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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 속사도들의 신학

하나님아들 2019. 1. 22. 12:49

3) 속사도들의 신학

 

속사도 교부들의 중요한 문헌으로는 클레멘트의 1서신. 이그나티우스의 7서신, 폴리갑의 서신. 바나바 서신, 헤르마스의 목자, 디다케 등이 있다. 속사도 교부들의 신학은 분명하게 특정한 신학의 학파까지 전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신학적 학파 또는 경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여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교회에는 윤리주의와 율법주의가 교회 내에 만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신칭의의 복음 진리가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고 행함에 대해 강조한 야고보의 사상만 강조되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이방의 철학사상 특히 스토아주의(stoicism- 금욕, 윤리주의) 의 영향이 컸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30~100)

 

클레멘트는 로마 교회의 지도자로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썼다(=클레멘트 1서신). 고린도 교회가 장로(=감독)를 폐한 일에 대해서 책망하며 회복을 권면하는 내용으로서 겸손, 회개, 사랑을 강조했다. 그는 감독직은 사도들로부터 계승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레멘트의 이 주장은 후일 로마 카톨릭 교리의 핵심이 되는 사도직 계승론 곧 교황제도의 씨앗이 되는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그의 서신(=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은 기독교 고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헌으로 평가된다. 구약 인용이 많아서 약 4분의 1이나 된다. 그는 야고보와 같이 윤리적 가르침을 많이 베풀었다. 교리적인 체계보다는 실천적 삶의 가르침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직분에 있어 질서를 강조하고 직분의 계승의 중요성을 가르쳤다(=감독(장로)과 집사의 2직분론).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110)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후에 A.D 70년부터 107년까지 37년 동안 안디옥(=시리아의 수도)의 감독으로 있었다. 그는 카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전승에 의하면 마 18:2의 어린 아이로 지목되고 있다.

18: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2세기 초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일곱 통의 편지를 기록하였는데, 다섯 통은 소아시아의 에베소, 마그네시아, 빌라델피아, 서머나 교회에, 다른 한 통은 로마 교회에 나머지 한 통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에게 보냈다. 이 편지들은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에 의하여 모두 수집되었다.

 

그가 남긴 일곱통의 서신들은 초대교회의 신앙과 조직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지주의적 유대교 에비온파의 이단설을 경계하고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를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러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교회를 괴롭히던 가현설(docetism, 假現說 ~처럼 보이다)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이 편지는 감독직의 권위 문제를 취급했는데, 교회 직분에 대해서 감독과 장로와 집사라는 3직분론을 주장했다(=군주 감독제). 감독의 권위를 중요시 하여, “감독이 없다면 교회도 없고 세례도 없고 성찬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군주 감독제는 주후 120년경에 안디옥과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으며, 150년경 이후에는 전 기독교 지역에서 보편적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는 나는 땅 끝까지 통치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거기에 도달했을 때 나는 진정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맹수형을 선고받은 자리에서 편지의 내용대로 나는 그리스도의 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운 짐승의 이빨 속에서 절구질되어 순결한 그리스도의 떡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존 폭스의 기독교 순교사> 또한 그는 칼날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폴리갑(Polycarp of Smyrna, 69~156)

 

폴리갑은 서머나의 감독으로서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에 의하면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다. 그는 성육신(incarnation)을 부인하는 자는 모두가 적그리스도이며, 십자가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마귀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앙의 실천적 삶과 종말론적 신앙을 강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불의, 탐욕, 돈에 대한 사랑, 거짓 증언을 피하고 저주를 저주로 갚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폴리갑은 교회에 혹심한 박해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모든 것을 단념한 후 침착하고 당당하게 처신하였다. 그는 오히려 대적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당시의 최대 시험은 로마의 황제를 반드시 주로 부르도록 강요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순교를 당함으로 순교적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폴리갑은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던 이단 마르시온을 찾아갔다. 이때 마르시온이 폴리갑이여, 우리를 인정하라.”라고 하자 폴리갑은 , 우리는 당신을 인정합니다. 당신이 사단의 맏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폴리갑의 편지는 몇 장 되지 않는데, 시종일관 인용문으로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말로 설명해야만 할 새로운 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폴리갑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디다케(Didache, 12사도의 가르침)

 

이 문서는 1873년 이스탄불에서 발견되었다. 디다케는 3부분으로 되어있는데 그 첫째 부분은 두 길 문서라고 부른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의 길이다. 둘째 부분은 세례와 금식, 기도와 성찬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셋째 부분은 훈련지침서로서, 거짓 선지자들, 성찬, 감독과 집사 선출, 세상의 마지막과 이에 대한 준비 등이 다루어진다. 이 책을 기독교 사상사의 측면에서 보면 무엇보다도 신학적인 흐름에 따르면서 도덕주의를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특히 세례와 성찬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흐르는 물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 흐르는 물이 없다면 다른 물을 사용할 것, 이것도 저것도 없다면 깨끗한 물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 번 머리에 뿌릴 것, 세례 받기 전에는 주는 자나 받는 자가 금식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이들도 동참할 것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세례 - 물에 잠기는 세례(immersion)와 뿌리는 세례(sprinkle)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당시에는 세례식을 하다가 들키면 몰살을 당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개된 연못이나 강가에서 세례식을 할 수는 없었다. 지하 동굴이나 사막에 숨어 살면서 물에 잠기는 세례를 할 수 없었기에 뿌리는 세례를 택하게 된 것이다(=意味儀式의 문제)

 

주의 만찬(=성찬) - 주의 만찬은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한정되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믿는다(=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믿는 것이었고 또한 그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교회의 운명을 걸고 받아들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 의식은 그가 영적으로 거듭났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었기에 세례를 받은 자에 한해서만 성찬을 주었던 것이다.

 

파피아스(Papias, 60~130)

 

파피아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이레니우스). 그는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 되었는데 자신이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을 수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해설 Explanation of the Sayings of the Lord5권의 책으로 발간하였다. 이 작품은 유세비우스의 < 교회사 > 속에 단편적으로 인용된 것이 전부이지만, 초기의 역사와 복음서들의 기원에 관한 사도들의 구두전승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는 특히 천년왕국설을 열정적으로 주장했는데 전천년설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마태복음이 원래 아람어로 기록 되어진 것과 마가복음이 베드로의 어록에 기초했다고 주장함으로서 두 권의 복음서의 저작자를 보증해주고 있다. 4세기 초까지 동방과 서방의 신학자들은 복음서에 대한 파피아스의 해설을 사용했다.

 

헤르마스(Hermas of Rome)

 

그는 로마의 노예였었는데 노예에서 해방된 후 기독교의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편집하였는데 그것이 곧 목자서(The Shepherd of Hermas)이다. Shepherd용서의 천사의 이름인데,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 그리고 10개의 비유 등의 3부로 구성되었다. 특히 12개의 명령은 기독교인의 의무를 요약한 것으로 이것들을 순종함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확신한다. 또한 12개의 명령서는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세례 후에 죄를 몇 번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헤르마스는 오직 단 한번만 용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세례로서 이전의 지은 죄를 모두 사함 받았으나, 세례 후 범한 죄 중에서 터툴리안이 규정한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들(=우상숭배, 신성모독, 살인, 간음, 사통, 거짓증거, 사기)은 죽음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이해했다. 이 물음에 대한 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a. 세례 이전까지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이는 세례 중생설, 세례 구원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후일 로마 카톨릭의 영세 개념과 동일하다.

b. 천주교는 중죄를 지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견해를 취한다. 영세를 받고 중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는데,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천주교의 중요한 핵심교리이다.

c. 경우마다 다르다(=case by case)

 

바나바(Barnabas of Alexandra)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법률학자로서 필로의 방법에 능통하여 구약성경을 우화적(allegory)으로 해석함으로 기독교와 구약의 조화를 시도했다. 그는 설교자는 신령해서는 안되고 정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기독교가 이미 윤리 도덕적인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카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형성

로마제국의 박해와 기타 안팎에서 오는 여러 도전에 직면한 교회는 그 싸움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통일과 규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점차 가정 교회의 상태에서 교회 간의 연합을 통해 커지고 조직화되었으며 교회 내에서도 감독의 비중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제도화되고 조직화 된 카톨릭 교회가 되었다.

이 시대의 카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공동, 보편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중세 이후 로마 교회가 스스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소위 로마 카톨릭 교회와는 다른 것이다. 이 시대의 카톨릭을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구분하기 위해서 카톨릭교회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는 교회만 통일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기초가 되는 여러 가지가 정리되고 통일되었는데, 사도신경이 이 시대에 생겨났고 신약성경의 정경도 대략 이 시대에 편성되었다.

 

3) () 사상들의 발흥

로마제국의 온갖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왕성하게 증거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방 종교의 교리와 헬라 철학의 사상적 활동도 왕성하게 이루어져서 가히 사상의 발효시대라고 할만 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헬라 철학, 동방 신비종교, 유대의 율법주의 등 여러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복음과 뒤섞임으로써 신앙적 혼란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이 새로 연구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 영지주의(Gnostism)나 신플라톤주의(Neo-Platonsim) 등의 절충 사상으로 사상적 혼란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을 변증가라고 한다.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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