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출애굽의 연대

하나님아들 2015. 12. 29. 17:34

 

출애굽의 연대

 

Ⅰ.출애굽의 서론

⇒출애굽기는 말 그대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재구성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탈출 공동체의 이야기는 우리의 경우 광복을 경험한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 더욱 확연해 진다. 이러한 출애굽(Exodus)은 진실로 이스라엘 민중에게는 광복의 기쁨이었으며, 건국의 새로운 역사적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탈출 공동체의 이야기는 신앙의 의식과 실천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성서의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이러한 민중적 관점이 많이 나타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적 언어로 그리고 야훼 하나님 중심으로 고백 되어 진 신앙으로 인해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로 강조되어 진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의 문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시점이 언제냐 하는 것이다. 출애굽이 B.C. 15세기경에 일어났다고 보는 ‘전기 연대설’과 B.C. 13세기경에 일어났다고 보는‘후기 연대설’이다. 이 중 오늘날 많은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는 ‘전기 연대설’이다. 여기서 전기 연대설과 후기 연대설을 비교해보려 한다.

 

Ⅱ. 출애굽의 역사적 정황

1.출애굽의 내용 분해

[1]이스라엘의 해방(1:1-18:27)

 

1.서문(1:1-22)

1)애굽의 이스라엘(1:1-7)

2)압제받는 이스라엘 (1:8-22)

 

2.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2:1-25)

1)모세의 출생 (2:1-4)

2)모세의 어린 시절(2:5-10)

3)모세의 결혼(2:11-25)

 

3.모세의 소명과 기사(3:1-4:31)

1)모세의 소명 (3:1-8)

2)모세의 사명 (3:9-22)

3)모세의 주어진 능력 (4:1-9)

4)세움받은 아론 (4:10-17)

5)모세의 애굽 귀환(4:18-31)

 

4. 바로와 대면한 모세 (5:1-23)

1)바로가 여호와를 모욕함(5:1-5)

2)바로의 보복(5:6-14)

3)패장들의 호소(5:15-21)

4)낙심한 모세 (5:22,23)

 

5. 언약의 재확인(6:1-13)

 

6.모세와 아론의 족보(6:14-27)

 

7.바로 앞에 선 모세(6:28-7:7)

 

8.애굽에서의 하나님의 이적(7:8-11:10)

1)뱀이 된 지팡이(7:8-13)

2)피 재앙(7:14-25)

3)개구리 재앙(8:1-15)

4)이 재앙(8:16-19)

5)파리 재앙(8:20-32)

6)악질 재앙(9:1-7)

7)독종 재앙(9:8-12)

8)우박 재앙(9:13-35)

9)메뚜기 재앙(10:1-20)

10)흑암 재앙(10:21-29)

11)장자 재앙의 선포(11:1-10)

 

9. 이스라엘의 유월절(12:1-13:16)

1)유윌절의 제정 (12:1-28)

2)장자 재앙(12:29-36)

3)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12:37-42)

4)유월절 규례 (12:43-51)

5)초태생의 성별(13:1-16)

 

10. 출애굽하는 이스라엘(13:17-15:21)

1)구름 기둥과 불기둥(13:17:22)

2)애굽 군대의 추격 (14:1-20)

3)홍해가 갈라짐 (14:21-31)

4)모세의 노래(15:1-18)

5)미리암의 노래 (15:19-21)

 

11.광야에서의 이스라엘 (15:22-18:27)

1)마라와 엘림 (15:22-27)

2)만나와 메추라기 (16:1-36)

3)므리바 사건(17:1-7)

4)아말렉과의 전쟁 (17:8-16)

5)이드로의 방문(18:1-12)

6)재판장을 세운 모세 (18:13-27)

 

[2] 시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19:1-40:38)

 

12.시내산 언약(19:1-24:11)

1)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19:1-13).

2)하나님의 시내산 현현 (19:14-25)

3)십계명 (20:1-17)

4)백성의 두려움(20:18-21)

5)계약과 율법 (20:22-26)

6)사회규범 (21:1-23:19)

7)약속과 경고 (23:20-33)

8)시내산 언약(24:1-11)

 

 

13.성막과 제사장직에 관한 지침 (24:12-31:18)

1)산상의 모세 (24:12-18)

2)이스라엘이 드릴 예물(25:1-9)

3)법궤 (25:10-22)

4)진설병 상(25:23-30)

5)등대 (25:31-40)

6)성막(26:1-37)

7)놋 제단(27:1-8)

8)성막 뜰(27:9-19)

9)등대 기름(27:20,21)

10)제사장 옷에 관한 규정 (28:1-43)

11)제사장직의 위임 (29:1-9)

12)제사에 대한 규례(29:10-46)

13)분향단 (30:1-10)

14)속전 (30:11-16)

15)물두멍 (30:17-21)

16)성별하는 향유 (30:22-33)

17)가루향 (30:34-38)

18)공교한 일군들 (31:1-11)

19)안식일 (31:12-17)

20)두 증거판(31:18)

 

 

14.배교와 계약 회복(32:1-34:35)

1)금송아지 (32:1-6)

2)모세의 중보기도 (32:7-14)

3)증거판을 깨뜨린 모세 (32:15-24)

4)우상숭배자의 처벌 (32:25-29)

5)모세의 기도(32:30-35)

6)시내산 출발(33:1-6)

7)회막(33:7-11)

8)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모세 (33:12-23)

9)계약의 갱신 (34:1-28)

10)모세의 변형 (34:29-35)

 

 

15. 성막의 건축(35:1-39:43)

1)안식일의 규례 (35:1-3)

2)필요한 자재의 헌납(35:4-29)

3)성막을 위한 일군들의 임명 (35:30-36:1)

4)풍족한 헌물 (36:2-7)

5)성막(36:8-38)

6)각종 기구들 (37:1-38:8)

7)성막 뜰(38:9-20)

8)헌물 일람(38:21-31)

9)제사장의 의복(39:1-31)

10)모든 기구의 검사(39:32-43)

 

16.성막의 봉헌(40:1-38)

1)각종 성별식 (40:1-16)

2)성막의 완성 (40:17-33)

3)여호와의 영광 (40:34-38)

2. 출애굽의 역사적 배경

⇒ 출애굽의 역사적 상황은 무엇이고, 이것이 기록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은 출19:1-8절에 대한 논의 이전에 가져야 할 질문이다. 왜냐하면, 출애굽기가 쓰여진 맥락 가운데에는 나름대로의 역사-신학적 관점이 존재하고, 이 가운데 기록된 시내산 계약은 그 문맥적 흐름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위 두 구절은 이러한 출애굽의 역사-신학적 관점의 핵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구절들이다. 즉, 구원(출1:1-18:26)과 언약(출19:1-40:38)은 출애굽기의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한다고 하였을 때 다가오는 문제점은 연대, 장소 뿐만 아니라 문서상의 존재 문제도 해당된다. 먼저, 연대에 대한 가설을 통한 역사적 상황을 인식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출애굽기의 연대와 관련하여 성서의 두 본문이 중요시 여겨지고 있는데, 하나는 왕상 6:1이고 다른 하나는 삿11:26이다. 전자에 따르면 출애굽이 솔로몬 제4년째 되는 해의 480년 전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솔로몬 제4년이 주전 967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는 주전 1447년이 된다. 후자에서는 암몬 왕은 모압이 전에 암몬 족속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거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입다가 이스라엘이 삼백년 전에 이 땅에 들어 온 이래로 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주전 15세기로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입다의 연대가 솔로몬의 연대만큼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자만큼의 강력한 근거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점에서, 고고학적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은 주전 13세기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존 브라이트(John Bright)의 경우 이집트에서의 ‘하비루’(̔Apiru)의 존재와 관련하여 13세기의 노예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이 아바리스에서 노역을 했다면, 그들은 적어도 세토스 1세의 치세 때(주전1305-1290년경) 이집트에 있었음에 7틀림없으며, 그리고 아마 그 도시의 재건이 완료되었던 람세스 2세의 치세 때(주전 1290-1224)에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는 출1:11절에서의 비돔과 라암셋을 텔 엘 마스쿠다와 타니스로 봄으로, 람세스 2세에 의해 엘 마스쿠다가 이루어지는 데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의 새로운 도입은 주전 13세기 설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빔슨의 해석에 의하면 비돔이라는 도시는 텔 엘-레테바 혹은 헬리오폴리스등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이 유적지들 역시 13세기보다는 이른 시기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역사적 재구성에 있어서 연대측정을 통한 재구성은 학자들의 논쟁으로 인해 애매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전 15세기에서 주전 13세기 정도로 출애굽의 연도를 예측하게끔 한다. 장소문제에서도 시내산의 존재 여부에 대해 아직도 밝혀지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존스톤(W. Johnstone)은 그의 소논문을 통하여, 출애굽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여기에 대한 근거로 시내산의 존재여부의 불투명을 예로 설명하고 있다. “만약 시내산이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시내 반도 남쪽에 있는 Jebel Musa와 동일시 된다면, 그것은 단지 약 3000명의 베두인 인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위치에 해당된다. 기후적 조건이 청동기 시대 이후로 변함이 없다면, 광야생활 40년 동안 2백만 내지 3백만의 이스라엘 백성의 지속성에 대한 언급없이는 일년 동안 그들이 시내산 앞에 장막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는 출애굽으로부터의 어떤 유물도 발견할 수 없었고,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이스라엘 점령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견해 역시, 새로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한 발견에 의해 언제든지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Ⅲ. 출애굽과 정복 연대 연구를 위한 주된 자료들

1. 구약성경

1) 성경적 자료

⇒열왕기상6:1- 성경 저자는 출애굽이 있은 지 480년 만에 솔로몬 성전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후기 출애굽 연대를 지지하는 진보주의자들은 성전 건축은 출애굽 한 지 300년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아 출애굽 연대를 1266년으로 주장한다.

⇒사사기11:15~27 - 11:26절 이 부분을 읽으면 입다는 출애굽한 지 300년이 지난 정복 직전의 이스라엘 역사 기간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암몬을 격파한 때를 12세기 말기(1100년경)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은 1400년경에 일 어난 사실임을 말하고 있다.

-위 둘을 부정할만한 성경 본문상의 증거나 내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2) 이집트에서의 체류 기간

⇒요셉의 선정으로 인하여 국왕을 중심한 왕실 및 지배 계층들은 야곱의 자녀손을 선대하긴 하였지만 그들의 직업인 목축업은 이집트인들이 싫어하거나 천대하는 직업이었으므로 요셉이 죽은 후 히브리인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점차 변하게 되었다.

①문 제: 이집트 체류 기간이 얼마냐에 따라 출애굽뿐 아니라 족장 기사와 요셉 기사에 영향을 끼친다. 전기 연대 주장자들은 성경에서대로의 430년이라고 보고 있으나, 후기 연대 주장자들은 215년밖에 안 된다고 주장한다.

② 장기체류(430년)의 증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출 12:40)가 첫 번째 좋은 증거이다. 둘째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신 초기에 그의 후손은 이방에서 객이 될 것이며 “400년 동안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라고 예언하신 창세기 15:13의 말씀이 강한 뒷받침을 하고 있다. 또한 70여명의 소수가 200만 이상으로 증가하려면 430년도 부족하므로 그 이하의 횃수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

③ 단기 체류(215년)의 증거: 후기 연대 주창자들이 단기 체류의 첫 번째 근거로 출애굽기 12:40의 70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을 든다. 이 학설은 신빈성이 매우 적지만, 많은 학자들에 게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이 학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4세대와 레위에서 모세까지 4대 를 쉽게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들은 초대 교부인 터툴리안이 215년으로 주 장한 것을 예로 든다. 아마 215년을 주장하는 이유는 출애굽기12:40의 숫자를 맛소라 성 경이 아닌 당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경을 기초하여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 이들은 215 이집트 체류기간의 근거로 갈라디아서 3:17을 들고 있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이 아브 라함 언약이후 430년이 흐른 뒤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게 한다.

-여기서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감안할때 430년이라야 가능하지, 215년은 분명히 상상적인 일 뿐이다. 그러기에 장기체류기간이 더 합리적임을 결론내릴 수 있다.

 

2. 성경 이외의 증거

⇒성경 이외에는 어떤 고대 근동 문헌에도 히브리인의 노예생활, 재앙, 출애굽, 정복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1) 메르넵타의‘이스라엘 비문’

⇒이 비문의 중요성은 이집트의 모든 기록 가운데 유일하게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명시된 기록이고, 또“이스라엘”은 임 1220년까지는 팔레스타인에 설립되어 다른 나라에 알려져 있는 나라로 언급하고 있어, 메르넵타가 히브리족을 정복한 사실이 아니고, 그들을 다른 팔레스타인 백성들과 함께 정복한 나라들의 하나로 기록한 사실에 있다. 이 증거로 후기 연대 증명은 어렵다. 그렇다고 초기 연대를 증명해 주지는 않지만, 다만 초기쪽으로 기울게 할 뿐이다.

2) 이집트 역사에 나타난 다른 자료들

⇒첫째로 제18왕조의 역사적 상황에 모든 히브리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력은 아멘호텝1세가 치세하던 힉소스 축출 직후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둘째로 14세기 초반의 기록인 아마르나 편지에 보면, 이집트 변방에 있는 도시국가의 추자들이 아피루라고 불리우는 자들에게 침공을 당하여 곤경에 처하자, 이집트의 바로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 중의 하나인 “아셀”이라는 이름이 있는 비문(14세기로 추정)이 출토되었다. 출애굽의 성경적 연대와 비슷한 시기의 것이다. 이 사실은 다만 모세 영도하에 이집트를 떠났던 이스라엘의 본래의 연합을 증명해 줄 뿐이라고 한다.

 

Ⅳ. 20세기 학자들이 주장하는 출애굽 연대에 대한 여러 견해들

1. 초기(전기) 연대-15세기 학설

1)일반적․초기 연대(1446년경): 1920년대 잭(J.W.Jack)이 열왕기상 6:1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출애굽 연대를 1446년으로 보면서 보편화된 학설로 현금의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이 따른다. 비돔과 라암셋에서의 억압된 이스라엘 민족을 다루면서, 잭은 라암셋 도읍이 람세스2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잭은 출애굽기 1:11을 해석함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대에 라암셋이라고 불리우게 될 성에서 일했다고 보아, 꼭 람세스2세 치하에서 노역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바리스람세스는 람세스 2세 때 기초를 세운 것이 아니라, 중 왕조 초기까지 소급이 가능한 것을 발견했다. 케년 이후로 이스라엘인으로 정복되었다고 여겨지는 많은 팔레스타인의 도성들이 15세기보다는 13세기 말기에 불탔음이 입증되면서 많은 진보 학자들과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초기 연대보다 후기 연대를 추종하기에 이르렀다.

2)이른 초기 연대(1470년경): 빔슨이 주장하는 학설로서, 근거는 팔레스타인 도성의 파괴에 대한 고고학적 연대가 중왕국 시기말에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1230-1220년의 연대를 수용한다면 결과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이 가나안 도시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되어, 성경적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 사이에 많은 상충을 발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중기 청동기는 1550년에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 빔슨은 중기 청동기 시기 마지막 연대를 1550년에서 1450으로 낮추자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중기 청동기 말이나 후기 청동기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나타난 “두 가지 채색 무늬 도기”라고 불리우는 도자기를 들고 있다. 만약 팔레스타인 도성의 중기 청동기 말의 파괴가 1450년경 뒤에 이루어졌다면, 현금의 견해인 팔레스타인 도시 파괴를 힉소스 축출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폐기되어야 한다. 빔슨은 도시 파괴를 1430년경 히브리인이 한 것으로 추론한다. 빔슨의 견해에는 열왕기상 6:1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도시 파괴가 중기 청동기말의 1550년보다는 1450년에 일어났다고 가정한다면 가장 논리적인 결론은 파괴자가 히브리인이 아닌 제18왕조 중간의 어느 바로가 되고, 또한 히브리인의 팔레스타인 도시 점령의 방법에 어려움의 3가지 난점이 있다.

 

2. 후기 연대-13세기 학설

1) 이른 후기 연대(1280년): 이 학설의 대표적인 학자는 고고학을 중심하여 역사를 재구성하였던 올브라이트이다. 1930년대부터 자신의 고고학적 발굴 현장 현장과 다른 이의 발굴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히브리인의 정복에 관한 주된 기간은 1400년경이 아니고 후대 곧 13세기 말 아니면 12세기 첫 상반기에 일어난 것으로 이론화시켰다. 올브라이트는 2개의 다른 출애굽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아마르나 편지에서 보이는 하비루의 것이요, 두 번째는, 모세의 인도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후기 출애굽이 성경에 기록되어졌으므로 이를 1280년으로 추정하였다. 이 학설을 주창하는 자들을 출애굽기 1:11에 언급된 두 도시의 이름이 출애굽 연대를 결정하는 데 매우 가치 있는 자료로 본다. 만약 이스라엘이 세티1세 때 이집트에 있었고, 1280년에 가난안에 있었다면, 출애굽은 1280년이나 그 후 얼마 안되어 일어났고, 여호수아가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시작한 것은 1250년경일 것이다.

2) 일반적인 후기 연대(1220년):현금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따르는 이 연대는 19세기부터 주창되었으나 당시 위대한 고고학자였던 페트리가 이 학설을 받아들이면서 보편화되었다. 히브리인이 라암셋에서 노역하였기에 노역 시기를, 도시 이름이 바로의 이름을 땄다고 보아, 제 19왕조의 람세스 2세 때로 본다. 후기 연대가 보편화 되었지만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갖는다. 첫째, 열왕기상 6:1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둘째, 만약 이들의 주장을 따라 70인역에서 언급하는 출애굽기 12:40의 430년간의 가나안과 이집트 체류를 인정하면, 요셉과 이스라엘의 이집트 체류 시작은 힉소스 시기의 17세기가 된다. 셋째, 메르넵타의 이스라엘 비문이 이 학설의 가장 큰 방해자이다. 넷째, 또 처음부터 고고학적 발굴에서 가난안 정복의 증거를 찾아 성경의 연대를 재구성 내지는 재해석하려는 것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Ⅴ. 후기 연대 증거들로 주장되는 자료들에 대한 비판

1.비돔과 라암셋

⇒①출애굽기 1:11에 언급된 도시가 람세스2세의 라암셋과 동일하다든가, 아피루가 이스라엘과 동일하다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희박하다. ② 라암셋이란 도시 이름이 람세스 2세의 이름을 따랐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자주 간과하는 또 다른 사실은 도시들의 건축과 출애굽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였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출애굽기 1:11의 비돔과 라암셋의 언급은 출애굽을 13세기로 보는 데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출애굽이 아닌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기 시작한 초기의 시기로 보는 것이 더 낫게 보인다.

2. 요단 동편 지역에 정착촌이 없었다는 견해

⇒출애굽을 13세기로 보려는 두 번째 증거는, 최근 학자들이 공격하는 요단동편의 고고학적 증거에 있다. 글뤡은 표면답사를 통해 1900-1300년에 정주했던 거민이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글뤡의 고고학적 해석을 따르는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에돔과 모압, 그리고 다른 왕국들과는 13세기 이전에는 만날 수 없다고 본다. 글뤡의 표면 답사를 통한 주장은 지난30여년간 매우 심하게 조정되었다. 그러나 글뤡의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다. 초기 연대를 부정하기 위해서 글뤡의 주장이 아직도 마치 합당한 증거인 것처럼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 중앙 가나안 땅의 파괴

⇒출애굽 13세기의 중앙 가나안의 도시에 전면적이고 넓은 지역의 파괴에 대한 불변의 증거가 있는 관계로 이런 파괴가 가능한 역사적 사건을 이스라엘 정복으로 여겨, 정복은 파괴의 결과이므로 출애굽은 이보다 약간 이른 시기일 것이다.

 

▶ 결론적으로, 출애굽과 정복의 연대를 후대로 돌리려는 어떤 노력도 불확실하며 실제로 성경적 기사와 반대된다. 성경은 1446년을 주장하고 이 사실에 반대되는 학설은 가공의 증거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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