 특징으로 하며 매끄러운 공간을 움직이면서 다시 그것을 포획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오늘날 제국의 외부는 없다. 그것은 전지구화, globalization의 경제적 문화적 교환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는 정치적 주체, 세계를 통치하는 지고한 권력이다. 쉽게 말하면, 네그리와 하트의 정치철학은 globalization을 배경으로 한 정치철학이에요.
마치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이 68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네그리와 하트의 사상은 1980년대 이후의 globalization, 지구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말하자면 그것은 맑스가 이야기했던 실질적 포섭이 완성된 시대라고 할 수 있죠.
▲ 초국적 사법장치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을 단지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가 더 커진 것으로 보지 않는 근거는 그것이 새로운 사법적 질서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마치 국민국가를 통해서 자본주의가 성립했듯이, 앞에서 말했죠.
17세기 절대왕정이 들어서고 전국규모의 유통망이 자본주의 형성의 토대가 되었듯이, 제국은 사법적 질서, 다시 말해서 WTO, GATT, NATO, NAFTA, FIFA, IMF 등으로 구체화된, 이른바 초국적 주권을 바탕으로 성립했다.
이 초국적 주권은 근대에 이르러 갈라진 국제법과 영구평화사상을 통합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제국은 힘 자체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권리와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형성되기에 이른다.
UN이나 미국 이런 애들이 평화를 위한다, 정의를 위한다는 이유로 무력개입을 하죠. 그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걸프전쟁에서 표명되었던 ‘정의로운 전쟁’, 네그리와 하트는 Empire가 도래하게 되는 어떤 결정적인 실마리를 걸프전으로 봐요. 걸프전에서 표명되었던 ‘정의로운 전쟁’은 힘에 도덕성을 부여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다.
제국은 초국적 사법장치들을 동원해서 예외적인 개입, 이른바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예외적인 개입을 할 수 있는 거죠. 경찰 내지 군대 투입을 정당화한다.
▲ 다중
네그리, 하트는 맑스,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미셀 푸코의 생체정치학, 들뢰즈와 가타리의 포획장치, 전쟁기계론를 기반으로 하여 이탈리아 자율주의 정치학을 이어서 이 제국을 파헤치고자 한다. 이런 작업은 제국의 일차적 주체인 초국적 기업들, 그리고 대중의 주체성, 욕망, 신체, 사회관계, 마음을 생산 조작하는 커뮤니케이션 산업을 비롯한 제국의 여러 구성 성분들의 해부를 포함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제국에 맞서는 대안을 다중에서 찾고 있다. 우리가 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인민, 민중, 대중, 군중 등으로 다르게 부르는데, 이 사람들은 다중의 개념으로 부르고 있죠. 다중은 기표, 소주체로서의 인민, 이것은 주민등록번호로 지시되는 그런 사람들로서의 인민이죠.
커뮤니케이션 산업에 포획된 어리석은 우중, 매일 TV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죠. 우르르 몰려다니며 두려운 욕망을 표출하는 군중 등과는 구별되는 다중, 즉 새로운 민중을 제국에 맞세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서 코드와 욕망의 투쟁처럼, 네그리와 하트에게는 제국의 권력과 다중의 역능이 부딪치는 전선들이 적대의 존재론적 기반이다.
조심할 것은 제국이 먼저 존재하고 제국의 안티 테제로써 다중이 생긴 것이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탈주선이 일차적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지적에 근거하여 다중이 제국을 낳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제국 때문에 다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중으로 변함으로써 그 다중에 걸맞은 장치로서 제국이 등장했다고 보는 겁니다.
19세기 이래 반복을 동반하는 차이로서의 리토르넬로는 투쟁의 국제적 주기를 만들어왔으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대한 반응으로서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목적론과 기계론의 역사가 그렇듯이 권력과 반권력은 서로를 변화시키며 진화해온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을 하나의 거대한 집합체로 보지 않는다. 과거 프롤레타리아트처럼 단결된 하나의 집합체로 보지 않는 거죠. 다중이라는 것은 다원성을 전제하고 있다. 광화문 촛불시위 때 모인 사람들은 무슨 특정한 당도 아니고, 특정한 지역도 아니고, 특정한 계급도 아니죠. 굉장히 이질적인 사람들이죠. 이질적인 사람들이 촛불시위에 모인 거죠.
천안문 사건, 인티파타운동, LA 폭동, 치피아스봉기, 프랑스와 한국에서의 파업 같은 사건들은 이질적이며 상호 번역불가능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을 제국을 겨냥한 것이며 이런 사건들에 대한 대항으로서 제국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국이라는 공통의 적의 실체를 분명히 밝혀내는 일이고, 다른 한편 이질적인 투쟁들의 소통을 통해, anti-Empire, counter-Empire, 반제국의 길을 여는 것이다.
▲ 제국의 형성과 구조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이 제국의 형성과 구조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해명하는 일인데, 네그리와 하트는 근대를 장식한 계약론적 정치철학들인 홉스, 루소, 칸트, 헤겔 등을 르네상스기에 수립되었던 역능, 욕망, 사랑을 양도 및 대의 개념을 통해서 국가장치 안에 가두려는 사상으로 파악한다.
특히 욕망과 복수성을 핵심으로 하는 시민사회를 국가 이성으로 흡수시키고, 유럽의 타자들을 매개로 유럽의 정체성을 구축했던 헤겔이 그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과정의 끝에서 통치성에 입각한 국민이, 또는 주민이 등장하게 되며 봉건적인 시민의 질서가 훈육적 시민의 질서로 이행되었다.
그러니까 네그리와 하트에게 ‘시민’은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니에요. 왜냐? 여기서 시민은 현금의 어떤 훈육장치에 의해서 성립한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이로써 근대국민국가 모델이 탄생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런 흐름에 맞서 다중의 역능과 연대가능성의 정치학을 펼친 인물로 스피노자를 꼽는다. 그리고 다중의 역능을 프롤레타리아의 역능에 잇는다.
이런 구도에 입각하여 홉스 이래 대의정치적 흐름과 그에 맞선 스피노자, 맑스의 역능정치학이 대비된다. 근대 부르주아 정치의 극단에서 진행된 제국주의는 1945년 이후에 와해되었다. 그러나 민족해방은 약이자 독으로서 작용한다. 해방된 지역들은 이제 국제 경제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해방된 그 순간, 경제적으로 다시 속박이 되는 거지.
왜? 그동안 지배받았기 때문에 기댈 수밖에 없었거든. 옛날에는 물리쳐야할 적이지만, 일단 물리치고 나면 경쟁을 위해서는 그 나라에 기댈 수밖에 없지. 다 그 나라가 만들어놓은 장치들이니까. 정치적으로 해방된 식민지들은 이제 경제 측면에서나, 문화 측면에서나 이전에는 원수였던 본국을 충실히 재현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것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특정국가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거대한 세계시장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로 이행한 현실에서 해방된 국가들은 이전의 본국들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 것이다.
▲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도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날 정치적 지형도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콜로리얼리즘, 근본주의로 분리해서 이해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리오타르 같은 사람들에 의한 거대서사들에 대한 비판,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에 대한 긍정,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분법적 사상들을 비판하고 차이의 정치학을 세우고 복수성을 긍정하고 전체주의를 고발한 긍정적인 공에도 불구하고, 네그리와 하트는 이제 이것은 제국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보았다. 즉 제국은 이미 이런 비판들에 면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흡수해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근본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잡종성, 이종성, 차이, 탈역사화와 대비되는 순수성, 지역성, 동일성 역사를 근간으로 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마찬가지로 서구 중심적 근대성을 공격한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포스트콜로리얼리즘은 식민지시대의 위계를 전복시키고 차이와 잡종성을 긍정하고자 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경우에도 역시 제국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 바깥은 없다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에 관련하여 주장하는 핵심적인 테마 중 하나는 바깥은 없다는 것이죠. 더 이상 바깥은 없다는 겁니다. 첫째, 제국에서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은 폐지된다. 자연이라는 바깥은 더 이상 없다는 거죠. 이 지구상에 누군가에 소유가 아닌 어떤 이름도 붙어있지 않는 자연이 존재하나요? 거의 없다는 거야. 이미.
둘째, 제국에는 소유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죠. 우리 경험이 여실히 보여주죠.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 그냥 산에 올라가서 손으로 물을 떠 마셨어. 처음 물을 사먹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소유에, 등록에 면제된 것은 없다.
셋째, 제국 바깥에 존재하는 큰 군사적 힘은 없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정부에 반대한다고 해가지고 국군에 대항하는 양산박이나 청석골이 존재할 수 없지. 이제는. 제국내에서의 전쟁만 존재할 뿐이다.
▲ 배제에서 관리로
권력의 작동은 유목적이다. 날카로운 경계선이 사라지고 들뢰즈가 지적했듯 권력은 매끄러운 공간에 미끄러지면서 요동친다. 이 제국의 디아그람은 곧 세계시장이죠. 세계시장이라는 디아그람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자체의 디아그람이다.
제국에 외부가 없기 때문에 이제는 배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차이의 배분을 통해서 작동한다. 미셀 푸코가 지적했듯이 근대 훈육 권력의 본질은 배제에 있죠. 그런데 오늘날에는 배제를 안 해요. 배제가 아니라 관리하는 거지.
예컨대 ‘흑인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 같은 인간이야. 다만 조금 못난 인간이야’ 이렇게 이야기 하죠. 영화에서도, 헐리우드 영화를 유심히 보면 흑인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흑인을 꼳 넣죠. 그런데 항상 백인 둘 흑인 하나 이런 꼴로 들어가죠. 어느 영화를 보더라도 그래요.
흑인 둘 백인 하나 나오는 영화는 거의 없죠. 다섯 명이면 백인 셋, 흑인 둘. 여섯 명이면 백인 셋, 흑인 둘, 황인종 하나 이런 식이죠. 요새는 가끔 황인종을 끼워주죠. 옛날에는 아예 황인종이 안 나와. 백인하고 흑인이야. 그런데 요즘에는 황인종이 가끔 하나씩 끼죠. 배제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관리하는 것이다.
이제 현대사회는 사람을 억압하지 않아요. 그건 무식한 방법이고. 오히려 관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죠. 어쩌다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저 사람 이상한 사람이네. 왜 저러지. 성격 참 이상하네. 이 즐거운 세상에 왜 그럴까’ 이렇게 이야기 하죠.
옛날에는 배제하고 억압하니까 오히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비판의식이 살아있었죠. 맞서 싸우고 저항하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그 시대가 의식이 깨어있었죠. 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그게 아니다. 지금은 다 관리를 하고 있죠. 사회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죠.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괜히 성격이상하다 그러죠.
▲ 세계시장의 작동방식
그래서 이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계시장의 작동방식을 해명하는 일이다. 네그리 하트는 제국의 세계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노동조직화에서의 테일러이즘, 임금체제를 통한 포디즘, 그리고 거시경제적 사회조직에서의 케인즈주의에서 찾는다.
여기서 포디즘은 확대 재생산한 잉여가치를 적당히 떼어 줌으로써 자회사의 노동자들이 자기 제품을 소비하게 만들죠. 옛날처럼 무식하게 떼먹으면 자기 회사 것을 소비를 안 한다. 적당히 떼 줘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다시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포디즘 임금체제죠.
브레튼우즈협정은 전후 미국지배의 초석을 깔았죠. 브레튼우즈협정은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삼는 거예요. 군사적 중장비가 아니라 달러를 통해서 국민국가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1980년대 이르게 되면 초국적 기업의 지배가 현실화 된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이전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제국이 형성되었다고 네그리 하트는 판단하였다.
1945년에 해방된 이른바 제3세계 국가들의 경우 식민지 상태에서 왜곡된 근대화를 겪다가 해방이 되자 짧은 근대화 과정을 거친 후 곧바로 제국의 전반적 체제에 흡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네그리, 하트는 탈주선이 일차적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에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자본가들의 능동성에 기인한다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의 역능에 있다고 본다. 이 제국의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가 생산의 정보화, 네트워크 권력이다. 모든 생산체들은 세계시장의 네트워크 안에, 서비스에 정보 공학적 생산들의 지배 아래 존재한다.
이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산업이 생산을 지배하게 된다. 생산해서 판매하는 포디즘이 아니라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도요티즘으로의 이행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의 도요타죠. 그렇다.
아울러 서비스, 문화상품, 지식생산, 커뮤니케이션 산업 등 비물질적인 노동이 등장하게 되고 컴퓨터가 이런 과정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맑스가 이야기했던 추상노동이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이런 흐름과 더불어 감흥적인 노동 또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른바 서비스 산업이죠. 사람들의 감정, 감흥을 서비스하는 것이죠. 지금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죠.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한 편이 못 사는 나라 국가 예산과 맞먹는다니까 말이죠.
이런 생산 집중화가 탈영토화 되고 산업자본으로부터 금융자본으로 이행이 강화되며, 이와 더불어 산업도시들의 쇠퇴와 관리도시들의 부상이 이루어진다. 루퍼트 머독 같은 독점언론재벌, 헐리우드, 마이크로소프트, IBM, AT&T 같은 정보커뮤니케이션 권력이 제국의 주요 권력으로 떠오르게 되죠.
이런 전반적인 흐름이 불평등과 배제의 새로운 분화를 가져왔으며 또한 동시에 불확실한 고용산업에 따라 비정규직을 양산해낸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구사한 전략 전술 중에 하나 비정규직을 만든 것이었죠. 오늘날에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은 비정규직에 더 어울리는 말이라고 봐야 해요. 삼성 노동자가 무슨 프롤레타리아야? 보너스 받아, 의료서비스 확실히 받아 그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죠. 비정규직이 오늘날의 프롤레타리트야.
언어적 소통적 감흥 네트워크를 통한 협동상호 작용이 새로운 형태의 생활양식으로 등장하는 것을 지적한다. 비물질적 노동이 스스로 창조적 에네르기를 표현함으로써 일종의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코뮤니즘을 형성하게 된다.
▲ 국가와 지구제국
네그리 하트에 따르면 결국 초국적 기업들이 국민국가를 초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가 자본을 견제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거나 해방된 자본을 찬양한다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로 퇴행할 수도 없고 국가 없는 자본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날에 이르러 국민국가는 제국의 행정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국가라는 것은 이 지구제국의 행정부가 된 거야. 제국은 초국적 기업들과 국민국가들의 Hybrid를 이룬다. 미국과 G8, 파리와 런던클럽, 다보스 등 숱한 이질적 단체들과 훈육장치들이 제국의 위계적 구조를 형성한다.
전반으로 볼 때 국가의 홈 패인 공간은 자본의 매끄러운 공간에 굴복하게 되었다. 아울러 근대적인 훈육사회는 포스트모던시대에 관리사회로 이행했다. 이 관리사회에서 주체화는 잡종적 성격을 띠게 되며 삶은 관리되기에 이른다. 폭력, 빈곤, 실업에 대한 공포가 기존의 분할선들을 새로운 분할선들로 대체하고 있다. 제국은 수소폭탄, 화폐, 분위기라는 세 장치들을 통해 지구를 관리한다.
▲ 제국의 시대 실천적 지향
마지막 그렇다면 이제 이와 같은 제국의 시대에 걸맞은 실천적 지향은 무엇이 되겠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날의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 유목적인 시대, 초월적인 코드가 와해된 시대라고 판단한다. 바로 이런 장,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내재성의 장 안에서 다중의 역능이 피어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 역능은 들뢰즈적 의미에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The Actual)’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재적인 것( The Real)’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화, 현실화 한다.
반면 ‘가능적인 것(The Possible)’은 상상적인 것이다. 가능적인, 상상적인 것은 경우에 따라 실재화 된다. 네그리와 하트는 베르그송, 들뢰즈적인 잠재성 개념을 활용하지만 ‘가능적, 상상적인 것에 좀 더 적극적 가치를 부여한다.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가능적인 것을 통과하여 실재적인, 현실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이행은 근본적으로 창조행위이다. 산 노동은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성을 실어 나른다. 산 노동이 공통의 활동력을 발휘함으로써 다중의 권력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이 생각의 핵심적인 것이다.
노동, 지성, 열정, 감흥의 공통적 행위들이 구성적 권력을 형성한다. 여기서 권력은 긍정적인 권력, 다중의 권력을 말하죠. 이런 맥락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현대 정치철학을 핵심문제로써 다음 물음을 제기한다. 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다중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네그리, 하트는 다중이 자율적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을 통해 전체 생활세계를 재생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중들은 주어진 코드에 매몰되기보다 스스로를 그 코드가 변환되는 지점, 즉 특이점으로 만들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특히 시간적 맥락에서 다중의 역능을 정교화한다. 이들에 따르면 시간은 집합적 실존과 소통 네트워크들을 통해서 다중들에 의해 재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시간은 신체와 노동의 시간이다. 오늘날에 다중은 근대에 걸려있던 노동자들의 삶을 옥죄는 그 시계가 아닌 보다 다원적이고 복잡한 시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을 분리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 근대적 시간의 해체는 사회적 임금권의 개념을 생각하게 만든다.
즉 개인노동, 가족임금 같은 개별화된 임금이 해체되고 사회적 임금의 권리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지구적 시민권 및 사회적 임금과 더불어 재점유권이 중요하다. 재점유권은 자본이 앗아간 자율적 자기 생산의 권리이다. 자기 관리 및 자율적 자기 생산이란 만들어지는 주체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주체의 특성이다. 이런 주체는 '~이다.'가 아닌 '~할 수 있다.'를 전제한다.
할 수 있음을 통한 자율적 주체 성립, 그런 주체들의 협동이라는 가치야말로 미래의 가치일 것이다. 스스로를 주체로써 정립한다는 것은 모든 형태의 훈육장치들과의 투쟁을 함축한다. 때문에 자율적 주체는 투쟁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네그리, 하트는 코뮤니즘을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으로서 규정한다.
실질적 포섭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제국의 시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소유의 개념으로 파악되는 시대에 코뮤니즘은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코뮤니즘은 공동체주의지만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복고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 생각은 버려야 한다. 다만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가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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