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32편 연구
1. 서 론
처음 시 32편의 연구를 시작할 당시 생각은 시 32편에서 시인(Psalmist)이 말하고 있는 '죄(Sin)'가 과연 무엇인지를 공부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보아도 시 32편의 연구방향을 그렇게만 잡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시는 악의 원인론이나 기원 문제를 따진다거나 죄의 교리 문제를 다루려는데 그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32편을 반복해 읽으면서 필자는 단편적으로나마 이 시가 '시인의 참회와 죄 사함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시인이 과거에 경험했던 참회와 용서의 감격적인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 예배 공동체 앞에서 죄, 고통, 허물로 괴로워하는 회중들에게 건강 회복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강력히 선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구약학자들의 주석을 살펴보며 필자는 필자가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 가졌던 추측보다는, 오히려 이후에 반복해서 이 시를 읽으며 느꼈던 생각과 거의 일치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적으로 주석가들이 32편에 붙인 전체 주제는 다음과 같다.
A. Weiser, <죄의 용서>
H. J. Kraus, The Blessedness of the Forgiveness of Sins
P. C. Craigie, The Blessing of Forgiveness
J. W. Rogerson and J. W. Mckay, Happy the Man Whose Sin is Forgiven
B. W. Anderson, The Blessings of Repentance and Forgiveness
이제 필자의 연구 방향은 '시인의 참회와 하나님의 죄 사함의 축복'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이 시가 말하고 있는 참회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리고 죄 사함이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의 죄 사함인가? 시인은 어떤 죄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는가? 그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로부터 해방되었는가?
시인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이 시를 썼는가? 이 시의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 시는 어떤 목적으로 정경에 들어와 있는가? 이 시는 어떤 양식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이 시는 예배에서 어떤 기능을 하였는가? 이 시의 내용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이 시의 케리그마는 무엇인가? 신학적 의도는 있는가? 이 시를 가지고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시인가? 필자는 수 없이 쏟아지는 개론적인 질문들을 32편에 던지며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2. 저작 동기와 시인의 삶의 자리
2.1. 이 시는 어떤 동기에 의해 쓰여졌을까?
필자는 일단 시편의 성립과정을 볼 때, 이 시의 최종적인 형태가 제의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fellow-worshippers)들과 함께 나누어 공유하려는 목적으로 편집되어 쓰여졌다는 시편신학의 개론적인 입장에 주목하였다. 그렇다면 이 시의 출발점은 어디서부터일까? 처음부터 이 시가 실재하지도 않은 한 개인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예배 공동체에서 회심교육의 텍스트로 사용할 목적으로 쓰여졌을까? 이 시의 삶의 자리는 원래부터 제의 공동체의(Cultic Community) 자리였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며 필자는 3-5절을 관심 있게 보았다.
3.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a // 온종일 끊임없이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b
4.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셀라)
5.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허물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a // 주께서는 나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b(셀라)
이 부분은 굳이 외적 삶의 환경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되지 않았다고 해도 될 만큼 개인적인 용어로 표현되어 있으며, 나와 우리의 경험으로 충분히 재현될 수 있는 '참회와 죄사함의 과정'이 기록되어있다. 필자는 이와 관련된 여러 자료를 검토하며 이 시가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출발되었다는 점과 함께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먼저 슈미트(H. Schmidt)는 이 시의 저작동기가 시인의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다후드(Dahood)도 이 시의 내용과 저작동기가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것에 대한 감사시로 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질병이 범죄에 대한 징계>로서 받아들여져 온 이후 <병 치유는 죄 사함의 징표>가 되어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모빙켈(Mowinckel)도 죄와 질병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점을 연구하면서 시인들의 죄의식이 '질병에 관한 시'들 안에서 그리고 '건강 회복에 대한 감사시'들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욥과 욥의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죄와 질병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질병에 걸린 사람은 혹시 그 자신이 토라에 명시된 어떤 거룩한 명령이나 금기시 된 관습과 법을 어기지는 않았는지를 되돌아보아야만 했다.
반면 크라우스(Kraus)는 이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크라우스는 32편이 병 고침에 대한 감사시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실재했던 어떤 한 죄'가 시인 자신을 매우 고통스럽게 했고 결국 죄의 고백을 통해 그 죄가 사함 받은 것에 대한 기쁨을 노래한 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빙켈이 지적하였던 것처럼 '시편이 예배에서 어떤 기능을 감당하였느냐?'를 묻는다고 할 때, 이 시가 예배 공동체에서 있어왔던 속죄제(sacrifices for sin)와 정결의식(rites of cleansing)과의 관련성(레위기4:27-5:19-속죄제를 드려야 할 경우, 14:1-57-환자를 정하게 하는 예식) 속에 놓여 있지는 않은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필자는 이처럼 몇 몇 주석가들의 견해를 통해 필자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아주 적절한 답은 아니지만 이 시가 처음부터 예배공동체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시 32편 자체를 놓고 볼 때, 시인이 과연 '병 그 자체' 때문에 근본적으로 고통받았겠는가? 를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위의 학자들의 의견에 부분적으로는 동의하였지만, 크라우스의 관점이 매우 적절하다는 견해를 가진다.
2.2. 이 시인의 죄의 고통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질병 때문인가? 실재했던 범죄 때문인가? 아니면 개인적이고 기질적인 차원에 기반한 심리적 이유 때문인가?
물론 시인이 어떤 병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그 이유는 32편 3-4절에서 나타나는 신체와 관련된 용어에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내 몸이 탈진하고, 혀가 말라 버렸다"(표준 새번역)는 시인의 고백은 시인이 지금 가장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면서 동시에 시인이 어떠한 '심각한 질병'에 처해있다는 것 또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렇게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맥적으로 볼 때 슈미트나 다후드, 모빙켈의 견해대로 '질병 그 자체'가 시인에게 고통을 주고 죄책감을 가지게 하지는 않았다고 보여진다. 즉,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 죄인이라고 까지 낙인찍힌 어떤 한 사람이 점점 그 마음까지 쇠약해지고 병마저 악화되어, 이 고통을 마침내 하나님께 자백하였다는 식의 추측은 '전체적인 시의 구조'로 보았을 때 그 순서가 아주 적절하지는 않다고 보여진다. 문맥적으로 보았을 때 시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본 파일에서 볼 수 있음
따라서 이 시의 출발점은 그가 지은 <어떠한 실재적인 죄>가 그를 심리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점점 <병>들게 하였고 시인의 고백대로 그 죄를 자신의 어리석음과 완고함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추기 시작함(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4절a)으로 인해 신체마저 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참회와 고백의 과정을 통해, 그의 죄를 사해주시고(내적 치유), 병까지 치료해 주셔서(외적치유) 시인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그 감사의 마음으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사실 필자가 이 부분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한국교회의 일부 보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부흥사들과 목회자들의 '질병과 죄의 상관성'에 대한 잘못된 종교적 신학적 시각 때문이었다. 부흥회를 가보면 이러한 천박한 주장은 곧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병 걸린 사람은 모두 죄인으로 취급받는 분위기가 되어버리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앞으로는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결론 내리면서, 이 시의 내용이 분명 어떤 한 개인이 심한 죄책감(죄를 안고 씨름하는 자의 고뇌)으로 인해 병까지 얻은 번민과 고통을 야훼 하나님께 고백한 후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진정한 해방을 얻게 된 기쁨과 감격을 노래한 감사의 찬양시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시가 점차적으로 후대에 제의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다듬어져서 교훈시로서 예배용으로 사용되었을까? 다음 장에서는 이 물음에 대한 해명을 위해 시 32편의 양식과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더욱 더 이 시의 삶의 자리가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3. 양식(Form)과 삶의 자리 규명
여기서 발제자는 시 32편을 궁켈의 양식 비평학을 인용하여, 양식(Form)-내용(content)-삶의자리(setting in life) 순서를 따라 이해해 보려고 한다.
3.1. 시의 양식과 그 내용
이 시는 시편 전체를 크게 찬양시와 탄식시로 나눈다고 할 때 찬양시에 속하며 세부적으로는 개인 감사시(H. J. Kraus, P. C. Craigie, H. Gunkel)에 속한다. 일종의 참회적 성격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를 참회시라고 보기는 어렵고 다소 상관관계는 있지만 탄원시로 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바이저(Wiser)나 안데르센(Anderson)의 견해대로 "시인이 이미 경험한 참회와 죄의 용서를 되돌아보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시(Psalm of Thanksgiving)"의 형태로 보는 것이 옳겠다. 더욱이 이 시를 형태상 개인 감사시로 보는 이유는 대표적으로 궁켈(H.Gunkel)의 제(諸)시편에 대한 형태론적 연구에 기인한 것인데,
*개인 감사시의 형태론적 연구(파일에서 볼 수 있음)
이러한 감사의 노래의 특징은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내용이다. 한편 이와는 반대 입장으로 32편을 지혜시로 완전히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다(R. E. Murphy, J. K. Kuntz). 그리고 굳이 이 시를 지혜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혜영향(wisdom influence)을 받았고 지혜 문학적 특징이 반영된 교훈시(Andorson, Brueggemann.)로 보려는 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하기에 궁켈은 32편을 굳이 지혜시로 분류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는 32편에 지혜적 구성요소가 조금 나온다고 해서 그 시 전체를 지혜시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학자들 사이에 이 시가 지혜시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학문적 기준은 매우 다양하지만, 어느정도 공통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시가 지혜시인지 지혜시가 아닌지는 그 시에 들어있는 공통적인 모티브(Motive)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양식과 내용 그리고 어휘를 바탕으로 식별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32편과 지혜문학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모티브 비교(파일에서 볼 수 있음)
그렇다면 이 시에서 나타나는 지혜 문학적 요소는 무엇인가? 발제자는 시편 32편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이런 모티브를 통해 지혜 문학적 요소를 몇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1-2절에 나타나는 '아쉐르(복이있다)' 공식구의 흔적인데 이 공식구는 명사적 감탄사로서 지혜문학에서 나타나는 요소 중 하나이다. 학자들 중에 안데르센(Anderson)은 이러한 요소를 본문의 1-2절, 6-7절, 10절에서 찾는다. 크라이기(P. C. Craigie)는 1-2절, 9-10절에서 그 지혜 문학적 요소를 찾는다. 로저슨과 맥카이(J.W.Rogerson and J.W.Mckay)는 1-2절, 8-11절에서 지혜문학의 특징과 영향을 찾는다.
결론적으로 볼 때, 필자는 이 시를 머피나 쿤츠처럼 전체적인 지혜시로 분류하는데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시 32편 안에 '감사'와 '지혜'의 요소들이 상당히 복합적으로 공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시의 성격을 <감사시의 구조를 그 틀(Basic)로 하고 지혜 문학적 성격을 후기에 첨가시킨 시>, <지혜적 성격을 띤 감사시>, <지혜영향을 받은 교훈시>로서 나름대로 정의하려 한다.
3.2. 최종적인 삶의 자리 추측
사실 양식과 내용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해서 그 삶의 자리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다양한 집단들이 자신들만의 문화적 진공관 속에서 활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다양한 시 유형이 서로의 집단에게(예언자, 지혜자, 율법가) 영향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시를 '감사시' 로만 또는 '지혜시'로만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학자들은 지혜시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체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이 포로기 이후의 작품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따라서 이 시는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왔던 시로서 <비제의적인 시(Non-Cultic Psalm)>에서 <제의적인 시(Cultic Psalm)>로, 감사시로부터 출발하여 지혜요소가 첨가되어 포로후기의 예배공동체에 정착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증거로부터 가르침으로 넘어감). 처음의 삶의 자리를 감사시로 본다면, 우리는 이 시가 감사예물을 드리는 축제 때 선포된 것은 아닌가?하는 가정도 해볼 수도 있겠다. 필자는 이러한 추측을 시 22편 22절을 통해 추측해보게 된다.
"주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나의 형제자매에게 알리고, 예배 회중 한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시22:22)
이러한 필자의 연구방향은 로저슨과 맥카이(J.W.Rogerson and J.W.Mckay)의 견해하고도 상당히 일치했는데, 그들은 이 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이 아니라 시인의(개인) 삶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실제적인 작품이며, 그 부분이 1-7(감사시)절까지라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예배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사용하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지혜자 집단?) 8-11(지혜시)절이 합쳐졌다고 본다. 그래서 나중에 교훈을 목적으로 하여 이 시의 삶의 자리가 제의공동체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Anderson, kraus).
4. 본문 주해
4.1. 시의 구조
이 시의 구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학자들간에 의견은 분분하다. 참고적으로 보면 안데르센(A. A. Anderson)은 32편을 시의 특징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Part) 구분한다.
A. (1-2) 용서받은 사람의 축복사 (사실은 결론부분)
B. (3-5) 시인의 과거 경험 이야기 (죄와 죄의 결과, 참회와 기적적인 죄 사함의 사건)
C. (6-7) 시인의 개인적인 고난과 그 후의 해방사건을 결론짓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함
D. (8-9) 시인이 죄 용서함을 요청할 때 계시 받은 거룩한 신탁
E. (10-11) 야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시인의 격려, 교훈의 요약.
부르그만(W. Brueggemann)은 이 시의 구도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A. (1-2), B. (3-7), C. (8-11) 여기서 그는 B부분을 B-1과 B-2로 나누는데 B-1은 3-5절, B-2는 6-7절로 구분한다. 크라이기(P.C.Craigie)는 이 시에서 교차 대구법(대각선 십자가 배열)이 그 특징이라고 하며 2개의 부분으로 나눈다.
Part1: (1)지혜(1-2) A (2) 감사(3-5) B
Part2: (1)감사(6-8) B' (2) 지혜(9-10) A'
필자는 여러 주석가의 글을 참조하며, 이 시의 구조를 아래의 표와 같이 구분해 보았으며, 그 구분은 안데르센(A. A. Anderson)과 키드너(D. Kidner)의 견해와 일치시키되, 특징은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도표는 파일에서 볼 수 있음
특징적인 것은 이 시가 이처럼 매우 복합적인 구조를 띠면서도 하나의 주제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어떠한 죄를 안고 씨름하든지 그 사실을 숨김 없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계산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용서해 주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의 조언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4.2. 주해와 케리그마 발견 (표준새번역)
다윗의 마스길 : '다윗에게 속한'(레다윗)이라는 표제어는 시편에서 73개의 시들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이 시가 다윗에게 속한 시 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오히려 포러(G. Fohrer)가 말한대로 '레'라는 전치사의 권위 아래 수집된 시중의 하나로 보여진다. 마스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교훈시(didactic psalm)'라는 뜻이다. 이 기능은 이 시의 목적, 그리고 그 제의적 사용에 관한 정보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셀 라 : 이 시에서 '셀라'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1-4절 뒤, 5절 뒤, 6-7절 뒤이다. 이 단어는 음악용어로서 '음악의 간주', '반복', 그리고 '기도 때의 구부림'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으며, 그 시가 강조하려는 주요 내용을 담은 짧은 후렴구를 '회중의 함성'에 의하여 높이 외치라는 음악적 지시어이다. 우리는 특별한 지식 없이도 이 단어를 통해 이 시가 예배공동체에서 노래형식으로 불려져 왔음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공적인 연주를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축복사(1-2절)
1. 복되어라! 지은 죄(transgression)a 용서받고 허물(sin)b을 벗은 그 사람!
2. 주께서 그의 잘못(iniquity)c을 따지지 않으시고,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은 복되고 복되다!
이 시의 전체적인 주제로 볼 때 1-2절의 축복사는 최종적인 결론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지혜적 가르침) 우리는 여기서 죄를 표현하는 세가지 용어를 발견하게 된다. 이 단어의 의미가 어원론적으로는 a. 거룩한 권위에 대항해서 반란하는 것(transgression), b. 어리석은 행동(sin), c. 굽음, 길을 잃어감, 타락해감(iniquity)이라는 뜻으로서 약간의 의미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시인은 이 세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함으로서 자신이 과거에 처해있던 실제적인 범죄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과 대조를 시키고 있다. 마치 산상설교에서 예수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시인은 마음이 청결하고 진실한 사람·정직한 사람·마음에 속임수가 없는 사람은 '복되다'고 선포한다. 죄를 용서함 받은 사람, 허물을 벗은 사람, 잘못을 추궁 당하지 않는 사람은 '곧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참회와 죄사함(3-5절)
3. 내가 입을 다물고A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B에는, 온종일 끊임없이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4.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셀라)
5. 드디어 나는 내 죄a를 주님께 아뢰며A 내 잘못b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B. "내가 주님께 허물c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께서는 나의 죄d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셀라)
그것은 곧 하나님께 고백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거짓이 없는 사람은 시인의 과거 경험에서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진실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고백은 곧 대화하는 태도를 암시한다. 필자는 특히 이 부분에서 브루거만의 주석을 매우 흥미롭게 보았는데, 그는 이 부분에서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 태도(3절-A·B)와 긍정적 태도(5절-A·B)로 대조되는 글의 구조를 파악하여 놀라운 케리그마(Kerygma)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 인간의 태도는 선택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부정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태도) 그것은 우리 삶의 고통이 될 수도 있고 행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여기서 죄의 문제를 인간의 선택의 차원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있고 그 결과 또한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즉, 자유와도 연관되어 있다. 수많은 환난과 악(惡)은 우리 스스로 자유를 남용한데 원인이 있으므로 하나님 때문이라고 떠넘겨서는 않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당신을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자유, 죄를 짓고 나서 고백할 수 있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살거나 하나님을 대항하고 완곡하게 우리 뜻대로 살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다.
'우리의 자유'라고 하는 것의 실상은 내부에 죄지을 가능성을 지닌 것이며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의 실상은 하나님이 생명을 존속시키려고 도모한 계획을 내부에서 어기는 것을 지시한다. 3-5절에서 무엇보다도 독특한 것은 자유와 선택의 문제, 책임성에 대한 문제를 죄의 문제와 상관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선택의 관념과 책임의 관념에 대한 시편기자의 섬세한 접근은 죄에 둘러 쌓인 인간실존의 구체적인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인간에게는 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선택의 문제'로서 인간을 끊임없이 갈등과 모호성에 직면하게 한다.
놀랍게도 저자는 여기서 모든 문제를 마감하지 않는다. 즉 죄를 짓고 난 후 죄를 고백하는 부분까지도 인간의 선택과 책임성의 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다. 시편의 저자가 어떤 종류의 죄를 지었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의 죄를 보듬고 씨름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시 32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케리그마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죄를 지었건 하나님 앞에 그 죄를 고백하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선택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짓 없는 사람 정직한 사람, 그리고 의인으로 높여주신다는 것이다. 수 천년전의 삶의 자리에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이처럼 놀라운 신학적 통찰력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 앞에 긍적적이고 솔직한 사람 그는 기꺼이 그 허물이 덮혀지고 용서받는 것이다. 그는 시인이 말하는 대로 진정 축복받은 사람이다.
감사와 신뢰(6-7절)
6. 믿음이 깊은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에, 모두 주께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쳐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7.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를 재난에서 지켜 주실 분! 주께서 나를 보호하시니, 나는 소리 높여 주의 구원을 노래하렵니다.(셀라)
6-7절은 3-4절에 나와있는 '시인의 무기력한 마비상태'의 내용과는 완전히 날카로운 대조를 보이면서, 시인의 모든 상황이 이제 명백하게 바뀌었음을 독자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한다. 시인은 이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죄를 고백함(5절)으로 오는 기쁨과 축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시인이 경험한 기쁨과 축복의 신비는 'be silent before God'에서 'acknowledge before God'로 옮겨가는 자백과 기도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그에게 닥쳐온 고난의 홍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룩한 신탁(8-9절) - 교훈과 훈계, 지혜적 가르침
8. 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가야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Instruct) 가르쳐(Teach) 주마. 너를 눈여겨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
9. "재갈과 굴레를 씌워야만 잡아 둘 수 있는 분별없는 노새(Mule)나 말(Horse)처럼 되지 말아라"
필자는 여기서 죄사함을 받기 이전 상황에 처해있었던 시인의 과거상태를 더욱 더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는 두 개의 비유적인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노새'와 '말'이라는 단어이다. 필자는 여기서 시인이 노새와 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동물의 특징을 생각하며 썼을 것인가를 질문해 본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비유가,
"말에게는 채찍, 나귀에게는 재갈,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필요하다"(잠26:3)
"네가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이르기를 '그럴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살아가겠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행동하겠다 '할 것이다"(렘18:12)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마들처럼 떠나갔다."(렘8:6)
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완고함(Stubborn)'과 '고집스러움'을 지시하는 단어라고 판단하였다. 이로써 필자는 시인이 왜 그토록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던가? 에 대한 그의 심리적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그의 삶에서 선택했던 부정적인 태도의 배후에는,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고함>과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또한 남의 충고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고집스러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제의적 선포 (10-11절)
10. 악한자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사랑이 넘친다.(이스라엘 계약신앙)
11. 의인들아, 너희는 주님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정직한 사람들아, 너희는 다 함께 기뻐 환호하여라.
고대 이스라엘에서 '의'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적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지, 그것 자체를 어떤 행동의 기준이나 이상적 모델로 삼지는 않고있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이 '의인들아!'라고 부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의 전체 문맥으로 보았을 때 의인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그것은 '정직한 사람들'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직한 사람들이 곧 의인들임을 암시하며 '거짓이 없는 사람들'을 지시하는 것이다.(2절) 여기서 정직과 거짓 없음은 관계적 측면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은 어떤 도덕적,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추구해서 얻어진 '자기 정의(Self-Righteousness)'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사람,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의인(義人)이라고 불리워진다. 따라서 심판의 척도는 인간의 덕행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자비!)에 대해 인간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응답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놓여있는 것이다.
5. 결론과 설교적 응용
하나님과 화합하는 것이 곧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다. 사실 시편 전체가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불변의 주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시 32편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회복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필자는 글을 나가며 이러한 '존재의 근본적인 회복과 치유의 과정'을 결론과 설교적 응용부분을 대신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 한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죄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현실적인 자기의 상태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 물음은 사실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사람만이 자기를 의식하며 반성적 사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궁극적 실재요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이의 조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에게 빚진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자리 가운데 하나님을 마음의 심지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태양이 있어야 가지를 뻗듯,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 인간의 삶은 진정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결코 그의 몫으로 하나님께 빚을 돌려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그 단순하지만 심오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오늘 우리가 성찰해야 될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 시편의 저자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깨닫지 못하는데서 오는 가장 참혹한 고통의 상황에 빠졌다. 실로 그 고통은 하나님에게서 오지도 않았고, 인간 본성으로부터 오지도 않았고, 혹은 악마로부터 기원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 인간의 완곡함과 실존주의적 소외였으며 외로움이었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단절되었을 때 시인은 정신과 육신이 병들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는 이 세상의 모든 인격과 삶을 향한 진지하고 성실한 성찰을 인도하는 힘이자 근원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對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 관계에서도 대화의 도구는 인간을 살리고 세계가 존재해 나가는 방식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하였듯,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이며 대화의 존재인 것이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며 나(Ich)와 너(Du)의 존재가 만나 대화할 때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군상은 자신의 독자적인 목소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못된 망상과 관념에 점철되어 있다. 대화가 의미 없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자신과의 대화, 그리고 절대자이신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이는 참된 삶을 일구어갈 수 없는 한계상황을 시편의 기자는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실로 이 관계의 힘이 단절되고 파괴될 때 역사와 시대는 병들고 인간과 자연이 병드는 것이다. 수 천년 전 32편의 시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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