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glish Bible ---------------------- The Lord 주 하나님
Deuteronomy 10:17-18 17For the LORD your God is God gods and Lord of lords, the great God, mighty and awesome, who shows no partiality and accepts no bribes. 18He defends the cause of the fatherless and the widow, and loves the alien, giving him food and clothing.
awesome a. 두려운, 무서운 partiality n. 불공평, 편파, 편애 bride n. 신부, 새색시 defend vt. 지키다, 방위하다, 변호하다 cause n,vt. 원인, 이유, 근거, ...의 원인이 되다 fatherless a. 아버지가 없는, 작자 미상의 widow n. 미망인, 과부 alien a. 외국의, 외국인의, 다른, 반대의
Romans 10:9-13 9That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i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10For it is with your heart that you believe and are justified, and it is with your mouth that you confess and are saved. 11As the Scripture says, "Any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12For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Jew and Gentile--the same Lord is Lord of all and richly blesses all who call on him, 13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confess vt,vi. 자백하다, (신앙을)고백(공언)하다 save vt. 구해내다, 건지다, 절약하다 shame n. 부끄럼, 수치, 불명예, 부끄럽게 하다 difference n. 다름, 차이점, 불화 Jew n. 유대인, 히브리인 Gentile n,a. 유대인 측에서 본 이방인(의), 이교도(의)
Colossians 2:6-7 6So then, just as you received Christ Jesus as Lord, continue to live in him, 7booted and built up in him, strengthened in the faith as you were taught, and overflowing with thankfulness.
just as I. ...와 꼭 마찬가지로 ~ buildup n. 형성, 발전, 선전 strengthen vt,vi. 강하게 하다, 강해지다
----------------------------------------------------------------- RELATED TEXTS Job 28 Psalm 8; 86; 110 Daniel 9:1-19 Philippians 2:5-11 -----------------------------------------------------------------
Deuteronomy 10:17-18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Romans 10:9-13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Colossians 2:6-7 6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55/366일차 = 379-385 개째 단어)
alien a. 외국의, 외국인의, 다른, 반대의 bride n. 신부 confess vt,vi. 자백하다, (신앙을)고백(공언)하다 defend vt. 지키다, 방위하다, 변호하다 partiality n. 불공평, 편파, 편애 strengthen vt,vi. 강하게 하다하다, 강해지다 widow n. 미망인, 과부
예수를 주로 믿는다는 말의 의미 ----------------------------------------- 롬 10:9-13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신 것을 믿습니다'고 하는 소리를 내게 하고, 그렇게 한 사실에 근거하여 "이제 당신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자녀로 영접해 주셨습니다!"고 하면서 그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해주게 되면, 이는 참으로 복음의 원리를 역행하는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1. 믿고 시인한다는 개념에 대한 온전한 이해
로마서 10:9-13은 기독교에 있어서 '이신칭의로 말미암는 구원의 원리'를 제시하는 중요한 구절들 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절). 사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해 주는 그 방식에 있어서 이신칭의를 구원의 원리로 삼는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선물로 받고, 감사함으로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교리가 특별히 부각된 것은, 루터를 비롯한 중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그릇된 구원관인 행위를 통하여 얻는 구원관을 타파하기 위하여 그 대안으로 제시했던 데서 되어졌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돈을 주고 면죄부와 같은 것을 사거나, 고행이나 선행을 쌓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그릇 되이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고백하는 자는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을 받으며, 또한 이런 방식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기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진리는 사람들에게 잘못 오해를 받고, 그릇 되이 이해되어져 나온 대표적인 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믿음과 시인의 의미를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본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려 함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복음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믿음과 시인은 그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는 것이며, 이때 예수님은 구원의 주(主)가 되신다는 사실을 또한 그 내용으로 삼게 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13절). 이 사실은 복음의 핵심이요, 진수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이단이요, 결코 함께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신칭의적 구원의 원리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직설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다른 그릇된 상황을 바로잡는 일과 관련하여 그렇게 합니다. 이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바울은 이미 오신 구원의 주를 몰라보는 가운데 그를 찾기 위하여 다른 데로 눈을 돌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헛된 수고를 겨냥하여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1-4절). 유대인들이 찾고 있는 그 구원의 주는 이미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미 구원의 주(主)가 되셨습니다(9절). 따라서 구원의 주를 찾는답시고 하늘로 올라가려거나 혹은 땅 아래로 내려가려는 등의 힘든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6-7절). 이제는 다만 이미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신 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지금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 구세주이신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8절). 이것만이 구약성경에서 제시되어져 나온 유일한 구원의 방식입니다(11-12절). 그러니까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의 헛된 수고를 벗어나, 이미 오신 구원의 주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믿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 대한 해석의 초점은, "지금 입을 열어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오신 예수님! 그가 바로 그 구원의 주이시니, 이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데 있게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함이 믿음의 의미
사안의 중요한 성격상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쌀은 밥을 짓는 재료이다. 쌀로 밥을 지으면 양식이 된다"고 했을 때, 이는 분명 쌀이 양식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경우 계속해서 얼마만큼의 물을 쌀에 부어야 하고, 열은 어느 정도로 가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쌀, 밀가루, 콩 등등의 여러 곡식들이 널려 있는 상태에서, 더욱이 쌀이 아닌 밀가루로 밥을 지으려는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강조점은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이 경우 쌀은 밥을 짓는 양식이요, 재료라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쌀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밥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이때에는 얼마만큼의 물을 부어야 하고, 열은 어느 정도로 가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아예 취급조차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밥의 재료는 밀가루가 아닌 쌀이다'는 전제를 받아들인 사람일 때 가증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후자의 경우가 여기 바울이 말하는 바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믿고, 시인한다'는 말을 사용한 의미를 통상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듯이 하여, 예수님에 대해 전도를 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어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습니다"고 하는 소리를 발음해 내는 차원에서 이해하면 그야말로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본문을 두루뭉실하게 취급하면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지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믿음과 시인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신 것을 믿습니다'고 하는 소리를 내게 하고, 그렇게 한 사실에 근거하여 "이제 당신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자녀로 영접해 주셨습니다!"고 하면서 그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해주게 되면, 이는 참으로 복음의 원리를 역행하는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앞서 제시한 믿음의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믿는다'는 말이 담고 있는 신학적인 사상은 성경의 용례를 따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사도 요한은 믿음의 의미를 한 마디로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본문에 의하면 '그 이름을 믿는 자'는 '영접하는 자'와 동일한 의미인 사실이 드러나고, 이 후자의 사실은 성경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믿음에 대한 신학적인 정의를 가장 효과적으로 기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영접하는 것이고, 이때 영접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 곧 행동으로 나타나는 전인격적인 반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전인격적인 반응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는 어떤 선교단체들의 경우처럼,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 사역에 대한 일련의 지식(知識)을 들려준 다음,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내가 이 사실을 믿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라고 입술로 표현하게 하는 식의 전도방식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이런 식으로 전하게 되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오늘날 교회를 그렇게도 타락시키고 있는 '신앙주의'라는 것을 형성하는 일에 잘못 기여하게 됩니다. 신앙주의란 일종의 '관념신앙'과도 같은 것으로 기독교 초기에 발생하였던 영지주의적인 신앙형태를 말합니다.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는 여러 가지 특징으로 나타났던 까닭에 이를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데, 지성과 정신적 계몽을 믿음이나 행위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 한 가지만큼은 분명한 특징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구원을 생각할 때 그것을 인식하는 지식을 절대시했고, 이로 말미암아 도덕적 행위의 중요성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를 위협했던 이런 그릇된 신앙 형태가 현대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 생기는 현상이 바로 '신앙주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주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을 전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즉흥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결단을 촉구하게 되는데, 이런 심리적인 현상을 '믿음'내지는 '영접'의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일부 선교회들은 주로 대학교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으면서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자기네가 세운 나름대로의 규칙에 따라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시킨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그 사람에게 업적을 수여하고, 그에 따른 일련의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이런 운동을 크게 전개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릇된 믿음관으로 말미암아 뒤따르는 부작용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앙주의가 득세하게 되는 현상인 것이요, 이는 다름 아닌 복음의 변질인 것입니다.
3. 교회만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실을 확증해 줄 수 있음
복음을 한쪽 면만 보고 강조하거나 그 충분한 의미에 이르지 못한 가운데 피상적으로 증거하게 되면, 그 동기의 순수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복음의 변질이라고 하는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됩니다. 복음 진리를 단 몇 분간의 그 짧은 시간에 두루뭉실하게 알려주고 나서는 감정을 부추겨서 결단을 유발시키고, 그 자리에서 소위 기도란 것을 즉흥적으로 해주면서, 그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허락하셨다고 선언해주는 이런 태도는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 로마서 본문의 의미를 충분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데서 이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실을 확인하고 추인해줄 수 있는 기관으로 오직 하나뿐인 교회(敎會)를 세우셨습니다. 사람이 복음을 영접한 사실을 공증해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진 기관은 오직 교회뿐입니다.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비로소 하늘의 재가(裁可)가 있는 구원의 확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매고 푸는 권세는 오직 교회만의 것입니다(마 16:19). 그러므로 교회적인 차원에서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실을 그 사람에게 확인해줄 수 있는 것이고, 또 실제로 의미도 있는 것이요, 이런 권세가 어느 한 개인이나 다른 기관을 통해서 행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일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 열심을 내는 것이 지나치고 한 가지 관점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른 측면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어떤 사설 선교회들의 경우를 보면, 하나를 세우되 다른 하나를 무너뜨리는 잘못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묵은 도둑 몰아내고 새 도둑 들어 앉히는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선교회들이 개인적으로나 혹은 교회가 아닌 선교회의 이름으로 구도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확증시켜 주는 바,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참으로 분수에 넘는 일이요, 오만방자한 태도인 것이고, 사실상 복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작태(作態)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방식의 복음 전도로는 교회가 세워질 수 없고 설혹 피상적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실질에 있어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삶의 능력에 있어서 - 이는 다름 아닌 새 사람의 능력을 발휘해 나가는 측면을 가리키는 것인데 - 실질을 발휘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세상 앞에 복음을 소유한 자다운 자세를 보여줄 수도 없게 되며, 도리어 많은 비난받을 만한 일만 저지르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도매금으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데에는 이와 같은 현상에서 초래된 부작용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성도라면, 복음을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 이런 부분에까지 세심하게 마음을 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단계까지 나갈 때라야 믿음이 있음
본문에 대한 첫번째 의미를 이렇게 바르게 이해한 다음으로, 이제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시인'의 의미는 신구약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복음의 큰 원리와 원칙 안에서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주(主)라는 표현을 쓴 것을 크게 주목해야 합니다. 이 칭호는 그냥 형식적인 형용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 위에 주로 세우셨습니다(12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것을 포함하며, 일평생 그분의 종이 되어 주인께 복종하는 삶을 전개할 결심을 동시적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순전히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한 심리적인 수법으로 듣기에 달콤한 말만을 들려주는 것은 합당한 복음 전파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주(主)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은 그의 주권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제사장의 사역만을 수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게 자기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으로부터 해방까지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해내시기 위하여 정사와 권세를 결박하셨고, 사단을 결박하는 더 강한 자의 능력으로 세상에 들어오셨으며, 구속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되는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온 우주의 통치자로 등극하셨습니다(엡 1:20-22 빌 2:9-11 벧전 3:22).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로 불리우시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선포하는 일이요, 복음을 믿는 것은 자신을 예수님의 주권 아래 복종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위에 왕노릇하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된 교회가 세상의 재난, 위협, 유혹 박해 등등에 의하여 사단에게 빼앗긴 바가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 백성에게 신령한 구속적 통치력을 행사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원들의 구원이 안전한 것은, 바로 이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친히 자기 백성을 통치하심으로 지휘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통치권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주가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시인한다고 하거나, 또는 영접한다고 할 때, 이것의 의미는 한층 심오해지게 됩니다. 바울은 바로 이 심오한 의미를 배경에 깔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며(9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13절),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그가 다른 서신서들에서 말한 믿음의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명확하게 이와 같은 대답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순종'을 자원하고 결심하는 심정이 있는 때가 아니고는, 거기에는 복음이 바르게 전파된 사실이 없는 것이고, '구원론적인 믿음과 시인'은 부재(不在)합니다. 이런 이해와 각오 하에서 평소부터 종(從)이 되어 만사를 주인(主人)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나온 실질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는 비로소 고린도전서 12:3에서 말하듯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이지, 그렇지 않고 삶의 실제적인 뒷받침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목소리를 내어 소리를 발음해 내는 식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이십니다"라고 한 이것을 가리켜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은 구원받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실질을 누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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