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분열
■분열의이 배경과 그 원인 (왕상11:26-12:33)
솔로몬에 의한 강경정책 특히 강제노동은 이스라엘로 불만을 갖게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만은 더욱 커졌으며 이러한 불만은 솔로몬의 탁월한 조
직적인 행정으로 그 씨앗을 터트리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세겜에서 왕위 대관식을 갖게
될때 온 이스라엘(북부지파) 과 여로보암은 르호보암에게 강제노동으로 싸
인 불만을 호소하고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완화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르호보암은 부친과 같이 했던 노인들과 자기의 측근들과 상의를 한
후노인들의 안건을 버리고 소년들의 안건대로 더욱 강경책을 채택하여 그들
의다시 왔을 때 " 나의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왕상12:14) 하였다" 하면서 르호보암의 역군의 감독인
아도니람을 죽이고 (이에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으로 도망) 솔로몬 당시에 요
셉족속의 감독관이었다가 아히야 선지자의 예언(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
는것) 사건으로 애굽의 시삭(애굽 제22왕조의 창시자)에게 망명해 있던 여
로바암을 공회로 청하여 왕을 세워 북이스라엘의 제1대 통치자로 삼았으니
이로써 찬란했던 통일왕국은 얼마가지 못하고 분열의 비극을 맞이해야 했
다.
왕국이 분열되어 여로보암이 북부에서 왕이 되자 르호보암은 북쪽지파와
싸워 온 이스라엘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스마야 선지자의 충고를 듣고 싸움
은 하지 않은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서에서 보여주는 것처럼대규모의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
라도 양자 간에는 산발적인 전투가계속되었으며 그것은 분열 초창기에 겪
을 수 있는 남북간의 국경선을 정하는 성경의 전투였다 그러므로 북 이스
라엘의 여로보암과 남 유다의 르호보암 사이에 경계를 갖고 있던 베냐민 지
파의 영토는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그 경계선 상에 있었기 때문에
르호보암은 베냐민지역의 상실은 수도를 매우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베냐민 영토를 점령하려는 조처를 취했고 마침내 베
냐민지파의 북쪽 경계선 부근으로 경계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대하
11:10)한편 북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된 여로보암은 왕이 되지 마자 에브라임
지파의수도라고 볼 수 있는 세겜성을 건축하고 수도로 삼아 이스라엘을 다
스렸다.
그러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서 제사를 드리러 내려갈 것을 두
려워 하여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제사케 하였으며 산당
을짓고 레위인이 아닌 일반적인으로 제사장을 삼는 잘못된 정치를 하여 많
은백성들과 제사장들이 남 유다로 망명을 하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써북이스라엘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남 유다로 망명을 하게 되는 점
차강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스라엘의 분열은 다윗과 솔로몬 당시 가졌던 여러 도시는 갓을
제외하고는 (대하 11:8)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이스라
엘로 하여금 국경 부근의 전투로 인해 바쁘게 만들었고(왕상15:27,16:15)
동쪽에 있던 암몬과의 결합은 최소한 지리적으로 파괴되었고 그들은 유다에
대한 충성을 할 의무를 지지 않았다.
북 이스라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미 솔로몬 당시 독립국가로 형성
되었으며 다메섹(왕상 11:23-25) 은 점차 세력이 커지면서 아람족속의 왕국
이형성되어 점차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다. 그러나 모압은 아
직까지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쳤던 것 같다.
결국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이류국가로 전락해 버리고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어려운 고비를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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