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회학 관점에서 바라본 창조과학 운동
* 이 글은 본지 칼럼니스트인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가 지난 6일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종교사회학회 주최 '과학과 종교, 그리고 공공성; 개신교와 창조과학'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학술대회에서 조덕영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1. 들어가면서
성경의 창조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는 다양하다. 유대교,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이슬람교 등이 모두 성경의 창조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들이다. 이들 성경 창세기의 창조 계시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은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도 개신교의 창조과학운동은 아주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국내서는 1980년대 초반 시작된 이 운동이 한국창조과학회 임원 직분을 가졌던 포항공대 박 모 교수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내정을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알려지면서 과학과 종교에 대한 논란이 새삼스럽게 증폭된 면이 있다. 본 논고는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이 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창조과학 운동의 등장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창조 신앙과 창조론(Creationism)은 주로 성경의 창세기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창조과학 운동은 주로 창조과학자라고 불리는 일련의 과학자들이 주도하여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신흥 운동이다. 따라서 역사적 창조 신앙, 창조 신학, 창조론과 창조과학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창조과학 운동(Creation Science Movement)은 개신교의 근본주의 신앙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관심을 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뿌리를 둔 운동이라는 점만을 염두에 둔다면 복음적이다. 그런데 이 용어는 오늘날 그 의미가 축소되어 우주와 생명의 창조에 대한 연대를 극히 젊게(대략 6천년에서 1만년 내외로) 보고 성경의 창세기 대홍수를 문자적으로 믿는 견해로 바뀌어 있다.
이와 같은 창조과학 운동은 19세기 보수적인 개신교나 20세기 초 근본주의자들의 전통적인 믿음은 아니었다. 2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기독신학자들은 창조론에 관한 결론에 있어서 그리 성급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전의 보수적 개신교인들은 대부분 창세기 1장의 "날"(히브리어 "yom")이 지질학적 발전의 오랜 시대를 나타낸다고 믿거나, 아니면 세상의 첫 창조와 그 이후의 일련의 창조 행동 사이에 긴 공백이 있어서 그때에 화석이 형성되었다고 믿었다. 주류 기독교는 어거스틴(주후 354-430)과 루터(주후 1483-1546), 칼빈(주후 1509-1564)을 거치면서 성경이 단순히 정확무오한 과학교과서 같은 책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향해 눈높이를 낮추어 적응(accommodation)된 수사학적 책이라는 데 대해 그리 의심하지 않았다. 즉 오늘날 창조과학 운동이 내세우는 핵심적 주장들은 개신교 역사의 주된 입장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평신도 장로교인으로 미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서 세 번 낙선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 검사는 진화론의 반대편에 섰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과 관련한 재판으로 유명한 1925년 미 테네시주에서 있었던 스콥스 재판(Scopes Trial)를 주도했던 브라이언도 창조과학과 달리 지구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역사적 정통 주류 신학과 궤를 달리하는 창조과학적 사고가 시작된 배경에는 아무래도 열성적인 제 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일명 안식교, 약자로 SDA)의 영향이 크다 할 수 있다. 선지자 엘렌 G. 화이트의 계시 문서들을 충실하게 따르는 안식교의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는 지질학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결과물들을 ⌜새로운 지질학⌟(1923)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한다. 프라이스는 이 책에서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6,000-8,000년 전에 창조하였고 지구의 지질학적 과거는 성경의 대홍수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폈다. 프라이스는 훈련이나 현장 경험은 전혀 없는 독학의 지질학자였다.
3. 헨리 모리스의 역할
오늘날 개신교 창조과학 운동의 원조는 수력공학자였던 헨리 모리스(H. M. Morris, 1918-2006)라 할 수 있다. 남침례교도였던 모리스는 프라이스가 믿는 안식교(SDA)의 교리는 분명 수용하지 않음을 밝히면서도 자신이 창조과학에 눈을 뜬 데에는 프라이스의 공헌이 크다는 점을 자신이 쓴 "창조과학운동사"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모리스가 본격적으로 창조과학 운동에 몰두하기 전 미국에는 보수적 크리스천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1941년에 결성된 미국 과학 연맹(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ASA)이 있었다. ASA에서 잠시 활동하던 모리스는 은혜 형제 교단인 그레이스 신학교의 신학자 존 휘트콤(John C. Whitcom, Jr.)과 의기투합하여 「창세기 대홍수」(Genesis Flood, 1961)를 발간한다. 이 책은 프라이스 저작의 현대판이기는 하나, 휘트콤의 신학적 기여와 모리스의 과학적 전문 지식을 통해 프라이스의 논점을 좀 더 정교하게 제시한 책이었다. 이 책은 현대 지질학의 동일과정설(同一過程說, uniformitarianism)의 입장을 격변론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공저이기는 하나 책의 기여도에 있어 훨씬 핵심적인 부분(지질학에 대한 격변론적, 과학적 해석)을 맡았던 모리스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일약 창조과학 운동의 중심이 된다.
1981년, 한국에서 창조과학회가 설립되는 데에도 모리스는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오늘날 모리스의 저서들은 도서출판 생명의 말씀사 등을 통해 국내에서 꾸준히 번역되고 있다. 창조과학 운동과 그 논쟁에 있어 모리스의 영향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한국에서의 창조과학 운동
지난 1980년에 있었던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 기간 중 한 분과(分科)로서 '창조냐 진화냐'에 대한 세미나(8.12 ~8.15)가 4일간에 걸쳐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던 한국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CCC)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강사가 바로 미국 창조연구소(ICR)의 소장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와 탁스톤(Thaxton), 월터 브래들리(Walter Bradley), 듀안 기쉬(Duane T. Gish) 그리고 김영길(당시 KAIST 재료공학 교수)박사였고 일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통역 강사로 봉사하였다. 이때 참여한 외국 인사가 주로 미국 ICR의 핵심 멤버라는 데에서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도 시작부터 미국 창조과학 운동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세미나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학생, 일반인, 교역자, 과학자 등 연 4천 여 명이 참석하는 경이적인 모임이 되었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이 '기원의 문제'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당시 국내 강사로는 유일하게 참석하였던 김영길 박사(당시 KAIST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초대 회장 및 현 명예 회장)를 중심으로 외국 강사의 통역을 맡았던 국내 학자 등 크리스천 과학자 25명이 간담회를 갖고 국내에서의 창조과학회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게 되면서 1981년 1월 31일 국내 창조과학 운동이 첫발을 디디게 된다.
캠퍼스 선교단체인 CCC 총재였던 김준곤 목사의 적극적 후원과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적 특성상 창조 과학 운동은 한국적 풍토에서 아주 큰 반향과 강한 호응을 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국내 창조과학 운동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서울 홍릉 과학 단지에 근무하는 국외 유학파 과학자들과 국내 저명 대학 교수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과학이라면 신뢰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일반 대중들의 상식적 판단과 대부분 성경을 보수적으로 믿는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함께 맞물리면서 국내 창조과학운동은 순풍을 타게 되었다. 창조과학회는 명칭은 학술 단체 같은 성격을 가진 단체처럼 보였으나 대중 집회나 선교, 창조-진화 논쟁과 같은 대중적 운동에 치중하고 1990년 대 기독교계 일간지인 순복음 교단의 국민일보의 창간과 더불어 기독 언론의 지원과 주목을 받으면서 교회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관련 학자들의 회원 확보에 성공하게 된다.
5. 창조과학은 무엇인가(이 운동의 특징)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곧,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의 이론은 주로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설립을 주도한 헨리 모리스(H. Morris, 공학자)와 듀안 기쉬(D. Gish, 부회장 역임, 생화학자)로부터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그 신학적 신념의 목록 속에 다음의 내용들을 포함시킨다. 이 내용은 미 대법원이 참고했던 맥리안 대 아칸소 교육 위원회 소송 사건(Mclean v. arkansas Board of Education)의 지방법원에서 창조론 측의 공식 입장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1)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되었다.
(2)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3) 현존하는 종들은 고정(fixity of kinds)되어 있으며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대진화, Macroevolution)은 불가능하다.
(4) 원숭이와 인간의 조상은 다르다.
(5) 지질학적 형성은 (동일과정설이 아닌) 대격변(catastrophy, 즉 Genesis Flood)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산에서 바다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은 대홍수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6) 마지막으로 지구의 창조는 젊다. 즉 6000년 내지 1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 이렇게 창조과학의 핵심은 지구와 우주의 오래된 나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부정한다. 지구와 생명체들이 6천년에서 1만년 사이에 24시간이 하루일 때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주로 고수한다.
6. 창조과학운동은 과학적인가?-과학의 반증 가능성(反證可能性, Falsifiability)과 관련하여
반증 가능성이란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 방식 가운데 하나다. 즉 어느 가설이 반증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 가설이 어떠한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서 반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적 진술의 자격이 있으려면 반드시 반증될 여지를 구획의 기준으로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시험 가능성 또는 반박 가능성이라고도 한다. 종전에는 과학적 진술이란 단지 경험에 의해 그 진정성을 알 수 있다고 보았는데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고자 했던 칼 포퍼(Karl R. Popper, 1902. 7.28- 1994. 9.17)는 반증 가능성이 있는 진술이 과학적 진술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순수 존재론적 성격의 형이상학적 이론들, 프로이트, 아들러, 칼 융의 정신분석이론, 점성술 지식 같은 이론들은 반증 가능하거나 시험 가능하지가 않다. 이런 영역들은 과학적 영역이 아닌 유사과학(pseudoscience)에 속한다. 칼 포퍼에 따르면 창조과학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관측이 불가능하고 시험이 불가능하며 재현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반증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 된다.
따라서 창조과학이라는 말과 달리 창조, 창조신앙, 창조론, 창조신학, 기원에 대한 과학철학 등은 종교 언어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나 별 문제없이 쓸 수 있는 말이지만 "창조과학"이라는 말 자체는 스스로 언어적 모순과 충돌(반증가능하지 않은 초월의 '창조'와 반증가능한 내재적 '과학'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두 단어의 결합) 딜레마에 늘 부딪히게 된다. 창조과학은 언어적 충돌 뿐 아니라 <제1원인인 초월의 창조(causa prima)를 제2원인인 내재의 과학(causa secundae, instrumentales> 속(아래)에 묶어둠으로 창조에 대한 신학과 철학과 학문의 영역을 차단하고 폐쇄하여 스스로 <과학 서적이 아닌 성경>과 <과학이 전부가 아닌 신앙과 삶>에 대해 해석의 풍성함을 버리거나 잃게 될 가능성에 빠지게 된다. 베이컨이 말하는 자체 '동굴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창조과학의 영역이, 신앙 학문보다는 신앙 운동의 영역에 늘 머물고 신앙의 풍성한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7. 창조과학운동은 신학적인가?
탁월한 조직신학자였던 고(故) 스탠리 그랜츠는 모든 사람은 신학도(자)라고 했다. 다만 신학이라고 다 같은 신학은 아니라고 말한다. 바른 교회와 사이비 이단교회가 전혀 다른 것처럼 좋은 신학과 나쁜 신학, 바른 신학과 그릇된 신학 등이 있다. 따라서 그 신학의 도구와 출발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창조과학은 초월을 내재의 도구(피조세상의 도구, causa instrumentales)를 가지고 다루려는 신앙 학문이다. 초월과 관련한 창조와 창조론 이슈들을 다룬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sola scriptura)에 의존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반면에 창조과학은 말 그대로 과학에 의존한 신앙 운동이다. <반증 불가능한 창조>와 <반증 가능한 과학>이라는 단어를 엮어놓은 <창조과학>이라는 용어는 분명 충돌하는 두 단어가 결합한 것처럼 수많은 딜레마를 양산할 수 있다. 이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선동적인 나쁜 과학과 나쁜 신학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농후하다. 포퍼는 거짓임이 드러나도 선동가들은 임시 방편(ad hoc)의 보조 가설을 도입하여 논박을 피한다고 했다. 반박 당하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과학인 반면 점성술이 과학이 아닌 이유는 불리한 증거들이 나오면 반증을 피해버리는 "점쟁이 책략"을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논증은 휘튼대 출신의 역사학자 마크 놀이 잘 전하고 있다. 즉 (진리 계시가 아닌) "원리(과학)로부터 연역(deduction)하고자 하는 창조과학은 성경(초월 계시)과 관련해서는 베이컨주의를 잘못 적용했고, 자연(내재의 일반 은총)과 관련해서는 건전한 베이컨주의를 포기했다는 점이 비극"이라고 했다. 이 뼈아픈 평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앙의 <과학>도 결국 신학이다. "틈새를 메우는 하나님" 논리가 아닌 (반증 가능한) 정통학자가 되어 제도권의 학문을 바꾸든지 성경적 창조 신앙을 다루는 신학자가 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창조신학은 초월 계시로서의 창조주(causa prima)와 그 피조세계에 대해 계시를 기반으로 하는 신앙 학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초월을 한계를 지닌 내재의 도구를 가지고 함부로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그랜츠의 말에 따른다면 창조과학도 일종의 신학인 셈이다. 다만 그 신학이 좋은 신학인가 나쁜 신학인가 미숙한 신학인가는 검증받아야 한다.
8. 나가면서
이렇게 성경 신앙의 다양한 역사 가운데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창조과학 운동은 그 과학적 특성상 연륜이 대단히 미천한 신앙 운동의 한 분파라 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서 등장하여 한국적 신앙 풍토 속에서 빠르게 승승장구하던 창조과학 운동은 21세기 들어오면서 불안한 모습을 노정(露呈)하고 있다. 먼저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수많은 정보를 쉽게 확보할 수 있게 된 대중들은 더 이상 과학자들의 명성 자체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만큼 아주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게 되었다. 슬라이드 몇 장 가지고 해당 비전문분야 과학자가 교회에서 강연하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대중들은 너무 많은 반론들을 인터넷 세상에서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창조과학의 핵심 주장인 창조 연대와 우주 기원과 지질학과 다윈주의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신학과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된 것도 프로파겐다적인 교회 사역에 치중한 창조과학 운동의 위기를 자초한 면이 있다. 특별히 그렇게도 창조과학 회원 확보에 열심을 다했음에도 대부분의 크리스천 지질학자들과 천문학자들(예를 들면 지질학의 원로 양승영, 장기홍 천문학의 최승언, 이영욱, 우종학, 권영준 등)이 창조과학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창조과학의 치명적 딜레마가 되고 있다. 지질학과 천문학 분야가 특별히 그 어느 분야보다도 창조과학과 학문적으로 정면충돌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신학도 그리 우호적이지가 않다. 헨리 모리스에 반대한 성경과 과학에 모두 능한 침례교 조직신학자 버나드 램이나 20대 중반 옥스퍼드대에서 분자생물물리학 학위를 취득한 천재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 성공회 신부인 물리학자 존 폴킹혼, 이안 바버, 카톨릭 신앙의 존 호트, 칼빈대의 데이비스 영, 역사학자 마크 놀, 안식교 배경의 로널드 L. 넘버즈, 게놈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프랜시스 콜린스 등이 모두 창조과학에 대해 비판적이다. 20세기 신학을 이끈 칼 바르트에 따른다면 창조과학 류의 자연신학은 쓰레기 신학일 뿐이다. 신앙과 신학의 학문적 내공 축적은 등한시하면서 선교와 교회 대상의 세미나와 창조과학전시와 교육관 건립 등 프로파겐다적인 홍보 전략에 집중하던 창조과학 운동이 아날로그적 감성의 시대에는 일부 효과적이었으나 디지털 시대에는 심리적, 체력적으로 힘겨운 도전의 언덕을 올라야 할지 모른다. 결국은 치열한 학문적 내공을 쌓지 못한 결과다. 한국창조과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송모 박사의 예루살렘 회복 운동이나 임원을 역임한 손모 교수의 예언적 사역이 한국의 저명한 신학자나 정통 교단으로부터 이단적 운동이라고 비판받거나 교단 차원의 정죄를 받은 것도 창조과학 사역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모두 신학에 대한 무지와 냉소적 접근이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론(理論)이나 설(說)이나 직관(view)과 달리 학(學)문은 정교하다. 그리고 끝없이 정교해지고 있다. 따라서 창조과학도 무조건 현대 과학을 불신의 학문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검증 가능한 논문을 통해 스스로를 논증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과학적 진리라 여긴다면 예수 믿는 비전문가인 대중들을 상대로 로고스가 결여된 파토스와 에토스를 앞세워 호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에토스와 파토스가 앞서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마치 문제가 많고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공격하는 누를 범 할 수 있다. 과학도는 파토스가 아닌 진정한 전문가로서 권위 있는 관련 저널에 자신의 입장을 치열하게 피력해야 한다. 이것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면 오히려 성경으로 자연 과학을 희화화한다는 조롱거리가 되고 겟토화 되어 버릴 수 있다. 따라서 에세이 수준의 칼럼으로 과학에 무지한 기독교인들만 현혹한다는 비판과 조롱에서 벗어나서 창조과학도 이제는 진지한 연구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비전문가로서 전문 영역을 함부로 폄훼하거나 간섭하지 말고 관심이 있는 영역에 직접 전문가가 되어 논증에 나서야 한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전문가들을 편협한 사고로 무조건 반성경적, 타협론자, 무신론자라고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지양하고 정말로 전문과학회를 표방하고 지향한다면 앞으로는 관련 전문학자들(신학자, 천문학자, 지질학자, 생화학자 등)과 대면하여 진지한 대화와 토론에 친히 나서야 할 때가 이제는 되었다고 본다.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 D., 김천대-평택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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