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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현대문화 Ⅰ

하나님아들 2020. 4. 1. 00:07

제13강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현대문화 Ⅰ

◆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현대문화


▲ 이미지의 시대,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시대

시뮬라크르와 현대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죠. 80년대까지가 이른바 근대화의 시대라면 87년 이후에 본격적 의미의 ‘현대’가 시작되었다고 보겠습니다. 9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여러 가지이나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한 가지가 우리의 시대는 이미지의 시대라는 거죠.

이미지의 시대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있지만, 무엇보다도 매체의 발달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것을 말하죠. 또한 그 이미지들을 지각하는 하는 방식도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의 시대를 조금 폭넓게 말하면 오늘날의 시대는 시뮬라크르의 시대라고 볼 수 있죠.

시뮬라크르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가장 명료하게 나타내는 개념이죠. 이 말은 원래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서 등장하는 ‘시뮬라크르’라는 말을 그대로 음역한 것이죠.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그것이 이야기 되는 방식이나 맥락에 따라, 이미지와 연관되어 이야기될 수도 있고, 사건이나 감성적 언표들과 연관되어 논의될 수 있죠.

시뮬라크르에는 존재론의 문제, 미학의 문제, 사회학의 문제, 세계를 둘러싼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죠. 그런데 우리가 컴퓨터로 simulation을 하죠. 이것은 simulacre에서 온 말이에요. 마치 image가 있으면 imagination이 있듯이, 즉 이미지의 운동, 이미지화, 이미지의 작용이 있듯이 시뮬라크르 만들기, 시뮬라크르의 운동, 시뮬라크르화가 시뮬레이죠.

시뮬라크르 개념이 왜 중요하냐면 이 개념이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고전적인 본질주의 철학(essentialism)과 니체 이후에 전개되는 반본질주의의 대결을 이 개념이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죠.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이 여러권 있죠.

<소피스테스>, <파르메니데스>, <티마이오스>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흥미진진한 대화편이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이죠. <소피스테스>에서는 소피스트들은 어떤 존재들인가를 탐구하는 거죠. 그래서 분할을 통해서 소피스트는 기술자냐 제작자냐 이렇게 물어보죠.

그리고 소피스트는 뭔가를 직접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획득한 사람이다. 이렇게 나누어 분할하고. 그러면 소피스트는 무엇을 획득하느냐? 는 질문으로 또 분할해가죠.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소피스트를 규정하죠. 우리가 어릴 때 하던 스무고개와 같죠. 소피스트가 뭡니까? 동물입니까 식물입니까? 동물입니다. 나늘을 납니까 기어다닙니까? 기어다닙니다. 이런식으로 소피스트를 규정합니다.

규정하는 과정에서 <소피스테스> 대화편이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소피스트라는 사람들은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이다는 거죠. 가짜를 만든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예컨대 여기 뽀삐가 한 마리 있다고 하자. 뽀삐는 하나의 개체, individual이죠. 뽀삐, 철수, 지우개는 모두 개체죠. 그런데 강아지라고 하는 것은 개체가 아니라 보편자죠. 그런데 이 보편자를 플라톤은 idea라고 불렀죠.

그러면 이 이데아와 개체의 관계는 뭐냐는 거지. 이 관계는 뭐예요? 모방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뽀삐라는 개체는 강아지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 에이코네스 (Eikones)라 그래. 여기서 오늘날 아이콘(icon)이라는 단어가 나왔죠.

아이콘의 특징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기호와 아이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이콘은 닮았다는 거죠. ‘금강산’이라는 글자는 실제 금강산은 전혀 안 닮았지만, 금강산의 아이콘은 금강산과 닮았죠. 그래서 미메시스는 항상 유사성을 함축한다.

그런데 누가 뽀삐의 그림을 그리거나 뽀삐의 그림자를 만든다거나 칠판에 그린다거나 하였다면 실제 뽀삐는 강아지의 이데아에 가깝지만, 뽀삐의 그림이나 그림자 등등은 강아지의 이데아에서 점점 멀어지죠. 이것을 eidola라고 그래. 나중에 이 말에서 idol, 우상이란 말이 나오죠. 이 우상이 오늘날 뭐죠? 바로 image, imago죠.

현실이 이데아일수는 없어, 인간이 아무리 해도 이데아일 수는 없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어떡하든 인간은 이데아에 가까이 가야해요. 그런데 이데아와의 관계에서 eikones가 아니라 eidola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eidola, 가짜,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라들이다.

이것이 이미지이다. 그런데 소피스트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이 이데아를 탐구해서 유사성을 가진 아이콘이 아닌 가짜를(영상) 만드는 것이다.


▲ 이데아

이런 eidola을 가리키기 위해서 플라톤이 쓴 단어가 Phantasma 와 Simulacra라는 단어죠. Simulacre라는 단어도 여기서 나왔죠. 플라톤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플라톤의 문제의식을 핵심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에요.

어떤 철학자든 그 철학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뭔가 파악해야합니다. 그 문제의식을 파악하려면 그 사람이 산 시대를 읽어야하고 그 사람이 받은 영향을 알아야 하죠. 플라톤은 가짜가 판치는 시대, 그리스가 멸망의 길에 접어든 시대를 산 사람이죠.

그런데 멸망의 시대를 지배하는 파토스가 있죠. 뭐냐면 뭔가 영원하고 위대하고 붙잡고 싶은 안타까움이 있지. 그래서 거대한 신전이나 절은 전성기가 딱 해가 넘어갈 때 가장 많이 나오죠. ‘아 이제부터 내리막이구나’ 했을때 그 전성기를 붙잡고 싶은 무엇이 있어요.

그 때 사람들은 무식하게 큰 것들을 짓죠. 어마어마하게 큰 것들, 만리장성 이런 것을 짓죠. 어찌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리스가 황혼기로 접어들 적에, 말하자면 이 가짜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짜가 무엇일까? 이 진짜라고 하는 것, 존재라고 하는 것의 판단기준이 무엇일까?

도대체 뭐가 진짜냐 하는 거지. 어떤 것을 진짜다 가짜다 이야기할 때 그것을 판단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뭐냐는 이야기죠. 그리스 사람들에게 진짜다, 참되다는 것은 영원하다는 거예요.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이죠. 모든 것을 마모시키는 시간을 견디면서 영원한 것. 어떤 것이 시간적으로 영원에 가까울수록 참된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런데 영원하다, 시간에 그만큼 굴복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조금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생성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뭔가 시간의 지배를 받고 생성한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물질성을 띄고 있어요. 그래서 자연히 시간의 지배를 덜 받는 이데아를 찾는다는 것은 물질적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죠. 물질은 생성하니까.

우리 몸도 몇 십 년 지나면 문드러져서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무엇이 시간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물질적인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시간의 지배를 받지않는 무언가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뭐냐면 그만큼 물질성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거지.

그것을 인식론으로 바꿔 말하면 뭘까요? 물질이라는 것은 그 만큼 시간의 지배를 많이 받고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이지 않는 것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인식론적으로 바꿔 말하면 무슨 이야기가 될까요? 물질적인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죠? 감각으로 인식하죠.

그러니까 자연히 물질적이지 않은 것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내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거예요. sensible하지 않는 것, sensible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는 거지. 그게 이데아야.

그 이데아를 우리에게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보여준 예가 수학이죠. 내가 여기 칠판에 파란 백묵으로 그리나, 노란 백묵으로 그리나, 빨간 백묵으로 그리나, 이 색깔은 원의 본질에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죠. 선이 두껍거나 얇거나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죠.

이데아 그러면 너무 요원한데, 이데아와 현실 사이에 수학을 넣으면 돼. 수학을 넣으면 조금 더 이해가 가지. 수학에서 더 가면 형태도 없는 순수개념, 순수존재인 이데아가 나오는 거죠.


▲ 플라톤 옹호

플라톤은 그런 이데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아요. 이데아가 있다고 전제해야지 이런 이런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말하죠. 플라톤이 단순하게 이런 것이 있어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죠. 이데아가 있다고 해보자는 거지. 이데아가 있다고 가정해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해가 된다는 거지.

그래서 플라톤은 그것을 뭐라고 불렀나 하면, hypothesis, 오늘날의 가설이죠. 하나의 hypothesis로 이데아를 설정해보자. 그리고 그 이데아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게 해보자는 것이죠. 플라톤을 단순화해서, 이데아를 이야기했으니까 현실과 관련이 없다고 하는 것은 플라톤을 굉장히 단순화시킨 거예요.

플라톤 이야기는 이데아를 설정해야 이데아를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갈 수 있다는 것이지. 인간의 이데아를 설정을 해야 그것을 축으로 우리를 바꿔갈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데아라는 것은 하나의 ideal, 이상(理想)이라고 하죠. 이데아를 설정함으로써 그 이데아를 매개로, 그 이데아를 축으로 하여 우리 삶을 바꿔갈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니체의 플라톤 비판은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플라톤을 단순화시킨 그런 비판이죠. 플라톤은 현실을 피하기 위해 이데아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야. 현실을 바꾸기위한 장치로서 이데아를 이야기한 거야. 플라톤이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현대철학이 플라톤을 동네북으로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플라톤을 읽어보면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 플라톤 비판

그런데 이런 그리스식의 플라토니즘적인 사유로 갔을 적에 굉장히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영원한 것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시간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것은 그만큼 가짜고 헛되고 심하게 말하면 나쁜 것이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삶 속에서는 우리가 감각으로 포착하는 것이 엄청 중요할 때가 많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표정을 읽는다”고 말할 때가 있지. “저 사람이 나를 좋아 한다” 처럼 말이죠. 물론 대개 착각일 때가 많지만 말이죠. 그런 감이 딱 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개념이나 논리나 보편자가 아니에요.

한 순간에 딱 열리는 거죠. 내 감각으로. 그런 어떤 이미지, 그 이미지라고 하는 우리 삶에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플라톤식 구도 속에서는 폄하될 수밖에는 없지. 현대철학자들이 플라톤에 불만이 많은 것은 영원적인 것, 보편적인 것, 필연적인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순간간적인 것, 우연적인 것, 감각적인 것 이런 것들은 항상 굉장히 무가치하고, 헛된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는 거죠.

 

◆ 현대사회의 연속성


▲ 시뮬라크르의 대두

이런 플라톤적인 사고를 극복하면서 시뮬라크르를 사고하게 되는데, 시뮬라크르를 사고하는 여러 축이 있어요. 현대철학과 고대철학의 차이점은 현대철학이 이미지, 순간을 폄하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존재론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거죠.

그런 철학에는 첫 번째 사건을 파악할 경우죠. 이것은 한순간에 벌어지는 것을 보죠. 어떤 이의 말 한마디가 내 기분을 완전히 바꿀 수 있고, 판사의 선언이 한 순간에 죄인과 무죄인을 만들죠. 이것이 사건입니다.

또 이런 맥락에 이미지론이 있죠. 이미지라는 것은 항상 감각으로 다가오죠. 이미지론은 곧 감각론이기도 해요. 그 다음에 시뮬레이션, 가상적인 것이 있죠. 가상현실은 플라톤이 보기엔 가짜고 그림자죠. 그러나 우리 삶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죠.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죠. 정리하면 사건은 존재론에, 이미지는 미학에, 시뮬레이션과 가상현실은 사회학에 연결되겠죠. 물론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고 서로 겹치지만.


▲ 사건으로서의 시뮬라크르(존재론)

시뮬라크르의 복권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데, 시뮬라크르의 복권이라는 일종의 존재론적 혁명은 사건의 철학으로 결실을 맺죠. 플라톤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를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식으로 말한다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일종의 이데아의 타락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플라톤 철학에서는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를 찾아보기 힘들죠.

그런데 사건은 막연한 생성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죠. 막연한 의미에서의 생성은 연속적인 것이죠. 흐름으로 이해됩니다. 생성한다는 것은 흐름으로 이해되지만, 사건은 흐름으로써의 생성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죠.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개별성, individuality를 가집니다.

그냥 생성하는 것, 막연한 의미에서의 생성은 흐름이죠. 그런데 흐름은 어떤 마디, 매듭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고, 마디나 매듭이 결여된 사유는 너무나 막연하죠. 그런데 event, 사건이라는 것은 그냥 흐름이 아니라 individuality, 개별성을 가지죠. 그 때, 저 때, 이 때, 그 때 그 시절 이런 식이죠. 정관사 the가 붙은 그 사건은 분절된다는 거죠.

어떤 밤에 호수가 있는데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랐어. 이것은 event지.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호수 옆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잉어가 튀어 오른 것은 이벤트가 안 되고 그 살인사건의 배경이 된다. 호수의 물결이 살랑살랑 대는데,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것도 사건이죠.

그런데 여기서 잉어가 튀어 올랐다. 이제 이것이 사건이 되고 살랑대는 호수는 배경이 되죠. 여기에 또 살인사건이 났다. 그러면 살인은 잉어를 배경으로 밀어젖히면서 솟아오르죠. 사건이라는 것은 다른 것을 배경으로 밀어내면서 솟아오르는 것을 말한다.

다른 것들과 같은 지평이라면, 아무리 격한 운동성이 있어도 그것은 사건이 아니에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도둑이 천지에 널려있다. 이런 상태에서 도둑이 들었다.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에요. 그런데 어떤 마을이 평화로워서 도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도둑이 한번 들면,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는 거죠. event라고 하는 것은 똑같은 지평에서 일어나는 것은 event가 아니에요. 다른 것들을 자기 배경으로 밀어내면서 솟아올랐을때 이것이 event인 거죠. event라는 것은 딱 분절되어 나오는 것이죠.

누군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표정이 계속 바뀌죠. 뀔 것이다. 그 수없이 바뀌는 표정 중에서 한 표정이 굉장히 의미가 있다면 그 표정은 기타의 표정을 밀어내면서 솟아오르죠. 돋아나는 거죠. 이벤트는 항상 그렇게 등장하죠. 그렇기 때문에 막연한 의미에서의 생성과 막연한 의미에서의 흐름은 상당히 다른 것이다.

둘째,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의미와 연계되어서 이야기된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띄고 읽힐 적에 하나의 사건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의미가 투영되었을 때 사건이 되기도 한다. 판사가 형을 언도하면 그 사람은 실체적으로는 바뀌는 것이 없지.

5년형이라고 한다고 해서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고, 얼굴색이 바뀌는 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없죠. 실체적인 변화가 있는 게 아니야. 그런데 그 순간 그 사람은 죄인으로 확 바뀌는 거죠. 그러니까 event죠. 사건이 일어나서 의미로 읽히기도 하지만, 의미가 개입함으로써 사건이 되는 거죠. 사건과 의미는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시뮬레이션

시뮬라크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세계에서 발생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시뮬라크르를 조작할 수도 있죠. 다시 말해 시뮬라시옹, 시뮬레이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정보라든가 컴퓨터, 인터넷, 영상, 게임 이런 것들이,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지각하고 이미지를 읽어내는 레벨이 아니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조작하고 탐미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식의 변화는 세계라는 개념 그 자체를 뒤흔들어 놓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통사회에서 대체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현실과 초월세계에요. 플라톤 같은 경우에 개체들과 이데아들, 개별적인 존재들과 이데아들, 동양같은 경우에는 현실세계와 하늘세계, 천(天)이라는 세계. 그러니까 전통적인 세계관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와 초월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어요.


▲ 미시세계

그런데 근대에 오면 달라지죠. 초월세계가 부정되기에 이르죠. 그 대신에 뭐가 등장하냐 하면 미시세계가 등장하죠. micro world가 등장하죠. 옛날 사람들한테는 마이크로가 빈대나 이 정도였죠. 16세기 말에 현미경이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이 들여다봤어요. 그렇지만 의미를 읽어낼 수가 없었죠.

그러니까 그때 사람들에게 micro한 세계에 미생물이 살고 있다는 얘기는 오늘날 안드로메다성운에 외계인이 있더라는 소리를 듣고 느끼는 것보다 더 큰 경악을 느꼈겠죠. 상상하기 힘들었겠죠. 오늘날에는 미생물, 분자, 원자, 미립자, 소립자 등등을 다룬다. 우리는 미시세계에 익숙하죠.

옛날에는 초월세계와 현실세계를 다뤘다면 오늘날에는 미시세계와 현실세계죠. 다루 인간과 세포와 생명체, 분자, 원자를 다룬다. 현실을 살아가는 세계는 개체들의 세계이다. 세포와 생명체, 분자와 세포, 원자와 분자.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세계는 이 개체들의 세계지.

이 인간, 이 탁자, 이 백묵, 이 책, 저 강아지, 개체들이죠. 전통적인 사고가 그 개체들의 세계와 초월적인 세계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면, 이제 거꾸로 개체 이하의 미시적인 것과 개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죠.


▲ 가상세계로서의 시물라크르(사회학)

그런데 현실세계도 아니고 초월세계도 아니고 미시세계도 아닌 제4의 세계가 등장하죠. 그게 바로 가상세계죠. 가상세계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현대문명의 이해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이 가상현실과 같은 문제에는 양면성이 있죠. 하나는 존재론적으로는 대단히 흥미롭다.

이제까지 우리가 몰랐던 세계, 알 수 없었던 차원을 열어주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윤리적 정치적으로 대단히 위험하기도 하다. 사람들을 조작을 하고 자본의 틀 속에 몰아넣고 사람들을 현실 속에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 살도록 만들죠.

마치 옛날에 물리학이 발달하니까 갖가지 문명의 이기가 생겼는데 그것이 동시에 핵폭탄이 되어 수십 만 명을 죽였듯이 새로 생긴 이 기술도 존재론적인 흥미진진함과 윤리적 정치적 위험성이 공존하는 그런 세계라고 볼 수 있죠.


▲ 이미지로서의 시뮬라크르(미학)

이렇게 현대에 새롭게 이야기되고 있는 시뮬라크르는 사건의 측면이나, 가상현실의 측면에서 논의를 낳고 있는데, 또 하나 중요한 측면이 미학적인 측면이죠. 오늘날 우리가 미학이라고 번역하는 aesthetics라는 말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감성론’으로 번역이 되죠. 그런데 <판단력 비판>에서는 ‘미학’으로 번역이 됩니다. 애초에 미학이라는 것이 잘못 번역된 거죠.

이렇게 한편으로는 감성론으로 이해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학으로 이해되는 이런 이중성을 극복하는 것이 오늘날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죠. 재미있는 것은 감성이라고 하는 것, 즉 sensibility라고 하는 것은 옛날보다 훨씬 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는데, 역으로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경계가 흐려지죠.

말하자면 감성론과 미학이 점점 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거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근대적인 의미의 예술개념으로 재현되지 않는 aesthetics, 감성학 이라고 할까, 감성론과 미학의 구분을 떠난 새로운 감성학이 오늘날 필요하게 되죠.


▲ 아페이론(apeiron)

이것은 또 하나 중요한 이야기를 낳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현대예술이 apeiron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왔다는 거죠. 이 아페이론(apeiron)이라는 것은 이데아와 대조적인 말이에요. 이데아라는 것은 영원해야 하는데, 영원하다는 것은 반드시 타자를 배제해야 해요.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 자기가 변하잖아. 그러니까 타자와 딱 절연되어 있어야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이데아라는 것은 타자를 배제하는 거예요. 타자를 배제하는 것을 ‘pure', 순수하다 그러죠. 이렇게 타자를 배제해서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을 self-identity, 자기 동일성이라 그러죠.

일상에서 이야기하는 ‘너의 self-identity를 가져라’고 할 때의 그것은 아닙니다. 다른 뉘앙스에요. 철학적인 논리적인 의미에서의 자기동일성을 말합니다. A는 오로지 A이기만 한 것이지. A가 B와 관련을 맺으면, B 때문에 A가 변하겠지. 그러니까 무엇인가가 영원한 것은 자기동일적이다. 그것이 이데아의 성격이에요.


▲ 이데아의 불연속성

이데아라는 것이 가지는 중요한 성격은 불연속성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완벽한 불연속성의 세계에요. 그런데 그 불연속성이 깨지면 연속성이 도래하면 관계와 운동이 발생하게 되죠. 예컨대 춥다는 것은 이 방의 공기와 내가 관계를 맺은 것이지. 내 말이 여러분 귀에 들어가는 것은 관계를 맺기 때문이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방식이든 연속성이 개입한다는 것이에요. 어떤 존재들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불연속을 이루면, 거기에는 관계라는 것이 없지.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도 관계를 피할 수는 없거든요. 예컨대 우리가 밥을 먹죠. 밥은 내가 아니죠. 나하고는 타자야.

그런데 내 안에 들어오죠. 내가 되죠. 내 안에 있는 입김이 나가죠. 여러분 대화하면 소리가 왔다 갔다 하죠. 눈빛이 왔다 갔다 하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관계를 피할 수 없어요. 그 관계를 피하는 유일한 세계는 뭐냐? 이데아의 세계에요. 물론 이데아에도 관계는 있어.

그러나 그것은 logical한 관계야. 물리적인 관계가 아니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물리적 관계를 피할 수 없죠. 그러니까 뭡니까? 항상 변하게 되죠. 운동 아니야 운동. 어떤 것도 관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연속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변하고 운동하겠지. 계속 운동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와 운동 속에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