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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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교회(라틴어: Ecclesia Catholica Romana 에클레시아 카톨리카 로마나, 영어: Roman Catholic Church) 또는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11억인 이상의 신자가 있는,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최대 교파이다. 성공회, 개신교, 동방 정교회와 함께 기독교를 구성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같은 한자 문화권에서는 천주교(天主敎), 천주교회(天主敎會)로도 불리며, 조선 후기에는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정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교회헌장(Lumen Gentium)》에서 볼 수 있는데 성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하는 교황은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그 단원인 주교들과 사도단의 직무를 계승하며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하는 표현에서 드러나고 있다.[1] 2008년을 기준으로 한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 신자 수는 11억 6,600만 명으로 파악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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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용어 정리
"가톨릭”이란 말은 ‘두루 따르는, 모두를 포함한’이란 뜻이 있는 고대 그리스어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ός, katholikos)에서 온 말이다. ‘가톨릭’의 뜻을 과거에 한자어로 공번(共繙)이라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풀이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보편적’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가톨릭이라는 말은 평범한 낱말로서 곳곳에 두루 쓰였으나, 기독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안티오키아교회 주교이던 성 이냐시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냐시오는 저서 '이단자와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보편적 교회가 있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가톨릭을 교회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교회 대분열 이전의 가톨릭이라는 낱말은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같이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특히 당시의 유대교에서 분리된 여러 종교 집단으로부터 구분하는 부차적인 뜻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교회사 학자들은 가톨릭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보편교회'로, 천주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3]
11세기 초, 5개 교회인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보편교회인 가톨릭 교회는 기독교 초기부터 중요한 신학 언어인 헬라어의 동방교회와 로마 중심의 신학언어인 라틴어의 언어적 영향 배경과 문화적 차이가 있었으나 주요 신학적 언어인 헬라어의 동방교회의 예속되어 있다가 "필리오케"를 주 원인으로 하여 라틴어의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의 로마교회가 헬라어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의와 갈라지게 되고 현재에 와서 동방교회는 지역적 신학차이로 나타난 동방정교회와 동방가톨릭교회로 구분된다. 서방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교황 수위권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앙적 사도권을 강조하는 개신교회로 구분된다. 동방 가톨릭교회란 일찍이 칼케돈공의회 이후 갈라져 나간 단성론 교회로서 동방도 서방 교회도 아닌 보편적 교회의 교의를 따른다는 입장이었다. 시리아교회, 콥트교회, 아르메니아교회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이들 동방교회들이 여러 이유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수위권을 받아 들이기로 하고 로마교회와의 일치를 도모하고 있어, 로마 가톨릭 교회내에서는 동방 귀일(歸逸)교회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한국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일찍이 중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천주교(天主敎)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편집] 로마 가톨릭의 4대 교리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는 이 세계를 창조한 삼위일체인 하느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외아들임을 믿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인류의 죄를 구원하였음을 믿는다. 인간이 죽은 뒤에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된다고 믿는다.
이를 천주존재, 삼위일체, 상선벌악, 강생구속의 4대 교리라고 일컫는다.
- 천주존재(天主存在) :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지배자이신 하느님이 존재하고 계심.
- 삼위일체(三位一體) :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세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심.
- 상선벌악(賞善罰惡) : 하느님은 착한 사람에겐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겐 벌을 주심.
- 강생구속(降生救贖) :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셨음.
[편집] 성경
[편집] 성경과 전통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형성된 기독교 신앙유산인 전통(Traditiion) 모두를 기독교 신앙의 규범으로 인정한다. 그중에서 특히 기록된 문서인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부여해 왔다. 특히 교황 다마소 1세의 명령으로 성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Vulgate) 성서는 현대까지도 공식적인 라틴어 성서로 취급을 받고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불가타역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번역본이라 하여 46권의 구약성경와 27권의 신약성경을 정전(Cannon)으로 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는 문서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구두(口頭)와 문서 두가지 방법으로 전해졌다. 기록된 것이든 구두나 전통을 통하여 전해온 것이나 '하느님의 말씀'은 오직 교회에서만이 해석하고 가르칠 권한(Magistrium)이 있다. 성경(Sacred Scripture)과 성전(Sacred Tradition) 그리고 교도권(Magisterium of the Church)은 성령안에서 서로 연관돼있으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영혼구원에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들처럼 경전의 종교가 아니고, '말씀'이 육화되어 오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칠 때에는 성경 전체 내용과 단일성에 유의하여 전체 교회의 살아있는 성전(Tradition)에 따라 읽을 것을 요청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앙진리의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편집] 한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대한민국에서는 일찍이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성경을 각자 번역해 사용해 왔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1965년) 이후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에 의한 성서 공동번역이라는 세계 교회 흐름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대한 성공회 등 모든 교파간의 공동 성서 번역 작업이 있었다. 그 성과가 처음으로 형태를 나타낸 것이 공동번역성서이다. 공동번역성서는 당시 성서 번역의 역량을 지녔던 개신교 계열인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하였지만, 로마 가톨릭과 소수 개신교 교파와 성공회, 정교회에서만 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대부분의 개신교는 참조용 성서로 사용하였고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개신교의 '하나님'과 천주교의 '천주'를 현대 한국어인 '하느님'으로 통일하였다. 개신교측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입장 차이가 이 공동번역성서의 사용을 주저하게 하였고, 개신교는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였다. 이후 공동번역을 사용해오던 한국 천주교는 2005년 천주교에서 새로 번역한 '천주교 성경'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대한 성공회와 한국 정교회 등의 소수 교파에서만 공동번역을 사용하고 있다.
[편집] 전례
- 이 부분의 본문은 예배입니다.
로마 가톨릭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는 것은 예수의 희생을 재현하는 성체성사(개신교에서는 성찬, 성만찬, 성찬식, 정교회에서는 성체성혈성사, 성공회에서는 성찬, 성찬례, 성만찬,거룩한 사귐/Holy Communion, 주님의 만찬/Lord's Supper,감사의 제사/Eucharist라 한다.)를 중심으로 하는 미사이다. 모든 일요일과 대축일(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예수 부활 대축일,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예수 성탄 대축일(12월 25일))에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신자로서의 의무이다.
- 이 부분의 본문은 성무일도입니다.
미사와 또다른 중요한 전례 행위로서 성무일도(Liturgia horarum)를 들 수 있다. 성무일도는 시간경이라고 불리는, 매일 일정한 시각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공적이고 보편적인 기도이다. 사제와 부제는 성무일도를 바칠 의무가 있으며, 수도자들은 수도회의 규칙에 따라 성무일도를 바치게 되어 있다. 평신도도 바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구약성경의 시편 낭송과 신약성경 독서, 청원기도, 찬가 부르기로 이루어져 있다. 화가 '밀레'의 유명한 그림인 '만종'은 오후 6시경에 바치는 저녁 기도를 그 배경으로 한 그림이며 그 시각에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올리는 시골 농부의 소박한 모습을 담은 것이다.
[편집] 특징
[편집] 공의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21번의 공의회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21번의 공의회는 연대순에 따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에페수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1차 라테란 공의회, 제2차 라테란 공의회,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제1차 리옹 공의회, 제2차 리옹 공의회, 빈 공의회, 콘스탄츠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제5차 라테란 공의회, 트리엔트 공의회,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공의회의 순서 매김은 기독교의 각 교파에 따라 달라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최초의 7번의 공의회만을 인정하고 있고, 개신교에서는 도적들의 공의회라고 불릴만큼 파행적으로 운영된 에페수스 공의회[4]를 제외한 칼케돈 공의회까지의 공의회를[8], 단성설 교회에서는 최초의 3번까지만 인정하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에서는 최초의 2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편집] 교회분열과 일치
[편집] 아시리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분열과 일치
1054년 동방정교회와의 분열보다 훨씬 오래된 에페수스 공의회나 칼케돈 공의회에서의 분열에서,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사소한 교의 논쟁이었다. 그것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은, 1994년 11월에 발표된 《그리스도 이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아시리아 정교회의 공동선언문》이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아시리아 정교회의 대주교에 의해 조인되었다.
아시리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분열은 431년의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서로 다툰 테오토코스 논쟁이라고 하는 성모 마리아의 칭호를 둘러싼 논쟁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와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중 어느 쪽이 올바른 칭호인지 논의된 것이다. 공동 선언문에서는, “어느 쪽을 부르든 같은 신앙을 표명한 것이며, 두 교회는 서로 전례와 신앙심을 존중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편집]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분열과 일치
한층 더 어려운 것은 동방정교회와의 일치 문제이다.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두 교회의 합동에는 교리 문제보다는 전통에 관한 문제가 더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나, 전례나 신앙심에서의 차이를 어떻게 서로 존중하는가의 문제가 관건이라고 본다. 한편, 동방정교회 측에서는 두 교회의 대립은 성상(聖像)의 문제나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하는 기본적 교리의 불일치에 있으며, 교황의 수위권이나 무류성에 관한 문제도 단순한 전통의 문제는 아니고 교리상의 문제라고 파악하고 있다. 또 십자군 문제나 동유럽 포교 등의 로마 가톨릭의 행동에 대한 반발도 있다.
동서교회가 결국 최종적으로 갈라지게 된 역사적인 사건은 15세기에 있었던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침략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있자 그 동안의 동서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유럽의 정세와 여러가지 지역문제로 서방교회에서는 동방교회를 물리적으로 도와줄 여력이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동방교회의 서방교회에 대한 서운함은 교회분열에 가장 큰 일조를 한 것으로 보는 사가들이 있다. 두교회의 분열은 신앙적인 것보다는 정치적·감정적인 원인이 더 컸다는 것이다.
[편집] 교도권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교도권(potestas magisterii)’이라는 말은, 평신도를 가르쳐 이끌어주는 권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권위는 신학자의 것이 아니고, 주교의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도권이 없으면 신도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해석한다든가 왜곡하여 모순이나 대립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이끌어줄 것을 약속하고 있지만, 이 인도는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일에 대해 발언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 로마 가톨릭에 의한 교도권 해석이다. 단지, 이것은 결코 성령이 개인을 이끌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편집]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일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교의적인 차이는 동방정교회보다 더 크다. 특히 개신교 일부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등 많은 부분에서 기독교 본래의 사명인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떠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회, 감리교회 사이에서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이 발표되어 또 하나의 기념비적 이정표가 세워지는등 지속되어온 에큐메니컬 운동의 귀중한 결실이 이어지고 있어 교회 일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가톨릭과 함께 교회일치주간 행사나 기타 협력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교회 일치 운동 즉,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분열은 소모적 논쟁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진보적인 기독교계의 반성에 따라 진전됨에 따라 대화를 나누어, 과거 서로에 대해 오해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개신교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모두 인정하고 있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세례를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정상적인 성례전으로 존중하여,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옮긴 신자에게 다시 세례를 주지 않는 교단이 있으며, 이를 거부하는 개신교 교단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개신교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아 일치 운동에 비해 결과는 아직 미비하다.
앞으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이 일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이름(여호와)에 대한 이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해, 교회론,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사도 계승권과 관련된 데에서 발생하는 문제(예를 들어 세례의 상호 인정, 상호 성직 인정 등) 해결,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의 도 교리나 성령 운동, 또는 은사 등과 관련된 이해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차이를 조정해야 하며, 이러한 일치 과정이 가능할지에 대한 부분은 쉽지 않아 보인다.
[편집]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의 일치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는 1960년대부터 기도회로 대화를 해왔으며,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일치하고자 한다.
[편집] 교회의 직분 구성
- 이 부분의 본문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입니다.
로마 가톨릭에는 교계제도(敎階制度, hierarchia)라는 것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현재 교단의 최고 권위자는 로마 주교인 교황이며, 신품성사로 임명되는 주교, 사제 그리고 부제의 3개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권한은 크게 재치권과 신품권으로 나뉘며, 교황과 주교는 재치권을 가지며, 사목과 관련한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갖는다.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천주교의 수장이며 사도들의 후계자로 주교들과 더불어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를 다스린다. 또한,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로 세계 각국에 대사를 파견하여 주재국의 교회를 보호한다.
[편집] 교황과 추기경단
로마 가톨릭이 다른 기독교 종파와 비교해서 특이한 점은 우선은 교황과 평신도 간의 관계이다. 교황이란 로마 가톨릭의 정신적 수장으로서, 로마 가톨릭의 재치권과 통치권을 소유한 자이다. 교황은 성 베드로에 의한 사도좌의 계승자이며, 바티칸에 거주한다. 덧붙여 사도좌라는 말은 바티칸의 행정 조직을 가리키는 때도 있으며, 로마 교황청이라고도 불린다.
교황과 관련된 권한 중에는 교황수위권과 교황무류성이 있다. 우선 교황의 수위권은 교황이 지상교회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교회의 주교이자 보편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전 교회에 대해 완전한 권한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통상적 이해로는 전 주교 중에서 교황의 우위권을 가리키고 있다. 이 우위권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에 5대 지역교회였던 로마 교회, 콘티탄티노플 교회, 예루살렘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 그리고 안티오키아 교회의 주교 가운데 가장 높은 서열로(First among equals) 인정받고 있었으며 로마 교회에서 임의로 만들어낸 순위는 아니다. 다음으로, 교황의 무류성은 “교황이 교리의 머리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공적으로 사도좌(Ex Cathedra)에서 장엄하게 선언할 때는 그르침이 없다.”라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무류성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신앙과 도덕, 교리 문제 판단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천문학이나 지리학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교황 선거에 관한 최근의 규정은 1996년의 사도헌장(《Universi Dominici Gregis》)에 나타나고 있다. 그 문서에 정해지는 규칙에 따르면, 교황 선거자인 추기경들은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비밀 투표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 선거를 콘클라베라고 한다.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려면 후보자에게 투표자의 3분의 2 이상의 표가 몰려야 한다. 또 관례에 따라서, 교황 선거에 참가할 수 있는 추기경은 80살 미만의 추기경에 한정된다.
추기경은 교황청에서 일하는 고위 성직자나 세계의 중요한 교구의 주교 중에서 교황에 의해 임명된다. 교황 선거에 참가할 수 있는 추기경은 80세 미만이어야 한다는 관례를 역수로 취하고, 80세 이상의 성직자로 교회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명예직으로 추기경에 임명하는 때도 있다. 그런 추기경 중에는 신학자나 중국이나 베트남 등 독재나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서 장기간 걸쳐 투옥된 사람도 포함된다.
[편집] 주교
로마 가톨릭에서 주교(개신교에서는 감독으로 번역됨)는 사도의 후계자이며, 교회를 통솔하는 직무에 해당한다. 교황 역시 로마 주교이지만, 사도 베드로의 권능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여 주교단에서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주교의 본래의 직무는 자기 교구의 담당이다. 주교를 보좌하도록 임명되는 대리 주교의 직함이 존재한다. 주교가 어떠한 사정 때문에 공석이 되었을 때는 대리 주교가 주교의 직무를 당연히 계승하게 된다
주교중에 명의주교라는것이 있다. 명의 주교는 교구 주교의 보좌 주교, 교황청에 근무하는 주교, 교황대사 등이 해당되며 보좌 주교는 주교의 업무를 보좌하기위하여 서품되나 주교의 계승권은 없다. 이러한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가 없으므로 재직시는 고대의 폐쇄된 교구의 주교 명의를 사용하게 된다
주교 중에는 대주교라는 지위로 올라가는 일도 있지만, 이것들은 서품에 따른 위계가 아니고 교구의 규모에 따라 정해진 교회 행정상의 직무를 나타낸다(즉 사제가 주교로 서품되는 일은 있어도, 주교가 대주교로 서품되는 일은 없다).대주교중에도 명의 대주교가 있다
주교들은 정기적으로 회합을 열고, 다양한 문제를 주제로 토의하는데, 주교회의(시노드)라고 한다. 시노드에서는 미사 등의 문제에 관해서는 결의할 수 있지만, 특정 주교의 처우에 관해서 등의 결의를 위해서는 주교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와 교황청의 재가가 필요하다.
[편집] 사제와 부제
주교는 사제와 부제(개신교에서는 장로, 집사로 번역됨)의 보좌에 의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는 교구에 속하는 교구 사제와 수도생활이나 선교를 행하는 수도, 선교 사제로 나뉜다. 11세기 이후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회부패의 가장 심각한 유형인 교회세습의 폐단과 세속 왕이나 귀족들이 성직자 임명에 관여하는 등의 교회의 부패를 막고자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따르지만, 동방 전례를 실시하는 교회(동방 가톨릭교회)나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로 교파를 바꾼 이들은 기혼자가 특별히 인정되는 일도 있다.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종신 부제(사제로의 진급을 전제로 하지 않는 부제)에 관해서는 기혼자의 서품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라도 서품 후의 결혼이나 기혼자의 아내가 죽었을 경우의 재혼은 인정되지 않는다.
한때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로마주교인 교황을 중심으로 주교, 사제, 부제가 있다고 하는 피라미드형의 계급 구조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모든 신도가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맡고 있다고 하는 ‘유대 민족의 교회론’이 다시 검토되어 종래의 성직자 지상주의의 수정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직자는 물론 평신도에게도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그리고 예언직을 모두 갖고 있다고 가르치며 사제는 미사성제라는 하느님 예배를 주관하는 직무로서의 제사장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편집] 신도의 분포
로마 가톨릭 신도의 총수는 2008년 말 현재 11억 6,6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가톨릭교를 중화인민공화국 다음으로 큰 단일 인구집단으로 만든다. 로마 가톨릭교도는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지만, 특히 그 수가 많은 곳은 유럽과 아메리카이다. 2000년도의 통계에서는, 아메리카에 5억 2,000만 명, 유럽에 2억 8,000만 명, 아프리카에 1억 3,000만 명, 아시아에 1억 700만 명, 오세아니아에 800만 명이다(참고:ANNUARIUM STATISTICUM ECCLESIAE: Published for 2000 (HTML)).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은 최대의 종교이다. 유럽에서 국민 중 로마 가톨릭교도의 비율이 높은 나라는 라틴 유럽에서는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있고 비(非)라틴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벨기에, 크로아티아, 체코, 헝가리, 아일랜드, 리투아니아, 몰타, 폴란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이 있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및 영국의 북아일랜드 지방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도 수가 비슷하다.
아메리카에 대륙에도 거의 전 국가에 걸쳐 로마 가톨릭교도는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 로마 가톨릭교도가 많아서 이들 국가 국민의 다수가 로마 가톨릭교를 신봉하고 있다. 특히 그 수가 많은 나라는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이며, 특히 브라질은 세계에서 신도수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그러나 최근 이들 국가에는 오순절교회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와 복음주의 성격의 성공회도 성장하고 있다. 특히 칠레의 로마 가톨릭은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의 업적을 남겼다. 앵글로아메리카의 미국과 캐나다에는 라틴 아메리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 비중은 낮으나, 캐나다에서도 로마 가톨릭은 종교 중 신도수가 가장 많으며, 미국에서도 2008년말 현재 6,811만 5천명의 신자로서 국민의 4분의 1 가량이 속해 있는 중요한 종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여러 나라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신도는 콩고 민주 공화국, 나이지리아, 우간다 등에 많으며, 국민 중 신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나라로는 세이셸, 우간다, 부룬디 등이 있다.
아시아에서는 전체 인구 중 그 비중은 낮으나, 필리핀과 동티모르는 예외적으로 국민의 대다수가 로마 가톨릭을 믿고 있는 가톨릭 국가이다.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신도의 수가 큰 폭으로 증가하여 국민의 약 10.1% 가량이 믿고 있다. 그 외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는 가톨릭 신자의 비중이 상당히 낮다.
오세아니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신자가 많으며, 다른 나라에도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미국에 속하는 하와이 섬에서는 19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인 다미앵 신부가 한센인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
[편집] 역사
[편집] 로마 교회의 기원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시작됐다. 유다교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분파로 이해됐고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로 유다교와 늘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다음에 예루살렘은 더 이상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자연스럽게 집중되게 됐다. 비록 예루살렘이 기독교의 발상지이지만 오히려 로마가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치 상황 등 복합적인 이유에 기인한다.
로마 교회가 언제 생겼는지, 즉 로마에 첫 그리스도인이 언제 정착했고 어떻게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됐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바오로의 로마 서간을 근거로 적어도 그 집필 연대인 58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로마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오로는 59년에서 61년 사이에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로마 도착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나있지 않다. 다만 클레멘스의 코린토 서간과 외경인 베드로 복음서, 베드로 행전이 베드로의 로마 체류 사실과 함께 그의 순교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 동안 모질게 박해했는데 이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기독교 공동체의 주역이었던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의미와 배경으로 인해 지역교회를 넘어선 새롭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초기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일치의 기준이었고 가시적인 정점이었다. 이후 로마 주교는 스승처럼 다른 지역교회와 공동체의 문제에 가르침을 내린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내부 분쟁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로마 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은 로마를 방문해 로마 공동체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보장받곤 했다.[5][출처 필요]
[편집] 로마 제국의 박해
로마 제국의 박해는 대체로 10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 성격은 3기에 걸쳐 뚜렷이 구분된다. 100년경 까지의 제1기는 교회에 호의적이다가 로마 시 대화재 사건으로 일어난 우발적이고 산발적인 박해기이며 250년까지의 제2기는 교회를 반인류적 반국가적 금지된 종교로 규정하고 신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던 시기다. 가장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시행된 250년에서 313년까지의 제3기는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어난 박해시기였다. 이 4년여에 걸친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순교했다.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와 로마제국은 비록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안고 있었다.
먼저 로마인들은 병역을 노예나 무산자들에게는 부과 시키지 않을 만큼 시민의 권리요 의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개인보다 국가를 절대시하는 성향이어서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기독교와 상충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 종교적 기반에서 제국의 쇄신과 내적 강화를 꾀했는데 황제숭배 같은 국가종교 예배가 국가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으로 강조될수록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로마인들은 영적 세력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었는데 타치우스나 아우렐리우스 같은 황제들의 재위기간에 전염병, 기근, 홍수, 야만족 침입 등의 재난이 발생하자 기독교 반대파들은 기독교 때문에 신들의 분노를 사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며 군중들을 부추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무지도 박해의 한몫을 담당했는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에 대해 신자들을 식인종으로, 형제자매로서의 친교생활에 대해 근친상간하는 야만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0여 년에 걸친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마침내 로마제국의 새로운 사회·통치 질서로 자리잡게 되는 승리를 거둔다.[6][출처 필요]
[편집] 제국 교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2년 이탈리아로 출정해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티베르 강 밀비오 다리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전투 전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했을 때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키(Χ)와 로(Ρ)로된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고 한다. 이 밀비오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의 주인이 됐고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숭배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개종은 박해의 종식과 함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는 대전환점이 된다.[7] [출처 필요]
313년 밀라노를 방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동부지역의 황제 리치니우스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되고 그 중에서도 십자가 발현 체험을 한 콘스탄티누스는 종교문제, 특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포고형식의 영을 내리게 된다. 이를 밀라노 칙령 혹은 관용령이라 부른다.
밀라노 관용령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면서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제국 내 모든 시민들에게 적용되는 종교자유의 원칙을 선포한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시대에 몰수당한 재산이나 팔린 재산까지도 교회에 반납하도록 명시한 것이다.
이 밀라노 관용령 자체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거나 특권을 베푼 것이 아니라 타종교와 같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뿐이지만 기독교가 제국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기초가 됐다. 밀라노 관용령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취한 여러 조치들은 대중의 대량 입교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기독교 정신을 확산시키게 된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반 교회적 정책을 시행한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전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됨으로써 기독교 정책은 더욱 강화된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이은 아들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친 교회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비록 율리아누스 황제 때 반 교회 정책이 시행되긴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 때인 380년 2월에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의 반포와 함께 기독교가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됐다. 이로써 300년 간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낸 기독교는 제국교회, 국가교회가 됐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단초로 제국의 공인교회가 된 기독교는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권의 교회로, 순교자의 교회에서 국가교회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는 광범위한 복음전파와 함께 대중의 대량 입교로 인해 양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교회가 됨으로써 국가권력과 너무 밀착되어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세속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우려한 인물들 중 몇몇은 교회 복음화와 내적 쇄신 그리고 신앙생활의 심화를 위해 사막으로 은거하기도 해 초기 수도원 운동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8][출처 필요]
[편집] 십자군 운동
- 이 부분의 본문은 십자군입니다.
11세기 서유럽은 클뤼니 수도회와 그레고리오 개혁 등에 의해 수도원 문화가 확산되었고 종교적 열성이 고양된 상태였으며 새로운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기독교 정신은 사회전반에 걸친 기본 토대였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는 전체 사회구조를 위협하는 위험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상업의 발달 등으로 봉건지배 체제가 해체되고 자치도시의 독립이 진행되는 시기로 무역세계의 확대가 당면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민과 농민들의 생활 수준은 열악하여 생활수준이나 사회신분의 향상을 바라는 욕구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날로 점증되어갔다.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은 기사계급의 동요였다. 끊이지 않던 제후들간의 세력다툼이 11세기 이후 사회의 안정과 함께 소멸되었으며 교회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교회 안에 유입된 호전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평화」(Pax Dei)와 「하느님의 휴전」(Tregua Dei)이란 제도를 만들어 많은 전투 행위를 금지 시켰다. 이렇게 되자 기사들은 전투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고 신분마저 위태로워졌다.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 이슬람으로 삼분되어있던 국제정세 또한 셀주크 투르크족의 발흥으로 균형이 깨지고 동로마 제국이 교황을 비롯한 서유럽 사회에 구원을 요청하게 됐다. 637년부터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의 세력아래 들어가 있었지만 성지순례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족이 점령한 이후부터는 성지순례가 어려워졌고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리하여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근 200여 년 동안 8차례에 걸쳐 원정이 이루어졌다. 농민십자군에 이어 기사들과 귀족들로 이뤄진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이 거듭될수록 그 순수성도 잃어버리게 되는데 4차 원정에서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놀아나 성지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라틴제국을 세움으로써 동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회복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군 운동은 원정이 거듭될수록 신앙의 순수한 열정이 퇴색되고 변질된 채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교황의 주도로 이뤄진 십자군은 초기에는 교황권의 신장을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 십자군이 실패함으로써 교황권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동시에 유럽의 종교적 열정도 식었다. 또한 영주들이 십자군 원정에 나선 후 영지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왕권이 절대화하는 한편 공동체의식이 강화돼 민족의식 내지는 국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함으로써 서유럽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마련됐다. 또한 동방과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은 학문을 증진시켜 스콜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9][출처 필요]
[편집] 종교 개혁
- 이 부분의 본문은 종교 개혁입니다.
중세 말기에 에라스무스등의 인문학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며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못 박은 사건은 역사를 움직인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가장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른바 「면죄부」이다. 이것은「대사특전(indulgence)」을 지칭한다. 16세기초 독일에서 촉발된 대사 논쟁은 소위 종교개혁을 부른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독일 종교분열의 직접적 동기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설교에 있었다. 극도로 피상적이고 과장된 대사 설교를 통해 특히 당시 독일 교회는 부의 축적에 몰두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특히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교황청에 일정액을 그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계약했으며 동시에 자기 교구 안에서 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설교를 하도록 협약이 이뤄졌고 그 수익금의 반은 자신이 소유했다. 그는 대사 설교가들과 고해신부들을 임명하고 이들에게 설교에 대한 전체적 지침서를 주었다. 이 지침서는 돈을 많이 걷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웅변적 과장이 많았다고 한다.
루터의 주장처럼 대사를 통해 신자들의 미래의 죄까지 사해진다고 한 일은 없지만 고해성사표를 판매했고 이 표를 가지면 일생 중 언제라도 고해성사를 보면 교황이 보류한 죄까지 사해진다고 한 일은 있었다고 한다. 또 설교가들은 고해성사표를 사는 순간 교회의 영적 은혜를 얻기 때문에 통회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했고 죽은 사람을 위해 대사를 얻을 때에도 고해성사를 보거나 통회할 필요 없이 돈만 주면 되도록 되어있었다.
작금의 대사 설교가 성실한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보다는 돈으로 자기 영혼을 구하려고 고심하고 순례와 같은 외적 행사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 루터는 대주교에게 새 훈령을 통해 대사설교의 폐단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신학자들이 대사 교리를 명확히 밝힐 것을 촉구하면서 작금의 대사 시행을 반박하는 신학 명제로서 대사 명제와 대사 논문을 첨부했다. 루터는 후에 자신이 95개 조문을 발표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편지에 대해 주교들이 아무런 회답을 주지 않은데 있었다고 말했다. 이 95개 명제는 루터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출판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1518년 95개 항목으로 정리돼 「95개조 명제」로 인쇄됐다.
논쟁이 이어지면서 루터는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전 분야에 걸쳐 발전시키게 되고 쇄신의 주장은 분열의 빌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1518년 1월 대사 설교가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 수사 텟첼이 106개조 반박문으로 95개조 명제를 논박하자 루터는 대사 명제에 대한 해설서와 대사와 은총에 관한 글로 대응했고 저명한 신학자인 엑크(Johann Eck, 1486~1543)와도 논쟁을 벌였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교황청에 루터가 이단적 새 교리를 전파시키고 있다고 보고했고 교황 레오 10세는 독일에서 발생한 대사 사건을 교리 논쟁으로 간주해 직접 개입을 피하려고 했다. 루터는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대사 명제의 출판에 대해 해명하고 교황에 대한 충성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충성 선언과는 달리 루터가 동봉한 「대사 효력에 관한 해설서」는 교황의 권위보다는 공의회의 결정이 우선적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따라서 교황에게 복종을 표시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은 결코 취소할 수 없음을 고집했다.
레오 10세 교황은 8월 23일 아우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교황특사로 파견한 가예타노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파견해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루터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지만 논쟁은 계속됐다. 루터는 분열을 원치 않았고 면죄부의 폐단과 교회의 타락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교황청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며 외면하였고 마침내는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루터는 자신의 문제가 교황청이 아닌 독일 법정에서 취급되도록 요청하여 이는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연결되었고 교황권을 넘어 심각하게 부패하고 있는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세계 공의회 소집을 청원했다. 마침내 교황청은 파문장을 보냈으나 루터는 이를 불살랐다. 루터는 이후 세속 군주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의 확신을 실현하게 됐다.[10][출처 필요]
[편집] 로마 가톨릭 개혁
- 이 부분의 본문은 반종교 개혁입니다.
[편집] 로마 가톨릭의 교회개혁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루터 등에 의한 종교개혁 운동으로 서방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개신교, 성공회로 분열됐고 이 분열을 치유하려는 운동이 16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됐으며 이러한 쇄신 운동을 19세기 초 역사가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종교개혁이라고 불렀다.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난 반 로마 가톨릭 교회적인 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은 특히 교회의 내외적인 개혁을 정치적으로 후원했으며 정치적 결속을 공고히 하고 잃어버린 교회의 영향력과 영토 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편집] 예수회
당시 교황으로부터 쇄신의 주역으로 각별한 관심을 받던 예수회가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 운동의 중추가 됐다. 예수회는 특히 영성 생활 지도와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하는 선교 활동, 자선 사업, 청소년 교육과 신학 연구 등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과 신앙 복구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즉, 로마 가톨릭이 수천년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은 예수회 운동등을 통해 스스로 개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집]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독일의 로마 가톨릭 교회 제후들은 새롭게 변모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습에 고무돼 쇄신을 실행했고 자기들의 영지 안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개신교가 확산되면서 개신교 신자가 억압을 받는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야기되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열린다. 이 회의에서는 제후와 자유도시의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며, 루터교회와는 달리 장로교는 종교의 자유에서 제외되었다.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는 제후의 신앙을 인민이 따르게 하였으므로 개인적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제후와 신앙을 달리 할 경우에는 인민이 거주지를 이동하는 것이 인정되었다.[11] 1617년 페르디난드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을 때 개신교를 억압함으로써 같은 기독교인끼리 전쟁을 벌인 30년 전쟁(1618년~1648년)이 일어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정치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가 실추됐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 데 합의함으로써 가톨릭 개혁과 개신교, 가톨릭 간의 종교 분쟁이 종결됐다.[12][출처 필요]
[편집]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입니다.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특징이 있다.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의 선교사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간 조선의 지식인 간의 교제로 로마 가톨릭, 즉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주로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시파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적인 벽파에서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탄압했다. 즉, “조상을 몰라보는 사람”(무부지자[無父之者])이라는 게 박해의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성을 띤 사건이었다. 실제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백서’에서 ‘천주교가 반대 당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라고 하였다.[13] 하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이 수없이 나오는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청나라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 등 활발히 성장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16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교구는 서울, 대구, 광주의 3개의 관구 안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 내 각 교구장의 협의회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있다.
[편집] 같이보기
[편집]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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