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기원과 타락
기독교로 야훼가 침투해 들어간 경로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언급이 있었으므로 생략하고 이번엔 불교의 타락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료는 많고 할 말도 많은데... 중요한 것만 최대한 간단히 적어 보겠습니다.(길게 쓰면 어차피 안 읽으실 것이니까...)
인터넷의 ‘안티사이비종교단학명상요가초능력’ 글쓴이 : 바른길님의 원글을 많이 참조했슴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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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불 : 비로자나불 - 노사나불 - 석가보니불 ==> 각각 조화주/교화주/치화주에 해당하며 우리의 삼일사상에서 기원한다.
*석가모니가 언급한 과거7불은 일곱분의 환인천제를 말한다. 따라서 불교의 뿌리는 우리의 천부사상에 기원을 둔다.
*부처는 理의 세계에 계시는 天神들을 말한다.
*화신불로 오신 석가모니가 떠나신 후 正法은 500년이 못갔다.
*석가모니 이후 500년이 지나며 불교는 인도의 힌두교와 섞이고 중국의 음양사상과 합체 후 한국에 전승되어 우리의 전통사상을 흡수함으로써 짬뽕敎가 되었다. 이것이 불교의 타락경로이다.
[불교의 일탈과정 요약]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BC 485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비탄에 빠졌으나 일부 습이 많은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옴짝달싹 조차 할 수 없었던 절대적 진리와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일탈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바닷다라는 제자 : “조금도 슬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들은 드디어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하는 석존의 잔소리에서 해방되었다”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마하가섭 : 이대로 두었다가는 교단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부처님의 정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크게 왜곡될 것을 우려.. --> 수행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경전정리 작업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제1회 불전결집이다.
*이 경전은 단순히 구전으로 암송...200년 뒤에 3차 팔리어 대결집의 모태가 됨...2차 결집은 부처님 사후 약 100년 경에 있었는데 이 시기는 불교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으로 입에서 입으로 가르침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적 상황에 따라 초기의 엄격했던 계율이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엄격한 교단과 새로운 지역의 개척교단 사이에 변질된 계율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10가지 쟁점이 있었다.
그 주요한 내용으로, 수행자가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정오를 지나 식사를 하는 문제,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문제,
금,은 등을 보시받는 문제 등이었다. 이런 일들이 당시 불교계에 논란이 되자 각지의 수행자 700여명이 바이샬리 거리에 모여 논쟁을 하여 기존 계율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계율을 융통성있게 해석하여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신생 관용파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비구들간의 논쟁에서 보수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채택되어 10가지 쟁점 모두 법에 맞지 않는 '비사(非事)'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모여 새로 대중부라는 파를 만들었는데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이렇게 갈라진 교단은 불멸 후 200년(BC 280년) 경에 개혁적인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고 보수적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BC 180년) 경 분열이 시작되어 20개 부파로 나뉘게 되는데 이들을 소승 20부라고도 하며 총칭하여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초기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완벽한 교리를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현학적이고 번쇄한 교리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진실성이 떨어지고 형식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BC 4세기 경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왕의 북서 인도 침입을 계기로 서북인도에는 마우리아 왕조가 나타났는데 BC 3세기 아소카왕 때 전성기를 맞았다. 아소카 왕은 참혹한 살륙이 벌어지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불법에 귀의하여 불교를 국가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는데 BC 235년 그는 필생의 사업으로 부처님 사후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經)과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律)과 부파불교에서 수백년간 연구되어온 아비달마의 논(論)들을 한자리에 모아 경·율·논 3장(三藏)의 대장경을 편찬하였다. 이것을 바로 불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라고 불리워지는 3차 대결집이다. 남방 소승경전의 전범인 팔리어경전의 기초가 됨.
[힌두교의 출현]
*아소카왕 사후 바로 마우리야 왕조는 붕괴되고 안드리아 왕국과 쿠샨왕조 같은 소국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전통의 복귀를 주장하며 브라만제도의 부활을 시도. 그들은 산스크리트 문법을 확립(B.C.2세기)하여 바라문 문화를 대표하고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문화를 이끌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는 마누 법전을 제작(B.C.1 세기)하여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에 포괄하고 선진종교인 불교 이론도 흡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원형을 이 시기에 정립했다. 이러한 힌두교의 정립은 기존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대중부 뿐만 아니라 상좌부도 분열하게 되는데 힌두교 박티신앙의 영향으로 불교속에도 부처님을 신앙으로 하는 <<대승불교>>가 나타나게 된다.
*4차 결집 :카니시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택하고 AD 125년 경 대대적인 4차 결집을 하게 된다. 700여년에 걸친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서를 가진 불교는 당시 위정가들에게 가장 차원높은 고급종교로서 인정받았으며 위정가들도 자신의 통치를 위해 불교가 필요했기 때문.
카니슈카왕은 부파불교 내에 여러 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각 부파의 이설을 통일하고자 경·율·논 3장에 통달한 스님 500명을 선출하여 불전 결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4차 불전결집'이다.
*따라서 오늘날 동양3국에서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700년간에 걸친 부파불교의 이론이 크게 반영된 카니시카왕의 4차 결집의 산물로서 힌두교의 영향과 각 부파불교의 논리들이 많이 반영된 것이니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귀족불교화 - 소승과 대승의 논란 -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 - 나가르주나(용수)는 중관사상을 마련하여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
이들에 의해 AD 1세기경에는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고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나타났는데 박티 신앙의 영향으로 초기 경전에 없던 여러가지 형태의 보살과 부처가 나타나게 된다.
*AD 3세기경 인도 불교계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20여 종의 아비달마 승단들이 난립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공 사상의 대가인 용수가 탄생하여 그 당시 사상계의 흐름을 철학적으로 평정하고 불교를 대승적으로 재해석.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란 없으며 모든 실체를 공이라고 하였다.
*대승불교에서 일체를 부정하고 우주의 실체가 공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불교는 힌두교와 차이가 거의 없게 된다. 처음부터 브라만적 환경 속에서 생겨나 자라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의 역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마침내 힌두교화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이 후일 힌두교에서 불교를 자파의 일종으로 무리없이 수용하는 계기가 된다.
[불교의 쇠퇴 - 밀교화 되는 과정]
처음 부처님은 인도사회의 미신적이고 관념적인 브라만제도의 어둠을 깨고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와 진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선언하셨다.
그래서 우주의 실상과 이치에 맞지 않는 주문이나 비밀의식에 대해 말법으로 금지했으며
기도니 주술이니 하는 기이한 원력으로
재난에서 벗어나려는 일체의 미신적인 수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는 과(파일제)를 받는다고 하셨으며
남방 팔리어 경전 소품에는 세속의 밀법들을 『축생의 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정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 밀교의 성립과 더불어 불교의 정식 교리가 되었으니 그 말법성을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마지막으로 불교는 밀교로 변하면서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대승불교가 성하던 7세기 중반 인도에서는 힌두적 관념에 물든 불교도들이 주술적 방법을 통하여 범아일여의 경지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인도적 주술과 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불교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렇게 변질된 불교를 밀교라고 한다.
*이들은 신을 숭배하고 주문과 의식을 통하여 초월적인 존재와 합일함으로써 해탈을 추구하려 했는데 이러한 입장은 결국 우주관과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브라만적 관념에 젖은 인도인들에게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불교의 진리성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초기밀교는 4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불교로 잡밀(雜密)이라고 하는데 병을 치료하고 장수를 기원하며 비를 멈추게 하는 것 등 중생들의 현실적인 요구에 응하기 위해 나타난 변형불교로서 다라니경과 제불보살을 신앙하는 일군의 밀교경전 등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밀교가 일어날 당시 대승불교가 성하였지만 이들은 비록 겉으로는 중생구제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래도 고도의 철학적 사유로 인하여 대중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종교였다. 그래서 무지한 중생들에게는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서 쉽게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주술과 신앙이 더 인기가 있어서 밀교가 성행하게 된 것이다.
*중기밀교란 7세기경 인도에서 새롭게 성립한 『대일경』과 『금강정경』등을 기초로 체계적으로 정립된 밀교로서 초기의 조잡한 잡밀에 비추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었다 하여 순밀(順密)이라고 한다.
*『대일경』에는 결인법, 진언의 염송법 및 3종의 만다라 묘사법 등 밀교의 삼밀행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으며 밀교의 실천체계인 호마법, 공양법, 관정법 등이 설해져 있다. 대일경은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 있다는 순수한 본성(보리심)을 나타내는 태장계만다라를 나타내고 있으며 『금강정경』은 대일경을 보다 체계화되고 세밀하게 발전시킨 것으로서 법의 성품을 금강성이라 하여 금강계만다라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를 성적 열락과도 결부시키고 있다. 이들은 만다라(법도), 무드라(수인), 만트라(주문)라는 형식을 통하여 깨달음과 법계, 불 보살의 세계를 복잡하게 조합하여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관념화는 그 교의나 의례, 존상에 있어서 기존 대승불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후기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 속칭 ‘탄트라 불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금강정경을 기초로 한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성적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좌도밀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좌도밀교는 여성과의 성적 의례를 근간으로 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여성의 기능을 우주적 요소로 파악한 인도 본래의 관념과, 성적 의례를 통해 느끼는 환희가 깨달음의 경지와 유사하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이렇게 성적행위를 도입한 금강승을 타락한 불교로 보는 견해가 생겨나게 되었으므로 대일경의 진언승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언승을 우도밀교, 금강승을 좌도밀교라고 한 것이다.
*금강성에 기반을 둔 좌도밀교는 처음부터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일반인으로부터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으며 현실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그리하여 밀교는 도덕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도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그 특징도 힌두교와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13세기초 힌두교의 압박과 이슬람교의 공격을 받자 인도에서 소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 만트라 - 성기원도 절친견]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아래 여러 가지 주술과 의례를 중시했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비밀의식이 호마법(護摩法) 이다. 호마는 제를 지낼 때 불을 피우고, 그 속에 공물을 태우는 의식으로 베다 이래로 전통적인 브라만교 주술의식이었는데 힌두교에서 이어받은 것을 다시 밀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밀교의 핵심은 주문에 있다. 주문은 정신을 통일하고 삼매에 드는 수단으로서 요가행법에서 널리 사용된 것인데 불법이 약해짐에 따라 이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밀교에서 주된 교리가 되었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진언을 외우면 우주의 신비한 힘을 받게 되어 인간의 힘이 무한자재에 이르게 되는데 일념으로 "옴 마니 반메훔"을 외우면 마음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까지도 금강소복괴산불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불교의식 때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우는 것은 이런 밀교의 영향인데 천수경의 여러 진언들과 반야심경의 주문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진언은 만트라(mantra)의 의역으로 본래는 베다의 주문을 일컫던 말로서 보통 내용이 긴 것을 다라니, 짧은 것을 진언이라고 하며 범어를 원문 그대로 외운다. 그러나 주문을 외우기 전에 먼저 주문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주문에 대해 말씀하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사실적인 인과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문으로 하는 일이 좋아질 것 같으면 씨만 뿌려 놓고 가만히 앉아서 주문만 외우면 풍년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에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비법이며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말로 다라니를 정당화시켜도 그것은 이치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실이 없는 것이며 이에 의지하게 되면 삶이 어두워지고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온갖 논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환상에 빠뜨리고 무익하게 만드는 것이 말법의 공통된 특징인 것이다.
[밀교의 특징 - 신앙적 요소]
부처님의 법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진리를 강조하고 신을 중시하지 않는데 있다.
왜냐면 완전한 신(조물주)은 완전한 이치를 통해 지은대로 주시기 때문에 각 사람이 주체적 입장에서 좋은 원인을 짓는 것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는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밝은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초기 불교는 신을 중시하지 않으며 의례나 예배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 의지하여 진리를 깨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이었던 것이다. 즉 힌두적인 인도에서 자리잡기 위해서 불교는 인도민중의 토속적인 신앙과 기복적인 욕구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 민중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힌두신들을 받아들여 퇴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때 불교에 들어온 힌두신으로는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등이 있다. 제석천은 베다에서는 일체의 악마를 정복하는 천둥벼락의 신이었으며, 우파니샤드 시대에 와서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든 신을 주재하는 인드라(Indra) 신이 된다. 범천(梵天, Brahman)은 브라만교에서 만유의 근원인 브라흐만을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는 제석천과 함께 불법수호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 이외에 절에서 많이 보는 사천왕은 원래 힌두교의 신화에서는 호법신이었는데 동방을 수호하는 지국천은 힌두신인 드리따라쉬뜨라, 남방을 수호하는 증장천은 비루다까, 서방을 수호하는 광목천은 비루빡샤,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은 바이슈라바나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금강역사(Vajradhara)는 원래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야차인데 불교에서는 이를 인왕(仁王)이라 하여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받아들였다. 팔부중도 불법을 수호하는 8가지 신으로서 원래는 고대 인도의 악마나 귀신이지만 붓다에게 교화되어 10대 제자와 함께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밀교 시대(7∼8 세기)에 이르게 되면 여러 관음 신앙이 나타나는데 예배형식이 확립되면서 이들에 대한 신앙과 가피력이 대중성을 띠어 보편화된다.
*특히 관음신앙은 북서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여 더욱 발전하게 된다. 관세음보살은 범어로 아와록까떼쉬와라로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나 형태에 따라 천수(千手),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준제(准提), 마두(馬頭) 등의 이름을 가진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인드라 신이나 비슈누, 쉬바 같은 힌두신들의 특성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 그 외 지장보살은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 미륵보살은 메이뜨레야(Maitreya), 문수보살은 만주슈리, 보현보살은 사만타바드라(Samanthabhadra), 일광보살은 수르야쁘라바, 월광보살은 짠드라쁘라바(Candra-prabha), 십일면관음은 에까다샤무카 라는 힌두신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해야 될 사건은 굽따 왕조 후기(AD 500년경)에 힌두교 내에서 붓다가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는 힌두사회가 불교를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편입시킨 좋은 사례로서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인도사람들은 비슈누 신과 붓다, 그리고 쉬바 신이나 관음보살과의 차이점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힌두교와 유사하게 됨으로써 힌두교의 한 종파로 정착하여 인도사회에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진리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인도사회에서 소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PS : 불교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의 역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초대교회의 순수한 하느님의 말씀중심은 유대의 카발라에 의해 서서히 공격받고 진리는 타락하여 숨어버린다. 불교도 석가사후 500년도 가지못해 유대카발라의 비전과 브라흐만(엘로힘 또는 여호와와 연관이 있을 듯)의 힌두사상에 점령당하고 만다. 타락의 주체는 氣문화속의 음양 이원론적 신들의 문화이다.
이처럼 오늘날 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모두 역사적 환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 왔으며 성자들의 원 가르침과는 크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자들은 기존에 전해져 내려오던 사고와 관념의 허황됨을 깨닫고 사실에 근거하여 바른 이치대로 살아갈 것을 인간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와 기독교는 성자들이 버려야 할 것으로 가르친 힌두교의 관념적인 공사상과 유대교의 맹목적 영적 신앙을 다시 받아들여 다시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미신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인은 기존 종교를 통해서는 인간성의 고양을 얻지 못하며 오히려 영적 오염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성장과 내세의 구원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진실을 밝히고 인간의 참된 삶을 회복해 밝은 세상과 인간완성으로 나아가려는 종교가 오히려 세상을 흐리고 인간성을 왜곡하는 곳이 되었으니 말세의 대표적 징표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다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학과 이성에 따라 노력하는 것이 인간성을 덜 망치고 삶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지나친 권위와 절대성을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며 성자들의 진정한 관심이 인간의 축복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실에 기준을 두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참된 진실과 진리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참된 진리의 복원과 들어냄.... 원래 이 지구상에 그 진리를 퍼뜨린 주체-한민족의 이 시대 사명이다.
기독교로 야훼가 침투해 들어간 경로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언급이 있었으므로 생략하고 이번엔 불교의 타락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료는 많고 할 말도 많은데... 중요한 것만 최대한 간단히 적어 보겠습니다.(길게 쓰면 어차피 안 읽으실 것이니까...)
인터넷의 ‘안티사이비종교단학명상요가초능력’ 글쓴이 : 바른길님의 원글을 많이 참조했슴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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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불 : 비로자나불 - 노사나불 - 석가보니불 ==> 각각 조화주/교화주/치화주에 해당하며 우리의 삼일사상에서 기원한다.
*석가모니가 언급한 과거7불은 일곱분의 환인천제를 말한다. 따라서 불교의 뿌리는 우리의 천부사상에 기원을 둔다.
*부처는 理의 세계에 계시는 天神들을 말한다.
*화신불로 오신 석가모니가 떠나신 후 正法은 500년이 못갔다.
*석가모니 이후 500년이 지나며 불교는 인도의 힌두교와 섞이고 중국의 음양사상과 합체 후 한국에 전승되어 우리의 전통사상을 흡수함으로써 짬뽕敎가 되었다. 이것이 불교의 타락경로이다.
[불교의 일탈과정 요약]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BC 485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비탄에 빠졌으나 일부 습이 많은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옴짝달싹 조차 할 수 없었던 절대적 진리와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일탈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바닷다라는 제자 : “조금도 슬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들은 드디어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하는 석존의 잔소리에서 해방되었다”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마하가섭 : 이대로 두었다가는 교단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부처님의 정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크게 왜곡될 것을 우려.. --> 수행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경전정리 작업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제1회 불전결집이다.
*이 경전은 단순히 구전으로 암송...200년 뒤에 3차 팔리어 대결집의 모태가 됨...2차 결집은 부처님 사후 약 100년 경에 있었는데 이 시기는 불교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으로 입에서 입으로 가르침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적 상황에 따라 초기의 엄격했던 계율이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엄격한 교단과 새로운 지역의 개척교단 사이에 변질된 계율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10가지 쟁점이 있었다.
그 주요한 내용으로, 수행자가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정오를 지나 식사를 하는 문제,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문제,
금,은 등을 보시받는 문제 등이었다. 이런 일들이 당시 불교계에 논란이 되자 각지의 수행자 700여명이 바이샬리 거리에 모여 논쟁을 하여 기존 계율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계율을 융통성있게 해석하여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신생 관용파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비구들간의 논쟁에서 보수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채택되어 10가지 쟁점 모두 법에 맞지 않는 '비사(非事)'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모여 새로 대중부라는 파를 만들었는데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이렇게 갈라진 교단은 불멸 후 200년(BC 280년) 경에 개혁적인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고 보수적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BC 180년) 경 분열이 시작되어 20개 부파로 나뉘게 되는데 이들을 소승 20부라고도 하며 총칭하여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초기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완벽한 교리를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현학적이고 번쇄한 교리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진실성이 떨어지고 형식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BC 4세기 경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왕의 북서 인도 침입을 계기로 서북인도에는 마우리아 왕조가 나타났는데 BC 3세기 아소카왕 때 전성기를 맞았다. 아소카 왕은 참혹한 살륙이 벌어지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불법에 귀의하여 불교를 국가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는데 BC 235년 그는 필생의 사업으로 부처님 사후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經)과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律)과 부파불교에서 수백년간 연구되어온 아비달마의 논(論)들을 한자리에 모아 경·율·논 3장(三藏)의 대장경을 편찬하였다. 이것을 바로 불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라고 불리워지는 3차 대결집이다. 남방 소승경전의 전범인 팔리어경전의 기초가 됨.
[힌두교의 출현]
*아소카왕 사후 바로 마우리야 왕조는 붕괴되고 안드리아 왕국과 쿠샨왕조 같은 소국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전통의 복귀를 주장하며 브라만제도의 부활을 시도. 그들은 산스크리트 문법을 확립(B.C.2세기)하여 바라문 문화를 대표하고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문화를 이끌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는 마누 법전을 제작(B.C.1 세기)하여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에 포괄하고 선진종교인 불교 이론도 흡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원형을 이 시기에 정립했다. 이러한 힌두교의 정립은 기존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대중부 뿐만 아니라 상좌부도 분열하게 되는데 힌두교 박티신앙의 영향으로 불교속에도 부처님을 신앙으로 하는 <<대승불교>>가 나타나게 된다.
*4차 결집 :카니시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택하고 AD 125년 경 대대적인 4차 결집을 하게 된다. 700여년에 걸친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서를 가진 불교는 당시 위정가들에게 가장 차원높은 고급종교로서 인정받았으며 위정가들도 자신의 통치를 위해 불교가 필요했기 때문.
카니슈카왕은 부파불교 내에 여러 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각 부파의 이설을 통일하고자 경·율·논 3장에 통달한 스님 500명을 선출하여 불전 결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4차 불전결집'이다.
*따라서 오늘날 동양3국에서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700년간에 걸친 부파불교의 이론이 크게 반영된 카니시카왕의 4차 결집의 산물로서 힌두교의 영향과 각 부파불교의 논리들이 많이 반영된 것이니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귀족불교화 - 소승과 대승의 논란 -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 - 나가르주나(용수)는 중관사상을 마련하여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
이들에 의해 AD 1세기경에는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고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나타났는데 박티 신앙의 영향으로 초기 경전에 없던 여러가지 형태의 보살과 부처가 나타나게 된다.
*AD 3세기경 인도 불교계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20여 종의 아비달마 승단들이 난립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공 사상의 대가인 용수가 탄생하여 그 당시 사상계의 흐름을 철학적으로 평정하고 불교를 대승적으로 재해석.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란 없으며 모든 실체를 공이라고 하였다.
*대승불교에서 일체를 부정하고 우주의 실체가 공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불교는 힌두교와 차이가 거의 없게 된다. 처음부터 브라만적 환경 속에서 생겨나 자라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의 역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마침내 힌두교화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이 후일 힌두교에서 불교를 자파의 일종으로 무리없이 수용하는 계기가 된다.
[불교의 쇠퇴 - 밀교화 되는 과정]
처음 부처님은 인도사회의 미신적이고 관념적인 브라만제도의 어둠을 깨고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와 진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선언하셨다.
그래서 우주의 실상과 이치에 맞지 않는 주문이나 비밀의식에 대해 말법으로 금지했으며
기도니 주술이니 하는 기이한 원력으로
재난에서 벗어나려는 일체의 미신적인 수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는 과(파일제)를 받는다고 하셨으며
남방 팔리어 경전 소품에는 세속의 밀법들을 『축생의 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정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 밀교의 성립과 더불어 불교의 정식 교리가 되었으니 그 말법성을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마지막으로 불교는 밀교로 변하면서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대승불교가 성하던 7세기 중반 인도에서는 힌두적 관념에 물든 불교도들이 주술적 방법을 통하여 범아일여의 경지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인도적 주술과 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불교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렇게 변질된 불교를 밀교라고 한다.
*이들은 신을 숭배하고 주문과 의식을 통하여 초월적인 존재와 합일함으로써 해탈을 추구하려 했는데 이러한 입장은 결국 우주관과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브라만적 관념에 젖은 인도인들에게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불교의 진리성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초기밀교는 4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불교로 잡밀(雜密)이라고 하는데 병을 치료하고 장수를 기원하며 비를 멈추게 하는 것 등 중생들의 현실적인 요구에 응하기 위해 나타난 변형불교로서 다라니경과 제불보살을 신앙하는 일군의 밀교경전 등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밀교가 일어날 당시 대승불교가 성하였지만 이들은 비록 겉으로는 중생구제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래도 고도의 철학적 사유로 인하여 대중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종교였다. 그래서 무지한 중생들에게는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서 쉽게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주술과 신앙이 더 인기가 있어서 밀교가 성행하게 된 것이다.
*중기밀교란 7세기경 인도에서 새롭게 성립한 『대일경』과 『금강정경』등을 기초로 체계적으로 정립된 밀교로서 초기의 조잡한 잡밀에 비추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었다 하여 순밀(順密)이라고 한다.
*『대일경』에는 결인법, 진언의 염송법 및 3종의 만다라 묘사법 등 밀교의 삼밀행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으며 밀교의 실천체계인 호마법, 공양법, 관정법 등이 설해져 있다. 대일경은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 있다는 순수한 본성(보리심)을 나타내는 태장계만다라를 나타내고 있으며 『금강정경』은 대일경을 보다 체계화되고 세밀하게 발전시킨 것으로서 법의 성품을 금강성이라 하여 금강계만다라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를 성적 열락과도 결부시키고 있다. 이들은 만다라(법도), 무드라(수인), 만트라(주문)라는 형식을 통하여 깨달음과 법계, 불 보살의 세계를 복잡하게 조합하여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관념화는 그 교의나 의례, 존상에 있어서 기존 대승불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후기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 속칭 ‘탄트라 불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금강정경을 기초로 한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성적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좌도밀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좌도밀교는 여성과의 성적 의례를 근간으로 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여성의 기능을 우주적 요소로 파악한 인도 본래의 관념과, 성적 의례를 통해 느끼는 환희가 깨달음의 경지와 유사하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이렇게 성적행위를 도입한 금강승을 타락한 불교로 보는 견해가 생겨나게 되었으므로 대일경의 진언승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언승을 우도밀교, 금강승을 좌도밀교라고 한 것이다.
*금강성에 기반을 둔 좌도밀교는 처음부터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일반인으로부터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으며 현실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그리하여 밀교는 도덕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도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그 특징도 힌두교와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13세기초 힌두교의 압박과 이슬람교의 공격을 받자 인도에서 소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 만트라 - 성기원도 절친견]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아래 여러 가지 주술과 의례를 중시했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비밀의식이 호마법(護摩法) 이다. 호마는 제를 지낼 때 불을 피우고, 그 속에 공물을 태우는 의식으로 베다 이래로 전통적인 브라만교 주술의식이었는데 힌두교에서 이어받은 것을 다시 밀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밀교의 핵심은 주문에 있다. 주문은 정신을 통일하고 삼매에 드는 수단으로서 요가행법에서 널리 사용된 것인데 불법이 약해짐에 따라 이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밀교에서 주된 교리가 되었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진언을 외우면 우주의 신비한 힘을 받게 되어 인간의 힘이 무한자재에 이르게 되는데 일념으로 "옴 마니 반메훔"을 외우면 마음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까지도 금강소복괴산불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불교의식 때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우는 것은 이런 밀교의 영향인데 천수경의 여러 진언들과 반야심경의 주문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진언은 만트라(mantra)의 의역으로 본래는 베다의 주문을 일컫던 말로서 보통 내용이 긴 것을 다라니, 짧은 것을 진언이라고 하며 범어를 원문 그대로 외운다. 그러나 주문을 외우기 전에 먼저 주문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주문에 대해 말씀하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사실적인 인과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문으로 하는 일이 좋아질 것 같으면 씨만 뿌려 놓고 가만히 앉아서 주문만 외우면 풍년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에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비법이며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말로 다라니를 정당화시켜도 그것은 이치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실이 없는 것이며 이에 의지하게 되면 삶이 어두워지고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온갖 논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환상에 빠뜨리고 무익하게 만드는 것이 말법의 공통된 특징인 것이다.
[밀교의 특징 - 신앙적 요소]
부처님의 법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진리를 강조하고 신을 중시하지 않는데 있다.
왜냐면 완전한 신(조물주)은 완전한 이치를 통해 지은대로 주시기 때문에 각 사람이 주체적 입장에서 좋은 원인을 짓는 것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는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밝은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초기 불교는 신을 중시하지 않으며 의례나 예배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 의지하여 진리를 깨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이었던 것이다. 즉 힌두적인 인도에서 자리잡기 위해서 불교는 인도민중의 토속적인 신앙과 기복적인 욕구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 민중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힌두신들을 받아들여 퇴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때 불교에 들어온 힌두신으로는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등이 있다. 제석천은 베다에서는 일체의 악마를 정복하는 천둥벼락의 신이었으며, 우파니샤드 시대에 와서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든 신을 주재하는 인드라(Indra) 신이 된다. 범천(梵天, Brahman)은 브라만교에서 만유의 근원인 브라흐만을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는 제석천과 함께 불법수호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 이외에 절에서 많이 보는 사천왕은 원래 힌두교의 신화에서는 호법신이었는데 동방을 수호하는 지국천은 힌두신인 드리따라쉬뜨라, 남방을 수호하는 증장천은 비루다까, 서방을 수호하는 광목천은 비루빡샤,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은 바이슈라바나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금강역사(Vajradhara)는 원래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야차인데 불교에서는 이를 인왕(仁王)이라 하여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받아들였다. 팔부중도 불법을 수호하는 8가지 신으로서 원래는 고대 인도의 악마나 귀신이지만 붓다에게 교화되어 10대 제자와 함께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밀교 시대(7∼8 세기)에 이르게 되면 여러 관음 신앙이 나타나는데 예배형식이 확립되면서 이들에 대한 신앙과 가피력이 대중성을 띠어 보편화된다.
*특히 관음신앙은 북서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여 더욱 발전하게 된다. 관세음보살은 범어로 아와록까떼쉬와라로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나 형태에 따라 천수(千手),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준제(准提), 마두(馬頭) 등의 이름을 가진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인드라 신이나 비슈누, 쉬바 같은 힌두신들의 특성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 그 외 지장보살은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 미륵보살은 메이뜨레야(Maitreya), 문수보살은 만주슈리, 보현보살은 사만타바드라(Samanthabhadra), 일광보살은 수르야쁘라바, 월광보살은 짠드라쁘라바(Candra-prabha), 십일면관음은 에까다샤무카 라는 힌두신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해야 될 사건은 굽따 왕조 후기(AD 500년경)에 힌두교 내에서 붓다가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는 힌두사회가 불교를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편입시킨 좋은 사례로서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인도사람들은 비슈누 신과 붓다, 그리고 쉬바 신이나 관음보살과의 차이점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힌두교와 유사하게 됨으로써 힌두교의 한 종파로 정착하여 인도사회에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진리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인도사회에서 소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PS : 불교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의 역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초대교회의 순수한 하느님의 말씀중심은 유대의 카발라에 의해 서서히 공격받고 진리는 타락하여 숨어버린다. 불교도 석가사후 500년도 가지못해 유대카발라의 비전과 브라흐만(엘로힘 또는 여호와와 연관이 있을 듯)의 힌두사상에 점령당하고 만다. 타락의 주체는 氣문화속의 음양 이원론적 신들의 문화이다.
이처럼 오늘날 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모두 역사적 환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 왔으며 성자들의 원 가르침과는 크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자들은 기존에 전해져 내려오던 사고와 관념의 허황됨을 깨닫고 사실에 근거하여 바른 이치대로 살아갈 것을 인간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와 기독교는 성자들이 버려야 할 것으로 가르친 힌두교의 관념적인 공사상과 유대교의 맹목적 영적 신앙을 다시 받아들여 다시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미신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인은 기존 종교를 통해서는 인간성의 고양을 얻지 못하며 오히려 영적 오염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성장과 내세의 구원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진실을 밝히고 인간의 참된 삶을 회복해 밝은 세상과 인간완성으로 나아가려는 종교가 오히려 세상을 흐리고 인간성을 왜곡하는 곳이 되었으니 말세의 대표적 징표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다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학과 이성에 따라 노력하는 것이 인간성을 덜 망치고 삶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지나친 권위와 절대성을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며 성자들의 진정한 관심이 인간의 축복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실에 기준을 두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참된 진실과 진리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참된 진리의 복원과 들어냄.... 원래 이 지구상에 그 진리를 퍼뜨린 주체-한민족의 이 시대 사명이다.
출처 : 국익수호연합
글쓴이 : 농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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