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스크랩] 장수민 목사 구속사 성경연구- 사람으로서의 가치

하나님아들 2018. 9. 28. 23:14

The English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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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s of God; The Creator
창조자이신 하나님

 

 

Ecclesiastes 12:1-2, 13-14      1Remember your Creator in the days of your youth, before the days of trouble come and the years approach when you will say, "I find no pleasure(have no delight) in them" 2before the sun and the light and the moon and the stars grow dark(are darkned), and the clouds return after the rain;......13Now all has been heard; here is the conclusion of the matter: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is is the whole duty of man. 14For God will bring every deed into judgment, including every hidden thing, whether it is good or evil.

ecclesiastes n. 전도서 *
trouble  n. 걱정(거리) ,고생, 어려움, 귀찮음
approach  vt. 이르다, 접근하다, 접근시키다
conclusion n. 결국(結局), 결말, 종결, 결론
fear  n,vt,vi. 두려움, 공포, 걱정, 경외, 무서워하다
commandment n. 명령(命令), 지령, 계명
duty  n. 본분(本分)의무, 책임, 직무
deed  n. 행위(行爲), 행동, 실행
judgment  n. 심판(審判), 재판, 판결, 천벌
including  prep. ......을 포함하여, 함께 넣어서


Isaiah 40:27-31      27Why do you say, O Jacob, and complain(assert), O Israel, "My way is hidden from the LORD; my cause is disregarded by my God"? 28Do you not know? Have you not heard? The LORD is the everlasting God, the Creator of the ends of the earth. He will not grow tired or weary, and his understanding no one can fathom. 29He gives strength to the weary and increases the power of the weak. 30Even youths grow tired and weary, and young men stumble and fall; 31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wait for∼)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not get tired), 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not become weary).

cause  n,vt. 원인, 근거, 정당한(충분한) 이유, 주의, 주장, ...의 원인이 되다
complain  vi,n. 불평하다, 투덜거리다, 불만을 털어놓다, 푸념하다, 한탄하다
disregard  n. 무시, 경시, 무시하다 ,경시하다
faint  a,vt,n. 희미한, 가냘픈, 연약한, 활기없는
fathom  n,vt. 재다, 헤아리다, 추측하다
increases  vi,n. (힘을)더하다, 증대, 증가
renew  vi,vt. 일신하다, 갱신하다, (사람을 정신적으로)갱생시키다, (힘, 젊음을)되찾다, 회복하다, 부활(부흥,재흥)하다, (토지 임대 계약.어음 기한 등을)갱신하다, 새로워지다
soar  vi. 높이 올라가다, (희망등등이)치솟다
stumble  vi. 넘어지다, 헛딛어 곱드러지다(at,over)
weary  a.  곤비(困憊)한, 피곤한, 기진맥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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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 TEXTS
Genesis 1, 14:18-24  Ecclesiastes 12:3-7
 Revelation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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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clesiastes 12:1-2, 13-14   1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2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3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Isaiah 40:27-31   27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57/366일차 = 393-399 개째 단어)


approach  vt. 이르다, 접근하다, 접근시키다
complain  vi,n. 불평하다, 투덜거리다, 불만을 털어놓다, 푸념하다, 한탄하다
duty  n. 본분(本分)의무, 책임, 직무
ecclesiastes n. 전도서 *
faint  a,vt,n. 희미한, 가냘픈, 연약한, 활기없는
soar  vi. 높이 올라가다, (희망등등이)치솟다
stumble  vi. 넘어지다, 헛딛어 곱드러지다(at,over)

 

사람으로서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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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13-14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아는 지식만이 그분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 앎은 단순한 정보의 습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는 것으로서의 교제(交際)의 과정을 거치면서 확신에 이르는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고백이 실제적인 삶으로 구현되게 되었습니다.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대답을 시작으로 총 107문에 이르는 가르침을 전개해 나갑니다. 먼저 묻기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한 다음에, 이에 대하여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소요리 문답의 첫번째 질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시작되며, 그 대답의 진리성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대답 중의 정답이 됩니다. 아마 이런 의미에서 죤 머레이 교수는 소요리 문답을 가리켜 "세상에 존재하는 문서들 가운데 가장 최고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내용"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로 그 제시되는 질문과 대답이 간단 명료하면서도 핵심적입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대단히 함축적이어서 깊은 숙고와 사색이 뒤따르지 아니하면 충분한 의미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본 질문의 핵심은 '성경적 인간관'의 바른 정립과 이해에 있습니다. 구원 받은 인생으로 하여금 그 삶의 목표와 방향 그리고 내용을 알게 해주려는 데 있습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를 결핍하게 되면 제아무리 많고 좋은 것을 소유하고 누린다 할지라도, 사실상 아무 것도 얻지 못한거이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결과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일찍기 세상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보았고, 누려볼 수 있는 것 또 뭐든지 누려보았던 사람으로 솔로몬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라고 함으로서 그의 전도서를 시작하였는데, 이제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여기서 본분(本分)이라고 사용된 단어는 주목을 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를 영어역에서 가장 최근의 것인 새 국제 번역(NIV)은 의무(duty)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단어를 순수한 우리말로 풀어 설명하면 '사람됨의 본질' 혹은 '사람됨의 가치'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전도서 기자의 말인즉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그래서 그분께 감심으로 순종하는 자'가 될 때에, 비로소 사람으로서의 그 온전한 가치를 나타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솔로몬인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이와 같은 고백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윗의 영화를 계승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야말로 인간이 누려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사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2. 인생의 가치 두 가지

   전도서 12:13-14에 입각한 소요리문답 제 일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하는 인생
   첫번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이 본분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인간은 창조된 존재인고로 창조주께 의존하는 한에 있어서 비로소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그 생명의 본래적 성격을 온전히 누려서 그야말로 영원무궁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타락과 상관 없는 상태에 놓였던 최초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죄가 들어옴과 동시에 인간은 무궁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축복을 상실하고, 저주로 떨어진 생명으로서의 무궁한 고통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곧 죽음과 동시에 바로 들어가게 될 영원한 형벌에로의 첫 출발을 보증하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죽음의 필연성을 들어, 곧 이어지게 될 심판의 당연성에 대한 증거로 제시합니다(히 9:27).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저주와 사망이 더 이상 그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죄의 왕노릇하는 권세보다 더 강한 자의 권세로서 저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롬5:12-21). 더 강한 자이신 주께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이 결과에 의거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아 새 생명 가운데서 거하게 되었습니다(롬 6:3-5).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새 생명의 특징은 본래 인간이 처음에 타락하기 전에 누리는 삶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태초에 타락이 들어오기 전에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아담과 하와의 삶의 양식이 어떠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인 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중요한 의무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 소요리문답 제 1문이 요구하는 대답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교회를 향하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가르치며, 또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들 거듭난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창조의 목적이 회복된 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새 창조물(a new creature)'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불리웁니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는 이 중요한 원리를 신앙으로 고백해 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특별히 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일차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예배 속에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이 예배가 보존되고 계속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터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예배를 그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물론 이 예배는 단순히 주일날 오전 11시에 모여서 드리게 되는 한 시간의 의식 그 자체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일날 드려지는 예배는 한 주간의 삶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일주일간의 삶이 뒷받침된 것으로서의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⑵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 함
   두번째로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사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령 어떤 사람들과도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그 무엇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현세를 벗어나 속히 내세에 들어가기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부족한 사람들의 말처럼 그곳에 가면 아무 일을 안해도 먹을 것이 뚝 뚝 떨어지는 그런 풍족한 곳이기 때문에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나라에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이신 그 주님을 뵈옵게 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동기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동기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합니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모든 기독교적인 관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됨에 있어서 아무 것도 지불한 대가가 없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의 가치가 그야말로 사상을 초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세상에 들어오신 가운데 그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자기를 대속물로 내어주려 함에 있다"(막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의 동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 그분 자신을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물질적은 축복을 하시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때 그러한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을 제쳐놓고 축복 그 자체만을 즐거워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자세입니다. 우리가 쉽게 말하듯이 자식이 아버지를 즐거워하지 않고, 아버지께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재산에 집착한다면, 이 얼마나 불쾌하고 가당치 않은 태도이겠습니까?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때로는 일부 부흥사들이 구약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복음을 기복주의로 잘못 전파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실 구약의 성도들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축복 때문에가 아니라, 그분과의 교제 그 자체를 즐거워했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고백하기를, "하늘에서는 주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시 73:25)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자로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시인들의 이와 같은 고백은 진공 상태에서 그냥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시인들의 고백은 자기들의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자기에게 어떠한 분이 되시는가를 아는 지식을 가졌던 데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아는 지식만이 그분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 앎은 단순한 정보의 습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는 것으로서의 교제(交際)의 과정을 거치면서 확신에 이르는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고백이 실제적인 삶으로 구현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3. 섬김과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통상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은 자주 하지만, 그렇게 자주 말하는 만큼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의 분량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생각함에 있어서 기껏해야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현대 기독교가 기복종교로 변질되어진 시대 속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조건으로, 무슨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는 옳지 못한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자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즐거워하는 자세인 것이 아니라 그분을 이용하는 못된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만일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는 심리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면, 이 사람은 결코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복된 영광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섬김과 사랑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 절대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로 말미암습니다(요 3:16).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직무에 기꺼이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실과 그 정도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결정적이고도 충만한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사실을 확증하는 의미를 가집니다(롬 5:8).
   과연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요일 4:10). 바로 이러한 중요한 사실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비로소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어떤 종교적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에, 그러한 분위기에서 부추겨지거나 느껴지게 되는 그 흔한 종교적 감정이나 분위기 따위를 가리켜 은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의 사역을 완수케 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근원이 되게 하신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심판에 떨어져야 하는 죄인의 신분에 놓여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공하게도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받아들여졌고, 게다가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하는 자가 되었습니다(갈 4:4-7).

4. 성도는 인간의 본분을 회복한 자답게 살아감

   서두에서 전제했듯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명령을 따름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인간된 본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장벽인 죄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일을 믿고 순종하는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요 17:3).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해주시는 지혜와 능력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고전 1:30-31).
   이상 간단하게 살펴본 것에 불과하지만,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마땅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조건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절대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드려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다한들 얼마만큼의 마음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얼마만큼의 순수함과 풍부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드리는 것을 기뻐받으십니다. 그러니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힘쓰시고, 그분 앞에 세세히 아뢰고 여쭙는 일에 힘쓰십시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떠한 사랑으로써 사랑하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을 마음 중심에 깊이 간직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정결한 신부로써 자기를 드리는 심정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그분의 다스림을 풍성히 받는 일에 깨어 있으십시다. 항상 근신하여 있음으로 이 세상 정욕을 벗어버리는 일에 민감하게 대처하시고, 살든지 죽든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이 반영되게 하는 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사는 데 애쓰고 힘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이 있기 때문인 것이며, 따라서 이것 이상으로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을 확신케 해주는 증거도 없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식으로 매사에 시간을 내어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십시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요,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요즈음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bloom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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