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스크랩] 박조준목사/설교의 기능개발

하나님아들 2019. 2. 26. 23:54

박조준목사/설교의 기능개발


이시간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과 저에게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하면 좀더 바로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분들이 역사의식적 측면, 사명의식적 측면, 은사개발의 문제 등을 다루었기 때문에 저는 설교의 기능개발 문제에 대하여 제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여러분과 같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설교자의 자질 문제
설교에는 기능이 필요하긴 하지만 설교자에게 있어서 기능은 둘째라고 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기초, 즉 사람의 됨됨이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벧엘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가 높은 사다리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오르락내리락 해야지 내리락오르락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덜되었는데 목사가 되면 큰 문제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번은 교수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몸이 이상하고 불편해서 감기약을 사먹으려고 동네에서 약국을 하시는 교회 집사님의 약국을 갔다고 합니다. 집사님은 "목사님이 처음 오셨는데 제가 약 값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제가 대접하는 마음으로 드리니 그냥 가져가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약을 가져왔습니다. 다음에 또 무슨일이 있어서 약을 사러 갔을 때 그 목사는 약을 달라고 하고는 돈도 내지 않고 그냥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나왔습니다. 나중에 집사님 말씀이 "나도 이것이 직업인데, 목사님이 우리집에 오면 으례히 그냥 가져가는 줄 알면 나는 어떻게 하나"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결국은 멀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데 그것은 목사의 책임입니다. 돈을 냈는데 그냥 가져가라 할 때는 별문제지만 돈 낼 생각도 안하고 그냥 가져가면 그것은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부터 되어야지 사람이 덜 되고 목사부터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왜 기초교육이 필요합니까? 대학 공부할 때 전문 공부나 하면 되는데 왜 교양 교육을 받습니까? 대학생이 되기 전에 적어도 이 정도는 알아야 대학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초 교양과목을 배우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나와 글만 읽을 줄 알아도 목사가 될 수는 있습니다. 또 옛날에는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분들 중에도 훌륭한 목사가 된 분이 많습니다. 목사가 꼭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나오고 그렇게 한 다음에 신학을 나와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초 상식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상식밖의 이야기를 할 때는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는 신학교가 수백 개 있습니다. 거기의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일단 안수를 받으면 어느 교파에서든 목사가 되는데 그들이 나와서는 문제가 참 많습니다. 앞으로 한국교회에 점점 더 복잡한 문제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국에 갔더니 미국에 간 교포의 수준은 상당한데 대개의 경우 목사님들 수준이 교인들 수준보다 낮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참 많더라"고. 바로 보신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어떤 경우에는 한국에서 목회하기가 어려워서 미국이라도 가자 해서 오신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으로 가신다고 해서 수준이 갑자기 높아질 수 있겠습니까?
미국에 이민 간 분은 대개의 경우 수준이 높습니다. 대부분 명목상은 공부하러 가는 것이라, 유학 갈 정도의 수준에 있는 분들에게 수준 낮은 목사님이 가게 될 때는 문제가 많고 얼굴 찡그리는 일이 많아집니다. 한국교회는 그 동네에 하나밖에 없어 나갔는데 나가보니 너무 한심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들이 모여 우리 자체의 자질을 향상하기 위해 힘쓰는 것은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기본자세
우리에게는 "좋은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고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를 요새 상당히 인기있는 직업 중에 하나로 인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이십년 전 저는 어떤 기회에 잡지에서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학교는 전통적으로 졸업하기 전에는 결혼을 못합니다. 혹 결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몰래하는 것이고, 원칙은 결혼하게 되면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졸업반 학생들에게 설문을 냈는데 여러 앙케이트 중에 '앞으로 이 대학교를 졸업하면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겠는냐'는 설문이 있었습니다. 통계를 냈더니 첫째가 엔지니어(engineer), 기술자입니다. 어디가나 취직 맘대로 하고 밥걱정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메디칼닥터(medicaldoctor), 의사입니다. 셋째가 프로페서(professer), 대학교수입니다. 넷째가 뱅커(banker), 은행가… 등의 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때 목사가 된 때여서 목사는 어디있나 살펴보니, 한참 내려가는데 열두번째가 이발사요, 그 다음이 목사였습니다. 그러니 열세번째로 이발사보다 못합니다. 그때부터는 이발소에 갈 때마다 '아하 이분은 나보다 인기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늘 갖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그것이 상당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목사가 세 번째 안에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에는 교회에서도 목사한테 시집가라 하면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고 했었습니다. 저희 교인 가운데 한분이 큰 약제사를 경영하는 데, 세상적으로 아주 괜찮게 살고 있습니다. 그 아들중에 하나가 서울 공대를 나오고 한국신학대 학을 갔습니다. 회사 회장으로 있던 아버지가 어느날 같은 회장급에 있는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 회장은 "회장님 내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정중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회장님 댁의 아드님이 훌륭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인데 사실은 저희 집에 딸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딸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훌륭한 딸입니다. 여러모로 내가 회장님과 오래 지내오는 동안 회장님의 아들과 우리 딸이 성혼을 하게 되면 참 훌륭한 가정이 될 자신이 있어서 내가 감히 청혼을 드리는데 좋으시면 허락하여 그 두 사람을 결혼시켜 보시면 어떻겠습니까?"고 말하면서 청혼을 하였습니다. 이때 아들 가진 회장님은 "죄송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서울 공대를 나와서 그 방면에서 내가 하는 사업도 인계를 하고 그랬으면 했는데 애가 특별히 뜻이 있어서 지금 신학교를 갔습니다. 앞으로 목사가 되겠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말을 듣자 청혼을 했던 이 회장님은 "아! 그렇습니까?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사에게는 딸 줄 마음이 없다 그말입니다.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얼마전에 어떤 청년 하나가 찾아와 "목사님 제가 상담할 일이 좀 있는데 말씀 좀 나눌 수 있습니까?" 하기에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목사님 바쁘신데 오랜 시간 말씀 드릴 수는 없고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가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아 그래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 가셔야죠. 참 잘했습니다."
"목사님 아시다시피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그 힘든 경쟁률 높은 곳에 입사시험을 치르고 들어가서 남의 회사에서 직원 노릇을 해보고 밑에서 생활해 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제 나름대로 독립해서 사업도 좀 해보았는데 신통치 않고, 그런데 요새 가만히 보니까 목사가 괜찮아 보여요. 그래서 신학교를 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얼마나 가슴이 서늘한지…. 그러나 남이 가겠다는 것을 말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누구나 신학교, 갈 수는 있습니다.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또 목사고시 보고 합격할 수 있습니다. 시험 잘보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목사도 될 수 있을 겁니다. 교회도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특별한 사명의식을 가지기 전에는 목회를 해도 비지니스일 뿐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할 것이고, 손해가 나면 무슨 일 있어도 안할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합니다.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물건을 팔면 아버지에게 본전으로 드립니다. 하지만 장사를 정말 잘하는 사람은 남길 것은 다 남겨야 합니다. 그래야지 아버지한테 밑지면 장사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누구에게 나 남겨야 잘하는 것이지 밑지는 것은 장사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 이 성직의 사명은 남기고 안 남기고가 아닙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어느 것이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냐', '어느것이 내 양무리를 위한 것이냐'하는 것이면 내게 손해가 나도 감수하고 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사명입니다. 이것이 목사의 됨됨이입니다.
제가 볼 때는 오늘 상당히 많은 분들이 직업적으로 목회를 합니다. 사명과 는 좀 멀리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장래를 위해서 참 유감입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심부름을 할 자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다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한이 가까워왔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다 벌써 부음이 되고" 한 방울의 기름도 다 남김없이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위해서 몽땅 쏟아 부었습니다. 이 생활,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을 만든 것입니다.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주께서 내게 맡겨준 사명 곧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도 내놓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바울이 바울된 것입니다.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과 못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믿음과 신념을 가진 교역자는 어려움이 있어도 피하지 아니하고 극복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울의 진심의 고백입니다. 자기 힘으로 생각한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지식으로 한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경험으로 한다 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능력 주실 때,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감당한다는 겸손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하는 데 다 두려움 때문에 물러서지 두려움만 없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향하여 거듭 거듭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렵게 되면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마찬가지로 두려운 생각이 들면 집니다. 신념을 갖고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담력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은 이깁니다.
저는 교인 중에 전에 부산에서 깡패 두목이었다가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를 나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한 번은 저녁 초대를 해서 그댁에 갔었는데 그 부인 역시 부산지방에서 여자 깡패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대장끼리 만난 것이지요. 제가 조금 의아심을 가진 것은 깡패 대장하면 인상도 더럽고 부리부리하고 눈망울만 봐도 겁이 날 정도이고 몸집도 덩치가 떡 벌어지고 힘을 쓰는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소한 몸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얼굴도 조그맣고 가무잡잡하고 힘도 없어 보이고 마른 사람인데 대장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반면 여자분은 달랐습니다. 덩치가 크고 한번 밀면 왠만한 남자는 저쪽으로 날아갈 정도였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부인이 남편과 살던 이야기, 예수 믿기 전에 깡패 생활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전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예수 믿게 되었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밥먹다 조금만 기분 상해도 던져버려 그릇이 깨지고 상이 부서지는 일이 한 주일에 두 세번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나아졌다고 합니다.
저는 가만히 있다가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이 깡패 두목을 하셨다고 하는 데 저는 깡패 두목은 키도 크고 몸집도 있고 무서울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렇지도 않는데 어떻게 두목을 하셨습니까? 무슨 특별한 기술이나 남이 모르는 힘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분 말씀이 "목사님, 그 싸우는 것이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기술은 있어 봤자입니다. 싸워 이기는 비결 하나는 '목숨'을 내던져야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바로 그것이구나"
목숨을 던지면, 힘과 기술이 있는 사람도 한참 싸우다가 이런 사람과 붙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키가 장대같이 큰 사람도 나중에 "형님"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목숨을 내놓지 않고 하기에 두려워서 겁을 먹고 못한다고 합니다. 목숨을 내어 보십시오.

목회자의 바른 자세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는 우리가 어떻게 못합니다. 자꾸 남 잘하는 것만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성결교회 대표격으로 일하시는 목사님과 식사를 하는 데 그 목사님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회자에게 그 그릇에 맞게 교회를 맡기신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그릇에 합당한 것이 아닌데 자꾸 남 커지는 것만 보고 그것 따라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목회자의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연한이 있는데 그 기간 동안에 내가 어떻게 맡겨진 이 목양 사업을 최선을 다해 하는가, 여기에 성실한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이 일하나, 이것이 중요하지, 어떻게 하면 크게 될까에만 신경쓰면 목회자답지 아니한 일들이 생기고 거기서 무리가 생깁니다. 저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누가 성공한 목회자입니까? 얼마나 많은 교인을 갖고 있느냐, 또 얼마나 많은 생활비를 받느냐, 얼마나 좋은 차를 타느냐, 얼마나 좋은 집에 사느냐, 얼마나 좋은 옷을 입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하는 이것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2백명, 3백명 모이는게 문제가 아닙니다. 꼭 1만명, 2만명 모여야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는 주인이 준 것이지 내가 가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 받은 자들입니다. 다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많이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뒷날의 회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너 얼마 남겼느냐?"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더 내놓았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더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칭찬하는 것을 보십시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칭찬한 것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칭찬한 것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습니다. 받은 것은 분모요, 남긴 것은 분자입니다. 5/5는 1입니다. 2/2는 1입니다. 그러나0/1은 0입니다. 이것입니다. 만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겼으면 이건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긴 것보다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를 받았든지 거기서 충실하면 하나님 보실 때는 마음의 중심을 보기 때문에 꼭 같은 축복과 성공의 칭찬을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목사는 유혹을 피해야 합니다. 인간 본위적인 것을 피해야 합니다. 여러분 도 그런 유혹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유혹을 가끔 받습니다. 설교 하다가도 이 말을 하면 교인들에게 인기가 있을텐데 하는 마음이 싹 들어옵니다. "이거 시험이 구나" 하고 벗어나야지, 이 시험에 걸리면 자꾸 그런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유혹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내 생명 전체를 바치게 되면 하나님이 축복 안 하시고는 못견딜 줄 압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다 관제와 같이 벌써 다 부음이 되었고 달려갈 길 다가고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믿음 지켰기 때문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승리적이고 성공적인 목회를 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언젠가는 우리의 마지막이 올터인데 그때 가서 바울처럼 '나에게도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하는 이런 축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 어떤 분은 목사님을 교회에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목사를 이렇게 대우하는 법이 어디있냐"고 그러는 분이 있습니다. 심지어 허물없는 목사님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할 때 "우리 교회는 머리만 많지 텅텅 비었어" 하면서 자기 대접을 잘 안한다고 섭섭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엄격하게 생각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접받았습니까? 대접받지 않았습니다. 숨겼습니다.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하는 뜻은 사실은 '섬기는 자'입니다. 대접받는 자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사랑해서 대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황송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대접받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 이름으로 이런 대접을 받나' 할 때 부끄럽고 죄송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조그마한 대접을 받아도 황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큰 기대를 하고 있는데 주먹만한 대접을 하면 '그까짓 것'그럽니다. 대접받지 못하면 당연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도 그런 대접은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은 어떤 교회에서 목회하든지 언제나 감사와 만족입니다. 세상에 불행한 것은 만족과 감사없이 사는 목사입니다. 목사가 만족과 감사없이 사는 것처럼 불쌍한 것은 없습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다른 걸 택할 걸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나는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님이 만족하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어떻게 만족한 생활을 하라 할 수 있습니까?
혹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야 대접받으며 잘 지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제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제가 27세 때 목사가 되어 저 영등포에 있는 공장지대에서 새로 시작하는 데 예배당도 없이 공장(동아실크) 식당을 빌려서 주일 아침만 예배드리는 곳에 초빙받아 가서 교회 이름도 짓고 일을 했습니다. 우리집은 교회에서 무허가 건물에 방 한칸 부엌 한 칸을 세내어 주었습니다. 둘이 갓 결혼해서 나갔으니 그때가 아마 10월이었을 겁니다. 날이 점점 추워오고 12月, 1月이 되니까 집이 허술하게 지은 집이라서, 물론 전기불도 없었고, 웃바람이 얼마나 센지 촛불이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연탄 난로를 갖다놓고 피우니까 그때야 웃바람이 없어졌습니다. 우리 집사람도 무던히 고생했습니다. 그 지역이 모두 가난한 지역이라 사람들이 가마니를 치고 굴속으로 지하실을 파고 들어가 움같은 곳에 살고 있는 집이 많았습니다. 그런 집에 심방가니까 밀가루를 빚어 수제비를 만들어 주는데 사실 그걸 속이 좋지않아 소화를 못시키지만 해주니까 맛있다고 하면서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목사님 수제비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가는 집마다 수제비를 줍니다.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부터 오늘까지 20여년 목사생활을 하는 동안 한번도 불평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남보다 대접을 더 잘 받아서 그런것도 아닙니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렇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중심으로 한번도 불평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 좋게 해석하고, 감사하게 보려고 하니까 마음이 언제나 기쁩니다. 감사하고 기뻐야 목사하는 재미가 있지, 불평할 바에 무엇 때문에 목사를 합니까? 제가 왜 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우선 목회자는 이런 자세가 필요함을 말씀드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감사하고 감격한 가운데 나오는 설교가 되어야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내 마음에 불평과 원망과 시기와 원한이 있어서 누구를 보면 한번 쏴주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설교가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과 온유와 감사와 기쁨과 확신과 용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참지 못하면 안됩니다. 어떤 목사님은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다음 주일날 설교단 위에서 당장 '반응'이 나옵니다. 어느 집사가 조금만 섭섭하게 하면 그 다음주에 당장 내려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살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많은 양무리를 먹여야지, 한 사람만 마음에 기억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나올 수 있습니까? 언제나 많은 양무리를 생각해서 그 양무리에게 내가 무얼 먹일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잠언에 "네 소떼에 마음을 두고 양떼를 부지런히 살피라" 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양무리, 소떼에게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예수님은 실수 많은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늘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사랑을 세 번씩 다짐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해석가는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하니까 그것을 알아차리고 세 번씩 사랑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렇게 세 번 실수했다고 세 번 "네가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이러면 예수가 아닙니다. 실수는 했지만 사랑이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 말씀은 "내 양을 먹이라"입니다. 양을 치라와 같은 말입니다. 목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양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없이 목양이 안됩니다. 설교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여야지 미워하는 마음으로 먹이면 안됩니다. 언제나 중심에 깔려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망과 두들겨 패는 것만은 아닙니다. 소위 어니스트니스(earnestness), 간절한 마음씨입니다.
옆집 아이에게 말하듯 하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아들 잘되라고 말할 때 "너 그렇게 하면 안된다. 바로 해봐"라고 하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그저 아들을 붙들고 눈물 흘리면서 "너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그것이 아니야"하고 말합니다. 자기의 있는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쏟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여기 아까 읽어주신 말씀 가운데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convenience or inconvenience라고 썼습니다. 편하든지 불편 하든지, 환경이 좋든지 나쁘든지 그 말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아 허탈한 것을 좇는다 했습니다. 오늘 이것이 마지막 때의 현상입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를 긁어주는 사람을 자꾸 찾는다는 말입니다. 이상한 말을 자꾸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너는 전도의 일을 다하며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교인 귀 긁어주는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생명의 양식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정주부가 식구들을 사랑할 때 '맛'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때 그렇습니다. 저의 아내가 피곤하니 이것 좀 마시라고 시퍼런 쥬스를 갈아서 주면서 마셔보라 했습니다. 코에 대니까 어지러울 정도인데 안마실 수 없어 서 마셨는데 마시고 난 후 물으니 '케일'이라고 합니다. 쓰고 메스껍지만 몸에 좋다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주었다면 마시지 않았을 겁니다.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몸에 좋으라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써도 메스꺼워도 마셨습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단 것만 먹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되면 단 것은 아니어도 쓰고 메스껍고 그래도 좋다할 때는 먹습니다.
동기가 무었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인들을 볼 때 눈치 볼 것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느 장로가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이런 말하면 어느 집사가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것저것 다 보다가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 양무리에게 이 약이, 이 말씀이 꼭 필요하다 할 때는 먹일 줄 아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마음과 마음은 통합니다. 정말 내가 사랑으로 하면 그 순간은 오해하고 비뚤어질지 몰라도 시간이 다 해결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와같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Ambassador for Christ)입니다. 요새로 말하면 대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파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대사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대사는 자기 말이나 의견을 내놓지 않습니다. 본국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대사입니다. 대사는 언행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가면 자기가 온 나라의 표준이 됩니다. 아, 저 대사 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 나라는 그런가보다 대사가 저렇게 행동하니 그 나라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나보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 대사는 대사로서의 긍지가 있어야 합니다. 왜? 한 나라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의 긍지가 필요합니다.
에스겔서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에스겔을 향해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너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내 백성을 깨우치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바로 목사의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사람입니다. 월간목회에서 얼마 전에 대담을 하자고 해서 성결교회 목사님 한 분, 합동측 목사님 한 분, 저 셋이서 목사의 권위 문제를 가지고 대담을 했습니다.
목사가 너무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서 문제가 많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하는 내용입니다. 목사의 권위가 어디 있습니까? 목사니까 권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목사 잎에서는 누구도 하는대로 따라만 가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목사의 말을 안들으면 하나님이 저주한 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이 말하면 되는데 내가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말 안들으면 저주받는다 그말인데 그건 문제가 다릅니다. 그럼 목사의 권위는 어디에서 옵니까? 권위는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귄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선지자들이 나와서 말씀할 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랬습니다. 거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자기 말은 일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는 대로 듣고 전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현대교회 우리의 목회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영감이 없이도 주일 아침, 저녁, 수요일 저녁에 설교해야 합니다. 새벽마다 합니다. 영감이 있든 없든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선지자는 한달이고 두달이고 영감이 없으면 가만히 있었습니다. 1년도 가만히 있다가 영감이 생기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했습니다. 요즘은 매일 해야 합니다.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어주신 이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요, 이미 주신 말씀을 현대인에게 어떻게 해석(interpretation)하느냐 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을 때 그 목사님 자신이 교인들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목사님 말씀이면 조금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목사님이 말씀하신는데" 하면서 따라옵니다. 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정치로 한다고 하는데 사실 목사가 정치를 해봐야 얼마나 잘합니까? 또 냄새만 피웁니다. 정말 정치 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것같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위를 가진, 권위를 부여 받는 하나님의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지도력 문제

요새 한국교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목사의 지도력 문제입니다. 원칙으로 목사는 같은 장로로서 말씀을 전파하고 일반장로 (elder)는 치리하는 장로입니다. 기능적으로 장로는 목사를 잘 뒷받침해주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된 교회의 원리요,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잘 가르치는 자를 갑절이나 더 존경하라는 것이 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목사와 장로 둘 다 책임이 있습니다. 장로가 목사를 존경하기보다 내가 신학을 안했으니 설교를 할 수 없으니까 목사는 설교나 시키고 그 외에는 내가 다 알아서 한다는 생각으로 목사가 지도력을 가지는 것을 장로들 가운데 싫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위 영어로 'under the thumb'같이 내 손가락 밑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한국 뿐 아니라 미국도 있습니다. 장로 말을 잘 듣는 목사가 들어와야 되지 조금만 장로 눈에 벗어나게 되면 목사를 내보내려고 합니다. 여기에 상당한 문제가 있고 목사의 지도력은 자꾸 떨어져갑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아주 비극적인 일인데 목사가 지도력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끝납니다. 목사가 밥이나 벌어먹으려면 거기에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장로의 비위나 맞추면서, 눈치를 봐가며 설교하고,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해요 하면 그러냐면서 또 안합니다. 이런 교회는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합니까?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지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사람의 종노릇하면 다 끝난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경향이 지금 이런 아주 위험스런 경향으로 나가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바로 해야 합니다. 지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꾸준히 노력하고 향상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언제나 일반 교인보다 목사는 몇 발자국 앞서 있어야지 같은 급에 있으면 지도가 안됩니다. 처음에 목사님 말씀이 잘 이해가 안돼도 따라가 보면 잘되는 것을 보고 "아 역시 목사님은 우리보다 앞섰구나"하고 깨닫게 되어야 지도력이 생깁니다. 목사님 그러면 어려울텐데요 하면 "그렇습니까 그만두지요"하는 교회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른 면은 내놓고라도 목회하는 목양 면에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 합니다. 전문가입니다. 장로님 집사님은 장사하고 사업하는 데 전문가입니다. 목사가 장사하는 장로님에게 장로님 그렇게 장사해서 되나요, 이렇게 투자하십시오. 라고 하면 점잖은 장로님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목사님은 설교나 하시지요. 입장을 바꾸어 보십시오. 목사님은 하루 종일 밤낮 24시간 꿈꾸는 시간까지도 교회만 생각하고 성도들 생각만 하고 말씀 전파하는 일만 생각하는 데 목사님에게 이러십시오 이러십시오 하는 것은 상식밖입니다. 전문성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돕는 여러분이 계시는데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습니다. 큰 회사에 사장도 계시고 큰 시중 은행에 은행장도 계십니다. 요즘 무슨 말을 하면 "목사님 우리도 바쁜데 그것까지 어떻게 압니까, 목사님이 하셔야지요. 목사님이 알아서 하세요"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새 교회니까 목사님 우리는 흰 종이인데 목사님은 그리기만 하십시오. 우리는 그저 따라갑니다. 하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목사님 필요하시면 하세요. 우리는 결재만 해드립니다 하는 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콩 놓아라 팥 놓아라 비전문가가 전문가가 하는 일을 간섭하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하여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 목사님 자신이 그렇게 되기 위하여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다른 데에 눈 팔지 마십시오. 한 우물을 파십시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우물을 파되 하나를 파라. 샘물이 날 때까지 파라는 것입니다. 여기 들썩 저기 들썩하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됩니다.
전에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참 모르는 것이 없이 박식합니다. 그래서 다른 목사님에게 그 목사님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칭찬했더니 목사님 대답이 그 목사님 모르는 것도 없지만 아는 것도 없다고 합니다. 전문적이어야지 넒게 아는 것은 많이 모르는 것입니다. 제일 많이 아는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입니다. 그 이상가면 좁게 압니다. 박사가 되면 더 좁아집니다. 그것밖에모릅니다. 춘향전 하나 가지고 국문학박사가 됩니다. 다른 것은 모릅니다.
우리도 성경 외에는 몰라야 합니다. 다른 것 알아봤자입니다. 변호사 놓고 법학 이야기하면 웃기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가 알면 얼마나압니까? 의사 두고 의학적인 말을 하면 얼마나 압니까? 의사들도 자기분야 아니면 모릅니다. 요새 전문의가 있지 않습니까? 외과 전문의도 한 가지만 아닙니다. 정형외과, 성형외과 등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은 모르고 하나만 압니다. 이것이 양심적입니다.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는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 했습니다. 전문가가 되리라 그 말입니다.

목회와 설교의 기능

설교의 기능적인 면은 소위 전달(communication)입니다. 전달에는 효과적인 면이 있는데 책을 읽는 것은 교육학적으로 말하면 10%의 효과가 있습니다. 듣는(hearing)것은 20%의 효과가 있습니다. 듣고 읽는 것, 녹음기 같은 것은 30%의 효과가 있습니다. 또 눈으로 보는 TV 비디오 같은 것은 40%의 효과가 있습니다. 라디오 듣는 것 보다 눈으로 보는 TV가 빠릅니다. 그래서 라디오 광고보다 TV광고를 30초 동안에 몇 백만원씩 주고 하는 것입니다. 효과가 빠릅니다.
그 다음에 행하는 것은 60%라고 합니다. 또 토론(discussion)하는 것은 70%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행하는 것과 반복하는 것 이것을 통해 80~90%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험을 하면 이론으로 배운 것보다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커뮤니케이션 단계에서 보면 '설교'는 무엇인가? 둘째입니다. 기껏 20%밖에 효과가 나지 않아 전달방법으로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1시간 30분 동안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해도 진짜 남는 것은 20%밖에 안남 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는 설교를 하는 데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효과를 내느냐 하는 것이 기능입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자세를 가지고 이 기초 위에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기능만 하게 되면 재간꾼입니다. 또 배우나 탤런트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순전히 기능만 하지 인격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배우, 탤런트의 생활이 어떻든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연기만 잘하면 됩니다. 사장 연기를 한다고 사장입니까? 사장 연기지 사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전파하는 것은 다릅니다. 내 생활에 내 인격에 기초를 두는 데서부터 이것이 전달이 되어야 바로 됩니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말씀을 전달할 때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확신(convict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확신없는 말은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부산에서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는데 그 교회에 3년을 계셨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우리 목사님은 강단이 너무 약하시다는 반응이 나와서 교인들이 떨어지고, 나와서 졸고, 3년 후에는 교인이 많이 줄어서 섭섭하지만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만두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설교가 약하다면 할 수 없지. 내가 이 교회에서 3년 부임한 이래 오늘까지 서울의 유명한 목사 설교집을 갖다가 그대로 읽었는데 그것이 약하다면 내가 할말이 없지"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어느 목사님은 그 설교로 큰 교회를 잘해 나가시는데 그분은 왜 그 설교 그대로 읽었는데 설교가 약해서 안되겠다고 그만두게 되었습니까! 확신 문제입니다. 원고도 중요하지만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이 있어야 설득력이 있습니다.
물건을 하나 사는데 동대문 시장에 양복지 많이 파는 곳에 갔습니다. 간판 만 다르지 물건들은 비슷합니다. 진열순서까지 비슷합니다. 척 들어가니 주인이 장부정리 하느라고 열중해서 손님이 와도 자기 일을 합니다. 들어간 김에 물건을 보다가 마음에 들어서 "이것은 어떤 옷감입니까" 했더니 그냥 처다보면서 "글쎄요 새로 들어오긴 했는데 내가 입어보았어야 알지요" 그럽니다. 이 집 아니면 못사냐 싶어서 바로 옆집에 갔더니 비슷한 것이 있어서 들어가는데 선생님 어서오십시오 하면서 친절하게 합니다. "이 옷은 어떤 옷감입니까" 하니 "역시 선생님은 눈이 밝습니다. 이것은 새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태리에서 주문해서 물건짜고 남은 것인데 한국에서는 처음일 겁니다. 옷을 보십시오. 색감하며, 촉감하며 선생님이 입으시면 품위가 달라집니다. 하면서 옷감을 쫙 펴서 척 입혀줍니다. 물건이 나쁘다면 모릅니다. 물건이 틀림없는 것을 보고 "좋습니다 사지요"하고 그 물건을 샀습니다.
똑같은 물건인데 왜 어떤 집에서는 살 마음이 없고 어떤 집에서는 살 마음이 생깁니까? 파는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로 우리는 복음을 파는 사람입니다. 값없이 파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 이 물건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기가 아닙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복음을 믿어야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지 확신이 없을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확신이 있을 때 열의가 있습니다. 확신없는 사람은 열의가 안생깁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여러기능

확대와 축소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메시지의 내용은 같지만 우리는 시간 세계에 속해 살기 때문에 모임에 따라서 시간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때는 5분, 어떤 때는 10분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어느 때는 30분, 1시간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지만 줄일 수 있고 늘일 수 있어야 합니다. 축소와 확대의 원리를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가끔 외부 목사님을 모셔다가 설교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잘 못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님 25분 안에 끝내야 합니다. 하고 부탁을 합니다.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하루에 5번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55분안에 끝나야 그 다음 예배가 계속됩니다. 그러니까 예배시간 끝날 쯤 되면 밖에 서서 성도들이 기다립니다. 어떤 목사님은 35분을 설교하는 데 이거 큰일 났습니다. 다음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교대를 합니까? 분명히 제가 25분 안에 끝내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런데 줄일 줄은 모르고 준비한 원고 그대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줄일 줄도, 늘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30분을 해야 하는 데 원고를 15분 준비했다고 15분만 하고 나서 다 끝내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예배가 45분 안에 다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문제는 같은 메시지의 내용이지만 늘이고 줄이는 이 기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술입니다.

채색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원색적으로 하는 것과 채색해서 듣기 좋고 보기좋게 할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떡을 먹을 때 뚝 한 조각 잘라 먹는 것보다 예쁘게 빚어서 찍어 주면 같은 떡이라도 먹음직합니다. 이왕이면 먹음직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안먹으려는 사람에게는 당의정을 씌워서 주거나 설탕, 꿀을 타서 먹입니다.
어른이나 아이는 예화를 좋아합니다. 이 예화를 통해서 진리가 들어갑니다. 진짜 약이 들어갑니다. 진짜 약이 들어가야지 약이 없는 예화만 해놓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 이라는 것은 그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내용없는 예화, 그 내용을 통해서 무언가 얻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채색이 필요합니다.

말이 정착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 한다는 정착지가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항상 듣기는 듣는데 다 그럴듯한데 무얼 들었는지 남는 게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정착점이 없고, 둘째는 전개가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신학교 선생님들 강의시켜보면 유식한 말을 하기는 하는 데 1시간 설교를 들어도 남는 게 거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학교 선생님은 강의는 잘 하는 데 설교의 전개가 약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잘 모릅니다.

변천의 법칙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저기로 넘어가는데 그걸 위해서 첫째는 이렇고, 둘째는 이렇고, 셋째는…, 어떤 분은 서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본론, 첫째, 둘째, 셋째, 결론으로 내려갑니다. 결론하면서 토막토막 끊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에는 서론, 본론 등이 필요 없습니다. 계속되는 말속에서 첫째, 둘째, 셋째도 필요하지만 어떤 때는 첫째에서 다섯째가 될 수도 있고 그것 없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무슨 설교이든지 세 대지입니다. 아마 삼위일체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1년 내내 세 대지입니다. 세 대지로 만들 설교도 있고 어떤 것은 네 대지로 만들 설교도 있어야 될 것입니다. 또 늘 세 대지만 하면 어떤 약점이 있느냐면 목사님 설교 듣다가 셋째 대지가 나오면 "아 이제 보따리 싸자."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설교는 틀에 짜이기 보다, 세 대지도 하고 세 대지없이 쭉 나가기 도 해서 교인들이 설교 들을 때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나는지 모르고 끝날 때 끝나면 아 벌써 끝났구나 해야지 끝날 시간 안됐나 몇 대지했지. 이렇게 되면 설교가 안됩니다. 천편일률이 아니라 다양하게 하는 설교가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시작하면 쉬는 곳도 없이 쫙 나가는 분이 있는데 잠깐 듣는 것은 괜찮은데 조금 피곤합니다. 저는 이것을 예술적으로 말해서 오케스트라와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관현악과 같이 설교하면 좋겠습니다. 관현악, 심포니(Symphony)를 들을 때 어떻습니까? 가령 베토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들어보십시오. 꼭 주제가 있습니다. 주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서 멀리 나갑니다. 그 다음 또 들어옵니다. 멀리 나갔다 또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끌고 나가는데 아주 사람의 마음을 계속 꽉잡고 있습니다. 주제에서 조금 이탈되다가 들어오고, 언제나 주제에 있으면서도 나가는 것같다가 들어오고 해야지 꼭 한 곳에만 있으면 지루해지고 딱딱해집니다.
같은 말을 해도 강하게 하다가 약하게 하다 낮아졌다가, 높아졌다가, 길어 졌다가, 짧아졌다, 이렇게 변화를 줘야 합니다. 작곡가가 작곡하듯이 포르테시모로 했다가 포르테로 바꾸고 피아노로 했다가 피아니시모를 할 때, 듣는 사람이 한 시간을 들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음악인데 언제나 같은 음률로 계속하면 다 귀막고 잘 것입니다. 그러나 리드미칼하게 하면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설교는 강의가 아닙니다. 강의는 안들으면 점수 못 딸까봐 선생이야 좋든 말든, 잘하든 못하든 주의깊게 듣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강의가 아닙니다. 점수 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선 듣는 사람에게 편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설교를 음악과 같이 편안하게 마음에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유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예화를 든 이유도 그것입니다. 유머가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꾸 웃기는 것만 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머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줍니다. 문이 열립니다.

낱말 선택을 바로해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최소한 국어는 알아야 합니다. 영어는 못해도 우리나라 말은 의사전달하는 말과 달리 말이 틀리지 않아야 됩니다. 어떤 분은 틀리는 말이 많습니다. 그러면 고등학생이 듣다가 아 우리 목사님 받침도 잘 모르시는구나 하고 자꾸 신경이 쓰여집니다. 국어는 알아서 받침, 철자법을 바로 써야 됩니다. 말이 정확해야 합니다.
설교 때 어떤 부흥사는 험한 말을 하시는데, 강단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면 생각할 문제입니다. 예를들면 찬송가 부를 때도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하는 찬송을 부흥회 때 여자들은 "나같은   이~"하며 찬양을 부르기도 합니다. 따지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그러면 품위가 떨어집니다.
어느 때는 참 얼굴이 뜨거울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조심해야 됩니다.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인데 너무 지나친 유머는 삼가야 합니다. 유머는 야비하지 않게 서로 마음을 풀 수 있어야 합니다. 단어를 바로 선택하여 설교를 준비하실 때 단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품위가 있는 단어가 되겠나 생각하십시오. 그렇다고 힘든 말 어려운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말 좋은 말을 쓰십시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힘든 말이 있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힘든 말을 하나도 안쓰셨는데 신학교 선생님들이 밥벌이 하려고 힘든 말을 씁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것은 비유로 하실 만큼 쉽게 전달하려고 애썼습니다. 낱말을 택할 때 바로 택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품위를 가지고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파하는 이 말씀으로 어떻게 하든지 내게 맡겨진 양무리들의 심령이 살찔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했지만 언제나 내 마음이 양무리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주부는 점심이 지나면 "저녁은 무얼할까?" 생각해서 메뉴를 작성하는 것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언제나 말씀 준비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하고 남을 때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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