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26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형상”과 “모양”을 발견합니다. 형상은 안에 속한 것을 말하며, 모양은 밖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안에 속한 것-생각, 의지, 감정을 갖고 있고 밖으로는 모양, 즉 몸을 갖고 있습니다. 답변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번에서 발췌하였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이다
고린도후서 4장 4절과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형상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보이는 형상이 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나타내셨다(요 1:18). 우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본 사람이 있다. 베드로는 그분을 보았다. 요한도 그분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오 백여 형제들이 동시에 그분을 보았다(고전 15:6).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인격의 나타난 형상』이라고 말씀하셨다.
2)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은 곧 그리스도이므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27절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분명 그리스도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3)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로마서 5장 14절은 첫 사람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 즉 예표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사진을 찍을 때 그 사진은 그 사람의 표상이요 예표이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사진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아담은 그리스도의 사진이었다. 사진이 어떤 형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장갑을 예로 들어보자. 장갑은 손의 형상과 손의 형태를 따라서 만들어진다. 손과 장갑은 다 손가락이 다섯이다. 장갑은 손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그 목적은 어느 날 손이 장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함이다. 손은 장갑을 채우고 장갑은 손을 나타낸다. 왜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리스도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9장 21절과 23절은 우리에게 사람은 그릇, 즉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졌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사람은 칼이나 망치나 다른 어떤 도구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이다. 로마서 9장 21절, 23절에서는 또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즉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영광의 그릇으로 만들어졌다고 말씀하신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씀하신다. 이 그릇은 마치 장갑과 같다. 어느 날 손이 그 안에 들어간다. 담길 것이 그릇 속에 들어간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이다.
4)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어느 날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8).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졌으며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누가 누구를 따라서 되었는가? 이것은 피차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만들어졌고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은 기묘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이 생명을 얻었다.
5)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고 닮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고 닮을 수 있다(고후 3:18).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변화와 닮음이 있다. 변화는 이면적(裏面的)이요 닮음은 표면적(表面的)이다.
우리에게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으며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만들어졌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최고의 생각과 최고의 의지와 최고의 감정을 갖고 계신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은 그렇게 실제적인 것이 못 된다. 손과 장갑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람의 손에는 하나의 엄지 손가락과 네 개의 손가락이 있으며 장갑에도 하나의 엄지 손가락과 네 개의 손가락이 있다. 장갑의 엄지 손가락도 엄지 손가락이지만 진짜 손가락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생각을 비교해 보라. 우리의 생각은 장갑의 빈 엄지 손가락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의 생각은 사람의 진짜 엄지 손가락과 같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 역시 빈 엄지 손가락과 같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지혜는 실지의 엄지 손가락과 같다. 그러나 어느 날 실지의 엄지 손가락이 장갑의 엄지 손가락 안으로 들어갈 것이며 이 때 두 엄지 손가락들은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는 모양, 즉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즉 내용이다. 우리의 지혜는 단지 그리스도의 지혜를 담는 그릇이며 그리스도의 지혜의 표현이다. 당신에게 사랑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에게는 다 사랑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빈 장갑과 같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서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 당신의 남편이 당신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빈 사랑이다. 주님을 찬미하라. 그것은 빈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들어오기 위해 그것은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처리되어야 할 것이 있다. 장갑의 손가락이 꼬여 있거나 휘어 있어 들어오려는 손을 거절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처리되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남편의 빈사랑 안으로 들어간다. 그 때 당신은 남편의 빈 사랑을 통해서 참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릴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인격이 무엇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빈 모형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의 모든 인격,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모든 것, 그리스도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변화시키는 역사(役事)를 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감정, 우리의 생각은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본성에는 합당한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어 있는 것이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분과 알맹이가 우리의 모든 인격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혜가 우리의 빈 지혜로 들어가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각을 주어야 한다(빌 2:5, 원문 참조).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채워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아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이면적 변화이다. 이 변화는 또한 표면적 닮음을 가져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되는 것이다(롬 8:29中, 원문 참조).
6)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의 모양과 같이 변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만들어졌다. 어느 날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오셨다. 우리는 그분을 영접했고 그분은 우리 속에 오셨다. 이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안에서 변화의 역사를 하고 계신다.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우리를 그분의 형상과 닮게 하신다. 결국 그분은 우리 밖의 몸을 그분의 영광스런 형체로 변화시키실 것이다(빌 3:21). 그런 다음 우리는 충분히 완전히 변화되어, 최후에는 그분과 똑같게 될 것이다(요일 3:2下). 그분은 자신을 볼 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 모든 사람들은 나와 똑같다.』 우리도 자신을 볼 때 주 예수님께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당신과 같고 당신은 우리와 같습니다.』 전혀 차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는 완전히 우리와 같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우리, 우리와 그리스도는 모두 똑같은 형상과 똑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사람의 창조는 완성되었지만 변화의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변화의 과정에 있으며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b) 밖으로 하나님의 모양이 있음
사람은 안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밖으로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의 종류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모양대로 되었다. 형상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가리키듯이 모양은 하나님 밖에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기묘하다. 성경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하고, 한편으로는 주 예수님께서 성육신 되어 사람이 되기 전 구약 시대에 그분이 사람으로서 사람들 앞에 여러 번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세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다(창 18:2上). 주님과 두 천사들이 그에게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을 자기 장막 안으로 초대하고 그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했다. 그들은 그와 함께 먹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식사를 하셨으며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것이다(약 2:23). 창세기 18장을 읽어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친구의 교제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친구였다. 잠시 후 두 천사들은 거기서 떠나고 주님만 아브라함에게 남아 있었다. 아브라함은 마치 친구처럼 주님 앞에 서 있었다(창 18:16上, 22).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되기 전의 일이었다.
두 번째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브니엘의 야곱에게서였다. 어떤 사람이 와서 이 강한 야곱을 이기려 하였다(창 32:24).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모양을 입은 하나님은 야곱과 씨름을 하고 계셨다. 야곱은 매우 강해서 하나님은 그를 이길 수 없었으며 결국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쳐서 야곱을 절게 만드셨다. 야곱은 물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 이름을 묻지 말라. 다만 나로 네게 축복하게 하라.』 결국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만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창 32:28-30).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의미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실지 사람으로 거기 나타나셨다. 만일 그분이 실지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야곱과 씨름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또다른 경우는 여호수아 5장에서였다. 그 당시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짐을 지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여호와의 군대는 여리고와 싸움을 할 참이었고 여호수아는 그들의 인도자로서 싸움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믿기로, 여호수아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생각하고 있던 저녁 때에 어떤 사람을 본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 사람은 말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수 5:13-14). 그 사람은 또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 5:15). 그 곳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다.
이러한 모든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성육신 전에도 여러 번 사람의 몸의 형태로 나타나셨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풀에는 얼굴이 없다. 채소와 나무에도 얼굴이 없다. 동물의 생명이 시작되면서부터 고기에게는 얼굴이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과는 너무 다르다. 다음으로 새, 육축, 짐승들이 나타났다. 그 다음 사람이 나왔으며 그 얼굴은 하나님과 매우 흡사했다. 이것은 기묘한 일이다. 여하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단지 표현들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내용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또한 모양이 있다. 즉 그것들은 형상의 모양이며 마치사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는 실제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실제가 없었다. 사람이 창조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안으로 취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실제, 혹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다. 사람은 실패했다. 그 후 주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다. 그분이 이 모양으로 죽으셨고 이 모양으로 부활하셨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그분을 쉽게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하여 얻었으며 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실제를 가질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의 공허한 생명을 실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양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이것이 변화이다. 결국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닮을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비밀의 계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또한 중심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형상이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의 생명과 실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는가를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결국 그와 우리는 하나로 연합되어 하나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모습과 표현이 되고 그는 우리의 실제와 내용이 될 것이다. 그와 우리는 하나 될 것이다. 그는 우리와 같고 우리는 그와 같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온 우주에 하나님을 나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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