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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유주의적 신학자들

하나님아들 2017. 10. 6. 23:58

자유주의적 신학자들

 

(1)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Friedrich Daniel Ernst, 1768, 11. 21- 1834. 2. 12)
쉴라이에르마허는 독일의 철학자, 신학자, 브레슬라우에서 출생. 근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바비의 모라비아파 신학교(1785-86)와 베를린 게디케신학교(93)에서 수학한 후 베를린 카리테의 개혁교회 설교자로 봉직했다(96-1802). 그는 형이상학이나 도덕에서 구별된 직관과 감정에 의거한 독특한 체함으로 종교를 파악했으며, 정통주의나 계몽주의와는 다른 근대주의 신학을 확립,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설령을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전공동체에 골고루 스며 있는 영으로 간주하고, 교회와 세계의 합일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을 야기시키는데, 보이는 교회는 오류에 빠져 있고 세계의 영향으로 인해 분열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이고 절대 무류하다고 주장한다.

(2) 리츨(Ritschi, Albrecht Benjamin, 1822. 3. 25- 1889. 3. 20)
리츨은 독일 무터파 조직신학자. 베를린에서 출생. 본. 할레대학에서 수학한 후 하이델베르크에서 로데에게, 튀빙겐에서 바우어에게 각각 사사하였다. 본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고(46) 괴팅겐대학 조직신학교수로 취임했다(64). 초기에 바우어의 역향하에서 역사에 관힘을 두었으나 헤겔적인 사변적 역사이해를 지닌 바우어를 극복, 철학적 관념론의 침투로부터 신학을 구한다는 면제가 그의 신학에 있어 주된 명제가 되었으며, 이는 1800년대 후반 독일과 영국, 미국에 이르기까지의 신학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괴팅겐에서 사망했다.

(3) 홀츠만(Holtzmann, Heinrich Julius. 1832-1910)
그는 독일의 신학자, 신약학자, 칼스루헤에서 출생. 베를린에서 수학후, 바덴에서 목회를 하였고(1854), 하이델베르크대학(58-73), 쉬트라스 부르크대학(74- 1904)에서 신학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공관복음서 연구에 있어 마가복음의 우선성을 강조했으며, 그리스도의 자의식의 심리학적 발전과정을 서술하고 예수의 가르침 속에 있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을 배제시켰다.

(4) 벨하우젠(Wellhausen, Julius, 1844-1918)
그는 독일의 성경비평학자, 동양학 연구가. 하멜론에서 출생. 괴팅겐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괴팅겐대학에서 사강사(1870). 그라이프스발트대학에서 수약학교수(1872). 할레대학에서 셈어학 사강사(1882). 마르부르크대학(1885-92)과 괴팅겐대학(1892-1913)의 셈어학 교수를 역임했다. 오경내에 있는 여러 복함자료들의 연대 문제의 비교연구에 관한 그의 논문을 구약역구를 완전히 변형시켜 놓았다. 한편 만년에는 같은 노선을 따라 신약의 비판적 연구에 전력했는데, 특히 복음서에 대한 그의 주석은 후대의 양식비평 발전에 많은 윤곽을 제시해 주었다

(5) 헤르만( Hermann, Wilhelm 1846. 12. 6-1922. 1. 3)
헤르만은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 동독의 멜코우에서 출생. 할레대학에서 수학한(1866) 후 동 대학 강사(75). 마르부르크대학 교수(79)를 지냈다. 칸트 철학과 역사적 그리스도론을 근거로 해서 예수의 생활이야말로 신앙의 근거라 하여 예수와의 인격적, 윤리적, 체험적인 만남을 역설했다. 리츨학파에 속하며, K. 바르트와 R, 불트만에게 영향을 끼쳤다.

(6) 두움(Duhm, Bernhard, 1847-1928)
두움은 독일의 구약학자. 오스트프리슬란트의 빙굼에서 출생. 아우리히에서 수학하고 괴팅겐대학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후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1877). 그 후 바젤대학의 정신교수로 임명되었다(1888). 무엇보다도 그는 우수한 예언서 해석자였다.

(7) 하르낙(Harnack, Adolf von. 1851. 5. 7-1930. 6. 10)
그는 독일 신학자, 교회사가, 도르파트에서 출생. 라이프찌히. 기센. 마르부르크 대학 교수를 거쳐 오핸 동안 베를린대학 교회사 교수(1889-1921)를 지내며 동 신학부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높였다. 한편 프로이센학사원 회원(1890). 프로이센국립도서관장(1905-21). 카이저. 빌헬름학술진흥협회 총재(11)를 역임했다. 영지주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교회사 전 분야에 걸쳐 치밀하게 연구, 기독교의 역사적 이해를 엄밀하고 깊이 있게 했으나 동시에 그러한 입장과 방법의 문제성을 노출시켰다고 평가된다.

(8) 쉬미델(Schmiedel, Otto Moritz 1858-1926)
그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라이프찌히대학, 예나대학에서 수학하고, 독일보급복음신교전도회 선교사로 일본에 파견되어(1887) 독일학협회학교 및 신교신학교 교수를 지냈다. 귀국하여(92) 바이마르 근교에서 목회활동 후 김나지움 교수가 되었다(95) 대표적인 논문은<인스피레이션>.<기적론>등으로, 성경의 측자영감설에 반대했다.

(9) 라우센부쉬(Rauschenbush, Walter. 1861-1918)
그는 미국 사회복음주의 신학자. 뉴욕의 독일인 가정에서 출생. 로체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의 독일침례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교회 주변의 빈민가를 목격하고 사회개혁운동을 벌이기 시작햇으며 1891년 영국에 가서 사회운동을 연구했다. 1892년 천국형제회를 조직,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전하기 시작했으며, 1897년부터 로체스터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경건주의 독일 침례교의 영향과 자유주의 신학 및 칼빈주의 개혁신학에 영향을 받아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강조하였다. 스스로를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지칭하였으며, 노동. 경제질서 등의 사회적 문제를 적극 수용해 해결함으로써 기독교 윤리에 근거한 사회절서 창출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0) 화이트헤드(Whitehead, Alfred North. 1861. 2. 15-1947. 12.30)
화이트헤드는 영국 철학자, 수학자, 림즈게이트에서 출생.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동 교 수학 강사(1885-1911), 런던대학 응용수학교수(14-24), 하버드대학 철학교수(24-37)를 역임했다. 그의 연구활동은, 기호논리학연구와 기초수학론의 이론주의완수를 추구한 제1기, 자연과학, 특히 생리학의 철학적 기초 연구를 추진한 제2기, ‘유기체철학’을 주장한 제3기로 분류할수 있다. 그는 생성이 존재, 무한, 영원과 함께 하나님의 한 속성이라 했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주의 공동 창조다”이며, 따라서 그 창조는 계속적인 진화과정이다. 주요 저서로는 <The Principle Mathematic>(3권, 10-13), <Process and Reality>(29)등이 있다.

(11) 우찌무라 간죠( 1861-1930)
그는 일본의 독립전도자, 무교회주의 창시자, 에도의 다카자키 제후의 가문에서 출생. 삿포로농업학교(1881), 미국 애머스트대학(84), 하트포드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귀국 후 제일고등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91년 교육칙어(敎育勅語)에 대한 불경사건으로 해적되었으나(1901) 자택에서 매주 일요일 성경강의를 하고 소책자<무도회>를 발행했다. 가시와키에 머물면서 저술활동 및 무교회주의 운동을 펼쳤으며 특히, 한국의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함석헌. 최태용은 그의 제자로 한국 무교회주의 연원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홍수 이전기>. <구약 10년>. <우찌무라간죠 전집>. <우찌무라간죠 성서주해전집>등이 있으며 영문잡지. 영문저술도 남겼다.

(12) 궁켈(Gunkel, Hermann, 1862-1932)
궁켈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성경신학자. 괴팅겐(1888). 할레(1889)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기센(1907), 할레(1920) 대학에서 구약신학교수를 역임했다. 종교사학파의 주도적인 인물이며 양식사의 선구자다.

(13) 트뢸취(Troeltsch, Ernst. 1865-1923)
트뢸취는 독일 신학자, 철학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 괴팅겐. 본.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수학했고 1915년 이후 베를린대학 교수로 철학사와 문명사를 강의했다. 신학으로는 리츨의 영향을 받았고, 철학으로는 빈델반트. 리케르트 등의 신칸트 철학에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 이해와 문화 해석에서는 딜타이에게 영향을 받았다. 역사주의(histoticism)개념에 입각한 과학적 역사연구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윤리. 종교의 절대적 가치와 역사의 상대적 가치 사이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4) 매킨토쉬(Mackintosh. HUGH ross. 1870. 10. 31-1936. 6, 3)
그는 스코틀랜드 신학자. 에든버러대학. 마르부르츠대학 등지에서 수학하고 1897년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아 애버딘에서 목회하였다. 1904년 에든버러대학 뉴칼리지 교수가 되어 조직신학을 강의했는데,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였다. 연합자유교회와 스코틀랜드교회 합동을 추구하여 1932년 연합된 그코틀랜드 교회 총회장이 되었다. 주요 저서는<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 (1912), <The Christian Experience of Forgiveness>(1927), <Types of Modern Theology>(1937)가 있다.

(15)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Pierre. 1881-1955)
샤르댕은 프랑스의 가톨릭게 신학자, 철학자, 인류학자. 오베르뉴에서 출생. 예수회 회원으로 빠리 가톨릭학원에서 강의했고(1920). 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으며(50). 뉴욕 웨나그렌연구소에서 인류학 연구에 힘썼다(51). 생물학. 인류학에 입각한 철학사상을 주장해 세계의 비전에 일치되는 인간정신을 내세웠다. 그리고 진화가 노리는 인간의 뚸어난 위치를 주장해 진화론을 인정했지만 그 도달점이며 창조의 끊임없는 진보의 추진자로서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주장한 ‘진화자로서의 그리스도’다.

(16) 디벨리우스(Dibelius, Martin. 1883-1947)
그는 독일의 성경학자. 드레스덴에서 출생. 너셔델. 라이프찌히. 튀빙겐. 베를린 등지에서 수학했고, 베를린대학 사강사로 재직하다가(1910-1915). 하이델베르크에서 신약주석 및 비평학 교수로 일생을 바쳤다. 그는 열렬한 에튜메니칼운동의 지지자였으며 “신앙과 직제위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약학 분야에서 양식비평학적 연구의 선구자이다.

(17) 볼트만(Bultmann, Rudolf Karl. 1884. 8. 20-1976. 7. 30)
볼트만은 독일의 신약학자. 비펠쉬테트에서 출생. 튀빈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여러 대학의 강사로 있다가 마르브르크대학 신약학 교수로 일했다(1921-51). 그는 신약의 본문을 역사적인 것보다 역사적인 것보다 신화적인 것으로 보고 신약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했으며,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 예수보다 초월적인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신약의 양식사적 연구를 개척했으며 변증법적 신학운동의 한 추진자였고 비신화화른을 제창해 20세기에 큰 반항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영향하에서 불트만학파까니 성립되었다.

(18) 불로호(BLoch, Ernst. 1885. 7. 8-1977. 8. 4)
그는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트비히스하펜에서 출생. 저서를 통해 유토피아의 사회적 의의를 추구하고 전체주의에 반대. 나찌시대에 마르크스대학 교수를 니내다가 서독으로 이주하여(61) 튀빙젠대학 교수가 되었다.

(19) 바르트(Barth, Karl. 1886. 5. 10-1868. 12. 9)
그는 스위tm 신학자. 바젤에서 출생. 부친(Fritz Barth, 1856-1912)도 베른대학 신약학. 교회사 교수였다. 독일 베른, 베를린, 튀빙젠.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09년 이후 제네바, 자펜빌에서 목회했다. 21년 괴팅겐대학 교수로 출발하여 뮌스터대학(25), 본대학(30)을 거쳐 35년 이후 바젤대학에서 62년 은퇴하기까지 개혁파신학을 강의했다. 대학 재학시절 하르낙. 헤르만. 등에게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고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1차세계대전을 체험하고 자펜빌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면서 사회주의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가 신학적 명성을 얻게된 것은 19년 로마서 주석<Der Romerbriet>를 출판하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하나님의 절대타자’를 강조하여 자유주의 신학으로 만연되었던 당시 유럽 신학계에 충격을 던졌다. 그는 하르낙과의 논쟁을 거쳐 계시신학이라는 새로운 근대신학의 영역을 개척했고 두르나이젠. 불트만. 고가르텐. 브룬너. 메으츠등 신학자들과 ‘변증법적 신학파’를 형성하였다. 신학적으로도 고가르텐과 결별하였고 브룬너롸의 자연신학 논쟁을 거쳐 계시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주장하였다. 흔히 ‘신정통주의신학’으로 불리는 그의 신학은 유럽뿐 아니라 전후 한국 신학계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 틸리히(Till도, Oaul. 1886. 8. 20-1965. 10. 22)
종교와 문화의 영역을 조명하고 함께 연결시킨 20세기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는 그의 출생지인 독일뿐만 아니라 후일 그가 정착했던 미국에서도 그 새대의 지적 생활의 중심인물이었다. 대학에서 연구가 끝날 무렵 르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틸리하는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군목으로 일했다. 이 전쟁은 그 전쟁의 대학살과 물질적인 파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19세기 휴머니즘의 붕괴와 지도적 원리로서 자율의 타당함에 대한 회의의 증거로서 그에게 산산이 조각나는 경험을 주었다. 전후 독일의 혼돈 상황은 서구문명이 실로 시대의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확신을 그에게 주었다. 그의<Systematic Theology>의 발간은 사상가로서의 한 평생의 결과를 의미있게 만들었다. 이 저술의 참신한 특징은 그「상관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신학을 인간의 탐구적인 이성에 의해 야기된 질문을 계시적인 체험으로 주어지고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대답들-자율의 질문에 대한 신율의 대답들-과 관련시키는 대화로 만든다. <Systemtic Theology>의 대화는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분은 전체로서의 조직내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는 통속적 기독교의 신인동형론적인「인격적 하나님」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인습적인 무신론자들처럼 하나님의 실재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죽었다」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틸리히를 인용하는 오늘날의「기독교적 무신론자」들은 틸리히가 하나님에 대한 부적합한 개념의 소멸이 하나님에 대한 보다 웅대한 이상의 시작이라고 말한 사실을 간과하였다.

(21) 고가르텐(Gogarten, Friedrich. 1887-1967)
그는 독일 개신교 신학자. 도르트문트에서 출생. 피히테에 관한 논문으로 명성을 얻고(1914) 스텔첸도르프(1917)와 도른도르프(1925)에서 목회생활을 했고 예나대학(1927), 브레슬라우대학(1931). 괴팅겐대학(1935-53)에서 교수행활을 했다. 초기에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에 몰두하다가, 경국 국가사회주의의 종교철학에 매료되어 독일국가교회의 대표적 신학자가 되었다.

(22) 브룬너(Brunner, Emil. 1889. 12, 23-1966. 4. 6)
브룬너는 스위스의 신학자. 빈터투르에서 출생. 쮜리히와 베를린대학 및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쮜리히대학(1924-53)과 일본국제기독교대학(53-55)에서 교수를 지냈다. 바르트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운동을 전개했으나 자연신학 논쟁으로 그와 결별했다.
그는 신 중심적 계시신학을 주장하고 자연신학을 제창해 계시와 이성의 관계를 중시했으며, 윤리학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인격주의적인 사상을 강조했고, 바르트의 객관주의 신학과 불트만의 주관주의 신학을 넘어신 ‘신과 인간의 만남’의 신학을 주장했다. 두 번(1949.50) 한국을 방문해 강의함으로써 유럽 신학자 중 처음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한국 자유주의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23) 니버 (Niebuhr, Reinhold. 1892. 6. 21-1971. 6. 1)
그는 미국 신학자. 사회윤리학자. 독일계 복음주의 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예일대학에서 신학을 배웠다. 1915년 복음주의교회 목사가 되어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28년 뉴욕의 유니언신학교 교수가 되어 60년 은퇴하기까지 봉직했다. 신학적으로 바르트(K. Barth)와 브룬너(E> Brunner)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1920년대 미국에서 풍미했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며 성경계시에로의 회귀를 강조하였다. 그는 원죄 교리를 재강조하였으며, ‘생명력있는 예언적 소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바르트 신학과 구별된다. 그는 미국이라는 사회. 정치적 구조 속에서 영향력있는 판단기준으로서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주창했다. 그의 신학은 기독교계뿐 아니라 일반 정치. 사회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미국 신학자 중의 사람이었다. 주요 저서로는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1941-43),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iblems>(1954).<Man's Nature and his Commu- nities>(1965)등이 있다.

(24) 김재준(金在俊, 1901-1987. 1. 27)
그는 장로교 목사, 신학자, 호는 장공(長空). 함북 경흥에서 출생. 송창근의 전도로 입교하여 일본 아오야마 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웨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수학했다.「<신학지남>의 필화사건」을 야기하면서 신신학자로 부상하였으며, 조선신학원 교수, 조선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신학노선의 문제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분립하였으며, <십자군>. <제3일> 등의 신학잡지를 발행하여 자신의 신학사상을 대변했다. 경동교회에서 목회한 바 있으며. 69년부터 한신대학 이사장, 기장총회장을 역임하였고, 조직신학과 윤리학 분야에 많은 역서와 저서를 남겼다. 말년에는 교편과 목회에서 은퇴하여 현실참여운동에 직접 간여하였다.

(25) 쿨만(Cullmann, Oscar, 1902-)
쿨만은 독일의 신학자, 성경학자, 스트라스부르에서 출생. 스트라스부르. 빠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스트라스부르대학(1930). 바젤대학(38)교수를 거쳐 48년 이후로 빠리대학의 개신교 신학부 교수직을 겸임해 왔다. 그의 학문 활동 분야는 성경신학 분야로서, 특별히 그는 구속사론을 발저시켰다.

(26) 플레처(Fletcher, Joseph, 1905. 4. 10-)
플레처는 뉴저지주의 뉴어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웨스트 버지니아대학(B. A.), 버클리신학대학(B. D.), 예일대학, 런던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선 목회에 종사한 후 케임브리지의 에피스코팔신학대학에서 사회윤리학 평교수로 재직하였다(1944-70). 그리고 그는「상황윤리」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변자들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현재 그는 버지니아 의과대학에서 의학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27) 본 회퍼( Bonhoeffer, Dietrich. 1906. 2. 4-1945. 4. 9)
그는 독일의 고백교회 목사, 신학자, 브레슬라우에서 출생. 튀빙겐. 베를린대학, 뉴욕유니언신학교(30-31)에서 수학한 후 베를린대학 조직신학 강사가 되었다. 바르트와 함께 고백교회를 이끌면서 반나찌활동을 벌였고 43년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45년 플로쎈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의 기독교의 역할, 국가간의 평화와 교회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운동, 히틀러 암살계획의 동참, 교회갱신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라는 말로 표현된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 등으로 20세기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준 신학자였다.

(28) 에벨링(Ebeling, Gerhard. 1912-)
에벨링은 독일의 신학자. 베를린에서 출생. 바르부르크,쮜리히,베를린 등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쮜리히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1938) 고백교회의 목사로 시무했다.(39-45). 1946년 튀빙겐대학에서 교회사강의를 시작으로 동 대학에서 조직신학(54) 및 쭈리히대학에서 신학사와 신조학(56)을 강의했다. 그의 기독교신앙 이해는 곧 인간이해라고 전제, 하나님과 인간은 두 주체가 아닌 하나의 주체라고 주장한다.

(29) 가로디(Garaudy, Roger. 1913. 7. 17-)
그는 프랑스 철학자, 마르크스주의자. 마르세뉴에서 출생. 프랑스공산당 중앙위원(45), 국회의원(45), 끌레르몽대학(62), 뽀아디에 대학(65)교수를 역임했으며, 기독교와 공산주의 사이의 대화를 시도했다.


(30) 로빈슨(Robinson, John Arthur Thomas, 1919. 6. 15-1983. 12. 5)
로빈슨은 영국성공회 주교, 신학자. 캔터베리에서 출생. 브리스톨에서 목회(1945-48)하였고, 웨일즈신학교 교목(45), 케임브리지대학 클레어칼리지 학장(51-59), 울리치 주교(59), 서섹주교(69),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 학장(69)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신에게 솔직이》(Honest To God, 1963), 《The Body》(1952) 등이 있다.

(31) 반 뷰렌(Van Buren, Paul. 1924. 4. 20-)
그는 미국의 교육자, 신학자. 노오퍽에서 출생. 하버드대학교(1948). 성공회신학교(51), 바젤대학교(57)에서 수학했고 성공회의 신부로 서품되어(51) 사역한 후 사우드 웨스트의 성공회신학교 부교수(64), 템플대학교의 교수(66)를 지냈다. 그는 기독교의 사상적 전통과 분석철학과의 종합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의 신학의 경험적 방법론은 인식적 명제와 비인식적 명제를 구분하는 데서 발견되다. 주요 저서로는 《Christ in our Place》(1957), 《The Secular Meaning of the Gospel》 (1963)이 있다.

(32) 콥 (Cobb, John Boswell. 1925. 2. 9-)
콥은 미국 과정신학자. 일본 코오베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출생. 사우드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로 (52), 화이트헤드 철학을 신학에 도입하여 신과 세계의 유기적 관계를 역설했다. 주요 저서로는 《A Christian Natural Theology》(1965)가 있다.

(33) 카우프만(Kaufmann, Gordeon Dester. 1925. 6. 22-)
그는 미국 조직신학자. 캔자스에서 출생. 메노나이트파 목사안수를 받았으며(1953) 밴더빌트대학교수를 지낸(58-63) 후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다(63). 주요 저서로《God the Problem》(72)이 있다.

(34) 세군도(Segundo, Juan Luis. 1925. 10. 31-)
그는 우루과이 신학자. 몬테비데오에서 출생. 루벵대학, 빠리대학을 졸업하고, 몬테비데오 페테르파베르 주교센터 소장이 되었다. 해방신학을 주창했다. 주요 저서로는 《Theology for Artisans of a New Humanity》(1973)가 있다.

(35) 몰트만(Moltmann, Jurgeon. 1926. 4. 8-)
그는 1960년대 이후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함부르크에서 출생.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수용소생활을 했으며(45-48)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52) 뷔페 르탈대학의 교수가 되었다(58). 그는 현대신학에 있어서 소망의 신학이라는 종말론을 제창한 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신학에서 계시 이해의 발판을 구축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Theologie der Hoffnung>(1964 : '소망의 신학‘, 1973한역)은 20세기 케리그마신학의 조류를 거슬러 그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이 소망의 신학이 지향하는 중심점은 혁신, 정치적 해석학, 창조적 제자직과 같은 예수의 부활과 미래에 그 핵심을 두고 있다.

(36) 알타이저(Altizer, Thormas Jonathan Jackson, 1927. 9. 28-)
그는 미국 성공회 신학자, 종교학자, 매사추세츠에서 출생, 시카고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엘리아데, 틸리히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메모리 대학교수(1956-68)를 거쳐 68년 이후 뉴욕 주립대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1960년대「신의 죽음의 신학」의 기수로 대표적 저술로는 <Oriental Myst- icism and Biblical Eschatalogy>(1961), <The Gospel of Christian Atheism>(1966), <Radical
Theology and the Death of God>(1966), <The Self-Embodiment of God>(1977)등이 있다.

(37) 판넨베르크(Pannenberg, Wolfhart. 1928. 10. 2-)
그는 독일 신학자. 쉬테딘에서 출생. 베를린, 괴팅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수학했고 뷔페 르탈(58-61), 마인쯔(61-67), 뮌헨(67-)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실존주의신학과 대조적으로 역사의 흐름과 그 전체적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역사의 의미와 목적은 역사의 종말로부터 파악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의 종말과 목적의 성취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로서만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38) 킹 (King Martin Luther, Jr. 1929. 1. 15-1968)
그는 미국 침례교 목사, 흑인민권운동가, 애틀란타에서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 보스턴대학을 졸업했고, 1954년 침례교 목사가 되어 몽고메리 텍스터에브뉴 침례교회를 맡게 되었다. 55년 12월 1일 흑인인 파크스부인이 버스좌석을 백인에게 양보하기를 거절하자 인종결리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몽고메리 인권개선협회가 결성되었다. 이 협회 지도자가 된 킹은 버스 승차 거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60년에는 교회를 사임하고 민권운동에 전념하였다. 63년 버밍햄과 워싱터에서 흑인차별 반대 집회를 개최하여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케네디가 그를 지원했으며, 마침내 64년 고용과 시설이용에 있어 흑인차별제도를 폐지한<시민권리 법안>이 통과되었고 그 해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계속에서 플로리다・앨라배마・미시시피 등지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그의 투쟁방법론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흑인 과격분자들과 백인들에게 배척을 받았고 결국 멤피스에서 남부 출신 백인 레이(J. E. Ray) 에게 살해되었다. 그가 쓴 책으로는 《Stride Tow- ard Freedom》(58), 《Why We Can't Wait?》(64), 《Where Do We Go From Here, Chaos or Community?》(67) 등이 있다.

(39) 콕스( Cox, Harvey Gallagher 1929. 5. 19-)
그는 미국의 신학자. 펜실베니아주에서 출생. 펜실베니아 주립대학(1951), 예나대학 신학부(55)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 신학부로부터 《Religion and Technology》로 박사학위를 받았다(63). 앤도버 뉴튼신학교 교수(63-65), 하버드대신학교 교수(70)등을 역임하면서 세속화 신학의 선구자로서 활약, 문화의 자율, 그리스도에 의한 세속 내의 변혁 등의 신학적 주장을 전개했다. 주요 저서로는 《The secular City》(65), 《God's Revolution and Man's Responsibility》(65)등이 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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