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철학 |
I. 서론
본 논문에서 필자는 서양근세의 무신론을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니체(Friedrich Nietzsche, 1884-1900)의 사상을 중심으로 논구하고자 한다. 신과 무신론에 관한 논의는 `신'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내용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종교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된다. 무신론(Atheismus)은 말그대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론을 그 내용으로 삼고있다. 우리는 무신론의 여러 양상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실천적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으나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부정한다. 둘째, 이론적 무신자는 자신의 판단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셋째, 극단적인 무신론은 모든 정신적이고 초감각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물질주의(Materialismus)와 실증주의(Positivismus)이다. 넷째, 범신론(Pantheismus)은 세계를 초월하는 인격적 신을 믿지 않는다. 경험적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절대적인 어떤 것(예; 도덕법, 아름다움의 이상등)을 인정함으로써 신에 대한 신앙의 싹을 지니고 있다. 다신론(Polytheismus)이나 이신론(Deismus)은 무신론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론적 무신론자를 좀 더 자세히 분류하면 이론적으로 부정적인 무신론자와 이론적으로 긍정적인 무신론자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신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이고, 후자는 신의 존재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아 의심하는 경우이거나 신에 관한 명확한 진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론적으로 긍정적인 무신론자는 신에 관한 명확한 진술은 경험에 국한된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다거나 (불가지론의 경우) 혹은 주관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요청적인 무신론자(니체, 니콜라이 하르트만)는 신에 의해 인간적인 가치 혹은 윤리적 가치가 위험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1) 이 논문에서는 종교비판가들이 신의 부재와 종교의 근거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근거들이 무엇인가를 추적해보고 그들의 논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일반적으로 유신론자들, 특히 그리스도교신자들은 인간과 세계의 기원, 인생의 의미등이 신의 존재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종교비판 논자들은 초월적 경험의 기본형태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인간 자신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른바 신의 현재성은 인간적인 동경과 원의(願意)의 투사(Projektion)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필자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이와 같은 상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논변에 있어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도 밝혀보고자 한다.
II. 포이에르바하
포이에르바하는 근세 무신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니체의 그것처럼 철저한 `세계성'(Weltlichkeit)의 정신을 구현한다. 그에게는 저승보다는 이승의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모든 종교와 독일관념론에 대한 비판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비판을 가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당시 헤겔학파는 헤겔사상의 해석을 둘러싸고 견해차이로 인하여 우파진영과 좌파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우파(예컨대, Rosenkranz, Haym, Erdmann, Fischer등)는 현실적인 것(das Wirkliche)만이 이성적인 것(das Vern nftige)이라고 주장했고, 좌파(Feuerbach, Ruge, Bauer, Stirner, Marx, Kierkegaard)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2) 헤겔의 관념론적인 철학을 전복시키려는 포이에르바하의 시도는 그의 물질주의적인 인식론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그의 유물론적인 인식론은 일종의 유물론적 세계관, 즉 자연을 포함하여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인간학적인 뮤룰론(Materialismus)에 의거한다. 그는 이와같이 인간학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관념론 일반과 종교에 대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3) 이와 같은 의미에서 포이에르바하는 신학에 반대한다. 그는 신학을 철학에서 해소시키려 한다. 결과적으로 사상가로서 포이에르바하는 신학에서 시작하여 사변적인 관념론을 거쳐 감각주의적, 자연주의적인 인간학으로 귀착한 셈이다. 이러한 인간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드러난다.
" `외적인' 사물만이 감각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감각을 통하여
또 그가 말하는 새로운 철학은 인간중심의 철학이다. " 새로운 철학은 자체만을 위한 이성진리인 신(Gottheit)에 의거하지 않고, 전체
그에게 새로운 철학은 인간의, 인간을 위한 것이고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다. " 새로운 철학은 ... 인간의, 인간을 위한 것이고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그의 인간학에서는 헤겔의 절대자(das Absolute)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게 된다. 그의 종교비판,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와 신학에 대한 비판은 이와 같은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1. 종교발생기원에 대한 비판적 설명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의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 [종교의 본질](das Wesen der Religion, 1845), 하이델베르크의 시청에서 학생들을 청중으로 하여 행한 [종교본질에 대한 강의](Vorlesung ber das Wesen der Religion, 1848/49 겨울학기)에 담겨있다. 포이에르바하는 당시에 영향을 미쳤던 종교비판, 예컨대 프랑스 계몽주의(Holbach, La Mettrie, Diderot)의 종교비판을 넘어 종교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견해를 표명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종교가 인간의 첫째이며 간접적인 자기인식이며 개인과 인류역사에서 철학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의존감정(das Abh ngigkeitsgef hl)이 종교의 근거(토대)이다. 그런데 "인간이 의존해있고 의존해있다고 느끼는 이러한 의존감정의 대상은 근원적으로는 자연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은 모든 종교의 역사가 충분히 증명하는 것처럼 종교의 첫째이며 근원적인 대상이다."7) 그는 종교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를 물음으로써 종교가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한다. 먼저 종교는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본질에 의거한다. 동물은 종교를 갖고 있지않다. 인간은 특유의 의식(das Bewu tsein)을 갖고 있는 점에서도 동물과 구별된다는 것이다.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은 어떤 본질(Wesen)에 그 유(Gattung), 그 본성(Wesenheit)이 대상인 경우에만 있다고 한다. 그런데 동물은 개체로서 존재하지 유로서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동물에게는 의식이 없다고 한다.8) 따라서 "동물과 달리 인간의 본질은 종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 인간자신의 무한한 본질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외에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9)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동물의 본능과는 달리 다른 사물들, 특히 자신의 본질을 대상으로 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의식의 무한성을 갖는 인간의 본성에 그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인간자신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비해 [종교의 본질]은 자연의 측면을 부각시킨다. 물론 이 두 측면은 서로 보완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의 여러 대목에서 종교에 관한 여러 민족들의 민속지학적인 예를 들고있다. 자연을 신앙대상으로 하는 여러 민족의 자연종교 뿐만 아니라 이른바 고등종교등에 이르는 진리의 과정에서 인간은 비로소 종교가 깊은 자기인식의 과정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반대관계가 착각(Illusion)이라는 것, 즉 그것은 인간본질과 개인 사이의 반대관계일 뿐이라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대상과 내용은 전적으로 인간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10)
2. 원의(Wunsch)의 투사와 모상으로서의 신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내용을 인간학적 및 심리학적 유래에서 설명한다. 다시말하면 종교와 신관념은 인간의 원의(願意)와 인간의 본질이 투사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생각하는대로의 신이다. "원의는 원천이다. 즉 종교의 본질자체이다. 신들의 본질은 원의의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11)
이와같은 의미에서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고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기인식이다. ... 신은 인간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고 자신이 진술된 것(das ausgesprochene Selbst des Menschen)이다." 또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자신 안에서 찾기 이전에 먼저 그것을 자기 밖으로 옮겨 놓는다."12)
같은 의미로 "신은 인간의 다른 자아이며, 잃어버린 다른 반쪽이다. 인간은 신안에서 스스로를 보충하며 신안에서만이 완전한 인간이다. ... 신은 인간에게 필요하며 자신의 본질에 속한다."13) 그래서 "종교는 자체에서 인간적인 본질을 반사하는 것(die Spiegelung)" 이다. "신은 인간의 거울'인 것이다.14) 그에 의하면 종교 뿐만 아니라 예술, 철학 혹은 학문도 진정한 인간본질이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5)
3. 인간소외 와 무신론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무신론적인 주장의 비판적인 화살은 모든 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를 겨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가장 세련된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이 철저히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들과 신의 거짓된 정체를 폭로하고 비신화화 하고자 한다. 그의 무신론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이 인간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인간에게 다시 돌려 주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의 자기자신과의 분열이다. 인간은 신을 그에 대립된 본질로 설정한다." "신과 인간의 이러한 반대관계, 분열은 ... 인간의 고유한 본질과의 분열이다."16)
마찬가지로 그는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서 , 즉 자기자신과 분열하게 하여 마침내는 내면에서도 그렇게 만든다"17) 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종교일반에 기인하는 인간의 소외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더욱 철저하게 된다.그에 의하면, 만일 종교가 신학이 된다면, 원래 자의적이 아니고 해롭지 않은 신의 인간으로부터의 분리가 고의적이고 노련한 구별로 된다. 이러한 구별은 이미 의식안에 들어온 일치를 다시 의식에서 치워버릴 목적만을 지닌다"18) 고 주장한다. 앞에서 거듭하여 언급했듯이 신의 존재는 인간의 원리와 본질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상상의 산물이다. 여기서 신은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초월적'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이 어떻게 이 세계를 창조했을까 하는 질문의답을 통하여 무신론적인 자신의 확신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계는 물리학의 대상이므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비물질적인, 재료가 없는활동이라는 상상에는 모순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기본적인 상상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위와 같은 질문을 할 경우 인간은 무신론, 유물론, 자연주의에 귀착하게 된다는 것이다.19) 그에 있어서 무신론은 사유와 환상의 본질(das Gedanken- und Phantasiewesen)을 현실적인 삶과 본질에 희생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므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무신론은 자연과 인류에게 의미를 주고 유신론이 빼앗아 간 존엄성을 되돌려 준다고 한다.20)
무신론은 인간으로부터 추상된 신의 자리에 인간의 현실적이고 참된 본질을 대치시키는 것이다. 되풀이하여 주장되듯이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가장 높은 본질이고, 인간이 인간에게 신(Homo homini Deus)21) 이므로 인간 이외의 다른 경배의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강의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러분을 신의 친구에서 인간의 친구로, 신자에서 사유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에서 노동자로, 저승의 후보에서 이승의 학생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에서 ... 인간, 전적인 인간으로 만들 과제를 " 떠맡으라고22)
III. 마르크스의 실천적 무신론
마르크스는 독일 트리어(Trier)의 유대 가정에서 태어나서 중등학교 시절에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다가 대학생으로서 베르린에서 공부하던 중 헤겔학파 사상가들과 교유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의 무신론적 사상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에서도 싹트고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의식은 인간의 고유가치를 감소시키므로, 이러한 멍에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그는 에피쿠로스가 "가장 위대한 그리스의 계몽가"23) 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그는 "진리와 자유에 이르기 위해 Feuer(불)-bach(내) 이외에 어떤 다른 길이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현대의 연옥(Purgatorium)이다"24) 라고 주장한다. 맑스의 종교비판은 그의 사회비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속박과 예속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이다. 그에게는 우선 인간을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해방된 사회의 건설이 중요하다. 때문에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미래의 계급없는 사회, 해방된 인류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지배, 기술(Technik)과 산업화에서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모든 공산사회에 필수적인 전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는 불완전한 사회적 관계에서는 주관적으로는 필요한 것일지 모르나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들을 변혁하는데는 걸림돌이 된다. 그런데 기술의 진보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하는 정도에 따라 종교는 점차로 필요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종교가 더 이상 어떤 기능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자연에 의존하는 인간의 보호와 위안역할을 하는 종교기능은 사라진다. 또 마찬가지 의미에서 계몽된 인간은 이러한 위안을 필요로 하지 않게된다. 결국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적인 세계 사회를 설계함으로써 신의 부정(Negation Gottes)으로서의 무신론을 성취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25)
1. 종교비판 마르크스는 종교비판의 주안점과 논거에서 대체로 헤겔좌파의 사상가들(Strau , Ruge, Edgar, Bauer, Stirner, 특히 Feuerbach)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에 있어서 종교는 비이성적인 세계의 산물이며 지성적인 계몽으로써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선결문제는 세계자체의 변화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정'(das religi se Gem t)자체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과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인간이 어떤 특정한 사회형태에 속한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7)26)
여기서 그는 철학과 철학자들의 사회변혁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만 상이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일 것이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1) 포이에르바하는 인간해방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개조를 무엇보다도 계몽, 의식의 변화, 종교적, 도덕적 강제로 부터의 자유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한다. 그 방안으로 그는 인간애로써 이기주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는 인간해방은 사회문제로서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여기서 해방은 단순히 이기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경제적 억압과 사회계급의 문제이다. 그는 사회혁명을 통하여 철저한 사회개조를 이루고자 한다.27) 마르크스에 있어서 "종교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종교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소외시키는 원인이며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고, 인간이 종교를 만든다. 종교는 아직 자기성취를 못했거나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인간의 자의식이며 자기감정이다. 이때 "인간은 세계밖에서 웅크리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그것은 인간의 세계, 국가, 사회(Soziet t)이다. 이 국가, 이 사회가 거꾸로된 세계의식인 종교를 생산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거꾸로된 세계(eine verkehrte Welt)이기 때문이다.28) 또 그가 이해하는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심정이다.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적 비참은 ... 현실적인 비참의 표현이며 현실적인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29)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종교비판은 시초에 그것의 후광(Heiligenschein)이 종교인 통곡의 계곡에 대한 비판이다."30)
또 그에게 철학의 과제는, 인간적 자기소외의 거룩한 형상(das Heiligengestalt)이 가면벗겨진 후, 거룩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는 자기소외들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다. 그래서 하늘에 대한 비판은 땅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고, 종교비판은 법비판으로, 신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비판으로 바뀐다는 것이다."31) 포이에르바하에서처럼 마르크스에 있어서도 인간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이 최고존재라는 학설과 함께 끝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유일하게 실제적으로 가능한 독일의 해방은 인간을 최고의 존재로 선언하는 이론의 입장에 선 해방이다."32)
2. 종교적 소외와 극복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종교는 상부구조에 속하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존한다. 다시말하면 법률, 종교, 예술, 학문등과 같은 상부구조는 경제적 토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념, 표상, 의식의 생산은 먼저 직접적으로 물질적인 활동과 인간의 물질적 고통, 현실적인 삶의 언어와 얽혀 있다." "인간은 그의 표상과 이념등의 생산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은 그의 생산력의 특정한 발전을 통하여 조건지워져 있다. ... 의식은 의식된 존재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고, 인간의 현실적인 생활과정이다."33) 마찬가지 의미에서 도덕, 종교, 형이상학, 그밖의 이데올로기들과 이들에 상응하는 의식형태들은 거짓된 자립성(Schein der Selbst ndigkeit)을 더 오래 보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의식이 삶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34) 본 논문에서는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소외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사유재 문제이다. 사유재가 소외의 근원적 원인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삶의 점유Aneignung)인 사유재의 적극적인 지양은 모든 소외를 적극적으로 지양하는 것이고, 종교, 가정, 국가 등에서의 인간을 그의 인간적인, 즉 사회적인 존재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종교적 소외는 그 자체로 인간내면의 의식영역에서만 생기지만 경제적 소외는 현실적인 삶의 소외이다. - 떄문에 소외의 지양은 양편을 포함한다."35) 그렇다면 종교적 소외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에 의하면 오직 새로운 생산양식에 의거하여 인간관계가 이성적으로 될 경우에만 종교적 소외가 없어진다. 즉 "실제적인 일상적 삶의 관계들이 매일 투명하고 이성적인 인간상호관계와 자연과의 관계를 나타내자 마자 일반적으로 현실적인 세계의 종교적 반사는 사라질 수 있다. 사회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형태는 자유롭게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들의 산물로서 그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에 따르는 감독아래 있을 때만 그 신비적인 안개의 베일을 벗는다."36) 그에 의하면 맑고 이성적인 생산관계는 노동분업의 지양과 사유재의 포기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또 계속 늘어가는 자본이 소수의 자본가에게 축적되고 집중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가 늘어나고 비참해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부조리는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제거되어야 하고, 계급없는 사회라는 완성된 공산주의의 사회형태가 오기까지 과도단계로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분업과 경제적 소외가 없어지고, 지배계급의 억압기구인 국가, 민족(국가)간의 갈등관계, 위안수단으로서의 종교도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종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폭력으로써 제거할 필요가 없게된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종교에 대한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적인 새로운 사회질서가 도입되면서 종교의식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37)
3. 인간해방과 종교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마르크스의 [유대인 문제](Zur Judenfrage)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대인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은 청년 헤겔학파를 주도하던 바우어(Bruno Bauer)의 두개의 논문에 관하여 언급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논문에서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바우어의 비판에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하면서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견해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종교비판에 사용한 방법을 국가와 정치비판에 적용시킨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헤겔의 사상을 유물론적으로 전환시킨 것을 비판하지는 않으나 형이상학적인 취급방법과 절대정신의 자리에 영원한 인간적 본성을 대치시킨 점을 비난한다. 마르크스는 종교비판, 특히 유대인 비판에서 포이에르바하와 바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마르크스의 독일유대인에 대한 비판은 지금 다루려고 하는 [유대인 문제]와 [신성가족](Die Heilige Familie,1844-45)에 실려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있어서 종교로부터의 국가의 해방은 현실적인 인간의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을 구별한다. 또 그는 국가를 종교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한다. 바우어에 의하면 유대인은 철저하게 유대교로부터 해방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는, 유대인은 완전하게, 모순없이 유대교로부터 절연하지 않고서는 정치적으로 해방될 수 없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물론 정치적 해방은 큰 진보이나 인간적 해방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고 이제까지 있어온 세계질서 안에서 인간적 해방의 마지막 형태가 아니다." "인간은 종교를 공법으로부터 사법(das Privatrecht)으로 추방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종교에서 해방된다." 또 "종교는 이기주의 영역이며 만인적대관계(bellum omnium contra omnes)의 영역인 시민사회의 정신으로 되어 버렸다."39) 맑스가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시민적인 민주사회(b rgerliche Demokratie)의 본질적인 성격을 우리는 대략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IV. 니체의 '허무주의적' 윤리학
철학사적으로 살펴보면 19세기말경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생철학'(Lebensphilosophie)이라고 불리는 철학사조가 있었다. 이 철학적 전성기에 속하는 사상가로서 우리는 니체를 포함하여 쇼펜하우어(Schopenhauer), 딜타이(Dilthey), 짐멜(Simmel), 베르그송(Bergson), 클라게스(Klages),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를 들 수 있다. 이 사조에서는 소크라테스이래 서구철학사에서 부각되었던 이성적인 인간상이 아니라 감정,열정,기분,충동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인간상이 강조된다. 쇼펜하우어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니체의 무신론은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그것과는 다르다.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마르크스가 인류의 평등의 실현을 설파하는데 비하면 그의 무신론은 이기주의적이라고 할만큼 편협한 데가 있다. 그는 사르트르(J.P.Sartre)와 까뮈(A.Camus)처럼 신이 인간의 자유와 개인적인 자기발전을 제약하고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신의 죽음'을 선포한 무신론자였다. 이제 필자는 그의 초기저술인 [즐거운 학문](188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허무주의(Nihilismus) '허무주의'라고 번역되는 독일어의 Nihilismus는 라틴어의 어원 'Nihilum'에서 유래하며 '없음'(無)을 뜻한다. 허무주의는 존재를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무'로 해소시킨다. 허무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은 회의주의적인 사유방식이 과격화하여 마침내는 절대부정의 입장을 취하는데 있다. 즉 실재,신앙,도덕등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온갖 질서, 이상이 부정되지만, 이것을 대신할만한 새로운 것이 생기지 않은 상태, 말하자면 무정부 상태이다. 또 허무주의에서는 절대적인 존재나 진리, 어떤 가치자체도 부정된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허무주의를 다음과 같이 여러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존재론적인 허무주의는 실체적인 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니체자신은 허무주의의 의미를 "최고의 가치가 몰가치화한다는 것,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왜'에 대한 대답이 없다"라고 규정한다.(Der Wille zur Macht, 2). 이와 관련하여 비관주의(Pessimismus)는 허무주의 전형태(Vorform)이다.(위의 저술, 9) 또 허무주의는 '영겁회귀'와 관련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존재(Dasein)는 의미와 목적이 없이, 그러나 무로 향한 종점이 없이(ohne Finale ins Nichts) 피할 수 없이 회귀한다. 즉 이것은 (필자첨자) '영겁회귀'(die ewige Wiederkehr)이다."41) 그러나 그의 허무주의는 '나와 나의 세계', 저승보다는 이승, 초월적인 가치보다는 현실적인 가치와 삶을 긍정하는 운명애(amor fati)의 사상을 담고 있다.
2. 종교와 신의 부정 니체는 인간과 그의 자유를 위해 신의 부재(不在)를 요청한다. 여기서 그의 의도는 인간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데 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의 자기부정을 초래하는 것이고, 신의 생(das Leben)에 반대되는 것이고 모순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적인 철학의 등장과 함께 이와 같은 순수함과 인간다움이 상실되고 생에 적대적인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적 위선과 도덕적 가식이 인간의 생을 안팎에서 제한하고 억누른 결과 인간이 병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이래의 주지주의가 형이상학을 유럽역사에서 적대적인 세력이라고 낙인 찍는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계승한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형이상학과 온갖 도덕적 기준으로써 삶을 제한하는 내세적이고 목적론적인 그리스도교의 교의(Dogma)가 적대세력 중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44) 니체에 있어서 "종교의 기원은 낯선 것으로서 인간을 놀라게 하는 힘의 극단적인 감정에 있다." 그리고 "종교는 '인간성을 왜곡하는'(alt ration de la personalit ) 경우이다."45) 종교 뿐만 아니라 도덕과 철학도 인간이 퇴폐(d cadence)이다. 종교에서 '거룩한 속임수'(die heilige L ge)는 원리적으로 행위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행위의 목적은 자연목적과 도덕목적으로 나뉘고, 전자에서는 이성(Vernunft)이 볼 수 없게(unsichtbar)되고 후자에서는 법의 실현, 신에 대한 섬김이 목적으로서 나타난다. 행위의 결과에서는 자연적 결과가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유익한"(n tlich), "해로운"(sch tlich), "생을 촉진하는"(lebensf rdernd), "생을 감소시키는"(lebensminde- rnd)과 같은 자연개념으로부터 전적으로 분석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46)
이러한 '거룩한 속임수'는 다음의 기능을 갖는다. 첫째, 이 속임수는 응징하고 보답하고 신을 만들고, 이 신은 사제들의 법전을 면밀하게 인정하고 사제들을 그의 입부리(Mundst ck)와 위임자로서 세상에 보낸다. 둘째, 생의 저편을 만든다. 이 안에서 벌을 주는 큰 기계가 비로소 작동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목적을 위해 영혼의 불멸이 설정된다. 셋째, 선과 악이 확고히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식으로서의 인간 안에 있는 양심. 양심이 사제의 지침과 일치를 이룰 것을 권고할 때 신 자신이 여기서 말한다는 것. 넷째, 모든 자연적인 경과의 부정, 모든 발생(사건)을 도덕적으로 제약된 발생으로서 환원시키는 것으로서 도덕. 세계를 관통하고 유일한 권세이며 모든 변회의 창조자로서의 도덕적 작용(즉 벌과 상이라는 이념). 다섯째, 계시된 것으로서 사제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이승과 저승의 삶에서 모든 구원과 행복의 조건으로서 주어진 진리.47) 이어서 니체는 이교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구별한다. 이교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의 긍정이며 자연적인 것 안에서 죄가 없다고 느끼는 감정, 즉 자연성(das Nat rlichkeit)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이와 반대로 자연적인 것의 부정, 자연적인 것에서 가치없다고 느끼는 감정, 반자연성(die Widernat rlichkeit)이다.48) 이제 신의 사망을 선고하는 그의 절규를 들어보기로 한다. 니체가 언급하는 19세기의 신은 그리스도교와 형이상학의 신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니체는 모든 종교와 신화에서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제조건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긍정과 초현실의 부정이다. 예를들면 그리스신들이 등장하는 호메로스 작품에서의 신들은 그리스도교의 신과는 다르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고대의 종교는 의무나 금욕 혹은 정신성(Geistigkeit)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이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현존(Dasein)이 강조되고 풍요한 삶의 감정이 제의(Cultus)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삶은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자체로 추구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파악된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신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속박하는 신이다. 이승의 가치, 이승에서의 인간의 삶, 즉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교적인 신은 죽어야 한다. 신의 죽음은 다음과 같이 선포된다. "미치광이 - 너희는 해맑은 오전에 등불을 켜들고 시장으로 달려가 계속하여 '나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고 외친 미친 사람에 관하여 듣지 못했느냐 - 거기에는 신을 믿지않는 대다수 사람들이 모여서 있었으므로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이 실종되었는가?라고 한 사람이 말했다. 신이 아이처럼 길을 잃었는가?라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혹은 신이 숨었는가? 그가 우리를 두려워 하는가? 그는 배(船)에 올랐는가? 이주했는가? - 그들은 요란스럽게 소리지르면서 웃어댔다. 미친 사람은 그들 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은 어디로갔는가?', 우리-너희와 나-는 그를 죽여버렸다는 것을 너희에게 말하고자 한다고 그는 웨쳤다. ... 신은 죽었다!(Gott ist todt!)" ... 우리는 그를 죽였다!(Wir haben ihn get dtet!)49)
니체에 있어서 신의 죽음은 인간이 초인으로 고양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너희 지고한 인간들이여, 신 앞에서! -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 이러한 신은 너희의 가장 큰 위험이었다. 신이 무덤에 누은 이래, 너희는 비로소 다시 부활했다. 이제 비로소 위대한 정오가 도래하고 지고한 인간 -주(Herr)-이 된다."50)
3. 삶의 긍정, 힘에의 의지. 초인 이승의 삶, 인간적인 삶을 강조하는 니체의 의도는 그의 저술의 여러곳에서 나타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성자이기보다는 어릿광대이고 싶다. ... 아마도 나는 어릿광대일 것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hung aller Werthe) 이것이 내안에서 살(Fleisch)과 천재(Genie)인 인간성에 대한 가장 높은 자기규정의 행위를 위한 나의 형식(Formel)이다."51) 마찬가지 의미에서 "모든 운동은 자발적인 운동이어야 하고 새롭고, 미래적인 더욱 강한 운동이어야 한다."52) 그가 강조하는 삶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소유함과 더 소유하고자 함, 한마디로 표현하여 성장(Wachstum) - 이것이 삶자체(das Leben Selber)이다."53) 그는 삶을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와 동일시한다. 즉 "삶은 힘에의 의지이다."54) 그는 삶의 의지를 여러 표현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희생(Opferung)과 봉사가 있는 곳에 주인이고저하는 의지도 있다."56)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그러나 삶에의 의지가 아닌 ... 힘에의 의지이다."57) "의도에서 나온 모든 발생(Geschehen)은 힘을 증대하려는 의도에 환원된다."58) "모든 '목적'(Zwecke), `목표'(Ziele), '감각'(Sinne)은 모든 발생에 부착되어 있는 한 의지인 힘에의 의지의 표현방식이며 변화(Metamorphosen)일 뿐이다. 목적을 가짐, 목표를 가짐, 의지일반은 더 강하게 되기를 원함, 성장을 원함, 또 그것에 대한 수단을 원함과 마찬가지이다."59) "힘에의 의지는 원초적인 정서-형태(Affekt-Form)이고, 다른 모든 정서는 원초적 정서의 형성물(Ausgestaltungen)이라는 것이 나의 이론일 것이다."60) 니체에 의하면 힘에의 의지는 다음의 경우에 나타난다고 한다. "초인은 나(필자주:니체)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고,나의 첫째 것이며 유일한 것이다."63) 니이체는 그리스도교가 내세우는 인간상을 반대하는 동시에 근세적 인간을 비판하려 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인도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극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이 극복된 인간이 바로 초인이라고 생각한다.64) 초인은 대지(Erde)의 의미이다. 니체는 대지를 창조하는 힘, 즉 Poiesis로 생각했다. 인간의 본질은 창조하는 자유에 있다. 대지는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들에게 현존을 선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대지에서 성장한 것으로서 대지의 형성물이다. 이러한 대지의 삶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다. 초인은 모든 저승의 꿈을 거부하고 대지로 향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자이다.65)
V. 무신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
이제까지 필자는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의 무신론적 사상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들 사상가의 무신론에 관하여 19세기라는 한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의 종교비판에서는 '종교'와 '신'문제가 중심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적 신이 비판의 과녁이다. 서양 근세의 무신론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생겨난 무신론이다. 그러므로 근세의 모든 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배경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무신론은 영국의 경험론과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주의에 근원을 두고, 19세기의 실증주의, 물질주의에서 지속되면서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 니체에 와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무신론자들이 인간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반대하는 신은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빼앗고, 인간의 소외를 가져오는 신이었다. 종교비판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서가 제시하는 신 및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적으로 이해된 신과 제도화한 교회 및 그 도덕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종교비판을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종교와 신학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그리스도교와 신자들)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자아비판의 내용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교회와 신학이 대체로 인간을 희생으로 삼아 신을 옹호하고, 이승을 희생하여 저승을 옹호하지는 않았는지? 둘째, 이원론적인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이승, 신체를 경시하는 풍조가 전체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통하여 있어오지 않았는지? 셋째, 마찬가지 의미에서 인간의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을 경시하지 않았는지 하는 점이다. 넷째, 신과 그의 말씀과 행적을 신의 본질보다는 인간의 현실에 더 맞게끔 형상화하고 형식화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스스로 던지면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깊이 통찰하고 논구해야 할 것이다.66)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종교를 있게끔 한 생산관계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저승에 대한 신앙을 갖게되는 인간소외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극복의 과제는 물론 철저한 혁명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믿음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인간과 사회현실이 경제적으로 제약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지당한 것이나 세계관적인 경제주의로 까지 비약한 것은 옳지않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학문적으로 철저한 분석가이기 보다는 이상주의적인 혁명가라고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종교없는 미래를 사회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상정한데서도 드러난다.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편파성을 면할 수 없다. 그는 성서적인 신과 인간에 관한 이해, 그리스도교의 복음서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진지하게 논구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역사적인 업적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또 성직자, 신학, 교회의 특정한 형태로부터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추론해내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있었던 국교나 교회의 역기능에서 이들의 본질을 규정해 내려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을 계기로 교회와 신학이 짊어지게 된 과제는 종교(특히 그리스도교)가 현세적 지배에 봉사하지도 않으며 불의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68) 그러므로 그의 종교비판은 직접적으로 당시의 유럽문화를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그의 무신론은 우선 그리스도교 비판에 기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비판은 그의 문화비판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신개념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계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그 체계와 제도에 대한 비판을 견디어 낼 수 있으려면 인간의 삶에 가까운 가르침과 그 구조에 있어서 인간을 위한 소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니체의 '신의 죽음'이라는 사망선고는 현대의 死神神學(Gott-ist-tot-Theologie)을 비롯한 현대무신론에 자극을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이와같은 선언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물론 분분하여 한가지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니체가 인간을 드높이기 위해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이고, 오히려 신에 대한 깊은 동경심을 가졌으며 신없이는 인간이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70) 또 프리스는 '신의 죽음'을 '신에 관한 특정한 이해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71) 독일의 가톨릭 사상가로서 하이데거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뷀테(Welte)는 니체의 '신의 죽음'의 문제가 그의 사상에서 중심을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그 역시 비저(Biser)처럼 신의 죽음의 문제를 문화사적인 현상에서 판독하고자 한다. 즉 그는 니체의 선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자 한다. "니체의 무신론은 결국 인간의 본질자체에 깊숙히 놓여 있다. 특히 그의 의지에 깊숙히 놓여있다: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므로, 신이 없기를 원한다.' "72)
이와같은 의미에서 니체는 인간적인 차원, 즉 무한한 삶의 차원, 신적인 공간의 차원으로 지향할 것을 인간에게 요구한다고 뷀테는 이해하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인 드 뤼박(de Lubac)에 의하면, 니체는 '무신론자와 반그리스도교 신자'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문화의 예언자이며 새로운 인간상을 요청하여 관철하려는, 포이에르바하에 정향되고 소펜하우어를 통하여 중개된 종교비판의 대표자이다. 드 뤼박은 니체의 무신론을 그의 저서명처럼 '신 없는 인도주의의 비극'이란 범주에 넣어 비판한다.74) 이상에서 보았듯이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의 종교비판에 대한 반비판이 가능하고,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변신론적인 논지를 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 사상가들에 대한 더욱 깊은 연구를 통하여건설적인 대화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무신론자의 논변은 사회와 신에 대한 신앙사이의 역사적 및 사회적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구체적인 종교형태, 특히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역사적인 형태는 역사적인 사회상황 및 정치상황과 밀착되어 있다. 때문에 '왕좌와 제단' 사이의 동맹관계가 있었고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주의적인 국가형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75)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나 교회의 본질이 특정시대에 나타났던 이들의 외형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신론적인 사상의 이의와 문제제기에 대하여 새로운 질문과 답변의 방법의 찾는 일이다. 각주) 1) Maximillian Rast, 항목 'Atheismus', in Walter Brugger편, Philosophisches W r- 9) Feuerbach, 앞의 책, 38쪽 0/41, MEW Erg nzungsband I, 305쪽 eutsche Ideologie, 349쪽. 47) Nietzsche, 앞의 책, 106-107쪽 uen Wertsetzung, 465쪽, 688 der. Freiburg. Basel. Wien 1968 참고문헌 1. Biser,Eugen: Gottsucher oder Antichrist? Nietzsches provokative Kritik des rt a.M. 18. Steffen,Hans 편: Nietzsche, Werke und Wirkungen, Vandenhoeck & Ruprecht 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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