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스크랩] 원어의 표현들 - 음부

하나님아들 2019. 2. 1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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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의 표현들 - 음부

이번에는 성령께서 ‘음부’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찾아보자.

원어를 조심스럽게 살펴봄으로써 성령께서 음부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바를 이해할 수 있다. 몇몇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는 우리에게 무덤 저편에 있는 신비를 벗겨준다. 조심스럽게 살펴보자.

 

1. 스올(l/av)

스올은 구약에서 65번 나온다. 신약의 하데스에 해당하며 흠정역 성경에서는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지옥(hell)으로 31번, 무덤(grave)으로 31번, 갱(pit)으로 3번.

스올의 기본적인 뜻은 어떤 무덤이나 매장지가 아니라 “사지”(死地)이다.

히브리어 ‘게벨’*(geber)이나 ‘볼’(bor)은 스올이 아니라 죽음을 가리키는 단어다. 스올이 사용된 65개의 성경 구절을 찾아 어떻게 번역되었나를 알아보면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게벨(Qeber)-시체가 묻히는 무덤. 퀘버는 무덤을 가리키는 구약성경의 단어이며, 34번 사용되었다. 죽었을 때 퀘버로 가는 것은 시체이지 영혼이 아니다. 스올이 31번이나 무덤으로 번역되어 있을지라도 결코 무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올은 이 세상을 떠난 영들(spirits)이 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일반 용어이다. 스올은 비참함(misery)이나 지극한 복락(bliss)으로 볼 수 있으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계시에 비추어 그것을 하데스와 연결 지을 수 있다.)

 

 

2. 하데스(a/{dh")

스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데스’이다.

사도행전 2:27,31에서 시편 16:10을 인용할 때 스올을 하데스로 성령께서 번역해 놓으셨다. 이 단어는 헬라어 id(‘보다’는 뜻)에 접두사 a를 붙여놓은 것이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서 문자적으로 “볼 수 없는”의 뜻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세계’ 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1번 나오며 10번은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고린도전서 15:55에서만 ‘사망’으로 번역되었다.


다시 한번 권하지만 좋은 성구사전으로 하데스(a/{dh")가 나오는 성경 구절을 찾아보라.

문맥을 살펴보면 하데스의 뜻은 사람이 죽어서 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하지 말고, 문자적인 뜻을 갖게 하거나 아니면 하데스로 놔두어야 한다. 문맥상 하데스가 죽은 사람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를 가리킬 때는 그렇게 번역해야 한다. 다음 두 경우가 그렇다.


(1) 마태복음 16:18-”음부의 권세(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 the gates(counsels) of the unseen world)가 이기지 못하리라 “

문이란 물론 중동 지역의 도시에서는 거래가 이루어지고 장로들이 다스리는 장소이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권세자들이 그분의 교회를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요한계시록 1:18-”나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스올이나 하데스는 어디에 있는가?

구약시대에 죽은 자의 거처는 땅 아래쪽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불러오는 장면에서, 사울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친숙한 영이 또 사람 모양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했던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이 실제로 나타나자 깜짝 놀라고, 화난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고 묻는다(삼상 28:8,11,15).


바울도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땅 아랫 곳으로 내려왔다”(엡 4:9)고 쓰고 있다. 죽으셨을 때 예수님의 영혼이 내려가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혼이 스올(하데스)로 가셨다는 것을 시편 16:10, 사도행전 2: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눅 16:31)으로 우리는 하데스에 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하데스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이 둘은 건널 수 없는 구렁으로 나누어져 있다. 부자의 영혼은 한 곳으로 갔고, 나사로의 영혼은 다른 데로 갔다. 그 둘 사이엔 큰 구렁이 있다. 천사는 나사로의 영혼을 그의 안식처로 데려갔다. 부자가 그 고통스러운 곳에서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틀림없이 호사스러웠을 그의 장례식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품’은 히브리어 숙어이다. 그 뜻은 ‘안식, 교제, 행복, 위로, 사랑, 안전한 장소’이다. 가난한 거지 나사로는 이제 행복과 만족을 의식하고 있다. 그가 지상에 있을 때 바랬으나 얻지 못했던 것이 이제 그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부자는 예수님이 ‘고통받는 곳’이라 부른 곳에 가 있었다. 부자는 고통 중에 부르짖는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 형제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누가복음 16장 전체를 살펴봄으로써 이곳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자는 죽었으나 살아있었다. 죽음은 그를 자기 육체와 분리시켰으나 그의 의식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이며, 도움이나 희망을 품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으며, 자신이 마땅한 곳에 와 있으며, 구원을 찾을 수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 중 하나가 자신의 죄 많은 생애를 뉘우치고, 놀라운 그리고 담대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한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원문에는 낙원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 “네가 나와 함께 그 낙원에 있으리라.” 이 낙원이란 단어가 특히 흥미롭다. 구약에서 솔로몬은 “내가 나를 위하여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었다”(전 2:5)고 말했다. 과원이라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파르데즘’(pardesim)이며, 이 단어가 문자적으로 ‘파라다이스’(낙원) 즉 ‘공원들’ 혹은 ‘놀이동산’ 이다. 동양의 왕들은 쉬거나 즐기기 위해 이같은 동산들을 만들었다. 예수님이 죽어가는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하신 장소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행복한 부분으로 가실 것이며, 구세주의 영혼이 계시므로 그곳은 즉시 낙원이 될 것이다.


에베소서 4:8(시 68:18)에서 하데스의 낙원 부분이 이제 다른 장소에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에 대해 성령께선  “그가 위로 올라 가실 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혹은 다른 번역본에는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 많은 사로잡은 자들을 데려가셨다”고 쓰여있다. 이 구절에서 추리하자면, 주 예수님이 믿어 죽은 영혼들을 주와 함께 하늘로 데려가셔서 구약 스올의 낙원 구역을 텅비게 하셨다.  그 이후에는 믿고 죽은 자를 언급할 때, 그 위치를 신약은 ‘아래’가 아닌 ‘위’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올라)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쓰고 있다(고후 12:4).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이끌려 올라갔다’(caught up)는 표현 이 또한 흥미롭다. 헬라어 ‘하르파조’(aJrpavzw)는 문자적으로는 단순히 ‘붙들어가다, 잡아채가다’는 뜻이다. 그런데 흠정역에서는 “이끌려 올라갔다”(caught up)로 번역하고 있다.


휴거를 설명할 때도 이 단어가 쓰인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aJrpavzw, caught up)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6,17).

여기서 전체적으로 보면 방향이 ‘위’이다. 똑같은 단어가 계시록 12장 5절에서 그리스도 즉 사람의 아들의 생애를 요약하면서 쓰이고 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aJrpavzw).”

따라서 바울이 낙원으로 이끌려 갔을 때, 흠정역은 그가 위로 올라갔음을 명백히 암시한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 주님이 위로 가셨다. 주님은 낙원의 위치를 다시 배치하신 것이다. 믿는 자들은 이제 주님이 계신 곳 즉 분명히 위로 간다.


전혀 다른 문맥에서 바울은 이와 동일한 것을 말한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롬 10:6).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보면 죽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기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즉 그들을 완전히 살아있어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다-더 좋은 것으로, 혹은 더 나쁘게.

낙원을 다녀온 후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그리고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말한다.  이 말을 할 때 바울은 흥미로운 단어를 쓴다. ‘욕망’은 문자적으로는 “그 욕망”(epithumai)이다. 이 단어는 흠정역에 서는 세가지로 번역되었다. ‘욕망’(disire)으로 3번, ‘육욕’(concupiscence)으로 3번, ‘갈망’(lust)으로 31 번.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 주님의 마음을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바울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낼 때 이 똑같은 단어를 썼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 2:17).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를 원한다고 말할 때 그는 문자적으로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이 “떠나”라는 동사(anatto)도 또한 흥미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떠났다가 돌아오다’는 뜻이다. 신약에 이 단어가 나오는 또 다른 유일한 곳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6)고 말씀하실 때이다.

바울은 이 동사의 명사형을 디모데후서에서 쓰고 있다. 임박한 사형 집행을 앞두고 바울은 “나의 떠날(analusis)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 4:6)라고 썼다. 고대 그리이스에서 이 단어는 배가 출항할 때 사용했던 단어였다고 한다.  바울은· “떠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말했다. 즉 그는 출항하고 싶어했다. 그는 파선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닻을 올리고, 언젠가 다른 나라의 보물을 잔뜩 싣고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먼 항구로 항해하고자 한 것이다. 이 놀라운 발언에서 바울은, 떠나(출항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있다고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더욱 좋다”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은 “훨씬 더욱 좋다” 로 되어야 한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비교급일 수가 없다. 단지 최상급이어야만 한다. 이같은 것이 ‘스올’과 ‘하데스’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죽은 후의 삶이다.

 

3. 게헨나(gevenna)

죽은 후의 세계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어둡고, 불길하고, 무섭고, 두려운 측면이다.

하데스의 어두운 측면은 게헨나의 어두운 그림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헨나는 히브리어 ‘토페트’에 해당한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2번 나오며 항상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악인들이 죽어 거하는 최종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불못’으로 나와 있다(계 20:14,15).


이 단어는 히브리어 ‘가이 힌놈’(GaiHinnom: 힌놈 골짜기)을 번역한 것이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예루살렘에 실제로 있는 장소이다.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를 하던 어두운 시절, 어린 아이들을 우상에게 바치던 장소였다. 그 곳에서 유대인들은 그 끔찍스러운 신 몰렉을 위해 아이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했다. 몰록은 속이 비어있고, 그 금속으로 된 배 부분에는 맹렬한 불이 타고 있었다 몰렉의 붉게 달아오른 무릎 위에 산 채로 어린아이들을 놓으면, 아이들은 구멍을 통해 이 불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 악마적 우상숭배를 예루살렘에 공식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솔로몬 왕이다.  “솔로몬이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같이 하였으며”(왕상 11:7).


수세기가 지난 후 요시아 왕 시대에 이 악마적 우상숭배는 끝이 났다.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하여 사람으로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왕하 23:10)

이 계곡은 예루살렘 남쪽을 잇는 3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다. 예수님 당시에 이 끔찍한 우상 숭배 의식은 이미 그친지 오래되었다. 더 이상 어린 아이들이 몰렉의 무릎 위에서 끔찍하게 죽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힌놈 골짜기에는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쓰레기를 소각시키는데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게헨나라는 단어는 “꺼지지 않는 불····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거지지 않는 곳”(막 9:43,46,48)을 자연스럽게 의미하게 되었다.


악인을 심판하는 백보좌 심판에 관해 성령께서는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고 기록하셨다. 이 심판을 받을 때 스올(하데스)의 고통스러운 부분에 있던 악인들의 영혼은 다시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들은 최종 판결을 받기 위해 크고 흰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불못’이라 부른 곳에서 영원히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데스는 텅 비게 될 것이다. 하데스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지옥을 생각할 때 연상하게 되는 불못이 그들의 최종적인, 끔직한 거처가 될 것이다. 그곳은 그 언어가 상징적이건, 문자적이건 묘사하는 실제 장소이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우리가 가지 않기를 바라셨던 그런 끔찍한 곳이다.

 

4. 하늘(Heaven)

하늘 역시 똑같이 실제의 장소이다.

구약에서는 ‘솨메’, ‘솨마인’(shameh, shamayin)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 단어의 어원은 ‘높은’이다. 그래서 보통 별들이 있는 하늘을 가리키는데 사용했다. 헬라어 ‘오우라노스’(ouranos)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을 의미하는 단어가 확대되어 하나님의 처소를 가리키게 되었다.

성전을 봉헌할 때, 이 성전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이 거하시기에는 부족 하다는 것을 솔로몬은 알고 있었다.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대하 6:21)라고 기도 중에 언급함이 그 증거이다.

비슷하게 다니엘도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해석해 주면서도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시라”(단 2:28)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신약에서도 반복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마 6:9)라고 시작하도록 말씀하셨다. 또 어린 아이를 학대하는 것을 꾸짖으시면서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고 말씀하셨다.

계시록에서는 하늘의 놀라운 예배 모습을 묘사하기 직전에 요한은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 4:1) 라고 말했다.


하늘은 실제로 사람들을 위한 실제의 장소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가르치시면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요 14:2)고 말씀하셨다. 하늘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에 관해 가장 분명한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은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자세한 묘사 부분이다. 이때 사용된 언어가 매우 상징적이고 새 예루살렘이 천년왕국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하늘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을 구체화시켜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성은 정사각형이며 각각 1,500마일이다. 재료는 반투명이라 빛이 흘러 나오고 있다.


정금도 유리같이 투명하다. 이 성은 보석으로 빛나는 12기초석 위에 세워져 있고 12문은 각각 커다란 진주 하나로 되어 있다.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가 거기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비취기 때문에 해와 달이 필요 없다. 모든 세대의 성도가 거기 거하고 있으며, 저주와 죄, 고통, 눈물, 밤이 없다. 예수님께서 거기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 이 곳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이다. 우리는 부활한 몸을 갖고 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한 기업”(벧전 1:4)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으로 누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단어만 간략히 살펴보자.

 

5. 타타루스(tavrtaro")

베드로는 ‘타타루스’를 타락한 천사를 가두어 두는 감옥으로 말하고 있다(벧후 2:4). 루시퍼를 따라 하나님의 보좌에 반역했던 많은 천사들이 아직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 이들은 성경이 ‘하늘’이라 부르는 곳을 다니고 있다. 바울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이라 부른다. 이들은 사단의 위계 질서에 속한 자들이다. 이들 중 몇은 ‘세상 임금’으로 불리우는 그들의 주인 밑에서 세상 나라들을 다스린다. 그러나 모든 타락한 천사들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하나님이 지금 가두어 두신 천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이 타타루스(지옥)에 갇혀 있다. 이 갇힌 천사들이 노아홍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악에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이 있는 듯하다. 아마도 문맥상 불법적인 성적인 죄를 지은 듯하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시대에 살면서, 지구를 더럽혔던 거인 종족이 이와 관련된 듯하다. 이 두번째 더욱 악한 타락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을 감금시키셨고 그들이 지금 타타루스에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6. 아부쏘스(a[busso")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 9:1-21에 무저갱으로 번역되었는데 하나님의 또 다른 감옥을 가리킨다. 이 신비로운 곳에 어떤 끔찍한 악령들이 지금 갇혀 있는데 그 우두머리의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이며 헬라어로는 아볼루온이다. 이 두 이름은 ‘멸망’을 뜻하는 단어이다 교회 휴거 후 어느 시점에서 이 무서운 사단이 사람들 위에 풀려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 동안 사단은 이 ‘아부쏘스’에 갇혀 있을 것이다(계 20:1-3,7,8).


이러한 단어들이 성경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묘사하는데 쓰였다. 이 세계는 실재하는 세계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보거나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세계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은 가야 할 천국과 피해야 할 지옥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과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을 말씀하고 있다. 이 두 길이 갈보리에서 교차하고 있다고, 이곳 갈보리에서 사람들은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을 벗어나 좁은 생명길로 갈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죄와 지옥에 관한 단어를 살펴봄으로써 성령께서 사용하신 헬라어, 히브리어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원어에 대한 특별한 지식 없이도 이 책에 소개된 책으로 해 낼 수 있다. ♣

 

출처: http://onyang.tistory.com/1232

 [단순함 그대로](죤 핍립스의 말씀의 올바른 해석에서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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