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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

하나님아들 2020. 4. 9. 16:42

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1]

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

돈 브라우닝과 토마스 오든의 방법론 비교

Interrelatedness between Theology and Psychology in Pastoral Care:

Comparative Study on Methodology of Don Browning and Thomas Oden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심리학은 미국 문화 전반에 걸쳐서 뿐만이 아니라, 신학 특히 목회상담학을 중심으로한 실천신학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이러한 심리학을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는 미국의 실천신학계에서 크게 환영하며 받아들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겠다. 역사적으로 보면, 1920년대에 임상목회교육(CPE)의 등장과 함께, 정신요법적 심리학들이 목회적 돌봄 특히 상담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왔다. 1950년대 초기 이후에는, 특히 일대일의 심리학 지향적인 상담모델에 대한 강조가 주요 개신교 목회적 돌봄에서 있어 왔는데, 이때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이 일반적인 구조를 제공했고, 또한 로저스의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이 주요 자원으로 등장했다. 목회학 분야에 있어서, 이런 심리학의 영향은 대표적인 실천신학자인 힐트너, 와이즈, 오츠, 클라인벨 등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심리학과 신학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늘 제기되었는데, 70년대 이후의 목회적 돌봄에 있어서 현대 심리학의 도움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 전통의 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 질문은 보다 깊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목회적 돌봄에서 심리학의 무비판적 수용으로 상실된 신학의 뿌리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본 글에서는 다원주의라는 오늘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작업을 한 두사람의 접근 방법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 둘은 신학을 다른 학문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공적신학으로 정정당당히 인정을 받아 목회적 돌봄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카고대학의 브라우닝과, 현대성에 환멸을 느끼고 성서와 교회 교부들 그리고 루터, 캘빈, 웨슬리와 같은 20세기 이전의 신학자들 안에 있는 기독교적 돌봄과 상담의 고전적 자료들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드루대학의 오든이다. 이들이 가졌던 처음의 관심--목회적 돌봄에서 신학적 뿌리의 회복--은 매우 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 신앙과 심리학적 통찰력에 대한 접근이 각기 달라졌기 때문에, 이 둘의 비교는 목회적 돌봄의 분야에서 심리학과 신학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1. 브라우닝과 오든의 공동 기반과 차이


브라우닝과 오든이 함께 나누는 중요한 가정이 있는데, 그것은 세속적 치료에서 내담자에 대한 치료자의 수용은 지금 여기서의 치료적 상황을 뛰어넘는 보다 큰 존재론적 수용의 구조 위에 기초를 둔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전제는 이 둘이 60년대에 취했던 것으로 심리학과 신학과의 관계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고자 했었음을 보여준다.

오든은 바르트의 정통적 신학과 로저스의 "내담자 중심" 심리학을 유비적으로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의 행위와 치료자의 행동 사이에는 상호 관련이 있음을 가정한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의 성육신과 상담자의 공감 사이에 존재하는 유비이다. 오든에 따르면, 성육신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유한성과 소외의 상황에 들어오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조건을 나누시면서, 우리의 준거 구조를 취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오든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빌 2:5-7)과, 치료자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준거 구조에 놓고, 세상을 그가 인식하는 대로 인식하고, 그의 세계를 함께 나누고, 그래서 내담자가 스스로 수용되고 이해되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치료적 과정에는 유비적인 상호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66년에 처음 썼던 그의 글과는 달리 78년에 다시 나온 그의 책 「케리그마와 상담」에서는 신학과 심리학과의 유비를 시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심리학의 한계를 분명히 설명한다. 비록 그런 유비적 추론이 상담에 관한 강화된 전망을 제공한다 할지라도, 치료자가 내담자의 고통을 상상적으로 나누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하는 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의 죄와 소외를 직접 담당하신다는 어떤 결정적인 점에서 이 유비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브라우닝 역시 치료자의 수용 배후에 있는 보다 큰 존재론적 수용의 구조에 기독론적 표현을 주는 것은 적절하다고 동의한다. 여기서 브라우닝은, 만일 치료자의 공감적 수용과 그 뒤에 있는 보다 큰 구조사이에 유비적 관계가 있다면, 그 유비는 어떤 방법으로 작용하는가? 즉, 어떤 구조가 유비의 척도인가, 작은 것인가 또는 큰 것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치료적 상황 안에서 작용하는 수용의 보다 큰 구조는 보다 작은 구조의 근거요 척도요 전제이며, 그것의(보다 작은 구조) 가능성을 구성한다고 본다. 그는 모든 유한한 것은 신앙이나 계시 사건에 뿌리를 둔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계시와 신앙의 본질에 대한 브라우닝과 오든의 미묘한 차이가 시간이 가면서 노출된다.

오든에게 있어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자신을 노출하는 하나님에 의해 전해진 말씀이다. 그리고 신앙이란 이처럼 성서에 의해 증거 되고 예수의 인격 안에서 전해진 그 말씀을 믿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한한 것의 척도인 완전에 대한 궁극적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다고 오든은 본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하숀에 의해 주장된 입장을 추가해서 제안한다. 이 제안에 따르면, 완전에 대한 직관은 신앙 경험 안에서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것의 결정적인 입증은 신앙의 범위밖에 있는 근거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과 정신요법적 심리학사이의 대화는 이 두 입장을 종합하는 맥락 안에서 가장 잘 진행될 수 있다고 브라우닝은 본다. 이처럼 브라우닝은 계시를 그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긍정적인 신학적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적 사건 밖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든의 근래의 저서들을 보면, 계시를 그리스도로 제한하지 않는 미묘한 언급을 한다. 그는 신적인 은혜가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 사이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틈새를 이미 다리 놓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오든의 우선적인 목표는 언제나 성서의 계시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계시의 가능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것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에 비해서, 브라우닝은 유비적 과정이 양쪽으로 작용한다고 제안한다. 첫째로 위에서 아래로(선험적으로), 그러나 또한 아래에서 위로(귀납적으로) 작용을 한다. 즉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치료자의 공감적 수용은 "명백히 하는 유비"가 될 수 있고 또 한편 그것으로 하나님의 수용의 본질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돈 브라우닝의 접근 방법


1) 심리학과 신학의 대화 필요성


현대심리학은 기본적으로 과학적이며 따라서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왔다. 사실 현대심리학이 과학적 지식인 한에 있어서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신학의 주장들과 갈등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 이반 바버는 이런 견해를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 대한 매력적인 해결책이다; 이 두 분야는 그들이 만일 전적으로 다른 기능을 한다면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 과학적 언어의 기능은 자연에 대한 예측이고 통제이다; 종교적 언어의 기능은 자기 위탁, 윤리적 헌신, 그리고 실존적 삶의 방향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대부분의 뛰어난 심리학들은, 그들이 갖고있는 기술적 가치가 무엇이든 지간에 그것에 덧붙여서, 긍정적인 문화 즉 현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형이상학적 상징체계와 윤리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심리학 특히 임상심리학은 비록 그들이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종교적, 도덕적 지평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로이드의 삶에 대한 은유는 '삶과 죽음에 대한 본능'이고 윤리는 '이기주의' 차원이고, 인본주의 심리학의 은유는 '조화'이며, 이들도 윤리적 이기주의 형태를 가진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심리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브라우닝은 과학적이고 서술적인 심리학의 한계를 넘어서 심리학의 내면세계를 밝혀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그는 심리학을 과학적 또는 임상학적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성격과 우리가 사는 방법에 영향을 주는 '실천적 도덕 체계'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감추어져 있지만 치료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유사종교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심리학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차원은 인식되고 비판적 분석을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심리학과 신학은 별개의 것을 다루는 분야라기 보다는, 세계관과 윤리관이라는 같은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갈등할 수 있으며, 서로 상호간의 비판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대화의 기준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즉 심리학이 비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인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단순한 기술적 경험적 이성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이성)에 근거해서 각자 안에 있는 세계관과 윤리관을 비교함으로 어느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심리학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 윤리적 차원을 브라우닝은 밝히려 하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를 하려는 그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 브라우닝의 가장 큰 관심은 다원주의 상황하에서의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인데, 현대 목회적 돌봄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도덕 규범(윤리)의 결핍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상담에서 많이 강조되는 사랑, 수용, 용서 없이는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없으나, 또 한편으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얘기하는 도덕 규범이 없다면 사람은 더 깊은 정신적 혼란으로 인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최선인가를 알고 싶어 하나 오히려 도덕 규범에 혼란을 갖게 되는데,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전통과 세속가치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전통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규범이 자동적으로 오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는 실천적인 도덕 규범을 만들기 위해 그는 전통(신학)과 세속 문화(특히 심리학)와의 상호 비판적 대화가 다음 다섯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은유적 차원 (우리는 어떠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무엇이 가장 궁극적인가?) 2. 의무적 차원(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욕구-경향성 차원(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추구하고자 하는 성향은 무엇인가?) 4. 상황 차원(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무엇인가?) 5. 규칙-역할 차원(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의 규범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이러한 차원들에서의 대화를 통해,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고(권위를 갖고 강제로 강요할 때 오히려 신경증적 질병을 초래하게 되는 권위주의의 폐해는 오늘날 심리학의 도움으로 잘 알려졌으므로), 어떻게 오늘에 맞는 도덕 규범을 세울 것인가를 그는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데이빗 트레이시를 따르면서, 브라우닝은 그의 방법을 "수정된 상호연결방법"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틸리히의 상호연결방법--심리학 같은 세속 분야에서 제기되는 실존적 질문들을 종교적 전통으로 연결시키는 방법--과 달리, '질문들'뿐만이 아니라 '답들'도 심리학에 의해 제시된다고 봄으로, 상호연결방법(실존은 질문하고 계시는 답을 한다는 일방적인 방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브라우닝은 일반 세속문화(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예술 등) 중에서도 특히 심리학에 큰 관심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심리학이 현대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는 필립 리프의 "정신요법 분야들이 현대 개인들의 자기 이해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영향력"이라는 주장을 포용한다. 미국이라는 상황에서, 오늘날 삶의 복잡성, 종교적 언어의 상대적 약화, 우리 세계 안에 넘치는 의미성에 대한 요구 때문에 심리학이 점점 종교의 영역을 차지해 가고 있음을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심리학의 기술적 배후에 있는 철학들과 기독교 신앙과의 상호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더나아가 비기독교인인 현대인에게도) 오늘에 맞는 도덕 규범을 제시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2) 심리학과 신학의 상호 영향


심리학 배후의 함축적인 은유들과 윤리들은 이미 심리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즉, 우리의 새로운 과학적 신화들은, 그들이 우리의 불안에 대답을 주려고 시도하고, 세상에 대한 일반화된 이미지를 제공하고, 삶의 가치, 죽음의 본질,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근거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를 형성하는 한에 있어서, 종교적 사고의 현대적 형태들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리학은 심리학이 아니라 종교의 형태를 취하는 무엇으로서 종교와 경쟁을 하기도 한다. 이제 이러한 심리학이 신학에 대해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신학은 심리학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브라우닝은 깊은 관심을 갖고 분석한다.


(1) 신학에 대한 심리학의 영향


심리학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의 자아실현, 자기배려, 자기존중에 대한 주장은 더욱 효과적으로 전통적인 이웃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로저스는 개인들을 "피상적이고 외적인 근거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자아사랑의 희생자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치료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근거로 해서 "문제의 핵심적 원인은... 그들이 그들 자신들을 경멸하고, 자신들을 무가치하고 사랑 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로, 그가 사랑 받고 있다는 관계의 경험 안에서만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솟아오르는 존경, 수용, 그리고 자신을 좋아함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그 자신을 사랑스럽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수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부드러움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실현화하기 시작할 수 있고, 그가 되고 싶어하는 더욱 사회화된 자아가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그 자신과 행동을 재조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른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입장도 비슷한데, 인간 실존에서 심각한 문제는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혐오'이며, 사람이 자기사랑을 느끼면(자아가 사랑 받고 또 사랑받을만하다고 느끼면) 자동적으로 타인 사랑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심리학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은 도덕성의 핵심으로서 상호성에 대해, 그리고 아가페와 에로스의 관계에 대해 더욱 적절하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공헌을 하였다. 이처럼, 근본적인 자기존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신학은 말을 하지만, 인간 조건의 분석에 있어서 자기혐오나 자기존중의 상실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심리학이 신학자들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신학은 일반적으로 아가페를 타자에 대한, 특별히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기희생의 사랑'으로서 해석한다. 예를 들면, 니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희생적 사랑의 대표적인 예이고 십자가는 그것의 완전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희생적 사랑이고,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노출된다는 것이 니버가 보는 아가페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아사랑, 자기실현의 욕구가 삶에서 어떤 역할을 가져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때 인본주의 심리학은 이웃 사랑의 해석을 자아와 타자에 대한 동등한 배려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보다 이웃 사랑을 현실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브라우닝은 본다.

특히, 에릭슨의 동등한 배려 또는 상호성의 윤리는 이웃 사랑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브라우닝은 에릭슨이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소극적인 건강한 자아의 개념--즉 인간의 기본적이고 자연적인 관심인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며, 그 근거로 에릭슨의 '상호성'에 대한 이론을 다음 세 가지로 부각시킨다. 첫째로, 이것은 계속되는 세대에 생식적인 문제뿐 아니라 폭넓은 돌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즉, 단지 자신의 아이들 뿐만 아니라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둘째로, 에릭슨의 상호성 이론은 '세대에 기초한 이론'위에 세워졌다. 즉,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어른들은 또한 자신 안에 있는 필요들을 채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아들이 어른들의 따뜻하고 인정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어른들도 유아들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유아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어머니는 젖을 빠는 아이들로부터 기쁨을 얻는다. 또한 아이들을 돌보는 바로 그 행위 안에서 부모들은 그들 자신의 "가르치는 본능"을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셋째로, 에릭슨은 「간디의 진실」라는 책에서, 황금률을 자기 희생을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하면서, "진실한 행동은...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을 준비에 의해 지배된다. 이것은 비폭력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행동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비폭력행동을 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더 정당하고 상호적인 행동을 가질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이 고통받고 상처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진실한 상호성과 정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에릭슨의 상호성을 브라우닝은 높게 평가하며, 이것은 이웃 사랑과 황금률을 더욱 적절히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2) 심리학에 대한 신학의 영향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에 대한 은유를 창조자, 심판자 또는 통치자, 그리고 구원자 등으로 표현해 왔다. 이것은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니버가 얘기하는 은유 즉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섭리자로서의 하나님,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은 은유적 표현으로 이들은 각각 창조는 선하고, 우주에는 도덕적 질서가 있으며, 구원(갱신)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은유들은 인간 경험의 광대한 영역에 질서를 부여한다.

기독교 신앙의 이러한 기본적인 은유들은 현대심리학의 은유들과 비교할 때 훨씬 더 풍요하고 다차원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의 은유들--삶과 죽음, 조화--은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만일 종교적 전통의 오래된 은유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인간은 과학적 신화들만 갖고 살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 실제적인 삶의 영역들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너무 일차원적이고 풍부하지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서구 종교적 전통의 다양한 은유들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브라우닝은 그가 선호하는 에릭슨에게도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에릭슨이 가진 것은 '조화'와 '구원'의 함축적인 은유이며, 이 두 가지는 서구 종교전통의 근원적인 은유들이지만,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은유나 이것과 유사한 은유들을 에릭슨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 체계를 필요로 하는 삶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은유들, 다시 말해 그가 삶에 있어서 근본적이라고 보는 일시적인 자기 희생과 상호성을 사람들이 갖도록 힘을 부여할 깊은 은유들이 없다는 것이다.

윤리에 있어서도 이기주의로 빠지는 일반 심리학보다 기독교의 도덕적 핵심은 상호배려로 이해되는 상호성임--물론 에릭슨에게서도 이 점이 나타나지만--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브라우닝은 이제까지 기독교 윤리를 자기 희생에 근거하여 이해한 니버의 견해를 뛰어 넘어 자율성과 상호배려의 원리를 강조한 카톨릭 신학자 쟌센의 견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쟌센은 "이웃 사랑은 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동등한 배려이다"라고 말한다. 니버와 대조적으로, 자기 희생이 기독교인 삶의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상호성과 동등한 배려가 이상적이고, 희생적 사랑은 이들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희생은 목적이 아니라, 진실한 동등한 배려와 상호성의 유지와 회복을 위한 일시적인 전이의 과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쟌센의 아가페에 대한 정의는 자아실현, 타인에 대한 동등한 배려, 그리고 상호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시적 윤리로서의 적절한 자기희생,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쟌센에게서 우리는 동등한 배려로서의 아가페의 모델을 발견하는데, 이 모델은 건강에 대한 자기 배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대심리학으로부터의 통찰력을 통합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이 모델은 자기배려와 타인에 대한 동등한 배려의 도덕적 요구와 균형을 이룬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수의 이웃 사랑은 공평무사한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상호 배려하는 것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해석이다. 예수의 황금률도 상호 배려로서의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적 행동의 근본 원리라고 브라우닝은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심리학에 대해 중요한 교정을 할 수 있다. 프로이드는 윤리 차원에 있어서 파괴적인 본능을 가진 인간으로서 이웃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윤리적 이기주의의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세상은 깊은 차원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각자 자아의 실현은 타인의 자아 실현화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화'를 궁극성의 은유로 갖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은 이웃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들의 가능성 실현화에만 관심을 갖음으로 윤리적 이기주의로 흐르게 되는데, 이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윤리적 이기주의의 성향을 띠는 자아실현의 개념을 폭넓은 도덕적 규범으로 확장시키려는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경향성과, 건강의 개념을 자아실현에 제한하는 그들의 한계를 신학은 밝히고 교정할 수 있는 것이다.


3. 토마스 오든의 접근 방법


1) 오든의 초기 입장: 60-70년대


오든이 말하는 심리학과 신학의 핵심적인 유비 관계를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적 신학(바르트) 구조
심리학(로저스)의 구조

인간의 곤경(죄)
내사된 가치들에 의한 부조화, 또는 갈등

구원의 사건(구속)
(상담자의) 공감, 조화, 무조건적 적극적 배려를 통한 자기수용

은혜안에서의 성장(본래성)
경험에의 개방, 조화, 완전히 기능 하는 인간



여기에서 내담자가 상담자를 찾아올 때 부조화 혹은 갈등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죄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과 유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생이 장래에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고자 계획을 세웠다고 하자(어쩌면 이것은 자신보다는 부모의 가치나 사회의 요구가 자신 안에 내면화되어 마치 자신의 뜻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대학에서 그의 성적은 보통 이하여서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꿈이 실현 불가능하게 보일 때, 그 대학생은 이상적인 자기 개념과 그의 성적에서 보여주는 실제적인 자기 모습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어, 자신감을 잃고 불안에 빠지며 드디어는 상담자를 찾아오게 된다.

이 때 초기의 내담자의 감정을 말한다면, 극단적으로 경직된 신념과 태도, 진실성의 결여, 자신의 감정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감각,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싫어함,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모든 부정적 감정들과 문제들의 책임을 외부에 돌리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담자의 진실성(조화), 내담자의 감정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임, 내담자의 타고난 독특성을 깨닫는 능력 등으로, 내담자는 차츰 방어의 벽을 한 꺼풀씩 벗겨 나가면서 가면적인 겉모습 뒤에 숨겨진 참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상담이 진행되어 가면서, 내담자는 점점 더 완전하게 자신의 감정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제 내담자는 이제까지 자신이 볼 때 수치스럽고 부정적이어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던 자신의 감정들, 공포, 불안, 죄책, 미움, 분노 등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담자는 자아에 관련해서 서로 모순되고 혼동되는 감정들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와 같이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죄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구원과 유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구원받은 이가 은혜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해 가야하는 것처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내담자는 자신의 경험에 더 이상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더 개방적이 되어가며, 덜 방어적이고, 과거에 매이지 않고, 자유스런 결단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해 갈 수 있도록 자신의 능력을 더욱 신뢰해야 한다. 이와 같이 심리학과 신학간에는 인간 내면 흐름에 대한 유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든은 이러한 유비를 설정하면서도, 로저스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으며, 구속에 대한 그의 교리는 개인적인 자기-화해로서 사회적 화해라든지 우주 전체에 대한 구속의 폭넓은 희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한다. 그리고 내사된 가치들(Introjected values, 부모나 사회에 의해서 즉 밖에서 내 안으로 주어지는 가치)을 로저스는 부정적으로만 보려고 하는데, 이는 성숙한 양심과 사회적인 책임감을 갖춘 개인적 자유인으로서 성장하는데 필요한 정당한 도덕적 구조와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당한 요구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사회적 통제라는 합법적인 수단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2]

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2]


2) 고전적 기독교 신앙의 회복


1980년대 논문인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함"에서, 오든은 교회의 '고전적 목회적 전통'이 현대 심리학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어떻게 20세기에 크게 무시되어 왔는지를 심도 있게 논증한다. 예를 들면, 클라인벨, 힐트너, 웨인 오츠, 폴 뚜리니에 같은 20세기 목회학 저자들에 대한 조사에서, 오든은 그들이 어거스틴, 그레고리 교황, 죠지 허버트, 루터, 칼빈, 제레미 테일러 같은 전통적인 저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프로이드, 융, 로저스, 프롬, 에릭 번 같은 현대 심리학자들만 인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글에서 강조되듯이, 그가 60-70년대에 그토록 빠져있던 현대 심리학을 비판하면서 고전적 전통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빠지게 된 원인은, 현대성(modernity)--전(前)현대적 지혜에 대한 경멸, 절대화된 도덕 상대주의, 청소년의 부모 돌봄 거절, 자율적 개인주의의 이념화, 환원주의적 자연주의에 대한 경외적인 복종, 진리에 대한 질문에서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과학적 경험주의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흐름--에 대한 그의 환멸에서 나온다. 특별히 그는 혁신을 주장하는 현대성의 경향--새 것은 좋은 것이고, 더 새 것은 더욱 좋은 것이고, 가장 새 것은 가장 좋은 것(New is good, newer is better, and newest is best)--을 공격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오히려 현대성의 '핵심'은 도덕적 하락의 극적 운동에 도달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세속 치료의 새로운 물결이 등장할 때마다 휩쓸렸던 '운동 신학자'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오든은 어떤 운동들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합한 표현인지를 주의 깊게 식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한 마디로, 20여년간 신학과 심리학간의 다리를 세우는 역할을 하던 오든은 "교통의 왕래가 다리 위에서 오직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다. 즉, 신학은 심리학의 말만 듣는 자였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도덕적 힘과 날카로운 지혜, 꿰뚫는 적절성을 가지고 있는 처음 17세기 동안의 목회적 돌봄의 전통적 지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현대 세계의 실제적 상황 한가운데서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옛 정통주의를 보여주려고 시도하는" 현대-이후 정통주의(Post-modern Orthodox)를 제시한다.

오든은 신정통주의는 실패했고, 근본주의는 고전적 기독교에 대한 현대성의 도전 앞에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믿는다. 그는 틸리히, 바르트, R. 니버, 브룬너, 불트만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니케아 이전의 전통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현대를 수용하려는 개혁적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이었다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근본주의자와 카리스마주의자들은 현대성에 의한 부패의 위험을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념은 정통주의이지만 고전적 신앙을 회복한 '현대-이후 정통주의'에 필요한 날카로움을 결핍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현대-이후 정통주의가 현대-이전의 정통주의와 다른 것은 그것의 "본질적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현대성의 실패한 약속에 대한 환멸의 경험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든은 목회적 돌봄에 대한 고전적 견해가 오늘날 목회자의 목회 실천을 위한 규범적 교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적 뿌리를 상실하고 현대 심리학의 이론에만 의지하려는 현대 목회적 돌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전적 전통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고전적 목회학 저자들은 성서적-신학적 근거와 목회 활동사이에 틈을 결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오든은 그의 책, Care of Souls in the Classic Tradition(고전적 전통에서 영혼의 돌봄), 에서 그레고리 (Gregory the Great, 540-604)를 신중하게 취급한다. 그레고리 연구를 통해서 그는 행동수정기술, 무의식의 분석, 내담자 중심치료의 세 가지 가정(공감, 조화, 무조건적 적극적 배려) 등의 현대 심리학 이론들이 이미 그레고리의 작업 안에 예시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즉, 상담과 심리치료의 실천과 이론적 성향이 고전적 목회전통안에서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전통신앙 노선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놀라운 심리학적 통찰력을 지닌 이러한 고전적 목회전통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통적 기독교를 위한 우리의 비굴한 변증을 그만둘 때이다. 대신에, 성서 본문과 초대 기독교 저자들에게 진지하게 귀 기울일 때이다. 이제는 우리의 깨어지고 혼돈된 현대 상황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어떻게 고전적 기독교 스스로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나를 물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고전적이며 에큐메닉칼한 지혜의 근거 위에서 예수 역사에의 접근을 시도하는 현대-이후 정통주의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이전 정통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교리적으로, 그리고 깊은 신앙심으로 연구하나, 역사 비평학적인 방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성서 비평주의는 예수를 역사적으로 연구했으나, 심한 환원적 자연주의적 철학적 가정과 전제를 갖고 연구했다고 비판하면서, 현대-이후 정통주의는 더 이상 현대성의 환영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대성의 급격한 퇴락 한가운데서 사도적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오든은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든은 목회적 돌봄과 상담의 분야에서, 현대 심리학으로부터 배운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고전적 기독교 유산을 진지하게 검토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돌이키게 하는데 가장 앞선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목회적 돌봄의 고전적 전통과 현대 문화 상황을 연결하기 위하여, 성서와 전통과 개인 경험과 이성을 포함하는 사변형적 방법론을 사용할 것을 오든은 주장한다. 즉 목회적 돌봄에서의 새로운 노력은, 경험적인 것만 강조하는 즉 이해되고 경험으로 확증할 수 있는 것만 수용하려는 현대주의의 정신을 넘어서서, 웨슬리가 주장하고 아우틀러에 의해 다시 크게 강조되었던, 성서, 전통, 이성, 그리고 체험을 무시하지 않는 건전하고도 전체적인 신학적 방법론으로부터 작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은 역시 성서와 그리고 교회의 전통이었다.


4. 브라우닝과 오든의 비교


1) 비판적인 상호관련적 접근


오든은 현대의 과학적 통찰력과 신중하게 대화를 취하면서도, 이들의 역할에 대하여 조심스러워하며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는 신앙이 현대 세계와 직면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서도 이 안에서 기독교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계속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히려 기독교 전통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서적 전통을 세속적 해석들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 상호관련 방법론을 비판한다. 이 방법론은 기독교 전통을 더욱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보기 때문에, 오든은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본문이 기독교인에게 규범이며, 현대 신학의 형태와 내용에 대한 어떤 토의에서도 규범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유대-기독교 전통으로부터의 신학적 주제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출발은 하지만, 오든과 달리 브라우닝의 기본적 추진방향은 비판적 대화를 전제로한 "수정된 상호관련" 방법이다.


(수정된 상호관련 방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기독교의 사실에 대해 역사적으로 해석학적으로 정확한 해석을, 일반인간 경험의 구조 위에서 철학적으로 이해할만하고 공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해석에다가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전통의 신앙을 출발점으로 한다 할지라도, 전통으로부터의 주장은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라 공적인 기준에 따라 자기의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브라우닝은 본다. 이것이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자세라고 말한다. 이때에, 과학은 신학의 발전에 건설적으로 기여할 수 있고, 신학은 또한 과학이론의 규범적 지평을 비판할 수 있다고 브라우닝은 보며, 궁극적으로 신학과 과학은 논쟁에 의해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원주의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에서 나오는 이런 생각 즉 다원주의 상황 안에서 실천 신학은 언제나 철학적 반성이 되야 한다는 생각은 실제 행동을 취하는 데 있어서 사회 과학 특히 심리학적 통찰력(일반적으로 문화적 정보)으로 하여금 기독교 전통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만든다.

브라우닝의 주요 관심은 기독교의 이야기(전통)가 이웃 사랑이나 개인적 가치 같은 어떤 추상적 규범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런 추상적인 규범들의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 전통이 아니라 심리학적 정보이다. "에릭슨과 코후의 인간 본성 이해는 인본주의 심리학 보다 더 기독교적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보는 것처럼, 심리학적 인간 이해가 기독교 전통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인간 이해의 구체적 내용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방법론은 사회과학(특히 심리학적 통찰)으로 하여금 신학과 교회에 너무 지나칠 정도로 기여를 하도록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성이 쇠퇴하는 한 복판에서 옛 정통주의의 생존"에 대한 오든의 견해와 "현대의 신앙상실"에 대한 브라우닝의 견해와의 비교는 그들의 접근의 차이를 분명하게 예증한다. 오든은 오늘날 교회 멤버의 감소는 현대성이 급격히 쇠퇴하는 때에 너무 쉽게 기독교가 현대성을 수용함으로 온다고 믿는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대 에큐메니칼 가르침이 무시되는 곳에서는 설교가 판에 박힌 문구나 도덕주의에만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한 종교적 전통은 그것의 문화적 대안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면, 급격히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브라우닝이 볼 때에, 기독교는 오히려 현대성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했다. 브라우닝은 성서 자체 안에 현대의 신앙 상실을 가져오는 원인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여전히 성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제시한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서 안에는 서로 다른 그리고 뭔가 모순되는 개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성서의 내용들은 생각과 행동의 효과적인 안내자로서 봉사하기에 언제나 충분히 명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브라우닝은 현대 신학자의 눈으로 볼 때, 정통주의의 주장은 지적 책임의 거절이며 세속 경험과 훈련이 제기하는 심각한 질문들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현대인은 신앙을 공적인 사회 속에서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오든은 지금이야말로 고전적 기독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교차 문화적 다원주의, 혼합주의, 그리고 광대한 역사적 변천 시대에서, 초기 기독교인으로부터 배운 전통을 계속되는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왜곡 없이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퇴색시킬 해석에 대해 방어할 수 있을까?" 이다. 오든에 따르면, 정통주의는 현재 의견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에큐메니칼 회의에 의해 규정되고 반복적으로 재확인 되어온 그리고 계속해서 역사 속에 나타나는 현대성에 반복적으로 도전을 하고 변형시켜왔던 사도적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든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역사 비평적 방법의 한계를 지적한다.


예수의 역사에 대해 객관적 탐구를 표방하는 성서-역사적 비평주의는, 19, 20세기의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의 가치를 신약성서 본문에 강요하는 아주 편견된 설명임이 종종 판명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 열망, 신화, 계급의 이익, 그리고 사회적 영향 등으로 단순히 환원되었다.

즉, 과학적인 역사 연구는 모든 증거를 충분히 연구하기도 전에 초자연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든은 비판적 방법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가 단지 이념이 아니고 역사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질문 없이는 예수에 대한 연구가 올바로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아무리 환원주의적 철학적 경향에 의해 실제로 왜곡된다 할지라도, 역사적 방법 그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연구에 있어서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 비판적 방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연구의 출발점으로 현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 방법론이 아니라, 참으로 신이요 인간이신 예수를 인정하는 후기-비판적 고전적 기독교 방법이 필요함을 오든은 제시한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전통적 믿음에 호소하지 않는다.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비판적"이란 말은 세속적인 질문의 공동체 안에서 수락되는 진리와 의미의 판단 기준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은 두 번째라고 볼 수 있다.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신학은 세속적 학문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지고, 전통적 신앙과 일반인간 경험과의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없어 보인다. 브라우닝은 현대성을 수용하려고 시도하는 자유 신학의 사고를 지지한다. 따라서 그는 그의 목회학 방법론에서, 특히 현대 상담에서 강조되는 도덕 규범을 세우기 위해, 기독교 전통에 단순히 의지하기보다는 심리학적 통찰력에 더 의지하게 된다.


2) 다원주의와의 대화

브라우닝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치에 자신을 위임하면서 동시에 종교적 진리에 대한 비판적 탐구, 자율적인 판단, 열려진 질문의 가치에 대해서도 역시 전적으로 자신을 위임한다. 그럼, 어떻게 그는 두 가지 위임을 다 책임 있게 수행해 나가는가? 여기에 있어서 그의 입장은 다소 불분명해 보이는데, 굳이 구분하자면 그는 신중심주의의 입장과 또한 동시에 포괄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브라우닝의 대화 목적은 기독교의 전통과 일반 문화 정보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통 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것을 다른 전통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기독교 전통과 문화 정보는 동등한 수준에서 대화를 출발해야 한다는 그의 방법론의 기본적 가정에서 나온다. 이 점에서 그는 신중심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브라우닝의 전제는 심리요법에서의 모든 치료는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치유 행위 안에 근거를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인간을 치유하는 이 유한한 활동 역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서의 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다른 종교들(문화들)에게 열려져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아무리 브라우닝이 기독교가 신적 실재를 표현하는 많은 역사적 모델의 하나로 존재한다고 인식한다 할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명백히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에 서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포괄주의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브라우닝은 비록 과정신학의 도움을 얻어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재해석하려고 시도한다 할지라도, 가장 중심적인 기독교의 하나님 교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의 유한성을 우상으로 바꾸어 하나님은 결코 다른 수단으로는 알려질 수 없다는 배타적이거나 절대적인 주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하나님이 기독교 밖에서도 말씀하신다면, 기독교는 이러한 밖의 증언들을 무시함으로써 그 자신의 자기 이해가 궁핍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계시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규범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브라우닝의 포괄주의적인 입장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명백하고 권위 있는 계시임을 여전히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비기독교 종교 안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임재를 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브라우닝은 모든 세계 종교들을 동등하게 타당한 구원의 도구로 보려고 하는 윌프레드 스미스나 폴 니터, 죤 힉과 같은 다원주의 입장에 있는 자들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브라우닝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특수성에 대한 포괄주의자의 강조와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을 강조하는 다원주의자의 강조 둘 모두를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입장은 양쪽--기독교 절대화를 위험스럽게 보는 다원주의자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교리를 타협할 수 없다는 배타주의자--에서 비난받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분석해 볼 때, 브라우닝의 학문적 입장에서는 비절대적인 기독론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로 하여금 그가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신앙의 공동체에서 소외되게 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인의 개인적 위탁의 깊이와 확고함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위에서 말한 약간의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는 다르게,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오든에게 있어서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도 다른 종교들(이슬람, 불교, 힌두이즘등)과의 계속되는 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에게 예수에 대해 계속 진술하도록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계 종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예수 오심의 우주적 성격에 대한 증언을 부드럽게 하거나, 세상의 생명이요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약의 확증을 다소 우호적으로 돌려서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이나 그의 예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즉 예수의 복음을 희석시킴을 출발점으로 할 수 없음을 오든은 강력히 주장한다.

오든에게 있어서, 전통의 중심은 그리스도안의 삶이다. 그것은 현 교회의 실재의 유일한 기초가 되고 있는 살아 계신 주님의 부활한 임재이다. 그는 "만일 기독교에 대한 예수의 중심적 기여가 그의 도덕적 교훈이나, (어떤 자유주의 형태가 가르치는 것처럼) 종교적 통찰력이나, 또는 (어떤 종교사회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적 가시적 종교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불교가 구조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오든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중요성을 그의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 조직적 능력이나 또는 그 자신의 과거의 삶의 차원에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공동체의 생명력 있는 중심으로서 예수의 현재 삶에 초점을 둔다. 이것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더욱 효과적인 복음 증거를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더욱 굳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4. 평가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심리학과 신학간의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다원주의적 상황하에서 신학을 "공적" (public)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긴급한 일이었다. 즉, 신학이 더 이상 자기의 특권만을 고집하며 독백으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학들의 주장과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통해 정당하게 신학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표적인 현대 심리학들 안에 있는 함축적인 윤리와 은유들을 명확하게 하며, 동시에 분석된 현대 심리학의 함축적인 은유와 윤리들을 유대-기독교 전통의 자원과 비교함으로써 이 일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전통은 세상에 줄 수 있는 풍부한 유산이 많이 있는데, 이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 토론에 참여함으로 같이 나눌 수 있다고 보며 심리학의 내면을 밝히는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브라우닝의 입장은 시카고 대학 신학부라고 하는 경험을 강조하는 학문적 토양이 성숙된 곳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온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특히 틸리히에게 있어서 보여지는 방법론보다 더욱 진보적인 방법임에 틀림없고,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당히 도전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브라우닝의 심리학과 신학과의 깊이 있는 대화는 우리가 희미하게 인식하던 이 둘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대화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일반 학문들이나, TV, 영화, 책들을 통해,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한 결정하는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갖고 있는(특히 구미에서 현대인의 삶에 가장 영향을 주고 있는 심리학) 배후의 은유와 윤리를 명백히 분석 제시하면서, 과연 어느 것이 삶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가를 체계적으로 토론하자는 것이 그의 의도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신앙과 세속 가치를 이원화시키지 않고, 우리의 현실을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원주의 상황하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보며, 이 점에서 브라우닝의 공헌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그는 다양한 기독교 주장들의 해석들과 다양한 인간 실존의 문화적 해석들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종국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우선적인 충성심이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세속적인 질문의 공동체 안에서 수락되는 진리와 의미의 판단 기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종교적 전통의 진리 주장도 일반인간 경험에 대한 의뢰에 의하여 타당성을 얻을 때까지 불확실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애매모호함은, 도덕적 경험을 종교적 신앙의 시금석으로 강조한 윌리암 제임스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은, 그의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브라우닝은 "우리는 진리를 그 뿌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열매로 안다"고 말한다. 즉, 신학과 심리학의 깊은 은유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그의 주요 관심이었다. 이처럼, 브라우닝은 도덕 규범이 인간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차원에서 신학을 해석을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영혼 돌봄은 전인적인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하고, 정신요법은 정신적 건전함과 육체적 건강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그렇다고 볼 때 브라우닝은 죄론 등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를 단지 심리학적 측면에서 시도함으로 현대인에게 인간 내면의 정신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해석을 주었을 지는 모르지만, 결국 전통적인 구원의 개념이 그에게는 약화된다. 그는 단지 윤리-종교적 영향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차원에서 기독교의 입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생의 의미를 묻기 때문에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윤리적 결정에 더욱 깊게 영향을 미친다. 현대 목회적 돌봄의 심각한 문제, 즉 도덕규범의 결핍을 심리학과 신학의 비판적 대화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또 한편, 사람들은 실천적 도덕적 추론보다는 신앙의 근거 위에서, 은유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들 대부분의 규범적 선택들을 하게된다는 사실을 브라우닝은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브라우닝은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를 깊이 있게 시도했지만은, 도덕 규범을 만들고자하는 좁은 범주에서--실용주의적 차원에서--활용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사회학 특히 심리학에 대한 너무나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함으로 보통의 목회자들에게는 실천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이론이 되기 쉬우며, 이것은 또한 영적이며 종교적인 모든 것들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도덕-환원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다원주의 환경에서 신학적 뿌리를 잃지 않고 기독교를 뚜렷하게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브라우닝의 열심 있는 노력은 실천신학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 마땅하나, 비판적 대화를 위해 기독교 전통신앙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론 등을 약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기독교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목회적 돌봄에서 엄격한 윤리적 규범이 없이는 정체성 혼란이 와서 사람들에게 정신적 질병을 유발시키게 된다는 브라우닝 자신의 주장처럼 말이다.

이 점에서 오든은 전통적 신앙에 대한 철저한 위탁으로 브라우닝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그의 책 Pastoral Theology(목회신학)에서 목회적 돌봄은 철저히 전통유산 즉 성만찬, 설교, 기도, 심방, 성경공부 등을 통해 행해져야 한다는 주장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목회적 돌봄 시리즈인 Crisis Ministry(위기 목회, 1986), Becoming a Minister(목사가 됨, 1987), Care of Souls in the Classic Tradition(고전 전통에서의 목회적 돌봄, 1987), Ministry Through Word and Sacrament(말씀과 성례를 통한 목회, 1989), Pastoral Counsel(목회상담, 1989) 등에서 전혀 현대 심리학에 대한 언급이나 심리학자를 인용함이 없이 오직 고대 전통에서의 문헌만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 그의 입장이 잘 나타난다.

다원주의 상황에서, 크리스챤이 비판적인 대화 없이 다른 견해들을 잘못되거나 열등하다고 배척하는 배타주의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다원주의에 좀 더 진지하자면, 기독교의 독특성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물론 기독교 우월주의나 배타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에 분명한 것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이 기독교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과 같은 사회과학을 무조건 배척하여 신학의 폭을 좁게 하거나, 또는 브라우닝처럼 동등한 차원에서 대화를 시도함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을 희석시키기보다는, 교회의 상황에 맞게 심리학을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되 그 철학적 배경을 비판하는 안목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