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全人) (1) / 안토니 A. 후크마
제 11장. 전인(全人)
크리스챤 인간관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우리가 인간을 단일체 즉 전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종종 별개의, 때로는 분리할 수 있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로부터 그 부분들이 추출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크리스챤 서클 가운데서 인간은 “몸”과 “혼” 혹은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세속의 학자들이나 크리스챤 신학자들 모두가 점점 더 인간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며 인간은 그의 단일체로 보아져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크리스챤 인간관이기에 이것이 정말로 그런 것인가를 보기위해 인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새로이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성경은 인간을 과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신학자들이 내리는 일반적 판단은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에 관한 과학적 묘사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의 "인류학"은 인간 존재의 여러 측면들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도 아니며 또한 철학적 인류학도 아니라는 사실이다.(G.C. Berkouwer)
더구나 성경은 정확한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도 않다. 또한 혼, 영, 그리고 마음과 같은 용어를 다소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몸의 지체들이 다른 지체들로부터 기본적으로 다르다거나 다른 지체들과 상호연관 되어 있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비추어서 전인의 다양한 국면들의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을 강조하는 관점으로부터 이해되기 때문이다.(John A.T. Robinson)
그러므로 정확하고도 과학적이며 성경적인 심리학을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시도도 해보았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델리취로 [성경 심리학의 체계]란 제목의 책이 1855년에 최초로 발간된 적이 있다. 그러나 심지어 델리취도 "성경은 학문적인 (혹은 가르침을 위한) 과학 서적이 아니며", 또한 교리적인 혹은 윤리적인 주제에 대해 그러하듯이, 심리학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학계의 언어로 제의된 그러한 체계를 거의 갖고 있지 않은게 사실이라고 인정해야만 했다.
1920년에 화란 신학자 바빙크는 [성경과 종교 심리학]이란 제목의 책을 쓴 일이있다. 그러나 그는 델리취처럼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성경은 우리에게 역사학, 지리학, 천문학, 농업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해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혹은 과학적인 심리학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비록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길 원할지라도, 성경으로부터 어떤 점에서 우리의 필요를채우는 그런 심리학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다양한 자료에 대해서 완전한 설명을 줄 수 없기 때문만 아니라 영혼, 혼, 마음, 그리고 정신과 같은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대중적 언어로부터 차용된 언어들로, 지금 우리가 연상하고 있는 것들과는 다른 내용을 갖고 있어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경은 결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상 생활의 풍부한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정확하고 과학적인 심리학이나 인간론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배울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앞단원들에서 우리는 그렇게 해 왔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인간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불가피하게 하나님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벌카워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모순이 두려움 없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성경은 결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주의를 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놓여진 인간에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다 성경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에, 혹은 그의 심리적인 구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해 있는 여러 관계들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1. 삼분론인가, 이분론인가?
그러나 때때로 인간은 특별히 어떤 구별된 “부분”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삼분론(trichotomy)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견해는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몸과 혼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삼분론의 최초의 주장자들 중의 하나가 이레니우스였다. 그는 비신자들은 단지 혼과 몸만을 갖고 있는 반면에, 신자들은 이에 덧붙여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영혼을 갖게 된다고 가르쳤다.
종종 삼분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또다른 신학자는 주후 약 310년에서 390년까지 살았던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네리우스이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이 인간은 몸과 혼과 영혼 혹은 정신(프뉴마 또는 노우스)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와 그리스도께서 취하셨던 인성 중에서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간 영혼을 대신 하셨다는 견해 등이 그에게서 기인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벌카워는 아폴리네리우스가 최초로 삼분론적 의미로 그의 잘못된 기독론을 전개해 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켈리(J.N.D. Kelly)는 아폴리네리우스가 이분론자였느냐 삼분론자였느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삼분론은 19세기에 델리취(Franz Delitzsch), 허드(J.B. Heard), 벡(J.T. Beck) 그리고 오힐러(G.F. Oehler)등에 의해 가르쳐졌다. 보다 최근에 와선 웟치만 니(Watchman Nee), 솔로몬(Charles Solimon, 그는 인간은 몸을 통해서는 환경과, 혼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영혼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타드(Bill Gothard)와 같은 저술가들에 의해서 옹호되어 왔다. 삼분론이 또한 구판과 신판의 [스코필드 주석성경]에서도 모두 옹호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삼분론자들의 견해를 거절해야 한다.
첫째로 삼분론은 인간의 단일성에 위반되기에 거절되어야 한다. 단어 그 자체가 인간을 세 “부분”으로 쪼개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삼분론은 두 개의 헬라어 즉 “삼중의”란 의미의 트리카와 “다르다“라는 의미의 템네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레니우스를 포함해 몇몇 삼분론자들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갖고 있는 반면에 나머지 다른 삶들은 갖고 있지 않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둘째로 삼분론이 종종 영혼과 육체 사이에 화해될 수 없는 대립을 전제로 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실제로 삼분론은 헬라철학 특별히 인간 본성에 대한 삼분론적 이해를 갖고 있었던 플라톤의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바빙크는 그의 책 [성경 심리학]에서 이 점에 대한 도움되는 논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과 그 외의 헬라 철학자들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사이에 매우 날카로운 대조를 놓는다. 물질적인 본체로서의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에 대항하여 서 있는 것이라고 헬라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세상과 함께 묶을 수 있으며, 또한 세상과 하나님을 교제의 관계로 이끌어 갈 중재적 힘, 소위 세계 정신이 필요했다. 헬라 사상에서 발견되는 인간관도 이와 유사하다고 바빙크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은 이성을 소유하고 있는 이성적 존재이며 또한 동시에 몸을 갖고 있는 물질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중재자로서 행동하는 제 3의 실체 즉 영혼(The soul)이 있어 이성의 이름으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혹은 정신)과 육체 사이에 이러한 어떤 날카로운 대립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경에 따르면 물질은 악하지 아니하며 도리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성경은 결코 인간의 육체를 필요악의 원천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국면으로 기술하고 있다. 헬라인에게 육체는 사람이 임종시 기쁨으로 표기해 버리는 “영혼의 무덤”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성경과는 완전히 부적합한 견해이다.
또한 삼분론이 성경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영과 혼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을 두기에 우리는 이를 거절해야 한다. 이 사실은 혼과 영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들이 성경 가운데서 종종 교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될 때 가장 분명해진다.
(1) 성경에서 인간은 몸과 혼 또한 몸과 영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고전 7:34);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2) 슬픔은 영 뿐만 아니라 혼에도 속하는 감정이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같이"(사 54:6);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요 12:2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요 13:21);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행 17:16);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8).
(3)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것은 혼과 영에 기인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6~4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4) 구원은 혼과 영 모두에 관계된다: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5) 죽는다는 것은 혼이나 영이 떠나가는 것으로 기술된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창 35:18);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왕상 17:2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 10:28);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 31:5);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 27:50);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
(6) 이미 죽은 자들이 때때로 혼으로 언급되거나 때때로 영으로 언급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10:28);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3:18~20).
삼분론자들은 종종 그들의 견해를 입증하고자 두 개의 신약성경 구절인 히브리서 4:12과 데살로니가전서 5:23에 호소하고 하는데, 이 두 구절의 어느 것도 그들의 견해를 입증치 못하고 있다;
히브리서 4:12은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통찰력을 기술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몸의 관절과 뼈 속에 있는 골수 사이에 어떤 구분을 짓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말씀이 혼이라 불리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과 영이라 불리는 다른 한 ‘부분’ 사이를 구분짓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언어들은 비유적인 언어다. 바로 다음의 말이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성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우리 행위의 은밀한 동기들을 드러낸다. 사실 이 구절은 많은 점에서 바울의 한 본문과 유사하다;
“그가(주님)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고전4:5).
그러므로 히브리서 4:12을 인간의 두 개의 구성요소로서의 혼과 영 사이에 심리학적인 차이점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다른 한 구절인 데살로니가전서 5:23은 이렇게 되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먼저 이 구절이 교리상의 진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도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데살로니가 독자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완전히 성화되고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며 지켜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도되고 있는 성화의 총체성이 본문 중에서 두 개의 헬라어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첫 번째 단어는 홀로텔레이스로 “전체의...”란 의미를 갖고 있는 홀로스와 마지막 혹은 목표란 의미의 텔로스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이 들이 합쳐져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이란 의미를 갖는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하반절에서 형용사 홀로크레론과 동사 테레데이에(“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둘 다 단수형을 갖고 있으므로, 본문의 강조점이 전인(全人)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그들 각각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했을 때,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10:27)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사람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분명히 사람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인간 구조에 대한 삼분론적 견해에 대해서 어떤 근거도 제공치 않고 있는 것이다.(바빙크, 벌콥, 벌카우어, 브루스, 델리취 책 참조)
인간구조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다른 한 견해는 이분론(dichotomy:디코토미)이라 불리는 견해로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몸과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견해는 삼분론보다 더 훨씬 폭넓게 주장되어 왔다. 우리가 삼분론을 거절하는 것이 이분론을 선택해야만 된다는 의미인가?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확신을 긍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벌코프는 "성경에 나타난 인간 본성에 대한 주요한 진술은 분명히 이원론적이다" 라고 믿고 있다.(스트롱, 멀러, 헨리 디이슨, 골든 클락 책 참조)
그러나 우리는 삼분론 뿐만 아니라 이분론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기독교 신자로서 우리는 확실히 고대 헬라인들이 가르쳤던 의미의 이분론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는 두 개의 구별된 본체, 즉 신적 기원을 갖는 사고하는 영혼과 육체라는 견해를 제시했었다. 육체는 질료라 불리우는 열등한 본체로 구성되어 있기에, 영혼보다 저급한 가치를 갖는다. 임종시 육체는 단순히 분해되어 버리나 이성의 영혼은 만약 그 영혼의 행위의 과정이 올바르고 존경을 받을만했다면 “하늘”로 되돌아가서 영원히 계속적으로 존재한다. 영혼은 본질상 파괴될 수 없으며, 보다 우수한 본체로 생각된 반면에, 육체는 영혼보다 열등하며 죽게 되어 있으며 완전파멸의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헬라의 사고 속에는 육체의 부활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후크마의 종말론, 벌카우어 책 참조)
그러나 분명히 성경에 어긋나는 이러한 헬라인의 이분론적 이해를 차치하고라도 이분론이란 용어를 여전히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분론은 인간에 대한 성경적 견해의 정확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용어 자체가 부당하다. 이 용어(디코토미)는 두 개의 헬라어 어근 즉 “이중의” 혹은 “둘로”라는 의미의 디케와 “자르다“란 의미의 템네인으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인간은 두 ”부분“으로 자를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세상에선 인간이 그렇게 나눠질 수 없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성경은 인간을 하나의 전체, 하나의 완전, 하나의 단일체로 기술하고 있다.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결정지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인간의 다양한 국면들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들을 조사해 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에 앞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고찰이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1) 이미 말했듯이, 성경의 기본적 관심사는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혹 인류학적인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이다.
(2) 우리는 로빈슨(J.A.T. Robinson)이 이런 용어들에 대한 구약의 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 바를 항상 마음에 명심해야 한다:
“어느 부분이든지 어느 순간에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
또한 신약의 용법에 대해서는 래드(G.E. Ladd)의 일언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의 학풍은 몸, 혼, 영혼과 같은 인간의 상이하고 분리할 수 있는 기능들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바라보는 상이한 방법들이라는 점을 인정해 왔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먼저 구약 용어들을 다룬 뒤에 다음으로 신약에 나타난 용어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2. 구약의 표현들
우선 대부분의 경우 " 혼“(soul)이라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네페쉬를 살펴보기로 하자. B.D.B. 히브리어 사전은 이 단어에 대해서 열 가지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 다음의 것들이 우리의 논제에 중요한 것들이다: ”인간의 내적 존재“, :살아있는 존재”(인간과 동물 모두에 대해서 사용됨), “인간 그 자체”(종종 인칭대명사로 사용됨. 이런 의미에서 총체적 인간을 가리킴), “욕망의 자리”, “감정의 좌소”. 때때로 메쓰(죽은)란 형용사와 붙어서 죽은 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메쓰라는 단어 없이도 이 단어는(네페쉬) 죽은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네페쉬는 전인(全人)을 나타낸다. 야곱(Edmond Jacob)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페쉬는 한 인간의 전체 본성 즉 인간이 무엇을 소유하였는지에 대한 지시용어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한
지시용어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단어의 대한 최상의 번역은 ”인격“(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의 히브리어 단어는 일반적으로 “영”(spirit)으로 번역되는 루아흐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움직이는 공기, 숨, 호흡”이다. 종종 바람으로도 번역된다. B.D.B.는 다음과 같은 류의 아홉가지 의미를 나열하고 있다: “영”, “생기”, “기질”, “인간과 짐승의 몸에 거하는 살아서 숨쉬는 존재의 영”(후자의 유일한 예는: 전3:21), “감정의 자리”, “정신상의 행위의 기관”, “의지의 기관”, 그러므로 루아흐는 의미에 있어서 네페쉬와 중첩된다. 스테세이(D. Stacey)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비추어 인간에 대한 언급이 있게 될 때는 루아흐란 용어가 사용된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러나 다른 사람 혹은 인간의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과 연관되어 정신상의 용어가 필요한 경우에 인간에 대한 언급이 있게 될 때는 네페쉬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경우 모두에 전인(全人)이 포함되어 진다.
그러기에 루아흐를 인간의 분리될 수 있는 부분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어떤 한 관점으로부터 보여지는 전인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음으로 보통 “마음”이라 번역되는 히브리어 레브와 레바브를 살펴보기로 한다. B.D.B.는 아래와 같은 의미들을 포함해, 이 두 단어에 대한 열 개의 의미를 나열하고 있다: “속사람 혹 내적 혼”, “정신”, “의지의 결정“, ”양심“, ”도덕성“, ”인간 자신“, ”욕망의 자리“, ”감정의 자리“, ”용기의 자리“. 마이엔펠트(H. Von Meyenfeldt)는 그의 훌륭한 단어 연구서에서, 레브 혹은 렙하브는 보통 전인(全人)을 나타내며 현저한 종교적 중요성을 가진 단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구약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생각, 느낌, 의지의 자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죄의 자리(창 6:5; 시l 95:8, 10; 렘 17:9), 영적 갱생의 자리(신 30:6; 시 51:10; 렘 31:33; 겔 36:26), 그리고 믿음의 자리이기도 하다(시 28:7; 112:7; 잠 3:5).
구약용어 이외의 경우에는 마음이란 단어는 그의 존재의 심층에 있는 인간과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인간을 상징한다. 화란 철학자 도이벨트(Herman Dooyeweerd)는 성경에 있어서의 마음을 "인간 전(全) 존재의 종교적 뿌리"라고 말했다. 그가 발전시킨 철학에 따르면 마음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활동의 중심부요 원천이다. 앤더슨(Ray Anderson)은 마음을 "주체적 자아의 중심부"라고 불렀으며 그에게 있어서 마음은 "참된 질서 가운데 놓여진 육체와 영혼의 단일체이다-그것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설펴본 세 개의 구약 용어들을 비록 인간을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기는 하나 모두가 그의 단일성과 전체성에 비추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로빈슨(H. Wheeler Robinson)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이 포함하는 영역들을 정확하게 구분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정확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통 “육체”라고 번역되는 바사르란 단어를 생각하기로 하자. B.D.B.는 아래의 것들을 포함해 여섯 가지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육체”(몸 그 저체에 대해서), “혈연과 혈족”, “하나님 맞은편에 있는 깨어지기 쉽고 죄를 범케되어 있는 인간”, “인류” 브렛시오티스(N.P. Bratsiotis)는 “바사르는 인간 본성의 외적인 육의 측면을 가리키는 단어로 구약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바사르가 인간의 외적 측면으로 그리고 네페쉬가 내적 측면으로 구별되고 이해될 때라도, 우리는 이 단어드을 플라톤적 의미의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나타내는 것을 결코 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바사르와 네페쉬는 하나의 이중적 실체와 깉은 인간 존재의 상이한 측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이중적 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이와같이 분명한 인간론의 온전성인 것이다. 그것은 바사르와 네페쉬 모두에 완전히 대립되는 이분론의 어떠한 견해도 배제하며 이 들 사이에 상호유기적인 몸과 마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Grand Rapids:Eerd-mans 1977)
종종 바사르란 단어는 연약한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볼프(H.W. Wolff)는 자주 "바사르는 인생을 꺠어지기 쉽고 연약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진술하면서, 이의 한 예로 예레미야 17:5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을 믿으며 육체로 그의 힘을 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때때로 바사르는 단순히 육체적 측면이 아니라 인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것을 가르키고 있다는 점에서 네페쉬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배쓰(Charence B. Bass)는 "몸"을 나타내는 구약의 표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몸과 영혼이 거의 혼용되고 있는데 영혼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서, 몸은 유형적인 가시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여진다...몸과 영혼의 이러한 단일성이 몇몇 저술가들로 하여금 구약은 육체적인 몸을 하나의 분별있는 실체로 보는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그라나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구약은 몸과 영혼을 하나의 단일체를 구성키 위한 기능에 있어서 서로에게 스며드는 동등자로 보고 있다.
그러기에 종종 바사르는 구약에서 비록 강조점이 외형적 측면에 있긴 하지만, 전인(全人)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상 세계는 인간이 두 개의 별개의 본체로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하는 어느 형태의 이분론이나 이원론을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다. 로빈슨(H. Wheeler Robinson)이 얘기하듯이 “4개의 용어(네페쉬, 루아흐, 레브, 바사르)들은 단순히 인격체의 단일성의 상이한 측면들을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에 최종적 강조점이 내려져야 한다.(The Christian Doctrine of Man, p.27)
3. 신약의 표현들
우리가 맨 먼저 살펴볼 신약언어는 네페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로,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혼”이라 번역된다. 안트-깅그리히의 신약 헬라어 사전은 이 단어에 대해 많은 의미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의 얼마는 다음과 같다:
“생명의 원리”, “땅의 삶 그 자체”, “인간의 내적 생명의 좌소”(느낌과 감정을 포함하여), “땅의 것들을 초월하는 삶의 자리와 중심”, “생명을 소유하는 것으로 즉 생명을 가진 피조물(복수는 인간들).”
에드워드 슈바이쳐는 프쉬케는 종종 복음서에서 한 인간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 또는 순전한 육체적 삶과는 구별되는 참된 삶을 묘사하기 위해, 죽음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주신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슈바이쳐는 계속해서 바울이 자연적 삶과 참된 삶을 가리킬 때 즉 인성을 나타내고자 할 때 프쉬케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프쉬케는 죽음 뒤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네페쉬와 같이 프쉬케도 종종 전인을 상징한다.
다음으로 루아흐의 헬라어 상당어인 프뉴마를 생각해 보자. 이 단어는 인간을 가리킬 때에는 거의 대부분 “영”이라 번역된다. A-G사전은 아래의 의미들을 포함해 8개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의 인성의 한 부분으로서의 영”, “한 인간의 자아”, “정신의 성향이나 상태”.
슈바이쳐는 바울이 인간의 육체적 기능에 대하여 프뉴마를 사용하며, 프뉴마는 종종 프쉬케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이 단어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나타냄으로 육체적인 본성보다는 심적 본성에 더 많은 강세가 주어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종말론을 논하면서 래드(George Ladd)는 우리에게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 인간의 영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영으로 중생을 경험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때때로 프뉴마와 인간의 외적 측면에 반하는 내적 차원으로서의 몸을 대조시키고 있다(고후 7:1; 롬 8:10). 프뉴마가 인간의 자기인식 혹은 자아의식을 기술하기도 한다(고전 2:11). 스테세이(W.D. Stacey)는 바울이 프뉴마를 오직 중생한 사람만이 갖고 있는 그 무엇으로 보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날 때로부터 프뉴마를 갖게 되나 크리스챤의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광의 교제를 통해, 새로운 특성과 새로운 품위를 띠게 된다”(롬 8:10)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프뉴마가 죽음 이후의 생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히브리서 12:23을 죽은 성도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눅23:46)와 스데반(행7:59)은 그들이 운명할 때, 그들의 “영”을 성부 하나님 혹은 성자 하나님께 의탁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확신컨대 죽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옥에 있는 영들에”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벧전 3:19).
그러므로 프뉴마는 거의 프쉬케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신약에서 종종 이 두 단어는 혼용되고 있다. 그러나 래드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짓고 있다:
"영은 종종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되나 혼은 결코 그렇게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푸쉬케가 인간편에서 사람을 나타낸느 반면에 프뉴마는 하나님편의 측면에서 사람을 나타내 준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대체로 나는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예를 들어 프쉬케는 때떄로, 주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것으로 기술되기도 하며(눅 1:46),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푸쉬카스)을 구원할 수 있는 마음에 심긴 말씀에 관해 말하고 있다(약 1:21). 또한 분명히 프뉴마가 전인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여지기도 한다. 프쉬케처럼 프뉴마도 전체성에 비추어 인간의 한 측면을 기술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 레브와 레바브에 상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로, 이 단어는 보통 "마음"이라 번역된다. A-G는 이 단어의 주요한 의미로 "육체적, 영적, 정신적 생명의 자리"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지, 정, 의를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내적 삶의 중심과 원천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마음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장소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벰(Johannes Behm)은 신약에 나타난 마음이란 표현을 정신적, 영적 삶의 주요기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입증해 보이시는 인간 속의 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음은 인간의 내적 삶의 중심부요, 감정, 이성, 의지의 원천인 것이다. 마음은 인간의 모든 내적 존재, 즉 인간의 심층부를 의미하며 자아 즉 인성을 상징한다. 카르디아는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 속의 최고의 중심으로서 그 안에 종교적 삶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결정짓는다.
앞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나타나는 레브가 죄의 자리, 영적 갱생의 자리, 그리고 믿음의 자리로서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았다. 카르디아도 이와 똑같다. 여기에 덧붙여 많은 크리스챤의 덕들이 카르디아에 기인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5과 베드로전서 1:22에서 보면 사랑은 마음과 관계를 맺고 있다. 로마서 6:17과 골로새서 3:22에서 보면 순종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용서가 마태복음 11:29에서 마음과 연관되어져 있다. 마태복음 11:29에서 결손이 마음에 관계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5:8과 야고보서 4:8에서 마음이 순결의 자리로 묘사되고 있다. 골로새서 3:16에서 감사가 마음에 관계되며 빌립보서 4:7에서는 평강이 마음을 지킨다고 기록되고 있다.
칼 바르트는 그의 [교의학]에서 "영혼과 육체로서의 인간"을 다루면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중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 본문들에 충실하다면 마음에 대해서, 그것은 인간 자체의 모든 것이요, 그러기에 그의 활동의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활동의 근본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그러므로 마음은 인간의 단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 그 자체이며 영과 육의 전체적 실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다시 한번 인간의 전인성에 대한 성경적 중요성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 카르디아는 인간의 내적 본질에 있어서의 전인을 상징한다. 마음에서, 믿음의 태도이든, 불신의 태도이든, 순종의 태도이든, 불순종의 태도이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비록 구약에는 몸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지만 인간의 육체적 측면 즉 인간의 육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바사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는 몸을 나타내는 단어가 두개 있다: 사륵스와 소마. A-G는 보통 육신이라고 번역되는 사륵스에 대해서 여덟 가지의 의미를 나열하고 있다. 다른 의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몸", "인간", "인간 본성", "육체적 한계", 삶의 외적 측면", 그리고 "죄의 의지적 도구"(특별히 바울 서신 중에서).
그런데 신약에 있어서 사륵스는 두개의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1) 인간 존재의 외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전체로서의 인간과, (2)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타락한 인간 속에 있는 성향으로서의 육신에 대해 사용된다. 바울 서신에 주로 나타나는 두번째 의미에 있어서, 사륵스의 의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육신의 죄"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의미를 제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사륵스가 전인에 의해서 범해지는 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5:19~21에 나타나는 "육체의 일"에 있어서, 열 다섯 개 중에서 다섯 개만이 육체의 죄이며, 나머지는 "영의 죄"라 일컫는 죄들이다. 즉 증오, 분쟁, 시기, 분냄 등등. 그러기에 심지어 사륵스란 단어가 이상의 두번째 의미에서 사용될 때라도 그것은 전인에 관계된 것이요, 단순히 사람의 한 부분에만 관한 것이 아니다.
이제 일번적으로 "몸"이라 번역되는 소마라는 단어를 살펴보기로 하자. A-G는 다음의 의미들을 포함해서 다섯 개의 의미를 주고 있다:
"살아있는 몸", "부활체", 그리고 "크리스챤 공동체 혹은 교회".
배쓰(Clarence B. Bass)도 성경에 있어서의 몸에 관한 그의 글에서 소마란 단어에 대해 다섯 가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 앞의 하나의 실체로서의 전인", "인간속의 영적인 것들의 소재지", "하나님 나라에 백성될 자로서의 전인", "부활을 위한 매개물", 그리고 "마지막 심판의 수단이 될 영적인 시험 장소."
그는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기에 분명히 몸은 전인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중간 상태(즉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의 경우를 제외하곤, 육체적 현존없이 사람이 존재한다는 어떤 형태의 성경적 인간관에 어떤 형태의 성경적 인간관에도 대치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성경의 표현들에 대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인간은 단일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육체적인 측면과 정신적 혹은 영적측면을 갖고 있으되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육체를 갖는 영혼 혹은 “영혼을 갖는” 육체로 이해되어야 한다.(Barth, Church Dogmatics, III / 2, p.350) 인간은 상이한 “부분들”의 복합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하며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G.C. Berkouwer, C.A. Van Peursen, H. Ridderbos, W.G. Kummel, Robert Jewett 책 참조)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 제11장. 전인(全人)에서 발췌(337~359p)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여호와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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