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사!!

교 회 역 사 P.K. Keizer

하나님아들 2020. 1. 7. 23:05

교 회 역 사

P.K. Keizer

Translated by T.M.P. Vander Ven

 

 

 

 

 

 

 

 

 

 

성언교회 언약의 자녀들을 위한 교회 역사

차례

첫 번째 시기: AD 100년까지 사도시대: 기초가 놓이다.

1.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투쟁함

2. 유대전쟁(A.D. 66-70)

3. 반기독교정신에 대항한 사도 요한의 투쟁

두 번째 시기: 100 - 323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

1. 박해와 고난을 견딤

 

여섯 번째 시기: 1648-1795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와 투쟁하는 교회

 

1. 서론 - 계몽운동서론- 계몽운동

2. 프랑스- 얀센의 교회개혁정신(Jansenism)

3. 독일 - 경건주의(PIETISM)

4. 영국 - 감리주의(METHODISM)

5. 네덜란드 - 개혁파 신비주의(REFORMED MYSTICISM)

 

일곱 번째 시기: 1795 - 현재 참된 교회로 있고 남기 위해 투쟁함

 

1. 국가와 분리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지는 않음

2. 네덜란드 개혁교회 1816-1834

3. 각성(THE Réveil)

4. 1834년의 분리

5. 갈등과 일치(conflict and unity): 1834년에서 1886년까지

6. 옛 세상에서 새 세상으로

7. 비기독교화 시대(The Age of Dechristianization)

8. 선교시대

9. 흐뢴 판 프린스테러 와 네덜란드 국가교회

10.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

11. 돌레앙티- 두 번째 분리

12. 1892년의 연합

13. 일부 카이퍼의 가르침에 반론

14. 1905년 우트레흐트 회의(The Synod of Utrecht)

15. 아센 총회(The Synod of Assen) 1926

 

 

 

 

교 회 역 사

 

첫 번째 시기: AD 100년까지

사도시대: 기초가 놓이다.

1.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투쟁함

1.1 유대인의 오순절기에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에 능력을 강력하게 나타내심으로 폭풍처럼 내려오셔서 이날을 기독교 절기로 만드셨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오래전 계획을 성취하셨다(2).

1.2 그 순간에 첫 자유 기독교회는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 세워졌다. 이러한 거룩한 보편교회의 그 기초헌장은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다음과 같이 읽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2:21)

1.3 예루살렘에 모인 그 오순절 회중은 많은 바리새인들을 포함하여 개종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바리새인의 누룩,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는 않았다(16:12).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유대인처럼 되도록 강요함으로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더 유대인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는 것을 주장하며 그들의 바리새적인 자기만족을 회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들은 오순절(성령강림) 이후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들일지라도 오직 믿음으로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1.4 유대주의자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유대인의 율법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말하자면 할례, 부정한 음식을 금함, 그리고 유대인의 종교 절기들을 준수함과 같은 것을 요구하였다.(15:1,5).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21:20).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 제물이 되신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확신을 더하기 위해서 그들 자신의 신앙심과 엄격하게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일 등을 추구하였다(10:3). 그들은 그들 자신을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소유()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진짜 바리새인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충분히 확신했다.

1.5 바울사도는 그들을 강하게 공격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에다 그들 자신의 선한 행실들을 추가하는 것을 더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자(유대인)의 율법준수(행위로 얻는 구원)에 반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율법의 준수를 가르쳤다. 유대주의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적대감을 둘만한 거리감이 있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런 분리의 벽을 깨뜨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들 두 세계를 하나로 만드셨고 그들을 한 몸(교회)으로 연합시키셨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아닌 그리스도인을 만드신 것이다(.2:14-16).

오순절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민족들로부터 주님의 교회를 모으셨다.(“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3:10))

1.6 유대주의에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유대주의 한 분파가 될 뻔한 위기에서 교회를 구하시려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방도였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세계적인 즉 보편적인 교회의 성격을 유지하셨다. 그 보편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게 되었다.

1.7 유대주의자에 반대하여 일어난 이 투쟁은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욥바에서 특별한 환상을 통하여 성령님께서는 유대인은 이방인과 조금도 나뉘지 않았다는 것을 연극을 보듯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셨다. 사도는 로마관리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지시를 받았다. 할례 받은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놀라는 가운데 성령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려오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동역자들은 해명을 듣고 싶어하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도록 베드로를 소환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 자신을 변호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다면,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그들이 이런 말을 듣고 조용해지더라.”(11:17,18) 그렇지만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 안에서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을 찾기를 계속하였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디옥이 선교하는 첫 교회가 되기에 합당해 보였다. 여기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유대 회당에 속한 자들 사이에 차이점을 알아차린 것이다(11:26). 이전에는 제자, 형제, 성도, 나사렛파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하셨던 것처럼 개혁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때면 늘 예비 된 고통(ill-prepared)이 있었다(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설교를 보라).

바울은 몇 차례의 선교여행을 (선교활동의) 기반이 되어준 안디옥교회와 더불어 시작하였다.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기에 야벳의 자녀들은 셈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며(9:27)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았다(22:13).

첫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고통을 당하였다(15:2). 예루살렘에서 사도의 회합(apostolic convention)이 진행되는 동안(A.D.49),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은 자유롭다고 주장하였다(15). 유대교의 분파가 아니라, 하나인 그리스도의 교회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개종한 이방인을 열등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긴 일에 대해 바울은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열광적인 유대주의자를 두려워한 나머지 베드로는 그리스도교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였다(2:11-14).

바울은 갈라디아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특별히 유대주의자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들은 교회 안에 큰 혼란을 일으키며 점점 더 광적으로 행동하며 바울을 감시하였다. 사실은 그들은 다른 복음을 끌어들인 것이다(2:12).

사도 야고보는 아마 유대주의자에게서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인데 그는 바울이 체포된 일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21:18ff, 2:12).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도, 이미 바울은 유대주의자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만으로 되는 복음을 주장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며 그곳 회중들에게 편지를 썼다.(1:16). 바울과 베드로 사도 두 분이 다 로마에서 사형집행을 당한 것은 거짓선지자들의 충동질(고후11:13)과 회중 가운데 있던 시기와 배반 때문이었다. 네로의 첩들 중의 한 사람인 개종자가 이 일에 도구가 되었다.

유대주의와의 싸움은 마침내 예루살렘의 파괴로 결판이 났다(ca. A.D. 70). 이로써 구약봉사의 중심은 지나갔다. 역사에서 시종일관하여 바리새주의는 유대주의에 그대로 남아서 자기만족, 열심, 그리고 당파심으로 교회 안에서 큰 손상을 입혔다. (오직 믿음으로만 세워지는) 그리스도교회가 가진 진정한 통일성은 유대주의 이단에 의해 여러 차례 위협을 당했다.

로마천주교회는 유대주의가 가르치는 것들을 선행이라는 그들의 교리의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통일성을 부정하였다.

: 율법 폐지론

a. 유대교 반대편에 율법폐지론(antinomianism, 이 단어는 헬라어 anti=반대하여, nomos=법에서 나왔음)이 선다. 율법폐지론자들은 모든 율법을 다 거부하였다. 비록 그들이 유대교인들처럼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거짓 교훈에 대해 항상 경계해야만 했다.

b. 율법폐지론자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교도들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준수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c. 유대교인은 열 가지 말씀(십계명)의 표제를 잊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율법(Torah)을 감사드리는 법칙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엄격한 명령의 모음집으로 바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율법폐지론자는 오직 서론에 하신 말씀만을 듣고,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30)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포함해서 율법의 모든 가르침을 지겨워한다.

d. 유대교인은 냉정하고 엄격하고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율법폐지론자는 그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유롭고 방종하며 세속적이며 활동적이다. 율법폐지론자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빈번하게 불경스럽고 경솔하다(하이델베르그 24주일을 보라).

e. . 유대교인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용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율법폐지론자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 죄에서 구속을 얻어야 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다.

f. 유대주의는 교회의 참된 보편적 성격을 좀먹는다. 손상시킨다. 그러는 동안에 율법폐지론은 교회의 거룩에 끊임없는 위협을 가한다. 유대주의는 예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 먼저라는 복음을 가르침으로 교회를 하나의 분파로 변질시킨다. 율법폐지론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교회와 세상의 차이를 없애버린다. “값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g. 16세기 재세례파들 가운데 소위 자유사상가(freethinker)라고 하는 많은 율법폐지론자들이 있었다. 사도요한의 말씀이 그들에게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h. 교회는 항상 이런 위험들로 위협을 받는다.

1. 형식주의적인 생활방식: 사랑 안에서 밝고 조심성있는 생활을 하는 대신에 개인적인 경건을 의지함, 엄격하고 두려워하는 생활을 함.

2. 세속적인 생활방식: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즐거워하지만 그러는 동안 마음의 악한 욕망을 따르기(5:13-26).

예수님은 두 가지 생활방식을 동시에 다 부정하신다; 형식적인 바리새인의 누룩과 세속적인 헤롯의 누룩(8:15).

2. 유대전쟁(A.D. 66-70)

2.1 예루살렘의 파괴는 주님께서 친히 예고하셨다(21:6). 이 날은 주 예수님을 거부한 일에 대한 복수의 날이었다. 유대 관리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증인이었다. 전쟁의 마지막 시기 중에서 좀더 후반부에 로마장군들은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였다(지배자 티투스라는 이름은 로마에서 그가 죽은 후에 불려졌음). 유대인들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게 로마인의 맹공격에 미친 듯이 날뛰며 저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리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오래 기다렸던 메시아가 나타나실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다리던 강림의 때를 알지 못하였다. 평화를 가져올 일들은 그들의 눈에 가려졌다(19:41-44를 보라). 1,100,000명이 죽었다. 97,000명은 죄수가 되었다, 그리고 수천 명은 노예로 끌려가 콜로세움과 같은 공사에 동원되었다. 이것은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종말이었다.

2.2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의 성벽 안에서 안전을 기대하고 있었던 도망자들의 시내 반대편으로 가서 펠라로 도망하였다(21:11). “그러나 너의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21:18). 바로 롯이 소돔의 멸망에서 구원받았듯이, 그렇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옛 도시에 쏟아 부으셨던 진노의 언약으로부터 그의 교회를 보호하셨다.

2.3 오순절이 지나고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던 장소라는 특별한 중요성은 사라졌다. “우리의 어머니는 예루살렘에 있던 오순절 회중이 아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다(4:26). 오순절 회중은 처음으로 속박에서 벗어난, 제한된 지역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 회중이었다. 그럴지라도 이 회중이 안디옥이나 에베소, 로마의 회중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 되지 않아 오순절 회중은 이방인 그리스도인 회중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자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a.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하신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의 그리스도의 교회와 연관되어 있는가? 또는 그것들은 또한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유대민족들도 연관되어 있는가?

b. 예수님께서는 예언하셨다. “또 그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모든 민족들에게 사로잡혀 갈 것이요, 또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21:24) 바울은 혈통상 동족인 그의 형제들에 대해 썼다. “3) 육신에 따른 내 형제들,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랐노라.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에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9:3,6).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 충만해지기까지 이스라엘에 부분적으로 완고해지게 되었다는 비밀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세계역사의 과정에서) 모든 이스라엘이(한민족으로서) 구원 얻게 될 것이다(11:25,26). 처음은 유대인이며 그리고 때가 되면 헬라인, 그러나 시간이 무르익어 이스라엘은 기억될 것이다. 이 비밀의 내용에는 그밖에 무엇이 있는가? 복음에 대한 그들의 태도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원수이지만 아직도 그들은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자로 남아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사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당신의 부르심에 있어 결코 후회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11:28,29). 그렇지만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중동에서 그의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때에 우리의 선조들은 북유럽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

c. 유대인이 살았던 곳에서 그 민족들과 동화하려는 시도들은 자주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동화되는 것을 막으셨다; 게토, 유대인 학살, 아우슈비츠가 그것이다.

너희들의 마음에 품은 것은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때 너희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방인처럼 다른 도시들에서 나무와 돌을 섬기는 가족들처럼 될 것이다라고 한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살아있으니, 분명코 전능한 손으로 뻗은 팔로, 격노함으로 부었고, 내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내가 너를 백성들로부터 인도하여 낼 것이며 너희가 흩어져 있는 도시로부터 전능한 손으로, 뻗은 팔로 그리고 격노함을 부어 모을 것이다(20:32-34). ...그러나 후에 너는 확실히 내게 듣게 될 것이다(20:39, NASB).

d. 유대민족, 이스라엘의 현대의 민족은 단순히 하나의 정치적 과제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의 민족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성경적인 비밀이며 교회역사적인 비밀이다.

e. 중동에서 이 정치적 국가는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유대인들은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보다 그 밖에 있는 유대인 거주지(diaspora)에서 살고 있다.

3. 반기독교 정신에 대항한 사도요한의 투쟁

3.1 사도적 시대의 끝으로 갈 즈음에(toward), 사도요한만 남게 되었다. 그는 에베소에 살았는데 거기에서 틀림없이 아데미의 대 신전을 보았을 것이다. 그가 생존한 시기에 가장 위험한 이단사상이 부상했는데 그것은 반기독교적 정신을 가진 거짓복음이다.

그 때에 요한은 마지막으로 기초석을 놓도록, 말하자면 사도들의 교훈을 놓도록 그래서 그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도록 허락을 받았다(16:18,21:14). 이 마지막 기초석은 요한의 세 일반서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요한의 복음이었다. 이들 기록들에서, 요한은 이들 반기독교정신을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3.2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적하거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어떤 존재이다. 바울은 그 자신을 하나님으로 과시하며 하나님의 성전(주님의 교회)에 앉는 어떤 자라고 말했다(살후2:4). 적그리스도인(antichristian)은 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자신을 율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법한 자(the man of lawlessness)이다.(살후2:3)

이런 적그리스도인들은 배교자였다(요일2:19). 그들은 육신으로 임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부인하였다(요일1:22, 4:2). 그들은 하나님의 아드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의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고 십자가위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아드님께서 참 사람으로 심판하여 세상을 개혁하시려고(reform) 다시 오실 것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부인하였으며(1:14)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을 부인하였다(딤전3:16).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신피조물의 구속을 부인하였다(3:16).

결론으로 기독교 반대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모든 것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창조(우리의 일상, 일상적인 생활)를 악의 영역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과 관계가 없다고 그들은 믿었다. 참된 신자라면 일상적인 생활에는 무관심하고 떨어져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일상적인 생활로부터 자유롭다고 느꼈다. 왜냐면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땅에 속한 과업을 감당하도록 부르신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이 없이 죄와 방탕한 가운데 살았다(2:14,20).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함과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을 미워하였다.

3.3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은 심판을 위해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몸이 구속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이런 이단은 교회를 두 번째 세기 동안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그것은 그 불쾌한 주장을 몇 번이고 들고 나서면서 -물론 우리의 시대에서도 그렇지만- 노스틱 주의(Gnosticism)로 알려지게 되었다. 20세기의 서구세계의 기독교는 이런 기독교 반대자들 쪽으로 더욱 더 기울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구속의 역사의 성경적인 사실(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언약적 진노의 행위들(예를 들면 노아홍수)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 그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세상에서 그의 사역을 완수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적그리스도의 흉악한 영(요일4:3)은 그리스도의 자리를 거머쥐려고, 그리스도를 무명인으로(unknow) 만들어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역을 무효로 만들기를 원한다(32:1,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3.4 사도시대는 전 교회역사의 하나의 간략한 요약이다. 그것은 오순절로 시작하고 요한이 밧모 섬에서 경험하도록 허락을 받았던 그 심판의 날로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세계교회의(21:14) 기초가 놓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로마 제국의 영토, 즉 그 당시까지 알려졌던 세상의 끝까지 선포되었었다.

마지막 사도인 요한은 주님의 말씀대로 참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생존하였다(21:22,23). 이어지는 장엄한 환상 가운데서 밧모섬에 있던 요한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았다. 그는 오순절에 시작되었던 일에 대한 예언과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즉 영 가운데서 하늘의 예루살렘이 땅위에 내려왔다.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이 있다(14:2).

그 시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적인 가르침(하나님의 말씀)으로 반복해서 되돌아갔으며, 마지막 사도에게 계시되었었던 그 미래를 늘 기다렸다.

두 번째 시기: 100 - 323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

1. 박해와 고난을 견딤

1.1 시작하자마자,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짓된 교리와 학살로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계속하여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교회가 확실하게 유대주의 분파가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됨에 따라 로마의 권세자들은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그들이 주 하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구세주시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다른 신들은 우상들(신이 아님)이다. 처음에 이런 박해들은 산발적으로만 일어났으며 대개 일부 지역에서 예를 들자면 로마시에서 일어났다. 혹은 소아시아나 남아프리카에서처럼 한 지역에 제한되었다.

시므온은 예수님의 친척이요, 글로바의 아들이었으며, 120년을 살았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 의해서 채찍질을 당하였으며 십자가형을 당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에서 사도요한의 제자였다. 지진이 그 도시를 강타한 후에, 사람들은 이것은 배교한 그리스도인들 위에 임한 신들의 진노다!”라며 소리쳤다. 공식방문 기간동안에, 트라얀 황제는 로마의 격투장에서 죽이도록 직접 이그나티우스에게 형을 선고하였다. 로마로 여행하는 동안에, 이그나티우스는 각각의 회중들에게 일곱 통의 위로의 편지를 썼다.

서머나(Smyrna)의 폴리캅은 또한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그가 죽을 때에 그는 거의 100세나 되었다. 그가 시련을 당하는 동안에 그는 기꺼이 무신론자들이여 떠나라!” 라고 외쳤는데 그때 그는 “86년 동안 나는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결코 주님은 나에게 해를 입히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떻게 내가 나의 왕 나를 구속하신 분을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라며 군중들에게 증거하였다. 장작개비를 던져 넣는 열심당 유대인과 대조적으로 그는 화형을 당하여 죽었다.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학자였다. 해변을 걷는 동안 그는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은 구약의 선지서들에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30세의 나이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로마에서 그는 자주 기독교교리를 학문적인 방식으로 변호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항상 바르지는 못했다. 그는 이들 논쟁들 중의 하나를 변호하는 동안에 체포되었고 참수형을 당했다.

블렌디나는 리용(Lyons)근처의 빈(Vienne)에서 왔다. 소아시아와의 비단무역의 결과, 그리스도인 회중들은 남부 프랑스에서 발견되었다. 블렌디나는 노예소녀였다. 아주 강한 신앙으로 복을 받아, 블렌디나는 15세인 폰티쿠스를 끝까지 격려하며 격투장에서 죽었는데 폰티쿠스도 그녀 옆에서 죽었다.

비비아 페르페투아는 귀족태생의 젊은 어머니였다. 그 여인은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의 통치기간 동안에 노예소녀 펠리시타스와 함께 카르타고의 격투장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비록 아프리카 출신의 무어인인 이 황제는 그리스도인 노예에 의해 치료를 받았었지만 그는 공포의 박해자가 되었다. 그는 건축양식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열등감으로 화가 났으며, 아름다운 이방신전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무시하였다.

마침내, 그 박해는 로마제국을 통하여 여러 황제들의 명령으로 확대하였다. 황제 데키우스(Decius,249-251)는 그러한 전국적인 박해들을 명령한 첫 번째였다. 마지막 전국적 박해들은 디오클레티안(284-305)의 통치 동안에 일어났다. 그의 아내와 딸은 그의 궁정의 많은 신하들이 그랬듯이 그리스도인이었다. 그 당시 제국에는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에 황제의 명령이 실행될 수 없었다.

1.2 이들 박해들에는 많은 동기들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로 고소당하였는데, 그들은 제단들도, 신전들도 어떤 우상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쉽게 유대인의 모함을 믿게 만들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비밀집회에서는 유아희생제물(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이 그들의 모임에서 들림), 인육을 먹음(“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들”), 근친상간(형제자매인 성도들의 교통)과 같은 온갖 종료의 터무니없는 짓들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비방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공적인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류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숭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황제를 공경하였지만 신으로 섬기는 일은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황제는 로마제국의 영원한 영광이 형체로 나타난 것이었다.: divus=황제는 신이다; advent=황제의 오심; soter= 황제는 구세주. 이것을 다니엘3장과 비교하라. 느부갓네살은 바빌론의 국가 종교를 거역한 범죄로 세 사람을 풀무불속으로 던졌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신들보다 더 능력이 있으심이 입증된 후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경배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1.3 순교자들이 그토록 잔인한 고문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으며,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구세주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가? 하늘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하늘의 선물들을 그의 회원들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부어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주님께서는 과연 모든 것을 기꺼이 견딜 수 있도록 그들에게 그런 놀라운 힘을 주셨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19주를 보라).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중요한 전투가 있는 바로 전날 밤에, 막시미니안(Maximinian) 황제는 소위 황제의 희생제물(emperor's sacrifice)을 그의 군대에게 요구하였다고 한다. Thebias(이집트)출신의 군단은 대부분이 그리스도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희생제물을 바치기를 거부하였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완강하였으며 그래서 반역자로 몰려 대학살을 당하였다. 전설은 이 사건이 스위스의 성 모리쯔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주장한다.(Sanctus Mouritius). 이런 방식으로 구세주는 또한 영광을 받으셨고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4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믿지 않는 형제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고통을 당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박해들은 가끔 형제들 사이의 미움이 발단이 된다. 바로 첫 번째의 살인은 이익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서 저질러졌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가인보다 아벨을 더 사랑하셨다는 이유로 아벨을 죽였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를 대적한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들에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대적한 산헤드린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바울을 대적한 유대인들, 루터와 칼빈을 대적한 로마교회, 참된 교회를 대적하는 거짓된 교회의 이야기들에서 똑같은 원인을 발견한다(요일3:11-17).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일어나는 박해들에 대해서 그의 제자들을 경계하셨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16:2)

세상에서 일어난(네로와 다른 로마의 황제들) 교회의 박해는 다른 동기로 인해 일어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로마황제의 박해 동안에 죽었던 자들을 숭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순교자들로 알려졌고, 종종 그들의 죽은 날이 성일로 기념되었다. (이그나티우스와 같이) 사자들에게 던져졌던 순교자의 이야기는 바울과 같이 회당으로부터 출회를 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더욱더 감동적이게 되어졌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네로나 로마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죽음이나 어느 것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데반이 죽임당한 일과 유대인의 손에 바울이 고통당한 일들을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당한 가장 극심한 박해는 그들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일어났다.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잘못된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힘을 얻어 증오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4:29)

온 시대를 걸쳐서 불신실한 교회도 역시 핍박을 받았다. 이를테면, 유대백성들은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동안 핍박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1917)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의 국가교회를 혹독하게 박해하였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진정한 박해의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독일계의 많은 신실한 스툰디스트(Stundist)의 회원들을 죽이고 시베리아로 추방했던 신실치 못한 러시아 교회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 없는 정통국가교회와 연대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그들 자신의 경건한 시간들을 마련하였다(Bibelstunden; Stundists).

1.5 모든 고난이 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유도 없이 짊어지는 고난들(25:3; 44:23; 8:36; 벧전3:14).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겪게 되는 그런 모든 다른 고난들은 징계의 결과이다.

“... 그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그러나 그것을 내 동댕이치고 나를 부인한다) 나에게 합당치 않다. 그의 생명을 얻는 자는(나를 부인함으로 그 대신 자유롭게 된다)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그는 나와 관계를 잃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순교자와 같이) 그의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영원한 생명을) 찾게 될 것이다”(10:38,39).

2. 영지(靈知)주의(Gnosticism)

2.1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생기지 않았으며, 아시아에서 나온 이방종교들에서 그 기원을 발견했다. 그 용어는 그리이스말 gnosis(지식)에서 유래된다. 이런 부류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그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비범한, 초자연적인 지식, 신적인 비밀에 대한 소위 심오한 이해를 가리킨다. 영지주의의 특징은 보다 고등한 세계에서 온 신들이 지금은 저급한 세계에서 한 범죄자로 살도록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람은 그 신들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람이 일상생활의 현실세계 저편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gnosis이다(알려지지 않은 신, 숨겨진 분, 원형의 존재에 관한 고등한 지식, 사실 그 신은 이 세상과 아무것도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2.2 영지주의에 따르면, 이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전능한 조물주께서 창조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한 악한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그런 까닭에 이 세상은 다른 질서- 저급하고, 불경스럽고, 죄 많은 질서로 되어있다.

사람은 이중적인 존재이다. 그의 몸으로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그의 보다 깊은 자아, 그의 본질로는 고등한 세계, 신령한 세계에 속하여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신성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진실로 하나의 신이지만 세속적인 생활에 갇혀있는 신인 것이다. 사람은 짐승같은 존재이면서 영적인 존재이고, 범죄자이면서 천사이며, 저급한 존재이면서 고상한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다. 그는 고등한 영역, 비밀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으며,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으로 나타나셨다. 그 인간이신 예수는 온 세상이 저주를 받았다는 표시로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아니다. 그는 그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던 이후로 더 높은 영역으로 가시려고 인간 예수를 떠났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해 죽은 것이다(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대로, 우리의 옛사람, 죄 많은 본성을 억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는 부활은 한 사람이 이런 부류의 고등하고 신성한 지식에 이를 때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이라는 개념을 경멸하였다. 세속적인 존재로부터 옮겨졌던 영적인 사람이 어떻게 육체의 결핍 가운데 여전히 있을 수 있는가?(딤후2:18).

영지주의는 말시온이 나중에 그랬듯이 별도로 교회를 설립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영지주의의 더 높은 영적인 단계에 까지 기독교신앙을 끌어올리기를 원하였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은 여러 가지 (거짓된) 복음 이야기들 예컨대 도마의 복음을 썼다.

2.3 초기 기독교인들은 박해보다 영지주의를 더욱 더 두려워하였다. 사도신조의 첫 조항은 영지주의의 공격에 대항하는 방어로서 생겨나게 되었다.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모든 세기를 시종일관하여, 영지주의는 가장 위험스런 그리스도의 교회의 적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영지주의의 많은 변형된 형태를 입고서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은 늘 중대한 거짓을 설교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는 나쁘며 하찮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 자신이 하나의 신으로서 본질적으로 신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비참한 세상으로부터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기 때문이다.

2.4 사도 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영지주의의 선두주자들을 반대하였다(1:15-23).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게 보낸 그의 편지 가운데서 가장 긴 장()을 할애하여(고전 15)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의 필요성과 우리의 생활의 갱신을 설명하였다. 그는 디모데에게 지식이라고 하는 거짓된 것에 관한 논쟁에 대해서 경고하였다(딤전 6:20, 21; 딤후 2:16-18).

사도요한도 역시 이러한 악마같은 이단을 공격하였다. 그는 그 추종자들을 적그리스도들이라고 불렀다. 그의 복음에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라고 기록하였으나 적그리스도들은 이런 창조를 경멸하였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와 특별히 리용의 감독 이레니우스는 겉으로 보기에 경건한 이단, 적그리스도의 영지주의를 날카롭게 공격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다고 주장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의 교훈들을 다섯권의 책, “이단들에 반박하여에서 논박하였다.

- 중세기 동안에는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 엑카르트(Eckhart)

-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영지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 영지주의는 다시 16세기에 세바스티안 프랭크(Sebastian Franck)와 쿤헤이르트(coornheert)의 교훈들에서 두드러지게 되었다.

- 18세기 동안에 그것은 많은 경건하지만 신비적인 찬미들의 형식으로 되돌아왔다.

- 소위 신신학(new hermeneutics)은 사실 영지주의의 부활에 불과하다. 그것은 성경을 재해석하기를 원한다. 이미 사도들은 성경의 그러한 사탄적인 왜곡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바울은 심지어 지도자들: 후메네오, 알렉산더, 그리고 빌레도(딤전 1:20; 딤후 2:17,18)를 거명하고 있다.

3. 말시온

3.1 말시온(85-160)은 시놉(Sinope)의 회중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감독의 아들이었다. 시놉은 본도(Pontus)의 로마 식민지에 있는 흑해의 남쪽 연안에 위치한 그리이스의 무역도시이다. 아굴라(Aquila)는 이 지방출신이었고 사도 베드로는 본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통의 편지를 기록하였다. 말시온은 부유한 선주였다. 그는 행실에 있어서는 흠잡을 것이 없었으며 확실히 율법폐기론자는 아니었다. 그는 겸손하였으며 신중하였고 친절하였으며 현실적인 사업가였다. 그렇지만 그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증오하였다. 바로 그 시대에 그들의 메시야인 바-코크바(Bar-Cochba)의 영도아래 (구약에 호소함으로) 일어난 유대인의 폭동은 온 로마제국에서 많은 반유대감정을 일으켰다. 이 폭동에서 50만 명이 더 되는 유대인들이 죽었다.

3.2 말시온은 반유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다. 그는 그의 시대의 유대인들이 구약의 유대인들과 동일하다는 사실 - 서로 싸우고, 죽이고, 사납고, 잔혹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말시온은 이것이 구약의 신인 야웨의 본성이었다고 가르쳤다. 그 신은 참혹한 세상을 창조하셨었다. 자비와 친절로 충만한 신약은 얼마나 더 나은가!

말시온은 두 신: 구약의 신인 유대인의 신, 엄격하고 공의로운 신과 신약의 신인 알려지지 않은 신, 기묘한 신, 자비하고 동정하는 신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구약의 창조주인 신은 자신을 거친 유대인의 율법 가운데서 계시하였었다. 신약의 알려지지 않은 신은 인자하심의 복음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말시온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모순되는 대조(반정립)를 가르쳤다.

- 창조주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알려지지 않은 신

- 구약과 신약

- 율법과 복음

-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과 영적이고 천상적인 것

- 몸과 영혼

3.3 진정한 적그리스도인 말시온은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참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의 모습은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천사의 모습과 같았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귀환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였다. 말시온은 이런 사상들이 유대인의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활은 고등한 질서, 영적인 본성에 관한 어떤 것이며, 저급하고 육체적인 몸에 관한 문제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말시온의 성경연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려고 고안된 틀림없는 음모들이 있었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주의 날 48). 그의 주된 일은 대립(antitheses)이었다. 그는 구약을 부인하였으며 누가의 복음과 바울의 서신들만을 그의 번역판에 남긴 채 신약을 정리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복음10:21에서 하늘과 땅이라는 낱말들을 지웠다.(“그 시간에 예수께서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그 이유는 그가 주 예수님의 아버지는 또한 땅의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기도에서 (실재하지 않는) 예수 당신의 아드님이라고 한 그의 번역본에 맞추어 네 번째 간구를 우리에게 당신의 빵을 주소서로 읽게 하려고 바꾸어버렸다.

그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 출교되었다(.10:37). 그는 자신의 배들 중에 하나를 타고서 스미르나로 항해하였는데 폴리캅을 만나게 되었다. 폴리캅은 그를 사탄의 장자라고 불렀다. 그는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로마에 도착하였고 거기에서 그는 가난한 자에게 막대한 액수의 돈을 기부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로마에서 교회로부터 추방된 후에는 이 돈도 그에게 되돌려졌다.

그는 많은 지역들에 대립하는 교회들을 세웠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감독들과 장로들과 아름다운 건물들과 성경을 가진 말시온의 교회로 알려졌다. 그들의 예배는 아무 시편도 들어있지 않았고 (경건으로 가득한) 찬미들만 포함하였다. 순교자들 가운데에는 역시 말시온의 추종자들도 있었다.

3.4 2세기 동안에 유프라테스에서 론(프랑스)까지 이르는 카토릭 기독교 교회 전체는 많이 손상 되어진 말시온의 교훈들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처하여 있었다. 첫 세기 동안에는 오직 하나의 분열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이다. 이 시대의 저서들은 주의 깊게 참된 교회인지를 찾아야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새복음이 설교되어졌던 말시온의 교회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 알지도 못하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시온은 한 사람의 이단자로서 출교를 당하였다. 그의 이름은 벨직 신앙고백서 9항에 언급되어 있다. 그는 성경 본문비평의 창시자이다. 왜냐하면 그가 구약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구약은 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성경이었다.

3.5 바울도 유대교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말시온은 바울의 추종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말시온과 바울의 교훈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말시온: - 사람의 비참= 슬픔, 고통은 깨달음을 요구한다.

- 하나님의 사랑= 인자, 불쌍히 여김

- 우리의 지상적인 존재= 운명, 우리의 책임 밖임

- 예수님= 유일한 중보자

- 반 유대민족(Anti-Semitic)

바울: - 사람의 비참= 부채, 범법, 죄 이것은 지불되어야만 하며 예수님의 보혈로 화해되어야만 한다.

- 하나님의 사랑= 은혜 안에서 죄와 허물의 용서

- 우리의 지상적인 존재= 고의적인 불순종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았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주의 날 4).

- 예수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평화를 이루셨다(1:20).

- 반 유대주의(Anti-Judaist)

말시온의 교훈들은 히틀러 때의 독일에서 현대 반()유태인의 거짓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되살아났다. 구약은 유대인의 신의 책으로 간주되었다. 현대 신학 역시 신약성경을 구약성경 훨씬 위에 둔다.

3.6 본도에 있는 신실한 자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 베드로는 자주 구약에서 인용하였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우리는 말시온의 아버지가 시편 34:9절에 있는 다윗의 말씀을 한번 이상 인용하였었을 것이고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3절에서 하였듯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말시온은 그의 아버지의 설교와 베드로의 가르침으로 인해 기분이 상하게 되곤 하였을 것이다. “... 유대인들의 하나님이 인자와 은혜의 신이라고? 천만에 말씀!” 말시온은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은혜의 언약과 화해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사도들은 구약과 그들의 복음 사이에서 어떤 불일치도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주의 깊게 선택된 몇 개의 메시야적인 구절이나 구약의 모형들이나 그리스도의 예표(indications)들 몇 개에 억지로 의지하게 요구를 받지 않았다. 전체 구약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자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완성이다. 화해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는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반역한 후에 즉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아드님을 약속하셨었다. 구약성경은 이런 약속으로 가득하다. 만일 구약이 거부된다면 신약은 이해될 수 없다.

일련의 대비들로 이루어진 그리이스의 이교의 구조를 통해서, 말시온은 성경의 일치를 깨뜨렸다(10:35) 그리고 이러한 사탄적인 교훈들의 파괴적인 영향은 현대의 기독교 사회에서 선명하게 두드러진다. 로마 카토릭교회는 성직자의 독신생활과 (말시온의 교회에서도 역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 수도원들에서의 금욕주의와 육체의 체벌(몸은 영혼보다 더 낮은 질서이므로 영적인 발휘를 위해 육체의 굴복)을 강조하며, 그리고 특별히 소위 거룩한 주간들에 금식을 훈련한다.

3.7 소위 영적인 지식에 대해 변론하는 일에 대한 바울의 다감(多感)하고 적절한 경고는 정말로 오늘날에 적절한 것이다(딤전6:20).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하나님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4. 몬타누스(MONTANUS)

4.1 몬타누스(170)는 프리기아(Phrygia)라고 알려진 소아시아의 중심지방의 페푸자라 부르는 곳에서 살았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기 전에는 이교도의 사제였었다. 기독교신앙의 쇠퇴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고 그의 시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서, 몬타누스는 절제와 금욕주의와 도덕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해졌다는 사실과 그것이 페푸자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신념에 기초되어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페푸자의 성자들 혹은 근대의(latter-day) 성자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두명의 여선지자, 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몬타누스는 중재자이신 약속된 성령님께서 그 자신의 인격에 나타났었다고 가르쳤다. 그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새로운 계시를 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몬타누스와 프리스킬라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방언으로 말하였고 자주 황홀경에 빠졌다. 때때로 그는 무의식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페푸자에서 큰 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

4.2 2세기 동안에 교회는 그 일치와 보편적인 특성을 다음을 통해서 더욱 더 드러냈다.

a. 직분들의 제도 - 첫째로 사도들, 그다음에 장로들 혹은 감독직. 그들의 첫 선교여행 동안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미 각 회중 가운데서 장로를 임명했었다.

b. 신앙고백의 작성

c. 정경을 받아들임

4.3 몬타누스는 이것들을 맹렬하게 반대하였는데 그는 자신을 선지자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a. 그는 직분들의 설립을 반대하였다, 자신이 가진 예언자의 재능들을 강조하였는데, 그는 그의 재능이 임명된 직분을 훨씬 초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b. 그는 영지주의와 말시온의 교훈을 반대하는 고백서의 발전을 반대하며, 그 자신의 예언이 사도적 증거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c. 그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신약의 정경을 거부하였는데(사도의 작품들의 목록, 교회들 가운데서 인정을 얻은 권위), 성령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를 주장하였다.

4.4 몬타누스를 대항하여 교회의 투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정경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몬타누스를 출교함으로 보존되었다. 계시의 시대는 종결되었다. 예루살렘의 기초는 그들의 복음과 서신들에 기록된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교훈이다. 기독교회는 몬타누스의 영적이지 않은 열광적인 행위를 거부하며 직분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의 통치를 보존하였다.

4.5 그의 말년에 카르타고에 있는 그리스도인 변호사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의 열광의 신앙심에 매료되었다. 터툴리안은 교회로부터 돌아섰다. 그는 예리한 문체를 가진 활발한 사람이었다. 그는 박해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을 변호하는 데 라틴어를 사용한 첫 번째 한사람이었다. 두려워하지 않고 그는 시민의 권리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자유를 변호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재판도 없이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바울도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으며 선한 제도를 이용하여(with good effect) 주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25:16,21).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에 대항한 터툴리안의 투쟁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직분자들은 회중을 섬기기보다는 더욱더 권력을 주장하였으며 자신을 대주교(metropolitans), 총대주교(archbishops), 심지어는 교황(patriarchs)이라고까지 불렀다. 교회의 직분의 남용이 더 심해지는 것에 대한 반발로 터툴리안은 아예 사도의 관습 전부를 거부하였다. 그는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계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문제의 결론(the end)이었다. "성도들의 교회"의 열광적인 사람은 심령주의자(spiritualist)와 체험적인 비밀집회에 있는 사람이(a man of the experiential conventicles) 되었다.

4.6 특별히 언약을 배반하는 시대에 그와 같은 신령주의는 기회를 엿보았다.

- 2세기: 몬타누스주의

- 5세기: 도나투스 주의(어거스틴의 시대에)

- 16세기: 재세례파

- 18세기: 라바디즘(Labadism)

- 20세기: 오순절교회파, 교파주의

4.7 비교하라:

영지주의: 사람의 내면에 있는 거룩한 불꽃은 악한 창조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말시온: 인간의 영혼은 저급한 질서의 창조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몬타누스: 사람은 성령님 안에서 살아야만하며, 직분과 고백서 혹은 정경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사람은 죄와 사탄에게서 구원받아야 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작품이다.

5. 종교의 자유

5.1 313년 서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틴과 동로마 제국의 군주 루시니우스는 밀란의 칙령을 선포하였다. 교회는 무제한의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몰수된 제산은 되돌려졌거나 넉넉하게 보상되어졌다. 이런 칙령은 세계 역사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별히 323년 이후에 콘스탄틴이 로마제국에 단독으로 군주가 되었을 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독교 종교는 국가의 교회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국가 교회가 되었다.

5.2 콘스탄틴 대제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들 때문에 기독교회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심각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감독과 대감독이라는 그 자체의 제도를 가진 교회는 공격당하고 분열된 로마제국을 위해서는 퇴폐적인 이교보다는 더욱 더 견고한 기초가 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렇게 하여 콘스탄틴은 교회가 국가의 정치적인 연합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로마 황제들은 종교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시민의 의무의(예를 들자면 병역의무)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신들의 은총은 대 로마제국이 행복을 얻도록 해야 했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은 사람들의 신앙에 관계없이 필요한 제물을 가져오도록 요구받았다. 이 제물의 목적은 do ut des, "나는 제물을 가지고 왔으며 그러므로 나는 당신께서(신들) 도움을 주실 줄로 기대합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이방 신전들에서 do ut des의 관례에 함께 할 수 없었기에 그 결과로 그들은 부과된 시민의 의무들을 거부한 일로 고발을 당하였다. 그 결과로 신들이 화를 내었다고 소문이 돌았고 그것은 국가에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견고함은 깊고 변치 않는 인상을 남겼으며 그리스도인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이교도는 타락하였으며 많은 신전들은 황폐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 국가의 고대의 신들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으신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로마제국의 보다 큰 안녕을 줄 수 있음에 틀림없다고 보였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전환시킨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한 결과로서 그리고 때가 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시민의 의무로 여겨지게 되었다(do ut des).

5.3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단계적인 과정이었다. 콘스탄틴은 이방종교를 무력으로 근절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공적으로 기독교신앙이 황제의 종교였다고 선포하였는데 그것은 참된 종교였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은총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느꼈다. 황제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검투사 경기를 금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공개적으로 그것들을 비난하지 않았고 투기장을 찾지도 않았다. 그 결과는 명백하였다. 이방종교는 표면적으로는 대왕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380년에 유럽에서 금지되었다. 일요일 준수의 법령은 선포되어졌다; 이방신전들은 파괴되었다; 마지막 올림픽 경기는 394년에 중단되었다.

6. 밀란의 칙령

6.1 혜택:

a. 교회의 직분자들의 법적인 지위는 안전하게 되었다(세금면제, 국세). 이것이 진정한 혜택인지 의문스럽다.

b. 전통적으로 신전과 성전들에 주었던 권리와 특권들은 이제는 교회로 넘겨졌다.

c. 단계적으로 일요일은 제국 전역에서 국가의 안식일이 되었다.

불이익:

a. 교회는 국가의 지배권에 대해서 그 독립심과 자유를 잃었다.

b. 실제에 있어 황제는 교회의 수장이요 아버지가 되었다(황제 교황주의). 그는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감독을 임명하고 면직하는 권한을 가졌다.

c. 교회는 세속화 되었다. 많은 사람은 확신 때문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생활의 편의 때문에 가입하였다.

d. 가장 큰 불이익은 이교종교와 기독교 신앙의 사이에 있는 선명한 차이점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모든 이방종교들은 이익과 능력을(노한 신들을 피함) 바라는 종교였다. 기독교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오는 구속을 말하는 유일한 종교이다(3:16).

6.2 로마의 황제인 배교자 율리안(361-363)은 밀란의 칙령을 무효로 만들어 과거로 돌아가려고 꾀하였다. 그가 젊었을 시절에는 그리스도인인체 하였었다. 비록 그가 낮에는 니코메디아의 기독교회에서 낭독자였을지라도 밤에는 이교의 신전에서 사제로 집전하였다. 황제로서 그는 강력하게 이교신앙을 장려하였으며 그리스도인에게서 받은 돈으로 폐허가 된 많은 신전들을 재건하는 데 제정을 지원하였다. 그렇지만 안디옥에 있는 복구된 신전의 엄숙한 헌당식에는 단지 노인 한 사람과 한 마리의 거위만이 참석하였다(only an old man and a goose turned up). 예루살렘 성전은 주 예수님의 예언들을 비웃기 위해 재건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다시금 수리된 후에 불과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마침내 율리안은 그만두었다. 그는 이교를 정화하기 원하였고 기독교는 분열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단 아리우스의 추종자들을 보호해주었다. 두 해째 박해 후에 그는 페르시아에서 군사작전 중에 죽었다.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는 이겼다!”)

6.3 사탄은 많은 이교도 국가들을 쳐부수고 복종시켰던 로마황제의 두려운 권력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파괴하려고 헛되이 꾀하였다. 다음의 세기 동안에 사탄은 교회에 그의 공격을 계속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18세기 동안 이슬람국가가 남부 아프리카를 가로질러 휩쓸고 지나갔을 때 그랬다(지브랄타=지브르--타릭=타릭의 해협). 732년에 포이티르 전투에서(혹은 투르스(Tours)), 찰스 마르텔은 그들을 피레네 산맥을 뒤쪽으로 가로질러 스페인으로 몰아내어 이슬람교도를 격파하였다. 16세기에는 이슬람교의 투르크(터키)족들이 유럽의 심장으로 곧장 행군하였으나 비엔나로 가는 길목 앞에서 격파되었다.

7. 첫 두 기간을 개관(槪觀)

7.1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알려진 온 세상을 가로질러 퍼지게 되어, 구주님은 그 자신을 위한 한 왕국을 세우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4:6). 그는 그의 교회를 모으셨고 보호하셨으며 유지하셨다. 주님은 교회를 심판들을 통하여 정결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소유된 자들의 생활 가운데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다.

7.2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양식은 그들 주변의 이교도들의 생활양식과 예리하게 대조가 되었다.

a. 그들은 결혼의 거룩한 결속을 존중하였으며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여인들은 그들의 존귀한 지위로 회복되어졌다.

b. 그들은 정부에 복종하였으며 권위에 있는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였으며(13:1, 벧전3:17이하), 결코 폭동이나 혁명을 설교하지 않았다.

c. 그들은 개인적인 소유를 인정하였으며 도둑질하지 않았다. 그들은 청지기 직무를 강조하였고 노동을 거룩한 소명으로 인정하였다.

d. 그들은 사회의 질서를 혼란시키지 않았고 노예의 즉각적인 폐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유자들이 그들의 노예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노예들은 하나님의 법을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복종을 보이라고 명하였다(3:22).

e. 때때로 노예들은 그들의 회중 가운데서 직분자들이 되었다. 이것은 노예가 하나의 사람의 물건으로 간주되었으며 네발 달린 상품으로 취급 받았던 세계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빌레몬, 주인과 도망간 종 오네시모는 주님의 상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나란히 앉았다. 골로새에서 노예를 소유한 빌레몬의 동료들의 반응은 이런 이상한 관습에 대해 어떠했겠습니까? 도망한 노예를 징벌하는데 낙인을 찍거나 사자의 굴에 넣어 처형하는 식으로 징벌하곤 했던 세계에서 무슨 불안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그런 비인간적인 노예제도를 즉각 폐지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혁명적인 요구는 사회의 현재의 구조들을 전체적으로 혼란스럽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노예와 주인을 형제로 만들어 고통으로부터의 즉각적인 안식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가루 석 되에 감추인, 빵 덩어리 전체(사회)를 부풀게 한 누룩처럼 일한다(13:33); 중세의 말기까지 노예무역은 모두가 했다. 그러나 기독교화 된 유럽(베니스에서 제외)에서는 사라졌고 길드제도로 대신하게 되어졌었다. 그 안에는 주인과 제자(pupil)의 권리와 의무들이 심지어 노동조합에 의해서 주장되는 현대의 제도보다 더 나은 조합을 결성하였다. 빌레몬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하늘의 예루살렘의 참된 기초가 유럽에 임하여 있음을(to be a true foundation of the heavenly Jerusalem descending on Europe) 증명하였다.

f. 자주 전쟁의 포로들이 배상금이 지불되었다.

g. 가난한 자, 나그네, 죄수들이 후원을 받았다.

h. 성령님의 열매(5:22)는 알려진 세상의 모든 도시에 사는 수천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나타났다.

i. 그리스도인이 인류의 적으로 박해를 받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설교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비유대인, 종과 자유자, 가난한 자와 부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반목의 장벽은 제거되어졌다(6:15; 2:2; 3:11). 그리고 그것은 충격적이었다. 바로 이교도 사회의 기초(공중에 있는 사탄과 악한 영의 권세 안에 있는)가 침식당하여 가고 있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은 어디나, 그리스도의 왕권이 확립되어졌던 곳은 어디나 이런 어둠의 세상권세의 물러남이 심지어는 그렇게 눈에 보이게끔 발생하였다!(6:12, 2:15). 비록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무죄하고 무방비 상태의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외치는 수천의 사람들은 확실히 마귀가 했고 그래서 그들이 불안에 떨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j. 로마 군단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부 유럽에 퍼뜨리는 일에 첫 번째였다.

7.3 그의 지역 교회들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아주 곧 이교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였다. 사도의 계승자들은 장로들(presbyters, episcopi)과 집사들이었다. 장로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딤전5:17): 설교와 가르침으로 일하는 장로들(후에 사역자)과 다스리는 장로.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자주 부르는 대로 사도시대의 아버지(Apostolic fathers) 라고 부르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사도들의 계승자들, 혹은 사도들의 제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터툴리안과 다른 사람들이 교부(church fathers)라고 불려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23:9절에서 분명히 그것을 금하고 있다.

이미 속사도 시대에서 목사와 교사의 직분이 다른 직분들 보다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곧 목사(교사)만이 감독(episcopus) 혹은 주교(bishop)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감독들은 그들이 사도들의 직접적인 계승자였다는 그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그들의 직분의 권위에 복종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 사도들로부터 직접적으로)계승되는 계보에서 파생시켜 만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성직계급제도가 교회로 살금살금 기어들어왔다.

7.4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구세주를 부인하기보다 기꺼이 그리고 신실하게 복종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더 그들의 생명을 잃었다. 때때로 주 하나님을 사랑하여 경외함이 없었고,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자주 가려지게 되었다. 심판은 점차적으로 배교하는 교회에 임해야만 했었다.

심지어 교회가 종교의 정치적인 자유를 받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민의 권리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교회를 박해하는 일은 거짓교회에 의해 밀란의 칙령 이후로도 마찬가지로 계속되었다. 교회의 대적의 선동에 아다나시우스는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추방당하였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그의 신실한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세 번째 시기: 323 - 590

교회가 국가에 굴복하다: 황제교황주의

1. 첫 번 세계교회 회의: 니케아 325

1.1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기독교회의 한 장로였다. 그는 매력적이지만 예수에 관한 설교로 그의 청중을 사로잡을 정도로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주목받았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항상 아버지셨던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드님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첫째가 되시며 가장 중요한 피조물, 일종의 하나님과 악한 세상 사이의 중간적인 존재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이름만 하나님이셨다.

1.2 이런 이교도에 대항해서 반발이 일어나, 심지어는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의 추종자와 그 반대자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거리 싸움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불안은 이집트 전역에까지 퍼졌다. 많은 주교는 아리우스의 편에 가담했다. 그리고 갈등은 너무 심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체 동방의 제국은 제국의 연합이 위협을 받기까지 동요되었다. 콘스탄틴의 판단에 제국의 연합을 위해서는 단일한 국교(國敎)가 필요했다. (느부갓네살 이야기와 비교하라: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락되었으나 이 신들 위에 다니엘 3장의 금신상이 일어섰다.) 동쪽으로부터 318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반면 서쪽에서는 겨우 여섯 명만 참석했다. 각각의 대표자는 혼란스럽게 공적인 운송체계를 형성하여 보좌관과 종으로 구성된 자신의 공들인 수행원들과 동행하였다. 그와 같이 대규모의 교회적 회합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것은 황제의 구상이었다(황제교황주의). 그것은 마치 교회는 그의 회중을 그의 말씀과 영으로 다스린 수장이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1.3 니케아 회의(325)는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여름궁전에서 열렸다. 그 회의들은 심각한 불일치와 온갖 종류의 개인적인 불화들과 함께 시작하였다. 황제는 왕권의 상징으로 가득하게 갖추어 입고 회의에 나타나 영광의 황금보좌에 앉았다. 그는 예견된 명예의장이었다. 그래서 재빨리 가득 쌓인 청원서를 불태우라고 명령함으로 대표자들의 개인적인 논쟁들을 잠재웠다. 황제의 허락으로 아리우스는 논의에서 자리를 잡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고) 그의 강력한 반대자인 아다나시우스는 그가 참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에 등장하도록 허락받지를 못하였다. 처음에는 황제가 아리우스 편을 선택하였다. 그렇지만, 후에 아리우스의 정죄와 추방에 동의하는 것으로 그의 마음은 변했다.

1.4 니케아의 중요한 교리적인 결정을 하는데 최대의 치열한 논쟁은 우리의 구세주는 참으로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구원되었다는 고백이었다. 하나님 자신께서 그의 아드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만일 예수님께서 단지 피조물이실 뿐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믿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셨기 때문이다.(1:1, 1:14, 20:28)

1.5 니케아(회의)에서 그런 거부에도 불구하고 아리안주의는 큰 힘을 얻었다. 황제의 법정의 의원들로부터의 압력을 받아 황제는 아리우스에 대해 약간은 더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는 심지어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 엄숙한 종교예전(a solemn ceremony) 동안에 다시 받아들여지도록 되었다. 그렇지만 그 예식의 전날 아리우스는 20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1.6 회의가 끝난 후, 그 싸움은 더욱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아리우스: 그리스도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유사하다.

아다나시우스: 그리스도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다.

1.7 니케아신조는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다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니케아 회의 때에 명확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그렇게 고백문구를 붙이게 되었다.

1.8 아리우스파의 감독 울피다(Ulfida, 그의 성경번역의 187페이지 분량이 여전히 스웨덴의 웁살라에 보존되어있다.)고트족(Goths)의 사도로 알려져있다. 이 고트족은 공포의 훈족 앞에서 도망하는, 민족의 대이동으로 지금 알려진 그 이동 중에서,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억지로 밀고 들어갔다. 서부유럽은 아리우스파 고트족의 통치 아래로 들어갔다. 58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리안주의가 마지막으로 (스페인) 톨레도(Toledo)의 의회에서 왕 Recared와 그의 아내에 의해서 유죄선고를 받았다. 유럽은 마침내 이단에서 건짐을 받았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의 교회역사의 기적이다.

아리안주의는 많은 현대 신학들에서 다시 출현하였다. 예를 들자면, 19세기의 자유주의(the libertines) 신학과 20세기에 모든 근대주의자 교회들의(the modernist churches) 신학이 그것이다.

2. 아다나시우스

2.1 아다나시우스는 295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373년에 같은 곳에서 죽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의 서기가 되었고 후에는 감독으로 계승하였다. 그는 현명하였고 웅변적인 사람이었으나 또한 유감스럽게도 오히려 더 야망있고 전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복음의 아리우스적인 왜곡에 대항하여 싸웠다. 여러 군주에 의해 다섯 번 추방되어 다 합하면 그의 생애의 약 20년을 추방 중에서 보냈다. 한번은 제국의 서부 변경으로 추방을 당했다(Trier).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서쪽에 있는 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더욱 끼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에 대한 증오가 너무 강력해서, 한때는 심지어 살인자라는 고소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도록 강제로 요구를 받았다. 그의 고소자는 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피해자의 도움(hand)을 연출하였다. 그렇지만 아다나시우스는 어떤 아르세누스(certain Arsenius)라는 그 피해자 자신을 데려감으로 아주 설득력있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었다!

2.2 그의 축제편지의 하나는(편지들은 그의 주교관구(diocese) 안에 있는 모든 회중에게 교훈했다) 성경의 완전한 정경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조용한 가운데 지금 신약을 구성하고 있는 오직 이 책들만이 (그 시대에 회람되었던 아무 다른 복음들과 서신들이 아니라) 교회에서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독교회들이 정경과 외경을 구별할 수 있게 했다. 벨직 5항은 우리는 이 모든 책들과 이 책들만이 거룩하고 정경으로 받는다...”라고 들려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이나 교회회의에 의해 편찬되지 않는다. 한번 생각해보라!

2.3 동방 교회 전체는 황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아다나시우스도 또한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제국의 영향력의 격렬한 반대자였지만, 때로는 고의로는 아니지만 반대를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한번은, 교회회의에서 다시 정죄된 후에 아다나시우스는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도망하려고 했다. 거리에서 황제의 사륜마차를 만나게 되어, 그는 담대하게 그것을 멈추어 세웠다. 그리고 황제가 자신에게 경청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주장을 변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다나시우스는 황제에게 호소했다. 교회회의에서 정죄받게 된 후에, 비록 동일한 황제에 의해 전에 추방되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그런 행동들은 별나다거나 변덕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 이 시대에 교회문제에 있어서 국가 감독과 국가간섭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방 교회에는 관습이 되었다. 이것을 비잔틴 전통이라고 한다. 이후 세기에서 서부 교회는 강력하게 그런 국가 영향력을 반대하였고 성공이 없지는 않았다.

비록 아다나시우스는 황제의 열향력을 인정하도록 요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하게 정부에 의해 강제될 수 있는 시민의무의 하나로 교회 회원권을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일에 강요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사람의 마음을 변개하는 영광을 남겨놓으셨다. 이것은 힘으로 되지 않고 그의 영으로 된다(4:6) 아다나시우스는 강하게 변호했고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스스로 변호한다. 힘은 이단의 상징이다아다나시우스는 동방에서 이런 일들을 서부에서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이 본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분명하게 보았다.

중세 동안에, 교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 사이의 구별이 유럽에서는 사라졌다. 생활의 전부는 교회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었다. 이것은 다수의 피흘림과 눈물의 원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가져오는 참된 자유를 크게 방해했다.

2.4 아다나시우스는 우리 구주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투쟁의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381년 콘스탄티노플의 2번째 세계교회회의 동안에 일어났다. 비록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아다나시우스에 의해 씌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2.5 아리우스의 교훈들

a. 아드님은 참으로 세상의 창조 이전에 존재하셨다. 그러나 그는 영원으로부터는 아니다; 아드님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b. 아드님은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피조물이시다. 아버지의 피조물로서 그는 아버지께 지배받으신다.

c. 그리스도는, 사람 중에 가장 고귀하신 분으로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인간의 능력은 그런 과정에서 등급을 바꾸신다.

2.6 아다나시우스의 교훈들:

a. 아드님은 온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다(니케아 신조); 지어진 것이 아니라, 낳음을 받으셨다(아다나시우스 신조)

b. 아드님은 아버지에게 지배받지 않으시며 아버지와 동등이시다. 아다나시우스 신조 6: “그러나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님의 신성은 모두 한분이시다. 영광이 동등이시며, 권위가 서로 영원하시다.

c. 아다나시우스 신조, 30,44: “바른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드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다...고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편신앙입니다. 사람이 신실하게 그것을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

3. 은둔자 안토니(Antony)

3.1 안토니는 아다나시우스와 동시대인이었으며, 고향 친구였다. 하루는 그가 젊은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너의 가진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10:21)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주님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만일 그 젊은이가 누가 그 앞에 서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의 제자와 연합하시려고 친히 그를 찾아오셨는지 단지 알기만이라도 했었더라면! 그러나 그런 것은 그에게 당시의 교회의 세계에서 그의 경력을 잃게 하였을 것이다. 안토니 역시 부자였다. 그는 그의 세상적인 소유를 남에게 줘버리기로 결정을 하였고, 이런 방법으로 그는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 가운데서 사람을 떠나 이집트 광야에서 살기로 하였다. 그러나 부자청년이나 안토니는 둘 다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다. 이것이 그 요점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라.

3.2 안토니는 불행하게도 평범한 생활(, 하나님과 언약안에 있는 생활)을 탈피하는 것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생각하였고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하나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수천의 수도사들과 수녀들의 본보기(sad example)가 되었다. 그들은 결혼과 재물과 돈을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으로 여겨 경멸하였다. 심지어 안토니는 그의 육체를 하나의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하여; 한 벌의 가죽옷만을 입었고 자신을 먹여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적게 먹었다. 또한 그는 비록 우리의 몸이 여전히 부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멸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였다. 부활하신 후에, 주님께서는 참되고 완전한 참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나셨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박해 중에, 안토니는 큰 소리로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 사람의 순교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고 외치며 등장하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당국자들은 이런 은둔자를 존경하는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감히 그를 체포하려하지 않았다. 거룩한 비웃음 가운데서(In divine irony), 하나님께서는 그가 경멸했던 그 몸이 105세나 될 때까지 그토록 오래 살게 하셨다! 그는 그의 낡은 가죽성경을 아다나시우스에게 유품으로 남겼고, 그는 이 선물로 대단히 명예롭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안토니의 전기를 기록하였다. 소위 대들보가 되는 다른 성자(pillar saints)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본보기를 따랐다.

3.3 2세기 동안 교회는 이교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다른 싸움을 하였다. 그렇다할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창조물과 우리의 생활을 여기 이 땅위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의 법령을 멸시하는 영지주의의 경멸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다.(딤전4:1-5). 우리는 사탄과 우리 마음의 죄에서 구원받아야만 하는 것이지(7:21-23) 세상적인 존재양식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토니는 자신과 함께 자신의 죄악된 마음을 가지고 광야로 들어간 것이며; 수도사는 그것을 수도원 안으로 가지고 들어간 것뿐이다.

a. 수도원적인 이상은 (말하자면 몸과 결혼과 일상적인 생활, 재산을 경멸함,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수단으로서 현세적이고 덧없는 생명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소원) 동방 교회의 이상에 남아있게 되었다.

b. 6세기 동안에, 이런 이단은 누르시아(Nursia)의 베네딕트의 가르침을 통하여 서방교회에 스며들었다. 동방으로부터 수도회들은 유럽의 기독교신앙을 압도하였다.

c. 안토니는 첫 번 은자였다. 파코미우스(Pachomius)는 처음 수도원의 조직체를 나일강에 있는 타베니시라는 한 작은 섬에서 구현하였다. 그의 누이 메리는 수녀에 해당하는 유사한 조직체를 만들었다.

은자 - 광야에 거주

수도사 - 그리스어 monos에서 파생 = 혼자서

수녀 - 정숙한 순수한

은자(anchorite) - 하나의 은자처럼 사는 사람, 도피자, 은퇴한 사람

수도원 - claustrum(라틴어)= 폐쇄된 장소

4. 2차 세계교회 회의: 콘스탄티노플 381

4.1 젊은 시절에 시리아감독 아폴리나리우스는 아다나시우스의 친구였었다. 그는 열렬하게 우리의 구세주는 참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완전한 사람이셨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일어났다. 이것은 아폴리나리우스에 의해서 부인이 되었다. 그는 인간을 그 당시의 그리이스-로마 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스토익의 철학에 따라 생각했다.

스토익 철학의 그 주요 교의는 다음과 같다.

a. 행복을 얻기 위해, 사람은 인간적인 결핍이 없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 말은 보다 적은 필요를 사람이 가지고 그 필요들이 채워지지 않을 때 보다 적은 슬픔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b. 생활에 관한 이상은 냉정함(passionless-ness)"(apatheia) 같은 그것이다. , 한 사람은 모든 인간의 열망을 억제하여 무감각하게 훈련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이상적인 생활은 신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은 결핍도 열망도 없는 것이다.

c. 사람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더 고등한 와 더 열등한 이다. 더 고등한 ’(사람의 인격, 그의 자아)는 우정, 사랑, 동정, 배고픔, 목마름, 그리고 슬픔과 같은 모든 감정들과 열망들 위에서 지배하며 높여져 있다. 신처럼 그러한 모든 관심으로부터 자유롭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백조가 물방울을 털어버리듯이 이들 감정들과 열정들을 떨쳐버려야만 했다. 그런 감정들은 열등한 부분에 속한 것이다.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끔찍하고 꼴사나운 것인가! 스토아학파는 자신의 형상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참되고 생명있는 사람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4.2 아폴리나리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스토아학파의 관점으로 읽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사람의 스토아적인 자아의 신분을 받아들이셨고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등한 부분을 취하기만 하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되시고, 살아있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열망이 없는 스토아적인 인간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단지 반인(half a man)이었다”(칼빈: 강요 21612)

그렇지만 만일 아폴리나리우스가 옳았다면, 우리 구세주는 우리처럼 참되시고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스토아철학이 말하는 모델에 따라서 주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참되시고 완전하시며 진짜 사람이시다(겟세마네를 기억하라). 주님은 슬픔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아니하시다. 동산에서 그는 그의 제자들로 더불어 위안이 되는 동행을 바라셨다. 그렇지만 주님은 죄가 없으셨고 항상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을 때조차도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에 있어 완전하셨다. 만일 주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와는 다른 사람이셨다면 우리는 완전하게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의 중재자, 우리의 보증인이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런 경우 그의 구속의 사역은 여전히 스토아적 금욕주의 행위에 의해서 완성을 요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4.3 황제 데오도시우스 대왕은 2차 세계교회회의를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은 정죄되었다. 이 회의에서 보편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을 고백하였다.

기독교회는 또한 이 회의 기간동안에 아버지, 아드님, 그리고 성령님의 삼위일체를 고백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요약이다. 이런 고백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들의 죽은 신들과 함께 모든 거짓된 종교들 위에 드높여졌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고백이 없이는, 과거와 현제와 미래에 그리스도의 사역은 닫힌 책이 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와 같은 생명에 관한 중대한 질문들에 관한 답을 얻지도 못한 채 버림을 당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의 기원과 의미와 목적, 그리고 지구상에서 세상과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알 수 없을 것이다.

a. 그리스도론에 관한 투쟁에 있어서, 말씀이신 인격은 독립된 개체즉 스토아철학이 말하는 그리고 그런 까닭에 오직 사람의 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투쟁은 중대한 혼란을 일으켰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와 같은 사람에 관한 스토아학파의 구분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이신 인격은 단순히 한 사람, 한 인간적 존재, 완전한 사람을 의미한다. 는 전인격을 의미한다. 우리 구세주의 그 인격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도르트신조,4)

b. 벨직 신앙고백서, 19항은 그리스도의 하나의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에 관하여 말한다.

5. 3차 세계교회회의: 에베소 431

5.1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 역시도 스토아학파의 사상에 영향을 입었다. 그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단을 거절하였고 구세주는 참사람이시라고 고백하였지만 말할 것도 없이 더 고상하고 더 저급한 를 가진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사람으로 고백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두개의 ”, 신성한 스토아철학의 와 인간적인 스토아철학의 가 있다고 가르쳤다. 두 인격, 두 주권자, 신성하게 고상한 와 인간적으로 고상한 ”, 그러나 주님의 기쁨, 눈물, 동정, 두려움, 고통, 그리고 죽음은 오직 그의 인간적인 에 의해서만 느껴진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나란히 서신 것이었다. 그들은 기름과 물처럼 친밀하게 연합된 두 친구처럼 되셨다(서로 마음이 통하는 연합). 네스토리우스는 하나님께서 하나의 성전과 같이 사람 안에서 사셨던 것으로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이런 식으로 네스토리우스는 두 본성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 고난들이 지니는 무한한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5.2 비록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3차 에베소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회의(431)에서 부정되었지만, 그는 로마제국 밖에서 특별히 페르시아에서 큰 지지 세력을 얻었다. 오늘날까지 그곳에는 앗시리아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있다. 70만 명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이 인도에 있다. 로마와 연대하지 아니한 이들은 지금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회원으로 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중국에 이르기까지 아시아를 침투하였다. 850년쯤에는 큰 중국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있었다. 이들은 몽골 군대 안에서 용병들처럼 큰 영향력을 가졌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중국의 성벽을 지켰다. 심지어는 3차 세계교회 회의 기간 중에서도 이미 약간의 기독교 교회들이 중국에 있었다. 1625년에 781년의 중국인 교회로부터 온 목사들의 명단이 적혀있는 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당시의 유럽과 미국의 상황과 비교해보라.

6. 4차 세계교회 회의: 칼케돈 451

6.1 보다 앞선 회의에서 교리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보편교회는 여전히 스토아철학의 헬라 이교 사상을 완전히 떨쳐내버리지 못하였다.

아리우스(325), 아폴리나리우스(381), 네스토리우스(431) 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한 수도원의 부원장인 유티케(Eutyches)가 등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한 본성을 가지신다고 가르쳤는데, 그것은 하나의 신성과 인성으로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융합체였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바다에 떨어진 포도주 한 방울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에 흡수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한 분의 주권자이시고, 숭고하시며 거룩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이라 묘사되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우리의 구세주께는 그의 인성에 관한한 우리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었다.

6.2 유티게는 많은 추종자를 이집트에서 얻었다. 이집트(알렉산드리아)가 로마제국 내에서 교회적 지도자가 되려는 징후가 보였기 때문에, 황제는 또 다시 다른 회의, 에베소 회의(449)를 소집하여 간섭하였다(황제교황주의). 이 회의는 철저한 혼동과 싸움 가운데 하나였다. 로마의 교황 레오1세의 대행자는 레오 자신이 파문을 당한 동안에 강제로 도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회의를 강도회의(Robber Council)라고 불렀다. 레오는 황제에게 도움을 호소하였다. 후자는 두 번째 회의를 위해 감독들을 소집하였다. 이번에는 칼케돈에서였다(451).

칼케돈 회의에서, 유티게는 정죄되었다. 다음의 중요한 결정은 교황 레오1(the Great, 대략 400-461)가 제안하였고 황제가 지지하였다(“베드로는 레오를 통해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본성들은:

-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다(유티케에 반대하여)

- 개별적이고 나뉘지는 않는다(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여)

이것은 서방교회의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6.3 유티케와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은 교회를 떠났다. 1054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단절되었지만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분리의 시작은 이 때를 기점으로 계산한다. 이교 사상들은 옛날 사람에 관하여 악한 영들에 의해 강력하게 진전하였고(딤전4:1) 그리스도의 사역을 파괴하려고 시도하였다. 묵은 누룩(고전5:6-8; 5:9) 계속해서 분리를 가져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서로를 묶어준다. 유티케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동방(이집트와 시리아)에 남았다. 그들은 대부분 이집트와 에디오피아의 이슬람교 도시에 콥틱 교회를 세웠다. 우리 구세주와 그의 승천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루터는 그도 역시 유티케의 추종자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a. 아리우스: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아드님이 아니다.

아폴리나리우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반인(스토아의 무욕)이다.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나란히 서신다(친밀한 연합)

유티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섞였다”.

b. 칼케돈의 정의는 그리스도는 혼합되지 않으시고, 변하지 않으시며, 분열이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두 본성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고 진술한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구별은 어떤 방식으로든 연합 때문에 파괴되지 않으신다. 그 대신에 각 속성의 특성은 보존되며 함께 단일한 인격, 한 본질을 형성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다...”1:1) 사람이셨다(“...하나님께서 친히 선정하신 사람...”17:31). 이런 신비를 이해함 없이도 우리가 그를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된다. 그는 이 말씀들을 약 19세기 전에 말씀하셨고 여전히 우리에게 그 성령님의 살아있는 말씀 가운데서 말씀하신다.

c. 성령님의 지도 아래, 보편교회는 겨자씨로부터 한그루의 나무로 발전하였다(13:32), 세계교회는 당시 유행한 스토아 철학과의 전투가운데서 구세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고백하기를 수용하였다.

d. 심지어 회의나 다른 교회적인 모임들조차 심각하게 잘못될 수 있었다. 동방교회들의 후기 회의들은 그들의 예배봉사에 형상을 도입하였다. 서방교회의 많은 교회회의들과 대회들은 자주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거나 반대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2차 교회회의 의장인 그레고리 나지안주스(Gregory Nazianzus)는 참석한 감독들과 총대주교들의 태도와 습관들 때문에 크게 방해를 받았다. 풀이 죽어 그는 한마디 했다. “나는 어떤 교회회의에서건 좋은 결과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참석자들의 싸우기 좋아하는 경향과 야망들이 문제를 확대시켰다....” 교황 레오1세는 그가 그의 교리에 있어서 정통이라고 승인한 칼케돈 회의를 야망과 무분별한 경솔함 때문에 비난하기를주저하지 않았다.(칼빈, 강요 ;9;11) 칼빈은 로마 카토릭이 우리에게 모든 교회회의의 결정은 차별 없이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성령님의 신탁으로여기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계속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 경건하고 거룩한 회의가 성령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회의들에 많은 인간적인 부분을 공유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겨야만 한다” (칼빈,강요 ;9;11).

e. 참으로 우리는 교회회의를 마치 그것들이 오류가 없는 것처럼 미화하지 말아야만 한다. 죤 후스(John Hus)는 화형을 당하였고 루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교회의 회의의 결정들 곧 로마교회는 오류가 없다고 하는 결정 위에 두었기 때문에 출교를 당하였다.

7. 암브로스

7.1 밀란의 암브로스는 트릴(Trier)에서 태어났다(340)으며 밀란에서 죽었다(397). 그의 아버지는 골(Gaul)지역 전체의 장관(prefect)이었는데, 이런 조건은 암브로스를 로마 귀족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로마에서 교육하였다. 암브로스는 군인의 길을 선택하였고 밀란의 사령관이 되었다(남부 이탈리아에서). 어느 때엔가, 새로운 감독을 선출하는 동안 그는 시민의 질서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그때에, 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암브로스가 우리의 새 감독이 되야 한다!”고 외쳤다. 비록 그 당시에 그가 신자였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감독으로서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열정적으로 싸웠다. 그는 아주 설득력있고 부유하며 관대하였으며, 자주 노예들을 해방시켜주었다. 그는 (합창단의 노래에 응답하는 회중과 더불어 부르는) 소위 암브로스의 찬미를 소개시켰다고 묘사된다. 교황 그레고리는 이런 종류의 노래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암브로스의 찬미를 그레고리안 교회 음악으로 바꾸어버렸다.

7.2 데오도시우스 1세와 암브로스와의 관계는 교회의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분노가 발작할 때에, 데오도시우스는 무거운 세금을 바치기를 거부한 데살로니가의 시민을 응징하려고 원정을 명령하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약 7천명의 시민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예언적으로, 암브로스는 황제에게 그의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도록 권유하였다 왜냐하면 황제라고 할지라도 교회보다 더 높지 않기 때문이다. 즉 황제는 교회의 한사람의 일반 회원이다. 동방교회에서 아다나시우스(와 다른 이들) 역시 황제와 법정을 대적하여 말하였다(자주 교회적인 문제들에 관한 권리까지 그들의 방자함이나 부당한 요구 때문에). 서방교회에서, 암브로스는 이단을 보호한 황제에게 대항하지는 않았다(이를테면, 아리우스주의를 좋아하는 사람), 그렇지만 그는 비교회적이고 국가의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범죄한 황제에 대해서는 반발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암브로스는 신성로마황제(a divine emperor)라고 하는 이교도의 신화를 무너뜨렸다. 결코 이전에 이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었으며, 동방교회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베들레헴의 다윗의 아들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위에 선 것이다!

7.3 암브로스 역시 그가 살던 시대에 한 어린아이였고 진정한 로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밀란의 칙령의 결과로 기독교신앙은 더 위대한 로마제국의 보다 위대한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국가종교(따라서 시민의 의무)가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로마의 신들을 예배하는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국가는 관용하지 않고 유대인이나 이단자들과 같은 비그리스도인에게 현재의 신앙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심지어 암브로스와 같은 사람은 유대인의 회당에 불을 지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신전들을 파괴한 수사들을 보호하기까지 하였다. 종교의 자유가 없던 이 시기에 기독교와 그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로마의 통치자의 대리인인 빌라도에게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나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나의 종들이 싸웠을 것이다...”(18:36) 라고 하셨던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콘스탄티노플이 수도가 되고 황제의 소재지가 된 후(동쪽에 위치함), 교회의 수장(로마의 교황)은 서방에서 정치적 연합의 상징으로서 점차적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중세 동안에 이것은 서부 제국의 모든 시민들 위에 교황의 권력의 공포스런 폭정으로 인도했다.

8. 어거스틴- 1

8.1 어거스틴은 354년 타가스트(Tagaste, 남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430년 히포 레기우스(Hippo Regius, 알제리)에서 죽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믿는 여자였으나 그의 경솔한 아버지 파트리시우스는 세세에서 소망도 하나님도 없는(2:12 보라) 그런 방식으로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결코 결혼하지 않았지만 18세에 이미 아들을 가졌다(아데오다투스). 그의 그리스도인 친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8.2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법률가로 Carthage에서 살았다. 그 때에 그는 마니교사랑의 추종자였고 오직 하나님 말씀 가운데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이런 부분만을 믿었다. 그런데 황제의 도시가 그를 끌어당겼고 그는 로마를 향해 항해했다. 그는 동시에 그의 어머니에게서 도망하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아들을 뒤쫓아갔다. 기도가운데서 모니카의 위대한 인내 가운데 두드러진 하나님의 영의 열매로 감명을 받은 한 감독은 그녀를 위로했다. “당신이 살아있는 만큼이나 진실로 그와 같은 눈물의 아들을 잃는 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어거스틴은 로마에서 찾고 있었던 바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는 마니교에서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후 암브로스에게서 수사학을 공부하려고 로마를 떠나 밀란으로 갔다. 암브로스는 위대한 웅변가로서 명성을 가졌다. 다시 모니카는 뒤쫓아갔다. 밀란에 있는 동안,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 교훈 아래 있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는 이런 사상의 영향을 결코 만족스럽게 떨쳐버리지는 못하였다.

8.3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셨으며 어거스틴을 믿음으로 인도하셨고 변화시키셨다. 그것은 그를 매료시켰던 암브로스의 수사학이 아니었고 그의 설교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책 고백들(Confession)에서 길게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영적인 투쟁을 묘사했다. “나는 가장 쓰라리고 부서져버린 마음으로 외쳤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옆집 문에서 한 소리를 들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지 못했다. 반복적으로 노래하기를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그는 성경을 들어 자기 앞에 우연히 펼친 구절을 조용히 읽었다.” 로마서 13:13(고백들 812) 33세에 그는 세례를 받았다. 바로 오스티아(로마의 항구)에서 카르타고로 돌아오기 전,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의 팔에서 죽었다.

8.4 어거스틴의 고백들은 하나님께 올린 긴 기도이다. 그 속에서 그는 그의 죄를 고백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죄의 노예와 이교사상으로부터 성경을 알기까지 오랜 여정을 늘 인도하신 일에 감사를 드렸다.

8.5 35년 동안 어거스틴은 히포 레기우스(Hippo Regius)의 감독이었다. 이것은 교회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 로마제국이 무너졌고 로마 자체는 약탈을 당하였다. 민족의 이동은 유럽을 뒤덮었고 사람들은 세상이 끝나게 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사건에 자극을 받아 어거스틴은 그의 두 번째 시기의 주된 작품인 유명한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을 저술하였다. 자주 그는 플렛폼에 앉은 채 설교하였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설교는 박수갈채를 받느라 방해를 받기까지 했다.

8.6 어거스틴은 히포 레기우스(393)와 카르타고(397)에서의 종교회의에서 성경의 정경을 승인하는 최종적인 논의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성령님의 사역, 곧 성령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신약성경의 정경을 승인하도록 역사하셨었다고 승인하였다. 아다나시우스나 어거스틴이나 교회회의들 그 어느 것도 신약성경의 책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거기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한 것도 아니다. 실로 이것은 사람의 작품이 아니었다. 교회들은 이 책들이 거룩한 문서들이라고 승인하였고 고백한 것이며, 은혜로 인간의 작품인 외경을 거절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받은 것이다.

8.7 회심 후에, 어거스틴은 그의 아들의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떠나보냈다. 아무도 그녀의 이름이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독신생활이 하나님을 향한 봉사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가운데서 이 여인의 영예(honour)를 희생시켰다. 어거스틴은 그 도시 히포가 반달족에게 포위당하여 있는 중에 죽었다. 이들 남부 독일에서 온 야만족들은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남부 아프리카를 지나 로마까지 죽음과 멸망의 흔적을 그들 뒤에 남긴 채 진행하며(their way) 싸웠었다. 참으로 이들 야만족들은 하나님의 응징이었다.

8.8 유감스럽게도 어거스틴은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려고 사로잡는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다(고후 10:5). 사로잡히지 않은 생각들 가운데는 어거스틴은 본래 영혼은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과 불멸의 신성에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가 결혼한 상태보다 더 고상하다고 간주하였다(이런 관점은 성욕(sexuality)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부터 제외시켜버렸다). 그는 정부는 그 칼을 가지고 이단과 싸우는 일에 교회를 섬겨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은 유감스럽게도 가루반죽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효시켰고 많은 손상을 입혔던 묵은 누룩에 속한다(고전5:6,7). 어거스틴은 기독교 유럽문화의 창시자들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결코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던 그의 이교의 이원론은 현재까지도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가장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예컨대, 딤전 4:1이하) 성직자의 혼인을 금지하는 사단적인 교리에 의해서 무시당하고 있을 정도이다.

8.9 동방에서 아다나시우스(알렉산드리아)와 크리소스톰(콘스탄티노플)을 통하여 그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신 바, 하나님께서는 결점들과 이단적인 이론(heresies)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어거스틴(남부 아프리카)과 암브로스(남부 이탈리아)를 통하여 서방에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일하셨다.

9. 어거스틴- 2

펠라기우스와 투쟁

9.1 펠라기우스는(400) 아일랜드의 수사였다. 엄격한 금욕주의자로서, 그는 자기 힘으로 선한 일을 하여 자신을 더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위한 일상적인 모든 일들은 부정하였다.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로마의 수도에 도착하자, 그는 아담의 죄로 오염되어졌던 그들의 옛 본성에 호소함으로 그들의 죄악된 생활양식을 너그러이 봐주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런 자들 때문에 분개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펠라기우스의 불쾌감은 영적인 것이 아니었다. 반작용으로 그는 원죄란 없다고 가르쳤다. 죄는 죄 많은 사람의 악한 본보기의 결과다. 그리스도는 오직 우리의 모범, 즉 사람은 죄를 제거하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단순히 죄 없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완벽한 모범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서쪽의 고트족들(Goths) 앞에서 도망하여 펠라기우스는 최후에 남부 아프리카에 도착하였다.

9.2 수도원에서 자라지 않은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를 반대하였다. 그는 원죄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의 부패행위를 가르쳤다(5: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잃은 죄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신 은혜를 설교하였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 어거스틴은 강력하게 주권적인 은혜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고백하였다. 펠라기우스의 교훈들은 카르타고의 교회회의에서 정죄를 당했다(418).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펠라기우스는 이미 예루살렘으로 가버렸었다.

9.3 벨직신앙고백서 15: “이점에 관해서 우리는 이런 죄는 단지 모방의 문제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오류를 거절한다.”

펠라기우스: 사람은 건강하다.

하나님의 말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2:5).

로마교: 사람은 병들었다. 성례전의 은혜의 도움이 필요하다(()펠라기우스주의).

9.4 펠라기우스주의자의 영은 17세기의 항의자의 교훈 속에서 강력하게 되돌아왔다. 이 영은 그의 오만함이 특징인데, 그 자신의 부패행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구속의 문제에 관한 최종적인 선언을 사람 자신에게 넘겨준다. 본질에 있어서 이런 교훈은 사람이 고결하며 선하다고 주장하며, 사람은 자유와 주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였다(and exalted over against God).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살아있는데, 한숨지으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 조니는 아주 좋은 애였는데, 지금은 그의 나쁜 친구들이 온갖 나쁜 말을 그에게 가르친다며 한숨짓는 한 어머니의 예를 가지고 설명된다.

10. 어거스틴- 3

도나티스트와 투쟁

10.1 도나티스트들은 한 그룹의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4세기가 시작할 때에, 도나투스라는 그들의 감독의 인도를 받아 교회에서 자신들을 분리하였었다. 그들은 크고 광범한 추종자를 가졌으며 이들 교회들은 나머지의 그리스도의 교회와 거의 같은 규모가 되기까지 성장하였다. 때때로 그들은 박해의 피해자였었고 때때로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황제에 의해 호의를 입었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강하게 반대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였다. 도나티스트 교회들의 최후는 7세기에 있었던 이슬람교의 이동(Islamic movement)으로 파멸 당하였다.

몬타누스의 편협한 이상주의에 매료당한 도나티스트들은 독립적으로 거룩하고 완벽한 교회를 원하였고, 그들 위에 죄가 더 이상 지배력을 갖지 않은 그런 자들만으로 구성하였다. 누구든지 그들과 충분히 일치하지 않는 자는 모두다 이단자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들은 순교자를 예배했고 traditio(여러 대박해 기간동안 성경을 넘겨주거나 누설하는 일)를 범했었던 자들을 경멸하였다. 그와 같은 죄를 범했던 설교자들은 더 이상 세례 베푸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런 거짓된 목회자에 의해 세례를 받았던 자들은 다시 세례 받아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교회와 특별히 직분자의 순수성을 지키는 milites Christi, 곧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간주하였다. 그들의 열광적인 행동은 때때로 그들의 관점들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목숨을 해치려고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는 그들의 정찰대가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그들의 매복을 벗어났다.

10.2 처음에 어거스틴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그들과 싸웠다. 그는 세례가 거룩한 제도이지만, 그것을 집례하는 사람에 의존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죄는 마찬가지로 교회로부터도 제거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간에 매우 너그럽게 대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바를 온유하게 시정하게 하고 시정할 수 없는 것은 참을성있게 견디게 하며, 사랑안에서 몹시 슬퍼하게 하고 애통하게 하라”(칼빈, 기독교강요 :12:11) 열광적인 도나티스트들은 회원들의 비참함과 결핍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교회와 분리시켰다.

10.3 마침내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와 투쟁하는 중에 마지못해 황제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들 자신의 선한 일을 위해서 정부가 권력으로 교회를 재결합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그는 누가복음 14:23절에 틀리게 호소하였다. “...그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채우라

암브로스는 국가 간섭을 반대하였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으로 관용이 없는 상태로 끌어가게 된다(단일한 제국, 단일한 종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모든 시민의 의무가 된다 - do ut des). 어거스틴은 잃은 자를 영적으로 보살피기 위해서 국가의 개입을 용인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목사로서의 관용을 보이지 아니한 허물이 있었다. 그는 정부의 과업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소명을 혼돈하였다. 성경은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4:6)

10.4 어거스틴은 정부가 가진 칼로 교회를 섬기기를 원하였다. 이후로 로마교회는 잔인하게 이러한 이교도의 길을 따라서 계속 걸어갔으며, 정부는 교회에 종속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심각한 잘못 때문에 이후 세기동안에 많은 피가 흘려졌다. 교황들은 이런 이교적 가르침을 지지하는데 어거스틴의 권위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황들이 교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며 교황의 권위는 교회에서 영적인 권위와 같다고 교황들이 선포한 이후로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도나티스트들과의 투쟁에서 초래된 어거스틴의 사상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음의 원인의 부분이 되었다:

- 왈도파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

- 살인이 종교재판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 위대한 종교개혁의 시기 동안 후스와 다른 순교자들의 죽음

- 많은 종교전쟁들

이것은 결코 어거스틴의 의도가 아니었었다. 그는 권징은 적당하고 사랑 가운데서 사랑의 영적인 끈의 순수함을 잃지 말고 시행되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강조하였다.(칼빈의 기독교강요:12:11에 있는 어거스틴의 작품들에서 인용구들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은 정부들이 복음을 선포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동안 교회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교회를 보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성령님의 검(6:17)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려고 정부의 무력을 요청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10.5 “교화로 이끄는 모든 것들을 폐지해버리기를 원하는”(칼빈, 기독교강요:12:12) 관용 없는 열광적인 행위 때문에 그렇게 자주 온 그리스도의 교회를 소란에 빠뜨리게 하였던 모든 비성경적인 영적 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몬타니즘과 도나티즘은 16세기에 재세례파의(Munster) 형태로 되살아났다. 자비에 따라 살지 않는 자들은 다만 긍휼 없이 그들의 이웃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11. 동방 정교회(The Eastern Orthodox Church)

11.1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동방교회는 계속하여 쇠퇴하였다. 이러한 쇠퇴의 일차적인 원인은:

a. 총대주교, 특히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들 사이의 질투. 이런 이유로 칼케돈의 교회회의에서의 중요한 교리의 결정들은 그 사건이 서방교회들에서 있었던 것처럼 동방교회들에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b. 성찬의 예식들. 점차 복음의 설교는 성찬의 예식들로 대체되어졌다. 동방의 교회에서 봉사는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일부분을 제사장들이 공연하는 하나의 연극이다. 몇 시간동안 계속해서 충실한 신자들은 신비한 황홀 속에서 그와 같은 봉사의 화려함과 번쩍이는 것을 본다. 수천 개의 촛불 아래서 그들은 화려하게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고 성화에 경건하게 입 맞추는 제사장들의 의식적인 행동을 뒤따른다. 그와 같이 봉사하는 동안에, 신실한 신자들은 성직자 그 자신과의 신비한 연합이라는 뭔가를 경험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속죄의 역사의 사실들에 관한 예전적인 공연인 하나의 연극은 영원하고 천상적인 것과 임시적이고 세상적인 것 사이의 빈틈을 이어준다. 이런 예전형식의 연극을 보는 신비적인 바라봄은 여기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종교적 경험이며 이 경험은 실제로 복음의 언약들을 믿는 것을 대신한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베푸는 가운데 신자들에게 임하는 것이지 신비한 경험안에서 임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절은 동방의 교회들에는 가장 큰 절기이다. 부활은 신격화(하나님이 되심)을 의미한다. 목표와 목적은 죄의 용서가 아니라, 불멸이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주님, 우리가 주의 교회 중에 있을 때, 오직 그때 우리는 낙원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의 섬김은 침묵의 섬김입니다. 그리고 이런 침묵 속에서 영원한 깨달음이 계시됩니다.”

c. 성화상숭배(Worship of images). 초상은 신적인 힘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때때로 물감은 이러한 초상으로부터 떼내어졌고 영생의 거룩한 술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의 만찬의 포도주와 혼합된다. 성화(초상)는 서방의 교회들에서 초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거룩한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 사이의 영적인 결합이요 매개자이다. 눈에 보이는 성화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요지는 불가시적이고 신비하고 천상적인 것이다. 성화는 본래의 것과 아주 닮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초상의 영성을 증가시킨다. 성화를 그린 화가는 생명을 그리려고 한 렘브란트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는 종교적인 환희를 그리려는 성령의 도구이다. 성화는 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성자가 친히 임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성화를 신비한 바라봄, 만짐, 혹은 입맞춤에 의해서 한 개인은 천상적이고 거룩한 생명, 전적으로 세속적인 생명과는 구별된 생명을 받는다.

d. The fillio-que(아드님과 함께, 15:26, 2:33; 니케아신조: “그리고 나는 성령님을 믿습니다...그는 아버지와 아드님으로부터 나오셨다”) 동방의 교회는 니케아신조에 있는 the filio-que(아드님과 함께)를 거부하였다. 성령님께서는 오직 아버지로부터만 나오셨으며 아버지와 아드님으로부터는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은 거룩한 생명을 볼 수 있지만, 말씀과 복음과는 별도로 산발적으로 그리고 갑작스럽게 신비한 환희 가운데서 보다 가까이 신성을 가져오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이런 심각한 이교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동방의 교회들의 생활로부터 옮겨버렸다.

e. 형식 숭배. 헛된 광신과 금욕주의 때문에, 동방의 교회는 일상의 생활이라는 현실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았고 그것이 종교적인 묵상 가운데 있는 것처럼 열중하게 되었다.

11.2 직분상의 분쟁이 1054년에 로마교황의 대표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Hagia Sophia에 있는 높은 성찬대의 계단에 파문의 교서를 놓았을 때에 일어났다. 동방의 총대주교들은 로마교황에 대항하여 같은 장소에다 교서를 놓아두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이런 상호간의 파문은 로마에서 교황 바울 6세에 의하여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총대주교 아데나고라스에 의해서 1965127일에 철회되었다. 이 사건은 두 교회들 사이에 더 가까운 관계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로 봐서는 어떤 충만한 연합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교황무오교리는 일치를 위한 노력에 큰 걸림돌이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오직 교황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개인적인 신비적- 영적 통찰력에 따라서 사는) 신비적인 동방교회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11.3 15세기 동안에, 서방의 교회는 민족의 대이동을 견디었다; 동방교회는 7세기에 이슬람교도의 습격을 겪었다. 그렇지만 이들 일련의 두 사건들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게르만 족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아졌다. 하나님께서는 “(유럽에) 미래와 소망을 주시려고 재앙이 아니라 평화의 생각들을 가지셨다.”(.29:11) 그렇지만 동방의 교회들은 이슬람교에 의해서 베어버림을 당했다. 계시록 3:3절은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주목할만하다, 겨우 몇년만에, 동로마제국의 전체는 이슬람의 습격에 의해서 정복을 당하였다. 기독교 유럽은 지브랄타(투르스)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의 이슬람교의 에워쌈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11.4 십자군전쟁의 시대까지, 콘스탄티노플은 많은 아름다운 교회들과 수도원들을 가진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기독교화된 도시였다. 그러나 교황의 교회정치관계들은(papal church politics) 그런 사실들이 서방교회들에 철저하게 알려지지 않게 힘썼다. 황제 져스틴(6세기)은 훌륭한 대성당 Hagia Sophia 대성당을 건축했다(“오 솔로몬이여, 나는 당신을 능가했소”).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했을 때 감탄하였다. 그 도시는 1453년에 이슬람에게 정복당했고, 그 도시 거주자들은 자비 없이 대량학살 당하였다. 동방의 교회는 공적 생활에서 그 입지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의 약속은 이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셈의 장막에 거하는 야벳을 위한 것이다(9:27).

11.5 오늘날 동방의 교회는 자신을 동방 정통교회 혹은 희랍 정통교회라고 부른다. 이들 교회는 러시아와 발칸 국가들에서 국가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방교회들의 조직은 로마 카톨릭만큼 정교하지 않다. 대감독과 총대주교는 큰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반감독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인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국가교회에서 가장 높은 권위는 감독회의이다.

11.6 중동지역에는 로마와 연대한 다른 교회들이 다수 있다. 그들은 동방교회 계열의 교회들로 알려져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관습과 예식들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다르며, 게다가 그들은 또한 그들의 사제가 결혼하도록 허락한다. 서방교회에서 정통은 교리적인 정통을 의미한다. 동방에서는 정통은 예전에 있어서의 정통을 의미한다.

11.7 1917년까지는 성경이 여전히 금서(禁書)였음에도 불구하고 1876년까지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그 후에는) 러시아어 성경번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모든 교회의 회원들은 신비적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신비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성경지식은 필요하지 않다. 설교들은 오직 성일에나 듣게 되었으나 이 설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현재(現在)하는 선포라기보다는 자주 성인의 생애를 다룬다. 모스크바의 총대주교는 동방교회들 전체를 전적으로 통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11.8 러시아 혁명(1917) 이후로, 러시아 정교회 역시 추방되었다. 이 교회는 강경하게 반공산주의자이고 그 자신을 1917년 이후로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진정한 계승으로 간주한다. 이 교회는 자신의 교회를 남부 북부 미국과, 서부와 중앙의 유럽, 그리고 호주에 세웠다. 초교파적인 운동(ecumenical movement)에 강하게 반대를 받기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WCC)와는 연대하지 않았다.

11.9 그리스와 러시아 정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와 연대하였다. 이 협의회에서는, 동방교회들은 다른 교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불평들이 들린다. 그렇지만 오직 모든 교회들이 일곱 개의 초교파 협의회들에 돌아오는 이 한가지만을 요구한다. 러시아 정교회들은 더욱 더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활동적이다. 그들은 대표들을 2차 바티칸 회의에 보냈지만, 그리스 정교회는 대조적으로 불참하였다. 러시아정교회는 WCC에서 더욱더 활동적이며, 크렘린의 압력 아래서 급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모스크바의 총대주교는 이 정부를 위하여 기꺼이 종노릇한다. 세계가 볼 수 있도록 그는 있는 그대로의 증거로서 러시아에 진정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만 한다.

 

 

 

 

네 번째 시기: 590 - 1520

교황체제의 멍에 아래 있는 교회

1. 교황권

1.1 로마 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모든 다른 사도들 위에 한 지위를 주었는데, 오직 베드로만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는 권세를 받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로마의 첫 번 감독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계승자들은 그들이 그의 보좌를 차지하였다고 주장한다. 수 세기동안 온 세상의 수도였던 그 지리적인 위치와 로마의 역사는 로마 감독의 수위권(首位權)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 감독들의 오래된 교리문답의 152문은 교황이란 무엇이냐?” 묻고 교황은 로마의 감독이며, 베드로의 합법적인 계승자이며,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리자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우리 주 예수님의 권세가 인간적인 존재에게 양도되어졌다는 뜻이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동일시되어진 것이다

1.2 이런 교황의 횡포에 맞서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a.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16:18; 또한 이사야 28:16, 고전3:11, 그리고 벧전2:4,6,7을 보라). 베드로의 인격(로마)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그 반석이다.

b. 성경은 어떤 식으로든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 위에 지배권을 가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1. 갈라디아2:9: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회중의 기둥들의 하나로서 맨 먼저 언급되며 게바(베드로)와 요한은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언급된다.

2. 갈라디아2:11: 바울은 강하게 베드로를 책망한다.

3. 에베소서4:11; 직분자의 수가 언급되었지만 교황은 아니다.

4. 베드로전서5:1: 베드로는 자신을 동료인 장로라고 불렀으며 4절에서 그는 목자장이라는 말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c. 신약의 기초석들은 12사람의 이름을 포함하며 바로 한 사람 베드로만은 아니다. 계시록21:14.

d. 성경은 두 종류의 제사장의 직분에 대해서 말한다. 레위의 직분(아론)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폐지되었다. 그리고 멜기세댁의 직분은 영원토록 계승자 없이 그리스도 자신이 속하는 직분이다(7). 로마 카토릭의 교황들과 사제들은 어떤 직분에 따라 임직되었는가?

e. 왜 하필 로마이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고 주님께서 첫 번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신 예루살렘은 아닌가?

f. 베드로는 결코 로마의 감독이 아니었다.

1.3 교황통치(제도)는 이미 2세기에 시작되었던 잘못된 경향의 결과이다.

a.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는 점점 더 하나의 사제가 되었다. 즉 은혜의 분배는 성례들 안에 밀봉되어버렸다.

b. 사도직의 계승 때문에, 사제는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군림한 왕이 되었다.

c. 대제사장(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었고 온 세상(정부)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장하였다.

1.4 교황이 권세를 주장하는 기본적인 이설은 두 가지이다.

a.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서 받지 않음. 주님은 제한된 지역의 직분자들을 도구로 삼아 직접 그의 교회를 다스리신다.(4:11)

b. 교회의 직분자들 역시 정치적인 권세를 가진다는 주장. 교황의 군대, 대부분 용병들은 가끔 교회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황의 최고 사령관에 의해서 지휘를 받았다. 그렇지만 루터는 교회란 어떤 세상의 권세도 바라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의 사역을 교황과 사제와 로마교회 안에서 계속해나가신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그리스도는 말하자면 교회의 보이지 않는 수감자이시다. 즉 오직 교회를 통하여서만이 우리는 주님과 충만한 친교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1.5 중세교회의 역사는 모든 교회들과 왕들에 군림하여 권세와 힘을 얻으려는 교황의 투쟁에 의해 특징짓는다. 이런 투쟁은 유럽에서 그리스도의 회중의 정말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을 심각하게 해쳤다. 카토릭 교회는 교황의 교회로 타락하였다. 교황주의는 결과적으로 성직계급제도를 낳았다.

1.6 590-1073: 교황권의 태동, 그레고리 1- 그레고리 7세까지

1073-1294: 교황권의 전성, 그레고리 7- 보니페이스 8세까지

1294-1520: 교황권의 쇠퇴, 보니페이스 8- 레오10세까지

1.7 우리의 시대에 바티칸은 교황의 정치적인 활동들이 증가하고 있다. 교황은 국가의 수장으로서의 입장으로 UN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정치적인 일치 가운데서 세계의 힘과 동맹하였다(계시록 17:2를 보라).

2. 교황권의 태동: 590-1073

2.1 400년대 쯤인 민족의 대이동(소위 민족들의 방황이라 함)은 유럽으로서는 공포의 시기였다. 동시에 교회의 확장을 가져온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서로마 제국(철옹성같은 왕국)은 무너졌으나(476) 게르만의 습격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들을 기독교화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교회를 남기셨으며 크게 증가시켰다. 476년 이후 사람들은 교회가 점점 국가를 대신하게 되어가고 있었고, 로마의 감독은 실제로 로마의 황제를 대신하였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하얀 겉옷을 입은 교황 레오 자신이 어떻게 아틸라(훈족의 왕, “유럽에 내리신 하나님의 응징)를 설득하여 대가로 그 도시를 남겨주도록 하였는지를 기억하였다(452). 후에 이 동일한 교황은 비록 로마의 도시가 약탈당하였을지라도 백성들을 학살하지 말라고 반달족을 설득하였다. 교황절대주의(papism)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를 이겼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거웠다. 동방에서 교회는 이슬람의 심판아래 놓였고, 서방에서 교회는 교황권의 멍에 아래 놓이게 되었다. 교회역사에서 중심이 되는 초점은 동방으로부터 특별히 교황 그레고리 1세의 등장과 함께 제국의 서쪽지역으로 옮겨갔다.

2.2 대왕인 그레고리 1세는 로마의 유명한(distinguished)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다. 그레고리는 먼저 유력한 공직자가 되었다(로마의 장관). 나중에, 그는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직분, 곧 교황의 직분을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에는 1870년에 교회정부(바티칸)가 되게 하는 것의 창립자가 되었다.

이 사람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 로마교회를 이단으로 향하도록 인도하였다(“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여로보암을 기억하라). 점점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교회의 전통에 집중되었고 가치의 기준이 말씀보다 전통에 놓였다. 온갖 종류의 현재의 견해들이 교회의 교리에 받아들여졌으니: 천사와 성자들이 중보자가 됨; 연옥; 유물 숭배; 신비한 이야기들; 주님의 만찬(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미사의 희생으로 흉하게 변질됨; 이방의 신전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됨; 성자들은 이제 많은 신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됨(프레야 대신 마리아); 이방종교의 관습들은 기독교화 되었다(여전히 흔히 쓰이는 로마카토릭 선교의 방법, 모든 것을 아주 쉽게 거짓된 개종을 부추기는 수단).

그레고리의 야심은 보편적인 로마교회를 거느리는 것이었다. 그는 평균을 뛰어넘는 선교의 교황이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북부 유럽의 나라들로 보내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선교사들은 교황의 보좌를 위해 선전하는 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유물들을 담은 상자를 실어 날랐다. 이런 죄들과 이단의 교훈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유럽대륙의 전역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셨다.

2.3 복음을 설교하려고 온 많은 선교사들 가운데서 우리는 언급해보자.

아일랜드의 사도, 페트릭(.430). 젊었을 때, 그는 그의 고향 스코틀랜드로부터 해적들에 의해 붙들려 아일랜드 사람에게 팔렸는데, 거기에서 돼지치기가 되었다. 거기서 도망친 후에, 그는 훗날 선교사가 되어 아일랜드에 되돌아왔다. - 그는 언어와 관습들을 알았다. 아일랜드는 유럽선교의 요람이 되었다(Insula sanctorum).

엘리기우스(Eligius), 프랑크족 궁전의 금세공인, 588-660. 그는 노예와 전쟁의 포로들을(때로는 하루에 55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 해방시켰으며 그들이 개종한 후에는 그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후에 엘리기우스는 플랑드르(Flanders)에서 복음을 설교하였다.

아만두스(Amandus, 584-679). 이 선교사는 플랑드르로 갔다. 두 번이나 그는 쉘트강(Scheldt)의 거친 강물에 던져졌다. 때로는 프랑크족 선교사들은 섹슨 족과 프리슬란트 사람들에 의해 스파이 취급을 당하였다.

윌리브로드(Willibrord, 658-739). 그는 처음에 위대한 강의(Frankish Frisia) 남쪽 지역에서 설교하였다. 왈케런(Walcheren)의 섬에서 그는 신 우단(Wodan)의 신상을 부쉈다. “과연 (살아있는)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사사기6:31). 우트레흐트의 대감독으로서 그는 적개심있는 프리슬란트 사람과 그들의 왕 레드보드(Radbod)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우트레흐트에 있는 성 요한의 교회의 수도원에 윌리브로드의 상()이 서있다.

독일 마인쯔의 대감독 보니페이스(Boniface, 680-754). 교황의 특사로서 그는 강력하게 로마 카토릭교회를 그레고리 1세의 정신 안에서 promote 시켰다. 그는 항상 그와 함께 거룩한 덮개를 운반하였다. 그와 그의 동행들은 모두 습격을 당하였고 무르머르우더(Murmerwoude, 살인자의 나무)라고 불리는 곳 가까운 프리슬란트에서 살해당하였다. 그는 풀다에 있는 그의 수도원(monastery)에 장사되어 안치되어있다.

루드거(Ludger, 744-809) 그는 프리슬란트 태생의 첫 선교사였다. 그는 프리슬란트와 헬골란트(Helgoland)에서 보니페이스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엥스카르(Anskar, 801-865) 북부의 사도. 그는 덴마크 사람과 노르웨이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였으며 스칸디나비아에서 기독교 신앙의 설립자로 잘 알려져있다.

2.4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기 위하여 복음을 설교하는 이들 선교사들의 강렬한 노고를 사용하셨다; 갈라디아6:15절에 한 새 피조물”; 에베소서 2:10절에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솜씨라.” 성령님의 열매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5:22). 시므온의 예언은 또한 유럽에서도 성취되었다. 즉 그리스도,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2:32). 대륙의 표면은 변화되었고 계몽되었다. 그때까지 유럽은 아시아의 외곽(outer porch)보다 더 보잘 것이 없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게도 그가 원하시는 자에게 그리고 그가 기뻐하시는 때에 이런 가장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사자를 보내시기를시작하셨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49:1; 또한 사42:4b를 보라). 바울은 꿈에서 이미 복음을 바라는 (유럽인의) 소리를 들었었다(16:9). 그러므로 유럽이 기독교의 대륙이 되고 세계의 심장이 된 것은 사람(교황들과 선교사들)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그 자신께서는 유럽의 백성을 기억하셨다(로마인, 고린도인, 빌립보인, 데살로니아인). 야벳의 아들들은 셈의 장막에 거주하여 있었던 것이다.(9:27; 10:5). 온 유럽인들에 관한 이와같은 말씀들은 참되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0,31). 여러 세기들 동안 다른 대륙들은 어둠 속에 있었다. 비록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유럽에서 교회들이 세워졌기 전에 이들 대륙들에 잘 세워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은 복음의 빛 아래서 유럽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사회와 문화의 영역에서 발전은 없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1:4). 오직 19세기 이후에, 그리고 (선교의 시대라는) 20세기에야 부분적으로, 온 세계는 위대한 진보를 보게 되었으며 그래서 복음이 어디에서나 설교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유럽에 임하여있습니까?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2.5 샤를마뉴(Charlemagne)는 유럽의 절반을 다스렸으며 이교도인 프리슬란트와 색손족을 복종시켰다. 그의 견고한 정부 차하에서 교회들과 수도원들은 번영의 시기를 즐겼다. 그는 점차적으로 영향력있는 로마카토릭의 성례전적인 예배에 반대하여 자국어로 하는 성경적인 설교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강력하게 교회의 조직과 성직자의 훈련을 장려하였다. 그는 성상의 숭배를 반대하였다. 전에는 흔히 프랑크족의 스파이로 대우받았던 선교사들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것은 죄가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신앙을 위하여 먼저 부족의 지도자들을 납득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런 이유는 백성들은 게르만의 법칙 곧 왕의 종교는 백성의 종교라는 원칙에 따랐었기 때문이다. 샤를마뉴는 충성의 서약을 한번 이상 깨뜨린 탐욕스럽고 믿을 수 없는 색손족들을 무력으로 다루었다. 가까운 브레먼(독일)에서 약 4천명이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는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여 사형으로 징벌함으로서 이교국가(heathendom)를 만들었다. 이것이 비록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을지라도 국가의 권력을 남용한 것이었다.(18:36을 보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800년에 있었던 성찬축하의식이 거행되는 중에 교황은 갑작스럽게 샤를마뉴 대제에게 왕관을 씌웠다. 교황은 이런 행위가 카롤링거의 제국을(샤를마뉴가 속한 왕조) 기독교 왕국으로 만들었다고 선포하였는데, 천년간 존속했던 왕국인 신성로마제국(800-1806)이다. 교황들의 열망은 한 교황을 지향하였으며, 카롤링거의 왕들은 서부유럽에서 강력한 제국을 지향하였고, 교황 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교회는 그 제국 안에서 중심에 있었다. 카롤링거와 교황들 사이에서 다툼이 시작되었고 그 다툼은 중세시대 내내 계속되었다.

3.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

3.1 교황의 교회의 쇠퇴는 900년에 가까워지면서 즉 암흑의 10세기에 이르러 최저점에 이르게 되었다. 교황의 보좌는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독약과 단검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추잡함과 간음의 생활을 했던 신앙이 없는 로마의 귀족들인 범죄자들에 의해서 점령을 당하였다. 우리의 조상들의 교회는 므낫세와 이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되어버렸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소돔의 방백들아...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1:10)

3.2 파코미우스(320)는 일반적으로 동방의 교회들 가운데서 수도원제도의 창립자로 간주된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500)는 서방교회에서 수도원제도의 창립자가 되었다. 베네딕트는 몬테 카지노(Monte Cassino)에 있는 신 아폴로의 폐허가 된 신전의(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었고, 후에 복구되었으며, 현재에는 예술센터) 자리에다 수도원을 세웠다. 한 수도원은 910년에 (프랑스) 클루니에서 교회의 타락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첫번 수도원장은 베르노였다.

이집트: 파코미우스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프랑스: 클루니

클루니의 수도원장들은 아주 엄격하게 베네딕트의 규율들을 사용했다. 즉 침묵의 명령, 자기 채벌, 세상을 경멸함. 클루니의 수도사들은 하층민 성자들(the saints of the people)”로 알려지게 되었다. 클루니에서 시작된 이런 수도원의 개혁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다. 클루니파의 질서는 중세의 가장 강력한 수도원 질서들의 하나가 되었다. 클루니의 대수도원은 로마에서 성 베드로의 성당을 건축할 때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기독교 교회 건축물이었다. 클루니의 수도원은 프랑스 혁명 때에 파괴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단지 폐허들만 남아있다.

3.3 클루니파의 수도원의 개혁은 특별히 성직매매와 평신도 성직수여(investiture)를 겨냥하였으며 또한 독신생활을 엄격하게 유지하였다.

a. 성직매매: 돈으로 영적 은사들을 매매함(8:18). 이런 습관은 교회의 직분들에서 매매와 뇌물로 이끌었다. 황제만이 아니라 교황 역시 큰 수입의 돈을 위해서 감독의 직분들을 팔았다.

b. 독신생활: 우리는 디모데전서 4:1절부터 “...사단의 교훈들... 결혼을 금하기, 음식을 삼가라는 명령....” 결혼의 금지와 선택된 음식들과 음료들을 사용함과 일반적으로 물질과 육체적인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거부함은 영지주의의 특징들이다.

그렇지만 클루니의 개혁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하나였으며 교회의 교황의 교리들로부터 환원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이 수도원의 질서는 감독들의 감독 아래 있지 않았고 교황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즉시 황제와의 투쟁 가운데서 로마교회의 정치가의 손에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이런 사실은 클루니 수도사인 힐데부란트가 1073년에 교황이 되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났다(그레고리 ).

4. 수도원들

4.1 중세에, 많은 수도원의 질서들이 세워졌었으며 많은 수도원들이 건축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주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서 빗나간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백성들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에(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매일 주님을 섬기는 데서 거의 기쁨을 얻지 못하였다. 많은 사람은 현세도피의 방법으로 현실 순응주의를 정복하려고도 시도하였다. 수도원의 생활은 간교함, 무역, 결혼, 가족과 같은 일상적인 문제들 보다는 더 하나님께 가까워지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반적인 생활은 세속적이라고 생각되었다.(더러운, 현세적(nature)). 수도원의 생활은 은혜였다(초월적인(supernature)). 여기에서 평신도는 저급한 생활(현세적, 불경건한)과 성직자는 고상한 생활(은혜, 초월적인)이라는 분리와 대조가 일어났다. 개혁교회들이 이런 구별을 거부하고 전문용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동안에도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였다. (수도원제도의 개념은 동방의 이교신앙 세계에서 온다. 예를 들자면 베트남. 묵주기도(rosary)는 티벳에서 기원하였다.)

4.2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온전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여기 이 낮은 곳에 있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로 우리의 모든 행실에서 당신의 형상을 나타내게 하소서”(찬송의 책, Hymn 47:2)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의 인간에 하나의 첨가된 것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쳤던 로마카톨릭의 교리로 대체되어졌다. 죄에 떨어진 결과로서 사람은 단지 그 첨가된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본래의인간은 남겨졌고, 약하여졌지만 부패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교리는 죄를 선명하게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부정하였다. 도시에서 종교적인 사람(성직자)은 보통 사람(평신도) 가까이에서 살았다. 이런 상황은 하나는 성직자를 위하여 하나는 평신도를 위하여 있는 이중적인 기독교사회와 이중의 교회를 드러냈다. 영적인 것과 현세적인 것 사이의 이런 구별은 큰 손상을 입히게 되었으며, 배교의 시대에는 심지어는 소위 개신교(protestant) 도시들 가운데서도 재발하였다.

4.3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정반대의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은혜 - 진노

순종 -

- 불의

주님을 경외함 - 언약의 의무를 거부함

물과 성령으로 남

(3: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 어떤 선을 행하는 것도 쓸모없음

죄에 떨어짐은 사람의 모든 기능과 능력들을 오염시키며 파기된 언약의 관계가 모든 생활에 미친다. 우리의 마음은 악하다(7:21절을 보라). 그리고 그 마음은 수도원에 들어간 한 사람과 함께 간다! 깊은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순종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의 제단만을 알았다: 화목을 위한 희생의 피가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일한 것. 불순종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높은 곳에다제단들을 세웠고 거짓된 영적인 제사로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진실로 영적인 사람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다; 성령님에 의하여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며 세속적인 사람들이다(고전3:1; 6:1)

4.4 중세에 많은 수도원과 예배당들이 성인들의 그림이 장식으로 꾸며져 건축되었다. 사람들은 아주 종교적이었지만 엄격하게 주님 하나님을 알았다. 추수와 배들과 도구들과 헛간에 복을 빌기 위해 종교적이 행렬이 구성되었으며 어디에서나 날마다 희생제사들(미사)이 거행되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불의는 극에 달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사제들과 수사들은 무식하고 천한 백성들에게는 축복이었다. 수사들은 규칙적으로 초지를 경작하였다; 그들은 교육의 기회들을 제공하였다. 많은 수녀들은 병자를 간호하였으며 가난한 자를 돌보았다. 가장 큰 축복은 이들 수도원으로부터 일어났는데 거기에서 성경이 정성들여 손으로 베껴졌던 것이다. 이러한 인내심 있는 노고 덕분에 하나님의 말씀은 후대를 위하여 보전되었다. 우리는 개혁의 시대에 첫 번 독일 순교자들이 수사들이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4.5 개신교의 기독교 사회가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떠나자 개신교 수도원 공동체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아이오나(Iona) 공동체 -스코틀랜드 1938

Taize 공동체 - 프랑스 1945

Marienschwesterschaft - 독일 1947

5. "빛이 어둠에 비치다“ -1:5 - 1

5.1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교황제도의 어둠의 시대 가운데서도 주님의 교회를 유지하셨다. 반복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돌아선 백성들을 부를 사람을 일으키셨다. 우리는 9세기에 그런 두 사람을 투린의 클라우디우스(Claudius of Turin)와 레임스의 코트샬크(Gottschalk of Rheims)라고 부른다.

5.2 투린의 클라우디우스(d.827)820년에 투린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저서들에 아주 정통하게 되었고 선행의 교리, 즉 성자들을 숭배함(알려진 바에 의하면 스페인의 성자의 뼈들은 한 범죄자의 것이라고 판명되었음), 형상들과 유골들을 숭배함, 순례여행을 실천하는 일들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주장하였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모양의 모든 나무조각을 숭배하려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또한 모든 구유를 숭배해야만 할 것인데 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구유에 누우셨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역시 모든 헝겊을 숭배해야할 것인데 출생하실 때에 헝겊들에 감싸여계셨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나귀들을 숭배해야할 것인데 구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숭배하지 말고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공적인 견해와 성자숭배신앙들에 대한 그의 공격에 대해 반대가 아주 대단하였다. 그는 교회를 허무는 뱀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보호했다. 그래서 일생동안 평화롭게 살았다.

5.3 레임스의 코트샬크(Godescalus)(805-869) 는 색슨족 귀족, 카운트 브루노(Count Bruno)의 아들이었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고아가 되었다. 그는 풀다(Fulda)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강제로 수사가 되게 하였다. 결국 그는 그의 자유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가문의 유산을 소유하도록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다. 어거스틴에 충실한 학생인 그는 특별한 은혜와 이중 예정의 교리를 지지하였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펠라기우스의 교훈을 공격하였다. 두 차례의 회의에 의한 정죄는 그의 성직을 박탈하였으며 매질을 하였으며, 그는 결국 869년 죽기까지 레임스에서 20년간 수감되었다.

5.4 아다나시우스의 교훈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다)은 서방의 기독교회에서 말하자면 톨레도 회의에서(589) 승리를 거두었으며, 거기에서 유럽은 아리우스주의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의 교훈(사람은 자신의 구세주가 아니다)은 펠라기우스의 교리가 카르타고 회의(418)에서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비록 고트샬크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교황의 교회는 어거스틴의 노선에서 점점 더 빗나게 되었다. 그래서 교리에 있어서 반 펠라기우스주의자(semipelagian)가 되고 말았다.

5.5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의 교리가 다시금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받아들여졌는데 16세기 대 종교개혁이 있기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 교황권이 번영하다 1073-1294

6.1 그레고리 세(1073-1085)1021년에 이탈리아의 소작농의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클루니의 수사가 되었고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다. 후에 그는 교황의 자문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 자신은 대중의 선택에 의해서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는 키가 작았고 못났으며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의 생활의 목표는 국가의 멍에로부터 교회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으며 교황의 권위를 최고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제국이 달이라면 교황은 태양이다. 그레고리는 그의 목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려고 시도하였다.

a. 교황은 더 이상은 독일 황제에 의해서 선출되지 않았고 추기경단에 의해서 즉 장로회에 의해서 선출되었다.(민수기 11:24절을 보라)

b. 금욕의 원리의 철저한 시행: “클루니는 승리를 거두게 되어야만 한다.”. 이런 결정은 많은 사제의 가족들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즉 한 아버지는 그의 사제의 직분을 포기하였거나 아니면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떠나도록 강요를 받았다.

c. 성직매매의 금지

d. 평신도에 의한 성직자의 임명의 금지(평신도 성직수여). 성식수여는 그 당시에는 황제의 특권이었다. 성직수여(investiture)라는 용어는 직책을 얻다는 의미를 가진 investitura에서 파생되었다. 이 용어는 지팡이(목자의 직책의 상징)와 반지(교회와의 결혼의 상징) 그리고 때때로는 홀(권위의 상징)을 선물함으로 감독의 취임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

6.2 그레고리 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황(그 자신)을 통하여 보편적인 신정국가를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혹독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회중을 다스렸으나 사실은 주님 자신을 반대하였다. 그는 중세의 가장 위대한 교회의 정치가이다. “황제의 목은 사제의 무릎보다 가치가 없다고 그레고리는 말하였다.

교회(교황)는 모든 것을 다스린다:

- 사람이 만든 모든 제도로 살아있는 것들을

- 연옥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면죄부로 죽은 자들을

- 독신주의 교리로 사제들을

- 계급의 체제(hierarchical system)를 통하여 지역의 교회들을

- 정치적인 지상권으로 국가의 권력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 위에 심지어 교황 위에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성경 대신에, 교황이 성경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6.3 중세 동안에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는 교회의 무거운 명령들 아래로 넘겨지게 되었다. 대성당은 마을 사람들의 일반 주거지보다 높이 솟아올라 도시를 위압하였다. 사제는 모든 공무상의 일들(지금 국가의 권위에 의해 시행되는 것과 같이): 결혼, 출생, 사망의 기입과 같은 일들을 했다. 감독들은 최상의 것을 지배하였다(ruled supreme). 그래서 전혀 상관이 없는 많은 일들에 교회를 전념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과업이 하나님의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교회, 국가, 그리고 사회 각각은 그들 자신만의 책임의 영역을 가지며, 그 각각은 그들의 특별한 영역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령에 주의해야만 한다. 이런 사실을 16세기 대 종교개혁 이후까지는 깨닫지 못하였다.

7. 성직수여권 투쟁(The investiture struggle)

7.1 교황과 황제는 둘 다 교회의 직분자는 정치적인 힘과 권세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중세의 기본적인 이단교리에 무지하였다. 그레고리 7세는 평신도 성직수여를 금지했다. 황제 헨리 4세는 이런 교황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는 강제로 교황 그 자신을 직분으로부터 강제로 떠나게 했다. 우트레히트의 감독이 1076년 부활절 일요일에 교황을 면직시키는 황제의 선포문을 낭독했던 바로 그 순간에 번개가 교회를 때렸고, 이틀 후에 그 감독은 죽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황제의 불법한 행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교황이 황제를 파면하였다. 그 결과 그레고리에게 다른 황제를 임명하기 위해 독일로 여행할 기회를 주어 아무도 더 이상 황제를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 헨리 4세는 그의 아내와 함께 그 혹독한 1077년의 겨울에 알프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의 시 카놋사까지의 잘 알려진 그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일 동안 그는 참회하는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왕관을 벗고 맨발로 교황의 성채의 문 앞에 서서 그의 죄들을 사면해달라고 부르짖었다. 교황은 파문의 칙서를 취소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기에 황제를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의 황제로서의 면직은 유효한 채로 남아있었다. 한 사제로서 교황 그레고리는 정치적인 자멸을 초래하도록 떠밀리게 되었다: 즉 그레고리는 로마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헨리 4세는 독일에서 그의 힘과 영향력을 다시 얻었으며 로마에 대해서 군사적인 행동을 준비하였다. 최후에는 그 자신이 임명했던 교황에 의해서 황제의 관을 쓰게 되었다. 그레고리 7세는 도망하였으며 살레르노(Salerno)에서 망명 중에 죽었다.

7.2 카놋사의 사건은 교황에게는 영광을 가져다준 것처럼 보이고 황제에게는 굴욕을 안겨 준 것처럼 보이지만, 교황에게는 쓰라린 실망을 그리고 황제에게는 달콤한 승리를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은 오직 일시적인 것이었다. 일시적인 타협은 보름스 협약(the Concordat of Worms, 1122)을 통해 타결되었다. 교회의 성직수여(반지와 지팡이)는 황제의 특권이 되었고 한편 귀족의 수임권()은 황제의 특권이 되었다. 교황은 감독들을 선임하였으나 황제는 그러한 임명들을 거부할 수 있었다. 이런 합의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이단교리(직분자는 정치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는 제거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그것은 마치 교황이 하나님의 것들을 방어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황제는 오직 자기 영광을 추구하였던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교황이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였다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으며 교황절대주의는 황제교황주의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7.3 일찍이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질문을 가지고(팔레스틴은 로마에 의해 정령당하였다) 주님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님께 바쳐라하고 답변하셨다(22:31; 12:13-17; 20:20-26). 이런 대답은 타협이 아니었고, 벌써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분리를 시사해주는 실제적이고 예언적인 답변이었다. 교회와 국가는 신약시대에 걸맞게 둘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남아있게 되었다.

7.4 보름스 협약은 거의 2세기 동안(1122-1294) 교황청을 점점 더 강력하게 하는 결말을 낳게 되었다. 제정적인 물자의 필요가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이런 재원(財源)은 성직매매와 면죄부를 수단으로 이용하여 채워졌다. 바티칸은 세상에서 가장 큰 은행이 되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은 자주 교황의 교회를 직접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교황권의 가장 나쁜 죄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8. 십자군운동(The Crusades)

십자군 이상은 중세적 정신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즉 세상과 그중에서 소위 무엇보다 거룩한 장소를, 무력을 사용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복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례들에서(삼상4:5부터 보라) 제공한 초자연적인(supernatural)” 은혜를 얻으려는 다시 말해서 불신자와 싸우는 거룩한 십자군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에게 교회에 의해서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는 열심의 파도가 서방의 교회를 굽이쳐 흘렀다. --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 그렇지만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것”(10:3)2계명을 어기는 죄였다.

8.2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위에 군림한 것처럼 동방의 정교회와 전체 이슬람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수단으로서 십자군운동을 사용하였다. 자주 서방의 무역 이해관계는 예를 들어 베니스의 도시의 상업적인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면죄와 부와 모험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에 이끌려 이 십자군운동에 참여하였다. 십자군은 하나의 성전(聖戰)이다. 그러니까 선교적 여행이 아니라 하나의 정복이었다. 어린애를 포함하여 수천 명이 그들 자신이 뽑았었던 칼에 사라졌다.(26:52).

8.3 십자군은 교황의 권력과 영향력을 강화시켰으며 십자군들이 성지에서 가져왔던 유물 때문에 미신을 증가시켰다. 그들은 결국 특별히 지중해 주변의 도시들과 무역의 증대를 가져왔다. 예를 들자면, 성 요한의 기사단과 템플 기사단과 같은 기사단의 계층으로 알려진, 새로운 계층이 창설되었다. 십자군들은 성소에서의 생활의 간소함을 발견하였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호화스러운 생활이 아니었다! 이것은 교황청의 사치스런 사치품의 변절에 많은 눈을 뜨게 하였다.

9.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9.1 클루니의 개혁운동은 10세기 동안에 발전하였던 반면에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mard Of Clairvaux(1090-1153)]12세기 동안에 수도원적인 이상의 갱신을 자극하였는데, 그때 끌레르보의 씨스터시움(Cistercian) 수도원을 세웠다(1115).

베르나르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갑작스런 개종 이후 그는 엄격한 씨스터시움 수도원에 가담하였다. 후에, 그는 Saône (프랑스)의 접근하기 어려운 계곡에 있는 끌레르보에 한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 땅을 개간하였고 여행자와 상인들을 위한 낙원을 만들었다(끌레르보는 정결한 계곡이라는 뜻이다). 클루니 수도사는 검은 검정색 의복을 입었으며 반면 베르나르의 추종자들은 염색하지 않은 양털로 희게 만들어진 의복을 입었다.

그는 설득력있는 웅변가였으며 (재해로 끝났던) 2차 십자군을 창설한 지도자의 하나였다. 아무런 형상이나 장식품도 없는 것이 베르나르의 수도원의 근거를 이루었다. 교황은 벌거벗은 벽들과 방들을 보고 당황하였다. 베르나르는 자주 육체적으로 채벌함으로 엄격한 자기수양(금욕주의)을 장려하였다. 그는 강하게 유대인들의 박해에 대항하였다. 왕들과 교황들의 개인 상담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고, 그는 관을 쓰지 않은 교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가뭄이 있던 때에 사심 없이 주간 동안 약 이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였다.

9.2 베르나르는 선행의 교리를 거부하였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를 설교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따랐고, 한층 더 철저하게 이러한 교리를 설교하였던 개혁가들을 앞서서 걸어갔다. 이런 이유로해서 루터는 그를 가리켜 중세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렀다. 베르나르의 표어는 기도(수도원의 기도)와 노동(땅에서)”이었다. 그는 모든 여행이 끝나면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으로 전형적인 중세의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그는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였다. 그는 교황권을 교회의 합법적인 권위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를 정복자로 이해하는 당시의 대중적인 이해에 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상처의 중요성과(53), 충성과 헌신(신비가 아니라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영혼의 일치),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름(그리스도가 행하신대로 행함,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중요성을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의 복음에 대조하여 선행을 행하는 새로운 율법으로서 복음을 믿는 중세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10. 절정에 이른 교황권

10.1 교황 이노센트 3(1198-1216)의 통치는 교황권의 절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30세의 나이에 추기경이 되었고 37세에 교황이 되었다. 그는 능력있고, 인상적인 인품이 있었다.

그의 선언의 일부:

- 교황은 하나님보다 못하지만 인간 존재 이상이다.

- 교황은 베드로의 대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 교황은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고 모든 것을 심판한다.

10.2 그리하여 교황권의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뚜렷하게 되었다. 교황의 권력의 절정은 사실은 비극적인 비참한 시점이었다. 교황권은 참된 교회를 일그러뜨렸다. 이노센트 3세는 유럽의 모든 왕들을 그의 권력에 복종하게 하였다. 그는 프랑스 왕으로 하여금 그의 이혼을 강제로 취소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나중에는 교황의 봉신으로 복직을 그에게 허락하면서 영국의 왕을 보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10.3 1215년에 그는 4차 라테란 회의(Lateran Council)를 소집하였다. 이것은 12번째 세계교회 회의였다. 그것은 화려함과 축하의 과시였으며 온 세계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회의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채택하였다:

- 회개하지 않는 이단들 특히 왈도파(Waldensians)와 카타리파(Albigensians)에 대한 혹독한 징벌

- 교회의 징계인, 비밀 종교재판소의 설립.(사람에 의해 세상을 심판함:1:10). 종교재판소는 1834년까지는 해산되지 않았다.

- 적어도 일년에 한차례의 비밀 고백.

- 화채(transubstantiation)의 교리

a. 화채의 교리는 새로운 교리였으며 분명히 사도의 가르침은 아니다. 9세기 동안 살레망의 궁정에 신학자들은 이 교리를 이단으로 공격하였고 정죄하였지만 1215년 이후 그것은 로마카톨릭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이 교리는 축성한 이후에 납작한 과자(성체성사에 사용되는)가 성체(聖體, 십자가의 희생)가 된다고 가르친다. 교황 이노센트는 지시하였다 이 새로운 신”(귀도 더 브레가 나중에 그렇게 부를 것이다)은 도둑이나 해충으로부터 안전하도록 자물쇠와 열쇠로 지켜져야만 했다. 도둑맞은 성체(聖體)는 피흘리는 복수를 동반하였다. 중세적인 기독교사회에 의해서 그들에게 가져다준 그런 이유로 빚어진 박해들을 혹독하게 겪으면서(suffering terribly in the resulting persecutions brought upon them by medieval Christendom.) 유대인들은 자주 그런 범죄로 고소를 당하였다. 1370년 부루셀(Brussels)에 있는 성(St). 귀둘(Gudule) 교회의 성체가 피 흘리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소문은 유대인들이 단검을 가지고 그것을 찔렀다는 것이다. 박해는 악독했다. 법적인 보호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형식의 재판의 절차도 없이 온 가족들이 산채로 불태워졌거나 일생을 추방당하였다. 1870년에 교황은 부루셀에서의 성체의 피흘림을 기념하는 500회째 기념일의 축제의 의식들을 취소하였다. 그 이유는 과학자들이 바실루스균(간상균)이 습도와 열의 어떤 조건 하에서 감자뿐만 아니라 빵에다가도 붉은 점을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하였었기 때문이다.

b. 화체설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트렌트 회의에서(1545-1563) 계속 옹호되었다. 가장 최근의 바티칸 회의의 회원들은(1962-1965) 맹세로 트렌트 회의의 결정을 재차 시인하도록 요구를 받게 되었다. 비록 많은 로마 카톨릭의 신학자들은 이런 가르침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공적인 교리의 일부분으로 남아있다.

c. 귀도 더 브레는 화체설을 거부하였으며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가르침에 신실하게 머물고자 그의 청중들에게 권고하였다. “나는 또한 나의 피로 (이 교리에) ()치기를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d. 동방의 교회는 화체설의 거짓된 교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플로랜스(FLorence,1439) 회의에서, 동서간의 불화를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다. 동방의 교회는 이 교리를 사도신경의 13번째 조항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런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았다.

e.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30)은 천주교 미사를 저주받을 우상숭배라고 부른다.

10.4 1215년 이후에, 본래의 카톨릭 교회는, 벌써 교황의 교회로 변했었으며, 지금까지 거짓된 교회로 향하여 가고 있었다는 것이 더욱 더 명백하게 되었다.

11.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

11.1 Mendicare는 구걸하다는 의미이다. 그 이름이 가리키고 있는대로 탁발(托鉢)수도회는 사람들의 관대함에 의존하였다. 이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담장 안으로 물러나지 않고 평민들 가운데서 말과 행동으로 설교하며 생활하였다. 탁발수도회는 공동소유과 같이 개인의 것이 없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역사적으로 이들 수도회는 교황청의 부유함과 지나침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사실상 탁발수도회란 하나님을 향한 배은망덕을 체계화한 것이다(a mendicant order is organized ingratitude toward God):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4,5)

11.2 프란체스코 수도회(The Order of the Franciscans)는 또한 이류의 탁발수사(Friars Minor) 혹은 잿빛의 탁발수사(Grey Friars)로 알려졌다- Ordo Fratum Minorum(O.F.M.). 그 창설자는 앗시시(Assisi) 출신의 지오반니 버나돈(Fiovanni Bernadone, 1182-1226)이었다. 그는 프란체스코 -프란시스- 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가 출생하였을 때 그의 아버지는 사업으로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젊었을 때에 그는 그의 돈을 탕진하며 무질서하게 살았다. 후에 그의 좌우명은 빈곤이 나의 신부다였다. 그는 자기 절제를 공로가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피로물들은 나의 친구들이다”, 라고 그는 기록하였다. 그는 꽃에게 말하고 동물에게 설교하였다. 감정적인 열정을 가지고 나환자를 돌보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처음에는 이노센트 3세가 반사회적인 특징을 정죄하며 이 수도회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보게, 돼지우리로 가게나!” 프란시스는 바로 그렇게 했고 견뎠으며 마침내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교황은 프란시스 수도회가 증가하는 왈도파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시도를 인정하였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설교와 그들의 단순하고 경건한 생활양식을 통하여 평민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었다. 프란시스는 스페인, 모로코, 그리고 다른 곳에서 대단한 전도의 열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이집트로 십자군에 참여하였다. 사람에게 끼치는 그의 영향력은 카리스마적이다. 그가 죽기 전 두 해에, 그는 소위 성흔(聖痕)을 얻었다. 이 낱말은 갈라디아 6:17“...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에서 채택하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오히려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였다; 그의 몸에 있는 그 흔적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겪었던 고문의 흔적들이었다. 그가 죽은 지 2년 내에 프란시스는 이미 그의 많은 선행들로 인해 한 사람의 성자로 선언되었다.

13세기의 전반기 동안에, 아시아의 몽골족들은 유럽의 기독교사회를 위협하였다. 프란시스 수도회 수사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이들 믿을 수 없는 잔인한 유목민 무리들에게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들의 선교사들은 중국에 있는 몽골의 칸의 왕실에까지 여행하였다.

프란시스 수도회의 이념에 기초한 여성을 위한 사회는 앗시시에 사는 부요한 가문의 딸인 클레어 스키피(Clare Sciffi)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이 수도회는 가난한 클레어(Clarisses)로 알려지게 되었다. 프란시스의 영향력은 또한 성장해가는 도시들에서 주목할만하였으며, 계속해서 다른 수도회, 테르티어리스(3회원, the Tertiaries)가 설립되었다: 비록 이 수도회의 회원들이 프란시스 수도회의 규율과 유사한 일련의 규율을 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의 서약들을 고백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관대한 조직체인 베긴회 수녀들 역시 많은 선행을 이 시기 동안에 했다.

두 번째로 큰 탁발수도회인 도미니크회(Order of the Dominicans), Ordo Praedicatorum(O.P.)1216년에 오스마의 스페나이아르드 도미니크(Spaniard Dominic of Osma)에 의해서 설립되었다(1170-1221). 그의 의도는 학문, 설교 그리고 선교였다. 많은 도미니크회 수사들은 이단의 열광적인 반대자가 되었으며 종교재판소의 지도자들 가운데 있었다. 평민들은 그들을 Domini canes 즉 모든 양무리를 지키는 주님의 개들이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자주 기사들과 황제들은 그들의 고해신부로 도미니크회 신부들을 임용(任用)하였다. 가장 유명한 도미니크회 수사들 중의 한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였다.

11.4 탁발수도회 이 외에 종교적인 기사단(religious orders of knighthood)에 관한 언급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십자군의 시기 동안에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 기사단은 순례자들과 십자군들을 보살피는 일과 보호를 제공하였다. 이들 귀족과 기사들의 계층은 역시 중세적 이상에 근거되어있었다.

a.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성 요한(St. John)의 기사단이다. 그들의 주된 과업은 병자와 부상당한 자를 돌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호스피틀 기사들(Hospitallers)로 알려지게 되었다. 팔레스틴으로부터 내쫓겨진 후에 그들은 몰타(Malta) 섬에 머물렀는데 그리고서는 몰타의 기사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몰타의 수도는 그들의 마지막 기사단 단장의 이름을 따서 라 발레타(La Valetta)라고 불리게 된다.

b. 성전기사단의 수도회는 그 첫 중심기구가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1118) 장소에서 설립되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 이 수도회는 이단과 부도덕 문제의 고소로 프랑스 왕인 필립 4세에 의해서 1312년에 해산되었다. 그는 텅 빈 귀족의 금고를 채우려고 이 수도회의 재물을 탈취한 것이었다.

11.5 생활의 모든 계층 출신의 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은 신약성경의 나사렛 사람들처럼 그들의 거칠고 참담한 시대에 구원과 위로를 가져오기 위해서 많을 일들을 했다. 그들은 자비의 기적을 수행하였으며 백성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의 직분지도자들은 오직 그들 자신들만 생각했다. 예언자 에스겔의 말이 저들의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확실히 적용된다:

“2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에스겔.34:2-4)

그렇지만 그 때도 역시, 교황의 계급세계의 교회의 한 가운데에서도 선하신 목자 그리스도께서는 이름이 잊혀져버린 많은 백성들에 의해서 주님의 양을 보살피셨다.

NOTES

a.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은 탁발 수도회의 궁핍과 독신이라는 고행의 이상에 의해서 매혹을 당했다. 이들 수도회는 물질의 소유를 경멸하였다. 오늘날 사회주의자의 이상은 엄청난 호소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물질적인 소유를 행복한 인류생활의 근본으로 우상화한다. 사회의 상황 가운데서 변화와 더불어 사람 또한 그의 생각과 철학을 변경하였다. 풍요는 종교를 꾸며낸 이야기로 몰아내버린다. 절대적인 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의 관점은 결국 하나님까지도 거절하고 허무주의로 인도한다.

b. 더 나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중세에 물질적인 행복을 거절하는 일과 언약의 하나님보다도 더 현대의 물질적인 행복을 숭배하는 일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유사한 점이 있다. 두 견해 모두 하나님의 법령을 거부하는 것이며 사람은 그 자신을 돌볼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음식과 옷과 돈과 물품, 사용자와 노동자, 생산과 매매를 "... 만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아무것도 거부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그의 사역)과 기도(우리의 반응)로 거룩하여졌기 때문이다“(딤전4:4,5) 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세상의 물품을 거절하는 일을 감사함 없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로 사탄의 교리요 위선이라는 표현으로 특징을 나타냈다(딤전4:1,2).

c. 앗시시의 프란시스도 칼 막스(1818-1883, 사회주의의 아버지)도 그들의 시대의 사회에 있는 죄에 대항하여 싸우지 못하였다. 그 대신에 그들은 사회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든 인간생활의 위에 계시는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인정하지 못하였다.

d. 1. 중세의 거짓된 종교성은 사람의 막대한 가난과 비참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 종교개혁시대 이후 기독교국가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을 거절함은 19세기와 20세기 동안에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곤궁하게 된 자들과 사회적으로 압박당하는 다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사회주의에 마련하여 주었다.

e. 우리의 일용할 양식에 관한 문제 -우리의 일용할, 물질적인 필요들- 은 참으로 하나의 종교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허락받은 언약은 역시 그 일용할 양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중세의 변절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기에 개인적인 소유의 개념을 부정하였다. 막스는 개인소유권은 도적질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의 문제를 모든 것을 에워싼 논쟁점으로(into an all-encompassing issue) 바꾸었다. 하지만 갈멜산에서(엘리야)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비와 곡식과 빵을 얻느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이시냐, 주님이시냐 아니면 바알이냐”(왕상18)이다?

f. 능력있는 수도회와 탁발수도회는 이런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였다. 사회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반대가 되는 답을 준다. 그것은 기독교회가 사실 참된 빈곤과 탐욕으로부터의 해방된(free of poverty and greed) 그리스도인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슬픈일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포함되어 있는대로 우리의 생활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너무나 자주 모든 성경은 종교와 신학에 관한 책으로만 여겨졌었다.

g. 이집트에서 기근이 절정에 달하여있는 동안에, 요셉은 백성들의 모든 땅을 샀다. “제사장의 땅만 사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바로에 의해서 그들에게 배정된 양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준 양식을 먹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땅을 팔지 않았다”(47:22). 역시 바빌론과 인디아에서도 제사장의 특권계층은 광범한 재산을 소유했다. 이집트에서 제사장들은 온 땅의 3분의 1을 감독하였지만 세금을 내지 않았다. 바로 이와 똑같이 동방의 사제들은, 많은 중세의 수도원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였다. 많은 로마 카톨릭교회는 많은 유품들과 마찬가지로 금 은 보물과 보석들을 소유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주민들은 자주 굶주렸다. 율법은 가나안 땅에서 레위지파에게 한 치(one foot)의 땅 조차도 소유하도록 허락지 않았다(18:20; 35:1이하를 보라). 만일 교회가 율법의 지혜에 복종하여 경청하였었더라면, 그리스도의 교회 위치가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투쟁 가운데서 또한 사회 경제학의 관점에서도 얼마나 더 강력하였겠는가.

12. "빛이 어둠에 비치다“ -1:5 - 2

12.1 중세 동안에 주님께서는 많은 수천 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아합왕의 위험한 시기 동안에 바알에게 그들의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명을 지키셨던 것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 이들 가운데 발도파 사람들이 있었다(Waldenses).

12.2 피터 발도(Peter Waldo, 1150)는 필경 보드(Vaud)라는 스위스 주()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 지방(Pierre Waldo)을 따서 이름이 지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복하였고 리용시에 살았다(블렌디나와 폰티구스를 기억하라). 그의 친구 중의 한 명이 방탕한 술 마시며 떠들어대는 방탕한 술잔치 동안에 죽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개종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찌됐건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섰으며 성경의 부분을 프랑스말로 번역을 준비하였다(시편과 복음서들). 그는 남녀 공동체를 설립하였는데, 처음에 그들은 자신을 쪽성경(Bble portions)을 복사하는 일과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게 하였고, 후에는 둘씩 짝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러 나갔다. 발도는 그의 광대한 토지를 그의 아내에게 주었으며 그의 재산의 나머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발도파 사람들은 단순하고 sober한 생활을 하였으며 그리하여 리용의 빈자(Poor Men of Lyons)로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12.3 비록 그들이 리용에서 추방되었지만 발도의 추종자들은 남부 프랑스와 후에는 역시 북부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도 큰 영향력을 얻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도적인 검소함과 일반 평민들에게 그들의 본토 언어로 성경을 가르친 일 때문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조용하였고 근면한 시민이었다.

12.4 그렇지만 그들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노센트 세는 그들에 대항하여 성전(聖戰)을 명령하였다. 수백 년 동안 줄곧 그들은 무거운 박해들을 겪었다. - 골짜기만이라도 말할 수 있었으리라! 온 마을은 누구나 죽여라, 주님은 자기 소유를 아신다!”는 함성 아래 학살당하였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는 15명의 발도파 사람들이 같은 기둥에서 함께 태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인내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그들의 특징을 지켰다. 이탈리아에 어떤 70명의 발도파 회중들은 여전히 로마카톨릭 성직자로부터 많은 반대를 여전히 경험하며 있다.

12.5 그들의 교회의 로고는 그 빛이 어둠에 비치다라는 말씀과 함께 타는 횃불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선한 축제로서 보다는 순종해야만 하는 새로운 율법으로 이해하는 실수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어둠 속에서 복음의 빛을 붙들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사람이 은혜의 언약 안에서 그의 하나님과 걷도록 허락한다.

13. 중세 스콜라철학에 의해서 어두워진 하나님의 말씀의 빛

13.1 첫 세기 동안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마음을 다하여 고백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을 그것을 위해 드렸다. 그들에게 그것은 진리였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은 진리였다.

그렇지만 중세시대 동안에 교회는 하나님의 견고한 언약을 신뢰하기를 포기하였다. 교회는 하나님과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그 안에 있지 않았다.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말씀(Word)으로 읽혀지지 않았다. 성경은 다양한 진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책으로 생각되었다. 이들 진리들의 어떤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기초로 해서 보다는 오히려 지적인 추론을 근거로 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의 지적인 능력의 사용에 의하여,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인 철학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여 자신을 위해 그런 진리들을 확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지성은 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한 그리스도인은 한 평범한 인간(본성의 단계)에 어떤 추가사항(은혜의 단계)이 더하여진 것이다. 중세기의 인간은 거룩한 성경 보다는 그 자신의 논리의 능력에 보다 큰 신뢰를 두게 되었다. scholae(고등학문의 학회)에서 익힌 학문적인 사상이 하나님의 약속을 경건하고 겸손하게 신뢰하는 일을 대체하였다. 스콜라철학은 하나의 학구적인 가르침이다. 영리한 철학자와 학식있는 교수는 단순히 마음과 중심으로(with heart and mind) 하나님께 그들의 신뢰를 두며 주님께 자신들을 바친 평범한 교회의 회원들보다 훨씬 뛰어나게 보여졌다. 소름끼치는 스콜라철학 이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쇄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의 사고 체계의 도움을 받아 설명해내려고 시도한다. 스콜라철학적인 학문이 주님께 대한 애정어린 존경과 신뢰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유명한 대학들이 파리에서(소르본느,Sorbonne), 옥스퍼드, 쾰른(컬로운,cologne), 그리고 다른 곳에서 세워지게 되었다. 중세의 스콜라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 중의 몇 사람으로는 켄터베리의 안셈(Anselm of Canterbury),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요한 던스 스코트스(John Duns Scotus), 그리고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이 있었다.

13.2 켄터베리의 안셈(1033-1109). 그의 뜻과는 달리, 안셈은 켄터베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만일 하나님께서 실재로(in reality) 존재하지 않으시고 단지 우리의 마음에만 존재하셨다면, 그렇다면 그는 실체를 빠트리셨기 때문에 완전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존재하셔야만 한다. 그의 책, Cur Deus Homo(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안셈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그러나 그런 논리적인 설명들은 그의 아드님을 보내심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단지 가릴 뿐이었다. 안셈의 표어는 Credo ut intelligam"(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런 지적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하나님을 어린아이 같이 신뢰함으로 동행하게 되도록 해줍니까?)

13.3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그를 네이플 가까이에 있는 그들의 부모의 대저택에 감금하기까지 했던 그의 형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좌우간 도망하여 도미니칸 수도회의 회원이 되었다. 후에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가 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은 Summa Theologiae(신학의 교훈들)이다. 몇 세기 동안 이 책은 사실은 하나님의 자신의 말씀을 대체하여 교회를 위한 바이블로 여겨졌다. 교회의 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으로서(로마카톨릭교회의 칼빈) 그는 doctor angelicus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의 말기에 그는 학문적인 논문들에서 보다는 십자가 아래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a. 토마스는 진리를 두 종류로 구분하였다:

1. 지적인 진리들,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유추되어질 수 있는 것들(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존재)

2. 종교적인 진리들,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것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들(예를 들자면, 삼위일체 - 하나님은 한 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b.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카톨릭 세계와 인생관을 위하여 광범위하고 논리적인 체계를 발전시켰다. 그것은 그후 내내 로마카톨릭의 사상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하위의 역사와 상위의 역사에 관해 말하였다. 저급한 역사는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다. 타고난 생명은 왕들과 황제들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 한 국가 안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까지 펼쳐진다. 그러나 오직 교회는 근본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들에까지 나아가게 할 수 있다. 로마교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안경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다. Thomism(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여전히 로마카톨릭교회 안에서 가장 지배력이 있다.

상위의 역사:

교황 소위 천상적인 것들

 

교회 - 더 높은 것(the higher)

- 성직자(clergy)

성례전 - 은혜(grace)

----------------------------------------------------------------

하위의 역사

왕 황제 소위 세속적인 것들

국가 - 평민(laity)

- 본성(nature)

일반 백성의 생활

 

13.4 요한 둔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26-1308)는 프란체스코수도회에 속한 영국사람이었다. 그의 생애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스코투스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쉽고 매끈하게 들어맞게 보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순조롭고 논리적인 체계를 강하게 거부하였다. 스코투스는 사상의 또 다른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출발점은 모든 것이 이치에 맞고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근거 위에 놓인 하나님의 순리가 아니었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뜻, 논리적인 기초도 설명도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과 권능으로 더불어 시작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 안에는 오늘날까지도 진행 중인 논의가 토마스 아퀴나스(자주 도미니크회 수사들)와 스코투스(자주 프란시스회 수사들) 사이에 있다. 전자는 후자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

13.5 오캄의 윌리암(William of Ockham, 1280-1349). 그도 또한 영국인이며 프란시스코 수도회에 속하였다. 그는 둔 스코투스의 제자였으며 후에 옥스퍼드에서 교수가 되었다. 교황은 오캄의 신학을 거부하였으며 결국 그는 출교당하였다. 오캄은 아비뇽에서 그의 감옥에서 탈출하였으며 흑사병의 희생물로 죽었다.

스코투스를 이어서 그는 논리적인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하며 토미즘(Thomism)을 논박하였다. 오캄은 우리는 증명할 수 없고,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논리적인 이해를 거스려 보이는 것들까지도 믿어야만 한다. 오캄은 엄밀하게 말해서 신앙은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a absurdum 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셨었다면, 어느 것이 선악(善惡)인지를 정하실 수 있었을 것이고 살인과 도둑질을 금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명령하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순결하며 모든 것이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기쁨(unreasonable pleasure)"이다. 사실은, 진리에는 두 가지의 다른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 그렇지만 아무리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연구하여 세우는 것이 있다.(that which God reveals, however unreasonable that might be; and that which we construct ourselves) 예와 아니요는 서로의 반대편에 이성으로부터 신앙을 나누며 변증법적으로 서있다. 그래서 오캄은 그가 지적으로 거부한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교황이) 그것을 요구하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오캄은 그의 신학의 합리적이지 않은(irrational) 체계를 토미즘(Thomism)의 합리주의적인 체계의 반대편에 두었다. 그렇지만 만일 오캄이 옳다면, 어떻게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이든 확신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누가 그리고 무엇이 신뢰받을 수 있겠는가? 오캄은 하나님의 뜻 안에는 아무런 확실성도 없으며; 아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로부터 알 수 없으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지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은 젊은 루터를 두렵게 하였다. 그는 Ich bin von Ockham's Schule" 루터의 중심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

중세의 끝 무렵에, 사람은 신앙의 확신을 잃어가게 되었다(문화의 비관론, cultural pessimism).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 자신의 율법을 넘어서 계시지만 그 율법에 언제나 신실하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충분히 그의 말씀에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해도 좋다: 그는 우리의 신실하신 아버지이시다.

a. 고린도에서 교회의 어떤 회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Gnosticism, 영지주의). 바울은 그들에게 지식(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는)은 자만심을 일으키지만 (이해와 지식을 지닌)사랑은 덕을 세우며하나님의 회중을 세운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만일 무엇이든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가 마땅히 알아야할만큼 아직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 사람은 주님께 알려진다“(고전8:1-3). 이런 본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없는 정보의 온갖 조각들 곧 관계없는 진리들을 가리키는 지식의 조각들을 말한다. 만일 당신이 큰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여전히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라! 우리는 하나님의 든든한 말씀안에서 애정어린 신뢰를 통해 참된 지식과 확실성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지적인 역량을 필요로 한다.

b. “여러분은 주 너희 하나님을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목숨(soul)과 여러분의 모든 뜻(mind)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22:37).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비논리적이지 않다. 즉 우리의 지성을 반대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우리는 오캄의 관점을 거절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이른다.(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 역시 거부한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갖게되어졌다(고전4:6).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관하여 논리적인 이론(a logical construct)을 세울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이것은 2계명을 범하는 죄이며 방자한 신앙심(self-willed religion)이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들(6:5), “주님을 아는 일에 지혜와 계시의 영”(1:17) 그리고 너희 마음(한글KJV에는 지성)의 눈의 계발(1:18)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지성, 우리의 ratio(이성)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heart)이 우리 인간성의 중심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합리적이고-도덕적인 존재(a reasonable-moral being)가 아니다; 신실함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연합된 자신을 찾고 있는 종교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사람의 영광이다.

c. 스콜라철학의 영향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두드러진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원천으로 주장해야만 한다.” 혹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전능하신 아버지,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심을 가지고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에 여러분은 그 속에 여러분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분의 (죽은) 개념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우리는 ... 주장해야만 한다. 우리는 ... 모셔야만 한다라고 하면서 하나의 사상의 체계를 부지런히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는 이런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의 푸른 초장을 벌거벗고 지적인 황무지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신실한 신자들은 굶주리게 된다. “그는 재를 먹고 있다”(44:20). 사람의 상상에서 나온 지적인 결과물은 만족스럽지 않으며 만족할 수도 없다(44:6절 이하를 보라).

d. 토마스 아퀴나스는 원죄를 하찮게 본다. 원죄는 단순히 고등한 은혜의 선물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했다; 즉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한 유죄로 간주되는 죄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죄용서의 은혜 역시 작게 보았다. 그는 은혜를 단지 그 자체로 선한 우리 인간의 본성에 분실한 것을 보충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6:15) 갱생을 통하여 우리의 전체 생활이 새롭게 되는 것을 가르친다. 이 새 피조물은 우리의 지적인 능력을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성경은 사람의 마음의 상상력에 관해 그의 어려서부터 악한 것이라고(8:21) 말한다.

e. 스콜라철학은 강제로 복음을 대체한 인간의 사고의 체계를 신자들에게 강제로 놓아둠으로 큰 불확실성을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고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잇따라 학자는 다른 사상의 체계를 고안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은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중세시기의 시대에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삼상3:1). 주님의 언약의 축복들은 기쁘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사람들은 부유하고 가난한 자의 악하고 음란한 생활양식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언약적 진노의 엄중함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f. 1. 중세시대 동안에, 아리스토텔레스(칼빈은 그를 장님 이교도라고 불렀다)는 아퀴나스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Summa Theologiae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를 직접 이름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그 교사(master)는 말하기를...”이라고 썼다.

2. 종교개혁시대 동안에, 주님은 다시 그의 말씀을 통하여 루터와 칼빈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비록 그들 자신이 철저한 스콜라적인 교육을 받았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이른 시대의 메마른 지적인 산물들을 거부하였으며 다시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주님의 은혜의 언약과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였다.

3. 계몽운동 중에(18세기), 기독교는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위로 자신을 들어올렸으며 심지어 성경 자체를 비평하였다. 중세의 학자들조차도 감히 그렇게 하지는 않았었다.

4. 19세기 근대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구절을 전부다 제거해버렸고(예컨대, 기적, 임신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의 부활)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구성한(self-constructed) 관념앞에 무릎을 꿇었다.

5. 20세기 신학은 과거의 모든 지적인 산물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오만한) 학문적인 사고의 최종적인 결말을 이끌어낸다: 신은 죽어있다(중세의 스콜라철학자들의 신(the god)은 참으로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함축하며). 자연과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고 실행하시고 그리고 간섭하시는 살아계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그의 실험들과 우주과학기술을 의지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신들(gods)을 고안한다: 즉 사회적인 깨달음, 자비. 다른 신들은 이미 그들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주변을 따라다니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예를 들자면, 동방교회의 신비적인 종교들). 사람은 신(a god)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오늘날의 현대주의 신학은 직접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부터 그 손에 (비신화화 된) 성경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넌지시 말하면서,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바이다라고 주장하며 사탄을 빛의 천사로 소개한다(고후11-14). 그리고 주님, 살아계신 언약의 하나님은 여기 세상에서 그의 백성 가운데 살아계시며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며, 그의 언약을 떠난 자들에게 진노하시며, 세상을 심판하시며, 죄를 회개하는 자들로 인해 기뻐하시며... 그런 하나님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는 소외되어 있으며 현대인의 마음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적으로 예고한 사람은 이사야였다: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우상과 금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2:20-22).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의 자녀들)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2:6).

7. 여러 시대를 거쳐 내내, 하나님의 말씀은 동방의 영지주의, 그리스의 철학들, 스콜라철학의 사상, 신비주의, 그리고 오늘날 불법적인 사람 - 그들은 마치 신이나 되는 듯이 권위있고 자율적인 말과 판단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큰 영향력을 얻은 사람들인데 - 의 영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희미해졌다(살후2:3-12; 또한 벨직 2,3항을 보라).

14. 중세의 신비주의로 희미해진 하나님의 말씀의 빛

14.1 중세시대동안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스콜라철학의 공격만 아니라 신비주의의 공격 아래 있었다. 신비주의라는 말은 폐쇄하기를 뜻하는 그리스 말 mu-ein에서 파생되었다. 신비주의자는 내적인 계몽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 눈과 귀를 닫아야만 한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의 내적인 경험을 위에 두며 하나님의 계시된 외적인 말씀을 대신한다. 그러나 마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참되고 내적인 말씀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거룩하며 신성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연속된 신비적인 경험으로, 그는 다양한 단계를 거쳐 신비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 즉 신성과의 연합의 단계로까지 진행할 수 있다. 불멸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또한 그 안에서 안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신비주의자들이 영혼의 참된 평화(the ture peace of the soul)"라고 부르는 것이다.

14.2 메이스터 엨하르트(Meister Eckhart,1260-1327)는 가장 영향력이 있었고 가장 위험한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쾰른(Cologne)에 있는 도미니칸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가장 존경받는 교사요 교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모든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불꽃이 있다; 사람의 영혼만큼이나 참된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

- 이러한 신적인 경지에 이르는 길은 거룩한 빈곤즉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옆에 내려놓는 일(이를테면 생활의 기쁨들을 다른 사람들 즉 친구들과 친척들과 함께함) 그리고 이런 세속적인 것들을 엄격한 금욕적인 절제와 자기응징하기(self-chastisement)와 자기희생으로 바꾸어놓는 일을 경유하여 간다. 지옥을 지나서 천국까지!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하여 자라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태어나게 된다.

- 비록 그리스도께서 교사로서 도울 수는 있을지라도 사람은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즉 신격이 아주 충만한 가운데 거하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엨하르트의 영혼의 평화에 관한 설교들은 인상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영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성경도 교회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신비주의는 내적인 자아, 자유롭고, 아름답고 그리고 고결한 영혼을 숭배하였다. 그의 영향은 특히, 라인강 유역의 수녀들 가운데서와 남부 독일에서(The Brethren and Sisters of the Free Spirit) 대단한 것이었다.

14.3 교황조차도 모든 것이 엨하르트의 가르침들과 잘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신비주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고 활발한 성경구절 인용은 이 가르침들이 가진 오류를 드러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엨하르트는 그의 가르침에 관한 교황의 평결이 공표되기 2년 전에 죽었다.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용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이단의 교리들을 강하게 대항하여 그 자신을 지키도록 특별히 16세기와 그 이후(Munzer, Seb.Franck, Coomheert) 동안에 압력을 받게 되었다.

14.4 신비적인 영혼 숭배는 그 자신의 구세주로서의 사람이 그 자신의 자아에 강하게 집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자기 숭배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말하는 살아서나 죽어서의 유일한 위로와 정반대에 서있다. 신비주의자는 우리의 온 마음과 우리의 온 생활로 그를 섬기도록 하려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지불되었다는 것을 거부한다. 신비주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계약의 관계와 직접 충돌한다. 현대 신비주의자들은 의미 없이 그리고 뜻을 제외한 것으로서의 성경을(the Bible as meaningless and without significance) 거부한다.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이와 같은 유력한 악한 영들에 대항하여 부단한 방어를 한다. 오늘날도 역시 이런 영들은 참으로 유력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떠나게 하고 있으며 그들을 지식과 경험의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그러나 단지 사람의 지식과 사람의 경험일뿐- 뉴에이지 운동(the New Age movement)).

골로새서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로새서 2:3: “...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로새서 2:9,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로새서 2:16-23: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엨하르트의 세상을 향하여 죽기는 외관상으로만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는 대로 죄에 대하여 죽기는 신비적인 자기 발전보다는 오히려 날마다 하는 싸움과 자기 부정을 요구한다.

골로새서 3:1-1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 땅에 있는 을원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passion) ... 분과 복수(wrath) 악의(malice)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14.5 엨하르트의 제자들 중의 몇 사람은 이렇다.

a. 존 타울러(John Tauler, 1300-1361).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큰 무리의 청중을 이끈 도미니크 수도회의 설교자였다. 그는 흑사병으로 인한 공포의 시기 동안에 병자와 허약한 자들을 두려움 없이 위문하였다. 타울러의 행실들은 그의 시대에 살고 있는 조금도 자비심이 없는(less-than-merciful) 성직자의 격분한 시기심을 일으켰다. 그의 가르침들은 엨하르트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성경이 아니라 사람 그 자신에게서 믿음의 확실성을 얻기 위한 근거를 발견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들에게로 돌아가라고 훈계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각 사람의 영혼 안에서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나 아비뇽까지 순례하여 평화를 찾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것이었다.

b. 류이스브룈의 죤(John of Ruysbroeck,1293-1381), 독일어 산문의 창시자. 그는 브뤼셀 부근에서 태어났으며 사제가 되었다. 후에 그는 신비주의로 물러났다. 브뤼셀(Brussels) 부근의 그레너달(Groenedaal, Green Valley)에서 그는 신비주의 공동체를 발견하였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의 영향 아래 있게 되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비적인 자기성찰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기반성을 훈련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규범들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14.6 이 시대로부터 엨하르트의 신비주의, Theologia Germania의 정신으로 기록된 소책자가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짊어져야만 하는 십자가에 관하여 익명의 저자가 책을 썼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내적인 체험이다. 만일 한 사람이 이것을 체험하였다면, 그때 그는 지옥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옥같은 경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안에서 일어나게 만든다. 아담(하나님과 다르다는 인식)은 우리 안에서 죽었으며, 그리스도는(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인식) 우리 안에서 살아난다. 이런 식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선은 사실상 제거되어진다. 루터는 이러한 소책자에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 칼빈은 그것을 온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기에 넉넉한 능력이 있는 독약이라고 불렀다.

14.7 신비주의는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었다. 신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출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구속하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주관적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기본적으로 구속적인 사실들이 일어났던 장소로서 영원한 영혼을(the immortal soul)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예배이다. 그것은 골로새서 2:8절에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라고 그토록 강력하게 경고하던 이 교리를 반대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이 세상의 영, 사탄의 영들이다. 사탄은 아주 경건하고 진지하게 보이는 이런 종류의 깊은 믿음을 조장하지만 그러나 완전한 사실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15. 현대의 신앙(modern devotion)

15.1 신비주의의 영향은 일반적으로는 14세기의 독일 부흥운동(Dutch revival movement)에서 특별히 주목할만하다: 공동생활 형제단. 오히려 그들의 온건한 신비적인 신앙의 이상이 현대의 신앙으로 알려져 있다.

15.2 이 운동의 창립자는 게라르드 그루트(Gerhard Groote, 1340-1384)였다. 그는 네덜란드(Holland), 디벤터(Deventer) 출신의 시장의 아들이었다. 퀠른에서 a fair를 주의하고 있는 동안에 한 낯선 사람이 그에게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런 질문은 늘 그를 따라다녔고 마침내 그가 개종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그의 부를 포기하고 사람들이 참회(penitence)하기를(개종(conversion)과 같지 않음) 촉구하는 대중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무지 때문에 크게 슬퍼하게 되었지만,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실한 아들로 남았다. 그는 좋은 것들을 나누며 함께 생활하는 형제들의 공동체를 창설하였으나, 수도원적인 서약들로 묶지는 않았다. 그는 노동과, 읽고 쓰기(성경을 복사하기), 그리고 백성들을 교육하기를 장려하였다. 이런 공동체들의 주된 목표는 신비적인 자기 살피기의 경건한 생활의 발전이었고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적으로 훈련하는 것이었다. Groote1384년에 병든 친구를 병문안한 후에 죽었다.

공동생활형제단의 조직자는 그루트의 제자이며 계승자인 플로렌티우스 라데웨인스(Florentius Radenwijns, 1350-1400)였다. 그는 Zwolle(네덜란드) 가까이의 Windesheim에 있는 공동체의 설립자였다. 이 공동체는 어거스틴 신조의 법규을 따랐다.

15.3 가장 잘 알려진 이 운동의 회원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79-1471)였다. 켐펀(Kempen, 퀠른 근처)에서 출생한 그는 쯔볼레(Zwolle) 가까이에 있는 성() 아그네스(Agnes) 수도원의 수도원 부원장이 되었다. 그는 성경을 네 번 필사하였고 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기(The Imitation of Christ)라는 유명한 소책자의 저자라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 이 소책자는 믿음으로 나오는 순종을 다루지 않고(“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10:27) 그 대신 인간 예수를 본받기를 다루고 있다. 디페르베인(Dieperveen)에 사는 한 수녀는, 그녀가 이런 활동이 사실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땔감을 나르는 늘 하는 허드렛일에 신물이 났다. 그의 소책자 12(거룩한 십자가의 길)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기(self-crucifixtion)에 관해 말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바울이 고린도후서6:3-10절과 갈라디아서 6:14,17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생과 박해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토마스는 자기 향상(self-improvement)을 촉구하였고 불가능할 뿐아니라 낙심하고 있는 과업을 촉구하였다.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산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신 그리스도를 믿도록 서로 촉구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우리를 건져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대신에 그들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작은 소책자는 많은 언어로 심지어는 아랍어로까지 번역이 되어져 있다.

15.4 간스포트의 요한 베셀(Johann Wessel of Gansfort, 1419-1489). 그는 흐로닝헨(Groningen)의 토박이였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제자였다. 신학 철학, 헬라어, 히브리어 교사인 그는 Lux Mundi(세상의 빛)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15.5 원어의 철저한 공부만 아니라 성경을 필사하고 복음을 설교함으로 이 형제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 세대가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도구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주 슬프게도(sadly enough)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성경적인 도리를 설교하지 않고 스스로 고안한 신앙심을 설교하여 그로 인해 그들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도리를 설교하였다.

16. 교황권의 쇠퇴 - 1294-1520

독일의 황제들과의 싸움에서 여러 교황들은 프랑스 왕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것은 책임들을 만들어냈고 프랑스 왕들 가운데서 중요한 지위라는 자각과 우월하다는 의식을 품게 하였다. 점점 그들 자신들을 교황권과 동등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보다 우월한 그 무엇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는 싸우게 만들도록 서로 얽히게 되어졌다.

보니페이스 8(Boniface )(1294-1303)는 야심이 있고, 거만하며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을 세우려한 첫 번째 교황이었다. 때때로 그는 공적으로 황제의 옷으로 갖추어 입고 등장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황제다! 그는 유명한 교서 Unam Sanctam을 공포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두 개의 칼의 교리를 제출하였다.(22:38). 그는 영적인 칼은 교회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한편 세속적인 칼은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교리는 이미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해여 가르쳐졌었다.

보니페이스 8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조세문제로 투쟁하기에 이르렀다. 그 논쟁은 격앙하였고, 마침내 보니페이스는 프랑스 왕에 의해서 감금되고 말았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얼마되지 못해 분노와 우울증으로죽었다(라토렛). 충격이 유럽을 휩쓸었다: 교황이 왕에 의해 감금되었다!

프랑스 왕들의 강한 압력 아래서 바빌론 유수(Babylonian exile)로 알려진 기간(1309-1377), 교황청은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겨졌다. 교황권의 승리는 카놋사(Canossa,1077)에서 시작하였지만; 아비뇽 사건으로 그 패배의 신호가 보내어졌다(1309). 로마로 되돌아간 후, 교황권은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였다. 프랑스 추기경들은 아비뇽에서 그들 자신의 교황을 세워서 응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서방교회의 거대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1389-1415). 이들 햇수 동안, 교회는 두 명의 교황을 가졌는데, 한 사람은 다른 교황을 출교하였다.

16.2 이런 진전들로 인해서 14세기 후반부는 보편적인 교황의 신정통치가 끝났음을 입증하였다. 거룩한 교황의 권위에 관하여 의심들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여러 민족 교회들은 로마로부터의 그들의 자유를 얻으려고 시도하였다. 이 모든 것은 conciliar movement라고 알려진 새로운 움직임을 가져왔다. 이 개혁운동은 가장 잘 알려진 지도자들 중에 파리에 있는 소르본느 대학 출신의 Pierre D'Ailly(1350-1420)John Gerson(1363-1429)과 더불어 지식층 가운데서 강력한 추종자를 얻었다. 가장 큰 쟁점은 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져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어떤 사람들은 개혁이 교황청(curia), 즉 교황의 권위 하에 있는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 기관(official body)에 의해서 얻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이들은 보편적인 교회회의의(교회회의주의,conciliarism) 임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보편교회회의가 세 번 개최되었는데, 피사에서(1409), 콘스탄스에서(1414-1418)(존후스, 아래 17.3을 보라), 그리고 베젤에서(1431)였다.

결국에 가서는 아무도 이기지 못하였다. 교회회의주의자들은 실패하였지만 교황청도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교황권은 더 이상 세계적인 권력이 아니었다; 교황은 오직 로마에 있는 그 자신의 교회국가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통치를 유지하였다.

16.3 20세기 동안 교회회의와 교황청 사이의 - 보수주의와 계급조직의 바티칸과 목자적인 협의와 토의를 요구하는 감독의 국제회의 사이의 - 오랜 투쟁은 스스로 갱신하였으며, 현대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채워졌다. 그때에는 교황청(즉 교황)은 로마 카톨릭 세계의 교회 안에서 그 권력의 많은 부분을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17.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다” - 요한복음 1:5 - 3

17.1 암흑의 14세기 동안,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잉글랜드에서 존 위클맆(1320-1384)의 사역을 통하여 아마도 가장 선명하게 보였다. 위클맆은 귀족태생이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영국 왕은 교황의 세금징수에 반대하는 위클맆의 강한 저항이 마음에 들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에게 루터워쓰(Lutterworth)의 목사로서의 위치를 보증하여주었다. 그는 1384년 죽을 때까지 목사직을 유지하였다.

위클맆은 14세기의 잉글랜드를 위하여 일하였는데 그 일은 발도(Waldo)12세기 프랑스를 위하여 행하였던 일 즉 평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둘 씩 짝지어 설교자들을 보내는 일을 하였다. 그는 점점 성물숭배, 방종, 연옥, 화체설과 같은 교회의 오류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교황정치(papal hierarchy)를 반기독교신앙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단의 도전에 대항하여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로 가기를 거절하였다. 도미니칸 수도사들은 계속적으로 그를 적대시하였고 방해하였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후 존 후스의 사형집행을 명령하였던 콘스탄스 회의(1414-1418)는 위클맆의 가르침들을 정죄하였으며 그의 유해를 태우도록 명령하였고 그 재를 흩어 뿌렸다.

17.2 클루니 수도원 개혁운동과 탁발수도회는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악습을 치료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위클맆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공격하였다. 그는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의 안내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 존 후스(John Hus)를 통하여 그가 수고한 일들은 또한 보헤미아(Bohemia)에서 많을 열매를 맺었다.

17.2 존 후스(1369-1415)는 남부 보헤미아에서 출생하였다. 1401년에 사제로 임명된 그는 프라하(Prague)에 있는 베들레헴 예배당서 설교하였다.(이것은 평민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후스는 옥스퍼드의 위클맆에게서 강렬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 잉글랜드와 보헤미아 사이에 관계는 밀접하였다. 영국여왕은 보헤미아왕의 자매였기 때문이다. 평민들에게서 얻은 후스 자신의 인기만큼이나 황제의 호의는 로마의 파문에서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는 콘스탄스 회의에 자신을 변호하려고 출석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안전통행권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칸 수도사들에 의해서 배반당하여 감금되었다. 황제의 항의들은 당신은 이단자에게 약속한 당신의 말을 지켜야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리로 거역을 받았다. 시기스문트(Sigismund)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Lugismund(Lugen거짓말하다, “거짓말하는 입이라는 뜻이다)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후스는 그의 생일인 141576일에 말뚝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그때부터 이단의 가장 악질은 후스신봉자(Hussite)라는 딱지를 붙이곤 하였다(예를 들어 루터). 다행이도 한 세기가 지나고 교회는 더 이상 강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는 후스와 같은 처지(fate)에 놓이지는 않았다.

후스는 위클맆 보다는 다소 더 온화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연옥도 화체설의 교리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 없이 맹렬하게 교황의 권위의 교리를 공격하였으며, 그것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공격하였다. 후스의 시련과 위클맆의 가르침의 거부는 존 게르손(John Gerson)의 전적인 동의와 함께 교회회의주의자들이 개혁을 향한 그들의 시도들에서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하였다; 교황정치의 악의 진정한 뿌리는 인식되지 않았다; 회복(restoration)은 개혁이 아니다.

17.4 후스파의 전쟁들(1419-1436). 후스를 배반하여 살해함은 보헤미아 전역에 큰 불안을 일으켰다. 이것은 프라하(Prague)에서 폭동을 일어나게 이끌었다. 후스파의 본부는 타보르(Taborites; 유다서 4:6절을 보라)였다. 그들의 훌륭한 사령관 찌스까(Ziska)의 영도아래, 그들은 그들 자신을 교황의 군대에 대항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그의 후계자 프로콥(Prokop)는 수비를 공격으로 바꾸었고, 잔인한 내란은 남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를 황폐하게 하였다. 타볼사람들은(Taborites) 후스가 했던 것보다 더 과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회질서를 어지럽게 하였다. 운동은 광신적인 행위로 끝나고 말았다(이것을 16세기에 있었던 문스터(Munster)에서 재침례교도와 비교하라). 그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족속을 멸망시키도록 명령을 받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로마카톨릭 성직자들을 공격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셨다는 생각에서였다. 후에, 분열이 로마와의 협상과 바젤의 교회회의(1431)에 출석과 관련하여 일어났다.

a. 후스파의 운동에서 첫 시기 동안에 온 국가가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것이다. 보헤미아는 감히 공개적으로 교황의 멍에를 거부한 첫 번째 유럽국가였다.

b. 후에, 남은 타볼사람(Toborites)과 발도파(Waldensians)는 보헤미아인과 모라비아인 형제회를 형성하였다. 우리는 후스파로서 진젠도르프의 백작의 사유지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17.5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의 수중에 들어간 사건은 유럽 전역에 큰 두려움을 가져왔다. 많은 학자들이 더 안전한 지역으로 피하였으며 이것은 학문에 특히 고전어인 헬라어, 라틴 그리고 히브리어의 연구에 새로운 흥미를 일으켰다. 이것은 나중에 종교개혁의 시기에 성경의 재발견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을 뿐아니라 또한 억제된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세속 철학에 새로운 흥미를 일으켰다(세속의 개혁, 그러나 신앙으로 인한 갱신과는 정반대임).

이러한 세속의 개혁운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메디치 왕조(the Medici dynasty)의 도시인, 플로렌스(Florence)였다. 이 가문의 구성원이며 나중 교황은 그리스도의 출생을 베들레헴의 우화라고 통렬하게 말하였다. 참으로 소위 20세기의 신신학은 어쨌든 간에 완전히 그렇게까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7.6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그의 가족의 희망과는 달리 도미니칸 수도회의 수사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발생지인 플로랜스의 수도원 부원장으로서 그는 지옥과 최후의 심판을 다시 태어난 세례요한처럼 설교하면서 강하게 그 당시의 사회적인 악들을 공격하였다. 그를 플로랜스로부터 꾀어내려고 추기경의 지위를 약속하였던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사보나롤라가 그 도시가 그 죄악들을 회개할 때 따라오게 될 황금시대에 관해 예언한 것들은 프랑스 챨스 8세의 침략이 플로랜스의 메디치의 통치자들을 도망하게 만들었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보나롤라는 3년 동안 그 도시의 지도자가 되었다. 플로랜스는 철저하게 그 사악한 길들에서 깨끗하게 되었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그대로 남겨졌다. 사보나롤라는 하나님의 유일한 은혜의 복음(sola gratia)과 함께 그러나 선행의 새로운 복음과 함께 르네상스의 비성경적인 사상들을 반대하지 않았다. 플로랜스가 퇴폐적인 도시에서 실질적인 수도원으로 개종된 것은 강압 아래에서 개종한 것이었다. 그는 진주들을 돼지에게 던졌는데 돼지들은 돌아보고는 그것을 삼켜버렸다(7:6절을 보라). 간첩행위와 비밀경찰에 의해 강제로 실시되는 문자에 충실한 복음에 지친 사람들은 그에게서 돌아서버렸다. 그는 1498년에 매달려 화형을 당하였다. 그 시대 동안 플로랜스의 사회의 구조들은 다소 변화되어졌었다. 그러나 시민들 그 자신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었다. 사바나롤라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진정한 선두주자로 간주될 수 없다. 그가 죽었을 때에 루터는 15세였다.

18 중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교회

18.1 오랜 기간동안 교회는 교황들, 교회회의들, 거짓된 선지자들(시편 74,79를 보라)로부터 온 그 대적들의 통제 아래 있었다. 많은 교황들은 양의 옷을 입은 늑대들이었다. 교회는 교회에게 박해를 당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그것은 박해의 가장 잔인한 형식이었다. 교회회의는 자주 거짓선지자들의 모임이 되고는 하였다. 복잡하고 메마른 신학적인 체계는(scholarsticism) 열정적인 신앙심, 개인적인 종교성, 그리고 신비주의 다음에 있었다. 레겐스버그의 베르톨드(Berthold of Regensburg, 1210-1272)와 요하네스 브루그만(Johannes Brugman, 1473)과 같이 거대한 대성당조차도 충분히 미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무리를 이끄는 대중의 설교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사람들에게 임할 천벌을 크게 외쳤다. 그리고 회개를 시키려고 경외의 신앙심을 설교하며 지옥과 최후의 심판의 생생한 그림을 표현하였다.

18.2 흑사병의 기간 동안(1348-1351) 모든 지역들은 인구가 감소하였다. 황폐하게 된 농장은 흔한 풍경이었고 바다에서 배는 선원도 없이 떠있었다. 이 죽음의 질병의 결과로 어림잡아 홀랜드의 인구의 60퍼센트가 죽었다. 스스로 매질하는 사람들(flagellants)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도록 감동시키려는 무익한 시도로 큰 행렬을 이루며 시내를 가로질러 이동하였다. 자기 채찍질(scourging)은 하나님을 설득하는 효력있는 방법이 된다는 사상이었다. 그와 같은 행렬은 33일간이나 오래 계속되거나(지상에서 주님의 생애의 수) 40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광야에서 주님의 시험받으신 날 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와 성인들이 화해시키고 달래기 위해 부르짖지 않고서는 엄격하고 자비 없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되었다. 교회들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죽은 자와 방탕한 영혼을 위한 미사는 값이 비쌌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단순하고 신실한 신뢰는 마술과 기도와 예배의식들에 의해서 궁지에서 유지되어야만 하는 격노한 하나님을 믿는 전형적으로 이방의 신앙으로 대체되었다.

18.3 교회를 지배한 사악한 사람들은 의인들을 박해하였다. 교황의 종교재판소는 사람의 손에 맡겨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내려놓는 세계적인 첩보활동 연락망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교회가 피흘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장되었고 그래서 (자주 무죄한) 희생양이 선고를 받도록 국가의 권위와 그들의 심복에게로 넘겨졌다. 교회가 고안한 교리나 교훈으로 인한 아주 경미한 탈선이 사형 판결을 내리게 할 수 있었다. 마녀사냥은 많은 무죄한 과부들의 죽음을 가져왔다. 유대인에 대한 학살은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18.4 아직도 존재하는데, 가장 큰 이단의 교훈의 하나는 영적이고 경건한 것들은 일상적인 생활의 사건들 보다 멀리 동떨어져있고 대단히 초월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는 교리였다(은혜에 대비하는 자연).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발견되어지는 성령의 열매는(5)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은혜의 언약이 온 생활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5 모든 것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위를 기다렸다. 즉 그의 오직 은혜(sola gratia)라는 그의 말씀의 회복을.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다섯 번째 시기: 1520 - 1648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1. 루터의 종교개혁

1.1 16세기와 더불어 우리는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로 들어간다. 변화의 힘은 강력하였으며 인쇄술의 발명과 아메리카의 발견과 같은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갱신을 가져오는 가장 위대한 힘은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이었다. 이것은 요시아 왕의 시대에 율법을 재발견한 것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왕하 23:4-6).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동안에 유럽 대륙을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계획하셨다. 의 교회의 개혁을 통하여 주님은 복된 장마비”(34:26) -언약의 축복을- 내리려 하셨다. 그것은 온 세상에 복지를 가져왔다. 주님께서는 교황의 계급제도의 멍에를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리셨는데, 헨리 8, 프란시스 1, 챨스 5세와 같이 왕의 전제정치와 더불어 교황계급제도는 유럽을 포로로 만들었다. 로렌조 더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아들인 교황 레오 10(1513-1521)는 기악과 성악에 열정을 가진 예술의 전문가이며 후원자였다. 자신의 광적인 종교성을 신뢰하는 베델(Bethel)의 종교인 유대주의(Judaism)는 강력하게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14, 15세기의 개혁운동들은 그들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기본적인 오류, 거짓된 교리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었다. 이것이 주님의 영광이 다시 그의 교회를 비추기까지의 상황이었다(. 60:1). 하나님 자신께서는 모든 개혁의 원천이시고 원인이시다. 사람의 작품이 아닌 것이다. 그의 백성을 오류로부터 불러내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감, 곧 하나님의 은혜의 때에 따라 새로워진 복음의 선포를 의미한다,

1.2 중세시대 동안 복음은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는 일련의 율법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었다. 성체성사는 하나님을 사람과 화해시키는 행위로서, 예배봉사의 중심이었다. 교회는 믿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그의 교회에게 주었고 그것을 율법주의적인 경건의 속박의 집에서 구해내셨다. 유럽의 기독교회는 다시 복음의 놀라운 빛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루터는 바로 그 복음의 설교자였다.

1.3 로마 카톨릭교도인 루터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고 그의 진노를 달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자주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공포를 경험하였다. 비록 그는 수사가 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런 공포였다. 수도회의 총대리인, 스타우피쯔는(Staupitz) “네가 지키지 못한 모든 행위들은 그리스도께서 갖추어 주실 것이다고 권하여 그를 위로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하게 막으셨다. 개심하고서, 루터가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라고 묻는 법을 배우기까지는 그는 확신이 없는 채로 있었다. 그 대답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

로마 카톨릭 수도사인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 글자그대로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것은 그의 죄들 위에 내린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가? 루터는 보상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만큼을 사람이 받는다고 믿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안경을 끼고 이런 말씀들을 읽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화해의 언약 책인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아직 배우지 않았다. 오직 그가 개종한 이후에야 그는 이 말씀의 성경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활동하는 인자와 동일한 것인데,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주님(LORD)은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116:5). 주님은 단지 어떤 것을 말씀하시기만 하지 않고 그의 약속들을 지키신다. 그것이 주님 안에 그들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의 의로우심이다.

a.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그분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신다는 뜻이다.(31:2,3).

b. 하나님의 의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특별히 그분께서 그의 아드님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보내셨을 때 그분의 자비의 전능하신 행위 가운데서 분명하게 된다. 그는 이것을 이미 낙원에서 약속하셨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구세주이시다(.45:21).

c.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의 허물을 무죄로 해주심으로, 실제적으로 완전하게 그분의 의로우심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과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시고 의로우시다(요일1:9).

d.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경우와 같이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벧후1:1).

e.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penitents)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1:27).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신실함(truth)과 진실하심(faithfulness)이다.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원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또한 그것을 실행하실 것이다.

f.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to escape)”(71:2). 시편 143:1절도 보라: “주님이시여(O LORD)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faithfulness)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하나님의 진실과 하나님의 의 사이에 있는 병행을 주목하라.) 20세기의 교회는 열렬하게 온 세상의 재판장께 이 시대에 그와 같은 의로우심을 동일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그러한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살아있는 믿음을 요구한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신자인 루터가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신앙심이 깊고 아주 종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둔 믿음(faith in God)은 종교적이 되는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시편 119(18)의 저자는 기도하였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이 사람은 소경이 아니었으며(루터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실 필요가 있었다.

g. 의라는 단어는 항상 그분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새로운 복종을 지시한다(세례예식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라고 강력하게 권하신다. 이를테면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다”(6:33).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애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은 항상 그렇듯이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되는 의를 우리에게 선언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는 나에게 주어지며 마치 내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나의 것으로 계산된다(하이델베르그 주의 날 23). 성경은 심지어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의()의 주님이라는 이름을 붙여드렸다(23:6; 33:16)

h. 1512-1513년의 겨울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루터의 눈을 여셨다. 그러나 95개조를 공포할 수 있기 전에 집중적인 연구와 묵상을 위해 달리 4, 5년이 더 경과하였다.

1.4 루터는 전반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나는 마치 내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즉각적으로 성경은 그 자신을 전혀 다른 빛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그의 과업의 하나는 그의 관할지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들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가 순회하는 동안 그는 그의 수도원 형제 가운데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씨앗은 곧 열매를 맺게 되었다. 면죄부를 가지고 행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실들로 인해 혼란스럽고 불쾌하게 되어 부주의하고 때로는 변덕스러운 행동과 생활양식으로 이끌어갔다. 루터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 학술적인 토론에 참여하려고 구상했던 95개조를 작성하고 공포하였다(15171031). (면죄부는 그것으로 죄인이 주님 앞에서 회개 없이 그의 구원을 구입할 수 있는 증서이다.) 같은 날 저녁 내내 그는 가장 겸손하고 유순한 편지를 그의 상급자인 마인쯔(Mainz)의 대감독에게 썼다. 거기에서 루터의 마음에는 교회 개혁에 관하여 전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5 논제 1: 우리 주님과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등등을 말씀하실 때 그분은 신자의 전체 생활이 회개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논제 32: 면죄의 문서들 때문에 구원을 확신한다고 가정하는 저들은 영원토록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파멸될 것이다.

논제 62: 교회의 참된 보화는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복음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자가 가끔씩 수행하도록 요구 받아왔던 참회를 가치있는 행위로 여겼다. 루터가 참회에 대해서 말할 때는 회심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전 생활의 전체적인 변화로서 말하였다. 즉 참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의 열매이다. 여행하는 수도사와 행상인들은 몇 주간 안에 이런 주제들이 온 유럽의 절반에 심지어 로마까지도 알려지도록 하는 확실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1.6 1520620일에 교황은 루터를 반대하여 칙령을 내렸다: Exsurge domine(일어나소서, 오 주님, 그리고 주의 소송을 심판하소서. 멧돼지가 주의 포도원을 침범하였나이다) 루터는 출교되었다. 15201110일에 그는 공개적으로 여러 장의 교황의 공문서를 비텐베르그의 문 앞에서 불태워버림으로써 그의 답변을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이 널 버릴 때 너는 어디로 가겠느냐?”

Sub caelo,이것은 루터의 답변이었다. “하늘 아래 어디에나 하나님께서 거주하고 계신다.”

1.7 종교개혁의 세 가지 대원칙이 있다:

SOLA FIDE - 오직 믿음으로: 인간의 선행으로 얻는 구원을 반대한다.

SOLA GRATIA _ 오직 은혜로: 우리 자신의 선행의 가치를 반대한다.

SOLA SCRIPTURA _ 오직 성경: 전통과 교회의 규범을 반대한다.

1.8 루터의 일부 저작물들:

독일 귀족에게 말함- 15208, 루터는 황제 챨스 5세와 독일 귀족에게 교회를 개혁하라고 불러 세우면서 호소하고 있다. 교황이 이를 행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권력에게 감독들과 다른 성직자들의 주장들을 논박하였다.

교회의 바빌론 포로 - 152010월 루터는 로마카톨릭교회의 공허한 연극을 비웃는다. 그들은 구원의 중보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리하여 율법과 교훈의 무거운 멍에를 신자들에게 올려놓는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 152011.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자유롭고 어떤 사람에게도 지배받지 않는다. 동시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역시 자발적인 종이 된다. 그리고 기꺼이 모든 사람을 섬긴다. 이 책은 고린도전서 9장에 대한 주석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얻어지고 그래서 한 사람이 주님의 일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같은 해에 저술되고 출판된 이 세권의 소책자를 읽는 일은 불확실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고 두려움과 교회적인 노예상태로 살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빛을 가져왔다.

루터의 일부 다른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의지의 속박(1525)은 에라스무스의 Diatribe on the Free Will(자유의지에 관한 비방)에 나타난 반 펠라기안(semipelagianism)을 반대하여 기록된 책, 교중을 위한 소교리문답과 목사들을 위한 대교리문답은 둘 다 1529년에 저술되었으며, 좌담(table talk, 15311544년 사이), 그리고 많은 성경 주석들.

2. 루터교의 종교개혁 반대자들

2.1 처음에는 즉시 전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에 반대하여 루터는 자신을 변호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 중의 하나가 그 유명한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였다. 에라스무스는 로테르담(Rotterdam, Holland)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에 그의 조상(彫像)에 새겨진 비문은 번역하면 여기서 위대한 태양이 떴다가 바젤(Basel)에서 졌다라고 읽는다. 거의 모든 유럽의 도시들까지 이르는 한 평생의 학문연구와 여행의 끝에, 그는 1536년 바젤시에서 죽었다.

처음에 에라스무스는 루터에 대해서 공감을 나타냈다. 그는 그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의 도움으로 잔인하게 실시하였던 바, 교황이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세 세계의 붕괴를 하나의 해방으로 생각하였다; 참으로 에라스무스는 이런 양심의 자유가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의 계발(啓發)에 충만히 이르도록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낙천적인 인도주의자였다. 로마 종교재판소는 수사(修士)들을 비웃고 로마 카톨릭교회의 결점들을 혹독하게 빈정거렸던 이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결코 이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다. “나는 순교자감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루터는 비평했다. “그는 미꾸라지(eel)만큼이나 미끄럽다, 그는 달걀 위를 걷기를 원하면서도 결코 깨뜨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2.2 유럽에서 가장 학식있고 유명한 사람,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에 관한 비방(Diatribe on the Free Will)이라는 그의 책을 출판하였을 때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의 불일치는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다. 유럽 전역에 있는 모든 수도원들과 대학(university halls)에서는 독일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도사의 답변을 기대를 가지고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 답변이 도착하였다. 열정적으로 맹렬하게. 의지의 속박(In The Bondage of the Will)이라는 책에서 루터는 에라스무스, 당신 홀로 문제의 핵심을 보았고 당신은 그것 때문에 나를 목 졸랐소.” 라고 기록하고 있다. 후기의 엘리야처럼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서 돌아섰다. 그는 성경의 믿음이 아니라 이성의 믿음을 맛본 것이다. “에라스무스여, 당신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당신은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까?” 거짓의 아버지는 사람을 그의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려고, 자유라는 거짓된 약속을 써먹었다.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그를 다시금 종으로 삼았다(8:44). 무슨 이유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까지 내려오셨다는 말인가? 에라스무스는 복음의 핵심을 부정하였다.

루터의 대답, Sola gratia, 오직 은혜라는 두 번째 부분은 실로 더욱 감동적이었다. 모든 점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들은 생명과 미래를 공유한다. 그것은 신앙의 참된 이유이며, 참된 윤리성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 살아가도록 하자! 참으로 죽음은 옮겨졌다. 이렇게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인본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들 두 권의 소책자는 교회의 역사에서 대단한 영향력과 중요성이 있었다. 그 책들은 전적으로 다르고 반대가 되는 두개의 관점을 보여주었다: 에라스무스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 중심에 있는 믿음을 제시하였지만 한편 루터는 성경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변증하였다. 종말론적으로, 예언적으로 명확하게(clarity) 루터는 사람에게 있는 믿음의 최종결과를 보았다. 18세기의 계몽주의와 20세기의 근본적으로 법을 부정하는 역사에 의해서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처럼 되려는”(3:5) 무언가를 계속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던바 이를 위한 이러한 사탄적인 투쟁을 깨닫지 못하였다. 한편 루터는 이런 사실을 그만큼 더 많이(so much the more) 깨달았다. 에라스무스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다. 그는 뜨뜻미지근하였다(3:16). 루터는 자유의지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교리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의 통치권과 복음의 존엄성을 강하게 확신했다. 이러한 교리는 그리스도야말로 참으로 인류애(humanity)의 교사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만큼 유명한 철학자들 이를테면 플라토와 세네카 같은 이들이 있었으며, 그들 역시 영감을 받았다. 그러니까 복음만이 거룩한 영감을 받은 유일한 형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철학자들의 그것보다는 더 수준이 높은 한 형식에 불과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16세기의 그의 교회를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려고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투쟁을 사용하셨다.(하이델베르그 21)

a. 에라스무스가 원문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출판함으로 종교개혁의 발단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b. 에라스무스는 자유주의 개신교처럼 알미니안과 계몽주의의 선구자이다. 그는 국제연합(UN)UNESCO의 범주 안에서 높이 존경을 받는다.

2.3 루터가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에 숨어 있었던 그 기간 동안, 두 명의 예언자들152111월의 그 달 중에 비텐베르그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열광적인 쯔빅카우의 토마스 뮌저(Thomas Munzer of Zwickau)의 제자인 니콜라스 스토르취(Nicholas Storch)와 마르쿠스 스투브너(Markus Stubner)였다. 그들은 루터는 로마교황에게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였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종이 교황(paper pope)에게서 자유롭게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서 모든 인간의 권위를 거부하였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까지도 거부하고 말았다. 이들 열광자들은 내적인 빛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의 오염되고 죄 많은 충동을 따랐던 것이다. 교회를 반대하여 폭력을 선동하며 그들은 비텐베르그의 교회들에 있는 형상들을 파괴하였고 도시안에서 공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멜랑톤은 그들을 억제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루터의 친구들 중의 또 다른 친구 칼슈타트(Karlstadt)까지도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스러운 사건들을 듣고서 루터는 담대하게 비텐베르그로 돌아왔다. 152239일에서 16일까지 계속해서 그는 나는 누구도 강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제로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복음이 설교되고 있는 한은 예배봉사 동안에 어떤 격렬한 변화들도 필요하지 않았다. 로마 카톨릭의 미신들과 이단교리들은 멀리 쫓겨났음에 틀림없다. 이런 방식으로 평화는 회복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루터가 중세의 신비주의를 거부하도록 이끌어주었다.

20세기에 와서 토마스 뮌저는 그의 인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이 루터보다는 뮌저가 독일교회의 더 진정한 개혁자였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의 저서들이 재발행 되었다. 근대 독일의 한 연극은 루터를 자본가로 특징지어 묘사하고 뮌저는 사회의 혁명적인 개혁자(renewer)로 특징지어 묘사하였다.

2.4 16세기는 빈곤한 시대였는데, 특히도 시골에서 빈곤하였다. 많은 소작농들은 실제로 그들의 지주들의 노예나 다름없이 살았다. 그런 농부들은 자유에 관한 루터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자유는 법과 권위로부터의 해방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부유한 지주들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살인과 약탈을 하며 지방을 휩쓸었다. 개혁은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 루터는 군주와 통치자들에게 이런 야만적인 폭동을 억제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에서 그는 군주의 권위를 강조하였다(13).

소작농의 폭동은 피를 흘리고서야 진압되었다. 약 십만 명의 소작농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뮌저는 교수형을 당했다. 루터는 그 당시의 사회를 괴롭혔던 사회적인 불의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에는 어떤 혁명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주의 잔인한 행위를 날카롭게 책망하였다: “소작농들을 한번 지배한 마귀들이 이제는 군주들 가운데 거하려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3. 루터의 종교개혁의 전개

3.1 하나님의 자비가 다시 그의 교회에게 돌아온 사실이 복음에 크게 굶주리고 목마르게 하신 가운데서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16세기에 그의 백성들 가운데 일어나게 하셨다. 2달 동안에 2천부의 신약성경이 팔렸다. 1522년에서 1572년까지 매해마다(이중 세 번의 년도를 제외하고는) 성경의 새로운 판이 간행되었다. 많은 수도회들 특히 루터가 속한 수도회인 어거스틴 수도회들이 종교개혁의 중심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3.2 새로운 신앙을 반대하는 첫번째 칙령이 1521년에 발포되었다. 첫 번 순교자들은 안트웹 출신 어거스틴 수도회의 수도사 헨드릭 포스(Hendrik Voes)와 죤 판 에센(John Von Essen)이었다(1523.7.1). 종교재판관 야곱 판 호크스트레이뜬(Jacob Van Hoogstraten)은 이 사람들을 사형시키는 것이 잔인한 숙명이라고 생각하고는 크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참으로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16:2)하는 말씀을 생각해보았을까? 안트웹 출신의 앞서 말한 자들과 야콥 스프렝(Jacob Spreng)은 비텐베르그로 탈출하려고 힘썼으며; 그의 후계자 헨드릭 판 줕펜(Zutphen)1523년에 처형되었다. 이러한 잔인한 사건에 대해 듣고 루터는 시편 116편의 말씀으로 그의 청중을 위로하였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니이다.”

이들 순교자들의 순종은 교회를 위한 씨앗이 되었다. 북부 네덜란드에서 첫 순교자(피흘린 증인)는 부르던(Woerden)에서 한 교구 사제인 얀 피스토리우스였다. 라우파인(Louvain)과 파리대학의 교수들은 가장 맹렬하고 가장 광적인 박해자들 가운데 있었다. 그 교수들은 그 (순교자)들이 스스로 만든 신학 체계안에 있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God's truth)라고 생각하였다.

3.3 독일의 북부지역은 대체로 루터교회지역이었던 반면에 남부 지역은 로마 카톨릭의 통제 아래 남았다. 후에는 칼빈주의가 베젤(Wezel), 나사우-딜렌버그(Nassau-Dillenburg), 그리고 중심지로서 하이델베르그를 포함한 팔라티네이트(Palatinate) 지역을 포함하여 서부지역에서 영향력을 얻었다,

독일의 외곽에서 루터교회의 종교개혁은 스칸디나비아의 도시들 가운데서 루터의 친구인 부겐하겐(Bugenhagen)의 활동을 통해서 근거지를 얻게 되었다. 이 도시들 가운데서 루터 교회는 당국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게 되어, 국가교회로 왕성해졌다. 이것은 발틱해 주변의 독일지방에서 있었던 경우와 역시 동일하다. 이 도시들에서 루터의 국가교회는 영국에서 성공회와 아주 유사하다. 이 둘 다 로마 카톨릭의 의식주의 예배 봉사를 기꺼이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하였다.

4. 루터의 종교개혁의 특징

4.1 루터의 종교개혁의 가장 특징적인 양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한 것인데, 이로써 죄인은 무죄를 선언 받는다. 칼빈은 더 멀리까지 나갔는데, 그는 사람이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어야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살아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여러분이 재난에 휘말렸을 때, 여러분은 심각한 육체적인 손해에서 구제되어야만 할뿐 아니라 여러분의 목적지까지 인도받아야만 한다. 이렇게 루터와 칼빈은 가르칠 때 다른 점들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처음에는 비판적인 성질이 아니었으며 역사적으로 잘 설명될 수 있었다. 루터는 어두움과 사망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면서 말할 수 없는(something)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처음으로 보았다. 칼빈은 거의 한 세대 후를 살면서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교회를 가르치도록 하려고 평화의 길을 걷도록 예정되었다.(1:79). 루터도 칼빈도 마찬가지로 (죄인을 무죄하다고 선언하시는-루터)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생애 전체를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 가운데 있는-칼빈) 하나님의 영예에서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두 요소들은 떨어질 수 없다.

4.2 비록 루터는 교회의 성직자 계급제도를 거부하였지만 황제 교황주의(caesaropapism)의 악을 일소(一掃)하는 일에는 실패하였다. 소작농들이 폭동을 일으킨 동안, 그는 군주들과 통치자들이 교회를 보호하고 폭동을 진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그는 교회의 정치(government)를 위해 통치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교황이 지배하던 것에서 세속 정부가 지배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루터교회는 국가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간의 이러한 관계는 계속되는 세기들 동안 일어난 사건에서 독일에게는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4.3 이러한 진전은 두 왕국,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는 영적인 왕국과 국가라는 세속적인 왕국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에 밀접한 도움을 입었다. 비록 설교자의 직분은 회복되었지만 루터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회복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방의 루터교회는 교회의 회의(consistory)가 다스리지 않고 그 지방의 세속 통치자가 다스리게 되었다. 교회의 직분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그들의 사도적 양식에 맞게 그 직분들을 복구시킨 사람은 칼빈이었다.

4.4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거부하였지만 공제설(consubstantiation)의 교리로 빗나가고 말았다.

4.5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독일에서, -공적인 생활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생활 전체를 개혁하려던 루터의 노력들은 거의 성공하지 못하였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간 뒤에 살았던 칼빈은 이점에 있어서 더욱 더 성공하였다. 루터가 죽은 후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주 사회생활만큼이나 정치적인 생활을 위해서도 복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를 자주 소홀하였다.

4.6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부닥친다고 입증된 모든 것을 부정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가르치는 것들만을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루터는 제단, 형상,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을 계속 남겨두었지만, 칼빈은 이 모든 것들을 완전히 폐지시켰다. 이런 사실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루터주의가 로마 카톨릭에 가까이에 남게 된 이유를 보여준다.

4.7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간다"). 일찍이 교회는 개혁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개혁하기를 계속해야만 한다. 루터가 받아들였던 것들 중에 어떤 것은 - 아마 속박 아래에서- 그의 동료들에 의하여 교리의 진술로 받아들여졌다(여호수아와 잇따른 개악의 시대인 사사시대 동안 그를 따랐던 자손들의 이야기를 보라). 이런 이유로 인해, 루터교와 칼빈주의 개혁의 교회들은(the churches of the Lutheran and Calvinist Reformation) 나누어지게 되었다.

5. 루터교회 종교개혁의 터닦기(consolidation)

5.1 정치적인 터닦기

a. 보름스 칙령은 루터를 정죄하였다. 교황은 1520년에 루터를 출교하였다. 이제는 황제가 또한 법의 보호를 박탈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들은 불태워졌다. 그의 동료들은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칙령이 독일 전역에서는 실제로 무시되었다. 왜냐하면 백성이 협력하기를 거절하였고, 그동안에 챨스 5세는 프랑스와 터어키와의 전쟁 중에 긴급하게 독일군주들에게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2:16절을 보라, “그러나 땅이 여인을 도와...”)

b. 1555: 아우구스부르크의 평화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평등을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교황은 격분하였다. 교황교회의 시작 이래로 어떤 이교도도 교회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중세교회의 일체 - 자주 힘과 무력으로 유지되었지만- 는 깨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치는 참된 신앙의 일치 안에서 정치적인 힘이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 가운데서 회복되게 되었다. 새로운 신앙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중세시대의 거대한 수확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완전하게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아우그스부르그의 협정(The treaty of Augsburg)은 루터교회와만 이해관계가 있는데 그것도 영지의 통치자가 그 영지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추가된 제한이 있다.: Cujus regio eius religio

c. 1648: 뮌스터의 평화는 참담한 30년 전쟁 끝에 이루어졌다. 이 협정은 이어지는 세기들 동안 유럽의 정치역학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유럽의 역사에서 아주 대단히 중요하다. 이 협정은 로마카톨릭과 루터교회와 칼빈주의자들에게 평등을 안겨주었다. 또한 반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운동을 좌절시켰으며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카톨릭의 지배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5.2 루터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서는 멜랑톤이 기록한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 Confession) 신앙고백(1530)이다. 주의 만찬에 대한 교리를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이 고백서가 일치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고백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루터가 죽은 뒤 얼마동안(1550-1580), 그의 동료들은 종종 맹렬하고 혹독한 신학논쟁에 휘말려들었는데, 이 논쟁은 결과적으로 일치된 신조(Formula of Concord)를 가져왔다(1577). 이 일치는 더 이상의 다툼을 막았으며 루터교회의 종교개혁의 기본적인 원칙을 유지하게 되었다.

1580: Book of Concord(일치의 책). 이 책은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일치된 신조, 그리고 루터의 대.소 교리문답들과 같은 루터교회의 교회적인 문서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은 고백적인 문서들을 채택함으로 사실상 루터교인과 칼빈주의 신자들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만들었다.

1580년 이래로, 루터교회의 종교개혁은 로마카톨릭교회와 칼빈주의 종교개혁 사이에 머물러 있다. "비텐베르크(Wittenberg)"로마제네바사이에 있다. “비텐베르크는 주의 만찬 교리와 개혁된 예식문을 봐서는 로마를 뒤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원칙에 있어서는 제네바를 뒤돌아보고 있다.

6. 루터교회의 종교개혁의 침체와 타락

6.1 1580년 이후, 신조주의는 루터의 교회들을 옥죄었다. 사람들은 개혁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해가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사실을 더 이상 깨닫지 못하였다.

6.2 반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공격(트렌트 교회회의와 예수회)은 오스트리아와 바바리아(Bavaria) 지방을 포함하여 종교개혁을 지지하는(for the Reformation) 영토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6.3 챨스 5세는 종교개혁을 분쇄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백년쯤 지나 페르디난트 황제 2(the Emperor Ferdinand )가 있었는데, 그는 교활하고 잔인한 장군들인 틸리(Tilly), 발렌스테인(Wallenstein), 파펀하임(Pappenheim)과 함께, 챨스 5세가 실패하였던 곳에서 거의 성공하였다. 그들은 유럽에 대한 정치적인 지배, 즉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80년 전쟁에서 잃어버렸던 지배권을 합스부루크가()(스페인-오스트리아)를 위하여 되찾으려고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인 프랑스조차도 그러한 정치적인 발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하였다. 신교인 독일의 군주들의 요구에, 그리고 로마카톨릭인 프랑스의 격려와 지원으로, 스웨덴 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는 독일의 황제와 싸우려고 진군하였다. 이 스웨덴 사람은 루터교회의 종교개혁의 구원자가 되도록 예정되었다. 그는 루쩬(Lutzen)전투에서 죽었다(1632). 스웨덴 군대에서 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지만 그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전해져온다. 이런 말은 왕과 공직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특징짓는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싸움은 배경이 되어 공포의 30년 전쟁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독일에서 도시를 황폐하게 하며 발발하였다(1618-1648).

7. 스위스 종교개혁: 울리히 쯔빙글리

7.1 쯔빙글리(1484-1531), 는 발트하우스(Wildhaus)에서 한 마을의 시장(magistrate) 아들로 태어났다. 바젤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생애 후기는 그가 휴머니즘만 아니라 정치역학과 (스위스)국가주의(nationalism)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업군인으로서 모험과 부를 추구하려고 그들 자신을 용병으로 외국인 부대에 고용되려 하는 고향사람의 관습을 (아내와 자녀를 빈곤한 가운데 남겨두는, Reislaufen이라 알려진 관습) 그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완전히 돌아왔을 때면 이 사람들은 종종 전쟁의 병든 희생자가 되어 돌아왔다.

아인시델른(Einsiedeln)의 목사로 쯔빙글리는 지역에 세워진 기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 마리아상을 우상숭배하는 것을 반대하여 힘있게 설교하였다. 루터의 작품들을 읽은 후 그도 종종 설교 본문으로 한 장 전체를 잡아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1523년까지 쯔빙글리의 영향력이 계속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도시 쮸리히는 종교개혁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변하게 되었다.

바젤에서 쯔빙글리와 동역한 개혁자는 우꼴람파디우스(Oecolampadius)였다(1482-1531).

7.2 내란이 로마카톨릭과 스위스의 신교 지역들 사이에 임박하였다. 쯔빙글리는 신교도 지역과 독일의 신교도들 사이에 동맹을 역설하였다. 그렇지만 루터의 추종자들과의 신학적인 일치가 이런 정치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7.3 쯔빙글리가 말부르그에서 루터와 만난 것은 말부르그의 회담(Marburg Colloquy)으로 알려져있다. 두 사람이 다 자기들의 지지자들을 동반하였다. 결정적인 문제는 주의 만찬에 관한 해석이었다. 루터는 분필로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단어를 테이블 위에 적고서는 힘있게 주장하였다. “이 낱말들이 그대로 있게 하시오루터의 친구인 칼슈타트(Karlstadt)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였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그 순간에, 주님은 그 자신을 가리키고 계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찬을 거행하는 동안에 사용된 그 빵 조각 속에(in) 더불어(with) 아래에 현재 육체적으로 계신다(성체공존설).

아마도 쯔빙글리는 하나님 말씀이라기보다는 학문적인 이유 때문에 더 루터를 반대하였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태도로 다소간 논쟁하였다. “루터씨, 당신은 이것을 정말로 믿습니까? 틀림없이 당신은 이것을 로마교의 어리석음을 따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루터는 쯔빙글리의 주장 가운데서 에라스무스의 지적인 오만함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또한 소위 이적들을 비웃었다. 아마도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루터는 이적에 대한 그의 신앙을 주장하며 대답하였다. “만일 주님께서 말굽으로 변화되었다 할지라도 나는 에라스무스와 쯔빙글리의 모든 학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을 것이다.” 쯔빙글리는 대답하였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기게 해준다. 그런 방법으로 우리는 를 기억한다. 그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지만 루터는 이런 입장을 거부하였다. 만일 주의 만찬의 우선적인 의미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강하게 했을 것이며 거룩한 만찬(Holy Supper)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례가 되지 못할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비록 두 개혁가들이 말부르그에서 대부분의 조항에 일치하였지만 주의 만찬의 해석에는 일치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토론은 결실이 없었다.

- 쯔빙글리는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 루터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신자가 지닌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산 떡을 보내셨다. 그것들을 먹고 즉 영적으로 사취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는 신자의 영적인 생명을 보살피시고 유지하신다....이 연회는 영적인 식탁이다...”(벨직 35)

7.4 대부분이 분리하는데 동의하였다. 쯔빙글리는 외쳤다. “비텐베르크 사람들은 내가 하나 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들이다.” 루터는 쯔빙글리의 친구 부써(Bucer)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같은 영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루터는 믿음의 일치의 표시로 악수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갈라섰다.

7.5 쯔윙글리가 두려워하던 일들이 사실이 되었는데, 바로 스위스에서 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그 개혁자는 15311011, 까펠(Cappel)이라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의 무기들은 심하게 찌그러진 철모와 나란히 쮸리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의 형제도 같은 그날에 죽었다.

쯔윙글리는 개혁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다. 그의 계승자인 요한 하인리히 불링허(Johann Heinrich Bullinger)는 칼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쯔윙글리가 로마교와 갈라선 것은 아마도 루터의 경우에서처럼 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그 내부에서부터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는 루터와 깊어진 감정적인 이해관계를 놓쳤으며 여전히 칼빈의 넓고 깊은 통찰력을 지니지 못하였다.

8. 칼빈주의자 종교개혁: 존 칼빈

8.1 칼빈의 생애는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1509-1536: 청년기와 준비

- 1536-1538: 제네바에 첫 번째로 머묾

- 1538-1541: 스트라스부르그

- 1541-1564: 두 번째로 제네바에 머묾

 

8.2 청년기와 준비: 1509-1536. 칼빈은 프랑스 북부에 있는 피카르디(Picardy) 지방에 있는 노용(Noyon)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부유한 귀족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칼빈은 귀족적인 교육를 받았다. 그것은 귀족계층으로 쉽게 옮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비록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와 교회권위 사이의 논쟁은 이런 계획을 변경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칼빈은 오를리앙스(Orleans)와 바우르허스(Bourges)의 대학들에서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는 파리에서 그의 학업을 계속하였는데, 거기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강의에 출석하였다. 파리에 있던 이 기간 동안에 이미 비밀 개신교 모임에 참석하였다.

1533년 칼빈은 파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가 귀족의사의 아들인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을 위해서 교장 연설을(the rectorial address) 작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었다는 것이 아마도 가장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방랑하는 피곤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는 지하실과 동굴에서 횃불을 켜고 반석을 성찬상 삼아 주의 만찬을 기념하며 설교하였다. 3년간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옮겨 다녔다. 그는 프랑스 왕 프랜시스 1세의 누이인 페라라(Ferrara) 백작부인의 손님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었던 칼빈은 이 부인과의 교통을 유지하였다. 칼빈은 마지막 편지를 이 부인에게 보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프랜시스 1세에게 보내는 잘 알려진 헌사와 함께 중요한 저작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출판하기 위해 저작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책은 바젤에서 출판될 예정이었다. 이 도시를 향해 가는 동안 칼빈은 15367월에 제네바에 도착하게 되었다. 귈라움 파렐(Guillaume Farel)이 제네바에서 개혁하는 사역을 머물러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 그 당시였다. 칼빈은 너무 젊었고 학업을 계속하려면 안정이 필요했던 형편을 변명하면서(claiming) 거절하였다. 파렐은 엄중하게 호소하였다. “당신은 자신의 원하는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의 일을 하도록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주님의 일보다 자신의 흥미를 구하고 있는 당신을 징벌하실 것입니다.” 후일에 칼빈은 이때 상황을 되새겼다. “이 저주 때문에 나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내가 시작했었던 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종교의 장관(a minister of religion)이 되었다.

8.3 제네바에 첫 번째 머물다: 1536-1538 - 어려움들을 개관하기. 이 무명의 프랑스인은 제네바 성() 삐에르(St. Pierre) 대성당에서 한 사람의 설교자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봉급은 논하여지지 않았다. 곧 칼빈의 사역은 반대에 부딪쳤다. 사역들이 무르익게 되었을 때에 그는 교회질서를 소개하려고 하였는데, 교회질서에서 그 자신의 권위와 자율권을 교회에 부여하기를 원하였다. 교회 권징(church discipline)은 국가의 권위로 시행되었었으나 이것은 일종의 국민에 대한 치안으로 전락하게 되었었다. 칼빈은 교회권징은 당회(a church council)에 속한 책임이라고 주장하였다.

당회를 세우고 교회질서를 도입하는 일은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전진하는 중요한 단계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도시 행정장관은 교회를 지배하던 그들의 권한을 넘겨주기를 거절하였다. 칼빈에 대한 반감이 사람들 가운데서 고조되었다. 그는 하마터면 론강(Rhone River)에 익사 당할 뻔하였으며, 성난 주먹이 그의 집 문을 부수려고 하였고, 밤사이에 그의 창문 아래에는 화기(火器)들을 갖다 놓았다. 나중에 칼빈은 조금도 피를 흘리는 일이 없었던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적었다.

칼빈과 파렐은 둘 다 15384월에 그 도시에서 쫓겨났다.

8.4 스트라스부르그: 1538-1541 - 더 큰 전투를 위한 대비(preparation for Further Struggle). 마틴 부서(Martin Bucer)는 칼빈을 스트라스부르그로 오라고 칼빈을 권유하였다. 파렐은 뇌하떨(Neuchatel)로 떠났다. 북쪽에 있는 엠던(Emden)의 도시와 남쪽에 있는 스트라스부르그의 도시 둘 다 유럽 전역에서 온 개신교 도피자들을 위한 피난처가 된 도시들이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는데, 그의 설교 아래에서 많은 재침례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로 돌이키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 스또르되르(Stordeur)라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나중에 칼빈은 스또르되르(Stordeur)의 미망인 이델레떠 더 부러(Idelette de Bure)와 결혼하였다.

칼빈과 부서가 수고한 보다 나은 결과로서 스트라스부르그는 교회의 개혁된 예전에 근거한 갱신의(a centre of Reformed liturgical renewal of the church) 중심이 되었다. 개혁파 시편집(Psalter)의 초판본들은 이 도시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기동안에 칼빈은 그의 유명한 사돌레토에게 답함(Reply to Sadoleto)을 저술했다. 사돌레토는 리용의 추기경이었다. 그는 재빠르게 칼빈이 제네바를 떠난 공백을 이용해서 제네바가 교황의 교회(the papal fold)로 되돌아오게 하려고 하였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지내던 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가운데 지냈던 기간이었다.

8.5 두 번째로 제네바에 머물다: 1541-1555 - 투쟁의 시대(Years of Struggle). 칼빈의 뜻에 많은 반대는 마침내 칼빈을 제네바로 돌아오도록 긴급하게 요청하게 만들었다. 칼빈의 모토가 있었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sere(주님을 위한 나의 마음이 내가 주님 당신께 신속하고도 충심으로 헌신하게 하였다). 그는 가장 명예로운 환영을 받았는데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몇 년 전 중단되었었던 바로 그 부분의 성경 강해를 계속하였다.

사도시대로부터 첫 번째의 시대에는 설교자와 장로의 직분을 가진 교회의 성경적인 조직이 복원되었다. 1541년의 교회질서(Ordonnances Ecclesiastiques) 지역 모임(the local congregation)의 권위와 책임을 기술하고 있었다. 제네바교회는 진정으로 개혁교회가 되었고 국가의 권위에서 자유로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직분을 받은 자에 의해 다스려졌다. 루터교회처럼 아무런 계급제도도, 어떤 식의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도 어떤 교회회의주의(consistorialism)도 없었다. 1544년 칼빈은 교회적인 축일들의 폐지를 제안하였다.

그렇지만 이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는 때때로 시의회 의원들의 요구에 억지로 굴복하도록 요구당하기도 하였다. 제네바에서 모든 반대가 잠잠해지기까지는 수년이 지나갔다. 특별히 방탕한 사람들은 종교개혁에 강렬하게 반대를 받았다. 그들은 사부아의 로마 카톨릭 백작의 정치적인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 권위도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제네바의 가장 저명한 시민들 가운데 몇 사람은 아미 페린(Ami Perrin)과 필리버트 베르델리어(Philibert Berthelier)와 같은 방탕아였다. 페린의 장인은 간통죄로 당회(consistory)에 의해 징계를 받았었고 그의 아내는 부도덕한 춤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 베르델리어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당하였었다. 반항하는 감정으로 그 시의 행정장관은 이러한 견책을 취소시켰지만 칼빈은 협박당하지 않았다. 그는 공적으로 선언하였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습니다만 받을 수 없는 합당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떡을 나누어주도록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그 주일 대학살이 예상되었지만 베르델리어는 주의 만찬을 거행하기 위해 감히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a. 칼빈과 그의 동역자들은 중세 시대 동안 미사를 참석하는 것과 비슷하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일이 훌륭한 시민의 상징으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에 염려해야할 이유가 있었다. 베르델리어는 평판이 좋은 시민이었으며 어쨌든 이방인이었던 칼빈 때문에 모욕을 당할 만큼 나쁘게 될 수도 있었다(could ill afford). 이런 경우에 당회는 공공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그 시의 행정장관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 삐에르 대성당 안에 가득 차있는 긴장은 거의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베르델리어는 집에 머물렀다. 오후예배 동안 칼빈은 많은 사람이 본문으로 사도행전 20:17-38절을 가지고 그의 고별설교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바를 계속하였다. 이 구절은 밀레도 해변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했던 바울의 고별연설이다. 칼빈은 그 말씀으로 설교를 끝맺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께 맡깁니다”(32a). 그리고서 그는 성경을 덮고는 집으로 갔다. 창백하고 병색이 완연하고, 쓰라린 마음을 가지고, 그 도시에서 두 번째로 추방되리라 충분히 예상하며.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b. 칼빈의 전기작가인 두머르귀(Doumergue)는 이 이야기(episode)를 암부로스가 로마황제 데오도시우스(Theodosius)에게 데살로니아인들을 학살한 후에 허락하기를 거절한 것과 루터가 그 당시에 제후들 가운데서 가장 권력이 큰 챨스 5(Charles )에게 용감하게 항거한 일과 비교한다. 실로 그를 적대하는 전기작가들 조차도 그 특별한 주일의 사건은 교회 권위와 국가 권위 사이의 투쟁에서 즉 그리스도의 회중의 자유와 자율권과 당회의 권위를 위한 투쟁에서 결정적이었다고 인정한다.

c. 주님의 상에 참여를 요구할 때 여러분은 만일 당신이 교리나 생활에서 태만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면...” 자신을 기꺼이 교회의 훈계와 권징에 복종시키기로약속한다. 그러므로 당회가 권징을 시행하고 죄인의 이름을 공적으로 언급할 때, 그 사람 혹은 그 여자는 국가의 재판에 불명예를 이유로 호소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이 자매교회들의 조언을 요청하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d. 베르델리어는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의 보호자이며 변호사였는데(이 사람의 경우는 아직은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는 부도덕과 음주벽 때문에 주님의 만찬에 참여를 거부당하였다. 그는 술에 취한 채 어리석게도(In drunken folly) 흉기를 든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종교 목사(a minister of religion)을 그의 집 현관문까지 시종 따라갔었다. 그 무죄한 사람을 협박하고 능욕하면서...

e. 피에르 아메옥스(Pierre Ameaux)는 도박카드 제조업자이며 가장 음탕한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그는 공개적으로 칼빈을 욕했다. 그 사람은 시내를 가로질러 참회하며 걷게 하여 공적으로 그의 죄들을 고백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사냥여행 중에 그의 아들을 저주했던 한 아버지는 3일간 구금에 처해졌다. 법률은 방탕과 지나친 사치(누구도 가난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함이 없이)와 싸우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 보잘 것 없는 도시에서 부도덕과 방탕을 대적하는 칼빈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과 교회권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온건함 가운데서 행해져야 한다. 그래야 아무도 그 가혹함 때문에 감정이 상하지 않는다. 또한 징벌은 가혹하지 않아야 하지만, 죄인을 주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이끌어내야 한다.“

논쟁을 일으키는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태도를 둘러싼 사건들은 아직까지도 칼빈에게 욕을 퍼붓는데(to heap abuse) 이용되고 있다. 이 스페인계 의사는 종교재판으로 사형에 처해졌었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제네바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칼빈은 전에 그와 연루된 적이 있었는데, 그 둘 사이에는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강요를 공적으로 그의 기독교의 회복(Restitutio Christianismi)에서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그의 비난은 철저하게 신성모독이었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들을 아다나시우스의 사탄주의(Athanasianum satanasianum)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그때 이 사람은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그 시의 치안판사는 (대다수의 방탕한자와 함께) 그를 체포하도록 지시하였다. 비록 칼빈은 자비를 요청하였지만 세르베투스는 15531027일에 이단자로 불태워졌다. 로마카톨릭과 개신교 둘 다 재판과 선고에 동의하였다.

쯔윙글리의 후계자 헨리 불링거(Henry Bullinger)와 주의 만찬의 해석에 관한 일치는 가장 환영을 받아야만 했고, 끊임없는 투쟁의 어려운 시기동안에 기쁨과 감사의 기회를 주었다. 쮸리히의 합의(Agreement of Zurich)1549년에 조인되었다. 그리하여 스위스 종교개혁은 더욱더 칼빈주의자들의 지도 가운데서 전진해나갔다. 아주 슬프게도 루터교회와 틈이 벌어졌다(widened). 같은 해에 칼빈의 아내는 죽었다(1549). “, 영광스러운 부활이여!(Oh, glorious resurrection)” 그의 아내의 마지막 말이었다.

1555년에 많은 피난민들이 제네바의 시민권을 얻었다. 이런 형편은 시장직(a magistracy)이 종교개혁과 칼빈에게 보다 더 우호적이 되게 하였다. 중요한 대적들이 칼빈의 생애에 공격에 실패함에 따라 그 도시에서 강제로 떠밀려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제네바에서 우세한 입장을 얻게 되었다.

8.6 제네바에 두 번째 머물다: 1555-1564 - 평화와 터 닦는 시기. 이제 경건과 헌신이 제네바의 공적인 생활(its public life)을 지배하게 되었고 제네바는 빛을 비추는 양초, 산꼭대기에 있는 동네가 되었다. 1559년에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라는 대학을 세웠다. 개교한 때에는 이미 9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등록했었다. 초대교장은 데오도레 베자(Theodore Beza)였고 후일에 칼빈의 계승자가 되었다. 학교설립은 많은 도시들에서 종교개혁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학교의 학생들 중에 죤 녹스(John Knox), 올레비아누스(Llevianus) 그리고 성() 알데곤더(St. Aldegonde)의 마르닉스(Marnix)가 있었다.

그의 중요한 작품,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외에도 캘빈은 거의 모든 성경의 주석들을 저술하였다. 대개 그는 종교개혁을 위해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이 책들을 왕들에게 그리고 영국, 프랑스 폴란드 스웨덴 그리고 덴마크에 있는 다른 중요인물에게 헌정하였다. 그는 유럽 전역에 있는 사람들과 서신왕래를 하였다. 4천통 이상의 편지들이 발견되었으며 거기에다 아직도 이미 입수한 2천백 편 외에 더 많은 설교들이 제네바 기록보관소에서 발굴되고 있다. 강요는 스페인어와 일본어를 포함해서 여러 언어로 번역이 되어있다.

칼빈은 1564627일 토요일에 세상을 떠났다(died). 육체적으로는 소진하였다. 맹렬한 싸움과 쉼 없는 활동 때문에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러나 죽기 바로 직전, 얼마 되지 않은 날 동안 질병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즐겁게 지냈었다. 그가 장사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묘지의 위치조차도 잊혀졌다. 그렇지만 주님 안에서 그의 노고는 헛되지 않았다(고전15:58)

그뿐만 아니라 비텐베르그에서 시작했고(루터) 독일인의 문제로만 남을 것처럼 보였던 종교개혁은 제네바(칼빈) 때문에 유럽의 운동(European movement)이 되었다. 나중에 영국(England)을 사용하셔서 복음이 아메리카 대륙에 전파되었을 때 진정으로 세계적인 교회개혁(worldwide church Reformation)이 이루어졌다.

9. 칼빈주의 종교개혁의 특징

9.1 칼빈주의 종교개혁의 중요한 특징은 생활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권을 설교하는 것이다.

a. 중세시대동안, 로마카톨릭교회는 생활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제들의 교회였다. 대 성당은 초라한 거주지 위로 높이 치솟아 있었다. 모든 시의회는 의원들 가운데 최소한 한명의 사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펼쳐있는 성경은 교회에도 가정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교회는 성례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조종하였으며 권위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절대적 주권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대적인 교황의 성직계급제도였다.

b. 16세기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로마교황의 성례전 중심의 교회와 그 사제들이 신자들을 지배했던 그런 목조르기를 깨뜨리셨다.

c. 종교개혁은 생활 전부를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 아래로 가져왔다.

d. 르네상스의 옹호자들과 휴머니즘의 추종자들은 교황교회의 권위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도 역시 거부하였다. 공적인 생활은 중립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왕의 시대 이후로 유럽에서는 추방되었던 이교사상이 휴머니즘과 르네상스의 모습으로 의기양양하게 재등장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오랫동안 이교의 이런 형식의 영향력을 제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마침내 이런 싸움은 감소되었다.

e. 18세기 동안에 계몽운동의 변절은 유럽에서 더욱더 세력을 얻었다.

9.2 중세 이후의 사람에게 칼빈의 메시지는 교회가 정부 그 자체에게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교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그들 자신의 교회회의인 당회(consistory)를 도입하였다. 당회는 교회의 생활을 조직하였고, 교회권징을 유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직분자로서 교회 회원들을 심방하였다.

제네바에서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있었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자주 장로의 임명이나 절기의 수와 주의 만찬의 거행 빈도수와 같은 현안에 대해 타협하자고 칼빈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교회권징의 경우에 있어서만큼은 어떤 문제이든 타협을 거절하였다.

루터도 쯔빙글리도 사도적인 모범대로 교회조직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성경에서 찾은 사도적인 명령에 근거하여 교회를 조직하려고 강렬하게 싸웠던 사람은 칼빈이었다.

9.3 칼빈은 교회가 국가의 정부 위에 있지도 않지만 국가의 권위가 교회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쳤다. 국가의 정부와 교회는 국가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들이 뒤섞임 없이 둘 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복종되어 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 사이에 참된 성경적인 관계, 하나의 진리를 보여주었다. 그 진리는 여러 세기 동안 인류의 비참과 슬픔이라는 기간동안에 교회에 큰 손상을 입히는 큰 대가에도 무시되어왔었다.

9.4 국가의 행정장관은 자주 그들의 권위를 남용하였으며, 국가의 소명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 콘스탄틴 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은 황제교황주의 죄가 있었다.

- 샤를마뉴(Charlemagne)는 색슨족에게 강제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 선교를 대신하여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던 카타리파(Albigensians)와 왈도파(Waldensians)를 학살함

공공의 질서와 공의를 유지하고 국가에서의 교회의 권리를 보호하고 복음을 설교하는 일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정부의 소명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둘 다 이러한 국가의 보호 안에서 평등하다.

a.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모압과 블레셋(시편 72)과 다른 족속들의 왕이었다. 그랬을지라도 그는 이들 이교도 민족들에게 강제로 유대종교를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교회)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는 아비아달(제사장)과 나단(주의 선지자)의 도움을 받았다. 다윗은 제사장을 겸한 왕이 아니었으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교도 민족들의 왕들과 같이 절대적인 군주도 아니었다.

b. 이미 구약에서부터 국가의 문제들과 교회의 문제들은 분리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유롭게 된 후에는 얼마나 더 이것이 사실이 되어야만 하겠는가.

9.5 하나님의 말씀(“....성령의 검,”6:17)은 교회를 심고 자라게 한다. 칼빈의 시대에 그러한 사실을 늘 명료하게 깨닫고 있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칼빈은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두려운 진리의 말씀을 인지하고 있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26:52). 또한 재침례교도의 뮌스터 사건(Munster drama)을 생각해보라. 칼빈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통치자를 존경하라고 가르쳤으나 결코 숭배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폭동과 혁명 힘으로 강탈함, 그리고 난폭함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가 된다. 요컨데 에덴동산을 잃었던 것은 혁명이라는 방식 때문이었다.

9.6 행정장관과 제후의 칙령이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 참으로 죽음이나 육체에 어떤 다른 형벌을 겪어야만 할지라도 그럴 때, 위험함 상황에 처해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을 지속하려면 큰 믿음과 은혜에서 오는 굳은 결심이 필요하다(벨직 28). 저들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할 때 그럴 수 없습니다하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슬픔을 견딘다면 이는 칭찬 받을만한 일이다”(벧전2:19, 10:28,39)

9.7 16세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고백하였다. 17세기에 사람은 그 자신의 권리를 부르짖고 있다.

10. 종교개혁에 대한 공격: 재세례파(Anabaptism)

10.1 재세례파(ana = 다시; anabaptism = 다시 세례를 주다). 종교개혁이 16세기 동안 활발했던 유일한 운동은 아니었다. 재세례파 운동 또한 그 시대에 큰 세력을 얻었다. 그 개혁자들은 두 방향에서 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는데 한편은 로마 카톨릭교도들이고 다른 한편은 재세례파교도들이었다.

10.2 재세례파교도들 자신은 유아세례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들은 외형적인 교회 조직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국가의 간섭을 거부하였다.

10.3 재세례파의 특징과 교리:

a. 재세례파 신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소위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생활이다. 이 하나님의 왕국은 완전하게 새로운 창조였고 단순히 타락한 땅의 재창조가 아니었다. 재세례파교도들은 세상, 마귀의 소유지라고 생각했던 세상에서의 구원을 설교하였다. 신자들은 그러한 사탄의 영역 안에서 아무런 소명도 어떤 관심도 없다.

b. 그들은 완벽하고 거룩한 성도들로 구성된 절대적으로 거룩한 회중의 교리를 설교했다. 이들 성도들은 세상에 얽어매는 모든 것에 엄격하다. 많은 재세례파교도는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마리아를 도구로 사용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주장하며, 처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 출생하셨다는 것을 부정하였다.(하이델베르그 14). 멜키어 호프만(Melchior Hoffman)이 한 말 중 하나는 저주받은 것은 마리아의 육체이다”(벨직 18항을 보라).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 또한 이 세상으로부터 엄격하셨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죄에 대한 (영적인) 투쟁을 설교하기 보다는 오히려 재세례파 교리는 이런 악하고 죄된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여 얻고자하는(Its) 이상(理想)은 죄 없는 삶이다. 이렇게 세상을 부정하는 결과는 군복무의 거부와 정부 공직과 맹세의 합법적인 사용을 거부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재세례파는 종교개혁이 아니다. 잘해야 회복을 시도해본 것이다.

c. 재세례파교도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혁명과 폭력이나(뮌스터) 이 세상의 모든 악한 것들을 수고를 아끼지 않고 피함으로(맨노 시몬스)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재세례파교도는 이 세상의 것이기를(to be of this world)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것 역시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의 하나님의 왕국은 물 위에 떠있는 기름처럼 표류하고 있다.

d. 몬타누스와 도나투스의 가르침이 그랬듯이 재세례파교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대신 사람 자신의 노력에 근거하여 열성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a zealous saintliness)을 선포하는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이것은 모든 재세례파 집단의 특징이 되는 거칠고 잔인함의 이유를 말해준다. 그들의 거룩해지려는 노력으로 그들은 대단히 극단적인 것을(추방, 정결예식) 원한다. 귀도 더 브레스(Guido de Bres)는 언젠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들은 달걀을 면도하려고 했을 것이다!”고 썼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 성화되지 않고 자신의 공로로 되기 때문에 그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세례는 믿음이 분명하게 되었을 경우에만 베풀어질 수 있다.

1. 중세의 스콜라철학은 본성과 은혜의 사이를 구별하였다. 전자는 선하였지만 후자, 거룩한 초자연적인 것의 첨가를 필요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본성과 은혜 사이의 통일성은 인정되고 있었다.

2. 중세의 신비주의는 신성한 것과의 합체를 설교하였다. 신비주의자는 일상적인 매일의 생활에 아무런 흥미도 없었지만 신성한 것과 연합되기 위해서 이런 생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3. 개혁자들은 죄와의 투쟁을 설교하였으며, 도피보다는 개혁이라는 생활 전부를 둘러싼 언약을 가르쳤다.

4. 재세례파교도들은 일상적인 생활을 마귀의 영역이라고 모욕적으로 말하였으며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적인 생활을 찬송하였다. 실제로 재세례파교도들은 종교개혁에서 배운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많은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신비적인 거룩함을 추구하는 일에서는 로마카톨릭과 아주 유사하게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리 의외의 일은 아니리라, 많은 재세례파교도들은 박해의 시기에 로마카톨릭의 무리에게로 돌아갔다. (비록 개혁신앙을 지지한 많은 사람들 또한 박해가 두려워 같은 일을 하였다는 것이 부언돼야 하겠지만 말이다) 수치를 그와 함께 짊어지기를 거절하면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되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역시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분은 우리의 천한 몸을 변케 하실 것입니다...”(3:20,21)

5. 중요한 로마가톨릭 이단교리는 교황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님(lord)이며 교회는 모든 것 위에 있다고 가르치는 교리이다. 재세례파교도의 중요한 이단교리는 내적인 빛”(한 사람 고유의 개인적인 통찰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lord)가 되고 하나님의 왕국은 모든 것 위에 있다. (참된) 재세례파는 누구나 그 자신의 교황이며 그런 까닭에 참된 (재세례파) 신자라면 한 사람이 진정 회심했는지 어떤지를 간파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왜 자주 서로 출교하면서 분쟁이 많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해준다. 로마가톨릭교도들과 재침례파교도들은 모두 다 일상적인 생활을 무시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교회적이거나(로마가톨릭) 영적(재침례교도)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말씀은 옛언약 하에서 이스라엘이 때때로 뽑은 칼로, 예를 들자면 아말렉족속과 블레셋족속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시행하시도록 지시를 받았다고 가르친다.(18) 새언약 아래에서 성령님은 복음을 설교하는 방법으로 보살피신다. 때때로 그리스도께서는 배도한 기독교국가에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진노의 심판들을 퍼부으신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육체와 피에 대항하여 투쟁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사악함을 주관하는 영적인 주관자에(spiritual hosts of wickedness) 대항하여 투쟁한다(6:12-17). 이 성경 구절은 우리의 영적인 갑옷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결코 낡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멍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무기들을 사용하는 일에 주님께서 복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뽑은 칼과 폭동을 일으키는 종교적인 혁명을 복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세 위에 계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권위에 복종해야할 의무가 있다(13:1이하를 보라)

7. 디모데에게 쓴 글, 바울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무엇보다 먼저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 2:1이하). 교회는 자신을 이런 식으로 정치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는 결코 혁명적으로 재침례교도에 혹은 교회적인정치관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10.4 초대 재침례교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은 멜키어 호프만(Melchior Hoffman,1495-1543)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모피 매매업자였다. 그는 광범위하게 여행하였고 마침내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 도시에서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을 엘리야라고 부를 정도였다(오리라 한 그분11:14). 그렇지만 10년 후 그는 같은 도시에서 감옥에서 죽었다.

10.5 할렘의 화란의 도시(the Dutch city of Haarlem) 출신의 제빵 기술자인 죤 마떼이스쯔(John Mattysz)는 특별한 환상을 받았는데, 스트라스부르그는 적합하지 않고, 뮌스터에 있는 독일의 도시가 하나님의 시온이 되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두 번째 에녹(하나님과 동행한)이라고 주장하였다. 마떼이스쯔는 압제의 시대는 지나갔고 추수의 때가 이르렀다고 설교하였다. 사악한 자들을 치려고 팔을 쳐든 시간이 이제 곧 되었다. 뮌스터 시는 열광적인 재침래교도들의 큰 무리로 된 요새가 되었다. 그렇지만 마떼이스쯔는 뮌스터 주교의 군대가 시를 공격하는 동안에 사망하였다.

그의 후계자는 쟌 뵈껠스쫀(Jan Beukelszoon)인데 레이든 죤(John of Leyden)으로 더 유명한 양복 매매업자(tailor by trade)였다. 예언서를 기초로 해서 그는 뮌스터만 아니라 온 세상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두 번째의 다윗왕으로서 뮌스터 상업중심지에서 그의 궁전을 다스렸다. 수천명의 사람들 이와 같은 재침례교의 이상에 매료되어 여기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다윗이 했던 것처럼 그들은 주님의 전쟁을 하는데 필요한 무기를 갖기를 요구받았다. 개인소유권은 폐지되었고 일부다처제가 도입되었다(어쨌든 다윗 자신이 많은 가졌었다). 도시 정화작업은 공포였다. 모든 불신자들은 추방되었거나 처형되었다. 마침내 이 영적이지 못한 열광주의(unspiritual fanaticism)는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광란으로 치달았다. 한 겨울 혹한에 많은 재세례파교도가 아닌 시민들은 많은 여자와 아이들과 함께 그 도시에서 바깥 어두운 곳으로쫓겨났다. 1535625일 뮌스터의 주교의 군대가 그 도시를 재탈환했고 로마가톨릭의 지배 아래 다시 가져왔다. 복수는 잔혹했는데, 지도자의 토막 난 시신들을 그 도시의 탑에 공개하였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26:52)

10.6 뮌스터의 함락은 재세례파의 극단적인 형태인 혁명적인 열광주의의 종말을 신호해주었다. 그렇지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멘노 시몬스(Menno Simons,1496-1561)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프리슬랜드에 태어났으며 사제(ordained priest)가 되었다. 그는 멜키어 호프만(Melchior Hoffman)의 영향을 받았지만, 시몬스는 분명히 호프만 만큼 열광적은 아니었다. 재세례파 운동의 완곡한 파는 그의 이름을 따서 멘노파(Mennonites)라고 불렀다.

1680s 동안 많은 멘노파는 미국으로 떠났다. 후에 독일 멘노파는 러시아로 이주하였고 볼가 그리스도인들(Wolga Christians)로 알려졌다. 그들은 1890-1910년 기간동안 박해로 심각하게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그들의 독일 조상 때문에 시베리아로 이송당하였다.

10.7 16세기의 개혁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재세례파와 혼동되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일이 극히 중요하였다.

벨직 신앙고백서 34: “그런 까닭에 우리는 재세례파의 오류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오직 한번 받는 단한번의 세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어린 자녀에게 베푸는 세례 역시 정죄합니다.”

벨직 신앙고백서 36: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재세례파와 다른 폭력적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권위들과 공직자들을 거부하며, 공의를 뒤엎고 재물의 공동소유를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세워놓으신 예절을 무너뜨리는 자들을 정죄합니다.”

10.8 16세기는 권위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경험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주님께 성결”(14:20)이라 씌어진 모든 것을 재세례파가 부정한 그 맞은편에 개혁자들은 복종의 위기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권세를 가진 모든 분들에게, 그들이 까다로운 엄한 감독자일지라도 복종하는 것을 그들의 소명으로 여겨(as their calling) 존중하였다. 재침례파 순교자들은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권세 가진 자들을 악담하였다. 개혁주의 순교자들은 그들의 주권자의 권위를 인정하였지만, “당신이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

10.9 재세례파[신령주의(spiritualism)]은 여전히 서구사회를 세속화하는데 여전히 강한 저변(undercurrent)을 이루고 있다. 즉 반군국주의(antimilitarism), 평화주의(pacifism), 세계교회협의회(WCC)"교회와 평화"(church and peace)라는 주제, 종교는 개인의 문제라는 주장, 그리고 성경의 열린(open)” 정경이라는 교리.

11. 종교개혁에 대한 공격: 신비주의

11.1 바울은 디모데에게 지식 혹은 그노시스라고 거짓되게 불려지는 반대에 마주하여 경계시켰다(딤전6:20). 이들 지식의 사람은 복음에 대한 설명을 바울의 복음과는 크게 다르게 제공하였다. 그들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딤후2:18)고 말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바울의 교훈들은 너무 많이 헬라철학과 그들 시대의 정신과 충돌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고전1:20).

11.2 2세기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은(리용의 이레니우스를 포함하여)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들 지식의 사람(people of knowledge)”은 낯익은 말들을 사용하였지만 거기에 새로운 의미들을 채워버렸다. 그들이 하나님을 말하기는 하였지만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하신 창조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참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영혼을 사람에게 있어 영원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였고 사람의 영혼은 거룩하다고 생각하였다.

11.3 중세시대 동안, 영지주의는 메이스터 엑하르트(Meister Eckhart)의 신비주의의 형태로 되살아났다. 엑하르트는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안식에 관해 아주 아름답게 설교할 수 있었다. 이런 고대의 복음의 대적은 게다가 종교개혁 시대 동안에 자신을 나타냈고, 또한 독일의 남부지방에서도 그랬다. 16세기 신비주의의 중요한 지지자는 세바스쳔 프랭크(Sebastian Franck,1499-1542)였다.

도나우워쓰(Donauworth)에서 태어났던 그는 사제(ordained priest)였다. 그는 1527년에 루터교인이 되었지만 1528년에는 재세례파 신앙에 이끌리게 되었고 1529년에 최종적으로 신령주의자로 돌아가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그에 대한 불평을 추방하였다(lodged) 그리고 이것은 1531년에 스트라스부르그의 시에서 추방으로 끝났다.(에라스무스는 로마가톨릭교회에게 자신의 신앙심을 시위하려고 이 사건을 이용하였다.) 많은 재침례파 경우처럼, 프랭크는 이곳저곳을 떠다니며 안식이 없는 생애를 보냈다. 그는 바젤에서 한 인쇄업자로 생을 마쳤다. 그는 1542년 그곳에서 죽었다.

프랭크는 재세례파의 견해에 대해 충분한 결론을 얻어냈기(drew) 때문에 재침례파 운동과 관계를 끊었다. 그에게서 노스틱 신비주의의 진정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신성과 영혼의 합체이다. 그는 행위로 얻는 성화(로마 가톨릭)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얻는 성화(개신교)도 거부하였다. 마음의 가장 심오한 문제는 표면으로 가져와야만 한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전혀 필요로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성경은 고작해야 칼집이지 확실하게 칼 그 자체는 아니다. 프랭크는 신앙의 확실성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옮겨 그 자신의 마음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말씀의 규범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프랭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그노시스의 폭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들은 성경과 설교, 교회, 세례 그리고 주의 만찬과 같은 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으며 확실하게 그것을 위해 박해를 겪을 준비를 해야할만한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certainly not matters for which one should be prepared to suffer persecution).

아주 잠시 동안 프랭크의 저서들은 높은 평가를 얻게 되었으며 역시 네덜란드에서도 그랬다. 도시에 있었던 콘헤이르트(Coornheert)16세기 중엽에 아주 잠시 영향력을 얻었다. 그들에 따르면, 참으로 중요한 문제에(깊숙이 하나님과 진실한 일체가 됨) 관해 그들의 경건한 토의들은 아주 엄숙하고 인상적인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프랭크와 콘헤이르트는 참 율법폐지주의 속에서 살았다. 즉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하나의 율법이 되었다.

NOTES

1. 하나님을 대적하여 폭동을 일으킨 우리 자신의 시대에 아주 큰 소리로 설교되고 있는 것은 바로 노스틱 신비주의이다.

2. 이것은 낙원에서 사탄의 복음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탄은 이브에게 하나님께서 비밀로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말하자면 사람의 진정한 구원에 관한 진실을 누설하였다.

3. 사단은 하나님의 비밀을 누설하였다: 너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알고 있는데, 만일 너희가 저 나무에서 따먹는다면 너희가 눈을 뜨게 될 것과 그때 너희가 선과 악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 지식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해줄 것이라는 사실이다(3:4,5)

4. a. 예술, 문학, 영화, 연극, 정치역학, 그리고 사회의 운동들과 활동들을 수단으로 하여, 현대의 반복음(antigospel)은 사람은 피조물이 아니며 조물주에게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갈채를 보낸다. 주장하기를, 사람은 진화의 과정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진실로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물주시라면 그런 경우 그분은 복종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실 것이다.

b. 이러한 반복음(antigospel)은 우리의 창조되어짐은 하나의 잘못된 생각이며, 사람이 스스로 자유 해야 할 구속하는 옷(strait-jacket)이라고 주장하였다.

c. 사람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자유롭게 되고 동등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되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 것이다.

d. 그때에만이 그의 눈은 열리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율법(laws)과 법령(statutes)을 치워버려라. 규칙(rules)과 법(norms)을 치워버려라.

파리에서 학생폭동 동안(1968), 다음과 같은 구호가 소르본느 대학 벽에 그려졌다. “어떤 것이든지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진다이런 구호가 비논리적이라 생각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반복음 속에서 사단의 깊은 것들이 주목을 받지 않았다.(2:24를 보자)

e. 노스틱이 구원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죽음에서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폭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폭동은 우리는 안다....”는 성명으로 이끈다. 절대적이고 신적인 자유(실존주의, existentialism)를 만들어주는 이런 주장은 절대적인 자기만족과 자신의 자유의지와 욕망을 따라 살 권리를 주장한다.

f. 이러한 현대의 노스틱은 우리의 이웃의 것들과(그것이 지옥이다, Jean Paul Sartre가 말했다) 결혼으로 사람이 그들 자신을 그들의 배우자에게 준 이후로는 결혼 배우자를 포함해 모든 속박에서 해방을 설교한다. 모든 노스틱교도들과 모든 신비주의자들은 신적인 개인주의자요 고독하고 외롭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탄적인 고독함으로 더불어 살 수 없어 자살을 범한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절망적인 영적 허전함을 채우려고 그런 신성에 속한 그 무엇인가(some of that divinity)를 경험하기 위해서 동방종교의 신비주의로 돌아선다.

g. 노스틱주의는 이러한 현대의 반복음의 중요한 표출이다. 사도 요한은 이미 밧모섬의 바닷가에서 동방, 아시아에서 일어난 땅의 짐승을 보았다(13:11). 확실하게 동쪽에서 신비주의의 원천이 자리하고 있다. 동방은 티벳에서는 로사리오 묵주를, 베트남에서는 수도원제도를 우리에게 주었다. 이러한 노스틱주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하나의 암 덩어리(딤후2:17)이며 그 교만한 노스틱교의 영은 너무나 쉽게 성도들의 친교(communion)를 감염시키기 때문에 교회를(it) 파괴하려고 위협한다. 항상 한편은 다른 편보다 더 잘 안다.(로마서14장을 보자). 바울은 한편을 위해서는 자만심을 일으키게 되고 다른 편은 적대하는 것을 경고한다(고전4:6,7). 회중 가운데 있는 일치를 위협하는 것이 바로 이런 태도이다. 그리고 회중 가운데 있는 이런 일치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늘 하는 책망의 핵심이다. 요한복음 13:35절을 보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장을 보자). 속아서 어린 양처럼 보이지만 용처럼 말하는 땅의 짐승의 그 영향력이란 얼마나 파괴적이었는가!

5. 이런 반복음(antigospel)은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적그리스도인으로 바꾼다. 그리고 의식있는 반 기독교신앙을 향해 여기 땅에서 더욱 더 반항적인 기독교세계를 재촉한다(2). 그러므로 사도요한의 세 서신은 사도 유다의 서신 만큼이나 오늘의 영적인 상황에 가장 적절하다. 사실 바리새인들 역시 무엇을 선이나 악으로 여겨야 했는지를 스스로 결정하였다. 한편으로 그들은 엄밀하게 율법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가장 조심성 있는 생활을 했다. 이것은 좋은 인상 거룩함과 같은 좋은 인상을 만들어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탐욕과 가혹함과 증오의 생활을 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참으로 그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셨다. 너희는 사탄의 자녀다. 그는 너희의 아버지이며 물론 너는 너의 아버지의 원하는 것을 행할 것이다.(8:44; 9:41). 이러한 진실은 정말로 그들을 뒤흔들었다.

6. 이러한 반복음은 그 변형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남아있다. 참으로 사탄의 수단들은 되풀이되고 지루하다. 인류는 배우는데 느리다. 사탄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을 일으키려고 이런 수단을 사용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처음 위치에 있는 눈 먼 이교도가 아니다. 정반대로 그의 가장 신실한 추종자들은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아버지와 체결하신 화해를 무시했다. 언약은 아직도 효력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다.

12. () 종교개혁(THE COUNTER- REFORMATION)

12.1 로마 가톨릭교회는 가톨릭종교개혁 혹은 교회의 회복이라고 부르는 것을 반()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선호한다. 반종교개혁은 우선적으로 예수회(the Order of Jesuits)와 트랜트 회의의 작품이다.

12.2 예수회(예수의 회). 그의 설립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1491-1556)]였으며 바스크(the Basque) 귀족의 일원이었다. 침략한 프랑스 군대에 대항하여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그는 중상을 입었다. 지루하고 긴 요양기간은 많은 성인들의 생애에 대해 읽는 기회를 주었다(더 좋은 책이 부족했기에). 이것은 그에게 회심을 가져왔다. 이제 그가 가진 기사도의 이상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는 기사도로 변화되었다. 그는 다른 많은 곳 가운데서도 파리의 대학에서 공부하였다(죤 칼빈처럼 거의 동일한 시대에) 그리고 예수회(Society Jesu - S.J.)를 설립하였다. 이런 엄격한 회는 군대의 계통을 따라 조직되었고 1540년에는 공적으로 교황의 재가를 얻었다.

이런 회의 목적은 교회의 명성과 영예를 증진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 회원들의 열심과 헌신은 교회의 우상숭배를 존중하게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이러한 수치스러운 예수회의 태도는 다음의 특징이 있다.

a. 절대적인, 맹목적인 복종(ac si cadaver esset); 교황의 기꺼운 도구들; 아주 엄격한 영적인 권징; 형제를 정탐; 가족과의 친밀함에 구속받지 않음. 교황은 그들을 베드로의 배를 탄 가장 열정적인 노잡이라고 불렀다.

b. 영적인 은닉(reservatio mentalis). 한 회원은 항상 모든 상황에서 진실을 말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는 진리의 부분을 보류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라는 말을 하지 않고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c.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한 회원은 더 큰 악을 막는 것을 위해서라면 보다 적은 죄를 범하는 것이 허락된다. 그러한 원리는 건전한 특징의 발전을 대단히 방해하였다.

12.3 회를 설립한 로욜라의 동료 중의 한 사람은 프랜시스 카비(Francis Xavier, 1506-1552)였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를 사도시대 이래로 가장 위대한 선교사들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그는 아시아와 일본에서 사역했다. 그리고 많은 개종자를 낳았다.(“나의 손은 많은 세례로 피곤하다). 자주, 그렇다고 할지라도(though), 그런 개종은 형식적인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많은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은 잔인한 박해에 저항했다는 사실도 역시 알고 있다.

12.4 학교에서 교육적인 노력만큼이나 고백자로서 그들의 사역의 방편으로 예수회는 강력하게 교황권이라는 큰 목적, 대의를 진척시켰다. 그들의 열광주의는 유럽을 황폐하게 했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12.5 트랜트 회의는 - 몇 번의 중단으로 인해 - 1545년에서 1563년까지 계속되었다. 트랜트 시는 교황을 만족시키기에 로마에 아주 가까운 신성로마제국의 남부에 위치하여 있었다. 예수회는 참석하여(in attendance) 교황의 지상권을 지켰다. 교황의 무오성은 첫 번 바티칸회의 동안인 1870년까지 비록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되도록 주장되지만 않았을 뿐이지 인정되어졌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요한 학적인 저서들은 트렌트 회의에 참석한 이들을 위한 첫째가는 자료가 되었다.

12.6 트렌트(Trent)는 로마와 종교개혁 사이에 결정적인 분리를 가져왔다.

a. 개혁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반대편에다 트랜트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를 집행할 때, 사제가 거행하는 예전행위를 하는 동안에 베풀어진다고 가르치는 교리를 세웠다.

b. 개혁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대신에, 트랜트는 교회의 전통의(선언과 관례들)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공적으로 이러한 전통들은 성경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종 전통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게 된 결과를 낳았다.

c. 개혁의 오직 은혜로(sola gratia) 반대편에 트랜트는 선행으로 얻는 공로(meritoriousness)를 두었다.

1. 오순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성령님은 성경에 덧붙여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의 아드님 안에서 한번 계시하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1:1; 22:18,19). 재세례파가 그랬던 것처럼 성()로마교회(공적인 명칭)는 성경의 충족성을 부정하였다.

2. 로마는 그들이 ex cathedra(보좌에서)(예를 들어, 교황 피우스 12세가 마리아의 승천을 공적인 교리로 1955111일에 선포하였다)라고 말할 때 그들의 교황의 무오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교황은 그와 같은 새로운 가르침들을 위해 사도행전 15:28“...성령과 우리에게 좋은 것 같으니...”(한글KJV) 라고 인용하며. 성령의 영감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사도는 개종한 이방인들도 교회에 속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재세례파 역시도 완성된 정경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 그들은 성령님이 내적인 소리를 사용해서 새로운 가르침을 계시하신다고 주장한다.

3. 종교개혁을 위한 그의 기념비적인 방어에서 - 그가 쓴 사돌레토에게 대답함(his Reply to Sadoleto) - 칼빈은 로마가톨릭교회와 재세례파를 분파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둘 다 하나님의 성령님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전통이라는 것으로, 재세례파는 내적인 빛내적인 소리라는 것으로 그렇게 하였다.

12.7 트랜트회의의 정경들로부터:

교회법(canon) 6: 만일 누구라도 새로운 율법인 성례가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은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것들이 어떤 장애물도 해가되게 놓아두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 마치 그것들은 믿음으로 받는 은혜나 의를 단순히 외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신실한 자를 불신자와 구별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의 표지에 불과하다는 듯이 말한다면: 그에게 저주가 있으라.

교회법(canon) 8: 누구든지 새로운 율법인 성례를 통하여는 은혜가 그 의식 자체로 베풀어지지 않지만(ex opere operato) 오직 신의 언약안에서 믿음만이 은혜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저주가 있으라.

Note: 이것은 이런 뜻이다. 세례를 베푸는 동안 사제의 예전과 의식행위는 그 아이에게 은혜가 부어지도록 만든다. 그때 그 아이는 즉시 새사람이 된다. 이러한 세례의 예전행위 이전에, 그 아이는 여느 다른 불신자녀와 똑같다. 세례의 행위는 교회의 신성한 공간을 통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되가져오기에 합당하게 만든다.

교회법(canon) 12: 만일 누구든지, 의롭게 하는 믿음은 신적인 자비가 그리스도 때문에 죄를 용서하신다는 확신뿐이라고 하거나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유일한 것은 확신이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저주가 있으라.

Note: 2차 바티칸 회의의 모든 회원들은 그들이 트랜트의 교회법들에 동의하고 복종을 맹세로 진술하도록 요구를 받았다.

12.8 종교개혁은 저주를 판결받았다.(고전 16:22절과 역시 갈1:8을 보자). 비록 남용의 일부는 정죄를 당하였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배교한 교리들을 재차 단언하였다. “그때에 로마교회는 스스로 참된 어머니 교회에서 자신을 분리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배도한 분파가 되었다[흐뢴 판 끄린스떼러(Groen van Prinsterer)].

12.9 트랜트 회의의 결정들은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공격할 수 있도록 특별히 예수회 수사들을 다시 새롭게 된 열정과 동기로 준비시켰다. 남부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에 실패하였다(were lost). 스페인에서 종교개혁은 종교재판소에 의해서 피로 억제되었다. 이탈리아, 헝가리 남부 네덜란드에서 예수회의 박해는 잔인하였다. 북부유럽(스칸디나비아, 북부독일)은 종교개혁에 신실하게 남았다. 중부유럽(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북부 네덜란드)은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으로 전쟁터가 되었다.

13. 종교개혁의 확장: 프랑스

13.1 종교개혁을 뒤이어 10년간 북부 유럽은 루터국가교회에 의해서 지배되었는데 한편 로마가톨릭교회는 남부 유럽에서 그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사이의 싸움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껴졌던 곳은 중부유럽에서였다.

16,7세기 동안 유럽을 가장 난타했던 종교전쟁들의 시작들은 1559년 프랑스와 스페인 간에 체결된 평화조역에서 마련될 예정이었다. 이 조약은 비밀조약이었으나 종교개혁 이단(heresy)을 멸절하자는 계획적인 합의를 담고 있었다. 그때 젊은 오렌지의 젊은 제후, 침묵의 윌리엄 왕자(Prince William the Silent)가 우연히 이 조약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챨스 5세의 아들인 필립2세와 스페인의 왕은 반()종교개혁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이러한 사탄적인 계교위에 간구한 이후, 1588년에 스페인 아르마다의 영국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간의 정치적인 싸움에서 전환점이 발생하였다.(11:22-25를 보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는 이렇게 새겨진 주조된 메달을 지시하였다. “하나님의 입김이 그들을 멸하셨다스페인의 유럽에 대한 지배력은 이러한 악명높은 함대의 파괴와 더불어 1588년에 끝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종교개혁 교회는 세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13.2 대개는 칼빈 때문에, 종교개혁은 프랑스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위그노 신자(Huguenots)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많은 모임들이 도시 전역에 세워졌다. 1559년까지 거의 3천개의 프랑스 개혁주의 모임이 있었다. 그때 오를레앙의 도시만 해도 약 5-6천명 되는 사람이 주의 상에 참여하였다. 프랑스 인구의 41이 개혁주의 신자가 되었다. 게다가 교육받은 시민(귀족, 학자, 부유한 시민)75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을 지지하였다. 오를레앙(Orleans), 보르독(Bordeaux), 리용(Lyons), 라 로첼러(La Rochelle), 몬토분(Montaubun), 몬스펠리르(Montpellier), 그리고 로체포르트(Rochefort)는 공개적으로 종교개혁을 선택하였던 도시들 중에 있었다. 권세 있는 귀족 가문이 종교개혁과 연합하였다. 게다가 군대의 총사령관(D‘Andelot)과 해군제독(Caspard de Coligny) 역시 개혁교도가 되었다.

13.3 비밀회의가 핍박과 사형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1559년에 열렸다. 프랑스 교회들은 갈리카나(Gallicana) 신앙고백서(프랑스신앙고백서)와 프랑스 교회질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반대가 극심하였다. 수천 명이 가장 소름끼치는 방법으로 처형을 당하였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이들 순교자들의 신앙은 일반 백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하고 번성하더라.”(12:24,한글KJV).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간의 대립은 두 가문을 중심으로 양극화 되었다. 로마가톨릭은 괴이서스(Guises) ()를 후원한 반면 위그노 신자들은 더 바우르본(De Bourbon) ()와 더 콜리니(De Coligny) ()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위그노 신자가 된 귀족의 회원에게 지원을 받았던 위그노 신자의 모의는 왕에게 영향력을 얻으려고 시도하는(1560) 괴이서스(Guises)()에 대항하였으나 밀고로 인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칼빈은 이 모반의 동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부당하게 고소를 당하였다.

해마다 칼빈은 프랑스에 있는 신실한 교회에게서 놀랄만한 소식들을 들었다. 가장 감동적인 방법으로 그는 그들을 위로하고 복수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더 이상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라며 설득하려고 애썼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2:19). 바로 여기에 우리의 견고한 소망을 둘 수 있다고, 그가 기록하였다. 칼빈은 그들의 무기는 그들의 신앙고백이며 고난이었다고 그들을 경계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올 것이다. 그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 그리고 이러한 약속들을 하신 그분을 항상 기억하라(62:1,6,7). 압박을 당하는 십자가가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로 우리에게 놓여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13:11).

암브롸스(Ambroise) 모의를 준비하는 동안, 칼빈은 사령관 더 콜리니(De Coligny)에게 경고하였다. “우리의 백성들에 의해 흘린 첫 번째 핏방울은 피의 홍수가 될 것이며 그것은 온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칼빈은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했던 것을 신자들이 거부하고서 모반을 일으킬 권리를 가졌다는 주장을 부정하였다. 그는 정부에 대해 어떤 정도의 폭력이라 할지라도 동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행정당국을 책임지고 있는 모든 관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 높은 상관이 박해를 명령하였을 때, 더 낮은 행정관리들은 동조하기를 거절하라고 권고하였으며 신앙을 지키라고 촉구하였다. 그의 강요(Institutes) ⅩⅩ25-32절에 합법적인 권위에 반대하는 폭력에 대해 단순한 논리조차 포함시키지 않았고; 고난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에 관한 일반적인 논리도 마찬가지로 기술하지 않았다. 큰 확신을 가지고 칼빈은 신실한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이야기하였다. ‘주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고통 중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때에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칼빈은 결코 폭력이나 반란을 권장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 때문에 대단히 겸손하라고 촉구하였으며, 구원을 위하여 모든 신자들에게 간절히 기도하자고 간청하였다(37:1-11).

13.5 위그노의 전쟁들(The Huguenot Wars) 1562-1598

a. 위그노 전쟁들은 파시(Vassy)의 대학살과 더불어 시작했다. 프란코이스 더 괴이서(Francois De Guise)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가는 도중이었다. 시편을 노래하고 있는 위그노신자들 때문에 불쾌하고 기분이 상하게 되자, 그는 부대에게 무방비상태의 그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위그노 신자들은 루앙과 리용을 정복하는 동안 물품으로 대응하였다. 칼빈은 승인하지 않았다. 그는 리용(Lyons)의 성직자에게 편지하였다. “만일 당신들이 우리의 큰 슬픔을 듣게 될 것이라는 그 말을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당신 자신과 온 기독교세계에 대한 배신이 될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스스로 군인이나 지휘관이 되게 하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말씀의 사역자에게 합당한 행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강단을 떠나 전쟁의 무기에 손을 내밀었다면 그것은 더욱더 야비한 짓입니다.”

b. 쓰라리고 잔인한 시민전쟁이 빚어낸 결과, 많은 피를 흘렸고 추수는 망쳤고 가축은 도단 당하였으며 소유는 징발 당하였다. 더 콜리니(De Coligny)의 초상화는 교수대에 못 박혀졌고, 죽은 채로든 산 채로든 그의 체포에 높은 현상금을 걸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성 게르마인의 평화가(the Peace of St. Germain,1570) 안식을 가져왔다. 위그노 신자들은 파리와 다수의 다른 장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도시들에서 집회를 허락받았다. 더 콜리니(De Coligny)까지도 궁정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c.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끔찍한 사기라는 것이 드러났다. 나바라의 헨리(Henry of Navarre)와 왕의 누이 마가렛의 결혼은 미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화해의 축일로 발표되었었다. 그러나 피의 결혼으로 돌변하였다(1572.9.23~24 - . 바르톨로뮤의 날의 학살). 더 콜로니((De Coligny)는 살해당하였고 프랑스로 건너간 많은 위그노 신자들은 무자비하게 살육을 당하였다. 위그노 운동은 결코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회복되지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반(Counter)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암울한 시기였다. 이 대학살의 선동자들은 모두 폭력에 의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d.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1598)은 위그노 신자들에게 교회와 학교를 세울 권리를 주었다. 그들은 또한 정부 요직에 임용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라 로첼러(La Rochelle)시를 포함하여 다수의 요새화된 도시가 그들에게 주어졌다. 위그노는 로마 가톨릭의 다수 한 가운데서, 작지만 영향력있는 소수를 이루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군대와 요새화된 도시들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말하자면 한 국가 안에 있는 하나의 국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낭트칙령은 독일의 아우스부르크 평화(1555)의 경우에서처럼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자유를 이단에게 주었다. 그리고 하나의 국가 안에 종교가 하나 이상 있을 수 있도록 허락받게 되었다. 이것은 중세의 정치와 종교적인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13.6 왕 루이스 13세 치하에서, 언급한(relative) 평화의 기간을 끝낸 악명 높은 추기경 리첼리우(Richelieu)가 있었다. 그는 위그노를 단번에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음모를 꾸몄다. 위그노의 정치적인 세력은 그들의 최후의 거점이던 라 로첼러(1627-28)의 함락으로 막을 내렸다. 영국과 네덜란드 해군의 선박들이 이 도시를 포격하는데 합세하였다. 유럽 정치역학의 아이러니는 개혁주의 네덜란드 선원으로 그들 자신의 동료인 신자들과 싸우게 만들었다. 참으로 정치관계와 무역은 종교적인 확신보다 더 중요해 보였다.

13.7 루이스14세가 통치하는 동안, 무력박해, 살인, 핍박 때문에 위그노 신자로 생활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마침내 낭트칙령을 1685년에 공식적으로 철회하게 되었다. 50만 명의 피난민들이 프랑스를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 안에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아 떠났다. 그러나 카미사드(Camisards)는 세베너스(Cevennes)를 에워싼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의 도움을 받아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하였다. 지중해 가까운 요새인 투르 더 콘스탄스(The Tour de Constance)는 특별히 여인들을 가두어두는 일에 사용되었다. 어떤 마리 두란트(Marie Durand)라는 여인은 17307월에서 17684월까지 여기에 붙잡혀 있었다. 뜨개바늘로 그 여인은 인내하라(Resistez)’는 단어를 벽을 긁어 새겨보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조금도 아닌 이러한 백성들에게 고난을 받으려는 대단한 자원함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을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게하셨다(5:3).

13.8 루이스 14세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다시 국가교회의 위치로 들어올렸다. 하나의 왕, 하나의 법, 하나의 주민(un roi, une loi, une foie). 프랑스 혁명 중에 프랑스에서 왕족의 몰락은 또한 이 도시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14. 종교개혁의 확장: 스코틀랜드

14.1 파트릭 헤밀톤(Patrick Hamilton, 1504-1528)은 스코틀랜드 순교자였다. 그는 사제가 되려고 공부한 귀족계층의 한 사람이었지만 루터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고 선고를 받았으며,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종교개혁의 밀물을 잠재우려고 하루 동안에 모든 것을 집행하였다.

14.2 존 낙스(John Knox, 1513?-1572) 역시 사제로 임명 되었다. 그는 이단의 처형을 목격하게 된 후에 종교개혁신앙으로 회심하였다. 19개월 동안 그는 프랑스전투 갤리선 뱃전의 죄수가 되었다. 한번은 그의 배가 성 안드레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보이는 스코틀랜드 연안을 따라 항해하였다. 그는 그의 동료 갤리선 노예들의 한 사람에게 가리키며 말하였다. “보시오, 어느 날, 내가 저 교회에서 다시 설교하게 될 것이오.” 그런데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 개신교도 낙스(Knox)는 전쟁 포로를 교환하는 동안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존 캘빈을 제네바에서 만났고 마침내 그의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강하게 종교개혁을 촉진시켰으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를 받아들였던 것은 낙스의 영향 때문이었다. 낙스는 여자(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나라의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악하고 비성경적이었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는 스코틀랜드가 이스라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 캘빈은 이러한 불같은 스코틀랜드의 세례요한의 생각을 완화시키려고 하였다.

낙스는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로마 가톨릭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죄 된 생활을 경고하였다. 그의 비명은 여기에 세상의 그 누구도 대면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묻혀있다.”라고 씌어있다. 특별히 이 사람은 스코틀랜드에서 개혁 신앙을 일으키는데 도구가 되었고, 온 생명을 발효시킨 밀가루 서말에 감추인” “누룩이 되었다(13:33). 그의 조각상은 제네바에 있는 종교개혁의 국제적인 기념물에서 파렐, 캘빈, 그리고 베자의 조상(彫像) 다음에 서있다.

15. 종교개혁의 확장: 영국

영국 왕 헨리 8(1491-1547)는 루터에 반대하여 소책자를 썼다. 교황은 이러한 노고에 현재도 여전히 영국 여왕의 공식 칭호의 일부분인 Defensor fidei(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수여함으로 보답하였다.

이런 충성의 증명에도 불구하고 헨리 8세는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기를 거절하자 교황의 지배로부터 영국 교회를 쉽사리 옮겨버렸다. 헨리는 자신을 교회의 수장으로 임명하였다(1531). 이런 식으로 영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영국성공회(Anglican) 혹은 감독의(Episcopal) 국가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에서 자유행위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진정한 종교개혁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로마 가톨릭교도(교황의 권위를 여전히 인정하는 사람들)와 루터의 추종자들(교회의 수장으로서 왕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개신교도)은 박해를 당하였다. 때때로 그들은 같은 교수대에 서로 나란히 매달렸다.

15.2 켄터베리의 대주교로서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단순히 헨리 8세의 이혼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만 아니라 개혁에도 동정적이었으며 캘빈과도 서신을 왕래하였다. 경건한 왕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동안, 크렌머는 교회를 진정한 개혁을 향해 접근하도록 시도하며 영국성공회에 여러 가지 개혁을(39조와 공동기도서) 도입하였다. 피의 메리의 반-종교개혁 동안에, 크렌머는 마찬가지로 희생자가 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그의 오른팔은 불속에 넣었다. 그 이유는 약해진 순간에 개혁신앙을 철회하는 표시를 그의 손으로 했기 때문이다.

15.3 헨리 8세가 강제로 신교도가 되도록 했던 반면 메리 튜더는 강제로 다시 로마 가톨릭교도가 되게 했다. 이런 과정은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었을 때 반복되었다. 30년이 안 되는 동안 세 번의 (가짜) 개종 모두가 군주의 즉위로 사람들에게 강제로 되었다.

15.4 홀란드와 독일과 폴란드에서 온 많은 피난민들이 에드워드 6세와 크렌머의 영국에서 안전한 처소를 얻었다(그들 중에 존 아 라스코, 1499-1560). 왕족의 명령으로 어거스틴(Austin)수도회 수사의 수도원이 1550724일에 독일 난민에게 제공되었다.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즉위 동안에 유럽 대륙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영국으로 온데 반하여, 메리 튜더가 다스리는 동안 피난민의 행렬은 다른 길을 따랐다. 그리고 다시금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동안 많은 사람들은 한 번 더 되돌아왔다. 자주 존 캘빈의 과거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처럼 이 일은 영국에서 칼빈주의의 영향력을 강력하게 하였다. 영국 종교개혁의 더 나은 지원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으로부터 왔다.

그 당시에 영국은 잘 발달된 도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주민이 약 2백만쯤이었다(스페인은 3백만, 북부와 남부 네덜란드는 대략 2-3백만 사이였다). 런던(London) 시민은 약 10만 명쯤이 있었다. 주택은 보잘 것이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맥주 오염물, 비계, 잔밥, 뼈다귀를 지푸라기로 덮은 진흙바닥에 대해 언급하였다.

15.5 영국성공회는 로마와 절교에도 불구하고 결코 참된 개혁교회가 아니었다. 두 가지 주요 분파로 계급조직을 강하게 유지하였다.

- 고교회(High Church) - 사도적인 계승을 보존하는 감독하는 교회 정부로; 성찬예식; 교리에 있어서 펠라기우스.

- 저교회(Low Church) - 39조와 공동기도서를 유지함

16,17세기 중 고교회(High Church)는 잔인한 박해를 선동하는 자였다. 이 거짓교회는 신실한 신자를 핍박하였다. 그 이유는 왕이 신앙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맹세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15.6 비록 대부분이 남았지만, 청교도(순수한 교회, 순수한 생활)로 알려졌던 이들 개혁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영국성공회를 떠났다. 청교도(Puritans) 가운데서 우리는 찾는다.

- 장로회는, 감독의 교회 정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역 당회에서 권위를 갖는 한 (지방의) 장로회를 유지하였다.

- 조합교회주의자(congregationalists), 그들은 지역회중에게 장로회가 그들에게 기꺼이 주려고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허락하였다. 그들은 또한 독립주의자(Independents)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이 시민정부만큼이나 교황과 성공회 주교의 영향력에서 독립을 유지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수년에 걸쳐 개신교 진영은 자기 나라에서 자주 박해를 당했으며 그들의 모국을 떠났다. 어떤 이들은 네덜란드로 가서 레이든과 미델부르크와 같은 도시에 정착하였다. 후에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인 Pilgrim fathers(메이플라워호를 탔던 102명의 영국 청교도를 가리킴, 역주)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메이플라워(Mayflower)를 타고 항해하였다. 1620년 새로운 세계를 향해 Pilgrim fathers가 떠나려고 하였을 때 그들은 델프샤번(Delfshaven) 부두의 자갈밭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마치 바울이 밀레투스의 해변에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말이다.(20:36)

15.7 17세기 동안 (성공회) 왕권과 (퓨리탄) 의회 간의 대립은 시민전쟁의 원인이 되었다.(1620).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였다. 거기에서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것을 작성하였다.(1646-1648). 이 영국 개혁 고백서는 북미 장로교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종교개혁을 세계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는 영국에서 개혁적인 영향력의 절정으로 볼 수 있다. 신교(Protestantism)는 중요한 정치적인 힘이었다. 거기에는 거의 그 시대 동안에는 거의 완벽한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

15.8 챨스 2세의 통치 동안 성공회는 국가교회의 제 역할로 회복되었다. 침례교도인 땜장이 존 번연(John Bunyan)12년간 감옥에 갇혔다. 그는 한 그리스도인이 천상의 예루살렘까지 가는 여정을 풍유한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라는 유명한 책의 저자(著者).

15.9 스웨덴의 구스타부스 아돌퍼스(Gustavus Adolphus)왕이 독일에 있는 루터파 개신교를 로마가톨릭의 합스부르크(Hapsburg) 통치에서 구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후(prince) 윌리엄 3, 홀란드의 스타드홀더(Stadholder)는 개혁파 개신교를 프랑스왕 루이스 14세와 동맹하여 네덜란드의 존립을 위협했던 로마 가톨릭의 제임스 2세에게서 구해냈다(명예로운 혁명[the Glorious Revolution], 1688). 1689년 관용의 조례가성공회와 그 반대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로마 가톨릭과 소시니안파는 그 조항에서 명백하게 제외되었다. 이런 법령은 영국개신교의 특성을 지켰다.

- 반대자나 비국교도들은 성공회 국교회에 속하지 않은 개신교 시민이었다.

- 1960년에 켄터베리의 대주교는 공식적으로 바티칸을 방문하였었다. - 1531년 이래로 처음.

16. 네덜란드 종교개혁: 개관

a. 1517-1530 루터교의 영향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남

b. 1530-1540 재세례파 우세

c. 1540-1550 캘빈의 영향력과 칼빈주의 종교개혁

d. 1550-1556 외국 도시, 특별히 독일에서 개혁 피난민 교회의 설립의 기원. 남부 네덜란드에서: 개혁파 교회의 박해

e. 1566-1572 북부 네덜란드에서 개혁파 교회의 박해

f. 1572-1586 주님은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129). 하나님께서는 북부 네덜란드에서 힘을 스페인에서 오렌지(Orange)로 옮기신다. 개혁파 교회를 위해 증진된 자유. 자유주의와 투쟁.

g. 1586-1619 알미니안과의 투쟁. 도르트 국가 총회, 1618-1619.

 

17. 남부 네덜란드 종교개혁

17.1 그리스도의 시대에 바리새인들처럼 로마가톨릭 지도자들 역시16세기에 자신들의 교리적인 체제로 인해 소경이 되었다. 그들은 참된 지식의 열쇠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값없는 의를 선포한 하나님의 은혜를 치워버렸다(11:52). 이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명령과 금지의 책으로만 읽을 수 있었다. 그들 자신의 이설들은 율법의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사람을 응징하며 한 가지 잔인한 결정에서 또 다른 결정을 그들에게 강요한다.

17.2 하나님과 교회에 관한 학문적인 사고체계의 마법에 사로잡혀, 종교재판관들 특히 루베인(Louvain)의 신학자들은 챨스 5세의 칙령을 집행하기위해 맹목적으로 잔인하게 그리고 아무도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실행하였다.

17.3 어거스틴 수도회(특별히 루터가 속했었던)의 수도원들은 종교개혁의 중심이 되었다. 특별히 안트웝(Antwerp)의 어거스틴 수도원이 으뜸이 되었다. 이들 수도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교되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쁨으로 그의 이름을 고백하였고 로마 가톨릭의 바리새파(pharisaism)의 마귀적인 덫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우리 구세주께서 16세기 수난의 시기에 마치 로마의 황제 치하에서 박해 동안에 가 하셨던 것처럼, 죽기까지 기쁨과 견고함과 같은 하늘의 은사들을 주님의 성령으로 부어주셨다(하이델베르크 주의 날 19).

17.4 네덜란드의 개혁자는 귀도 더 브레스(Guido De Bres, 1522-1567)였다. 그는 몬스(Mons)에서 태어났다. 지금 벨기에의 남서부 지방이다. 그는 떠밀려 영국으로 도피하게 되었고 나중 그도 독일에 머물렀다. 결국 그도 제네바에서 캘빈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Tournay의 회중의 목사가 되었다. 치안판사들(magistrates)은 공적인 모임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몹시 불쾌하여했기 때문에(소위 성가대, 귀도 더 브레스가 그것이 재세례파의 예식에 속하는 사람을 상기시킬 것을 염려하여 강력하게 경고했던 하나의 관례), 그들은 개혁파 시민들을 거칠게 다루었다. 1561111일 저녁에, 군주가 개혁 회중이 혁명적인 재세례파의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벨직 신앙고백서(더 브레스가 주된 저자임) 사본 하나가 Tournay에 있는 성벽위로 던져졌다. 그러나 박해는 극심했다. 그의 동료 직분자인 페러그린 더 라 그랑어(Peregrin de la Grange)와 함께 더 브레스는 발렌시네스(Valenciennes)에서 1567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a. 더 브레스의 어머니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귀도가 사제가 되도록 허락되기를 열렬히 기도하였었다. 이러한 어머니다운 기도는 한 수사(monk)의 불같은 설교의 결과였다. 그녀의 기도는 응답되었으나 기대했던 대로는 아니었다. 그녀가 죽기 전에, 더 브레스는 가장 감동적인 작별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썼다.

b. 두 퓨르(Du Four)라고 부르는 성가대의 선동자는 개혁 목사 더 브레스가 너무 겁이 많고 너무 느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인들이 닥쳤을 때 더 브레스는 그의 회중과 남았지만 반면 두 퓨르는 목숨을 위해 달아났다.

 

17.5 로마 가톨릭교회는 근원적으로는 사도의 교회였지만 주홍빛 짐승(17:3)이라 할 수 있는 신실치 못한 치안판사에 올라탄 음녀가 되었다. 음녀는 성도들의 피를 마셨다(17:6).

17.6 귀도 더 브레스와 더불어 십자가 아래 교회(개혁교회가 그 당시에 알려졌던 것처럼)의 지도자(organizers) 몇 사람이 있었다.

a. 카스파르 판 더르 헤이더(Caspar van der Heyden)- 얼마동안 안트웝에서 목사였다.

b.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 - 처음에는 무신론자, 후에 플랑드르(Flanders)의 순회 설교자, 오랜지의 윌리암을 위한 궁정 목사(chaplain), 그리고 레이든(Leyden)에서 교수.

c. 페트루스 다테누스(Petrus Dathenus, 1531-1588) - 플랑드르(Flanders)에서 순회 설교자, 겐트(Ghent)에서 회중의 목사. 그는 네덜란드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번역하고 네덜란드어로 시편찬송(psalter)을 출판하여 교회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시편찬송은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오고 있다.

 

17.7 16세기 동안에 괸트(Ghent)시는 파리시보다 더 컸다. 그룬 판 프린스테러(Groen van Prinsterer)는 이 시의 시민을 극단적으로 개혁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강제로 플랑드르(Flanders)가 자기들의 모범을 따르도록 하기를 원하였다. 부르고마스터르 헴뷔서(Burgomaster Hembyse)의 명령 아래 그리고 그들의 목사 다테누스(Dathenus)의 축복을 받으며, 플랑드르 지방의 많은 마을에서 평화로운 로마 가톨릭 시민을 상대로 폭력이 자행되었다. 온통 분별없고 무감각한 난동 속에서 교회는 불타고 수사는 고문을 당하였고 수도원은 폐허가 되었다. 훔친 물건은 시의 자산에 보태려고 팔려졌다 교회는 부대의 주둔지와 마구간으로 변하여 있었다. 다테누스는 군주 오렌지의 윌리엄이 필요하다면 군사력으로 로마 가톨릭 도시들에 순수한 종교를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기를 원하였다. 교회는 개종하게 하려고 치안판사의 칼을 사용해야 한다고 다테누스는 주장하였다.

다테누스는 그의 과업이 예루살렘의 요시아 왕의 과업과 동일하였다는 잘못된 표현 아래서 있었다. 그는 모든 우상의 제단을 파괴시켰다. 군주 윌리엄은 두 번 그 도시를 방문하였지만 두 번 다 다테누스는 그를 만나기를 거절하였다. 부르고마스터르 헴뷔서는 배반자로 돌아섰다. 그는 그 도시를 스페인 파르마(Parma) 제독에게 넘겨주기를 원하였다. 그는 그의 동료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후일에 다테누스는 노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a. 다테누스는 자신과 요시아 왕을 비교하는 심각한 잘못을 범하였다.; 요시아는 그의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서 우상숭배는 설교와 권징을 수단으로 해서 제거되어야만 한다.

b. 힘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치안판사의 과업이 아니다. 그룬 판 프린스테러(Groen van Prinsterer)는 수단이 옳다면, 거짓된 종교를 반대하는 것은 선한일이다고 의견을 말하였다. 교회는 전쟁 무기에 의해서 세우지지 않는다. 진리는 폭력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외부인들은 성령님의 검과 그들에 의해 마음으로 사랑의 계명을 완수함으로 쟁취된다.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의로운 행위에 기대될 수 있다. 그 치안판사는 질서있는 시민생활을 어지럽히려고 위협하는 악행자에게서 그 시민을 보호하는데 그 칼을 사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13:4 - “선을 위하여”). 그 치안판사는 그 칼을 그리스도의 교회가 복음을 설교하는 정치적인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데 사용해야만 한다.

c. 칼빈은 국가와 교회, 사회와 교회적인 문제의 차이와 구별을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이러한 통찰력은 종교개혁의 열매이다. 또한 제후 윌리엄(William) 역시도 헴비서(Hembyse)와 다테누스(Dathenus)의 지도 아래 겐트(Ghent)의 극단적인개혁시민이 했던 보다 훨씬 더 이런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제후의 중용의 관점은 거의 소수만이 이해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d. 다테누스는 지나치게 자주 나는 기드온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의 예를 오렌지(Orange)와는 대조적으로 플랑드르(Flanders)에서 일어난 시민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였다. 이제 나는 이것이 신앙이 심겨지는 참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회중에게 마음의 참된 회개를 설교해야하는 요점을 망각한 채, 또한 나는 지나치게 많이 외형적인 예식을 강조하였다.”

e. 부르거스의 목사이며 나중에 프라네커르(프리슬랜드)의 대학에서 교수가 된 리디우스(Lydius)는 견해를 말했다. “이 사람들(다테누스와 그의 동료들)은 종교개혁 중에 플랑드르와 브라반트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

17.8 성상파괴(Iconoclasm); 형상의 파괴 -1566. 플랑드르에서 출발한 열광적인 개신교도는 지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 있는 성당과 조각과 그림을 파괴하며 시골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런 열광주의는 개혁된 성경적 원리보다는 순결에 관한 재세례파주의자의 사상에 의해서 끌려 다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와 수도원에서 했던 것처럼 로마가톨릭 시민을 약탈하였다. 누구도 감히 그들을 막으려했다가는 폭력을 당했다. 사실은 이러한 행동들은 폭동(civil rebellion)에 해당되었다. 오렌지의 제후는 세 명의 주된 선동자를 안트웹에서 교수형을 명령하였다. 스페인의 알바(Alva)장군은 이 폭동으로 주민의 모든 혜택을 금지하는 구실을 삼았다.

17.9 로마는 군사력으로 다시금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지배권과 권세를 다시 획득했다. 많은 시민들은 북부 네덜란드로 피했다. 남쪽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안트웹(Antwerp)은 상업적인 중요성을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도시가 된 암스테르담에 빼앗겼다.

18. 북부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

18.1 루터교도 가운데서는 아무도 독일에서 순교를 당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보름스 칙령(1521)이 독일의 통치자에 의해서 대부분이 무시되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에서의 박해는 너무 극심하여, 1530년까지는 루터교 종교개혁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재세례파가 큰 무리를 얻으며 네덜란드 안을 휩쓸었다. 뮌스터(Munster)의 멸망 이후로 이 운동은 외적인 많은 세력을 잃었으나 오늘날 사회에서조차도 눈에 띄는 저변에 남아있다.

18.2 1555년까지 칼빈의 영향력은 북부네덜란드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이 되었다. 이런 영향력은 칼빈의 작품(강요)의 형식과 그의 제자들(. 알더콘더의 마르닉스)과 남부 네덜란드에서 온 개혁파 난민들 가운데서 나타났다.

네덜란드에서의 상황은 루터교 목사들에 의해 추적당하여 칼빈주의자(Calvinists)들을 도시에서 도시로 도피하게 만들었던 독일에서의 상황과 다소 달랐다. 비록 네덜란드(Dutch) 인구의 10퍼센트를 넘지 않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종교개혁에 가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것은 네덜란드 국민이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가장 풍성하게 자랄 수 있었던 하나님의 들판이 되기에 다른 민족들보다 더 적합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런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그들의 나라에 있는 autos-da-fe에 출석하였던 스페인 사람은 네덜란드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다음 세기에 오히려 열정의 다른 유형, 말하자면 무역과 상업에 있어서 네덜란드 국민의 맹렬한 관심을 주목한 사람은 그룬 판 프린스테러(Groen van Prinsterer)였다. 그는 물었다. “맘몬(mammon)은 네덜란드의 바알이 아닌가?” 참으로 북부 네덜란드에서 종교개혁의 거대한 중요성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신 기쁨의 기초 위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18.3 복음의 축복은 네덜란드 국민에게 아주 넘치도록 베풀어졌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만이 아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엄청난 배은망덕이다. 신적인 인자의 큰 부요함에 이어 인간의 부패의 구렁텅이 또한 네덜란드(Holland)에서 드러났다. 네덜란드(Dutch)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많은 평행을 보여준다(106:7~).

주님께서는 네덜란드에 많은 재앙을 내리셨다. 전쟁들, 홍수들, 기근, 질병, 종종 흑사병이라고 했던 치명적인 질병과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재난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치시도록 금식과 기도의 날이 특별히 개최되었다.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3:6).

18.5 첫 번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본토가 아닌 외국 땅에 세워졌다. 이들 첫 교회는 피난민교회였다.

a. 런던(영국): 회중은 과거에 아우구스티누스 탁발수도회 수사들의(Austin Friars) 수도원에서 모였다.

b. 엠던(독일): 이 도시는 "하나님의 압박을 대비한 여인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교회의 꼭대기는 화란어로 새겨진 문장과 함께 거친 바다에 있는 한 척의 작은 배를 보여준다. "Godts Kerck, verstroyt, verdreven, heeft Godt hier rust ghegheven" (하나님의 교회가 내쫓기고 흩어졌다가, 여기서 안식처를 얻었다). 1560년 겨울에 약 350명의 피난민이 얼음을 건너 도착하였다. 한 빵장수는 그들 중의 30명을 보살펴주었다.

c. 베젤(독일)

d. 프랑크푸르트(독일)

 

18.6 외국에서 네덜란드 피난민교회의 조직이 보다 자세하게 되었다:

- 1568 베젤 수도회(Convent of Wezel)

- 1571 엠던에서 첫 국제 대회. 이 대회의 강령 1항은 다음과 같다. 어느 교회도 다른 교회 위에 군림할 수 없고, 말씀 사역자나 장로나 집사도 다른 직분 위에 군림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지배권에 관한 어떤 의심이나 유혹에 대해 경계해야할 것이다.(현재는 캐나다 개혁교회의 교회질서 74)

18.7 수난의 40년은 80년 전쟁(Groen van Prinsterer)에 이어졌다. 네덜란드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권위에 대항하여 반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학살당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쟁무기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방법으로, 극심하게 박해받는 교회가 주님의 보좌 앞에 올려 보낸 많은 탄원에 응답하여, 주님께서는 친히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일어나셨다.

80년 전쟁은 개혁파 신자들에 의해 싸워졌다, 재세례파에 의해서 주장되었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진전시키려는 투쟁으로가 아니고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바랐던 것처럼 단순히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치적으로 종교의 자유(political-religious freedom)를 얻기 위해 냉정한 칼을 가지고 벌인 싸움이었다.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의 자유를 말씀하지 않으신다.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신앙의 자유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신앙의 자유가 있어야만 한다. 정치적인 종교의 자유는 하나님의 큰 선물이다. 교회역사의 첫 세기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선물을 얻지 못하였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많은 분야가 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이런 자유를 갖지 못하였거나 잃어버렸다. 이런 자유의 선물은 쉽사리 우리에게서 빼앗길 수 있다. 아무리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자유주의를 표방할 수 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이 협의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만큼이나 압제적이다.

18.8 1572년에 올가미가 깨어졌다(124). 주님의 압제당한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 하나님께서는 정치적인 힘을 (스페인 왕) 필립2세에게서 나소(Nassau)의 윌리엄(오렌지의 제후)에게로 옮기셨다. 오렌지(Orange)는 무장된 반란을 개시하지 않고 오렌지의 군주로서 그는 하나님의 교회의 방어에 그의 정치적인 힘과 권위를 사용하기 위한 힘과 기회를 얻었다. 그의 노력은 넘치게 복을 받았다. 네덜란드에서 주권이 있는 군주로서 그는 모든 네덜란드인, 특별히 이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정치적인 권리와 자유를 보장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 군주로서 그는 사도적인 말씀을 의뢰하였다. 즉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복종한 것이다(5:29). 그는 언제나 그의 주 스페인 왕 필립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주권군주로서 반란이나 유격대 투사처럼이 아니라 16세기에 확립된 대로 헌법에 맞게 군대를 모집하였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압제당하는 그의 교회를 위해 개입하셨다. 그는 오렌지의 제후를 기꺼이 지원할 홀란드와 젤란트의 국가를 만드셨다(도르트레흐트, 15727).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혁명의 결과로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렌지의 윌리엄에게 교회를 위한 큰 축복과 더불어 그의 의무와 직분을 이행할 기회를 주셨다. 1572년 이전까지의 오렌지의 모든 군사적인 계획들은 실패하였으며 그 자신은 그의 아버지의 성채에 도망자로 사는 신세가 되었다. 1572년 이후로 그는 북부 네덜란드에 대한 정치적인 지도력을 돌려받았다.

18.9 1572년에서 1586년은 네덜란드에서 개혁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보았다. 네덜란드(Dutch)역사에서 처음 시기동안 교회의 직무(offices)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대로 역할을 하였다. 한 국제적인 대회는 네덜란드 땅에서 소집될 수 있었다. 1574년 도르트 국제 대회이다. 더 많은 도시들이 종교개혁에 가담하였으나, 오랜 시간동안 많은 지방이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 아래 머물게 되었다.

18.10 도르트레히트에서 있었던 홀란드 국가의 첫 회합 동안 예배의 자유의 원리를 고수하기로 결정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좋은 출발은 이듬해 로마 가톨릭 신앙이 금지되면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지배하는 교회, 그래서 가장 특혜를 가진 교회가 되었다.

18.11 자유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의 libertas(자유)와 국가의 자유에 대한 신념으로 내쫓겼다.

가장 영향력있는 자유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은 디르크 폴커르쫀 코른헤르쯔(Dirck Volkertszoon Coornheert, 1522-1590)였다. 그는 서기로 그의 경력을 시작하여고 나중에 할렘에서 시 장관(town secretary)이 되었고 최후로는 홀란드의 국가 장관(secretary)이 되었다. 그는 강력하게 반 칼빈주의자가 되어 홀란드의 세바스찬 프랭크(Sebastian Franck)"라고 인식이 되었다. 그는 그 자신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그의 영혼을 위한 평화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피조물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보혈 안에서 그의 위로를 찾지 않았다.

쿤헤르트(Coornheert)는 알미니안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 이단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화해를 자주적인 사람에게 단지 부분적으로만 가치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 자유주의자는 단지 죽은 교리와 메마른 글자를 담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벨직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거절하였다.

18.12 알미니안과의 투쟁 - 배경

a. 알미니우스(제이콥 헤르만드스존 알미니우스, 1560-1609)는 고아였고 그는 암스테르담 시의 배려로 공부할 수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목사로서 그는 다른 목사 페트루스 플랜시우스(Petrus Plancius)와 갈등하게 되었다. 후에 알미니우스는 레이든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고(promote), 거기서 그는 고마루스(Gomarus)의 동료가 되었다. 1600년 전에는, 도시와 주에서 극소수의 목사들만이 인본주의(반펠라기안(semipelagian))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설교하였지만 1600년 이후로 이 이단교리는 레이든 대학에서 알미니우스의 강의에까지도 배어들었다.

b. 고마루스(Francis Gomar, 1567-1641)는 알미니우스의 최고의 적수였다. 그는 부르거스(Bruges)에서 태어났고(남부 네덜란드), 스트라스부르그와 다른 곳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우르시누스의 제자였으며 레이든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후에는 그로닝겐(Groningen)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c. 알미니우스에 대한 고마루스의 논쟁은 펠라기우스에 대한 어거스틴의 논쟁 그리고 에라스무스에 대한 루터의 논쟁과 동일하다. (Remonstrantism으로도 알려진) 알미니안의 교훈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만일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한 일을 행하기로 결심한다면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선한 사람을 선택하신다.

2.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 또한 그에게 베푸실 수 없다.

3.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기능할 수 있다.

d. 투쟁은 더욱 더 곤란하게 되었는데, 정부가 간섭하였기 때문이다.

e. 투쟁의 전개:

1. 1608: 알미니우스와 고마루스는 고등 회의(High Council) 전에 만났다. 고마루스는 그가 만일 알미니우스의 견해였다면 감히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교회에 관한 문제들은 교회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2. 1609: 알미니우스는 결핵으로 죽었다. 요하네스 위텐보거트(Johannes Uytenbogaert)는 새 지도자가 되었다. 위텐보거트는 오렌지의 제후 마우리스(Maurice)를 위한 궁정목사(chaplain가 되었다.

3. 1610: 위텐보거트와 다른 40명의 목사들은 홀랜드 정부에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4. 1611: 페스투스 호미우스와 다른 개혁신앙의 옹호자들은 항의서에 반대하여(contra-remonstrance)로 답하였다.

5 깊이 자리 잡은 종교적인 미움 때문에 두 파벌간의 투쟁은 잔인하고 폭력적이 되었다.

6. 1617: 마우리스 제후는 양측을 불러 그가 1586년에 맹세시켰던 직무에 대한 엄숙한 맹세를 다시 읽어보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개혁신앙을 방어하려는 의지를 재개하였다. 가득한 수행원과 함께 그는 헤이그(The Hague)에 있는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였다. 국가의 국무장관인 판 올던바르너펠트(Van Oldenbarnevelt)는 투옥되었으며 후에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7. 암스테르담의 회중은 자신을 황제교황주의(홀랜드의 지배계층(states of members)에 의해서)와 알미니안주의 교훈의 영향에서 해방시킨 첫 번째 교회였다.

8. 1618: 한 국가 총회가 1113일에 도르트레흐트에서 소집되었다(도르트).

18.13 알미니안주의자들과 투쟁: 도르트총회

a. 의장은 리우바르던(Leeuwarden)에서 목사이며 제후 마우리스의 삼촌인 윌리엄 루이스의 친구인 요하네스 보거르만 목사였다. 많은 외국의 신학자들이 국회(the States-General)18명의 위원과 마찬가지로 참석하였다. (자기의 나라에 있는 신실한 자들을 박해했던) 영국 왕은 감독 한사람을 대표로 보내서 참석하였다.

b. 총회(Synod)는 새로운 성경번역을 출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번역-the Staten Vertaling-1637년에 출판되었다. 이 번역본은 네덜란드에 있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크나큰 선물이었다. 특별히도 그 난외주(주석들) 때문이다. 그것은 화란민족의 생활과 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번역본의 제목표지는 아직 교회와 국가 사이의 성경적인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이것을 흠정역과 비교하라).

c. 항의자(Remonstrants)들은 총회에 참석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총회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개혁파에 반대하려고 일어난 한 교파(a party)로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총회는 관습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위에서 그들의 위치를 정당화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이 논쟁에서 판결을 내려주기를 요구하였다. 총회는 많은 인내를 가지고 그들에게서 들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을 쫓아내고 말았다.

d. 1. 161956: 도르트 신조 - 항론파에 반대하는 5개 조항

- 1: 신적인 선택과 영벌(reprobation)

-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인한 사람의 구원.

- 3-4: 사람의 부패, 하나님께로 그의 개종,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방법

- 5: 성도의 견인

2. 도르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신 기쁨이라는 성경적인 교리를 유지하였다. 설교를 멈추기를 거절한 항론파 목사들의 교리는 나라에서 추방되었다. 프랑스로 떠났던 많은 사람은 자주 로마가톨릭교회로 되돌아간다. 1619년에 항론파의 협회는 안트웝의 시에서 조직되었다.

3. 교회질서, 신앙고백서들, 그리고 예식양식은 수정되었다.

e, 국가총회(The States-General)는 도르트 교회질서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를 위한 완전한 자유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회는 어느 정도까지는 국가에 의존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f. 1618-1619년 도르트 이후, 국가총회가 1816년까지는 개최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시기: 1648 - 1795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와 투쟁하는 교회

1. 서론 - 계몽운동

1.1 개관

- 3세기: 이교도의 신앙이 지배하다.

- 4세기: 이교신앙이 유럽에서 추방됨(380).

- 14세기: 인문주의와 르네상스 가운데서 그리이스-로마의 이교주의의 부활.

- 16세기: 종교개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감

- 17세기: 인간의 경건을 강조함

- 18세기: 합리적인 인간의 발전

- 19세기: 자주적인 인간의 시대

- 20세기: 후기 그리스도인과 적그리스도인의 시대

 

1.2 종교개혁의 시대와 프랑스 혁명의 시대 사이의 기간 동안에 새로운 관심이 르네상스에서 나타났다. 르네상스의 그 기본적인 사고는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가장 깊은 자기-실현이다. 16세기 동안에 있었던 이러한 진전은 계몽운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독일에서는 Aufklarung). 그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계몽운동 이전에 다음에 나온 말들로 사람의 처지를 묘사하였다: “계몽은 사람의 양심을 무지에서 떠나게 해준다. 무지 속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과오와 결점을 탓하며 머뭇거리게 된다. 무지는 자신의 지성을 자주적으로 사용하는 일에 사람을 무기력하게 한다. 이러한 무지는 지적인 능력의 결핍을 탓하지 않고 용기의 결핍을 탓한다”. 칸트는 유럽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함으로 그의 엄청난 지적인 재능을 남용하였다.

a. 중세의 학문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려고 꾀하였다. 이러한 합리적인 설명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더 쉽게 해주었을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그런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모른다는 암시를 하면서 말이다.

b. 계몽운동은 한편으로는 이성의 자율성과 지성과 과학의 주권을 받아들이면서 더 진행해나갔다. 이 운동은 단순하게 그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위로 들어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여타의 권위를 전적으로 거부하였지만 그 자신은 아니었다. 그 모토는 sapere aude 즉 감히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의 고백들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계몽운동가는 종교의 큰 파괴자들이다 그들은 자유사상가들이다 그들은 감히 혼자 서려고 한다.

- 데카르트 (Descartes, 1596-1650)

- 볼테르 (Voltaire, 1694-1778)

- 루소 (Rousseau, 1712-1778)

 

1.3 계몽운동은 이성을 수용 가능한 유일한 세계관과 실행 가능한 유일한 철학의 기초로 받아들인다. 주목할만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들은(갈릴레오, 뉴튼, 케플러, ) 사람의 정신의 능력에 무한한 신뢰를 일으켰었다. 사람이 종교를 전적으로 18세기처럼 받아들이는 한, 그의 생각들은 성경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생각들의 일부는 이렇다.

a. 모든 종교의 핵심은 똑같다. 이런 진술은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였고 상대론과 회의론으로 인도하였다.

b. 예수님은 훌륭한 도덕선생이시다. 자연인은 선하지만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자비롭게 되어야하고 관대해야만 한다.

c. 기독교 신앙(Christian)은 무엇이 자연적인 것이며 무엇이 참으로 인간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말한다. 그 새로운 합리적인 종교는 불가능한 이적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자연적인 계시로 오염되지 않은 것이다.

d. 하나님 - 도덕 - 불멸: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은 여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데, 이것들은 자연스러운 것(natural)”이었고 그러기에 기독교신앙(Christian)”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신앙은 자연종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하나의 시계처럼 만드셨기에 그것을 더 이상 보살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신론(deism)에 의해서 약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일상생활에서 중요하지 않다. 주님을 사랑함에서 나오는 경외심은 상실되었다; 주님과의 일상적인 교통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사라져버렸다. 하나님은 더 이상 날마다 다스리지 않으신다; 그는 훌륭한 조성자로 사람을 대신 두셨으며, 또한 교회 안에도 그렇다; 사람의 일반적인 느낌은 낙관적인 인본주의의 하나였다.

e. 그렇지만 1775년에 끔찍한 지진과 홍수가 리스본(포르투갈)시를 강타하였고, 5만 명의 사망자를 남기게 되자, 이신론자들은 당황하였다. 소위 신정론(theodicy)이 세상에 있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짜 맞춰지게 되었다. Leibnitz는 악이란 더욱더 밝게 빛을 비추도록 하려는 하나의 그림자였다고 암시했다. 이런 식으로 불행이나 고통의 필요가 설명되었지만 사람의 어두운 추리력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 진노, 징벌 그리하여 세상에 내리신 심판이라고 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것을 논하였으나 그들은 그분을 그들의 아버지로는 알지 못하였다.

1.4 1717년에 freemasonry 운동은 영국에서 확립되었다. 그 기초는 인간의 마음의 완전한 자율성이었다. 그 모토는 당신 자신을 알라, 자신을 다스려라, 자신을 높여라”.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이신 건축자이시다. Freemasonry는 가장 근본적인 종류의 인본주의에 기초한 보편적인 종교이다.

a. 19, 20세기의 참으로 거대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은 신존재에 대해(the existence of a god) 과거 유행했던 것보다는 더 온전한 이해(the whole notion)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생각들 사이의 대조는 너무 크게 되었다. 후자는 전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주권자 하나님은 사망선고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아무런 큰 손실이 아니었다. 신은 뭐라고 하든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오직 측정할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수세기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신 이시스(Isis)와 오시리스(Osiris)를 믿었다.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올림푸스(Olympus)산에서 제우스(Zeus)와 같은 자기들의 신을 믿었다. 로마인들은 주피터와 같은 신을 가졌다. 고대 게르만족은 도나(Donar), 프레야(Freya) 그리고 보단(Wodan)과 같은 신을 믿었다.

이 모든 신들은 버림을 받았었으며 이런 역사적인 종교의 신들 무덤에 추가되어지는 일은 이제 기독교의 신의 기회가(god's turn) 되었다!

b. 이 이방종교와 신들의 배후에 사탄의 권세가 서있다. 성경은 이런 것들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고전10:19-21)

c. 주님께서는 이들 사탄들에게 이름들을 주셨다. 그모스(Chemosh), 모압의 가증한 우상, 몰렉(Molech), 암몬의 가증한 우상(왕상11:7). 에스겔의 예언의 말씀들은 가증스러운 우상들을 섬기는 것 때문에 그의 교회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교회백성이 아닌 백성의 종교적인 확신에 대해 신적인 저주를 하는 것은 확실히 많은 사람에게 참을 수 없고 불쾌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악의 구렁을 생각하라,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일이 이스라엘 자녀들을 거기까지 끌어갔다. 바로 약속의 땅에서 많은 진흙항아리들이 발견되는데, 거기에는 모압족속과 암몬족속의 신들에게 바친 재물인 어린 자녀의 유골이 들어있다. 노아가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주 하나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새땅에 관한 새 언약을 맺으셨던 사람이었다. 하나뿐인 언약은 땅의 민족의 각각의 역사적인 지역을 포함하였다. 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저주하셨다. 이 저주는 이스라엘족속이 가나안 족속을 그들의 혐오스러운 종교와 짐승같은 짓과 함께 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성취되었다. 성적인 사악함의 사탄의 영은 이미 그 방법으로 소개가 된 적이 있었다. 함과 그의 아들은 노아에게 수치를 주었다(9:24, 25).

d.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가나안땅과 그 거주자들의 멸망을 명령하신 것은 주님의 히브리교회를 보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항상 복종하지는 않았다. 아합과 아하스같은 왕들은 가나안땅의 종교들을 섬기도록 허락하였을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 장려하였다. 가나안이 세상, 특별히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과 결혼한 저주받은 악한 찌꺼기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온 역사를 걸쳐 가나안 족속의 바알과 아스다롯, 이집트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마찬가지로 그리스여신 아프로디테의 혐오스러움과 부도덕한 로마여신 비너스와 같은 방탕한 우상숭배를 통하여 오늘날 그들의 성적인 즐거움을 위해 합법적인 매춘굴과 다를 것이 없는 유럽과 미국의 섹스클럽에 이르기까지 매혹적인 성욕이 홍수가 되어 이어져 왔다.

e. 한 가지는 바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악한 신들이 참으로 역사의 종교묘지에 매장되었고 죽어 오래전에 사라졌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 진실이기를 바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이들 고대의 신들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무법한 현대 인간들 가운데에 아주 많이 활동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서부터 헬레니즘과 르네상스를 통과하여 온 죄와 오염 가운데서 뒹굴고 있다. 언약의 자녀들이 우리 시대안에서와 같이 그렇게 심각하게 속임을 당했던 적이 결코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께서는 가증한 것과 오염 속에서 악한 즐거움으로 더불어 뒹구는 이들에 대해 그의 진노를 내려치지 않으시는가?

f. 결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토론까지 들어가지 말라. 그런 토론은 하나님의 존재의 변증이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낙원에서 있었던 반란의 기본적인 입장을 근본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성경의 첫 말씀은 하나님 한분이 계신다... 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창세기 1장은 장엄하게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말씀하심으로 시작하신다. 이전까지는 아무것도 어떤 사람도 없었다. 결코 성경의 신뢰성에 대해 토론으로 들어가지 말라. 그것은 오만한 인간으로 당황하게 하는 사탄의 질문이다. 정확하게 정말로 하나님께서 .... 말씀하셨느냐?”라는 바로 그 질문 때문에 (3:1) 하나님에게서 넘어졌다. 우리는 오직 들음을 통해서만 순종을 배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확실성을 순종하여 경청하는 방식으로 주신다.

g. 후기그리스도인(postchristian man)은 자율주의, 자유로운, 실존주의의(existential) 인간이다. 이 세상을 넘어서는 아무것도 없다. 이방인이라는 단어는 미개인(barbarian)이라는 말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 같은 경멸하는 의미를 더 이상 함축하지 않는다. 기원적으로 야만인(barbarian)이라는 말은 그리이스말을 할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켰다.(고전14:11절을 보라). 무엇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처음 시대 동안에 콘스탄틴대제 때문에 이방인(pagan)이라는 말은 다시금 점잔은 말이 되었다.

h. 현대의 "블레셋사람들은(Philistines)" 그들 스스로 만든 과학과 기술의 신들을 가지고 그들의 현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서 현대의 이스라엘(세례 받은 기독교세계)을 힘있게 지배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기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의 백성을 그의 말씀에 따라 돌아보실 때까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시 다곤(Dagon)의 신전에 속박을 받으신다.

i. 사도 바울의 예언들은 사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성취되었다. 대서양에 인접한 국가들 가운데 기독교세계는 의식적으로 더욱더 자발적인 반 기독교신앙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j. 종교개혁과 더불어 그것으로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유럽 국가들에게 그와 같은 거대한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셨다. 신생(Renaissance)이라는 관념을 가져오게 되어, 그것은 사탄의 어둠의 권세를 사용하여 이성의 빛 즉 계몽주의라는 모습으로 이들 국가들에 영향을 끼쳤다(사탄은 루시퍼 즉 빛의 임금이다).

k. 16세기 하나님께서는 한 권능을 보내셔서 많은 사람이 진리를 믿도록 하셨다. 20세기동안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강한 유혹을보내셨다. 그래서 그들이 그 거짓을 믿게 될 것이다”(살후2:11)

1.5 종교개혁과 반(Counter)종교개혁 사이의 투쟁의 끝에 이어지는 시기는 모든 종류의 개인주의적인 운동들의 발전을 보았다. 그것은 생애의 중심이 되는 관심으로 경건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건운동은 죽은 정통에 대한 반작용과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와 같은 이교정신에 대한 반동과 관련하여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얀센의 교회개혁정신(Jansenism)

독일에서 경건주의(Pietism)

영국에서 감리주의(Methodism)

네덜란드에서 개혁파 신비주의Reformed Mysticism

1.6 이러한 후기 종교개혁운동들은 근대 신앙(Modern Devotion)의 이전 종교개혁(pre-Reformation) 운동과 잘 비교될 수 있다. 이들 운동들의 어느 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개혁적이 아니다. 그것들이 믿음 가운데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로 사람들을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건한 운동들은 죽은 논리적인종교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었다. 논리적인 종교는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게 만들었다(12:15). 이런 운동들은 죽은 교리를 비웃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로서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경건과 고백 간에 차이와 대립을 두지 않는다. 그러한 대립은 스콜라식의 논리의 악한 결과이다. 종교개혁은 이런 교훈들을 일시적으로 그치게 하였으나 18세기동안 그것들은 돌아왔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압도하였다.

a. 자주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성경이 참이며 하나님을 확실하게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주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사역에는 눈을 감는다. 그들은 이기적인 만족 가운데서, 개인적이고 공동의 죄들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 않는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산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는 못한 채 이신론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전적인 자기 확신(self-assurance) 가운데서 하나님 없이 실제적인 목적들을 위해서(2:12) 살아간다. 그러한 이신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벨직고백 2항을 부정한다. 그것은 우리가(신자들) 그분을(하나님) 두 가지 수단으로 즉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사역으로 안다고 진술하고 있다. 비록 사실들과 사건들이 우리의 생활을 위한 규범들은 아니지만(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규율들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사역들은 우리에게 또한 말한다.

b. 성경이 우리가 가는 길들을 우리로 생각하도록 어떻게 권고하는지를 주목하라(1:5,7; 2:16,19,20). 또한 선지자가 언급했던 정확한 날들을 주목하라. “다리우스왕 26월 그 달의 첫날에, 주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현대 달력을 사용해서 그 날은 B.C. 520828일과 같다. 학개 선지자의 다른 날은 B.C. 521921, 5201018, B.C. 5201218일로 계산되었다. 우리는 매일의 사건들 속에서 일하시는 주 하나님의 손을 주목할 수 있다.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 한글개역 (Heed the (swishing of the) rod and the one who appointed it)”(6:9 NIV; 42:25 역시 보라).

c.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그분의 하시는 일 속에서 그분을 인식할 수 있다.

d.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기간동안에 그 종족들은 조금도 그분께서 말씀하신 말씀의 선포 없이 있었고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오순절 이후로 그분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들에게로 퍼져간다. 이미 낙원의 시대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계시라는 방식으로 그분을 알 수 있도록 사람에게 허락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를 알고 있다. 거기에는 아무도 어떤 핑계도 없다. 또한 벌거벗은사실들도 없다.(말씀의 계시 없는 사실들, 1:18-32; 2:14-15)

e.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그의 사역 없이 되었다는 스콜라철학을 우리는 반대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결코 그의 말씀이 없이 되었다는 이신론을 반대한다.

f.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사람들에게 하는 사람의 죄된 무지에 관한 바울의 설교를 들어보라(17:15-34). 바울은 이들 사람의 무지를 인정하고 있으나 그는 그 때문에 그들을 죄없다고 하지 않았다. 성경적으로 말하고 교회역사적으로 말하여, 낙원 이후로 모든 인격은 언약파기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탄의 반(anti-)복음을 기꺼이 들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2. 프랑스- 얀센의 교회개혁정신(Jansenism)

2.1 코넬리우스 얀센(1585-1638)은 독일 태생이었다. 그리고 이프레스(Ypres)의 감독이 되었다(오늘의 벨기에).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책 어거스틴(Augustinus)는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되었다. 그 책은 아주 감명을 주었다. 얀센은 예수회(Jesuits)의 교훈을 강하게 반대하였고 어거스틴에 의해서 가르쳐진 대로 은혜의 교리를 옹호하였다.

2.2 포트 로얄 더 챰프(Port Royal de Champ)에 있는 수도원은 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얀센주의자들은 그들의 추종자들 가운데 그 유명한 블라이서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 위대한 수학자를 포함시킨다. 파스칼의 지방문서(Provincial Letters)는 힘차고 훌륭하게 예수회 수도사들의 윤리를 폭로하였다. 그의 팡세(Pensees, 아직까지 널리 읽히고 있음)는 일련의 잠언의 형식으로 기독교 신앙의 방어를 포함하고 있다.

예수회 수도사들의 선동으로 포트 로얄 수도원은 폐쇄되었고 나중에는 건물조차 파괴되었다.

2.3 1713년에 교황은 공식적으로 어거스틴에 의해서 가르쳐진 은혜의 교리를 정죄하였다. 그리하여 함축적으로 얀센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정죄하였다. 반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는 배교한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승리하였다.

2.4 많은 얀센주의자들은 네덜란드로 도피하였다. 부분적으로 그들의 관점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예수회의 적개심 때문에 얀센주의자들은 고대 가톨릭 교회를 이루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하였다(1765). 이 교회는 30개 교구에 30명의 사제들과 3명의 감독들과 교회의 수장으로서 우트레흐트의 대감독과 함께 약 12천명 회원이 있다. 독신은 성직자가 되는데 필수가 아니었다. 이 교파는 아머르스포르트에(Amersfoort, the Netherlands) 자신의 신학교를 가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화란의 로마 가톨릭 추기경을 통하여 시도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친교를 회복하려고 제안되었다. 고대 가톨릭교회(The Old Catholic Church) 역시 세계보편교회 운동에 결합되어있다.

2.5 계몽운동의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는 로마 가톨릭이 1773년에 예수회(the Jesuit order)를 해산하게 했을 때 이루어졌다. 그랬지만 1814년에 이 수도회는 회복되었다.

3. 독일 - 경건주의

3.1 경건주의는 전형적으로 17세기 루터 국가교회로부터 나오는 독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그 시대에 기독교를 잠식하고 있었던 합리주의적이고 주지주의적인 이설에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3.2 필립 제이콥 스페너(1635-1705)는 루터파 목사였다. 그는 그들의 종교적인 경험을 서로 나누기를 원했던 신자들을 위한 특별한 모임을 구성하였다.(collegia pietatis(경건한 무리) - 이것이 경건주의자라는 별명을 낳았다). 그의 주된 저서, Pia Desideria(경건한 소원)에서 스페너는 예리하게 그의 시대의 교회에서 압도적이었던, 영감이 없고 죽어있는 분위기를 비판하였다. 그는 교리가 아니라 생활을 강조하면서 경건의 훈련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루터교 정통의 지도자들은 그를 반대하였다.

스페너의 사역은 할레(독일)의 대학에서 경건파 교수단의 설립을 가져왔다. 그것은 대부분 교회안에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ecclesiola in ecclesia).

3.3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는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였고 유명한 Franchesche Stiftungen(프랑케 재단) 즉 그 시대의 무시당한 젊은이들을 위하여 학교들, 병원들, 그리고 고아원들을 설립한 사람이었다. 이런 자비사역은 독일 전역에 퍼졌으며, 집사들의 사역의 연장인 국내선교(home mission)라고 알려졌다.

프랑케는 강하게 종교적인 경험과 갑작스런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그 신자는 시간과 날짜와 장소를 댈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율법적인 태도, 엄격한 교육적인 시각들, 그리고 생활에서 아주 어두운 모습은(자녀들의 놀이는 바보짓거리였다) 가장 훌륭한 태도로 이해되었을 것인데, 이것은 그가 살던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자기만족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할레는 인도까지 이르는 독일의 경건주의 선교를 위한 중심이 되었다.

3.4 부유한 니콜라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Nicola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는 스페너와 프랑케의 제자였다. 모라비아 교도들(후스의 추종자들)Berthelsdorf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이 공동체는 Hernhut(하나님의 보살핌 아래서)로 알려졌고, 그 공동체의 깊은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경험적 신앙에 대해 알려져 있다.

3.5 프랑케(할레)와 진젠도르프(헤른훗) 사이에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프랑케는 경건한 사람의 심각한 참회의 신앙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젠도르프는 급작스런 회심과 경건주의의 율법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어린이처럼(때로는 거의 유치할지라도) 기쁨을 보여주었다.

3.6 모라비아 형제단(연합 형제단)은 열정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그린란드, 황금해안(Gold Coast), 수리남, 러시아, 그리고 남아프리카로 갔다. 폰 진젠도르프의 죽음까지(1760) 이미 약 200명의 선교사들이 보내어졌다. 그들의 비석이 쓸쓸하게 세상의 여기저기 황무지에서 자주 발견이 된다.

폰 진젠도르프의 바람과는 달리 모라비아교도들은 하나의 신앙고백 없이 오직 구세주 신학(Saviour theology)” 하나만으로 그들 자신의 교회를 세웠다.

3.7 “영적인 체험의 힘은 이성의 힘(계몽운동)의 맹공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경험적인 신앙을 합리적인 종교로 바꾸게 해놓았다.

 

4. 영국 - 감리교주의(METHODISM)

4.1 박해를 받은 많은 유럽 그리스도인들은 북아메리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리하여 개신교도는 새로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상당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1646년에 이미 존 엘리옷(John Eliot, England)은 인디언들 가운데서 설교하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충분하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개신교도인 백인(pale face)들의 손에 죽었다. 한스 에제더(Hans Egede, 덴마크)는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설교하였다.

4.2 퀘이커교도들은 영국 침례교도들이었다. 죠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그들의 지도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음성에 의존하였다. 퀘이커 교도들은 북부 아메리카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특히 폭스의 계승자요 펜실바니아의 퀘이커주의 설립자인 윌리엄 펜(William Penn)의 활동을 통해서 얻었다. 퀘이커들은 교회의 가장 무거운 죄, 종살이에 반대하여 세상을 깨우는 일에 으뜸가는 존재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다. 종종 도망친 노예들이 퀘이커들에 의해서 가능한 어디에서든 언제든 원조를 받았다. 오늘날 많은 영향력 있는 미국인들은 퀘이커 운동 출신이다. 그리고 많은 자비의 사역으로 세상을 가로질러 도움을 제공한다.

4.3 감리교주의(Methodism)

a. 감리교신앙의 설립자는 죤 웨슬레(1703-1791)였다. 그의 회심은 그가 전하는 대로, 1738524일 저녁 915분에 일어났다. “나의 사역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나는 온 세상을 나의 교구로 바라본다.”

b. 본래 메소디스트(Methodist)는 웨슬레와 그의 친구들에게 생활을 위한 아주 엄격한 규율들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후에 그들은 그 이름을 받아들였고 웨슬레에 의해 요구된 회심의 방법이 규율이 되었다. 웨슬레 형제들(죤과 챨스)은 영국 전역을 광범하게 여행하였으며 개신교 기독교세계의 기병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웨슬레는 알미니안의 부활이었으며 감리교주의 운동은 정결에 대한 강하게 율법주의적인 사상에 의해 특징지었다. 그들은 주로 평범한(대개는 소외된) 사람과 관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불쌍한 사람과 죄수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었다.

c. 죠지 휫필드(1715-1770), 칼빈주의자이며 웨슬레의 친구인 그는 또한 설교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교회 건물안에서 보다 옥외에서 연설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는데, 그가 사는 시대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영국에 있는 다른 부류의 감리교주의(Methodist) 무리들이 미국에서 만큼이나 많이 있다. 감리교주의자들은 대서양의 양쪽에 위치한 앵글로-색슨 세계의 전체에 두드러지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d. 이런 영국식의 신앙부흥운동 형식이 전형적으로 그 속에 나타났다.

- 영국인과 외국인 성경협회는 1804년에 설립되었다. 이 협회의 활동을 통해서 성경은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이 되었다.

- 세계선교의 중심은 독일(모라비안교도)에서 영국과 미국(감리교도)으로 특별히 윌리엄 케리가 활동하는 동안 방향을 바꿨다.

- 구세군은 윌리엄 부쓰(1829-1912)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e. 19세기에 가장 잘 알려진 신앙부흥운동가의 하나는 챨스 H. 스펄젼(1834-1892)이었다. 그는 특별히 그를 위하여 세워졌던 메트로폴리탄 장막(Metropolitan Tabernacle, 런던)에서 대개 5천명이 넘어가는 청중들에게 설교하였다.

 

5. 네덜란드 - 개혁파 신비주의(REFORMED MYSTICISM)

5.1 하나님의 은혜로 네덜란드(Dutch) 공화국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자유를 모두 얻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온 유럽에서 온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들 피난처는 주 예수 자신의 말씀에서 위로를 찾았다.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나 땅이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떠난 사람이 -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땅을 박해 때문에 - 이제 이 때에 백배를 받지 못하고 오는 세대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10:29,30). 많은 외국인들은 종교적인 자유와 일자리를 홀란드에서 찾았다.

a. 1648년 이전, 많은 사람이 남부 네덜란드와 영국(청교도)에서 와서 도착하였다.

b. 1648년 이후, 많은 루터교 피난민들과 헝가리에서 온 피난민들이 도착하였다. 네덜란드 제독 더 루이터르(De Ruyt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번은 26명의 헝가리 목사를 지중해에서 터키의 전투 겔리선(war galley)에서 풀어주었다.

c. 많은 돈이 왈도파를 돕기 위해 스위스에 보내졌다. 17331128일이 국경일로 선포되었는데 그때에 많은 궁핍한 왈도파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였다.

d. 프랑스 위그노교도는 그들 자신의 eglises Wallones를 설립하였고 그들과 더불어 산업에 있어서 급격한 발전을 가져왔다. 암스테르담의 도시는 그 도시의 제방을 넘어 잘 성장하게 되었다.

e. 많은 유대인들 특히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사람들은 홀란드에서 피난처를 마련하였다. 그들 가운데서 유명한 철학자 바루크 스피노자가 있었다. 그 부유한 유대인 로페즈 수아쏘(Lopez. Suasso)1688년에 스타트홀더 윌리암 3세에게 일백만 길더를 영국 침략(명예혁명)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성공한다면 나는 내 돈을 돌려받겠습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글쎄요,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5.2 얼마나 눈이 멀었는지, 이들 부유하고 복 받은 개혁교회들이 그 시대의 사회의 죄악들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발견하는 것은 비참하다. 돈의 많은 액수는 기쁘게 외국에서 핍박받는 형제와 자매들을 돕기 위해 제공되었다. 동시에 막대한 이익들은 모든 무역 중에서 가장 가증스러운 노예무역으로 얻어졌다.

중세의 마지막까지 노예는 오직 베니스의 도시에서만 알려졌다. 하지만 항해 탐험은 이 악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프리카 흑인은 수천명씩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유괴되어 미국까지 배에 실려 왔다.

가장 큰 악행자이며 부당이득을 본 자들은 영국과(낙스와 크롬웰의 나라) 화란 무역상(칼빈을 존경하고 귀도 더 브레스의 신앙고백을 높이 들어올린 나라)이었다. 네덜란드는 최고였는데, 즉 대서양을 건너는 사이에 그들의 노예의 30%만이 배에서 죽었다.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짐을 싣는 계획을 궁리하는데 있어서 가장 독창적이었다. 그것은 가장 큰 이익을 보장해주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무역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의 추종자들 사이의 투쟁에서 토론이나 논쟁의 요점이 결코 아니었고 항의자들과 반항의자(Contra-Remonstrants) 사이에 투쟁의 일부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유럽의 기독교 국가(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둘 다)는 인간약탈을 범하였을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북 아매리카의 인디언, 아즈텍, 남아메리카에 있는 잉카, 그리고 타스마니아의 원주민(Aborigines)을 대량학살한 죄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고국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사회의 타락과 탄압 아래 살았다.

a. 이미 언약의 책에서(언약의 열 가지 말씀에 관한 하나님의 자신의 첫 번 주석) 그것은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다: “사람을 납치하는 자는 분명 죽음에 처해져야할 것이다”(21:16). 40년 후 모세는 호렙산에서 받은 율법(신명기 24:7)의 더 넓은 설명에서 이 계명을 반복하였다. 바울 역시도 디모데에게 8계명의 토론에서 이 악행을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부패를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종교개혁의 열매들에도 불구하고 탐욕은 사회적 억압이라는 옛적에 범했던 죄(the old sins)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것은 중세에 거의 근절되었던 것이었다.

b. 17세기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의 부()는 부분적으로는 노예의 희생(blood)과 사회의 불의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5:4). 많은 부유한 상인은 저명한 화가 중의 한 사람에게 자신과 자기 가족의 초상화를 주문했는데, 때로는 갈색의 노예가 배경에 나타난다. 이런 초상화들은 지금 세계의 곳곳의 박물관에서 관찰할 수 있다.

c. 늦은 1788년 네덜란드(Dutch)의 노예무역은 한 해에 약 20만의 상품 품목으로 경기가 좋아지고 있었다.

d. 네덜란드(Dutch) 동인도의 섬의 본토 역시 노예를 사용했다. 특별히 육체적으로 강한 수단사람들을 사용하였다. 네덜란드(Holland)는 노예무역을 폐지하기까지(1863) 맨 마지막까지 남은 국가들 중의 하나였다. 늦은 1905년 한 광고가 네덜란드(Dutch) 동인도 교회 회보에 나타났는데, 팔려고 내놓은 상품, 이를테면 힘세고 값싼 일군(coolies)과 건강한 가축과 같은 상품에 관심을 묘사하고 있다.

e. 우리시대에 합중국의 남부에 있는 주(state)들에 살고 있는 니그로(negro)들은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조상을 운송해온 네덜란드(Dutch)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있다.

f. 20세기의 니그로의 반란들, 백인에 대한 증오(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와 해결할 수 없는 인종문제는 세상을 가로지르는 수백만 흑인과 유럽식민지에 있는 유색인에 대해서 자행된 이러한 역사적인 범죄의 무서운 결과이다.

g. 그러나 인권을 위한 혁명적인 외침은 종종 정치적 자율권과 자치라는 때 이른 승인을 하는 결과를 빚어낸다. 이런 많은 젊은 국가들(these young nations)은 그런 자유와 책임을 다룰 수가 없다. 잔인하고 부도덕한 전쟁들과 종교전쟁들이 자주 그 결과이다. 혁명은 결코 그 약속을 이루지 못한다. 사람은 그가 무슨 존재인가가 남아있는데, 즉 죄에게 하나의 노예인 채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만일 아드님께서 여러분을 자유하게 해주신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8:36).

5.3 네덜란드 사람이 무역과 상업에 가장 흥미있어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7세기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또한 그들의 선교적인 소명을 인정하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무역상들은 거의 항상 선교사들과 평신도 설교자와 동행하였다. 교회들은 주변 세계에 세워졌으며 이런 선교운동의 결과는 오늘도 여전히 보여지는데, 예를 들자면 스리랑카와 타이완의 개혁교회에서 그렇다.

5.4 그렇지만 17,18세기 동안, 우리의 선조들은 언약의 법에 복종하지 않았다(32:15). 교회의 회원권은 종종 해야 할 일이니까 마지못해서 하는 의무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행정장관들(magistrates)은 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아모스의 경고는 그들에게 적용한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아모스6: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자기충족, 자기만족 그리고 자만이란 무엇인가(What self-sufficiency, complacency, and conceit in the church of Jesus Christ). 몇 해가 지나고(in late years) 그런 정부의 통제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정치적인 관용(공적인 종교의 자유)은 종교의 관용이 되어버린 것이다(교리의 자유). 교회는 그 자신의 거짓된 신앙심 때문에 이런 이단교설에 대항하여 무기력해졌다. 교회는 더 이상 그 자신의 고백에 따라 살지 않았고 지()의 여신(the goddess of reason)을 예배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5.5 레너 데카르트(Rene Descartes, Cartesius 1596-1650)는 네덜란드(Holland)에서의 합리주의의 아버지였다. 그는 이성을 지식의 유일하게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초로 받아들였다. Je Pense, donc je suis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의식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은 모든 의심 위에 서있다이것은 르네상스적인 사상으로 전형적인 비기독교인의 원리의 본보기가 된다.

데카르트의 표어는 다름 아닌 피조물로서의 의존적인 사상을 거부하고 모든 그의 긍지 있고 독립되어 있는 자율적이고 주권적인 인간을 예시해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묻기를 잊어버렸는데, 이 생각하는 라는 존재는 누구인가? 신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러기에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백한다(creatus sum ergo cogito). 데카르트는 모든 진리를 하나님의 계시 안에 있는 믿음 보다는 오히려 논리적인 증명의 터 위에 세우려고 하였는데, 사람의 논리적인 이해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의 영은 폭풍으로 교회를 사로잡았다. 언약은 부정되었다. 사람의 확실성과 분명한 지식의 근거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서 찾아지게 되었다. 이런 철학은 현대 주관주의의 시작이었다. 주관주의는 결국 20세기 실존주의자의 절망의 철학(existentialist philosophy of despair)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18세기 계몽운동과 20세기 인문주의자 합리주의의 선구자로 보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5.6 이런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교회를 파괴하였다. 이러한 결과들로

- 하나님의 말씀은 기껏해야 사고의 개혁적인 철학의 체계로까지 내려서게 되었다.

- 신앙고백들은 교회적인 규칙이 되었다.

- 살아있는 신앙대신에 신자들은 이성에 기초한 신앙에 대해서 들었다. 그것은 경건으로 보충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 이러한 전개는 설교를 건조하게 해서 학적이고 학문적인 강연으로 쇠약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사람의 보증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진리에서 찾지 않았다. 사람의 신앙의 근거는 그의 추리력(reasoning ability)이 되었다.

5.7 헤이스버르트 뵈티우스(Gijsbert Voetius)는 전형적으로 네덜란드(Dutch) 개혁주의 신비운동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de Nadere Reformatie). 그는 고마루스(Gomarus)의 제자였으며 도르트 총회의 한 회원이었다. 왜냐면 40년 이상 우트레흐트에서 신학교수였기 때문이다.

a. 그는 데카르트의 추종자들의 격렬한 논적이었다.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학자답게 그리고 학문적인 신학적 접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뵈티우스의 입장은 아주 슬프게도 약화되었다. 스스로 성경을 하나의 매 마른 개혁사상의 체제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뵈티우스는 과거 유행하던 학자로 간주되었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파는 현대의 합리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성경에서 뵈티우스가 했던 것보다 더 많이 빗나가게 하였다. 양쪽이 다 상대의 추론이 잘못이었다고 입증하려고 했다.

b. 뵈티우스의 학문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짓눌렀는데, 그 반동으로 요하네스 코케이우스(1603-1669), 프리슬란드 신학교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거의 자유사상가의 관점을 반대하였다. 그 결과는 뵈티우스의 추종자들과 코케이우스의 추종자들 간의 쓰라린 투쟁이었다. 그들 중 아무도 인간의 논리의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고전1)

c. 그 오만과 자만심으로, 합리주의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머거리가 되게 하였다. 매 마르고 죽은 교리의 체계에 대한 과학적인 타당성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많은 다른 사람들을 주관적인 신앙의 경험 가운데서 영적인 양분을 추구하도록 했다.

- 종교적인 주관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암시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은 개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의 증거였다.

- 종교적인 주관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과 학문적인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을 듣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감정적으로 관련되지 않고서 가능하다고 암시하였다.

- 성경은 그런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히브리서 4:12절에서 거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고, .... 생각들과 마음의 의도들을 분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있으며 활동한다.

d. 뵈티우스 자신은 객관적(학문적)이고 주관적(엄격한-경건주의자)이었다. 그래서 그는 라바디스트(Labadists), Jean de la Badie(1610-1674)를 추종하는 자들에 반대하여 개혁의 가르침을 방어하기 위해 소집했을 때 우유부단한 입장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믿음의 단순과 정직이 결여되어 있어서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라바디스트의 비평은 근거들이 없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신비적이었고 그들의 관점에 있어서 개혁적이기(reformed)보다는 재세례파였다. 그들은 단순한 생활양식과 세상의 소유를 나누는데 헌신된 생활공동체를 세웠다.

5.8 인간의 이성을 찬양함과 개인적인 느낌과 감정을 강조함은 심각하게 진정으로 성경적인 헌신과 경건의 발전을 방해했다. 뵈티우스는 토마스 아 켐피스를 그의 작품들이 단순하고 강하고 경건한 그런 사람으로 칭찬하였다. 신앙의 확실성은 신앙의 표시 가운데서 찾아졌다. 끊임없이 그러한 표시들이 관찰이 되었고 시험되었다. 참된 믿음이 참으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 사람의 개인의 신앙과 함께 이런 망상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관찰이 영적인 유익을 향해 가는 방도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5.9 네덜란드에는 여전히 신실한 개혁교회가 있었는가? 18세기, 네덜란드에서 개혁교회들의 배도는 완전해 보였다. 모든 사람은 정통이었다. 모든 사람이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것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종교적이었으나 신실(믿음에 순전(full of faith))하지 않았다. 사실, 개혁파의 학자들은 이성이라는 우상을 예배하였으며 단지 개혁파의 사상의 체계에 따라 살았다. 신비적 경견주의자의 태도는 온 교회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유다의 왕 므낫세의 시대에서와 같았다. 그는 이사야를 포함해서 신실한 자를 핍박하였다.(왕하 21:16). 합리주의자들과 경험적인 신앙을 믿는 자들 사이의 논쟁들은 몹시 맹렬하였다. 그들의 시대에서 상황은 혹독한 논쟁을 하며 신비주의를 반대하는 학자들 때문에 중세시대의 마지막 상황과 동일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간섭하게 되었고 관용의 법령(the Act of Tolerance, 1694)을 선포하였다. 마치 그런 법령이 우상의 종들에게 어떤 효력을 미치게 할것이라는 듯이 말이다(as if such an act would have any effect on servants of idols)! 요구되었던 것은 회개였다.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복종하여 듣기를 다시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말하시고 결코 침묵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런 관용의 법령 때문에 교회에까지 계몽주의 사상이 등장할 수 있도록 길이 열리게 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유사한 태도를 가졌으며, 서기관만큼이나 율법적이고 사두개인만큼이나 오만하고 회당의 지도자들만큼이나 거칠고 잔인한 태도를 가졌다. 사람들은 성경적인 규범이 없었다. 그리고 참된 신자는 목자 없이 있었다. 항의자들은(the Remostrants) 결국 승리를 차지했었다.

5.10 신비적인 부흥운동들은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모두다 덕행(virtue)과 경건(piety)을 강하게 강조한다. 알렉산더 콤리(Alexander Comrie, 1706-1774)는 그의 책 '신앙의 ABC(The ABCs of Faith)'에서 진정한 개혁을 계속해서 외친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관용에 대한 그의 반대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1773년에 정부는 새로운 시편을(a new psalter) 교회에 부과하였다. 그 시편은 이신론, 경건주의, 그리고 신비적 경험을 가르치는 영을 강력하게 호흡하는 것이었다.

5.11 16세기의 세대는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도록 허가를 받게 되었다.

17,18세기의 세대들은 불순종하게 되었고 배신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버려진 은이라고 부를 것인데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다”(6:30). 이들 세대들은 여로보암의 죄를 범하였다. 말하자면 베델의 우상숭배(Bethel worship)이다. 16세기의 초상화들을(렘브란트) 17세기 초상화들과 비교해보라. 즉 분을 발라서 생기가 없는 얼굴은 가발을 썼다. 거의 미미한 일이 행하여졌다. 부유한 자가 그들의 부를 즐기는 동안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가난한 가족을 의지하였다. 진정으로 개혁적인 저술들은(켈빈과 더 브레스의 작품들)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던 반면 세바스챤 프랑케(Sebastian Francke)와 같은 경건주의자들의 작품들은 잘 속는 마음들을 만족시켜주었다. 상대론(Relativism)은 끝없는 논쟁으로 자라났고 결국 무관심으로 돌아섰다.

5.12 네덜란드(Dutch) 개혁교회들의 상황은 종교개혁시대 교황의 교회의 상황과 잘 비교될 수 있다. 이들 교회들을 위해 마지막 시간이 이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의 심판을 가지고 오셨으며 문화들을 모으라고 명령하셨다. 교회가 그 자신을 썩은 고기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17:37) 하나님의 언약의 복(황금시대)은 그와 동일한 언약의 저주로 대신하게 되었다(프랑스 혁명).

총독 윌리엄(Stadholder William) 5세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가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을 때 네덜란드 땅에서 했던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우리의 비참의 진정한 원인은 우리의 친구들과 동맹들이 배신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국가적인 죄와 불의 속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네덜란드와 싸우고 계신다.”

일곱 번째 시기: 1795 - 현재

참된 교회로 있고 남기 위해 투쟁함

1. 국가와 분리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지는 않음

1.1 18세기 동안 유럽은 이신론적 종교에 잠겼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주님이신 언약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이신론은 하나님을 일상생활에서 밀어내버리기 때문에 변장한 무신론이다(2:12절을 보라. “...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 프랑스 혁명은 불의한 기만이 되어(살후2:10) “죄의 사람의 도착을 알리며(살후2:3) 돌아 왔다. 일찍이 기독교 로마 황제 콘스탄틴대제시대 때부터 주님과 그이 기름 부은 자(2:2)를 대적하는 적대감이 복음으로 억제 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적은 더 크고 대담하게 지배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뢴 판 프린스테러는 이런 혁명을 사상과 태도에서 전적인 변화라고 불렀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온 기독교신앙을 삼켜버렸다. 본질적으로 프랑스혁명의 원인은 그 시대의 사회적인 문제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게서 자율적이고 독립하려는 사람의 욕망에서 찾아야 했다. 여배우 Candeille는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 지의 여신(the goddess of reason)으로서 한 보좌에 앉혀졌다.

1.2 이전에는 결코 역사 속에서 율법과 권위 전부를 거절함은 사회에서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것과 그 시민의 법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을 고려되지 않았다. 혁명이란 불신앙으로 취급된다. 그것은 사람의 권리를 설교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리를 설교함으로만이 맞설 수 있었다.

흐뢴 판 프린스테러는 그의 책 불신앙과 혁명’(Unbelief and Revolution)에서 세상의 역사를 위한 혁명의 중요성은 기독교를 위한 종교개혁의 중요성과는 반대이다. 종교개혁은 유럽을 불신앙으로부터 구하였던 것과 꼭 같이 그렇게 반대로 계몽운동은 문명을 불신앙의 나락으로 던져버렸다. 종교개혁처럼 그렇게 혁명은 생활과 학문의 모든 영역을 건드린다. 전자에 있어 원리는 하나님께 복종이었으나, 후자에 있는 원리는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국가 안에, 그리고 스콜라 학문 속에 있기 위해 하나님의 법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에 관한 의문에 대해서 일반적이고 거룩한 투쟁을 계속한다.

1.3 혁명의 소름끼치는 현실은 1795-1816년 동안 프랑스 혁명세력에 의해 장악되어졌을 때에 네덜란드(Dutch) 국민에 의해서 드러났다. 홀랜드는 프랑스의 통제 아래 하나의 분리된 공화국이 되었다(De Bataafse Republiekthe Batavian Republic). 마지막 네덜란드(Dutch) 총독 윌리엄 5세는 1795년에 영국으로 도망하였다. 그가 고기잡이 선박에 올랐을 때 그와 그의 가족을 안전하게 피신하였는데 그는 홀랜드를 뒤덮은 재난에 대해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네덜란드와 반목하신다. 그리고 도시를 침략하는 프랑스를 막으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함으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혹독한 추위는 강을 대로로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동댕이치신다면 누가 건져내겠는가?”

총독이 북해(North Sea)를 건너 안전하게 항해하는 동안, 소위 애국적인 목사들은 프랑스를 인류의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의 종들은 교회의 주님의 진노에 소경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얼어붙은 강물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인간의 권리의 옹호자들의 도착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기도봉사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진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구분하지 못하였다. “들으라, 오 땅이여! 보라, 내가 이 백성들에게, 심지어는 그들의 생각의 열매들에 재난을 확실히 가져올 것이다. 그들이 나의 법에 유의하지 않았고 그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6:19).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그의 언약의 권리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놀랄만한 시대였다.

나폴레옹은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것 같은 사람의 권리의 옹호자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매였다.

1.4 공포의 해 동안 많은 부모들은 프랑스에 의해 징집된 그들의 (세례 받은) 아들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열렬하게 기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포함하여, 피비린내 나는 작전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몇 년 전, 네덜란드 화폐가 베레찌나 강(Berezina River) 근처를 발굴하는 동안 발견되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칼을 보내셨다. 그것은 언약의 복수를 집행하셨다(26:25). 그는 그분께서는 크고 장기적인 재앙”(28:59)들을 그의 유럽의 교회에 가져다 놓으셨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였고 땅위에 찌꺼기가 되었다(16:4; 25:33).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분의 영혼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비참을 참지 못하실 것이다”(.10:16). 그분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고 그의 백성을 구출하셨다.

1.5 프랑스의 네덜란드점령의 한 가지 결과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였다. 교회의 물리적인 재산은 국가의 소유라고 발표되었다. 많은 말씀의 목사들은 빈곤에 처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책과 가구, 심지어는 그들의 옷가지를 팔아야만 했다.

네덜란드(Dutch) 교회의 물리적인 재산의 많은 것들(예를 들어 토지와 건물들)은 기원적으로 옛 중세교회와 수도원의 소유였었다. 종교개혁 이후로도 내내 그들의 재산의 수익금은 개혁교회 목사의 급료를 지불하는데 이용되어졌었다.

1.6 혜택을 받는 계층은 더 이상 하나도 없었다. 모두를 위한 자유, 평등, 그리고 동포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선전문구를 따라 관용이 지배하게 되었다. 도르트회의와 고백서들을 참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는데, 옛 고백서들만큼이나 다른 사상들을 위한 여지를(항론파의 사상을 포함하여)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부에 자유롭지 않았다. 교회회의를 개최할 아무런 기회도 없었다. 마지막 회의는 1618-1619년에 개최되었다. 목사들은 강제로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거절하는 자들은 치욕스럽게 해고되었다.

위협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국가에 충성을 서약하기를 거부하였다. 니콜라스 스코트만(Nicolas Schotman, 1754-1822) 목사님은 그렇게 한 분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프랑스) 정권에 의해 정직되었다. 후에 그의 정직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왕 윌리엄 1세의 귀환 이후로도 사정들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1.7 총독 윌리엄 5세의 아들이 왕 윌리엄 1세로서 귀환 이후(1813) 그리고 프랑스의 마지막 패배(워털루 전투, 1815) 이후로, 홀랜드에서의 생활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1815년 목사들은 다시금 국가의 급료를 받게 되었다. 이런 권리(교회의 목사들이 국가에 의해 급료를 받는 일)는 체질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질문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어떤 교회가 이런 규정으로 혜택을 받을 것인가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일은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황제교황주의), 그리고 관용이 공표된 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사정들이 나아지지 않았다.

200년 기념 도르트 회의(1818-1819)가 열리던 해에, 공식적으로 국가교회에 의해서 무시된, 니콜라스 스코트만 목사님은 ‘2백년전에 개최된 국제 회의를 기념하는 기념비, 니콜라스 스코트만에 의해 세워졌다(Monument in Commemoration of the National Synod Held Two Hundred Years Ago in Dordrecht, Erected by Nicolas Schotman)’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연설을 출판하였다. 물론 당국은 그런 출판물에 대해서 관대할 수 없었다. 어떻게 스코트만은 항론파(Remonstrants)들에 대항하여 그 수치스러운 결정에 감히 교회를 묶어놓으려고 했단 말인가! 이 늙은 목사는 경멸을 당하였고 비방을 당하였다. 그러나 빌럼 빌더르데이크(Willem Bilderdijk), 네덜란드 각성(Reveil)운동의 아버지는 공개적으로 이 기념비(Monument)2판 서문에서 그를 옹호하였다.

2. 네덜란드 개혁교회 1816-1834

2.1 윌리엄 1, 네덜란드 왕의 첫 번 공적의 하나는 1815년 그의 대관식에 이어 네덜란드 국가교회의 목사들의 물질적인 복지를 제공한 것인데, 말하자면 자신의 소유지에서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좋게 생각을 해도(however well meant), 이런 행위로 왕은 시민의 권리와 정부 자체에 대한 교회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왕은 단순히 필요한 재정을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를 지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왕 윌리엄 1세는 저명한 그의 선조 마우리스(Maurice) 제후의 모범을 따르도록 조언을 받았을 것이다. 마우리스는 알미니안파 행정장관들(magistrates)에 대항하여 시민의 권리와 교회의 자유를 옹호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정부의 과업이다. 제후 마우리스의 행동의 결과로서 교회는 도르트 회의로 모일 수 있었다.(1618-1619). 그러나 왕 윌리엄 1세는 교회가 자신의 과업을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였는데, 심지어는 교회에게서 대회(in its major assemblies)로 모이는 권리를 빼앗기까지 했다.

2.2 181617일에는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그것으로 네덜란드에 있는 개혁교회의 조직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규칙들은 1618-1619년의 도르트 회의에서 채택되었던 도르트의 교회질서를 대신하였다. 이런 규정에 반대하는 합법적인 항의들(무엇보다도 왕은 교회의 업무를 통제하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이 거부되었다. 암스테르담 노회의 항의는 아예 재고되지도 않았는데, 새 규칙 하에서는 노회의 지역구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2.3 이러한 왕의 규칙의 일부 요점들:

a. 교회의 공적인 이름은 네덜란드의 개혁교회가 된다(단하나의 이름!).

b. 교회에서 가장 높은 권위는 국가 교회회의(national synod)였다. 최고 교회회의의 회원들은 왕에 의해서 임명되어졌다. 버금가는 각 교회회의의 의장과 서기도 역시 왕의 지명자들이었다.

c. 조직적인 교회의 조직 기구는 이러한 계급적인 구조의 바탕에 지역 당회들을 둔 지방회의(provincial boards)와 노회(classical boards)들로 이루어졌다.

2.4 왕이 교회를 재구성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a. 도르트 교회질서의 폐지로 개혁교회는 국가교회회의(national), 지방회의(provincial), 노회(classical)와 관련이 되었다. 지역회중은 이런 연합관계의 작은 가지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자가 있는 지역 교회들은 그들의 권리를 잃어버렸으며 진정으로 장로교회의 방식으로 다스려지지 않고 교회회의와 같은 계급체제에 의해서 다스려졌다.

b. 비록 옛 이름들이 유지되었지만 교회는 일찍이 이전보다 더 큰 국가의 영향력과 계급적인 통제아래 있게 되었다.

c.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나쁜 일은, 교리의 자유가 존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5 목사들이 서명하도록 준비된 양식에 서술된 새로운 형식의 문구, 소위 서명양식(Form of Subscription)은 교활한 변경을 포함하였다. 목사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 교리를 가르치도록 요구를 받지 않았다. 그 새로운 표현은 이런 해석을 허용하였다. (한 사람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게 있는 한. 이런 형식적인 문구는 비공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력있게 참되고 완전한 구원의 교리인 세 일치신조의 폐지를 가져왔다. 이런 일은 양의 울타리 안으로 도적들과 강도들을 끌어들였다(10:1).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로 여겨야 하고 그렇지 않아야 하는 여부에 관하여 개인이 결정을 하도록 하는 길이 열려졌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계몽된 사람의 말이 교회에서 권위였다. 이런 시행은 공적이고 법적인 위치를 교회안에서 얻게 되었다. 1854년까지는 목사들은 영(spirit)과 교회에 관한 교리의 주된 부분을 지지하는데 동의했다는 사실을 선언하도록 요구를 받았다. 100년 후인 1954년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교부들의 가르침과 더불어 그 신앙을 다함께 고백하였으나 반드시 일치 가운데서 하지는 않았다. 비록 이 교회가 신앙을 고백하기를 원하지만 그 신앙고백은 더 이상 어떤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2.6 후에 국가는 교회의 문제들에 직접 개입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회의로 다스려졌다. 모든 종파들은 동등한 권리를 받았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 자신의 교회의 계급체제를 홀란드에서 종교개혁(1853) 이후 첫 번째로 복구할 수 있었다. 그 종교개혁은 어느 정도는 강력하지만 효과적이지는 못했던 저항으로 유래된 것이다.

2.7 흐뢴 판 프린스테러(Groen Van Prinsterer)는 이 시기에 대해 교회 안에 있는 배교와 퇴보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만족과 자기중심적인 만족(complacency)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웠다고 평가했다. 국가의 상태는 특별히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아주 훌륭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밖의 나라들은 혼란과 불화로 고통을 당했으나 홀란드에서는 평화와 일치가 있었다. 어떻게 교회가 눈이 멀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자주 소경이 되었던 만큼이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법과 종교적인 계율을 따라서 살았다. 존경할만함은 교회의 보증이었다(Respectability was the hallmark of the church). 아주 소수만이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살았다. 개인인 목사들에게 남아있었는데, 그런 세례의 예식문이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즉 내가 그대에게 회중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congregation) 세례를 베푸노라.... 나는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faith, hope, and love) 그대에게 세례를 베푸노라.... 나는 너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그대가 기독교 안으로 가입될 수 있게 하노라....

3. 각성(THE Réveil)

3.1 Le Réveil(각성, 갱생)19세기의 첫 반세기 동안의 유럽 신앙운동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운동은 여러 유럽의 도시들에 일어났고 냉담하고 스스로 의롭다하는 영을 반대하여 강한 증거를 가져왔는데, 그 영은 주요 교회들에서 압도하였다.

3.2 스위스에서(제네바),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케사르 말란 목사의 성경적인 가르침을 반대하였다. 그는 불신자였었던 사람이었다.

벨기에(브루셀)에서, 멜러 드 아우비그너(Merle d'Aubigne)는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설교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 역사가이며 정치가인 흐뢴 판 프린스테러와 그의 아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독일에서 각성(Réveil)은 주로 죽은 정통으로 황량해진 세상에 속에 있는 사회적인 비참에 초점을 맞추었다.

3.3 네덜란드 각성(Réveil)운동의 아버지의 한 분은 윌렘 빌더데이크(Willem Bilderdijk, 1756-1831)였다. 그는 그의 시대의 세속적인 영에 대항하여 증거하였는데, 혁명을 지지하는 것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모든 기회를 사용하면서 그렇게 했다. 그 시대의 삼손으로서 빌더데이크는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했다”(13:5; 14:4)

네덜란드 각성운동(Réveil)의 주요 지도자는 이삭 다 코스타(Issac Da Costa, 1798-1860), 시인이자 주해의 설교자이며 빌더데이크의 제자였다. 그의 소책자, Objections to the Spirit of the Age(1823)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도록 안내하는 충격을 줄만한 책이었다. 그렇지만 경찰은 다 코스타의 추종자들의 행적을 감시했다. 관용과 수용이 한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즉 죄악과 범죄를 말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은 무엇이든지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설교할 수 있다. 일요일 저녁 암스테르담에서 다 코스타의 성경읽기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정치가 흐뢴 판 프린스테러 역시도 네덜란드 각성(Réveil)운동에 속하였다.

3.4 각성운동은(Réveil) 세력을 떨치고 있는 합리주의와 19세기의 실리주의(amterialism)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사람들은 저녁 모임 시간에 성경읽기와 기도를 위하여 자주 함께 모였다.

교회의 개혁을 위해 투쟁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분열이 있었다. 다 코스타(Da Costa)는 교회를 환자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는 흐뢴 판 프린스테러와 의견이 달랐다. 그는 교회가 세 일치신조에 고백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돌아오도록 촉구하였다.

3.5 각성(Réveil)운동의 추종자들의 많은 사람은 사회에서 상류계층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백성들의 사회적인 곤경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온갖 종류의 사회의 악들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많은 도움이 가난한 자 과부 그리고 고아를 위해 마련되었다.

그러나 각성운동(Réveil)은 진정한 개혁운동 전혀 아니었다. 이 운동은 개인적인 경건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성경의 직분들을 가진 교회의 성경적인 기능을 가리키지 않았다. 전 국민의(national) 운동이라기보다는 얼마 되지 않는 일부 귀족사회와 부자들에 의해 개혁을 위한 노력으로 남았다. 그들은 집에서 모였으며 교회에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1854년을 지나며, 갱생운동으로서의 각성운동(Réveil)은 그 영향을 상실하였다.

4. 1834년의 분리

4.1 1827년에 어떤 D. 몰레나르(Molenaar) 목사가 교리의 자유에 대항하여 익명의 소책자를 썼다. 그때까지 그것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의 모든 개혁동지인 신자들에게 고함(Address to All My Reformed Fellow Believers). 그는 비성경적이고 비개혁적인 특징을 폭로하며, 서명 양식에 있는 모호한 표현을 비난하였다. 그는 그의 동료 신자들이 교회를 개혁하도록 촉구하였다. 이 소책자는 대단한 감동을 일으켰다.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고, 왕 자신조차도 참견하였는데, 몰레나르 목사가 왕의 신성왕의 처소”(아모스 7:12)를 반대하여 예언하였다고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압력 아래서 몰레나르 목사는 철회하였고 소책자(brochure)를 쓴 일에 대해 공적으로 유감을 표명하였다. 후에 왕의 가장 관대한 태도를 기대하는 후자의(latter's) 대관식 행사에서 그는 왕 윌리엄 2세에 의해서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왕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 소책자(booklet)는 대단히 널리- 1827년 한 해만도 9판이나- 보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배교와 퇴폐를 깨닫고서 격려를 얻기 위해 그것을 의지한 것이었다(turned to it). 주님(The LORD)은 에스겔 34:11절 말씀대로 다시 그의 양을 찾기 시작하셨다.

4.2 핸드릭 더 콕(Cock) 목사(1801-1942)는 울룸(Ulrum)에서 목사였다.(네덜란드 흐로닝헌). 자신의 ()교리문답반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인 클라스 피터르 쿠이핑하(Klaas Pieter Kuipinga)는 한번은 말하기를, “만일 내가 나 자신의 구원에 오직 한 가지 탄식(only one sigh)만이라도 더하려고 했다면 나는 영원토록 멸망을 당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인지는 젊고 현대적인 목사 더 콕(De Cock)안에서 변화의 한 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쿠이핑하가 한 것 같은 그런 말들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었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천천히 주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 당시의 자기만족(self-sufficient)의 영,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하셨다. 그러나 그가 충분히 준비되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1주의 유일한 위로에서 담대히 말하기 이전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자신의 비참의 깊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심으로 우러러보아야 하는 필요성을 그는 배워야 했다. 그는 분명히 많이 배워야만 했는데, 아직은 그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1831년까지 읽기 시작하였던 때였다.

그의 설교는 더욱더 성경적이 되었다. 그는 죄와 은혜를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덕과 신앙심을 방편으로 해서 중생하는 대신에 믿음으로 얻는 중생(regeneration)을 촉구하였다. 이런 종류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때때로 50마리 말이 끄는 마차들을 울룸 교회 건물 앞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부모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에게 자신의 교중들의 현대적인 목사가 세례 베풀기를 원치 않았다(이런 행위는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더 콕 목사는 출판도 시작하였다. 그는 도르트 신조와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기독교 신앙의 개론’(Compendium of the Christian Religion for Those Desiring to Come to the Lord's Holy Supper)이라는 그의 책과 함께 재 발행하였다. 그는 문답식 가르침을 향상시키려고 하였다.

반대가 일어났다. 특히도 더 콕 목사가 공적으로 그의 근대주의자인 동료 두 사람을 공격한 후로 그랬다. 이 출판물의 제목은 전부를 다 말할 필요가 있다. ‘참된 개혁교리와 참된 개혁 신자들의 방어, 두 마리의 여우들에 의한 공격과 울룸에 있는 개혁목사 H. De Cock에 의한 방어’(Defence of the True Reformed Doctrine and the True Reformed Believers, Attacked by Two Wolves and Defended by H. De Cock, Reformed Minister at Ulrum). 참으로 더 콕 목사의 의도는 아주 분명했다.

더 높은 권세들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아, 노회(the classical board)는 더 콕 목사에 대해서 소송을 시작했다. 심리도 없이 그는 말씀의 목사의 직분에서 (불법적으로) 정직 당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지방회(provincial board)에 의해서 면직되었다. 더 콕목사는 총회(the general synod)에 호소하였다. 거기서는 그에게 그의 견해를 바꾸도록 6개월을 허락하였다. 왕에게 한 호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호소를 하는 동안 왕은 그 평범한 마을 목사를 위협하려고 하였다. 더 콕 목사 자신은 어떻게 주님께서 그에게 왕권 앞에서 용기를 주셨는지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그는 자신을 교회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권위로 내린 명령들에 복종하였다. 그래서 설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스리시며 그의 은혜로 183410월 동안에 사건들이 순식간에 전개되었다.

105: 세살 박이 쟈네터 더 콕(Janette De Cock)이 죽었다.

109: H. P 숄터(Scholte) 목사는 더 콕(De Cock) 목사를 방문하였다. 그런 비참함의 한 가운데서 무엇이 위로인가!

1010: 숄터 목사가 울룸교회에서 설교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1011: 더 콕목사의 딸의 장례식.

1012: 그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교회가 폐쇄되었기 때문에 숄터 목사는 교회봉사를 목사관 뒤편 마당에서 수행하였다.

1013: 숄터 목사가 배교한(the departure) , 울룸교회의 당회는 참 교회로 남기 위해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분리하기로 결정하였다.

1014: 회중은 과부 헐쇼프(Hulshof)의 집에서 모였다. 기도 후 출석한 사람의 대부분은 분리 혹은 복귀의 법령(Act of Secession or Return)에 서명하였다.: 136개의 서명 혹은 표시(모든 사람이 쓸 줄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 합쳐 250.

이것은 참된 개혁 -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로 복귀의 시작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울룸에도 그러했다. “그리고 빛이 어둠에 비치고 있다”, 울룸에서도(1:1,5).

4.3 분리 혹은 복귀의 법령, 기념할만한 183410 14일 화요일의 회중의 모임 중에 서명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부분적으로 읽는다. “우리 아래에 서명한, 울룸의 예수 그리스도의 개혁교회의 회중의 감독과 회원들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가운데 있는 부패를 오래도록 알고 있었는데(having long been aware of),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된 우리의 교부들의 교리를 손상시키고 부정하고,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in his Word)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거룩한 성례들을 집행하는 일에서 퇴보하고, 모든 교회적인 권징을 거의 전적으로 무시하였다. 우리의 개혁 고백서 29항에 따라서 시행하는 모든 것이 참된 교회의 표지들이다.....”

이런 서론을 쓴 후에, 그 문서는 더 콕목사의 설교와 목회적인 보살핌 가운데서 울룸의 교회가 즐긴 축복들을 낱낱이 열거했다. 그러나 교회의 회의에 의하여 그에게 적용한 불법한 대우를 또한 폭로하였다. 그 문서는 교회적인 통일체(bodies)를 교황교회와 비교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통일체들이 허약한 자에게 사람이 만든 그들의 규율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였고 그들의 규율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은 채 부당한 복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문서는 계속하였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이제 보다 더 분명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고백서 39항에 의거해서 볼 때 참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로써 그 아래 서명한 사람들은 28항의 모든 신자들의 직무에 따라,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교회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과 분리되었다고 공표하고 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개혁교회가 주님을 참으로 봉사하는 일로 되돌아오기까지는 더 이상 교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그들 스스로 모든 참된 개혁 신자들과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곳이라면 어떤 곳에서든 기꺼이 교제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오류 없는 말씀에 기초했다면 어떤 모임과도 연합하기로 선언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모든 일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존귀한 일치의 양식, 말하자면 신앙의 고백서인,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과 1618년과 1619년에 개최된 도르트레흐트 회의에서 된 신조에 에 자신들을 묶어놓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공적인 예배를 전통적인 교회의 예전에 따라 배열하려고 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과 정부에 관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전술한 도르트레흐트 회의에서 작성되어 현재 사용되는 교회질서에 자신들을 묶었다.

4.4 세상의 심판들이 교회 안에서의 심판들 보다 때로는 더욱더 정직하고 논리적이다. 더 콕 목사 상대로 고소가 제기되었다. 그가 다른 회중에 속해있는 부모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었다. 더 콕 목사는 정직을 당하였는데 현대주의자(modernist)인 두 명의 그의 동료교수에 반대하여 그가 쓴 소책자 한권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를 반대하는 근원적인 불평은 그 소책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예배 봉사에서 찬양(hymns)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면직을 당하였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정의에 부합한가(add up)?

분리 혹은 복귀는 이런 의미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를 당하였기 때문에 분리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 상황이 개선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로 복귀할 것이다.” 분리 혹은 복귀는 하나이며 동일한 결정의 두 측면이다. 우리가 거짓된 교회에서 분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기초되어 있는 그 신앙고백들로 복귀하기 위해서이다.”

4.5 거의 한 해 동안, 핸드린 더 콕은 왕이 교회에 부여한 교회 조직체의 권력을 계속 깨닫게 되었다. 한 결과로서 그는 많은 학대와 불의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잠잠히 있지 않았다. 1832년에는 이미 그는 울룸에서 그의 전임자 호프스테더 더 흐로오트(Dr. Hofstede de Groot)와 대응하기 시작하였다(started to correspnd). 그는 곧 흐로닝헌에있는 그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흐로닝허 신학교(the Groninger School of Theology)의 설립자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신학교는 옛날 아리우스의 이설을 되살려냈는데, 아리우스는 우리 구주께서 하나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정하였던 사람이다. 그 흐로닝허 신학자들은 도르트레흐트의 교리(속죄로 화해됨)가 피의 교리였다는 견해에 있었다(were of). 피의 교리란 주께서 그의 사랑을 기꺼이 보여주려 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피를 보기 원하셨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참으로 도르트레흐트 교리는 잔인하고 매정한 하나님으로 그려져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 대신에 이들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계몽의 본보기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그의 죽음은 인류가 그의 완전한 가능성에 이르도록 인류를 위한 기회를 가져오는 위대한 희생이었다. 기독교는 생활의 더 높은 단계를 위한 하나의 훈련장이다. 참된 인간성에 관한 이러한 이상을 지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호프스테더 더 흐로트(Hofstede de Groot)는 울룸의 회중에게 겉보기에 아주 영적이고, 따스하게 인간적이고, 애정 어린 그런 방식으로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가르침은 완전히 거짓이었다. 하지만, 이들 시대에 누가 복음의 핵심이 이들 신학자들 때문에 바꾸어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주 사랑하셔서 그분의 유일한 독생자를 주셨고, 그래서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고 가르친다(3:16).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하나님은 가혹한 하나님이신가? 고후5:18-21: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의 선의의 도덕에 기초하고 있는 자기만족(self-sufficiency)이라는 항론파 교리는 다시금 그리스도를 믿기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 하시고 죽은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경적인 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들 현대주의자, 계몽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인용하며 주장하였다. 물론 그들은 불신과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싸웠다. 호프스테더 더 흐로트 교수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적었다. : “첫째로 나는 사람을 죽은 신앙고백문서에서 성경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들을 성경의 문자에서부터 성경에 살아있는 복음으로 불러내고 있다.”

흐로닝어 학교가 영향력을 얻게 되자, 그의 아리우스파, 항론파 그리고 현대주의자 사람의 영광과 도르트레흐트의 노골적인 거부는 더욱 더 분명하게 되었다. 이것이 더 콕 목사와 그의 동료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설교하도록 재촉하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잃어버린 죄인을 위한 그의 주권적인 은혜를 설교하도록 재촉하게 되었다. 그런 설교는 많은 사람을 그들의 신앙과 성령님의 기쁨의 확실성을 고백하도록 인도하였다. 클라스 피터 쿠이핑하(Klaas Pieter Kuipinga) 역시도 공적으로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4.6 그러나 그 원수는 쉬지 않았다. 1835. 713일에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총회는 정부에게 이들 분리자를 반대하여 판단하라고(to take measure) 요청하였다. 지방(local)과 주(provincial) 당국은 경찰과 군대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법규들을 포고하였다! 나폴레옹시대에 만든 20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해묵은 법(an old law)은 분리자들의 모임을 약화시키는데 이용되었다. 그 분리자들은 강제로 그들의 집에 군인들에게 숙소로 내주게 하였다; 그들은 무거운 벌칙을 받았다; 지불할 수 없는 그들의 소유물들은 다른 분리자들이 이들 물품들을 되사서 돌려주지 못하게 하려고 일요일에 경매에 붙였다. 때때로 사람들은 쭈이더해(Zuyder Sea)를 배를 타고 바다에서 예배봉사를 거행하는 방법으로 당국의 손길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분리자에게 행하는 부당행위와 잔인한 짓들을 모른 채하였으며 심지어는 부추기기까지 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황제에게 호소를 허락받았으나 왕 윌이엄 1세는 울룸과 그 밖의 다른 교회의 신자들을 박해함으로 그의 직무를 남용하였다.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은 그 나라의 법규의 보호를 즐겼으나 분리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4.7 벨기에라고 지금 불리는 나라와의 정치적인 갈등 때문에 1830-1839년에 일어난 벨기에 폭동은 벨기에 왕국의 터전을 마련하게 이끌었다. 윌리엄 1세는 국가교회 안에 분열 없이 잘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분리자들에 대한 과격한 행동들은 정치에 의해서 첫 자리에 자극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주의자 관용의 철학에서 나왔다. 종교 분열은 그 국가의 일치를 위태롭게 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도 거기에는 교리의 평등과 자유가 있어야 했다. 참과 거짓 모두에게 똑같은 지위를 허용했다.

많은 요청들이 있었지만 총회(the general synod)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현대주의자의 해석을 반대하는 고소를 다루기를 완고하게도 거절하였다. 왕에 의해서 교회에 적용된 그 보편 규칙들은 모든 것을 묶었다; 그러나 교회의 고백서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묶여지지 않았다. 더 콕과 그의 동료들은 정죄를 당하였으나 그들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시민 불복종과 그들의 분리가 그 나라에서 일으킨 무질서 때문이었다.

1834년에 이미 프랑스 대사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상관에게 보고하였다. 알미니안의 가르침과 고마루스의 가르침 사이의 해묵은 논쟁이 1618 -1619년 도르트 레흐트 회의에 의해서 결정된 것인데, 다시 타오르게 되었다고 보고한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진리였는바 그 진리는 불의 속에서 억압을 당하였다.(1:18)

1839년에 한 조항이 프랑스 정기 간행물에서 출판되었다. 모든 세상을 위하여 읽도록 발표되었다. “홀랜드, 특별히 믿음을 위해 박해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큰 자비를 가지고 그 품에 받아들인 사실에서 그의 찬미와 번영을 소유하고 있는 홀랜드가 이제는 신앙에 대해 야만스런 박해라는 장애물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사건들이 복음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그토록 많은 봉사를 한, 오렌지 나사우(Orange-Nassau)()의 통치 아래서 일어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왕과 조언자들은 개혁교회 안의 교회의 지도자들만큼이나 거의 주의하지 않았다. 모두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 나라 전역에 퍼진 그 새로운 운동을 분쇄하려고 공모하였다.

4.8 극소수의 사람들이 분리자들을 후원하거나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정치적인 권리를 지키려고 용기를 냈다. 흐뢴 판 프린스테러(Groen van Prinsterer), 그는 장관이었으며 왕실의 역사가였고, A.M.C. 판 할(van Hall)씨 자신은 결과적으로 분리파와 연대하였는데, 이들은 용기 있게 외친 그 소수 가운데 있었다. 판 홀 법률가는 분리자의 권리를 법정에서 옹호하였고, 한편 판 프린스테러는 마치 그들이 나라의 법을 모조리 반대하는 자들인 것처럼 그들을 적대시하는 행위들을 비판하는 소책자를 썼다.

그렇지만, 그 각성운동(Réveil)을 하는 사람들은 분리파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광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판 프린스테러와 판 홀은 그들이 분리파를 공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반대한 일들을 주목하였는데, 비록 흐뢴 판 프린스테러는 엄격하고 예리한 비판을 하면서도 결코 국가교회를 떠나지는 않았다.

4.9 분리파의 움직임은 급속하게 자랐다. 박해와 부당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1836년에 분리자들은 대략 25십만 인구에서 약2만 명에 이르렀다. 1850년부터 1890년까지, 홀랜드 인구는 47퍼센트에까지 증가하였는데, 분리자의 수는 18504만 명에서 1890189천 명으로 369페센트까지 증가하였다.

다른 중요한 분리파 인물이 있었는데,

- H.P. 숄터 목사(1805-1868). 그는 교회 법정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을 분리시켰다.

- S. Van Velzen목사(1809-1896).

- A. Brummelkamp목사(1811-1855)

- G.F. Gezelle Meerburg목사(1806-1855).

- 후보생 A.C. van Raalte(1811-1876). 주 교회회의(Provincial Ecclesiastical board)는 그를 목사후보생으로 받기를 거부하였다. 분리된 교회의 첫 회의는 그를 목사직분으로 받아들였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국가는 분리파의 폭발적인 증가에 놀랐다. 일년 안에 백 개 이상의 회중이 생겨났다. 이들 중의 많은 회중들은 비밀집회가 되곤 했다. 비밀집회들은 신자들의 은밀한 신앙 모임이었는데, 그들은 국가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신실하게 설교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분리파는 이들 신자들을 교회로 되돌려 놓았다. 이들 교회들은 정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라갔다. 당국은 교회법의 권위는 준수되야만 하고 신앙과 도덕의 명예는 보호되어야만 하며 그래서 사회 안에 평화는 강력하게 유지 되어야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조치를 정당화 했다. 진정한 투쟁은 아르미니우스의 거짓된 가르침과 고마루스(Gomarus)의 성경적인 가르침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총회(the general synod)는 정녕 깨닫지 못했다.

바울은 유대교 지도자들에 관해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었다. “만일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처형하지는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이 말들 또한 19세기 네덜란드(Dutch) 국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되는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했다면, 분리자들을 박해함으로 그들이 감히 그리스도를 핍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4.10 각성운동에 대조하여 분리파는 진정한 교회의 개혁이었다. 분리파의 특징 - 각각의 종교개혁의 경우처럼 - 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받아들인 것이다.

분리파는 어떤 분파도 아니었다. 저 시대의 교회는 하나의 거짓된 교회가 되어있었는데, 인본주의와 합리주의 설교, 그리고 신비주의 설교로 신자들을 잘못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분리파는 불법, 재세례파의 분리도 아니고 그들의 고백서와 교회질서에 요약되어있는 대로, 16세기 처음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교리와 봉사와 권징으로 돌아가는 복귀였다. 분리파는 분명히 어떤 분파주의 운동도 아니고 한 나팔이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모두에게 제기했던 개혁으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4.11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자주 주님을 떠났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은 거짓된 교회가 되었다. 예를 들어

a. 솔로몬은 왕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신자로서 주님을 떠났다(왕상 11:1-3).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했다(왕상 22:53) 그리고 하나의 국가교회, 금송아지들과 모든 것을 베델과 단에 세웠다. 여로보암2세는 아모스를 박해하였다(7). 유다사람인 젊은 선지자(왕상 13)가 거짓 교회를 쳐 예언하였다.

b.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바알 숭배가 대신했고 진실한 선지자는 살해당하였다(왕상 19:10; 벨직 27).

c. 두지파의 왕국 역시도 자주 주님과의 언약을 깨뜨렸다, 예를 들자면, 예루살렘 성전을 우상 숭배에 이용했던 사람인 므낫세가 재위한 동안에 그랬다(왕하 21:1-19).

d. 국가의 유대주의 교회는 가야바의 지도아래서 철저하게 죄악되었다(7:13) 그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율법의 터전 위에서 주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낙원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율법을 유사한 방식으로 잘못 사용하였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19:7).

e. 로마 가톨릭교회는 스스로 거짓된 교회라고 특별히 16세기에 보여주었다.

같은 방식으로, 분리자들을 박해했던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교회회의의 규정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은 채, 복종을 요구함으로 벨직 신앙고백서 29항에서 말하는 거짓교회가 되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16세기에 행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였다.

4.12 분리파는 교회 자체의 생활에 있어서만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의 국가에도 중요했다. 왜냐면 그것이 그분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를 위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이 네덜란드를 자유국가로 만든 것처럼, 그렇게 분리파의 싸움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그분을 섬기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모든 진정한 자유를 즉 자유로운 국가, 자유로운 교회, 자유로운 학교, 그리고 그 나라의 시민들을 위한 정치적인 자유를 얻으려하는 유일한 원리이다.

4.13 분리파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보편교회에 대한 관심이 있을 때에 태어나게 되는 보편의 교회의 중요성을 나타냈다. 분리파의 1834년의 결의(Act)에는 진정한 세계교회를 지향하는 의지가(true ecumenical intention) 있었다.: 그들은 또한 참으로 개혁신앙을 가진 모든 신자들과 교제를 기꺼이 실천하고 어디서든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곳이라면 하나님의 오류가 없는 말씀에 기초한 어떤 모임과도 기꺼이 연합하기로 스스로 선언하였다.

분리파의 교회들은 스위스 각성운동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메를러 드아우비그너(Merle d'Aubigne)와 말란(Malan)과 같은 사람들과 접촉했었다. 1857년에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와 교회적인 교제를 추구하였다. 1858년에는 디르크 포스트마(Dirk Postma)목사는 그 세상의 저편(in that part)에 있는 교회의 개혁을 후원하기 위해 남아프리카에 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더욱 국제적인 접촉이 이루어져갔다.

분리파의 선언은 우리에게 아주 선명하게 그리고 성경적으로 교회의 거룩과 그 보편성을 상기시켜준다.

5. 갈등과 일치(conflict and unity): 1834년에서 1886년까지

5.1 비록 오순절 이후로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언약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온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더구나 예루살렘에 사는 회중이 그들 한 가운데에 할례받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움을 깨닫게 되었다. 안디옥에서 바울 사도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에 대해 충고하였다. 루터는 결코 모든 중세 철학과 신비주의를 뒤로하고 떠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배교의 힘은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에만 전적인 복종을 고백한 자들 안에서 조차도 강해 보였다. 분리파의 교회들 역시도 더 콕 목사와 그의 동료와 따르는 군인들과 숄터 목사들 사이에 비참한 불일치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다. 이런 불일치들은 양쪽 사람을 서로 간에 깊이 슬퍼하게 하며 개인적인 그들의 우정을 끝장냈다.

5.2 1837년 우트레흐트에서 개최된 분리파 교회회의에서, 숄터 목사는 다수의 조항이 도르트 교회질서에 우선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한 새로운 조항을 제안하였다.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 고백에 따라서 반드시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된다.” 숄터 목사는 이 조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는 자신이 중생했다고 용기있게 고백하지 않는 회원들의 자녀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교회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기에 그들의 자녀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습니다.” 숄터 목사는 한 사람의 신앙의 고백이 그의 회심과 중생에 대해 진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여러분의 영혼과 신앙경험에 대한 자기진단(self-examination)과 자기 관찰(observation)의 방법으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회심과 중생이 확실하게 될 수 있다. 그러한 자기진단(self-examinations)과 자기 관찰(self-observations)에 기초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하나님의 약속들을 주장할 수 있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더 콕 목사는 한편으로는 오히려 다른 조항을 제안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 모든 사람은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보이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이는 교회보다 더 확대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교회는 요리문답 주의 날 21에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르게 인식하는데 실패하였던 부분이다.

더 콕 목사의 회중의 회원 가운데 공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용기있게 고백하지는 않은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참되고 성경적인 설교, 사람에 대한 친절과 자신의 경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신자들에게 그들의 신뢰를 그리스도께만 두라고 촉구하는 그런 설교를 거의 듣지 못했다. 이런 나이 많은(older) 비수찬회원들은 그들 자신의 신앙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참되게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담대하게 고백하지 못하였다. 더 콕 목사가 보기에, 이들 신실한 회원들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믿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것을 고백할 용기를 발견해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회중에 속하였다.

더 콕 목사는 숄터 목사를 책망하였다. “당신은 성자들과 완전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5.3 이러한 논의들은 다시금 이전의 세기에 그렇게 널리 퍼졌던 주관론의 위험을 강조하였다. 이런 주관론은 확실성을 자기 밖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 속에서 찾기보다는 자기 안에서 찾았다.

a. 더 콕과 숄터는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직접 그분의 언약들 속에서 말씀하신 것을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책임이 빠진 진리의 소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멀리 있지 않다: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자신과 절대로 나눌 수 없다.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분의 언약약속으로 우리에게 믿으라고 촉구하신다.

더 콕 목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를 원하였지만(객관적인 면) 아직은 저 약속들을 받아들임으로 용기있게 반응하지는 않은 그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간주하기를 원하였다(주관적인 면).

대조적으로 숄터 목사는 경건주의 하에서 아마도 재침례교의 영향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명확하게 찾고 있는 영혼들(seeking souls)”에게 문을 닫아버렸다. 더 콕 목사는 더욱더 현실적이었으며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비록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 사람들의 생각들을 판단하려면, 우리는 그들의 배경과 영적인 환경을 기억해야만 한다. 더 콕 목사는 감옥에서 성경적인 통찰력과 신앙의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b. 둘 다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신뢰할만한 분이신 것을 의지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들을 주셨다는 확신을 동시에 갖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위로도 없고 확신이 없는 가운데 머물게 된다. 성령님은 구원으로 이끄는 회개의 핵심에 슬픔을 일으키신다(고후 7:9ff).

c. 두 사람 모두 그 시대의 사람들의 대다수가 가지고 있던 신앙적인 독선을 구분하였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개혁신앙에 자부심이 있었고 열광적으로 로마 가톨릭신앙을 반대하였던 사람들이었다. 더 콕과 숄터가 선포한 성경적인 설교는 압도하려는(prevailing) 교회의 태도를 직접 반대하였는데, 주권자의 위대한 권능, 잃어버린 죄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유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함으로 반대하였다. 그것은 분리파의 신조(credo)였다; 그것은 네덜란드에 있는 그분의 교회 안에서 19세기의 전 반세기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었다.

5.4 슬프게도 분리자들 가운데 일어난 불일치는 예리한 논쟁과 불신으로 깊어져갔다. 심지어는 예배봉사에서 가운을 사용하는 문제와 같은 보다 작은 주제(things)에 대해서조차도 불일치했다. 어떤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설교자를 임명하였다.

더 심한 박해를 면하기 위해 숄터 목사는 왕에게 새로운 기독교의 분리된 회중으로서 회의를 개최할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다른 이들도 그가 한 모범을 따랐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그들이 하나의 새로운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십자가 아래 있는) 개혁교회들로 부르기를 계속했다. 여러 해 동안 이들 두 무리는 서로 반대하였다. 그것은 정말 슬프고 어두운 시기였다. 교회회의들 중의 하나인 회의 기간 중에, 더 콕 목사는 그의 감정을 어찌할 수 없어, 어린 아이처럼 부르짖게 되었는데, 형제들의 가혹함 때문이었다. 비록 숄터 목사가 1840년에 열린 교회회의에서 정직처분을 받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설교했다. 분리파의 교회들은 죄와 비기독교인의 생활양식 때문에 재앙을 받았다. 더 콕목사는 J.J. 부케마(Beukema)를 책망해야할 필요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분리 혹은 복귀의 조례에 서명한 첫 번째 사람이었는데, 공개적으로 술에 만취했기 때문이다!

사상과 가르침에서 더 신비적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 목사들은 먼저 분리파의 교회들과 연대하였으나 후에 다시 다른 교파를 만들려고 떠났다(Gereformeerde Gemeenten - 개혁회중: 북부미국; 네덜란드 개혁 회중들).

선한 의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분리자들은 자주 사탄의 계략에 무지하였다(고후2:11).

5.5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는 분리파의 교회에 혼잡을 주었다. 분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룹의 보존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하신 부르심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2:4, 5). 만일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분리파의 모든 행위는 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일치를 열망하는 마음들을 만들어주셨다.

1854년에 신학교(the theological college)가 캄펜 시에 세워졌다. 그 분리파의 지도자들은 서로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1869년에 이르러 연합의 신비가 실제가 되었다. 분리파의 교회들은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기독교 개혁교회)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하나인 것에 주목하라! 지역교회들은 기독 개혁회중(Christian Reformed congregations)이라고 알려졌다. 하나의 통치에 관한 교칙과 조직은 정부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채택이 되었지만, 이 교회들은 여전히 도르트의 교회질서에 머물러있다. 1869년에 채택한 규칙은 1892년의 연합(Union)과 함께 즉시 폐지되었다.

6. 옛 세상에서 새 세상으로

6.1 루터파 종교개혁은 주로 독일 사람의 관심거리였다; 칼빈주의자 종교개혁은 주로 유럽에서 있었다. 종교개혁이 영국(퓨리턴)에서 북아메리카로 이동한 후에는, 전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울룸의 그 작은 흐로닝허(Groninger) 마을에서 시작한 분리파는 주로 네덜란드 사람의 관심거리였다. 그러나 수백 명의 분리자들이 미국으로 이민함으로 인해서 분리파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관심을 얻게 되었다.

6.2 분리파들이 이민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농장 노동자들의 극심한 빈곤. 분리자들의 많은 사람들은 또한 많은 무거운 벌금으로 가난하게 되었다.

b. 1846년에 모든 토마토 수확은 질병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이것은 진정 국가적인 재난이었다.

c. 정부는 타격을 주려고(to operate) 분리파의 기독교 학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d. 많은 사람들은 네덜란드에서 배도와 불신 때문에 미래에 대해 두려웠다. 이런 것 때문에 숄터 목사는 펠라의 작은 요단 사람의 마을을 모범을 따라 아이오와(Iowa) 주에 정착할 것을 마음에 정하였다. 유대전쟁 동안(66-70),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이 마을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도망하였었다(21:21).

6.3 많은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서인도로 이민을 더 좋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로 떠났다. 판 랄터 목사는 미시간(홀랜드)의 숲속에 정착하였고 숄터 목사는 아이오와(Pella)의 초원을 선택하였다.

이들 정착민들은 길고 감동적인 역사를 보냈고 그것은 어렵고 위험한 역사였다. 말하자면 6주간동안 작은 배 몇 척(small sailing ships)을 타고 대양을 건너는 항해, 열병과 병, 맹수들, 초지의 화재, , 폭풍, 메뚜기 떼, 위험한 토착민들, 거대한 들소(buffalos) 떼들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라고 번영했다.

6.4 숄터 목사는 교회의 지도자로는 실패하였다. 그는 미국의 정치에 활동적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에 대사로 임명되기를 생각하기까지 했으나 네덜란드(Dutch) 정부는 그를 임명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한 사람의 농부였고, 우체국장이며, 장학사(school inspector)이기도 했다. 그는 제재소와 석회가마(lime kilns)와 채석장을 소유했다. 심지어는 교회 건물도 그의 소유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개인주의는 불행한 불화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그의 동료와 갈라서게 되었다.

3년 안에, 판 랄터 목사는 네덜란드(Dutch) 개혁교회와 연대하였다.(17세기부터 구개혁교회는 뉴욕에 세워졌었다. 뉴욕은 더 이전에는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분리자들은 이 교회가 너무 많이 배교한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 가운데서는 프리메이슨단(Freemasons)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그 회원에게 허락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에서 다시금 분리되었으나 판 랄터 목사는 남았다.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1857)에서 분리는 지금 기독교 개혁교회로 알려진 것으로 초래되었다. 그리고 분리자의 신앙은 기독교 개혁교회 안에서 간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판 랄터 목사는 홀랜드에 훈련하는 대학, 그러니까 미시간에 - 호프 대학(Hope College)을 세웠다. 그는 유명해졌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연방국가(United States)의 부도덕한 대통령이 그의 장례에 참석하였다. 기독교 개혁교회는 자신의 훈련학교, 캘빈 대학(Calvin College)을 그랜드 레피드에 세웠다. 19세기의 후반기동안 이들 교회들은 크기에 있어서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분리자들의 도착은 연방국가에 대단히 중대한 의미(great importance)가 있게 되었다.

6.5 19세기 동안에, 영국 정부는 케이프 콜로니(남아프리카)의 교회를 영국식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들 자신의 정체성, 즉 신앙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아프리카너(Afrikaners)들의 그 열렬한 소원은 트랜스발로 가는 대집단이주(Great Trek)의 이유가 되었다. 그것은 대개 네덜란드에서 분리자들을 박해했던 같은 시기이다. 그 개척자(Voortrekkers)들은 자신들을 남부 아프리카의 영국 정부와의 갈등만이 아니라 토착민들과도 갈등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년이 다 되어가자 백 명 이상의 농부들이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소 6천 두와 거의 18천 마리 이상의 양이 도둑맞았다. 한 해에 54천 마리의 양이 질병과 기진하여 죽었다.

이들 아프리카너들은 분리자, 디르크 포스트마(Dirk Postma) 목사를 큰 기쁨으로 영접하였다(1857). 그의 인도를 받아 도퍼 교회(the Dopper Church)가 세워졌다. 파울 크루거는 그 회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훈련 기관(training institution)이 세워졌는데 그것은 후에 유명한 포체프스트롬(Potchefstroom)대학이 되었다.

특별히 언급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 있는데, J.D. 두 토이트(Totius)박사에 의해서 마련된 아프리카말로 아름답게 번역된 성경과 아프리카 언어로 된 시편이다. 그는 포스트마 목사의 사위이다. 성경번역은 동시에 언어개혁이었다. 킹 제임스 번역이 영어를 풍요롭게 한 것처럼 토티우스(Totius)의 번역도 아프리카 말을 부요하게 했다.

그렇지만 북아프리카로는 남아프리카보다 훨씬 적은 분리자들이 이민하였다.

7. 비기독교화 시대(The Age of Dechristianization)

7.1 유럽의 그리스도인의 큰 수가 현재 있고 장래 주실 될 생명의 약속을 가진 경건에서(딤전 4:8) 돌아섰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선포된 혁명이라는 이상(ideals)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하였다. 그 이상은 기독교신앙을 영원을 위한 단순한 보험수단으로 축소시켰다.

7.2 산업혁명과 대도시의 성장은 사회주의를 일으킨(칼 막스 1818-1883) 새로운 신들에게 돌아선 -때로는 절망하여- 사람으로 대규모 군중을 만들었다. 서부의 식민지 시대의 힘은 신민지 전쟁과 무역으로 그들 자신들을 부요하게 했다. 값싸게 얻은 원료의 거대한 홍수는 유럽을 부자로 만들었다. 온 유럽이 너무 자주 식민지들을 착취함으로.

a. 1493년에 이미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알려진 세상을 싸우기를 좋아하는 경쟁자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포르투갈의 절반과 스페인 절반으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수세기 동안 이러한 교황의 결정은 유럽에 있는 기독교를 위한 사건들의 흐름을 결정하였다. 이런 결정은 끊임없이 증가된 힘과 부를 찾아, 식민강국(colonial powers)이 되도록 유럽의 국가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부 아메리카와 멕시코에서 스페인 사람들을 발견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포르투갈 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교황의 결정은 1500년부터 베트남전쟁(Vietnam War)까지 400년 식민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였다).

b. 수세기동안 작은 포르투갈 식민지가 인디아에 남았다. 티모르의 섬의 반쪽(One-half), 인도네시아 군도의 일부는 여전히 포르투갈의 지배아래 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조차도 아직까지 한 작은 포르투갈 영토(enclave)가 있다. 신교도들은 포르투갈의 무역특권을 인계받았다.

c. 이런 발전들은 하나님의 주지사(stadholder of God)”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세상의 왕들 위에 있는 권위를 주장하였던 자이다. 사도 요한은 이 모든 것을 이미 밧모섬에서 보았다. “또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17:18). 교황교회는 서부 유럽의 신교교회들 만큼이나 진노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18:3). 사도 요한은 상인들의 상품들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18:12, 13).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 자신을 거대한 매춘부가 되게 용인하였으며, 식민권력과 부를 가진 배교한 기독교는 거대한 바빌론이 되었다.

d. 비록 이런 것들이 교리가 아니라 무역과 해운업과 부와 권력을 다루는 것일지라도, 이것은 또한 분명하게 교회역사이다. 사도 요한의 환상은 가장 눈에 띠는 방식으로 일찍이 1493년 강대한 로마의 오만한 결정 이후로 발전을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이들 식민제국의 위대함은 이름 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예를 들자면, 샌 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샌 디에고(San Diego), 산타 크루즈(Santa Cruz). 그들의 배들은 자주 홀리 버진(Holy Virgin)과 성 삼위일체(Holy Trinity)와 같은 기독교 이름들을 전해주었다. 한번은 12척의 선단이 12사도의 이름을 받았다. 돛에는 십자가가 그려졌다. 흔히 새로운 땅에서 하는 첫 번째 일은 거룩한 십자가를 심는 것이었다. 그 스페인 사람과 포르투갈 사람은 열정적으로 본토 이교도를 개종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선교적인 열심과 맘몬숭배가 함께 갔다.

e. 유럽인구의 넓은 계층들은 끔찍한 빈곤을 겪었다. 예를 들자면 독일에서는 광부들, 보헤미아와 영국에서는 직조공들이다. 어린아이 노동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acceptable necessity)로 생각되었다. 웨일즈(Wales)에서는 자녀의 침대가 결코 식지 않았다. 직조기나 광산에서 밤일을 마친 후 죽을 만큼 지친 한 자녀가 그 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에 오자마자, 다음 아이가 다른 날 아침 다섯 시에서 저녁 여덟 시까지 노예처럼 노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f. 기독교국가들이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에 따라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한 한 회의가 1891년에 개최되었던 중에, A. 카이퍼(Kuyper)박사는 그의 연설을 기도로 끝맺었다. “그것이 네덜란드(Dutch) 그리스도인의 과오라는 사실을 즉, 사회 모든 계층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 그 나라가 구원을 얻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복은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할 필요가 없도록 하여주시옵소서.

7.3 각성운동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의 악습들에 대해 소경이 아니었다. “참으로 여러분의 들에서 풀을 베는 노동자의 품삯, 여러분이 속여 빼돌린 그 품삯이 부르짖는다. 그리고 추수자의 그 부르짖음은 만군의 주님의 귀에 상달하였다”(5:4).

빌렘 빌터데이크는 사회의 불의를 대항하여 말하였다. 박애주의(Philanthropy, 선물을 나누어주기)는 인본주의에서 나온 개념이다. 성경은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권리에 대해서 말한다. 흐뢴 판 프린스테러는 궁핍을 그의 시대의 가장 큰 채찍이라고 생각하였다. H. 숄터는 적었다. “가난한 사람이 새장에 있는 새처럼 사육을 받는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는 아니다.” A 카이퍼 박사는 사회의 문제에 관한 회의에서 첫 Christian Social Congress를 조직하였다. 이 협의회 동안에 그는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행동규범 윤곽을 그렸다(1891).

모든 교회의 회의 직분자의 공적인 진술이 아니라, 사회 모든 계층의 많은 신실한 신자들의 예언적이고 성경적인 증거는 19세기의 영국 사회만큼이나 네덜란드(Dutch)에 많은 개선을 가져왔다. 네덜란드에서 가능한 탁월한 사회의 보호는 확실히 사회주의의 노력을 위해 첫 번째 위치해있는 의무는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Marxism)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를 살던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를 베푸는데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더 장애가 되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 많은 계급투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4 비록 복음의 설교와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모금운동이 많은 구제를 하게 했지만 19세기의 사회의 비참의 기본적인 원천이 제거되지는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특히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은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교훈과 사람의 모든 생활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하기를 거절하였다. 교회요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위한 토라의 하나님의 지혜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강단에서 설교되지 않았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15세기 전에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보혜사(the Helper) 성령님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구분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치실 것이다“(14:26).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를 우리의 사회-경제적인 생활이 관련이 되어있는 데까지 또한 가르치실 것이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4:5-8).

7.5 너그러운 네덜란드(Dutch) 정부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공공시설에 수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때때로 마구잡이로 그리고 자비심도 없이 실시되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단지 아버지가 실직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깨지게 되었다. 이것이 해결책이었는가? 얼마나 과격하고 잔인하고 불공평한가. 부유한 시민은 그 자신을 스스로 독선과 광신으로 목욕하였고, 부유한 농장주는 안락한 농장에서 살았다. 그러나 일하기가 불가능한 날씨에는 노동자들은 빈손으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7.6 중세에 부유하고 세력있는 수도회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진정한 구제를 베풀지 않았다. 19세기에 신교 기독교 역시도 그들의 책임에는 소경이었다. 비기독교화는 우리를 어둠의 영역에서 구원하셨고 빛의 성도들의 왕국으로 우리를 옮겨주신 그분을 점점 거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1:13).

8. 선교시대

8.1 19세기는 또한 이방인의 continents를 향한 선교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전 세기에 동인도와 서인도 무역회사는 선교에 큰 액수의 돈을 기부하였다. 1794년까지 동인도회사는 거의(approximately) 900명의 목사들을 보냈고 또한 성경 번역사업을 많이 지원하였다. 참으로 그 회사는 모든 것을 준비하였고(organized), 교회를 포함하여 모든 일에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러나 종교적인 관심보다는 무역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다. 무역협정(향신료)을 세 이슬람교의 군주(Sultan)과 조인했다. 조약의 한 가지는 각 본토 기독교 개종자는 이슬람의 군주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때문에 억류당한(bound for Japan) 배에 탄 선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위대한 19세기 식민지 무역제국의 부흥(rise)은 세계를 열었고 또한 선교에 대해서도 그렇다.

8.2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선교명령에 응답하였다. 영국은 선교사들을 인디아와 아프리카로 보냈다(마펫, 데이비드 리빙스턴). 독일 선교사들은 수마트라에서 사역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선교사들 중의 한 분은 루드비히 잉그버르 노멘선(Ludwig Ingwer Nommensen)으로 Bataks의 사도라는 분이다. 바탁족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가장 사나운 원주민 부족의 하나다. 네덜란드 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은 복음을 모루카스와 셀레베스에까지 전파되었다. 1896년부터 선교는 독립선교회들보다는 전적으로 개혁교회의 책임으로 생각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이 설교된 거의 모든 선교사들의 사역지들은 큰 추수를 보고해준다. 그래서 더 많은 일군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에 필요하게 되었다(.9:37,38). 아마도 우리는 그 왕국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설교되면 곧 마지막이 되리라고 한 그 날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24:14).

9. 흐뢴 판 프린스테러

와 네덜란드 국가교회

9.1 19세기 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분은 휠라우머 흐뢴 판 프린스테러(Guillaume Groen van Prinsterer)였다(1801-1876). 그는 빌더데이크(Bilderdijk)의 제자였다. 그는 단순히 혁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반혁명적이었다. 빌더데이크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을 혁명의 조련사라며 존경하였다. 그러나 흐뢴 판 프린스테러는 대혁명의 아들이요 수호자인 나폴레옹을, 독재자요 폭군이라 생각하였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흐뢴 판 프린스테러는 혁명에 대한 생각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의 폭력이라고 밝혔다. 그의 저서들 (불신과 혁명과 우리나라 역사 안내서)은 네덜란드(Dutch nation)를 경고하는 그의 용기만큼이나 그의 성경적인 이해를 잘 입증하였다. 그의 빈번한 외로운 투쟁은 자유주의의 패배와 카이퍼의 기독교 정치의 등장으로 결국 보상을 받았다. 사실 그는 A. 카이퍼 박사가 조직하고 이끌었던 반혁명당의 시조이다.

여러 해 동안 흐뢴(Groen)은 기독교교육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을 이끌었는데 분리와 함께 시작하였다. 그 분리파들은 그들의 자녀를 교회의 교리 안에서 세례언약에 복종하여 교육하기를 원하였다. 세상 어디서도 네덜란드에서처럼(지금까지도) 기독교교육이 인정받고 복을 받는 곳은 없다.

비록 강하게 분리를 지원하였고 자주 분리파의 예배에 참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흐뢴(Groen)은 국가교회 내부에 있으면서(from within) 개혁을 일으키려고 노력하는. 각성운동(Réveil)을 하는 사람이었고 각성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그는 결코 정식으로는 분리의 교회들과 연대하지는 않았다.

9.2 흐뢴은 세 일치양식이라고 부르는(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그리고 도르트신조) 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그의 방어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바른 위치로 이것들을 복귀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헛된 일이 되고 말았다.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사상의 영향아래서 국가와 교회간의 유대는 1852년에 마침내 끊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교회를 지배하던 왕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개혁 국가교회는 에라스무스의 관용의 교회로 남았다. 모든 교파와 모든 관점이 분열 위에다 일치를 받아들이는 한 환영을 받았다. 경건주의와 신비주의 신앙들은 사람의 신앙적인 흥분과 경험을 강조하였으며; 현대주의 관점은 성경비평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만큼 잘 기본적인 진리에까지 성경의 복음의 축소가 즉 이 모든 것들이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적들은 과학적으로 설명하였고, 부활을 부정하였다. 심지어 진화론 개념을 이용하여 성경을 설명하였다.

전체적으로 네덜란드 국가교회(Dutch state church) 안에서 거짓과 진리가 같은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평화로워져가는 대신에 교회는 근대주의자의 혁신파와 정통 보수파 사이에 점점 더 맹렬한 투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흐뢴은 남았고 교회에 있는 근대주의를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1864년에 그는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복귀하기를 촉구하는 신앙고백회(a Confessional Society)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9.3 예수님의 시대에, 유대 민족교회(the Jewish national church)는 모든 당파와 견해들을 받아들였다.(바리새파, 사두개파, 헤롯당, 열심당). 하지만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하신 개혁자이신 예수님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유사하게도 네덜란드 국가교회는 모든 교훈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분리파들은 말썽꾼들이라고 생각했다.

흐뢴과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말씀의 수납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참으로 세계의 신앙고백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반대에 마주쳤다. 자주 흐뢴은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다. 그는 군대 없는 장군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좌우명은 한 사람의 정치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고백자(Not a politician, but a confessor)”였다. 1876년에 그가 죽자, 모든 것이 잃은 것처럼 보였다. 카이퍼는 남부 프랑스에서 심각한 침체에서 회복되어 활동적인 참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흐뢴은 분리파에게 축복만은 아니었다. 그는 또한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그의 후계자인 A. 카이퍼의 사역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1816년에 왕이 세운 교회 규칙의 속박과 관용이라는 적그리스도의 복음의 덫에서 탈출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흐뢴의 수고는 큰 열매를 맺었다.

10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 ·1837-1920

10.1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1837-1920)는 마슬루이스(Maassluis, 네덜란드 로테르담 근방)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레이든에서, 그는 고전어와 신학을 흐로닝허 신학교의 숄터(Scholten) 교수와 같은 근대주의자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카이퍼 자신은 이런 공부가 그에게서 그의 부모님의 신앙을 어떻게 도적질해갔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는 그가 가진 신앙을 흙이 얕은 땅에 떨어져서, 근대주의 신학의 의심의 영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메말라버린 씨앗에 비교하였다. 비록 그는 신앙을 버리지도 교회를 떠나지도 않았지만 개혁신앙의 오랜 보배에 있어서는 거의 남지 않았다. 나중 출판물에서 그는 근대주의자의 신학안에서 주님과 구세주를 부인하게 된 죄를 고백하였다.

10.2 그는 흐로닝헌의 대학에 의해 마련된 소론시험에서 그가 우승하게 되어 학구적인 그의 능력을 입증하였다. 이 소논문(essay)은 칼빈의 저작들과 폴란드의 개혁자 존 아 라스코의 저서들에서 발견한 대로(as) 교회의 개념을 다루었다. 이 소논문을 위해 자료와 자원을 찾으려고 어떻게 힘썼는가 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주목할만하다. 카이퍼는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신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는 그 모든 것 때문에 아주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기도를 시작하였다. 참으로 그의 생애에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에게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10.3 그 시대 동안 젊은 카이퍼는 1853년에 간행되었던 샬롯터 M. 용허(Charlotte M. Yonge)The Heir of Redclyffe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소설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책은 성격이 크게 다른 두 사람이 완고하게 충돌하고 투쟁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그 두 형제는 결국 한쪽 형제의 힘으로가 아니라 겉보기에 더 약해보이는 형제의 신앙의 힘으로 화해하게 된다. 카이퍼는 이 소설의 강렬한 절정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후에 이렇게 적었다. “그 순간에 나는 온통 내 영혼 속에 살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중에서야 충분히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 시간부터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전에 귀하게 여겼던 것들을 경멸하였고, 한때 경멸하였던 것을 추구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은 오래도록 감명을 남겼다.

10.4 베스트(Beesd)라는 마을에 있는 첫 번 회중 가운데서 카이퍼는 보통 사람의 신앙심을 그들의 비밀집회(Pietje Balthus)에서 배워 알게 되었다. 이 젊은 여인의 신앙의 확실함은 카이퍼를 복음에 대한 냉담한 마음에서 충분한 관심을 갖도록 움직였다. 그는 다른 빛 가운데서 캘빈을 읽기를 시작하였다. 우트레히트에서 교회를 섬기는 동안에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근대주의 신학자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근대주의(modernism)에서 떠나버렸다.

10.5 암스테르담 교회로 옮긴 후에, 카이퍼의 큰 은사와 재능들은 더욱 더(even more) 분명하게 되었다. 그는 반혁명정치의 지도자로서 흐뢴 판 프린스테러를 계승하였다. 그리고 1872년에 그는 반혁명정당을 세웠다. 그는 또한 자유 기독교 교육(이른바 school struggle이라고 함)을 위한 무시무시한 투사였다. 그는 다작의 저자였으며 그의 주간지 De Heraut(전달자, The Herald)는 많은 가정에 보급되었다. 이 주간지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 안에 있는 개혁신앙의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인 자유주의와 신학적인 근대주의, 그리고 국립대학(the state universities)에 있는 과학예찬에 대항하여 싸웠다.

10.6 하나의 이정표가 1880년에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의 개교와 더불어 도래하였다. 이 기회에 카이퍼는 그의 중요한 웅변, Souvereiniteit In Eigen Kring(영역주권, Sphere Sovereignty)을 했다. 거기에서 그는 선포하였다.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위하여 주장하지 않는 것이란 한 치도 없다

1891년에 그는 기독교 사회 협의회(Christian Social Congress) 첫모임에서(at the first-ever) 시작 인사말을 했다 . 주제는 사회적인 의문과 기독교 신앙(The Social Question and the Christian Religion)이었다. 종종 그는 공개적으로 사회생활을 위해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성을 변호하였고 종종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추종자들과 격렬하게 토론하였다. 그의 유명한 진술 가운데 하나는 만일 어떤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확실히 기독교 신앙이다!”

카이퍼가 1899년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에서(for) 행한 교장 연설(rectorial address)은 진화를 다루었다. 그는 주장하였다. “우리의 19세기는 진화론의 최면에 걸려 무감각해져 있다그리고서 진화는 최근의 인위적인 사상의 체계이며 새롭게 꾸며진 이론이며 새롭게 일어난 신앙인데, 그것은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반대하며 우리의 생활 전부를 포위하고 지배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 이론은 폐허가 된 기독교 신앙고백에다 자기 성전을 세우고 싶어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면서 끝을 맺었다. “언제나 있어왔고, 여전히 있으며 유지될 것은 이 세상의 전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앙고백의 출발점은 진화론에 반대하여 옹호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모든 기독교신앙고백의 항목들 중에 맨 먼저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계속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10.7 그의 정치 경력의 절정은 1901-1905년이었는데, 그때 그는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었다. 연설가로서 그리고 신문기고가로서의 그의 재능 때문에 그는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대체적으로 네덜란드 국가를 인도하기에 아주 적합하였다. 비록 그가 모든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듯이 결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인도 아래서 네덜란드(Dutch)국가는 놀라운 사회적, 정치적, 교회적인 칼빈주의자의 회생을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 초기 동안 경험하였다. 카이퍼는 참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평민의 지도자였다.

11. 돌레앙티- 두 번째 분리

11.1 첫 번 분리와 바빌론에서 귀환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인도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은 바벨(Babel)에서 예를 들자면 다니엘을 기억한다. 두 번째 바벨에서 귀환은 에스라가 이끌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봉사를 기억하였다. 후에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그 이유는 첫 번에 귀환한 유대인들 가운데 개혁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직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도성의 방벽들이 복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도 1834년의 첫 번 분리는 1886년의 두 번째 분리, 돌레앙티(Doleantie)로 이어졌다. 다시금 주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으며 1834년 이후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 남아있던 많은 사람들을 구출하셨다. 그들 가운데 아브라함 카이퍼가 있었는데, 그는 한 어린 소년으로서 1837년에 마슬루이스(Maassluis)의 거짓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1880년 이후로 그가 자유 대학에서 교수였기 때문에 장로로 암스테르담의 교회를 섬겼다.

11.2 돌레앙티를 향하여(Toward the Doleantie).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이 근대주의에 대항하여 암스테르담 당회의 투쟁 가운데서 끝까지 저항하였다.

a. 증명서 발행. 암스테르담 당회는 주의 만찬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그래서 그들의 근대주의 신앙을 고백하기를 원하는 교리문답 학생들이 근대주의 목사가 있는 이웃하고 있는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그 시행을 반대하였다. 본당회(The home consistory)는 그와 같은 학생들의 선행(good conduct)에 관하여 증서를 발행하도록 압력을 받았고 거기다 후일에 수찬 회원으로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한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 교리문답 학생들은 바로 그런 목적 때문에 자주 코흐 안 더 짠(Koog aan de Zaan)이라는 이웃하고 있는 도시에 있는 교회로 갔다.

이 문제는 1885년에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암스테르담의 정통 당회는 이들 증서 발행을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더 이상 그러한 거짓과 협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행을 조장하는 근대주의자 목사들에 반대하는 조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그런 증서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정하였다. 불평들이 이 결정에 반대하여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자 노회는 암스테르담 교회가 협력하도록 지시하였고 188618일 전에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만일 증명서 발행이 유일하게 토론된 논쟁이었었더라면 훨씬 더 나아졌을 것이다. 결국 이런 투쟁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고백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참으로 슬프게도, 다른 논쟁들이 교회의 물을 흐리게 만들었다.

b 소유권 문제(The Ownership Question). 암스테르담 당회는 노회와의 충돌이 광범하게 미치게 될 결과를 예측하였다. 그래서 18851114일 회합에서 교회위원들이(교회건물을 책임 맡은 위원회) 당회에 직접적으로 책임을 유지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그것은 회중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도록 함께 돌보았다.” 136명의 당회회원 중에 80명이 찬성하였다: 5명의 목사(28명의 목사가 있었다), 42명의 장로(카이퍼 박사를 포함하여), 그리고 33명의 집사들.

188614일에 이들 회원들은 노회에서 정직을 당하였다. 이 노회는 암스테르담 당회가 발행하기를 거절하였던 그 증명서를 발행해주었다. 그리고 모든 건물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비록 주된 논쟁은 개혁교리의 유지였고 교회 재산의 소유권은 아니었으나 슬프게도 이 사건들은 토론을 영적인 문제에서 누가 건물을 소유하는가?’라는 물질적인 데로 이동시켰다. 이것은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

11.3 정직을 당한 직분자들은 노회의 이런 행위들과 결정들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1886121일의 판결에서 총회는 정직을 확정하면서 이러한 호소들을 거부하였다. 1886년 내내, 이들 직분자들은 그들의 직분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였다.

18861216일 회합에서 암스테르담 당회는 교회회의 계급체제(synodical hierarchy)라는 멍에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Nederduits-Gereformeerde Kerk(dolerend) (네덜란드 개혁교회, 의견을 달리하는)라고 불렀다.

암스테르담에서 두 번째 분리의 지도자들로는 카이퍼 박사, F.L. 루트허스(F.L. Rutgers) 박사, 그리고 A.F. 더 사포르닌 로흐만(A.F. De Savornin Lohman(후에 정치정당을 설립하였다)

11.4 네덜란드 말 dolerend의 뿌리는 condolence같은 한 단어 속에서 찾아볼 수 있고, 슬픔이나 불평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들 분리자들은 그들의 법적인 소유를 빼앗기게 되자 법정에 호소하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합법적인 연속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호소는 크게 거절당하였다. 왜냐하면 법정은 그 분리자들이 그들 자신들을 국가적인 조직으로부터 분리했었고 하나의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 법정절차가 결론에 이르게 된 후 dolerend(의견을 달리하는)라는 타이틀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11.5 18862월에는 이미 포르투이전(Voorthuizen)과 코트웨이크(Kootwijk)에 있는 회중들의 당회들은 대회의 회의들(synodical boards)과 결렬되었다. 곧 두 번째 분리는 힘을 얻었다. 그리고 많은 당회들은 암스테르담의 모범을 따랐다. 그래서 국가교회와 결별하였다. 첫 번째 분리 후에 있었던 경우처럼 이제 그 정부는 대회의 회의들(synodical boards)을 돕도록 부탁을 받았다. 훨씬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광신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강하게 분리자들을 적대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와 불명예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신앙이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었다는 믿음에 견고하게 되었다.

11.6 누가 교회를 다스리는가? 1816년에 공포된 교회를 위한 왕의 법규는 지역 회중을 지배하는 최고 회의로서 전국적인 회의를 가진 국가교회의 분할로 단순하게 생각하였다. 대조적으로 분리파의 교회들은 성경과 일치하게 주장하였는데,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정부 아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지역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고전 12:13, 27).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는 일곱으로 나누어진 촛대이고(1), 구약에 있듯이 일곱 줄기를 가진 한 촛대가 아니다.

1834년에는, 많은 개인들이 벨직 신앙고백서 29항에 따라 거짓으로 드러난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1886년에는, 많은 당회들(직분자들)은 해야 할 그들의 권리와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을 교회의 회의들의 계급체제의 법규에서 자유롭게 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카이퍼를 포함한)은 거짓된 조직에 참된 교회로 남아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지될 수 없었다. 그 논법이 도리어 부자연스러웠고 사실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1834년의 분리자들과 1886년의 분리자들 사이에 일치를 크게 방해하였다.

1834년과 1886년의 주된 논쟁점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이 교회를 다스리고 있는가 였다. 모든 참된 개혁의 기본적인 원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2. 1892년의 연합

12.1 1834년의 약속대로, 첫 분리교회는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는 두 번째 분리교회(the Nederduits Gereformeerde Kerken)와 교제하려고 애썼다. 후자는 그들이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죄를 그렇게 오래도록 관용한 죄를 인정하였다.

12.2 1834년의 첫 번 분리 교회와 두 번째 분리교회(1886)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a. 네덜란드 개혁교회와의 관계였다.

1834: 벨직 신앙고백 29항에 따라 이 교회를 거짓되다고 선언하였다.

1886: 1816년의 왕의 법규 안에 있는 이 교회의 조직이 거짓되다고 선언하였다.

b. 목사에 대한 훈련:

1834: 목사들은 교회를 위하여 교회에 의해 훈련받아야 한다.

1886: 목사의 훈련은 (독립된) 신학교의 업무이다.

12.3 일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고백서들(세 일치신조)안에서 신앙 가운데 있는 일치에 기초해서 마련되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근본적인 단절이 필요했다는 데 일치하였다. 비록 이 교파가 거짓교회로 간주되야 했는지 여부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판단에 남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가 캄펀에 있는 신학교도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만큼 장래의 목사를 위한 훈련기관으로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1834년 첫 분리 교회들)의 대회와 Nederduits-gereformeerde kerk(1886년 두 번째 분리 교회들)1892617일 암스테르담에서 공동회의(joint session)로 만났다. 1834년의 분리의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조상인 판 펠전(S. Van Velzen) 목사는 그 회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연합하게 된 대회에서 그의 아들이 그분의 연설을 읽었다. W.H. 히스펀(Gisvjs)A. 카이퍼 박사 사이의 악수는 연합을 조인했다. 그리고 이들 교회들은 네덜란드 개혁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A교회(1834년의 분리 교회)B교회(1886년의 분리교회) 사이의 지역의 수준에서 일치가 어디서나 사실이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일이 걸렸다.

12.4 1892년의 연합에 모두가 합류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강하게 중생과 세례에 대한 카이퍼의 가르침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연합은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이었기에 된 것이 아니라, 신앙과 고백에서 일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영향력있는 카이퍼가 있었다 해도, 그의 사상과 가르침들이 1834년의 교회와 1886년의 교회 사이의 연합의 기초가 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카이퍼의 가르침의 영향력을 염려하였다. 그것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고백과 온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새로 연합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는 이런 염려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첫 분리교회의 많은 회원들은 1869년 이후로 기독교 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 북미에서는 자유 개혁교회)의 회원이었었는데 그것을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목사를 훈련하는 학교는 아펠도른 시에 세워졌다.

13. 일부 카이퍼의 가르침에 반론

13.1 1892년에 연합한 후 마침내 카이퍼 박사의 어떤 가르침들에 반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위대한 카이퍼조차도 19세기에 기독교 교회에 너무나 강하게 영향을 미친 합리주의와 주지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식에 반대하여 일어난 공론과 모든 거만한 것을 파괴하려는 투쟁의 가혹함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즉 그는 모든 생각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고 사로잡아 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았다(고후10:5). 사도는 고린도의 나누인 회중들에게 경고하였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이 본문에서 성경은 교회의 많은 비참과 오만의 근본적인 원인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13.2 이미 중세 스콜라철학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완전히 복종시키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너무도 자주 스콜라철학은 그 자신을 그 권위 위에 있고 그 권위를 초월한 그의 학문 안에 두었다. 결과적으로 이 방법의 연장은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에다 사람의 합리적인발견물들을 놓았다. 사람의 상상은 성경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학의 학문 체계와 용어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성경적인 학문은 항상 경건하게 성경에 복종을 유지해야만 한다. 즉 할 수 있는 한 성경의 언어와 용법에 가까운 말과 용법을 사용한다. 무엇보다 성경적인 학문은 교회를 봉사해야만 한다. 학자의 신학 그 자체는 결합하지 않고 분할을 가져오고 자주 이탈을 가져온다.

13.3 개혁체계신학으로서 카이퍼의 칼빈주의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진보적인 교사, 숄턴 교수의 방법론을 상기시켜준다. 그는 성경과 고백서의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면서 너무 멀리 가버렸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물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과 성경적인 고백서들을 받아들인 신자들이 신학의 합리적인 체계의 개념과 생각에 의존하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지를 아주 두려워해야 한다.

도르트 회의는 이미 인식하고 이런 위험을 다루었다. 프라네커(Franeker) 대학에서 교수인 마코비우스(Maccovius)는 그의 가르침의 용어사용이 성경 언어에 충분히 가깝지 않았기 때문에 권고를 받았다. 회의는 그에게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훈계하였다. 그래서 교회 안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반론이 카이퍼의 세 가지 가르침, 칭의, 중생 그리고 세례에 대한 그의 생각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13.4 카이퍼는 영원으로부터 칭의의 교리를 가르쳤다. 그에 따르면 신자들은 오직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런 은사를 알게 될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은 참된 용서를 간구할 필요는 없고 단지 그들의 죄의 용서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특별히 루카스 린데붐(Lucas Lindeboom, 1845-1933)박사가 있는데 그는 카이퍼의 신학체계의 스콜라철학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이 신학자는 1834년 분리된 교회에서 목회자였다. 그리고 후에 캄펜 신학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의 자신의 사역의 특징이라면 복음 설교를 위한 그의 큰 열정이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괄목할만하게 복을 받았다. 그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과 성인들을 보살피는 여러 기독교 기구들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정신의학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러므로 그런 점에서 그는 그 시대를 멀찍이 앞서있었다.

린데붐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만 아니라 개혁 신앙고백서들도 영원으로부터 칭의를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오히려 둘 다가 믿음으로 받은 칭의의 복음 선포를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카이퍼의 사상의 합리주의를 지적하였는데,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계시하신 것보다 그 자기 생각으로 더 멀리 가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줌으로 지적하였다. 그 위험은 아주 실재이다. 그런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생각은 결국 사람으로 하나님의 비밀에 돌진하게 이끈다. 십자가의 미련함은 틀림없이 학자의 지혜가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학자는 십자가의 능력을 손상시킨다.

린드붐 교수는 카이퍼의 가르침 때문에 깊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적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자비로우시오니, 그분께서는 카이퍼박사와 그를 그의 길에서 고집하도록 인정하는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단순함으로 돌이켜주시기를!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 자유대학과 개혁교회의 신학대학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무서운 생각! 어떤 사람이 물을지도 모른다. 이 유력한 사람들이 회개할 가망이 있는가?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언제나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이것들은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감정적이고 예언적인 말들이다. 즉 오늘날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은 현대주의자의 생각들을 장려하고 있다. 린데붐 교수는 많은 교회의 투쟁의 주된 이유 즉 기록된 것을 넘어 생각하는 것을(고전 4:6)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13.5 심각한 반론이 일어난 카이퍼의 가르침의 두 번째는 중생에 관한 것이다. 카이퍼는 중생을 복음설교라는 수단 없이 성령께서 직접 마음에 심은 사람에게 있는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새로운 병원균은 하나님 말씀의 설교로 일깨워지기 전까지 여러 해 동안 잠복하여 있었다. 카이퍼의 아들, Jr. A. 카이퍼 박사는 그의 아버지 보다 더 나갔다. 그래서 넌지시 암시하기를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회중들을 박해하고 있었을 때에 이미 중생하였다고 했다.

린데붐 교수는 이런 이유가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개혁 신앙고백서들을 반대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그 자신을 순종하여 복종시키지 않는 신학적인 학문 활동을 하고 있는 카이퍼를 고소하였다. 그런 가르침들은 둘로 나뉘었고, 불화를 일으켰으며 전적으로 거만하다.(고전 4:6)

a.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이해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왜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가? 바리새인들은 덮개가 그들의 마음을 덮은 채로 모세의 책들을 읽기 때문이다.(고후 3:15,16). 그들은 살아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고 그분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완고한 마음으로 그들은 하늘에 계시는 그들의 아버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그들 자신을 아주 강하게 근거를 두었던 분 그리고 열렬하게 마음을 빼앗긴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분에 대해 더욱 더 듣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 듣기를 계속하였고 그분에게서 배우기를 계속하였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8:43,47)

b.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문구는 예수님의 설교로 일깨워지기 위해 어떤 신비하게 받은 중생의 세균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적용된.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낙원에서 처음 계시하셨고 이후 시대에는 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선포되도록 하셨으며 성전에서 봉사를 통해서 미리 비춰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복음에 의해 선포된 은혜로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주의를 돌리고 있었. 그러한 신자는 예수님께서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안에서 그 옛 복음의 약속의 완성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런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선물로 주신 자들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온 은혜의 말씀의 기초에 근거한 믿음의 성령 안에서 거듭났다(8:37ff). 제자들은 아무 간사한 것이 없는 저 신자들 가운데 있었다(1:47).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신학적인 이유로 아주 소경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 자신들을 모세의 옛 언약에서 너무 멀리 놓았다. 그래서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중생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c.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중생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에스겔 36:24-27절에서 그 사상 자체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것은 겸손하고 그리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례받기를 원하는 세금 징수원과 죄인의 계열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교만한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또한 필요하였다.

d. 중생은 우리 안에서 일깨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의 설교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벨직 24). 중생은 영생의 씨가 갑작스런 심기(a sudden planting)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날마다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셨는데, 그들이 어리석었고 이해하는 것이 둔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모세만이라도 이해하였더라면 그들은 주님께서 고난당하시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는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부활 이후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이해하게 해주셨다(24:45).

e. 스스로 고안해낸 것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자리라고는 없는 비성경적인 사고의 체계로 완고해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13.6 카이퍼의 가르침의 세 번째는 개혁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나 그것은 또한 많은 사람에게 강하게 반대를 받았는데 그것은 세례에 관한 것이었다. 카이퍼는 세례가 자녀안에 이미 베풀어진 중생을 인친다고 가르쳤다. 세례는 믿을 수 있도록 불어넣어진 능력 즉 하나의 능력이 나면서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졌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린데붐 교수와 그와 함께 한 많은 다른 사람들은 세례가 그 자녀에게 뭔가가 선물로 베풀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인 신뢰할만한 약속들을 상징하고 보증한다. 그 안에서 자녀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세례는 가정되고 불확실한 중생에 근거해서 집행되는 것이 아니고 주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다.

린데붐 교수는 가정된 중생을 보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물었다. “중생하지 못한 자녀에게 베푸는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과 고백에 따라 우리는 어떤 것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중생과 중생하지 못한 자녀를 언약 안에서 출생하도록 하신 그분께 그리고 세례의 성례, 즉 그분의 언약의 성례를 모든 그 자녀들에게 베풀도록 우리를 명하신 그분께 복종해야만 한다. 상상해보라. 만일 한 자녀가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자녀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외친다. 아니요. 그러나 나는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 모두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중생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무슨 덜떨어진 이론이, 무슨 교훈적인 지혜가 그 종에 의해서 제안되었는가(What a backward theory; what didactic wisdom produced by the servant)! 이런 주관적인 추리가 위험하고 잘못이라는 것이 얼마나 분명한가!”

13.7 린데붐 교수는 철학적인 지혜에서 참되고 성경적인 신학으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회중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추상적인 관념의 메마른 체제로 날조하는 인간의 지혜의 말로 가르쳐지지 않아야만 했고,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는 말씀과 같이 성령님에게서 오는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다. 린데붐 교수는 개혁교회가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화되었으며 아무라도 그 말을 변경시킬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무엇이든지 그런 변경들은 항상 큰 손상을 가져올 것이다.

그는 적었다. “참된 그리스도인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힘과 권위로 말씀한다. 비록 말씀이 우리를 수치와 죄의 수렁으로 내동댕이칠지라도, 그것은 깨끗하게 하며 거룩하게 하며, 신자에게 모든 위로의 원천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의 생각과 체계는 아주 감명을 주지만 그것들은 결코 참되고 거룩한 열심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들은 결코 시편을 그들의 입술에 두지 못한다. 그들은 결코 마음들을 하나로 연합시키지 못한다. 오늘시대의 사람들은 짓눌려있다. 즉 영적생활을 하는 기쁨의 흔적이 거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된 주된 이유가 지성주의의 학대라고 한다. 주지주의는 철학적인 학문과 신학을 가지고 개혁교회에 아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려고 힘쓴다. 그러므로 모든 회중을 경계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이다. 자유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남아있으라!”

13.8 린데붐 교수는 19세기 개혁교회와 관련하여 과학과 학문예찬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선명하게 인식하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외로운 것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제한되었고 그는 냉소를 당하였다. 1940년대까지는 그의 말이 심각하게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자유의 법령(1944) 부분을 읽어보자. “우리는 수치에서 자신을 자유케 한다. 그 수치는 앞서 언급한 교리적 결정에 포함되고 1892년의 연합 전후의 교회를 섬겼던 사상에 반대하여 과거에 공개적으로 싸우던 목사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그 목사들의 봉사는 복음에서 나오는 풍성한 복을 만끽하게 했다.”

13.9 20세기 기독교의 거의 전부가 자율적이고, 자기를 의지하는 과학신학(science of theology)의 권세 아래 있다. 사람의 생각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래서 그 말씀은 이제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제는 유일한 진리는 과학적인 진리라고 주장한다.

14. 1905년 우트레흐트 회의(The Synod of Utrecht)

14.1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가 우트레흐트에서 1905년에 개최되었는데, 카이퍼 박사의 가르침에 반대를 그 의제로 준비하였다. 회의의 선언은 린데붐 교수도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 채택하였다. 이 선언은 하나의 교리적인 공포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평화를 회복하고 지키려는 시도였다. 총회의 회원의 한 사람이 총회의 결의가 제시하는 바를 요구하였고 그래서 그는 이런 선언에 동의했을 뿐인데 그것을 화해를 위한 기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1905년의 화해선언(Pacification Declaratio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총회가 있기 조금 전에 카이퍼 박사는 선거운동에서 떨어졌고 네덜란드 수상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카이퍼의 사상을 철저하게 정죄하는 대신에 총회는 온건한 교정(mile correction)에 만족하였다.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에 따라 언약의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되고 거룩하여졌다고 여겨져야 하는데, 그들이 자라감에 따라 갖게 되는 그들의 생활과 사상에서 그 반대가 분명하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여겨야 한다. 그렇지만 세례가 가정된 중생이라는 근거위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은 좀 덜 정확한 말이다. 왜냐하면 세례를 위한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과 법령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정말 애매하다. 1905년의 개혁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로 들어올려진 그 신학체계를 철저하게 거부하지 않았다. 수년이 지난 후, 교회의 이런 태만이 정말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가 분명하게 되었다. 1942년에 이 화해선언은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의 교리로 선언이 되었다.

14.2 1905년 우트레흐트 총회는 모든 우상과 거짓된 예배가 제거되고 금지되도록,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멸망하게 되도록이라는 말을 벨직신앙고백서 36항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이 문장이 지워진 단락은 교회의 사역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해야하는 왕과 군주, 국가공직자들과 시민정부의 과업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억제하고 유지하는 과업은 공공질서에 국한하지 않고 교회와 교회의 사역을 보호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모든 우상과 거짓예배가 제거되고 금지되게 하고,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멸망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임하고 복음의 말씀이 어디에서나 설교되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에 요구하시는 대로 공경을 받으시고 섬김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a. 이 문장을 지워야할 필요가 있었는가? 1905년 우트레흐트는 이 말의 내용이 정부의 과업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확언하여 대답하였다. 하지만 19세기 개혁신자들은 재세례파의 비성경적인 관행에 반대하여 벨직신앙고백서를 공식화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문제와 국가의 문제를 구별하였으며 당회와 행정장관을 구별하였다. 그들은 권위를 경멸하는 사람과 혁명적인 재세례파로 오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의 영적이지 않은 열심이 성령님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모든 우상숭배자에 대적하는 힘과 폭력의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이런 열정은 스가랴 4:6절에 나오는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 . .”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가 된다. 개혁자들은 로마교회의 교리도 역시 반대하였다. 로마교회의 교리는 교회를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었으며 그 교회에게 전적으로 복종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오늘까지도 교황은 국제적인 정치관계에서 아주 활동적인 이유는 두 가지의 칼, 정부의 칼과 성령의 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개혁자들은 열광적인 행위와 교회의 정치를 모두 반대하였다. 즉 재세례파도 로마 가톨릭도 아니었다.

b. 그렇다면 그 대답은 무엇인가?

1. 1905년 총회는 이 말의 문맥을 잘못 읽었다. 마치 그들이 정부의 과업을 지시했다는 듯이 말이다. 만일 그것이 그런 뜻이었다면 그렇다면 더욱 삭제되어야 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이 말을 그들의 틀린 문맥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설교하는 일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역의 목적을 언급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사역을 방어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과업이다. 정부가 그 과업을 성취할 때 교회가 모든 우상과 거짓된 예배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정치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멸망당하게 하려는 것이다.

2. 본래 조항의 저자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말했을 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국제적인 권력과 폭력을 생각하였다.

3. 신앙의 고백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읽어야 한다. 그 문맥 속에서 읽으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읽으라.(말씀은 또한 정부 위에 세우고 그들의 유일한 과업과 지위를 준다). 이 말을 지워야할 필요는 없었다. 벨직신앙고백서에 이 변경을 모든 개혁교회들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4. 다니엘은 충성스럽게 페르시아의 이교도 왕을 섬겼으나 그의 친구들과 함께 그들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신상(金神像)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말라는 왕의 칙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사자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억하라. 그는 주님께서 그를 구출해주실지 여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단호하고 절대적인 싫습니다가 요구되었다.

5. 이교 정부는 또한 교회에 복이 되었다. 바로에 의해서 승진한 요셉은 야곱의 가족을 이집트에서 보전할 수 있었다. 우랜 후에 이집트는 노예의 집이 되었다. 히람은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는 일을 도왔다. 페르시아의 키루스는 에스라를 지원하였고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모든 도움으로 느헤미야를 준비시켰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지역 회중은 빌립보의 행정권의 보호를 받았다. 광적인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c. 벨직신앙고백서 36항은 정치적인 행동방침을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의 교회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부에 호소하는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당신들은 교회를 보호해야만 한다. 교회에서 폭동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여러분은 교회로부터 선한 것들만을 기대할 수 있다. 교회에서 공적인 기도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정부를 위한 기도이다(딤전2:1ff).

d. 그리스도인의 정치는 중립이나 진보적인 정치와 달리 성경적인 정치이다. 그들의 정치적인 과업에서 그리스도인의 정부는 주권자이신 주님, 주 하나님에 반대하는 일에 중립으로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의 과업은 단순히 복음의 설교와 시민의 권리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는 그 이상이다. 국가나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 우상을 대항하여 칼을 사용하는 것(이것이 중대한 징벌을 언급하는 것만은 아니다)이 정부의 과업이라고 우리는 고백한다. 국가나 민주주의나 모두가 사람의 주권적인 구주는 아니다. 이 시대의 정신을 따라 폭력적인 권력획득에 대항하여 보호하는 것, 예컨대 무법정신과 부도덕(동성애) 그리고 공공 보건(마약, 낙태)에서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과업이다. 이런 식으로 정부는 정치적인 책임을 사용하여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파멸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 정부는 너희에게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로마서 13:4절이 말씀하고 있는데, 제후 오렌지의 윌리엄은 이 말씀은 따라 충실하게 기독교 정치를 실천하였던 16세기 몇 안 되는 정치가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강력하게 네덜란드 개혁자인 다테누스(Dathenus)와 조용하고 법을 준수하는 로마 가톨릭 시민들을 박해하려는 의도로 헨트(Ghent)에서 모인 가장 극단적인 회의(the extremist consistory)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15. 아센 총회(The Synod of Assen) 1926

15.1 1924323일 일요일, J.G. Geelkerken 박사는 북 암스테르담 회중에게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3주일 설교를 전하였다. 헬케르컨 박사는 창세기 2, 3장의 역사성을 받아들였으나 전통적으로 문자적인 해석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해주기를 원하였다. 중동에 있는 동굴에서 나온 새로운 정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계속되는 과학적인 연구들이 이 장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를 포기하게 만들지나 않을까 해서 크게 염려하였다.

15.2 도리어 이 감각의 문제가 1926년 임시 아센 총회에서 다루어졌다. 헬케르컨 박사는 이렇게 선언하기를 요청하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말하는 뱀, 그리고 생명의 나무는 ,,, 창세기 2, 3장의 성경이야기의 분명한 목적에 따라,,, 참되고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오감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헬케르컨 박사의 견해, 벨직 4, 5항에서 고백한대로 성경의 권위를 반박하지 않고 이런 사실들이 오감으로 관찰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다는 견해는 거부되어야만 한다.”

15.3 헬케르컨 박사는 이 선언에 서명하기를 거절하였으며 그래서 총회에서 정직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를 정직한 일은 북 암스테르담 지역교회의 당회의 책임과 충돌하였다. 총회는 직분자를 정직시킬 아무 권한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1926년 아센 총회가 개혁신앙을 위한 1886년의 두 번째 분리의 많은 혜택을 허락하였다고 말해야만 한다.

캄펜에 있는 신학대학 교수인 S. 흐레이다누스 박사는 권징의 불법적인 시행에 반대하여 투표하였다. 그는 이런 행위를 도르트 교회질서에 반대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교회질서는 당회에 의한 충고에 주의하지 않은 직분자는 집사가 함께 한 그들 자신의 당회와 이웃하는 교회의 집사가 함께한 당회의 판결에 의해서 직분에서 정직할 수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찬양의 책 669페이지, 교회질서 71조항). 총회가 아니라 지역당회가 고집 센 직분자를 정직할 책임과 권위를 가진다. 흐레이다누스 박사는 교회를 위협하는 새로운 악의 징후, 새로운 교회정치의 그 징후를 바르게 진단한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였다. 1944년의 자유의 사건은 그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15.4 헬케르컨 박사와 그의 지지자들은 처음으로 다른 개혁 교단을 세웠다. 후에 이 교단은 19세기 국가교회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연대하였다.

15.5 1926년 총회 아센의 교회의 정치적인 결정은 중요한 교회적인 결정들이다. 그 논제가 해석의 자유와 같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권위가 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을 설명하신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은 사람의 신학이나 과학적인 발견들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1926년 아센은 자율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의 체계에 대항한 투쟁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 사상의 체계란 그 자신의 권위라는 힘에 의해서 성경 이야기, 성경의 내용과 메시지의 의미를 그 세목들(그들의 감싼 것들)로부터 풀어헤치기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 신학의 체계는 그리스도의 회중을 다시금 신학의 전문가들의 수고에 의존하게 만들려고 했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한다 “. . .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 .”(벧후.1:20)

1926년 아센은 성경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체 때문에 분명하며 이해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시기였다. 켈빈은 기독교강요 1.7.2에서 “(성경)은 교회의 신조에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우리는 어떻게 설득이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될 때. 그것은 마치 어떻게 우리가 빛과 어둠을 흰 것과 검은 것을 구별하며 달콤한 것과 쓴 것을 구별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느냐고 질문을 받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그것의 진상의 분명한 증거와 같이 성경은 그것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희고 검은 것이 그들의 색을 드러내듯이, 달콤하고 쓴 것이 그들의 맛을 내는 것처럼성경을 듣게 됨으로 우리는 성경을 믿는 것을 배운다. 만일 여러분이 햇볕에 서있다면 그의 따뜻함을 느끼고 그 빛을 보게 된다. 그래서 도르트 총회는 진리의 명확함을 묘사하였다.

a. 분명히 내가 태양이 뜨고 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퇴보와 무지의 잘못이 없다. 아무도 현재 과학적인 지식의 상태를 모르는 것에 대해서 나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25세기나 26세기에 발굴의 결과에 따라, 그 결말은 20세기 인간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던 사실을 끌어내렸을 때 그것은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럽게 될 것이다.

b. 진화론의 불신의 바알(the Baal)은 사람의 과학의 개념에 따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사역에 관하여 사실을 계시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오만하게 거절한다. 창조와 사람의 역사는 사라이 죄 가운데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대 파멸이라는 거대한 결말을 계시한다.

왜 이런 사실들을 무시하는가? 성경이 영혼과 종교를 위한 책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전능하신 아버지,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의 존재는 더 이상 여기 땅에서 사는 우리 현실의 일상생활에 타당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c. 신명기 5:8절의 땅 아래 물은 신명기 4:18절의 물고기가 잡히는 물이다.

1926년 아센의 결정, 헬케르컨 박사의 관점을 부인하는, 1967년에 개혁교회(대회적인)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그들은 이들 교회들과 함께 더 이상 어떤 교리의 권위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을 비신화화하려고 시도하는 현대 신학에 대한 승리였다. 과학 속에 있는 진화론의 불신앙의 폭력은 구원의 역사라는 사실들을 포기하도록 끌어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장 훌륭한 가르침의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누가 이런 본보기들이 우리를 여전히 가르쳐도 좋다는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15.6 성경은 하나의 역사책이다. 기독교 신앙은 사실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설교는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 또한 헛되다”(고전15:14). 디모데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에서 바울은 특별히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딤전1:20) 그리고 빌레도를 언급했는데, 그의 말은 암(cancer)처럼 퍼질 것이다”(딤후 2:17). 이 사람들은 부활이 이미 일어나버렸다고 설교하였다(그들 자신의 마음에 - 영지주의), “그래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8).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더 심각한 불경건으로 나가게 할 모독스럽고 헛된 수다와 다를 것이 없었다(딤후2:16). 성경의 기적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셨고 여전히 행하실 모든 것들이 하찮게 여겨졌고 무시당하였다. 새로운 신학은 암처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에 손상을 입혔다. 그분의 인자한 사랑과 은혜로 죄와 비참에서 사람들을 구하려고 찾으시는 하나님을 가리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이런 암으로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떠오른 도끼와 말하는 나귀에 경멸하여 비웃을 수밖에 없게 된다.

오늘날의 현대신학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한다. 바울은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2:19). 베드로는 적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구원의 역사라는 사실이 뒤집혀질 때 그때 또한 신자들이 살아야만 하는 규범도 변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사악한 자의 잘못을 말하였다(벧후 3:17). 사도 유다는 그것을 더 강하게 적어놓았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다서 4). 과거에는 동성애는 변태로 생각이 되었다(1:26,27) 그러나 오늘날 성의 관념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자신들을 감히 개혁주의자라고 여전히 부르는 자들조차도 동성애를 정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요한일서 4:1-6절에서, 독자들에게 하나님 안에 진리 안에 머물라고 훈계하면서 사도는 거짓과 참 사이의 선명한 구별을 그리고 있다. 성경은 모든 세대의 교회를 위하여 기록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타당한 하나님의 말씀이 각 세대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투쟁을 위하여 있는지를 주의하는 것은 주목할만하고 위로가 된다.

이것이 성경의 명료함에 대한 린데붐 교수의 변호의 핵심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 있지 않다. 즉 그분의 말씀은 여러분 가까이에 여러분의 입과 여러분의 마음에 있다(.10:8; 30:11).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묵상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공부할 수 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17:27).

16. 회복(revival)

16.1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부흥을 네덜란드에 있는 개혁교회들에게 주셨다. 하나의 강력한 개혁의 운동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되돌아가려고 일어난 것이다. 이런 운동은 세 번째 분리, 1944년의 해방(the Liberation)의 배경을 이루었다. 그 해방은 이 운동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16.2 역사적으로, 개혁운동은 1834년과 1886년 분리파의 개혁신앙고백과 19세기 마지막 해에 칼빈주의자 카이퍼와 바빙크의 각성운동(Réveil)의 개혁 신앙고백에 대한 새로워진 관심에서 그 뿌리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카이퍼의 비성경적인 가르침 특히 하나님의 언약과 세례에 관한 생각은 거부하였다. 이어서 린데붐 교수의 가르침과 카이퍼의 작품에서 스콜라 철학은 실질적이고 예언적인 살아있는 주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너무나 크게 방해하였고 그 말씀을 일련의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논쟁으로 만들었는데, 그것들이 무엇인지 분석되고 폭로되었다.

그의 작품들의 큰 줄기에서 카이퍼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개혁주의) 사상의 체계로 축소시킴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의 지혜와 섞었다.(고전 2:5,7,13), 즉 신앙고백들은 하나의 메마른 체계요 이론적인 진리로 가치를 떨어뜨렸다. 우리는 합리주의의 영향 아래서 17, 18세기에 만연했던 정신을 상기하게 된다. 카이퍼가 죽은 다음 해에(1920), 영적인 퇴보와 세속화가 교회로 슬며시 기어들어왔다. 그래서 이전 세기에 시작하였던 사람의 이성을 숭배하는 것이 서부유럽의 사회에 대하여 저항할 수 없는 침해를 계속하였다. 개혁교회들이 이 모든 것을 방어하기에는 어렸다.

16.3 이러한 개혁운동(ca. 1926)의 지도자들 가운데 속한다고 여겨지는 분들이 있다. D.H.Th. 폴렌호펀(Vollenhoven)박사와 그의 동료인 H. 도예베르트(Dooyeweerd) 박사, 비헤케르커(Biggekerke)에 있는 학교 교사인 A. 얀서(Janse), 그리고 둘 다 캄펀에 있는 신학대학에서 교수인 K. 스킬더(Schilder)S. 흐레이다누스(Greijdanus)이다.

16.4 D.H.Th. 폴렌호펀(Vollenhoven)박사와 H. 도예베르트(Dooyeweerd)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철학적인 체계를 발전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이 체계는 칼빈주의 철학 혹은 암스테르담 철학의 학파로 알려져있다.

a. 철학(지식애)은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조사하는 학문적인 분야이다. 개혁주의 철학자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지식을 얻는가?” “사회란 무엇인가? 역사, 언어, 경제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들의 빛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b. 폴렌호펀과 도예베르트의 철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진술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모든 과학 이론의 사고와 지식은 신뢰할 수 있고 실제적이고 살아있는 지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둔 비과학적이고 실천적이고, 불변하는 이해에 뒤따른다. 과학자나 학자 역시도 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며, 땅에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과학적인 고찰을 시작하기 전일지라도 들어야 한다. 스콜라철학과 합리주의는 사상의 죽은 체계들이다. 그것들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이성에 굴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고후10:5).

c. 이들 칼빈주의 철학은 계몽운동의 주장을 거부하였는데, 과학적(scientific)이란 편견 없이(without prejudice)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거부하였다. 사람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분과 친교를 가질 수 있도록 조물주에게 복종하는 종교적인 피조물이다. 하나님과의 유대가 사람의 존재에 본질이다.

d.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모든 사람은 확실한 신앙적인 전제, 지적인 논리로 입증할 수 없는 기본적인 출발점에 근거해서 추론한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과학적인 업무만큼이나 그의 인생을 위한 위대한 출발점을 안다. 즉 당신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36:9). 이것은 모든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노력들에 똑같이 적용된다.

e. 폴렌호펀과 도예베르트는 플라토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이스 이교 사상이 서부 유럽에서 기독교신앙의 사고(thinking)와 생활에 미칠 비참한 영향을 인식하였던 소수의 학자들 가운데 있었다.

f. 이런 개혁주의 철학 체계는 정적이고 닫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을 시작한 사람(originators)들은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하도록 의도를 가졌다. 그들은 참된 신앙은 아주 많이 생기가 있고 활동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철학(창조-타락-구원)에 의해서 동일시되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주제는 실제로 교회의 고백들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학문적인 노고로 우리는 등등하게 연대하게 되었고, 일치의 세 양식으로 부요해졌다. 이들 고백서들은 몇몇 기독교의 기본적인 주제에 의해 대체될 필요가 없다. 비록 우리는 기독교의 과학적인 노력들을 위한 이들 철학자들의 과업의 가치를 인정한다. 이 철학자가 신앙과 교회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심각한 반대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16.5 A. 얀서(Janse, 1890-1960)는 쩨란트(Zeeland)의 네덜란드 주에 있는 비허교회(Biggekerke)의 마을에 있는 성경과 함께하는 학교(그리스도인의 독립학교, a Christian independent school)의 교장이었다. 얀서는 특별히 개혁주의 저술들 때문에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이(반복해서) 그 저술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목사들과 다른 교회의 회원들의 눈을 우리의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확정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의 풍부함에 대해 열었다. 그의 노고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주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셨던 언약을 재발견하였고 그분께서 징벌하고(기독교국가들 간의 싸운 일차 세계대전, 1930년대의 경제적인 위기, 2차 세계대전에서 국가들을 덮치게 될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의 발전하는 격변) 또한 유익(불변하고 바르며 살아있는 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이 돌아옴)을 베푸시며 유지하시며 기억하시는 언약의 확정적인 신뢰를 재발견하였다.

그의 저작들이다:

Van de Rechtvaardigen(Of the Righteous)

Leven in het Verbond(언약 안에서 생활, Living in the Covenant)

Heerlijkheid van de Psalmen(시편의 영광, The Glory of the Psalms)

Het eigen Karakter der Christelijke School(기독교학교의 유일한 특징, The Unique Character of the Christian School)

Onderwijs in Opvoeding(가르침과 교육, Instruction and Education)

안타깝게도 이 책들 가운데 하나도 영어로 번역되지 못하였다.

16.6 K. 스킬더 박사(1890-1952)는 개혁을 향한 강한 힘이 있었다. 그는 캄펀에 있는 신학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목사로서 그 당시의 모범식(exemplaric)이고 도덕적인(moralistic) 설교에 반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의 부요함에 대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열었다. 역사는 구원의 역사요, 언약의 역사이다. 구속의-역사적인 설교와 가르침.

이미 소름끼치는 거짓말

 

11.

 

11.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경건 서적을 내셨지만, 목사님은 아니시고 정치 활동을 열심히 하셨지만 그것으로 활동을 요약하긴 어려운 것 같고,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글쎄요. 남들이 저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웃음)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하셨으니 뭉뚱그려서 박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기자는 博士의 한문이 두루 알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말씀 드렸다).

박사님의 약력 중 특이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에 경도되었다가 다시 개혁주의 신앙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고백하시게 된 과정을 많이들 궁금해 합니다. 말씀해 주시겠어요?

칼빈의 사상은 보통 사람들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또 그 사상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참된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칼빈주의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죄성과약함을 발견하게 된 것이 회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은사이신 드 브리스 De Vries 교수님의 제안으로 저는 논문 경시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7개월 정도를 열심히 연구해서 금상을 탔지요.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일에 너무 몰두를 해서 그랬는지 저는 탈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거지요. 육개월이나 요양을 해야 했으니까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양을 하고 있는 동안 제 약혼녀가 권해준 The Heir of Redclyffe라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저는 제가 얼마나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 모습이 어떠한지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때부터 제 회심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육개월 후에 저는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1862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따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운 레이덴(Leyden)대학 쇼텐(Schoten)교수님이나 드브리스(De Vries) 교수님은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경도된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영향을 받아서 저 역시 정통적인 개혁주의에 대해서 호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정통주의자들은,글쎄요. 설득해서 돌이켜야 할 대상이었지요. Leyden 대학을 졸업하고 제가 처음으로 부임하게 된 교구가 베이스트(Beesd)라는 시골이었습니다. 사실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것을 중히 여기는 제게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정통적인 교리를 우기는 사람들은 설득의 대상이었지요. 그런데 어찌나 완고한지 논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거예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촌부들의 완고함이라는 것이 제게 도리어 은총이었습니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도리어 제가 성경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제게 그분들은 칼빈의 저작을 읽어보기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글을 읽어가면서 그 시골 어른들의 말이 칼빈이 오래 전에 기록한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칼빈의 사상은 보통 사람들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또 그 사상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참된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칼빈주의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사님의 신앙은 촌부들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베이스트의 목회사역을 통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화란어로는 kleine luyden, 작은 사람들)이 실은 더욱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사람들이 제 교회개혁, 정치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어 주셨습니다.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세워나가게 되셨습니까?

베이스트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 은사 중 한 분인 쇼텐(Schoten)교수님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분의 신학적 입장이 제가 배울 때와 180도 변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교수님은 이런 변화가 자신이 플라톤적 관점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으로 학문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서문에서 이야기 하셨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세계관의 변화지요. 세계관의 변화가 성경을 보는 시각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이 일로 저는 세계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은사의 경우에 세계관은 학문의 성격을 바꾸었는데, 세계관이 어떤 사고를 전개해 나가는데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원칙으로 작동한다는 증거였지요.

칼빈의 저작을 공부하면서 저는 칼빈의 사상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칼빈주의는 구원의 기쁨을 강조하는 만큼이나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 중에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내가 주인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하나도 없다고 믿거든요.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라면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만이 남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따르든지 그렇지 않고 사람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욕심을 섬기든지요.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디를 선택하든지 각각의 선택은 나름대로 원칙을 부여하고 이 원칙은 반드시 체계를 발전시킵니다. 원칙이 내적인 힘과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과 생각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방향은 다름아니라 사람의 마음,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욕심과 세상을 향하는가를 지적하는 방향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선택 중 실제로 사람에게 유익한 선택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뿐이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성경의 진리일 뿐 아니라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길이기도 합니다.이런 원칙은 하나님과 관계, 동료 인간과 관계, 피조계와 관계라는 세가지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 세가지 관계에 대한 인식이 세계관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사님의 변화에서 세계관의 개념을 착안하셨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학문에 있어서 세계관의 영향력은 어떻게 미칠까요? 특히 저희는 과학에 연관되어 생활하고 있는 데 과학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의 학문은 그 사람이 지닌 세계관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 학문의 결과물로 내어놓는 것과 불신자가 내어놓는 것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방법이 비슷하다 해도 말이지요.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사상은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하다고 믿곤 하지만... 어떤 학문이든 학문은 결국 통합적인 안목을 제시하기까지 발전합니다. 그 통합적 안목이 바로 세계관이지요. 그런데 모든 세계관은 가치 평가를 전제합니다. 공평무사한 세계관은 없습니다. 또 어떤 세계관을 지닌 사람은 부단히 그 세계관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지요.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된 학문은 잘못된 세계관을 제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세계관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학문이 올바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경험론은 결국 불가지론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을 지닌 학자는 성경의 기록대로 이 세계가 안정성을 지녔다는 사실과 질서를 지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 때문에 학문을 계속 탐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성경이라는 안경을 쓴 연후라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이라는 책에 기록해 두신 그분의 생각을 해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박사님의 사상 중에 세계관의 개념 외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으로는 영역주권 sphere of sovereignity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소개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다양한 문화적 권역으로 나누어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경제, 정치, 지적 탐구와 같은 권역들이지요. 이들 영역은 맡아서 해야 하는 자신들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역 내에서는 자신의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하나님께서 두신 그 영역 내에서만 유효합니다. 어느 영역에 속한 실체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권위를 행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원리에 배제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일종의 월권행위를 우리는 교회와 국가 권력의 사이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교회는 국가 권력을 탐냈고, 국가 권력은 교회의 영적 권력을 탐냈지요. 또 국가가 교육, 가정 생활등 지나치게 많은 영역에 간섭하려는 것 역시 이런 월권행위입니다.

박사님의 국가 권력의 위험성을 많이 보셨던 것 같습니다.

국가 권력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야 도입된 제도이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허락된 것이지만, 옳지 않은 방향으로 그 권력을 사용하기 쉽습니다. 제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국가 권력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에까지 영향력을 끼치려는 속성을 가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양심에 대해 영향력을 끼치고 문화의 각 영역을 주도 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제가 살던 시대에는 교회 역시 국가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고 국민 개개인을 억압하게 되는 수단, 죄의 수단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 Free Unibersity)의 설립이나 사립학교법 같은 그런 정치 활동이 영역주권에 대한 박사님의 생각에 근거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치에 관한 박사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원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일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앞의 것을 구원하시는 은혜(saving grace)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일반은총(common grace)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의 가정 생활, 경제, 사회, 정치에 대해서는 이 두 번째의 원리를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에는 정치의 논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은총에서 비롯한 원리, 실제로 기독교적 원리가 적용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그 기독교적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서, 기독교적 정책을 수립한다든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교회가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것은 하나님뜻이 아니지요.정치가 교회의뜻을 대표한다든지,교회에서 가르치도록 요구하는것을 가르치다보면 자칫 교회가 원하는것을 강조하다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간과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신정정치를 생각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자유대학이 신학교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회복과 정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그런 기독교 대학을 꿈꾸었던 것이지요.사립학교법은 사회 기관의 하나인 학교가 교회와 국가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대학은 그 노력의 결과이지요.

박사님의 사회에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한편으로 아주 보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측면도 발견됩니다.예를들면 박사님께서 정치활동을 하셨던 정당이름은 반혁명당(Anti Revoltionary Party)였습니다.이런것은 박사님이 보수주의자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갖게 합니다만 박사님께서 여성이나 작은사람-하층민-에 대해 지니셨던 생각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내어 걸었던모토가 자유입니다. 저는 자유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에서 시작하지 않았던 프랑스혁명은 참된 자유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프랑스혁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도 여전히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조국 네덜란드에서도 높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네덜란드의 미래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은 다름아니라 이 프랑스혁명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반혁명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작은 사람들을 배려했던 것은,우선그분들이 제 정치적 기반이었으니까(웃음),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않았나요?예수님은 항시 약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셨습니다. 저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명칭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성경 말씀에 합당한 견해만이 있을 뿐이지요. 성경을 상고하면 사회의 이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질서와조화를 중시하고 약자들의 인간적 가치를 인정하는 그런 것 말이지요.

박사님의 왕성한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곤 합니다. 어디서 힘을 얻곤 하셨나요?

글쎄, 내가 워낙 열정적이어서 그런가?(웃음)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교제를 나누는 시간이라,지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활동하셨던 박사님의 이력에 비추어보면 좀 의외입니다. 어떤 유익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사람은 온전한 행동가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굽히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를 볼 수 있는 시야와 비전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사역에 방향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제 영혼에 유익한 일이었습니다.의외라니, 그게 의외이군요.(웃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의지와 행동이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활동하기로 작정하고, 실제로도 많은 일을 행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다가 방향을 잃곤 했습니다. 우선 신앙의 문제를 행위와 사실-숫적인 사실-에 국한하고 말았지요. 그런데 신앙은 그런 외적인 면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러다가 무슨 무슨 사업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사업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일상생활이 지닌 가치가 파묻히고 마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겠군요.

형제가어떤 소망을품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어쨌든하나님 입니다.

 

이제 인터뷰를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한마디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주권을실현하기 위한삶을 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 가정, 교회, 정치 현장, 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현재를 주의 깊게 분별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는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지요. 어제의 세상과 오늘의 세상은 다릅니다. 지금 세상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무엇이 하나님께 돌려 드릴 것인지를 찾아 보십시오. 말씀의 지혜를 간구하십시오.동시에그렇게깨닫게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에 방법을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역동적인 상호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우리 인간의 반응이 역사입니다. 지금 하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숙고하고 힘차게 나갑시다.

귀한말씀듣게되어서감사합니다.

세속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사상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 무엇보다신앙이 구원과교회생활에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그의 말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또한성경에서 비롯한사상이라야인간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사실은우리가쉽게 간과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사회 변혁을 기층민에서 시작하려 했던아브라함카이퍼에 정치 사상도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그러나무엇보다도사역에 근본은 하나님과 교재라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간과해 버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였다.

카이퍼의 아래 고백이 우리의 것 되기를 기도한다.

나에게, 내 삶을 이끄는 하나의 소원은,

내 영혼과 의지를 몰아가는 단 하나 목표는교회와 가정마다,

국가와 학교에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

세상이 어떻게 반대하여도 이것이 나의 조국을 위한 최선의 것

성경과 피조물에 뚜렷히 새겨진 하나님의 질서를 깊이 새기는 것

나의 조국이 하나님께 다시 복종하는 나라되도록

For me, one desire rules my life

One urge drives soul and will

It is to re-establish Gods holy ordinances

In churches and home, in state and school,

Regardless of the worlds protestations,

For the benefits of the nation.

It is to engrave those divine ordinances,

To which Word and Creation witness,

So clearly on the nation

That once again it bows its knee to God

Reference

칼빈주의 강연 아브라함 카이퍼 김기찬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6

Creating A Chtistian Worldview Peter Heslam Eerdmans 1998

Religion, Pluralism, and Public Life Luis Lugo edi,Eerdmans 2001

하나님께 가까이 아브라함 카이퍼 정성구 역,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86

참고한 Website

kuyper의 삶에 관해서

1. http://nazuri.pe.kr/words/reformed/kuyper

2. http://www.opc.org/new_horison/nh99/nh9901d.html

3.http://www.ccojubilee.org/resourcefolder/Discipleship/ChristianPerspective_Jubilee/ KuyperSaylor/KuyperSaylor.html

4. http://thebigpicture.homestead.com/abrahamkuyper.html

Kuyper의 사상에 관해서

1.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8tc/8tc086.html 리차드 마우의 카이퍼 사상소개

2. http://www.ucalgary.ac/~nurelweb/papers/irving/kuyperp.html

3. http://members.aol.com/rsigrace/kuyper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