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사
(신학사 -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요약, 벵트헤그룬트 지음 - 브르스 셀리 지음
박희석 옮김)
아타나시우스와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
교회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아리우스 주의와 이단자들을 후원한 황제의 권력에 대항하게 되었고 시대의 충신 아타나시우스가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가 328년에 죽자 그 뒤를 이어 감독이 됩니다. 그는 니케아회의에서 주장을 하다가 박해를 받고 다섯 번이나 감독직에서 피해 다니며 20년을 망명길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아리우스주의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주장을 지키고 있었다는 그 시대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죽어서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 되었던 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가 주후373년에 사망을 하기 까지 아리우스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 이었지만 그가 남긴 공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니케아 신학은 381년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의 저서로는 “이방인에 대하여”(318년저술) “아리우스주의를 논박하는 글들”(335년저술)“세라피온”등에게 보낸 네 개의 편지들이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클레멘트나 오리겐처럼 철학속에 삽입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적인 자료를 거부하고 성경을 유일한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약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성경을 율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성경은 그리스도와 그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을 그 중심으로 하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외쳤던 루터의 말을 상기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아리우스주의와 투쟁을 하는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주장.
1.만일 그리스도가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과도 동일본질이 아니라는 아리우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으며 그는 인간을 자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 인간 세계에 내려 오셨던 분이시기 때문이다.
2.아리우스의 교훈은 피조물에 대한 경배나 혹은 한분 이상의 신에 대한 신앙을 포함하고 있다. 첫 번째 주장은 모든 신학의 핵심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신앙이 전복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장의 내용은 이레네우스와 마찬가지로 아타나시우스도 창조에서 시작하여 종국에 가서는 완성의 단계에 이르는 구원의 질서를 설명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레네우스가 영지주의들과 논쟁을 벌였던 예와 같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구원과 창조의 근원을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죄의 유입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사망과 타락에 넘겨져버렸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로고스가 인격적으로 인성을 입으신 결과로서, 그가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회복시켰을 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일은 사망과 타락이 파괴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었다. 때문에 로고스가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육신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아들 안에서 사망이 멸하여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새로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에 합당한 자는 하나님으 형상대로 오셨던 아들 한분 뿐이셨다.(Oratio de incar-natione Verbi,13,8-9)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다른 교부들 보다도 죄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죄가 최책을 가져왔으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그 죄에 대한 희생물이었음을 깨달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죄가 사망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사망은 회개만으로도 정복될수 있었다고 하였다.
즉 죄와 사망은 공존의 관계였다는 것이었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그를 하나님처럼 만드시는 일이며. 이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하나님과 함께 동일 본질을 가지시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자신이시기에 믿음으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똑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고스는 하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 가르쳤던 아리우스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는 아타니시우스에게서 배척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은 종속론적 견해에서도 극복하게 되었다. 로고스는 또 다른 하나님도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유출된 영적 존재로서 아버지 보다 낮은 곳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3인의 갑바도기아인
아타나시우스의 뒤를 이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 하며 이 교리에 최종적 형태를 잡기까지 헌신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역사는 그들의 3인의 갑바도기아인들 이라고 한다. 가이사랴의 감독을 역임하였던 대 바실과(379사망) 그는 아리우스주의를 완전히 정복한 니케아 정통신학의 설립자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394년 사망)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394년 사망)가 있는데 후자로서의 그는 수사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전자의 견해를 자신의 저서 가운데서 해석해 놓았다. 니케아 신학이 아리우스주의와 양태론 사이의 전정한 중재적 입장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것은 캅파도기아인들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신학을 구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본질”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쪽 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세 위격들“ 이라는 동방적 개념에 입각하여 통일성과 삼위일체 모두를 발전시킬 수 있는 용어를 발견하였다. 바실은 바울과 요한과 같은 개체적 인간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 보다 구별되게 하는 독특한 개성을 가졌지만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사람들이라는 점이었고 사람이 공통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는 한 그들은 독립적 본체를 지닌 개별적인 인격체들이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와 아타나시우스신경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서방적 입장에 대하여 저서 “삼위일체에 관하여”를 기록하였다. 어거스틴은 아타나시아 신경 가운데서 발견된 삼위 일체적 입장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어거스틴은 하나의 신적 본질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삼위일체적 관점을 발전 시켜 나갔다. 그는 신적 통일성의 구조 안에는 세 위격이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삼위성은 이 통일성 가운데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내적 실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인간적 현상, 특히 인간 영혼의 구조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 대상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사랑하는 이와 받는 이 그리고 사랑 그 자체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상응한 관계가 신격의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도 발견 된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 관계에서 특이한 점은 주체와 객체가 모두 불가분리의 동일 본질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관계가 사고와, 지성과, 행위의지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인간의 영적 삶에는 기억, 지성, 의지,라고 하는 셋의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주체와 객체 모두가 자신을 의지하며 자기사랑의 행위들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신앙속의 그리스도.
헤루몬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이게 사람들은 내가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을 하셨고,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배드로는 당신은 메시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했다. 인간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랍비. 혁명가.등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 하며 예수님을 통하여 많은 기대와 목적을 가졌었고 가장 큰 목적은 로마정치를 종결시켜 주는 것이었다. 인간들의 의견이 어떠하든 교회는 배드로와 같은 입장으로 지속되어 왔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앙모와 경배의 대상이었다.
제국교회 시절 황제들이 목회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신앙고백적인 기술을 요구하였을 때, 교회는 신-인 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다. 45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칼게돈에서 공의회를 열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시며 분열이나 분리가 없는 두 본질로서 한데 모여 한 인격을 형성하셨다고 고백하였다. 대부분의 로마 카토릭,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성명을 정통 기독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인도의 일부 신자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동용하지 않는 이유는 5세기에 이 성육신의 사건을 보다 명확하게 규명하고자 하였던 시도에서 비롯 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
신학분야는 기독론이라고 부른다. 신학은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문제를 취급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존재여부를 질문한다. 그러나 이슬람교에 모하메드론이 없고 불교에도 부처론이 없다. 성육신의 의미에 관한 4-5세기의 논쟁은 그리스도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던 것이 아니다. 신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의 지혜로는 분류할 수 없으므로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두 개의 유명한 신학 학파들이 서로 대조되는 성경 구절의 해석들을 제시 하였다. 이 두 학파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학파들이었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후자는 그의 인성을 보다 더 강조하였다. 전자는 천국에서 지상으로 후자는 지상에서 하늘을 바라 보았다. 플라톤의 사상에 힘입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신적인 로고스를 중심으로 신비주의를 이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류사이의 만남이 완전하게 이루어 졌으니 신자들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갑바도기아의 교부 닛사의 그레고리는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 한분의 신적인간 - 께서 자신 속에서 신성과 인성을 연합하였다고 가르쳤다. 안디옥 학파의 신학자들은 보통 성경을 보다 단순하고 역사적인 양식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였다. 그 들은 예수님의 모범과 이루신 사역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덕들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인간들 속에서는 죄를 즐겨하기 마련인 - 인간의 의지가 순종적이었고, 죄악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따라서 안디옥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보다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안디옥학파의 교훈 속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들이 한데 연합하거나 결합하기 보다는 함께 동맹을 맺거나 그 세력을 모은 상태에 있는 두 개의 존재로서 이해되기 쉬웠다. 성육신의 사건을 둘러싼 논쟁이 여러 세대 동안 지속 되었던 것은 정치적 세력 다툼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아래서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로서 등장한 후 에는 교회의 구조가 몇 몇 강력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제국의 주요 도시들의 감독들은 대 감독 혹은 대주교, 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감독의 세력과 권위의 공식적인 구역의 중심을 표현하는 용어는 교구였다. 제국의 도시들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의 감독들은 감독들 중에서도 가장 그 위치가 높아 총대주교, 혹은 총감독이라고 불리었다. 제 4-5세기에 걸쳐서 이 네 대도시들의 감독들은 자기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넓히기 위하여 서로 경쟁 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가 서로 지지하는 경향이었으며. 안디옥은 대체적으로 콘스탄티노플과 동맹하였다. 안디옥의 입장에서는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 못할 경우에는 그 자리가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이단들
기독론을 둘러싼 논쟁은 일세기 이상을 끌었으며 동방에 소재한 교회들의 가장 중대한 과제로 등장하였고 350-450년 사이에 등장한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에 관하여 교회가 점차 더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하였다. 먼저는 라오디게아 지방의 목사였으며 아타나시우스의 젊은 친구였던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이었다. 그는 심리학적 방향으로 접근하여 그는 성육신을 통해 신적인 말씀이 인간의 몸속의 사고하고, 이성적인 영혼을 대체시키어 말씀과 그의 몸 사이에 본질의 영합“ 을 이룩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성은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그 영역이라 생각하였다. 그것은 신적인 말씀의 하나의 육신을 입은 성질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풀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에서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이 묵살되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안디옥출신의 뛰어난 설교가로서 428년에 황제에 이하여 콘스탄티노풀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스승인 테오토레의 입장을 변호하고자 하였다. 그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을 낳은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당시의 일반적인 표현을 부정하였다. 간략하자면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의 두 개의 아들로 분리시킨 적은 없었지만 예수의 인간적 행위들과 그의 고통을 신성에 의거한 것으로 돌리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마치 신성이 여자에게서 태어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난지 사흘 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네수토리우스가 정죄를 받은 것은 교리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유대인들과 이단들을 혹심하게 비판하여 많은 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412-44)키릴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키릴은 뛰어난 설교가요 신학자였으나 논쟁에서는 사정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치리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들의 불평에 네스토리우스가 동조했다는 사실에 분노 하였다. 결국428년 말, 키릴은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경을 시작하였다. 키릴은 우선 그에 대한 비판을 당시 네스토리우스가 로마에서 축출되었던 몇 몇 성직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던 총대주교(교황)셀레스틴이 자리 잡고 있었던 로마에서 그를 음해하였다. 그때까지 네스토링우스를 지지하던 테오도시우스2세에 의해 소집된 에베소공의회에서 키릴은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시리아 대표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를 파문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시리아인들은 안디옥 총대주교 요한의 지도 아래 키릴과 그의 추종자들을 정죄하였다. 이어서 로마의 대표들이 와서 키릴의 행위를 지지하였다. 이 사건의 전체가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흉계로 점철되어 있었다. 네수토리우스는 수도에서 축출이 되고 450년 유배중 이집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네스토리우스의 파 신자들은 티벳 중국등 인도, 소련의 남부까지 큰 교회들을 세우며 선교를 하였지만 모슬렘정복자 타메르레인이 박해로 인해 (1380년)진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 80.000가량, 인도에 5,000 그리고 미국에 25.000가량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자서전속에 가기가 ”하나님을 낳은 여자라는 표현을 반대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부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진정한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리의 영역을 확정
에베소 회의 이후 제3의 이단이 출현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근처 수도원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유티케스 는 그리스도 안의 한 본질(단성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서 대속주로서 반드시 미리 갖추어야만 할 조건과 그 신비의 중심을 부인해버린 셈이었다. 기독교 대속의 교리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된 모습이었다. 총대주교플라비안은 유티케스를 회의에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그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하자 정죄하였다. 그러나 유티케스는 키릴의 의견을 충실히 따랐던 알레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디오스크루스의 지지를 받아내고 그의 도움으로 에베소회의를(449년) 열어 위치가 복원된다. 전체교회는 이 결과를 받아드리지 않았고 교황레오1세는(440-461년)이 회의를 강도들의 회의라고 불렀다. 그는 황제에게 다시 회의를 소집할것을 제안 하여 테오도시우스의 후계자 마르시안(450년-457년)황제가 451년에 칼케돈에서 4차회의를 소집하였다. 디오스코루스는 고발을 당하였고 이후 대표들은 니케아신경에 무엇인가를 첨가한다는 것에 대하여 주저를 하였다. 그리고 표명된 신학적 정의가 있었다.
우리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시고 동일하신 성자로서 고백한다. 그는 신성과 인성에 완전하시어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진정한 인간이시다. 혼란과 변화와 분열과 분리가 없는 두 개의 본질로 존재 하신다 연합의 사건으로 인하여 본질들 사이의 구별이 전혀 훼손되지 않았으며, 각 본질들의 특성은 계속 보전되었고 한데 합하여 한 위격을 형성하였다.
325년 니케아 회의=그리스도는 완전히 하나님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그리스도는 완전히 인간이다.
431년 에베소회의= 451년 칼게돈회의 = 그리스도는 한 인격 안에 인간이며 신이다. 그리스도는 연합된 인격이다.
이렇게 교회는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확인하였고 아폴리나리우스에 대항하여서는 진정한 인간이심을 확증하였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에서 분리되어나간 단성론자들이 에디오피아에서 세력을 가졌고 시리아에서 야곱파교회를 세웠고 남부인도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이집트 쪽에서는 콥트 교회를 조직하였다.
신성과 인성의 한 위격 속에서 연합이 되는 문제는 칼케돈 회의에서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논리라 언어의 한계로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한다. 성경자체가 이 사건을 예외적이며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1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교회가 선포한 것 이외의 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용어들을 말하지 않는다.
[출처] 신학사와 -교회사의 삼위일체 확립|작성자 더로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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