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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해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효과적인 언어적 측면 고찰

하나님아들 2017. 4. 8. 14:49

강해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효과적인 언어적 측면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연설과 에세이의 구별의 실패,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구별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기록해 놓은 원고도 아니고, 아웃라인도 아니다. 이런 것과는 달리 설교는 음성이나 표정이나 제스쳐(gestures) 등의 연속이다. 거기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은 다시 읽을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에선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설교자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그 순간 이해하지 못하면 끝나버리고 만다. 설교자는 자기 설교의 전체를 다 알고 있지만 청중은 한 부분밖에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적 측면과 비언어적 측면이 있는데, 먼저 언어적 측면부터 고찰하도록 하겠다.

 

A. 단어 선택의 문제(또는 표현 문제)

설교는 문자 언어가 아니고 음성 언어이기 때문에 설교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에세이(essay)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달라야 한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설교자는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격을 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에서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첫째,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라.

설교자는 설교시 지나치게 난삽(難澁)하고 현학적(衒學的)인 단어 사용은 피해야 한다. <-()>을 남발한다든지, 신학적-철학적 전문 용어를 연발한다든지, 고사성어(古事成語)를 계속 사용한다든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알아들을 만한 난해한 어휘를 상용(常用)한다든지 하는 것은 설교자의 어휘력 과시는 될지언정 청중의 설교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에 통효(通曉)하여 고담준론(高談峻論)이나 명론탁설(名論卓說)을 강()해도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였던 스펄전(C.H.Spurgeon)이 말한 바와 같이, 시장(市場)의 사람들은 학문적 언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에 학문하는 사람들이 시장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어려운 단어를 쉽게 번역하는 것은 목사가 해야 할 숙제이지 성도들의 숙제는 아닌 것이다. 9) 웨슬리(John Wesley)는 가끔 자신의 설교를 무식한 하녀에게 읽어주면서,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나 구()를 내가 쓰거든 나를 중단시켜라"고 하면서 쉬운 용어를 사용하려고 애를 썼다.

설교자는 평이한 단어를 쓰면서도 고상하고 세련된 표현을 하도록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세련되고 고상한 표현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다.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할 때 비로소 그것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난삽한 단어를 의도적으로 남용하는 설교자들은 대개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가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심리적 <보상 행위>(compensation)의 일종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결격 사유가 있을 때 이를 은폐하여 유식하게 보이기 위해서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설교자라고 해서

 

조잡(粗雜)한 표현만 써야 한다는 이유는 없다.

교육의 다소와는 상관없이 모든 설교자는 세련된 표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은폐하기 위해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 명쾌한 표현을 사용하라.

독일의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Friedrich Nietzsche)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심오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명쾌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대중에게 심오하게 보이게 하고 싶은 사람은 애매모호하려고 노력한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이 자주 말하듯이, "강단에서 아지랑이가 끼면 회중석에서는 안개가 낀다"는 말을 모든 설교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10) 설교자는 자신을 심오하게 보이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고, 진리를 숨기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해서 그들이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자의 절대적인 의무이다.

필자는 얼마전 어느 교회에서 주관하는 선교집회(mission conference)에 강사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주강사는 선교사로서의 경험도 풍부하고 학문적 수련도 제대로 된 훌륭한 분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 강사가 선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학교를 다닐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을 설교의 서론으로 인용함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것은, "당신은 우주적 중요성이 있느냐?" (Do you have universal significance?)는 질문이었다. 영어를 아는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universal significance"라는 표현은 아주 애매하고 번역하기도 굉장히 까다로운 표현이다. 이 표현은 "우주적 중요성" "우주적 의의" "보편적 중요성 "보편적 의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게 한 가지 문제이고, 또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느 번역도 이 표현의 의미를 명쾌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교 내내 필자는 그 표현을 뭐라고 하면 의미를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에 그 강사와 대화하면서 "당신이 사용하던 '우주적 중요성'이란 표현은 애매해서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되니 '범세계적인 영향력'(world-wide impact)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더니, 그 강사는 "그 표현이 훨씬 명쾌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이해되지 않는 애매한 표현은 설교 용어로서는 마땅히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체험을 통해서 명쾌한 단어의 사용이 설교자나 연설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지적인 활력이 넘치는 분이셨다. 나의 최상의 훈련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왔다. 그는 애매한 표현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셨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1903년 아버지가 타계(他界)하실 때까지--그 때 그는 81세의 고령이셨다--나는 내가 쓴 모든 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일일이 그것을 큰 소리로 읽도록 하셨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나를 중단시키시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그러면 왜 그렇게 표현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참새 한 마리를 쏠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 전체를 쏘지 말아라. 내가 말해야 할 그것을 향해 정확하게 겨냥하라." 11)

 

셋째, 문장의 길이를 가능하면 짧게 하라.

설교는 음성언어이기 때문에 듣는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긴 문장,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문장은 피하고 가능하면 간결한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추상적이고 애매한 말은 긴 문장으로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짧은 문장을 통해서 청중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문장에서 사용된 단어의 수와 문장의 난이도(難易度)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플레쉬(Rudolf Flesch)의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도표화하고 있다. 12)

 

8개 단어 이하 아주 쉽다

11개 단어 쉽다

14개 단어 비교적 쉽다

17개 단어 표준

21개 단어 비교적 어렵다

25개 단어 어렵다

29개 단어 이상 아주 어렵다

이 도표에 의하면 한 문장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17개 단어 이내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넷째, 구체적 표현을 사용하라.

추상화(抽象化)라는 것은 자세한 부분들을 생략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지도는 어느 지역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 제작 목적에 맞는 내용만 포함하고 나머지는 다 제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이란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 지도와 마찬가지다. 유용하기는 하지만 많은 제약이 있다. 그것은 마치 비누거품 같아서 우리 앞에서 조금 떠돌다가 손에 잡으려고 하면 터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13)

문장 표현에 있어서 사용되는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표현은 오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릿핀(Duane Litfin)은 추상적 단어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제시한다: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단어는 재미가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워진다" 1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부엌에 놓아두었던 고기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역겹다면 옆에서 궁금해하는 어린 아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새로운 화학적 물질을 형성하기 위해서 고기의 성분이 분해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어린 아이가 알아듣겠는가? "고기가 썩었어!"라고 표현한다면 어느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근거해서 우리의 견해와 판단을 형성한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표현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또 하나를 더 보자. "성서적, 신학적 지식의 결여는 신앙 성장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표현보다는 "성경을 잘 모르면 신앙이 자라기 어렵다"라고 하는 표현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인 표현이다.

 

다섯째,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라.

감각적인 단어는 우리의 오감(五感)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어필(appeal) 하는 단어인데, 이런 단어는 그렇지 않은 단어에 비해서 훨씬 강하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감각적인 표현은 단어 그 자체를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의성어(擬聲語)나 의태어(擬態語)의 사용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은유법이나 직유법 같은 수사법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다. 랠프 루이스(Ralph Lewis)의 연구에 의하면, 호세아서에서는 600여 개 이상의 감각적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과 관련된 표현이 98, 청각과 관련된 것이 46, 미각과 관련된 것이 55, 후각과 관련된 것이 6, 촉각과 관련된 것이 34, 근육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 129, 내적 심상(心像, internal images)과 관련된 것이 234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15)

감각적인 표현은 성경에서는 물론 위대한 문학 작품이나 일상적 언어 생활에서도 다반사(茶飯事)로 사용되고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공든 탑이 무너지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같은 속담들이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라든지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나려 /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 마음 허공에 등불을 키고 / 내 홀로 밤 깊이 뜰에 나리면 /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雪夜에서) 같은 것도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문장의 경우에도 감각적인 표현이 효과적이라는 데에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그가 길을 가고 있었다"는 표현보다는 "그는 비틀비틀 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라든지 "그는 어슬렁거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라든지 "그는 미친듯이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는 표현이 훨씬 더 감각적인 표현이다.

직유법이나 다른 사물과 비교하는 표현도 좋은 감각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의 심령은 건조해진다"는 표현보다는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 심령은 메마른 사막같이 생명 없는 불모지로 변한다"는 것이 더 낫다. 박목월(朴木月)의 시 나그네는 직유법과 감각적인 표현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효과적인 언어 사용은 생득적(生得的)인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계발(啓發)될 수 있는 후천적인 능력이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아 프리오리'(a priori)한 것이 아니라 '아 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것이다. 그러면 설교자로서 어떻게 하면 이 면에서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까? 다음의 몇 가지 제언(提言)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 자신의 언어 사용 습관을 점검해 보라. 16)

나 자신이 사용하는 문장은 짧은가, 긴가? 단문인가, 복문인가? 어휘는 대학의 국문과 출신이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인가, 아니면 초등학교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한가? 문장의 표현 방식은 복잡한가, 단순한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문체(style)에 대해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지며 비판적으로 자신의 설교를 대한다면 분명한 향상이 있을 것이다.

 

(2) 다른 사람의 문체를 주의해서 보라. 17)

좋은 수필집, 문학 작품, 다른 설교자의 설교집 등을 읽을 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에 유의를 하면서 읽고, 또 읽다가 효과적인 표현이 나오면 그것이 왜 효과적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표현들을 깊이 연구해서 그 이유를 발견하여, 동일한 원리를 사용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표현 자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설교를 기록하라. 18)

설교는 문자로 기록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다. 설교 전달 방식으로는 원고낭독형이나 다른 방식보다 아웃라인형이 가장 좋다. 그러나 단어 사용이나 문장의 표현에 문제가 있거나 자신이 없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써 보는 것이 좋다.

 

이런 방법은 특별히 설교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게 권장을 하고 싶다. 물론 이 방법을 통해서 언어 구사에 상당한 자신을 갖게 되면 설교문을 완전히 작성하는 대신 처음부터 아웃라인식으로 작성해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B. 음성 사용 문제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단어 선택 문제와 함께 선택된 단어와 문장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1) 고저(pitch)

전달에 있어서 피해야 될 최대의 금기(禁忌)<단조로움> (monotony)이다. 낮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한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높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하는 것은 전달에 있어서의 최대의 적이다. 설교자는 청중이 설교 중에 졸지 않게 하려면 음성의 고저를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한다. 설교할 때마다 졸음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설교자라면 결코 효과적인 설교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속삭이듯이 낮게, 어떤 경우에는 맹수가 포효하듯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런 대화식으로 다양하게 해야 된다. 위대한 설교자치고 음성의 고저를 다양하게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는 없다.

낮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높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하는 것과 꼭 같은 정도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동일한 패턴(pattern)을 반복하는 것이다. 음성의 고저가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똑 같은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123454321-123454321같은 식이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리듬이 생기게 되고, 리듬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음악으로 변하고, 음악은 청중을 잠재우는 자장가가 된다.

설교자는 그 음성이 고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된다. 필요하다면 갑자기 높이고, 또 필요하면 갑자기 낮추어야지 그 변화에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속도 (rate)

음성의 고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음성의 속도이다. 말은 너무 빨리 해도 안 되고, 너무 느리게 해도 안 된다. 너무 빨리 말하면 청중이 제대로 따라오기 어렵고, 너무 느리게 말하면 박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말의 속도는 전달하려는 설교의 내용이나 설교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청중은 1분에 약 500단어 정도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속도로 말을 들을 때에는 듣는 내용을 다 소화시킬 수가 없다. 설교나 연설에서 정상적인 속도는 1분에 120단어에서 170단어 정도의 속도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설교 내내 고정불변이라는 뜻은 아니다. 설교의 내용이 고조되면 말의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또한 어떤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할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출 수도 있다. 설교자는 설교가 끝날 때까지 항상 동일한 속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청중은 전달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전달은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음성의 속도를 변화시키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19)

첫째, 설교자가 전하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둘째, 그것은 독서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해서 청중이 설교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그것은 한 가지 내용에서 다른 내용으로의 전이(轉移)를 용이하게 해 준다.

넷째, 그것은 중요한 개념을 강조해 준다.

다섯째, 그것은 청중의 관심을 끌게 해 준다.

 

(3)강약(volume)

설교자의 음성의 크기는 대개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20) 첫째는 음성을 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힘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설교자와 청중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설교하는 환경이 어떠하냐, 즉 설교를 방해하는 요소(: 잡음,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 등)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어야지 설교 내내 항상 불변한다면 청중은 쉽게 지치고 말 것이다.

 

(4) 휴지(休止; pause)

설교에 있어서 휴지라는 것은 '' 또는 ''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설교를 머뭇머뭇 거리면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21) 설교에 있어서의 휴지는 말이 막혀서 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잠깐 쉬는 것이다. 그것은 음성 변화와 마찬가지로 문장에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먼로우(Alan H.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휴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휴지는 사고(思考)에 구둣점을 찍는다. 쉼표나 세미콜론이나 마침표가 문장의 단어들을 사고 단위로 분리시키듯이 상이한 길이의 휴지는 연설의 단어들을 의미 단위로 분리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연설을 할 때나 원고를 읽을 때 휴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인쇄물에서 잘못된 구둣점을 사용함으로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혼란과 같은 혼란을 청중에게 가져다준다. 22)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휴지를 사용할 때에는 하나의 사고 단위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문장의 중간에나 어떤 논리를 한창 전개해 나가는 도중에 그렇게 하면 그것은 혼란만 가중시키고 청중의 의혹만 받게 된다. 때아닌 휴지는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할 말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지언정 유익은 되지 않는다.

휴지는 종종 강조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중요한 진리를 선포한 직후에 잠시 설교를 중지하고 쉬는 것은 "내가 방금 한 말을 잘 생각해 보시오"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떤 예화를 들려주기 직전에 잠깐 쉬는 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예화에 더 큰 기대를 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설교를 잠깐 중단하고 쉬는 것은 어떤 강력한 언어보다도 설교자의 감정이나 의향을 더 잘 표현해 준다.

설교자는 절대로 휴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잠깐 쉬면 다음에 할 말을 잊어 버릴까봐, 아니면 그 사이에 청중이 설교자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할까봐 두려워서 쉬는 동안에도 '' '' ''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휴지의 목적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잠깐 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또 쉴 때는 완전히 쉬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기타

언어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고저, 강약, 속도, 휴지의 어느 범주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면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설교자는 전달할 때 열정(enthusiasm)이 있어야 한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를 계속해서 고성으로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되고, 그 확신이 음성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열정이 없는 설교는 청중은커녕 설교자 자신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가 불타면 청중은 불 구경하러 모일 것이다.

 

둘째, 설교자는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습관적으로 각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 아예 입 밖으로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삼켜 버리는 경우가 있다. 각 문장의 끝을 떨어뜨리지 않거나 높이는 것도 어색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떨어뜨려서 귀에 들리지도 않게 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각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또 그 끝을 적당히 낮추어서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설교자는 비어(鄙語)를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강단에서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을 마구 남발하는 것은 청중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아서 교양이 있는 청중이라면 비어를 마구 쓰는 설교자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과 일본 사람을 아무리 증오하더라도 강단에서 이들을 지칭할 때 '왜놈'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 '...' '...새끼' 같은 용어도 설교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넷째, 가능하면 문법에 맞는 표현을 쓰도록 해야 한다.

물론 원고 낭독형의 설교가 아닌 다음에야 문법적으로 완벽한 설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문법적으로도 흠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평소에 문장 수련이 잘 되어 있으면 실제 설교할 때에도 임기응변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 원어의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신학교에서 한두 학기 배운 원어 실력 가지고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원어를 제대로 모르면서 청중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꼭 필요한 경우라면 원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경우라면 "이 단어는 원어에서 ....라는 의미입니다"라든지 "이 구절을 원문에 좀더 충실하게 번역한다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라는 식의 간접적 사용이 바람직할 것이다.

 

여섯째, 사투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 경기도, 충정도, 강원도는 전반적으로 표준어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특히 영남 출신과 호남 출신은 사투리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영남 사람들은 서부 경남 사람들 외에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포항과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했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의 주위에는 쌍시옷을 발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2 때 독일어를 배우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라디오에 나오는 아나운서의 표준 발음을 따라서 수년간 연습을 했다. 끈질긴 연습의 결과 지금은 쌍시옷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다. 영남 사람은 <><>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 서부 경남 출신들은 중모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신''학신'으로 발음하고, '위대하다''이대하다', '경쟁''갱쟁'으로 발음한다. "강원도의 관광사업을 진작시킨다"는 말을 "강언도의 강강사업을 진작시킨다"는 식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강하다.

호남 출신은 <><>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예배''에배', '예산안''에산안'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소유격 조사 <><>로 발음하는 사람도 많다. 또 조사 <>를 경음화해서 <>로 발음하는 경향이 많다. 또 일부 호남 사람들은 격음화 현상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적합하다'는 격음화 현상에 따라 '---'는 식으로 발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와 같이 발음하기도 한다.

표준어권에 속하는 사람도 가끔 사투리를 쓰는 경향이 있다. '겁이 많다''겂이 많다'라고 하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 '손을 씻는다'라고 말해야 할 경우에 '손을 닦는다'라고 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손을 물에 씻고, 수건으로 닦아야지 물에 손을 닦는 것은 아니다.

사투리는 아니지만 어법에 맞지 않는 발음을 하는 경향은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널리 퍼져 있다. <잊다><잃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설교자, <가르치다><가리키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이나 <><><>도 제대로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빛이 있으니''비시 이쓰니'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 '비치 이쓰니'로 발음해야 연음법칙에 맞는 발음이 된다. '무릎을 꿇고''무르블 꿀고'로 발음해서는 안되고 '무르플 꿀코'라고 발음해야 연음법칙과 격음화 현상을 제대로 따른 발음이 된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흐그로 사라믈 비즈사'가 아니라 '흘그로 사라믈 비즈사'라고 해야 연음법칙에 맞다. 설교자는 국어 순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영어나 외국어를 공부할 때에는 철자나 발음에 굉장히 신경을 쓰면서 왜 우리가 평생 사용하는 국어에는 무관심한가? 자기 나라말을 어법에 맞지도 않게 마구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효과적인 음성 사용에 관심이 있는 설교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의 사모가 좋은 비평자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설교를 녹음해서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몇 개월 동안만 자신의 설교를 비판적으로 들어보고 개선하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천하면 음성의 사용은 물론 설교 전체가 휠씬 개선될 것이다.

 

출처 : 영성회복훈련원
글쓴이 : 양승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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