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유다

[스크랩]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

하나님아들 2017. 12. 13. 12:44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간은 어떤 정치적인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 얻기를 구했

습니다. 저 먼 고대나  중세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최근의 세계 역사

를 살펴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 민족들은 물론 어떠한

웅변적인 연설문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 역시 정치적인 억압에서 벗어나

기를 갈구했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  왕을 찾아가 '멍에를 가볍게 해 주옵소서'

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때 르호보암  왕은 포악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희

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리라."


본문배경


솔로몬 왕은 아주 모범적으로 통치를 시작하여 그 영광과 명예와 권세가 극에 달

했으나 결국에는 비극과 비통 속에 치세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의

힘을 펼쳐 보이기 위해 주변 이방국가들과 많은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당시에

는 동맹을 맺은 나라의 왕이  또다른 동맹국 왕에게 자신의 딸을 주는 풍습이 유

행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솔로몬 왕

에게는 700명의 부인과 300명의 첩들이 있었습니다(왕상11:3). 솔로몬의 이방 아

내들은 그들이 섬기던 이방 신상들을 들고 이스라엘로 왔는데 어리석게도 솔로몬

은 그녀들이 자신들의  신상들을 숭배할 수 있도록  신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이방 아내들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쫓게 하였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온전치  못했습니다(왕상 11:4).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습

니다. 아주 호화스러운 생활을  좋아했던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

과하고 많은 이들로 그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중에 여로보암이라는

한 청년을 그들의 지도자격으로  세웠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을 떠나던 여로보

암은 과거  하나님의 멧세지를 자신에게 전달해  주었던 선지자 아히야를 들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아히야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12지파중 10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새옷을 취하여 12조각으로 찢고 그 조각중 10조각을 그에게

주었습니다(왕상11:26-31). 여로보암이 아주  위험한 적수로 부상하고 있음을 깨

달은 솔로몬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왕상11:40). 그러나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피신하여 솔로몬이 죽기까지 그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

보암이 왕좌에 올랐을 때  이스라엘 북방 사람들은 애굽에 있던 여로보암을 불러

와 르호보암에게로 보내 멍에를  가볍게 해 줄 것을 건의케 했습니다. 그러나 아

비야의 예언을 이루기나 하려는  듯 거만한 르호보암은 그 건의를 묵살해 버렸습

니다.


1.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행동(왕상12:13-15)


  대관식을 위해 세겜에 갔을  때 르호보암은 북쪽 지파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

데 그들은 그의 아버지  솔로몬 당시 부과되었던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르호보암은  3일 후에 그  요청에 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아버지 솔로몬을 모셨던  장로들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들은 백

성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왕의 명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지혜로운 조언을 했습

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조언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적인 경험이나 지혜가

없는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다시 구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백성에게 솔로몬 때

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우라고 충동질했습니다.


1-1. 르호보암의 포악한 대답(13, 14절)


13."왕이 포악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젊은 르호보암

의 어리석은 대답에 대해  읽을 때마다 우리는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세워 놓았던 이스라엘 제국의 통치권을 이제 거

의  빼앗겨 버릴 순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백성들을 관대하게 통치하겠

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장로들의 충언을 거절해 버렸던 것 같

습니다. 르호보암이 그같은  못된 성품을 갖게 된  데에는 솔로몬의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즉,  막강한 권력가의 아들로 성장했던  르호보암이 못된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합

니다. 그의 성장 과정 중 그에게 감히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모든 욕심은

충족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그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리 없습니다. 결

코 무거운 짐을 져보지 않았던 자가 짐을 지는 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르호보암의 이 비극적인 예를 오늘을 사는 모든 부모들은 하나의 경

고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래서 자녀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그 결과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복 받지 못한 다른 또래들에 대해 거의 무관

심 합니다.


14.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

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

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르호보암의 과거  경력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한  아버지의 죄가 아들대에 이르러

재앙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10지파에 대한

통치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부른 솔로몬의 어리석음은

아들 르호보암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르호보암은 암몬 여인 나아마와 솔로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왕상14:21).  따라서 르호보암은 무자비한 이방

인의 품성과 음모와 사치를  좋아하는 솔로몬의 첩들의 일반적인 특성을 한 몸에

지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르호보암이 북쪽

지파의 대표자들에게 보였던 무자비한 반응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 르호보암의 교만(15절)


15."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  르호보암의 교만한 행동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

이었습니다. 물론, 왕국의 분열은 이미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예언된 것이었습니

다. 그러나 그 비극을 맞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르호보암은 장로들의 충고를 따

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론 3일 후에 응답을 해 주겠

다고 약속했지만 백성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

리어 백성들의 마음을  더 자극시킬 수 있는  대답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자유롭게 택한 그 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성취하셨읍니다.


2. 백성들의 반응(왕상12:16, 17)


2-1 이스라엘의 반역(16절)


  왕의 오만한  말에 백성들은 즉각  만장일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백성들의

반응은 오랜 세월 동안 북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 존재했던 불화를 반영해 줍니

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넬이란 사람은 이스보셋(사울의 아들)을 경쟁자로 세

웠으며  북이스라엘과   베냐민까지도  얼마   동안  이스보셋을  추종했다(삼하

2:3-4,8-9). 그 후 모든 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왕으로 옹립하기까지 내전은 끊이

지 않았으며(삼하3:1,5:1-5), 그가  즉위한 후에도 세바를 따르는 반란군들이 있

었습니다(삼하20:1-2). 북방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미 르호보암에 대한 반역을 신

중히 검토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실은 그들이  이미 여로보암을 데려오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무거운 세금과 막중한 노

동을 부과했을 때 백성들의 마음에는 반역의 장작들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고,

르호보암 왕의 오만한 말이 그 장작 위에 불을 그어 댄 것입니다."이스라엘아 너

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외침입니다.(삼하

20:1). 항의했던 백성들은  이제 행동을 취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침은

왕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권고의 음성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제

반역을 평정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할지 모르는 르호보암을 생각하고 전쟁 준비

를 촉구하는 외침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2-2 유다 지파의 충성(17절)


17.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

더라."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을 단순히 르호보암에게 충성하기 위해 남은 유다

족속에 대한 언급으로 봅니다. 또 다른 주석가는 여기의 "이스라엘 자손"을 유다

영역 내의 도시에 거주하는  다른 족속들의 일부로 봅니다. 여기의 "이스라엘 자

손"에는 시므온 지파(수19:1-9)와 오랫동안 유다와 경계를 이웃했던 베냐민 지파

가 포함됩니다. 왕국 분열 이후 "이스라엘 자손"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같은 표

현은 거의 항상 북왕국 거민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3. 분열된 왕국(왕상12:20,26-29)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반란이  일어난 뒤 르호보암이 취한 행동은 솔로몬을 위

한 강제  노역의 감독이었던 아도니람을  파송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아도니람을 파송한 행위는 르호보암 쪽에서 취한 어떤 화해의 제스처였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르호보암처럼 오만한 자가 그처럼

빨리 올리브 가지를 내밀리  없기 때문입니다.(당시 사람들은 회해를 청할 때 올

리브 가지를 내밀었음).  아도니람을 파송했던 이유는 분명히 "전갈"로 다스리겠

다던 말을 상기시키기 위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아도니람이 어떤 의도에서 파송

되었든간에 백성들은 또 다른 억압이 시작되는구나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자 그

들의 끓어 오르던 분노가 폭발하여 돌을 던져 아도니람을 죽여버렸습니다. 그 소

식을 전해 들은 르호보암은 마차를 빨리 몰아 예루살렘으로 도망해 버렸습니다.


3-1 백성들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음(20절)


20."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돌아왔다함을 듣고 보내어 저를 공회로 청하여다

가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으니 유다 지파외에는 다윗의 집을 좇는 자가 없으니

라." 백성들은 여로보암을 이스라엘  북쪽 지파의 초대 왕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

는 솔로몬 때부터 왕가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그가 왕으로서 적격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로보암의 대관식이 어디서 거행되었는지 확

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 역사 가운데 유명한 지역인 세겜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해 봅니다. 백성들은  그 대관식이 가능한 한 좀더 합법적

인 대관식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왕국이 분열될 때 다윗의 지파

인 유다 지파만이 르호보암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훗날 베냐민 지파도 유다 지파

와 합세했습니다.(21절 참조).


3-2 여로보암이 백성들의 불충성을 염려함(26,27절)


26,27.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

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백성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여로보암은 좀처럼  백성 다스리기를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여로

보암은 세상에는 군사력보다 더  강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

었습니다. 백성들은  예배하러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습관을 하루 아침에 뿌리 뽑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의 독재자들이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교훈입니다. 러시아에서는

거의 70여 년 동안, 중공에서는 반세기 이상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말살

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엄격한 통제 속에서도 기독교는 계속 성

장해 왔습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한 예배 중심지와 한 제도를 인식하고 있는

한, 두  왕국의 상태로는 오래가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백성들이 갑자기 난폭해져서 자신을 거역하면 자신도 아도니람처럼 당

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배 행위를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배 행위를 변질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3-3 두 금송아지(28, 29절)


28,29.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여로보암은 그

문제를 놓고 자신의 정치 고문관들과 함께 최선책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그 결론

은 두  금송아지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직 세력을 규합하는  중에 있던 여로보암이 우상 숭배를 드러내고

도입시킨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대한 예배를 여전히 표방했

지만 금송아지란 가나안과 그곳  타 민족의 숭배 대상이었으므로, 결국은 실제적

인 우상 숭배로 이끌어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두 금송아지가 여로보암이 통치

하는 왕국의 남북 중심지에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인 벧엘에 그

하나를 두었는데,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야곱이 꿈을 꾼 바로

그곳이거나 그 근처에 위치해  있었습니다(창 28:10-22). 이 역사적인 성역이 정

치적 이권을 위해 더럽혀졌다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요. 다른 하나는 헤르

몬 산 기슭의 "단"이라는 성읍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북쪽에 사는 지파들에게 편

리한 곳이었습니다.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얼마나 영

리한 말인지요.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 하고 있으면서도 여로보암은 자

신의 행위가 그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믿게했습니다. 이같은 속임수는 오늘날에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 이끌려서 편리주의에 입각한

종교 결정을 합니다. 즉,  어떤 종교지도자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인간들의 편

익을 위해 어떤 명령을 내리고  순종을 요구할 때 너무도 쉽게 동의해 버리고 맙

니다. 교회 나가는 것이 귀찮으니까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 계신다는 주장을 가지

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고집합니다. 솔로몬이 이방 신상을 숭배했기 때문

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국에서 10지파를 분리해 내서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여호보암은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이스라엘 가운데 우상 숭배가 성행할 여

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집은 이스라엘 족속들로부터 끊기

울 것입니다(왕상14:7-11,20/15:25).

 

출처:비공개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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