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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감정론 (종교적정서) - 조나단 애드워즈

하나님아들 2018. 10. 4. 14:31
 

  Google 번역번역에서 제공

 

 

종교적 정서

에드워즈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부흥신학을 정립한 것이다그가 쓴 의지의 자유」 때문에 세상은 철학적 신학자로 취급하지만그는 철학이 자신의 신앙을 지도하거나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그는 사변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철학적 흥미가 설교에 영향을 미친 흔적도 전혀 없다에드워즈의 진정한 위대성은 성경적 신학자로서 그의 성취에서 발견해야 한다에드워즈를 일차적으로 철학적 신학자로 보는 것은 지난 세기가 빚은 거대한 오해다.

에드워즈의 저술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부흥에 대한 것이다. 1735년 코네티컷골짜기 부흥에 대한 기록인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대각성을 전후해 집필된성령의 역사의 구별되는 표지들,뉴잉글랜드의 현재 종교 부흥에 대한 소고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종교적 정서(신앙감정론전집7)이다.

 

제 장 종교적 정서의 배경

 

종교에 있어 이성과 감정의 기능에 대한 견해 차이가 촌시와 에드워즈를 갈라 놓았다촌시는 사탄이 감정을 통해 이성에 역사한다성령은 이성을 통해 감정에 역사한다고 주장했다그는 종교에 있어 감정의 표출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종교는 지각 있는 일이므로 감정적 무질서는 절대 피해야 했다그 때문에 그는 부흥적 종교를 가짜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에드워즈는 인간을 재창조되어야 하는 죄인으로 보았다재창조가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음의 새 감각을 주실 때였다새 감각은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있는 거룩한 정서로서전인을 통해 그 변화의 능력을 발산한다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부흥은 단지 일회적인 경이가 아니었다그것은 이 타락한 세상이 영광 중에 갱신될 때까지 말세의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찾도록 촉구하는 수단이었다부흥이 전파됨에 따라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때에 하나님의 왕국의 충만함이 도래할 것이다이러한 견해 차이가 대각성 기간 중에 복음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 사이를 양측으로 갈라놓았다.

 

촌시를 비롯한 반부흥주의자들이 합리주의의 성향을 노출하고 있었다면 반대편 극단에는 다소 광신적인 그룹이 있었다감정이 지나쳐서 열광적 내지 광신적인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과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을 구별해 줄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그가 보기에 이들의 종교적 감정들 중에는 가짜도 많았지만 그들 자신은 단지 자기들이 종교와 관련해서 풍부한 감정을 체험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과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을 구별해 줄 필요를 느꼈다거짓된 종교적 감정 상태 속에서 스스로 속고 있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는 1742년과 1743년 초에 그 문제에 대한 설교를 이어갔다이 설교들이 나중에 1746년 출판된 종교적 정서(신앙감정론)의 일부를 이룬다.

 

1차 대각성 기간 중에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을 에드워즈는 봄에 개화한 꽃망울에 비유했다. “나무 위에는 그러한 꽃망울들이 수없이 많이 맺혔다그것들은 모두 아름답고 소망스러웠다그러나 그것들 중 다수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에드워즈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회심되었는지 즉 그가 진정한 은혜를 체험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과 냄새가 아니라 그 후에 오는 잘 익은 열매들이라고 확신했다그리하여 그는 종교적 정서에서 진정한 종교의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신앙의 속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사실에드워즈가 평생 동안 가장 깊은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회심의 본질이 무엇인가한마디로그것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음주의의 고전적 해답이었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종교에 있어 정서의 중요성과 절대필요성에 관한 변증이요, 2부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그러나 종종 참된 표지로 받아들여지는 열두 가지요, 3부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열두 가지 표지에 대한 해설이다.

 

 

제 장 종교에서 정서의 위치

 

1부에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주제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정서에 있다는 것이다그는 정서를 영혼의 성향과 의지의 보다 왕성하고 감지될 수 있는 활동들로 정의한다사람을 중립 상태로부터 혹은 단순한 동의로부터 움직여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다성경은 도처에서 많은 부분이 감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그는 주장한다성경은 동정혹은 자비를 자주 참 신앙의 아주 위대하고 본질적인 요소로 언급한다고 지적한다성경은 참된 신앙을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사랑은 하나님그리스도하나님의 백성그리고 인류에 대한 것이다그것은 감정들의 으뜸이요 모든 다른 종교적 정서들의 원천이다하나님에 대한 강렬하고 열렬하고 감동적인 사랑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다른 종교적 정서들이 우러나온다에드워즈는 거룩한 정서가 없으면 참 신앙도 없다고 단정한다마음에 거룩한 정서를 낳지 않는 어떤 이성의 빛도 선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은혜로운 정서를 낳지 않는 어떤 마음의 습관이나 원리도 선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서들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떤 외적 열매도 선하지 않다.” “왜 그처럼 많은 꽃송이들이 아무런 영속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는가를 제2부에서 다룬다.

 

 

제 장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표지들

 

단지 종교적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종교적 정서가 대단히 크고 아주 높이 고양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것이라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는 못 된다.” 참된 종교는 많은 부분이 종교적 감정으로 이루어진다.진정한 신앙이 크면 클수록 종교적 감정도 커진다사랑은 감정이다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강하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또 하나님과 거룩에 대한 아주 크고 강한 욕망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가그렇지 않다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기갈을 노래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내 영혼이 하나님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이다”(42:1). 벧전1:7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성도들은 높은 정도의 기쁨을 드러내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5:12). “기뻐하고 뛰놀라”(6:2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68:3).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9:9).

 

한편단지 크다고 해서 그 종교적 감정이 정말 은혜롭고 신령한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반대편 측면을 지적한다갈라디아 교인들은 한때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주려 했을 것이라고 바울은 회고한다.그러나 얼마 후 바울은 그들을 위한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염려를 표한다(4;1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그들은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다언약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고 약속했다그러나 그들을 얼마나 신속히 다른 신에게로 향했는가불과 얼마 후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주위를 돌면서 춤추고 즐거워하지 않았는가예수 시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이 얼마 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변했다에드워즈는종교적 감정이 고조된 경우라 할지라도 참된 신앙은 전혀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결론 짓는다.

 

종교적 감정들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요 반증하는 것도 아니다경련을 일으킨다든지 까무러친다든지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이 꼭 은혜 받은 증거인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그러나 에드워즈는 집회 중에 육체적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에도 참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어떤 면으로든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지적한다마음이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동할때는 예외 없이 신체가 영향을 받는다그 영향은 지각되는 종류의 것이다그러나 어떤 감정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이라는 확증은 전혀 아니다.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들도 마찬가지다영적 감정들에는 커다란 능력이 있다반면인간은 연약하다혈과 육은 성경에서 아주 약한 것으로 나타난다특히위대한 영적천상적 작용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고전15:43, 50;26:41). 성경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사실은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은 먼지와 재 같은 존재인 연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그리하여 영적인 깨달음이 강하게 주어질 때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육체를 압도하게 만든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인식으로 자신의 육체가 받은 영향을 언급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3:16). 시편 기자는 강렬한 감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84:2).

 

누가 종교적인 길들에 대해 유창하게 열렬히 그리고 많이 말한다고 해서 그의 정서가 참 은혜의 결과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특별히 그들의 말이 감동적이고 진지하면 그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력” 아래 있는 자로 판정해 버린다.

 

입술과 말뿐인 신앙은 성경에서 잎만 무성한 나무로 묘사된다. “잎사귀가 지나치게 많은 나무치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경우는 드물다고 그는 꼬집는다자기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이다. “어디에서건누구와 함께 하건 자기 체험을 늘어놓는” 것은 차라리 나쁜 신호라는 것이다사람이 종교적 일에 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마음이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다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가 은혜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못 된다거룩하지 않은 종교적 정서가 충만한 경우에도 종교에 대해 많을 말을 할 수 있다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종종 대단한 열심과 굉장한 열의를 보여 주었다그러나 결국 그들 대부분은 어떻게 되었던가

 

보통 사람들은 흔히 말을 번드르르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다. 20세기 초에는 가짜 부흥사들이 말재주와 언변만 가지고 부흥회를 인도해도 수많은 회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잘 한다고 할 때 그것인 단지 입담과 쇼맨쉽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참으로 영성과 경건의 능력이 있기 때문인지 보통 사람들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에드워즈는 종교적 주제에 대해 단지 말을 많이 하고 또 잘하는 것이 참으로 은혜 받은 자라는 증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기 힘으로 혹은 자기 노력으로 어떤 종교적 정서들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정서라는 보장은 없다지정된 은혜의 수단을 소홀히 하면서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을 기대하는 것은 불합리한 주제넘음이요 광신임을 인정했다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성령께서 보다 은밀하고 점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도 인정했다그러나 사람의 심령에 구원의 은혜를 낳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으로서인간의 능력과는 전혀 다르고 자연적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어떤 능력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아주분명하고 명백하며 감지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은혜란 외적 작동자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작용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 은혜를 체험하는 자들이 그것을 느끼고 분별하며 의식하는 것” 즉 지각되는 방식으로 구별하는것이 왜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는 것이다결국,그러한 체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도 망상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판단이었다한편감정이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라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억지로 일으킨 감정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참된 종교적 정서는 아니다. “다른 영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시험하라!”고 명한다에드워즈는 많은 거짓 영들이 아주 다양하게 인간에게 역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그것들은 때로 광명의 천사들로 위장하여 아주 교묘하게그리고 아주 큰 능력으로 성령의 역사를 모방한다또 사탄의 역사도 다양하다사탄의 능력은 단지 공포와 무서운 암시들에서 뿐만 아니라 거짓 위로와 기쁨으로 나타날 때도 역시 직접적이고 뚜렷하다”.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인상이 자가 발전의 결과도 아니고 악령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며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나 참된 종교적 정서가 아닌 거짓 것이 있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이 아니라 일반적 영향의 결과다.

 

성령의 영향의 결과로 생긴 감정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 참된 것으로 받지 않고 구원에 관계된 것과 일반적인 것 두 가지로 분류하는 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적 감수성이 얼마나 민감하여 그의 영적 분별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잘 느낄 수 있다역시 악령이나 선한 영과 상관 없이약한 신체와 약한 두뇌의 소유자들로서 특별히 예민한 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상상이나 생각그리고 강한 감정이 자기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성경 본문과 함께 어떤 종교적 정서가 생겨났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은혜의 결과거나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어떤 성경 구절이 놀라운 방식으로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참 은혜의 임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떠오른 성경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떠오른 방식이 놀랍고 희귀한 것이라는 이유로 생겨난 감정은 참된 은혜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참 열매로서성경 자체로부터성경을 바로 사용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용하여 생길 수 있다.마귀가 성경 본문을 마음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잘못 적용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없는 증거가 이디 있는가마귀는 예수를 시험할 때도 말씀을 이용했다기쁜 감정이 성구와 함께 온 정도가 아니라 성구로부터 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구원을 주는 참 신앙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돌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커다란 기쁨을 얻었다그것은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종교적 정서 안에 사랑의 외양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긴 하나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가만히 보면 어떤 것이 탁월한 것일수록 모조품이 더 많다철이나 구리보다 은의 모조품이 더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다이아몬드나 루비도 모조품이 많다사랑과 겸손만큼 많은 모조품을 가진 은혜는 없다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그리고 그것이 아주 격렬한 감정일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이 은혜를 전혀 갖지 못했을 수 있다저 은혜 없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그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밤낮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예수를 높이는 외침을 외쳤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저는 따르겠나이다!”혹은 호산나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여러 종류의 종교적 정서가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로운 정서의 결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못 된다여러 가지의 거짓 감정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와 같이 모든 종류의 은혜로운 감정들에도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도 모조품이 있다바로사울 왕아합 왕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자연인들도 모든 종류의 종교적 정서들을 흉내낼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감정들의 속성을 볼 때 왜 한 감정이 고조되면 다른 감정들도 덩달아 자극을 받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에드워즈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사랑은 모든 감정들 중 으뜸이며 그것들의 원천이다여기서 에드워즈는 한 가지 생생한 예를 제시한다한동안 지옥에 대한 공포로 인해 크게 질려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있었다 하자고민과 무시무시한 생각들로 인해 그는 거의 절망할 지경에 가까워졌다그러다가 사탄이 준 어떤 망상에 의해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셨으며그를 그 분의 극진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 주셨으며그에게 영생을 약속하신다고 굳게 믿게 됨으로써 갑자기 구조되었다이를 테면환한 얼굴로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활짝 펴고 피를 흘리는 사람에 대한 어떤 환상혹은 강한 상상이 갑자기 그 속에 일어날 때 그는 그 인물을 그리스도라 생각한다그리스도와 그의 충만하심 및 복음에 나타난 구원의 길의 탁월성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진 것은 아니면서도마치 이런 음성이나 말이 자신에게 들려오는 것 같다. “소자야안심하라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혹은 두려워 말라.네게 나를 주는 것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이니라.”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그와 연합된 적이 없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주신 말씀으로 받는다이런 경우여러 종류의 종교적 감정들이 그의 마음속에 연이어 몰려들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하늘까지 솟아오를 것이며그 가상의 하나님과 구속자에 대한 열렬한 감정으로 충만해질 것이다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라는 생각으로 경탄과 감사로 가득해질 것이며자신이 체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을 것이다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며하나님 앞에 아주 겸손해질 것이다이처럼 에드워즈는 참 체험과 거짓 체험 사이에는 그 외양에 있어그리고 당사자가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 아주 커다란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위로와 기쁨이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오는 것이 종교적 감정의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 기준은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청교도들(윌리엄 퍼킨스토마스 셰퍼드토머스 후커)의 회심론에 의하면회심은 먼저 각성공포그리고 끔직한 불안 후에 전적 죄성과 무력함에 대한 인식 속에서 율법적 겸비가 따르고 그 다음에 이러저러한 빛과 위로가 오는 순서를 따른다고 주장했다이에 대한 반론은 인간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이다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순서대로 회심을 체험하는 것이 꼭 그 체험이 가짜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러한 순서대로 체험한 정서가 참된 회심의 표지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구원이 감지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악에 대한 어떤 상당한 감각을 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두 개의 극도로 다른 상태들을 거친다첫째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은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 --- 그러므로 구원받는 인간들이 이 두 상태 속에 느껴지는 방식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합리적이며 하나님의 지혜에도 부합되는 일이다.

 

에드워즈는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한다회심되기 원하는 자들은 먼저 비통한 재앙과 무서운 비참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그 후에 느껴지는 방식으로구원과 행복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그들은 먼저 그들의 절대적 극도의 필요를 느낀 후그리스도의 충족성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에드워즈는 어떤 의미에서 칼빈의 죽임과 살림에 해당하는 이 두 단계의 체험을 회심의 거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상적” 구원 방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광야의 체험을 거치게 한 후 위로하는 것이었다.즉 먼저 인간의 무력과 비참을 깨닫게 한 후 죄인들의 심령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구원 순서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일종의 낮아짐과 높아짐의 이중적 단계를 거치는 것이 성경적 구원 방법이라고 주장한다성경에는 그러한 예들이 얼마든지 나타난다는 것이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그들은 그것을 위한 준비의 단계를 거쳤다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중한 멍에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이다홍해에서 구원받기 전에도 그들은 큰 고민에 빠졌었다뒤에는 추적해 오는 애굽 군대앞에는 홍해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없는 무력함을 발견했다는 것이다가나안 안식에 들어가 젖과 꿀을 즐기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서 크고도 무서운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다그리하여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게 하셨다결국 그들에게 선을 행하셨다(8:2,16).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도 그러했다그는 자기 형들을 먼저 큰 당황과 고민 속에 빠뜨렸다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큰 죄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전적으로 그의 처분에 맡기게 한 후 그들에게 자신이 동생 요셉임을 드러낸다.

 

신약성경에서도 12년간 혈루병 앓던 여인이 치료받기 전에 어떠했는가자신의 모든 것을 지상의 의사들로부터 치료받는 데 다 써 버렸다그런 다음그녀는 아무 돈도 값도 없이 위대한 의원이신 예수께 왔다그녀의 요구를 완전히 거부하고 그녀를 처참하게 낮추셨다스스로 개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하신 다음 그녀에게 자비를 베푸셨다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놀라운 구조를 받기 전에 감당키 어려운 정도의 고난을 받았다그리하여 그는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그런 다음그는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되었다예수의 제자들도 폭풍이 와서 배가 가라앉으려 했을 때 그들은 주여 우리를 건지소서우리가 죽겠나이다고 소리쳤다그리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통상적 자기 현현 방법이 처음에는 무섭게” 그리고 다음에는 자비롭게라고 주장한다하나님은 대개 먼저 자신을 무서운 방식으로 드러내신 후 위로를 주신다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도 먼저 커다란 어두움의 공포가 있었다시내 산의 모세에게도 먼저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의 공포가 있었다엘리야에게는 폭풍지진불 다음에 고요하고 작고 달콤한 음성이 들려왔다다니엘은 먼저 그를 두렵게 한 번개 같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일만 달란트 빚진 종에게 왕은 먼저 정죄를 선언하고 그 식솔들을 모두 노예로 처분하라고 한 후 그 빚을 탕감했다돌아온 탕자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했다아담과 하와는 먼저 하나님의 위엄에 질린 후 여인의 씨에 대한 약속으로 위로를 받았다.

 

다른 한편기쁨과 위로가 커다란 공포와 지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뒤에 따라온다고 해서 그 기쁨과 위로가 올바른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 단계가 회심의 전 경험으로 필요하며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공포는 종종 다른 요인들에 기인할 수 있다성령의 영향에 의한 죄의 확신의 본질은 다음 몇 가지에 대한 확신이다,“마음과 삶의 죄악됨”,“가공할 엄위와 무한한 거룩의 하나님을 대항해 지은 죄의 무서움”,“죄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벌하시는 것은 아주 정의롭다는 확신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유사한 감정과 체험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마음과 삶의 죄악됨을 참으로 확신시켜 주는 밝은 양심은 거의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고 했다마귀도 사람을 공포에 빠뜨릴 수는 있으므로 공포 후에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다 참된 은혜는 아니다예드워즈는 은혜의 모조품이 얼마나 정교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열거했다예를 들면마귀는 은혜의 준비 단계마저도 모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심지어죄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그로 인해 겸비해진 마음도 모양만 모방할 수 있다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가 따르는 그 순서도 흉내낼 수 있다. “회심에 있어 성령의 역사의 순서라고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그러한 순서와 방법을 정확하고 분명히 밟은자들즉 죄에 대한 깨달음 후 감정을 체험하는 식의 규칙대로 회심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들의 그러한 체험을 멋있게 진술한자들이 결국은 참 회심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에드워즈는 당시의 청교도 전통 속에서는 아주 급진적인 주장을 제시한다그는 그 죄의 각성과 위로의 분명한” 체험이 없다고 해서 회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다소 기존의 자기 주장과 상반되는 듯한 주장을 내어 놓는다.

단계와 방법에 관한 이 명료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사람이 회심했다는 분명한 표지는 아니듯이 그것이 없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회심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전혀 아니다”. 에드워즈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에드워즈는 깨달음의 필요성에 관한 자신의 강조를 고수하고 있다. “자기의 죄의 비참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허함과 무력함 또한 자신이 영원히 정죄되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지 못한 죄인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확실한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영혼에 일어난 역사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한 성경적 원리로 증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것이다참된 회심자라 할지라도 그가 회심에 이르는 은혜를 받는 과정에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행위에 포함된혹은 신앙의 행위에 전제된 그 요소들이 때로는 희미하게 나타나 마치 어떤 것들이 생략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는 청교도들의 회심의 정형화획일화하는 것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바람이 분다는 것은 그 소리를 들어 혹은 그 영향을 보고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도 신비하고 다양해서 인간이 측량하기 어렵다는 일반적 진리를 에드워즈가 여기서 다시금 확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누군가가 정말 회심의 은혜를 체험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종적 시금석은 열매즉 영혼에 일어난 결과의 성격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성경에서 열매의 성격에 의해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그러나 그것들을 생산하는 성령의 방법에 의해 그렇게 해보라는 권고는 아무 데도 없다결국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그의 삶과 인격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말이다그렇다면 참된 중생의 체험 없이 단지 도덕적 수양과 훈련에 의해 남들 보기에 훌륭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이 참 회심의 증거는 아니다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점이다. “종교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예배와 외적 의무들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참 신앙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실한 표지는 아니라는 것이다참된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 등의 종교적 활동들을 즐거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들이었다그들은 월삭안식일대회 등의 절기가 아주 많았다손을 펴고 많이 기도했다(사 1:2-15). 구원 얻는 신앙이 없는 자들도 종교적 의무와 규례를 각근히 준수할 수 있다돌 밭같은 마음을 가진 청중들도 기쁨으로 말씀을 들었다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그들은 길게 기도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단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각종 교회 집회나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것이 참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는 못 된다는 것이다.물론그것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도 아니다.

 

10 입에 할렐루야”,“아멘을 달고 다니는 것이 참 은혜의 증거는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소위 은혜 충만한사람들특히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그것은 입으로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는 종교적 정서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그것이 참 회심의 표지가 될 수 없으며 또 거짓 은혜의 증거도 아니다에드워즈는 그러한 것이 꼭 그가 남들보다 더 은혜가 충만하다거나 참된 종교적 정서를 소유했다는 증거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죽지 않은 교만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에드워즈는 사울을 그러한 예로 제시한다사울은 굴복되지 않은 교만과 다윗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다윗의 전례 없는 자비를 높이면서 외쳤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사 26:21).

 

11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 정서가 참된 것이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가 못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이것은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한 경고가 된다특히 복음주의적 신자들 사이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경우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신자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책망 받을 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합당치 않은 일이며 또 크게 비난받을 만한 일(고후13:5)”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본인들 스스로 표명하는 자신감이 구원의 확실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강한가의 여부와 상관 없이 그들의 자신감만 보고서는 어떤 확실한 단정도 내릴 수 없다.”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성도이며 가장 휼륭한 성도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오히려참 성도들이 가끔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을 한다에드워즈는 위선적 확신의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첫째위선자들은 신중한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그러나 참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각성과 신중함이 점점 더해 간다둘째위선자들은 자기의 영적 소경 상태자기 마음의 거짓됨자기의 낮은 이해력에 대한 인식이 없다셋째마귀는 위선자들의 소망은 건드리지 않는다넷째거짓 소망을 가진 자들은 자기 부패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믿음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영적 빛- 에드워즈는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그는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본다억지로 믿거나 믿기로 결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이것은 현대에 유행하는 일반적 복음전도 방식에 중대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현대에 유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은 청중들이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한다영적 조명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단지 누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복음을 믿기만 하면혹은 받아들이기로 결단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현대 복음 전도의 핵심이다그러나 에드워즈는 아무 영적 빛이나 조명 없이 사람들에게 밀어붙이거나 촉구하는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 주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이다.”소위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싸구려 믿음주의에 대한 정면 공격인 것이다에드워즈가 우리 시대에 살았더라면 현대의 기독교가 그처럼 피상적이고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무력하며 불신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신령한 조명 없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처하는 데 있다고 진단했을지 모른다.

 

에드워즈는우리가 조명 받은 만큼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영적 빛이 없이는 믿음을 구사할 수없을 뿐 아니라 영적 빛을 가진 꼭 그 정도만 믿음을 구사할 수 있다.”에드워즈에게 있어 믿음은 신령한 지식과 거의 동의어였다알지 못하고는 믿을 수 없었고 빛을 받지 못하고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그를 신뢰할 것이다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신실하심을 본 것 이상으로 한 치도 더 그분에 대한 믿음을 구사할 수 없다.”

 

체험과 은혜와 믿음의 상관관계에드워즈는 생생한 은혜의 역사” 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여기서 은혜의 체험이란 바로 신령한 빛을 비췸 받아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보게 되는 것과 동의어이다그러므로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체험,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만일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도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사죄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이것은 요즘처럼 전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에드워즈는 체험 외에는 은혜의 다른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은만일 그 체험들이 참된 것이고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대단한 은혜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참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따른다. “참 체험들치고 은혜의 역사가 없는 것은 없다그리고 은혜와 성결의 정도는 참 체험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체험을 파먹고 사는 경우들이 있다그것은 자기 체험을 의로 삼고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는 경우다그들은 자기에게로 눈을 돌려 자기 성취와 자기의 높은 체험그리고 자기들이 만났던 위대한 일들만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그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인다그래서 하나님도 자기들의 그러한 체험들에 대해 자기들만큼이나 대단한 평가를 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에드워즈는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신자의 엄청난 부도덕보다 더 가증한 것이라고 비난한다과거의 어떤 체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낙관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지적일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먹고 사는 아주 심한 경우다그러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상에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옛날에 받은 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정욕과 부패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어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으면 은혜로운 자신감과 확신을 가질 수 없다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그리스도를 의지해야지 체험을 의지하면 안 된다고 타이르고믿음으로 살아야지 보는 것으로 행하면 안 된다는 성구를 인용하면서 구원을 확신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혜롭고 은혜로운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성도의 상황이 불투명해 보일 때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과 영적 조명 없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신령한 빛이 비취는 체험 없이 자신의 구원을 직관하는 것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12 외적 모습과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이 경건한 자들이 듣기에 아주 감동적이고 유쾌하여 그들의 호의를 얻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로 단정할 수 없다위선자들도 많은 종류의 종교적 정서를 소유할 수 있다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아주 비슷한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으며 형제들에 대한 일종의 사랑을 가질 수 있다나아가서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역에 대한 경탄죄에 대한 슬픔순종자기 비하감사기쁨종교적 갈망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심 등의 외양을 다 가질 수 있다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이 커다란 각성과 양심의 가책 후에 올 수 있다모조품 사랑과 기쁨이 참된 회심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순서로 올 수도 있다실로, “성도들 속에 있는 모든 구원 얻게 하는 은혜는 그 모조품들이 위선자들 속에 존재한다영적이고 아주 현명한 사람들조차도 성령의 참된 구원의 역사로 쉽게 착각할 수 있는 유사품들이 위선자들에게 있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얼마나 엄격한지를 본다그리고 참 회심과 거짓 회심참 구원의 은혜와 거짓 은혜가 외양에 있어서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염소들도 양들과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한편한국 교회는 이런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구분에 얼마나 무관심하며 무능력한지를 느낀다얼마나 쉽게 번쩍이는 것은 모두 금이라 간주하는가어쩌면 한국 교회는 그러한 구분을 하고 싶지 않은지 모른다지금 한 사람이라도 교인으로 더 받아들여 교인 수를 늘리고 싶은 판에 언제 진짜와 거짓을 구분한다는 것인가이러한 현상은 에드워즈 식으로 옥석을 가리다가는 교회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반발심 때문일 수도 있다.

 

 

제 장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지들

 

에드워즈에게 있어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가 있다는 말은 곧 그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역으로그가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를 가졌다는 말은 그에게 회심의 은혜가 임한 적이 없다는 말이요 그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말이다.

 

전제1.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수단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님.

 

우리 주위의 신앙고백자들 중 누가 참 신자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기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 결코 없다는 그는 선을 긋는다말하자면대략적인 기준은 성경에 있지만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양과 염소를 분명히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남겨 두신 특권이다그리하여 초두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작업은 단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하는 데 개략적인 참고가 될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제공하면서 누군가가 이 기준들을 사용하여 주위 교인들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려는 시도를 할 위험성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전제2. 영적으로 미약한 자들이 확신 얻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됨.

 

에드워즈는 이 기준들이 불신자는 아니지만 은혜로운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즉 영적으로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에드워즈는 아주 저조한 은혜의 상태혹은 좋지 못한 영적 상태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두 가지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첫째대상에 결함이 있다. “은혜가 너무 적어서 명백하고 확실하게 식별되고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너무 작은 물체는 우리가 그 형체를 분명히 식별하거나 다른 것들과 구분할 수 없다.

은혜에 관련된 또 하나의 결함은 부패가 그것에 너무 많이 혼합된 것이다부패는 은혜를 흐릿하게 만들고 감추어 버림으로써 은혜를 분명히 알아 낼 수 없게 만든다참 신자라 하더라도 영적으로 안 좋은 상태에 있으면 죄책감이 양심에 깔리게 된다그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확실한 소망에 의한 평안과 기쁨을 막아 버린다.죄책감과 두려움이라는 연기로 인해 내재하는 은혜가 제대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관찰이었다미약한 은혜와 지배적인 부패는 대상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처럼 또한 그것은 시력을 약화시킨다에드워즈는 죄가 눈의 질병과 같아고 생각했다부패하고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물들을 식별하고 판단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감각이 무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에드워즈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자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표지는 아무 것도 제공될 수 없다고 말한다제 아무리 좋고 틀림없는 표지들을 분명하게 제공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그들이 해야 할 일은 죄를 처리하는 것이다. “부패를 죽이고 은혜 안에서 자람으로써 그것이 활발하게 역사하게 하는 것외의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에드워즈는 구원의 확신을 얻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그것은 행동이다그는 사도 바울이 주로 이 방법에 의해 구원의 확신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놓인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행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갔던 것이다그가 확신을 얻었던 것은 생각보다는 달려감에 의해서였다은혜 안에서 자라고 믿음에 덕을 더하는 방법이 우리의 부름과 선택을 확실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사도 베드로도 말했다이것 없이는 우리의 눈이 흐릴 것이며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와 같을 것이다그리하여 과거의 사죄함 받은 사실이나 미래의 하늘의 기업 어느 것도 밝히 볼 수 없을 것이다.

 

전제3. 구제불능의 위선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

 

에드워즈는 자기가 제시하는 기준들이스스로 위대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거짓 체험과 소망을 가진 위선자들에게는 별 격려가 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그런 사람들은 눈이 멀고 자기 의로 인해 마음이 강퍅해져 있다그러면서도 그 자기 의는 큰 겸손의 가면 아래에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숨겨져 있어 아무리 확실하게 그들의 위선의 증거들을 제시해도 소용이 없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제시하는 표지들이 그러한 위선자들의 출현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기 작업에 의미를 부여한다그처럼 완악하지는 않은 다른 부류의 위선자들을 깨우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도 한다마지막으로참 성도들이 자기들 속에 혼재하는 거짓된 종교적 정서들을 참 정서들로부터 가려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보다 순수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적초자연적신적 영향과 그 작용

 

은혜롭고 신령한 감정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에 가해진 영적초자연적신적 영향과 작용 즉 성령의 영향이야말로 은혜로운 종교적 정서의 원천이라고 한다.

에드워즈는 영적이라는 말을 덕스럽다는 말과 동의어로 간주한다사람이 영적이 되는 것은 비범한 은사가 아니라 덕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6:1). 온유라는 덕을 소유했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이라 인정 받았다는 것이다에드워즈는 성령의 비범한 은사를 자연인도 받을 수 있다고 본다그러나 자연인이 어떠한 은사를 가졌든 상관없이 그러한 사람을 신약성경이 일반적으로영적인 사람이라 부르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에드워즈가 자연과 은총을 얼마나 날카롭게 구분하는지 드러난다그는 자연이 아무리 탁월한 것이어도 결코 은혜를 낳지는 못한다고 본다.

 

새로운 원리와 감각

 

에드워즈에 의하면하나님이 성령을 신자들에게 주시는 최대의 목적은 그들 속에 새로운 신적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다모든 참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령은 그들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면서 그들 마음에 영향을 준다그리하여 새로운 성품의 원리” 즉 삶과 행위의 신적 원천으로 작용한다그런데 이 성령의 고유한 성품은 거룩함이다성도 안에 생명의 원리로 거주하는 성령은 성도 안에서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발휘해서 그에게 전달한다.성도들은 바로 그 거룩한 성품을 전달받기 때문에 영적이라고 불린다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저 은혜로운 움직임들과 감정들 속에 새로운 내적 지각 내지 감각이 있다그것은 그 본질과 종류에 있어 자연인이 느끼는 모든 것들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성경에서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은 새로운 감각을 주는 것에 비유된다눈에 시력을 주며귀에 청력을 주어 귀머거리의 귀를 뚫고 장님의 눈을 열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전환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란 말이다그것은 죽은 지각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에드워즈는 그 새로운 감각이 자연인들에게 있는 모든 원리들을 합한 것보다 더 고상하고 탁월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이는 모든 다른 지각과 능력들은 헛되고 무용하다고 주장한다그리고 그것이 영혼에 일으키는 결과들과 열매들이 너무나 복되기 때문에 그것을 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나 새로운 창조에 비유된다그것은 새로운 이해의 능력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이해의 능력을 새로이 작동하는 것이다에드워즈는 이 새로운 감각은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새로운 영적 감각을 종교에 대한 이해 내지 인식과 대비시킨다사람은 영적 감각이 없이도 교리와 종교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질 수는 있다.

 

에드워즈는 은혜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원리라고 주장한다그것은 마치 꿀을 입으로 맛보는 것과 그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통해 그것에 대해 얻게 되는 개념이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성령은 성도의 마음에 영적 영향을 행사할 때 이 새로운 영적신적초자연적 원리들을 주입혹은 발휘함으로써 역사한다에드워즈에 의하면 신령하고 은혜로운 정서들은 어떤 이해개념혹은 마음의 감각에서 생긴다즉 어떤 신적영적인 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데서 은혜로운 정서가 우러나온다그러므로 정서는 이해의 결과요 열매다역사상참된 종교적 정서와 거짓 종교적 정서에 대한 관심을 에드워즈만큼 많이 가지고 그 양자를 그처럼 엄격하게 구별하는 시도를 한 사람은 없다모든 종교적 정서가 다 참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그는 회심되지 않은 자연인이 느끼는 종교적 감정은 사탄의 역사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상상력과 참된 은혜 체험

 

에드워즈는 영적인 것과 공상적인 것을 철저히 구분한다. “상상력에 새겨진 인상이나 공상적 관념들은 그것이 하나님그리스도혹은 천국혹은 종교에 관련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은혜나 영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상상력의 산물은 아무리 그 내용이 종교적이고 은헤로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 은혜의 역사는 아니다또한 그것은 자연적 차원의 것이지 영적 차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은혜의 체험으로 오인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먼저 어떤 형체에 대한 생생한 관념이 있다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형체의 얼굴을 보면 그는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한다위대한 외적 빛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하나님혹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그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이 머리 속에 떠오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영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피에 의한 구원의 길을 보았다고 주장한다그러나 그러한 관념은에드워즈에 의하면 십자가의 주위에서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바라보았던 그의 원수 유대인들이 가졌던 관념과 그 자체로서 아무 차이가 없다.”

 

나아가서에드워즈는 설사 그러한 외적 상념이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보편적 사역의 결과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구원에 관련된 성령의 특별한 사역과 자연의 영역에 속한 일반적 사역을 다시 엄격히 구별하는 것이다그 구체적 예로 발람의 경우를 인용한다발람은 하나님의 의해 야곱으로부터 떠오르는 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하고 뚜렷한 관념이 그 마음에 새겨지는 체험을 했다(24:16-17).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발견은 아니었다. “샛별은 결코 그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떠오르는 체험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 체험도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성경 본문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도 단지 상상력이 자극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어떤 글자들이나 소리들을 마음에 제시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혹은 은혜로운 영향이 아니라 일반적 역사일 수 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경험을 자기들 신앙과 소망과 위로의 근거로 삼은 것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확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의 근거가 단지 그러한 성경의 약속들이 자기들 마음에 떠오른 방법에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된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는 단지 어떤 성구가 신기한 방식으로 마음에 떠올랐다는 그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러나 그러한 사실-구원에 관한 성구가 갑자기,그리고 경이롭게 마음에 떠오르는-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본다단지 약속의 말씀이 마음에 생각나게 된 그 방법이 신기해서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믿게 되었다면 에드워즈가 볼 때 그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인간의 기억의 한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먼저 믿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이 믿기 전이 아니라 믿은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들에 대한 그들의 분깃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아직 믿음이 없는 자에게 성령께서 그들의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법은 없다특정인이 사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성경 본문은 없다.

 

에드워즈에 의하면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어떤 사람이 자기도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둘째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확신되며셋째성경은와서 복음의 은택에 참여하라는 죄인들을 향한 초청으로 가득하므로 자기도 초대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단언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일으킬 수 없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에드워즈는 성령의 영적 조명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혹은 제시를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성령께서,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처럼 은혜로운 제공을 베푼 제공자의 달콤하고 경이로운 은혜및 자기가 제안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그의 거룩한 탁월성과 신실함”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 혹은 미각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고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성령의 증거

 

구원의 확신 문제와 관련해서 에드워즈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성령의 증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먼저 그는 그것에 대한 일반적 오해를 지적한다소위 성령의 증거라는 것은 자주 어떤 이가 회심되었다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직접적 시사” 내지 인상으로 오해된다. “너는 나의 자녀야라고 모종의 은밀한 음성이나 인상으로 하나님이 내면에 말씀하시는 것이 성령의 증거라고 종종 혼동한다는 것이다에드워즈는 성령의 증거가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과 같은 것이라 믿는다성령의 인은 성령의 어떤 역사” 혹은 영향인데 그것은 영혼 위에 신적 표로 남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식별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성령의 증거” 혹은 어떤 이가 구원받았다는 직접적 시사나 계시가 아니라성령의 거룩한 도장혹은 인상 지위진 이미지로서 양심에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성령의 은 성령의 보증과도 같은 개념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성령의 보증 혹은 인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교통과 영향이다그것은 성령이 양자의 영으로 혹은 자녀의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에게 하듯 처신하게 하시는 것이다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 같고 복음적이며 겸손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사랑

 

은혜로운 정서들의 객관적 근거는 신적 일들의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성격이다.”하나님의 일들이 어떤 사람 자신혹은 그의 이익에 대해 가지는 관계가 아니라그 자체 속에 있는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으로 인해 야기된 감정들이 참된 기독교적 정서들의 객관적 근거라는 것이다사랑의 정서는 모든 정서들의 원천이다특별히 기독교적 사랑은 모든 은혜로운 정서들의 원천이다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들의 출처를 두 가지로 대별한다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이기심이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사역들그리고 하나님의 방법들 등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이야말로 참된 성도가 그것들을 사랑하는 일차적 이유이다.

 

만일 그가 신적인 것들로부터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익이나 그가 그것들에서 받았다고혹은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혜택이 그것들을 사랑하는 일차적 이유라면 그가 그것들을 사랑하는 최초의 근거는자기 사랑"이며 그러한 근거에서 출발하는 종교적 정서는 거짓이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견해였다.

 

 

아직 회심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자기 이익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이기적이요 계산적이며 실용주의적이 것이어서 위선적이다위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거기서 어떤 이익을 발견하기 때문이지 성경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열려서가 아니다하나님의 일들에서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해서가 아니다.

 

에드워즈는 자연인들이 죄를 미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다죄의 도덕적 악이나 가증함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원리 때문이다사람들이 뱀을 미워하는 것이 그것의 독과 유해성 때문이며맹수를 싫어하는 것이 사납고 위험하기 때문인 것과 같다는 것이다아직 참된 회심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도 각성되어 죄를 깨달을 수는 있다그들도 죄책죄와 처벌의 관계죄와 고난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이것도 성령의 역사다.그러나 특별한 역사는 아니다그것은 단지 성령이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도와준 것일 뿐이다그들은 신적 사물에 속한 도덕적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은 갖고 있지 못하다이렇게 볼 때기복적인 동기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거나 기복적인 동기를 강조함으로 많은 회심자들을 생산했다는 한국의 기독교를 에드워즈가 평가한다면 엄청난 부분이 거짓 회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것이다.

 

잘못된 순서

 

에드워즈는 마음의 미각이 바뀌어 하나님의 성품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영광지고선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께 끌리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 참된 회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물론, “그 다음에” 그리고 그것의 열매로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이익이나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에드워즈에 의하면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전도 시에 흔히 사용하는 접근법은 잘못된 것이다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인식 후에 하나님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에드워즈는 여기서 이기적 동기에서 출발되는 기독교에 쐐기를 박고 있다영혼의 구원이든 지상적 축복이든 이기적 욕심이 신앙의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거짓 신앙이라는 것이다그리고 그러한 이기적 동기에서 비롯된 종교적 감정도 다 거짓이다그는 종교의 최우선 순위에 인간의 만족보다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두고 있다그렇다면 대부분 현대의 전도 방식은 심히 문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자기고 계십니다하는 식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만족에 호소함으로써 최초의 종교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으로부터 신앙을 가지도록 결단하게 하는 종류의 전도는 참된 회심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된 종교적 정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본 후그가 나를 사랑하심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이 사랑스러우며 그리스도가 탁월하고 영광스럽다는 것을 본다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이 먼저 이러한 관점에 사로잡힌다그들의 사랑은 수시로 여기서 시작되는 경향이 있다. --- 그런 다음에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은혜를 본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 신학의 핵심들 중 하나에 접근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는 그 이전에 놓여진 기초즉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성도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성도의 기쁨 즉 영적 즐거움도 마찬가지다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일들의 거룩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영적 기쁨의 원천이다영적 기쁨의 최초의 근거는 신성한 일들” 속에 있는 어떤 자기 이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다그것은 하나님의 일들의 신적이고 거룩한 아름다움에 대한 조망 내지 묵상” 중에 그들이 누리는 달콤한 재미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적 체험과 관련된 중요한 위험성을 지적한다흔히어떤 은혜 체험을 하고 나면 그것을 자랑하고 그로 인해 교만해지는 경우들이 많다그러나 에드워즈는 잘못된 종교적 정서를 소유한 자들,즉 위선자들은 그리스도그의 아름다움 및 충만함을 자기들의 체험으로 대체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대신 자신들의 놀라운 체험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기들 체험의 아름다움이다. “발견된 그리스도보다 그들의 발견들에서 더 큰 위로를 얻는 것이것이 바로 체험을 먹고 사는 것(living upon experiences))”이다.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

 

참된 종교적 정서는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에 근거한다혹은 하나님의 일들을 그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의 최초의 시작이요 원천이다거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혹은 도덕적 완전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도덕적 탁월성

 

에드워즈에 의하면, “도덕적 탁월성은 도덕적 완전과 같은 말이며 그것은 동시에 과 동의어이다한마디로 그것은 거룩이다. “지성을 가진 존재의 이 도덕적 탁월성이 거룩이다고로 거룩은 모든 참된 도덕적 탁월성을 포함한다. ---진정한 거룩 외에 다른 참된 덕은 없다.”자연적 원리들로부터 나오는 정직성정의관대함좋은 성격많은 이교도들의 공공 정신과 같은 도덕적의미와 구별된다.

 

거룩

 

거룩은 선한 사람이 가진 모든 참된 덕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간들에 대한 은혜로운 사랑정의자비동정심온유함과 유순함을 망라한다.” 기타 모든 기독교적 미덕들이 거룩에 속한다.”

 

현대 기독교는 거룩에 대한 강조를 상실한 지 오래다아니거룩이라는 단어를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그것은 시대착오적이거나 좀 모자라는 사람혹은 잘난 척하는 위선자기껏해야 고리타분한 경건주의자로 간주된다그러나 에드워즈에게 있어 거룩은 기독교의 본질에 닿아 있다참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그에 의하면그의 거룩 때문이다.

 

거룩의 아름다움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거룩을 미와 연결시키는 것은 에드워즈에게 독특한 것이다그에 의하면, “거룩은 그리스도의 모든 아름다움을 집약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의 모든 영적 아름다움-온유,겸손,인내,천상적 태도,하나님에 대한 사랑,인간에 대한 사랑,비천한 자들에 대한 겸양,불쌍한 자들에 대한 동정 등-은 모두 그의 거룩으로 요약된다.” 이 거룩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영적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새로운 영적 감각은 회심 시에 주어진다성결의 미를 감각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회심의 순간이요구원의 은혜를 받는 순간이다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다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을 다른 말로 달콤함이라고 표현한다. “거룩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성경은 영적 미각의 당당한 대상으로 묘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아름다움과 성화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거룩의 영광이라고도 한다그는 사람이 이 거룩의 아름다움 내지 영광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성도들과 천사들은 거룩의 아름다움을 그 본질로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이 영광을 볼 때 비로소 인간의 마음은 녹고 겸비해지며세상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며하나님에게로 끌리며효과적으로 변화된다.” 성결의 미에 대한 감각은 회심뿐 아니라 성화의 원천이다그 때문에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서는 종종 회심이 성화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회심 시에 일어나는 이 영적 개안으로 인한 변화는 소경으로 태어난 자가 오랜 세월 후 갑자기 눈을 뜨고 시력을 얻게 되어 밝은 태양 빛 속에서 사물을 보게 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영적 감각은에드워즈에 의하면마음에 새로운 거룩한 성향” 혹은 어떤 마음의 습관을 가져다 줌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킨다. “은혜가 강력하고 활발할 때는 거룩한 성향과 영적 미각이 영혼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이 올바르고 기독교인에게 합당한가를그러한 감각이 없이 가장 위대한 능력을 가졌을 때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해 준다." 은혜의 결과로 획득된 영적 감각은말하자면우월한 종류의 마음의 습관 내지 성향이며 그러한 성향에 의해 인간이 성화된다는 것이다결국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도덕적 탁월성)을 보고서 그것을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변화될뿐더러 거기서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요지였다.

 

4. 신령한 지식

 

에드워즈에 의하면은혜로운 감정은 정신이 조명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바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거룩한 정서는 빛 없는 열이 아니다. “을 받아 지식이 생겨야 거룩한 감정이 일어난다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나님그리스도복음에 제시된 영광스러운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고 그것들에 대한 더 낫고 뚜렷한 이해가 가능해진다그는 사변적자연적 지식과 영적초자연적 지식의 경계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진정한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그것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참된 신앙의 기초는 신적인 것들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지식”, 혹은 이해이다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그러나 이 지식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영적인 것이다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 인간의 구원과 성화 여부는 모두 이 영적 지식을 획득 혹은 체험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영적 이해

 

실로우리는 지금 에드워즈의 <종교적 정서>의 절정 부분에 도달했다아니 사실상 그의 신학 전체에서 최고봉에 도달해 있다그가 말하는 영적 이해는 영안이 열려 영적 실재를 보게 되는 것이다전에는 영안이 닫혀 보지 못하던 신령한 사실들을 이제 마음의 눈이 열려 보게 되는 것이다(119:18). 그것은 마음이 영적으로 조명을 받아 성경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영적 이해는 영적 감각 혹은 미각에 의해 가능하다.

 

마음의 감각

이러한 영적 이해력혹은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을 에드워즈는 마음의 감각이 생긴 것이라 표현한다에드워즈 신학에 있어 결정적인 열쇠인 영적 이해는 영적 감각 혹은 미각에 의해 가능하다. “영적 이해는 하나님의 일들의 거룩성혹은 도덕적 완전성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대한 마음의 감각이다.

 

영적 지식

 

영적 이해 혹은 마음의 감각에 의해 우리는 영적 지식을 얻게 된다영적 지식이란 참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의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미각이다사람이 이러한 영적 이해력을 가지게 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마음의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선친신지가 열린다영혼이 신적 일들 속에 있는 거룩함혹은 도덕적 선의 참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게 되면 새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에드워즈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보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것을 본다고 주장한다. “성결의 미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거룩의 아름다움은 에드워즈 사상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자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하다.” 신령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모든 참된 체험적 지식이 비롯된다그것은 새로운 지식의 세계다.

 

 

확신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의 다섯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들의 확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다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은혜로운 정서의 표지들 중 하나다은혜받은 사람들은 모두 복음의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확신있다고 주장한다이러한 사람에게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사라진다복음의 위대한 교리들이 더 이상 의심스러운 일들이나 견해가 되지 않는다참된 믿음이 있는 자는 확신이 있다.

 

이성적이면서 영적인 확신

 

확신은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첫째는 이성적 확신” 둘째는 영적 확신이다영적확신은 중생한 자들혹은 영적인 사람들” 즉 자기들 속에 생명의 원리로 내주하는 성령을 가진 자들에게 고유한 것이다즉 복음의 사실성과 신성에 대한 확신은 이해력에 대한 성령의 조명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확신은 영적 시각” 혹은 이해를 가짐으로 가능하다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에 나타난 것들의 비길 데 없는 아름다움을 보거나 감지하게 된 사람은 그 신성을 확신하게 된다하나님의 영광과 신적 일들의 아름다움이 우리 마음에 그것들의 신성을 확신시키는 것은 두 방법으로 이루어진다하나는 직접적으로요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다

 

직접적 방법

 

마음의 눈이 열려 신적인 것들의 거룩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보게 되면 자연인에게는 그처럼 이상해 보이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많은 교리들이 진실임을 즉각 알게 된다복음의 교리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밝히 드러난다그는 복음에 대한 역사적 증거만 가지고 복음의 교리들을 확신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주장한다인간의 마음이란 박식한 사람들이 복음의 진실성에 대해 들려 주는 모든 말을 들은 후에라도 어떤 커다란 시험을 만나면 의문을 품게 된다그러므로 모든 소유를 팔고모든 것을 겁 없이 버리는 모험을 무릅쓰며,가장 지독하고 심한 고문까지 견디며세상을 초개처럼 여기고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에게 소중한 전부를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으려면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증거 이상의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한다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즉 내적 증거성경의 자증성과 일치한다이 내적 증거가 있어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는 것이다복음의 신적 영광을 보는 영적 시각이라는 것이 있다영적 시각이 있는 사람은 성경 계시 안에 있는 내적 증거를 본다. “하나님의 복음은 증거를 구걸하러 다니지 않는다왜냐하면 그 자체 안에 최고의그리고 가장 적합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에드워즈의 방법이 필요하다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신적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요오직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어야 한다오늘날 정통적 고백주의자들의 문제는 그것이다머리로는 정통 신학을 고백하나 마음과 체험에 그것이 부재한다감정도 의지도 행함도 따르지 않는 정통주의는 경건주의와 합리주의의 반발만 낳을 뿐이다.

 

간접적 방법

 

에드워즈는 신적 영광을 보는 시각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시켜 주는 간접적 방법을 설명한다첫째는 신적 일들의 진실성에 대한 마음의 편견들을 제거하여제시된 논리의 힘에 정신이 열리게 함으로써다둘째는단지 이성의 장애물들이 제거될 뿐 아니라 이성을 도와 사변적 인식을 더 활발히 함게 함으로써다.

 

에드워즈는 환상를 보거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신비적 체험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그런상상력에 가해진 비상한 인상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일들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종종 가진다그러나 결국 그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복음을 거부하며 불신과 무신론으로 기울어진다.그러므로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요아주 좋지 못한 것들이라고 에드워즈는 단정한다.

 

겸손

 

여기서 비로소 거룩한 정서의 표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시작된다앞의 다섯 가지는 표지라기보다는 그것의 원천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에드워즈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이 겸손이라는 주제 하나에 대해 무려 30페이지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루고 사랑온유조용함용서 및 자비를 다 합해서 불과 13페이지를 할애한다.

겸손을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으로 나눈다전자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아직 은혜로운 정서가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후자는 오직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전자는 자연적 원리들을 돕는특히 자연 양심을 돕는 성령의 일반적 영향에서 비롯된다후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고 적용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율법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복음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게 된다전자 아래서는 인간이 제압당해 강제로 땅바닥까지 낮아지게 된다.후자 아래에서 인간은 달콤하게 굴복하게 된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발 앞에 부복한다는 것이다에드워즈는 율법적 겸손은 복음적 겸손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복음적 겸손이 없는 자는 참 신앙이 없는 자다신령한 지식이 있으면 틀림없이 의지가 변화된다성품 내지 삶의 변화가 뒤따른다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그에 의하면겸손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복음적 겸손은 기독교인의 커다란 임무인 자기 부인의 주된 부분이다기독교적 자기 부인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하나는 세상적 성향을 부인하는 것이다명예,권력쾌락정욕 등 세상적 목표들에 대한 욕심 내지 끌림을 버리는 것이다은자들이나 은둔자들이 버린 것이 바로 이 동물적마귀적 정욕이었다다른 하나는 타고난 자고함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버림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이 부분은 가장 위대하면서 어려운 부분이라고 지적한다일반인들은 사막이나 광야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고대의 은자들의 경건을 높이 평가한다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들의 겸손이 거짓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은자들이 자신의 자존심이나 의를 전혀 버리지 않았었다고 주장한다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다단지 한 정욕을 버리고 다른 정욕을 산 것뿐이었다. “짐승 같은 정욕을 팔고 마귀 같은 정욕을 만족시킨것이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의를 세우는 경향이 자연인에게 얼마나 강한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에드워즈는 보았다.

 

에드워즈는 위선자들이 겸손한 척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고 지적한다율법적 영이란 무엇이든 자만하는 영이었다자기의 의로움도덕성거룩성감정체험신앙겸손 등 어떤 좋은 것이든 그것에 대해 자부하는 영적 교만이야말로 율법적 영이었다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특징이 자신의 겸손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자신의 낮아짐에 대한 높은 평가로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가 있다그들의 겸손은 자신 있고 과시적이며 시끄럽고 주제넘고 마음이 부풀고 자만에 찬 겸손이다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아주 교만하고 행동이 거만한데도 자신은 아주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놀란다인간 마음의 교활함이 이 영적 교만과 자기 의의 영역에서처럼 많이 드러나는 곳은 없다고 한다이점과 관련하여 사람을 다루는 데서 사탄의 교묘함은 그 절정에 달한다고 한다.

 

영적 교만이란 대개 커다란 겸손을 가장하고 나타나지만 두 가지 방식에 의해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첫째영적 교만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을 성도 중에 낮은 자, “모든 성도들 중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낮게 여긴다그들은 듣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데 열심이다그들은 권위를 지니 총감독이나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벧전5:5 참조). 정말 뛰어난 성도들 즉 가장 탁월한 체험을 가지고 있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기에 은혜에 있어 어린아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은혜로운 성도는 자신의 의무의 규칙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성도 속에 있는 은혜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조차도 그가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수준에 비추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에드워즈의 죄론이 등장한다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한 청교도적 이해는 기독교의 가장 심오한 차원에 관련된 주제이다에드워즈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아마 죄에 대한 인식에 있어 교회사에서 가장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일 것이다모든 죄는 그 안에 무한한 결함과 가증스러움을 안고 있다어떤 존재를 사랑하고 공경할 우리의 의무는 그의 사랑스러움이나 명예로움에 어느 정도 비례한다하나님은 무한 사랑스러운 분이다그러므로 그를 사랑할 우리의 의무도 무한다그러므로 그 사랑에 반하는 어떤 것도 무한한 불의결함 및 무가치함을 지닌다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죄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거리에 비례하여 가증스럽다대상의 위대함과 주체의 비천함 및 열등함은 그것을 악화시킨다대상의 우우월성이 크면 클수록 열등한 자가 그 우월한 자를 공경할 의무는 그만큼 더 커지는 반면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를 공경하지 않는 죄는 더 가증스러워진다.

 

에드워즈는 무한의 개념을 즐겨 활용하고 있다.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다.” 참된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자신의 선함과 거룩함이 그만큼 더 작아 보인다. “인간의 오염과 일탈을 감추어 주는 것은 어두움이다그러나 마음에 흘러 들어온 빛은 그것을 드러내고 가장 은밀한 구석에서 그것을 찾아내어 그것이 선명히 나타나게 한다특별히 만물을 꿰뚫어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은 그러하다.”가장 탁월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은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더 많은 겸손더 많은 감사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증스럽게 느껴진다그리고 자신의 연약함가증한 교만과 배은망덕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모든 참된 영적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지각하게 한다.

 

영적 교만의 틀림없는 표지는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가짜 체험들은 대개 위조 겸손을 동반한다그리고 위조 겸손의 속성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뛰어나게 은혜로운 정서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획득한 겸손을 아주 작은 것으로 본다반면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교만은 크고 아주 혐오스럽다고 여긴다겸손의 원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다자기가 겸손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적다고 여기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크게 여긴다.

 

실제로 소유한 존귀함의 정도와 자기를 낮추는 정도로 겸손을 평가할 수 있다참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존귀함에 대해 아주 낮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는 모든 행위들이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인다자기처럼 비열하고 가난하고 비참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이 전혀 대단한 겸손이나 자기비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존경하는 신학자 매스트리히트의 표현을 빌어서겸손을 한마디로 일종의 거룩한 소심함(holy pusillanimity)”이라고 정의한다거지와 같은 가난한 심령을 은혜로운 겸손이라 본다은혜로운 정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계속적으로 하나님 집의 문간에 있는 거지로 자처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교만보다 자기의 교만을 먼저 본다고 한다그리고 자기보다 더 교만한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적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선언한다. “모든 참된 신령한 자식의 특징은 사람이 그것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겸손은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뭇사람을 공경하며”(벧전2:17)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악한 사람들 뿐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거짓 형제들과 박해자들까지 공경한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정서들을 마리아의 향유에 비유한다그녀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그 향유는 온 집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그런데 옥합이 깨어질 때까지는 향유가 흘러나올 수 없었으며 그 향기를 발할 수도 없었다마찬가지로은혜로운 정서들도 상한(깨어진심령에서 흘러나온다그리스도에게 달콤한 향기이며 기독교인의 영혼을 하늘의 달콤함과 향내로 가득 채우는 모든 은혜로운 감정들은 상한 심령의 감정들이다참된 기독교적 사랑은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 대한 것이든, “겸손한상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한다.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더 어린아이처럼 만들며 더 겸비한 처신으로 인도하는 경향을 가진다.

 

성품의 변화

 

그는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 같은 초자연적 선물보다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인격적 변화가 없다면 은사나 능력이란 그가 보기에 거의 무의미한 것이었다회심은 곧 성화를 낳는다고 보았다성화되지 않은 회심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그리하여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은혜로운 정서들의 또 하나의 표지는 본성의 변화은혜로운 정서는 성품의 변화를 수반한다모든영적 발견들은 영혼의 본성” 자체에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인격적 변화 없는 체험은 망상이다. “사람 안에 크고 지속적이며 괄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면 회심의 체험이라는 것이나 크게 감동되었다는 것도 다 상상이며 가식일 뿐이다.” 돼지는 씻어도 그 더러운 본성이 그대로 남아 있고 비둘기는 더러워져도 깨끗한 본성이 그대로 남는 것에 비유한다.

 

물론타고난 기질은 고려되어야 함을 인정한다그러나 그것조차도 큰 변화를 거치게 된다고 주장한다인간은 타고난 체질 때문에 회심 전에 가장 빠지기 쉬웠던 죄에 대해 회심 후에도 가장 쉽게 유혹을 받는다그러나 회심은 그러한 죄에 대해서조차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더 이상 그를 주관하지는 못하게 된다그는 단지 최초의 영적 발견에 의해 회심되었을 때만이 아니라 그 후의 조명과 감동도 처음 회심 때와 같은 신적 능력과 에너지가 있어 마음의 밑바닥까지 미치는 효과를 가지고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온유유순화평용서자비

 

참된 기독교적 정서는 어린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기질을 동반한다참 은혜로운 정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었던 것과 같은 사랑온유조용함용서자비의 영을 자연스럽게 낳고 증진시킨다.”이것들을 그리스도인 마음의 참되고 구별되는 성향들즉 기독교적 영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맹렬하고 난폭한 모습을 보이거나 날카롭고 통렬한 열정을 노출할 때 그것은 힘과 용기가아니라 연약함의 증거다.”진정한 기독교적 용기란 하나님의 원수들과 자기 자신의 원수들의 가장 격렬하고 불합리하며 사악한 반대의 와중에서 어린 양 같은 겸손조용함온유함 및 비둘기 같은 무해함사랑그리고 달콤함을 유지하는 것이다그는 또 그리스도를 위한 담대함과 영적 교만을 예리하게 구별한다. “구별되고 독특해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영적 교만의 본질이다.”자기들이육신적이라 부르는 자들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그가자기 집단에서 보다 높이 들리기 위해서다.”

 

부드러운 마음(죄에 민감한 마음)

 

마음의 부드러움이란 온유한 성품이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죄에 민감한 마음이다예민한 죄의식과 민감한 양심을 말한다참된 은혜는 죄에 대한 양심의 깨달음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부드러운 영을 동반한다가짜 종교적 정서의 특징은 과거와 현재의 죄에 대해 마음의 감각이 무디며 미래의 죄에 대해 덜 꼼꼼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들과 그의 섭리에 의한 징계에 대해 무덤덤하며자기들의 영적 상태나 자신들의 행동 방식과 경향에 대해 보다 부주의하다.”“딱딱한 마음을 가진 신자들은 죄에 대한 혐오감이 없다고 한다한국 사회의 대형 비리들에 많은 그리스도인들그것도 대표적인 대형 교회들의 지도급 인사들이 자주 포함되는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단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은혜는 죄에 대한 양심의 깨달음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부드러운 영을 동반한다참회자의 마음은 불에 덴 어린아이가 불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이” 죄를 두려워한다그리스도인들의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동정심이 풍부하다.

 

거룩한 담대함은 노예의 두려움과는 반대되는 것이다거룩한 담대함은 노예같은 관계의 거리감” 및 도덕적 거리감 혹은 소외감을 없애거나 줄여 준다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자연적 거리는 전혀 없애 주지 않는다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보다 한없이 낮은 존재다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부자 관계를 강조하느라고 하나님에 대한 무엄함혹은 무례를 권장하는 경우에 대해 에드워즈는 따끔한 경고를 준다사람들이 광대하신 하나님과 미물인 자신들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무엄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는 한국 교회에서 종종 발견된다열린 예배 같은 자유로운 예배 형식을 취할 때 그러한 우를 범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거룩한 담대함이 크면 클수록 자기 신뢰는 적어진다.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크면 큰만큼 자기가 그러한 벌을 받아 합당하다는 깨달음도 크다. --그는 가장 견고한 위로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한다다른 이들보다 부유하나 모든 이들 중에 가장 마음이 가난하다가장 크고 강한 성도이지만 그들 중 가장 작고 부드럽다.

 

10 아름다운 대칭과 균형

 

하나님의 영은 은혜와 은혜로운 정서들을 아름다운 대칭과 비례 속에서 주시는 경향이 있다.”거짓된 정서는 불균형과 비대칭성이 그 특징이다그 사례로,

1) 과거에는 죄를 애통해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2) 인간은 사랑하나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든지 아니면 그 역이다.

 

3) 사람의 영혼은 사랑하는 척하나 육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없는 경우다.

4) 남의 결점에 대해서는 흥분하나 자신의 결함과 부패에 대해서는 덤덤하다그러나 참된 종교적 정서를 가진 자는 남의 결함보다 자신의 결함에 더 민감하다.

 

5) 아직 더 낮은 차원의 것이 없다면 그보다 높은 차원의 것은 없다.

사소한 도덕성” 차원을 초월하고 영적이고 신령한 삶을 살기로 했다 하면서 실제는 그 시시한” 도덕성도 없는 경우스스로 신령하다 하면서 기본적 상식교양예절합리성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자기 내면의 사악함으로 인해 크게 상심한 척하지만 그보다 낮은 차원인 외적 생활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저주받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자기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재산과 명예의 작은 손해사소한 세상적 불편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우다.

 

6) 덜 중요한 것에는 참지 못하고 열을 올리나 더 중요한 것즉 은밀한 기도와 찬양 중에 하나님 앞에 영혼을 쏟아 놓거나 하나님을 더 닮아 가는 일 등은 소홀히 한다참된 신앙적 정서의 특징은 자주 홀로 하나님과 대화할 고독한 곳을 찾는 것이다참된 신앙이 있는 사람은 거룩한 명상과 기도를 위해 자주 고독한 장소에서 홀로 있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성경에 의하면성도들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를 받는 것은 홀로 있을 때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가장 현저히 드러내신 것이나 언약의 자비를 베푸신 것은 그가 홀로 있을 때였다죄인들의 영혼을 위한 성도의 해산의 수고와 고통은 주로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어떤 이가 집단적 신앙에는 크게 열을 올리는 것 같지만 골방의 신앙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다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는 함께 대화할 아무도 없을 때는 무감동하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 크게 은혜를 받는 신앙은 장래가 아주 어둡다고 경고한다.

 

7) 어떤 특정한 죄에만 분개하고 자신의 죄에는 무덤덤하다참 은혜로운 정서는 죄 일반에 대해 증오심을 가진다고 지적한다그 강도는 그 죄성의 크기에 비례한다. “내가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119:104,128).참된 열심을 가진 자는 주로 자신의 죄에 대해 그것을 발휘한다물론 다른 사람들 속에 만연된 위험한 죄악데 대해서도 적합한 열정을 발휘하지만 말이다그러나 죄악에 대한 가짜 미움은 단지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서만 반대한다이를 테면신성모독이나 사치스러운 의상에 대해 열을 올리는 자들이 자신의 탐욕신앙 퇴보윗사람에 대한 시기심다스리는 자들에 대한 뿌리 깊은 악의 등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8) 관심이 수시로 변하여 잠시 영적인 관심을 갖는 것 같다가는 금방 세상적 관심으로 옮아간다비범한 시기,즉 성령이 비상하게 부어지는 때혹은 하나님의 섭리가 비범하게 나타나는 때혹은 어떤 커다란 자비를 실제로 받았거나 받았다고 상상할 때혹은 어떤 비상한 지상적 축복을 받았을 때그들은 크게 감동한 것처럼 보이고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낸다그러나 얼마 안 가 그들은 다른 일들에 마음을 쓰는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다.

 

11 영적 욕구와 갈망

 

은혜로운 정서는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영적 성취에 대한 영혼의 욕구와 갈망이 증가한다반면에거짓 정서는 스스로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거룩한 정서를 더 많이 가질수록 영적 식욕이 더 강해지는 이유는 영적 입맛이 생긴 사람은 거룩의 탁월성을 감지하고 그 신적 달콤함을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비성경적 상태에 빠져 버렸다회심되기 전에는 몸부림치고 애를 쓰던 사람들이 회심 후에는 안이한 시간을 보내면서 가만히 앉아 게으름을 즐기면서 빈둥거리고 있다고 그는 개탄했다.

 

영적 욕구가 있으나 그 동기가 잘못된 상태에 놓인 그리스도인들이 있다이들은 거룩 그 자체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수적 목적을 위해 그것을 추구한다거룩함 안에 있는 도덕적 탁월성과 달콤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구원을 보다 확신하기 위해” 더 분명한 영적 발견들을 추구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사랑을 가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맛보기를 갈망한다.”

 

성도에게는 거룩함에 대한 내면의 불타는 욕구가 있다거룩함으로 자라기 위해 하나님의 영에 대한 거룩한 기갈이 있다어떤 은혜로운 감정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바른 태도다거룩한 갈망의 보다 직접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어떤 현시보다 거룩 혹은 성화거룩함이야말로 영적 식욕의 대상이 되는 고기와 음료였다에드워즈는 성경이 성도들의 갈망소원그리고 염원의 대상을 언급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 의와 하나님의 법을 더 자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성도들이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에 의해 그들이 거룩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다.”그러나 위선자들이 영적 발견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의 성화시키는 어떤 영향력보다는 그 발견들이 주는 현재의 위로와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현시때문이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관찰이었다.

 

12 기독교적 실천

 

에드워즈는 이 실천 부분에 책 전체의 거의 4분의에 가가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는 기독교적 실천으로 표현되고 열매 맺는다.” 은혜의 속성은 거룩한 행동과 실천을 낳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비활동적이지 않다천하에 은혜보다 더 활동적인 것은 없다.”왜냐하면 그것은 생명 자체가장 활동적인 종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샘이 시내를 낳고 태양이 햇살을 발산하며 생명체가 숨을 쉬듯, “경건은 실천을 낳는다.”“기독교적 체험에 속하는 모든 은혜는 거룩한 실천으로 연결된다.

 

기독교적 실천의 내용

 

1) 순종이다.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그는 가장 사랑하는 죄”, “선천적으로 자신이 가장 유혹을 잘 느끼는 죄도 버려야한다그의 언행은 진지하고 종교적이며독실하고 겸손하며온유하고 관용하며화평하고 존중하며친절하고 공손하며선의자비사랑이 가득해야 한다.

 

2) 신앙생활에 아주 열성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아주 진지하고 근면하게 수행해야 한다그는종교적인 일들에 자신을 바쳐 그것을 자기 생의 주된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달려가야 한다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태만하고 해이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 반역이다그러한 악한 종은 바깥 어두운 데 던져질 것이다.

 

3) 견인이다참 그리스도인은 생의 마지막까지” 모든 시험과 시련을 뚫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비록 실족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신앙 생활을 계속적으로 싫어하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을 중지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적 실천은 거룩한 삶과 동의어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 성경은 거룩한 행실을 은혜의 주된 증거로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증거들 중 으뜸으로 간주한다.

 

교회원의 자격 요건

 

에드워즈는 기독교의 핵심을 고백하고 행하는 자가 참 신자이며 참 신자라야 교회의 정회원으로 인정되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기독교의 핵심은 이렇다죄를 회개하고 모든 죄를 버리며자신의 죄성과 비참과 (구원에 있어)무능자기 의의 불충분성그리고 완전히 멸망할 상태를 확실히 깨닫는 것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아 완전한 버림을 당해 마땅함을 느끼는 것복음의 진리를 믿는 것즉 우리의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다시 말해 오직 전심으로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완전한 탁월성만을 의지하는 것다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것하나님을 자신의 완전하고 영원한 분깃으로 모시는 것그분을 위해 이 헛된 세상의 즐거움을 포함한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는 것그분에게 자기 마음과 자기 전부를 드려 온전히그리고 영원히 그 분의 것이 되는 것전생을 바쳐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우리 왕이신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하나님의 모든 계명심지어 가장 어렵고 자기부인적인 계명에도 순종하는 것인류에 대한 선의 등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 받으려면 위에 언급한 신앙고백과 그것에 상응하는 가시적인 성결한 삶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말과 행실에서 그의 경건을 부정할 만한 것도 없지만 그것을 증명할 커다란 적극적 증거도 없는 사람을 그는 참 신지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은혜 체험의 순서와 방식 진술의 가치

 

그 전의 청교도 신학자들은 교회 회원권 지망자들에게 그들의 특별한 회심 체험의 과정과 방식을 진술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에드워즈는 한 영혼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신 순서와 방식을 진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믿었다그 체험의 결과즉 거룩한 삶이라는 열매가 더 결정적이라고 보았다그가 보기에 체험에 대한 간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증거들을 무시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었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증거란 기독교 진리에 대한 견실한 지식그리고 신앙고백에 상응하는 삶두 가지라고 생각했다그것이야말로 그가 참 성도라는 최선의 증거라는 것이었다.

 

가시적 거룩의 구체적 내용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삶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생활마태복음 5~7로마서 12그리고 신약의 많은 다른 부분들에 나타난 규칙들에 상당한 부분에 준하는 삶그리스도의 명령과 복음의 규칙들 및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에 나타난 의무들에 대한 순종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인간성도들적들에 대한 사랑온유와 용서자비와 자선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 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는 것특정인들과 대중들의 영혼 및 육체에 선을 행하는 것절제와 육신을 죽이는 일겸손한 말씨혀를 재갈 먹여 그것을 사옹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교회가정직장동네 등 모든 장소에서그리고 주일이든 주중이든 모든 때에모든 형편과 시험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행하는 것자기 부인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신앙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것 등이었다이러한 것들에 비하면 다른 모든 체험들은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실로 기독교적 행실은 체험의 진술보다 한 사람의 신앙고백의 진실성을 훨씬 더 잘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아마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에드워즈가 제시한 그러한 증거들이 회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화에 관한 것이라 느낄 것이다.

 

성경적 근거

 

성경도 기독교적 행실을 은혜의 뚜렷하고 확실한 증거로 말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 굳세게 하리로다”(요일3:18-19).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19-2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리라이러한 성구들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행실이야말로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모든 증거들 가운데 으뜸이며 죄의 깨달음회심에 있어서의 조명들과 위로들의 방법이나명상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어떤 내재적 발견들이나 은혜의 작용들보다 훨씬 더 선호해야 할것이라고 단언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14:21-24)

거룩한 행실은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용될 커다란 증거라고 에드워즈는 강조한다그것은 마25:19-30의 양과 염소 비유20:12, 고후5:10 등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선한 의도의 한계

 

단순히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자기 성향대로 행할 자유가 있을 때 그것에 마음이 있다는 으뜸가는 증거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지옥이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고 꼬집는 청교도들의 전통을 따른다경건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의 진실성에 대한 시험 방법

 

시련에 의해 고백의 진실성을 시험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를 든다사람들은 금 색깔과 모양을 가진 광석을 용광로에 집어넣음으로써 과연 그것이 금인지 아닌지를 시험한다마찬가지로신앙의 어려운 의무들즉 시험들은 신앙고백자들이 참 성도인지 아닌지 시험한다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만난 어려움들에 의해서였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을 때 자신의 외아들을 바치는 어려운 명령이었다이처럼 어려운 명령에 의해 신앙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사용하신 방법이었다고 한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런 다음에 와서 나를 따르라고 부자 청년에게 시험했다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들이 처음 싹이 날 때는 다 비슷해 보이나 타는 태양의 열기에 의해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고 예수는 교훈하셨다결론적으로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행실이야말로 어떤 신앙고백자가 참 은혜받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가장 고유한 증거이며 은혜의 모든 표징들 중 으뜸이며, “표지들 중 표지이며 증거들 중 증거로서 모든 다른 표지들을 인치고 관 씌우는 것이다행위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증거로서의 행위이다체험이 행위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체험이야말로 영적이고 신적인 것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한다.

 

반론에 대한 답변

 

1) 행실의 의미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참된 은혜의 주된 증거가 영적 체험이라는 많은 선한 사람들의 관념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체험과 실천과의 관계에서 두 극단의 오류를 지적한다하나는 내적 체험 없는 외면적 종교적 실천이다이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다른 하나는 실천이 없는 소위 체험이다기독교적 행실을 수반하지도 않고 그것이 뒤따르지도 않는 이러한 체험은 없느나 보다 못한것이라고 혹평한다체험의 신빙성에 대해 회의적이 된 이유는 목회 경험이 많아질수록 가짜 체험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입만 살아 있는 신앙에 대해 냉소적이다. “우리 입술이 생기 있고 활발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봉사에서 활발함으로” 생기 있는 신앙을 입증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 종교가 진실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그리스도인들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취어 그들이 그 선행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전망했다.

 

2) 기독교적 실천이 은혜의 주된 증거라는 주장은 율법적주장이라는 것이다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행위가 하나님의 은총을 사기 위한 대가로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표지요 열매라고 대답한다. “값없는 은혜와 거룩한 행실의 필요성은 성경에서 수시로 상호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 모순 되지 않는다행실을 통해 나타난 믿음의 결과가 그것의 주된 표지들이라 말한다 해서 믿음의 영예와 중요성이 감소되지 않는 것은,행동과 동작이 생명의 주된 표지들로 간주된다고 해서 생명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제 장 에드워즈의 종교적 정서론 평가

 

에드워즈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마음으로 혹은 영으로 이해하고 감지한 체험을 가진 신학자라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자신의 남달리 깊은 종교적 체험을 놀라우리만치 정밀한 언어로 형상화하여 후대에 남겨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이 있다그는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그는 사실상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본질이라 보았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의 달콤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주는 표준을 너무 높인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특히여러 면에서 표준을 낮추고 타협하는 것이 일반화된 현대 교회에서 그는 비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엘리트주의를 추구한다는 비난을 받을 위험성이 있다단지 현대 교회에서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진 집단으로 보이는 청교도 교회에서도 그의 기준은 너무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에드워즈의 그처럼 높은 기준은 결국 노샘프턴 교회 다수 교인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그의 목사직 해임으로 마무리되었다그 사건은 바로 그가 종교적 정서에서 주장했던 표준들을 실제 자기 교회의 교회 회원 자격 결정 기준으로 제안함으로 촉발되었다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제세례파의 완전주의에 빠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그의 진실한 신앙과 순수한 교회에 대한 청교도적 집착이 이러한 교과서적 기준을 만들게 하였고부패한 본성과 연약한 신앙을 가진 현세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청교도적인 높은 표준에 감사하고 그 표준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채찍질할지언정 성경적인 표준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현재 한국교회에서 부흥 혹은 성령의 활동이라고 하는 것들의 80%이상이 에드워즈의 표준에서 보면 가짜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각성해야 할 일이다청교도 신앙을 본받고 참된 부흥에 대한 갈망을 새롭게 할 때이다.

 

칼빈은 신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영적으로 아주 연약하며 영적 진보가 더디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이해와 관용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그것을 또한 현실로 받아들였다칼빈은 에드워즈보다 더 목회적이요 온건주의적이었다에드워즈는 참신자는 그의 경건을 증명할 만한 커다란 적극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에드워즈는 어떤 사람 안에서 육적인 요소가 강하게 잔존하는 것즉 옛 사람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을 아직 회심되지 않은 탓이라 보는 경향이 있다.

 

 

 

제 부 갈등과 결별 (PP 573-668)

제 장 균열의 조짐들

 

1730년대 즉 노샘프턴 교회에서 전임목사요 외조부인 솔로몬 스타다드가 죽은 후 1차 대각성의 절정까지 에드워즈의 목회에 있어 성공의 기간이었다설교도 탁월하여 그의 목회의 안전과 미래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그런데 위대한 설교자요 거룩한 목회자가 교인들의 배척을 받아 교회를 사임했다.

 

그것은 사례문제권징문제인간관계 문제로 교회와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교회 안에서나 친척의 권징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원만하게 대처하지 못해 친척이나 교인들에게 원성을 받은 것을 보면 인간관계를 무난히 맺어가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딸만 아홉 있는 집에서 외아들로 자란 탓인지 특히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 소극적이었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 강하고 고집스러움은 힘 있는 사람들로부터 적대감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제 장 성찬 논쟁

 

에드워즈가 사임해야할 결정적인 이유는 성찬에 참여할 자격에 대한 문제였다.

그는 그전의 기준보다 훨씬 높고 강화된 기준을 제시했다그러므로 해임의 결정적인 요인은 교회론적이고 신학적인 것이었다.

 

논쟁의 배경

 

1630년 중반 무렵부터 교회의 정회원이 되기 위해 회중 앞에서 회심체험 진술을 하고 회중의 판단을 받아야 했다이것은 교회원의 숫자를 감소시키고 정회원이 아닌 사람의 자녀는 유아세례를 받을 수 없는 문제점을 가져왔다그 타개책으로 1662년 중도언약으로 준회원제를 두어 그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였다이 조치에 의해 회심의 체험을 교회원권의 조건으로 삼는 관행이 뉴잉글랜드지역에서 점점사라지게 되었다.

 

이 제도에 앞장 선 목사중의 한사람인 에드워즈의 외조부였던 솔로몬 스타다드는 개방적인 입장에서 스타다드주의로 불리우는 중생하지 않은 자라도 생활에 하자가 없고 교리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교회회원권을 얻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스타다드는 성찬식이 사람을 회심시키는 경향이 있는 은혜의 수단이므로 비중생자라 할지라도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에드워즈가 제시한 성찬참여 자격기준

 

에드워즈도 1744년까지는 스타다드가 도입한 것과 같은 조건위에서 성찬참가 자격을 인정했다그러나 성찬에 참여했음에도 뒤늦게 회심을 고백하고 회심을 고백한 뒤에도 단지 일시적 변화에 그치고 마는 일들이 일어났다.

에드워즈는 자기 목회 중 약 550명에게 성찬 참여권을 허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스스로 속는데 그리고 자기가 세상을 교회에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에드워즈는 마침내 교회에 문제를 제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 처음 도착했던 청교도 조상들이 주장했던 가시적 성도다움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가시적 성도다움이란 가시적 거룩성이란 말고 같은 의미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한 신앙고백과 거기에 상응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핵심에 대한 신앙고백은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 및 하나님의 정죄의 정당함에 대한 시각즉 청교도들의 용어대로 겸비해짐의 체험을 포함해야 했다아울어 육신과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서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는 것 그리고 자기부인이 포함되어야 했다.

 

현대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이러한 성찬 참여 자격 기준이 비현실적으로 높으며 심지어 완전주의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반발할 것이다어쨌든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은혜와 경건의 고백 및 외양이 없으면 더 이상 교회 정회언권을 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그 주장은 에스겔 22:26, 레위기 10:10, 예레미아 15:19, 44:6-8 등의 본문에 근거하고 있었다.

 

가시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를 볼 때 에드워즈는 교인들의 삶의 모습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에 많이 미달된다고 느꼈음에 분명하다그러므로 해결책은 교회 회원권 취득의 자격요건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입교의 기준을 높여야겠다는 것이었다에드워즈의 새 정책은 동네에 물의를 일으켰고 교회위원회도 15명 중 3명만 거기에 동의했다에드워즈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심하고 교회 위원회에 문서로 약속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책을 교회가 읽어본 후 쌍방이 선택한 회원들로 구성된 공의회의 자문을 구한 후 교회가 원한다면 내가 이 교회를 사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겸허한 질의

 

에드워즈의 목회 사활이 걸린 가견적 기독교회에 있어 완전한 회원권과 성찬참여자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들에 대한 겸허한 질의라는 긴 제목의 책이 발간되었다에드워즈의 주장의 요지는 온전한 자격을 갖춘 자들만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며 기독교적 판단자들 눈에 가시적으로 드러날 것을 강조했다.내면적 경건은 측량할 수 없지만 내면적 은혜의 외적 표현이야말로 참된 회심에 대한 유일하게 믿을 만한 증거라는 것이다.

 

참된 회심은 틀림없이 생활과 인격의 가시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어떻게 그 가시성을 판단할 것인가였다에드워즈는 자신은 판단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교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사람들은 목사가 자신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결과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해임결정

 

1749년 가을반대자들은 논쟁을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마을회의인 지역 회의로 가져갔다교인들은 만일 목사가 자기의 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사임해야 한다는 해결책에 합의했다.

 

에드워즈의 여러 가지 권한에 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국 1950년 6월 19일 노샘프턴에서 회중들이 초청한 다섯 교회 목사다섯 명의 평신도 대변인들 그리고 에드워즈가 초청한 다섯 교회 목사네 명의 평신도 대변인들로 구성된 공회에서 해임이 결정되었다그 직후 공의회는 교인들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공동회의를 소집했다. 230명의 성인 남자 회원 중 23명을 뺀 절대다수가 그의 사임을 원했다공의회 회원인 데이비드 홀은 자신의 일기에서 그 결정에 대한 에드워즈의 반응을 이렇게 적고 있다.

 

“ 그의 얼굴에서 최소한의 불쾌한 빛도 발견할 수 없었다그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다웠다그의 행복은 그의 대적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그리하여 그를 해임하지 않으면 두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던 많은 이들조차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에드워즈를 특별히 괴롭게 했던 것은 그에 대한 큰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었던 교인들의 반대였다외부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들은 너무나 미혹되어 그를 반대하는 열심이 일종의 미덕인 것처럼 생각했다.

 

제 장 검허한 질의

 

1. 질의를 공시하고 설명함.

 

[검허한 질의]는 3부와 부록으로 이루어진다.

제 1부는 질의를 공시하고 설명함이란 제목하에 고백과 외양에 있어 기독교적 은혜와 경건을 부여받은 자들 외의 어떤 이들이 기독교 성례 특히 성찬에 허입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2.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이유 열한 가지

 

제 2부는 성찬 참가 자격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으로 제1부에 제기된 질문에 대해 부정적 결론을 내리는 이유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견적 성도들과 신앙고백하는 성도들혹은 가견적이고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가견적 교회의 회원으로 영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정적 배후에는 에드워즈의 치밀하고 엄격한 신학적 관점이 깔려있다.

 

첫째,‘가시성에 대한 외조부 솔로몬 스타다드의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에드워즈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가시적 경건성을 소유한 자들과 단지가시적 도덕성만을 가진 자들을 구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일반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함으로써 참된 신앙을 명시적이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 일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라고 주장한다(신 6:13,10:20의 맹세하라에 근거). ‘그 이름으로 맹세라는 제도의 의도는 하나님과 공적으로 언약을 맺는것이었다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 2가지를 엄숙히 고백했는데 하나는 신앙이요다른 하나는 순종이었다고 주장한다.

 

셋째스타다드의 참 성도와 위선자들의 구별은 복음교리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도덕성 신실성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왜 그 분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고백하듯 자기들마음속에 있는 그 분에 대한 적절한 존경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없는가라고 도전한다.

 

3. 20 가지 반론들에 대한 답변

 

제 3부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20 가지 반론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첫 번째 반론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학교로서 사람들을 받아들여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곳이므로 다른 어떤 자격 요건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학교임을 인정하나 입학자격도 갖추어지지 않은 자들을 받아 그 자격부터 구비시켜준다는 의미의 학교는 아니라는 것이다자신들을 참으로 주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는 자들은 믿음에 의해 마음이 정결케 된 자들뿐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반론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가시적 경건과 먼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렀다에드워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시적 성도성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신실성도 없었다그렇다면 현재에도 악명 높고 노골적으로 사악한 자들을 성찬에 허입해야 할 것인가라고 반박한다.

 

세 번째 반론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의 경건 고백을 하지 않았으나 참여할 자격으로 죄 범한 자가 성찬에 나오고자 하면 죄를 자백하고 회개의 가시적 표지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동일한 입장이라고 대답한다.

 

네 번째 반론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은 무리들은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고백했다거나 참된 경건의 가시성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에드워즈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자백하면서’(3:6) 나아왔고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였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반론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 받은 자는 적으니라’(20:16)는 말씀은 가견교회 속한 자는 많으나 참된 성도는 소수라는 것이라 주장했다에드워즈는 청함을 받은 자는 복음에 초청받은 자이며 택함을 적게 받았다는 것은 가견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섯째 반론은 마 13장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에드워즈는 가라지가 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무 조치를 쓰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곱 번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유다가 은혜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성찬을 제공하셨다에드워즈는 유다가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지만 주의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고 주장한다.

 

8~10번째 반론은 확실성과 가시성의 차이점을 말하였으나 에드워즈는 중요한 것은 양심적인 신앙고백이라 주장하고 열 번째 반론은 심사를 까다롭게 할 때 목회의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에드워즈는 설사 연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곤혹스럽더라도 쉽게 허입된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강팍함이 극복되는데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가치가 있는 대가라고 생각했다.

 

11~13, 20번째 성례의 자격요건들목적과 효과들에 대한 것이다에드워즈는 어떤 예배의무에는 얼마든지 참석할 수 있지만 성찬에는 허입될 수 없다설사 성찬이 회심을 증진시키는 경향이 있더라도 거기에 참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불신자가 구원받는 것이 우주의 지고한 가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14~19번째 반론은 신앙고백의 성격에 관련된 것으로 에드워즈는 위선자들을 교회에서 완전 몰아낼 수는 없다는데 동의했다그러나 어두움과 꼼꼼함 때문에 몇 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밖에 머무르게되는 것이 중생하지 않은 많은 자들을 교회 안으로 몰려들게 함으로써 교회 전체와 그 자들이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주장했다.

 

제 장 성찬 논쟁에 대한 현대적 평가

 

에드워즈는 성찬 참여 자격에 대한 잘못된 기준은 세상과 교회의 차별성을 제거함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그는 성찬 지원자가 구원 얻는 신앙’ 혹은 성화시키는 은혜의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앙고백과 삶에 있어 가시적 성도다움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에드워즈가 요구한 경건의 고백은 자신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는 약속자신과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원하는 온전한 헌신의 약속을 포함했다노샘프턴 교인들이 볼 때 비현실적이고 과도히 높은 기준이었다그것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청교도 1세대와 2세대들이 살던 17세기에나 존재하던 까마득한 옛날의 제도를 연상시키는 제안이었다.

 

진정한 회심과 거짓 회심의 구분은 에드워즈의 평생 과제였다그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교인들을 은혜와 체험과 구원의 확신 속으로 인도하는 일을 목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종교적 정서]에서 그는 단지 도덕적 삶을 사는 것과 참 은혜 받은 자의 삶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강조했다회심의 은혜와 상관없는 도덕적 삶은 인간 노력의 산물이요 성령의 특별한 역사의 결과가 아니므로 그것이 성도의 표시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었다.

 

18세기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인들이 직면했던 갈등은 지금도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그대로 남아있다대부분의 현대 개신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본다결과적으로 현대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는 변화의 기준이 너무 낮다문제는 회심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 할 때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 회심된 것으로 볼 것인가.

 

한국교회로서는 에드워즈의 기준이 과도히 높은 것임이 객관적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기준에 대해 안심해서는 안된다그것이 여러모로 낮아져 있기 때문이다세례 기준입교 기준직분수여 기준목사후보생 기준목사안수 기준 등이 일반적으로 너무 낮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이것은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타락으로 연결된다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에드워즈의 기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정신에 도전을 받아야 한다그리고 여러 면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회복해야 한다그래야 하나님의 영예교회의 명예 그리고 복음의 영광을 지킬 수 있다이것이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 사이의 논쟁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이다.

 

 

 

제 장 고별설교

 

1750년 7월 10일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교회에서 고별설교를 전했다수년간 교인들과의 격렬한 논쟁 끝에 23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떠나는 목사가 교인들에게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기회였다.

 

제목은 교인들이 자기 목사를 공적으로 거부한 후 노샘프턴 제일 교구에서 행해진 교별 설교라는 긴 것이었다본문은 고후 1:14로 에드워즈는 목사들과 그들의 교인들은 심판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만나야 한다는 교리를 제시했다.

 

어떤 식으로 만나는가?

마지막 날 목사와 그 교인들은 특별한 일을 가지고 분명하고 확실하며 무오한 빛 속에서 만나게 된다고 선포했다에드워즈는 최선을 다한 자신의 복음적 설교사역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 강퍅한 사람들이었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했다이것은 자신의 견해가 오류였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무엇을 위해 만나는가?

 

마지막 날 그러한 특별한 만남은 그들이 지상에 살고 있던 동안 그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상대방에게 어떤 식으로 대했던가를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 보고하기 위해 만난다고 그는 주장했다그는 정말 마지막 날 모든 것이 철저하게 규명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의 판단을 받기 위해

 

특별한 만남을 갖게 되는 또 하나의 목적은 그들이 세상에 있었을 때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란에 대해 그리스도의 판단을 받기 위해 선다고 주장한다신실한 목사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상급이 있을 것이며(12:3)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을 악하게 대한 사람들은 엄중한 벌을 받게 될 것(10:14-15)이라 선언했다.

 

에드워즈는 자신을 신실한 목사로 인식하고 있었다아마도 교인들은 설교자가 강단을 이용해서 쓴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그러나 에드워즈는 자신의 동기의 순수성과 성실성을 자신있게 회고했다.

 

적용

 

첫째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둘째다툼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셋째교리적 오류를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넷째기도를 더 많이 더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후임으로 오는 목사는 건전한 교리를 견지하는 인물이며 진지한 신앙의 인물일 것을 강조했다에드워즈 목회의 최대 강조점은 체험적 회심이었다그는 청교도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것이다.

 

 

 

 

 

 

 

 

 

 

 

 

 

 

 

 

 

 

 

 

 

 

 

 

 

 

 

 

 

 

 

 

 

놀라운 회심 이야기

(전집 7권 PP 137-273)

초판 서문(런던 1737)

아이작 와즈존 가이조목사

 

초대 기독교 이후 지금 이 책에 기록된 것만큼 놀라운 사건을 듣거나 읽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형식적이고 냉랭하며 부주의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자들로 하여금 모든 기독교적 은혜를 활력있게 발휘하게 하시고 우리의 거룩한 종교를 능력있게 실천하는 자들로 변화시키셨던 것이다.”

복음의 복된 성공 사례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혼을 다루시는 방법을 많이 배울 수 있다죄인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그분의 은총과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 말이다.” “이 복된 사건을 통해 그들의 영혼속에 신적인 생명을 불붙이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보게 된다.”

 

갑작스럽게 회심한 사람 대부분은 위협적인 재앙에 대해 느낀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 때 신앙적 관심을 대부분 잃어버린다그러나 이번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여전히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과거의 어리석은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신앙고백을 실천하고 있다그것은 이 현재의 은혜의 역사가 진짜라는 것을 확인해 준다.”

 

3판 서문(보스턴 1738)

조셉 슈얼토머스 프린스존 웹윌리엄 쿠퍼목사

이 이야기는 목사들이 지친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안식으로 인도하고 성령의 이런 역사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지도하고 격려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놀라운 회심 이야기 본문

 

초판(런던 1737)을 교정하고 제 3(보스턴 1738)을 보고 보충한 것이다.

 

<벤저민 콜먼 박사에게 쓴 편지>

노샘프턴은 약 82년 된 동네입니다. 200 가구 쯤으로 형성된 주민은 대부분 그 정도 규모의 인근 마을보다도 더 밀집해 살고 있습니다.

 

 

영적 각성이 시작됨

 

1733년 말경 청년들이 보통 때와는 아주 달리 고분고분하고 충고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1734년 4월 한 청년의 갑작스런 죽음과 이어서 결혼한 한 젊은 여성의 죽음 직전에 은혜체험을 하고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그 사건으로 사람들이 신앙에 관심을 더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12월 후반에 하나님의 영이 더 비상하게 임하셔서 우리 가운데 놀라운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시작했습니다한 사람씩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체험하기 시작하였습니다마을 전체에서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것 외의 다른 이야기는 관심 밖이었습니다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하늘나라를 얻는 것이어서 모두가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거의 모든 집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놀라운 증거들이 있었습니다모든 사람이 공중예배에 열심히 참석했고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그들은 수시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처음 마을 주변 사람들은 우리의 회심을 정신질환이라고 부르며 비웃고 조롱한 자도 많았습니다그러나 우리 마을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은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고 우리 위에 쏟아진 복된 소나기에 참여하여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그리하여 드디어 군내의 다른 여러 마을에도 이와 같은 분명한 역사가 가득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735년 3월에는 사우스 해들리 사람들이 같은 시기 서필드 서부에서도 다음에 그 부흥은 설덜랜드에 디어필드 일부에도 햇필드 남부 웨스트 스프링필도 롱 매도우엔필드에서도 아주 전반적인 각성이 일어났습니다웨스터필드의 불목사는 그 지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일주일 동안에 있었던 역사가 그 전 7년 동안 있었던 것보다 더 컸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은 군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파급되었지만 거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였습니다코네티컷 주의 많은 지역이 같은 은혜를 받았고 뉴잉글랜드 지역을 벗어났습니다이런 부흥은 아주 비범하고 전반적인 역사인 것 같습니다.

 

부흥은 모든 사람 즉 근신하는 자나 사악한 자들 높고 낮은 자들 현명하거나 우둔한 자 젊은이나 노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심지어는 네 살배기도 구원의 역사체험을 했습니다또 한가지는 사람들이 그처럼 갑작스럽고도 크게 변화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아주 짧은 시간 내에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습니다.

 

마을에서 성령의 절정은 이른 봄이었는데 이 무렵에는 일주일에 거의 30명이 회심되는 일이 대 여섯 주간 계속 되었습니다보통 때 같으면 모든 노력을 동원해도 1년간 일해야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사역이 단 하루 이틀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각성된 사람들의 반응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나면서부터 비참한 상태였다는 것과 자신들이 처해있는 영원한 멸망의 위험 그리고 신속히 멸망을 피해 더 나은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그들은 마치 심장이 화살에 정통으로 찔린 것처럼 양심이 갑작스럽게 찔리게 되었습니다전에도 구원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해이하고 둔한 구도의 자세를 깨닫고 하늘나라로 더욱 맹렬히 침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깨달음에 사로잡히게 되자 2가지 결과가 생겼습니다하나는 즉각 자신들의 죄악된 행실을 버리게 되었고 술집은 비게 되었습니다또 하나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교회 예배와 사적 모임에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과거에 술집에 있던 사람들이 목사관으로 몰려 들었습니다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을 경험한 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였지만 위로 소망으로 다른 이들보다 열 배나 적게 염려하게 되었고 이상하리만큼 자유로움을 누렸습니다이것은 이번 부흥이 과거 다른 부흥들에 비해 다른 점이었습니다.

 

각성이 처음 시작되면 사람들의 양심은 대개 자신들의 외적 악행이나 다른 죄된 행위에 집중됩니다많은 경우 하나님은 그들의 경험을 이용하셔서 자신들이 얼마나 천박할 정도로 텅 비어 있는지와 얼마나 총체적으로 부패했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그럴 때 그들은 수시로 더 엄격하게 생활하며 죄를 자백하고 많은 신앙적 의무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고 자기들이 범한 죄를 보상하고자 은근히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자신들이 실패했음을 발견하고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그들은 거듭 시도합니다때로 그들은 신앙감정은 하나님에 대한 반감으로 변합니다그들은 절망하며 자포자기 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애타게 묻습니다만일 그들이 자신의 힘과 의를 너무 의지하고 있다고 말해주면 그들은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선한 결과는 전혀 생기지 않고 모든 것이 캄캄해 보일 뿐입니다그래서 그들은 헤매면서 안식을 찾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마침내 그들은 힘이 다 빠지고 상한 마음이 되며 율법적으로 겸비해지게 됩니다그때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전적으로 무능하고 불충분한지를 확실히 깨닫게 하십니다그래서 그들은 참된 대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많은 경우 하나님은 간단히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그들로 하여금 허망한 모든 자기 신뢰를 빨리 극복하게 하시고 그들을 진토에까지 낮추셔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셨습니다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않고 아주 신속히 회심된 경우도 있습니다율법적인 확신 아래 있는 죄인들을 다룸에 있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방법에 메이시는 일이 결코 없어 보였습니다사람들이 고통 아래 있는 시간은 어떤 이는 불과 며칠밖에 안 걸렸고 어떤 이들은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며 각성과 격려 두려움과 소망이 적절히 혼합되어야 해이와 태만 그리고 결국에는 무관심을 낳는 두 극단인 자만심과 낙심 사이에서 중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들어야 했습니다.

 

율법적으로 겸비해지고 영적인 평강을 누린 어떤 이들의 영혼은 복음에 계시된 대로 특별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그 다음에는 수시로 자비하신 하나님 충족하신 구속자 또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즐거운 일인지에 대한 달콤한 위로가 즉각적으로 혹은 짧은 시간 내에 뒤따랐습니다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과 완전 충족하신 은혜를 깨닫게 되는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회심 이전에는 회심에 대한 개념이 아주 불안전했고 회심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그들이 인정하듯 회심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표현들과 성령의 은혜들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봄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심령의 가난하나님에 대한 신뢰하나님께 맡김 등그것은 날 때부터 소경인 자에게 색깔의 이름을 전달하는 개념과 같았습니다.

 

자기들 속에 일어난 그런 감정들이 참된 은혜의 결과인지 아닌지 일단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면 -- 그런 사람들이 올바른 지도를 받게 되어 소망을 갖게 되면 그들 마음에 있는 은혜로운 성향이 생명을 얻어 활기를 띄었습니다마치 따뜻한 봄볕에 씨앗을 움틔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회심에서 사람들은 성경 본문을 (자신들의 처지에 아주 적합한 것마음에 떠올리는 데하나님은 성경 본문들과 어울리는 그런 마음 상태와 묵상으로 그들을 인도하셔서 그 본문들을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그들이 성경만큼 즐거워한 책은 없습니다그들은 자기들이 묵상하고 있는 특별한 진리들에 마음이 고정되었습니다자신들의 새로운 발견에 너무 심취되고 분명했기 때문에 처음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과 대화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충만했습니다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부모와 세상 모든 것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그들이 수시로 언급한 것은 값없는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 길이 얼마나 탁월한 방법인지를 느끼고 자신들이 자기 의를 버리고 그것을 전혀 의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이 영적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동안 많은 사람이 식사도 잊어 버렸습니다그들 주위의 모든 사물이 아름답고 달콤하고 즐거워 보이게 되었습니다이 기쁨은 자신들이 진토까지 낮아져 자신을 거의 비웠을 때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전부가 되었을 때 발견되었으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육안으로 보인 어떤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이 마을 사람의 의견이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헛되고 쓸 데 없는 상상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그것들은 쉽게 고쳐졌습니다.

 

도처에서 많은 말이 나돈 한 가지는 노샘프턴 교인들이 퀘이커 교도들과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실상 퀘이커들은 이런 소식을 접하고 아주 고무되었습니다그리고는 여러 번 이곳을 찾아와서 어디 비빌 언덕이 없는가 하고 기웃거렸습니다그러나 전혀 씨가 먹혀들어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는 낙심해 더 이상 발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결론적 고찰

 

우리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의 전반부에서 절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사탄은 전에 없이 묶인 것 같았습니다. 5월 하순경부터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서 물러가시고 이후에는 사탄이 더 활발히 역사하며 무섭게 날뛰는 것 했습니다첫 번째 사례는 우울증으로 한 남자가 자기 목을 따서 자살하였습니다.

 

그 뒤 경건한 사람들이 이상한 충동을 느끼고 같은 시기 광신적 망상에 빠진 두 사람의 사례가 발생했습니다.이런 일이 있을 후 노샘프턴에서는 회심의 역사가 드물고 얼마 안 되어 하나님의 영은 아주 떠나시는 것 같았습니다그러나 이 부흥 때에 회심되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그때 일어난 변화가 지속되었습니다그리고 노샘프턴에서는 여전히 노소를 막론하고 신앙적인 많은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 두 명의 주목할 만한 회심 사례

 

아비가일 허친슨이라는 젊은 여성은 지적인 집안 출신이었습니다그는 오랫동안 병약했습니다그는 오빠가 중생의 은혜를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필요성에 말하는 것을 듣고 자기도 같은 복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겠다고 결심했습니다성경을 통독하려고 첫 장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그때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대항해서 죄를 범했다는 것 때문에 크게 공포에 떨었습니다그는 자신의 몽에 대해서는 그처럼 염려하여 자주 의사를 찾아 치료를 부탁하면서도 영혼에 대해서는 그처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하고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기도와 종교적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이방인들처럼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어 주실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그날 그는 자기를 그처럼 두렵게 한 성경에 대해 적개심이 가득한 듯했습니다다음날 아침 잠이 깨었을 때 그는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놀랐습니다그때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날 월요일 내내 그의 영혼은 달콤함을 계속 누렸습니다수요일 아침 그리스도의 영광과 충만하심을 영적으로 맛보고 즐기던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찼습니다그는 죄인들에게 경고하러 뛰쳐나가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습니다.

 

그가 동생에게 자기는 여러 날 밤낮 감당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황홀하게 맛보며 즐겼다고 말했습니다마치 아이와 아빠 사이처럼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것 같았습니다그리고 아이처럼 배우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드러냈습니다그는 종종 하나님 앞에 낮게 엎드리는 것이 얼마나 좋고 달콤한 일인지를 말했으며 낮을수록 더 좋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사는 것도 아주 좋고 죽는 것도 아주 좋다 병든 것도 좋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주 좋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아주 좋다.” 고 말했다그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자 아주 편해졌고 그때부터 고통속에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린 상태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연약한 몸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강한 은혜가 더 자유로이 역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례는 살 된 여자 아이가 11 살된 오빠의 말에 크게 감동되어 골방으로 가 기도하곤 했습니다. 3개월 뒤 아이는 기도를 끝낸 뒤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제가 지옥에 가게 될까봐 두려워요”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웃음 지은 얼굴로 엄마 하늘나라가 제게 왔어요” “이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어요전 하나님을 사랑해요” 엄마 아빠보다 동생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그리고 언니와 동생을 볼 때마다 그들이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 두려워 울기도 했습니다.

 

주일 성수를 엄격히 지켰고 교회 가는 것을 즐거워했는데 그것은 설교를 듣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아이는 하나님을 대단히 경외했고 그분에게 죄짓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때로는 성경구절로 크게 감동받고 기뻐했습니다특별히 계 3;20이 아이의 마음에 떠올라 들뜬 목소리로 다른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하나님과 함께 먹는단 말이야하며 크게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언니들에게 기도해야 하며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어요우리는 세상에 그저 잠시 살 것이기 때문에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이예요아이는 보기 드문 사랑의 영을 드러냈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가난한 가족에게 잃어버린 암소 대신 자기집 암소를 주기를 원했고 아니면 그 가족과 함께 살게해 주자고 졸랐습니다.

 

자기 목사도 많이 사랑했습니다제가 지난 가을 건강상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흥분된 음성으로 거듭 거듭 말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이 돌아오셨대에드워즈 목사님이 돌아오셨대” 아이는 은밀한 기도 생활을 아주 꾸준히 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교리문답을 외우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균형잡힌 부흥론

(전집 7권 PP 453-537)

 

제 부 부흥을 반대하거나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지 말고 찬성하고 추구하라

 

성경의 모범들과 경고들

 

하나님의 말씀에는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원수들을 대적해서 어떤 위대한 일을 하시고자 할 때그 일에 있어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화롭게 하기를 더디게 하며 소극적으로 드러누워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며 하나님을 크게 격노케 하는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구원대장이십니다(히 2:10). 그러므로 그분은 자기의 깃발을 꽂으실 때 자기 백성이 그분에게로 집결하지 않으면 당연히 크게 분개하실 것입니다혹은 그분이 원수들에 대항해 나팔을 불면서 영광스럽게 전진하실 때 자기 백성이 따르기를 거부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은 그러한 경우에 살아 있는 모든 영혼이 주의를 기울이고 그 부름에 아주 기쁘게 부응하며 조심스럽고 부지런히 그 부름에 순종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사 18:3,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거하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호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

 

이사야 26장 10-11은 그러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그분의 영광과 위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를 보여 줍니다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미국에서 동트게 될 천년왕국

 

성령의 이런 역사는 정말 비상하고 경이롭기 때문에 성경에서 자주 예언된 하나님의 저 영광스러운 역사의 여명이나 최소한 서막일 수 있습니다이 역사가 미국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많이 보이는 여러 요소가 있습니다.그것이 세상의 어느 아주 멀리 떨어진 변두리즉 항해를 하지 않고서는 다른 세상과 접촉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될 것임을 밝힌 성경 본문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60:9, “확실히 섬들이 나를 앙망할 것이며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내 아들들을 먼 곳으로부터 데려올 것이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은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새롭고 더 탁월하게 하시고자 세상에 어떤 영광스러운 일을 성취하실 때아직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아직 아무런 기초가 놓이지 않은 곳에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현저히 드러나 보이게 하시며그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것으로 보이게 하시며더 명백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상을 천국으로 바꾸려 하실 때 이미 잘 성장하고 있는 곳에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시작하십니다그리하여 어두움에서 빛이 비치게 하시며세상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물이 가득한 곳이 되게 하시며건조한 사막이 땅에 물을 내게 하십니다사 41:18-19,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니라”(사 43:20)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위해 어떤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실 때 더 낮은 끝에서 시작하는 것이 그분의 방식이었습니다그처럼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실 때 세상의 가장 멀리 떨어지고 가장 비천하며 가장 어리고 가장 연약한 부분즉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마지막으로 세워진 곳에서 시작하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흥을 반대하는 자들의 위험

 

저 영광스러운 추수기를 도래케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고 진흥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가 스가랴 14:16-19에 나와 있다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할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초막절을 저 영광스러운 영적 잔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하나님의 백성과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이사야 60:12에 나타나 있는 대로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스가랴 14:1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 속에 썩을 것이라”. 사사기 5: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러한 일에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즐겁고도 힘차게 그 일을 진흥시키기 위해 분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길입니다역대하 12장에 보면 다윗을 이스라엘 왕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일어난 다윗을 도왔던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특별하고 명예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까22,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두 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영적 다윗이 세상에 자기 왕국을 세우러 오실 때 그를 돕고자 그와 함께 나타날 하나님의 군대의 모형으로 의도된 것이었습니다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거룩한 산 시온 위에 왕으로 세우실 때 여호와를 도우러 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훨씬 더 많이 베푸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 힘써야 할 사람들

 

<공직자들의 의무>

시 2:6-7,10-12, “내가 내 왕을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노라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는 내가 너를 낳았노라 ---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며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새 왕이 지나가는 길가에서 모든 사람특별히 공직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공개적이고 가시적인 존경의 표시로 자신들의 충성을 표현하기를 원할 때그것을 거부하거나

소홀히 하는 자들은 즉각적으로 응징을 받아 길에서 망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반면그러한 일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 일을 진흥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관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영예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성경은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하나님의 장막을 세우는 때에 이스라엘 족장들이 나아와 족장답게 헌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고 기록합니다사사기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목사들의 의무>

하나님의 눈은 다른 누구보다도 복음의 사역자들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하나님은 그들이 일어나 이와 같은 일들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영화롭게 하며 부흥을 격려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부흥을 진작시키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헌신하도록 부름받은 바로 그 일이기 때문입니다목회자들은 특별히 그리스도 왕국의 장교들입니다그들에게 기대되는 것은다른 무엇보다도그들이 시대를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해야만 하는 일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복음 사역이라는 거룩한 일에 고용된 우리는 성읍의 파수꾼들입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온 문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그런데 시온의 적법한 왕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억압하는 원수에게서 그들을 구출하려 하실 때 만일 우리가 그분에게 문을 열어 드리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진노를 얼마나 크게 촉발하겠습니까?

 

신앙의 부흥이 시작될 때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굼뜨게 행동하며 퇴보적이며 무덤덤해 보이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럽겠습니까그리스도와 사도 시대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가장 크게 불쾌해하시고 가장 심하게 분노를 나타내셨던 대상들은 유대인 가운데 바로 복음의 사역자들이었습니다마태복음 23장에서 그리스도가 그러한 과오에 대해 그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보십시오.

 

목사들은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 데 있어서 자신보다 더 많이 사용하시는 다른 목사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부흥의 때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좋은 태도는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 방식과 수단을 존중하면서 온전하고도 기꺼운 마음으로 위대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의무>

공직자들과 목사들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영혼은 이제 일어나 부흥에 있어 하나님을 인정하고 부흥을 진흥하기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그래야만 하나님의 저주를 면할 수 있습니다모든 사람빈부귀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광야에서 장막을 세우는 데 일조했습니다이제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이 때 모든 사람은 자기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진흥시켜야 합니다하나님이 각자 처하게 하신 곳에서 자기에게 속한 일을 함으로써 말입니다모든 사람이 자기 힘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최대의 경성함과 주의와 부지런함을 발휘해야 합니다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협조하며 가장 즐겁게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은 부흥이 자신들의 육신적인 마음에 소중한 어떤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며 또 부흥이 자신들로 하여금 잘난 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들에게서 정욕의 대상들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거라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자신들의 더러운 돼지를 더 사랑했습니다자기 동네에 군대 귀신이 들어있는 돼지 떼를 가지는 것이 그것들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부흥의 흠집들을 계속 열거하고 지적함으로써 부흥 속에 있는 선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보다 결함을 지적하기에 급급하다면 우리는 주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대적해 싸우는 셈이 될 것입니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친구들이라면 부흥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날이어야 합니다만일 우리가 사물을 올바른 빛으로 바라본다면 허다한 죄인들이 회심한 부흥의 위대한 사건은 여기에 동반되었던 모든 경솔함과 일탈보다도 훨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집중시킬 것입니다우리의 마음은 이 사건의 영광에 삼킨 바 될 것입니다.

 

 

제 부 부흥 참여자들에게 부당한 비난을 한 것에 대한 답변

 

최근에 이 땅에 진행된 부흥은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부흥의 시작이 사람의 힘이나 재간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부흥의 진행이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에 의존한 것도 아닙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부흥을 진흥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며 부흥에 마음을 열중하며부흥을 위해 애쓸 것을 기대하십니다그러므로 이 위대한 부흥을 진흥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있어 우리는 최대의 주의와 성실함과 재간을 사용해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을 채택해야 합니다위대한 일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열 가지 비평에 대한 답변

 

⑴ 목사들이 청중의 지성보다 감정에 호소하여 그들의 감정을 최고도로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대부분 오해거나 감정의 본질과 원인을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되거나 그들이 지나치게 지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믿습니다모든 감정은 지성에 어떤 빛이 비췰 때나 어떤 실수와 망상 때문에 생깁니다모든 감정은 지성이 어떤 것을 이해했을 때 생기는 것이 분명합니다빛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열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그들은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설교를 더 필요로 합니다.

 

⑵ 목사들이 이미 큰 공포를 느끼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두려움을 설교한다는 것입니다목사들이 두렵게 하는 것이단지 그들에게 더 많은 빛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바로 알 수 있게 할 목적이라면 전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영은 죄인들의 양심에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양심을 크게 각성시키십니다우리가 죄인들을 빛으로 더 많이 인도하면 할수록그들이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고 그 빛이 그들에게 두려운 것인 한그 빛은 그들에게 점점 더 기쁜 것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각성하고 있는 자들에게 즉시 위로를 베풀지 않고 이처럼 진리를 선포한다고 해서 목사들을 비난하는 것은 마치 외과의사가 수술 칼을 들이대기 시작하여 환자가 이미 큰 고통을 느끼면서 움츠러들고 아파 소리 지를 때 그 의사가 멈추지 않고 칼을 더 깊이 들이밀어 환부의 뿌리까지 댄다고 해서 그를 잔인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보류해야만 하는 한 가지 경우가 있는데 우울증의 경우입니다.

 

⑶ 설교자들이 가련하고 순진한 어린이들을 지옥불 이야기와 영원한 저주에 대한 말로 놀라게 만든다는 점입니다비록 어린이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순진해 보일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들은 독사 새끼이며 독사보다 무한히 더 가증스러우며 아주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이 성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어린이들의 영혼의 문제에 있어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그들을 단순하고 철저하게 다룸으로써 복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그렇게 해서 나쁜 결과가 나오는 것을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⑷ 신앙 집회를 너무 자주 가지면서 신앙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사실 신앙의 외형적인 일들 가운데서 과도해질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우리가 세상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그러나 우리가 세상일에 조금도 차질이 없을 정도로만 신앙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훨씬 더 중요한 세상적인 일 때문에 다른 세상 일에 차질이 빗어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마찬가지로 만일 영원한 일들이 세상일들만큼이나 생생하고사실은 무한히 더 중요한 것이라면 영원한 부요와 불명의 영광을 찾기 위해 일시적인 관심사를 어느 정도 희생시키는 일을 왜 기꺼이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만 그처럼 인색해야 합니까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해 지상의 이익에 차질을 빚는 것이 마치 무슨 범죄나 되는 듯이 말입니다최근의 비상한 신앙 활동 때문에 사용한 시간보다 웃고 떠들며 술집에 출입하고 빈둥거리며 쓸데없이 남의 집을 찾아다니며 실없는 잡담을 하며 비생산적인 소일거리와 불필요한 기분 전환을 하는 등의 일들을 끊음으로써 절약하게 된 시간이 더 많습니다아마 술집과 사치스러운 의상을 끊음으로써 절약하게 된 돈이 신앙 집회를 위해 사용한 돈의 다섯 배는 될 것입니다.

 

⑸ 잦은 설교가 무익하고 해로운 것이라는 반대를 특히 많이 받습니다설교를 너무 자주 들으면 한 설교가 다른 설교를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설교를 통해 얻게 되는 주된 유익은설교를 들을 때 마음에 새겨지는 인상 때문이지 후에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일어나는 효과 때문이 아닙니다기억이 유익을 끼치는 것은 그것이 그 인상을 새삼스럽게 하고 강하게 할 때입니다설교할 때 신앙에 있어 더 중요한 것들을 자주 가르친다고 해서 그런 인상들이 잘려 나가지는 않습니다그것은 오히려 그 인상들을 강하게 하며 마음에 더욱 깊이 고정시킵니다우리의 경험이 그것을 확인해 줍니다.

 

⑹ 목사들이 고함이나 기절과 같은 육체적 현상을 너무 많이 일으킨다는 것입니다그들이 그러한 현상들을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증거요 설교가 성공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진리들을 설교한 결과로서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그런 현상에 대해 적절히 논증할 수 있고 합당한 동기가 있었다면 혹은 선한 다른 수단들을 사용한 결과로서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런 현상들에 대해 말하며 그런 현상들을 기뻐하며 그런 현상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제가 발견한 것은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성령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 성령의 아주 강한 역사가 임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눈에 띄는 큰 소동이 있게 마련입니다.

 

⑺ 어떤 목사들은 아주 특별한 외적 현상 때문에 감동을 체험한 사람들을 함께 모아 둔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많은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혼란을 조장한다고 생각합니다불가피하게 강한 신앙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그것을 보는 자들의 마음에 복된 영향을 갖다 주는 경향이 있으며 경험적으로 볼 때도 그것은 탁월하고 지속적인 효과를 갖다 줍니다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을 관찰할 기회를 얻어서 유익을 얻도록 신경 쓰고 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진작시키는 커다란 수단으로서 복을 받았습니다스가랴 9:15-16은 말일에 성령의 충만함을 비상한 방식으로 받아서 신체적인 체험을 하며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비상한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깃발이나 푯대로 제시하는 자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⑻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을 때 말을 너무 많이 하고 그것도 열렬하고 격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신적이고 영원한 일들의 위대함을 경이로움과 중요성을 역설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경고하고 초청하며 간청한다는 것입니다신앙적인 일들의 중요성과 죄인들이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아주 큰 깨달음은 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경고하고 싶은 거의 억제할 수 없는 성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예레미야 6:10-11과 부합됩니다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⑼ 집회에서 노래를 너무 많이 부른다는 것입니다그들이 부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비상한 정도로 체험하여 하나님 안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찬양을 많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많은 성경 본문이 시사하는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다가오는 영광스러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에는 말로나 노래로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풍성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⑽ 어린이들이 집회를 가지면서 자기들끼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어린이들도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성이 있습니다그리고 서로서로 사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들은 그 행하는 열매들에 있어 성령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일 그들이 성령에게서 받은 신앙심을 신앙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신앙적인 목적을 위해 서로 교제를 증진시키고 싶어한다면 누가 그것을 말릴 수 있겠습니까?하나님 보시기에 성인인 우리 안에는 기도할 때 아이들보다 천 배나 더 나쁜 결함이 있습니다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의 큰 차이가 없습니다이 부흥에서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놀라운 생각을 보여 주셨습니다하나님 보시기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어린 아이들은 다름 아닌 세상의 크고 학식 있는 자들입니다그들과 비교할 때 이 소자들은 어른이며 백 세나 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