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청년 설교

학생 설교 23편

하나님아들 2018. 8. 26. 20:30

설교(23편 중등부) 



제목: 거짓 예배 

본문: 렘 7; 8-11 
설교목적 1. 예례미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토대로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대 
에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알아본다. 
2.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본다. 
3.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행복할 수 있고 그분께 순종할 때만이 인류의 삶이 행복질 수 있다. 
설교 본문 배경 
1. 저자 : 예레미야 -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2. 연대 : 기원전 627년에서 586년경 
3. 예레미야서의 목적 : 유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하여 
4. 기록장소 : 예루살렘 
5. 대상 : 유다와 예루살렘의 패역한 지도자와 백성 
6. 배경 : 유다를 괴롭히던 앗수르가 쇠약해지고 새 강국 바벨론이 발흥하여 유다와 애굽을 점령하던 시대. 
저자는 유다의 왕 요시야 시대부터 멸망할 때까지 목도함 
7. 해설 : 하나님께서 순종할때는 축복을 불순종할 때는 멸망을 약속하셨고 이스라엘 은 후자를 택하게 됨에 따라 멸망하게 되었다. 

설교본문 : 8절 ;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절 ;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쫓으면서 
10절 ;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절 ;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회 눈에는 도적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설교 내용 
서론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가지 길을 제시해 주시고 계십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할 때는 복을 받아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양무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곳이며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신명기 28장 3절에서 6절에 약속하셨습니다. 
반면에 불순종할때는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아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즈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한마디로 "내 말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라는 약 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것을 쉽게 알수가 있습니다. 
본문 8, 9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범죄를 알수가 있습니다. 1)거짓말을 의뢰하는 것, 2)도적질, 3)살인,4)간음, 5)거짓맹세, 6) 바알에게 분향, 7)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는 것, 마지막 두 가지는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집"이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얘기 합니다. 즉 온갖 악행이란 악행을 다 저지르면서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하는 말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주여 영광 받으소서"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어쩌고 저쩌고 ......" 이러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의 모습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 당시 시대 상황과 오늘날 현재 기독교인의 상황을 한번 분석하여 보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 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본 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은 바로 이곳 여기 있는 나나 여러분 모두에게 지금 이시간에 성령을 통하여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를 볼 경우 전체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교회가 양적으로 숫적으로 자꾸만 늘어만 갑니다.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학교로 많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각종 많은 신학교들이 있습니다. 이 사회에 기독교인이 늘어가고, 물론 90년대를 기준으로 감소추세에 있다고는 하지만, 신학교 수가 늘어가고 교회의 수가 늘어 간다면 이 사회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웃을 향해서, 정의와 공의를 향해서, 진리를 향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를 보십시오. 이 사회는 날로날로 악해져 갑니다. 정치가 썩었습니다. 성범죄가 늘어갑니다. 인륜도덕이 땅에 떨어진지 오래입니다. 나 밖에 모르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팽만합니다. 청소년범죄, 음주문화, 퇴폐향락 문화, 물질지상주의, 황금 만능주의 시대를 격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병페와 부조리는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바로 나와 여러분과 자칭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탓해야 합니다. 각성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이사회를 변회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동화되어서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믿는 다고 하면서 세상사람들처럼 즐길 것 다 즐기고 마실 것 다마시고 안갈 때 갈 때 다가고 말입니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사람들과 구별이 없는 삶을 살다가 주일에 와서는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도하고 찬양도 하고 말씀도 듣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고 죄사함 받아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도"라고 합니 다. 즉,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 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도라면, 예수를 영접하여 천국백성이 된 사람이라면,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학원에서나 어디서든지 세상친구들과는 무엇인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여 합니다. 근래에 와서 사회가 청소년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근본적인 원인은 모범을 보이지 못한 기성 세대에게 있습니다. 즉, 청소년 음주 및 흡연문제, 교내 폭력문제, 좋지 못한 유행을 따라가려고 하는 문제 ( 여름에는 야한 옷, 배꼽 티, 최근에는 롱 진, 또 머리염색, 짙은 화장, 현란하게 눈에 띄는 옷 등등), 건전치 못한 이성교제, 미팅 폰팅 문제, 저질 음란비디오 시청문제 등등. 
아로헌 문화는 우리 기독교 문화에 역행을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과 동화가 되어있기 때문에 도대체 뭐가 잘못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른다는 애기입니다. 나나 여러분들은 이러한 문화에 너무나 쉽게 노줄이 되어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들이 여러분을 유혹하여 시험들게 합니다. 교회를 멀리하게 하고 말씀을 멀리하게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게 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러한 문화는 사탄이 지배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으로 경건치 못한 모습으로 살면서 교회에서는 거룩한 척, 깨끗한 척, 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볼수 가 있습니다. 즉 이러한 모습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톱니 바퀴에 맡물려서 살아가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거짓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중에 혹시 내가 이러한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깨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증스러운 예배를 경고하셨듯이 지금도 많은 곳에서 드려지고 있는 거짓 예배를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과 행실이 일치하고 교회내의 생활과 교회밖에서의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올바른자를 향하여 귀를 귀울이시고 또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지금도 그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이 하나님을 향아여 볼일 듯이 일어나는 자를 찾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 복이라는 것은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물질적인 것만을 위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 것이 복의 척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배부르고 등따신 것 만이 복이 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현재 가질 수 있는 복은 우선 학생이니까 공부할 수 있는 학습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와 위로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복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사함받아 천국민의 자격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과 말씁에 순종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순종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30장 14절에보면 "오직 그의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즉 여러분은 매일매일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하고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여러분이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합당히 여기시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총체적인 위기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 기독교인의 책임이 큽니다. 이러한 위기는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요 또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신약성경 로마서 12장 1절에서2절을 읽고 생각해보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회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니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구별하도록 하라." 요약하면 1) 너희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3)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하여 분별하도록 하라. 
즉 한마디로 "너희의 삶 자체가 하나님꼐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2.16일 오류동교회 중등부 설교 
예수를 구주로 시인 하는자. 


목적 : 학생들로 하여금 성령의 하시는 일을 알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신앙고백이 있게끔 한다. 


서론 : 본문 12장 3절 후반부 말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를 주시라 시인하는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중거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은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성령께서는 어떤분이며 무엇을 하고 계시는 분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 성령께서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이 자리에서 일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분입니다. 성령이란 그리스도의 영의 줄인말로서 그 분은 우리의 구원과 아주 밀접하고도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계십니다. 즉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심을 믿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 승천하신 분이요 이 땅에 다시 오실 분"이라는 것을 마음 깊숙히 깨닫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레서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이 가능합니다. (복음송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마16장16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배드로의 고백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인간적인 지식과 노력,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일들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기적적인 생애 , 대속적인 죽으심, 사흘만에 부활하심과 승천하심, 무엇보다도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 낮고 낮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일들입니다.(찬404)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엄현한 사실이요, 현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믿게끔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게 하고 신앙고백적인 말을 할 수 있게끔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그리스도의 영)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람의 두뇌에 단순한 지식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속에 실제적으로 임하셔서 믿음을 그 사람 심령 속에 부어주심으로 믿을 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성령깨서는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일은 모두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롬 8장 9절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받은 자, 즉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그리고 구원을 받은 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일어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옆에 있는 우리의 지체인 예수님의 피로 갚주고 산 형제 자매 그리고, 이웃에게 관심을 보이고, 또 전도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바로 성령께서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자기자신을 한 번 접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서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표가나고 얼굴에서 따뜻함과 온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는 얼굴에 환한 웃음꼿이 피어납니다. 사랑이 넘쳐 흘러납니다. 이러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자에게 나타나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맺는 성령의 열배는 갈5장 22절 23절 말씀처럼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첫째,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이고,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자 
히12장 6절-9절, 1997년 3월 2일 오류동교회 중등부 설교 

서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1:12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합니다. 하물며 영적인 아버지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면 영적인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본론 
첫째,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십니다. 육신의 아버지,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부모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다 건강하기를 바라고, 공부잘하기를 바라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신앙생활을 잘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무엇인가 잘못을 했을 때, 즉 예를 들어서 공부하러 도서실이나 학원간다고 해놓고 땡땡이 치고 놀러가거나 이성친구만나러 갔을 때, 주일날 교회 안가고 다른데로 놀러갔을 때, 신앙생활을 게을리 했을 때, 친구하고 심하게 싸우거나 패싸움했을 때, 부모님 말씀 거역했을 때, 말대꾸를 했을 때, 쓸대 없이 반항했을 때(아니 이녀석이 벌써 다 컸다고 반항하네 어쭈구리) 부모님은 여러분에게 좋은 소리 안합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남의 자식이야 어찌됬든 상관 없지만 내 자식이니까 야단치고 잔소리 합니다. 왜 사랑하니까 앞으로 더 잘되라고. 하물며 눈에 보이시지는 않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어서 독생자까지 이 땅에 보내신 영적인 영의 아버지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했을 때, 말씀을 게을리 했을 때, 부모님께 불효할 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행동을 했을 때, 우리 하나님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리고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징계를 하시고 또 채찍질을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하십니다. 때로는 환경을 통해서, 때로는 질병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징계를 하십니다. 이러한 징계는 우리 인간의 죄의 댓가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잘못을 했는데도 징계가 없고 아무일이 없고 만사가 형통하다. 이러한 자는 바로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닌 것입니다(8절). 이 세상에 보면 부정으로 돈을 축척하여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데도 이러한 사람들은 징계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냐 하면 바로 구원에서 제외된자요 남의 자식이요, 남의 아들입니다. 그들은 나중에 심판을 받습니다. 시편 1편 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땅에서 망하지 않는다면 저 땅에서 망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우리는 더욱더 복종하여 살아야 합니다(9절).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은 가장 축복된 삶이요, 평안한 삶입니다. 이러한 평한은 세상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주님이 그 자녀에게 주시는 평화입니다. 요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새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또 이러한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왜 되는일이 없지, 만사가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하지, 나는 아마 복이 없는 모양이야, 아! 열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불평만 할게 아니라 그 때에는 내가 왜 이런지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앞에 바로 서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말입니다. 

결론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온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합시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누립시다. 복된 삶 














3월 23일 오류동교회 중등부 설교 

설교본문 : 골로세서 3장 12 - 17 
설교제목 : 사랑의 띠 
요 지 : 1) 용서 + 사랑 = 온전하게 매는 띠. 
2)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3) 감사하는 자가 되라 
4)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5) 무었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6)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서론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애매하고 모호하여 정의를 내리기 힘이 듭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 표현하자면 무한한 사랑, 한없는 사랑, 아들을 십자가의 형벌에 두시기지까지 우리를 아끼시는 사랑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최고로 나은 표현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몸소 실천을 하고 닮아가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사랑의 실천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사랑이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인지를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먼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용서는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인간이 되셔서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마땅히 우리의 형제나 자매의 잘못을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를 하나들겠습니다. 옛날 중동의 어느 나라에 대단히 훌륭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너무나 훌륭하시어 지금도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극히 드물 정도입니다. 그 분을 따르는 제자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중에 아끼시는 어느 제자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만일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라도 해 주어야 합니까?" 이 때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얘야, 일곱 번이 뭐니?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해주어야 한단다. 내 얘기를 한 번 들어볼래? 옛날 옛날에 어느 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단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는 한 1억 정도의 빛을 진 종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 종이 애원을 했어, 조만 간에 돈을 갚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고 용서해 달라고....., 그래서 그 주인은 그 종을 용서해 주고 돈도 다 갚은 걸로 해 주기로 했단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벌어졌단다. 뭐냐면 그 종에게는 한 백만원 정도 빛진자가 있었대. 그런데 그 종은 금방 그 주인이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준 것을 잊어버리고 백만원 빛진자를 뭐라고 막 혼내면서 자기 집에 있는 옥에다 가두어 버렸대, 참 우스운 일이지. 자기는 1억 정도의 큰돈을 용서 받아놓고 자기한테 백 만원 정도 빛진자에게 학대를 하다니. 만약 이 사실을 그 부자 주인이 안다면 어떻게 하겠니? 나 같으면 아마 돈을 다 갚으라고 하고 그러고 혼을 내줄 꺼야."라고 그 선생님은 자기 제자에게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얘기일까요? 예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용서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마18:21-35).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이런 기도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신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오늘 본문에도 이 말씀을 인용해서 사도 바울 아저씨가 골로새 교인들에게 하여 주시고 계시고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해 주고 계십니다. 13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러하고". 이러한 용서는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사랑이 없는 용서는 도리어 용서가 아니라 거만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그러한 능력이 있게 때문에 상대방을 그냥 봐주는 것으로 여기게 되게 때문입니다.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고 영혼이 있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 그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용서에다가 사랑을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말합니다. "온전하게 매는 띠" 즉 "사랑의 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송에도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16절 말씀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는 말을 우리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있어야 되겠고,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됩니다. 새로 나온 친구라고 해서 소외감(가나현 학생)을 느낄 필요도 없고 또 그 친구를 어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핍박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물려 우리의 형제 자매는 어떻겠습니까? 16절 말씀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야 하겠고 그렇게 함으로써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좋은 말로 충고를 해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말자이말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말도 조심하고 서로의 감정을 중히 여기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17절에는 이렇게 기록을 해놓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결론 
하나님의 사랑을 듬북 받고 자라고 있는 여러분!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됩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서 살아갑시다. 나나 여러분이나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님으로부터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요 귀합니다. 그리니 서로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사랑의 띠를 형성합시다. 





제목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일시 : 1997년 4월 13일 오전 9시 
장소 : 중등부 예배실 
대상 : 중등부 
본문 : 마11장 : 28-30 
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하시니라 

요지 : 1.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만이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2. 우리에게 있는 짐이 무엇이 있는지를 점검하고 이 짐을 모두 예수그리스도에게 내려놓 을 수 있는 믿음이 있게 한다. 
3.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신앙을 기른다. 

서론 
어른 아이를 불문하고 인간은 이 땅에 사는 한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 짐가운데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짐이 있는가 하면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질 수 있는 짐이 어떤 것이 있는 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걱정과 염려가 있습니다. 학생의 경우를 보면 내일 있을 시험이 걱정이 되고, 시험을 못 봐서 선생님에게 야단맞고 부모님에게 야단맞을 것이 걱정이 되고, 친구와 싸우고 나서 그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걱정이 되고, 또 숙제가 밀려서 미쳐 하지 못해서 걱정이 되고, 오늘은 일요일인데 내일 학교 갈 일이 걱정이 되고, 외모에 대한 걱정, 너무 살이 쪄서 걱정, 너무 살이 안 쪄서 걱정, 공부에 대한 열등감, 집이 부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 하여튼 우리는 걱정의 연속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생인 우리도 이렇게 많이 걱정을 하는 데 어른들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여러분과 같은 자녀가 말을 안 들어서 걱정, 공부를 전혀 안해서 걱정, 자녀의 가출문제로 걱정, 자녀 교육비 때문에 걱정,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걱정,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걱정등 많은 걱정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대부분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들입니다. 어떤 것은 쓸데 없는 걱정입니다. 이러한 모든 걱정은 물론 우리 주님께 맡기면 들어주시겠지만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오는 그러한 문제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좀더 부지런하고 열심만 내면 안할 수 있는 그러한 걱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을 해도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거짓말을 한번도 안 한 사람이 있습니까? 친구를 한 번도 미워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고 그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모두 그 분이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만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염려과 걱정, 질병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사53장 4-6).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찬 487장)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를 마음속으로 인정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기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위에서 말한 걱정과 염려를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오. 공부에 대한 걱정, 시험에 대한 걱정 등의 모든 걱정과 염려를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걱정이 있을 때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 기도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예기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공부를 도와 주신 다는데 공부에 대해서 뭐가 걱정입니까? 학교 시험이 뭐가 걱정입니까? 우리 주님이 지혜를 주신다는 데 말입니다. 전적으로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한 번 우리 주님께 맡겨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맛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 항상 웃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정과 평화는 세상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요14장27절).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우리는 그러한 마음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 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신앙이 얼마나 있는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걱정과 염려를 하고 사는가를 보면 됩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친구가 매일같이 불평만 하고, 짜증만 내고, 화만 내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고, 온갖걱정은 혼자 다하고 이러한 친구는 믿음이 적은 친구입니다. 믿음이 있는 친구라면,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겨놓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설사 일이 잘 안되었을지라도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동요가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평안합니다. 이러한 친구를 가까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아무리 염려가 되는 일이 많아도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모든 짐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그 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997년, 4월,20일 야외예배설교 


말씀 : 창 1 ;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성육 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 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제목 :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은 자연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인 이 지구환경을 잘 가꾸고 지키기는커녕 오염시켰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이 오염되었습니다. 공기오염, 자동차 소음, 공장페수, 핵물질 유입 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리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동시에 욕심의 산물입니다. 즉, 죄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아름다운 자연을 관리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천사항 : 이 곳 용산 가족공원에서부터 시작합시다. 
쓰레기 안버리기 
예) 장신대 뒷산 아차산공원은 깨끗하다. 이유는 쓸 레기를 안버렸기 때문에. 


제목: 나는 포도나무다 

4월 27일 중등부 설교 
본문: 요한복음 15장; 1-14 

저는 산을 참 좋아합니다. 전에는 내가 산을 좋아하는지를 몰랐는데 최근에 와서야 산이 참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시간만 있으면 가까운 산이든지 멀리 있는 산이든지 오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혼자서 시골에 있는 산에 아무도 없는 곳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산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낀 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을 것만 같은 외로움이 가슴속에 밀려왔습니다. 부모나 형제나 이 세상에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몰라줄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설사 나중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손자를 본다고 해도 이 외로움을 가시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시간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믿음은 별로 나에게 위안이 안되었습니다. 혹시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지도 몰른다는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자연은 확실히 존재해 있고 아름답다는 것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산과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와 조용히 날아 다니는 새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집으로 내려와서 우연히 성경을 펼쳤을 때 바로 눈에 뜨인 구절이 바로 나는 포도나무다라는 본문의 말씀이었습니다. (4절말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보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 말씀을 읽고 나서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주는 포도나무요, 나는 그의 가지라" 이 포도나무의 가지는 나무에 달려있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과실을 맺을 수 없고 말라 죽게되어 있습니다. 내가 산에서 느꼈던 외로움도 홀로 있다는 기분도 이 말씀 한 구절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즉, 예수님과 함께 있는 나에게 외로움은 무엇이고, 두려울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을 하니 앞으로 어떠한 외로움이나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찬455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롈루야 할롈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연을 가꿀 수 있는 기술을 주셨고 또 여러 가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솜씨도 허락하셨습니다. 제가 금요일날 삼성 무역센타에서 하는 서울 모터쇼에 가서 많은 아름다운 차들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차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미녀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이쁠 수가 있을까?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차도 아름답지만 그 옆에 서 있는 미녀는 더 아름다웠습니다. 야 이쁘다! 이쁜 여자들은 다 여기에 모였구나! 이렇게 이쁜여자들은 왜 교회에서는 보기가 힘이 들지? 저렇게 좋은 외모를 가지고 선교나 하던가 전도나 하던가 아니면 목회를 하던가 하지 그리고 왜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영혼을 구원하는데 사용하지 않으시는가하면서 혼자 생각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어떠한 상태에 있을까? 만약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구원에서 제외되어 있다면 이 모든 아름다운 외모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즉, 본문에 있는 말씀처럼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6절말씀에 보면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 생긴 왜모,키나,돈, 공부잘 하는 것 등등, 이러한 것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이러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우선순위는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안에 평화가 있고, 예수안에 능력이 있고, 예수안에 기쁨이 있고 예수안에 세상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보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고,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습니다. 

11-12절 말씀에 보면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는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달려있는 가지로서 서로 하나의 나무를 이루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지체요 한 몸입니다. 그러한 우리는 당연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서로 사랑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먼저 뜨겁게 사랑하고 옆에 있는 지체인 형제 자매를 뜨겁게 사랑합시다. 

사랑한다, 누구 누구야 (주님안에서) 



















5월4일 중등부 설교 제목: 예수님의 권세 

본문: 막1:21-28 

옛날 유대 나라에는 유대인들이 모여서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회당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사람이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와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서를 풀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의 교훈은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는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힘과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사람들은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고 또 감동을 받았습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짓껏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을 하지 못할 생명력과 힘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여짓껏 들어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때 그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시고 계시던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서 보이지 않는 힘과 생명력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이 분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놀라운 사건이 벌여집니다. 즉 회당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놀라서 기겁을 합니다. 심하게 겁을 먹습니다. 두려워서 떨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귀신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조정하고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즉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렵고 떨려서 기겁을 합니다. 그는 소리를 지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3절, 5장,7절의 고백) 
이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저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니? 그럼 혹시 저 사람이 메시야, 그리스도란 말이야? 에이 아니겠지" 하면서 사람들은 웅성웅성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사람보다 귀신이 먼저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귀신이 먼저 겁을 먹고 자신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니까 예수 앞에서 떨면서 고백을 합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짓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귀신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둘로 나뉘어 져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명이 다하면 이 육신은 땅에 묻혀 흙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주님의 천사들이 와서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생명을 다한 자의 영혼은 이 세상을 방황하는 유리 하는 영이 됩니다. 이 영혼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 권세, 즉 사단의 권세 하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이 떠돌아 다니고 유리 하는 영이 바로 귀신입니다. 이 귀신은 항상 있을 곳을 찾습니다. 귀신이 머물고 싶어하는 곳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들어간 인간의 영혼을 망가뜨리고 또 온갖 나쁜 짓을 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나오느 귀신들린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자 하여 그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 귀신은 처음에는 예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귀신이 하고자 했던 일은 방해를 받습니다. 너무나 위대하고 권세 있는 말씀과 그의 권능에 눌려서 오히려 먼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고백을 합니다. --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 
이 귀신은 자신이 언제 멸망을 받는 지 알고 있습니다. 즉 귀신의 세력은 예수의 재림때, 최후의 심판 때 멸망을 받습니다. 그 때까지 이 귀신은 세상을 떠돌며 그리고 사람의 몸을 노리며 떠들고 다닙니다. 사람의 몸에 언제든지 틈이 나기를 기다리다가 그 사람에게 틈이 나면은 그 사람 속에 거처를 잡고 살아갑니다. 
그 틈이란 어떠한 틈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 인간이 정결한 생활을 하지 못할 때, 경건한 삶을 살지 못할 때,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않을 때 이 사단의 세력은 틈을 탑니다. 이 사단은 우리 인간에게 틈을 타서 나쁜 생각, 악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생활을 할 때 사단이 기뻐하는 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로,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멀어질 때 사단은 무척 기뻐합니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그 영 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고 또 신앙생활에서 도태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기도와 말씀생활을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생활을 하지 않을 때 이 사단의 세력은 기뻐합니다. 
셋째로, 짜증과 불만과 불평 그리고 각종 시기와 악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 정죄하는 마음을 기뻐합니다. 
사단은 즉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항상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장8절)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기도생활로 무장을 하여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이 귀신들린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딱 한 마디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우리는 때때로 귀신들린 사람을 위해서 아니면 무슨 문제를 위해서 몇시간이고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그 응답을 받습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많은 기도시간과 정성을 들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평소에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하고, 그의 말씀에 청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경건한 삶을 살고, 주님의 능력으로 무장이 되어 있다면 단 한 번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을 하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주일 내내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다가 어떤 기도제목이 생겨서 그 기도제목에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없다가 내가 필요할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삶이 아니라 평소에 기도하고 경건의 훈련을 하여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야 하고 그 분 안에서 평화를 맛보야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고 항상 하나님 안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게는 무한한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힘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마디 했을 때 귀신은 그 사람을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게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의 몸에서 나오기 싫어서 하는 최후의 발악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예수 안에(요15장 포도나무와 가지의 예처럼) 항상 거하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되어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권세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권세를 우리는 항상 어느 때든지 활용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서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목 : 다윗의 신앙과 용기 
주제 : 다윗의 신앙을 본받자 
본분 : 삼상17장:45절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 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옛날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삼 천년전의 이야기입니다. 중동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에 양치기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키는 작은 어린 소년이지만 그의 머리는 붉고 그의 눈은 총명하여 총기가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버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중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누구보다도 하나님 중심의 삶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양들이 사자나 곰으로부터 위험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로 그 짐승들을 쳐서 양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항상 기도하는 소년이었고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의뢰하는 소년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막내이고 어렸기 때문에 뜰에서 항상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뜰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 이새가 급히 집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곧장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 소년이 집에 가보니 나라에서 중요한 손님이 와 있는 것입니다. 이 손님이 바로 그 나라의 중요한 제사장 사무엘이었습니다. 사무엘을 기름 뿔을 가지고 취하여 막내아들인 그 소년에게 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소년에게 이상한 힘이 솟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불기둥처럼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갑자기 이 소년에게 일어난 일들은 무슨 일일까요? 그 자초지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이 막내 소년이 바로 여러분이 익숙히 들어서 알고 있는 다윗왕인 것입니다. 다윗은 원래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의 이새라는 사람의 막내아들로서 그가 하는 일은 하찮은 양치기 일이었습니다. 이 어린 양치기 소년이 십여년 후에 이스라엘나라에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한 나라의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 당시 왕인 사울이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왕을 예선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사무엘은 베들레헴이라는 마을로 가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간 것입니다. 처음에 이새의 여러 아들을 보고 사무엘은 "이들 중에 하나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어린 소년인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러한 생각으로 맏아들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던 일곱 아들 모두를 배격했습니다. 그래서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다윗이 급히 부름을 받아서 집으로 온 것입니다. 이 소년 다윗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시려고 한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전 이야기를 염두해 두고 오늘 보문 말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이웃 나라 블레셋과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어린 소년 다윗이 이웃나라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에 다윗이 적장 골리앗에게 한 말입니다. 
그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하나님을 무시하였고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백성들보다 자기네 나라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은 키가 여섯규빗 한 뼘이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45*6+13 283) 그러면 어떻게 이 어린 소년 다윗이 무시무시한 적장 골리앗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었을까요? 
이 어린 다윗의 형 중에 첫째와 둘째와 셋째형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들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라는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가게되었습니다. 그 때 소년 다윗은 적장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군대를 무시하는 골리앗의 말을 듣고 
"어떻게 감히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 주제에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을 무시 
하는가 도저히 용서를 못하겠다"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 사울에게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골리앗과 일대일 대면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이 어린 다윗이 적장 골리앗에게 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체구도 작고 어린 소년의 몸에서 이러한 용기와 힘이 생길 수가 있었을까요? 이 용기는 바로 다윗이 평소에 섬기고 의지하던 하나님을 신뢰하는데서 오는 신앙의 결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을 지켜주심을 알았고 이스라엘을 항상 지켜주시고 계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담대함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러한 신앙과 용기를 가지고 골리앗과 일대일 대결을 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다윗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물매들이 바로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은 것입니다. 결과는 다윗의 승리요,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요,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위 소년 다윗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가져다줍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첫째로, 다윗의 용기입니다. 이 다윗의 용기는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그의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고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다윗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나나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항상 기쁘고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의 삶속에서 용기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인간은 너무나 약해서 다른 무엇인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부모님이나 친구를 의지합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선 의지해야 할 분이 바로 세계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때때로 부모님을 통하여 아니면 친구를 통하여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 그들을 의지하여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하나님을 떠나서는 길을 읽은 양과 같이 이 세상을 헤매이다가 나중에는 이리나 늑대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이 세상이 잠깐 동안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맛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는 시간과 함께 과거로 흘러가고 맙니다. 그러한 평화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를 다윗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장 골리앗과 대결할 때도 겁을 내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서 싸워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생활을 할 때만이 다윗이 소유한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 우리 모두 다윗의 신앙과 용기를 본받아서 이 세상에서 항상 승리하는 삶 을 살자 -- 










참된 행복 
본문: 요14:27 
많은 사람 들은 세상에 살면서 좀 더 잘 살아보려고, 좀더 행복해 지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구입니다. 
우리 학생들의 경우를 본다면 좀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고 싶고, 또 좀더 남보다 공부도 잘하고 싶고, 남보다 건강하게 살고 싶고, 좋은 친구를 사귀고 싶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싶고 등등 우리는 남보다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어른들의 경우를 보면, 돈을 많이 벌려고 합니다. 좋은 직장에 가기를 바랍니다. 좋은 사람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좋은 자녀를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모두 노력을 한다고 해서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우리가 노력을 해서 위에서 말한 것들을 얻었다 해도 그러한 행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순간순간의 즐거움과 행복은 있을 지 모르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의 평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이런 마음의 평화를 오래 지속적으로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를 만드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모셔왔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질병과 고통과 슬픔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받아들이기만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러므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지속적인 행복과 즐거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교회에 나와서 신앙이 성장하여 이러한 기쁨과 더불어 행복을 누려봅시다. 



돌아온 탕자(눅15:11-24) 
날 짜: 1997년, 5월 25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곁을 떠나서 살고싶었습니다. 이 세상을 그리워하며 동경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돌째 아들은 참다 못해서 아버지에게 와서 말합니다. "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즉 이 말은 유산을 물려달라는 말입니다. 아직도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무말도 않고 그 아들의 몫을 가각 나누어 줍니다. 
둘째 아들은 그 재물을 정리하여 먼 이웃 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되어서 인생을 즐기며 멋지게 살아야지"하는 큰 포부를 가지고 갑니다. 드디어 아버니의 속박에서 탈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많은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리는 너무나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오라고 부르는 술집도 많았습니다. 세상친구들이 그를 맞이합니다. 그는 매일 기생집(술집)을 내집드나들 듯이 드나듭니다. 그는 너무나 황홀해서 자기의 월내의 목적을 상실한채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맙니다. 
어느새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재산이 바닦이 납니다. 그는 이제 빈털털이가 됩니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같이 놀고 즐기던 세상친구들은 그를 이제 박대합니다. 돈이 없으니 배가 고파 굶주립니다. 
그래서 그는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더구나 그 나라에는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해도 주는 자가 없습니다. 이제 그는 굶주림과 배고픔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이제 그는 돌이켜 그의 죄를 뉘우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아들의 권한을 완전히 포기한체 품군의 하나로 자신을 생각하고 또 그렇게 아버지에게 말을 할 참입니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처음에 아버지의 품을 떠나갈 때는 자유롭고 무엇이든지 잘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세상을 너무나 힘이들고 참 자유가 없구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가 최고 행복했구나!"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때에 멀리서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맞이합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신을 떠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돈이나 이해로 연결되는 관계가 아니라 아버니의 사랑과 그 아들의 그에 대한 응답으로 연결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웁니다. 그러면서 너무나 즐거워합니다. 

이 돌아온 아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돌아온 탕자입니다. 
위의 내용에서 볼 때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 좀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 불행해 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떠한 잘못과 죄악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그래로 주님께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오 더불어서 살게 되었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삶은 불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 때, 그리고 죄를 저지를 때,(거짓말, 미움, 시기, 불평 등등) 우리의 신앙 양심이 우리를 징계하고 우리에게 가책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셔서 죄를 범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고자 하시어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고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의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계시고 또 여러분을 향하여 뜨거은 애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할 때, 예를 들어 주일날 아침에 교회에 나오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거나 늦잠을 자서 나오지 않거나 할 때 주님은 우리를 그 때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뿐만아니라 예배시간에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친구나 그 속에 하나님애 대한 애정이 없이 그냥 몸만 와 있는 학생도 지금 그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6월 1일 중등부 설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타락, 하나님과의 단절, 율법과 제사장 선지자를 주시는 하나님. 
1) 우리 인간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후 타락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땅과 함께 저주를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단절을 회복하고자 하시어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제시해 주셨고, 또 많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세우셔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게 함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러한 번거로운 절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사 망을 이기심,) 
2)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이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 한번에 회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친히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영접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단 한번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죽음 권세를 이김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우리도 예수님의 공로로 사망에서 건짐을 받을 수가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의 공로로 하나님께 떳떳히 나아갈 수 있게되었습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 잘못된 신앙관을 가진 그 당시 사람들, 
3) 그러나 이 천년 전에 하나님이 이 땅에 친히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두움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구원관은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 율법온전히 지킬 수도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의 신앙관은 인간이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온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주심 
4) 그러나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영접하고 믿고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5) 그러나 이러한 영접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나의 마음을 감동하고 움직여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전12장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설명, 버림받고 운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순종, 사망을 이기신 예수,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 
6)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희생을 하였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절규를 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십니다.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공로로 죄로부터 해방을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이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즉 사망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영접하는 우리도 이 사망을 이기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는 사망에서 건짐을 받고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고백,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7)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먼저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집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이 상징적으로 거하시는 지성소로 누구든지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면서 무덤속에서 잠자던 자들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후에 많은 사람에게 증거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지키고 섰던 백부장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이 아들로 고백을 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성령을 통한 신앙고백 
8) 우리는 예수님과 다른 장소와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것도 직접 보지도 않았고 또 그의 부활도 목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이 예수를 믿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예수를 진정한 마음으로 영접하기를 바랍니다. 














6월 8일 중등부 설교 제목: 형제 사랑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유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서로 기뻐하며 즐겁게 지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아름다운고"라고 시를 지어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목적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같이 동거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뻐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기쁨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쳤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통하여 기뻐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에베소서 1장 22-23절에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여러 지체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어느 한 부분이라고 망가지거나 고장이 나면은 온 몸이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체를 서로 사랑으로 돌보아야만 하고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서로 같은 목적과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그 지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또 서로에 대해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서로 모여서 기뻐하며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체육대회로 모임을 같습니다. 혹시 이 중에 이 예배가 끝나면 바로 집에 가서 낮잠을 자거나 아니면 친구를 만나 놀러 갈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그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친구가 마음을 바꾸어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어울려서 같이 공놀이도 하며 즐거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놀이가운데 서로에 대한 관심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처나기를 원합니다. 













6월 15일 중등부 설교 
원수를 사랑하라. 

본문: 눅 22, 34-38 
하나님의 아들이 이 천년 전에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유대라는 나라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자나 아니면 여러 선지자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둘째,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수셨습니다. 그리고 셋째, 많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자들 즉 그 당시로 보면 죄인 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시는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에 걸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언제 죽는 지 그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또 십자가에 달리실 것도 알고 계셨고 그러한 고통도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 십자가의 달리시어 운명하시고 사망을 이기시는 일련의 사건에 집중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여기에 있는 우리를 포함하여 인류가 지고 가야할 죄의 값을 대신해서 죽으시는 대속적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님안에 구원이 있고, 예수님안에 인류의 모든 크고 작은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우리의 구주로 영접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고 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에게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그의 삶속에서 우리의 삶의 표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 속에서 실천 속에서 우리의 모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가 하신 말씀 중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철저히 실천을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시지도 않았을 터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그가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또 그들을 용서하신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사랑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속에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속에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지기 싫어서 그들에게 권능을 행하셔서 그들을 모두 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사랑하라"는 자신의 말씀을 철저히 실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철저한 사랑을 깨달아야 하겠고 또 그분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그 분을 닮아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러한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노력을 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 구주 예수님을 친구에게 혹은 이웃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이웃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도를 하는 데에 참으로 훈련도 되어있지 않고 도리어 전도를 하고자 하면은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4) 

우리 친구들의 모습 속에도 그러한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길거리에서나 아니면 학교에서나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챙피해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을 믿는 것조차도 부끄러워하는 친구가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위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지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전도에 대한 상이 제일 큽니다. 





























6월 22일 중등부 설교 
제목:시험 (마4:3-4) 

[성경에 대한 요약]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는 약30세쯤부터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약 40일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시면서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40일 금식 기도가 끝난 후에 예수님은 몹시 굶주리셨습니다. 
그 굶주림 속에서 계실 때에 시험하는 자가 나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귀의 정체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감히 던질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공중권세를 잡고있는 마귀인 것입니다. 원래 이 마귀는 천사였답니다. 그런데 이 천사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답니다. 이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이 천사를 이 땅으로 내어 쫒았답니다. 이 쫒겨난 천사가 바로 마귀 즉 사탄인 것입니다. 
이 마귀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라는 탈을 쓰고 접근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끔 만들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데 성공을 하였답니다. 이 마귀에게 속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잘못으로 그 후손들은 그들과 함께 타락을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계획으로 스스로 인간이 되셨답니다. 이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증거입니다. 

[마귀의 유혹] 
1.이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십일 간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셨답니다. 이 때도 노치지 않고 이 마귀는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찾아와서 시험을 하였답니다. 이 마귀의 시험을 예수님은 이기셨을까요 아니면 지셨을까요? 네 예수님은 이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마귀가 한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가장 약점인 굶주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말이야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서 먹어봐 그러면 배부르지 안그래?"라고 예수님에게 와서 유혹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이 시험을 이기셨답니다. --예수님 만세!-- 

2.이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우리라고 시험을 하지 않겠어요? 지금도 이 마귀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할까? 예수님을 멀리하게 할까? 하면서 시시탐탐 노리고 있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깨어 있어야만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는 이러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와 말씀생활을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마음먹고 기도를 하려고 하면 무슨 문제를 만듭니다. 예를 들어 책상에서 기도를 하려고 마음을 먹고 기도를 하려고 하면 먼저 눈에 들어와야 할 것이 성경책인데 1)만화책이 눈에들어옵니다. 2)평소애 안보던 교과서를 펼치게 됩니다. 3)참고서를 뒤적거립니다. 4)갑자기 오줌이 마렵습니다. 5)갑자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집니다. 이러저러한 일로 기도를 하려고 했던 마음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마귀가 우리의 생각을 틈타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감히 시간을 정해놓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기도를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를 하는 자에게는 항상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예수님께서는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로 무장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쉽게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올 수 있는 시험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첫째로, 주일날 교회에 갈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평소에 기도도 안하지요, 말씀도 안보지요, 예수님 생각은 조금도 안하지요 그러니까 완전히 무장해재의 상태니까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쉽게 조절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갈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냥 잠이나 자야지, 친구와 놀러 가야지, 평소에 공부도 안하고 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도서실이나 가볼까?하는 잡다한 생각이 우리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 기도와 말씀이 없기 때문에 쉽게 마귀가 틈을 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가령 학교에서 친구와 싸웠을 때, 이 때는 마음에 그 친구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우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 때도 마귀가 틈을 타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마음에 증오가 가득차 있는데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겠어요? 즉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무장을 하여서 친구와 사소한 일로 싸우는 일이 없어서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 때문에 우리는 시험에 많이듭니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짜증도 많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