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교회에서는 설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어떤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지 않았다. 개종한 모든 성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모든 은사가 있는 성도가 회중에서 기도하고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었다. 신약성경은 어떠한 영적 계급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신약성경은 비록 많은 이가 소명의식이 매우 부족했지만 모든 신자를 성도라 불렀다. 또한 신약성경은 하나님과 일반 성도를 매개하는 특별한 신분의 제사장을 알지 못한다.” (Schaff, History of Christian Church Vol 2, p. 118)
“지역교회에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교회의 일을 감독하고 이끌었고 구제사업을 관장했고 병자들을 돌보았고 예배가 정기적으로 드려지도록 신경썼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조직은 어느 특정 직분이나 법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고 대신 성령의 은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 성례를 집례하는 것들은 회중에서 은사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장로도 은사가 있으면 가르치고 설교하고 성례를 집례할 수 있었지만 그가 직분자라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은사가 있는 이들중 어느 누구도 은사때문에 교회법적으로 직분을 갖지는 않았다.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과 성례를 주관하는 것은 어떤 직분이 교회법적으로 하는 일들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회중에 있는 어느 성도라도 복음을 설교할 수 있었고 성례를 집례할 수 있었다. ” (Lars Pederson Qualben,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1936. p.94)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린도전서 1: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린도전서 14:26~32)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사도행전 6:8~10)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사도행전 8:5~6)
우리는 성경을 읽을때 초대교회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은 발견한다. 우선 설교나 가르침이 직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사에 의해서 행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들은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낮은 신분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즉 이들이 설교할때나 가르칠때 고도의 수사학이나 깊은 생각과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한 내용을 설교하거나 가르쳤다고 보기 힘들다. 이들이 설교하거나 가르칠때는 성령의 임재하심에 의해서 이들의 교육 수준과 상관없는 성령의 권능으로 하는 설교나 가르침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현대 교회의 설교는 30분짜리 설교를 위해서 20시간이나 들어간다고 하니 현대교회의 설교가 초대교회에서 행해진 설교나 가르침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이렇게 많은 수고와 노력이 들어간다니 현대 설교는 성령의 은사에 의한 설교가 아니라 사람의 노력에 의해 안나오는 것을 억지로 쥐어 짜는 식의 설교인 것 같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데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고민하는 소설가가 연상되는 것은 나뿐인가? 신약 성경의 어느 누구도 이런 이상한 은사 없는 사람이 설교자나 가르치는 자로 세워지지 않았다. 모든 성도에게 자비량을 권면했던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은사 없는 사람도 설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일하지 말고 설교 준비나 하라고 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냥 자비량하면서 다른 은사를 구하라고 했을 것이다.
또한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설교(Kerusso, Euaggelizo)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선언하는 경우였다1. 현대 교회의 설교는 늘 교회의 교인이 대상이다.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담임 목사를 본적이 있는가? 하지만 사실 현대 목사는 순회적 복음 전파자가 아니라 이방 교회내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상주 목회자와 더 가깝기에 이런 비교는 애초에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지역 교회에서 이미 믿는 성도에게 말씀을 전할 때는 가르침(Didasko)이라고 했다2. 하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가르침은 늘 질문과 대답을 동반하는 대화식 가르침이었다. 이것은 유대회당에서의 가르침에도 늘 나타나는 방식이었다. 유대회당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가르치고 배울때 이러한 방식을 썼었다.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초대교회도 이러한 대화식 가르침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또한 현대 교회에서의 설교와 거리가 멀다. 현대 교회에서의 설교는 일방적으로 말해지는 웅변식 설교다. 성도들은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설교를 쉽게 자신의 삶으로 내재화 시킬 수 없다. 이것의 증거는 학교 수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방적으로 말해지는 교수법은 지식의 전달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학생들이 집에서 스스로 복습하면서 되새기며 내재화 시키지 않으면 강의 내용은 거의 무용지물이다. 반면에 강한 상호작용이 있는 교수법은 학생이 질문과 답을 해나가면서 그 자리에서 수업내용을 내재화 시킬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교사의 머리로 상상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삶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가르치게 된다. 따라서 가르치는 것에 과도한 시간이 들어갈 필요도 없고 단지 자신의 신앙을 자신의 세속의 삶 가운데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교훈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즉 자비량하는 신실한 주의 종의 세속의 삶 가운데 빛과 소금으로 승리하는 실천적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30분을 위해 20시간을 들여 억지로 나오는 설교가 아니라 그의 삶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30분짜리 설교에 20시간이 들어간다는 이 현대교회의 일방적 웅변식 설교는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이것은 그리스의 소피스트에게서 유래했다. 종교 개혁이 있었을때 루터와 칼빈은 그들 설교의 모범으로 소피스트 출신의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오리겐 등의 초대 교회 교부들을 택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설교했다기 보다는 설교 기교를 열심히 연습한 전문설교가였다. 또한 이것이 결국 현대 교회의 설교가의 모습이다 (이교에 물든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