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스크랩] 하나님은 왜 영원한가?

하나님아들 2017. 6. 12. 21:48

목 차

Ⅰ. 시작하는 말
Ⅱ. 하나님이 영원하신 이유
1. 언약을 성취하시기 때문
2. 생명을 주관하시기 때문
3. 교회를 보호하시기 때문
Ⅲ. 마무리하는 말
------------------------------
Ⅰ. 시작하는 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롬16:25~27)

연구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연구하는 대상이나 내용이다. 그래서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을 연구하게 되고, 역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를 연구하며, 세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연구 대상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성경에 증거되는 신이다. 전통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신관을 다양하게 정립해 왔는데, 그 중의 대표적 신관이 소위 삼위일체론적 신관이다. 즉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인 동시에 성자 하나님이시며, 성령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 교리에 대한 반박이나 반론을 제기하면 이단이 될 정도로 기독교의 기본진리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이 교리가 성경적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 계시의 근본 목적이나 결과를 성경전체의 흐름에 근거하여 원리적으로 잘 집약된 것이 아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 계시의 방법에 치중되어 집약된 교리이다. 그런데도 이 교리가 역대의 신학에 미친 파장은 매우 컸다. 지금도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의 큰 어려움으로 남아 있다. 그 어려움은 바로 원리를 잡지 못하고 방법에 치중된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비하여 성경에서 농도 짙게 증거되는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은 그 구호보다는 실제에 있어서 의미가 약화되고 그것의 성경적인 의미가 그대로 증거되지 못했다. 기독교에 있어서 영원이나 여호와의 의미가 대단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교리에 얽매여 성경전체의 흐름에 비추어 잘 정돈되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전체의 내용을 기반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은 영원한 여호와이시다”라고 하는 주제는 바로 신학의 난제들을 원리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가 되며, 성도의 삶의 원동력이다.

대개 여호와라는 의미가 언어학적 뜻 자체에 몰입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되고 있다. 스스로 존재하는 분으로 설명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주로 강조하는 것이지 존재 원리는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시간․공간․형상․수 등 역사를 초월해 존재하는 분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원리를 비교적 포괄적으로 증거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원리는 구약과 신약의 내용인 여호와의 언약 성취 내용이 그것을 체계적으로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여호와라는 성경신학적인 의미는 언약대로 성취하는 영원한 신이라는 것인데, 여호와는 의미상 영원이라는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여호와께서 언약하고 성취하는 근거나 성질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근원적으로 연구하여 궁극적인 해답을 얻는다는 것은 그 문제의 근거와 이유를 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왜 영원하신 분인가? 라고 하는 질문은 성경의 주제와 아울러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은 바로 전통신학의 난제로 남아 있는 삼위일체의 교리룰 성경적으로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관건이 된다고 생각된다. 이에 ‘하나님이 왜 영원한 여호와인가’를 성경을 근거로 하고, 아울러 성경 내용에 근거해 성경신학의 원리와 기초가 되도록 성경 전체를 조감하여 정리된 성경개론(박용기,진리의말씀사,1994)을 참고서로 삼아 알아 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이유를 성경의 기본 내용인 동시에 성경신학의 원리인 여호와의 언약 성취를 그 기저로 삼아 논증의 유기적 관계상 몇 가지로 나누어 서술할 것이다.

Ⅱ. 하나님이 영원하신 이유

1. 언약을 성취하시기 때문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렘33:14)

하나님이 영원하신 여호와가 되시는 이유와 근거는 하나님께서(천상에서) 하시는 언약과 성취의 성질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 여호와의 영원한 언약 성취가 실체적으로 증거된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해 주는 구약의 근거는 구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을 언약해주는 내용이고, 또 신약의 근거는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을 성취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영적인 것이지 결코 육적인 것이 아니다. 육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영원하심을 오해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친밀하거나 일체임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에서는 부자관계와 부부관계로 비유하였다. 그 대표적 예가 영원하신 하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관계로 표현된 것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부부관계로 비유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의 근본적인 대상이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달리 또 다른 한 분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신 여호와이심을 증명할 목적으로 계시하신 영원한 언약과 성취의 근본 대상인 동시에 주체이다.(요한복음에서 많은 근거를 얻을 수 있으며, 한 예로 1장 1절을 참조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을 언약함.
구약의 언약은 내용의 특징상 크게 세 부분으로 분석된다. 창세기에서 에스더까지는 섭리를 통한 언약이고, 욥기서에서 아가서까지는 찬양을 통한 언약이며, 이사야서에서 말라기서까지는 예언을 통한 언약이다. 이렇게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언약된 각각의 근본 내용은 동일한 것이다. 그 내용(대상)은 바로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아나 예수 그리스도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논증의 성격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된 의미와 목적이 성경적으로 밝혀진다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언약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언약한다는 의미는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이 온다는 것(계시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영원하시는 것과 아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는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의 아들을 언약하고 예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내용의 흐름이 성경 본래의 의미로 드러날 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에게도 아들이 있는가? 성경은 분명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고 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강조하여 증거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마가복음 1장1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성경에는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고 있는데,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된 것의 성경적 의미와 목적에 달려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관계가 일단 육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임을 성경을 근거로 하여 전제할 수 있다. 육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 그리고 수 등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바로 위에 열거한 시․공․형․수 등을 초월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와 결부되어 성도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는 의미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근거해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시어 시․공․형․수 등을 초월하여 출현한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임을 증거해 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하나님이라고만 칭해지거나 그렇게 드러나지 않고 외관상 복잡하도록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관계로까지 연관되어 계시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관계처럼 아버지를 통해 아들이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유출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상의 난점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유출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성령이 유출되었다는 식으로 정리한 학설(영지주의의 유출설)도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를 통한 계시는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성취함을 계시하는 방법으로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자기의 언약과 성취가 근본적으로 누구를 통하여 이루지 않는다. 전능하시고 절대적인 분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그 누구에게 언약하시거나 그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실현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적인 의지를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가 계획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을 친히 이루시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언약과 성취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시․공․형․수 등의 역사적인 성격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그 드러난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나 근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면 반드시 이루신다는 여호와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관계로 계시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약속을 하면 가장 잘 이루어 주는 관계의 표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도록 하는 것을 들어서,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인간을 사랑한다는 점에 가장 큰 의미를 둔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죽게 되는 것은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두기 보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더 중점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고15:28,갈3:15~20등).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언약했다는 의미는 시․공․형․수 등 역사성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언약했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언약한 목적을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3대 언약(자손,땅,왕)을 복으로 주셨다. 이 언약들은 후대 이스라엘 열조들에게 계승되었고, 이 언약들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언약이 성취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되는 그리스도를 언약하고 성취하는 영원한 언약을 계시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오실 것을 예고해준다는 의미에서 언약이고 오신 후에는 시간상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언약과 성취는 이러한 시간상의 전후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신 여호와됨을 계시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대상으로 삼아 언약하고 성취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자신에게 언약하고 성취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시․공․형․수 등에 의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이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 아들을 구약에서 언약한 것은 인간을 구속할 구원자로서 메시아를 보낸다는 의도보다는 자기를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낸 가장 큰 목적을 인간 구원에 둔다면 하나님이 자기가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이 되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근본 목적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성령강림도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성령이 강림한 것은 구약에 약속되었고(욜2:28~32), 또 신약에서 예수님 자신도 자기가 가시면 성령이 온다고 약속했다. 이 모두는 성경에 약속된 대로 이루어짐으로 자기의 영원한 뜻을 이루어 나가심에 역사의 중간 중간에 발생되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 때문에 방해를 받아 원래 계획하신 뜻을 이루지 못하는 세상적이고도 역사 속에 갇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을 성취함.
신약의 성취는 내용의 특징상 크게 두 부분으로 분석된다.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는 예수를 통한 성취이고, 사도행전에서 계시록까지는 성령을 통한 성취이다. 이와 같이 각각의 두 부분이 성취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성취되는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그 성취 내용은 구약의 언약 내용(대상)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에 언약된 내용이 신약에 그대로 성취된다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증거해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성취한다는 말이 조금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 될 지 모르지만, 이렇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언약한 하나님과 그 언약을 성취하는 하나님은 분명히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신약의 성취가 모두 구약에 언약된 그 아들을 성취한다는 의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왔다는 것이다. 신약의 모든 내용이 구약의 모든 내용과 결부되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 즉 구약에 언약된 하나님의 아들 자격으로 왔으며, 그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어 왔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햬 온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세월동안 메시아가 온다고 약속이 전해지다가 실제로 오랜 세월을 뛰어 넘고 오랜 세월동안의 모든 여건에 의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그대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역사성을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임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인간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를 입고 왔다는 것보다, 구약의 모든 예언의 내용대로 메시아가 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육신의 몸을 입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원성을 증명해 주는데 중점이 된다기보다는 구약의 모든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취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성을 더 잘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관계가 육적인 관계가 아니고 영적인 관계인데, 예수는 이 땅에 오실 때 인류의 모든 인간과 성질상 동일한 육체를 입고 온 것이다. 육체를 입고 왔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육체를 초월해 계시는 영원한 분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수는 자기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했는데(요14:9), 육신 그 자체를 보고 영원한 하나님을 보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땅에 오셨을 때 육신 그 자체를 본 사람은 많았지만, 그들이 모두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아 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아본다는 의미는 욥이 어려움을 겪고 나서 과거에는 하나님을 귀로만 듣더니 이제는 눈으로 보옵나이다(욥42:5)라고 고백한 의미와도 통한다. 예수가 이 땅에 왔다는 진정한 의미가 공간상으로 어느 곳에 계시다가 이 땅에 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적인 존재자가 육적인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그 본질을 육적 존재자로 볼 수 없다. 성경에서 사용된 표현은 성경자체의 의미에 근거해 해석될 때 올바른 해석이 주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5:8)라고 했을 때, 여기서 사용된 ‘본다’라고 하는 것이 육신을 입고 온 예수 형상을 본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와 함께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청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 육신의 형상은 보았지만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진정한 예수를 보지 못하면서도 도덕적이거나 육신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본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책망한 적이 있다(요9:41). 이러한 내용만 보더라도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왔다는 내용으로 집약된다고 했을 때, 그 의미가 영적이며 언약 성취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함이 분명하다. 단순히 육신을 입고 온 예수를 보고 그 당시의 예수 비난자들이 예수가 죄인과 세리와 함께 한다고 손가락질 한 내용이 성경에 있다. 이것은 구약의 성경을 여호와의 언약으로 바로 보지 못한 결과들이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성취한다는 의미는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 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왔다라고 표현된 것이 공간상의 이동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성취한 목적을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스라엘 열조들을 통해 오실 메시아를 구약에서 언약하셨다. 구약의 오실 메시아 언약을, 신약에서는 예수가 오심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 증거는 오신 예수와 강림한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구약의 언약은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역사적으로 언약이 이루어지는 그 내용은 바로 장차 영원한 언약의 내용(대상)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언약하는 필수불가결한 한 요소가 된다. 신약에서 역사적으로 예수가 오시고 또 성령이 강림한 것은 구약의 그 모든 언약이 영원한 하나님이 메시아로 오심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데 또 예수와 성령이 오고 한다는 내용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신학상에 큰 혼선을 빚어 왔다. 이 모든 혼선은 예수가 육신의 몸을 입고 온 근본 목적을 구약과 신약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이해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결과들이다. 또한 성령이 강림한 근본 이유와 목적을 오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드러내려는 성경의 전 포괄적인 목적을 간과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나누어 그것들을 분리시켜 연구함으로써 신학상의 엄청난 난제들이라고 보고 다룬 서적들이 많이 나와 있다. 예수가 오시고, 성령이 강림한 것은 성자 하나님이 그 자신의 특성을 지니고, 성령 하나님은 또 그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그 성격과 특징 그리고 의미를 각각 부각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보다는 역사적인 하나님으로 또 소위 말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격하시켜 본 것이다. 성경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묘사된 것은 계시의 방법과 현상으로 사용된 것이지 계시의 목적이 소위 하나님이 삼위일체되심을 드러내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묘사된 것은 하나님은 언약하시고 언약의 내용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영원하신 여호와되심을 드러내는 목적의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아들을 언약하고 그 영원한 언약의 성취 확증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러한 구약과 신약의 전체 연결 목적에 의미를 둔다면 소위 난제라고 알려진 시편 2편7절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것도 사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성경관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인간 구속을 드러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언약하시고 성취하시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다. 결국,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언약하고 성취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영원한 여호와 되심을 계시하는데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를 초월하여 자기를 영원하신 분으로 계시한다.

2. 생명을 주관하시기 때문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신30:19~20)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라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모든 생명의 주인이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생명이라는 뜻을 사람이 나서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는 활동의 현상으로 이해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그런 뜻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사용된다. 요한복음 17장3절에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알고 또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성경은 ‘원리서’이지 어떤 현상을 말해주려는 현상학 차원의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그의 하시는 일의 원리를 밝혀 주고 있다. 그 원리는 모두 영원하다는 것과 연관된 의미로 드러난다. 생명은 근원적인 것이지 현상을 가리키는 생명체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현상을 놓고 그 근본을 알지 못하는 데 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힘주어 나타내고 있다.
생명은 이해하는 절차상 영혼의 생명과 육신의 생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육신의 생명은 유한한 것이요 영혼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없는 유한한 육체 자체만의 생명을 두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영과 육이 결합되어 있는데, 죽게 되면 영과 육이 분리된다. 분리되어 육은 없어지지만 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섭리함에 있어 그 중심이 영에 있기 때문이다.

1) 인간의 영혼을 창조함
하나님 창조의 핵심은 인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창세기의 중심 내용을 그 제목대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으로 본다. 이것도 창세기의 근본 내용를 보지 못하고 지엽과 현상을 본 결과이다. 사실 창세기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인간의 창조도 하나님의 근본적인 영원한 언약을 드러내는 목적의 과정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선민의 열조들에게 주어졌다. 이렇게 인간 창조의 의미는 하나님의 언약과 연계될 때 진정한 의미가 주어진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로 영원하신 분인데, 인간이 영적으로 창조됨은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남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함에 있어서의 그 핵심은 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조와 대표격인 아담의 영을 창조함에 있어 언약의 근본대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삼아 창조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영원한 언약의 근본 대상인 예수의 영과 아담의 영이 역사성을 지닌 수적인 둘로 지음 받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명은 그리스도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하셨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도외시된 채 각종의 생명론이 난무하고 있다. 근원을 알아 내지 못한 모든 학문은 한갓 현상학에 불과하다. 과학이 정자의 난자의 결합으로 생명체가 되는 것으로만 보고 하나님의 생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근본이 빠진 현상학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통계학과 과학으로 치닫고 있다. 또한 성경에 깊은 뿌리를 두지 못하는 일부 신학계에서도 근본이 제거된 통계학과 과학에 맹종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남자와 여자의 결합)처럼 착각하는 이 현상 앞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면 미친 사람으로 지목받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인 성경은 사람으로 잉태하게도 하고 잉태치 못하게도 하는 생명의 주관자로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태(胎)를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성경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나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태를 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성취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루진 사실들이다. 이렇게 볼 때 성경에 밝현진 인간창조나 잉태사건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근본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계시하는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서 기자는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너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11:5)라는 말씀으로 핵심을 찔러 잘 증거해주고 있다. 이러한 성경이 도외시되니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는 사주학이 진리가 전해지지 않는 곳에서 판을 치고 있고, 그것과 관련된 서적들은 날개 돋치듯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주학은 인간의 진정한 주관자와 시간의 주관자를 알지 못하는 현상학이며 통계학이다. 소위 사주(四柱)라는 것은 네 개의 기둥이라는 뜻인데, 엄마의 태로부터 나오는 연․월․일․시가 인간 운명의 네 기둥이 된다는 것이다. 사주학에 대한 근본적인 반문으로 인간이 엄마의 뱃속에서 나올 때가 그 인간이 출발되는 시각인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에는 생명이 아닌가? 위에 인용한 전도서 기자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인간 육체의 시작뿐만 아니라 중생되는 것도 그 시점을 잘 모르도록 하셨다(요3:8). 이것은 바로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준비하시고 인도하며 심판하시는 영원하신 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생명의 주관자로 더 나아가 영원한 여호와로 계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까지만 살펴보아도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세 전에 작정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만세 전에 작정되어 창조된 인간이기에 영원한 하나님을 알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영혼의 주요한 기능은 인식 기능이다. 그래서 이 주요한 인식 기능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며 보게 된다. 영원한 하나님을 알고 본다는 것은 이미 감각 기능을 뛰어넘는 차원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 자요 모르는 자는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자는 하나님을 영원한 여호와로 알아 경외하게 된다.

2) 인간의 영혼을 심판함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또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까지 하신다. 성경에는 인간을 악인과 복 있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악인과 복 있는 사람의 기준은 그 사람의 도덕이나 윤리적 삶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창조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은 지음을 받으며 인간은 이에 항거할 수 없는 존재이다(롬9:19~21). 하나님의 창조는 곧 심판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8절에는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는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증거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심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동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심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어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의 구분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자기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인데, 이 문제에 의하여 악인과 선인으로 심판받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출생하여 이 땅에서 자기의 공로나 업적에 의해서 악인과 선인이 되지 못하도록 창세전 영원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로 구분하였다(잠9:22~31,엡1: 등참조).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모두 자기를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여 그 성도로 하여금 경외하게 하려는데 있다. 여호와를 알아 경외하는 자를 잘 되게 하신다는 내용이 잠언과 전도서에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여호와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 섬김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판단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서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 경외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향하게 되는 마음이 인간 스스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증거한다. 지혜자 복 주시는 여호와이신데, 성경에 나타난 지혜자는 궁극적으로 복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영원안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는 모두 지혜자들이다. 이 지혜는 참 지식으로부터 주어진다. 참 지식은 분별력이며 판단력이다.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별이며,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한 분별력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의 분별이다. 이 참 지식에 의하여 인간의 영혼이 총명하고 명철하게 된다. 총명은 마음이 밝고 맑아 하나님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바로 지혜로온 자이다. 이처럼 지식과 명철 그리고 지혜는 상호 유기적으로 근거가 되기도 하며 결과가 되기도 한다. 지혜롭고 명철하게 되는 것이 인간 노력의 결과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본 내용을 여호와의 언약과 성취로 보지 못하면 구호와는 다르게 명철하고 지혜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 결과로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실제로 성경 부분 부분에는 인간의 명철과 지혜를 구하라는 식으로 많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명령구들의 그 근본 대상자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요구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명령과 요구들을 모두 받아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앞에 내세우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성경의 모든 명령과 요구를 받는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이 천하에 어디 있겠는가? 이 점을 보더라도 성경의 하나님의 아들 언약과 성취라는 성경의 근본 내용은 다시 중요시 된다. 이 정도만 보더라도 성경은 인간에게 도덕적 지침이나 행동을 요구하는 일반적 차원의 윤리서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 개인의 인생 삶에 근거하여 심판하신다면 어느 누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할 때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 하실 때 역사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의 어떤 과정을 기준하여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동일하시게 원래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심판하시는 목적은 일차적으로는 심판주로 드러내심에 있고 궁극적으로는 한번 계획하시면 반드시 이루신다는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인간 영혼의 심판 목적이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는 결과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심판이 지금 흐르고 있는 이 시간의 흐름이 끝난 그 어느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으로 오심으로 영원한 심판이 이미 이루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한 것임을 알고 믿는 자는 이미 심판이 되었으니 아무렇게나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게 살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굴복되어 그를 경외하고 섬길 수밖에 없다.

3. 교회를 보호하시기 때문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임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교회가 지금도 존속하며, 교회를 통하여 진리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땅위에 존속되어 말씀이 전파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중요한 방편이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약속의 반석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어떠한 환난을 당하더라도 최후의 승리(요한계시록에 잘 증거됨)를 한다. 하나님은 자기가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이 되심을 계시하기 위해 교회를 끝까지 돌보시며 승리케 하신다.

지상의 교회에게는 반드시 환난이 있다. 환난이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교회의 환난은 복으로 약속된 것이기 때문에 환난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마5:11~12).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큰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의 지체인 성도들은 자연히 동참된 셈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교회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승리하는 중요한 한 과정이며 요인이다. 하나님은 교회에 환난을 주심으로 자기를 영원한 하나님으로 드러내시며, 성도로 하여금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모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교회의 승리는 곧 환난 속에서 건져내심을 당하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이 확증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를 보호하는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베드로가 주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처럼 말씀에 근거한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서만 가능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특히 고린도전서에 많음)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설립하시고 양육하시며 무장시켜 비진리와 싸우게 해서 승리하게 하신다(사도행전~계시록). 인류 역사의 중심은 교회이다. 역사의 중심되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저버리지 않고 세상끝까지 보호하시며 비진리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여 그를 영원토록 찬송케 하려는데 있다.

Ⅲ. 마무리 하는 말

기독교에 있어서 성경은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 기독교는 성경의 토대위에서만 기독교가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근본 목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점점 등한시 되고 다른 인본주의적 요소가 성경의 내용을 빙자하여 넘실거리고 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니 또는 역사적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려는 저의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중심이 인간의 구원이나 역사 자체를 드러냄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껍데기만을 본 것이지 알맹이를 보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성경은 신구약 모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 가지 모양과 부분을 통하여 계시해 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적인 근거를 언약과 성취에 두고 논술하였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근거에 따라 오는 부수적인 근거를 다시 두 가지로만 나누어 살펴보았다. 성경은 하나님을 영원과 관련시켜 증거해 주고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영원의 의미를 연구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왜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으로 증거될 수 있는가의 이유를 연구하여 확인해 감은 굳건한 신앙생활의 초석이 될 것이다.

무릇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3:14)

출처 : 동산교회 김승일 목사 신학자료실

출처 : 智本知神
글쓴이 : Healer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