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

[스크랩] "저는 전도 못한 가짜 목사였습니다"

하나님아들 2015. 9. 15. 15:39
"저는 전도 못한 가짜 목사였습니다"
[전도간증]신장섭 목사(능곡 평산교회) 上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 이슬비전도 문화상 목회자 부문 금상 수상작

어느 날 한 목회자로부터의 상담 전화를 받았다. 그 분의 목소리는 고통과 아픔의 떨림이었다.

“나는 더 이상 목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 실망과 낙담의 음성은 바로 내가 겪어야 했던 아픔이었다. 비록 전화 선상이지만 서로 격려해주면 기도해 주었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 이 전도 간증문을 기록해 나가면서 주마등처럼 스친다. 지난 1년 남짓의 기간들이 너무나 소망과 기대와 떨림 속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나 역시도 감격 속에서 한편으로는 나를 향한 도전 속에서 기록을 하고 있다.

과연 고통과 아픔의 떨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 부흥이었다. 목회자에게 한평생의 꿈과 소망이 있다면 교회 부흥일 것이다. 젊음을 불태우고 눈물, 콧물로 신학교에 뛰어들어 목회자로서 목회 현장 속에서 닥쳐오는 수많은 갈등의 아픔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될까, 때로는 한 사람을 목회해도 나의 최선을 다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눈물을 상급으로 보상해 주신다는 위로의 말을 듣곤 하지만 부흥하지 못하는 목회 현장을 바라보면서 나의 진실을 외치며 발버둥 친다고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외롭고 힘든 목회의 길

한 평생 개척교회를 섬기겠다고 자위해 보지만 어느덧 개척한 지 2-3년이 지나가면 이제는 교회가 성장해야 될 것이다. 영원한 개척교회는 없다. 한적한 시골이든 벽촌이든 교회는 성장해야 된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역사가 아닌가? 그러나 목회 현장은 너무나 외롭기에 때론 수많은 예기치 못하는 일들이 닥쳐오기 때문에 어느덧 그 감격의 때가 지나가고 낙심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 이 간증문을 기록해 가면서 진정한 교회 부흥의 비결은 무엇인가, 성경적인 간단한 원리와 목회 현장의 체험을 통해서 모든 분들에게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신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록한다.

   
   ▲ 한 교회에서 열린 이슬비전도편지 전시회
진정한 부흥의 비결은 전도

해답은 간단하다. 진정한 교회 부흥의 비결은 바로 ‘전도’다. 이것은 바로 성경적인 원리다. 구약 속에 이스라엘을 주님이 세우신 것도 한마디로 ‘전도’를 위해서 세우셨다. 신약도 바로 전도를 위해서 오순절 역사를 통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이 전도의 비결을 체험하여 목회현장 속에 도입해서 교회 전도문이 열어질 때 드디어 교회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날마다 더해가는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냥 당신의 백성을 보내주시지 않는다. 그것은 전도를 통해서만 보내주신다. 본인이 이 비결을 깨닫기까지는 5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신학교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깨달았건만 그것이 가슴 속까지 와 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이었다.
먼저 그 ‘어느 날 새벽’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목회현장을 소개해야겠기에 자랑이 아닌 간증으로 기록함을 밝힌다.

어릴 적부터 선교사가 세운 교회(행주교회)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까지 주의 종들로부터 배워왔기 때문에 나의 신앙은 순수하게 자랐다. 그러나 40년 동안 신앙의 큰 변화없이 자라오던 나는 늦게야 부름을 받았다. 선교사가 100년 전에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나의 머리 속에는 그 어린 시절 선교사들이 드나들 때마다 그들에 대한 동경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이 보내준 구제품을 얻어 입고, 그들이 보내준 밀가루, 우유가루 등을 받으면서 기뻐했던 날들이 어쩌면 저의 첫 목회를 선교를 향한 도전과 꿈으로 지난 40년의 잠재의식 속에서 표출되었으리라.

바로 신학교 졸업반 때 총신 뒷동산(사당동)에서 휴식시간에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도중 한 친구가 우리 교회(비록 개척교회이지만)에 와서 1년 동안 같이 고생하다가 다음 해에 선교사로 나갈 수 없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결국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졸업 후 그 교회에서 함께 1년 동안 선교를 위한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교의 현장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선교의 현장 역시 목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도들이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갈등과 모순 속 실패의 몸부림

이렇게 갈등과 모순 속에서 1년 동안 몸부림을 쳤지만 몇십만원의 선교비 부족과 본인의 목회 미숙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1989-1990년 1월까지). 그렇게 꿈과 비전 속에서 도전했던 첫 번째 선교의 시작은 아픔과 상처 속에서 1년을 마무리짓게 되었고 1990년 1월부터 5월까지는 본인에게 목회현장 탈출의 계획으로 가득 찼다.

1년의 선교가 실패로 끝나자 찾아오는 것은 좌절과 실망뿐이었다. 그때 찾는 탈출구는 더 좋은 목회지가 없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바로 그때 나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이민 목회의 길이었다. 옛날(총신대) 함께 공부했던 잊을 수 없는 친구(캐나다 뱅쿠버)의 방문으로 이민의 길이 열리게 되었을 때 그것은 바로 선교 실패의 하나님의 응답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은 섭리는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순간순간 닥치는 목회 속에서 좌절과 실망은 때로 하나님의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리게 하였고 그러나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혼선이 찾아오는지. 목회자가 꿈을 상실한 교회의 모습은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이다. 본인이 교회를 등지고 이민을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교회는 침체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

5개월 후(90년 5월)에 선교의 실망 속에서 다시금 선교를 시작했다(개척교회 6군데와 선교 후보생 2명). 또다시 선교를 시작했을 때 교회 재정이 5배 이상 증가되었다. 5월, 6월.... 교회 재정이 엄청나게 증가하자 드디어 나는 이민을 포기하고 새로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선교의 첫 발걸음은 실패하였지만, 그 실패는 하나님 편에서는 실패가 아니라 축복을 허가하시는 때였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온통 교회는 도와주고 나눠주는 선교교회로 어느덧 탈바꿈 되었다. 성도들이 이제는 선교에 불타는 마음으로 교회가 세계를 가슴에 품고 다시금 실패의 언덕을 넘어설 수 있다는 심정으로 가득 찼다. 서서히 교회는 엄청난 선교비를 지출할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교로 90년을 넘기고 91년에 접어들면서 선교사가 파송되고, 그해 7월에 또 한 가족이 파송되면서 상상할 수 없었던 선교비(월 1천만원)가 지출되었다. 91년 8월 여름철이었다.

막대한 선교비 벽에 부딪쳐

   
  ▲ 한 종류의 편지글이 전시되어 있다.
나에게는 어려운 시련이 또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교의 벽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한정된 성도(50-60명) 속에서 막대한 선교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덧 한계선에 부딪쳐 그 벽을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무척이나 더운 여름 새벽에 새벽기도회 모임 수는 5명이었다. 그 순간 얼마나 실망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나님,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선교를 감당하면서 눈물과 아픔 속에서 이 적은 성도 가지고 이 일을 감당해 왔는데 이 새벽기도회를 보십시오. 너무 실망이 갑니다.”
새벽설교를 마치고 기도시간이 되었다. 사탄이 낙심의 심연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선교를 해도 너의 교회는 부흥되지 못한다. 네 꼴을 보아라. 몇십명을 바라보면서 네가 선교를 한다고...”
“하나님, 지금까지는 세계선교를 끌고 왔지만 이제는 두 손 들 수밖에 없나이다.”

그 순간이었다. 내 마음 속에서 주님의 영음이 들려왔다.
“너 전도했느냐”
전도한 만큼 성도들을 보내주시겠다는 느낌이 나의 가슴 속에 밀려오는데 나의 대답은 “주님, 전도요? 전도를 어떻게 합니까?”였다. 막막하기까지 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사무실로 내려와서 쇼파에 앉으면서 눈을 좀 붙이려고 하는데 탁자 위에 이슬비전도학교라는 광고지가 보였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전도의 길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전도프로그램 광고지를 보았어도 그냥 스치고 지나갔건만, 이슬비전도학교 광고는 그 순간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졸음이 사라지고 단숨에 광고지에 기록된 사항들을 읽어내려 갈 때 내 가슴 속은 떨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새벽에 기도를 응답해 주신 하나님,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절망의 늪에서 다시금 소망과 꿈으로 끌어올려 주시는데 그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규과정 제 1기 때 교육을 받은 진주시온감리교회가 이슬비전도편지를 통해서 347명이 등록되었다는 그 기사를 보면서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동녘이 밝아오면서 나는 설레이는 맘으로 이슬비전도학교로 전화를 걸어 “교회가 정말 부흥됩니까”라는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

오죽이나 교회 부흥의 절망감 속에서 헤맸으면 전화로나마 확신과 소망을 얻고 싶었을까. 바로 1991년 8월 그 뜨거운 여름 새벽, 나의 목회 인생을 바꿔준 날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슬비전도학교 광고를 보는 순간이었다. 아직 교육도 받기 전이었지만 나에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순간부터 교회가 부흥되어지고 성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제 교회에 광고를 해서 전도학교에 갈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성도들의 반응은 별로 좋기 못했다. 목사님이 다녀오셔서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확실한 소망과 꿈을 저버릴 수 없기에 계속 성도들에게 독려해서 나를 포함해서 12명을 선정했다. 교회 재정은 항상 바닥이 나 있기 때문에 100만원의 빚을 내서 제 2기 정교과정 전도학교 교육장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사실 그 출발 지점이 우리 평산교회를 전도하는 목회 현장, 성장하는 목회로써 탈바꿈되는 계기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이제 한쪽에서는 떨림과 감격으로, 한편에서는 두려움 속에서 훈련이 시작되었다.

   
    ▲ 부모님을 위한 편지글이다.
'전도하지 못한 가짜목사' 회개

나는 목회현장에서 드디어 전도의 귀중함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몸부림치며 울었던 때는 그때가 아닌가 싶다. 전도하지 못한 죄 때문에 가슴을 치면서 폐강예배 때 기도순서가 되어서 모인 많은 훈련생들에게 전도하지 못한 가짜 목사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을 때 그 기도를 듣고 있던 우리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이 위해하시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고 했다.

이제 엄청난 전도의 비전을 각자의 가슴에 품고 훈련장에서 고향교회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몰랐다. 그러나 어느덧 교회가 가까워지면서 지금까지 배운 이슬비전도편지가 과연 목회 현장에서 적용이 가능할까? 그동안에 품었던 꿈만큼 서서히 무거운 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전도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주일을 준비기간으로 정하고 매일 저녁 모여서 우리가 그동안 배운 것들을 점검하면서 이제 일주일 후를 D-day로 정하고 저녁마다 모여 기도했을 때 서서히 전도에 대한 그 엄청난 꿈들은 훈련받음 모두에게 무거운 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가정에 얽매인 분들이었기에 매일 저녁에 모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나는 이 길만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줄기차게 끌고 나갔다. 훈련받은 성도들이 눈빛은 서서히 피로의 눈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 눈빛들을 어찌 목회자가 모를 리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중단하면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위로와 용기를 주면서 일주일을 준비기간으로 삼고 매일 저녁 모였을 때 저들의 눈빛 속에는 어느새 자신감이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D-day가 왔다. 태신자의 주소를 받기 위해 출발하는 날이었다. 과연 몇 명의 태신자 주소를 받아올 수 있을까? 불안해 한 이유는 간간히 들러오는 소식이 “어떻게 하겠는가?”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탄을 벌써부터 시작하기도 전에 가능성이 아닌 불안감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사탄은 전도대원들 가운데서 분열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목회자의 꿈과 소망과 위로가 전도대원들에게는 커다란 짐이 되어가게 되고 불평으로 바꿔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 이슬비전도편지는 성공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으로 주신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좋은 결과를 가지고 교회에 모일 것을 약속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저녁이 되어 교회에 모였다. 이상한 것은 예상 외의 결과가 벌어진 것이다. 생각지도 안 했던 분이 20명의 태신자 주소와 이름을 적어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다른 분들은 몇 명의 태신자 주소를 받아왔고 그중에는 할 수 없다는 불평도 깃들여 있었다.

사탄의 방해 공작도 거세

만약에 그때 그 초신자 자매님의 성공적인 결과가 없었다면 이슬비전도편지는 우리 교회에서는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매일 매일 결과가 저녁 모임에서 집계되었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분이 기대와 소망으로 매일매일 수십장씩 태신자의 주소와 이름을 적어서 오자 전도대원들 가운데서 시기, 질투, 분쟁이 움트기 시작했다. 전도대원들 사이에 분파가 생기고, 서서히 화목이 깨져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반드시 전도와 선교 뒷길에는 사탄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사탄의 방해공작이 성도들을 통해서 불기 시작했다. 교회가 부흥되어야 하는 그 안타까움과 절박감의 과제가 놓여 있는데 아무리 성도들이지만 목회자의 그 안타까움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할까 싶었다.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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