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교회사)
L. J. Joosse 저,
안재경 역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교회사는 역사를 다루는 분야이다. 곧 교회의 역사를 다룬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교회의 역사이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마16:18).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를 삼으라는 전도/세례 명령에서 교회 설립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다. 교회 설립의 약속은 그 주님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교회를 모으셨고, 지금도 모으시며, 스스로 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시다(엡 2:20).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역이시며, 동시에 제자인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구약에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는 계시사로 우리에게 전승되었고, 초대교회의 역사도 계시사로 완결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예수님의 약속은 성령 주심과 임재로 계속 실현되면서, 교회는 존속되고 설립되며 교회역사는 계속된다. 교회사는 바로 이 교회의 역사를 다룬다. 곧 하나님의 사역의 역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그들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영광을 본다. 구약의 역사서처럼 교회사도 언약의 백성인 신앙의 후손들에게 부단히 전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사는 사건 나열을 벗어나 이야기로 전승되어야 한다. 각 족속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영혼만 구원받음이 아니라 성령으로 임재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다시 오실 주님과 영광의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도록 교회사는 이야기꺼리로 씌어져야 한다. 이것을 본서는 만족시켜 줄 것이다. 역사만 배우지 않고 교회의 역사를 배우고 나아가 삼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잘 이야기해 줄 것이다.
1995년 5월
고신대학 신학대학원 연구실에서
유해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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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 2
1. 교회사 서론 / 4
2. 옛 것에서 새 것으로 / 6
3. 내부적인 공격에 직면한 새로운 교회 / 9
4. 외부적인 핍박에 직면한 새로운 교회 /13
5. 새로운 교회에서 카톨릭 교회로 / 16
6. 국교가 된 카톨릭 교회 / 21
7. 카톨릭 기독교회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로 / 23
8. 동, 서교회의 분리 / 26
9.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복음적인 교회로 / 29
10. 복음적인 교회에서 개혁교회로 / 32
11. 복음적인 교회에서 장로교회로 / 38
12. 개혁교회의 교회연합운동 / 42
13. 종교개혁의 진전 / 46
14. 보편적으로 확립된 개혁, 장로교회 / 50
15. 기존 개혁교회에서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로 / 54
16. 기존 장로교회에서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로 / 58
17. 연합적인 개혁된 교회를 향하여? / 62
18.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에 의해 수행된 복음전도
(부록)
개혁신앙고백교회로서의 개혁교회와 한국장로교회(허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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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의 중요성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주목해야 할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우리는 교회사가 성경역사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성경역사(Biblical history)는 구약과 신약의 기간 내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 혹은 다른 말로 교회의 백성들과 관련지어 일어났던 사건들을 뜻한다. 그 사건들은 성경에 나타나있다. 그런 까닭에 성경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사도행전의 끝에서 멈춘다.
교회역사(Church history)는 세상의 시작부터 예수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실 때까지(the forthcoming return)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에 관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는 더 이상 교회역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성경역사와 교회역사 사이의 아주 큰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역사는 ‘계시-역사’를 또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인데, 계시역사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분 자신과 그분의 구원의 사역을 계시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비록 교회역사는 성경역사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교회역사는 훨씬 더 많은 기간들과 사건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탄생 전 2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마카비 전쟁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역사는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성경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그런 목적으로 교회역사를 강조하지 않는다.
교회역사도 성경역사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언약역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역사는 지나간 세기동안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후에도 이런 교제(fellowship)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담(창3:15)과 인류와 더불어 교제를 재확립하셨다. 창세기 9:8-17절에 나온 대로 노아에게 말하셨던 말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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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사가 단지 사람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들을 무엇보다 먼저 명백히 증언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역사를 기록하거나 연구할 때 모든 시대의 교회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관찰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역사 속의 교회가 자체로 완전하게 될 것이라거나 어떤 식으로든 변하지 않는 실체인 것처럼 말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역사를 통해 복음을 이해하고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점차로 넓어지고 깊어지는, 점진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사역인 ‘구원역사’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계신다(롬10:14∼17). 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할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이 진행과정에 참여자가 되게 하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진실한 신자들과 상관이 있다.
그러면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27장은 보편적인 기독교회에 대해 명백히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보편적인 교회 혹은 우주적인 교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 씻음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되어 인치심 받음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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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도 역사(최소한 현재역사라 할지라도)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역사를, 특별히 현재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계신다. 그 분은 온 인류 중에서 홀로 당신의 교회를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하고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우시는 사역을 수행하셨음을 알리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진실한 믿음 속으로 불러들이신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요소들을 잘 주목해 보면서 앞으로 개관할 교회사의 몇몇 사건들을 잘 살펴보면 지나간 교회역사에서 일어났던 분쟁들의 배후뿐만 아니라 실재적인 사실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몸 된 교회를 유지해 오셨는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미 얻었으며, 앞으로 유지해 나가야 할 교회적인 발전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옛 것에서 새 것으로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11:19)고 말했다.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 그는 이러한 분쟁들을 개인적으로 경험하였다.
새 언약(행 2장)으로 말미암아 교회생활이 확립되었을 때 모세의 가르침을 고수해야 할지에 대한 수많은 이견들이 있었다.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유대인의 회당생활을 청산해야 하는가? 모세의 율법들을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가? 이방인들 중에서 새로 입교한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조력자인 디도의 경우처럼)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오순절 이후 얼마동안, 특히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던 기간에 여러 번이나 제기되었다.
바나바는 회중들에게 바울을 사도로 소개했다. 첫 번째는 안디옥에서,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말이다. 다른 교사들과 같이 사도들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가서 회중들을 가르쳤던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고 와 그로 하여금 얼마동안 안디옥에서 선생으로 가르치게 했다. 이것이 AD.37∼43년의 일이었다.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리셨다(행 13장). 이에 두 사람은 첫 번째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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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바리새인들도)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와 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대 기독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이 안디옥에 전해진 즉시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이 첫 번째 선교여행을 할 동안에 이방인들이 기독교인들이 되어 교회생활에 참여하게 되자 예루살렘교회의 바리새인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제기한 질문은 ‘하나님의 종이었던 모세의 가르침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몇 몇의 형제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형제들은 교사자격으로 안디옥의 회중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구성원 중 바리새파에 속한 신자들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의 형제들이자, 동료 교사들이었던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잘 따르기 위해서는 할례와 같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이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구약교회는 이스라엘의 국가종교 아닌가?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백성들이 아니었는가? 그러니 현재도 누구든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자 하면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
바울은 이런 이단사상을 물리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바울은 (성도들이 보기에 아주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이미 전해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든지, 예루살렘 교회든지 상관이 없었다. 바리새파의 형제들은 사도바울과의 유대를 끊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을 (비록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했다. 이런 의견 차이에 직면하자 안디옥의 회중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도 포함된) 위원들을 파송했다.(여러분도 교회생활을 하는 도중에 발생하는 이런 긴장들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은 이런 논의과정을 잘 보여준다. 예루살렘회의는 이 문제를 잘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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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은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예루살렘에 파송된 사람들은 안디옥으로 내려가 이 편지를 전달하고 이 메시지에 따라 교인들을 격려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
얼마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행15:36)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가라고 불리는 그들의 조력자 요한에 관해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날카로운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 결과 바나바는 마가와 더불어 구브로를 향해 떠났다. 이 섬은 바나바의 고향이었고 바울과 함께 첫 번째 여행 동안 설교한 곳이기도 하다. 바울은 실라와 더불어 첫 번째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소아시아로 떠났다. 바울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구약의 중요성에 관계된 의견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경험하였다.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초기 기독교회는 구약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세 율법의 모든 의식법들에 나와 있는 문자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폐하셨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교인들이 옛 언약시대처럼(의식법이 예표한 약속된 하나님의 어린양, 즉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으심, 부활을 통해서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아니한 것처럼) 의식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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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형성한 이런 새로운 공동체그룹은 유대 회당공동체와 대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당공동체는 계속해서 구약교회와 아브라함의 씨로 남아있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며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들을 유대화하려고 유혹하였던 바리새파 유대주의는 초대교회에 계속해서 강력한 힘으로 남아 있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것에 관해 편지를 썼다(갈 2장). 베드로가 안디옥에 내려갔을 때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다. 그러나 야고보가 보낸 어떤 사람들이 오자 베드로는 할례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식사자리에서 떠나 이방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해 버렸다. 다른 유대인들도 이런 외식에 가담했다.
그들의 외식에 바나바(!)조차도 유혹되었다. 이에 바울은 한 번 더 강조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 고로 우리(베드로)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노라"고 하였다.
이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누가 하나님께 옳다 인정받을지가 명백해진다(고전11:19).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새언약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들, 즉 진실한 믿음에 의해 의로워진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회당에 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언약에 속한 기독교회도 아브라함의 씨이다. 옛 것과 새 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에 의해 연합되어 “새로운” 친교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율법들이 예표한 분, 즉 오실 메시야에 의해 그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았다. 구약의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국제적인 ‘그룹’, 즉 다양한 국가들의 회중들(예수님을 알고 그 분을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예루살렘, 안디옥, 수리아, 시실리, 구브로, 그리고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도 동일한 믿음을 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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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에 퍼졌다. 그러나 사도들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교회와 유대로부터 다른 곳으로 흩어진 회중들은 그들이 정착한 곳에서 피난민으로서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은 수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 분을 유일한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특별히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자로 유명했다(갈라디아 2장을 보라. 여기에서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동의하였다는 것을 사도적인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기독교회들이 세워진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아마 바울은 헬라의 무역도시인 Sinope가 세워진 지역인 본도(Pontus)에서도 성경을 가르쳤을 것이다. 이곳은 말시온(벨직 신앙고백서 제12장)이 태어난 도시였다. 아굴라가 태어난 곳도 본도지역임을 기억하라! 말시온의 할아버지는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말시온은 AD85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Sinope에 있는 기독교회의 주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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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 외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Sinope에 살았다. 그들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회당모임을 가졌다. 말시온은 수많은 구약성경의 구절들을 반대했지만 구약의 유대적인 해석을 많이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Sinope에 있는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과 달리 ‘율법과 선지자들’을 풍유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였던 헬레니즘적인 유대인들을 싫어했다. 풍유적인 해석에 의하면 구약의 구절들은 단지 비유적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구약의 실재적인 표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Sinope에 있는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말시온은 어릴 때부터 성경과 유대주의 학문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회당과 유대인들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봉사한 기독교회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말시온은 기독교 교리로부터 빗나간 그의 사상을 공공연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초기 단계부터 자기 아들의 이러한 잘못을 알아차렸다. 말시온의 아버지는 말시온의 이단적인 끈질긴 주장 때문에 그를 기독교회에서 추방했다. 이로 인해 말시온의 아버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독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아들보다 사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국 말시온은 다른 마을과 도시를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지역의 기독교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사도바울이 친히 가르치고자 했던 바로 그 가르침을 사람들이 완전한 의미로 붙잡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소명감(?)을 가졌다. 말시온은 배 한척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아시아 해변을 항해했으며 서머나와 에베소를 방문했다. 마침내 그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회에 가입하기 위해 로마로 항해했다.
당시에는 교회들끼리 서로 의사교환이 잘 이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말시온의 출교는 다른 교인들과 다른 교회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의 환영을 받았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는 약 400만원에 해당하는 돈을 교회에 헌금했다. 이것은 물론 그때에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그는 로마에 5년 동안 머물면서 자기 사상을 책으로 출판하고자 열심히 일했다. 그는 신약정경을 편집하였다. 작품이 마무리되자 그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회의 장로회와 종교회의에 자기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장로회는 이 책을 보자 거부반응을 보이고 그가 바친 상당한 돈을 되돌려주면서 교회에서 내쫓았다! 이 사건이 AD 144년에 발생한 그의 실제적인 출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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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이런 출교가 일어났을까? 또한 이러한 출교는 정당한 것인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사건은 말시온이 기독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으로부터 출교된 것을 의미한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30, 31주일).
그런데 말시온은 자신이 기독교회 내에서 다른 교리를 장려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실재 가르침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사도바울은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바울은 유대인들의 회당을 반대했고, 할례와 모세율법의 중요성을 재고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고 로마서에서 분명하게 표방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유대인들은 달랐지 않은가?
말시온은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울처럼 구약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말시온은 자신이 적어도 기독교회보다 사도바울을 더 잘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회는 사도바울의 저작들을 이해했다고 주장하지만, 말시온은 교회가 눈을 뜰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율법에 주의를 돌려보면 구약의 수많은 구절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신약성경의 말씀처럼 만약 사람이 행위에 의해 의로워지지 않고 믿음에 의해서만 의로워진다면 새 언약의 관점에서 경배해야 하는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된다. 그러니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자신을 계시하신 구약의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심에 틀림없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야 산다고 말씀하셨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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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하나님은 율법에 의한 도덕적인 의로움만을 인정하셨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신약의 하나님은 그의 사랑의 확증이신 복음으로 구원을 베푸신다. 이와 같이 율법과 복음사이에는 절대적인 간격이 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이 계속 안타깝게 호소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율법주의와 바리새적인 유대주의의 모든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구약성경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율법을 순종할 때만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 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말시온에게 있어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순수한 복음을 해석하고 선포한 뛰어난 사도였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들은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있으며, 믿음의 기준이 된다. 성경의 모든 다른 책들과 복음서의 구절들은 이런 서신들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해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평가해 볼 때 가장 뛰어난 복음은 누가복음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말시온은 그 자신의 정경을 만들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이것을 ‘기독교’ 성경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사상은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경화된 책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관계된 성경본문들과 구절들이 오래된 사본들에서 지워져 버려 정경본문에 대해 수많은 비평들이 표면상으로 구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신빙성 있는 성경사본들이라도 이런 혼란을 야기시키기 때문에 새로운 정경을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었다. 기독교회로부터 출교된 말시온은 그때 당시에 대단히 영향력이 컸던 분리된 교회를 세웠다. 말시온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교회들이 중동전역에 번성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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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교회들이 번성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번창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저주’를 부인한데 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처벌과 의로우신 심판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들은 언약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저주를 포함하는 언약의 약속과 언약의 요구)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말시온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오늘날도 왕성하게 살아있다! 현대 기독교는 심판과 처벌만을 강조하는 소위 하나님의 "왼편"을 싫어한다. 그들은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치는 소위 하나님의 "오른편"만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들의 "신"을 분리된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단지 한 하나님만이 계신다고 계시한다. 그 분은 천지를 만드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시다. 동시에 그 분은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새 예루살렘이 이 땅에 내려오도록 만물을 회복하실 분이시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히10:2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사람들의 죄악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4. 외부적인 핍박에 직면한 새로운 교회교회에는 원래부터 영웅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물론 그럴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영웅시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시대를 '사도시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유익하며 또한 적절하다. 이 시대는 기독교회 내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이 공적으로 선포된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여러 나라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설교하고 사역한 시대였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죽고 난 이후에 작성되었다. 복음 전도자 요한은 제일 마지막에 죽은 사도였다. 이것이 AD 98년의 일이었다.
이 일 후에 기독교회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증인들"이 선포하고 요약하는 이런 작업은 약 AD 300년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의 기독교회를 "사도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웅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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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시대를 영웅시대라고 부를 수 없는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사도들이 핍박(예를 들면 네로황제 시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을 증거하게 한 분은 바로 성령이셨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기독교신앙을 굳게 붙들고자 할 때 고난을 당해야 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미리 예언된 사실이었다. "그들이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도 핍박하고 미워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의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을 핍박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동료 형제인 유대인들이었다(예를 들면 사도행전의 여러 장들을 보라). 새 언약이 세워진 초기 단계에서 교회구성원들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인들이었다. 사도들이 죽고 난 후에도 이런 경향은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교회를 세우는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들 사이에 여러 이견들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유대인들은 교회를 세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기조차 했다.
유대인들은 2세기까지도 기독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며 반대했다.
처음에 핍박은 지엽적으로 (예를 들면 서머나 근처에서) 일어났다.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한 그들의 삶은 안전하지 못했다. 두드러진 예로 사도요한의 제자라고 알려진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이 있다. 그는 86세에 붙잡혀 서머나의 원형경기장에 끌려 나갔다. 그는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고소를 당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의 집과 교회건물에서 어떠한 신의 형상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무신론자"라고 고소했다. 그들이 그를 끌고 가 화형 기둥에 묶고서 총독이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폴리갑은 "내가 86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동안 그 분이 나를 잘못 대해주신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내가 나의 왕이시며 나를 구원하신 그 분을 저주할 수 있겠소? 나는 기독교인이오"라고 대답했다. 이에 그는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 이것이 AD 15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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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핍박은 점점 더 보편적인 일이 되어갔다. 로마제국 안에 사는 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안전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세상이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했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동시에 성령이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이 고난을 견디게 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 분은 자기 손으로 민족들 가운데 이미 행하신 사역을 사탄이 멸하도록 그냥 놓아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순교자들의 피는 기독교회의 "씨"가 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몇몇 기독교 신학자들은 핍박을 멈추게 하고, 기독교신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변증서들을 저술함으로 기독교신앙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유명한 변증가인 순교자 저스틴은 AD 153년에 "변증서"라는 잘 알려진 책을 저술하였다.
그때 당시에 교회 성도들이 가장 어려워한 중요한 질문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한 사역자가 회개한 경우에 그를 신실하다고 인정하여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감옥에 있는 동아 핍박 때문에 믿음을 부인한 직분자들이 종종 있었다. 후에 그들은 회개했으며 감옥에서도 풀려났다. 이렇게 핍박 때문에 자신들의 기독교신앙을 부인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만약 사역자가 자기 믿음을 부인한다면 풀려난 이후에도 더 이상 교회는 그를 직분자로 인정할 수 없고, 그 자신도 성례를 집행하거나 설교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는 완전한 교회와 완전한 믿음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핍박은 정화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정결하게 되기 위해 핍박을 적극적으로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3세기에 몇몇 황제들은 기독교를 대단히 미워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모든 로마황제들이 핍박을 항상 부추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기독교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동료들과 패권다툼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여 로마제국의 서쪽부분을 완전히 통치하게 되자 기독교 신앙을 옹호했고, 이전에 숭배한 다른 신들을 거부했다. 기독교회가 그렇게 애타게 기도하던 것이 성취되었다. 기독교는 독립된 종교로 인정되었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신앙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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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은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어 AD 313년에 칙령을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한 도시 밀란에서 공포된 이 칙령은 "밀란의 칙령"이라고 불려진다. 로마 정부의 이런 결정은 기독교인들을 크게 안심시켰고 결과를 광범위하게 야기(惹起)시켰다.
핍박을 당하던 시절에 기독교인들은 야경군들의 도움을 받아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기 위한 은밀한 장소인 카타콤으로 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야경군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자기들의 일을 버렸다! 이 칙령은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의미했다. 이것은 국가의 법이 기독교를 그때까지 인정한 다른 종교들(예를 들면 로마와 헬라종교)과 동등하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발전하게 된 것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기독교의 신앙을 증진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통치자 자신이 기독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교회는 이 교인(콘스탄틴황제)을 주교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황제는 교회생활과 교회문제에서 자신의 국가권력을 사용해도 되는 것은 아닌가? 이후의 세기동안 교회는 이러한 질문들에 답해야 했다.
5. 새로운 교회에서 카톨릭교회로밀란 칙령의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기독교회를 유대국가신앙과 구별된 종교로 공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기독교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는 자신들이 받은 핍박으로 인해 이미 많은 사람들의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제는 로마제국의 국민들과 시민들이 기독교원리에 더 친숙해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축제에 참석하지 않는 등 다른 생활양식 하에서 살았기 때문에 로마에 속한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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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의 강력하고 엄격한 도덕성은 다른 시민들에게 영향을 주어 폭동이나 부도덕을 삼가도록 만들었다. 기독교인이 되면 로마의 종교축제에 참여하는 것(여기에서 신약서신들의 의심적인 표현인 "세상을 버리라"는 말이 나왔다)을 포기해야 했다. 기독교회는 사람들에게 "로마의 화려함", 즉 이방인의 축제행렬과 축제('carnalis'는 "육욕에 탐닉하는"이라는 의미이다)를 그만두도록 요청했다. 기독교의 엄격한 도덕성과 강도 높은 훈련은 로마시민들을 매혹해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원리를 추구하고 고찰하도록 만들었다.
기독교회가 독립된 교회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이 되기를 원했다. 이처럼 교인의 수가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기독교가 로마사회 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런 상황은 소극적인 면에서 순수한 기독교 생활양식을 위한 투쟁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물론 교리의 발전이 정지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논쟁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 기독교회의 장로 중 대단히 활동적이고 달변가였던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결코 기도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간주하지도 않았다.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교리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제를 논의할 때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크게 흥미를 가졌다(행17:21). 헬라의 철학자들은 사람이 신의 삶에 참여하므로 불멸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우리가 육체적인 삶으로부터 구원받아 신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가?' 라는 질문은 대단히 논쟁적인 주제였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육체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들은 사람이 육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통해서 신적인 삶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람이 자신의 영적인 삶과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자마자 신적인 삶에 빠져들게 된다고 추론했다. 자신의 영혼에 열중한다는 것은 사람을 각성시키는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와 '지식'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말을 '로고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로고스"라는 말이 헬라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들은 요한복음 1장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 즉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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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는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복종했으니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자신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식" 혹은 "로고스"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불멸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우주 원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났다. 신자들이 성례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져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원리인 "로고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단히 존경스러운 인물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라고 하는 그의 사상을 아리우스가 전하기 시작하자 아리우스가 장로로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기독교회의 주교였던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사상을 반대했으며, 그에게 반대하는 수많은 소책자들을 썼다.
아리우스는 자기 신앙을 끝까지 고집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는 다신론을 철저히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믿었다(신6:4). 그러니 예수님은 자연히 신이 되실 수 없지 않은가?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두 분의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피조물인 것이 틀림없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부분을 보라.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분이며, 신적인 삶에 참여하도록 도우시는 분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아직까지 이와 동일한 것을 믿고 있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아다나시우스는 요한일서를 예로 들어 말하기를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되며, 실제적으로도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고 반반하였다. 예수님의 신성은 구원이 사람에게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5, 6주일). 그러므로 아다나시우스는 이 이단을 반대하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단일성을 고백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고백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어 주신 것이 구속을 이룰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그러면 왜 당신은 예수를 아들이라고 부릅니까?" 라고 물었다.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낮은 분이며,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에 아다나시우스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한 하나님이 계신다고 강조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아들을 경배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단순한 피조물이라면 이 말씀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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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의 사상은 오늘날의 기독교세계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계기독교협의회(W.C.C.)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사상은(비록 영생을 믿지는 않지만) 영생을 믿는 방법을 제외하고는 아리우스의 사상과 거의 같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모범이시다. 그 분은 사색과 지식뿐만 아니라 영생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시며, 신적인 삶에 이르는 수단인 지식과 이해를 우리 마음에 일으켜 주시며, 사람의 필요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고통과 가난, 절망과 억압과 불평등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해 영광스러운 삶을 주시는 위대한 선생이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사람의 교만한과 부유함과 자기중심성을 질책하셨고, 나무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현대 '추종자들'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것과 같은 구원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교리적인 "열전"과 "혼전" 때문에 당시의 기독교회는 상당히 불안했다. 기독교인이었던 콘스탄틴 황제는 이런 상황을 싫어했다. 그는 제국의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회의를 개최했다. 로마교회의 주교는 이 회의를 종교회의, 즉 교회회의라고 불렀으나 황제는 이 회의를 교회문제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법원으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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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의는 황제에 의해 회집되었고 대표자들은 황제의 "손님들"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사이의 의견 차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AD 325년 니케아에서 모였다. 회의가 열리는 동안 콘스탄틴황제는 구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타협적인 고백문을 제시했다. 그 고백문은 "예수님이 아버지와 한 본질"이라고 고백한다.
우선 이 문구는 모든 기독교회를 대표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졌고 채택되었다. 모든 기독교회를 대표하여 모인 니케아 공의회는 '전 기독교회' 공의회 혹은 '보편적인' 공의회라고 불려진다. ‘전 기독교의’ 혹은 ‘보편적인’ 이라는 말은 ‘우주적인’ 혹은 ‘전 세계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 순수한 문구에 대한 교리적인 투쟁과 더불어서 정치적인 힘 대결이 있었다. 즉 교리적인 투쟁과 더불어 정치적인 투쟁이 내재해 있었다는 말이다. 아리우스의 친구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지원해 주교 아다나시우스의 권위를 무시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았다.
아다나시우스는 개인적인 투쟁을 하던 중 로마제국의 변방으로 추방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니케아의 문구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부분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 년 후에 니케아공의회의 표현을 그의 소책자에서 언급하기 시작했고, 그 표현과 화해했다. 그렇다면 그는 카멜레온 같은 사람인가? 아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한 반면, 후에는 니케아의 문구를 빌려와 삼위일체의 단일성에도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로마의 기독교회는 점차적으로 아다나시우스의 사상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구별된 삼위이신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단일성을 강조했다. 수 년 후에 기독교회 내에 이러한 두 그룹(니케아의 문구를 지지하는 자들과 아다나시우스주의자들)이 연합했다. 그리하여 그 후에 열린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확증했다. 이 공의회는 AD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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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로부터 아리우스주의는 분리되어 나갔다. 이것 때문에 로마제국의 동쪽에 있는 기독교회는 아다나시우스를 지지한 서쪽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았다. 동쪽 교회들은 공식적으로 아리안 교회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아리우스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이후의 세기에서 동쪽 교회들의 불화와 분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아리우스의 사상이 단지 교리적인 문제였다고 쉽게 말해버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신비스러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단일성을 여전히 수호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단일성은 오늘날도 여전히 공격받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단일성은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요즈음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신을 믿어. 하지만 교회에 갈 필요는 없다고 믿어, 나에게 그런 예배는 필요 없어!"
자신이 창조주를 믿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면 이 신조를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은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아버지께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 마음속에 신적인 불꽃을 일으켜 주는 것은 지식과 이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로고스, 즉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데리고 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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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회가 인정한 후에 보편적으로 수납되어 국교가 된 카톨릭교회는 계속 번성했다. 이 교회는 수많은 나라들에서 실재로 국교회가 되었고, 인류 문화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카톨릭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다. 다른 종파와 교회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평가에서 별로 가치 없게 여겨졌다.
이때 여러 도시에서 대학이 세워졌다. 이것은 철저한 교육을 위해 이스라엘에 선지자 학교가 세워졌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카톨릭교회는 이런 교육을 통해 성례를 집행하고 복음을 설교할 사람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는 이집트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 "신학교"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볼료나(Bologna)에도 신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기독교교리에 관한 한 제일 오래된 기관이었다. 이 신학교는 볼료나의 주교인 페트로비우스가 세웠다.
프랑스의 리용(Lyon), 영국의 바누크라(Banoochra), 독일의 트리엘(Trier)에도 학교들이 세워졌다. 그 외에 파리, 툴루스, 프라하에도 유명한 학교가 있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기독교"를 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영국학교 출신인 '펠라기우스'라는 유명한 학생이 있었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잠시 수도승이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카톨릭교회의 교회생활에 점차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던 로마로 여행하였다.
그가 로마에 도착하여 수많은 교회 성도들의 교회 생활과 삶의 방식을 보고 상당히 실망하였다. 그는 수많은 교인들이 악을 기꺼이 멀리하고 기독교의 엄격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투쟁을 포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이것에 대해 훈계하자 그들은 "그래요, 그것이 나의 죄 된 본성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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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는 사람들의 이런 태도와 논리를 부수어 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회와 개인생활 속에 있는 죄의 기원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연구하고 난 후에 그는 무엇이 죄의 기원에 대해 비기독교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사람은 죄 없이 태어난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게 되고 악을 보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닮아가려는 욕망으로 인해 죄가 그들의 삶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닮으려고 하는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본성과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닮아갈 훌륭한 모범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지 않는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정복할 수가 있다.
펠라기우스가 가르친 이런 사상은 교회에 널리 퍼졌다. 한편 이 사상은 어떤 사람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 사람은 대단히 유명한 설교자 ‘암브로시우스’(그는 그 당시 교회의 노래와 음악을 성숙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의 맹렬하고 강력한 설교를 통해 죄 된 삶에서 회개하게 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다. 한 때 그는 죄에 깊이 빠졌으며 그 결과 아들의 회심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던 그의 어머니 모니카에게 몹시 밉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유명한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후에 고향인 북아프리카로 되돌아갔다. 후에 그는 힙포(Hippo Regius)교회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35년 동안 머물다가 죽었다.
회심한 후에 그는 유명한 책 "참회록"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살 동안 행한 악들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인 교부가 되었다. 또한 그는 펠라기우스의 교리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성경이 아담과 하와의 깊은 타락에 의해 야기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류가 죄 가운데서 태어나며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 있다는 "원죄"사상에 이르게 되었다. 인류는 죄 된 본성 때문에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이다. 다윗왕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후에 고백한 시편 51편과 로마서 5장 21절을 보라. 사람이 만약 죄가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면 사람은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육을 통해 훌륭한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단지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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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이런 사상은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사람이 본성상 건전한 것이 아니다 "병든"상태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병든 상태이지만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덕을 자신 속에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만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자신이 선을 행하는 정도에 따라 존경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결국 로마교회는 반 정도만 펠라기우스를 따랐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사상은 사람의 본성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악하지는 않다고 믿은 16세기의 에라스무스에 의해 한 번 더 부흥되었다. 또한 이런 펠라기안 이단은 17세기에 알미니우스의 교리를 통해 더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사상은 아직까지도 대단히 활동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영향은 미국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계교회를 휩쓸고 있다.
교육방면에서도 이 이단사상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어린아이들이 잉태되어 태어날 때부터 타락한 아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원죄의 교리를 따르는 한 우리는 이것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교육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교육시키는 전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였고 어릴 때부터 죄가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성장하면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식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구체적으로 믿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 하에 있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의 이단사상을 반대한 결과 AD 418년의 카르타고공의회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죄했다. 그러나 카톨릭교회는 펠라기우스를 정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단사상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로부터 벗어났다. 이것이 카톨릭 교회가 이단사상의 온상지가 된 로마교회로 바꾸어진 이유이다.(우리는 중세교회의 대를 잇고 있는 구교를 일반적으로 '카톨릭'이라고 부르지만 실재로는 카톨릭이 아니라 '로마교회' 라고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이후 약 2∼300년간의 교회를 카톨릭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 이후의 중세교회와 현재의 구교는 로마에 본거지를 둔 지엽적인 교회인 로마교회인 것이다. 오히려 신교가 초대 사도적인 교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회복한 카톨릭인 것이다 - 역자주)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장로는 무엇을 하는 직분인가? 이 말 자체는 헬라어에서 왔다. 초대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했지만 후에는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여러 언어들이 섞여져 사용되었다. 헬라어의 어떤 말들(예를 들면 "아멘"이라는 말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목사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주교"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교회는 "장로"라는 직분을 세웠다. 예수님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기 때문에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회중을 감독하고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교가 장로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의 근원이 무엇인지, 또한 거느리고 있는 회중의 숫자가 많고 적음에 따라 주교의 지위가 결정된다는 주장이 어떻게 나왔는지 추적하는 것은 실제로 어렵다.
점차로 직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이들은 평신도라고 불렀다)도 도시의 주교들이 시골의 주교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교들조차도 수도, 특별히 로마나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과 같은 곳의 주교가 되어 가장 중요한 자로 불려지기를 원했다. 이러한 수도들의 주교들은 사람들과 정부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바울도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서 주교들을 제일 크게 존경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로마의 주교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불렀고 그 돌 위에 기독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런 논리가 설득력있게 들릴지는 몰라도 실재로는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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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들은 다른 교회보다 더 큰 교회건물을 짓기 위해 경쟁했다. 어떤 도시 내에서 더 큰 교회건물을 가지고 있는 주교가 더 큰 권위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도시에 있는 주교들은 ‘대도시 주교’라고 불려졌고, 그때 당시에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제국의 다섯 개의 수도들의 주교들은 라틴어로 “아버지”(모든 아버지들의 아버지)라는 의미의 “patriarch” 라는 칭호를 얻었다.
교회의 이런 중앙집권화 된 구조는 여러 사상들뿐만 아니라 장로들과 주교들 사이에 권력투쟁을 야기시켰다. 어떤 장로나 주교는 다른 장로나 주교보다 더 많은 재능이나 화술이 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교회에서 더 큰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런 종교계급주의를 부채질한 것이 있었다. 당시에 이단들이 성행했으며 이들은 자기들의 사상을 성경에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이 계시한 것을 명백하게 해석할 책임이 있었다.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가장 명백하게 해석할 수 있었던 주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었다. 제국의 도시들 중 로마의 중요성 때문에 로마의 주교는 자신을 가장 중요한 지도자, 즉 교회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다른 주교들은 교회에서 논쟁이 일어났을 때 결정을 내리기 위해 로마의 주교에게 호소하는 습관을 가졌다. 그래서 얼마 후 로마의 주교는 다른 주교들과 온 교회위에 독보적인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다. 로마의 주교 레오 1세가 죽은 461년에 교황권이 완전히 확립되었다.
성찬예식에 관한 교리가 변함에 따라 주교들이 더 큰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하고 난 후에 헌금과 헌물을 상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후에는 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으로 헌금을 드리는 관습이 굳어졌다. 신자들은 감사의 표시로 교회에 헌금을 가져와 상에 놓았다. 그들은 성찬예식을 행한 후에 같이 식사를 했다(고전10, 11장). 그러나 점차 성찬과 예배 후에 가난한 사람을 위해 차린 식사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찬과 애찬의 차이를 무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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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주교들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타난 이런 차이를 강조하여 주의 상의 거룩함에 치중해 이 상을 '성체성사'라고 불렀다. 또한 다른 사상도 제기되었다. 신자들은 헌금을 제사로써 드리며, 주교는 신자들에게 사죄와 영생을 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인 떡을 제사로 드린다고 생각했다. 주교는 희생제사를 드려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떡을 떼기 때문에(즉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찢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떡을 떼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계속해서 희생되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희생으로 간주되었다.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지 않는가? 또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라고 불리지 않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교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찢어지고 그리스도가 실제로 새롭게 피 흘리므로 신자들이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사제인 주교가 사람들의 구원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카톨릭교회'는 수도인 로마의 주도적인 지위 때문에 이 수도의 이름을 딴 '로마교회'가 되었다. 로마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 이단사상은 그 이후로 점차적으로 발전하였다. 교부 어거스틴 이후로 진정한 기독교신앙은 점점 뚜껑을 덮어 버렸고 교회생할에서 공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마황제의 몰락으로 인해 주교였던 로마교황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유럽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 로마주교의 권위가 유럽 전역에 퍼졌다. 반면에 교회주교의 권위를 그늘지게 했던 로마제국은 중심되는 권위를 상실해 버렸다. 대도시 주교들은 "대주교"라고 불려졌다. 이런 주교의 서열은 "거룩한 자가 다스린다"는 의미를 가진 "성직자 계급제도"라고 불려진다. 7세기부터 교황은 세상 정부조차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이런 노력은 새 시대를 예고했다. 즉 세상정부의 힘과 교회의 권위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 논쟁점이 된 것이다. 중세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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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교회와 동쪽 교회(로마교회와 그리스정교회)가 갈라진 것은 갑자기 된 일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불화가 누적된 결과였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분리와 분리 이후의 문제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분리는 중요하지 않게, 더 나아가 하찮게 취급되었다. 이 관점에서 카이퍼(B. A. Kuiper)의 책(Church History)이 기록하고 있는 말은 옳지 못하다. 이 책에서 그는 "두 교회 사이에 수많은 차이점들이 노출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차이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89p). 이것은 천년동안 하나였던 교회가 1054년 비로소 분리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잘못 본 것이다.
새 언약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 천년이 지나면서 교회 내에 많은 불화가 누적되었다. 우리는 교회가 고백한 신조의 관점에 의해서 그런 불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1054년 이후에 비로소 교회가 갈라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보편적인 신조들을 유지하기 위해 심각한 투쟁을 할 때마다 실제적으로 분리되었다.
이미 325년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과 고백을 했다. 그 후 교회는 이 고백 외에도 다양한 고백들을 만들었다. 로마제국의 동쪽 부분에 있었던 교회들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의 의견에 다소간 동의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성경적인 고백에 대해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가 논쟁한 이후로 동쪽 교회는 아리우스의 출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고백도 믿지 않았다.
동쪽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섞여져 하나의 신인성이 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어떤 존재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동쪽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란되거나, 변화되거나, 나누이거나, 분리되거나 하지 않았다는 고백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벨직 신앙고백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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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리 때문에 분리된, 첫 번째 교회는 페르시아교회(지금의 이란)였다. 이 페르시아교회는 중국에까지 가서 선교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5세기에 아르메니아, 시리아, 압베서안의 교회가 이와 같은 이유로 분리되어 나갔다. 1054년에는 그리이스교회가 서쪽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갔다.
그 동안에 동쪽 제국들은 이슬람교에 의해 침입을 받아 수많은 교회들(예를 들면 소아시아에서)이 파괴되었다.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마지막 교회는 필라델피아교회였다. 이 교회는 1100년까지 남아있었다.
카톨릭교회가 325년에 니케아 신조를 만든 후 신약시대 천년 동안에 이 교리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마지막 교회가 그리이스교회였다. 비록 다른 요소들도 이 분리에 작용을 했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성부와 성자가 오순절에 성령을 내려주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고백 배후에는 교회내의 정치적인 힘 대결, 즉 서쪽 교회의 ‘아버지’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주교가 이끈 동쪽 교회의 ‘아버지’의 투쟁이 있었다.
로마교황은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예배드릴 때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이 고백을 예배문구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제안은 동쪽 교회도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쪽 교회는 교회의 단일성과 일치를 위해 이 문구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고 그 결과 교회가 분리되었다. 이 분리는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두 사람 사이의 분리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면 이 고백의 배후에 있는 생각이 과연 무엇인가? 왜 서쪽 교회는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셨다고 열렬히 주장하였는가? 그 유일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 성령이 성부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분리시키게 된다. 우리는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에게 연합되었다고 믿지만, 그리이스정교회는 성찬예식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선포되어진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이 몸은 땅, 즉 우리의 몸과 연합된다.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지는 예배에 참여하므로 우리는 새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떡이 떼어질 때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떡을 먹을 때, 혹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묵상하는 예배의식에 참여할 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어난다. 성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떡을 떼는 일에 참여하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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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때문에 그들은 성찬 예식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으며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 예식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주교나 사제가 떡을 뗄 때 성도들의 영화가 사실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떡을 뗄 때에 교인들은 소위 "사람의 신성화"라는 신비스러운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자는 영원한 힘을 받는다. 로마교회가 주도한 서쪽 교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할 때에 신자들이 영화롭게 된다는 생각을 배척했다. 그들은 로마교황이 인도하는 성찬예식을 받아들였고 성부와 성자가 교회에 보내어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령으로부터 성자를 분리시키는 것을 싫어했다. 즉 그들은 교회에 성령을 보내신 분이 성부와 성자라고 믿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혜사"를 의미하는 위로자를 보내시기 위해 승천하셨다고 주장했다. 이 위로자는 고소된 사람을 돕는 변호사처럼 교회가 진리를 방어하는 일을 돕는다. 그들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오셨다고 고백했다.
수 세기 후 존 칼빈은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을 주시기 위해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을 서쪽의 교회에 더 확실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복음의 선포, 즉 성경의 선포와 해석을 통해 역사한다. 성령은 설교를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신다. 또한 성례를 통해서도 이 일을 하신다. 로마교회는 이 관점에서(말하자면 성례를, 특히 성찬을 보는 관점에서) 복음으로부터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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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성자로부터 분리하면 사람들은 교리를 생활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 결과 교리적인 가르침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생활양식이 분리된다. 그러나 교리와 생활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로마교회는 비록 잘못된 곳으로 나아갔지만 성자와 성령의 관계성에 대한 성경의 귀중한 교훈을 고수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신실한 백성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새언약이 체결된 후 처음 천년 동안 교인들을 선하게 인도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을 주신 분으로 믿도록 하셨다. 즉 예수님은 교인들을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유지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새 언약(이 언약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므로 세워진 것이다)의 시대인 신약의 두 번째 천년 동안에도 분명한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9.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복음적인 교회로마틴 루터가 독일 엘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기까지는 성경을 결코 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루터는 엘푸르트대학에서 학부과정을 마치고 학사학위를 받은 후 1505년에 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성경을 '발견하고' 읽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마틴 루터가 여러 학교를 거치면서 교육받는 동안 성경을 결코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루터의 출생, 삶과 활동을 되돌아보면서 이 이야기에 과도하게 주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가 루터가 살았던 시대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해 줄 수는 있지만 루터가 받은 교육이 실제 그러했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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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는 중세시대에 성경이 그 정도로 무시되지는 않았다. 수도원이나 몇몇 학교에서는 성경읽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기도문이나 십계명 같은 성경구절들을 묵상하도록 했다. 수도원, 특히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는 초입자들은 성경을 성실하게 읽고 철저히 연구할 것을 맹세해야 했다. 마틴 루터도 이 맹세를 하고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수도승으로 지내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 맹세가 그로 하여금 나중에 로마교회의 교리와 가르침과 투쟁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는 초등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았다. 수도원에 있는 동안에 루터는 성경을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12년이 지나자 그는 막덴버거의 성당학교에서 광범위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화란 ‘현대-헌신’운동의 지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루터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사무엘이 태어나고 성장한 과정을 읽고 배우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성경을 더 깊이 읽고 연구하도록 불을 붙여 놓았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로마교회의 라틴어 공식 성경인 벌게이트 판을 소유하게 되었다. 28살 때에 루터는 윗텐버거에 있는 수도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성경주석을 가르치는 평생교수가 되었다. 그때 당시에는 구약과 신약의 주석뿐만 아니라 신학과 관련된 윤리학, 교의학(교리를 연구하는 분야), 철학 그리고 예배학 등이 있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의 내용자체와 신구약 해설에 관한 강의를 담당했다. 이런 일을 통해 루터는 로마교회의 이단사상에 대항하여 성경의 실제 진리를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찬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종이 되었다.
루터는 대단한 열심과 정확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모든 성경을 연구해 나갔다. 그는 학생들에게 실제적인 성경내용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구‧신약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시고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분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 결과 루터는 그의 학생들에게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설명한다는 입장을 가르쳤다. 루터는 구약에 나와 있는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들조차도 그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 구절들을 던져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중세 동안 그렇게 집착했던 전통들로부터 교회를 자유롭게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루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문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했다. 또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는 사도바울의 말도 기억나게 했다. 그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6∼17절의 말씀뿐만 아니라 시편 71편 1∼2절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고 나서 윗텐버거 교회의 정문에 이 유명한 논지를 걸어 놓았다.
이것이 1517년의 일이며 그의 논지는 곧 출판되었다. 그러므로 교회사적으로 볼 때 1517년은 대단히 중요한 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1520년을 더 중요한 해로 취급하곤 한다. 왜냐하면 1520년은 루터의 출교를 실제적으로 증명하는 교황의 교서를 그가 불태운 해였기 때문이다. 1520년 10월 10일에 학생들, 교수들, 그리고 시민들의 수많은 무리들이 윗텐버거교회 바깥에 모였다. 교수 중의 한 사람이 장작더미 위에 불을 붙였다. 루터는 정경(로마교회의 교회율법)을 불타는 나무 위에 던져 넣었다. 무리들은 정경과 칙서가 불타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된 후에 무리들은 꺼져가는 불 주위에서 'Te Deum(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사건은 루터가 더 이상 로마교회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1521년 1월 21일에 그의 출교가 공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윗텐버거의 교회에서 수많은 일들을 했다. 1524년에 그는 "복음적인 찬송가"라고 불려지는 첫 번째 찬송가를 출간했다. 이때부터 루터는 교회를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힌 도구가 되었다. 그래서 독일에 있는 교회는 "복음적인 교회"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현재 "복음적인"이란 말은 이와는 좀 다른 사람들을 가리킬 때에 사용되는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라고 부를 때는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를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모든 성경 단어들, 심지어 이스라엘에 관계된 모든 예언까지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윗텐버거의 로마교회 건물은 "복음적인" 교회에 헌정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예식들이 바뀌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동일한 그 교회건물에 출석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로마교회의 무오하고 거룩한 전통에 대신하여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끊임없이 가르쳤다.
이후에 루터의 설교와 대학에서의 가르침에 의해 수많은 "복음적인"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루터는 전혀 다른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성경만!"을 의미하는 "sola Scriptura"라는 구호를 기억하라. 사제들이 사람들에게 참회를 하고, 면죄부를 사도록 강요한 대신 루터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회개하면 된다는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루터는 그때 당시에 유행하였던 로마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누구든지 믿음으로만 구원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접 받게 된다. 루터는 사도바울의 설교를 회복시켰다. 그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칭의와 같은 보편적인 기독교회의 신앙을 인식하도록 했다.
더 나아가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인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지도하신다는 것을 가르쳤다. 또한 사도시대처럼 이미 성경에 계시된 것과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칭의를 사람들이 고백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완전히 회복한 사람은 칼빈이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성례의 의미를 올바로 고백하도록 했다. 칼빈은 교회사에서 성경이 반대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일소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사용되어진 도구였다.
10. 복음적인 교회에서 개혁교회로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16세기에 제네바는 루터의 활동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믿었던 사람들을 핍박한 로마교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누렸던 도시'들 중의 하나였다. 로마의 교황이나 로마의 황제들도 이 도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스위스의 다른 몇몇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쮜리히는 쯔빙글리의 활동에 의해 일어난 종교개혁이 얼마동안 우세했다. 쯔빙글리는 쮜리히에 있는 큰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1529년에 루터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왜냐하면 루터는 성찬에서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정신으로부터 일보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1529년에 쯔빙글리는 성경적인 의미의 성찬을 주창하여 '개혁된 신교주의'를 일으켰다(쯔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의 일정한 장소에 제약되어 계시기 때문에 어떠한 '현실적 임재'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앙의 명상'에 의해만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자요, 그의 몸의 지체라고 고백하는 선서이다. 즉 성만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상징설' 혹은 '기념설'이라고 부른다 - 역자주).
제네바는 로마의 사보이 공작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의회가 큰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으며, 제네바와 인근지역을 다스리는 실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행정관들은 루터가 주창한 대로 '새로운' 종교를 따르는 소위 '복음주의자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복음주의자들'은 어떠한 기준도 거부하는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자들처럼 고백들을 갖는 것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반면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이단 사상들에 대항하기 위해 성경내용을 요약한 신앙고백을 작성하려고 하였다. 제네바에 있는 행정관들의 입장 때문에 이 도시에 있는 교회의 목사들은 성찬을 올바르게 집행할 수 있었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0주일).
또한 그들은 고해성사와 면죄부를 폐지하고, 회개의 필요성을 설교하는 것 등 성경말씀의 진정한 교리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 중의 한 분은 윌리암 파렐 목사였다. 그가 제네바에 갔을 때까지만 해도 제네바에는 로마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도시의 복음화와 개혁을 위해 열정적이고도 영향력 있게 일하였다. 그는 불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친 결과 그 도시의 종교적인 흐름은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536년 5월 21일에 열린 시민총회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투표를 했으며 신교를 제네바의 공적인 종교로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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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이런 발전이 진행되는 동안, 후에 제네바의 목사가 된 존 칼빈은 그 도시를 알지도 못했다. 그는 제네바 출신이 아니라 북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는 파리대학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그는 고대언어, 논리학, 초대교부들의 사상, 그리고 특히 법률을 공부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그곳에서 그는 후에 의사와 변호사가 된 유력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의 딸들도 잘 알고 지냈다.
그러나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법률 공부를 포기했다. 그는 프랑스 왕의 누이와 몇몇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파리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의 그룹에 가담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생명의 위기를 느껴 파리를 탈출해야 했다. 그는 몇 년 동안 프랑스를 떠돌아 다녔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동안에 칼빈은 어디서든지 설교를 하고 소그룹을 만들었다. 그는 헛간이나 굴속에서, 때로는 바위를 성찬상삼아 성찬을 베풀었다.
그 후 그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의 자유도시인 바젤에 얼마동안 머물렀다. 그 곳에서 그는 과부였던 클라인 여사의 집에 유숙했다. 대단히 짧은 시간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기독교강요"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작업은 1536년 8월 1일에 마무리되었다. 이에 칼빈은 그 동안에 페라라 공작과 결혼한 프랑스 왕의 딸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그는 그곳에서 마틴 부서(Martin Bucer)의 활동으로 종교개혁의 유력한 본거지가 된 유명한 도시 스트라스버그로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제네바에 잠깐 들러 하룻밤을 여인숙에서 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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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렐목사는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칼빈이 머물고 있었던 여인숙을 방문해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때가 1536년으로 제네바에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소요가 대단히 거세게 휘몰아칠 때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같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이 제네바에서 목사직을 수행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더 원한 것은 스트라스버그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책을 저술하면서 학자로 평화롭게 살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칼빈은 자신의 경험부족(그 때 그는 단지 28세였다)과 자신의 부적합성을 근거로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변명하였다. 이것이 그 문제에 대해 그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자 그 연장자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천둥 같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데 만약 당신이 이렇게 어두운 시대에 교회의 복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당신의 안식과 당신의 연구를 저주하실 것이오."
이 말에 칼빈은 굴복했다. 후에 칼빈은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천둥과 같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처럼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하신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새로 온 잘 모르는 이 외국 설교자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는 설교를 통해 로마교회의 관습에 젖어 지내던 자신들의 불법과 방탕을 신랄하게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강한 반대에 직면한 칼빈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선포되어지는 성찬예식에 부도덕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참석시키지 않았다. 칼빈은 권징을 실제로 시행하였다!
칼빈이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따라 말씀을 봉사하는 목사들뿐만 아니라 장로를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야 한다는 "교회정치"를 작성하였을 때 사람들의 저항이 절정에 달했다. 이런 직분자들은 초대교회 감독들처럼 감독하고 권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시의회의 의원들이 교회의 권징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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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격렬한 힘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자기들의 권한이 축소되는 것을 싫어했다. 시민들도 의원들과 더불어 칼빈에게서 얼굴을 돌려 버렸다. 사람들은 종종 밤에 칼빈이 머무르고 있는 집의 문을 거칠게 두드리거나 심지어 총을 겨누기도 했다. 칼빈은 후에 편지를 통해 이것이 피를 흘리는 데까지는 발전하지 않은 "기적같은 사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과 파렐목사는 제네바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징에 대한 적용규칙들 뿐만 아니라 교회정치와 당회제도를 도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1538년 4월 23일에 추방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단지 2년 밖에 일하지 못하였다. 추방을 당한 후에 칼빈은 스트라스버그에서 살면서 마틴 부서 목사로부터 많은 것, 특별히 예배에 관한 것들을 배웠다. 그는 3년 동안의 평화를 즐겼다. 그는 이 기간동안에 그 도시에서 결혼을 했다.
그렇다면 칼빈이 떠나간 후 제네바는 어땠는가? 제네바는 혼란과 불안정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교인들이 권력을 쥐기 시작했고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칼빈을 지지하던 당이 권력을 쥐게 되자 그들은 칼빈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되돌아오도록 강력하게 요청했다. 마침내 칼빈은 그들의 강한 요청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1541년에 제네바로 돌아갔다. 이때 칼빈은 "나의 마음을 주님께 바칩니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라고 말하였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자마자 교회정치인 "교회법"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장로의 권위를 확립했다. 그는 곧 초대교회처럼 권징을 시행하기 위해 장로들의 권한을 회복시켰다.
사실 1541년은 제네바 종교개혁의 해라고 부를만하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일치된 교회개혁이 제네바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다시 회복되었다. 당회가 조직되고 권징이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교회생활에서 성경적인 다스림이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제네바의 시의원들은 칼빈이 소개한 교회조직을 항상 지지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충돌은 한 부자를 성찬에 참여시키지 않았을 때 다시 절정에 달하였다. 강력한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던 필립 베델리엘은 아내와 이혼했고 부도덕한 춤에 빠져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시의원들의 은밀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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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당회에 의해 권징을 받았지만 시의회는 당회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이 견책을 무시해 버렸다. 오전예배를 드리면서 칼빈은 죄인들이 진실하게 회개하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시의원들에게 말해다. "당신들이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떡을 취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내 손이 하나님의 떡을 결코 주지 않을 것이오." 제네바의 모든 시민들은 그 주일에 피를 흘리게 되는 일이 있을까봐 두려워했다. 그 날 사람들로 만원을 이룬 제네바의 성 베드로 성당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델리엘은 그 날 아침에 집에 있었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후에 칼빈은 밀레도의 장로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바울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사도행전 20장 17∼38절을 설교했다. 모든 사람들은 칼빈목사 자신이 한 번 더 추방당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보다고 추측하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계속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칼빈은 엄격한 권징을 계속 시행해 나갔다. 이 일로 그는 그때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좋은 예가 있다. 한때 칼빈을 모욕한 놀이카드 제조업자는 자신이 한 모욕 때문에 재판을 받아 셔츠를 입은 채 온 도시를 걸어야만 했다. 이 일로 인해 그 사람은 바보라고 간주되었다. 다른 예가 하나 더 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저주하면서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해 3일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폭동은 금지되었고 이런 일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은 견책을 받았다. 성경과 고백들 속에 기록된 대로 개혁된 생활양식을 따르기 위해 값비싼(?) 법률들이 도입되었다. 대부분의 이러한 규칙들은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그 법률들을 실제로 적용하였다.
칼빈은 생활뿐만 아니라 교리에서도 불법적인 것들을 반대하였다. 그는 다른 신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성경에 계시된 모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중 한 유명한 예가 미첼 세르벳이라는 제네바의 의사에 대한 판결이었다. 그 의사는 자기가 선전한 이단적인 사상 때문에 처형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성, 즉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의사는 예수님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도 믿지 않았다. 이것은 그 의사가 초대 기독교회가 고백한 것들을 거부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초대 교회의 삼대 보편적인 고백은 사도신조, 니케아 신조, 아다나시우스 신조이다. 사도 신조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으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이다.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면서 초대교회의 정통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삼위일체교리와 성육신, 그리고 두 가지 본성을 교리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 역자주) 그래서 칼빈은 사도신경의 가르침을 수호하기 위해 그 의사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물론 그 의사 자신은 초대교회의 고백을 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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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1541년에 칼빈은 교회의 권징과 기독교 생활양식과 교회의 순수한 교리를 위한 필요 때문에 장로들과 목사들을 임직하기 위한 독특한 요구를 하였다. 벨직 신앙고백 제29장("참 교회의 특징 및 거짓 교회와의 차이점")은 이와 일치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루터는 이런 범위까지 교회생활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루터는 은혜에 의해서만 사람들이 기독교 생활을 올바로 영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계속해서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졌다는 것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반면에 칼빈은 신자의 모든 삶이 하나님과의 화목한 교제를 누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칼빈은 기독교인의 삶을 전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삶과 교리는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찬에 관한 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루터의 공재설(그리스도가 몸으로 떡과 포도주와 함께 주의 상에 임재하신다는 사상)대신에 칼빈은 그리스도가 몸으로 주의 성찬상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할 때 그의 성령을 통해 임재하신다고 가르쳤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확증하게 된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 25주일 64문답). 신자들은 이러한 믿음의 확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고 죽으심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때문이다. 순수한 교리에 대한 이런 투쟁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관한 가르침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택자들의 중보자이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창조 전에 미리 선택해 놓으셨다는 것을 말한다(도르트 신조의 첫째 교리인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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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믿음과 구원의 확신만을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깊은가를 깨닫게 하고, 항상 겸손할 수밖에 없게 하는 선택의 확실성을 가르쳤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초대기독교회의 신조들로 되돌아가므로 교리와 삶을 회복시킨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초대교회 신조들과 가르침들을 단순히 반복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나와 있는 장로직분과 교회의 권징 등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더 발전시켰다.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모으시고 유지하시는 일에 칼빈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칼빈을 통해 보편적인 기독교회인 "개혁주의 교회"를 공적으로 출발시키셨다. 이 교회는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시대에 활동했던 초대교회의 신조들뿐만 아니라 탁월한 도덕성을 발휘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11. 복음적인 교회에서 장로교회로1559년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대학에 해당하는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이 로잔 아카데미의 칼빈주의적인 프랑스 교수들을 훼방했기 때문이다. 이 교수들은 제네바로 가서 칼빈으로 하여금 개혁주의 신학을 위한 국제적인 센터가 될 제네바 아카데미를 만들고자 했다. 이때부터 유럽의 여러 국가들로부터 수많은 학생들이 제네바로 몰려들었다. 이것으로 인해 온 세계에 개혁주의의 영향력이 놀랍게 확장되었다. 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수많은 학생들은 유명한 교회지도자들이 되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안펄스의 시장이 된 윌리암 오렌지 공의 친구인 알더혼더(Marnix Van Sint Aldegonde),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저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독일 하이델베르그의 올리비아누스(Caspar Olevianus),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혁자인 존 녹스(John Knox)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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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사제였던 녹스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성경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종교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녹스의 지도력(1513∼1572)하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스코틀랜드 사람은 해밀톤이었다.
녹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군대의 노예선에서 일하다가 풀려 나와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부사제가 되었다. 그는 얼마동안 영국에 머물렀으나 칼빈이 가르치고 있었던 제네바로 가서 공부했다.
녹스는 1555년에 자기 본국 스코틀랜드로 가서 로마교회의 미사와 로마교회주의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 1557년에 녹스는 교황권과 로마교회의 영향력에 대항하여 힘을 모으고, 싸우기 위한 선언이었던 "스코틀랜드 첫 번째 헌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공동서약"을 작성하였다. 1560년에 스코틀랜드의회는 스코틀랜드의 국교를 로마카톨릭 대신에 장로교회주의로 바꾸었다. 녹스의 주요한 역할에 의해 칼빈주의적인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 녹스의 설교는 유명해졌다. 그는 누가 대적한다 할지라도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우상숭배가 강했던 펠쓰 교회와 성 안드레 교회에서 성상파괴가 시작될 정도였다.
교회를 타락하게 만든 교리적이고 도덕적인 광범위한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교회헌장"이 나온 것이 1560년이었다. 이 교회헌장은 두 번째 "스코틀랜드 헌장과 고백집"처럼 "제네바 교회정치"라는 문서를 칼빈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입고 있다. 이 교회헌장은 개혁주의의 목표를 일반적인 용어들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서이다. 두 번째 헌장은 교회정치의 원리를 발전시킨 문서이다. 당시에 제네바는 수많은 교회지도자들과 사람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이 도시는 사회에 대한 개혁주의의 영향력 때문에 '거룩한 도시'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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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성도들을 단순성과 근면성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녹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런 것을 다소간 모방하였다.
로마 카톨릭주의는 사실상 스코틀랜드에서 사라졌지만 아직도 상당한 어려움이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영국이 손을 내밀어 자기들의 앵글리칸교회처럼 장로의 통치를 주교에 의한 통치로 바꾸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국회는 1567년에 기부의 형식으로 교회에 재정 지원을 하였고 그 즉시 국왕은 교회를 자기의 뜻대로 다루려고 하였다. 총회를 해산하라는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자유총회가 1638년 글래스고우에서 열렸다. 여기서 성경적인 장로의 통치가 감독의 통치보다 옳다는 것을 재확립했다.
영국에서는 1645년에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려 1647년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대체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다. 또한 이 총회는 "장로교 교회정치문서"도 채택했다. '1564년 시편집'은 1640년에 대체되었다.
이런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위대한 원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소위 계약시대 동안에는 감독제도가 우세했지만 개신교도들은 계약을 맺고 있었던 로마카톨릭주의에 대항해 강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투쟁했다. 장로주의는 국왕 윌리암 오렌지 3세와 왕비 메리의 통치하인 "1690년 조약"으로 신앙고백을 인준하고 장로교회정치를 확립하면서 더 발전해 갔다.
18세기 동안에 목사가 없는 지역에 목사를 임명하기 위해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평신도-후원자'에게 목사 추천권을 부여하는 것에 관련된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18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앤드류 톰슨과 토마스 챌머스 같은 사람들의 지도력 하에서 일련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한 영향력을 새로이 배가시켰다. 예를 들어 챌머스는 교회가 노동자들의 가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가 사람들의 부와 안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주장은 기독교인들이 막스주의를 반대하는 대신 영국의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사상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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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에 평신도 군주들에 의한 목사들의 관직임명이 종종 있었다. 이것이 1843년에 스코틀랜드 교회분열이 일어나게 된 이유였다. 이 선언은 국가의 재정지원이 사라진다 해도 목사는 평신도 군주들에 의해 임명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힘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 때문에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라고 불린다. 자유교회의 첫 번째 총회는 챌머스 박사가 의장이 되어 탄필드 할린의 성 안드레 교회에서 열렸다.
존 녹스는 로마 카톨릭에 물들었던 스코틀랜드를 '이스라엘'로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장로주의'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유지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해오던 노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복음의 출발점은 스코틀랜드도, 나아가 존 칼빈이 있는 제네바도, 심지어 마틴 루터가 있는 윗텐버거도 아니다. 그 출발점은 이미 옛 언약의 시대인 구약시대부터 선포되었다. 녹스의 활동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에 있는 교회도 장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감독하는 보편적인 기독교회의 신앙으로 돌아왔다. 제네바에 있는 개혁교회가 수많은 나라들에 퍼진 것뿐만 아니라 장로교회도 세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에 퍼졌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를 통해 자기 교회를 인도하신 일련의 사건들을 관찰할 때 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유익인지 아닌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인용된 이 말의 무게는 모든 세대와 모든 장소에 있는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고려할 때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이 보여주는 것은 종교개혁이 발생한 이후로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개혁교회에서도 성경이 끊임없이 유지되었고 설교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개혁교회생활과 장로교회생활은 따로 발전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다른 상황 속에서 진리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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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뿐만 아니라 개혁교회도 여러 이견들과 시민정부의 권위 등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백성들이 성경의 진리에 충실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리스도는 존 칼빈,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 그리고 존 녹스 같은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자기 교회를 유지하셨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설교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시는 계속되는 구원사역(롬10:14∼17)에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했기 때문에 존 칼빈은 신학교를 만들어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회복하는데 크게 유익을 끼쳤다. 초대교회처럼 종교개혁 때는 신학적인 제도를 조직하여 사람들과 학생들의 교육을 돌보았다.
12. 개혁교회의 교회연합운동초대기독교회는 어떤 한 나라에만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영향 때문에 사도들은 수많은 국경들을 가로질러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바울은 이스라엘(예루살렘)과 수리아(다메섹과 안디옥)에서 구브로와 소아시아(터키)와 그리이스의 여러 지역(마케도니아와 아가야)과 이태리까지 아무런 제한을 받지도 않고 여행했다. 기독교회는 여러 국가들에 흩어져 있었지만 동일한 믿음과 신앙의 일치를 보였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것이 꽤 쉬웠다. 왜냐하면 몇몇 국왕들은 여러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16세기 말에는 몇몇 국가들이 이전의 예속상태로부터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다지 큰 어려움 없이 학생들이 제네바로 올 수 있었고, 본국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프랑스는 예외였다. 프랑스에 있던 개혁교도들(휴그노라고 불렀다)은 여러 번이나 심한 핍박을 받았다. 프랑스의 이런 예외적인 경우는 네덜란드에서 조직된 도르트 총회의 창립 시에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네덜란드에 있는 개혁교회들은 얼마동안 시민정부에 의해 반대를 겪었지만 마침내 정부로부터 국제적인 총회를 구성하도록 허락받았다. 몇몇 지방회들은 교회연합을 이루었지만 국제적인 총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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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첫 번째 해에 야곱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라는 교수의 가르침 때문에 개혁교회들 내에서 다양한 이견들이 제기되었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선택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칼빈의 가르침과 16세기 중반에 확립된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기록되어 있는 개혁교리들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다.
알미니우스는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교수가 되기 이전에 제네바에서 교육을 받았다. 알미니우스는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박사에게 좋은 인정을 받았다. 또한 그는 이태리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레이덴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알미니우스는 개혁교리를, 심지어는 인간의 전적부패에 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조차도 버렸다. 루터에 대항한 에라스무스같이, 어거스틴에 대항한 펠라기우스 같이 고마루스에 대항한 알미니우스는 사람이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전적 무능력을 부인했으며, 사람은 자신의 본질적인 선을 완전히 박탈당했다고 믿지 않았다. 알미니우스는 펠라기우스처럼 교회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완전하고 본질적인 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3주일).
이런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믿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미리 아신 사람들이 후에 믿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이다(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예지예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 역자주). 사실 그는 선택이라는 말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알미니우스 교수의 가르침과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고백되어져 있고, 기록되어져 있는 개혁신앙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알미니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지만 그 기회를 취하느냐, 마느냐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기회를 취할 자들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누가 믿게 될지, 안 믿게 될지를 미리 아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게 될 자를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기준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예견된 믿음이다. 결국 사람은 누구든지 스스로 그 기회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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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혁주의 표준문서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다. 예수님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택자들을 위해 죽으셨고 실제로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선택의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기인한다. 하나님이 나타내신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인류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회개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구원 자체를 가능케 한 실체였다!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우리는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상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구원 받을지 구원받지 못할지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믿는 것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칼빈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란 뜻인 ‘soli Deo gloria’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견지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을 사람들을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결정하셨다’
알미니우스의 잘못된 이단사상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 관점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도르트총회가 열렸다. 이것은 실제적인 연합운동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임은 구원에 대한 건전한 교리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계획에 관한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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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 모임을 연합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모임은 펠라기우스의 옛 사상에 대항하여 기독교회가 주도권을 쥐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대표자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화란의 대표들은 어거스틴과 초대교회가 가졌던 신앙의 일치를 굳게 견지한 채 자기들의 교회들이 표방하는 진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당시에 세계에 있는 모든 개혁교회 신자들과 장로교회 신자들의 신앙일치를 위해 투쟁하였다!
이 일을 위해 다른 개혁, 장로교회들의 대표자들을 초대했고 이러한 초대는 곧 받아들여졌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교회들의 대표자들은 네덜란드 도르트로 여행했다.
스위스뿐만 아니라 독일, 헤센(현재 통일독일 중부의 주), 팔츠, 그리고 브레멘도 대표자들을 파송했다. 프랑스 개혁교회의 대표자들도 초대를 받아들여 네덜란드로 여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국경을 넘는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 교회 대표들은 이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알미니안 이단은 프랑스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프랑스 교회 몇몇 학자들과 직접관계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다른 개혁교회들로부터 온 수많은 대표들은 도르트 총회에 참석했다.
이 국제적인, 보편적인, 연합 총회는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제네바 교리문답은 아니다)을 개혁교회의 신앙문서들로 채용하였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라는 말이 이러한 문서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반면에 장로교라는 말은 웨스트민스터 문서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회정치, 그리고 대·소 교리문답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알미니안 이단 때문에 도르트 총회는 하나님의 선택, 인간의 전적부패, 우리의 도움 없이도 우리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사람이 중생된다는 것, 그리고 믿음의 유지 등과 같은 복음에 따른 진리를 광범위하게 공식화하였다. 믿음의 유지는 택자가 일시적으로 큰 죄에 빠졌을 때에라도 성령을 완전히 거두어 가시지는 않는다는 교리이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을 보라('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도르트에서 공식화된 이 고백은 ‘도르트의 캐논들’(캐논은 ‘지침’ 혹은 ‘자’ 라는 의미이다)이라고 불려진다. 복음이 우리의 지침이듯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똑바로 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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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안주의자들의 교리가 교회에 위험을 주는 것으로 판명되자 그들은 잠시 동안 네덜란드에서 추방되었다. 이 추방은 다른 나라들에서 온 대표들의 전적인 지원 하에서 이루어졌다.
도르트 총회는 개혁교리가 복음의 교리이나 이 복음의 교리를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고 단정했다. 반면 알미니우스 교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위험성이 있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단정지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개혁교회 교인들은 정부가 알미니안주의자들을 나라에서 추방시키는 것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몇 년 후에 네덜란드에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기는 했지만 알미니안주의는 영국과 다른 나라들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존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를 채택해 감리교의 신조로 삼았다. 현재 침례교와 다른 여러 교단들도 이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고 있다.
13. 종교개혁의 진전도르트총회가 이룬 결실은 교회생활에서 개혁을 증진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 도르트총회 이후의 시기는 몇몇 유럽 나라들에서 '개혁시대'라고 불려진다. 개혁교리가 명백히 규정되고 정착되자 교회생활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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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다른 나라들에서 개혁신자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1560년부터 프랑스의 휴그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러나 1598년부터 1610년까지 짧은 휴식기간이 있었다. 1629년에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따라 이름 지어진 개혁주의의 마지막 보루였던 도시 라 로첼러가 점령되었다. 그렇지만 벨직 신앙고백과 유사한 신앙고백이 프랑스 독립개혁교회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핍박이 새롭게 가속화되자 수많은 휴그노들은 네덜란드와 북아메리카로 도망쳐야 했다.
네덜란드는 모든 시민의 권리인 종교와 개인적인 예배의 자유를 누렸다. 이 때문에 핍박받는 수많은 무리들이 네덜란드로 몰려왔다. 이들은 독일의 루터교도들, 프랑스의 휴그노들, 영국의 장로교들과 청교도들이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개혁신앙의 본거지가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도망친 유대인들조차도 종교의 자유가 있었던 네덜란드로 갔다.
도르트총회 이후에 경건주의 운동이 "독일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유명한 신학자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는 사람들에게 '순간적인 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교리로부터 경건에로 옮기고자했다. 그는 수많은 교리와 성경지식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적인 헌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교제에는 무관심한 교인들의 일반적인 습관을 싫어하였다. 프랑케는 개인적인 종교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또한 선교사역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복음이 개종하지 않은 민족들에게 전해져 그들이 온 세계의 구세주와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교제를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는 고아들을 위한 탁아소와 버림받은 젊은이들을 돌보기 위한 기관도 만들었다. 독일에서 조직되어 널리 알려진 이런 자비의 사역은 국내선교라는 의미의 'Innere Misson'이라고 불려졌다.
이 사역은 "화란" 개혁교회에 내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우트레흐트 대학의 보에티우스(G. Voetius)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의 생활에서 교리와 경건한 확신 이 둘을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물론 보에티우스는 도르트신조로 인해 개혁교리가 더 확장되어 진리가 명확하게 이해되어졌다고 보지만 개혁의 방향이 더 진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교회의 교리기준들이 과학적인 방식과 지적인 방식으로 더 발전되어야 하지만, 반면에 종교행위는 청교도적인 삶의 양식을 개발하므로 사람들의 삶을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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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티우스교수에 반대하여 그의 동료인 칵세이우스(Coccejus)는 신앙고백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어둡게 만든다는 사상을 부인하면서 언약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칵세이우스는 언약을 중시하였지만 이후의 언약을 앞의 언약에 끌어들여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제일 처음의 언약은 아담과 맺은 언약이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다. 그는 이러한 언약들이 각각 서로 다르다고 믿었다. 타락 이후에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은 노아와 맺은 언약과는 다른 언약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진전되었기 때문에 거듭 거듭 다른 언약들이 세워져나갔다.
이런 '새로워지는' 언약들이 체결되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면 이전의 언약들은 폐지된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시작된 새 언약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새로운 계약 이전에 확립된 옛 언약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그는 네 번째 계명도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식일이 더 이상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의 규칙들과 계명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와 성령의 언약인 것이다.
이런 관점은 자연히 교회생활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안식일의 중요성과 영향에 대한 글들이 씌어졌다. 이것이 교회 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소위 안식일 논쟁이다. 물론 이것 외에도 다른 논쟁거리들이 많이 있었다.
개인적인 중생과 경건도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교회는 개인적인 헌신이나 신앙고백 속에 문구화 그리고 형식화되어 있는 '메마르고 죽은듯한 성경내용들'을 가려내어야 하는가? 고백적인 전통에 대항한 이런 '성경신학'의 투쟁은 수년 동안 계속되어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이것을 계속적으로 말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교리와 주 예수와의 살아있는 관계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성경신학자들은 성경을 보다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은 성경의 요소들을 더 잘 관찰하도록 만들었지만 이런 노력이 바로 성경의 진리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란정부는 1618년의 도르트총회 같은 국제적인 총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므로 교회의 건전한 발전을 방해하였다. 영국 국왕이었던 윌리암 3세도 교회 내에서 교리적인 논쟁보다는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도록 강요했다. 1694년에 그는 평화를 고수하는 법령을 반포했는데 이 법은 '교회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라고 불려졌다. 결과적으로 이 투쟁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학적인 주장의 결과는 후의 언약이 이전 언약을 폐지하며, 무제한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교인들로 하여금 순수한 교리뿐만 아니라 청교도적인 삶의 양식도 유지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사고의 결론은 주관주의를 반대하고 객관주의를 추구하였다. 개인적인 경건한 삶 보다는 교리적인 지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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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윌리암 3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들의 목사들로 하여금 ‘세 가지 일치 신조’가 고백하고 있는 것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이것은 이미 고백하고 있는 교리 기준들을 넘어서는 문제들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사람들 사이의 의견의 차이일 뿐이니 관용하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당회로 하여금 1694년의 명령에 따라 목사들의 중용적이고 평화로운 기질을 더 확대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순수한 복음의 유지를 희생하고서 평화가 유지되었다.
성경지식, 교리문제들, 그리고 경건한 경험들 사이에 이견이 생길 때 우리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이해하게 만드는 분은 우리가 주를 믿을 때 역사하신 바로 그 성령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식과 과학적인 사고가 한편에 있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다른 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진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히 헌신한다면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올바른 지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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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게 될 것이다. 반면 이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수술하는 칼날과 같은 것이다.
"영국"에서 존 웨슬레,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의 가르침에 의해 감리교가 생겨났다. 존 웨슬레는 알미니안주의자였다. 그는 무미건조한 교리적인 지식과 습관적인 교회출석에 반하여 신앙부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인상적인 설교를 통해 중생하는 방법과 회개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 중생의 방법은 점차 규칙적이고 지도적인 원리가 되었다. 휫필드는 하나님의 선택에 관해 칼빈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에 소위 '칼빈주의자'라고 불릴 수 있지만 존 웨슬레의 사역을 지원하였다. 이것은 영어를 말하는 교회들, 특별히 영국본토와 미국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국부흥운동은 영국성경협회를 자극시켜 수많은 나라에 성경을 전하게 만들었다. 윌리암 케리에 의해 주도된 독일에서 미국까지의 세계선교와 윌리암 부스의 구세군운동도 이 운동의 결과였다.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부흥운동가는 종종 5,6천명에게 설교하곤 하였던 찰스 스펄전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인들은 영국 국왕 윌리암 3세에 의해 발표된 규칙에 직면하여 장로교 고백과 교회정치를 1690년에 확정지었다. 몇몇 언약주의자들은 이 규칙을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1690년의 대 혁명 때에 시민헌법을 채용하자 몇몇 언약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로부터 분리하였다. 그들은 개혁장로교회를 만들었다. 개혁장로교회는 에라스티아니즘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은 채 1743년 8월 1일에 조직되었다.
그들은 헌법을 죄 된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국, 웨일즈, 그리고 아일랜드에 장로교주의가 아니라 감독제도를 영속적으로 확립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1690년부터 장로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국왕이 1691년부터 총회를 해산시키거나 연기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인 앵글리칸 목사보의 직임은 애매하거나 한편으로는 포악했다. 그들이 또한 반대한 것은 국왕이 영국 앵글리칸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왕은 자신이 아무런 핍박도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벨직 신앙고백 제 36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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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에 장로교회가 분리되었는데 분리해 나간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만들었다. 개혁장로교회의 교인들은 자유교회의 교인들을 향해 너희들은 자유롭지만,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비웃었다. 개혁장로교회는 자신들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진실한 교회라고 간주했다. 또한 그들은 아일랜드와 미국에 교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장로교인들이 당회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1743년부터였다.
개인경건을 강조하였던 사람들은 18세기 동안 개혁, 장로교회 생활이 쇠퇴하자 이미 확고한 교회예식들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교회사는 뚜렷한 진전뿐만 아니라 연속되는 쇠퇴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초대기독교회가 순수한 도덕성을 강조한 것처럼 개혁, 장로교인들도 교리와 생활 사이의 관계를 명백히 하려고 노력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였던 개인성도들은 노예제도와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적인 불평등과 같은 수많은 비기독교적 관습들과 싸웠다. 무역과 개척이 활발해진 결과 남아프리카, 스리랑카,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도 개혁교회가 세워졌다.
14. 보편적으로 확립된 개혁, 장로교회16세기 말에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 장로교회를 세우는 데에 공헌한 사람은 특별히 존 녹스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여러 번이나 핍박을 겪고 나서 비로소 영국의 장로교인들과 청교도인들이 획득한 것과 같은 상당한 지위를 얻었다.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장로교회를 핍박하므로 사람들이 로마교 신앙을 선호하게 되자 청교도들은 그 유명한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쓰에서 북미로 항해했다. 그들은 순례자들이라고 불려졌다. 이들의 여행을 통해 개혁신앙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다른 이들도 얼마 후에 그들의 신앙에 가담했다. 인디안의 사도라고 알려진 존 엘리오트같은 몇 명의 지도자들도 장로교회에 대해 호의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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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북미에서 장로교주의와 개혁신앙의 건전한 기초를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란시스 마케미 목사였다. 그의 노력으로 인해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1729년에 미국 장로교회들의 총회는 모든 장로교 목사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서명해야 한다는 "채용규칙"을 채택했다.
요나단 에드워드, 조지 휫필드, 그리고 길버트 테넨트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사람의 죄악에 대해 강한 인상을 주는 설교를 하였다. 그 결과 개인적인 경건과 중생을 가져다주는 '부흥방법들'이 토론의 열띤 주제가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개인적으로 누리는 경건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그리스도와 더불어 보이는 교제를 형성하고, 모든 성도들이 예배로 모여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으로부터 빗나가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이며, 동일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과의 연합을 희생하면서까지 개인적인 중생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대각성운동은 종교적인 열정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런 부흥운동과 개인적인 믿음에 대한 강조로 인해 사람들은 교회개척과 공적인 교회생활을 단지 조직의 문제로 간주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교회를 분리시킬 때 교회를 하나님이 사역하시는 공동체로 보는 대신에 '교단들'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마치 은혜와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닌 양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실재적인 믿음과 지식을 믿음의 확신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분이 성령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이를 수도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지식과 신뢰를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땅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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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흥운동은 초기(요나단 에드워드!)에 알미니안주의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은연중에 알미니안주의를 장려하게 되었고, 교회의 분리를 야기시켰다. 1861년에 북미장로교회와 북미남부지역의 장로교회가 분리되었다. 후자(P.C.U.S.)는 신학대학인 프린스톤 신학교를 세워 선교와 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반면에 전자(P.U.C.S.A.)는 점차 현대주의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세기 동안 북미에서 현대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해 싸우는 거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현대주의가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프린스톤 신학교에도 침투해 들어오자 그레샴 메이첸교수는 1643∼1647년에 모인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확립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서 이름을 따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1929년에 세웠다. 1935년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왜냐하면 수많은 대표자들이 진리보다는 자유주의와 평화를 더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몇몇 사람들이 기존 장로교회를 떠나 예수님의 사도들이 가르친 기독교교리를 잘 고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옹호하는 정통장로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1936년의 일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으로부터 온 장로교인들과 청교도인들 뿐만 아니라 화란과 프랑스에서 온 개혁교단 사람들도 무역이나 핍박(프랑스 사람들의 경우)으로 인해 16, 17세기에 새 세계로 이주해 갔다.
요나 미카엘리스 목사의 지도 하에 화란의 암스테르담 노회에 의해 지배를 받은 뉴 암스테르담에 1628년 첫 번째 개혁교회가 세워졌다. 1664년, ‘화란개혁교회’의 장로였던 피터 스타이퍼쟌트가 식민지 ‘뉴 네덜란드’의 집정관이었을 때 그 식민지가 영국에 의해 점령당해 뉴욕이라고 이름이 바꾸어졌다. 화란개혁교회는 방해를 받지 않고 선교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해 나갔으며 그 결과 후에는 미국 ‘개혁교회’라는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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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1847년에 화란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갔다. 이들은 화란의 기존 개혁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1834년에 분리된 드 콕 목사와 그의 활동을 따랐기 때문이다(목사 콕은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기성 개혁교회에 반발하여 그리스도 개혁교회를 창설해 모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 역자주). 이러한 이주자들은 판 랄트 목사의 지도 하에 미국에 있는 개혁교회와 합병했다. 그러나 그 동안 불만이 급속히 커져갔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주의가 미국 개혁교회에 번성했기 때문이다. 이에 1857년에 분리해 나간 사람들이 ‘기독개혁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장로교인들과 개혁교인들이 북미에만 정착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호주로도 여행했다. 그곳에는 제임스 메인이라는 경건한 장로교인이 1803년에 첫 번째 정규적인 장로교 예배를 드렸다. 20년 후에 목사들이 호발트와 시드니에 도착했다. 호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을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이 호주에도 충격을 주었다.
그 동안에 기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목사의 임직과 같은 교회문제에 정부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교회가 국가에게 공적으로 복종하게 된 이 사건을 에라스티아니즘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일어났다.
1842년에 스코틀랜드교회가 스코틀랜드 국회에 요구, 선언, 그리고 항의를 했다. 그것은 정부의 사법권이 시민적인 문제에만 적용되어야지 교회에 관계된 문제에 있어서는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재정적인 지원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목사는 평신도 군주의 임명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교회의 권리를 타락시키는 모든 규칙들이 폐기되고,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이런 소위 권리주장을 기각시켜 버렸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총회가 모였을 때 정부의 이런 결정에 대해 항의하였다. 총회의 문구에 이런 항의를 실은 후에 사람들은 여왕의 대표자인 대감독관에게 존경을 표하는 절을 하고는 120명의 목사와 73명의 장로가 줄을 지어 문으로 나가 버렸다. 이런 사직 행위는 결국 1200명의 목사들 중 474명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첫 번째 총회가 열렸다. 이런 스코틀랜드 교회분열은 1843년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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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장로교회가 1846년의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기존 장로교회의 편을 들었을 때 총회의 몇몇 구성원들이 이 결정에 대해 항의를 표시하였다. 이 선언 후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총회로부터 탈퇴해 ‘동 호주 장로교회’ 다른 말로는 ‘동 호주 자유 장로교회’를 세웠다. 또한 아일랜드로부터 온 개혁장로교인들이 호주와 미국으로 여행해 197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개혁장로교회를 세웠다.
개혁교인들은 본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여행해 세계의 다른 곳으로 나아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기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사랑 때문에 이단사상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기존교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의 열심은 특출했다.
15. 기존 개혁교회에서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로19세기 초기에도 기존 개혁, 장로교회가 16, 17세기에 채용한 개혁교단과 장로교단의 표준문서들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근거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고 명백히 고백하고 있는 도르트 신조로부터 벗어났다. 이들은 진정한 개혁교회의 구성원과 직분자들이 되는 데는 "도르트 - 개혁교리"를 받아들일 필요성이 없다고까지 주장하였다.
1816년 이래로 화란의 기존 개혁교회 내에서 공적으로 신앙고백의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또한 묵인되었다. 이 교회의 개혁주의 정치문서는 화란 국왕 윌리암 1세에 의해 1816년에 무시되어 옆으로 밀어제쳐졌다. 목사들은 ‘세 일치 신조(Three Forms of Unity)’ 와 같은 개혁주의 표준문서들에 서명해야 했지만 더 이상 이런 개혁주의 교회문서들에 표현된 신앙의 일치를 유지하고 전할 의무가 없었다. 목사들은 형식적으로 서명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스스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는 한 교회에서 마음껏 자유를 향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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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1619년 총회 시 교회에 의해 채용된 개혁주의 정치문서가 제거되자 국왕은 교회문제를 결정하는 대표자를 임명했고 총회를 영구적인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런 ‘도르트교리에 대한 고수’로 인해 드 콕 목사는 자기가 목회하고 있었던 교회 당회에 의해 면직되었고, 다른 교회 회중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이유로 지방회에서 면직되었다.
콕은 목사로서 현대교육을 받았지만 개혁신앙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 개혁신앙을 고수하자 사람들은 개혁신앙이 구원의 유일한 교리라는 것을 믿었고 예배를 드릴 때 자기들의 자녀들을 세례 받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례단에 나오는 부모들은 자기들이 자녀들을 개혁신앙으로 키울 것이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목사 자신이 개혁신앙을 엄격히 고수하지 않는다면 그 질문에 올바로 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개혁신조들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교회생활을 개혁할 수 없게 되고, 또한 교회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정부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게 되자 콕 목사는 핍박을 받으면서 조차 스콜터 목사와 함께 교회의 이런 변질에 대해 논의했다. 1834년 10월 14일에 드 콕 목사가 목회하고 있었던 울름교회는 기존 개혁교회로부터 분리를 선언했다. 콕 목사는 기존교회가 개혁신앙으로 되돌아갈 것을 호소하면서 목사직을 다시 수행하기 시작했다. 총회가 개회되자 그는 기존교회가 모든 면에서 성경대로 그 변질과 이단사상을 고치면 자기의 분리선언을 철회하고 기존교회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1834년에 행한 이 선언은 “분리와 회복의 선언”이라고 불려진다.
이 분리는 화란에서 대단히 많은 소요를 불러일으켰다. 분리된 교회들은 개혁신앙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 나라의 다른 몇몇 지역에서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화란기독개혁교회”라는 교단을 세웠다. 이들은 1854년에 캄펜에 신학대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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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마지막 몇 년 동안 화란의 기존 개혁교회 내에서 또 다른 목사가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외쳤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가 바로 카이퍼(A. Kuyper)목사였다. 그는 1886년에 기존 교회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기독개혁교회’로 왔다. 이것이 “Doleantie” 혹은 “고소”라고 불려지는 사건이다. 이 명칭은 기존 개혁교회가 구 교회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만 교리의 이탈 때문에 화란개혁교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깁센 목사와 더불어 1834년 분리한 사람들과 연합하는 노력을 경주했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연합해야 하는 의무를 강조한 결과이다). 이런 분리의 초기 단계에 핍박이 강했으므로 판 랄터 목사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화란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1892년에 발생한 이런 개혁교인들의 진정한 연합에 의해 ‘화란개혁교회들’이란 이름의 교단이 생겼다. 이때 단지 세 무리의 회중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무리가 교회의 이전 이름을 견지한 채 연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카이퍼 목사가 그 자신이 조직하고 세웠던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유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이 비고백적인 사고에 의해 영향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의 한 구성원이 자기의 개인적인 믿음으로 견지한 것 때문에 교회의 연합을 거부했다.
후에 화란의 수상이 되어 기독교정당(혁명의 원리에 반대하는 반-혁명원리를 견지한)을 만든 카이퍼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고백 관점에서 빗나갔다. 그는 개혁교회들(각 지역교회들이 완전한 교회이기에 복수이다!)만이 가장 순수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자의 다수성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보이는 교회라고 주장했다. 벨직 신앙고백은 27, 28장에서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본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회생활, 가정생활, 학교생활, 그리고 교회 생활 등과 같은 모든 삶의 영역의 특별성(소위 '영역주권'이라는 사상이다) 등 올바른 면에서 깊이 있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가 모든 면에서 개혁신앙을 견지한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면을 지적해 보자. 카이퍼 박사는 이 우주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사랑인 일반은총과 교회를 특별하게 돌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구별한다. 그는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를 통해 재침례파가 세상에서 완전히 격리되는 것을 반대할 수 있었고, 성도들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은 성경적인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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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은총이라는 말 자체의 실재적인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벨직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말한다. 세상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덕을 입는다. 이런 계획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공급하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즐기고 있는 창조와 역사는 그것을 주신 자, 즉 만물의 목적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엡1:10)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표준문서들로부터 빗나간 세 번째 것은 유아세례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 그는 세례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취급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만이 진정한 세례를 받았으며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효과적인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는 실제적인 언약이 사람의 중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두 종류의 세례들과 두 종류의 약속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린아이들이 실제적인 세례를 받기 이전에 믿음이 씨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아세례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 대해 몇몇 신학자들이 반대했을 때 카이퍼 교수를 추종한 몇몇 교수들, 예를 들면 그의 아들 카이퍼와 헤프 교수는 총회에서 이러한 반대들을 정죄하도록 했으며 이러한 반대 분위기를 ‘새로운 교리’라고 낙인찍었다. 교회들의 요구 없이 총회는 이러한 반대들을 다루었다.
특별히 카이퍼의 세례이론과 그 반대들이 논의되었다. 카이퍼의 관점은 1905년 총회에서는 거부되었지만 개혁교회들의 총회에 의해 공적으로 채용되었고 오래된 개혁교리로 승인되어 왔다. 이것은 카이퍼가 죽은 지 오랜 후인 1942년 총회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1943년에는 다시 수많은 반대들이 제기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 대해 불평했으며 특별히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전쟁으로 인한 비극적인 결과 때문에 총회가 어떠한 결정이라도 하는 것을 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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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총회는 교인 양심의 머뭇거림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그 결정을 따르지 아니한 사람들이 개혁교회로부터 파면되고 출교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세례단에 데려 갈 때 아이들 안에 믿음의 씨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결과 그들의 자녀들이 중생되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가정된 중생’의 교리라고 불려진다.
1944년 8월에 이런 결정이 내려졌고 바로 “자유개혁교회”가 조직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총회의 결정과 올바르지 못한 고백의 구속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자유 혹은 회복의 결의서”라고 불려진다. 이런 방식으로 부모들에게 질문을 하기를 싫어하는 목사들과 캄펜 신학교 교수들이었던 노년의 흐레이다누스 교수와 스킬더 교수는 다른 많은 목사들, 장로들, 집사들과 함께 총회에서 면직되었다.
새로운 개혁교회가 출발한(1834년) 지 약 100년 후에 화란 개혁교회의 총회는 개혁신앙이 고백하고 있는(하이델베르그 제25주일과 벨직 신앙고백 제33∼35장에 묘사된) 성례와 유아세례를 잘못 이해하는 결정을 예전에 내렸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에 충실한 화란 개혁교회를 유지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였다(현재 화란에는 개혁교회라고 불리는 교단들이 3개나 있다. 첫째는 '개혁교회'라고 불려지는 이전의 국교회이며, 둘째는 '개혁교회들'이라고 불려지는 교단이며, 셋째는 '자유개혁교회들'이라고 불려지는 교단이다 - 역자주)
16. 기존 장로교회에서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로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개혁신앙으로부터 이탈된 것은 비단 화란 개혁교회 뿐만이 아니었다. 말씀의 진리를 보호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스코틀랜드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들은 진정한 장로교회, 즉 개혁주의 문서들 속에 고백되어 있었던 구원에 대한 진실하고 완전한 교리를 굳게 붙잡은 개혁교회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는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가 세워진 1560년과 1690년 그리고 교단이 분리된 1843년(이 세 기간은 때때로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종교개혁이라고 불려진다)에 중대한 위기를 겪었다. 그 이후로 교회문서들인 개혁주의 고백들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 더욱 더 가속화 되었다. 1892년 총회는 “선언규칙”의 건의를 통과시켰다. 레이니 박사는 그 선언규칙을 통과하고자 노력했다. 왜냐하면 이 규칙의 관용적인 성격은 교회가 자격증을 받은 사람이나 직분을 받은 사람들에게 요구한 신앙선언에 관하여 몇몇 사람들이 느꼈던 어려움과 망설임을 쉽게 제거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과 망설임을 제거하고자 하는 바램은 교회와 정부의 관계에 관한 고백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규칙은 다음과 같은 말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와 정부의 관계도 언급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편협하거나 핍박적인 원리들을 부인한다. 그리고 고백에 서명하는 문제에 있어서 양심의 자유와 개인판단의 권리에 모순 된 어떤 원리도 따르지 않는다.”
명백하게 국교의 원리는 편협한, 더 나아가 핍박적인 원리라고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구주로서 필연적으로 경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건의를 반대한 사람들은 이 규칙이 국교의 원리를 넌지시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들은 국교의 원리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계시되어있는 바 국가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인정하는 교리라고 주장했다. 부활 후 그리스도 자신은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의 제자들이 개인들뿐만 아니라 민족들에 대한 복음화도 귀하게 생각해야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정부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굴복해야 한다. 그런데 선언규칙에서 넌지시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총회는 국교의 원래를 배제하므로 자신의 출생권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공적인 문서들에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라고 불려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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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백에 언급된 양심의 가책을 제거하기 위한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 복음을 듣도록 하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소명, 사람의 타락과 그 영향(예를 들면 ‘전적’ 이란 말은 사람의 부패에 대한 말 속에서 빠져버렸다)등에 표현되어 있는 것들과도 관계되어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선언규칙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이 어느 정도 타락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이 규칙은 개혁 신앙의 원리를 잘라내어 버리거나, 새롭게 짜 맞출 수 있는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이 규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어떤 교리와 원리들에 대해 더 많은 중요성을 두기보다는 사고의 진전을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언규칙이 통과되고 나서 1893년의 총회에서 그 규칙을 무효화 시켜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892년에는 이 규칙으로 인해 아무런 분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1893년에는 그 규칙이 신앙고백과 성경에 모순된다는 주장을 한 번 더 올바로 제시했다.
한편 총회는 선언규칙을 옹호하는 결정을 내렸고 맥팔레인 목사가 읽었던 항의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맥팔레인 목사는 선언규칙을 받아들인 교회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진정하게 대표한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목사들과 장로들도 이 규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21명의 목사들과 21명의 장로들이 분리해 나갔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가 1894년에 조직되었다. 이들은 자유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그 이후로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두 교회들은 서로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이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연합을 위한 위원들을 임명하였다.
연합을 위한 위원회가 1916년에 임명되었다. 스코틀랜드 자유 장로교회는 그 대표들과 논의하려는 열망을 암시하므로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자유장로교회의 총회는 진리 안에서 연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기는 하였지만 차이점들을 잘 논의하기만 하면 그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위원회가 임명된다면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 차이점이란 것은 자유교회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파괴하는 어떤 대학교수가 옹호한 관점을 정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유교회는 1906년에 1892년의 선언규칙을 무효화하였지만 무효화하는 규칙의 서문 중 한 문장은 자유장로교회의 입장을 비방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자유교회는 대단히 다양한 교회출신의 사람들에게 무차별하게 교회봉사의 문을 열었으며 또한 권징에 있어서 대단히 느슨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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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에 대해 자유교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위에서 말한 교수는 솔직하게 후회하였고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그의 믿음을 아주 강한 말로 공적으로 재확인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유교회는 선언규칙(1892)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다른 부차적인 문서들의 원리로부터 심각하게 빗나가 있는 교회의 규칙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에 덧붙여서 자유교회는 그 규칙이 1906년의 무효화하는 규칙으로 인해 무조건적으로 무효화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새로운 규칙이 된 1906년의 규칙이 모든 원리를 판단하는 규칙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1906년의 규칙이 자유장로교회에 대한 비방을 함축하려고 하는 의도가 없었다고 진지하게 재주장하였다.
자유교회의 이런 답변을 받은 자유장로교회의 총회는 가시적인 연합을 얻으려는 노력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1917년의 이런 연합운동을 거부했다. 연합에 대한 분위기가 사라지게 된 것은 자유교회의 답변이 대부분 회피적인 표현과 타협적인 제안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전체 교리인 고백선언과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 어떤 교회와도 연합을 고려할 수가 없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세 명의 목사들이 자유교회로 넘어가 버렸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 교인들의 극단적인 냉담이 성도의 교제라는 근본적인 교리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가르침과 보조를 맞추지 아니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자유교회의 목사로 받아들여졌다. 세 목사들의 이러한 떠남은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유장로교회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자유장로교인들에게 크게 사랑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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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연합하려는 운동을 거부하고 난 후 자유장로교인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분리된 채로 남아있었다.
1896년에 캐나다에 있는 흩어진 장로교인들이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연합운동에 상당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스코틀랜드로부터 온 대표자들의 호소가 기꺼이 받아들여져 1902년부터 온타리오에 있는 사람들이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인들과 밀접하게 유대를 맺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인들의 조심스러움으로 인해 캐나다 장로교 연합운동을 반대하는 다양한 그룹들이 온타리오, 토론토, 그리고 위니펙에 조직되었다. 캐나다에서는 1861년에 자유교회와 연합장로교회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졌다(반면에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한 자유교회와 연합장로교회와의 연합은 단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연장을 의미했다). 다른 연합은 1875년에 발생했다. 이것은 캐나다 장로교회와 '캐나다에 있는 스코틀랜드 회중교회'(장로주의 대신에 회중주의를 다소간 옹호한 교회 : 교회의 주요한 권위가 장로들에게 보다는 회중에게 있다고 믿는 교회)와의 연합이었다.
체슬리에 있는 '연합장로교회'도 1912년에 자유장로교회의 회중으로 받아들여 달라는 청원이 들어왔고 총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유교회의 방해에 따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1922년에 밴쿠버에서도 교회가 세워졌다. 또한 이들은 미국에도 그들의 대표자들을 보내었으며 그 결과 그 곳에서도 얼마간의 교인들이 생겼다.
호주의 경우를 보자. 동 호주 장로교회는 스코트 박사의 방해로 인해 한 자유장로교회가 호주 그래프톤-부쉬그로우브에 생겼다. 동 호주 장로교회는 1864년에 호주 장로교인들의 연합운동과 마주쳤다. 동 호주 장로교회나 동 호주 장로교회의 네 명의 목사들은 이 연합을 거부했다. 이러한 목사들은 교회분열(1843)의 원리를 굳게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시적인 연합보다는 교회생활을 발전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우선적으로 가졌다. 이렇게 장로교회가 재조직되는 상황 속에서 스코트 박사는 그래프톤-부쉬그로우브의 회중들 중 남은 자들이 승인된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에 가입시켜 달라고 한 요구를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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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실제로 고수하려는 투쟁이 미국에서도 다른 면에서 발생하였다. 앞 장에서 본 것처럼 그래샴 메이첸 교수는 미국교회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로부터 빗나가자 진정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기존 장로교회에서 분리해 나가 정통장로교회를 세웠다. 이런 정통신앙의 전통들은 보증할 수 없는 보수주의를 고수하려는 단순한 노력이 아니었다. 반면에 이러한 투쟁은 진정한 개혁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즉 이러한 투쟁으로 인해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성령의 인도 하에서 살아가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부착될 수 있게 되었다.
17. 연합적인 개혁된 교회를 향하여?개혁주의 신앙고백은 교회 내외에서 제기된 이견들과 이단사상들을 견제하고 올바른 믿음을 고수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런 신앙고백은 성경에 부속된 것이기에 그 잘못이 드러날 때는 수정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 이런 교리표준들은 복음의 진리를 보편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백들은 진리에 대한 교회의 신실함을 선언(재확인이라는 의미에서)하고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백들은 이런 의미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지 그것들이 오래되었다고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고백들은 진실하기 때문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 또한 이런 고백들은 진실한 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러한 문서들을 작성하였고 채용하였다고 해서 이러한 문서들의 아름다운 진정성에 대한 존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는 우리 주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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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서들은 성경과 일치한다고 과거에 인정되었고, 또한 초기 동로마제국의 교회가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신조들을 성경에 근거해서 다시 확장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도 거부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고백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는 교리와 문서로써 완전히 수납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해 교회의 신앙일치가 제한되고 결정된다. 신앙고백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의 일치를 보증하는 수단이다. 교회구성원들(그가 직분자이든지 아니면 평신도이든지 간에)은 신앙고백의 각 부분들이나 세부사항들이 성경에 위배된다고 증명할 수 없는 한 신앙고백이 고백하고 있는 교리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신앙고백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의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교인들은 모든 세기와 모든 장소의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자신의 은혜를 모든 세대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공통적이고 개인적인 반응은 고백문서들에 의해 명백해진다. 이와 같이 고백문서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드리는 성도들의 개인적이고 공통적인 헌신을 고백하고 있다.
교회들과 교인들은 다른 신자들과 연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주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을까?). 그러나 이런 연합운동들이 신앙일치를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것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무 유익도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연합이나 합병은 영적인 연합과 합병이어야 하고 신자로써 서로 서로에 대한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헌신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전통들과 의견들에 대한 일치가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만 일치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19세기에 호주(1864년)와 화란(1892년)에서 발생한 교회의 연합운동을 살펴보았다. 후자는 믿음의 실제적인 일치를 보았지만, 전자는 각자 나름대로의 신앙자유를 향한 긴 움직임이었을 뿐이다.
다른 나라들의 예를 들어보자. 그 나라들에서는 존재하는 교회들이 항상 연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교회들이 기존 교단들과 연합한 것도 아니었다. 19세기 동안에 개혁주의를 견지한 이주자들이 다른 나라에서 개혁교회들과 곧바로 결합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1940∼1945) 이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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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한 번 더 화란에서 북미로 이주한 이주민들과 북미에 있는 기독개혁 교회는 이 세기의 80년을 지내는 동안 상당히 발전했다. 이러한 교회들은 20세기에 다시 수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이 교회에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연합하지 않은 합당한 이유들을 갖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 기독개혁교회는 카이퍼의 사상을 반영하였으므로 심지어 일반은총과 유아세례에 대한 카이퍼의 개념을 강요하기조차 하였다. 이에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기독개혁교회의 훅스마 목사가 1924년에 카이퍼주의를 반대하였다. 칼라마주에서 열린 1924년의 총회는 “칼라마주의 세 가지 요점”이라고 불리는 “일반은총”에 관한 성명서를 채용했다.
훅스마 목사의 의견을 정죄한 총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유기되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증거하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그리고 평상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언약의 약속을 하시는가가 아니라 복음의 설교가 유기된 자들에게도 은혜가 되느냐(고후2:15∼16) 하는 것이다. 훅스마 목사는 총회에서 면직되었다. 이것은 기독개혁교회의 분리를 의미했다. 훅스마 목사와 다른 사람들은 1924년에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들”이란 교파를 만들었다. 화란에서 북미로 온 개혁주의 이주자들이 1924년부터 1949년까지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에 가입하도록 격려를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화란에서 소위 “1944년의 자유” 이후 첫 해 동안에 화란 ‘자유’개혁교회와 북미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 사이에 자매관계를 추진했으나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교리에서 이견을 보였기 때문에 자매관계가 맺어지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모든 언약자녀들에게까지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성인들에게만 제공되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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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앙의 불일치 때문에 몇몇 개혁교인들은 기독 개혁교회에도,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1944년의 ‘자유’ 이후로 미국과 캐나다와 다른 나라들에 정착하였던 이들은 ‘미국과 캐나다 개혁교회들’(초기 단계에 이 교단은 ‘자유개혁교회들’이라고 종종 불렸다)이란 교단을 만들었다.
1950년 4월 16일에 레트브릿지에 첫 번째 교회가 세워진 것을 필두로 에드몬톤, 알타, 죠지타운, 그리고 몇몇 다른 장소에서도 교회가 세워졌다. 네일란디아에 있던 기독개혁교회의 몇몇 구성원들이 자기들의 총회에 성경과 고백의 기초 위에 화란에 있는 개혁교회들의 입장을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기독개혁교회의 총회는 이 요청에 응하지 않은 채 이러한 화란교회들과 자매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기독개혁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이들은 북미 기독개혁교회에도,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에도 가입할 수 없게 되자 모든 면에서 주님을 교인들의 머리요 왕으로 모시는 개혁신앙을 견지하기 위해 “캐나다 개혁교회들”이라는 교단을 세웠다. 이 교단은 개혁주의 교회정치를 채택하였으며 1950년 11월에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첫 번째 지방회가 조직되었다. 몇 년 후에 이 교단은 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기 50년 동안에 호주로 이주해간 개혁주의를 표방한 이주자들은 호주에 있는 기존 개혁교회들이 개혁주의 표준문서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 25주일과 벨직 신앙고백 제 33장)에 대해 보이고 있는 동일하고 명백한 불충성과, 수많은 사람들이 화란총회가 결정한 카이퍼의 유아세례 개념을 재고하기를 꺼려하는 것 때문에 그 교회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호주에도 별개의 개혁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호주개혁교회들”과 “호주 자유개혁교회들”이 되었다. 이 교단은 단지 몇 명의 자유개혁교회의 교인들에 의해서 창립되었다. 하지만 볼론공에 있는 교인들과 멜버른에 정착한 그룹은 몇 년 동안 이 교단에 가입했다. ‘자유개혁교회들’이란 이름은 1956년에 알바니아교회에서 소집되고 알머데일에서 열린 두 번째 총회에 의해서 그 명칭이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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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개혁교회는 화란 개혁교회들과 자매관계를 맺었고, 자유개혁교회들의 회중들은 화란 '자유'개혁교회들과 유대를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주 개혁교회들의 총회는 최근에 뉴질랜드에 있는 개혁교회들과 마찬가지로 화란 개혁교회들과의 자매관계를 끊어버렸다. 왜냐하면 화란 교단이 기독교와 개혁주의 신조들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이 교단은 이제 성경비평과 동성애를 허용했으며, 세계교회협의회가 선전한 이단사상들과 관점들을 목사들이 따르도록 종용했다.
진정한 개혁교인들은 이단사상들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며, 그 사상이 하나님의 말씀과 신조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저항한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호하고 건설해 나가기 위해 그리고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든지 길을 빗나갈 때에 그것을 막고 복음의 진리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개혁신자로써 눈에 보이는 연합을 획득하고 유지해야 할 이런 의무는 이들이 단도직입적으로 기존 개혁교회에 가입하거나 분리되거나 하지 않을 때는 그 의무를 잘 고려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피상적인 모습으로 교회연합에 대한 인상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실하게 남아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관건이다. 결국 연합이라는 것은 비방을 당하고 있는 신앙의 유대를 희생하고서야 그리고 신앙 안에서 공유하였던 것을 줄이고서야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란 ‘자유’개혁교회의 몇몇 목사들이 교회가 거부한 잘못된 세례개념이 판을 치고 난 바로 후에 교리표준들에 관하여 여러 형태의 자유와 관용을 요구한 것은 슬픈 사실이다. 이들은 1966년에 공개적인 편지를 보내 자기들이 모든 면에서 개혁주의 문서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보편적인 기독교신앙을 실재로 표현하였는지를 물었다. 텔드 목사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2주일(몸의 부활과 영생)에 관한 설교에서 이단적인 해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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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자들이 죽고 난 후에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을 부인하는 요지의 설교를 하였다. 그는 신자들이 주님의 재림 시에 깨어나게 될 것이며 그때까지는 그들이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적인 생명은 한순간이라도 삶을 중지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영적인 생명도 육체처럼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예수님은 우리가 회개하자마자 결코 성령을 거두어 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텔더 목사의 개념은 성경이 영원한 생명(요3:16)을 불어 넣어주는 성령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몇몇 목사들은 텔더 목사와 동조하여 신조적인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개혁교리들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1966년의 이런 공개적인 편지를 옹호한 목사들은 1969년 총회에서 총회총대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총대들은 개혁신앙을 철저하게 고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개혁주의 교리표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유’개혁교회 내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도록 요청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들은 “(가입되지 않은) 화란개혁교회”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자로써 서로 연합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연합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혁신앙을 끊임없이 방어하고 보편적으로 교회연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열망이 자유개혁교회 내에서 점차 자라나게 되었다. 화란 ‘자유’개혁교회와 더불어 호주 자유개혁교회는 아직까지도 웨스트민스터 교리문서들을 견지하고 있는 장로교회들을 초청하였다. 즉 그들은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들과 논의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의회를 만들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성경을 고수한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를 구분 할 수 있다. 교회사를 통해 우리는 교회들이 설교한 복음의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였는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성례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수하게 집행되었는지, 그리고 권징이 성경적으로 시행되었는지를 구별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지를 알 수 있는 이러한 표식들(벨직 신앙고백 제 29장)은 교회분리와 연합이 성경에 충실하였는지를 답할 수 있는 올바른 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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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들과 성도들이 이러한 표식들을 굳게 견지할 때에 이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그렇게 환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들은 주인보다 높지 못한 제자들인 성도들도 미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35년에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호주, 캐나다, 그리고 인도의 신문에서 공적으로 광범위한 악평을 들었다. 이 권징은 수많은 지역으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 권징은 “돌노크 춤 사례”라고 불려진다. 이것은 돌노크에 있는 교회의 직분자가 권징을 받은 사건이다. 문제는 교회의 직분자가 집에서 춤을 출 수 있느냐, 아니면 출 수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직분자는 징계를 받았다. 결국 그는 자기 동조자들과 더불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에 가입했다. 교회 권징을 거부하는 자라면 이 사건이 교회의 앞길에 나쁜 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교회의 표식(제네바에서 존 칼빈의 사역을 기억하라!)인 권징의 “시행”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 사건은 좀 다른 측면에서 숙고해야 할 것이다. 말씀에 충실한 교회는 죄가 있는 경우에 마땅히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위의 경우는 성경을 적용하는 예가 될 것이고 개혁주의 정통관례를 굳게 고수하는 길이 될 것이다. 진리를 끊임없이 고수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서로서로 도와야 할 것이다.
20세기는 교회연합의 세기라고 부를만하다. 왜냐하면 교회연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협의회들과 종교회의들이 무수히 열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구성되었고 “개혁주의 협력총회”가 확립되었고(여기서 화란 개혁교회는 한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세계교회협의회의 구성원도 되었다), 셋째로 “복음주의 협의회”가 창립되었다. 이런 운동들은 교회연합과 협력을 위한 전세계적인 움직임을 잘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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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일어난 다른 운동은 소위 미국장로교회(P.C.A.)와 정통장로교회(O.P.C.)의 합동이다. 이 합병은 최근에 미국장로교회가 정통장로교회를 받아들이기 위해 공적인 초대를 했을 때 일어났다. 그러나 이 합동이 교인들에게 실제로 유익을 주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언약백성들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충실하게 고백하도록 하였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미국에 있는 다른 장로교회인 개혁장로교회는 이미 미국장로교회에 합동되었다. 우리는 전 세계교회를 잘 조사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눈에 보이는 명백한 교제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때문에 전 세계적인 연합은 진정한(이것은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신앙 안에서만 연합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도들과 그의 보편적인 기독교회로 하여금 왕국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런 기도는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요, 만국을 심판하실 자이신 하나님이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신앙을 넣어주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복음의 설교와 교회의 충성에 의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유일한 진리인 그의 말씀의 충실한 수호자가 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복음의 설교(롬10:14∼17)를 통해 이 우주의 유일한 구주이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게 된 자들은 신앙의 진정한 연합과 신앙의 교제를 공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진정한 신앙 안에서 가시적인 연합을 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오하신 말씀에 의해 서로를 진정한 성도로써 인식할 수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 성령이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느냐 하는 것은 교회사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성경을 잘 조화시켜 생각할 때에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교인들 사이에 이단사상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누가 올바른 진리 위에 서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분열과 분리를 경험하더라도 복음의 진리를 고수하도록 하신다. 이런 면에서 개혁교인들이 종종 간과한 것은 진정한 개혁교회가 보다 더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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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진정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서로 점차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예를 들면 호주 개혁장로교회와 장로교회는 현재 서로 교제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게다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자유’개혁교회들은 진정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를 연합하기 위한 영원한 협의회와 본체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이런 교단들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자기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뜻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의 왕국이 임하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기독교회가 동로마제국에 보편적으로 퍼진 기독교회가 된 것처럼 우리가 보편적인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동일한 진리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진리(유일한 진리이며 또 다른 천년동안 점점 더 깊이 이해되어질 진리)를 증거하도록 하셨다.
18.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에 의해 수행된 복음전도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비유들 중 하나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뿌려진 후에 자라 모든 나무보다 더 크게 되는 겨자씨에 비유된다. 그것은 선지자 다니엘이 본 뜨인 돌, 즉 모든 강대국들을 포함하여 지상의 모든 왕국들을 파괴한 뜨인 돌과 같다. 겨자씨 비유와 선지자 다니엘이 해석한 꿈은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적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고 확실할 것 같다.
하나님은 이런 복음전도가 땅 끝까지 퍼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흩어져 모든 족속들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직까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선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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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에 선교라는 용어는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러 왕국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사역으로 정의되어 왔다. 자기들의 고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국내선교”라고 부른다. 해외선교라는 용어는 먼 나라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복음전도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교회로, 또한 그들이 한 때 속했던 언약에로 부르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계교회협의회의 계열에서는 선교, 가르침, 의료혜택과 정치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것을 선교라고 부른다. 이들은 사회적인 활동을 하나님의 왕국의 표적이라고 믿는다. 반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복음전도라는 말을 선호하였다. 이 경우에 선교는 모든 족속들에게 사회활동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전도를 하는 것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들은 초기에 이런 구분을 하지 않았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였으므로 “복음전도”라는 용어는 대단히 적절한 말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바로 이 일을 하였다. 누가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였다고 묘사한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이스라엘 국가에 속한 언약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다윗의 자손을 약속된 메시야로 영접하였다.
처음에 제자들은 12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후에 성령의 지도를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한 날에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더하였다. 며칠 후에 여인들과 어린이들의 숫자가 증가한 것 외에도 사람들의 수가 약 5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사도들의 활동으로 인해 점점 더 많은 남녀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들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행5:14). 누가는 사도행전 6장에서 이 모든 것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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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제사장들이 예수 그리스를 믿게 되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이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이 사도들이 전한 믿음에 복종하게 된 것은 분명히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 선택은 그들의 직업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았는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 핍박이 일어났을 때(회당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 그러나 흩어진 자들이 가는 곳곳마다 말씀을 전하였다. 그 결과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까지 교회가 세워졌다. 다시 평화의 때를 즐기면서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강하게 되었고 격려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다시 숫자가 늘어났다(행9:31).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베드로와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복음전도자 누가는 유대인의 개종을 이방인의 개종 이전에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믿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후손인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한 것과 같다. 온 유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에 세워진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이 일 후에 성령은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로마정부와 맞부딪치도록 했다(사도행전 10장과 13장에서 로마의 관리와 대사들이 소개된 것을 보라). 이방인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행14장과 17장).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록한 후에 누가는 베드로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전도활동은 가서 모든 족속들(이스라엘의 위로를 진실하게 기다리지 않는 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탈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새언약의 첫 1세기 동안에 보편적인 기독교회는 그렇게 평화스럽게 지내지는 못했다. 교인들은 수십 년 동안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특별히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같이 이단사상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면서 그렇게 했다. 이것은 복음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선교”의 문제였다. 그들은 변증가들이라고 불려졌다. 복음을 변호하면서 전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수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이해의 측면에서도 성장했다.
핍박기가 지나고 나자 교인들은 헬라와 이방철학에 대항하면서 여전히 복음을 전파하였다. 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옹호하는 것이 논리적임을 보여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논리적인 증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복음을 선포할 소명을 받았다. 초대기독교회는 선교사역을 무시하였고, 선교사역에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초대 기독교인들은 지나간 세기에 만들어진 선교의 개념들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국내 선교나 국외 선교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뻗쳐나가는 사역을 명백히 수행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가입하고 연합하도록 독려했으며, 이단사상을 따를 경우 교회에서 내쫓았다.
로마제국이 무너지면서 로마교회는 세속정부의 권위도 차지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주의가 보편적으로 퍼진 데에 그 이유가 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모든 족속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잘 수용하였다고 때때로 주장된다. 그러나 이들이 복음을 전한 이유는 수세기 동안 로마의 수장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로마교회는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일했다. 복음이 전하여졌으며 수많은 민족들이 기독교화된 것은 사실이다.
중세 동안에 이들이 노력한 결과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다. 중세의 설교자들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회개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게 된다고, 즉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런 면에서 유럽제국이 기독교화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단지 수도사들이 전‘서구’세계에 성경을 전했다는 관점에서 중세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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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후에 개혁자들은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런 사역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현대 “선교”의 의미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초대기독교회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단사상을 거부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 개혁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이 조직되었으며 이들 교회들은 교회가 세워지지 아니한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수행했다. 또한 이 당시에는 기독교정부가 기독교를 발전시키고, 기독교를 전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존 칼빈은 이방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 교회의 의무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실 그는 마태복음 28장 18~20에 계시된 예수님의 명령을 사도들에게 제한하면서 사도들이 이 일을 수행했고 그 결과 이 명령이 성취되었다고 말했다. 칼빈은 이 명령이 현재교회에 계속적으로 적용되고 이 말씀의 더 나은 성취가 남아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가 교회의 일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부터 복음전도와 선교를 분리시키는 현대적인 개념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골로새서 1:23절을 선지자적인 약속들의 배경에서 설명했다. 바울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만물에게 설교해야 하는 복음의 종이 되었다.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복음이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이사야 45장과 60장). 칼빈은 사도들의 설교를 이러한 약속들의 성취로 보았다. 이러한 약속들은 성취되었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 채 말이다. 칼빈은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이 진정한 복음을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소명을 받았다.
후에 개혁교회들은 다른 민족들도 복음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온 세계를 여행하는 항해사들과 더불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교인들의 영적인 부요를 위해 또한 이방인들에게 개종시키기 위해 목사들이 파송되었다. 목사들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목사들뿐만 아니라 다른 직분자들도 파송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 아픈 자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성경을 읽어주었다(이들은 위로자들, 권면자들, 낭독자들이라고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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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에 인도네시아로 여행한 두 명의 낭독자들은 바다를 여행하는 동안에 죽어가던 사람들에게 세례를 집례했다. 또한 그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난 후에 다른 민족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개혁신앙을 믿게 된 로렌스라는 한 인도네시아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낭독자들은 당회에 의해 비난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성경을 읽어주도록 보냄을 받았지 성례를 집행하도록 보냄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스텔담의 당회는 그들이 행한 것을 듣고 난 후에 목사를 파송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만족한 태도를 보였다.
여행과 교회 직분자들과 목사들의 선교로 인해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 그리고 대만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특별히 암스텔담과 미델버그의 개혁교회는 인도네시아에 파송된 목사들을 후원했다. 그리하여 보고서에 따르면 1621년 1월 3일에 “아시아의 첫 번째 교회”가 자카르타에 세워졌다. 계속해서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암본, 몰루카)과 스리랑카(콜롬보), 폴모사, 그리고 인도와 같은 다른 나라에도 교회들이 세워졌다. 교회는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러나 무역회사들이 경제적인 이권을 위해 더 많이 여행했다. 이것으로 인해 선교사역이 수많은 면에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별히 돈을 벌기 위해 여행한 개혁교인들에 의한 피해가 제일 심했다(그때 당시에 화란의 대부분의 시민들이 개혁교회의 교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이런 교인들은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종종 이단사상으로 기울어졌으며, 교회의 선교사역이 발전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반대하였다.
교회의 선교사역은 17,18세기에 주로 개인과 협회에 의해 증진되었으며 19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교회의 임무로 인정되었다. 1843년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전에 ‘글래스고우 선교협회’가 수행한 남아프리카(트란스케이와 동 케이프) 선교를 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 자유교회는 1870년대 말에 폴모사에 있던 ‘자유교회 중국선교회’와 관련을 맺은 복음전도자들의 후원 하에 1925년에 중앙 인도에서 사역하였다. 이 사역은 차파라와 락나돈의 셔니지역에 센터를 두었으며 최근에는 도시 야발풀에까지 그 사역을 확장하였다. 그들은 복음을 실재적으로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적인 돌봄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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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 있는 리마에서 사역을 시작한 자유교회의 첫 선교사는 맥케이(John A. Mackay)박사였다. 그는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세웠고 그때 당시에 지속적이고도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 내지선교사역은 1921년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교회들이 세워졌다(the Iglesis Evangelica Presbyteriana del Peru).
남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페루의 이런 선교사역은 자매교회인 호주자유교회(동호주 장로교회)에 의해서도 후원을 받았다. 그들도 앤드류(J. Campbell Andrew)박사와 같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PCEA가 파송한 첫 번째 선교사는 1948년에 남아프리카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하였다. 1970년에 그는 박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더 긴 기간을 잡고 사역을 수행했다. 이러한 PCEA의 선교사들도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선교협회’의 통제를 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PCEA선교위원회가 부여해준 책임을 수행하였다. 봉사하는 일반적인 기간은 봉사하는 나라를 떠나서 돌아오는 날까지의 기간인 9개월을 빼고 4년이었다. PCEA는 자매교회인 자유교회의 선교사역을 지원하여 연합활동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최근에 독자적인 선교협의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1982년 마지막 날에 삼 타마타 목사를 피지로 파송했다(그는 지금 수바에서 사역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자유 장로교회는 라다시(John B. Radasi) 목사가 스코틀랜드에서 남 로데시아(현재의 짐바브웨)로 간 1904년에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 교회에서 신학훈련을 받은 최초의 원주민 선교사였다. 1924년에 다른 목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 1928년에 맥도날드(R. Macdonald) 박사는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세 개의 중요한 센터가 잉배냐, 젠카, 그리고 므부마에 세워졌다. 1962년에 노회가 구성되었고 시편 전부가 신데벨레 언어로 번역되어 공예배시에 잘 사용되었다. 이런 선교를 위한 후원회가 화란 구 개혁교회에서 조직되었다. 수많은 정치적인 소요에도 불구하고 이 사역은 계속 수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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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총회는 교인들을 잘 지도하기 위해 1955년 5월에 “빌리 그래함”운동과 같은 대중복음전도에 거리를 두도록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총회는 그런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채택된 잘못된 가르침과 의문스러운 방법들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웨슬레와 디 엘 무디와 같은 사람들의 알미니안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 결의문은 교회가 선교지에서 대중복음전도를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확증하였다.
미국장로교회(PCA)의 해외선교국인 “세계를 향한 선교”에 의해 파송 받아 지금 일하고 있는 모든 선교사들의 사역을 요약하는 것은 거의 끝없는 일일 것이다. PCA는 그 시작부터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교육과 의료와 사회개발 등을 포괄하는 선교사역을 하였다. “세계를 향한 선교”는 1973년에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PCA의 해외선교국으로써 조직되었다. 1982년에 이 조직은 27개 나라에서 사역하는 200명의 선교사 조직으로 확장되었다. 1982년에 개혁장로교회가 PCA에 합병했다. 이 때 25년이나 된 해외선교국인 “세계장로교선교”가 “세계를 향한 선교”에 병합되어 그 조직에 9개 나라에서 선교하는 90명의 선교사를 더 보태어 주었다. 이런 선교활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 속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개혁주의 강조점대로 행했다. 그러나 이 교회 내에서 이러한 위대한 고백들의 내용들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불평이 많았다. “세계를 향한 선교”가 자기들의 목적으로 내세운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목적은 교회 개척팀과 전략이고 기술적인 지원직원들을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듣지 못한 세계의 수용적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성공은 현저한 교회성장에 의해 판단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성장이 그들 사역의 최종적인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지역교회는 현저하게, 즉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조직은 미국 선교신학자 맥가브란(Donald McGavran)과 그가 세운 교회성장학파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 같아 보인다. 그는 지상명령(마태복음 28장)을 제자를 삼는 것과 사람들과 민족들을 완전케 하는 것으로 각각 구별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고백하도록 하는 것 외에 우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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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학파를 세운 맥가브란은 신조들을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신조들은 신자들의 신앙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인 자유의 마그나 카르타는 인간의 다양한 의견들과 전통들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하게 받아들인 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보편적으로 순종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 기독교와 개혁주의의 신조들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 선교지의 어린 교회들도 자기들이 보편적인 기독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화란 개혁교회들은 교회가 선교지에서 포괄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고쳐 잡았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교육적이고 의료적이고 사회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선교지에서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같은 기존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실재적인 고백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자유’개혁교회들은 선교지에서 먼저 목사들을 보내어 복음의 교리를 전하게 하고, 그 다음에 교인건설협회들의 교육적이고, 의료적이고, 사회적인 도움을 주도록 하는 원래적인 방식을 견지했다. ‘자유’개혁교회들의 개교회들은 인도네시아에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을 파송했다. 소위 “1944년의 자유” 이후에 이런 사역은 숨바에서 계속되었다. 1950년대 초기에 다른 선교지가 열려 목사 한 분이 인도네시아 깔리만탄 바랏에 파송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드로스터(M.K.Drost)목사가 더치 뉴기니아에 파송되었다. 이 섬은 1962년부터 인도네시아에 소속된 오늘날의 이리안 자야라고 불려지는 섬이다. 인도네시아의 이런 지역에서 이루어진 사역이 급속히 성장해 몇몇 교회가 세워졌다. 루미(O. Rumi)라는 첫 번째 원주민 목사가 쿠(Kouh)에서 임직을 받았다. 또한 보마키아에 신학교가, 보마에는 중앙성경학교가 세워졌다. 다른 지역의 ‘자유’개혁교회들은 남아프리카 마메로디의 프레토리아, 브라질의 쿠리티바(가장 최근에 열려진 선교지), 중미의 쿠라카오(이주민들이 교회를 세웠고 원주민들도 진정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에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게다가 소위 복음화 사역이 ‘자유’개혁교회들로부터 조직되어 벨기에와 스페인에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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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웃들”이라고 불리는 교인들의 독립된 협의회는 이라안 자야, 깔리만탄 바랏, 숨바, 그리고 중미의 쿠라카오에 교사들, 간호사들, 사회개발사와 기술개발사들을 보내었다. 이라안에서의 선교사역은 캐나다 개혁교회들과 협력하여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캐나다의 교회들은 이라안 자야의 만겔룸에 목사를 파송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캐나다 교회들은 브라질(펨남북코주에 있는 레시피근처 사오 로우즈)에서도 선교를 시작했다.
캐나다 개혁교회들의 개 교회들은 지원교회들과 협력하여 선교교회의 역할을 수행했다. 슐래이 교회는 아리안 자야를 위한 선교를 담당했고, 토론토 교회는 브라질 선교를 담당했다. 국내선교부가 스미드 교회에서 조직되어 인디안들을 위한 선교를 수행했다.
캐나다 개혁교회들과 같이 호주 자유개혁교회들은 그들의 국내 선교에서 이런 선교를 수행하였다. 호주의 개 교회들은 원주민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1971년부터 피냐라(Pinjarra)에서 선교를 수행하면서 원주민을 위한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사역은 몇 십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자 이런 선교를 외면했다. 남아프리카 자유개혁교회들은 그들의 본국과 화란 ‘자유’개혁교회들과 선교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잘 협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약속들과 신약의 병행구들은 교회가 온 세계에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노력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디서건 진정한 복음을 설교하는 목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편적이고, 계속적이고, 신실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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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개혁신앙고백 교회로서의 개혁교회와 한국 장로교회
허 순 길
1. 유럽개혁교회와 한국교회의 신앙고백
2. 양 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관점
3. 신앙고백과 신앙고백자
4. 신앙고백관에 대한 차이의 근거
5.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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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개혁교회와 한국교회의 신앙고백
유럽이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때, 루터파 교회는 로마교회의 화체설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고 주변의 다른 영주들도 루터가 만든 요리문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이었던 프레드릭 영주가 당시 학식이 뛰어났던 학자 두 사람을 동원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주에서는 이것을 가르치게 했다. (당시 독일은 6개의 주로 나뉘어져서 각기 영주들이 다스렸다.)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독일 황제 칼의 소환을 받아 재판이 열렸을 때, (칼빈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루터파 쪽에서 제소했기에 열린 재판) 황제 앞에서 프레드릭은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자신은 칼빈을 알지도 못하고, 다만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하지만 사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한 두 사람의 신학자는 칼빈에게서 배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프레드릭은 황제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요리문답은 이후 서서히 주변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알미니우스 문제로 열린 화란의 돌트 회의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더더욱 천명하고, 알미니우스를 정죄하고, 내친 김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개혁교회라고 하면 주로 돌트신조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따르고 있다.
장로교회의 경우, 칼빈에게서 배운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세운 교회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시조는 존 낙스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문서들이 형성되자, 아니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회의에 참석한 주된 학자들이 스코틀랜드 교회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1967년도에 미국 장로교회는 이 신앙고백서에 2가지 항목을 더해서 총 35장으로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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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신앙노선에 있다. 다 칼빈주의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개혁교회와 영,미를 거쳐 온 한국 장로교회는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으며 칼빈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유럽 개혁교회 신앙고백은 상당 부분 칼빈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작성되었고, 그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때 작성되었다. 벨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 돌트신경(Canons of Dort 1618,9) 그래서 그 내용 자체에 성경적인 직설적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고, 단순한 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비해 장로교의 신앙고백은 이보다 약 1세기 후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영국의 청교도적 개혁신앙을 가진 신학자들과 스코틀랜드(Scottland)신학자들의 협력으로 작성되었다(1643-46). 이때는 이미 알미니안 주의가 화란 돌트렉트에서 열린 국제적 개혁주의 신학자 대회에서 정죄를 받은 후요, 칼빈주의가 유럽대륙에서 재세례파와 루터파와의 구별이 분명하게 드러난 뒤였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1646년에 작성 완료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매우 조직적이고 세밀하여 신앙고백서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어 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이 작성된 때는 칼빈이 서거한지 이미 1세기도 넘은 때였기 때문에 그의 영향은 매우 간접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화란에서 일어난 알미니안(Arminian)주의를 정죄한 후였기 때문에 돌트신경의 내용인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의 내용은 유럽의 개혁교회가 받은 직설적이고 단순한 벨직(Belgic)신앙고백에 비해 매우 스콜라틱(scholastic)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벨직(Belgic) 신앙고백은 체제상 매우 개인과 직결되어 매 장이 “우리는 중심으로 .... 믿는다. (We all believe with the heart.....)” “우리는... 고백한다(We confess...)”로 되어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하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객관적으로 교리를 진술함으로 친밀감을 덜 느끼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신학과 교리 면에서 다 같은 칼빈을 좇으면서 유럽 대륙의 교회와 영미의 교회는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유럽의 교회들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로, 스코틀랜드(Scotland), 아일랜드(Ireland) 등의 영연방의 것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로 불리어 왔다. 대륙의 교회를 ‘개혁교회’라 부르게 된 것은 신학, 교회, 정치 모든 면에서 변질된 로마교회에서 개혁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불려졌고, 스코틀랜드(Scotland)를 위시한 영연방에서 ‘장로교회’라 부르게 된 것은 교회정치에 있어서 로마교회와 영국교회의 감독정치와는 다른 장로회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는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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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는 영연방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으로부터 미국을 거쳐 온 장로교회의 신학, 신앙, 생활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것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고 교회의 터를 놓은 분들이 주로 미국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는 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지 못했다. 미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 만주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John Ross, John MacIntire등)이, 한국 서북 지방에서 만주를 드나드는 한인들을 접촉, 전도하고, 이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여 한국에 보급함으로 한국선교에 큰 공헌을 했지만, 한국 땅 밖에서 봉사했을 뿐 한국교회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고백적 생활에 대한 어떤 전통도 남기지는 못했다.
한국의 장로교 최초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영국태생이었지만 미국에 이주한 후 그의 부모들이 화란계 개혁교회에 가담했고, 그는 뉴 브라운슈바이크(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수학했었다. 그러기에 그는 어느 정도 대륙의 개혁교회 전통의 신학과 교회생활에 접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대륙 개혁교회의 신학적, 신앙고백적 전통을 한국에 소개하거나 심어준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당시 미국의 주도적 장로교 신학교인 멕코믹(McCormick)이나 프린스톤(Princeton)신학교 출신들보다도 훨씬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 큰 봉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개혁교회 전통도, 미국의 장로교 전통도 남겨주지 못했다. 단지 넓은 복음주의적 신앙과 생활의 영향을 남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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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 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관점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 교회의 터를 놓은 미국, 캐나다, 호주의 장로교회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그 가운데 미 남북 장로교회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초기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장로교의 교리와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고백 문제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한국 장로교회 독노회를 조직할 때(1907), 한국 장로교회의 터를 놓으면서 선교사들은 역사적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내용인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을 하지 않고, 1904년 인도의 장로교회가 채용한 간단한 소위 “12신조”를 채용한 것이다, 아직 교회역사가 짧아 어린 형편에 있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선교가 시작된 지 23년이 되었고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교세는 세계 어느 나라 장로교회 공동체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큰 집단을 이루었었다.
당시 교회수(지교회, 회당)가 1,472교회요,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수가 18.061명, 원입교인이 19,791명, 교회지도자인 조사가 160명, 전도인이 330명이나 되었다. 독노회는 12신조를 “대한장로교회신경”으로 채용하면서 그 서문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1) 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서 내용을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칠 것으로만 알고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 내용을 신앙고백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만 보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교회와 신앙고백의 관계에 대한 매우 소극적 관계의 표현을 보게 된다. 신앙고백을 교회의 고백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신앙고백의 내용은 성경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성경은 절대 무오하고 신앙과 생활에 절대 규범이 된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인간이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것이요. 교정을 요하는 오류도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고 신앙고백을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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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교회사를 이끌어 가시는 교회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적 역사를 간과하는 일이고, 지난날 주의 교회가 받아 고백해 온 역사적 유산을 등한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 고백내용에서 오류가 발견되기 전에는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다. 이런 초대 선교사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소극적 접근을 볼 때,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음은 틀림없으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귀중히 여기고 장로교회의 정체를 뚜렷하게 하는 데는 매우 약했었다. 곧 저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터로 하고 장로교회를 세운 “개혁신앙고백교회”의 건설자들이었다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로, 한국 장로교회 초대선교사들 대부분은 전형적인 미국적 복음주의자들로 아르미니안 주의를 경계하지 않는 교회일치주의자들이었다. 1905년 재한 서울 장로회 일치위원회(The Seoul Presbyterian Committee on Union=선교사 단체임)는 대한예수교회(혹은 대한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설립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그 해 9월에 장, 감 선교사 150명이 함께 조직한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총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 in Kroea)”에 한국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것을 제의하여 수용하게 했다. 이 총공의회의 목적은 “선교활동의 협력과 단 하나의 원주민 복음주의 교회의 조직(Cooperation in missionary drrorts and eventually the organization of but one native evangelical Church)”이었다.2) 이런 하나의 교회운동은 곧 같은 때에 캐나다에서 일어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의 일치운동의 소식에 고무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교회운동은 그 결실을 쉽게 보지 못했다. 그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가 수용을 하지 않았고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분들의 수가 차츰 생겨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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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감리교회와 합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은 1920년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1925년 캐나다의 일치운동이 결실을 맺어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in Canada)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29년 개신교 기관지인 “기독신문”이 당시 교회지도자들에게 교회 통합에 대한 의견을 질문지를 내어 물어보았다. 답을 준 36명 가운데 대부분이 찬성을 보였다. (이때 신학 면에서 어느 정도 진보적 경향을 가졌던 남궁혁, 백낙준, 부산의 김길창 등). 그러나 초대 한국 교회의 목사인 선천의 양전백이나 임택권 목사 같은 분은 교리와 정치가 다르므로 불가하다고 했었다.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었지만 철저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하반기에 북미를 휩쓴 피니(Charles Gl. Finney, 1892~1875)의 부흥운동과 이어 나타난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로부터 직간접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었고 철저한 개혁신학과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언더우드가 선두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이것이 수락되었을 때, 당시 북장로교 선교국 총무인 엘링우드(Ellingwood)에게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 나를 한국에 보낸다면, 나는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표(公表)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했었다. 그는 처음부터 교파라는 것을 싫어했던 일치주의자(unionist)였다.
초대 선교사인 소안론 (W. L. Swallon)같은 분도 성경의 완전영감은 철저히 믿었으나 교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데 어려움이 개재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1925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한 라부열(S. L. Roberts)같은 분도 장‧감 양 교회의 일치문제에 있어서 양 교회가 다 한국교회이니 한국교회의 의견을 듣기 원한다는 중립태도를 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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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는 그들 독특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있다면 인본주의적, 체험주의적 부흥신학이고,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안 신학을 좇고 있다. 이 신학은 화란의 돌트렉트 대회(1618~19)에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정죄를 받았었다. 그런데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게는 아르미니안 주의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선교구역을 분할할 때에도 나타났다. 장‧감 선교회의 선교구역이 확정되자 어떤 장로교 선교지역에 세워진 기성교회를 감리교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넘어가도록 강요를 당한 장로교인들이 항거함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 일도 있게 되었다.3) 이런 일들은 선교사들이 신학과 신앙고백(교리)을 간과한 데서 온 사건들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초대 미 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앙고백 문제에 있어서 해이한 교회생활의 전통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1960년대가 이를 때까지 자기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한국 대부분의 장로교 교파들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4) 이를 볼 때 한국장로교회를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고백교회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럽의 개혁교회는 신앙고백관이 한국의 장로교회와는 매우 다름을 본다. 그들이 가진 소위 일치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를 교회의 신학적, 교리적 기반으로 삼고, 이를 교회의 가치(Symbolun)로 내세우며, 거기서 개혁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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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를 교회적인 공식신앙고백문서로 채용했으나, 이를 참고서 정도로 여기고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목사와 장로 등 직분자들까지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목사가 임직 시에 이 신앙고백 내용을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라는 물음을 받고 “예”라 답함으로 서약을 한다. 그러면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나 설교의 내용은 이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리에 의한 검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 목사 상당수의 설교들은 장로교 설교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설교의 내용이, 개혁주의적이라기보다 아르미니안적 경향을 띄고 있음을 본다. 개혁교회는 이와는 달리 목사의 교육과 설교에서 신학과 교리의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래서 유럽의 개혁교회는 고백교회로서의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편이다.
3. 신앙고백과 신앙고백서
한국 장로교회와 유럽 개혁교회는 누가 신앙고백을 하며, 그 신앙고백을 따라 살 것을 서약하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직분자들만이 장로교 신앙고백을 수락하고, 서약할 뿐이고, 일반교인들은 제외된다. 그러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직분자들만의 신앙고백일 뿐이고, 일반 교인들의 신앙고백은 아니다.
원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전체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작성되었었다. 대요리문답은 강단에서 교리적 해설과 설교를 하기 위함이었고, 소요리문답은 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원래 장로교인들은 이 신앙고백문서로 교리교육을 받고 당회 앞에서 이 신앙고백내용으로 문답시험을 거쳐, 신앙고백(입교시)에 “이것을 성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겠느냐?”는 물음에 “예” 서약함으로 장로교회 신앙고백을 하는 고백교회 교인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었다. 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Scotland) 자유 장로교회는 지금도 그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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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입교)을 할 때,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으로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는 초대 선교사들로부터 이런 전통을 받지 못했다. 목사 장로만이 장립 혹은 취임 시에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 묻고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에게는 신앙고백(입교시) 시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에 관하여는 묻지 않는다. 단지, “교인인줄 알며” “예수가 구주임을 믿으며”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겠느냐?”는 아주 초보적이고 보편적인 것만을 묻고 서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한국교회는 이를 세례문답이라 부른다.)을 한 분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교적에 오름으로 장로교회의 교인이 될 뿐이지, 장로교회가 믿는 바를 믿고 고백함으로 장로교회 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한국장로교회의 문제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목사, 장로, 안수 집사들만이 장로교인이요, 일반 다른 교인들은 정체성이 없이 어느 교회라도 넘나들 수 있는 보편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일반교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장로교회에서 감리교회로, 혹은 침례교회로 드나들게 된다. 이런 신앙고백에 대한 접근생활은 교회의 권징 문제에 있어서도 관계가 된다. 교리적으로 크게 탈선하였을 때에도 신앙고백을 두고 서약한 직분자들에게는 징계를 가할 수 있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직분자들은 신앙고백을 두고 서약을 했지만, 일반교인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혁교회가 언급하는 참교회의 표지 중 하나인 권징 문제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권징만 할 수 있고 교리적인 면에서의 권징은 불가능한 것이다.
유럽의 개혁교회는 교회 직분자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이 다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문서 내용을 자기의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수용하고 고백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에서 신앙고백 내용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뒷받침된다. 일단 교회청소년들이 10세가 되면 매주 한 시간씩 목사로부터 직접 교리교육(Catechetics)을 받기 시작하여 18세 안팎이 되어 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신앙고백을 할 때쯤이면 청소년들은 일치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에 대한 내용을 거의 익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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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이들은 교리 교육을 통해 개혁교회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을 좇는 교회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신앙고백 시에 묻는 물음 가운데 첫째 물음이 “신앙고백서에 요약되고 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전심으로 믿습니까?” “또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이단과 모든 오류를 거절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생사간 이 교리를 계속 굳게 붙들고 살기를 약속합니까?” 이다.5)
이는 개혁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철두철미 신앙고백 내용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고 사는 개혁교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거의 다른 교파 교회를 옮기는 일이 없다. 자기 교회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은 칼빈주의 개혁교회와 아르미니안주의 교회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안다. 이들은 어느 지역, 어느 나라로 이동을 해도 개혁교회를 찾아간다. 개혁교회는 이렇게 교리문제에 강하기 때문에 교리적인 문제 외에는 분열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모든 교인이 공식적인 신앙고백내용을 받고 서약하는 고백교회이기 때문이다.
4. 신앙고백관에 대한 차이의 근거
장로교회와 유럽의 개혁교회가 신앙고백을 접근하는 것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신앙고백서 내용에 나타난 교회관에서 오게 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장로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25장에서 교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고백에 나타난 교회관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교회에 대한 매우 상대적인 사고를 쉽게 갖게 한다. “복음의 교리를 가르침과 받아들임, 규례의 집행, 그리고 공적 예배가 행해지는 순수의 정도에 따라 혹은 더 순수하기도 하고 혹은 덜 순수하기도 하다”로 함으로 더 순수하고 덜 순수한 교회를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하기보다 사단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했다”라고 한다.6) 이런 교회에 관한 내용은 매우 현실적이라 볼 수 있다. 이 교회관에 따라 물론 신자들은 더 순수한 교회에 가담하고, 사단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한 교회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순수성의 차이를 언급하게 될 때,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상대주의적 사고를 쉽게 가지고 어느 교회에든지 안주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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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혁교회의 벨직 신앙고백 제 29장은 참교회(The true Church)와 거짓(The false Church)을 구분하고 있다.7) 그리고 이 참 교회의 표지로 순수한 복음설교(the pure Peraching of the gospel), 순수한 성례의 집행(the pur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교회권징(Church discipline)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제 28장에는 “누구든지 교회의 일치를 지탱하고 이 교회에 속하고 연합할 의무가 있다”(But all and everyone are oblized to join it and unite with it, maintaining the unity of the Church)고 한다.
유럽의 개혁교회 신자들은 이런 교회관을 가진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서약했기 때문에 참 교회의 표지를 따라 참교회를 분별하는데 노력한다. 물론 세상에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없는 것처럼 완전한 참교회도 없다. 그러나 개혁교회 신자들은 참교회 표지를 따라 교회 중에 가장 참된 교회로 판정되는 교회를 택하여 속해야한다는 신자의 의무감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회관이 유럽 개혁교회의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고백 내용을 귀중하게 생각하도록 하고, 유럽 개혁교회가 명실공히 고백교회로 자리를 잡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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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는말
한국 장로교회 초대 선교사들은 성경을 영감 된 절대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주의, 근본주의 신학을 좇는 분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자들로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따른 교회건설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알미니안 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교회일치주의(Unionists)자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장로교회를 장로교의 역사적 기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터로 하는 개혁신앙 고백교회를 건설하지 못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지난날 성경관에 있어서는 매우 강한 입장을 취해 왔지만 다른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강조를 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의 복음주의교회로 성장해 왔지 색깔이 선명한 장로교회로 성장해 오지 않았었다고 보게 된다. 한국 장로교회의 많은 분열에는 교리가 아닌 다른 것이 요인이 되어 왔었다. 이는 교회가 선명한 신앙고백 내용 위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한 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개혁신앙고백 교회가 되지 못함으로 현재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오늘 소위 보수 장로교회들 안에서 지난 날 초대 선교사들이 하나의 “대한 그리스도교회”를 세우자고 했던 이상을 극찬하면서 한국에 모든 교파를 망라한 하나의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 일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교회일치운동, 나아가 종교 다원화 운동이 거세어질 앞날을 내다보며, 주께서 기뻐하실 교회운동이 오늘 무엇인지를 알고 우리들의 역사적 위치를 한 번 더 점검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난날 한국교회 초대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희망대로 하나의 “대한 그리스도교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주님의 은혜로운 섭리적 간섭이었다고 보게 된다. 한국교회가 지난날 놀라운 성장의 축복을 받은 것도 거기서 찾게 된다. 같은 때에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하나의 교회를 이룬 캐나다 연합교회는 오늘날 세계에서 속화된 교회 중에서도 가장 속화된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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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앙과 교리 면에 순수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 교회로부터 생명력이 있는 메시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의 무오 교리를 견지하는 동시에, 범위를 더욱 넓혀 개혁신앙고백교회 건설에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장로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 직분자들이나 평신도들이 왜 내가 장로교인인지 누구 앞에서나 그 이유를 당당히 밝힐 수 있고, 장로교인 된 것을 감사하며 자부심을 가질 때 한국교회는 더욱 복 받는 교회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 내부에 보이는 건물은 호주의 껠름스코트 개혁교회이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 로회록(제 1회), 1908, p.24
2) L. H. Underwood of Korea, p.228, S. F. Moore, an Epoch-Making Conference in Korea, The Movement for a United Christian Church, The Review of the World, 1905, 9월호, p.690.
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록 제2회(1913), p. 33. 합동에 대한 별위원 보고; “황해도 해주 경내에 전에 장로교에 속하였던 교인들이 감리교회의 치리함을 받지 않고, 따로 모이는 일을 권면하여 합하라고 가서 그 사람들을 청하여 권면도 하고, 찾아가 사실을 알아보기도 하고 합하도록 하려하여도 불복하는 고로 ... 그 형편을 알라본즉 치리가 합당치 아니하야 그런 것이 아니옵고, 정치가 좀 다른 것과 겸하야 육정을 많이 생각하옵내다 ...”
4) 합동 측 1966년, 고신측 1966년 작업시작 1969년에 받음.
그런데 합동측에서 1992년에 편집발간한 “헌법” 책에 12신조와 대소요리문답을 제일 먼저두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신도개요로 이름부처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뒤에 “부록”으로 제일 마지막에 두고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5)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식서(Form for the Public Profession of Faith);
First, do you wholeheartedly believe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summarized in the confessions and taught here in this Christian Church? Do you promise the grace of God steadfastly to continue in this doctrine in life and death, rehicting all heresies and errors conglicting with God's Word?
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4절과 5절 참조
7) 벨직(Belgic) 신앙고백은 3장에 걸쳐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다. 제 27장은 보편교회(The Catholic Church), 제 28장은 교회에 가담할 신자의 의무, 제 29장은 참교회와 거짓교회의 표지를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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