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glish Bible ------------------------------------------------------------ Names of God: The Mighty One 위대하신 하나님
Isaiah 60:15-16 15"Although you have been forsaken and hated, with no one traveling through, I will make you *the everlasting pride(an eternal excellency) and the joy of all generations. 16You will *drink(suck) the milk of nations and *be nursed at royal breasts(will suck the breast of kings). Then you will know that I, the LORD, am your Savior, your Redeemer, the Mighty One of Jacob.
mighty a,ad. 위대한, 힘센, 강대한, 굉장한 hate v. 미워하다 forsake vt. 저버리다, 버리다 traveling n. 여행(의), 이동(하는) everlasting a,n. 영영히, 영원한, 영구한, 끝없는 pride n,vt. 자랑, 자만, 자존심, take a pride in ...에 긍지를 갖다, 뽐내다, 자랑하다 nurse n. 유모, 보모, 애보는 사람, 간호사 royal a. 왕의 breast n,vt. 유방, 가슴, 흉부 savior n. 구원자, 구조자 redeemer n. 구속자, 되사는 사람
Luke 1:46-55 46And Mary said: "My soul glorifies the Lord 47an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48for he has been mindful of the humble state of his servant. From now on all generations will call me blessed, 49for the Mighty One has done great things for me--holy is his name. 50His mercy extends to those who fear him,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51He has *performed mighty deeds(showed strength) with his arm; he has scattered those who are proud in their inmost thoughts. 52He has brought down rulers from their thrones but has lifted up the humble. 53He has filled the hungry with good things but has sent the rich away empty. 54He has helped his servant Israel, remembering to be merciful 55to Abraham and his descendants forever, even as he said to our fathers."
mindful a. 주의 깊은, 마음에 두는 humble a,vt. (신분이)비천한, 낮추는 extend vt. 펴다, 늘이다, 확장하다, 연장하다 perform vt,vi. 하다, 실행하다, 성취하다 scatter vt. 흩트리다, 쫓아버리다 immobile a.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throne n. 권세, 왕좌 ,옥좌, 왕위, 왕권 merciful a. 자비로운 descendant n. 자손
----------------------------------------------------------------- RELATED TEXTS Joshua 22:22 Psalm 50; 132 Isaiah 49:24-26 Mark 14:60-62 -----------------------------------------------------------------
Isaiah 60:15-16 15전에는 네가 버림을 입으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지나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로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16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Luke 1:46-55 46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61/366일차 = 421-427 개째 단어)
breast n,vt. 유방, 가슴, 흉부 extend vt. 펴다, 늘이다, 확장하다, 연장하다 hate v. 미워하다 pride n,vt. 자랑, 자만, 자존심, take a pride in ...에 긍지를 갖다, 뽐내다, 자랑하다 royal a. 왕의 scatter vt. 흩트리다, 쫓아버리다 traveling n. 여행(의), 이동(하는)
마리아의 송가 속에 나타난 구속사 -------------------------------------------- 눅 1:46-55
마리아는 '......기억하시되'(54절)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계시의 구조 속에서 '기억한다'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과 맺으신 약속과 언약을 실행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하면,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출 2:23-25).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은, 그것을 우리 인간의 경우처럼 건망증에 의해 깜빡 잊어버렸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억한다'는 말의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움직이시고 행동하시는 역동적인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1. 마리아의 송가의 의미
누가복음 1:46-55은 '성모 마리아 송가(Magnificat)'로 잘 알려져 있는데, 구속사의 중요한 핵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약간의 상황 설명이 필요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와 문안했을 때, 그녀의 복중에 있던 태아 세례 요한이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태아 예수님을 알아보고 크게 반응을 보여 뛰놀게 됩니다(눅 1:41,44절). 훗날 맺어지게 될 예수님과 세례 요한과의 특별한 관계는 이렇게 복중에 있을 때부터 그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을 감동하사 마리아에게 일련의 예언을 하게 하셨습니다(40-45절). 이 두 가지 사실은, 그러니까 나이가 많아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던 엘리사벳이 기적적으로 수태한 사실을 확인한 것과 성령의 감동으로 선포되어진 예언을 듣게 된 이 두 가지는,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의 복중에 구주가 잉태된 사실을 확증케 하는 징조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36절). 구속사를 깨달은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큰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게 됩니다(46-55절). 마리아의 찬양은, 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46-48절), ② 하나님의 능력과 의로우신 판단에 대한 찬송(49-53절), ③ 하나님의 약속과 이행에 대한 찬송(54-55절)으로 나타납니다. 이중에 여기 세번째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55-55절)"고 한 부분은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도우셨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는 조상적 때부터 세우셨던 언약이 성취되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구원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여기서 문제는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된 아기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와 같은 구원 역사의 의미로 해석되어지는가를 해석하는 일에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구약 구속사의 예언이 메시아의 도래를 지향해 나온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때마다 취하신 방법은 항상 당신의 대리자를 보내신 일이었습니다. 가령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대행하는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사사들 역시 동일한 의미로 출현한 구원자들이었고, 그들에게 기름이 부어짐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으로 객관화되었습니다. 또한 메시아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고 볼 수 있는 다윗의 경우 무려 세번이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당시 사울이 집권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여 가족들만 있는 데서 은밀하게 기름부음을 받았고(삼상 16:6-14), 두번째는, 사울의 죽음 이후 유다 지파에 의해 남쪽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기 위해서였고(삼하 2:4,7), 다시 7년이 지난 뒤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때에 세번째로 온 이스라엘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하 5:1-3). 기름부음이 상징하는 바는 성령의 능력 충만입니다. 모세(민 11:17), 여호수아(신 34:9), 옷니엘(삿 3:10), 기드온(삿 6:34), 입다(삿 11:29), 삼손(삿 13:25), 다윗(삼상 16:13) 등등의 경우를 통하여 이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이들 구약 구속사 속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여호와의 종들은 메시아의 전형이었고, 장차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집행하실 참 메시아의 도래를 예시케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사야는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할 때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사 61:1)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약속은 참 구원자의 직무를 수행하시게 될 메시아인 한 인격자의 도래에 집중되어져 나왔다고 볼 수 있고, 그 일이 지금 마리아의 복중에 이렇게 성령으로 한 아기가 잉태됨으로, 이제 최종적인 성취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고로 마리아는 자기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가 잉태되어진 이 일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라고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앞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이런 중요한 사실을 고지(告知)받은 바 있습니다(1:26-38).
2. 언약에 신실하시고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역사에서 찾아보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또 다른 놀라운 측면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마리아는 '......기억하시되'(54절)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계시의 구조 속에서 '기억한다'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과 맺으신 약속과 언약을 실행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하면,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출 2:23-25).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은, 그것을 우리 인간의 경우처럼 건망증에 의해 깜빡 잊어버렸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억한다'는 말의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움직이시고 행동하시는 역동적인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이 사실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마리아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는 구원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오랜 침묵 끝에 비로소 재개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무려 300-350 여년에 걸쳐 하나님의 침묵에 직면해 있어야 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갈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상대방이 침묵으로 묵묵부답 하는 때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수백 년의 기간 동안 강대국들에게 유린당하며 식민지 국가로 전락해 있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고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 시대 때 누렸던 영화는 도무지 재현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지금처럼 길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70년간의 포로 생활 때 잠시간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지만, 그나마 70년간에 불과하였고, 그나마 이 당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아주 중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절망과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는 더더욱 가중되었고, 구약 종교는 더 이상 어느 부분에서도 그 순수함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어져만 갔습니다. 빛이 완전히 꺼져가는 듯한 때에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다시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시므온이나 안나와 같은 몇몇 특정인에게 개인적으로 임했습니다. 시므온의 경우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2:26)고 하신 성령님의 지시를 받은 고로, 자기의 살아 생전에 메시아가 도래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안나 역시 아기 예수를 보게 되었을 때 첫 눈에 메시아이신 사실을 알아보고 '이스라엘의 구속'이 시작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습니다(36-38절). 그렇지만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한 대다수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의 도래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였는데, 이것을 기대하기에는, 이제까지 너무도 오랫동안 하나님의 계시는 중단되어졌고, 상대적으로 자의적인 하나님 숭배는 유대교 안에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기에, 어쩌면 무리였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소망인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는 말하기를,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고 했던 것입니다. 그나마 이스라엘이 소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해 나왔던 것은, 변역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입니다. 지금 이 하나님의 신실성이 본격적으로 집행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번에는 메시아께서 직접 강림하시는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리하여 아브라함 때부터 - 원칙적으로는 창조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 지금까지 전개되어져 나온 하나님의 구속사는 급기야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두번씩이나 찬양되고 있는 사실은 마리아의 송가에서 찾아지는 두번째 특징입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긍휼히 여기시고......'(50,54절). 하나님은 교만하고 권세를 부리며 착취하는 부자를 흩으시고 내리치시고 공수로 만드는 분이시지만(51-53절), 당신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대대로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마리아의 이중적인 찬양은, 이같은 구속사의 배경 속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어집니다. 첫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역을 수행하심으로 '새 언약'을 세우십니다(눅 22:20).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켜 '새 언약'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구약 구속사의 언약들을 통하여 계시되어져 나온 신학적 원리들의 모든 상징들이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실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들이 담아 나온 상징 속에는 속죄(贖罪), 대속(代贖), 구속(救贖), 화목(和睦), 화해(和解) 등등의 개념들이 대표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각 용어들이 갖는 구체적인 의미가 각기 따로이 있지만, 구원(救援) 개념이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말미암는 각종 상징적 제의법들을 주심으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인 것을 배우게 하셨고, 이를 위해서 대속물(代贖物)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에 따라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을 경우 그 죄를 속함받으려면 반드시 어린양을 제사장 앞에 가지고 나와야 했고, 그것이 대속물로 바쳐짐으로 비로소 그 죄가 초래하였던 심판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 가르침이 하나의 언약 형식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언약 형식이냐 하면, 장차 참 대속물이신 메시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실질적으로 성취되어질 '새 언약의 구원 사역을 예표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사역을 수행하심으로 대속물이 되셨을 때(막 10:45), 이는 옛 언약을 완성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신 일이었고, 동시에 참 구원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소외와 멸시를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마리아는 자기 복중에 잉태된 메시아가 장차 완성하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켜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52-53절)고 합니다. 여기서 비천한 처지에 있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50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들은 악을 멀리하는 자들입니다. 당시의 일차원적인 문화구조 하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착취와 권세의 방법을 배제하고서는 부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이런 삶의 태도를 따를 리가 없고, 따라서 그들의 신앙심은 물리적인 영역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아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긍휼은 구원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대상은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요, 신앙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특별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하나님이 지목되고, 더욱이 두려움이란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동기로 나타날 경우, 이는 '경외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집니다. 따라서 성경 다른 부분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가령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듯이, 비천하고 주림의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특성으로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가리켜 '계집종의 비천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48절),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신앙적 자세였습니다. 이상 살펴본 구원의 원리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위대한 구원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경외하는 자는 긍휼히 여기심을 입어 언약의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공효를 덧입으며,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셔서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는 큰 사랑으로 구원을 베푸셨으므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가지 못하며 무효화시키지 못합니다. 따라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요, 곧 은혜 구원의 본질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받기만 하면 되고, 받은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대속적 구속 사역을 신뢰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측면에서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이 성도에게 실질로 임하게 될 때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이론의 실질적 효과일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죄 문제가 해결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죄로부터 그렇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다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로 정교화됩니다. 첫째로, 이것은 죄책이 사라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죄책이란 죄의 책임, 곧 죄 값을 치르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망과 심판으로만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망과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죄인이 아닐 뿐아니라 도리어 의인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이 사실을 현세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경험과 체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절대적인 구원의 확신이 뒤따라 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두번째로 성도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이 두번째 사실은 앞의 첫번째 사실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다시 말하여 죄책을 해결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인 것이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그는 죄책을 벗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후자의 사실을 염두에 두게 되면 앞서 말했던 구원의 확신을 경험하는 일의 불가능성 문제가 어느 정도 가능해지게 됩니다.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죄를 이기고 극복하며 지배하는 삶의 실질!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이며, 따라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에 속해 있는 사실에 대한 보증인 것이고, 그의 속에 성령께서 거처를 삼고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는 어떻게 정의되어지는가? 또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예! 능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도덕주의를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게 되면 새로운 함정에 빠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바른 의미는, 성도들이 각자에게 부과된 자기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집결하여 한 몸이 된 가운데,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와 통치를 받들어 나가는 자연스러운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적 종교 단체가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비로소 실질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생각이 좀더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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