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Absolute Sovereignty and Human's Responsibility) / 김 봉 환 교수 (칼빈목회연구원장)
Ⅰ. 서론 / 하나님의 절대주권
Ⅱ. 하나님 주권의 범위
Ⅲ. 인간의 책임
① 문화(과학) 건설의 책임
② 기도의 책임
③ 선교의 책임
④ 선행의 책임
⑤ 성화의 책임
Ⅳ. 결론 및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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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하나님의 절대주권(God's absolute sovereignty)
칼빈주의는 유신론(有神論) 가운데 철저한 점은 하나님의 주권(主權) 교리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칼빈주의는 칼빈의 인간적 사상이 아니고 그가 성경을 바로 찾아내어 가르친 원리들을 의미한다. 그러면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을 그의 기본 원리로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이란 도리(道理)의 의미는 무엇인가? 칼빈의 사상적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 교리는 칼빈의 다른 모든 사상체계가 싸고도는 중심 태양이라 하겠다.
그것은 칼빈주의 학자 헨리 미터(Henry Meeter) 박사가 잘 말하여 준다. 그는 말하기를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現想)의 배후(背後)에 계신 하나님을 보며 또한 모든 일어나는 일에 하나님의 손이 그의 뜻을 이루고 있음을 잘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나 무엇에나 통치하고 계시며 관할하고 계심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 사색이란 것은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하나님의 통치를 보고 있는 사색이다(시 139:7-10).
그런데 칼빈은 이 사색을 어디서 얻었느냐? 그는 이것을 성경에서 얻었다. 성경은 칼빈주의의 규준(規準)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시작하고 성경으로 진행하고 성경으로 마감한다. 칼빈주의는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멎는데 멎는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의 증험문서(證驗文書)로만 보지 않고 오직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그 독자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본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견해이다. (신 4:35, 왕하 19:15, 시 24:1, 사 54:5, 14:24, 욥 42:22, 시 33:11, 사 4:27, 단 4:35, 잠 21:30, 시 139:7-10, 사 45:7, 잠 16:4, 롬 9:15-18 등)
칼빈주의의 핵심 원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뛰어나신 자이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자기 본위(self-seeking)에 젖은 모든 행동의 근거를 없애 버린다. 참된 도덕성은 하나님께 지향되어 있다.
그리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제1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다루고 있다. 칼빈 개인의 좌우명은 ‘Coram Deo’였는데 이는 “하나님 면전에서”란 뜻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을 보았으며 그는 성경을 통해 여호와의 눈이 항상 자기를 통촉(洞燭)하시는 것을 알았다. 칼빈은 범사에 하나님의 손을 의식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로마서 11장 36절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世世)에 있으리로다. 아멘.
신학적으로 볼 때 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라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중심에 계신다, 만물 위에 뛰어나신 절대 주권, 그것은 그의 독점적인 권한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주의 절대적인 최고 통치자이시며 작정, 창조, 섭리, 구속에서 주권적이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보존자이시다. 우주는 창조의 전부이어서 절대적으로 그 창조자에게 의존된다. 이런 기본적 구별은 인간 자신의 탐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경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이다.
Ⅱ. 하나님 절대주권의 범위(The range of God's absolute sovereignty)
만물을 그의 법칙에 복종케 하신 이 법칙은 피조물 전반에 관계된 것이다. 전도서 9장에서 태양과 바람, 그리고 물의 존재와 활동까지 법칙에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은 항상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법칙 아래 살고 있다.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피조물의 본질이다. 그것에서 피조물의 피조성(被造性), 의존성(依存性), 유한성(有限性), 자충족성(自充足性)의 결핍과 스스로의 결정에 대한 무능력이 드러난다.
주권(主權, sovereignty)이라는 말은 권위로 옷 입혀진, 호령할 수 있는 권세-즉, 명령할 수 있는 자격의 소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최고의 주권자이시며 절대적 명령자로서 모든 권위를 소유하신 분이다. 지상에 있는 모든 주권과 권위는 하나님께로 유래되었고 제정되었다. 그리고 모든 주권과 모든 권위는 항상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절대 주권(絶對主權)이 하나님께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그의 법칙들도 주권적이다. 이 법칙들은 권위를 행사하고 또 주권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법칙들이 적용되는 영역 안에서는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아무 제한이나 방해를 받지 아니하시고 자유로 자기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의 눈치 보시느라고, 누구의 비위 맞추시느라고 무슨 일하시는 것을 주저하거나 중지하지 아니하신다. 절대적인 자유와 주체 의지를 가지고 아무 거리낌 없이 모든 일을 하신다(대상 29:11-12, 시 89:6, 9, 11:13, 사14:24, 단 4:34-35, 롬 9:20, 사16:8, 삼하 5:2, 왕상 1:35, 14:7, 왕하 20:5, 대상 5:2, 11:2, 17:7, 29:22, 잠14:28, 6:7, 29:26, 합1:14, 민 24:19, 전10:5).
칼빈주의 신학자 찰스 하지(Charles Hodge) 박사는 “어떤 사물이 하나님께서 지배하시기 에는 너무 크다든가 또 하나님께서 인식하시기에는 너무 작다든가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풀잎 하나하나에 계시고, 북두성의 행정(行程)을 인도하시고, 별들의 대군을 통수하시며, 해와 달의 진행을 주장하신다. 모든 사람의 영혼에 내재하셔서 생각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신다. 한 장소에 계신 것과 같이 모든 곳에 계시며 한 일에 유의하시는 것과 같이 만사에 유의하신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성경에서 만물의 최초(제일) 원인으로서 표현되었다. 창조와 보존(시135:6, 렘 4:11, 18:6), 통치(잠 21:1, 단 4:35), 선택과 유기(롬 9:15-16, 엡 1:11), 그리스도의 고난(눅 22:42, 행 2:23), 중생(약1:18), 성화(빌 2:13), 믿는 자의 고난(벧전1:3,17), 사람의 생명과 운명(행18:21, 롬15:32, 약 4:15), 심지어 가장 미미한 생물(마10:29)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 않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적 관할이 창조와 인간의 구원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제반 영역에 미친다.
☞생활의 각종 영역(The Various kinds of range of life)
“영역 주권”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생 모든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창조와 인간 구원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각종 영역(sphere)에도 골고루 미친다는 말이다.(천문학, 지질학, 물리화학, 해양학, 식물학, 조류학, 수산학, 동물학, 인류학, 인간학, 심리학, 의학,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법률, 윤리, 철학 즉, 천체계,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 미생물계…)
단 4:35, 렘 32:17, 마 28:18, 엡 1:11, 22, 사 14:24-27, 46:9-11, 창 18:14, 욥 42:2, 시 115:3, 사 55:11, 롬 9:20-21.
☞자연계(the natural world)/물질계(the material world)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이 우주 만사에 주도(周到)함과 같이 그의 계획도 또한 같이 포괄적인 것을 가르친다. 아무리 미소(微少)하고 아무리 기이한 것이라도 그의 명령이 없이 혹은 그의 계획에 있어서의 그 독자적 위치에 합치하는 일이 없이는 발생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의 일체(一切)의 귀결(歸結)은 하나님의 영광의 시현(示顯)이고, 하나님의 찬송의 누적이 아니면 아니 된다. 이는 구약 성경, 신약 성경의 우주 철학이니 발생하는 일체사상(一切事象)이 시간적 세계에서의 발전인 절대적 제약 혹은 절대적 목적 계획에서 구체적 통일을 얻는 세계관이다.
요 1:3-4, 13-4장, 출 9:26, 마 5:45, 창 41:29-32, 암 4:7, 행 14:17, 사 40:12, 암 3:5-6, 애 3:33, 사 47:7-9, 전 7:12-14, 사 54:16, 시 104:14.
☞동물계(the animal kingdom)
각종 동물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도 여전히 신비할 뿐이다. 어떤 동물은 맹수이고 어떤 동물은 유순하다. 소(牛)는 일하고 그 몸(고기)도 주고, 복어는 독이 든 알을 갖고, 고래는 새끼를 낳는다. 가장 멀리 나는 도요새는 점보 비행기처럼 웅장하고, 어떤 열대어는 내장이 환히 들여다보인다. 미생물이 있고, 파충류(爬蟲類)가 있고, 포유류(哺乳類)가 있으며, 토끼와 거북이가 있어 재미있다. 인간은 여성이 아름다운데 동물은 오히려 수컷이 아름다우니 신기하다. 창 1:25, 욥 39:1-2, 마 10:29, 단 6:22, 시 104:21-28, 창 31:8-9, 마 6:2.
☞민족의 생활 역사(The racial living history)
인류 역사의 장래도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계 1-3장, 17:17).
단 4:17, 사 40:15, 대상 16:31, 시 47:7, 단 2:21, 시 33:10, 수 21:44, 삿 6:1, 암 3:6, 합 1:6.
☞개인의 전 생활(An Individual's whole life)
인간의 출생과 운명 속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고 있다(시 139:13-15).
성공, 실패가 하나님께 있으며(시 75:6-7, 눅 1:52),
구원 역사도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롬 9:20-23).
잠 21:1, 16:9, 시 37:23, 롬 11:36, 약 4:15, 고전 4:7, 시 34:7, 단 3:17, 시 118:6, 사 64:8, 스 8:31, 느 4:15, 행 18:9, 출 11:7.
☞인간의 자유행동(Human's free action)
빌 2:13, 출 12:36, 스 7:6, 6:22, 겔 36:27.
☞인간의 사악한 행위(Human's unholy action)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명확히 아는 바와 같이 인류 역사상 최악한 죄행인 그리스도의 참살(慘殺)은 하나님의 계획 중에 적확적(的確的), 필연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행 2:23-4:28). 이 특정적 구속 방법은 하나님께서 인생이 타락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낙심한 후에 임시적 고안으로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원적 목적에 기인한 것이다(엡 3:11). 베드로는 말하기를, 대속적 희생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예지되셨다(벧전 1:20) 하였고, 그리고 에베소 1:4에, 신자들은 창세전에 피택되었다고 하였고, 디모데후서 1:9에, 우리는 임시적 행위로 득구한 것이 아니고 영원 전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의 목적과 은혜로 말미암아 득구(得救)하였다고 하였다. 만일 그리스도의 정사(釘死)와 그의 속죄적 희생의 사역이 하나님의 영원전 계획 속에 포함되었다면 이 희생을 필연하게 만든 아담의 타락과 기타 죄과들이 그의 계획 중의 일종인 아름답지 못한 듯한 부분일지라고 원시(元始)로부터 포함된 것만은 명확한 사실이다. 행 4:27-28, 벧전 1:20, 딤후 1:9, 요 19:11, 삼하 16:10-11, 시 76:10, 출 14:17.
☞예정론에 대하여(The theory of predestination)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없이는 예정교리도 해결할 수 없다.
예정의 작정은 의심할 바 없이 그 전 부분에 계획(경륜)과 의지에 있어서 한 분이신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협력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성경에 계시된 것과 같이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예정의 주권적인 행동은 좀 더 특별히 성부에게로 돌려진다(요 17:6-9, 롬 8:1-29, 엡 1:4, 벧전 1:2).
예정의 대상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작정과 구분하여 하나님의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만 관계한다. 가장 흔하게 그것은 타락한 인간들을 언급한다. 모든 선하고 악한 인간들-집단별뿐만 아니라 개인별도 포함된다(행 4:28, 롬 8:29-30, 9:11, 13, 엡 1:5, 11).
선하고 거룩한 천사들(막 8:38, 눅 9:26)과 그들의 첫 지위를 지키지 않은 범죄한 천사들(벧후 2:4, 유 6절)에 대하여 말할 뿐만 아니라, 선택된 천사들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함으로써(딤전 5:21), 또한 선택되지 않은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유기(遺棄, reprobation)는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으로 어떤 사람들은 죄를 간과하시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벌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공의를 드러내시기로 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으로 정의(定義)된다.
그러므로 유기의 작정은 두 요소를 포함한다. 간과(pretetiton) 즉, 어떤 사람들은 그 죄에 대하여 지나가시는 결정과 정죄(condemnation) 즉,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처벌하시는 결정(precondem-nation, 선고)을 함의(含意)한다.
간과(看過)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 즉 인간의 과실이 고려되지 않는 바 하나님의 단순한 선하심과 기뻐하심의 행동인 반면, 선고(宣告)는 죄를 멸하시는 법적인 행동이다.
유기론은 상황의 논리로부터 자연스럽게 추론된다. 선택의 작정은 필연적으로 유기의 작정을 함축한다. 만약 무한한 지식을 소유하신 전지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의도하셨다면, 그는 사실상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기로 의도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면, 그는 바로 그 사실(impactor)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을 거절하셨다.
에밀 브룬너(Emil Bruuner)는 성경이 거절에 대한 신적 예정을 한마디도 가르치지 않았다 하여 이러한 논의에 대해 경고(警告)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경은 문제의 논리를 반박하지 않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주로 구원의 계시(啓示)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히 선택만큼 유기에 대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는 매우 충분하다(마 11:25, 롬 9:13, 17, 18, 21, 유 4절, 벧전 2:8).
심원한 유기의 이유가 있다. 이것은 바로 신의(神意)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자기들의 선택에 따른 것인 양 생각하고 있지만 보다 깊은 이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섭리”에 기인하는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특히, 유기론에서 두 가지 이유가 있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피상적(皮相的) 이유라고 불리는 것으로 인간의 불신 혹은 사악성(邪惡性)이 그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본질적 이유로 불리는 것으로 신의(神意, 하나님의 뜻)가 그것이다.
칼빈의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판단은 전적으로 의롭다는 것이 그 첫째 사실이요, 인간은 하나님의 결정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두 번째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범죄 행위에 마땅한 벌(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행 4:27-28, 엡1:5, 1:11, 롬 8:29-30, 고전 2:7, 행 2:23, 13 :48, 엡 2:10, 롬 9:23, 시139:16.
하나님의 속성에는,
비공유적 속성(The character in separate):
독립성(獨立性):자존성(自存性), 불변성(不變性)
무한성(無限性):완전성(完全性), 영원성(永遠性),무변성(無變性)
통일성(統一性):단순성(單純性), 단수성(單數性)
공 유 적 속성(The character in common):
영성, 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도덕성(선, 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 의),
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독립성은 자존성인데 말 그대로 스스로 존재하심(self- existence)을 의미한다. ‘자존성’이 의미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그 자신 안에 있어서 존재에 근거를 가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독립적이며, 사실은 그의 덕(virtues), 뜻(decrees), 일(works)에 있어서도 독립, 자존적이시며, 모든 것이 그에게 의존적이 되게 하셨다. 출 3:14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말씀이다. “나는 여호와라(I am who I am).” ‘존재한다’라는 동사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존재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from eternity) 다른 어떤 존재에도 의존치 않고 스스로 계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서는 성경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시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 3:6)라고 한다. 히브리서 6:17에는, 하나님은 그의 뜻을 변하지 않으신다고도 하였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의 존재와 작정과 역사에 있어서 변함없는 지조(constancy-unchangeableness)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계획이 불변하고 언약이 그러하며 성취가 그러하다(잠 19:21, 창 17:7, 13, 19, 갈 3:17, 시 110:4).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히13:8), 자신에게 신실하시고, 또한 그의 작정(decree)과 계시와 역사에 있어서도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
불변성이란 하나님이 어떤 변화도 없으시며, 그의 완전성과 목적과 약속에서 변치 않으시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더해지거나 덜해지는 일에서 자유로우시며, 그의 존재와 완전하심은 성장이나 부패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의 속성은 온갖 종류의 제한으로부터의 자유이다. 하나님은 세계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붙잡히거나 우주 조건에 종속하지 않으신다.
완전성이란 어떤 한계나 양태나 끝이 없는 최고의 정도에 있어서의 모든 완전성을 함의한다.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모든 속성들은 무한하다고 말해야 한다(Heidegger).
영원성은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완전성이다. 즉,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성장과 발전, 성숙이 없다. 하나님은 시간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으신다. 시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Augustine). “하나님의 영원성” 그것은 그가 창조하신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무변성(無邊性, immensity)이란 일상 대화에서 별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다. 영원성이 시간과 관련하여 파악되는 것이라면 무변성은 공간과 관련하여 이해된다. 이 완전성에 의해서 하나님은 모든 공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의 전 존재로서 공간의 모든 지점에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여기에, 또 부분적으로는 저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로 공간의 모든 부분을 채우신다. 그러므로 편재와 더불어 생각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우주 속에 내재하시나 거기에 조금도 구속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이 완전성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왕상 8:27, 사 66:1, 시 139:7-10, 렘 23 :23-24, 행 7:48-49).
하나님의 무변성은 편재(遍在)와 넓은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즉, 무변성은 공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완전성이고, 편재성은 이 초월적 하나님이 동시에 하늘에나 땅에 어디든지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일성은 단순성(unitas simplicitatis)과 단수성(unitas sin-gularitas)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단순성은 하나님이 혼성되거나 분할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속성은 신격 안에 있는 삼위가 하나님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또한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에 무엇을 첨가하는 것이 아님도 알게 해 준다. 즉, 이 속성은 하나님의 내적, 질적인 통일성을 표현한다.
단수성은 하나님의 유일성(oneness)과 단일성(unity)을 말한다. 즉, 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소위 전능이라는 말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이지만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거짓말, 범죄, 변절, 자기 부정 등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민 23:19, 삼상15:29, 딤후 2:13, 히 6:18, 약1:13). 스콜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은 본래부터 자기에게 모순된 것도 할 수 있고, 자신을 멸절하실 수도 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의지의 단순한 실천을 통하여 그가 이루고자 결정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다 실현하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전능을 증거한다(욥 9:12, 시115:3, 렘 32:17, 마19:26, 눅 1:37, 롬 1:20, 엡1:19).
역대상 29: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Ⅲ. 인간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human)
칼빈주의자의 표어는 신 29:29에서 모세가 한 말이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인간에게는 너무 깊어 도달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모순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고 실제는 그렇지 않음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명백한 두 모순을 조화시킬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이 문제들 중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현저한 역설이다.
윌킨슨(Loren Wilkinson)은 청지기직에 대한 인간의 임무, 즉 역할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첫째로 청지기직의 임무는 일반적인 임무이다. 우리의 생활 형편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름 받는다. 둘째로, 청지기직의 임무는 맥락적이다. 그것은 동물을 잘못 다루어서는 안된다든가, 경작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보다 특별한 의무를 일으킨다. 셋째로, 우리는 만유의 소유주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고 보호하라고 위탁받은 보관인이다. 즉 창조주이며 지탱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지배권이다, 넷째로, 자연을 사용하고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청지기는 종이다. 다섯째, 인간의 지배권이 위탁받은 것이라는 것은 청지기는 종일뿐만 아니라 관리자임을 말해준다. 여섯째, 청지기로서 우리는 자연의 적절한 사용에 관하여 결정의 자유를 갖고 그 책임을 진다. 이는 아담의 동물들에 대한 이름 짓기에서 볼 수 있었다.
위의 사실들에 인간은 자연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며,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환경윤리, 즉 자연을 회복시키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고 성도들이 감당해야할 성화의 영역이며, 성화를 위한 성도의 책임인 것이다.
①문화(과학) 건설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civilization (science) construction)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종교(宗敎)와 문화는 분리될 수 없음을 말했고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주권(主權) 아래에다 가정과 국가, 사회 및 문화의 모든 생활영역(生活領域)을 두려고 하였다. 남아프리카의 칼빈주의적 문화의 소장학자인 리(Lee) 박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문화의 위대한 창조자이며 유지자(維持者)이며 성취자”라고 하였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부탁하신 것은 만물을 정복하라고 하였다(창 1:26, 5:1, 9:6, 고전 11:7 참조). 만물을 다스리는 것은 만물을 연구함과 및 그 연구 지식을 가지고 문화를 건설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영토를 다스릴 특권과 책임을 부여해 주셨다. 이 문화명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주신 영역인 땅을 잘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사명을 주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창세기 2장 19절에 보면 아담은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바 사명대로 만물을 다스리라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즉 그것은 만물을 연구하여 그 내용대로 정의(定義)하는 과학 행위이다.
과학 행위는 문화 건설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신자들 중에서 과학을 무시하는 폐단이 많이 있다. 기독교는 과학을 초월하나 무시하지는 않고 도리어 과학 행위에 있어서 누구보다 더 선봉적(先鋒的)인 걸음을 취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말씀에서 과학의 사명을 깨달은 까닭이다.
창 4:20-22의 내용을 보면 가인의 자손들이 그 당시 문화를 발달시킨 것은 죄악의 행동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신 이 세상 분깃(몫)인 것이다. 그들은 내세의 소망이 없으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문화 건설의 혜택을 누린다.
시편 7:14-15의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문화 건설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그것이 인간의 죄악의 산물과 혼합(混合)하지 않는 범위에서는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는 문화를 무조건으로 건설할 것이 아니고 죄악의 산물과 혼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대로 바로 건설하기를 힘쓸 것뿐이다.
그러므로 과학 행위에 대한 기독 신자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중대한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 신자는 과학 행위와 문화 건설에 있어서 선지자의 책임까지 하여야 되겠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계의 편리를 보면서 그를 섬기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산 제물이 되어 수고와 땀과 피와 생명과 영혼으로 그를 섬기는 것을 원하신다.
문화(文化)를 정의함에 있어서 리차드 니이버(Richard Niebuhr)는 다양한 문화의 특징을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문화는 헬라, 로마 문명이나 중세 또는 서양 문명 또는 문화처럼 어떤 특수한 인간 사회 조직의 일면에 국한된 좁은 의미를 말하기 보다는 삶의 전 영역에서 펼쳐지는 인간 활동의 전 과정과 그 활동의 전적인 결과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② 기도(祈禱)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pray)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는 특권인 동시에 의무임을 잘 보여준다. 기도란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깊은 필요와 희망을 하나님께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특권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성경적 기도 중 하나인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 용납되는 방식으로 기도해야 하기에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욥은 16:17에서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특권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때, 과연 우리의 기도는 정결한지에 대하여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칼빈주의자는 고백하기를, “나는 모른다.” 이것이 칼빈주의자의 종교적인 겸손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00 퍼센트의 주권이 있고 또 인간에게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성경에 있으므로, 이것이 내게 합리적일 수 있고 따라서 나는 믿는다. 또 나는 행하라고 하신 모든 명령들을 행하려고 힘쓸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만사를 다 예정해 놓으셨다 할지라도 여전히 기도가 유효하므로 인간은 기도를 드려야 하며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힘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약 5:16).
바돌로매와 홀트(Bartholomew & Holt)는 기도를 왕국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의 의미를 설명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행동하시도록 하는 어떤 기술이나 하나의 감추어진 해석적 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구원계획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목적을 붙잡기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참여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그것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기도한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목적인 그의 놀라운 구원계획 혹은 구원역사를 드러내기 위한 기회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구원역사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제시된다(Harris 1966:Polymale 1990). 기도는 영적 부흥이나 교회성장의 ‘수단’(means)이나 ‘기교’(trick)나 ‘열쇠’(Key)나 ‘기술’(technology)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시키는 본질적인 일(왕국활동)이다.
이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선택하지 않으셨고 또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가라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힘써 좇아 모든 민족을 제자들로 만들어야 함을 의미한다(마 28:19).
③선교(宣敎)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missionary works)
칼빈주의 선교사상은 제네바를 신정(神政)적인 도시로 만들었던 칼빈에게서, 그것에 크게 영향 받은 영국의 민주제도와 미국국가 건설에 또한 영향을 주었던 퓨리탄 주의, 그리고 칼빈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한국의 장로교회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칼빈주의의 신론(神論), 구원론(救援論)에서 우리는 칼빈주의적 선교사상을 도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선교사상은 신뢰할만한가? 그것에 대한 해답은 예스(yes)이다.
이유는 칼빈주의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충실하고 신앙 경험과도 맞는 합리적인 신학 체계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원시 기독교, 바울주의로 환원하려고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마치 뉴턴의 만류인력의 법칙은 이미 우주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칼빈주의는 성경 진리의 재발견을 의미한다. 이것이 칼빈주의 선교사상의 위대성이다.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만 또한 인간을 기용하셔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때, 한편, 성령의 역사를 말해야 하면서, 다른 편으로 교회의 과제를 더불어 논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선교의 역사(役事)는 성령의 일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감당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둘은 결코 신입 협동적 관계는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면서 또한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 요구되는 신비한 일이다.
그 이유는 두 요소-즉,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하나로 보는 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논한 중심 구절 전후에서(롬 9-11장) 인간의 책임을 전제했다. 로마서 6장 12-13절에는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 또는 “너희 지체를 죄에게 내주지 말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관한 똑같은 조화가 있음을 기억하자. 살전 5:8-9 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유를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구원을 받게 하심”(9절)이기 때문에 근신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또 살후 2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면하기를, 하나님이 처음부터 택하사 구원을 받게 하셨기 때문에 굳건하게 서야 한다고 한다(살후 2:13-15).
인간은 주권적인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지만 또한 도덕적 책임을 가지는 것을 칼빈주의는 믿는다. 그것의 양립을 거절하고 주권성에만 인정을 한다면 선교의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
칼빈주의 선교관은 주권적인 하나님을 의존함 가운데 자신의 선교적인 책임을 이행하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회적 의의는 신론이나 기독론의 항목들에서만 발견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신론에서부터 시작하여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교리들 전 영역들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수행은 세속적인 사회봉사와는 달리, 성경적 교리들이 제시하는 성경의 교훈들과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추진되는 사역이어야 한다.
칼빈주의는 교회 외연(外延)의 확대인 선교를 위해 위대한 선교의 명령에서 계시된 것처럼, “모든 민족”, “만방”, “땅 끝”으로 나아가야 하며,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세례를 주고 가르쳐 제자로 삼고, 하나님 중심의 주권 신학으로써 그의 주권이 우리를 매개로 하여 모든 민족 만방, 땅 끝으로 적용이 되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유는 그것이 칼빈주의 선교신학이기 때문이다. 신뢰성, 의미성 그리고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칼빈주의 선교사상은 위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④ 선행(善行)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good deeds)
칼빈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image)를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각 개개인은 자신의 이웃을 존귀한 존재로 다루어야 하고 서로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될 때 사회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거듭난 생을 살아야 되는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신약에서 바울이 이야기한 이상적인 인간질서가 교회에서 적용되는 것처럼(고전 12:14-26),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사명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적용을 통하여 사회에서 규모 있게 생활함으로 이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인간됨에 대한 참된 통찰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사도 바울은 선택이 선행의 동기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선행을 촉진케 한다고 한 것이다.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벧후1:10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씀을 잊지 말자.
칼빈주의자들의 한 특징은 삶의 제 국면(諸局面)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의 근본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통일된 체계이다, 또한 이 근본 원리 때문에 통일성은 칼빈주의 체계의 명백한 특징이다.
칼빈주의에 의해 확립된 사상 체계는 보편적인 범주를 가진다. 그것은 생(生)의 모든 영역-특히 신학, 정치학, 교육, 노동, 그리고 통신(communication) 등의 영역을 포함한다. 과연 이 체계는 칼빈주의자의 세계관이며 또한 인생관인 것이다.
칼빈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본받아 우리 자신을 이웃을 위해 투여하는 사랑의 4가지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 기회가 주어질 때에는 언제든지 형제를 진실로 애정을 가지고 사랑한다.
ⓑ 주님께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기회를 주셨다고 믿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사명감을 느낀다.
ⓒ 할 수 있는 한 목마르거나 굶주리거나 혹은 여타 다른 형제의 필요를 충족히 채운다.
ⓓ 사랑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열려져야 하고 주님이 가지신 마음을 본받아 주님과 같은 감정을 가져야 마치 고통 받는 자들이 우리 자신들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예정론자들은 하나님이 예정했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예정을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책임감을 느끼며 최선의 노력을 하게 된다. 역사적 증거를 들어 보자. 다니엘 선지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해에 이스라엘이 70년이 차야 고국에 돌아가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이 70년이 되어야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예정을 알게 될 때 경건 생활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삼하 7:27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라고 했다. 다윗 왕이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장과 25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알렉산드리아호를 타고 로마로 가는 도중 지중해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행 27:14).
바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만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 주실 것을 알았다. 이때 바울은 절망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하나님의 예정을 확신하는 사람은 사경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영국에서는 청교도들이, 스코틀랜드에서는 계약론자들이(Covenanters),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들이(Huguenots) 도덕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생활수준을 보여 주었는데 이들은 다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기독교 역사상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모범될 만한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미국의 개척자인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자들이었다. 로버트 프류인(Robert Fruin)은 말하기를 “칼빈주의가 화란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논리적 조직과 민주주의적 교회 자치법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엄격한 도덕의 강행력과 인간의 종교적 개혁을 위한 도덕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했고, 반덴 브린크(R. C. Bakhuizen Van den Brink)는 말하기를 “칼빈주의는 16세기에 종교와 정치적 원리에 있어서 가장 발전한 형태이었다.”라고 했고, 반크로프트(Bancroft)는 “칼빈주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본체론과 윤리와 사회적 행복과 인간의 자유를 내포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성경은 정치계에 있어서도 가장 참된 기준이다. 칼빈이 정치사상에 있어서 다수 투표의 원칙을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을 가리킨다. 영국의 청교도시대에 이르러서 나타난 민주주의 정치에 발달을 주었다. 민주주의는 실상에 있어서 책임과 규율을 먼저 존중시하고 그 결과로 자유와 특권을 가지게 하는 정치이다. 민주주의에서는 책임과 규율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불구자로 취급하며 국가의 해로운 물건으로 여긴다.
성경은 어떤 일정한 정치형태를 고정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동물들이 어떤 위치를 가지며 그것들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무엇인가 성경적 입장을 보면,
첫째, 그것들이 하나님의 창조로서 갖는 본유적(本有的) 가치이다. 동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그의 작품이다(시 8, 19, 104편, 롬 1장). 둘째,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와 목적의 일부인 동물을 아끼시고 은혜롭게 다루신다는 사실이다.(창 1:21, 창 6:19-20, 7:2-3, 창 9:10-11, 9:3-4, 출 20:10-11, 신 5:14, 욘 4:11, 시 145:9, 15, 마 6:29, 눅 12:6). 셋째, 동물보호에 대한 성경의 구체적 명령들이다(신 25:4, 출 235, 신 22:4, 7).
성경의 증거들을 볼 때 동물을 인간에게 음식으로 주셨다(창 9:3, 4, 레 11장, 신 14장). 신약에도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막 7:19, 합 10:9-16, 행 15:20, 롬 14:1-6, 13-23, 고전 8:1-13, 10:23-33, 눅 24:41-43). 이상의 성경의 증거들을 볼 때 동물을 죽이는 것은 무조건 잘못이고 채식만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정당하게 동물을 죽일 수도 있고 그 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들의 생명의 가치와 존재할 권리를 배려하는 제한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보수 신학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정당한 신학적 논제로 삼아야 하고 창조질서와 성경의 중요한 교리를 무너뜨리는 “동물권”과 같은 반성경적인 환경이데올로기와 철학에 맞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관한 보다 성숙한 신학을 생산해 내어야 할 것이다.
⑤ 성화(聖化)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sanctification)
칼빈주의자들은 주님에게서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켜 도덕적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의무의 상관성
오웬의 성화론 즉, 죄죽임의 교리의 본질 즉, 죄와 유혹의 본성과 내주하는 죄의 존재와 통치 그리고 이를 억제하는 죄죽임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하여 성령이 성화의 조성자이자 주체라면 신자의 의무와 책임의 영역의 소재는 어디까지이며, 하나님이 신자에게 얼마나 많은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실까? 만일 성화를 오직 하나님의 주권설에 근거를 둔다면 인간의 의무론은 불필요하지 않는가에 대한 상충된 견해가 제기될 수 있다. 즉, 성화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과의 어느 부조화 또는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성화론을 다룬 오웬도 역시 이렇게 제기될 문제의 소지를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만일 이 사역이 성령의 단독 사역이라면 신자는 어떻게 이 사역에 대하여 이해해야 할 것인가? 만일 은혜와 성화, 거룩함의 시작과 진행과 성장이 오직 성령 사역의 결과에 기인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것들이 은혜와 거룩함 가운데 성장시키기 위한 우리 자신들의 노력은 과연 필요한 것이가? 과연 이러한 노력의 의무가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어졌는가?
만일 혹자가 죄죽임은 인간 고유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성령을 통한 은혜의 결과로 이해한다면 여기에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성화를 위한 책임과 의무감을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 숙명론(fatalism)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웬은 중생과 성화의 차이점을 로마서 11장 6절에서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중생은 새 창조물의 출발점으로서, 이는 주요하고도 유효한 원인(principal efficient cause, 요 3:3-6)이 되시는 성령의 적절하고도 특수한 사역의 순간적이고도 단회적인 사건으로서 인간의 개입과 활동이 배제되어있다. 그러나 성화는 죄죽임의 과정으로서 성령의 은혜와 인간의 의무가 서로 상반되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게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신자의 의무(책임) - 죄죽임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들(The Special, Progressive Direction for Mortification).
오웬은 죄죽임을 위한 일반적이고도 근본적인 원리를 제시한 후 보다 구체적이고도 신자의 노력과 의무를 요구하는 세밀한 지침을 제공한다. 그는 신자의 죄죽임은 성령의 사역이며,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은혜의 수단들”(the means of grace)이라는 통로를 신자들에게 수여하심으로 가능케 되었다.
오웬의 용어에 의하면, 신자는 “성령에 의해 창조된 습관들” (Spirit-created habits)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성화의 사역 즉, 죄죽임을 진행시켜 갈 수 있는 것이다. 은혜의 습관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여된 것(infused)들로서 이를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삶으로 진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Ⅳ. 결론 및 제언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갖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동기는 사랑과 연민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책임은 동료 기독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가난한 비기독교인들을 돕는 목적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적극적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에 대하여 김은수 교수는 첫째, 우리의 신앙과 삶의 전 영역에 걸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다시 확고하게 정립해야 하겠다. 칼빈에 있어서 그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삶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개혁주의적 신학 원리들은 실제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것이 아마도 칼빈의 신학이 가지는 엄청난 생명력의 근원 중의 하나일 것이다.
둘째, 우리의 물질관에 있어서 성경적 개혁주의적 관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청지기 정신”의 재고이다.
셋째, 일(노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재고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소명의식의 회복으로 가능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비생산적인 구조와 가치관들을 개혁해 가야 할 것이다.
넷째, 우리 사회, 경제 활동영역에 있어 정의(justice)와 사랑(charity) 실천이다라고 했다.
개혁신학은 경건의 신학이다(Theologia pietatis).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대전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책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진리의 모음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신학 진술의 자세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바른 태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의 윤리적 귀결은 참된 경건, 곧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의 결합체’를 경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칼빈은 세속 철학의 우물에서 이성적 논리를 빌려다가 성경과 합하여 놓지 않았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윤리적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과 행함에 깨어 있음으로써, 오늘날도 살아있는 감동과 힘을 발취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주일날 하루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 주간 내내 생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간다. 그로서는 생(生)의 모든 것이 다 종교적(예배적)이다. 그는 이 세계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았으며 이제는 기독교인의 일터가 된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생의 모든 영역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해야 한다. 따라서 종교와 생활은 두 개의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종교와 생활은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며, 이 종교적 국명을 나타내는 모든 소명은 하나님 면전에서 영광스러운 것이다. 구속함을 받은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에서 적극적인 태도로 사역한다. 왜냐하면 그는 주기도문의 두 번째 간구인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기도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는 그 성취를 위해 역사(役事)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명 혹은 임무들은 일반적으로 3중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선적으로 교회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았으며, 다음으로 주의 성도들에 대해서는 양육 혹은 건덕(edification)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증거”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름 받았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복음전도와 자비의 사역으로 나뉘어 진다.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기초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지를 강조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떠나면 헛수고에 불과하다. 인간의 종교적 노력이 순결하고 흠이 없으며, 거룩하지 못하다면, 구원에 이르는 선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다룰 때에 가장 적합한 성경적 균형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리의 아름다움은 합당한 균형을 유지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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