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마에스트로, 해돈 로빈슨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 박사가 십대였을 때, 구원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에 유명한 설교자였던 해리 아이언사이드(Harry Ironside) 박사의 설교를 듣고 일기장에 글을 남겼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아이언사이드)는 1시간 동안 설교를 하는데 20분 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20분 동안 설교하는데 1시간 한 것처럼
느껴질까?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걸까?” 어떻게 보면 해돈 로빈슨 박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로 「강해 설교」(Biblical Preaching)의 출간이라는 열매로 나타난 것이다.
해돈 로빈슨 박사는 세계 강해 설교사에서 하나의 큰 획을 그은 분이다. 사람이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기는 쉽지만, 전통의 바탕 위에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시도하고 실제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로빈슨 박사가 바로 그런 분이다. 현재 그 분은 설교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그 분의 역작인 「강해 설교」는 지난 1980년에 초판 발행 이후(2001년에 개정판 발행) 영어권과 비영어권의 120여 개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될 정도로 설교학 관련 서적들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책이다. 1996년 베일러대학교에서 실시한 조사에는 로빈슨 박사를 영어권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 12인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해돈 로빈슨 박사는 댈러스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 19년 동안(1960~1979) 재직했다. 그 후 덴버침례신학교에서 12년간 총장을 역임하고(1979~1991), 1991년부터 현재까지 고든 콘웰신학교에서 설교학 석좌 교수(Harold J. Ockenga Distinguished Professor of Preaching)로 재직하면서 강해 설교 확산에 힘쓰고 있다. 로빈슨 박사는 후학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댈러스 지역의 YFC(Youth for Christ) 대표(1952~1955), 오리곤 주 메드포드(Medford) 소재 제일침례교회의 부목사(1956~1958), 일리노이대학 스피치 강사(1960~62)로 활동했다.
특히 1970년부터 1979년까지 CMDS(Christian Medical and Dental Society)의 대표를 역임했는데, 이 협회는 미국 전역의 크리스천 의사 및 치과 의사 7,000명으로 구성돼 있는 단체다. 1983년에 미국복음주의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회장으로 섬기기도 했다. 지금도 로빈슨 박사는 미국 전역에 방송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구 Radio Bible Class)의 성경 교사로, Preaching Today.com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많은 잡지에도 꾸준히 기고하고 있다.
불량 청소년 시절
해돈 로빈슨 박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0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헌신적으로 양육했다.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오후와 밤에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아들을 믿음으로 양육했지만 어머니 없는 아픔과 외로움으로 인해 어린 로빈슨은 점점 주위에 있는 질이 좋지 않은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그들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아이들이 모여서 크게 한 번 싸움판을 벌일 계획을 꾸몄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경찰이 그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경찰은 아이들의 몸수색을 하다가 로빈슨의 옷 속에 감춰 놓은 얼음 깨는데 사용하는 송곳을 발견했다. 경찰은 로빈슨에게 물었다. “이 송곳으로 무얼 하려고 했지?” 로빈슨은 거짓말로 “얼음을 깨려고 해요”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행히 그 정도로 그날 밤의 일은 마무리 되었지만, 어린 로빈슨은 더 이상 잘못된 일에 관계 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는 큰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로빈슨은 브로드웨이장로교회(Broadway Presbyterian Church)의 주일 학교 교사인 마이겟(John Mygatt) 선생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그때가 16세였다.
댈러스신학교 설교학 교수로 서다
이어 로빈슨은 밥 존스대학교(Bob Jones University)에서 학부 과정을 마쳤다. 그 분의 설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은사는 일찍이 대학 시절부터 나타났다. 채플 시간에 학교에 와서 설교하는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좋은 설교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한 후 대학 도서관에서 설교집과 설교학에 관한 서적을 폭넓게 탐독했다. 그 결과 대학 졸업 때 설교 분야에서 최고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그 후 댈러스신학교(1955년, Th.M.)와 남감리교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1960년, M.A.)를 졸업하고 1964년 일리노이대학교에서 ‘Speech Communication’을 전공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로빈슨 박사가 댈러스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 19년 동안 봉직하면서 강해 설교를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댈러스신학교는 “말씀을 전파하라”(Preach the Word)는 모토 아래 1924년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강해 설교를 위주로 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로빈슨 박사가 항상 말했듯이, 강해 설교는 방법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강해 설교에서 어떤 형태로 설교를 하느냐는 것보다 얼마나 본문의 가르침에 충실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왕이면 짜임새 있게 전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설교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 분이 댈러스신학교에서 강의하는 동안 강해 설교는 그 형태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따라서 댈러스신학교의 강해 설교는 로빈슨 박사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로빈슨 박사 이전의 강해 설교라고 하면 주로 ‘나열식 주석’ 즉 말씀을 한 절 한 절씩 풀어가는 형태였다. 그러나 로빈슨 박사가 재직하던 동안 강해 설교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거듭하면서 단일한 사고 단위가 되는 본문에서 먼저 ‘빅 아이디어’(주제)를 찾고 그것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전개되도록 설교했다.
필자가 1979년 댈러스신학교에 공부하러 갔을 때 이미 로빈슨 박사는 댈러스를 떠나 덴버침례신학교 총장으로 부임한 상태였다. 따라서 필자는 로빈슨 박사에게서 직접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필자는 로빈슨 박사의 ‘손자’에 해당한다. 대신에 그 분의 ‘아들들’을 통해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셈이다. 로빈슨 박사가 댈러스를 떠난 후에도 그 분의 제자들을 통해 강해 설교는 지금까지 댈러스신학교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로빈슨 박사의 제자인 도널드 스누키안(Donald Sunukjian) 박사와 빌 로렌스(Bill Lawrence) 박사에게서 강해 설교를 배우면서 그 장점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필자가 미국에 유학할 때만 해도 설교가 뭔지 잘 몰랐고, 더구나 강해 설교에 대해선 완전 백지 상태였다. 그러다 댈러스신학교에서 처음으로 강해 설교를 접하고, “아, 바로 이거로구나! 한국에 돌아가면 강해 설교야말로 한국 교계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분야이겠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 강해 설교를 배운 후 1년 정도 미국 목회를 하면서 실제적으로 강해 설교의 위력을 경험했다. 귀국한 후 지난 20년 동안 목사로, 교수로, 저술가로, 세미나 강사로 활동하면서 해돈 로빈슨의 강해 설교를 한국에 전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설교의 마에스트로
많은 설교 학자들이 설교학 강의는 잘 하면서도 실제로 설교는 잘 못한다. 심지어 이런 농담도 있다. “설교학 교수가 설교를 가장 못하고, 교육학 교수의 교수법이 가장 나쁘며, 영성 신학 교수의 영성이 가장 안 좋다.” 학교의 강의와 강단의 설교를 구별하지 못하는 교수 때문에 강의는 강의대로, 설교는 설교대로 무미건조함 그 자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빈슨 박사는 설교학 교수이면서 설교에도 탁월하다. 그 분은 6,000번 이상의 설교를 평가하면서 청중이 귀를 기울이는 설교를 하기 위해 설교자들이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런 경험과 개인의 연구를 집대성해서 결국에는 「강해 설교」라는 역작을 내놓게 되었다.
그 분의 설교는 정확한 석의, 해석상의 통찰력, 생생한 이미지, 감동적인 예화, 효과적인 음성 사용 등을 통해 ‘빅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살려내 듣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필자도 그 분의 설교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 분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설교의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댈러스신학교 설교학 교수를 역임한 고(故) 윌라이트(Keith Willhite) 박사의 신학교 학급 친구 중에 한 명이 윌라이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해돈 로빈슨을 먼저 만드신 후에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만드신 것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두 번에 걸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자 윌라이트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해돈 로빈슨을 맨 먼저 만드시고, 그 다음으로 많은 설교자들을 만드셨으며, 그러고 나서 우리 모두를 만드신 것 같다. 말하자면 세 번 창조하신 것이다.” 해돈 로빈슨 박사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보내주신 크나 큰 선물이다. 그런 분과 동시대에 호흡하면서 직접 그 분의 강의와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돈 로빈슨 박사는 세계 강해 설교사에서 하나의 큰 획을 그은 분이다. 사람이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기는 쉽지만, 전통의 바탕 위에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시도하고 실제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로빈슨 박사가 바로 그런 분이다. 현재 그 분은 설교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그 분의 역작인 「강해 설교」는 지난 1980년에 초판 발행 이후(2001년에 개정판 발행) 영어권과 비영어권의 120여 개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될 정도로 설교학 관련 서적들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책이다. 1996년 베일러대학교에서 실시한 조사에는 로빈슨 박사를 영어권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 12인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해돈 로빈슨 박사는 댈러스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 19년 동안(1960~1979) 재직했다. 그 후 덴버침례신학교에서 12년간 총장을 역임하고(1979~1991), 1991년부터 현재까지 고든 콘웰신학교에서 설교학 석좌 교수(Harold J. Ockenga Distinguished Professor of Preaching)로 재직하면서 강해 설교 확산에 힘쓰고 있다. 로빈슨 박사는 후학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댈러스 지역의 YFC(Youth for Christ) 대표(1952~1955), 오리곤 주 메드포드(Medford) 소재 제일침례교회의 부목사(1956~1958), 일리노이대학 스피치 강사(1960~62)로 활동했다.
특히 1970년부터 1979년까지 CMDS(Christian Medical and Dental Society)의 대표를 역임했는데, 이 협회는 미국 전역의 크리스천 의사 및 치과 의사 7,000명으로 구성돼 있는 단체다. 1983년에 미국복음주의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회장으로 섬기기도 했다. 지금도 로빈슨 박사는 미국 전역에 방송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구 Radio Bible Class)의 성경 교사로, Preaching Today.com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많은 잡지에도 꾸준히 기고하고 있다.
불량 청소년 시절
해돈 로빈슨 박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0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헌신적으로 양육했다.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오후와 밤에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아들을 믿음으로 양육했지만 어머니 없는 아픔과 외로움으로 인해 어린 로빈슨은 점점 주위에 있는 질이 좋지 않은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그들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아이들이 모여서 크게 한 번 싸움판을 벌일 계획을 꾸몄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경찰이 그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경찰은 아이들의 몸수색을 하다가 로빈슨의 옷 속에 감춰 놓은 얼음 깨는데 사용하는 송곳을 발견했다. 경찰은 로빈슨에게 물었다. “이 송곳으로 무얼 하려고 했지?” 로빈슨은 거짓말로 “얼음을 깨려고 해요”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행히 그 정도로 그날 밤의 일은 마무리 되었지만, 어린 로빈슨은 더 이상 잘못된 일에 관계 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는 큰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로빈슨은 브로드웨이장로교회(Broadway Presbyterian Church)의 주일 학교 교사인 마이겟(John Mygatt) 선생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그때가 16세였다.
댈러스신학교 설교학 교수로 서다
이어 로빈슨은 밥 존스대학교(Bob Jones University)에서 학부 과정을 마쳤다. 그 분의 설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은사는 일찍이 대학 시절부터 나타났다. 채플 시간에 학교에 와서 설교하는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좋은 설교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한 후 대학 도서관에서 설교집과 설교학에 관한 서적을 폭넓게 탐독했다. 그 결과 대학 졸업 때 설교 분야에서 최고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그 후 댈러스신학교(1955년, Th.M.)와 남감리교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1960년, M.A.)를 졸업하고 1964년 일리노이대학교에서 ‘Speech Communication’을 전공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로빈슨 박사가 댈러스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 19년 동안 봉직하면서 강해 설교를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댈러스신학교는 “말씀을 전파하라”(Preach the Word)는 모토 아래 1924년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강해 설교를 위주로 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로빈슨 박사가 항상 말했듯이, 강해 설교는 방법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강해 설교에서 어떤 형태로 설교를 하느냐는 것보다 얼마나 본문의 가르침에 충실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왕이면 짜임새 있게 전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설교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 분이 댈러스신학교에서 강의하는 동안 강해 설교는 그 형태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따라서 댈러스신학교의 강해 설교는 로빈슨 박사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로빈슨 박사 이전의 강해 설교라고 하면 주로 ‘나열식 주석’ 즉 말씀을 한 절 한 절씩 풀어가는 형태였다. 그러나 로빈슨 박사가 재직하던 동안 강해 설교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거듭하면서 단일한 사고 단위가 되는 본문에서 먼저 ‘빅 아이디어’(주제)를 찾고 그것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전개되도록 설교했다.
필자가 1979년 댈러스신학교에 공부하러 갔을 때 이미 로빈슨 박사는 댈러스를 떠나 덴버침례신학교 총장으로 부임한 상태였다. 따라서 필자는 로빈슨 박사에게서 직접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필자는 로빈슨 박사의 ‘손자’에 해당한다. 대신에 그 분의 ‘아들들’을 통해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셈이다. 로빈슨 박사가 댈러스를 떠난 후에도 그 분의 제자들을 통해 강해 설교는 지금까지 댈러스신학교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로빈슨 박사의 제자인 도널드 스누키안(Donald Sunukjian) 박사와 빌 로렌스(Bill Lawrence) 박사에게서 강해 설교를 배우면서 그 장점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필자가 미국에 유학할 때만 해도 설교가 뭔지 잘 몰랐고, 더구나 강해 설교에 대해선 완전 백지 상태였다. 그러다 댈러스신학교에서 처음으로 강해 설교를 접하고, “아, 바로 이거로구나! 한국에 돌아가면 강해 설교야말로 한국 교계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분야이겠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 강해 설교를 배운 후 1년 정도 미국 목회를 하면서 실제적으로 강해 설교의 위력을 경험했다. 귀국한 후 지난 20년 동안 목사로, 교수로, 저술가로, 세미나 강사로 활동하면서 해돈 로빈슨의 강해 설교를 한국에 전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설교의 마에스트로
많은 설교 학자들이 설교학 강의는 잘 하면서도 실제로 설교는 잘 못한다. 심지어 이런 농담도 있다. “설교학 교수가 설교를 가장 못하고, 교육학 교수의 교수법이 가장 나쁘며, 영성 신학 교수의 영성이 가장 안 좋다.” 학교의 강의와 강단의 설교를 구별하지 못하는 교수 때문에 강의는 강의대로, 설교는 설교대로 무미건조함 그 자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빈슨 박사는 설교학 교수이면서 설교에도 탁월하다. 그 분은 6,000번 이상의 설교를 평가하면서 청중이 귀를 기울이는 설교를 하기 위해 설교자들이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런 경험과 개인의 연구를 집대성해서 결국에는 「강해 설교」라는 역작을 내놓게 되었다.
그 분의 설교는 정확한 석의, 해석상의 통찰력, 생생한 이미지, 감동적인 예화, 효과적인 음성 사용 등을 통해 ‘빅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살려내 듣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필자도 그 분의 설교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 분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설교의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댈러스신학교 설교학 교수를 역임한 고(故) 윌라이트(Keith Willhite) 박사의 신학교 학급 친구 중에 한 명이 윌라이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해돈 로빈슨을 먼저 만드신 후에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만드신 것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두 번에 걸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자 윌라이트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해돈 로빈슨을 맨 먼저 만드시고, 그 다음으로 많은 설교자들을 만드셨으며, 그러고 나서 우리 모두를 만드신 것 같다. 말하자면 세 번 창조하신 것이다.” 해돈 로빈슨 박사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보내주신 크나 큰 선물이다. 그런 분과 동시대에 호흡하면서 직접 그 분의 강의와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kimkt88
글쓴이 : 김경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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