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와 제사문제
전도폭발훈련 -사랑의교회-
목 적
1) 전도현장에서 제사문제에 관련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을 때 조상제사와 의미를 바로 이해시키고 성경적으로 잘못된 점을 깨닫게 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2) 전도자가 조상제사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게 한다.
3) 전도자가 조상제사의 잘못된 점을 성경과 비교하여 알도록 한다.
1. 서 론
▶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든지 전도의 가장 높은 장벽은 그 나라 그 민족 특유의 민족주의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미신' 이라고 한다. 전도는 언제나 그 민족의 토착언어와 토착문화의 옷을 입혀서 복음을 전함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 여기에는 상대적인 요소와 절대적인 요소가 있다. 서로 타협하며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상대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굽힐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복음의 절대적 요소가 있다. 이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한국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에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을 십분 이해하고 문화적 장벽을 용이하게 넘어서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려운 벽이 둘 있는데 그 첫째가 조상숭배요, 둘째가 술과 담배 문제라고 생각된다.
▶ 이론상으로는 간단한 듯 보이나 전도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너무나 높고 두터운 벽이 여기에 있다.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제사 때문에 곤란하다." "나는 장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라는 핑계가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 예나 오늘이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미신을 버리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버리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용기' 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속해있던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혁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2. 조상제사의 유래
▶ 고조선(古朝鮮)의 원시 종교였던 무교(巫敎) 에는 제사풍속이 없었다.
무속에서는 오히려 천신(天神)을 숭배하는 제천의 풍속이 있을 뿐이었다.
▶ 여러가지 신을 섬기는 풍속으로서 천신을 숭배하는 자연종교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속화란 민속신앙과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이 결합해서 생긴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풍속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 고대 조선시대에 우리 민족이 조상을 숭배해서 제사했다는 풍습을 전하는 기록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조상에 제사드리는 풍속은 무속적인 천신제사의 민속에 유교적 사상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이조 500년 동안에 우리 고유의 민속의례가 유교의 조상숭배 형식의 틀에 갇혀서 지나온 셈이다. 유교는 봉건적이며 또 귀족적인 종교인 것이 사실이다.
결국은 상류층에서나 시행할 수 있는 조상숭배 의식이 지켜지는 동안 이 계층에는 허례허식으로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드는 문제를 낳았고 반면에 일반 서민층에서는 이 형식에 매여서 순수한 내용과 의미조차 모르고 미신적인 예속만 되풀이해온 셈이다.
▶ 불교는 이 조상숭배 의식에 약간의 영향을 준바 있으나 극락 사상을 제하고는 결정적인 영향을 준바 없다고 보여진다.
▶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은 무속신앙에 근거하여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이 신앙이 제사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뿌리가 된다.
▶ 시체를 매장할 때 여러가지 격식을 갖추려는 것은 죽은 영혼이 그 시체 주변에 있든지 또는 배회하고 있으며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민속신앙에 근거하여 조상숭배 사상과 결합할 때에 죽은 조상의 혼이 다시 찾아와 차려놓은 제물을 먹는다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 때문에 지금도 제례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 깊은 뜻은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이미 죽은 조상의 혼이 배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지정된 안식소에 가 있지만 때때로 자손들을 찾아오며 특히 죽은 장소와 그가 살던 곳에 찾아오고 그 혼들이 끊임없이 자손들의 예배와 공양을 받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동시에 이처럼 극진한 공양을 받는 조상의 혼은 그 자손을 가호한다고 믿는 것이다.
▶ 이 민속신앙이 발전하며 또 세속화될 때에 죽은 조상의 혼의 가호를 받고자 하는 자기 중심적 욕망이 우선되고 심지어는 이 자손들의 액운과 재해를 막아주고 또 큰 복을 내려준다고 기복 사상에까지 내려가게 되기도 한다.
▶ 이 때문에 산 늙은 부모는 자손을 돕지 못하고 죽은 부모의 혼백은 자손에게 복을 줄 수 있다는 엉뚱한 말도 나오게 되고 살아계신 부모에게 등한하고 죽은 후에 극진한 제사를 드리는 크나큰 불효한 제사의식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그런즉 미신적인 뿌리에 유교적인 옷을 입혔다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 본래 제사란 죽은 이를 계속 공양함으로써 효를 계속 이어가자는 추양계효(追養繼孝) 행위이지만 이것이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미신적 제사풍속이 되어버렸다.
3. 조상제사의 의미
「제사(祭祀)」 또는 「제례(祭禮)」의 본래적 의미는 신(神)과 세상을 떠난 사람의 영(靈)에 대한 사람들의 위안과 감사를 표하는 기원의식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조상 제사」는 세상을 떠난 조상들에게 효(孝)를 한다는 명목으로 자손들이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기원하는 것이다.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不孝)를 한다고 생각한다.
조상 제사는 우리 민족의 미풍 양속에 속하는 것이라고 잘못 말하는 자들이 있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제사는 중국의 요(堯), 순(舜)시대부터 있었는데, 조상신(祖上神)에 대한 제사는 하(夏)와 은(殷)나라를 거쳐 주(周)나라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조 계승과 왕가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주로 천신(天神)에게 제사하였다. 조상제사는 고려시대 이후 나타나는데 조선 시대 이후 4대 고조까지 제사하고 있으나 오늘에 와서는 편의에 의해 행하여지고 있다.
4. 성경의 제사
▶ 성경에는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드렸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는 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제사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뜻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제사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속죄제사였다. 그 제사들은 피를 흘려서 뿌려서 드렸고 제물을 온전히 불살라 드렸다.
▶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아니었다. 이 제사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이 제사를 드려서 큰 복을 받아내자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이사야 1장).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사무엘상15:22 )
▶ 하나님은 부정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책망하셨다. 그런고로 성경의 제사는 마음과 뜻을 회개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곧 제사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 하시는 제사는 회개, 겸손, 의와 화해 그리고 거룩함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긍휼과 사랑이 우선되는 제사이어야 했다.
▶ 더욱 귀중한 신학적인 의미는 이 제사들은 계시적이요 예표적이 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그의 자녀로 만나주시며 영접해 주심에는 그 자신에 지불되는 엄청난 희생이 있다. 이 하나님 자신이 지불하시는 희생을 제물 위에서 계시하고 계신 것이다. 생명을 죽여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 '죽음'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공의로운 사랑이 구체적으로 상징화되어 계시된 것이 제사이며 제물이다.
▶ 따라서 결정적인 제사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그 역사적인 예표가 곧 제사인 것이다.(히브리서 참조)
5. 제사문제의 발단
유교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조상제사(祖上祭祀) 문제」는 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사회 문제가 되어왔다. 우리나라에는 천주교회가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개신교보다 100년이나 먼저 들어왔는데, 그 때 천주교는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18세기 말엽에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조상숭배와 제사를 미신 으로 여겨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 문제화하여 1871년에 큰 핍박이 있었다. (신해교난, 辛亥敎難) 그 발단은 단순히 진산의 윤지충이란 천주교도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했다는 데서 생긴 것이었다. 핍박 이유는 「서학은 미풍양속인 조상 제사를 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천주교는 조상 제사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성당에서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1700년대 조선시대 서학을 연구하는 실학자 이승훈 선생이 서학을 연구하다가 어느날 제사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는 제사문제에 봉착하자마자 바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그는 당시 기독교를 한국에 먼저 전해 준 중국, 북경에 가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거기서 세례를 받게 되었고,17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후 약 7년이 지난 뒤인 1791년 어느 여름날,전라도 해남에 양반출신의 윤지충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그는 24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영재였으며 유명한 실학자 정약용의 외삼촌이었다. 그는 당시 약 4년 전에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서 북경을 왕래하며 선교사들과 말씀을 나누며 교제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 권씨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는 슬픔을 억누르며 상주로서의 예의범절을 다 갖추고 장례를 치렀으나 오직 어머니의 위패만은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그랬더니 장례에 참석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는 불효자식이요,나라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국가의 법도를 반역하는 사람이라도 매도하고, 이를 고발함으로 말미암아 당국에 잡혀서 고문을 받다가 1791년 정조 15년 11월 8일 극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또 그후 약 100년후인 1880년 경의 당시 노춘경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날 한문서적을 읽다가 기독교가 조상도 모르고 임금도 섬기지 않는 불효의 종교라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그래서 이 종교가 서양에서 건너온 종교란 사실을 알고는 이것을 따지기 위해 당시 서양인 선교사인 죤 해론(John W. Heron) 의사를 찾아갔다.그리고는 가서 따졌더니 죤 해론 의사는 말하기를'나는 잘 모른다' 하면서 신중히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는 또 당시 선교사로 입국해 있던 알렌(H.N. Allen) 의사를 찾아갔다.
그때 이 알렌 의사는 죤 해론과는 달리 모른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쪽복음 성경을 눈으로 가리켰다.
이에 노춘경은 그 쪽복음 2권을 가지고 집에 가서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그가 그렇게 열심히 읽은 이유는 기독교를 따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는 "정말 아니로구나, 기독교가 잡풍을 유발하는 나쁜 종교가 아니로구나. 오히려 유교보다 낫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깊이 깨달은 그는 곧장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 집으로 찾아갔다.
이때 언더우드 목사님은 심히 놀라면서 이 나라의 국법이 기독교 신앙을 금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아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러나 노춘경은 결연한 표정으로
'목사님, 이제 저는 예수님을 믿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도 세례를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심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누가 볼까봐 또 누가 와서 듣거나 엿볼까봐 세례를 베풀기 전에 문 밖에다 보초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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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적
1) 전도현장에서 제사문제에 관련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을 때 조상제사와 의미를 바로 이해시키고 성경적으로 잘못된 점을 깨닫게 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2) 전도자가 조상제사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게 한다.
3) 전도자가 조상제사의 잘못된 점을 성경과 비교하여 알도록 한다.
1. 서 론
▶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든지 전도의 가장 높은 장벽은 그 나라 그 민족 특유의 민족주의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미신' 이라고 한다. 전도는 언제나 그 민족의 토착언어와 토착문화의 옷을 입혀서 복음을 전함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 여기에는 상대적인 요소와 절대적인 요소가 있다. 서로 타협하며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상대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굽힐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복음의 절대적 요소가 있다. 이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한국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에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을 십분 이해하고 문화적 장벽을 용이하게 넘어서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려운 벽이 둘 있는데 그 첫째가 조상숭배요, 둘째가 술과 담배 문제라고 생각된다.
▶ 이론상으로는 간단한 듯 보이나 전도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너무나 높고 두터운 벽이 여기에 있다.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제사 때문에 곤란하다." "나는 장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라는 핑계가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 예나 오늘이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미신을 버리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버리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용기' 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속해있던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혁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2. 조상제사의 유래
▶ 고조선(古朝鮮)의 원시 종교였던 무교(巫敎) 에는 제사풍속이 없었다.
무속에서는 오히려 천신(天神)을 숭배하는 제천의 풍속이 있을 뿐이었다.
▶ 여러가지 신을 섬기는 풍속으로서 천신을 숭배하는 자연종교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속화란 민속신앙과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이 결합해서 생긴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풍속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 고대 조선시대에 우리 민족이 조상을 숭배해서 제사했다는 풍습을 전하는 기록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조상에 제사드리는 풍속은 무속적인 천신제사의 민속에 유교적 사상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이조 500년 동안에 우리 고유의 민속의례가 유교의 조상숭배 형식의 틀에 갇혀서 지나온 셈이다. 유교는 봉건적이며 또 귀족적인 종교인 것이 사실이다.
결국은 상류층에서나 시행할 수 있는 조상숭배 의식이 지켜지는 동안 이 계층에는 허례허식으로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드는 문제를 낳았고 반면에 일반 서민층에서는 이 형식에 매여서 순수한 내용과 의미조차 모르고 미신적인 예속만 되풀이해온 셈이다.
▶ 불교는 이 조상숭배 의식에 약간의 영향을 준바 있으나 극락 사상을 제하고는 결정적인 영향을 준바 없다고 보여진다.
▶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은 무속신앙에 근거하여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이 신앙이 제사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뿌리가 된다.
▶ 시체를 매장할 때 여러가지 격식을 갖추려는 것은 죽은 영혼이 그 시체 주변에 있든지 또는 배회하고 있으며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민속신앙에 근거하여 조상숭배 사상과 결합할 때에 죽은 조상의 혼이 다시 찾아와 차려놓은 제물을 먹는다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 때문에 지금도 제례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 깊은 뜻은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이미 죽은 조상의 혼이 배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지정된 안식소에 가 있지만 때때로 자손들을 찾아오며 특히 죽은 장소와 그가 살던 곳에 찾아오고 그 혼들이 끊임없이 자손들의 예배와 공양을 받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동시에 이처럼 극진한 공양을 받는 조상의 혼은 그 자손을 가호한다고 믿는 것이다.
▶ 이 민속신앙이 발전하며 또 세속화될 때에 죽은 조상의 혼의 가호를 받고자 하는 자기 중심적 욕망이 우선되고 심지어는 이 자손들의 액운과 재해를 막아주고 또 큰 복을 내려준다고 기복 사상에까지 내려가게 되기도 한다.
▶ 이 때문에 산 늙은 부모는 자손을 돕지 못하고 죽은 부모의 혼백은 자손에게 복을 줄 수 있다는 엉뚱한 말도 나오게 되고 살아계신 부모에게 등한하고 죽은 후에 극진한 제사를 드리는 크나큰 불효한 제사의식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그런즉 미신적인 뿌리에 유교적인 옷을 입혔다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 본래 제사란 죽은 이를 계속 공양함으로써 효를 계속 이어가자는 추양계효(追養繼孝) 행위이지만 이것이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미신적 제사풍속이 되어버렸다.
3. 조상제사의 의미
「제사(祭祀)」 또는 「제례(祭禮)」의 본래적 의미는 신(神)과 세상을 떠난 사람의 영(靈)에 대한 사람들의 위안과 감사를 표하는 기원의식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조상 제사」는 세상을 떠난 조상들에게 효(孝)를 한다는 명목으로 자손들이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기원하는 것이다.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不孝)를 한다고 생각한다.
조상 제사는 우리 민족의 미풍 양속에 속하는 것이라고 잘못 말하는 자들이 있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제사는 중국의 요(堯), 순(舜)시대부터 있었는데, 조상신(祖上神)에 대한 제사는 하(夏)와 은(殷)나라를 거쳐 주(周)나라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조 계승과 왕가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주로 천신(天神)에게 제사하였다. 조상제사는 고려시대 이후 나타나는데 조선 시대 이후 4대 고조까지 제사하고 있으나 오늘에 와서는 편의에 의해 행하여지고 있다.
4. 성경의 제사
▶ 성경에는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드렸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는 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제사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뜻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제사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속죄제사였다. 그 제사들은 피를 흘려서 뿌려서 드렸고 제물을 온전히 불살라 드렸다.
▶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아니었다. 이 제사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이 제사를 드려서 큰 복을 받아내자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이사야 1장).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사무엘상15:22 )
▶ 하나님은 부정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책망하셨다. 그런고로 성경의 제사는 마음과 뜻을 회개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곧 제사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 하시는 제사는 회개, 겸손, 의와 화해 그리고 거룩함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긍휼과 사랑이 우선되는 제사이어야 했다.
▶ 더욱 귀중한 신학적인 의미는 이 제사들은 계시적이요 예표적이 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그의 자녀로 만나주시며 영접해 주심에는 그 자신에 지불되는 엄청난 희생이 있다. 이 하나님 자신이 지불하시는 희생을 제물 위에서 계시하고 계신 것이다. 생명을 죽여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 '죽음'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공의로운 사랑이 구체적으로 상징화되어 계시된 것이 제사이며 제물이다.
▶ 따라서 결정적인 제사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그 역사적인 예표가 곧 제사인 것이다.(히브리서 참조)
5. 제사문제의 발단
유교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조상제사(祖上祭祀) 문제」는 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사회 문제가 되어왔다. 우리나라에는 천주교회가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개신교보다 100년이나 먼저 들어왔는데, 그 때 천주교는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18세기 말엽에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조상숭배와 제사를 미신 으로 여겨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 문제화하여 1871년에 큰 핍박이 있었다. (신해교난, 辛亥敎難) 그 발단은 단순히 진산의 윤지충이란 천주교도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했다는 데서 생긴 것이었다. 핍박 이유는 「서학은 미풍양속인 조상 제사를 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천주교는 조상 제사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성당에서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1700년대 조선시대 서학을 연구하는 실학자 이승훈 선생이 서학을 연구하다가 어느날 제사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는 제사문제에 봉착하자마자 바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그는 당시 기독교를 한국에 먼저 전해 준 중국, 북경에 가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거기서 세례를 받게 되었고,17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후 약 7년이 지난 뒤인 1791년 어느 여름날,전라도 해남에 양반출신의 윤지충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그는 24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영재였으며 유명한 실학자 정약용의 외삼촌이었다. 그는 당시 약 4년 전에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서 북경을 왕래하며 선교사들과 말씀을 나누며 교제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 권씨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는 슬픔을 억누르며 상주로서의 예의범절을 다 갖추고 장례를 치렀으나 오직 어머니의 위패만은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그랬더니 장례에 참석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는 불효자식이요,나라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국가의 법도를 반역하는 사람이라도 매도하고, 이를 고발함으로 말미암아 당국에 잡혀서 고문을 받다가 1791년 정조 15년 11월 8일 극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또 그후 약 100년후인 1880년 경의 당시 노춘경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날 한문서적을 읽다가 기독교가 조상도 모르고 임금도 섬기지 않는 불효의 종교라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그래서 이 종교가 서양에서 건너온 종교란 사실을 알고는 이것을 따지기 위해 당시 서양인 선교사인 죤 해론(John W. Heron) 의사를 찾아갔다.그리고는 가서 따졌더니 죤 해론 의사는 말하기를'나는 잘 모른다' 하면서 신중히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는 또 당시 선교사로 입국해 있던 알렌(H.N. Allen) 의사를 찾아갔다.
그때 이 알렌 의사는 죤 해론과는 달리 모른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쪽복음 성경을 눈으로 가리켰다.
이에 노춘경은 그 쪽복음 2권을 가지고 집에 가서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그가 그렇게 열심히 읽은 이유는 기독교를 따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는 "정말 아니로구나, 기독교가 잡풍을 유발하는 나쁜 종교가 아니로구나. 오히려 유교보다 낫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깊이 깨달은 그는 곧장 언더우드(H.G. Underwood) 선교사 집으로 찾아갔다.
이때 언더우드 목사님은 심히 놀라면서 이 나라의 국법이 기독교 신앙을 금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아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러나 노춘경은 결연한 표정으로
'목사님, 이제 저는 예수님을 믿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도 세례를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심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누가 볼까봐 또 누가 와서 듣거나 엿볼까봐 세례를 베풀기 전에 문 밖에다 보초를 세웠다고 한다.
출처 : 의정부북부교회
글쓴이 : 염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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