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스크랩] 이스라엘 사사의 개관

하나님아들 2018. 2. 26. 12:14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사사기)
 
 

1. 해방된 이스라엘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지파들은 각자의 영토에서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한다. 그들에게는 왕이 없었다. 아니 성서적으로 볼 때 그들은 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의 압제 밑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에게는 파라오와 같은 왕은 저주의 대상이었을 것이며 민중을 압제하고 수탈하는 독재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진입하여 그들과 어울려 살면서 왕없는 사회를 이룩했다.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왕은 지상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별도의 왕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당시 왕 없이 살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할 때 팔레스타인은 외부의 간섭을 적게 받고 있었다. 주전 13-11세기는 이집트와 바벨론으로부터의 대규모 공격이 없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팔레스타인 안에 있는 도시국가들 간에 소규모의 전쟁이 있을 뿐이었다. 사사기 1:1-2:5은 이전에 밝힌 대로 비교적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강대할 때는 무력으로 점령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가나안 원주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되었고 이들은 지파간의 동맹체 형태로 결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시대를 가리켜 '해방된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 왕이 없던 시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었던 시대!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를 만끽한 시대를 가리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대략 250년 동안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고 간주하는 데 우리는 이 시기를 또한 '사사시대'라고 부른다.
 
 


 

[지도: 시리아-팔레스틴-주전 2,000-1,000년경]
 
 

2. 사사란 누구인가?
 

    사사(士師)란 누구인가? 개역성서의 사사기를 공동번역에서는 '판관기'라고 부른다. 즉 사사는 판관 혹은 재판관이란 말이다. 유독 성서에서만 사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본래 우리말이 아니라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우리들은 재판관을 사사로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종교인의 보수성 때문에 일반인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명칭이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전망이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에는 누가 다스렸을까? 지상에 왕은 없었지만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지켜 준 전쟁용사가 있었다. 가나안 주변에 있었던 수많은 군소 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은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불완전한 상태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이스라엘이 외부로부터 전쟁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전쟁 영웅이었던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지켜 주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 백성들의 시빗거리를 재판해 주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재판관(쇼프팀)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들의 출신성분은 다양했는데, 그 중 사사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다. 여자 선지자도 있었는데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사사기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왕이 없던 시대'로 요약된다. 이 말은 많은 함축성을 지닌다. 고대사회에서 왕이 없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우선 왕이 없는 사회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체제가 수립되지 않음으로 해서 정세가 불안할 것이다. 너도나도 힘있는 사람이 권력을 누렸을 것이며 정치와 경제 등 모든 일상생활이 무질서한 상태가 되기 쉽다. 야훼 종교 역시 정치력의 뒷받침 없이 굳건한 토대 위에 설 수 없었다. 그래서 야훼신앙은 가나안의 바알 종교와 함께 혼재된 상태로 지속되었으며 백성들 역시 야훼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출애굽한 세대는 이미 다 사라졌고 야훼신앙에서 자라지 않았던 다른 세대들이 이스라엘과 합류하면서부터 야훼신앙의 위기가 서서히 도래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후 계속되어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심각할 정도로 야훼신앙이 위협받는 사태가 속출하게 된다. 정치·경제를 비롯한 모든 생활이 왕권이 없는 상황에서 영위되다 보니 국가체제를 형성하지 못하고 사울이 출현하기까지 약 250여년을 사사시대로 이어간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사'라는 말보다는 '전쟁영웅'(나기드)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왜냐하면 여사사 드보라 외에는 이스라엘의 사사들이 백성의 재판에 관여한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참조. 삿 4:4-5). 대부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구출하는데 앞장섰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charismatic leaders)이었다.
 
 
 

[그림: 철기시대의 이스라엘 집: 주전 1200-1000년경]
 
 
 
 

3. 사사시대의 생활
 

    여호수아가 죽고 그 세대들도 다 떠나가자 다음 세대들은 야훼를 알지 못했으며, 야훼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인도해 낸 사실도 모른다(삿 2:6-10). 이런 성서의 보도는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손들에게 야훼의 구원행위를 틈만 나면 강조해 왔으며, 믿음의 조상에 대한 신앙이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야훼신앙이 세대가 달라짐으로 해서 단절되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뿌리깊은 나무가 되지 않고 그때그때 변하는 일시적 풍조란 말인가? 우리는 성서를 대할 때 순서적으로 이해하려는 습관이 있다. 창세기부터 야훼 하나님이 소개되며 이스라엘의 족장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성서독자들은 야훼산앙의 기원이 창조때부터라고 생각하기 쉽다. 출애굽 사건, 광야생활,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등은 야훼의 구원행위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사사기의 보도는 야훼를 모르는 이질적인 집단에 의해 이스라엘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사기의 이런 보도는 초기 이스라엘의 상황과 일치한다. 출애굽의 사건과 가나안의 정착 사건, 그리고 이스라엘의 형성 사건이 가나안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가정이 일리 있다면 사사기의 보도는 훨씬 신빙성이 있다. 이스라엘은 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혼합된 종교형태를 견지했으며 중앙의 통제력이 없는 상황에서 저마다의 소신대로 살았다(삿 17:6; 21:25). 지파간의 동맹형태도 느슨하여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며 그 결과 지파간에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다(삿 19-21장). 이런 상황을 볼 때 사사기는 초기 이스라엘의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종교사와 정치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여겨진다.
 
 


 

[지도: 이스라엘  지파의 경계-주전 12-11세기]
 
 
 

4. 이스라엘의 반역과 하나님의 사랑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야훼를 버리고 가나안의 신 바알과 그 파트너 아세라를 섬기자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 결과는 이방족속의 침략으로 이어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을 겪게 된다. 이스라엘의 주변국은 야훼 하나님께서 남겨 둔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된다(삿 3:1-6). 야훼를 거절한 대가로 혼이 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사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구하신다. 사사 옷니엘은 메소포타미아의 상부에 위치한 아람나하라임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였으며, 에훗은 모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였고, 삼갈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한다(삿 3:7-31). 이들에 의해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한동안 평화를 만끽하면서 다시 야훼께 죄를 짓게 되고 그 결과는 가나안 북방의 하솔을 다스리는 야빈왕의 침략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은 야훼께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은 여사사 드보라를 보내어 그들을 구출한다(삿 4:1-5:31).
 
 
 


 

[그림: 전형적인 바다 족속(Sea People)의 배 모양이다. 바다민족 가운데 한 종족인 블레셋은 기원전 13세기에 지중해 연안의 가나안 해안지역을 공략하였다(BAR91-6-34)]
 
 

    특별히 여자 사사인 드보라의 활약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성서는 여인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삿 4:9). 남성 중심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거나 이유없이 억압당할 때 여자 영웅이 나타나 환기를 촉구한 것이리라. 출애굽 당시에 미리암의 활약이나 사사시대의 드보라의 활약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 남자뿐만 아니라 여성도 커다란 몫을 담당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여성의 사회참여와 인권운동이 제한적이나마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평화시대는 잠시 지나가고 이스라엘은 또 죄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신다. 이스라엘은 죄짓고, 그 대가로 적이 쳐들어오고, 적에게 어려움을 당하자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고, 사사는 이스라엘을 구하고, 평화시대가 오고, 이스라엘은 또 죄짓는 순환적인 역사가 사사기를 지배하고 있다. 고대의 성서 기자들은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렇게 반복적인 이야기 구성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고집을 부릴 때마다 재앙이 더해지고 그 강도도 높아만 간다. 10가지 재앙이 진행되는 동안 파라오는 짜증스러울 정도로 고집이 세며 하나님은 거기에 질세라 조금씩 조금씩 강도를 높여 가며 이집트 왕을 골탕먹이지 않는가? 광야생활을 보라. 이스라엘이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할 때마다 하나님은 심판과 함께 자비를 베풀지 않는가.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사람들의 죄악은 변함없고 하나님의 구원행위도 여전하다. 인간은 늘 죄를 짓고 그 대가를 어느 정도 받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신명기사가는 이런 역사관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해석)하고 있으며 야훼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5. 사사 기드온

 
    미디안을 물리친 사사 기드온에게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사사들도 예언자들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하도록 명하자, 기드온은 자신이 므낫세 지파중에서도 가장 약하고 작은 자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이에 하나님은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조를 하신다(삿 6:14-16). 기드온이 하나님께 징표를 요구하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 그 위에 있는 고기와 무교전병(누룩 없는 빵)을 불사른다. 이것을 본 기드온은 자신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해서 두려움에 떤다. 하나님은 그를 안심시키고 기드온은 야훼를 위해 제단을 쌓는다(삿 6:17-24). 이 과정은 모세가 야훼를 만나는 장면과 유사하다.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가 지나치게 힘겼다고 여겨졌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태도와 그에 따른 야훼의 조치(출 3:1-14), 그리고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된다는 고대인의 사상이 기드온에게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출 33:20; 사 6:5).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여 하나님의 징표를 대신했듯이(출 4:3), 기드온에게도 제물이 타는 것으로 하나님의 징표가 나타난다. 기드온은 여기에 한술 더 뜬다. 하나님의 징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땅이 말라 있으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겠다는 것이다. 양털 시험을 두번이나 반복한 뒤에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을 물리치는데 앞장선다(삿 6:36-40). 모세의 경우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에 의해 표징이 나타나지만, 기드온의 경우에는 자연현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간접적으로 확인한다. 기드온은 신점(divination)을 통해 신의 의지를 파악하는데 익숙했음이 분명하다. 후에 전리품으로 획득한 금으로 에봇을 만든 행위에서도 신점에 대한 믿음이 강했음을 엿볼 수 있다(삿 8:27). 여기서 에봇은 제사장의 가슴에 부착된 우림과 둠밈을 담는 주머니가 아니라 '작은 신상(神像)'으로 여겨진다. 신점(神占) 현상은 고대사회에서 유행한 인기 있는 종교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현상이나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신의 계시를 알 수 있다고 믿었던 고대인에게는 신점이 야훼신앙을 훼손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림: 가나안의 도시 돌(Dor)에서 발견된 아스다롯 여신상. 풍요의 여신으로 알려진 이 여인상들은 후에 그리이스 미술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BAR-89-4-28]
 
 

    야훼의 징표를 확인한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옆에 있는 아세라 여신상을 찍어 그 나무로 번제를 바친다(삿 7:25-26). 이것을 본 성읍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기드온에게 항의하면서 죽이려고 하자 기드온이 그들을 설득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이로 인해 기드온은 바알을 대항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신(spirit)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자 더 힘을 얻는다(삿 7:28-35). 이 사실을 볼 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보다는 오히려 바알신앙에 더 젖어 있었다. 그런데 기드온이 야훼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도 야훼를 따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에서 발견된 황소상]
 
 

    당시 가나안에서의 바알신앙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종교였다. 계절에 따라 비를 내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준 신은 바알이며 그 상대 여신 바알라트와 아세라(혹은 아스다롯)가 동시에 섬겨졌다. 그들은 비가 오지 않을 때 바알을 대신하는 제사장들과 바알라트를 대신하는 성전의 창녀들이 (holy prostitutes) 서로 성적인 교합을 함으로써 바알과 바알라트를 자극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자극에 의해 하늘을 상징하는 바알과 땅을 상징하는 대지의 여신(바알라트)이 조화를 이루어 비가 오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야훼주의자들에게는 혐오스런 것이었으며 결국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알신앙은 고대사회에서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이스라엘 역시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종교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종교혼합주의를 비판했던 야훼주의의 선봉자들이었다. 사사시대 역시 아직까지 야훼주의가 확립되지 못하고 바알신앙과 병행되어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300명의 작은 군대로 거대한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친 기드온은 전리품을 이용해 에봇을 만들어 성읍에 둔다(삿 8:27). 이 에봇은 작은 신상으로서 신점(神占)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 에봇을 경배하면서 음란한 행위를 하자 이것이 기드온 집안의 올무가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삿 8:27). 하지만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에봇은 마치 바알신앙과도 어울리는 신적인 힘을 가진 물건(聖物)으로 간주되었다. 후대의 기록자인 신명기사가(DH)가 생각할 때 기드온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을 해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드온의 행위에 대한 아무런 비판이나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을 보아 그것이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그림: 기원전 14-13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천둥을 동반하는 바알의 모습이다.우가릿의 바일신전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투구를 쓰고 한 손에 곤봉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BAR-83-5-65)]
 
 

    어쨌든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사십년 간 이스라엘은 평안한 상태를 유지했고 기드온은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소유하고 살았다(삿 8:28-32). 야곱도 레아와 라헬을 정식 부인으로 맞이했던 점을 볼 때 이스라엘은 일부일처제만을 고집했던 것 같지 않다(창 29:15-30). 그러나 기드온 처럼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둔 사실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사사시대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율법의 규정이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일처제를 기조로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기드온의 경우는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텔 도르( Tel Dor)에서 발견된 가나안의 성창들(Sacred Prostitutes). 이들은 바알신전에서 제사장들과의 성적교제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되며,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BAR89-4-54)]
 
 

6. 왕이 되고자 했던 아비멜렉
 

    사사시대에도 왕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다. 기드온의 정실부인에게서 난 자식이 70명인데 반해 그의 첩에게서 난 자식은 한 명으로 소개된다. 그의 이름은 아비멜렉이라 한다. 아비멜렉이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기를 섬길 것을 종용한다(삿 9:1-2). 세겜 사람들과 밀로 사람들이 아비멜렉에게 기울자 그는 자기의 이복 형제들을 살해하고 왕으로 추대된다(9:6). 거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요담이 아비멜렉을 빗대어 노래한 요담의 우화는 마치 이솝 우화를 연상하게 한다. 하루는 나무들이 왕을 세우기 위해 여러 나무들에게 간청을 한다.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모두 왕위를 거절하고 자기 본분에 맞는 삶을 추구하지만, 가시나무는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너희는 와서 내 그늘에서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삿 9:15). 그늘도 없는 그늘에서 쉬라고 하니 말이 될 법한 이야기인가?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숨지게 된다(삿 9:50-55). 아비멜렉이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왕이 되었으나 실질적인 왕권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아직 국가체제를 이루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체에 정치적 변동이 없었다. 따라서 아비멜렉 역시 사사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그후 사사 돌라와 야일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죽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바알과 여신 아스다롯을 비롯한 여러 이방신을 섬겨 그 대가로 암몬 사람들의 침략에 시달린다(삿 10:1-16). 암몬족에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길르앗에 진을 쳤으나 그들을 대항하여 나설 사람이 없을 때 사사 입다가 출현한다.
 

7. 사사입다와 인신제사

 
    사사 입다와 그의 딸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간의 무지를 또 한번 일깨워 준다. 이스라엘이 암몬 족속과 싸우려고 할 때, 사사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한다. 만약 하나님이 암몬 족속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안겨 준다면, 싸움터에서 돌아올 때 제일 먼저 자신을 환영하러 나온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단다.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기 외동딸이 춤추면서 자기를 맞이하는 것 아닌가. 입다는 자기를 환영하러 나온 딸을 원망하지만 하나님과의 서약을 어길 수 없어 난감해 하고 있다. 그의 외동딸은 아버지 입다의 처지를 이해하고 두 달 동안 산에서 애곡한 다음 제물로 바쳐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해 나흘씩 애도하였다(삿 11:29-40).

    성서전통에 의하면 전쟁 전이나 전쟁 후에 사람을 제물로 바친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사사 입다가 이방민족들이 행했던 인신제사(人身祭祀)를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하나님이 강요하지도 않은 인신제사를 서약하고 만다. 이점에서 볼 때 입다는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입다의 딸은 믿음의 문제와는 별개로 입다의 일방적인 서약으로 죽음에 처한 것이다. 입다는 단순히 자신의 승리를 위해 사려 깊지 못한 서원을 한 것이다. 누가 죽게 될 것인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자기의 목적을 위해 불의한 서약을 한 입다는 앞으로 닥칠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을 무시한 입다의 이기적 신앙은 자기의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입다의 외동 딸은『심청전』에서 심청의 경우와는 달리 스스로 택한 죽음은 아니지만 자신의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의 의도에 의심을 품는다든지, 왜 그러한 어리석은 서원을 했느냐는 항의도 없이 그저 순순히 죽음의 길을 택한다. 심청이의 정성과 입다의 딸이 보여준 순종의 미덕은 우리가 중시하는 '효'(孝)라는 주제를 내포하기도 한다. '효'를 위해 죽어간 것은 아니지만 말없이 순종함으로써 부모의 잘못을 사죄하는 입다의 딸을 보면서 '에밀레종'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듣기 위해 누이동생의 갓난아이를 구리 속에 넣어 만들었다는 봉덕사의 신종(神鐘)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기성세대의 잘못된 사고로 말미암아 죄없는 젊은이들이 희생의 대가를 치른다. 자기 딸이면 안되고 다른 사람의 자식이면 제물로 바쳐져도 좋다는 이기적인 신앙이 딸을 죽게 한 서글픈 이야기다. 젊은이들의 아픔과 애환이 서려 있는 사사기는 그래서 '젊은이의 책'이라고도 불려진다.
 
 
 

[그림: 삼손이 사자를 죽이다]
 
 

8. 삼손과 들릴라
 

    이어 삼손 이야기가 소개된다. 영화에도 소개된 바 있는 삼손이야기는 그 내용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야훼의 특별한 도움으로 삼손이 출생한다. 삼손은 출생하자마자 나실인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진다. 삼손은 커가면서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일 정도로 힘이 강대해진다.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삼손은 아내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누설함으로써 자기 아내를 친구에게 내어 주게 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블레셋 족속을 크게 무찌른 삼손은 다시 블레셋 기생인 들릴라를 사랑하게 된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알기 위해 들릴라를 이용하게 되고, 그녀의 꼬임에 넘어가 삼손은 자신의 힘이 머리털에서 나온다는 비밀을 누설한다. 결국 힘을 잃게 되어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 의해 두 눈을 잃고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된다. 그 사이 머리털이 다시 자라 삼손은 힘을 얻게 되고, 다곤 신전(神殿)의 기둥을 뽑아 무너뜨리고 그 신전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기나긴 이야기가 사사기 13-16장에 걸쳐 소개된다. 삼손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족속이 가끔 한데 어울려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블레셋은 힘이 강대해지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왕권을 형성한다는 이야기가 사무엘서에 소개된다.
 
 

[그림: 삼손과 들릴라]
 
 
 
 
 
 
 

9. 미가의 신당
 

    미가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신당을 꾸미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을 삼은 사건이 사사기 17-18장에 소개된다. 집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서 신상(神像)을 제조하기도 한다. 미가는 또 레위가문에 속한 소년을 제사장으로 삼고 야훼의 축복을 받고자 했으나 이것이 올무가 된다. 레위 소년이 전해준 길조(吉兆)에 따라 단 지파는 미가가 거하는 라이스 지역을 공격하여 자기 영토로 만든다. 미가가 만든 신상들이 단지파 자손들에 의해 보존되었다는 사사기의 보도는 이스라엘의 혼재된 종교생활을 잘 보여준다. 아직까지 제사장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으며 힘있는 사람은 집안에 신당을 세우고 신상까지 건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모세를 통해 부여된 야훼의 율법을 모르는 것 같다.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 야훼의 율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에봇과 드라빔(가족 수호신)을 만들어 경배의 대상을 삼은 것을 볼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종교생활에 익숙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중에야 자리를 잡아간 야훼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사시대까지만 해도 신상을 섬기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진 것 같다.
 
 

10. 맺음말
 

    종교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 치안부재를 초래한 때가 바로 사사시대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 지파간의 대규모 전쟁을 초래한 사건이 발생한다. 레위인의 첩이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죽게 된다. 그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열두 동강 내어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 보내자, 열 한 지파가 범죄를 저지른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는 사건이 사사기 19-21장에 소개된다. 사사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슬픈 이야기는 사사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성서기자는 사사기 마지막에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적고 있다(삿 21:25). 이처럼 사사시대는 지파간에도 서로 통제력을 상실할 정도로 정치체제가 아직 잡혀 있지 못했다. 종교적으로 혼재된 상황에서 야훼신앙이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정치적으로 아노미 현상을 초래했던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국가체제를 갖추기 이전의 모습을 반영한다. 사사기를 기록한 성서기자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이스라엘의 죄악을 반복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이스라엘과 야훼와의 관계성을 부각시킨다. 어쩌면 이스라엘이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한 것도 야훼에 대한 불순종 때문이라고 그는 역설하고 있다. 비록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무질서한 면을 그리고 있지만 초기 이스라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대 근동지방, 특히 팔레스타인에 관한 연구와 더불어 주의 깊은 연구가 요청된다.
출처 : 아름드리
글쓴이 : 우하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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