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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강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현대문화 Ⅱ

하나님아들 2020. 4. 1. 00:08

제14강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현대문화 Ⅱ

◆ 현대사회의 연속성과 판타지


▲ 이데아의 불연속성 (계속)

플라톤이 볼 적에 모든 것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있으면 인식이란 게 안돼. 어쨌든 끊어줘야 인식이 돼. 우리가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구분이 되고 마디가 있고 있으니까 가능한 거죠. 그러니까 인식은 이 세계를 끊어서 보는 거지. 이 탁자도 모양 따라 끊어보니까 인식할 수 있는 거지.

여러분이 나를 인식하는 것도 형태, 색깔에 따라 끊어서 구분해 보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만약에 모든 것이 연속이면 아무 인식도 없겠지. 우리가 현실 속에서 어떤 인식도 없는 연속성을 어디에서 만나죠? 어떤 동일성도 없는 흐름의 세계? 강물에서 만나죠.

여러분 춘천의 공지천에서 강물을 바라본 적이 있는데, 한순간도 쉬지 않고 강물이 흘러갑니다. 완벽한 연속성의 세계지. 어떤 동일성, 어떤 self-identity도 성립할 수 없는 세계죠. 우리가 가진 모든 분별적 self-identity가 다 거짓이라고 한 사람이 누구에요? 붓다죠.

헤르만 헤세의 소설 중에 <싯다르타>를 보면 붓다의 소설 속 직업이 뭐예요? 뱃사공이죠. 붓다가 강물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기가 막히게 잘 묘사가 되 있어요. 그런 것이 흐름의 세계, 완벽한 생성의 세계죠. 생성의 세계에는 딱 끊어지는 분별이 없지.

* 참고자료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 [Hesse, Hermann, 1877.7.2 ~ 1962.8.9]

플라톤을 포함한 그리스 세계는 apeiron을 견디지 못하는 세계야. 아페이론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꺼려하는 문화가 그리스 문화이다. 딱딱 끊어줘야 돼. 그러니까 그리스 예술이라는 것은 apeiron에 명료한 형상을 입히는 거예요.

돌멩이는 apeiron이죠. 물론 돌멩이도 끊어지기야 하지만, 끊어진 것 안에는 아무것도 없죠. 그것을 조각을 하죠. 어떤 연속체를 자르는 것이죠. 음악이 뭡니까? 소리의 연속체를 딱딱 자르는 것이죠. 기타를 쳐보면 알 수 있죠. 기타줄이라는 소리의 연속체를 코드를 잡아서 하모니를 만들어내죠.

그러니까 문화라고 하는 것은 흐물흐물한 apeiron이라는 연속적 흐름에 마디를 주는 거죠. 그런 식의 그리스의 문화 이념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죠. 명확하고 완벽한 self-identity를 가진 이데아들의 세계죠. 가장 clear한 세계죠.

그래서 서구사람들은 clear한 것을 좋아하잖아. clear하고 distinct한 것을 좋아하잖아. 뭔가 이어지는 것, 흐르는 것, 얽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clear한 불연속성을 도래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수죠. 수 또는 기하학. 그래서 apeiron이라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극복해야할 대상이야.

동양인하고는 조금 다르죠. 모든 것을 생성이라고 보는 붓다의 생각이라든가, 모든 것을 역(易)이라고 보는 동양의 생각은, 모든 것을 딱딱 마디를 주는 사고가 아니지. 마디들 둔다는 것, 분석한다는 것에 대해서 서양만큼 큰 의미를 두지 않죠.

예컨대 여러분이 옷을 입을 적에도 양복을 만드는 사람을 tailer라 그러죠. tailer가 자른다는 의미죠. 양복은 내 몸에 맞춰서 딱딱 자르는 거죠. 우리 옷은 헐렁헐렁 하잖아. 마디가 없잖아. 서양의 혁대는 구멍이 뚤려있어서 마디가 딱딱 있는 거죠.

일본에 이세이인가 하는 여성디자이너가 현대디자인에 선풍을 일으켰어요. 이 사람의 디자인은 서양인들이 보면 헝겊 걸친 것 같애. 서양옷은 몸에 딱 맞아야 하는데, 헐렁 헐렁 해. 저게 옷인지 헝겊인지 알 수가 없어. 근데 그게 매력적으로 보여서 어마어마하게 히트를 쳤지.
그리고 또 딱딱 잘라서 apeiron에 peras를 부여해. apeiron이 peras가 없다는 말이거든. peras는 마디, 매듭, 딱딱 끊어지는 거거든. 그런데 그리스사람들한테는 극복해야할 대상이었죠. 그런데 이세이의 옷은 일부러 apeiron을 부여한 거죠. 딱딱 안 자른 거죠.

무조(無調)음악 알죠? 쇤베르크나 베베른 이런 사람드의 음악. 여기서 조(調)라는 것은 소리의 apeiron, 소리의 연속체에 마디를 준 거죠. 딱딱 마디를 주어야 조(調)가 나오죠. 조(調)를 부여하면 그 음계 사이는 빠져 달아나죠.

여러분이 베토벤 이런 음악 듣다가 드뷔시 음악 들으면 어떤 차이가 있어요? 베토벤 같은 음악은 딱딱 끊어지지만 드뷔시는 계속 이어지죠. 문학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프루스트(Proust)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죠. 문장이 끝이 안 나죠. 서양에는 ‘;’표시들이 있어서 더 그렇죠. ‘;’는 어떤 표시입니까? 문장의 끝은 아닌데 끊으면서 이어주는 거죠.

서양사람 책을 읽으면서 ‘;’을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중요해요. 이걸 어떻게 살려서 번역하는가에 따라 번역 실력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요. 여하튼 이 부호가 있으니까 계속 이어져요. 강물처럼 흐르죠. 시간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것은 물질성이고 그래서 감각기호화하려는 물질성은 폄하되었다고 했는데, 물질성이 폄하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물질성이 바로 apeiron적이기 때문이에요.

앞에서 물질성이 폄하받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신간의 지배에 그만큼 더 지배받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 외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물질은 연속체이기 때문에, apeiron적이기 때문이죠. 물질에 형상이 들어가야 딱딱 끊어지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apeiron을 새롭게 사유한다는 것은 바로 물질의 연속성 자체를 주목한다는 이야기가 되죠. 이제는 명료하고 클리어하게 끊어지는 불연속성만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연속성도 선호하게 된 거죠. 만약에 전통적인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에게 예컨대 잭슨 폴락 같은 사람이 르네상스 때 태어나가지고 그런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이 장난치냐고 했을 것이다.


▲ Original의 맥락에서 본 시뮬라크르

지금까지는 apeiron이라는 맥락에서 시뮬라크르를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하나 시뮬라크르가 갖 고있는 맥락은 original과 대비되는 거예요. 시뮬라크르 시대는 오리지널의 개념이 쇠퇴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여기서 내려가 보면 사거리에 보면 족발집이 쫙 있는데, 전부 원조야. 그걸 보면서 아 오리리널이란 것이 없는 거구나 알 수 있어요.

전부 원조라는 말을 쓰는데 따지고 보면 거기에 오리지널은 없지. 시뮬라크르 시대는 오리지널이 거(去)한 시대다. 그러니까 앤디 워홀 작품을 보면 캠벨사 깡통을 좍 배열했다거나 마를린 몬로를 좍 배열해뒀죠. 어떤 오리지널이 있는 이데아가 없죠.

철수도 영희도 누구도 인간의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는 거죠. 모방한다는 것은 뭡니까? 유사성을 전제하죠. 어떤 놈이 더 이데아를 더 나눠갔고 있느냐를 전제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깡통 늘어놓은 거라든지, 마릴린 몬로 널어놓은 거 보면 어떤 놈이 오리지널인지 알 수가 없죠.

그것은 resemblance, 유사성이 아니라 similitude, 상사성에 불과하다. 원래 오리지널 개념이 원래 있던 개념이 아니에요. 전에 <트로이>라는 영화가 호메로스의 작품과 다르다고 해서 욕을 하는 글을 읽었는데, 다르긴 많이 다르죠. 아가멤논이 아킬레스를 죽인다거나 하는 것은 말도 안 되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호메로스도 오리지널이 아니에요. 호메로스의 책도 트로이 전쟁에 대한 여러 버전 가운데 하나의 버전일 뿐이죠. 물론 그 영화는 좀 심하긴 했죠. 이미 우리에게는 절대 오리지널은 아니더라도 상대적 오리지널이 있는데 그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죠.

그런데 그거 자체가 문제는 아니에요. 내가 보기에 아킬레우스를 이상하게 만든 것이 이상한 거지. 누가 어떻게 했는가는 사실 버전이 여러 가지야. 그런데 오리지널이라는 개념이 아주 예민하게 등장하게 되는 게 근대문화에요.


▲ 근대문화에서의 오리지널 - 저작권의 문제

근대문화가 등장할 적에 나온 개념 중에 하나가 저작권이라는 개념이죠. 그러니까 근대문화에서의 저작권 개념은 근대철학의 주체 개념과 나란히 가는 거예요. 근대철학이 주체철학이듯이 근대문화는 저작권의 문화에요.

오늘날 오리지널과 카피가 아닌 여러 버전들만 좍 있는 문화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문학이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플롯을 가져다 쓰면 표절이었죠. 예를 들어 미셀 트루니에(Michel Tournier)의 작품 중에 <방드르디>가 있는데, <방드르디>는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거야. 스토리는 똑같지. 내용만 반대야.

원래 <로빈슨 크루소>는 로빈슨 크루소가 흑인 프라이데이를 문명화시키고 말도 가르치고 그러죠. 그런데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가 불어로 방드르디야, 금요일이란 뜻. <방드르디>에서는 방드르디가 오히려 로빙손을 가르쳐줘요. 거꾸로 반대로 그 틀을 깨요. 표면적인 내용은 다 같은데 핵심적인 내용을 전혀 다른 거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르소>는 아주 제국주의적 작품이에요. 근대 서구인들의 제국주의가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인데, <방드르디>는 이것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는 거지. 이거 꼭 한번 읽어보세요. 굉장히 잘 쓴 소설이에요. 물론 말이 좋아 hypertextuality지, 이렇게 잘 쓴 작품은 드물지.

99%는 다 쓰레기들이지. 뭐 포스트모더니즘 한다고 해서 막 그런 작품들은 전부가 엉터리야. 정말 hypertextuality는 정말 가끔 나오지.

* 참고자료



미셀 트루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꿈』민음사, 2003


그 다음 미술 같은 경우는 본질주의 사실주의를 무너뜨리고 시뮬라크르를 부활시키고 있다. 명멸하게 했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은, 성당이라는 게 묵직하고 크고 self-identity가 정말 확실한 것이 성당인데, 이 그림에서 성당은 흐물흐물해서 건물인지 뭔지 알아보지도 못하게 해놓았죠.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오리지널이 있고 그것을 베끼는 것이 아니지. 감각을 넘어선 essence가 있고 그것을 베끼는 것이 아니죠. 그냥 감각 속에 나타난 흘러가는 apeiron을 그린 거죠. 영상은 말할 것도 없죠. 오늘날 아이들은 인생을 가짜에서 시작하죠.

예를 들어서 애들이 진짜 기린을 보고 그 다음에 기린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잖아. TV에서 기린 보고, 그림책에서 기린 보고, 영화에서 기린 보고 기린 인형을 갖고 놀죠. 그러다가 열 몇 살 되어서 동물원에 가서 기린을 확인하는 거지. 우리는 완벽하게 시뮬라크르 속에서 살아가는 거지.

기린을 먼저 보고 기린의 시뮬라크르를 보는 애들은 없을 거야 아프리카 아이들 아니면. 그런데 사고 안 나는 것이 이상해요. 만날 디즈니에 나오는 거 보다가 안 무서워 하면 사고날 것 같은데. 사자 그러면 ‘어 라이온 킹 반갑다’ 이러다가 사고 안 나는 것이 이상하죠.

이런 시뮬라크르 문화가 우리의 존재론적으로, 미학적으로 흥미진진하고 많은 것을 보여주었지만,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상업적인 것이 엮여있어서 우리를 마비시키는 거지. 우리 의식을 판타지로 마비시키는 거지.

그러니까 아이들, 청소년들을 만나면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안하고 주변에서 진짜 보는 사람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면 영화이야기, TV이야기 이런 이야기만 하죠. 환상 속에서 사는 거야.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를 사는 거지.

실물에는 관심 없어. 실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만나서 이야기하는 90 몇 퍼센트가 영화이야기, 만날 그런 판타지 이야기만 하죠. 그러니까 현대사회라는 것은 거대한 판타지산업사회야. 현대사회의 본질을 하나로 말하라고 하면 판타지산업이지.

판타지 소설, 영화, TV드라마, 이 삶 자체가 판타지로 구성되어 있어. 판타지 산업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죠. 이제는 판타지라는 것이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죠. 뭐가 판타지와 실물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실감도 안나고 촌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 시뮬라크르의 세계


▲ 보드리야르

지금까지 존재론과 미학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사회적인 이야기, 보드리야르 이야기를 잠깐 하고 끝냅시다. 시뮬라시옹은 이전에도 행해져 왔다. 지도나 그림, 인형 같은 것들이 있죠. 문자나 한자 같은 것도 일종의 시뮬라시옹으로 생각할 수도 있죠.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새로운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진단한다. 첫 번째 시대의 시뮬라시옹은 미메시스 개념에 가까운 거죠. original이란 것이 있고, 그 copy라는 의미죠. 두 번째 단계는 기계들이죠. 예컨대 달 착륙을 했던 거미 같은 것들.

세 번째 시뮬라시옹은 정보통신 위에 세워진 것들이죠. 마지막은 이미지의 조작가능성, 하이퍼리얼리티, 리얼과 가짜의 경계를 초월한 것으로, 더 이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완벽한 통제와 관리가 도래했다. 걸프전 같은 것은 모니터를 보면서 하는 전쟁, 마치 어린 아이들이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듯이 하는 것을 보여주었죠.


▲ 실재의 폐허

오늘날 시뮬라시옹은 원본 없는 실재, 초실재를 만드는 과정이다. 실재는 원본의 권위를 상실했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을 ‘실재의 폐허’라고 표현했죠. 보드리야르가 말한 이런 세계를 그린 영화가 <메트릭스>라는 영화죠. 실재의 세계는 사라져버렸고 가상의 세계만 존재하죠. 물론 그 영화세계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세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에요. 왜냐면 영화는 실재 세계가 망하고 완전히 가상의 세계를 따로 만든 거죠.

쟝 보드리아드(Jean Baudrillard)가 말하는 세계는 그런 이원적인 세계가 아니고, 지금 사는 이 세계가 시뮬라시옹의 세계라는 거죠. 진짜와 가짜, 실재와 가능, 원본과 시뮬라크르 사이의 차이는 소멸해버렸다.

앞에서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보았듯이 resemblance는 사라지고 similitude만 남아있다. 이것은 이미지가 실재를 복사하는 시대가 아니라, 실재가 이미지화해서 그 간격이 사라진 시대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가 실재를 덮어버린 시대가 아니라 이미지가 실재인 세계죠. 상상세계가 실재가 된다.

본래적인 지시작용이 사라지고, 예컨대 ‘금강산’이라는 말은 저 북한의 ‘금강산’을 지시하죠. ‘기린’의 그림은 진짜 기린을 지시하죠. 여기서 지시는 지시하는 것과 지시되는 것의 거리를 전제로 하는 거지. 기린 그림과 진짜 기린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지시’가 성립하죠.

거리가 무화되었기 때문에 이제 지시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죠. 단지 원본과 시뮬라크르 사이에 지시관계가 아니라 단지 시뮬라크르 자체 사이에서의 상호참조만이 존재한다. 기표는 물질화된 기의들에 그치고, 즉 기의가 있고 그것이 물질화되어 기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의는 사라지고 단지 기표들 간의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가 만들어진다.

기의가 기표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표들이 조작될 뿐이다. 시뮬라크르는 ‘흉내 내기’가 아니다. 흉내 내기는 인류역사와 함께 존재했죠. 진짜를 위협하는 가짜, 마침내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가짜이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을 계속 감속시키면서 실재의 폐허를 이끌어낸다.

* 참고자료



쟝 보드리야드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1


▲ 시뮬라크르의 네 단계

시뮬라크르는 재현이 아니다. 원본과 유사성/지시를 전제하는 재현과 지시/유사성을 제거한 후 그 힘만을 흡수한 시뮬라크르는 다르다. 이것을 이 사람은 네 단계로 표시하는데,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다.(신성),
이미지는 실재를 변질시킨다.(저주),
이미지는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마법),
이미지는 실재와 무관한 순수 시뮬라크르이다.(시뮬라시옹)

처음에 이미지는 실재를 반영하죠. 이미지는 실재 자체는 아니지만 그러나 실재를 반영한다는 거죠. 플라톤으로 말하면 이것이 뭡니까? eikones지. 여기서 더 가면 이미지가 실재를 변질시킨다. 이미지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그런데 더 가면 이미지는 실재가 부재한다는 것을 감춘다. 이것은 이미지가 실재의 행세를 한다는 거지. 실재가 부재하고 그 부재한 자리를 이미지가 채우는 건데, 아예 이미지가 실재의 부재 자체를 감추어버리니까 이미지가 실재의 노릇을 하는 거지. 자기가.

그 다음에 뭡니까. 이미지는 실재와 무관한 순수 시뮬라크르다. 이제 실재를 감췄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 자체가 아예 필요가 없는 거지 이제. 이미지와 실재가 구분이 되야 반영을 했느니 왜곡했느니 감췄느니 하는 것이 가능한데, 이제 그런 말들이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 이미지와 실재의 구분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 거죠. 그것이 바로 시뮬라시옹의 시대다.

아까 우리가 기린 예를 들었는데, 첫 단계는 뭡니까? 이 기린 그림이 비록 아프리카의 그 기린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기린을 보여주는 단계지. 두 번째 단계는 기린을 영 기린처럼 보이지 않게 그리는 거지. 세 번째 단계는 뭡니까?

그 그림을 기린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거죠. 네 번째는 착각을 한다는 둥, 안한다는 둥 하는 것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 거죠. 더 이상 실재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지. 실재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시대지.


▲ 디즈니랜드와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는 무엇인가를 흉내내고 감추고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는 기호이다. 시뮬라크르의 시대는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시뮬라크르르 만들어낸다.

미국 자체가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생겼다. 미국이 디즈니랜드인데 그것을 감추기위해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지. 그러면 사람들이 디즈니랜드를 보면서 그 바깥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세상 자체가 미친 곳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정신병원이 지어진 거지. 이 세상이 정신병원인데 정신병원을 지음으로써 그 정신병원 바깥은 정신병원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거지. 마치 인디언 살해를 감추어지기 위해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든 것과 똑같은 거지. 이미 죽어버린 세상을 감추기 위해 죽음을 전시한다.
상상의 세계로 제시된 것은 다른 세계가 실재라고 믿기 위한 장치이다. 시뮬라시옹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실재의 폐허의 문제이다. 그것은 실재로의 회귀를 저지 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는 모든 존재론적 층위들 사이의 차이를 무화시켜 함몰(陷沒)시킨다. 그것은 블랙홀이다. 그러니까 TV에서 하는 역사드라마가 그런 거죠. 내가 밥먹다가 <서울1945>이라는 드라마를 봤는데, 황당하더라구.

내용을 조금 보니까 해방정국이더라고, 여운형도 나오고 그래. 그런데 역사드라마인데 전혀 역사하고 상관이 없어. 멜로드라마에다 주제곡이 나오는데, 옛날에 ‘떠날 때는 말없이’ 이런 노래야. 주인공 연기도 그렇고, 흐르는 음악도 그렇고. 그거 보니까 보드리야르가 생각이 나더라고.

여운형도 나오고 박헌영도 나오더라고 그런데 드라마는 역사하고 아무 관계도 없어. 완전히 멜로드라마 삼각관계야. 이건 역사를 왜곡한 것이 아니지. 역사가 있는데 왜곡한 것이 아니라 그 TV드라마가 역사인 거지 사람들한테는.

역사가 있고 그것을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에이 이건 아니다’ 이런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인 거지. 그거 보니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밥이 안 넘어가더라고.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서 시뮬라크르의 회전은 잘 나타난다. 폭탄 투척들이 좌익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지, 극우에 의해 자극된 것인지, 중립주의자들의 것인지, 경찰의 것인지를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까 truth를 알려면 일어난 사건을 접해야 하는데, 존재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버전들만 있는 거지. truth라는 것은 증발해버려. 그런 것이 존재하는 지도 모르죠. 내가 한겨레에서 고전에 관한 원고청탁을 받는데, 항상 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와. 구뭐라는 친군데.

내가 2년 동안 그 친구를 본 적인 없어. 이 친구가 존재할까? 존재하는지 내가 알 수가 있나. 신문에 취재기자로 나오니까 존재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도무지 존재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 오로지 그것의 버전들만 있으니까.


▲ 자본주의, 시뮬라시옹의 원조

시뮬라시옹의 원조가 뭐냐?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팔기 위해서는 모든 짓을 한다. 그러다가 ‘실재의 폐허’를 만들어냈지만.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가 되면 원조는 몰락하게 된다.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번에는 다시 시뮬라크르로서의 실재를 만들어내는데 혈안이 된다.

자 시뮬라크르를 만들어 팔았어. 그런데 시뮬라크르가 범람하니까 원조가 망하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상품을 계속 팔기위해 시뮬라크르에 대비되는 원조를 만들어. 물론 그 원조도 하나의 시뮬라크르지만.

그것이 뭐냐? 추억의 상품화지. 옛날에 이런 것이 있었다는 오리지널을 상품화하는 거지. 과거를 상품화하고.


▲ 보드리야르의 냉소주의

그러니까 보드리야르를 읽으면 내가 더 살아서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 더 살아봐야 뭐 판타지를 소비하는 것, 그러니까 돈 생기면 판하나 사고 영화 하나 보고 뭐 판타지를 소비하는 것 말고는 인생이 아무 의미없는 거지.

근데 내가 보드리야르를 읽다보니 어떤 생각이드냐? ‘학문도 선정적일 수 있구나’ 보통 선정적이라는 것은 대중문화가 선정적인데, 아 학문도 선정적일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너무 극단적으로 하나의 길로 몰아가니까. 예컨대 우리가 영화를 보면 되게 선정적이잖아. 그래야 재미있거든.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만 영화에 나온다면 영화는 얼마나 재미없겠어. 극단적으로 착한 사람, 극단적으로 악한 사람을 만들어야 영화가 재미있겠지.

영화는 그렇게 하면 이해가 가는데, 학문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야지, 재미있게 하기위해 한쪽으로 극단화하면 그게 픽션이지 무슨 학문이야. 보드리야르를 읽다보면 이 사람 너무 선정적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꼭 디스토피아를 그린 SF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

만일 사실이나 진실이 확인 불가능하다면, 아니 그 이야기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해? 어차피 확인 안 될 것을 뭐하러 책을 수십권을 쓰고 그래? 쓸데없이. 자가당착적인 거지. 그런 이야기 있잖아. ‘모든 것이 거짓이다’, ‘모든 것이 권력이다’ 아니 그럼 그 이야기 하는 그 인간은 권력아니야? 이런 이야기는 사실 하나마나 한 이야기야.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모두 자가당착적인 거야. 자기 밑바닥을 자기가 갉아먹는 거야. 다 거짓이면 그런 이야기를 뭐하러 해. 자기는 거짓이 아니야? 그러니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냉소주의뿐이다. 나도 이제 48세니까 인생을 꽤 많이 산편인데, 무슨 주의, 무슨 주의 해서 무슨 주의가 많잖아.

인생의 제일 마지막에 남는 것이 냉소주의야. 실존주의, 구조주의, 사회주의해서 주의가 많은데, 인생의 제일 마지막에 가면 공통적으로 모두 냉소주의야. 그래서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고 사는 것, 나고 냉소주의에 안 빠지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냉소적이 되는 때가 있어. 아니 경험하고 살아보니까 냉소적이 안 될 수가 없어.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 이 사람은 냉소주의를 막 부채질 하는 것 같아. 읽고나면 냉소주의밖에 안남아.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래도 뭐 희망을 주고 그래야 의미가 있는 거지. 냉소주의는 이렇게 이야기 안 해도 자연스럽게 냉소주의가 돼. 그런데 그래도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해줘야 의미가 있는 철학이지. 어찌 보면 싱겁기도 하고!

자 그럼 한 학기동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