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언자들의 전언(傳言)들
구약예언자들의 전언(傳言)들은 초(超) 시간적인 이념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기를 향한 신(神)의 의지를 "신(神) 앞에서 백성을 향하여" 즉 신(神)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 전언(傳言)한 말들이다. 그러므로 그 예언자적 전언(傳言)은 신앙고백이거나 이념 또는 케리그마라기보다는 야훼에 관한 소식을 특정인(들)에게 선포하는 선포문이라고 하겠다.
(1) 예언문학을 남긴 가장 초기의 예언인,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아모스"의 예언은 그가 전하고 있는 다섯개의 환상보도(암 7 : 1-9 ; 8 : 1-3 ; 9 : 1-4 ; 메뚜기, 불, 다림줄, 여름 실과 광주리, 제단 곁에 서신 야훼 환상)를 통하여 신(神)과 백성 사이에 서 있는 "중재자" 또는 "대변자"로서의 예언자가 지닌 가장 극적인 고민과 긴장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용서할 수 없는 심판을 결심하신 야훼 하나님과 그리고 그 피할 수 없는 신의 심판 아래에 처하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서 있는" 예언자 아모스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주의 심판 결단을 거두어 주실 것을 두 번이나 간절히 "중재"한다(암 7 : 2, 8). 그러나 백성의 거역은 굽힘이 없이 계속됨으로 인하여 아모스도 세번째부터 다섯번째까지의 환상보도를 통하여서는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암 7 : 8 ; 8 : 2). 또는 "아무도 도피할 수 없을 것이다"(암 9 : 1)라는 신(神)의 돌이킬 수 없는 "심판결행"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되고 또 그것을 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피할 수 없는 "공의의 심판"이라는 신언(神言)으로 아모스의 예언이 일관되게 성격지어진 것은 지배계층들이 시장을 독점하고 그리고 가진 자에게만 유리한 경제정책을 취하여 나가므로 인하여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함에 따라 생겨난 사회경제적 부정의(암 2 : 6-11 ; 3 : 9 4 : 3)가 계속되었기 때문이고 또 이에 대한 신(神)의 교훈적 / 교육적 심판 경고들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수사어투가 아모스의 설교적 성격의 예언 속에서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암 4 : 6, 8, 9, 10, 11) 또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러면 산다"(암 5 : 4, 14)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백성들의 사회부정의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모스에게 인식된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한 요구이고 그의 예언자적 환상 속에 비추인 신의 모습은 정의의 신 또는 공의의 신이었다. 그러나, 아모스에게 인식된 신의 분노는 선민 이스라엘이 행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의 파괴와 그 계약특권의 오용(誤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성을 오히려 선민 이스라엘이 모독하였다는 데서부터 발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모스 예언의 분노의 분출은 "내가 선언한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너희가 이 모든 악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암 3 : 1-2)라는 말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선택 신앙"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 ―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 에는 전혀 아랑곳 없이, 단지, 모세시대에도 없었던 각종 종교의식에만 매달려서 사회정의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구 짓밟는(암 2 : 6-8 ; 4 : 4-5 ; 5 : 4-5, 7) 이스라엘 선민(選民)의 이중적 행태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행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앗시리아에 의한 이스라엘의 종말을 내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아모스 예언의 "혁명성" 같은 것을 읽게 된다. 즉 여기서 아모스는 "야훼의 날"로 표상되는 예언자적 종말신앙을 선민(選民)을 위한 종교제도적 특수장치로 이해하려는 태도, 이른바, 장차 있을 야훼의 날(야훼의 역사개입의 날)은 무조건 이스라엘에게만 일방적으로 축복과 구원이 베풀어지는 날로 보려는 민족주의적 종말 신앙관을 철저히 깨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구약 예언자의 모습은 바로 이런데서 그 진가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아모스는
너희는〔이스라엘은〕망한다! 야훼의 날이 오기를 바라는 자들아, 왜〔너희 따위가, 선민이라는 것만 믿고〕야훼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너희에게는 오히려〕어두운 날이며 빛이라고는 없는 날이다. 사자를 피하여 도망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집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 물리는 것과 같은 날이다(암 5 : 18-19).
말하자면, 사회 부정의에 젖어 있는 자는 그가 아무리 선민(選民)이고 종교의식에 철저해도 심판을 피할 길이 없으며(암 9 : 1c)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것(암 1 : 6, 9, 11; 2 : 1, 4, 6 등)이다. 야훼 하나님의 뜻은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 5 : 24)는 요구 속에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아모스는 야훼 하나님의 신의(神意)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훼로부터 아모스에게로의 신언(神言)의 전이(transition)는 이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모스 예언의 탈(脫) 민족주의적 세계주의 사상(특히 암 9 : 7 ; 1 : 1 2 : 16)은 종교를 초월하는 신언(神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2) 아모스와 거의 동시대의 예언자인 "호세아"에게 전달(傳達)된 하나님의 말씀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에게 가장 요청되는 것이란,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의 "신의"(信義)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그 계약의 출발과 기초는 "사랑과 신의"였다(신 7 : 7)는 말이다. 말하자면, 계약사회를 유지하게 하고 존속하게 하는 힘은 "사랑과 신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호세아에게 전이(轉移)되어 온 야훼 하나님의 시대적 말씀은 이스라엘이 시내산 계약의 때에 하나님과 맺었던 계약의 기초인 그 "율법"을 어기는 이스라엘의 그 불신성, 음란성, 그리고 배신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호세아에게 전달된 신언(神言)이었다. 그 말씀을 "대변"하는 것이 호세아 예언자의 예언자적 사명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의 근본적 동기는, 논의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지만(신 7 : 7) 그 사랑의 계약을 이루는 그 기초는 "율법"이었다. 이것이 호세아에게 전이(轉移)된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 사실을 그의 예언 중에서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말씀은 역시 호세아 4장 1-3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아, 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주께서 이 땅의 주민들과 변론하신다. 야훼께서 이 땅의 주민들과 변론하신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시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닷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
이 본문이 말하는 가장 핵심적인 예언자적 증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신실한 계약관계를 깨뜨리는 요인들인 "진실없음", "사랑없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음"은 결코 추상적인 종교교리가 아니라 "저주", "시기", "살인", "도둑질", "간음"과 같은 반(反) 율법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이러한 반(反) 율법행위가 "땅의 탄식, 들짐승과 공중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의 멸종"을 가져올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현대인들이 심각히 문제삼고 있는 환경오염 문제나 생태학적 위기 문제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반(反) 율법성(律法性)에서 왔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기원전 8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은 충분히 넘는 그 먼 옛날의 예언자적 메시지가 현대의 생태학적 위기를 이와 같이 인간학적이고도 종교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호세아가 관찰한 종말론적인 생태학적 위기는 율법의 하나님과 물질적 풍요의 신 사이를 구분하고 또 이원화(二元化)하는 신앙적, 이념적 모순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예언자 호세아는 예언자 엘리야가 주장한 것처럼, 율법의 하나님과 풍요의 신, 즉 윤리적 신(神)과 자연의 생성소멸을 주관하는 창조와 생산의 신 또는 풍요의 신은 사실,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하나의 신(神)은 "야훼"라고 하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언자 호세아는 생산신(生産神) 바알과의 성적(性的) 합일(合一)을 예배화 또는 제의화(祭儀化)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고 물질의 풍요에 눈이 어두워 신앙윤리를 내어버리는 이스라엘의 음란한 부정절(호 2 : 2-3)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그들에게 회개하고 야훼에게로 돌아올 것(호 6 : 1)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그의 메시지의 강한 설득력은 그의 음녀와의 결혼상징(호 1 : 2-3)에서부터 왔다고 하겠다.
여기서 호세아가 생각한 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를 좀 더 현재화하여 "헷세드"("신실한 사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계약조건으로 맺은 "부부관계"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물론,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도 표현할 때도 있었지만(호 11 : 1-4), 죽음의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살려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티없이 맑고 깊은 사랑을 심화(深化)시킴으로써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살 길은 향락주의적 물질주의(바알주의적 가나안주의)가 아니라 죽음의 사막에서 ― 그 고통의 자리에서 ― 사랑(헷세드)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가슴에 심어 주신 그 참되고도 순수한 윤리적 "사랑", 그것에 대하여 성실하게 보은 응답하는 길뿐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즉 "앗시리아를 향하여 도와달라. 이집트를 향하여 도와달라" 하여 강대국들에게 이리 저리 추파를 던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호 7 : 11).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부부계약에 성실하는 것은 그 계약의 기초인 "율법"에 충성하는 것이요 향락주의와 물질주의의 외간남자〔情夫 : 이방신〕와의 관계를 끊고 "발길을 돌려서〔본〕남편이신 야훼에게로 돌아가는"(호 2 : 7) 것이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이 그러한 음란스러운 물질주의와 향락주의 이념으로부터 돌아서서 참 삶의 길로 돌아오도록 하는 "고난교육"(심판의 채찍을 통한 교육 ; 호 2 : 6-7, 14-23)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점이다. 이것이 호세아가 본 하나님의 "헷세드"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약적 사랑의 확고부동한 신실성이 드러난 것이다. "헷세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브라임)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 "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차라리〕내가 마음을 고쳐먹겠다"(호 11 : 8). 실로, 예언자의 길은, 이와 같이, 운명점술가(foreteller / fortuneteller)와는 그 길이 너무나 다르지 아니한가!
아모스는 비록 남왕국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위에서 언급한 아모스와 호세아는, 비록 그 예언의 편집은 남왕국에서 되었다 해도, 그 모두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하였고 주로 왕정(王政)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저들과 거의 동시대의 예언자인 남왕국 유다의 예언자로서,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와는 달리 유다 왕궁과 성전 주변에서 주로 예언을 했던 자는 "이사야"였다. 그러므로, 그의 예언은 비록 초기의 풍요기에는 권력가들의 횡포에 대한 심판예언도 하였고 또 그러한 죄를 짓는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야훼 하나님이 자기 주인(主人)인 줄도 모르는, 이른바, 주인을 알아보는 소나 나귀보다 더 무지한 백성이라고까지 유다를 비난하면서 침략제국 앗시리아를 이스라엘 심판(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하시리라는 심판의 신언(神言) ― 신탁(oracle) ― 을 선포하기까지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심판예언은 어디까지나 불순물을 제거하여내되(사 1 : 25), 마치 그가 성전에서 소명(召命)을 받을 때처럼, 그렇게 부정(不淨)한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태워(사 6 : 6-7) 모든 것이 다 타서 단지 "그루터기가 될 거룩한 씨"만 남게 하시려는(사 6 : 13) 정화(淨化) 작업의 한 일환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이사야 메시지의 핵심을 학자들은 "남은 자" 사상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의 아들의 이름도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을 가진 "스알야숩"(사 7 : 3)이라는 이름을 짓도록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사야에게 전달(傳達)된 핵심적인 신언(神言)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야만적-이질성"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침략제국 앗시리아를 이용한, 파괴적인 유다징계와 심판에 관한 예언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은 "앗시리아"에 저항하는 시리아-에브라임의 연합군으로부터 도전을 받았을 때, 불안에 떨고 있던 그 유다 왕 아하스에게 "믿기만 하면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대언(代言)한 "믿음"에 관한 신탁문일까? 아니면, 그후 요시아 왕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자극받은 희망적 메시지가 거기에 첨가, 확대된 내용 그 모두를 포함한 것일까? 물론, 이사야 1-39장의 내용은 그렇게 단순한 편집물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 그의 묵시문학 자료까지 포함할 때 ―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아마도 혹독한 심판경고를 통한, 그러나 구원지향적인 "남은 자 사상"으로부터, "믿음"을 중심주제로 한 이른바, 다가올 다윗 왕조를 통한 종말론적 희망 또는 메시야적 희망까지 내다보는 매우 특수한 메시지, 이른바, "심판 → 구원"의 틀을 가진 메시지로 묶여져 있다고 하겠다. "메시야"는 처녀의 몸을 통하여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리라는 예언(사 7 : 14), 메시야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평화의 왕(사 9 : 6)으로 오시리라는 예언, 그리고 "어린이가 이리와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모사의 굴에 손을 넣는"(사 11 : 6, 8) 그런 이상적인 평화공존의 세계가 미래의 메시야적 세계 안에서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 예언자 이사야가 받은 신언(神言)의 끝마무리였다. 실로, 그에게 있어서 세계를 붙드는 유일한 힘은 "임마누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뿐이었다. 그러므로 강포한 저 대 침략제국 앗시리아도 이렇게 또는 저렇게(!) 자신의 역사섭리의 도구로만 쓰시는(사 10 : 5-19) ― 앗시리아는 한 발자국도 하나님의 지시를 벗어나지 못했다 ! ― 하나님의 절대적 역사 주권에 관한 "믿음"을 가지라는 요구가 이사야가 받은 신언(神言)의 핵심이었다.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 예언문학의 절정기를 마감하는 시기에 남왕국 유다의 "모레셋"이라는 시골 출신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는 "미가"였다. 그는 소작농민들의 고뇌와 정부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들의 고뇌를 잘 이해했던 "아모스"처럼, 시골 땅을 불법적으로 착취하는 도시 중심적 신학체계를 반대하는 입장을 신언(神言)으로 대변한 예언자였다. 그의 비판의 대상은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치·사법·종교에 걸쳐서 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가 힘없는 자들의 밭과 집을 합법적으로 강탈하고 그리고 노동력이 될 만한 자들은 닥치는 대로 노예화시켰다는 점이다(미 2 : 2). 따라서 "미가"가 본 하나님은 공의(公義 : 미슈파트)의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은 이러한 힘있는 자들의 횡포에 심판을 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심판의 철퇴는 예루살렘에 제일 먼저 내려질 것이라고 보았다(미 3 : 12). 이러한 예언은 아모스의 격정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사야의 경우에서처럼, 그의 예언의 후반부(미 4-7장)가 평화와 위로의 선포로 바뀌는 그런 예언구도(심판 → 구원의 예언구도)는 구약예언 구도의 일반적 현실이다. 그런 점은 아모스와 호세아의 예언을 면밀히 고찰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기원전 8세기의 예언에서부터 기원전 6세기에 있는 포로민의 귀환(미 4 : 7, 10)과 이보다 1세기는 더 늦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에 관한 언급(미 7 : 11)을 동시에 발견한다는 것은 이 예언의 후반부를 다른 시기의 첨가로 볼 수도 있게 한다. 그러나, 특히 아모스의 예언이 웅변하고 있듯이 이런 유형의 예언서를 그와같이 두 시기 또는 세 시기,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구약예언서의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보다는 19세기 주관주의적 역사주의 학풍의 영향에 더 얽매이는 오류로 보인다.
미가는 예루살렘에 대한 가혹한 심판선언 다음에 있을 평화의 세계를 어느 예언자보다 가장 탁월하게 묘사해 준다. 평화, 위로, 구원(救援)은 언제나 심판받은 잿더미 위에서 새롭게 싹트는 것이다(제2이사야를 생각하라). "미가"가 내다본 평화는, "칼을 쳐부셔서 농기구를 만들고, 자기가 정당하게 노동하여 결실한 실과를 따먹으며 바로 그 실과나무 아래에서 아무런 위협 없이 살며,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자기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신 줄을 모든 열국이 다 알게 되는 그런 세계"(미 4 : 3-5)였다. 더욱 특이한 것은 이러한 평화는 "해산의 진통을 거쳐서"(cf. 미 4 : 10 ; 5 : 3) 비로 소(!) 생산될 것이며, 자기 맏아들을 산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헌신으로서도 이루어지지 않고 ① 아모스가 강조한 "정의", ② 호세아가 강조한 "사랑"(헷세드), 그리고 ③ 이사야 가 강조한 "겸허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할 때에만 이루어진다(미 6 : 6-8)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자 "미가"에게 옮겨진 신언(神言)의 내용이다.
앗시리아 제국의 위협 아래 있었던, 이상의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을 통하여서, 우리는 그들이 대언(代言)한 신언(神言)들 사이에는 아주 심각할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는 것을 보고 놀란다. 이것이 또한 점성술이나 역학(易學)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예언자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점이다. 호세아는 평민 또는 농촌 출신으로서 왕정(王政)의 세계에 대해서는 생소했으므로 주로 제의적(祭儀的) 부패에 관한 신언(神言)을 전언(傳言)받았다면, 이사야는 도시인으로서 신(神)이 보장하신 그 도성(주로, 예루살렘)의 수호를 굳게 믿었고 장차는 의(義)와 평화의 왕이 올 것을 믿었으며 "시온"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으나, 호세아는 물론이고 아모스와 미가도 이사야가 걸었던 시온에 대한 희망의 길은 결코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의 예언활동을 통하여 이스라엘 정신세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점과 그리고 이들의 영향이 후일 예레미야, 에스겔, 특히 제2이사야(사 40-55)와 같은 예언자들에게 그 정신을 유산으로 넘겨주어 그들과 함께 전(全)이스라엘의 정신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들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과 더불어 이스라엘 정신세계에서는 새로운 변혁이 일어났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주목할 만한 점이다 : (a) 이들은 그들에게 임한 신언(神言)들을 자기의 개인에게 관련시키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전승"에 관련시켜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예언자적 신언(神言)을 어떤 한 카리스마(charisma)적 "개인"의 차원에서부터 종교적 성격의 "민족" 전승을 해석하는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b) 또한 이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만 알고 이스라엘만 선택하였던"(암 3 : 2)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바로 그 백성〔 選民〕을 오히려 세계의 심판대 앞에 불러 세워서 유죄선고를 내리셨다는 점(암 8 : 2)을 인식하고 그것을 그의 백성에게 선포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충격이었다. (c) 따라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선택"을 받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신의 위협을 받는다고 보았던 것이다(암 3 : 1f). (d) 예언자들의 탁월한 "세계주의"(universalism)는 바로 이러한 사상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암 9 : 7). (e) 제의(祭儀) 중심적 종교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이 예리해진 것도 또한 이러한 맥락 안에 있었다고 하겠으며 (f) 소위 말하는, 야훼께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종말의 날" 즉 "야훼의 날"에 관한 신앙이 거기 이스라엘 사회 안에 깊이 심겨져 있었으나, 그러나 그 날은 선민(選民)만이 구원과 영광을 누리는 날이라는 전통적인 이스라엘적 통념을 완전히 뒤엎고 그 날은 오히려 선민(選民)을 "먼저" 심판하는 날이라고 외치는 일종의 "종말관의 대전환"을 이룩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고 하겠다. 이것은 분명히 율법주의자들, 특히 제사 계율 신봉자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참뜻이라는 말인가 라고 하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너희가 살려면, 선(善)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암 5 : 14 cf. 사 5 : 20)라고 하는 "매우 극명하고도 단순한 요구"만을 외쳤던 것이다. 이러한 외침은, 어떤 점에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는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가는 이 시대 예언의 내용을 집대성하여 오히려 이렇게 대답하였다. : "너 사람아, 무엇이 착〔 善〕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믿음]이 아니냐!"(미 6 : 8). 물론 이것은 종교의식(cult)보다는 윤리(ethics), 또는 "이" 율법보다는 "저" 율법을 요구한 양자택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또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가능한 길의 제시일 뿐이다. 그러나, 공의와 사랑, 그리고 믿음을 실천하는 그 길은 그럼에도 고통과 심판의 그늘에 싸여 있다. 즉 구원은 심판의 어두운 그늘을 통하여 동튼다(Salvation comes in the shadow of judgment). 실로, 전혀 새로운 이 길과, 그리고 이 신학적 방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곧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이었다.
기원전 8세기의 중동세계를 지배했던 앗시리아 제국의 세력은 기원전 7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그 위세를 중동 전역에 떨쳤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7세기 하반기로 내려가면서는 그 빛을 잃기 시작하였고 신흥 바벨론 세력이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친(親) 앗시리아 정책으로 장수, 장기집권을 하던 므낫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아몬마저 2년만에 피살, 실각되자 유다의 새 희망인 요시아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무렵, 앗시리아 실각에 일조를 한 "스쿠디아"인이라고 이름하는 코카스 지역의 한 야만족이 일진광풍처럼 일어나 주변을 파괴하면서 팔레스틴 일대를 휩쓸어 이집트 지역으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언자 "스바냐"는 이때의 스쿠디아인 이동의 사건을 보면서 이 사건을 유다심판의 "야훼의 날"로 증언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스바냐"에게 전언(傳言)된 신언(神言)이었다. 이러한 심판의 직접적인 동기가 요시아 왕 초기까지 성행했던 므낫세의 혼합주의 종교정책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러나, 야훼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관리, 재판장, 예언자, 제사장 등등의 지도자의 부패 때문이라는 것은 그가 받은 신언(神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로부터서도 감지하였듯이, "스바냐"가 선포한 것 같은 그토록 잔혹한 심판 메시지도 또한 그러한 심판 속에서라도 자기 신앙을 지키며 살아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또 그들을 통하여 야훼의 이상적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앗시리아의 세력이 완전히 꺾였을 무렵이었다고는 하더라도, 이전의 예언자들과는 전혀 달리( ! ) 야훼의 백성〔 선민〕의 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철저한 복수자로서만 자신을 계시(啓示)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기쁨과 만족을 표시하는 그런 성격의 예언서가 구약 예언서에 유일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다(이 예언서는 "오바댜"서와는 다른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 예언서는 "니느웨" 성에 대한 저주시로만 구성된 "나훔" 예언자의 예언서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켜서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나 1 : 2)으로만 고백하고, 그리고 그 원수의 도성 니느웨를 가리켜서 "너는 망한다! 피의 도성! "(나 3 : 1)이라고 노래한 이 "나훔"의 저주시는, 시편 137편과 함께, 명백한 신학적 변증과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훔"의 이러한 저주문을 윤리적 유일신론(倫理的 唯一神論)의 변증 같은 것으로 읽으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나훔"의 예언을 성전(제의) 예언의 상황에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한 예배의전문 속에서 우리는 흔히 ― 국가 제의(祭儀)의 성격상 ― 그러한 민족주의적 저주문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후대 부림절의 에스더서 낭독 관습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서(다음에 다룰 것임)와 함께, 구약성서의 하나님의 공의성을 이러한 복수사상으로부터 찾으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cf. G. E. Mendenhall, The Tenth Generation, p. 69).
앗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꺾이고 새로운 세력인 신흥 바벨론이 일어날 때 그리고 이와 때를 맞추어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이 진전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유다의 상황은 극히 희망적인 유다의 회복에 가슴 벅찼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훔"의 예언과 같은 극단적 낙관주의적인 민족주의적 예언이 국가제의(國家祭儀)에서 공적(公的)으로 선포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아직은 아니었다. 요시아의 급작스러운 전사(戰死 : 기원전 609년)는 유다의 희망을 일순간에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설상가상, 야훼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성취가 이러한 역사적 호기(好機)에서도 또 다시 지나쳐가고 그 구원의 성취는 또 다시 "지연"되며 그리고 새로 일어난 바벨론 세력의 포학성은 앗시리아에 못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 해이해지고 악인이 의인을 박해하는 부조리가 정당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예언자의 예언 기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자에게로"가 아니라 "예언자로부터 하나님에게로"라는 주객의 위치가 전도되게 마련이다. 즉 예언자 "하박국"은 백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우선" 하나님을 향해서 "왜?"라는 항변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말하자면, 앗시리아의 시련이 지나갔는데도 구원성취의 지연(하나님의 자신을 감추심 : Deus absconditus)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그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신(神)의 답변은 단지,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산다"(합 2 : 4)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역사의 시련은,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주님, 언제까지 이러실 것입니까?"(합 1 : 2b)라는 신(神)을 향한 예언자 하박국의 항변과 함께, 예언자 "오바댜"의 에돔나라에 대한 저주시는 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서, "나훔"의 그것과는 다른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대 전환과 격변은 바벨론 포로기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예언은 울분과 격분, 좌절과 종말론적 희망의 기대 등등으로 나타났다. 바빌론 포로기의 시작을 성서의 사가는 한때 구원사의 종식같이 느꼈던 것 같다(애가서 참조). 그러나, 신(神)의 구원사는 포기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신명기적 역사가는 유다의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은혜를 입어 여생을 왕이 받는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고 보고함으로써(왕하 25 : 27-30) 구원사에 대한 한가닥의 희망을 열어놓았다.
"에돔" 나라에 대한 "오바댜" 예언자의 복수의 예언은 ― 단 한장으로만 구성된 가장 짧은 예언인데 ― 결코 단순한 유다민족의 민족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예언은 아니었다. 이 점이 "나훔" 예언서와 다른 점이다. 오히려, 이 예언은 하나님의 정의, 그의 공의로운 보응행위, 그리고 약자를 위한 정당한 응보 및 평화를 갈구하는 약자들에 대한 격려의 응답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야훼 하나님의 심판의 날(야훼의 날)은 어느 특정 민족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는 날이다. "오바댜"의 분노는 형제가 폭행과 치욕을 당할 때 멀리서 구경만 하고 방관만 하는 것, 형제의 불행을 기뻐하고 고소해하며 그리고 심지어는 살려고 도망치는 형제들의 길목마저 막아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까지도 원수의 손에 넘겨주는 그런 천인공노의 불의는 용납받을 수 없다는 "의분심"의 발로였다고 하겠다. 새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비극의 잿더미 위에서 비로소 싹터 나온다. 여기에는 분명히 야훼 하나님의 "유일한 역사적 주권 및 왕권"과 이 역사의 주(主)가 이끄시는 공의로운 역사섭리 아래에 있는 인간 역사의 "책임성"이 진솔하게 증언되어 있다고 하겠다.
유다 나라가 신흥 바벨론과 이집트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렘 2 : 36) 하면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기원전 598-586년경에, 역사의 유일한 주(主)이신 야훼 하나님은 회개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 유다와 그의 유일한 기초인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표범보다 날쌔고 굶주린 늑대보다도 사나우며 독수리만큼 빠른 폭력자"(합 1 : 7-9)인 신흥 바벨론을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준비하셔서 세우시고 그를 "먼 곳에서 데려 오셨다"(렘 5 : 15)라고 외친 예언자는 "예레미야"였다. 실로 여러 세기를 걸치면서 복잡하게 얽혀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아나돗 출신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은, 비록 후대의 역사가(신명기적 역사가 : dtr.)들이 재해석하거나 재편집한 특이한 이데올로기로서 간주되기도 하였지만, 이 예언은 신흥 바벨론이 중동의 새 강자로서 일어나고 있을 시기에 유다의 예루살렘 사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허구적인 "체제수호적 이데올로기"(왜곡된 시오니즘 같은 것)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종말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동시에 그 강력한 체제수호주의자들의 억압 앞에서 통렬하게 탄식하였던 그 시대의 소리였고 역사적 신언(神言)의 대변이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신성불가침성에 관한 허구적 안보체제논리의 고정관념과 교조를 깨뜨리고 새로운 침략자인 신흥 바벨론에 의한 멸망을 불가역(不可逆)의 신(神)의 섭리로서 진솔하게 시인하고 회개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 청년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 시대에 받았던 신언(神言)이었고 그것이 바로 시대적 예언(預言)이었다. 예레미야는 끓는 가마솥이 북으로부터 아래로(남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렘 1 : 13- 15) 그것이 곧 신흥 바벨론에 의한 신(神)의 예루살렘 심판현실임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신(神)의 거룩한 도성이라고 자랑하던 예루살렘 도성의 시민들로부터도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는 현실(렘 5 : 1), 유프라테스강 가에 묻어 두었던 띠가 전혀 쓸모없을 정도로 썩어버리는 현실(렘 13 : 7), 그러나, 이러한 현실보다 더 비참한 현실은, 이것이 예루살렘의 진정한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진정한 회개"는 없이 단지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렘 7 : 4)라는 성전찬양의 말로 백성을 속이기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만을 일삼으며 성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루살렘 체제의 안전(렘 7 : 10)을 믿었던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진정한 고뇌와 고충은 여기에 있었다. 평화가 아닌데도 "평화다. 평화다"(렘 6 : 14)라고 말하는 체제수호논리의 그 두텁고도 강인한 거짓 장벽을 과연 어떻게 깨뜨리며, 침략제국 ― 신흥 바벨론 ― 의 침노를 신(神)의 역사섭리의 순리로 받아들이라는(렘 20 : 4), 이른바, 친(親) 바벨론 이념을 가진 매국적 메시지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신언(神言)을, 그것이 신언이니까, 그러므로 전한다는 것("하나냐"와의 충돌, 렘 28장 참조)은 아마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예레미야의 소명(召命) 사양(렘 1 : 6) 또는 그가 평생을 독신(렘 16 : 2)으로 활동한 것 등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쳐야 할 것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외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며, 바로 이 점이 점성학자의 사명과 예언자적 사명 사이의 다른 점일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받았던 예레미야의 슬픔과 탄식과 수난(렘 9 : 17-18 ; 15 : 10 ; 11 : 18f 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예레미야가 받은 신언(神言)에 따라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전언되는 신언(神言)도 또한, 지금까지의 관찰이 통일되게 말하고 있듯이("나훔" 제외), 어디까지나 "심판을 통하여" 구원을 지향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Salvation comes in the shadow of judgment). "그때가 오면 "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예레미야의 새로운 신언(神言 ; 렘 31 : 31-34)은 그러므로 이러한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폐허의 잿더미 위에서 오히려 "새 계약"(new covenant)의 역사가 새롭게 창조될 것을 감히 내다보았던 것이다. 옛 계약(시내산 계약)은 이스라엘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파기되었어도, 그러나 신실하신 야훼 하나님은 ― 측은한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은(렘 31 : 20) ― 자의적(字意的) 법규로 얽어매는 그런 문자적 계약 대신에(!) 야훼는 이제는 그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받은 그 70년 재앙을 그 대가로 지불받으시고(cf. 제2이사야 : 에스겔) 그 모든 죄를 무조건 다 용서하시어 새 마음을 다시 창조해 주시는 그런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예언구도가 그와 같은 시대(바벨론 포로기)의 예언자 "에스겔"과 "제2이사야"에게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에스겔" 예언자는 사독 계열의 제사장 출신 예언자로서, 결혼은 했으나 일찍 상처(喪妻)를 한 기인(奇人) 예언자로서, 장로들의 의회에 참여할 정도의 사회지도자 계층에 속한 예언자였고, 목회자적인 사역의식(使役意識)도 깊게 갖고 있었던 예언자였다. 그가 기인(奇人) 예언자였다는 것은, 그가 사용한 예언자적 상징행위가 다른 예언자들(cf. 호세아, 이사야 등)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났고 그가 보았다는 환상 보도도 다른 예언자들의 그것(cf. 아모스, 예레미야 등)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람 얼굴을 한 네 생물과 수레바퀴 환상(겔 1장), 머리카락을 잘라서 ⅓ 은 불사르고 ⅓ 은 칼로 치며 ⅓ 은 바람에 날려버리는 행위(겔 5장), 성벽에 구멍을 뚫고 피난하는 행구를 챙겨나가는 행위, 또는 포로로 끌려가는 행위(겔 12장) 등을 보임으로써 북(北)으로부터(신흥 바벨론으로부터) 임한 신(神)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교훈했다든지, 또는 마른 뼈 골짜기에 흩어진 뼈들이 다시 살아 일어나 강한 군대가 되는 환상(겔 37 : 1-14)을 통하여 유다의 정치적 상황에 희망적인 대변화가 올 것을 전언(傳言)하였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환상보도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조가(弔歌)와 탄식과 재앙의 글로 앞뒤를 가득 적어놓은 두루마리 성서 ― 신의 심판의 말씀이 적힌 성서 ― 를 받아먹으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두루마리 성서가 꿀같이 단 것을 체험했다는 보도다(겔 2 : 8 3 : 3). 이 환상보도가 말하고 있듯이, 예언자 에스겔의 예언도 신의 잔혹하고도 쓴 심판의 역사섭리를 통하여 새 이스라엘의 창조가 비로소 가능하다는 신의 구원섭리의 역설적(逆說的) 특성을 증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벨론의 유다인 포로유배가 시작되던 해(기원전 597년)에 에스겔 예언자도 포로민으로 끌려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예언소명(召命)이 이 무렵 바벨론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분명하다(겔 1 : 1-3). 이러한 이 예언이, 이미, 1장 4절부터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겔 1 : 4) 것을 내다보고 있고 또 그의 심판예언의 장소가 생생하리만큼(바벨론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되어 있는 것은, 예언자 에스겔이 바벨론과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예언을 했기 때문인지, 과거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를 회상한 예언자적 상상력에서부터 기인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에스겔의 예언이, 성서비평학상 그의 것으로 보기 어려운 이방나라들에 관한 신탁문인 25 32장을 제외하면, 전반부(겔 1 24장)와 후반부(겔 33 48장)가 "심판"예언과 "희망"예언으로 현저한 대조를 이루어 "심판 → 구원"의 예언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언자 에스겔이 기원전 597년부터 바벨론 몰락의 539년까지 내내 활동하였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에스겔 예언의 구도는 분명, 조가와 탄식과 재앙의 "심판 예언"(겔 1 24장)과 마른 뼈가 군대로 되살아나는 민족의 비극적 정치상황의 대회복에 관한 "구원예언"(겔 33 48장)의 역설적(逆說的) 종합임에는 분명하다.
남유다의 예루살렘이 북에서 일어난 신흥 바벨론을 이용하시는 신의 심판 앞에 서게 된 그 이유를 에스겔은 그 무엇보다도 야훼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부터 떠나가리 만큼(겔 8 11장) 가증스러운 제의적(祭儀的), 성전예배적 부패에서 기인되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거룩한 성전 안에서 파괴되고 또 경멸당하고 있다는 것 ― 에스겔의 머리채를 잡은 신의 형상과 영이 공중으로 그를 이끌고 날아가서 성전 안뜰 북문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해괴한 신성모독적 가증행위를 보여 주셨을 때 ― 이러한 신의 "거룩성"의 파괴와 "참예배"의 상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즉 신의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받은 신언(神言)도 이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신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 이외의 다른 메시지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언은 심판으로만 종결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길이 이스라엘 안에는 결코 없었다. 단지 한가닥의 길이 만일 있다면, 그것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성을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 이름〔 名聲〕을 위하여 스스로 일어서시는 길 밖에 없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거룩한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야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구원〕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렵혀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 함이다!"(겔 36 : 21, 22).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겔 37 :11)라고 절망하고 좌절했던 민족을 ― 죽은 자를 무덤에서 끌어내듯 ― 새롭게 일으켜 세워서 다시 창조해 주시기로 약속하신다. 그것도 남·북 두 왕국의 통일의 기쁨(겔 37 : 15 이하)까지도 허락해 주시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신의 기적이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p. 330) 8 15 해방을 "도둑같이 온 해방"이라고 하였듯이, 에스겔 이후 먼 후일,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출바벨론의 소식(기원전 538년)은 도둑같이 찾아온 신의 기적의 소식이었다. 예언자 에스겔이 뱃속에 받아먹은 조가와 탄식과 재앙의 고통스러운 두루마리가 꿀같이 달게 되리라고 하였던 바로 그 예언(cf. 시 126 : 1-3)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역사의 주(主)는 그때도 오늘도 내일도 일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을 증언(證言)하는 자가 예언자다.
70년의 긴 바빌론 포로기로 인한 이스라엘 구원사(救援史 : history of salvation)의 단절은 "마침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그 지은 죄만큼의 벌을 다 받았고 그 벌에 대한 복역의 기간을 또한 다 채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토록 도도하던 신흥 바벨론 제국이 페르샤의 고레스(Cyrus)에 의하여 무혈점령을 당하고 졸지에 무너지던 때, 꿈이든가 생시든가(시 137 : 8-9 ; 126 : 1), 놀라웁게도 예언자 제2이사야(그 이름을 익명으로 한 예언이지만 그의 예언이 이사야서와 함께 엮어져 있고 그 정신이 이사야 학파의 전승을 계승한 것 같아서 학자들은 이 익명의 예언자를 "제2이사야"라고 부른다. 이사야 40 55장 그리고 이사야 56 66장도 참조)는 그의 예언에서 한번도 이스라엘의 죄를 묻거나 회상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단지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와 그리고 희망의 고취이며 새 역사를 맞을 신학적 기반을 구축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이 예언자를 가리켜서 구약성서가 낳은 최대의 신학자라고 불렀는지 모른다.
제2이사야가 천명한 신언(神言)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역사의 유일무이 (唯一無二)한 주(主)이시다는 선언이었다. 즉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이스라엘의 속량자이신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神)이 없다'"(사 44 : 6)라고 단언하였다. 그의 예언을 개괄적으로 관찰해 볼 때, 제2이사야는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들의 무력성을 조롱하는 조롱어투, 법정의 재판과정에서 진위(眞僞)를 가릴 때 쓰는 판결어투, 그리고 쟁점을 놓고 논쟁하는 논쟁어투 등등을 동원하여 야훼 하나님의 "유일신성"(唯一神性)을 이론적으로 논증하는 데 탁월한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유일신이론(monotheism)은 그의 문학적 기법의 우수성을 통해서 확인되었다기보다는 그의 탁월한 신학에 기초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유일신 이론은 세계역사를 야훼 하나님이 "홀로" 이끄신다는 이론에 기초되어 있다. 예컨대, 신흥 바벨론을 몰락시키고 페르샤를 등장시킨 역사의 주(主)는 페르샤의 신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이시며 그리고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역사에 등장한 것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그를 기름부어 "종"으로 ― "메시야"로 ― 삼으셔서 비로소 된 것이라는 그의 주장(사 45 : 1)에서 잘 나타난다. 물론, 바벨론의 신 "마르둑"이 고레스를 역사에 등장시켰다는 고고학적 자료도 있으나, 그러나, "마르둑" 신(神)의 "로고스"(말씀)와 제2이사야가 선포한 야훼 하나님의 "로고스"(말씀)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우선, 야훼의 말씀은 신화(神話)의 탈을 벗고 역사화한다. 제2이사야는 70년 포로기의 암흑기를 가리켜서 "야훼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Deus absconditus)라고 고백하였다(사 45 : 15). 야훼 하나님은 자신을 언제나 우주의 "왕"으로만 선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숨기셔서 스스로 수난을 감내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cf. crucified God!). 그는 빛도 창조하시지만 어둠도 창조하시는 분이셨던 것이다(사 45 : 7). 말하자면, 빛과 어둠, 선과 악, 승리와 패배를 모두 한 분이신 그 분의 자유로운 뜻에 의해서 관장하신다. 야훼의 세계섭리는 결코 이원화(二元化)되지 아니하였다는 점이다. 제2이사야의 세계주의 사상은 여기에 기초되었을 수도 있다.
더욱이 야훼의 유일신성은 그가 역사의 주(主)이시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창조주"가 되신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래를 향하여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셨다. 그런 점에서, 제2이사야에게 있어서는 "창조주 신앙"이 "역사의 주 신앙"보다 앞서 각성된 것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옳을 것으로 보인다. 제2이사야 예언의 대부분은 야훼가 이스라엘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며", "조성하며", "만드시는" 신(神) ― 부성적(父性的) 속성보다 모성적 속성을 더 강하게 나타내 보이신 신 ― 으로서 소개(사 44 : 21 ; 46 : 3-5 ; cf. 사 66 : 12-13)한다. 임신하신 어버이가 자식에게 어떻게 죄를 묻겠는가?(사 44 : 21-22). 진정한 구원은 그러므로 새로운 창조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2이사야가 말한 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사 43 : 19)라는 미래에 관한 약속도 ― "마르둑"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이 약속도 ― 창조주의 선포(사 43 : 1)일 뿐이다. 창조주만이 "시작이요 마감"(사 44 : 6)일 뿐이다. 또한 창조주만이 미래를 열 수 있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으실 뿐이다. 종말론적 희망은 여기서부터 열린다. 제2이사야의 자극으로 인하여 포로민은 열려질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 부풀게 되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70년 포로기의 역사적 산고(産苦)가 바로 다름아닌 이 진리에 대한 파악에 접근할 수 있게 한 신학적 요인(factor)이었던 것이라는 점이고 위대한 신학자 제2이사야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언자 제2이사야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이 가진 세계선교적 자의식을 인식하고 선언한 것은 신학적 위대성 중에서도 가장 빛이 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스라엘은 그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세계구원의 길 ― 세계주의 사상의 한 절정을 우리는 여기서 본다 ―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고 그리고 신약성서 기록자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구원사의 지평의 끝에 서 있는 그 명백한 이유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페르샤 왕 고레스의 포로귀환령(기원전 538년)은 모든 포로민에게, 특히 바벨론으로 유배갔던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있어서는 조국재건의 꿈과 옛 종교전승의 회복에 관한 꿈에 한껏 부풀게 한 요인이었다. 포로귀환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최대의 과제는 성전재건을 통한 성전제의(祭儀)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부딪힌 조국재건의 과제란 어느 경우에서나 뜻같지 않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포로되었다가 귀환한 자들과 그리고 포로경험이 없이 조국에 그냥 남아 있었던 자들(사마리아 공동체) 사이의 긴장관계 때문에 성전재건의 꿈은 무산될 뻔한 위험도 겪었고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는 일도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간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바벨론으로부터 조국으로 귀환한 이후의 이러한 이스라엘의 현실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구약 예언자들(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등의 예언자들)의 과제라는 것은 성전재건과 예루살렘 재건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이념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학개"의 경우, 그는 야훼 하나님의 성전을 서둘러 재건하지 않는 것을 하나의 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신(神)의 심판을 선포하는 데 주력하였다. 즉 성전예배의 회복을 통해서 모세 시대의 옛 야훼종교 이념과 다윗-솔로몬 시대의 영광스러운 시대를 회복하라는 요구가 그가 받은 신언(神言)이었다. 이렇게 하여 성전이 재건되는 때, 야훼는 세계를 진동케 할 것이고 세계의 모든 영광을 성전 쪽으로 집중케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스가랴"의 경우 역시, 비록 그 예언의 형식은 많은 묵시적 환상을 동원하였다고는 하더라도, "스룹바벨"(정치지도자)과 "여호수아"(종교지도자)를 충동, 격려하여, "학개"처럼 성전재건과 다윗 왕조 복원을 촉구하는 예언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개처럼 메시야 시대의 "임박성"을 주장하지 않고 좀 더 "미래적인 메시야 시대를 내다보았으며, 성전재건만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적 구원의 시대가 오기 전(前)에 민족의 내적 갱신 이 있어야 할 것을 내다보았다. 백성들이 우선 정의와 진리를 구하는 일과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스가랴 예언자가 받은 신언(神言)이었다.
"학개"와 "스가랴"의 열정적 독려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노력에 힘입어,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는 성전을 재건(기원전 516년)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된 축복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또 믿었던 응보사상의 이념도 허공으로 사라진 듯, "제2이사야"가 남겨놓은 그 가슴벅찬 희망도 좌절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모든 것이 벽에 부딪친 듯 힘들었다. 백성들은 말하기를 "야훼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말 2 :17)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원에 관한 신언(神言)을 전달받고 나선 예언자가 "말라기"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제의(祭儀)의 부패(불결한 예물을 드리는 일이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일 등등) 그리고 제의(祭儀)의 토대인 "토라"(교훈 / 율법)에 대한 불성실을 비판하였다. 예컨대 도덕적 판단의 부족 및 이혼이나 잡혼의 성문란 등으로 인한 정신적 위기를(비록 "말라기"는 제의 / 예배의 순결을 도덕적 순결문제보다 좀 더 강조한 것 같지만) 극복하는 것이 성전재건 이후의 포로귀환 공동체가 해야 할 절대적 과제라고 하는 것을 신언(神言)으로 전달받고 그것을 그 시대를 향하여 외쳤던 것이다.
이러한 중에서도 말라기의 예언은 "엘리야"를 다시 보내실 "야훼의 날"에 관한 메시지(말 4 : 5)를 남겼다는 이유 때문에 ― 그의 예언이 70인역 성서에서 구약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그 역할도 포함하여 ― 구약의 예언서와 신약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등장 사건 사이를 연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제3이사야"(사 56 66장)는 말라기와 비슷한 시대(성전재건으로부터 "느헤미야" 이전까지)에 활동한 예언자로서 그도 역시 제의(祭儀)의 순결을 강조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 제2이사야의 정신을 계승하여 조국귀환 후 실의에 빠져 있는 포로귀환민을 독려할 사명을 띠고 나타난 예언자다. 비록 그는 그의 스승 제2이사야의 정신세계에는 결코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그도 또한 주옥같은 시대적 증언들을 많이 남겨 놓았다. 그는 지도자들을 규탄하면서 파수꾼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벙어리 같은 지도자라고 비판하였고 또 "굶주린 벙어리 개"(사 56 :10-11)라고까지 힐책하였으며, 우상종교가 전 염병처럼 퍼져도 아무 대책없는 사회현실(사 57장)을 비난하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금식"과 "참 안식일 준수"가 무엇인지를(사 58장) 가르치고 훈계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구도(심판경고 → 구원위로)에서 보듯이, 야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게 될 희망적 새 예루살렘에 관한 환상도 예고해 주었다(사 60장 이하 ;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이러한 새 희망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모성적(cf. 사 66 : 13) 사랑과 은혜의 품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그는 "은혜의 해"를 선포(사 61 : 1-2)하였다. 말하자면, 자식을 품에 안고 위로하는 어머니처럼(사 66 : 8-13)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사 61 : 2) 다시는 기억할 필요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 주실 그 야훼 하나님을 증언하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자신이 세상에 오셨다고 선포(눅 4 : 18-19)하셨던 것이다. 이리하여 구약예언의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예언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그러나 그 시대성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논란되고 있는 문제의 두 예언서, 즉 "요엘"서와 "요나"서를 언급하면서 구약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관한 소개를 마감하겠다.
"요엘" 예언자는 주로 "야훼의 날"에 관한 전통적인 종말사상을 예언의 핵심으로 삼은 예언자였다. 본래, "야훼의 날"(야훼께서 전쟁용사로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역사 속에 개입해 오시는 날) 신앙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원수를 격파시켜 주시는 날에 대한 기대에서부터 발전한 것(폰·라트)이다. 그러나, 아모스(암 5 : 18-20), 이사야(사 2 : 12-16), 스바냐(습 1 : 2 이하) 등등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통속적인 민족주의적 낙관론을 비판한 바가 있다. 즉 그 날은 선민(選民)이 심판받는 날로 이해되고 선포되었다. 그러나, "요엘"의 경우는, 이 "야훼의 날"을 우주적 성격의 재앙(메뚜기 재앙)의 날로 보았지만, 선민(選民) 시온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을 선포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요엘이 말하는 "재앙의 날"은 어디까지나 "경고의 날"이며 "회개를 촉구하는 의미"(욜 2 : 12-17)를 가지며, 동시에 회개하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욜 2 : 32) 날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야훼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욜 2 : 13)이시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약성서의 복음적 가르침과 가장 유사한 예언자적 증언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나" 예언서는 그 성격상 "예언서"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요나서는 "사십 / 일이 / 지나면 / 니느웨가 / 무너진다"(욘 2 : 4)라는 히브리어 글자 다섯개의 자음으로만 구성된 매우 짧은 메시지 이외에는 "요나"의 입으로 전한 예언자적 선포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풍자문학적 성격을 지닌 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도도하게 예언서의 구실을 뚜렷이 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이 갖고 있는 그 중심 주제가 포로 후기 예루살렘 공동체 ― 또는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 사회 ― 가 갖고 있는 "앗시리 아"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어떤 경우에도 용서치 못하는 적대적 증오감정(이것을 우리는 "요나·신드롬"이라고 부른다)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품성과는 절대적으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야훼 하나님의 세계주의적(우주 창조자적) 품성과 모순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과 품성을 감금시키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예언자적 경고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아마도 요나서는 오늘날의 동서 이데올로기 대결을 질책하기 위하여 수세기 동안이나 원수사랑의 교훈을 역설적으로 각색하여 보존해 둔 구약성서의 가장 대표적인 풍자문학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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