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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켄 윌버의 철학에서 과학과 종교의 통합*

하나님아들 2016. 6. 15. 00:00

켄 윌버의 철학에서 과학과 종교의 통합*

박 정 호**인제대학교 인문문화학부 교수.

요 약 문
근대 이래 과학은 사실과 진리의 영역을, 종교는 가치와 의미의 영역을 담당하며 갈등과 분열을 일으켜왔다. 과학기술 문명은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고 있고 종교는 전근대적인 신화적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근대 과학과 전근대 종교의 통합은 현대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급선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켄 윌버의 과학과 종교의 통합 모델을 재구성해보고 그 규범적 함의를 밝히려는 것이다.
윌버의 통합 방식은 ‘온상한, 온수준 접근법’이다. 전근대의 종교적 세계관의 핵심은 ‘존재의 대사슬’이고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은 예술(나)/도덕(우리)/과학(그것 및 그것들)의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이다. 윌버는 나/우리/그것/그것들의 네 상한을 두고, 각 상한에는 발달의 선에 따른 수준의 차이를 둠으로써 존재의 대사슬과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를 통합해낸다.
윌버에 따르면 과학의 핵심은 직접적인 경험적 증거에 대한 요구에 있는데, 직접적 경험에는 감각적 경험뿐만 아니라 이지적 경험과 영적 경험도 있다. 따라서 감각적 경험을 다루는 좁은 과학뿐만 아니라 이지적 경험과 영적 경험을 다루는 넓은 과학도 있다. 종교 역시 신화적·독단적 믿음에 집착하여 자아를 강화하는 좁은 종교와 직접적인 영적 경험을 통해 자아를 초월케 하는 깊은 종교가 있다. 깊은 종교는 영적 경험의 과학이 된다.
나아가서 윌버는 (신비적 경험과 같은) 깊은 영적 경험조차도 물질적 뇌에 상관물을 갖고 있고, 이 상관물은 (명상가가 뇌전도에 연결되듯이) 좁은 과학으로 면밀히 탐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깊은 종교와 좁은 과학을 통합한다.
현대인이 참 과학과 참 영성의 통합을 통해 전근대와 근대를 넘어 진화하는 데서 윌버의 통합 모델은 중요한 사상적 지침이 될 수 있다.

※ 주요어 : 켄 윌버, 종교, 과학, ‘온상한, 온수준 접근법’, 존재의 대사슬, 홀라키.

1. 머리말

17세기 이래 근대 경험 과학은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엄청난 성과를 올리면서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전근대 시대에 종교의 영향 아래 있었던 과학은 기성 종교의 교리의 토대를 서서히 잠식해왔다. 과학은 종교의 교리를 근거 없는 환상이나 독단 또는 위안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일축하면서, 나아가서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세계 일반을 경험적·실증적 증거가 없는 것으로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종교와 과학 사이에 오로지 전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근대 초기 과학자들은 진실한 신앙인으로서 자신들이 단순히 자연 안의 신의 섭리를 발견하고 있다고 믿었다. 개신교의 종교적 심성이 과학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재판과 다윈의 진화론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정통 과학과 정통 종교는 수백 년 동안 갈등과 긴장의 관계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학은 사실적 진리를 추구하지만 가치와 의미에 관해서는 침묵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 과학 기술의 엄청난 성공은 종교를 수세로 몰아 넣으면서 내면 세계의 황폐화와 가치와 의미의 상실을 수반하고 있다. 종교는 바로 과학이 침묵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의 영역에서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종교를 거부하는 과학자들조차도 막다른 삶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암암리에 신에 의지하는가 하면 일상의 남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과학과 종교 둘 다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포스트 모던 시대에 걸맞게 자기 혁신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경전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든가 다른 종교를 악마의 종교로 몬다든가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것을 막무가내로 믿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전근대의 신화적인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기성 종교를 거부하고 새로운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역시 상당수는 왜곡된 마술적·신화적 믿음이나 지나친 주관주의에 경도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 문명이 보이고 있는 극도의 비인간화나 환경 파괴와 같은 위기적 징후는 근본적으로 영성을 부인하는 과학과 마술적·신화적 단계에 머무르는 종교 간의 괴리, 사실과 가치, 지식과 지혜 사이의 균열에서 비롯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9·11 테러와 뒤이은 아프가니스칸·이라크 침공에서 우리는 과학 기술과 종교의 잘못된 만남을 극명하게 볼 수 있었다.
과학과 종교가 진리와 의미, 사실과 가치의 영역을 대변한다면, 인간 삶의 두 차원, 두 영역의 분열을 치유하는 문제는 곧 과학과 종교의 통합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전근대와 근대의 통합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과학과 종교의 통합은 어느 한쪽을 희생해서 다른 쪽에 흡수 통일하는 식으로는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양자가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데다가 현 상태의 과학과 종교로서는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둘 다에게 적절한 자기 혁신을 요구하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논지를 펴야 할 것이다.
켄 윌버(Ken Wilber)의 시도는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켄 윌버는 “과학과 양쪽 모두 그들 나름의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논지”를 가지고서 양자를 통합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과 종교 양쪽 진영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투로써 이들 사이의 화해와 궁극적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윌버는 사실과 가치, 내면과 외면, 전근대와 근대로 분열된 현대인의 삶에 대해 참신하고 설득력 있는 통합 모델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윌버의 과학과 종교의 통합 모델을 재구성하고 그것이 함축하는 규범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관점들을 윌버가 어떻게 분류하고 비판하는가를 실마리로 삼아 보자.


2. 현 세계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대체로 몇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를테면 이언 바버(Ian Barbour)는 1)갈등, 2)독립, 3)대화, 4)통합으로,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과학주의, 과학 제국주의, 교회 권위주의, 과학적 창조론, 두 언어 이론, 가설적 공명, 윤리적 중첩, 뉴에이지 영성의 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의 분류는 세부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과학과 종교의 적대 관계에서 출발해서 양자의 공존, 상호관계를 거쳐 통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켄 윌버의 분류법 역시 크게 다르진 않은데, 그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과학은 종교를 부인한다: 종교는 그저 과거의 유물로서 미신에 불과하고 신은 경험적 증거가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성의 지배적인 분위기로서, 대부분의 근대 과학자들이 취하는 입장이고 경험론자와 실증주의자의 입장이다. 콩트, 프로이트, 마르크스, 러셀의 관점이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스피븐 핑커(Steven Pinker)의 관점이기도 하다.
2) 종교는 과학을 부인한다: 과학은 타락한 세계의 산물로서 어떠한 진리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태도로서, 근대성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진화란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신이 6일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든가, 성서가 문자 그대로 진리라든가 하는, 기본적인 과학적 사실에 배치되는 믿음을 고수한다. 전근대 세계에서는 과학이 종교에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도 과학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근대성이 종교를 전면 부인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런 태도가 생겨났다.
3) 평화 공존론: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존재 영역을 다루므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강한 판본(strong version)과 약한 판본이 있다. 강한 판본은 일종의 인식론적 다원주의(epistemological pluralism)로서, 실재(reality)는 물질, 신체, 마음, 혼(魂 soul), 영(靈 spirit)과 같은 다양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과학은 물질과 신체처럼 낮은 영역을 다루는 반면 종교는 혼과 영처럼 높은 영역을 다룬다는 관점이다. 과학과 종교는 똑같은 ‘큰 그림’의 일부로서 각자의 진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 종교의 표준적인 입장이며, 플로티노스, 칸트, 셸링, 화이트헤드,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 이언 바버 등도 여기에 속한다.
약한 판본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가 ‘NOMA’라고 명명한 것으로서, 과학과 종교는 근본적으로 통약 불가능한 서로 다른 영역을 다루므로 ‘큰 그림’으로 통합될 수 없다는 관점이다. 굴드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각기 다른 전문 영역을 다루므로 갈등도 일치도 있을 수 없다. 자연은 사실의 영역으로서 과학에 의해 드러나며 인간은 가치와 의미의 영역으로서 종교에 의해 드러나므로 자연과 인간은 “겹치지 않는”(비중첩) 두 영역이다. 이런 태도는 어떤 식으로든 영(신)을 믿으면서도 이 믿음을 과학과 조화시킬 수 없는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4) 과학 자체가 영(靈)의 실존에 대한 논변을 제공한다: 과학적 사실과 발견이 직접 영적 실재를 제시하고 있으며 과학은 신을 드러내는 것을 직접 도울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빅뱅은 창조자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고 진화는 외적 설계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과학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저자들의 관점이다. 프리초프 카프라(Frijoff Kapra)나 폴 데이비스(Paul Davies)와 같은 전일론(全一論 holism) 패러다임의 주창자들이 이런 주장을 펴고 있다.
5) 과학 자체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한가지 해석에 불과한 것이고 따라서 예술이나 시와 똑같은 타당성을 가질 뿐이다. 과학은 사실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해석의 패러다임을 제공할 뿐이므로 인식론적으로 시나 종교, 신화 등과 대등한 위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입장으로서, 보통 대학 강단의 엘리트들과 문화 엘리트들이 옹호하는 입장이다.

윌버에 의하면 이 모든 입장들은 과학과 종교의 통합에 성공하지 못한 것들이다. 처음의 두 입장은 물론 통합과 관련이 없다. 나머지 세 입장은 과학과 종교 양쪽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입장을 지지하는 논변을 윌버는 “그럴싸함 논변” (plausibility arguments)이라 부른다.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서 영(신)의 실존에 대해 그럴싸한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변들은 상당히 흥미롭고 대중에게 설득력을 발휘하기도 하며 윌버 자신도 그로부터 많은 시사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윌버는 ‘그럴싸함 논변’이 일종의 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관조의 눈’(靈眼)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을 ‘마음의 눈’(心眼)으로 보려 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이미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을 다루면서 순수 이성(합리적 이성)의 한계를 논증한 바 있듯이, 영적 현상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대다수 정통 과학자들은 그런 논변을 가벼운 흥미거리 정도로 치부해버리며, 반대로 영적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논리로써 초월 세계를 파악하려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으로 본다.
다섯 번째 입장은 과학 자체의 근본 바탕을 잠식하려 하고 있다. 과학은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되며 전일론적 세계관을 담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과학과 종교가 통합될 수 있다고 본다. 윌버는 “해석은 우주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도 진리의 계기가 담겨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극단적 포스트 모더니즘은 오직 해석만을 인정하고 진리의 객관적 요소를 부정하는 결과를 빚는다는 점을 윌버는 비판하고 있다.
이제 세 번째 관점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영성을 수긍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입장이다. 그 중에서 약한 판본인 굴드의 관점은 사실의 영역인 자연과 가치와 의미의 영역인 인간 사이를 가르는 엄격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전통적 이론가들이 선호하는 강한 판본 역시 ‘겹치지 않는’ 영역이 둘에서 여러 개로 늘었을 뿐 굴드식의 이원론을 벗어나진 못했다. 문제는 근대의 지배적 세계관인 과학적 유물론은 이성과 경험은 인정하나 영성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상위의 수준(관조의 눈)을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통합의 필요성 자체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높은 영역과 낮은 영역의 관계는 무엇이며, 과학은 오로지 물질과 신체 같은 낮은 영역에만 국한되고 혼과 영과 같은 높은 영역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3. 내면과 외면

평화 공존론의 강한 판본은 전통 종교의 표준 입장으로서,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에 다름 아니다. 윌버는 휴스턴 스미스, 아서 러브조이(Arthur Lovejoy)의 주장을 따라 전근대 종교의 핵심을 ‘존재의 대사슬’로 본다. ‘존재의 대사슬’이란 실재(reality)는 존재와 앎의 여러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실재는 일차원이 아니며 “상이하지만 연속적인 여러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의 위대한 종교적 세계관은 어떤 식으로든 물질, 신체, 마음, 혼, 영으로 이어지는 수준(levels)을 인정한다. 물론 이때 이 수준들의 수나 분류법은 종교 전통에 따라 다양하지만,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모든 위대한 전승 종교에 공통적이다.
윌버는 ‘존재의 대사슬’이란 용어가 적절치 않다고 보고 대신 ‘존재의 대둥지’(Great Nest of Being) 또는 ‘존재의 대홀라키’(Great Holarchy of Being)라는 용어를 쓴다. “각각의 상위 수준이 하위 수준을 초월하면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홀라키란 아서 케슬러(Arthur Koestler)가 만든 용어로서 holon과 archy의 합성어이다. ‘holon’이란 “보기에 따라 전체로도 부분으로도 묘사될 수 있는, 위계 구조상의 중계적인 단계에 있는 야누스의 얼굴을 한 실재,” 즉 어떤 맥락에서는 전체지만 동시에 다른 맥락에서는 부분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홀론들의 위계를 홀라키(holarchy)라 하는데, “전체성과 통합 역량에서의 증가를 나타내는, 증가하는 홀론들의 질서”를 말한다. 이를테면 원자는 소립자에 대해서는 전체지만 분자에 대해서는 부분이며 분자는 원자에 대해서는 전체지만 세포에 대해서는 부분이고 세포 역시 분자에 대해서는 전체지만 유기체에 대해서는 부분이라는 등등이다. 각 요소는 전체만도 부분만도 아니고 언제나 전체/부분이다. 상위의 수준은 하위의 수준을 ‘초월하며 내포’한다. 즉 하위 수준이 갖고 있는 요소들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하위의 수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창발적인 요소를 추가시킨다. <그림 1>은 이러한 홀라키를 나타낸다.

<그림 1> 대홀라키


중요한 것은 본래의 전통적인 대사슬에서는 과학은 낮은 층에 있고 종교는 높은 층에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윗층은 문자 그대로 “세상 밖에” 있어서 물질적 영역과 거의 접촉이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윌버는 전통적인 존재의 대사슬이 “다른 세계 존재론”(other-worldly ontology)이라 본다.
그러나 근대 과학은 이런 기존의 생각을 무너뜨렸다. 근대 과학은 의식(마음)이 초월적 현상이 아니라 물질적 유기체인 뇌와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속속 밝혀냈다. 이를테면 기도나 명상을 할 때는 평소와는 다른 특정 뇌파 패턴을 보인다든가, 신비 체험을 할 때 뇌의 특정 부위의 활동이 급격히 감소한다든가, 사랑할 때나 분노할 때는 특정의 호르몬이 분비된다든가, 꿈꿀 때는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마음의 상태와 유기체의 상태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윌버가 자주 드는 예를 들어 보자. 명상을 하는 사람을 뇌전도(EEG) 기계에 연결해보면 깊은 명상 상태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특정한 뇌파 유형을 볼 수 있다. 명상가는 주관적·내면적·영적 체험을 하지만 그 주관적이고 영적인 체험에 객관적인 자료가 상응하고 있다. 종교의 영역인 영적 실재와 과학의 영역인 경험적 실재가 그렇게 엄격히 칸막이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는 굴드가 말하는 “비중첩 교권역”은 아니다. “‘표준적 NOMA 논변’이 간과하는 것은 가치와 사실이 어떤 의미에서는 분리된 영역일지라도, 주관적 가치를 체험할 때 이 가치는 뇌 자체 속에 객관적인 사실적 상관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윌버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각기 낮은 층과 높은 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층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종교가 높은 층, 과학이 낮은 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나란히 낮은 층부터 높은 층까지 있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은 “한 건물의 다른 층들이 아니라 한 저택의 동등한 기둥들”로서 관계한다.
근대의 과학적 유물론은 이런 발견을 토대로 심지어 의식을 신경계의 활동(유희)으로 환원하는가 하면 영적 실재와 영적 앎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신은 뇌 안에 있다든가 사랑이란 호르몬 분비에 다름 아니다든가 꿈이란 뇌의 특정 부위의 활성화일 뿐이라든가 하는 주장이 나온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런 주장은 영적 경험을 자연적 사건으로 환원하는 것으로서, 지지받을 수 없는 것이다. 과학 역시 마음이나 영혼을 다루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 측면이 아니라 객관적 측면에서 다루는 것이다.
내면과 외면의 이같은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윌버는 전통 종교의 핵심과 근대 과학을 통합하는 보다 정교한 모델을 제시한다. 보통 ‘온상한, 온수준 접근법’(all-quadrant, all-level approach)이라 불리는 윌버의 통합적 관점을 보기로 하자.


4. 온상한, 온수준 접근법

윌버는 종교와 과학의 통합을 전근대와 근대의 통합이라는 보다 큰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전근대 종교의 핵심이 존재의 대사슬이라면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윌버는 막스 베버를 따라 근대성의 핵심을 “문화적 가치권의 분화”로 보고 있다. 문화적 가치권은 근본적으로 예술, 도덕, 과학의 3대 영역으로 나뉜다. 전근대 문화는 예술, 도덕, 과학을 대규모로 뚜렷이 분화시키는 데 실패한 반면 근대성은 이들 권역을 분화하여 각각이 다른 영역의 간섭없이 그 나름의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였다.
윌버는 이 3대 권역을 다음과 같이 나(I), 우리(we), 그것(it)의 영역이라 부른다. “예술은 미적·표현적 영역, 주관적 영역을 가리키며 일인칭 언어 또는 ‘나’ 언어로 묘사된다. 도덕은 윤리적·규범적 영역, 상호 주관적 영역을 가리키며 2인칭 언어 또는 ‘우리’ 언어로 묘사된다. 그리고 과학은 외적·경험적 영역. 객관적 영역을 가리키며 3인칭 언어 또는 ‘그것’ 언어로 묘사된다.(이것은 사실상 개별적 ‘그것’과 집합적 ‘그것들’의 두 영역으로 나뉠 수 있다).”
윌버는 이 네 개의 ‘영역’(realm) 또는 ‘차원’(dimension)을 ‘네 상한’(four quadrants)이라 부르고 <그림 2>처럼 배치한다.
여기서 위의 두 상한은 단수·개체의 영역이고 아래 두 상한은 복수·집합의 영역이다. 왼쪽의 두 상한은 내면적·주관적 영역인 반면 오른쪽의 두 상한은 외면적·객관적 영역이다. 이 세부 영역들은 모두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각 영역 내에서는 화살표 방향으로 발달이 이뤄지며 상위의 수준은 하위의 수준을 내포하면서 초월한다. 또 네 상한은 서로 상관 관계를 갖는다. 즉 모든 홀론은 의념적, 행동적,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림 2> 네 상한

<그림 1>은 전통적인 ‘종교적’ 세계관의 요약이고 <그림 2>는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을 겹쳐 놓으면 <그림 3>처럼 된다. 이때 여러 수준의 차이는 존재의 대사슬을, 네 상한은 근대성의 분화를 수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존재의 대사슬(종교)과 근대성의 분화(과학)를 각자의 규범을 범하지 않으면서 통합한 셈이 된다.

<그림 3> 네상한과 대둥지의 통합

<그림 4> 내적(의식) 상태와 외적(물질) 상태의 상관 관계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좌측 상한과 우측 상한의 관계이다. 감정, 생각, 영적 경험 등의 내부 상태는 항상 외부의 물질적 영역과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내면과 외면의 관계를 특별히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림 4>처럼 된다.
앞서의 예를 들면 뇌전도에 연결된 명상가는 좌상 상한에 해당하는 주관적·내면적·영적 실재를 경험하고 있지만, 이는 실제로 우상 상한에 외적·객관적·경험적 상관물을 갖고 있다. 영적 실재도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외적 실재)과 종교(내적 실재)는 하나가 다른 것 ‘위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상한 온수준 접근법의 좌측 측면과 우측 측면으로서) 서로서로 ‘나란히’ 발전한다.”
그렇지만 과연 명상가들이 경험하는 것이 현실적 실재인가, 과학이 다루는 실재와 같은 의미에서 현실성을 갖는가, 다시 말해서 영적인 영역도 역시 현실적 실재인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명상가들이 경험하는 사태에 대해 독자적 실재성(reality)을 부여하기를 거부하고 그것들이 주관적 감정 상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경험)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내면 세계의 독자적 실재성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내세운다. 첫째, 내면 세계라는 것은 모두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생물-물리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식, 내면 세계, 초월적·신비적 세계와 같은 것은 그 자체의 실재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감각 경험적 과학에 의해서 연구될 수 있다. 둘째, 설사 내면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 관한 앎은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윌버는 내면적인 것에 관해서도 과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내면의 영역이 ‘과학적’ 실재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통상적인 좁은 의미의 과학 개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5. 참 과학이란 무엇인가?

윌버는 우선 과학을 ‘좁은’ 과학과 ‘넓은’ 과학으로 나눈다. 좁은 과학은 주로 외적·물리적·감각운동적 세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서, 물리학·화학·생물학처럼 흔히 ‘굳은’(hard) 과학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과학에는 이외에도 심리학·사회학·인류학·언어학·기호학·해석학·인지 과학처럼 내부 영역을 다루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 의식 연구에 과학적 접근법을 쓰고자 하며 흔히 인간 과학 또는 정신 과학으로 불린다.
전통적으로 경험 과학은 감각적 경험에 대해서만 과학적 인식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좁은 과학이든 넓은 과학이든 감각 운동적 세계에만 기초하여 지식을 얻는 것은 아니다. 좁은 과학만 하더라도 수학이나 논리처럼 감각적․경험적인 도구가 아닌 도구를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논리는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실재가 아니라 내부적 실재인 것이다.
게다가 심리학, 언어학, 해석학 등등처럼 우측 상한뿐만 아니라 좌측 상한에 관해서도 다양한 학문이 있고 그것들은 나름의 과학적 접근법을 가지고 방대한 자료를 구축해왔다. 이같은 증거를 모조리 거부하지 않는 한, 내면 세계의 과학이 성립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경험과학이 내면적 실재 일반을 거부하면 자기 자신의 기반 자체를 거부하는 셈이 되며 또 내면 세계에 관한 기존의 수많은 과학적 성과를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 경험 과학이 내면 세계의 실재성을 모조리 부정하기는 어려운 만큼 이번에는 일부 내면 세계, 즉 신비적․초월적․초개아적(超個我的) 내면 세계만을 부정할 수 있다. 이런 내면 세계에 관한 앎은 타당성을 검증할 수단이 없으므로 진정한 실재성이 없고 주관적 취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윌버는 이런 주장에 맞서 감각적 증거 대신 다음의 세가지를 모든 과학적 탐구의 본질적 측면 또는 “타당한 앎의 세 요건”으로 들고 있다.

“1) 실제적 교시(practical injunction): 이것은 하나의 실제적인 실행(practice), 하나의 본보기(exemplar), 하나의 패러다임, 하나의 실험, 하나의 규칙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항상 “당신이 이것을 알기를 원하면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한다.”와 같은 형식을 취한다.
2) 직접적 이해(direct apprehension): 이것은 교시에 의해 나타난 영역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즉 자료(data)의 직접적인 경험이나 이해이다.......
3) 전문가 집단의 승인 (또는 거부)(communal confirmation or rejection): 이것은 이미 교시와 이해의 요건을 적절히 완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결과(자료, 증거)를 검사하는 것이다.”
윌버는 이러한 앎의 세 요건이 현대 과학 철학의 유력한 세 학파, 즉 경험주의, 토마스 쿤, 카를 포퍼의 타당한 주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요건은 단순한 예를 들자면 비가 오는지 알고 싶으면 창가에 가서 밖을 내다보아야 한다든가 목성의 달을 보려면 망원경으로 관찰해야 한다든가 세포를 알려면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법을 알고 실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윌버는 이것이 바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이라고 한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제기한 주장은 흔히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해석되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과학은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되는데, 패러다임은 실재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한 해석 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 중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나은지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쿤에 대한 엄청난 오독이라는 것이 윌버의 주장이다. 윌버에 따르면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은 흔히 생각하듯 구성적 거대 이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실행, 하나의 교시(敎示)이고 자료를 생성해내기 위한 하나의 전범으로 취해지는 하나의 기법”을 말한다. 자료는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교시(패러다임)에 의해서만 생성되며, 새로운 교시(패러다임)는 새로운 자료(경험)을 드러나게 한다. 그렇지만 교시는 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자료를 제멋대로 구성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드러내는 것이다.
두 번째 요건은 경험주의와 관련된다. 경험주의의 핵심은 모든 지식은 경험적 증거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요구에 있다. 즉 경험주의란 증거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고 단순히 독단이나 신앙이나 불확실한 추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경험 과학자들이나 좁은 의미의 경험주의자들은 경험의 의미를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경험에는 감각적 경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지적(mental) 경험, 영적(spiritual) 경험도 있다. 수학, 논리학, 언어학, 해석학과 같은 것은 이지적(理智的) 영역의 경험에 속하는 것이고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의해 알려진 증거로 밑받침되는 것이다. 따라서 윌버는 경험주의를 넓은 의미로 확장하여 감각적 경험 뿐만 아니라 이지적, 영적 경험을 포함한 직접적 경험에 대한 요구로 받아들인다.
세 번째 기준은 좋은 과학은 자신의 주장을 끊임없이 확증하거나 거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전범(사회적 실행)을 택하고 일련의 경험과 증거(또는 자료)를 산출하고 나면,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검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료 집단 또는 처음 두 요건(교시와 자료)을 적절히 완수한 사람들이 최선의 검토자가 될 것이다. 여기서 윌버는 포퍼의 ‘반증 가능성의 원리’(principle of falsifiability)를 끌어들인다. 어떤 신념 체계가 도전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일종의 독단일 뿐이며, 적임자(適任者) 집단의 의해 나쁜 자료는 거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퍼주의자들은 반증 가능성 원리를 오용하여 감각적 자료에만 국한시킨다. 그래서 감각적 자료에 의한 반증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이지적·영적 지식에도 적용하여 이들 영역을 진정한 지식의 지위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지적·지적 영역의 경험(자료)에 대해서는 오직 해당 영역의 자료에 의해서만 허위 입증이 가능한 것이다. 윌버의 예를 들면 󰡔햄릿󰡕의 조잡한 해석에 대해서는 감각적 자료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문 해석가 집단의 이지적 자료에 의해서만 반증이 가능하다.
이상과 같이 윌버는 경험주의, 쿤, 포퍼의 입장에 내포된 진리의 계기를 수용하면서도 그것들을 환원주의와 오용에서 건져내어 폭넓은 경험주의에 입각한 통합적 과학관으로 생성시킨다.
윌버에 따르면 이상의 세 기준이 ‘좋은 과학’(good science) 또는 ‘참 과학’(real science)의 일반적 특징이다. 과학이 물리적, 심적, 영적 영역 어디서든 이 세 요건에 따라 자료를 모으고 그 타당성을 검사한다면 좋은 과학이 될 수 있다. 우측 상한 또는 외부 영역을 다루는 좁은 과학이든 좌측 상한 또는 내부 영역을 다루는 넓은 과학이든 둘 다 좋은 과학이 되려면 증거 축적과 검증의 이 세 요건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감각적 영역과 이지적(심적) 영역에 관해서 이야기해왔는데, 그렇다면 과연 영적 영역에 관해서도 세 요건을 따르는 과학이 성립할 수 있을까? 이를 알려면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6. 참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용어는 신화적 믿음, 신비적 체험, 근본주의, 확고히 믿는 세계관 등의 다양한 현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윌버는 전근대 종교에서 증거 없이 주장되는 신화적 믿음들은 근대 이후 이제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한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다든가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든가 노자가 태어날 때부터 900살이었다든가 지구가 신성한 거북의 등 위에 놓여 있다든가 하는 신화적 이야기들은 이제 더 이상 근대성의 요구를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성은 증거에 대한 요구를 내세우며 종교도 역시 증거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종교에서 이런 신화적이고 독단적인 내용을 빼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종교의 진정한 핵심이란 무엇인가? 윌버는 종교의 추종자가 아니라 창시자들의 삶을 주목하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주요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깊은 영적 체험, 즉 절대자, 신, “궁극의 신성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직접적인 영적 체험’이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이러한 체험을 한 후 추종자들에게 독단적 믿음보다는 교시, 본보기, 실행(수행, 수련)을 제시한다. ‘궁극의 신성과 합일하고 싶다면 이것을 행하라’, ‘나를 본받아서 이것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시는 각 종교의 독특한 명상법, 묵상, 기도, 요가, 수련, 수행법에 해당한다.
이같은 교시에 따라 실행하게 되면 신성을 직접 경험하게 되며 이 경험은 해당 종교의 공동체에 의해 검사되어 승인되거나 거부된다. 명상, 관조, 묵상도 감각적 경험 과학의 명제처럼 교시, 이해, 승인이 있고 반복 가능하며 검증 가능하다는 것이다.
윌버에 따르면 결국 모든 위대한 정통 종교의 핵심은 (좁은 과학이 아닌) 좋은 과학의 세 요건을 따른다. 그것들은 (명상과 같은) 특유의 사회적 실행 또는 교시에 의존한다. 또한 그 주장은 경험적 증거와 자료에 근거하고 이 자료를 끊임없이 적임자들의 공동체에서 세련되게 하고 검사한다. 따라서 이런 절차를 ‘명상 과학’(contemplative science) 또는 ‘영성 과학’(spiritual science)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래서 깊은 영성은 부분적으로는 혼과 영이라 부르는 현상, 자료, 경험(체험)에 대한 넓은 과학이다. “종교의 위대하고 지속적이며 유일한 힘은, 바로 그 핵심으로 가면 그것은 (어느 영역에서건 교시, 자료, 승인의 세 요건에 순응하는 직접적인 경험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과학’이란 말을 사용하면) 영적 경험의 과학이 된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윌버는 (좁은 과학과 넓은 과학을 구분하듯이) 이같은 영적 경험의 과학을 포함하는 종교와 통상의 신화적 교리에 머무르는 종교를 구분하여, 전자를 좁은/얕은 종교 또는 수평적/해석적 영성이라 하고 후자를 넓은/깊은 종교 또는 수직적/변형적 영성이라 부른다. 전자는 분리된 자아에 의미와 위안을 주고 따라서 에고를 강화하는 기능을 하고 후자는 비이원적인 통일 의식 상태에서 분리된 자아를 초월하려 하며 에고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 가운데 깊은 영성은 넓은 과학으로서 우주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으며 단지 일련의 주관적인 감정상태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윌버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뇌전도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좌상 상한의) 혼과 영의 내부적 자료와 경험은 우상 상한 속의 감각운동적 증거 속에 상관물을 갖고 있다”는 것이 윌버의 참신한 주장이다. 다른 말로 하면 “넓은 과학이 탐구하는 좌상 상한의 깊은 영성은 좁은 과학이 탐구하는 우상 상한에 상관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존재의 대사슬에서 물질은 존재의 최하위 수준에 있지만, 윌버의 상한도에서는 내면적인 것에 대한 객관적 상관 현상이 된다.
이처럼 ‘온상한 온수준 접근법’은 많은 다른 전선을 가로질러 과학과 종교를 밀접히 통합한다. 윌버는 깊은 영성이 부분적으로는 더 넓은 인간 잠재력에 관한 넓은 과학임을 보여줌으로써 깊은 종교와 넓은 과학을 통합한다. 또한 (신비적 경험과 같은) 깊은 영적 자료와 경험 조차도 물질적 뇌에 현실적 상관물을 갖고 있고, 이 상관물은 (명상가가 뇌전도에 연결되듯이) 좁은 과학으로 면밀히 탐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깊은 종교와 좁은 과학을 통합한다.
이렇게 되면 과학과 종교는 서로 싸울 필요가 없고 긴밀히 협조하게 된다. “진짜 전쟁은 ‘참’ 과학과 ‘거짓’ 종교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참 과학 및 참 종교라는 한 편과 거짓 과학 및 거짓 종교라는 다른 한 편 사이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참 과학과 참 종교는 모두 올바른 앎의 축적을 위한 세 요건을 따르지만, 반면에 거짓 과학(의사 과학)과 거짓 종교(신화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는 그 시험에 아주 형편없이 실패하고 만다. 따라서 참 과학과 참 종교는 그들 각각의 권역 안에서 거짓된 것, 독단적인 것, 검증 불가능한 것, 허위성 입증이 불가능한 것에 대항하여 실질적으로 제휴하게 된다.”


7. 참 과학과 참 종교의 통합을 위하여

이상에서 우리는 윌버의 과학과 종교의 통합 방식을 살펴보았다. 윌버는 과학과 종교 양쪽 진영이 받아들일 수 있는 논지로 양자를 통합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이 기존의 과학과 종교에 아무런 수정을 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양쪽에게 약간의 자기 혁신을 요구한다.
우선 과학은 감각적 경험에 국한된 좁은 의미의 경험주의를 포기하고 직접적 경험 일반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과학이 논리학이나 수학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신화적·독단적인 주장을 벗어버리고 직접적인 영적 경험에 근거해야 하며 경험적 증거를 통해 진리를 검증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역시 그 창시자들이 그렇게 했던 것이며 심오한 종교 전통에서는 그렇게 해온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교정은 과학과 종교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윌버의 주장이다.
과학과 종교의 통합에 관한 이 같은 윌버의 주장에 대해 과학과 종교 양측에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먼저 과학 측을 보면, 윌버가 종교와 과학을 통합한다고는 하지만 실은 과학에다가 종교를 슬그머니 밀수입했을 뿐이며 이것은 곧 나쁜 과학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과학과 종교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가지 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윌버가 말하는 종교가 좁고 얕은 해석적 종교가 아니라 깊은 종교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 신학자들이 자연 과학에 그들의 신학을 밀수입해서 여호와가 빅뱅을 창조했다는 식으로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려 하는 경우 그 같은 비판이 타당하다. 그러나 윌버의 통합에서 종교는 직접적인 영적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의 과학은 초합리적·영적 단계의 본질적 요소나 심층적 특징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것과, 동시에 스스로 변형적 수행을 실천함으로써 보다 높은 초합리적 단계들을 자기 안에서 계발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증거를 요구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태도와 맞아 떨어진다.
과학 측에서 두 번째로 흔히 제기하는 비판은 요가나 명상, 기도 등과 같은 ‘영성 과학’이 과연 과학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달의 존재를 증명하듯이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역시 윌버의 과학관에 대한 오해가 개입하고 있다. 과학을 좁은 과학, 즉 감각적 경험주의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수학과 논리학을 포함해서 감각적 실재를 넘어서는 어떤 실재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과학을 넓은(깊은) 의미에서 직접적인 경험적 증거에 입각한 명제로 이해하면 신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가능하다. 바로 세계의 궁극적 실상에 대한 직접적인 각성(깨달음)이 그것이다. 게다가 윌버는 이같은 각성의 경험에 대해 좁은 과학은 두뇌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고차적인 실재에 대해 온상한 온수준을 통해 보다 풍부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종교 측의 비판은 주로 윌버가 좁은 종교를 깎아 내리고 심지어 무시함으로써 통합의 종교 측에 너무 많은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 95% 가량의 종교인들은 해석적 영성(종교)을 신봉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윌버는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기존의 신앙을 버릴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양한 영역의 과학이 있듯이 다양한 종류의 종교도 있을 것이다. 윌버는 대다수 뉴에이지 사상가처럼 여러 종교의 차이를 무시하고 균질화된 영성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윌버가 종교에 대해서 요구하는 바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이다.

1) 좁은 종교가 ‘경험적’ 주장을 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측 상한의 객관적 영역에 관한 주장을 한다면, 그 주장은 (좁은) 경험 과학의 시험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좁은 종교가 내세우는 대부분의 경험적 주장들은 경험 과학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물론 그런 종류의 주장을 믿는 것은 자유지만 거기에 대해서 좋은 과학이나 깊은 영성의 재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
2) 종교의 진정한 핵심은 깊은 종교 또는 깊은 영성이다. 각자가 자신의 보다 수준 높은 잠재력을 활성화할수록, 좁은 종교의 매력은 점차 감소한다.

이상의 비판과 응답에서 보듯 윌버의 통합 모델은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윌버의 모델이 갖고 있는 규범적 함의는 분명하다. 과학자들과 근대 과학적 유물론에 물든 사람들은 좀더 열린 자세로 과학 개념을 확장하여 영적 실재와 영적 과학을 인정해야 한다. 종교는 독단적·신화적·마술적 단계를 벗어나 직접적인 영적 체험에 입각하여 우주적·보편적 의식으로 상승할 필요가 있다.
명상이나 묵상 등의 수행을 통해 더 높은 영적 실재를 직접 체험하고 이 체험을 객관적으로 검증받는 것은 인류 모두가 지향해야 할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인류는 아직 진화선상에서 전근대 종교와 근대 과학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인류의 무게 중심이 점차 더 높은 쪽으로 움직임에 따라 깊은 영성의 체험이 점점 더 일반화되어갈 것이다.
이러한 진화는 흔히 생각하듯이 개인의 내면 영역(좌상 상한)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윌버의 네 상한도가 보여 주듯이 문화적, 사회적, 행동적 차원이 여기에 모두 개입하는 것이다. 온상한적인 실천을 통해 그러한 진화를 앞당김으로써 전근대와 근대 (및 탈근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 인류가 당면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윌버의 통합 모델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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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Integration of Science and Religion in Ken Wilber's Philosophy

― Park, Jeong-Ho ―

According to Ken Wilber, there are two major meanings of "science" and three levels of "science." "Narrow science" refers to a science that accepts as real nothing but sensorimotor occasions, or, secondarily, attempts to tie its rational and theoretic analysis to nothing but sensorimotor occasions. For the narrow sciences, "empiricism" likewise means "experiences originating in the five senses or their extensions".
The "broad sciences" or "deep sciences" often deal with realities that can only be seen with the "inward eye". For all of the broad or deep sciences, an occasion is empirically real if it can be directly experienced by individuals in a peer group competent in the means of accessing the occasion. Broad sciences can investigate the objects or the phenomena or the experiences that present themselves to any subject or consciousness, whether the objects or experiences are sensory, mental, or spiritual.
Wilber asserts that both of those two major forms of science (narrow and deep) share at least three common features ― namely, they both operate by injunction/exemplar, experience/evidence, and confirmation/rejection ― the "three strands" of all good science. That is, all "good science," whether narrow or deep, attempts to follow these three strands (which is what grounds their truth claims and makes them "scientific"). These three strands explicitly incorporate the valid aspects of the theory of science advanced by Kuhn (the necessity of exemplars/injunctions/paradigms), empiricism (the necessity of experiential grounding), and Popper (the importance of potential refutation). Wilber further claims that these three strands are generally followed by sensory science, mental science, and spiritual science.
And using the quadrants, we can correlate the findings of broad science (e.g., meditative experiences) with the findings of narrow science (e.g., brainwave patterns during meditation registered by an EEG machine). Wilber's "all-quadrant, all-level" approach therefore allows us to do something that neither premodern spiritual traditions nor modern science can do on their own: namely, track all four dimensions of an actual occasion (intentional, behavioral, social, and cultural) and therefore offer a more integral approach to science, consciousness, and spirituality.

※ Key Words : Ken Wilber, Religion, Science, 'all-quadrant, all-level approach', The Great Chain of Being, Holarchy.

출처 : 반석의 신앙 따라잡기
글쓴이 : peterb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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