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glish Bible -------------------------------------------------- The Names of God: The Lord 주이신 하나님
Deuteronomy 32:1-4 1Listen, O heavens, and I will speak; hear, O earth, the words of my mouth. 2Let my teaching fall like rain and my words descend like dew, like showers on new grass, like abundant rain on tender plants. 3I will proclaim the name of the LORD. Oh, praise the greatness of our God! 4He is the Rock, his works are perfect, and all his ways are just. A faithful God who does no wrong, upright and just is he.
proclaim vt. 선언하다, 공표하다 descend vi 내리다(맺히는) dew n. 이슬 abundant a. 풍족한, (단비:abundant rain) tender a. 연한 plant n. 풀, 식물
1 Chronicles 16:8-13 8Give thanks to the LORD, call on his name; make known among the nations what he has done. 9Sing to him, sing praise to him; tell of all his wonderful acts. 10Glory in his holy name; let the hearts of those who seek the LORD rejoice. 11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12Remember the wonders he has done, his miracles, and the judgments he pronounced, 13O descendants of Israel his servants, O son of Jacob, his chosen ones.
strength n. 능력, 힘 miracles n. 이적, 기적 pronounce vi. 선언하다(he pronounced=그의 판단) descendants n. 자손, 후예
Psalm 9:9-10 9The LORD is a refuge for the oppressed, a stronghold in times of trouble. 10Those who know your name will trust in you, for you, LORD, have never forsaken those who seek you.
refuge n. 피난, 도피, 보호, 피난처 oppress vt. 압제하다, 압박하다 stronghold n. 요새, 본거지 forsaken v. 버림받은, 고독한(forsake의 과거분사)
----------------------------------------------------------------- RELATED TEXTS Exodus 15:1-3 Isaiah 42:5-9 Colossians 3:16-17 Hebrews 3:15 -----------------------------------------------------------------
Deuteronomy 32:1-4 1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3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4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1 Chronicles 16:8-13 8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9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10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11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12그 종 이스라엘의 후손 13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Psalm 9:9-10 9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53/366일차 = 365-371 개째 단어)
descend vi 내리다(맺히는) dew n. 이슬 plant n. 풀, 식물 pronounce vi. 선언하다(he pronounced=그의 판단) refuge n. 피난, 도피, 보호, 피난처 stronghold n. 요새, 본거지 forsaken v. 버림받은, 고독한(forsake의 과거분사)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 ----------------------------------- 시 9:9-10
여호와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아는 이 '앎'은 신앙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요, 누리는 내용이며, 더더욱 증가시켜 나가야 할 목표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사람, 곧 신관이 여기에 이르는 사람은 여호와를 끝까지 신앙하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을 받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지식에 결함이 있는 데서 초래되는 것입니다. 부족(不足)의 문제가 아니고 결함(缺陷)의 문제입니다.
1. 여호와를 아는 신앙의 정도와 깊이
여기 시편 9편에서 풍겨지는 전체적인 느낌은,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신 데 대한 감사의 노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1-3절). 하나님은 온 열방을 다스리는 전능자이셨고(5,7,8,17,19,20절), 이 전능한 능력으로 자기 백성의 보호자가 되심으로 당시 궁핍하고 가난한 자의 심정으로 나아온 다윗을 능히 구원해 주셨습니다(18절). 다윗은 어떤 어려운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심정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이 열악하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을 앙망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 (13-14절),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사랑하심으로 응답하셔서 구원의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사를 누렸습니다(9-10절 히 11:6). 다윗은 이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그는 숱한 구원의 은총을 맛봄으로 여호와께서는 한번 택하신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는 분이신 사실을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를 진정으로 아는 자였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다윗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이런 분으로 다윗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자라나온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태어났고, 견인하시는 능력 안에서 자라나왔으며, 골리앗을 쳐죽인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됨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앞장서서 주관해 나가기야 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세워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역사의 무대 위에서 다윗은 한순간도 퇴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다윗의 신관(神觀)은, 자기 속에서 한번 시작하신 착한 일을 끝까지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셨습니다(빌 1:6).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한번 택하신 한에는 끝까지 구원하는 분이십니다(시 138:8). 우리의 구원이 영원토록 안전한 것은, 하나님을 부여잡기 위해서 심리적으로 쥐어짜내고 발휘해내는 우리의 자의적인 신앙 때문인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영단번의 구원이 주어진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영단번의 성격으로 베풀어진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대 위에 올려져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 언약의 주권적 집행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끝까지 구원하시는 것이요,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 부단히 개입하셔서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집행되어져 나온 여호와의 주권적 구속사(救贖史)는, 여기 다윗에게 성립되어 있던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근거와 내용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이렇게 이해했고, 신앙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여호와답게 아는 성도였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10절상).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여호와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구세주(救世主)이신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이렇게 아는 자일 때에, 그 앎을 신앙으로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할 때에 비로소 여호와를 의지하는 인생을 전개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비로소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주를 의지하오리니......"(10절중)
2.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의 깊은 의미
여호와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아는 이 '앎'은 신앙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요, 누리는 내용이며, 더더욱 증가시켜 나가야 할 목표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사람, 곧 신관이 여기에 이르는 사람은 여호와를 끝까지 신앙하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을 받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지식에 결함이 있는 데서 초래되는 것입니다. 부족(不足)의 문제가 아니고 결함(缺陷)의 문제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온전히 알았기 때문에 그분을 끝까지 신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10절). 여기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자'라고 표현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시편에서 사용된 '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그 본래적인 의미가 매우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용한 단어의 어근은 '야다( )'입니다. 우리가 통상 쓰고 있는 '안다'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안다'고 하는 단어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삼중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⑴ 파악과 분별로서의 지적인 요소 첫째로,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인 의식하다(to become aware of), 구별하다(to distinguish), 인지하다(to identify) 등의 뜻을 가집니다. 즉 안다는 것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지식, 곧 앎은 각성, 기억, 통찰력, 이해력 등과 같은 인간의 인식 능력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 족장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창 44:27)라고 했습니다. 요셉도 자기를 방문한 자들이 스파이인지 아닌지를 알고자 책략을 세웠는데,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창 42:23 출 33:16).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아시는 것과 관련하여 "그 우고를 안다"(출 3:7)고 말씀하셨습니다.
⑵ 경험과 체험으로서의 동적인 요소 둘째, 이 지식은 경험과 관계됩니다. 가령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한 단계 나아가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곧 '직접적인 접촉'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특성 내지는 개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즉 감정적이며 체험적인 차원에까지 확대됩니다. 이는 '안다'는 말이 '동침'의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어서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창 4:1)라고 번역될 수 있었던 사실을 보건대 충분히 짐작되어집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를 '알매' 가인을 낳았다는 말인데, 이는 아담과 하와의 접촉과 교통과 애정의 모든 관계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8절에서 "남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이라고 번역된 것도 원어상으로는 '안다'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민 31:35). 그래서 이 단어는 또한 기술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출 36:1). 이 단어는 이런 의미에서 '특별한 선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견책하는 말씀 중에,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알았다'고 하는 말은 특별히 그들을 '사랑하여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열방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특별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성애적 사랑으로 징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안다'는 말은 신학적인 용어로 '선택'을 의미합니다(호 13:5).
⑶ 행동과 참여로서의 의지적인 요소 셋째, 이 단어는 의지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은 여호야김에 대한 예레미야의 고소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안다'는 말이 행동과 연결되고 있습니다(렘 22:16).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을 때,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아셨더라 - 권념하셨더라 -(출 2:25)"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권념하셨다'는 말의 히브리어 원문은 '야다'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 속으로 개입하신 역동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시편 1편 6절에도 보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아시나 - 인정하시나 -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도 '안다'는 말은 정보로서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걸어가는 인생 길에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그를 보호하시며 돌보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구속적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행동과 연결되는 의지적 작용을 말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기 시작할 때, 그 동기는 애굽 땅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새로운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요셉을 알지 못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애굽의 왕들이 그들의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왕의 자격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 새 왕은 요셉을 알아도 너무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이스라엘을 학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알지 못한다는 말은 감정적으로 미워하고 행동적으로 멸시하며 학대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3. 여호와를 아는 일은 신앙의 동기와 내용과 목표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안다' 혹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지적 인식을 뛰어넘어 의지적이요 행동적인 반응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제사장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고, 나면서부터 여호와를 섬겨야 하는 환경에 처해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적된 것은 정보로서의 지적 인식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과 헌신의 마음과 그 행실이었던 것입니다. 흡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를 그릇 되이 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훗날 호세아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하여 다시 한번 그 의미가 강조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로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2:8 4:1,6,14 5:4).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1,6). 여기서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할 때에도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인 '야다'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호세아가 말한 지식 또한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헌신을 드리는 사랑 등등의 지정의적이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선포합니다(6:3). 하나님께서는 "번제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6:6). 물론 이 두 경우에도 사용된 동사는 '야다'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에 이는 곧 하나님의 구속사를 체험한 것을 가리키고, 이 사실에 입각하여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삶을 전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속사와 일생 동안에 걸쳐 접촉해 있었음으로 인하여 이같은 신앙의 자리를 유지해 나왔습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속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 일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능동적으로 건설해 나가는 구속사의 주체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의 삶은 그 성격과 방향 혹은 내용과 목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한 영역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의미이고, 하나님을 구원론적으로 아는 자의 신앙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도는 일체의 불법을 저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에다가 인생의 최고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앙은 신학적인 정보와 지식을 그 머리 속에 채우기만 하는 정도의 신앙 인격으로부터는 발견되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이런 상태만으로는 그야말로 학문적 작업으로서의 신학(神學)일 뿐이지, 구원을 누리는 신앙(信仰)인 것은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사람은 구원받은 실제적인 신앙이 없이도 얼마든지 신학을 능통하게 수행할 수 있으며, 심지어 장로, 집사, 목사 등의 직분자가 되어 교회를 주도적으로 인도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신학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를 행하는 목사들이 쉽게 범하는 무서운 죄악은, 그 복음에 대한 믿음이 자기에게는 없다는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이 사실은, 그 설교에 대하여 스스로의 기쁨이 없고, 긴급성이 없으며, 열정이 없는 것을 통하여 이미 자기의 양심에 드러납니다. 이런 식의 기독교적인 종교 심리에 속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는 정도의 믿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건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으며, 구원과 상관없는 하나의 종교 현상에 불과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가리켜 귀신들도 믿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 2:19).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수준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접촉해 있는 신앙인 것이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구속사를 하나님과 함께 짊어지고 나아가는 역동적인 신앙을 가리킵니다(고전 3:9). 따라서 이런 신앙은 성도의 삶을 일생 동안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현해 나가는 자가 되게 합니다. 성도는 이 자리에 견고하게 서서 나아가고 있는 실질을 평소부터 자연스럽게 영위하고 있는 까닭에, 설혹 예기치 못한 재난과 위협을 만나게 될 때에라도,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역사하는 믿음'이 있는 '의인의 기도'의 한 양상인 것이요(약 5:16), 하나님이 주실 후한 지혜를 의심치 않고 간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10절하 약 1:5-8). 오늘날 신약 교회 성도들이 서 있는 신앙의 자리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소의 삶 속에서 늘 하나님의 뜻을 알아 나가려 하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하는 삶의 실질에 성립되어 있어야 하고, 이때에도 이것은 본능과도 같이 우리에게 작용함으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역시 여기 시편 9편에서 다윗이 주를 의지하고 그 앞에 나아가 자신의 곤고한 심정을 아뢰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했던 바로 그 신앙과 동질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과 함께 하는 보편의 교회원으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사를 완성하신 가운데,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원으로 삼으사 이 시대를 살아가게 하신 구원의 목적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지금 당신에게 이런 구속사의 안목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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