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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죄와 인간 그리고 예수님

하나님아들 2012. 9. 14. 17:53

관련 동영상

1 구원받은 사람이 멸망되기로 선택할 수 있을까? 

2 은혜 아래 태어나는 아이들 

3 둘째 아담 

4 그리스도인의 완전 

5 죄의 정의 

6 죄의 성질 

7 죄의 문제 

8 육체와 성령 

9 그리스도인과 죄의 문제 

10 계속 실패하는 자들을 위한 소망 

11 멸망 받기 불가능한 상태 

12 새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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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일까?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아프면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에게 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어딘가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 때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무슨 병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치료가 가능하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정의하는 데에 따라서 우리의 복음과 신앙과 믿는 바가 달라진다. 제 1부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복음은 다 “죄”에 대한 다른 정의와 이해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다.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1). 죄의 정의

A. 원죄설; “죄는 본성이다”라는 정의
첫 번째 죄에 대한 정의는 원죄설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바로 죄라는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정의는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미 우리는 잃어버린바 되고 정죄 받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곧, 우리는 지옥으로 갈 본성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잘못된 본성이 있는 그 자체가 죄라고 믿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원죄설”의 정의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개신교인들이 믿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B. 죄는 선택; “죄는 우리의 선택이다”라는 정의
첫 번째 원죄설의 정의는 “우리는 잘못된 본성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히 잘못된 행동을 한다”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는 다르다. 우리가 잘못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 나는 내 뜻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 뜻대로 하기를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계명)을 어기고 자기 뜻대로 한다면, 그것이 자기가 한 선택이고, 그것이 “죄”인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죄의 정의”인 “죄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2). 선택으로서의 죄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내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복음은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선택으로서의 죄”를 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한 예증을 들어보자. 고양이는 사람에게 와서 털을 비비며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주인을 따라 문을 나설 때 갑자기 이상한 성격을 나타낸다. 수염과 꼬리를 바짝 세우고 날카로운 동물로 변한다. 왜 그러는가? 고양이는 본성적으로 자기보다 큰 것이 오면 무조건 도망가고 자기보다 작은 것은 무조건 잡기 때문에, 밖을 나가면 본성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밖에서 작은 생쥐를 잡으면 어떻게 하는지 아는가? 그는 생쥐를 금방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다 다시 잡았다 하는 반복을 계속한다. 왜냐하면 그는 쥐를 잡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창조물은 다른 창조물(생쥐)에게 죽기까지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새 땅에 가면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고양이가 다시 주인에게 올 때 어떻게 하는가? 콧수염을 바싹 세우고 자기가 생쥐를 잡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온다. 그때 주인은 어떻게 하는가? 만일 당신이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양이를 정죄할 것인가? 아니면 죄가 없는 것인가 라고 갈등할 것인가? 아마 여러분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잘했다고 말하며 다시 그 살인자를 집으로 들여 보낼 것이다.

 

자, 여기서 악한 것과 죄에 대한 책임의 차이를 알아보자. 이 고양이가 한 일은 악한 짓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너는 죄의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이 고양이의 작은 두뇌 속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고, 옳고 그름의 차이 또한 없다. 그는 그저 타락한 본성만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타락한 본성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본성이 말하는 것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에게 타락된 본성은 악하게 있지만, 아직 죄의 책임은 없다. 죄를 짓기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는 스스로가 짓기로 선택해야 죄가 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올바른 죄의 정의인 것이다.

  •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3). 결과와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

창세기 2:17은 하나님께서 창조 받은 인간들에게 처음 주시는 말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그들이 선악과를 먹었는가? 그런데, 그들이 그 날 바로 죽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왜 아담의 사형 집행이 즉각 시행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대속의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의 죄를 몸소 지시고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죄값을 지불하기를 자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계 13:8을 읽어 보도록 하자. 이 절의 전단에 중점을 두겠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영어 성경의 번역을 보면, “창세 전부터 죽음을 당해 오신 어린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창세 이후로 4000년이 지난 이후에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경우를 대비해 창세 전부터 구속의 계획을 마련해 놓으신 것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서서 말씀하시기를,“나로 그 형벌을 받게 해 주소서. 제가 사람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소서”라고 하셨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로 예수님께서 중재자로 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려면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지만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셨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가지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범죄자에게 선고된 운명을 막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죄의 정의로서의 “원죄설”은 성경의 구속의 계획과 맞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에덴 동산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는 멸망 당하고 정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갚으셨을 때는, 그것은 완전히 갚으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갚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했을 때에 그들은 멸망 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나쳐야 지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그들의 길에 주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아기들은 지옥으로 미끄러지는 길 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지옥으로 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짓밟고 지나가야 되는 것이다.

 

4). 죄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 하시는 지에 대해 한번 보자. 요한복음 9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걸어가시는데, 눈이 먼 맹인을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에 제자들이 질문을 했다. 2절,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들은 이 사람이 “죄인”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그의 눈을 좀 봐,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심판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뜻은, “그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그의 부모들이 뭔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부모들의 죄 때문에 그는 정죄를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가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은 것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사실과 죄와 혼동하지 말아라. 눈이 먼 것은 악한 것에 속하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죄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시며, 계속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마귀의 역사만 볼 수 있지만, 너희는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만약 마귀가 역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아무나 다 태어나면서 장님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 됨을 어떻게 취급하셨는가?“내가 너의 눈을 용서한다”라고 하셨는가? 절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의 눈을 치료해 주셨다. 그의 눈을 다시 재 창조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죄악들을 취급하시는 것이다

 

제2부: 죄와 유혹의 차이

죄와 죄책감, 그리고 유혹과 죄의 차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자칫 무거워 보이는 신학적인 논제 같지만,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이고, 또 이것에 대해 확실한 이해가 생길 때 승리하는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열심히 함께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죄악과 죄책감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죄에는 두 가지 문제가 따른다. 한 가지는 죄악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죄책감이다. 악은 모든 인간의 본성과 동물들에게 있고, 또 이로 인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야기된다. 또한 다른 문제는 죄책감이다. 우리는 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죄 받은 죄인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두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그분은 우리의 죄책감을 용서 하신다. “내가 너희의 죄책감을 대신 질 터이니 너희는 자유롭게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죄책감이 없어질 때, 우리에게 지옥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두 번째 죽음이라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죄악과 죗됨은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 우리의 본성 가운데 있는 죗된 본성과 죄악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없어질 것이다. 주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없애시는가? 주님께서 그것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이 세상과 우리의 본성을 재창조 하심으로 없애시는 것이다. 요한 복음 9:4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러분이 정말 모른다면, 정말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알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남아 있다. “빛”은 우리의 죄악들을 깨닫게 하고, 이것이 우리의 죄책감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빛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순종하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 가운데 있는 죄악이 죄책감이 되는 것이다.

 

◈ 이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분명한 말씀을 찾아보자.
∴ 야고보서 4장 17절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우리가 여기에 있는 차이를 이해해야 된다. 우리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알아야 죄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알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이럴 때에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고양이나 어린 아기한테는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야고보서 1장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기에 “자기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또한 우리의 죗된 본성과 그 힘에 의하여 우리가 유혹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2). 유혹과 죄의 차이

1. 유혹


유혹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밖에서 무엇인가 우리를 자극하는 요소가 필요하다. 보는 것, 혹은 듣는 것 등. 그래서 우리의 내적인 것이 그것에 유혹을 받아서 끌려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적으로 끌리는 것이 없으면 거기에는 유혹이 있을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 1:14절에서 읽은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유혹을 받고 끌려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자극에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를 이 죗된 자체가 죄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본성이 죄 되다. 그러나 성경은 그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끌리는 것은 “유혹”이라 말한다.

 

2. 죄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는 유혹 뒤에 온다.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단계가 있다. 곧, 유혹을 계속 품어야 죄가 되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 성경절을 보면 죄가 성립되는 데는 단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험담하는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궤휼”은 온갖 형태의 불순을 포함한다. 불순한 생각이 용납되면 부정한 욕망을 품게 되고, 그 욕망으로 마음이 더럽혀지면 그 정직성도 손상된다. 불순한 생각은 죗된 것이다. 그것은 더럽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이것을 죄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불순한 생각이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일을 더 해야 한다. 그것을 품어야 된다. 그것을 우리의 생각으로 품어야 죄가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14, 15절은 죄가 되는 단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처음에 유혹을 받고, 그 욕심을 계속 품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혹을 죄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죗됨과 죄의 책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첫 번째 단계(끌리는 단계)가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3번째 단계를 죄라고 말한다. 이렇듯 “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 하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 다른 복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록 1에서 살펴보았듯이, 첫 번째 죄의 대한 정의(원죄설)는,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늘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것은 할 수 없고 그냥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런 정의를 가진 사람에게 복음은 항상 “용서만”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항상 용서만 받고 살아야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이다.

그러나 죄가 우리의 마음에 선택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거절할 수도 있고, 또 그분을 거절함으로 인해 치료 받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우리마음 가운데 모시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용서도 받고 치료함도 받을 수 있다.

 

제3부: 인간의 본성과 죄


잘못된 신학은(신신학 또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리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견해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신신학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중요한 논증의 자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네 가지의 핵심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인간은 원죄(original sin)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기독교 사상 가운데 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그는 이교 사상으로부터 이것을 받아들였는데, 이 사상의 골자는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태어날 때부터, 심지어는 수태되었을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인간 스스로 혹은 하나님 자신까지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주장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해 두셨다는 가설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기독교 신자들은 다윗이 드린 회개의 기도를 들어 이 견해를 뒷바침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기 위하여 대개 현대역 성경을 인용하는데 그 번역된 구절 속에는 번역자의 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원죄에 관한 편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흠정역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 그러나 새 국제역(NIV) 은 똑 같은 구절을 의역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원죄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실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나의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였을 때부터 죄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51:5 (NIV 영어 성경 번역).

 

히브리 원전의 이 성경절에는 어떤 원죄나 범죄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살펴보면 다윗은 밧세바로 더불어 지은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중심의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편 51:6,7.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이 구절들은 다윗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상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죗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려고 하는 본질적인 경향이 있음을 지적해 줍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자연스럽게 죄를 범하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출애굽기 32:33.
  •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20.
  • 이런 성경 구절들은 원죄라고 불리우는 신신학의 교리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죄인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원죄의 사상이 성경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침례 요한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15.
  • 아담이 범한 죄 때문에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짓는 죄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2. 하나님께서 개인의 영생과 멸망에 관해 미리 예정해 놓지 않으셨다.

원죄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논리적으로 결국 예정설을 인정하게 된다. 성경은 인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예수께서 갈바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셨지만, 각 개인은 이미 손에 쥐어진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인간의 구원은 조건적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사단의 이론이 신신학(자유주의 신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르침이 상당히 미묘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든지 이기지 못하든 지를 불문하고 결국에는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사단의 거짓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의 전제 조건은 순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거듭하여 단언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38.
  •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행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4.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12.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야고보서 2:5.
  •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103:17,18.
  •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 19:16,17.
  •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4. 성도들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케 하는 능력이 공급됨.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는 참된 성경적인 진리는 성도들이 죄를 지금 이 순간에 이길 수 있고, 또 이길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신학(자유주의 신학)은 성도들이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유다서 24.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4-6.
  •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린도전서 15:34.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4.
  •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한계시록 12:17.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9:8.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요한계시록 14:4,5.
  •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요한계시록 22:11.

위에 인용한 성경절들은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신신학의 도덕적 패배주의 이론을 꼼작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신신학의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인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엉뚱한 가정 중 한가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A)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하늘로 데려가심으로서 하늘 나라를 다시 죄로 오염되게 하실 것이다.
B)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중에서 하늘로 데려갈 수 있는 성도들을 당신 자신이 임의대로 만드실 것이다.

 

제4부: 그리스도의 인성-대속과 모본


지금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그분의 삶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뒤덮여 있다. 서점이나 극장가에는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논하는 책과 영화가 나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는 돈을 위하여 만들어진 책과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삶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오해와 편견을 갖도록 이끌어 갈 뿐이다.

 

지금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한 쪽에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본으로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우리와 전혀 다른 육체를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취하고 태어나신 본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구원을 논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복음의 연결 고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믿고 따라가는 복음과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제부터 1,2편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육체(본성)에 대한 비밀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대속”과 “모본”

먼저 예수님의 대속과 모본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서만 많이 배워왔다. 그러나 성경을 잘 연구해 보면, 예수님의 “모본”은 대속 못지않게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서도 오셨지만, 또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도 오셨다.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대속만을 위해서 이 땅에 구세주로서만 오셨다면, 십자가에서 직접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시지, 왜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셔서 33년 동안 세상에 사시면서 우리의 모본 되는 생애를 사셨을까? 그리고 왜 내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이기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육체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이시며 우리로 그분의 모본을 따라 가게 하셨을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오셨지만,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그에 못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드셨다”는 사단의 거짓을 깨뜨리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순종의 생애를 사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증명 하셨다. 또한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러기에 스스로 우리의 본성을 쓰시고 인생을 체험하셨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18).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거룩한 품성에 참여하는 자들은, 계명이 가리키는 모든 교훈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의 모본대로 살 수 있게 된다.

 

2). 예수님의 본성

1.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심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실 때 어떤 본성을 취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시험 받으실 수 있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성경절들을 찾으면서 함께 연구해 보자.
◈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위의 성경절들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라는 뜻과 “사람의 모양으로”라는 뜻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된 육신의 모양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이다. 죄인의 육신의 모양,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는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라는 말이다.
◈ 히브리서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히브리서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위의 성경절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쓰신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16절을 킹 제임스 성경의 표현으로 보면 아주 그 의미가 확실하다.
“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 but he took on him the seed of Abraham.”: 이 뜻은 “예수께서는 천사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 인간과 똑 같은 본성, 곧 아브라함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2. 같은 본성을 가지고 우리의 모본이 되심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께서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유전을 지니시고, 또 우리와 같은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유전법칙에서 제외되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그분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전혀 없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마리아는 자기 조상의 유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리아의 유전법칙을 받고 이 땅에 오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유전을 받으시고 태어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과 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어떤 하나의 순결하지 않고 고상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하는 유혹에 굴복하신 적이 전혀 없으셨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타락된 우리의 본성의 욕구를 물리칠 수 없다. 사단은 이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시험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각 사람에게 와서 인간의 선천적인 약점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시험과 유혹에 빠뜨리려고 할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땅을 먼저 통과하셔서 우리도 이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분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본성을 지니시고 그 길을 먼저 걸어 가셨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주셨다. 예수께서는“내 뜻을 행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순종하는 생애를 사셨다. 그리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모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제5부: 그리스도의 인성-예수와 인간의 차이


1).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다고 되어 있다.

◈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문단을 이해해야 한다. 이 원어는 아주 단순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비우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의 어떤 형상을 비우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어떠한 부분을 비우셨는가? 함께 연구하여 보자.

 

♣ 예수께서 비우신 속성들

1. 전능

◈ 요한복음 5:30 -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상하게 들려질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의 뜻에 따라 행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하신다고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며, 이적을 베푸실 때 조차도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하시며, 그분의 능력을 버리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만을 의지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우리와 똑같은 입장에 처한 삶을 보여주시기 위해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 밖에 없다.

 

2. 기억

◈ 누가복음 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어떻게 그 놀라운 하나님께서 지혜가 자라갈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엄마 품에 안기어 양육 받을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셔서 점점 자라나시며 지혜를 터득해 가셨다. 그분은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말씀을 이제는 그의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배우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을 얻으셨다.

 

그의 부모들이 예수를 12세 때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갔을 때, 그는 처음으로 성전 제사에서 어린양이 희생되는 것을 보았고, 그때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의 구세주로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깨달으셨다. 성령께서 그분의 사명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셨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이해했는가? 당신의 사업의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것은 당신의 기억을 통해서 이해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이해하신 것이다.

 

3. 선견 (미리 아심)

◈ 마가복음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어떻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짜를 모르실 수가 있으신가? 이런 일들이 올 것을 예언으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만 알았고 그 이상은 모르셨다. 예수께서는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 속에서만 행하셨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시기 전에 그 모든 내용의 완전한 계획이 그 앞에 제시되어 있었겠지만,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실 때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씩 인도함을 받았다.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을 눌러 그 고통으로 죽어가실 때, 믿음과 느낌 사이에서 갈등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아마 그의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저를 여기에 보내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죄가 내 위에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지리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선견성”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만 순종하셨으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존재 하셨다.

 

4. 무소부재 (동시에 어느 곳에나 존재하심)

그리스도께서는 인성 때문에 방해가 되어 모든 장소마다 친히 계실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승천하시어 아버지께로 가셔서 지상에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인간들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신다.

 

5. 영광

◈ 이사야 53:2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그의 영광과 위엄을 다 버리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잠시 동안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포기하셨다. 성경 다른 곳에는 잠깐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 2:7~9 참조)

 

2). 죄지은 사람이 가지게 되는 죄에 대한 강한 경향을 갖지 않으심

그런데 예수님의 본성을 연구하다가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셨다는 것을 강조하다가 그분을 사람들 앞에 죄의 경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제 2의 아담이시다. 그분은 죄의 유혹에 굴복하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셨지만, 유혹에 한번도 넘어가거나 시험에 굴복하시지 않았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죄를 한번도 지으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죄지은 사람이 가지는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없으셨다. 죄 없는 경향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우리가 계속 반복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죄의 경향이란,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타락한 경향에 따라 우리가 선택을 하고, 그런 선택을 함으로 만들어진 습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셨을지라도, 어떤 죄의 습관을 가지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죄의 유혹들을 인식하셨고,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과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4:15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3).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

예수님과 우리와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탄생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에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곧 타락한 경향을 타고 났다. 그래서 죄의 습관이 생겼다. 여기에 우리와 예수님과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 거듭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 있는 타락한 습관들을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 어머니와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성령께서 그의 아버지로서 잉태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타락한 본성을 주관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죄악적인 습관을 배양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와 우리와 단 한가지 유일한 차이는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나고, 성령을 받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셨을 때부터 성령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성령을 거듭날 때 받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그 거듭남을 경험할 때,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같이 우리도 똑같이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보다 더한 특권을 가지고 사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능력을 우리도 또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매일 성령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본성이신 성령을 매일 받으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죄를 이기신 것이고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도 똑같은 성령을 우리의 생애 가운데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와 같은 성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끊임없는 교통을 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늘 아버지와 계속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속에는 의가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경험의 중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쓰시고, 매 순간 하나님과 연결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사시므로 죄를 승리하시고 우리의 모본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면,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제6부: 죄와 그리스도인 완전


죄의 승리와 완전한 품성에 대하여 더 공부해 보기로 한다.

1). 죄를 승리하는 길

우리가 올바르게 행할 힘은 없지만, 올바른 편을 선택할 수는 있다. 우리가 주님의 편을 선택할 때, 즉시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범죄하지 않도록 도와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우리의 의지로 올바른 편을 선택한다 해도, 유혹과 죄를 이기는 데는 하나님의 능력이 늘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어떤 패턴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눈과 귀로 어떤 자극이 들어오면, 우리의 두뇌 세포들은 서로 빨리빨리 연결을 한다. 그리고 우리 몸의 어떤 기관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거기에는 연결하는 길(선)이 생기고, 그것이 습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화나게 만들면, 그 때 자연적으로 우리 입에서 좋지 않은 어떤 말이 튀어나온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뇌에 다른 선, 새로운 길을 주셔야 된다. 그래야 우리의 눈과 귀에 어떤 충동이 들어 올 때, 옛날 길, 곧 옛날 패턴으로 가지 않고 새로운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떤 사람이 똑같은 것을 말해도, 악한 말을 해도, 그 새로운 패턴이 우리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이 재창조를 받아 우리의 두뇌에 새로운 길, 새로운 패턴이 생겨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의지와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죄를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

 

죄를 이기려면, 먼저 우리의 생각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우리 마음에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다룰 때는 먼저 우리에 생각과 마음을 다루어야 한다. 부패한 상상이나 생각들이 밀려올 때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서 구해야 할 것이다. 좋지 않은 생각이나 상상이 우리를 끌어 내리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빨리 뛰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원수 마귀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이 거룩하고 순결하며 하늘에 대해 머물러 있도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훈련해야 한다.

 

2). 죄의 승리에 대한 성경의 약속

1. 고린도전서 10:13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우리가 정말 피할 길을 찾는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피할 길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2. 고린도후서 10:5 -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 성경은 모든 생각들까지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그분의 생각이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였는가? 모든 생각이다. 그렇게 계속된 예수님의 전체의 생애의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죄 없는 생애이다. 그분에게는 단 하나의 죄도 없었다. 모든 생각까지도 아버지께 굴복되었기 때문이다.

3. 갈라디아서 5:17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육체와 성령은 우리를 서로 다른 곳으로 끌어간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성령은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 16절에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을 다른 말로 바꿀 수가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유혹이다. 이 유혹은 죄가 아니며, 다만 육체의 유혹이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꿀 수 있는데, 그것은 ‘죄’이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읽어보자. “너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죄를 짓지 않으리라” 바로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성령 안에서 10년, 20년 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나는 매일 성질을 부린다!”라고 한다면, 이 성경 말씀은 옳지 않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매일 행하셨는가? 그분께서는 날마다 성령의 지도 가운데 사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셨는가? 성령은 죄를 짓지 않는다. 우리가 유일하게 죄를 짓는 길은 우리가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잠깐 비켜 계시게 하는 때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 속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4. 요한일서 3:2-9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 이것은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씨가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면, 우리는 죄를 범할 수가 없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 말은 헬라 말로 “현재분사형”이다. 그러므로 6절을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현재 죄를 짓지 않고 있나니”라는 뜻이 되며, 8절은, “현재 죄를 짓고 있는 자는 현재 마귀에게 속해 있는 자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죄를 짓든지 순종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거나, 아니면 마귀의 지배 아래 있지, 그 중간은 없다.

◈ 우리가 지금 읽은 말씀은 너무나 불가능하게 들리고 우리의 실제 생활과 너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약속들은 이루어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주실 때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거기에 “빛”이 있었다. “네 죄가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의 죄는 용서 받았다. 우리가 마음에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죄는 용서 받았다. “내 씨가 네 안에 있기 때문에 너는 죄를 범할 수 없다”라고 말씀 하실 때, 그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가?

 

3). 완전과 완전한 성품

“완전”이란 “하나님의 뜻과 계명, 그리고 진리에 굴복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의미한다. 완전은 본성의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1편에서 언급한 “완전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본다면, “품성의 장성함”이란 “완전한 성품”을 말한다. 성품의 완전이란, 외부적으로 그 누구도 판단을 하거나 가릴 수 없다. 그러나 각 개인이 매 순간 올바른 편,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고 순종하여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한 성품을 가질 수 있으며, 그 단계는 각 개인마다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할 때인, 거듭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거듭나는 순간은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를 시작하는 때이므로 성품의 성장이 장성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해하는 수준까지만 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굴복할 당시에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버리고,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대하여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의로 여겨 주신다. 이렇게 하나님께 굴복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완전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한 의로 여겨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장성한 성품으로서, 우리의 성품과 생애에 풍성한 열매를 맺어서 추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빛이 밝아지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증가됨에 따라서 우리의 굴복과 순종은 더욱 더 깊고 의미 있는 것으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앞에서 배운 대로, 만일 우리가 죄를 우리의 선택 여하에 달린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믿어야 한다. 사단은 억지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이 그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한 그는 우리를 주관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의지가 먼저 승낙하고 우리의 믿음의 손이 그리스도를 놓기 전에 사단은 자기의 세력을 우리에게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살아계시다면, 예수께서 범죄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짓기를 거절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면 죄가 나가고, 죄가 들어오면 그리스도께서 나가는 것이 단순한 원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죄를 동시에 우리의 마음 보좌에 모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장성한 완전의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주장하심으로, 우리가 반역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4). 예수님의 완전한 성품은 우리의 모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도 죄짓지 않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생각까지라도 시험에 굴복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분은 늘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사단과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죄를 승리 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또 품성의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곧, 인간이 위로부터 능력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타락한 인간이 신성과 연합하고 교제할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분의 완전한 성품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들도 그가 한 것처럼 하나님께 굴복할 때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더불어 연합하고 있는 동안에는 죄는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유혹은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단은 모든 면에 우리들과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신 주님의 고결하신 성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할 수 없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경험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죄짓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 마치면서

이번에 연구한 주제가 혹시 너무 신학적이거나 어려운 것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당신이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베뢰아 사람처럼 성경을 열심히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연구가 영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나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예수님과 똑같은 생애가 이루어질 수 있다. 곧, 죄를 승리하는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나사로를 죽음가운데 살리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마음과 생각을 재창조해 주실 것이다! 곧 마음을 바꾸시는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죄를 승리하는 생활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의 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독자의 생애에 가능한 것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출처 : ♡진리의 길♡
글쓴이 : 튼튼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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