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강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현대문화 Ⅰ | |
◆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현대문화
시뮬라크르와 현대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죠. 80년대까지가 이른바 근대화의 시대라면 87년 이후에 본격적 의미의 ‘현대’가 시작되었다고 보겠습니다. 9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여러 가지이나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한 가지가 우리의 시대는 이미지의 시대라는 거죠. 이미지의 시대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있지만, 무엇보다도 매체의 발달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것을 말하죠. 또한 그 이미지들을 지각하는 하는 방식도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의 시대를 조금 폭넓게 말하면 오늘날의 시대는 시뮬라크르의 시대라고 볼 수 있죠. 시뮬라크르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가장 명료하게 나타내는 개념이죠. 이 말은 원래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서 등장하는 ‘시뮬라크르’라는 말을 그대로 음역한 것이죠.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그것이 이야기 되는 방식이나 맥락에 따라, 이미지와 연관되어 이야기될 수도 있고, 사건이나 감성적 언표들과 연관되어 논의될 수 있죠. 시뮬라크르에는 존재론의 문제, 미학의 문제, 사회학의 문제, 세계를 둘러싼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죠. 그런데 우리가 컴퓨터로 simulation을 하죠. 이것은 simulacre에서 온 말이에요. 마치 image가 있으면 imagination이 있듯이, 즉 이미지의 운동, 이미지화, 이미지의 작용이 있듯이 시뮬라크르 만들기, 시뮬라크르의 운동, 시뮬라크르화가 시뮬레이죠. 시뮬라크르 개념이 왜 중요하냐면 이 개념이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고전적인 본질주의 철학(essentialism)과 니체 이후에 전개되는 반본질주의의 대결을 이 개념이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죠.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이 여러권 있죠. <소피스테스>, <파르메니데스>, <티마이오스>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흥미진진한 대화편이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이죠. <소피스테스>에서는 소피스트들은 어떤 존재들인가를 탐구하는 거죠. 그래서 분할을 통해서 소피스트는 기술자냐 제작자냐 이렇게 물어보죠. 그리고 소피스트는 뭔가를 직접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획득한 사람이다. 이렇게 나누어 분할하고. 그러면 소피스트는 무엇을 획득하느냐? 는 질문으로 또 분할해가죠.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소피스트를 규정하죠. 우리가 어릴 때 하던 스무고개와 같죠. 소피스트가 뭡니까? 동물입니까 식물입니까? 동물입니다. 나늘을 납니까 기어다닙니까? 기어다닙니다. 이런식으로 소피스트를 규정합니다. 규정하는 과정에서 <소피스테스> 대화편이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소피스트라는 사람들은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이다는 거죠. 가짜를 만든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예컨대 여기 뽀삐가 한 마리 있다고 하자. 뽀삐는 하나의 개체, individual이죠. 뽀삐, 철수, 지우개는 모두 개체죠. 그런데 강아지라고 하는 것은 개체가 아니라 보편자죠. 그런데 이 보편자를 플라톤은 idea라고 불렀죠. 그러면 이 이데아와 개체의 관계는 뭐냐는 거지. 이 관계는 뭐예요? 모방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뽀삐라는 개체는 강아지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 에이코네스 (Eikones)라 그래. 여기서 오늘날 아이콘(icon)이라는 단어가 나왔죠. 아이콘의 특징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기호와 아이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이콘은 닮았다는 거죠. ‘금강산’이라는 글자는 실제 금강산은 전혀 안 닮았지만, 금강산의 아이콘은 금강산과 닮았죠. 그래서 미메시스는 항상 유사성을 함축한다. 그런데 누가 뽀삐의 그림을 그리거나 뽀삐의 그림자를 만든다거나 칠판에 그린다거나 하였다면 실제 뽀삐는 강아지의 이데아에 가깝지만, 뽀삐의 그림이나 그림자 등등은 강아지의 이데아에서 점점 멀어지죠. 이것을 eidola라고 그래. 나중에 이 말에서 idol, 우상이란 말이 나오죠. 이 우상이 오늘날 뭐죠? 바로 image, imago죠. 현실이 이데아일수는 없어, 인간이 아무리 해도 이데아일 수는 없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어떡하든 인간은 이데아에 가까이 가야해요. 그런데 이데아와의 관계에서 eikones가 아니라 eidola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eidola, 가짜,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라들이다. 이것이 이미지이다. 그런데 소피스트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이 이데아를 탐구해서 유사성을 가진 아이콘이 아닌 가짜를(영상) 만드는 것이다.
이런 eidola을 가리키기 위해서 플라톤이 쓴 단어가 Phantasma 와 Simulacra라는 단어죠. Simulacre라는 단어도 여기서 나왔죠. 플라톤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플라톤의 문제의식을 핵심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에요. 어떤 철학자든 그 철학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뭔가 파악해야합니다. 그 문제의식을 파악하려면 그 사람이 산 시대를 읽어야하고 그 사람이 받은 영향을 알아야 하죠. 플라톤은 가짜가 판치는 시대, 그리스가 멸망의 길에 접어든 시대를 산 사람이죠. 그런데 멸망의 시대를 지배하는 파토스가 있죠. 뭐냐면 뭔가 영원하고 위대하고 붙잡고 싶은 안타까움이 있지. 그래서 거대한 신전이나 절은 전성기가 딱 해가 넘어갈 때 가장 많이 나오죠. ‘아 이제부터 내리막이구나’ 했을때 그 전성기를 붙잡고 싶은 무엇이 있어요. 그 때 사람들은 무식하게 큰 것들을 짓죠. 어마어마하게 큰 것들, 만리장성 이런 것을 짓죠. 어찌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리스가 황혼기로 접어들 적에, 말하자면 이 가짜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짜가 무엇일까? 이 진짜라고 하는 것, 존재라고 하는 것의 판단기준이 무엇일까? 도대체 뭐가 진짜냐 하는 거지. 어떤 것을 진짜다 가짜다 이야기할 때 그것을 판단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뭐냐는 이야기죠. 그리스 사람들에게 진짜다, 참되다는 것은 영원하다는 거예요.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이죠. 모든 것을 마모시키는 시간을 견디면서 영원한 것. 어떤 것이 시간적으로 영원에 가까울수록 참된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런데 영원하다, 시간에 그만큼 굴복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조금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생성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뭔가 시간의 지배를 받고 생성한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물질성을 띄고 있어요. 그래서 자연히 시간의 지배를 덜 받는 이데아를 찾는다는 것은 물질적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죠. 물질은 생성하니까. 우리 몸도 몇 십 년 지나면 문드러져서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무엇이 시간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물질적인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시간의 지배를 받지않는 무언가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뭐냐면 그만큼 물질성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거지. 그것을 인식론으로 바꿔 말하면 뭘까요? 물질이라는 것은 그 만큼 시간의 지배를 많이 받고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이지 않는 것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인식론적으로 바꿔 말하면 무슨 이야기가 될까요? 물질적인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죠? 감각으로 인식하죠. 그러니까 자연히 물질적이지 않은 것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내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거예요. sensible하지 않는 것, sensible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는 거지. 그게 이데아야. 그 이데아를 우리에게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보여준 예가 수학이죠. 내가 여기 칠판에 파란 백묵으로 그리나, 노란 백묵으로 그리나, 빨간 백묵으로 그리나, 이 색깔은 원의 본질에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죠. 선이 두껍거나 얇거나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죠. 이데아 그러면 너무 요원한데, 이데아와 현실 사이에 수학을 넣으면 돼. 수학을 넣으면 조금 더 이해가 가지. 수학에서 더 가면 형태도 없는 순수개념, 순수존재인 이데아가 나오는 거죠.
플라톤은 그런 이데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아요. 이데아가 있다고 전제해야지 이런 이런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말하죠. 플라톤이 단순하게 이런 것이 있어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죠. 이데아가 있다고 해보자는 거지. 이데아가 있다고 가정해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해가 된다는 거지. 그래서 플라톤은 그것을 뭐라고 불렀나 하면, hypothesis, 오늘날의 가설이죠. 하나의 hypothesis로 이데아를 설정해보자. 그리고 그 이데아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게 해보자는 것이죠. 플라톤을 단순화해서, 이데아를 이야기했으니까 현실과 관련이 없다고 하는 것은 플라톤을 굉장히 단순화시킨 거예요. 플라톤 이야기는 이데아를 설정해야 이데아를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갈 수 있다는 것이지. 인간의 이데아를 설정을 해야 그것을 축으로 우리를 바꿔갈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데아라는 것은 하나의 ideal, 이상(理想)이라고 하죠. 이데아를 설정함으로써 그 이데아를 매개로, 그 이데아를 축으로 하여 우리 삶을 바꿔갈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니체의 플라톤 비판은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플라톤을 단순화시킨 그런 비판이죠. 플라톤은 현실을 피하기 위해 이데아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야. 현실을 바꾸기위한 장치로서 이데아를 이야기한 거야. 플라톤이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현대철학이 플라톤을 동네북으로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플라톤을 읽어보면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식의 플라토니즘적인 사유로 갔을 적에 굉장히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영원한 것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시간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것은 그만큼 가짜고 헛되고 심하게 말하면 나쁜 것이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삶 속에서는 우리가 감각으로 포착하는 것이 엄청 중요할 때가 많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표정을 읽는다”고 말할 때가 있지. “저 사람이 나를 좋아 한다” 처럼 말이죠. 물론 대개 착각일 때가 많지만 말이죠. 그런 감이 딱 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개념이나 논리나 보편자가 아니에요. 한 순간에 딱 열리는 거죠. 내 감각으로. 그런 어떤 이미지, 그 이미지라고 하는 우리 삶에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플라톤식 구도 속에서는 폄하될 수밖에는 없지. 현대철학자들이 플라톤에 불만이 많은 것은 영원적인 것, 보편적인 것, 필연적인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순간간적인 것, 우연적인 것, 감각적인 것 이런 것들은 항상 굉장히 무가치하고, 헛된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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