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유다

[스크랩] 이스라엘의 분열

하나님아들 2017. 12. 13. 12:42
 


            이스라엘의 분열


 ■분열의이 배경과 그 원인 (왕상11:26-12:33)


 솔로몬에 의한 강경정책 특히 강제노동은  이스라엘로  불만을  갖게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만은 더욱 커졌으며 이러한 불만은 솔로몬의 탁월한  조

 직적인 행정으로 그 씨앗을 터트리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세겜에서 왕위 대관식을  갖게

 될때 온 이스라엘(북부지파) 과 여로보암은 르호보암에게 강제노동으로  싸

 인 불만을 호소하고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완화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르호보암은 부친과 같이 했던 노인들과 자기의 측근들과 상의를  한

 후노인들의 안건을 버리고 소년들의 안건대로 더욱 강경책을 채택하여 그들

 의다시 왔을 때 " 나의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왕상12:14) 하였다" 하면서 르호보암의 역군의  감독인

 아도니람을 죽이고 (이에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으로 도망) 솔로몬 당시에 요

 셉족속의 감독관이었다가 아히야 선지자의  예언(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

 는것) 사건으로 애굽의 시삭(애굽 제22왕조의 창시자)에게 망명해 있던  여

 로바암을 공회로 청하여 왕을 세워 북이스라엘의 제1대 통치자로  삼았으니

 이로써 찬란했던 통일왕국은 얼마가지 못하고 분열의 비극을  맞이해야  했

 다.


 왕국이 분열되어 여로보암이 북부에서 왕이 되자 르호보암은  북쪽지파와

 싸워 온 이스라엘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스마야 선지자의 충고를 듣고  싸움

 은 하지 않은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서에서 보여주는 것처럼대규모의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

 라도 양자 간에는  산발적인 전투가계속되었으며 그것은 분열 초창기에  겪

 을 수 있는 남북간의 국경선을  정하는 성경의 전투였다 그러므로 북  이스

 라엘의 여로보암과 남 유다의 르호보암 사이에 경계를 갖고 있던 베냐민 지

 파의 영토는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그 경계선 상에 있었기  때문에

 르호보암은 베냐민지역의 상실은  수도를 매우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베냐민 영토를 점령하려는 조처를 취했고 마침내   베

 냐민지파의 북쪽 경계선  부근으로  경계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대하

 11:10)한편 북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된 여로보암은 왕이 되지 마자 에브라임

 지파의수도라고 볼 수 있는 세겜성을 건축하고 수도로 삼아 이스라엘을  다

 스렸다.


 그러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서 제사를 드리러 내려갈 것을   두

 려워 하여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제사케  하였으며  산당

 을짓고 레위인이 아닌 일반적인으로 제사장을 삼는 잘못된 정치를 하여  많

 은백성들과 제사장들이 남 유다로 망명을 하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써북이스라엘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남 유다로 망명을 하게 되는 점

 차강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스라엘의 분열은 다윗과 솔로몬 당시 가졌던  여러  도시는  갓을

 제외하고는 (대하 11:8)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이스라

 엘로 하여금 국경 부근의 전투로 인해  바쁘게  만들었고(왕상15:27,16:15)

 동쪽에 있던 암몬과의 결합은 최소한 지리적으로 파괴되었고 그들은 유다에

 대한 충성을 할 의무를 지지 않았다.


 북 이스라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미 솔로몬 당시 독립국가로  형성

 되었으며 다메섹(왕상 11:23-25) 은 점차 세력이 커지면서 아람족속의 왕국

 이형성되어 점차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다. 그러나 모압은  아

 직까지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쳤던 것 같다.


 결국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이류국가로 전락해 버리고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어려운 고비를 겪어야만 했다.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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