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스크랩] 장수민 목사 구속사 성경연구-시19:12-14-계시의 목적과 구원

하나님아들 2018. 9. 28. 23:12

The English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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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eemer
구속자 하나님

 

 

Job 19:25-27      25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26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 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27I myself will see him with my own eyes--I, and not another. How my heart yearns within me!

redeemer  n. 구속자
destroy  vt. 썩다, 파괴하다, 멸하다, 죽이다
skin  n.  피부(가죽)
yearn  vi. 초급하다, 동경하다, 그리워하다, 그립게 생각하다, 동정하다, 간절히-하고 싶어하다


Psalm 19:12-14      12Who can discern his errors? Forgive my *hidden faults(secret faults). 13Keep your servant also from willful sins; may they not rule over me. Then will I be blameless, *innocent of great transgression(I shall be innocent from the great transgression). 14May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pleasing in your sight, O LORD, my Rock and my Redeemer.


error  n. 허물, 잘못, 과실
fault  n.  결점, 과실
discern  vt. 인식하다, 지각하다, 분간하다
willful  a. 고의의, 계획적인, 고집센
innocent  a. 때묻지 않은, 흠없는, 순결한, 죄없는, 결백한, 순진한
transgression n. 죄과, 위반
meditation n. 묵상, 명상, 심사 숙고, 명상록


Isaiah 44:6-8   6"This is what the LORD says--Israel's King and Redeemer, the LORD Almighty: I am the first and I am the last; *apart from me(beside me) there is no God. 7Who then is like me? Let him proclaim it. Let him declare and lay out before me what has happened since I established my ancient people, and what is yet to come--yes, let him foretell what will come. 8Do not tremble, do not be afraid. Did I not proclaim this and foretell it long ago? You are my witnesses. Is there any God besides me? No, there is no other Rock; I know not one."

proclaim  vt. 외치다, 공표하다, 나타내다
declare  vt,vi. 고하다, 선언하다, 언명하다, 신고하다
establish  vt. 설립하다, 확립하다, 제정하다
ancient  a,n. 고대의, 옛날의, 고래의
foretell  vt. 예고하다, 예언하다. foreteller n.
tremble  vi,vt. (무서워서)떨(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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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 TEXTS
Isaiah 44:24-28; 54  Luke 24:13-36  Galatians 4:4-5  Titus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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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 19:25-27      25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Psalm 19:12-14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Isaiah 44:6-8   6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지어다 8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62/366일차 = 428-434 개째 단어)


discern  vt. 인식하다, 지각하다, 분간하다
error  n. 허물, 잘못, 과실
fault  n.  결점, 과실
meditation n. 묵상, 명상, 심사 숙고, 명상록
skin  n.  피부(가죽)
willful  a. 계획적인, 고의의, 고집센
yearn  vi. 동경하다, 그리워하다, 그립게 생각하다, 동정하다, 간절히-하고 싶어하다

 

 

계시의 목적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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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9:12-14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잘 나타나는 고범죄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생활과 관련한 것인데, 특별히 예배에 있어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함께 교정하자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한 성도가 적어도 세례를 받을 정도의 구원론적인 지식이 있어 합당한 절차를 밟아 자신이 속한 그 지교회의 회원으로 가입되었다면, 예배가 하나님을 알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처소에 부복하는 것이라는 신학적 이론에 대해서 명백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도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주의, 습관성, 졸음, 육체와 머리의 분리, 습관적인 지각 등등의 나태하고 어지러운 자세로는 도무지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두 영역

   시편 19편은 잘 알려져 있듯이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두 영역인 자연계시와 말씀계시를 찬양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인간의 구원론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계시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이고, 여기서 말씀계시는 그 구속적 성격과 관련하여 특별계시 혹은 초자연계시로 부르기도 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솜씨를 보여주고(1-6절), 말씀 역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합니다(7-11절). 마지막 부분은 12-14절은 하나님의 계시가 가져오는 결과를 보여주는데, 곧 하나님 앞에 직면한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죄를 드러내고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두 가지 목적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기를 간구합니다(12-14절).
   죄가 인간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전에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훌륭한 '자기계시'의 수단이었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물론 타락한 이후에도 이 자연계시는 어느 면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이 되어집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하나님의 존재성을 계시할 수만 있을 뿐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는 수단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려 함에 있어서 특별계시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면, 백번의 경우면 백번 모두가 우상숭배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 필연적인 결과입니다(롬 1:18 이하).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다듬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자연계시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두 가지 수단, 곧 '본유적 신인식'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① 내재적 자연과 ② 외부적 자연의 두 원천으로 구성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감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가리켜 내재적 자연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상선벌악의 심리로 사람이 도덕적으로 신의 존재를 의식한다거나 어떤 종교적 심리를 갖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외부적 자연은, 창조세계를 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 외부적 자연은 당연히 내재적 자연에 의존하게 됩니다. 내재적 자연이 없는 한에는 제아무리 자연을 광대히 관찰하고 세밀히 분석한다 할지라도 바른 신관을 정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외부적 자연에서 나오는 신인식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내재적 자연 역시 완성적인 것이 되지는 못합니다.
   특별계시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자연계시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은, 죄가 이것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이후부터는 통상 구속과 연관되는 특별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특별계시라는 것이 본래에는 없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새롭게 나타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타락의 결과로 초자연계시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특별계시는 있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에게 생명과나무와 선악과나무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특별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교제하신 이 특별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은 충분하여 완성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이 가진 하나님을 아는 계시인식 수단은 크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한 사실과 함께 그의 속에 있는 두 본성, 곧 내재적 자연과 외부적 자연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하나님 인식 능력이 무디어지고 어두워져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상적인 말로 양심이 마비되었다고 합니다. 가령 앞에서 예를 들었던 상선벌악의 심리를 보면, 이것이 도무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아주 말살된 것은 아니지만 오염되고 무뎌졌으며, 흑암 가운데 둘러싸여버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외부적 자연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외부적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수단도 마찬가지로 왜곡과 오류의 지배하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자연 환경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도 크게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원칙적으로 '자연신학'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신학이 제아무리 철학적인 논리들을 펼쳐 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형식적으로만 옳은 듯이 보일 뿐이지, 고속적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누릴 수 있는 실질적 구원에는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히고도 교묘한 사단의 장난도 없을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제 타락하기 전의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타락한 이후로는 그 내용에 있어서 구속(救贖)의 형태를 띠게 된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초자연계시, 곧 특별계시는 인간을 구속하는 일을 그 두드러진 기능과 역할로 삼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그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구속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부각됩니다. 우리는 타락하기 이전의 특별계시를 가리켜 '행위언약'이라 부르고, 타락 이후 변화를 받은 특별계시는 '은혜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요, 초자연계시인 것입니다.

      타락전            타락후
     내재적 자연 = 양심, 종교심, 자연   →    왜곡과 오류에 휩싸임
     외부적 자연 = 하나님의 말씀 계시  →    구속의 특징을 드러냄

                                          눅 22:20

                      창 3:15


2. 구속하는 특징을 가진 특별계시

   타락후부터 하나님의 초자연계시는 여러 모양으로 변화된 특징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먼저 이 특별계시는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타락 이후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그 대상에 있어서도 제한적이어서 크게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특별계시가 적용되어집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굳이 인간과 교제를 계속하셔야 하는 근거는 이미 없어진 것이고, 엄중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만이 집행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계시를 통하여 불순종의 대가는 죽음인 사실을 분명하게 언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부부가 이 언약을 배반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집행하시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심판을 유보하신 채 은혜의 언약을 시작하셨으니, 곧 인간이 범한 죄를 해결해 주시는 구속의 역사를 집행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 모두가 이 혜택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로만 제한되어야 했습니다.
   이제부터 말씀으로서의 특별계시는 구속의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까닭에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특별계시는, 그 성격에 있어서 구속을 계시하고, 더욱이 구속을 실제로 누리게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특별계시는 내용적으로 구속의 진리들을 풍성하게 보여주게 됩니다. 타락하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주관적인 교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어서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후부터는 어떤 다른 수단이 개입되게 되었습니다. 이 수단들이 무엇이냐 하면, 각종 제사 의식들, 절기들, 율법 조항들 등등으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인간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다른 수단들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현현도 드물어졌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사람 앞에 현현하심으로 임마누엘 관계는 자연스럽게 전개되었으나, 이후부터 이런 일은 매우 드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속의 진리들은 처음에는 전승으로 전해지고, 다음에는 문서화되는 단계를 거치면서 마침내 성경의 형태로 고정되게 되었습니다. 구속사 속에서 전개되어져 나온 구속의 진리들이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경(聖經)의 형태로 고정되게 되었을 때,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객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죄로 말미암아 드물어진 하나님의 자기현현, 그리고 이때 소유할 수 있게 된 소중한 진리가 사라져버리는 안타까운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객관하된 구속의 진리의 총체요 총화이십니다(요 5:39 딤후 3:15).

3. 특별계시로 말미암는 구원을 누리기를 갈망함

   이상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여기 시편 19편의 부분인 7-11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1-6절은 자연계시를 언급한 것이고, 7-11절은 특별계시를 다루었습니다. 타락한 이후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은 인간의 죄를 다루게 됩니다.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속의 수단을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여기서 여호와의 율법이란, 곧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주신 수단으로서의 특별계시요, 은혜언약을 가리킵니다. 특별계시를 받는 대상은 모두가 은혜언약의 수혜자들이며, 따라서 이들은 여호와의 율법의 기능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이요, 곧 생명의 수단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막는 것이 다름 아닌 죄(罪)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붙잡게 됩니다. 이에 따라 시인은 죄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여기에 보면 '숨은 허물'과 '고범죄'라는 말이 나옵니다. '숨은 허물'은 하나님 앞에서 감추려고 했던 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기워졌다고 생각하는 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죄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고 정당화시키면서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죄를 짓는 이런 경우가 우리에게 얼마나 자주 경험되어집니까? 그렇지만 이 숨은 허물을 자신이 미처 의식치 못한 죄를 가리킨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사실 성경이 죄를 죄로 규정짓는 것은, 그것을 행한 자의 의식성 유무와는 상관 없습니다. 의식이 없이 행한 것도 죄인 것에는 틀림 없으며 반드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여기 '벗어나게 하소서'의 원어적인 의미는 용서(容恕)입니다.
   13절에서 말하는 고범죄는 어떤 것입니까? 이는 12절의 의미가 재 진술된 것으로 한 마디로 말하여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알면서 범하는 죄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범하는 죄입니다. 그렇지만 알면서 범하는 이 고범죄 문제는 성도의 삶에 참으로 심각한 암적 요소가 되어집니다. 한번 이 고범죄의 영향 아래로 떨어지게 되면, 여간해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죄는 주장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볼 수 있고, 이는 다윗이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라고 간구한 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알면서 범하는 죄를 이기는 가장 능력 있고 현실적인 대안은 기도(祈禱)입니다. 대개의 경우 기도 생활이 끊어지면 이 고범죄란 것이 성도의 생활에 틈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써 자기를 성찰하기를 생활화하는 사람은, 간혹 부지불식 간에 죄에 빠질 수는 있어도, 여간해서 이 고범죄의 영역으로는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가 중단되는 곳에 반드시 죄가 틈탑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잘 나타나는 고범죄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생활과 관련한 것인데, 특별히 예배에 있어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함께 교정하자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한 성도가 적어도 세례를 받을 정도의 구원론적인 지식이 있어 합당한 절차를 밟아 자신이 속한 그 지교회의 회원으로 가입되었다면, 예배가 하나님을 알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처소에 부복하는 것이라는 신학적 이론에 대해서 명백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도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주의, 습관성, 졸음, 육체와 머리의 분리, 습관적인 지각 등등의 나태하고 어지러운 자세로는 도무지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좀더 깊게 생각해 볼 것은, 예배는 개인적으로는 성립된다기 보다는, 것이요, 몸 전체로서의 드려지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예배시에 되어지는 자신의 불경건한 태도는 몸 전체 예배자들에게 누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흠으로 남는 것이 아니고 몸 전체가 드리는 예배 자체를 망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거룩한 예배를 경시하고 오염시키는 이 고범죄의 문제가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죄의 영역은 내적인 성향과 동기와 관계하는 까닭에, 자신이 기계적일 정도로 예배 의식에 꼬박 꼬박 참석하는 한에는, 스스로도 속기 쉬운 것이어서 여간해서 외부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특징을 가졌기도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의 자기계시 앞에 직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계시인 율법과 대면하여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론적인 신앙관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백성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시인은 자신의 죄를 모두 벗어버리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열납(悅納)'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 그 모든 것이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죄라는 것은 이 복된 관계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소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요, 따라서 이것의 지배와 권세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였습니다.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bloom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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