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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8. 9. 16. 22:57

교부들의 삼위일체

 




동방 교부들의 삼위일체


서         론

 


325년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르기까지 치열한 공방을 거쳐 삼위일체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4-5세기 위대한 동방 교부들이 핵심역활을 했다.

여기서는 아타나시오스와 카파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를 보려고 한다.

 

A. 아타나시오스(295-373)

 

1. 그의 생애

 

 그는 29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공부했다.

319년 알렉산드로스 주교에 의해 보제로 임명되어 알렉산드로스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에 참석했다.

3년 후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된다. 그는 새로운 신학체계나 용어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지만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것을  절대절명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5번이나 면직을 당했으며 17년 이상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보지 못하고 죽었으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니케아 신조를 지킨 것은  절대적으로

그의 공이 크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그를 "교회의 기둥"이라 불렀으며 오늘날 동방교회는 그를 "

정통교회의 아버지"로 서방 교회는 동방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4명중 한 사람으로 기린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나 그의 신학에는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종속론을 극복하였다.

둘째는 로고스 뿐 아니라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진정한 삼위일체를 완성했다.

세째는 그의 삼위일체는 사변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구원론적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2. 그의 삼위일체론

 

1) 삼위의 하나됨과 고유성

 

먼저 구원론적 관점에서 마28:19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는데 성자와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하나의 세례가 창조주와 피조물로 나누어 지는데 그것이 유효한 세례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동등하며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어떤 종속적

관계도 인정하지 않았다.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 이후 한편으로는 앙키라의 바실리오스와 같은 유사본질파를

인정했다. 그는 유사파들이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나셨고 그 본질은 아버지와 비슷하다'면 유사본질이란 말이

불만족스럽지만 결국 동일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는 교회화합 차원에서 그것을 인정했다고 볼수 있다. 그는 삼위가 서로 내주하면서 모든 행위가 하나라는 것도 강조했다. "삼위는 항상 동일하며 본성으로 나뉠수 없고 그 행위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말씀을 통해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그러면서도 삼위의 하나 됨을 강조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단순히 이름에 불과하지 않고 실재적이라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오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고유성을 나타나기 위해 '위격'이나 '인격'등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하나의 본질과 세 위격'이라는 표현은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위격과 본질을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2) 말씀과 구원

 

아리오스의 가르침은 이러하다.

말씀(아들)은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피조된 피조물이며 그리스도는 덕행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우리도 덕행과 순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수 있다. 

아타나시오스에게 구원이란 '하나님과 닮고 썩지 않을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그리스도가 피조물로 인간이라면 어떻게 자기도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인간을 부패로부터 구원하며 하나님의 저주를 파기하고 인간에게 죄를 사할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죽을 수 없지만 자신이 죽지 않고는 인간의 부패와 죽음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제물로 죽음에 내어주어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여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히 썩지 않게 하셨다.

이런 생각 때문에 말씀이 피조물이란 것을 그토록 반대하게 만든 것이다.

 

3) 성령의 신성

 

350년경 이집트에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아타나시오스는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성령의 신성을

신앙의 조항으로 넣었다. 아타나시오스는 성령의 고유성을  샘과 시내, 빛과 광채의 유비로 설명했다.

"아버지가 빛이시고 아들이 그 광채라면 성령은 우리를 조명하시는 분으로 그리스도는 성령안에서 드러내신다.

아버지가 샘이며 아들이 시내로 불리면 우리는 성령을 마신다고 할 수있다." "성령은 아들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적인 물이며,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명이다." 우리를 거룩하게하고 하나님처럼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면 성령이 피조물이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성령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성부,성자,성령으로 준 세례가 유효하지 않으며 하나의 세례를 창

조주와 피조물로 나누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다. 아타나시오스는 성령에 대해 "아버지께로 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요15:26)이란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와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빛을 빛추고 보내지며 주어진다.

 

4) 영향

 

그의 삼위일체 신학은 구원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들과성령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며 니케아 신조 안에 '동일본질'과 '아버지의 본질로부터'라는 말이 구원신앙의 핵심적 내용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학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카파도기아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서방 삼위일체 신학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었다.

 

B. 바실리오스(329-379)

 

1. 그의 생애

 

바실리오스는 세명의 카파도기아 교부중에 유일하게'위대한,대(大)'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교회정치가이자 조직자,신학자이면서 동방 수도운동의 기초를 마련하여 『수도생활을 위한 긴 회칙서』들을 작성해 후대 수도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카파도기아 카이사리아의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아테네에서

고등교육을 받다 365년경 고향으로 돌아와 수도생할에 전념한다. 카이사리아의 주교인 유세비오스는 바실리오스를

설득하여 사제로 만들고 370년 유세비오스가 죽자 그를 이어 카이사리아 주교가 된다.

그는 종합적인 사회복지사역을 시행하여 가난한 자를 돌보고 전염병환자와 여행자와 나그네를 위한 사역에도 힘썼다.

그는 유사파 신앙을 강요하는 발렌스 황제에 맞서 니케아 신앙을 수호했으며 박해받는 니케아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래서 카파도기아에서는 심한 박해를 면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일치에 혼신의 힘을 썼지만 안티오키아의 교회분열문제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그의 삼의일체의 중요한 것은 본질과 위격의 구별과 성령론에 관한 것이다.

 

2. 그의 삼위일체

 

1) 본질과 위격의 구별

 

그가 삼위일체에 가장 큰 공헌을 한것은 본질과 위격을 구분하여

'한 본질과 세 위격'(mia ousia, tres hypostaseis)이 유일하게 인정될 수 있는 올바른 신앙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본질과 위격이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아타나시오스도 '한 본질과 세 위격들'이란 표현을 썼지만 그는 본질과 위격을 동의어로 이해했다. 바실리오스는 니케아 신조의 어구를 고수해야할 뿐 아니라 이를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본질과 위격을 구분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하지만 그들은(니케아 공의회 교부들) 위격과 본질이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단어들이 동일한  한 뜻을 표현했다면 왜 두 단어가 모두 필요했겠는가? 

그들은(니케아 공의회 교부들)  자신들의 견해를 펼칠때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비롯된다고 선언하면서,

'위격으로부터'라는 단어를 덧 붙이지 않은 것은 본질과 위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본질로부터'라는 말은 아들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정죄하는 것이고  '위격으로부터'라는 말은 구원의 교리를

서술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지만, 그들이 명백히 가르친대로 아버지는 자기고유한

인격안에 있고 아들도 그러하며 성령도 그러하다고 분명히 고백해야 한다". 그는 본질과 위격을 '공통된 것'과 '고유한 것'의 관점으로 정의한다. 본질은 선함과 신성과 같이 공통적이라면, 위격은 아버지됨, 아들됨, 성령됨과 같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그는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을 활용하여 베드로와 바울은 각 각 다른 이름으로 고유한 특징이 있지만 인간이라는

종으로 하나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공통적인 것'(to koinon)과 '개별적인 것 '(to kath)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공통적인 것"은

본질,신성을 말하며,'개별적인 것'은 위격 곧 아버지,아들 그리고 성령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본질이란 것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신적 본질로서, 구체적이며 실체적인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 

그는 "본질과 위격을 함께 결합해서 아버지,아들,성령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신적인 성령 이라고 고백해야 제대로 표현한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위격이 단수로 사용할 때는 본질과 같은 뜻이며 복수로 사용할 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한다고 했다.  바실리오스는 세 위격을 인정하는 것은 단일통치원리를 무너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들은 아버지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안에 있다. 아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요,

아버지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들을 통해 이루기 때문이다. 인격의 고유성에 의하면 하나와 하나이다.

하지만 공유에 따르면 둘은 하나이다."  바실리오스는 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문제를 다루면서 단일통치원리를

설명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알려지고 성령의 조명을 통해 우리가 알수 있다.

"신 인식의 길은 한 성령으로부터 한 아들을 통해 한 아버지에게로 이른다."

 

2) 성령론

 

그의 삼위일체는 성령론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니케아 신조가 작성될 당시 성령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단지 '성령을 믿는다'는 언급만 있을뿐이다.

그러나 350년경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고 성령을  섬기는 영이나  피조물로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에 바실리오스는 성령은 성화하는 힘이지 성화되는 분이 아니라 하면서 피조물이나 섬기는 영이란 자들을 정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순서를 바꾸는 것도 정죄했다.

그는 저서"성령론"을 통해 성령의 신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실리오스의 삼위일체 시작은 세례와 신앙과 영광송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이것은 세례에 의해서 되는데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나누어 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바실리오스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라고 말하지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게 영광을 돌린다고 하여

우회적으로 성령의 신성을 강조했다. 본질의 공유와 사역의 공유는 영광의 공유로 나타나야 한다.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사역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영광을 돌리며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본질에서 같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령을 영광송에 온전히 포함시키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나님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바실리오스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수도사들에게 공격을 당했지만 당시 상황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를 계기로 아타나시오스와  힐라리우스, 교황 리베리우스등 니케아 파가 유사본질파와

연합전선을 펼치던 상황에서 바실리오스도 유사본질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대신에, 바실리오스는 '성령의 위대함과 위엄과 작용'을 통해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성령은 창조 때에 창조주로서 생명을 주는 사역에 동참했으며 구속사 전체에서 치유하고

거룩하게 하는 일을 했다. 지어진 모든 만물이 으뜸가는 원리는 아버지요, 만드는 원인은 아들이며 마감하는 원인은 성령이다. 명령하는 주님, 지으시는 말씀, 견고하게 하시는 성령이 하나의 창조행위를 이룬다. 성령을 섬기는 영이라 주장하는

자들에게 섬기는 영은 천사들이며 천사들은 아버지의뜻에 따라 실존하며 아들의 작용으로 존재하게 되며 성령이 임재로

완성된다고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모든 일에 성령도 함깨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바실리오스는 '본성의 공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뗄 수 없는 관계와 공동의 사역뿐만 아니라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다는 사실에서 증명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은 아들처럼 나시지 않고 하나님의 숨(호흡)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시며 이런 점에서 아들과 구별된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만 아들이 성령의 유일한 근원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영화롭게 되듯이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교제를 통해 영화롭게

된다. 행위가 하나라면 본성도 하나일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증명했다. 성령이라는 이름이 아들처럼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나타나지 않는 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행위의 동일성은 본성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본성의  공유는 이러한 호칭(신적 성령)이 매우 적절히 부합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C.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329-389)

 

1.그의 생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리오스와 마찬가지로 카파도기아의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바실리오스와 동년배로 함께 공부했지만 전혀 다른 성격과 은사를 가지고 있다.

고요한 관상과 수도생활과 교양적 문화를 좋아했고 유약하고 민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외부압력에 저항하지 못했으며

그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도피와 세상으로 복귀로 특징지어진다. 그가 신학적 작업을 하고 교회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활을

했던 시기는 379-381 여름까지 2년동안 이었다. 37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나지안조스의 교회를 맡았으며 379년 니케아

소수파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5개의 신학적 설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설교가 여기서 이루어졌다.

380년 11월 24일에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었으며 381년  5월에 개최된 공의회 의장이 되어 회의를 주도했다.

공의회의 중요한 문제중 하나가 안티오키아의 교회분열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사임하고 나지안조스로 돌아가 주교로 봉사하다 그의 사촌 유랄리오스를 나지안 조스 주교로 세우고 가족 영지인

아라안줌으로 돌아가 문예생활과 수도생활에 전념하다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2.그의 삼위일체

 

1)구원론적이고 영광송론적인 맥락

 

그는 바실리오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바실리오스를 "삶의 인도자요 교리의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신학적 용어와 표현을 정리하고 신학의 정의, 성격, 방법론을 세워 바실리오스를 넘어섰다.

그는 하나님의 하나됨과 셋 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제시했으며, 삼위일체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차원에서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레고리오스는 삼위일체 신앙이 사벨리오스주의와 아리오스주의의 이중적

도전사이에 있다고 보았다. 전자는 하나님의 셋됨을 하나로 혼합시켰으며 후자는 다신론을 가르친다.

그는 삼위일체의 신앙이 추상적인 사변이 아니라 구원론적 관점에서 세례신앙을 삼위일체의 기초라 보았다.

"그리스도는 우리때문에 인간이 되셨으니 이는 우리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세례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성령은 세례를 통해 인간을 신화시키는 분이며, 우리를 거듭나게하며 아들과 함께 다시 살리시는 분이다. 세례안에 표현된 삼위일체 신앙은 영광송으로 연결된다.

나를 세례로 신화시키는 분이 성령이라면 그분이 예배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분이 예배된다면 마땅히 경배되어야 한다.

그분이 경배된다면 왜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구원의 황금사슬이다."

 

2)내재적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그레고리오스의 가장 뛰어난 공헌 중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고유한 특성과 기원과 상호관계를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정의했다는 점이다. 바실리오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고유한 특성을 밝혔지만 성령의 고유성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며 지복직관에서나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스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고유성을 "비출생, 출생,파송"으로 말하거나 "나시지 않은 분 과 나신 분 과  나오시는 분 (발출하신 분),  한 하나님과 세 고유하신 분"이라 불렀다. 그는 아들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아담과 하와와 셋을 유비로 제시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화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고 셋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출생했지만 이 모두는 동일본질이다.

하와와 셋은 아담에게서 구별된 방식으로 나왔다.

하와가 떼낸것 이라면 셋은 낳아진 것으로 이는 성령과 아들의 기원방식의 차이를 어느 정도 보여 줄수있다.

바실리오스는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는 당시 상황에 비쳐 충분히 공감할수 있고 그

레고리오스도 공감을 표했지만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뚜렷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바실리오스와 구별된다. "등불을 말아래 감추지 말고 등경위에 두어 모두에게 비추듯이 이제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은유나 지적인 개요가

아니라 온 누리에 분명한 선언으로 비추게 해야 한다". 그는 성령이 하나님이며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이는 계시의 진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구약은 아버지를 분명히 선언했지만 아들은 희미하게 선포했다. 신약은 아들을 분명히 드러냈지만 성령의 신성은  암시만 했다. 아버지의 신성이 아직 고백되지 않았을 때에 아들의 신성을 드러내게 선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아들의 신성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에 성령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아들의 신성이 확정되었다면 성령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바실리오스는 인격이라는 개념이 존재론적으로 공허한 개념으로 존재론적 성격을 가진 위격이라는 말이 함께 결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인격이란 말이 원래 가면을 뜻했기에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고리오스는 위격과 인격을 같은 개념으로 이해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교서는 이러한 그레고리오스의 입장을 따라 위격과 인격을 같은

의미로 이해했으며 삼위일체론의 인격 개념안에 주체성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진보로 생각할 수 있다.

 

3) 삼위의 상호관계와 단일통치원리

 

그레고리오스는 삼위의 하나 됨과 고유한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최초로 관계 개념을 사용했으며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정점을 이루는 라틴 교회 삼위일체론을 예비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셨으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것에서만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된다.

곧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 자체에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구별된다.

아들과 성령도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게된 차이 곧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셧고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발출된다는 차이가 이름의 차이를 만들었다. 아들이 뭔가 부족해서 아버지가 아닌 것이 아니며 성령은 뭔가 부족해서

아들이 아닌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것이며 성령은 아들의 모든것이다.

어떤 본질적 차이도 없으며 오직 관계의 차이만 있을뿐이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은 원인만 제외하곤 아들의 것이며,

아들의 모든 것은  아들됨만 제외하고 성령의 것이다.

또한 그레고리오스는 하나님의 하나됨과 단일통치원리를 강조했다. 셋에게 본성은 하나,즉 하나님이다.

하나됨은 아버지로 이루어지는데, 나머지는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그분에게로 돌아가 시간,의,권능의 분리 없이 혼합이

아니라 결합된다. 삼위의 기원이 하나이며 본질이 동일하며,뜻,의지,권능,행위가 하나라면 세위격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 한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버지에게 기원이 없다는 점에서 아들보다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들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기원의 관계를  제외하곤 삼위안에는 완전한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D. 닛사의 그레고리우스(332-395)

 

1. 그의 생애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기독교 사상적으로 위대한 인물인데도 흔히 간과 되어 왔다.

한때 그는 '교부중의 교부' '온 교회를 받치는 기둥' '우주적 박사'라고  찬사를 받았다.

바실리오스의 동생으로 더 철학적이고 더 심오하다는 점에서 카파도기아의 다른 두 교부를 능가한다. 

독창적인 신비가로서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형 바실리오스에게 수사학과 신학훈련을 받았으며 372년

바실리오스에 의해 작은 도시 닛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바실리오스가 사망한 후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하며 수 많은

저작을 남겼다. 381년 5월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지도적인 역활을 담담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공의회 이후 공의회의 결정을 시행하기 위해 만든 법률에서 모든 주교들은 그와 일치해야하는 "규범적인 주교"로 불렸다.

 

2. 그의 삼위일체론

 

1) 세례와 영광송과 삼위일체론

 

다른 카파도기아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도 삼위일체 신앙이 예수의 세례명령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것이 구원의 기초라 하였다. 삼위가 모두 창조되지 않은 것이라 믿고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하는 길이 되지만, 삼위중 어느 하나라도 창조물이라고 고백하면 이에 참여할 수없고 삼위 중 어느 한 이름이라도

빠진다면 세례의 은총은 불완전하다.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이고 아들은 생명의 창시자요 성령은 살리시는 영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믿음으로 영생의 은총이 주어진다.

"삼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우리의 생명은 만물의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나오고 아들은 통해 흐르며 성령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온전한 확신을 지니고 명령받은 대로 세례를 받고 세례받은 대로 믿고 믿은 대로 영광을

돌린다. 이로써 우리의 세례,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영광송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로 드려진다"

그는 삼위일체 신앙이 유대교의  유일신론과 헬라의 다신론 사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위격의 구별을

본성의 하나 됨 안에서 보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신론과 유대교의 일신론의 잘못에 빠지지 않을수 있다"

 

2) 성령론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며 성령의 위격과 활동을 삼위일체적 삶과 온전히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카파도기아의 교부와 일치한다. 성령은 신성의 모든 속성을 공유하며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다.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삼위의 구별을 기원이라는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아버지는 기원이 없고 나시지 않고 영원한 아버지로 생각되며, 그분으로 부터 나신 아들이 있다고 이해되며, 아들로  

말미암아 성령이 존재한다"

성령의 기원을 말하면서 '아들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한다.

그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비롯되며 성령은 아버지로 부터 아들의 중재를 통해  비롯된다고 한다.

그에게서 '필리오케'가 발견되지는 않지만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성령은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바실리오스는 성령의 출현이 성부의 숨으로 나오셨다고 하며 성령이 존재하게 된 방식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성령의 기원을 성부로부터 '발출'한다고 하였다.

이는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데 아리오스파는 성부가 두 아들을 두셨다고 조롱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그래서 카파도기아 교부들은 성자의 기원 양식과 성령의 기원 양식을 구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특히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중 발현설을 주장하였다. 성령은 중보자인 성자로 통하여 존재한다.

그는 이것을 햇불의 비유로 설명했다. 첫번 햇불이 다음 햇불에게다가 빛을 전하여주고 그  다음에 둘째 햇불을 통해서

세째에다가 빛을 나누어 준다. 그는 성령이 아들의 영으로서 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의 교리는 분명히

성자가 의심할 나위없이 삼위의 원천이신 성부에 종속되어 성령을 산출하는데 있어서 대행자로서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이후에 동방교회의 정규적인 가르침은 성령의 발현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된다는 것이다.

 

3) 단일통치원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하나의 신적 원리가 있을 뿐이다.

먼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항상 서로를 따르며 서로 연합한다.

성령안에서 예수를 주라하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갈 수 없다.  

이런 내재적 상호작용은 창조사역과 구원사역 같은 경륜적 활동에서도 표현된다. 

창조사역은 아버지에의해 시작되고 아들을 통해 진행되며 성령안에서 완성된다.

어떤 행위도 아버지나 아들이나 성령의 단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도 죄인을정결하게하고 거룩하게 한다.

어느 한분이 각각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시작되고 아들을 통하여 실현되고 성령에의해 완성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경배를 드리는 것은 삼위로부터 하나님의 동일한 은총을 받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무슨 이유로 그대는 모두로부터 하나의 동일한 은총을 받으면서도 세 위격을 다른 본성으로 가르고, 서로 다른

세 신으로 만드느가?" 그레고리우스는 마치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받아 성장한다. 단 하나의 은총을 받는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따진다면 그  빛안에는 여러가지 다른 빛이 있다.

그 빛들은 연합하여 한 빛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           론

 

아타나시오스는 삼위일체의 기본적인 원리와 틀을 세웠고, 카파도기아 교부들은 이를 개념적으로 다듬고 논리적으로

발전시켜 고전적인 삼위일체를 완성했다. 그들의 삼위일체는 내재적인 관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삼위의 하나됨과 셋됨을 설명하기위해 노력했지만, 이론적 사변이 아니라 구원론적 관점에서 특히 세례와 영광송과 연관시켜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본질과 위격을 구별하고 삼위의 기원에 있어서만  다르며 다른 모든 점은 동일하며 삼위의 하나님이  본질,

의지, 행위를 가진다는 교부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오늘날에도 타당성을 얻지만 그들이 전개했던 형이상학적인 전제와 틀은 오늘날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고전적인 삼위일체 신학은 현대의 삼위일체 신학이 필히 참조해야하고 대화해야 한다.  








서방 교부들의 삼위일체


서론.


4세기 삼위일체 논쟁에서 서방교회는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고 아타나시오스를 비롯한 동방교회의 니케아파를 지지하며,

결국 니케아 신앙을 동서교회의 공동의 신앙고백으로 확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는 테르툴리아누스와 노바티누스가 기초를 세우고 힐라리우스와 빅토리누스,암브로시우스가

발전시키고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은 서방교회 삼위일체론의 규범이 되어 오늘날

까지도 영향을 미치고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힐라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신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A.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295-367)

 

1. 그의 생애

그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푸아티에서 이방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쾌락적인 삶에 대한 혐오와 철학자들의 모순을 느끼고 성서를 통하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350년경 푸아티에의 주교가 되었으며  356년 베지르스 교회회의에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난다.

355년 열린 밀라노 교회회의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굴복하여 주교들이 아타나시오스를 정죄하자 이를 맹렬히 반대하다 프리기아로 유배당했다. 그는 356-360년까지 유배생활을 했으며,유배중 오리게네스의 저작을 접했으며  동방 교회의

유사본질파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게돤다. 그는 유배중 동방교회의 셀레우키아 교회회에 참석하여 유사파 신조를

거부하도록 했다. 361년 파리 교회회의를 주도하여 사벨리오스 주의를 거부하고 니케아 신앙의 고수를 선언 했지만

동일본질과 함께 유사본질론도 받아들었다.

유사본질파는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며"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에서 비슷하다는 파이며 유사파는 본질로부터를 빼고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본질에서 비슷하다는 파이다.

 

2. 그의 삼위일체

 

1)삼위일체의 방법론

 

힐라리우스는 동방의 아타나시우스의 전통과 연결되는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힐라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은 유배 이전과 이후에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유배 이전에는 테르툴리아누스와 노바티아누스의 연장선상에서 삼위일체론을 펼쳤지만 유배이후에 쓴 "삼위일체론"에서 아들의 출생과 나뉠 수 없는 신성의 일치,

삼위일체론의 구원론적 특징을 강조하여 아타나시오스의 영향을 보여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를 받아들였으며,

영원한 출생과 상호 내주를 토대로 삼위의 하나됨을 주장했다.

서방 주교들이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여 동일본질을 제외한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때, 그는 유배생활중

유사본질파의 신앙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의 저서"교회회의"를 통해 341-357년 까지의 시르미움 신학 선언을 제외한 동방의 모든 신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유사본질론과 동일본질론이 긍극적으로 같은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동일본질이

사벨리오스 주의로 오인될 수 있으며 아리오스 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사본질론도 받아들여야한다고 했다.

그는 먼저 부정신학적 입장을 강조한다. 철학적 신 인식은 하나님의 존재,유일성, 전능성,영원성을 확신한다고 하지만

이런 자연적인 이성은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아는데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아리오스 주의를 반대했다.

그는 계시신학을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수 있다. "그 분을 알때 아버지를 안다.

그 분을 볼 때 아버지를 본다. 그 분이 말씀하실 때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머물러 말씀하신다.

그 분이 일하실 때 아버지 자신이 일하신다. 그 분 자신이 아버지안에 있고 아버지께서그 분안에 있다."

그는 또한 성서를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에서 성서구절을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삼위일체를 전개한다. 그는 삼위일체를 전개하는 데 동방교부들처럼 철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서와 전통에 기초하여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는 동방교부들에게는 시도되지 않았던 방법으로 후에 서방교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2)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과 하나됨

 

신6:4,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라"를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 여겼다.

그는  한 하나님에

대해  '만물이 나온 하나님'과 '만물이 말미암아 나온 하나님'을 구분한다.

만물이 나온 하나님이란  만물의 창조주를 말하며 나시지 않고 영원하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아버지를 말한다.

그분의 존재는 자신에게 있으며 다른 것으로 받지 않고 자신안에 지닌다. '만물이 말미암마 나온 하나님'이란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왔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들을 가리킨다. 아버지란 이미 아들을 전제하고 있다.

아버지를 고백한다는 것은 아들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아버지를 믿는 다는 것은 곧 아들을 믿는다는 것과 같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 두분은 초월적으로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귐속에 있고 그 사귐은 인격의 합일이 아니라 본질의 하나됨으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힐라리우스는 철저하게 합일(unio)과 하나됨(unitatis)를 구

분했다. 합일은 인격의 단일성을 뜻하며 사벨리우스처럼 하나님안에서 복수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적인 구별은 남아 있지만 본질의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이

같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동일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란 책에서 이 동일본질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사벨리오스 주의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에 두신이라 말할 수 없다. 아버지는 "나시지 않은 하나님" 아들은 "홀로 나신

하나님"이다. 아들은 무로부터나 질료로부터 나시지않고 아버지의 본성에서 나셨으며 아들은 무시간적으로 영원히

나셨기 때문에 그분이 없었던 때가 없다. 아버지는 아들을 나았기 때문에 '홀로있는 하나님'이라 할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지 한분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에서 하나이지만 인격에서는 구별된다.

아들은 아버지만 제외하고 아버지의 모든 것이다. 골2"9에  그리스도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아버지는 아들안에 아들은 아버지안에 상호내주하셔서 아버지는 아들안에서 행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행한다. 힐라리우스는 본성과 인격을 구분하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과 차이를 나나태는데 충분하다고 한다. 하나님,본성, 실체,본질,등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이다.

그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위격(hypostasis)이란 그리스어 단어를 실체와 연결시키지 않고 인격과

연결시켜서 본성과 달리 인격은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3) 성령론

 

그는 성령의기원에 대해 상세히 말하지 않지만 성령을 피조물이라는 자들에게 성령은 하나님께 속하며 이는 하나님이

본성과 다른 것 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본성상 하나님과 같으며  성령은 아들처럼 나시지 않아지만 하나님으로

부터 아들을 통해 나온다고 했다. 성령은 세례때의 신앙고백으로 표현되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근원이 되는분, 홀로 나신분, 은사에 대한 고백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다.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아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으며 성령은 만물안에 있는 선물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는 '영원의 무한함, 형상의 현시,

은사의유익'이 있다고 했으며 이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서 인용되었다.

그는 성령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이해했다. 성령을 인격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본성의힘, 혹은 권능,본성의 실재라고 이해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지만 두 분의 공유하는 신성의 힘과 본성은 성령의 은사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이지만 또한 똑같이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분은 아들의 본성의 실재요, 똑같이 아버지의 본성의 실재이다"

 

 

 

 

 

B.아우구스티누스(354-430)

 

1. 그의 생애

 

  그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불신자 아버지와 독실한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독학으로 수사학을 공부했다.

청년시절 타락한 생할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때 키케로의 호로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눈을 뜬다.

그는 수사학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로마에서 유명한 수사학자가 된다.

그는 참 지혜를 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와 카톨릭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빠지게 된다. 9년 동안 마니교에 있다가 회의를 느낀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된다.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388년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수도원

생활을 하던 중 히포의 주교 발레리우스의 권고로 사제가 된다. 발레리우스가 396년 죽자 히포의 주교가 된다.

히포가 반달족에게 함락당하기 1년전 76세로 사망하게 된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기초를 세우고 힐라리우스가 발전시킨 삼위일체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종합되어 완성된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의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으며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이 책을 힘겨운 작업이라 불렀으며 12년 정도 오랜 기간에 걸쳐 420년경 완성했다.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세 가지로 요악될 수 있다.

첫째,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하나님인데, 세 신이라 말하지 않고 한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역은 나뉠 수 없는데, 어떻게 성육신은 아들의 고유한 사역이고, 변화산에서의

음성은 아버지에게 해당하고, 오순절 강림은 성령에 해당하는지,

셋째 성령의 고유성은 무엇이며 출생과 발출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는 이것을 서술하고자 삼위일체를 세 방면으로 전개해 나간다. 하나는 성서적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서술하고 둘째는 철학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마지막으로

심리적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서술하고 있다.

그가 『삼위일체론』을 쓰게 된 이유는 더 깊이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것이며  믿는 바를 지성으로 보려고 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약함을 고치시고 길을 열어주시면 당신을 더욱더 만나리라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삼위일체론』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에 대한 사랑,힘을 다한 지적 탐구, 위대한 겸손이 잘 표현되어있다.

 

 

 

 

 

2. 그의 삼위일체

 

1) 성서와 삼위일체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삼위일체론』 논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고 전통적인 보편교회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삼위일체를 펼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나뉠 수 없는 동등함으로 하나의 똑같은

실체의 신적인 유일성을 보여주며 따라서 세 신이 아니라 한 신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삼위일체 신앙이 성서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첫번째 신학적 관심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하나님인데, 세 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한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이문제를 성서의 토대 위에서 해설한다. 그는 성부를 출발점으로 삼는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신적인 본성

자체로써 시작한다. 이 단순하고 변치 않는 본성이야말로 삼위일체이다.

딤전6:16과 롬11:33-36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은 단순히 어느 한 위격이 아니라 본성의 하나님 곧 삼위일체이다.

본성이  세 인격을 구성하기에 처음부터 종속설이 설 자리가 없고 성부가 신성에서 성자보다 클수 없고 성부와

성자가 합해도 성령보다 클 수 없고 어느 한 인격도 삼위일체보다 작지 않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성서 구절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님이 여자로부터 태어 나셨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는 표현이 가능하며 신학적으로 정당하다고 하였다.

본성의 하나됨을 강조하는데서부터 몇가지 당연한 결과가 도출된다.

첫째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유에 속한 세 인간적 존재들과 같은 방식으로 별개의 세 개체들이 아니다.(김씨,이씨, 박씨) 오히려 각 개의 신적인 인격들은 실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인격들과 동일거나 혹은

신적인 실체 자체와 같다. 인격들이 따로따로 내주하거나 혹은 상호간에 성품을 함께 타고 낫다고 말할 수 있다.(성부 안에 성자,성령이 내주하거나 성자 안에 성부와성령이 내주)

둘째로 신적인 본성 그 자체에 속한 것은 무엇이거나 엄격히 말해서 그 본성이 유일하므로 단수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는 아타나시오스의 주장처럼 각 개의 인격들은 무한하고 전능하며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성부를

무한자, 성자를 전능자, 성령을 영원자라 할 수 없다.

셋째로 삼위일체는 분활할 수 없는 단일한 행동과 단일한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본성들의 차이가 없으므로 의지의 차이도 없다.

네째로 그는 자신의 이론이 시사하는 분명한 곤란점에 직면하게 된다.

즉 그의 이론은 세 인격의 몇 가지 역할을 말살하는 듯이 보인다. 그의 대답은 이러하다.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어 태어나서 고난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나, 성부는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성자와 협력하셨음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각 개 인격들이 특수한 방식으로 신적인 본성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신성의 외적 작용에 있어서 각 개 인격들에다가 그 기원의 덕분으로 그 인격에 특유한

역할을 귀속시키는 것이 적절하다. 이것은 서방의 신학자들이 특유화라고 묘사한 것의 경우이다.

 

2) 관계의 개념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이 없고 더할 나이 없이 좋으시며 모자람도 흠도 없으시며 모든 것을 다 갖추신다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을 나타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의 상호관계를 엄격히 갈라놓았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다른 인격과 연결시켜 말하는 것,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과 관계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며 한편은

아버지요, 한편은 아들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를 가지고 있어야 아들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본질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격들의 신적인 본질로

고찰해 볼 때 동일하지만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므로 아버지로서 구별되시고 성자는 태어나시므로 아들로서

구별되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부여'되시므로 구별된다.

그래도 삼위가 사실상 무엇이냐는 질문이 생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가 전통적으로 인격들(Persons)이라 지칭되어 왔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용어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 용어가 그에게는 별개의 개체들을 시사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그 용어를 인정했다면 이는 양태론에 반대하여 삼위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 비평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범주도식에 근거를 두고서 본성을 실체의 범주에 둔다면 삼위가

독립적 실체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곧 삼신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는 신성 안에서 신성이 일으키고 있는 낳음, 태어남, 발출이라는 요인들과 똑같이

실지적이고 영원한 관계라고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 개 인격이 무엇이든지 간에 각기 한 분이나 혹은

다른 두 분에 대해 관계되어 있다는 뜻에서 관계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면 이 둘사이에 관계를 설정한다. 곧 두 인격이 있고 그 사이에 관계를 정립할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면 관계가 있음으로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관계가 곧 인격이다. 그 관계가 실지의 존립체를 가지고 있다는 관념이

이상스럽게 들리지만 그는 이것으로 신격의 통일성과 복수성을 동시에 주장할 수 있었다.

 

3) 성령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발현이 무언인지 혹은 그것이 어떤 점에서 성자의 출생과 다른지를 설명하려면 언제나 당황하였다. 그러나 확실히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상호적인 사랑이요 양자를 연합시키는 공동실체적 결속(bond)

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시종일관된 그의 가르침은 성령이 다같이 양자의 영이시라는 것이었다.

"성령은 양자 중 한 분의영이 아니라 양자 모두의 영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 대해 관계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단일원리를 형성한다. 그는 어느 서방 교부들보다 더 명백하게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현한다는 이중발현에 대한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성자와 성령이 모두 성부로부터 파생되시므로 두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반론에 대답하면서 "성자도 성부로부터 나시고 성령도 성부로부터 나신다.

그러나 성자는 태어나시고 성령은 발현하신다. 그러니까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시고 성부로부터 태어나시지만,

성령은 양자로부터 발현하시어서 양자의 영이시다. 성부는 성령발현의 창시자이시다.

그 까닭은 성부가 아들을 낳으셨고 그 아들을 낳으실 적에 성부는 성자를 성령이 발현하시는 근원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라고 진술하였다. 요점은 이것이다.

즉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실 것을 모두 주셨기 때문에 성령을 부여하는 능력을 성자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바는 그러니까 성령이 두가지 근원이나 원리를 가지셨다고 추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창조에 있어서 세 인격 모두의 행위가 공동적이듯이 성령을 부여하시는 데 있어서도 성부와 성자의

행위는 공동적이다. 더구나 이중발현에도 불구하고, 성자가 성령을 부여할 자신의역량을 성부로부터 도출해

내시므로 성부는 원초적인 근원으로 남아계신다.

그리고 성령을 두 분의 선물이라고 부른다. 곧 성부는 성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자도 성부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므로 두 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제를 나누고 연합한다. 성령은 두 분을 하나로 만드는 끈과 같다. 또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로 하나로 만들게 한다. 성부와 성자가 성령으로 말리암아 하나가 된것 같이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또한 이 성령은 삼위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주시는 끈이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공유된 그것을 통해 그분들은 우리들 서로간의 친교, 그분들과 우리와의 친교를 세우시기를 원하셨다. 둘을 하나로 만드는 그 선물을 통해 그 분들은 우리를 하나 됨으로 이끌기 원하셨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선물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며, 그 분을 통해 기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성령은 선물(donum)로 나타내고 신자와 교회와 관련된 경륜적인

의미의 성령은 주어진 것(donatum)이라고 말한다.

 

4) 심리적 삼위일체

 

우리는 이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신학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으로 공헌한 것을 다루게 되었다.

즉 그가 인간 영혼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유비를 사용한 것을 다루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삼위가 절대적으로 하나이시면서도 삼위로 구별된다는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삼위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만물안에는 희미하게나마 삼위일체의

자취가 남아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참다운 형상을 찾으려면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 사람을 우리의 (즉 삼위)형상과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육체의 형상이 아니라 이성적인 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고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에게 참여하고 하나님을 관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여 영혼의 불멸성에 영원히 박혀있다.

겉 사람일지라도 삼위일체에 대한 일종의 유사성을 제공해준다. 첫째 요소는 어떤 의미에서 둘째요소를 낳고

세째요소는 이 둘을 결합시킨다. 즉 외부적 객관과 그 객관에 대한 정신의 감각적 표상과 그 정신을 초점으로

삼는 행위 즉 의도가 그것이다. 여기에 그림이 있다. 정신이 그것을 인식하고 감각적으로 좋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 그림을 산다. 여기서 외부적 객관을 제거하면(곧 그림을 제거하면) 우리는 제2의 삼위일체를 가지게 된다. 기억과 그기억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의지의 설정으로 한층 더 우월한 삼위일체를 가진다. 

"따라서 기억과 이해와 의지, 이 셋은 세 생명이 아니며 한 생명이며, 세 정신이 아니라 한 정신이므로

필연적으로 세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적인 신성의 참다운 형상을 찾으려면 속사람 즉 영혼을 보아야한다.

속 사람중에서도 인간의 이성적 본성인 정신을 보아야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가장 높은 그리고 매우 하나님다운

부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의 말을 시발점으로 사랑이라는 관념을 삼위일체의 유비로 삼는다.

사랑하는자(amans), 사랑받는 대상(quod amatur), 과 그 양자를 연합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랑(amor)으로 분석함

으로 드러난다. 그는 존재, 지식,의지의 삼위성을 숙고하면서 이러한 자기정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세 가지 연속적 단계로 상승하여 결국 하나님을 향한 정신활동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a) 정신과 자신에 대한 정신의 지식과 자신에 대한 정신의 사랑 (b) 기억 혹은 더 적절한 표현으로는 자신에 대한 정신의 잠재적 지식과 오성 즉

영원한 이성의 빛에 비추어 본 오성의 자기파악과 의지 혹은 자신에 대한 사랑 (c) 하나님 자신을 기억하고

깨닫고 사랑하는 정신으로서의 삼위일체이다.

그는 정신이 기억하고 깨닫고 사랑하는 모든 능력으로써 그것의 창조주를 향해 초점을 맞출때에만 그 정신이

창조주에 대해 지니고 있는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고 추리했다.

그러나 이런 유비들도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커다란 제한이 있다.

첫째로 인간 정신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어느 경우에나 멀고 불완전하다.'

과연 닮은 모습이지만 멀고 먼 형상이다. 성자 안에 나타난 형상과 거울 속에 나타난 형상은 전혀 다르다.'

둘째로 인간의 이성적 본성이 위에 언급한 삼위일체들을 보여주지만 신성의 삼위일체가 존재하는 방식이 인간의 존재방식과 전혀 다르다. 신적인 본성은 완전히 단순하다.

세째로 이것에서 나온 논리적 결론으로는 기억과 오성과 의지가 제각기 작용하지만, 세 인격은 상호적으로 성품을 공동으로 타고난 것이고 인격들이 행동으로 하나의 나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성에 있어서는 삼위일체의 세 지체들은 인격들이지만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는 한 인격이다. "인간의 정신에 나나탄 삼위일체 형상은

한 인격이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 그 자체는 세 인격이다" 그렇지만 인간 정신속에있는 삼위일체보다는 성삼위가 더 불가분리적으로 하나임을 성찰할 때 그것은 하나의 파라독스이다.

그러나 이같은 파라독스가 우리가 지상에 있을 동안에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거울 속에서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나중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볼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결   론

 

카파도기아 교부로 대표되는 동방의 삼위일체론과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공동의 신앙 유산에서 발전되었지만 ,일정한 차이를 보여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성령의 이중발출 문제는 중세를 거치면서

동,서방교회의 신학적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4세기 삼위일체의 논쟁


서론.

 

4세기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야기된 논쟁은 급기야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325년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게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일뿐 아니라,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삼위일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곧 제국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는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교회, 하나의 신앙이란 신념을 실현 시키고자 친히 교회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의  교회회의 소집자는 주로 황제이다. 

여기서 도출된 하나의 신조를 토대로 제국의 통일을 도모하려 했던 황제는  이 신조에 반대하는 자들을 회유, 협박하거나

면직, 유배를 보내곤 하였다. 아타나시오스가 다섯 번의 면직과 복직을 반복한 것은 비단 아타나시우스 뿐 아니라 많은 주교와 사제가 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이 시기는 삼위일체론 신앙이 교회회의를 통해 신조형태로 많은 신조들이 탄생한 "신조들의 시대"일 뿐 아니라, 기독교가

제국에 편입되면서 제국의 정치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고 ,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힘겨루기까지 겹쳐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갔다. 도저히 해결될 것 같이 않던 삼위일체가 381년 두번째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정적인 정의를 마련하는데 성공함으로 삼위일체는 일단락된다 .여기서는 그 과정을 전개하려 한다. 

특히 아리오스와  아타나시오스를 주목해야한다.

 

A. 아리오스논쟁과 니케아 공의회

 

1.아리오스(280-337)

 

아리오스의 논쟁은 논쟁의 첫단계인 318-337년에만 적용된다.

그는 280년경 리비아에서 출생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제로서 바우카리스 교회를 지도했다.

아리오스는 성서를 주해하고 설교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변증과 논리에 능한자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가르침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갈등을 빚게되자 알렉산드로스 주교는 이집트와 리비아의 주교들을

불러 교회회의를 열고 아리오스와 그 추종자를 정죄하고 면직한다. 상황이 불리해진 아리오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 주교를 비롯한 여러 주교에 도움을 요청하자 동방교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는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니케아에서 최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한다.

 

 

2.아리오스의 사상

 

그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을 설명했다.

그는 초월적이고 자존적인 하나님과 그로 부터 나온 아들 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한다.

'아들은 시작은 있지만 아버지는 없다' '아들은 무시간적으로 지어졌지만 동시에 무로부터 생겼다'.

아들을  '변할 수 있는 피조물의 영역에 포함시켰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동일 본질이 아니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파악할 수 없으며, 아버지가 보여주는 분량 만큼만 보실수 있다

아들은 고유한 본성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가변적이고 죄를 지을수 있는 존재지만 '행실의 부지런함과 수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순종과 덕행으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3.니케아 공의회와 니케아 신조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인한 교회 분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코자 제국내 모든 주교를 니케아 황궁으로 불러 325년 6월 19일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는 거의 두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아리오스 논쟁 외에 부수적인 문제 곧 부활절을 춘분이후 첫번 째

만월 후 주일에 지키도록 정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오스에 대한 결정이었다.

공의회는 아리오스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다음과 같은 신조를 작성한다.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ek tes ousias tou  patros)나신 홀로 나신분(독생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 빛으로 부터 비롯된 빛,참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

(poiethenta),나셨으며(gennethenta)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homoousion to patri),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내려오셔서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받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오르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그분은 나시기 전에는 없었다'

'그분은 무로부터 생겼다'라고 말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상이한 실체 혹은 본질로 이루어졌거나, 피조물이고  

변할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말하는 자들은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파문하노라.

 

니케아 신조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밝힌는데 초점을 맟추고 있다.

이 신조에 따르면 아들은 무로부터가 아니라 '아버지로 부터',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기원을 가진다. 또한 '나시다'라는

단어와 '지어지다'라는 단어를  구분하여 아들의 기원과 만물의 기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다.

이 신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아리오스가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본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2명의 주교를 제외한 모든 주교가 이 신조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소수였다고 보이며 , 대다수는 아리오스파의 가르침에 동조하지는 않을 지라도 니케아 신조를 완전히 지지할 수 없었다.

이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두드러진 역활을 하지 못하다가 아타나시오스가 350-351년 "니케아 공의의 규정"을 저술하고 ,니케아 신조와 이 용어를 변호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4. 니케아 회의 이후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안에서 일어난 분쟁이다.

니케아 신조가 확정되었을 때 서방교회는 이 신조를 대체로 찬성하였으나 동방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325년 니케아 신조가 확정되고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을 때 까지 황제는 이 신조를 극히 신성한 것으로 여겨 수호했지만,아리오스에

가담했다가 유배를 당했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후에 콘스틴티노플의 주교가 됨)와 유조니우스 그리고 아리오스와

니케아의 테오그니스를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다는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받고 그들을 다시 복직시켜 주었다.추방되었던 아리오스파 지도자들이 돌아오자, 겉으로는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였으나  속으로는  반 니케아파를 구성하고 ,니케아파의 열렬한 지지자들인 안티오키아의 유스타티오스,앙키라의 마르켈로스,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를 파면,

추방시키도록 공략하여 결국 니케아 신조를 무력하게 만들려고 했다. 이 시기는 바로 니케아의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1) 안티오키아의 유스타티오스

 

안티오키아의 주교 유스타티오스는 니케아 신조의 수호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했으며, 유세비오파(반 니케아파의 수장)에 맞서 오직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만 가진다고

가르쳤다. 하나님과 로고스는 한 위격(hypostasis=ousia) 이지만 서로 구분된다.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들이며,본성적으로 하나이며, 아버지의 형상이요, 창조되지 않고 나셨으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사들과 세계가 지어졌다.

또한 로고스는 지혜이며 영이며 신적인 능력으로 아버지와 로고는 공동으로 일하신다.

그가 성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가 삼위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유스타티오스는 특별히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오스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는 카이사이리아의 유세비오스가 니케아 신앙을 변조시키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에 대해 유세비오스는 유스타티오스를 사벨리오스 주의로 공격했다.결국 유스타티오스는 327년 유세비우스가 주재한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에서 면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를 트라키아의 크라야누폴리스로 유배했다. 그가 면직된후 그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주교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회를 만듦으로 안티오키아 교회는 수십년 동안 분열이 계속되었다.

 

 

2)앙키라의 마르켈로스

 

니케아 신조의 대변자였던 마르켈로스는 극단주의로 대표된다.

마르켈로스는 삼위나 세 인격등을 언급하지 앟고 오직 한 인격(hen prosopon), 한 위격(mia hypostasis), 한 본질

(mia ousia)만 강조했다. 이 하나님은 나뉠수 없는 하나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안에서 구분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 특히 창조와 말씀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존재안에서 분리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직 로고스의 실제적인 활동 안에서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분리가 일어 났을 뿐이다. 하나님은 안식의 영으로 불가분리적으로 존재하는 단일자(monas)이며, 실제적인 활동에서만

삼위(trias)로 확대된다. 마르켈로스는 아버지와 로고스와 성령의 세 경륜을말하기 보다는 로고스-아들의 두 경륜을

주장했다.

첫째 경륜은 성육신 이전의 사역, 즉 하나님 안에서의  로고스의 활동과 관련된다.

둘째 경륜은 성육신의 사역으로 이 기간동안 성령은 아버지와 성육신하신  분으로 부터 나온다.

마르켈로스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이 두번째 경륜과 연결시켰다.콘스탄티누스황제는 336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마르켈로스의 문제를 상정했고, 그는사벨리오스파로 몰려 면직되어 유배되었다.

그는 로마로 가서 서방교회의 지지를 받아 340년 50명 이상의 서방주교들이 참석한 교회회의에서 복권이 결정되있으며

이후

그는 동,서방교회의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다가, 345년 밀라노교회회의를 계기로 그에 대한 지지 분위기가 바뀌었다.그

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죄되었다.

 

 

3) 아타나시오스

 

327년 니코메디아 교회회의는 아리오스를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으며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스에게 아리오스를 사제로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아타나시오스는  세계공의회에 이단으로 정죄된 자를 교회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들은 331년 아타나시오스를  갖은 죄목을 들어 고소했고,

결국 335년 티로스 교회회의에 의해 아타나시오스는 정죄되고 면직되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트리어로 유배되었다.

 

 

B.  동,서방교회의 갈등과  다양한 신조들의 탄생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망 이후 제국은 그의 세아들인 콘스탄티누스2세,콘스탄스,콘스틴티우스2세에 의해 분활통치

되었으며,유배된 아타나시오스의 복귀문제로 동,서방교회의 갈등, 신학적대립, 그리고 340년 이후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의 권력투쟁으로 삼위일체 논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

 

 

1.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와 신조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사망이후 삼위일체 논쟁은 동방의 유세비오스파와 서방의 니케아파의 대립구도로 진행되었다.

서방의 콘스탄티누스2세와 콘스탄스황제는 서방에 유배된 동방의 주교들 아타나시오스,마르켈로스,파울로스등의 귀환을 허용했지만 유세비오스파와 콘스탄티우스황제는 이 니케아파의 주교들의 귀향을 허용치 않고 다시 추방했다.

이들은 다시 로마로 피신하여 교황 율리우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교황 율리우스는  콘스탄스 황제의 지지를 얻어 340년

교회회의 열고 이들의 면직 조치가 부당하다가 선언했다.

동방의 유세비오스파는 341년 1월6일 콘스틴티우스 황제를 대동하고 안티오키아의 "황금예배당" 축성예식에 모여 세를

과시하고 동방교회와 관련된 소송건에 로마가 항소 법원이 될수 없다고 주장하고 세가지 신조를 가결했다. 

이 신조들은 단일신론 특히 마르켈로스의 견해를 공격하고, 아리오스파의 가르침과 니케아신조를 모두 거부하는

중도파의 견해를 표현했다.

첫째 신조은 본질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홀로나신 분으로 모든 시대 이전에 존재하시고 그 분의 낳으신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 아들은 영원히 왕과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함으로 마르켈로스를 경계했다.

마르켈로스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성육신 이후 시작되었으며 ,400년이 안되 종말을 맞을것이며 ,심판이후에는 끝난다고

주장했다.

두번째 신조는" 제2안티오키아 신조"로 불리는데 아들에 대해

" 아버지의 신성과 본질과 의지와 권능과 영광의 불변의 형상" 이라고 규정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니케아 신조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마르켈로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또한 아들의 나라는 무한한 시대까지 영속적으로  존속한다고 규정하여 마르켈로스를 반박했다.

또한 이 신조의 중요한 부분은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 위격으로 규정한 부분인데 서방측은 위격을 실체로 이해하고

존재론적인 종속론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것은  신학적 갈등의 핵심이 되었다.

이 신조는 아들을 피조물, 생겨난 것, 지어진 것으로 말하는 자들에 대한 정죄를 선언하여 자신들이 아리오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세번째 신조는 아들이 "시대를 이전에 아버지로 부터 나신분,완전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완전한 하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 위격적으로 존재하신다"고  고백하여 마르켈로스, 사벨리오스,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견해에 동조하는 자의

정죄로 신조를 끝맺는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유세비오스가 죽자 주교직을 빼앗겼던 파울로스가 유배지 폰토스에서 돌아와 주교직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파울로스를  쫓아내고 마케도니우스를 새 주교로 임명했고 파울로스는 트리어로 도피했다.

이에 서방의 황제 콘스탄스는 파울로스와 아타나시오스의 면직된 이유를 묻자 동방의 주교들은 342년 여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회의를 열고 "제2안티오키아 신조"를 약간 수정한" 제4안티오키아 신조"를 서방황제에게 제시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변호했다.

이 신조는 본질이나 위격 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자신들이 아리오스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2.세르디카 교회회의(343년)와 안티오키아 교회회의(344)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했다.

동방교회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렸던 영토 곧 이집트,그리스,그리고 소아시아(터키)에 있는 교회를 말하며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이에 비해 서방교회는 로마,갈리아(프랑스),스페인 지역에 있는 교회를 말하며 주로 라틴어를 사용했다.

동방교회의 분열에 서방교회가 개입하면서 갈등이 커간 것이다. 이에 서방의 콘스탄스 황제는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동,서방 연합 교회회의를 열 것을 주장했고,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마지못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343년 늦 여름 많은 주교들이 동,서방 제국의 경계지역인 세르디카(소피아)에 모여 들었다.

그러나 서방 주교들은 동방 주교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타나시오스와 마르켈로스의 정죄를 무효화하고 교회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동방 주교들은 회의 참여를 거부하고 동방 황제의 영토인 필리포폴리스로 물러나 장문의 공식 서한을 작성하고,

342년 작성한 '제4 안티오키아 신조'와 동일한 신조를 첨부하여 서방 주교들에게 보냈다.이에 세르디카에 모인 서방 주교들은 동방 주교들의 행태와 그들의 삼위일체를 맹렬히 공격하는 공의회 서한을 작성했다.

이 서한에는 먼저 동방교회에서 면직된 아타나시오스,마르켈로스와 아스클레파스는 무죄이며,그들은 곧 복직되어야 하며,이들을 정죄에 앞장선 테오도로스,나르키오스, 스테파노스, 우르사키오스,발렌스,퀸티아노스등의 주교들은 면직되고  

파문되어야한다고 했다.

또한 삼위일체에 관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위격들이 다르며 구별된다는 것을 공격했으며,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본질(ousia)이라고 부르는 위격(hypostasis)은 하나 라고 주장했다.

요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한 것은 위격의 하나됨을 말한다.이 선언은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는

나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고 밝혀 마르켈로스의 주장도 반박했다. 또한 성령에 대해  "우리는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믿고 인정하며 성령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고 선언한다. 이는 우르사키오스와 발레스가 말씀과 성령이 모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교회일치를 이루려던 세르디카 교회회의는 오히려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서방 주교들은 동방의 세위격론이 아리오스주의로 삼신론을 주장한다고 공격했고, 동방 주교들은 서방의 일체론이 단일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380-450)는 양편이 서로 상대를 놀랍게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상대방을 헐뜯고 악평하던 그 근거에 대해 캄캄했다고 한다.그 가운데는 그리스어의 위격(hypostasis)을 라틴어의 실체

(substantia)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도 한목했다.그 단어는 persona로 번역했어야 했다.


세르디카에서 작성된 서방 주교들의 서한은 344년 년 카푸아의 빈켄티우스와 콜로뉴의 에우프라테스 두 주교에 의해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이에 동방 주교들은 344년 안티오키아에 모여 교회회을 열고 "장문 신앙고백"을 작성했는데, 이문서에는 제4안티오키아신조,세르디카 교회회의에서 파문된 자들의 명단,삼위일체에 대한 일곱항의 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선언에 의하면, 아들은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나셨다.알수없고 이해할 수없는 방식으로 아들을 나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원이 없으되 아들은 기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실재와 인격을 고백하는 것은 세 신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요 홀로 나시지 않으신 분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대들

이전에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아들의 신성을 명시적으로 주장했다.

본성상 시대들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완전한 참 하나님이시다. 시대들 이전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과 중보자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으며, 동정녀로 부터 태어 났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거부했다.

교리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완전하며,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비숫하다'고 했다. 아들의 출생은 필연에 의하지 않고 아버지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나셨다고 하는 니케아신조의 가르침을 논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연합과 구별에 대해 말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직접적이며,뗄 수 없이 연합되며 나뉠 수 없게 존재하며 지극히 거룩한

삼위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믿으며,아버지를 하나님이라 부르며, 아들을 하나님이라 부르면서도 이들이 두 신이

아니라 한 신성의 존귀, 정확한 단일통치의 조화를 고백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선언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면서도 성령에 대해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344년 안티오키아 교회회의는 4명의 주교를 서방에 보내 서한을 전했으며 345년 콘스탄스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밀라노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방의 선언이 서방과 신학적 타협을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서방교회가 어느정도 동방의 삼위일체를 이해한 듯 보인다.

 

3. 아타나이시오스의 복귀와 유배, 시르미움의 신학선언

 

345년 알랙산드리아 주교 사망으로 아타나시오스에게는  유리한상황이 만들어 졌다.

콘스탄스 황제는 즉각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아타나시오스를 복귀시키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346년 아타나시오스는 알랙산드리아로 복귀했다.

그러나 350년 찬탈자 마그넨티우스에 의해 콘스탄스 황제가 살해 되자  동방 주교들은 351년 시르미움 교회회의를 열고

아타나시오스를 면직시키고 342년 작성했던 "제4안티오키아 신조"를 다시 확인했다.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콘스탄스 황제의 죽음으로 자신이 면직되자 "니케아 공의회의 규정"을 저술하고 동일본질

(homoousios)이란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351년 시르미움 교회회의를 이단적인 견해라 공격했다.

이러한 아타나시오스의 문제 제기로 인해 니케아 신조에서 나타난 '동일본질'이란 용어가 다시 신학적인 논쟁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35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찬탈자 마그넨티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의 단독 통치자 된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 아타나시오스를 주교에서 몰아내자 그는 이집트 광야로 은신한다.

황제는 357년 교황 리베리우스를 강요하여 351년 시르미움 공의회의 신조를  받아 들이게 할뿐 아니라 코르도바의

호시우스도 황제의 압력으로 여러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니케아 신조를 정면으로 거부한 이 신학선언에 서명했다.

흔히 "시르미움의 신성모독"이라고 알려진 이 선언은 주교회의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인정되고 서명된 신조라기

보다는 이론적인 진술이며 따라서 정죄문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이 선언은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왔던 '동일본질'이란

용어를 언급하거나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동시에 이 선언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버지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한다. 아버지는 영예, 존귀, 영광과 엄위에서 아들보다 크시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한다.

 

 

4. 급진파의 등장과 성령론 논쟁

 

1) 성령론 논쟁

 

삼위일체 논쟁은 350년 대 말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

이집트에 아들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성령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나타났다.

아타나시오스는 그들을 '에둘러 말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방식', '비유'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오스는 아들뿐만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성령론에 대한 논쟁은 아타나시오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고 완전한 삼위일체 신학을 펼치도록 도왔다.

 

2) 급진파 아에티오스와 유노미오스

 

아에티오스는 "하나님의 나시지 않음과 나심에 대한 가르침"에서 '상이본질'을 변호하며 나시지 않은 아버지와 나신 아들과의 본질적 차이를 설명했다. 그의 제자가 유노미오스인데 그는 아에티오스의 사망 이후 상이본질파의 주요한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유노미오스파로 불리운다.유노미오스의 가르침은 이러하다.아버지의 본질은 '나시지 않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출생은 본성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의해 나셨다는 이른바 의지출생을 강조하고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고 말하는 본질출생을 가르치는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오스를 비판했다. 그는 본질과 행위를 분명히 구분한다. 본질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서는 안된다. 본질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단순하지만, 행위는 시작과 끝이 있다.아들은 아버지의 자유로운 의지의 행위로

존재하게 되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과 뜻에 복종하며 아버지와 동일본질도 유사본질도 아니다.

그는 아들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성령의 신성도 부인한다.아버지의 피조물은 아들이며,아들의 피조물은 성령이다.

성령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아들의 행위로 지어졌으며 만물중에 으뜸이요 가장 크신 분으로 홀로 나신 분의 유일한

피조물로 신성과 창조의 능력은 없지만 거룩하게 하며 가르치는 능력으로  존경받아야한다.

이러한 급격한 주장은 삼위일체의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5.유사본질파와 유사파의 등장

 

아에티오스와 유노미오스의 급진적 가르침은 니케아 신앙을 반대하는 데 일치를 보였던 동방 주교들을 분열시켰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유독시오스는 아에티오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주교들을 중심으로

안티오키아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357년"시르미움 신학선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했다.

유독시오스의 이러한 행보는 라오디키아의 게오르기오스와 앙키라의 바실리오스를 비롯한 소아시아 주교들을 경악시켰다. 그들은 앙키라 교회회의를 열고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에서 유사하며 '아들이 본질에서 다르다는 것은 그분이 아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긴 선언문을 발표했다.

바로 유사 본질파가 출현한 것이다.

앙키라의 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설득하여 상이 본질파인 유노미오스와 아에티오스를 비롯한 70명의

반대파를 유배시키고 유독시오스를 아르메니아로 보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동방과 서방에서 2개의 회의를 열어 교회일치를 이루려고 했다.

서방은 359년 7월에 아리미눔에서 모여 회의를 열고, 동방은 359년 9월에 셀레우키아에서 모임을 열었다.

이에 앞서 황제는 아리미눔과 셀레우키아 교회회의에서 인준을 받게될  신조의 초안을 359년 5월22일 시르미움에서

승인한다. 바로 이 신조를 가지고 동,서방교회는 회의를 열게된다.

이 신조는 그리스도의 음부로의 내리심에 대해 언급하는 최초의 신조이기도 하다.이 신조는 전문적인 용어를 배제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유사파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신조는 다음과 같다.

 

'본질'이라는 용어가 충분한 숙고없이 (니케아 공의회의)교부들에 의해 채택되었고 성서가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실족거리가 되므로, 이 용어를 제거하고 앞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결코 본질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성서는 어디서도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본질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성서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로 아들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유사하다(homoion)고 선언한다.

 

이 신조는 각 정파의 입장을 중재하고 모두가 인장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만들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 신조의 초안을 가지고 서방 주교들은 아리미눔에서 359년 7월에 모여 숙의했다. 그들의 결론은 이러하다.

그둘중 다수파는 357년 시르미움 신학선언을 니케아 신조의 폐기로 보고 니케아 신조의 고수를 주장했다.

그리고 니케아 신조를 폐기하고 새로운 신조를 만드려 했다는 이유로 소수파를 정죄했다.

다수파와 소수파는 각각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지만 황제가 준비한 유사파 신조가 다수파 주교들에게 거부당한 것을 달갑게 생각지 않은 황제는 그들을 니케로 보내졌고 결국 황제의 위협과 압력에 굴복하여 359년 10월 10일에  새 신조(니케의 신조)에 서명했다. 새 신조가 초안과 다른점은 아버지와 유사하다는 말 다음에  "모든면에서"가 생략되었으며 삼위일체 신학에서 본질뿐아니라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 했다는 것이다.

359년 9월 셀레우키아에서 개최된 동방 주교들의 회의도 초안으로  제시된 유사파 신조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다수파는 동일 본질이라는 용어만 제거하고 거의 수정없이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기를 주장했지만( 이때 힐라리우스는

서방주교로 동방교회 회의에 참여하여 새로운 신조를 거부하게했다) 

소수파는 니케아 신조를 대체하고 새로운 신조를 만들자고 하면서 초안과 비슷한 유사파 신조를 제시했다.

결국 다수파는 소수파의  주교 아카키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게오르기오스, 안티오키아의 유독시오스 주교를 면직시겼다. 다수파와 소수파는 각각  황제에게 사절을 보냈는데 황제는 소수파를 환영하고 다수파에게는 위협과 회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결국 359년 12월31일 동,서방 교회 회의의 사절이 황제의 유사파적 신조를 인정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회의 대표가 유사파적 신조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360년 1월 72명의 주교가 콘스탄티노플에 모여 니케에서 기초된 신조에 기초하여 새로운 신조를 만들고 이후에는 어떠한 신조도 만드는 것을 금했다.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마케도니오스, 키지코스의 엘레우시오스, 앙키라의 바실리오스,셀레우키아의 네오나스,

폼페이오폴리스의 소프로니오스,예루살렘의 키릴로스등 아카키오스의 정적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결국 유사파가 승리하게 되었고 이것은 제롬으로 하여금 '전세계가 온통 아리우스파인것을 발견하고 신음하고 놀랐다'고

쓰게 만든 상황이다. 이시기는 아리오스파와 사벨리오스파 사이의 일대혼전이었다고 볼수있다.

두파는 서로 그런 별명을 붙여 욕설을 하였으나 그 별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실수한다.

이 신학적 논쟁에서 특히 주목할 인물이 힐라리우스다.

그는 서방의 주교로 유배생활중  동방의 삼위일체 신학을 면밀히 조사하고는 유사본질이 동일본질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가서 니케아 신조를 굳이 바꿀 필요가 없고 니케아 신조를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는 니케의 신조를 확정하고 힐라리우스와 뜻을 같이 하는 주교들을 탄압했다.그는 『콘스탄티우스 논박』을

저술하고 황제를 폭군이요 적그리스도라 지칭했다. 이러한 힐라리우스의 주장은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주교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회를 타 부황제 율리아누스는 갈리아에서 자신이 황제라고 선포하고 콘스탄티우스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6.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362)

 

361-381년에는 삼위일체 대한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361년 콘스틴티우스 황제의 사망으로 율리아누스가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면서 그는 이교정책을 펼쳐 개혁을 돌이키고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유배된 주교들을 복귀시키면서 362년 아타나시오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362년 아타나시오스 지도하에 니케아파는 362년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역사적인 전환점을 가져다 준 교회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교회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니케아 신조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는 하나의 본질과 세위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받아들였다.그들은 거룩한 삼위가 실재로 존재하며 하나의 신성,

하나의 원리를 알고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며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오스는 이들의 주장이 니케아 신조와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또한 한 위격만 주장하는 자들도 받아 들였는데 이는 '자기들은 사벨리오스처럼 생각지 않으며 위격과 본질은 같은 것이며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나오신다는 사실과 본성이 동일하다는것 때문에 하나의 위격이라고 주장한다'는 답변을 듣고 이들도  니케아 신조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타나시오스와 함께 이 회의를 주도했던 베르켈라이의 유세비오스는 서방지역으로 가서 푸아티의 힐라이우스와 로마의

리베리우스와 손잡고 3년전 아리미움에서 지어진 유사파 신조 때문에 생긴 모든일을 처음으로 되돌려 놓았다.

율리아누스의사망으로 요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아타나시오는황제에게 니케아 신조만이 정통이라 강조했다.

메레티오스 주재아래 안티오키아에서 회의가 열려 주교들은 교회일치를 위해 니케아 신조를 받아 들인다고 결의했지만

니케아 신조에서 동일본질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와 '본질에서 아버지와 비슷하다'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7. 발렌스 황제의 박해

 

요비아누스 황제의 사망으로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그는 자기의 동생 발렌스를 동방의 황제로 임명했다.

발렌틴아누스는 니케아 신앙의 추종자 였지만 발렌스 황제는 360년 유사파 신조를 동방의  공식적 신조로 삼았다.

370년 발렌스 황제는 니케아파를 비롯한 비유사파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378-379년에는 새로운 정치적 상황으로 삼위일체 논쟁은 결정적 전환점을 맞게된다.

고트족이 다시 쳐들어 오자 발렌스 황제는 정통파 주교들을 다시 복권하고 전쟁터로 나가 378년 8월 아드리아노플 근처에서 목숨을 잃는다. 379년1월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를 동방 황제로 선출하고 두 황제는 모두 니케아 신조를 고백한다. 동,서방 황제가 모두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면서 니케아파는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맞이 하였고  동방과 서방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였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사본질파가 동일본질을 받아 들이는 쪽으로 점차로 전환했다

는 것을 보여준다 

 

 

C.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와 신조

 

1.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381)와 성령대적파

 

379년 1월 동,서방 두 황제가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379년 3월 두 황제의 이름으로 모든 이단을 금하고 정통 교회에 유리한 법령만을 인정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379년 가을에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오스의 주도하에 153명의 주교가 안티오키아에 모여 로마 교회와의 신앙의 일치를

밝혔다.380년2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유명한 Cunctus populos 란 칙령을 발표하여 교황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주교가 고백하는 신앙을 따르는 자들만이 공교회의 교인 될 수 있으며 이 신앙은 "동일한 권세와 거룩한 삼위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고 밝혔다.

381년 1월의 칙령은 이단들이 교회당을 소유하고 도시에 머무르는 것을 금하며 교회당을 공교회측에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성령론 문제와 안티오키아 교회의 분열 문제로 381년5월 150명의 주교가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플에서 역사적 공의회를 개최했다.공의회의 가장 중심적인 신학적인 문제는 성령론 문제였다.350년대 말 이집트에 "에둘러 말하느 자들"

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아들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성령의 신성은 인정하지

않고 '피조물,섬기는 영,더 나은 천사' 라고 주장했다.그러다 375년경에 성령의 신성을 반대하는 자들이 유노미오스의

제자들로부터 유사본질파의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380년경

성령대적파는 뚜렷한 집단을 형성하여 공동전선을 폈다.

그래서 이 문제도 공의회에서 시급히 다루어야 했다.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해설하기 위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작성하였으며 교회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규정은 콘스탄티노플을 '새 로마'로 규정하고 로마에 다음가는 영예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2. 니케아-콘스탄노플 신조(381)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니케아 신조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니 케 아 신조(325)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381)

    

 

     우리는 한 하나님,전능하신

    아버지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로부터,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홀로 나신분,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  

 

 

 

  빛으로부터 비롯된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참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내려오셔서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 받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하지만 "그 분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 분은 무로부터

  생겼다."라고 말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상이

  한 실체혹은 본질로 이루어

  졌거나,피조물이고 변할 수

  있고 변화할 수있다."고 말하

  는자들은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히는 파문하노라.

   

 

 

     우리는 한 하나님,전능하신

    아버지 , 하늘과 땅과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홀로 나신분 ,

 모든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

 

 

 

 

  빛으로부터 비롯된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미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셨으며

  성령과 처녀 마리아로부터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해 본디오 빌라도

  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 받으시고 

  묻히시고

  성서대로 3일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으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없다. 

  또한 우리는 성령,

  주님이시며 살리시는 분,

  아버지로부터나오신          (ekporeyomenon),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으며

 죄를 용서하는 한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자의 부활과

 올 세계의 삶(영생)을

 고대한다.아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아들에 대해 몇가지 중요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본질로 부터'란 말이 빠졌지만 '

동일 본질'이란 말을 분명히 했으며 '그 분의 나라는 끝이 없다'란 것을 붙여

마르켈로스의 가르침을 경계했다. 성령에 대해 성령을 '아버지로 부터 나오신 분'(발출)이라하여 성령의 출처를 명시하여

성령의 신성을 보여주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분으로 영광송에 포함시켰다.

성령에 대해 동일본질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들을 끌어 들이려는 정통파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며,4세기 신조에 많이 나타나는 

보혜사란 말이사용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381년 7월30일 황제는 칙령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정된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위엄과 권능,

동일한영예와 통치를 지닌다고 고백하는 주교들에게 모든 교회를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신조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신학논쟁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공의회다.이후에는 어떤 형태의 아리오스주의도 교회에 근본적인 위협을 줄 수 없었다.

 

D. 결   론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인한 삼위일체 논쟁은 급기야 325년

최초의 니케아 공의회를 열리게 했다. 거기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리기 까지 반세기를 넘게 치열하게 싸우게된다. 

325-381년까지 수많은 교회회의가 열렸지만 정식으로 공의회로 인정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도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하기 어렵다.

서방 주교들은 초대되지 않았으며 대표자도 파견되지 않았다.

공의회에 참여한 주교들도 이 회의를 동방지역 주교들의 회의로 생각했고 황제는 공의회 법령을 동방지역에만 공포했으며 공의회도 결정사항을 로마나 서방 주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열리기까지 431년 에베소 공의회를 두번째

공의회로 알려졌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두번째 공의회로

인정된 것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다.

54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칙령을 반포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성경의 4복음서에 비유하여 '거룩한 네 공의회'라고 선포했다.

325-381년까지 삼위일체를 두고 치열하게 싸운 것이 이제 막을내리게 되었다. 수많은 교회회의가 열렸고 수많은 신조가

탄생했다. 황제가 누가 되는냐에 따라 삼위일체가 결정이 되고 동방에서 벌여진 일에 서방교회가 개입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되던 것이 극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우리는 4세기 삼위일체 논쟁은 단순히 추상적 사변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론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논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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