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서!! 룻기!!

[스크랩] "시편의 시학"

하나님아들 2018. 5. 27. 23:25

 

 

미주한인기독문인협회(KCLWA) 주최 문학세미나(10-6-2015)

 

                                  "시편의 시학"

                                                                                                                                                                 최 선 호  

 

 

글머리에: 성경의 바른 이해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가치는 성경이다. 성경은 천지만물과 인간을 내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인간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사용하는 문자에 담겨졌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의 문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다. 여기에 적지 않은 문제가 따르고 있다. 유한한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서 나온 인간의 언어로써는 무한하신 초월자인 하나님의 실재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실재와 그의 섭리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상징이거나 간접적이거나 비유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Paul Tillich는 종교적 언어의 상징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성경이 상징적 언어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성경의 가치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종교적 언어의 상징적 성격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 성경의 놀라운 힘을 찬양한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상징은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가 비판하는 것은 상징을 상징으로 보지 않고, 직접적이고 문자적인 하나님의 묘사로 보는 것이다. 그는 상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공격한다. 그것은 절대가 아닌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며, 유한한 것을 무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을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즉 상징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곧 상징의 내용과 의미는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의 힘, 존재 자체, 존재의 근거 등의 개념은 모두 하나님이라는 상징에 대한 틸리히의 존재론적 분석과 해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우리 심령의 눈이 더욱 밝아져야 한다. 따라서 성경을 보는 눈도 달라야 한다. 성경을 보는 눈이 문자에만 매여 있으면 문자주의의 노예일 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려면 일단 문자를 통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문자를 빌어 표현된 상황의 물리적 도덕적 윤리적 이해를 충분히 거쳐, 말씀으로 주시는 영적 세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자가 갖는 바른 태도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한 첫 몫은 문학을 통한 성경의 바른 이해이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음성이 인간의 이성세계에 들어오셔서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징, 압축, 생략, 직유, 은유, 풍자, 풍유, 대유, 제유, 환유… 등, 알레고리적 수사가 없을 수 없다. 이런 이해를 무시하고 문학적 양식이 없이 성경을 보면 거의가 허황된 이야기의 나열로만 보일 뿐, 영적 세계에의 도달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것만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영적 세계에 이르려면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야 하고, 궁극적인 진리를 터득해야 하며, 진리를 앎으로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 일의 첩경이 성경의 바른 이해이다.

 

성경 한 절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는 독일 신학자 중에는 성경 한 절을 제대로 연구하면 독일 역사가 바뀐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1517년 Martin Luther의 종교개혁도 성경연구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성경연구는 끊임이 없어야겠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이 막중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부릅떠야 하겠다. 이를 위한 처음은 성경의 바른 이해요, 그 나중은 영성에 이르는 일이다.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문학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언제 어디에나 노래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편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시(詩)임에 틀림이 없다. 시편은 노래 부르기 위하여 쓰였다. 시편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이 시정으로 승화되어 나타난 신앙문화의 금자탑이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의(義)를 찾기 위한 민족의 얼이 노래로 담겨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에 대한 배경으로써 구약 중에 시편을 가장 많이 이용하셨다. 시를 매우 좋아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겸비하신 시인이다. 시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구원사에 노래로 남겨 주신 귀한 신앙정신의 결정이다. 영원히 부를 우리들의 노래이다.

 

시는 감동 있는 영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영성(靈性)을 가지려면 시심(詩心)을 품어야 한다. 인간의 생애는 영감과 감동으로 짜여진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 살면서 영성 있는 감동을 만나는 생활은 바로 시를 가까이 하는 삶이다.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는 수사비평의 필요성에 대하여

"나는 문학에 대한 지식 없이는 순수한 신학이 전혀 설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학이 쇠퇴해질 때 신학도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언어와 문자를 생겨나게 하시고 발전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위대한 하나님 말씀의 계시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없었던 것처럼….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시인과 수사학자가 나오길 소원한다. 이는 그 어떤 다른 방법보다도, 이 연구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적절하고 기쁘게 다룰 수 있도록 가장 잘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이 젊은이들에게 시와 수사학 연구에 애쓰도록 권해주길 간청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시편의 이해를 도우려는 노력의 결정이므로, 시편을 연구, 묵상하고 더욱 가까이 하려는 모든 분들에게 매우 필요한 자료이기를 바랄 따름이다.

 

시편(詩篇: Psalms)은 인간의 감동에 앞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일반적인 시의 모태는 인간의 감동이다. 감동은 경험과 상상을 수반한다. 삶에서 얻은 감동을 운율에 실어서 언어로 표현한 것이 시(詩)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시편은 인간의 감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인간을 통하여 언어로 표출된 점에서, 인간의 감동으로 쓰여진 일반 시와는 근본적으로 그 터가 다르다. 축자영감설은 너무도 분명한 성경의 모태를 잘 나타낸다. 성경에 나타난 시편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종교적 경험이 현실과 초 현실성을 바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를 찬양하는 다양한 믿음의 표현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깊은 지혜(insight)는 이 시편들에서 제사의식과 연결됨으로써 그 영원성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은 그 민족의 가슴에 태양보다 뚜렷한 대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 민족이 대대로 섬겨 온 대상이요, 그들의 지울 수 없는 소망이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계약관계에 있는 선민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 사상, 감정 안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민족의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각 개인의 삶이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얻어진 인간의 영적 체험이 한데 모아진 이 시편들은 우리 인생에 위대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시편들은 순수하고 벅찬 감동의 자발적인 표현들이다. 영적 체험의 실상이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통하여 표현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따뜻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시편은 지금으로부터 2500∼3000년 전에 쓰였고, 문학적으로 볼 때, 시편은 우리가 이해하는 시의 형식이나 특징과는 다른 형태로 쓰였다.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볼 때, 시편은 시온 산(성전)과 다윗 왕과 주님의 통치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시편과 우리 사이의 신학적인 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만큼이나 멀다.

 

히브리 성경은 율법(토라), 선지서(네빔), 그리고 성문서(케투빔)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시편은 성문서에 속한다. 시편의 중요성은 그것이 성문서의 서두에 나온다는 것과 그 전체의 대표로 지칭된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유대인의 찬송이기도 한 시편은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구약성경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시편의 히브리어 제목은 "찬양"을 의미하는 세페르 테힐림(Sefer Tehillim)이다. 이를 줄여서 '테힐림'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이 "찬양"의 사상은 시편 전체에 흐른다. 그러나 이 시편의 내용은 노래와 비탄함과 찬양 등, 다양하므로 본래 구약성경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테힐림", 즉 "찬양의 책"이라고 부른 반면, 70인 역에는 "시가(詩歌)의 책"이라고 기록되었다.

이(詩篇: Psalms) 책의 이름이 영어로는 Psalms인데, 칠십인 역의 헬라어 명칭 "프살모이"(Psalmoi)를 음역한 것으로써, 그 뜻은 "수금(竪琴)을 치며 부르는 노래" 즉 "현악기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히브리 원문의 명칭은 "시들의 책"이란 뜻이며, 한글 개역 성경의 "시편"이란 명칭도 히브리 원어의 뜻을 반영한 이름이다.

 

시편은 "신뢰의 노래", "헌신의 찬가", "히브리어로 된 기도서"로써 개인생활이나 대중예배 때 사용되었고,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사랑 받는 책으로 인정을 받았다.

 

시편(詩篇: Psalms)은 일반적 견해로 볼 때, 구약성서 중 17 권 째 성경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기도로 약 13 명의 기록자가 있다. 150 편의 종교시(宗敎詩)를 모은 모세, 다윗, 솔로몬, 에스라 등의 작품으로 찬미, 은혜, 메시야에 관한 예언적 시(詩) 등의 내용으로 취급된다. (성경에 실린 150 편의 시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시편들이 있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적 시(詩)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1) 장차 오실 메시야: 2, 16, 22, 24, 40, 45, 68, 69, 72, 110, 118편.(2) 참되신 목자: 23편.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목자이시다. 참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10:11).(3) 말씀: 119편. 말씀이신 그리스도. 주의 말씀의 단맛, 주의 말씀은 길을 밝히시는 등불이시다. (4) 영광의 왕: 24편. 그리스도는 영원한 왕이시며, 영원히 영광을 누리실 만 왕의 왕이시다(딤전6:15∼16).(5) 수난 당하실 주    a) 시22:1→마27:46    b) 시22:6∼7→눅23:35∼36    c) 시22:6∼8→마27:39∼43    d) 시22:12∼13→마27:36∼44    e) 시22:16→요19:16∼19    f) 시22:18→마26:35    g) 시22:28→고전15:23∼24

 

각 시 위에 있는 표제문에는 저자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거나 때로는 암시 정도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각 시편이 쓰인 동기가 적혀 있으며, 공적(公的) 제사를 위한 용도를 밝히고 있는 것도 있다. 한편 표제 중 일부는 음악 효과나 배경(setting)의 요구를 지시하고 있으며, 그 시의 기본성격(미스올: 노래를 위한 기사문, 쉴: 노래, 마스길: 선곡집(Anthem), 믹담: 애가(Lamentation)등을 나타내는 표제도 있다.

 

다시 말하여 각 시의 표제문은  (1) 그 시의 형태를 지칭하는 기술적 명칭. (2) 음악 용어. (3) 찬양의 선율. (4) 전례(典禮)의 표기. (5) 역사적 사실 중 하나, 또는 일부의 내용을 포함한다.

 

이 표제문은 히브리어 원문의 첫 절에 상응하는 것으로 34편을 제외한 모든 시의 서두에 나와 있다. 물론 표제들은 후대에 와서 편집과정 중에 붙여진 것이지만 그 역사적 내용은 정확하다.

 

가장 많이 사용된 기술적 용어는 "셀라"(Selah)와 "영장으로"이다. 시편에서 71 회, 하박국 3장에 3 회나 사용된 "셀라"는 아마도 반주의 막간(幕間)이나, 변화를 알리는 음악적 표기일 것이다. "영장(노래 지휘자)으로"는 55편의 시와 하박국 3장 19절에 나타나 있는데, 특별한 기회에 사용할 수 있도록 영장을 위해 준비된 시의 모음들을 가리킨다.

 

여러 시들의 제목으로 볼 때

 73편은 다윗. 12편은 아삽(50, 73∼83편). 11편은 고라 자손들(42, 44∼49, 84∼85, 87편). 2편은 솔로몬(72, 127편). 1편은 헤만(88편). 1편은 모세(90편). 1편은 애단(89편).

 

그 외 50 편은 작자 미상이다(단, 88편은 고라 자손들의 시 속에 포함되기도 한다). 작자 미상의 시편 중 어떤 시는 그 시편 앞의 작자와 같다는 견해도 있다. 작자 미상의 작품 중 다윗의 작품이 더 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제목은 바로 저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히브리어에서 "의", "에게", "위하여"는 같은 전치사이다. 다윗"의" 시는 다윗이 썼든지, 다윗을 "위하여" 지었든지, 다윗"에게" 바쳤든지 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러 견해 중에는 "시편은 다윗의 시편이다"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약성서가 그것을 인정한다"는 견해와 다윗이 주로 시편들을 썼거나 편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들이 많다. 또한 다윗에 의하여 많이 확대되어 보충되다가 에스라에 의해서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이라고도 한다.

 

히브리 시(詩)는 정교한 예술적 기교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감정의 표현이다. 히브리어 자체가 회화(繪畵)적인 언어이므로, 각 단어는 시각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히브리어의 원형(root)은 주로 시각적인 행위나 상태를 묘사하는 반면, 그 다양한 용법은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한다. 히브리어의 이런 특성은 타오르는 종교적 정열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다른 많은 서구의 시들과는 달리, 히브리 시는 음악적 효과를 위하여 운(韻)이나 운율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리듬과 대구법에 의존하고 있다.

히브리 시에는 음절이나 강세 상으로 어떤 기계적인 규칙을 지킨 흔적이 없다. 오히려 리듬 효과는 강세 음절과 무강세 음절의 균형 수에 의하지 않고, 중요한 단어 자체를 강조함으로써 얻어진다. 히브리 시의 발성은 단순하지만 부드럽게 높낮이를 되풀이하면서 잔잔한 위로와 비탄, 또는 힘찬 격려 등, 여러 가지 벅찬 감동을 묘사한다.

히브리 시의 두 번째 특징은 대구법이다. 시인이 한 사상을 표현한 다음 반복, 변형, 대조의 방법으로 그 주제를 강조한다. 이런 대구법 중 시편에 자주 사용된 형태는 다음 4 가지이다.

1) 동의 대구법: 둘째 행은 기본적으로 첫째 행의 내용을 반복한다(시1:2;3:17).2) 대조 대구법: 둘째 행은 첫째 행과 날카로운 대조를 보인다(시1:6).3) 종합 대구법: 둘째 또는 그 이후의 행은 첫째 행을 첨가 또는 발전시킨다(시 7:1).4) 상징 대구법: 대체적으로 직유법을 사용하여 둘째 행은 첫째 행의 표현을 심화 한다. 대구법은 두 줄로 제한되지 않고 절(節)과 연(聯)까지 확장한다. 또 시편에는 알파벳의 답관체(踏冠體) 형식도 사용되었다.(9, 10, 25, 34, 37, 111, 112, 119, 145편).

 

W. E. Gladston이 말하기를 "헬라 문명을 모두 쌓아 올려도 시편 한 권만큼 높지 못하다"고 했다. 물론 그 높이나 분량의 많고 적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시편 자체에 담겨있는 위대한 내용을 무한의 가치로 평가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아픔을 당하실 때에도 시편을 인용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하신 말씀(시22:1;31:5)이 마  27:46, 눅23:46 등에 기록되어 있다.

 

시편의 분류 총 150 편의 시를 아래와 같이 5 부로 분류할 수 있다.  제1부: 1∼41편. 제2부: 42∼72편. 제3부: 73∼89편. 제4부: 90∼106편. 제5부: 107∼150편.

 

또 아래와 같이 일반적인 분류도 할 수 있다. 1) 개인(3편) 혹은 공공(44편)의 애가(哀歌) 혹은 간구의 시. 2) 개인(30편) 혹은 공공(65편)의 감사 찬양시. 3)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4편). 4) 여호와의 왕권에 관한 시(47편).    예루살렘에 관한 시(48편).    왕에 관한 시(그 중 어떤 것은 메시야에 관한 시이다-2, 110편)등을 포함하는 찬양의 시.  5) 교훈적 지혜를 담은 시(1, 37, 119편)

 

  또한 주제에 따라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도 있다.

 1) 창조: 8, 19편. 2) 출애굽: 78편. 3) 저주: 7편. 4) 회개: 6편. 5) 순례자의 시: 120편. 6)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시: 2, 8, 16, 22, 40, 45, 72, 110, 118편 등이다.

 

아주 옛날부터 이 분류는 히브리어 성서나 헬라어 성서에 나타나 있다. 시편 전체를 5 부로 나눈 것은 모세 5경을 모방한 것 같다는 견해도 있다.

 

좀 더 다른 각도로 시편을 분류하면 1) 고라 아들들의 시편: 42∼49. 2) 아삽의 시편: 73∼83. 3) 믹담의 시편: 56∼60. 4) 상승의 노래: 120∼134.

 

구성(Plot)과 주제(Theme)에 따른 분류로는메시야 시편:  2편: 메시야의 신성(神性)과 우주 통치. 8편: 메시야로 오신 사람이 창조주가 됨. 16편: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 22편: 메시야의 고난. 72편: 메시야 통치의 영광과 영원함. 89편: 메시야의 영원한 보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110편: 영원한 왕과 제사장. 118편: 그의 민족의 지도자들로부터 배척 당함. 132편: 다윗 왕위의 영원한 계승자.

 

역사적 시편, 참회의 시편, 저주의 시편, 각 연의 첫 자가 히브리 알파벳 순서대로 쓰인 답관체(踏冠體) 시편, 신정(神政)의 시편, 찬미(讚美)의 시편, 할렐루야 시편 등이 있다.

 

시편은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좋은 신학양식

 

성경의 다른 어떤 책에서도 시편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종교적 경험이 다양하게 표현되지는 않았다. 이 다양한 믿음의 표현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인들의 심경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깊은 지혜(insight)는 이 시편들에서 제사의식과 연결됨으로써 그 영원성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는 각 개인의 삶이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얻어진 인간의 영적 체험이 한데 모아진 이 시편은 언제 어디서나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시편들은 순수하고 벅찬 감동의 자발적인 표현들이다. 일상의 어려움을 통하여 표현된 영적 체험의 실상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따뜻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첫째, 시편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 시대에 걸친 민족신앙의 고백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역경과 투쟁이 담겨 있다. 또한 이 험난한 시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회의에서 확신까지 그 순례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각 노래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어떠한 절망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시편은 예수님 사역의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예수님은 유년시절 그의 가정에서 이 시편을 배우셨고, 또 세례를 받으셨을 때, 주의 사명이 시편의 말을 빌어 선포되었다. 십자가상에서 최후를 맞으셨을 때에도 그의 마음에는 시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신약성경에서 이 시편보다 더 많이 인용된 구약의 책은 없다.

 

셋째, 시편은 예배를 통한 필수 요소였다. 전 세계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기 위하여 이 시편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시편은 예배의 기본 요소일 뿐 아니라 긴급한 개인의 심령을 더욱 풍부한 체험으로 채워 준다.

 

시편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에 의하여 사용된 책은 유례가 없다.

 이런 면에서만 보더라도 시편문학에 나타난 신학사상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시며, 원수의 억압에서 보호 인도하여 주심을 우리가 확실히 믿고, 민족과 국가는 물론 우리 모두가 개인의 구원과 번영을 위하여 여호와께 애원하고 있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심을 확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서 시편문학의 신학사상은 더욱 분명한 선을 그어주고 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은 매우 다양하다. "하늘에 계신 자"(2편),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3편),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18편), "나의 목자"(23편), "나의 인자", "나의 피난처", "내 백성을 복종케 하시는 자"(144편) 등,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항상 현재적으로 우리의 삶에 성경을  적용하여야 한다.  

성경의 시간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창조이전의 시간과 창조 당시로부터 종말까지와 종말로부터 영원으로 계속되는 시간이다. 창조 이전의 시간은 시작이 없고 종말 이후는 끝이 없으나 창조 이후부터 종말까지는 시작도 있고 끝도 있는 시간이다.

 성경적 시간관은 시간을 목표로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운동이다. 시간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현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안에서 일어났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을 위해 영원이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구원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시간은 항상 카이로스의 의미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시간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시편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절절한 고백인 동시에 그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노래이다. 시편의 신학(영적) 사상이야말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항상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신을 알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칼 바르트의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명제이다.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는 하나님 말고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생의 심령에 임하셔서 인생을 하나님의 뜻으로 감화 감동시키심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원의식을 강하게 느껴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편만이 갖는 독특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신 목적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함은 당연한 일 중의 하나이다. 시편에서처럼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는 인간의 노력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님과 인간이 연관을 갖고 밀접한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정상적인 신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시편이 이처럼 방대한 종교적 사상과 생각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시편의 독특한 신학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실로 구약의 거의 모든 신학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시종일관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두드러진 강조점이 있다. 시편기자들은 우주를 탁월하게 통치하시는 여호와께서 땅 위에, 그 백성 가운데,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해 공정한 통치를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악인으로 인한 고난과 육체적 곤경으로 난국에 직면할지라도 그들은 온 땅의 재판장께서 해명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그 공정한 통치가 그들의 생애 중에 실현되기를 기도한다. 또 의가 승리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백성들에게 가져다 준 승리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기자들이 예배에 참여하고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그들이 확신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때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뛰어넘어 멀리 메시야가 오실 때에 실제로 여호와께서 의로 땅을 다스리실 것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얼마나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말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확신 있게 기대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시편기자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언약에 대한 충성을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의를 수호하려는 열정으로 인해 그들의 말 속엔 자주 저주와 악담이 담겨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팔을 꺾으시며(시10:15) 그들의 이를 박살내고(시58:6)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기를(시69:22∼28) 기도한다. 이러한 것들은 시편기자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런 표현들은 개인적인 복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시편기자들은 그들을 배반하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시109:4∼5).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지며 악이 심판 받기를(시69:22∼28)-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 바라는 그들의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신약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이들과는 다른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가 속히 임하기를 바라는 신약의 기도도 역시 의가 수호되고 악인이 심판 받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시편기자들은 또한 이교도의 사상과 풍습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여겨 그것들을 혐오했다. 이방 다신교의 여러 측면들이 교묘한 방법(예언적 계시보다 덜 교묘하게)으로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한 논박은 때로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시68:4에 오히려 여호와께서 "구름을 타고"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실은 가나안 족속의 바알 신이 그렇게 묘사되었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 시편 전체의 주제가 그에 대한 논박이기도 하다(시 29편은 가나안의 폭풍신 바알이 가나안 땅에 폭풍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언급은 셈족의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이웃 나라들과 공통된 어휘와 비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같은 논박 부분은 그들 사이의 영적 분기점을 보여준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신들을 좇는다는 사실이 이 같은 논박을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 진리가 대대로 굳게 지켜지고 영속되었다면, 거짓되고 부패한 믿음은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방인과 의인의 역사적 전투뿐만 아니라 다신 신앙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위협했음도 알아야 한다.

 

이교도의 신앙이든 아니면 이스라엘인 배반자이든 악한 세력과의 싸움은 순전한 신자들로 하여금 그 믿음을 더 주장하게 하며 그들의 정직과 충성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소개하게 만들었다. 시편기자들은 이생에서의 구원을 기대했다. 혹자는 박해와 고난, 재난을 당하는 시편기자들이 이생을 포기하고 앞으로 올 생애에서의 만족을 기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예배와 찬양도 끝난다고 생각했다(비록 후에 쓰여진 다른 성경 본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되어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 의로우심은 이생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시6:5;30:9;88:4∼5,10∼12;115:17).

 

 시편은 그 어디에서도 예언서에 나오는 기록처럼(사26:19;겔37:1∼14;단12:2) 부활의 소망을 명명백백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시편의 몇몇 본문들은 이생 이후에도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가지는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시16∼17편;49편;73편). 그러나 그런 본문들에 사용된 표현들은 현세인 이 땅에서의 경험을 나타내는 다른 부분들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기자들은 죽은 영혼들이 거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스올'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무덤이나 극심한 위험(비유적 표현으로)을 나타내기도 한다. 시49:15은 스올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시편기자에게는 이것이 "영광의 소망"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현세의 구원과 예배의 지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시30:3도 다윗이 경험했던 스올에서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크패트릭(A. K. Kirkpatrick)은 이러한 본문들이 훗날 기록된 성경의 계시가 나타내듯 내세의 삶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쉽사리 작용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시편들(시16∼17편;49편;73편)은 영생교리의 근원과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는 저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성령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인간의 본질과 운명,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인간 최선의 참된 행복이라고 말하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는 이생에 국한하거나 갑작스런 최후의 단절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 교제가 영원하리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 강조한 이런 점만이 아니라도 수직적 수평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입체적으로까지 시편은 신학사상을 다양하게 내포하고 있음에 무한한 감사와 감동을 가지는 동시에, 계속적으로 연구 묵상할 분야이며,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좋은 신학사상을 함유하고 있는 찬양·고백양식임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최선호 목사

시인 문학평론가, 미주감신대 교수 크리스천헤럴드  재미시협 고문 

저서: <바른 말 고운 말> <뜻 따라-육영 반세기> <땅의 실수 하늘의 은혜>

<시편정해> <나의 엘로힘이여> <증보판 시편정해> <아가-노래 중의 노래> 등

서울시지정연구모범상 기독언론인상 가산문학상 기독문학상 미주시인상 수상 

Email: penmission@hotmail.com Tel: 213-219-2222 

 

 

 

 

 

 

 

 

 

 

 

 

 

 

 

 

 

 

 

 

출처 : 최 선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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