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교리에 대한 웨슬리 신학적 관점에서의 연구
-이선희 교수(목원대)
서 론
기독교 대한 감리회는 1997년 10월 입법의회에서 「교리와 장정」을 개정하여 출판했다. 그것이 「교리와 장정」(1997년판)이다. 이 개정판에 있어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번에 새롭게 제정된 감리회의 역사와 교리는 우리 감리회의 주체적인 역사를 밝히고 교리 개요와 지침을 제공함으로 앞으로 2000년대를 향한 감리회의 새로운 방향을 확정해 주는 것"1)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롭게 제정된 감리회의 교리"라는 것은 "제2장 교리" 가운데 "제3절 우리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2. 감리회 신앙고백(1997년)"2)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리 개요와 지침을 제공"했다는 것 가운데 "교리 개요"는 "제1절 신앙과 교리의 유산" 가운데 "2. 감리교 신앙의 강조점"3)을 의미하며, "지침"이라는 것은 "제2절 한국감리회 신학을 위한 지침"4)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감리회 신앙고백(1997년)"은 "교리적 선언(1930년)"5)에 대한 수정보완의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새롭게 제정된 교리 역시 필자의 소견으로는 1784년 존 웨슬리가 "영국 성공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을 25개조로 정리해서 감리회 종교강령이라는 이름으로 발표"6)했고 지금도 감리회의 교리로서 이 「교리와 장정」(1997년판)에도 들어있는 그 "종교의 강령"7)에 이미 명시된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8) 여전히 정확하고도 명백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신앙내용을 각각 규정하고 표현했을 뿐, 이 셋이 각각 온전하신 하나님이시요 그래서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나 내용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감리회 신앙고백(1997년)"이 삼위일체 신앙을 부인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표현을 정확하고도 명백하게 하면 해결될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새롭게 제공한 "교리 개요"와 "지침"에 있다. 이 둘의 목적은 감리회 신앙의 근본내용과 진리기준을 밝히고 설명하는 데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감리교의 신앙전통은 기독교의 참된 구원의 진리와 성서적 경건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9)고 하며, 또한 "웨슬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 칭의,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10)고 말한다. 즉, 감리회 신앙의 근본내용은 구원의 진리요, 그 진리의 기준은 성경이며, 그것을 전수(傳授)한 권위는 웨슬리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새롭게 제공한 "교리 개요"와 "지침"이 웨슬리가 전수한 대로의 감리교의 구원론을 정확하고도 명백하게 표현하며, 또한 이것이 성경에 일치됨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에는 감리교 교리의 개요를 설명하고자 하는 "제1절 2. 감리교 신앙의 강조점"과 한국 감리교 신학의 지침을 제시하고자 하는 "제2절 한국감리회 신학을 위한 지침"은 이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 제공된 교리개요와 지침은 어느 경우에는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으며, 어느 경우에는 웨슬리가 전수한 구원의 진리에 일치하지 않거나 또는 상반되는 내용들이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또 어느 경우에는 스스로 설명하는 내용에 있어서 일맥상통하지 못하는 점들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밝히고 문제해결을 위한 제안을 각 경우마다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는 먼저 웨슬리가 전수(傳授)한 구원의 진리를 개요적으로나마 명백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구원론의 중심개념들을 살펴 본 다음에(A), 「교리와 장정」(1997년판)의 해당 본문들을 분석하고 성경 및 웨슬리의 구원론에 비추어 그 옳고 그름을 검토하기로 한다(B).
본 론
A. 존 웨슬리 구원론의 중심 개념들
1.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
(1)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아(창 1:26), 그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했었다.11) 인간이 부여받은 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질적 형상'(the natural image), '정치적 형상'(the political image), '도덕적 형상'(the moral image)이 그것이다.12)
첫째로, 하나님 자신의 불멸성을 본받은 형상인 그의 '본질적 형상'에 있어서 인간은 불멸하는 영혼 및 이해력과 의지와 감정과 또한 이 세 가지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은 썩지 않는 영적인 존재로 피조되었다. 둘째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형상인 '정치적 형상'에 있어서 인간은 이 땅위의 만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는 존재로 피조되었다. 셋째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의와 진정한 거룩함'의 형상인 '도덕적 형상'으로 피조되어서, 하나님의 계명에 그 전인격으로 일치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깨끗하여 죄도 없었고 악도 알지 못하였다.13)
(2) 이처럼 완전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완전한 율법(롬 7:12)을 주시고, 이 율법에 대한 충분하고도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셨다(창 2:16-17).14)
(3)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여, 그의 조물주를 창조주로 알아보며, 사랑하며, 순종함으로써 섬길 수 있는 능력인 자유(liberty), 다른 말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의 자유(freedom of choice)를 부여하셨다. 이 선택의 자유라는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지음 받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인간도 진흙이나 돌 조각 이상으로는 조물주를 섬길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의로우며 거룩하다든지 또는 (하나님의 뜻에 거역할 때) 범죄하여 거룩하지 못하다든지 하시는 말씀이 무의미했을 것이다.15)
2. 원죄(原罪)
(1)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아담은 이 선택의 자유를 오용하여, 창조주의 뜻을 따르기 보다 자기 자신의 뜻을 행하기를 선택했다(창3:1-7).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도덕적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여 의와 거룩이 전혀 없는 완전한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본질적 형상'도 왜곡되어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그의 이해력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며(이것이 불신앙의 상태다), 그의 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자기 뜻(self-will)을 추구하며(이것이 교만의 상태다), 그의 감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뻐하는 것을 따르게 되었다(이것이 육신의 정욕이다).16) 그리고 '정치적 형상'도 왜곡되었다. 여기서 인간의 경건치 않음과 어리석음과 불행이 시작되었다.17)
(2)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간은, 믿음에 의한 칭의와 重生 전에는, 죄의 세력(the power of sin)18) 하에 종노릇하므로 그의 자유의지를 선한 쪽으로 쓰지 못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을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웨슬리의 원죄론에 의하면, (1)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있어서 아담과 동일한 죄책 및 처벌에 해당되며,19) (2) 그래서 이 인간의 영혼, 정신, 모든 내적 및 외적 움직임의 원리가 부패했고, 거기서 나오는 모든 기질과 생각과 행동이 악하며,20) (3) 그의 본성 속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은 전적으로 철저히 악하다"21). (4) 그리고 이 악한 상태는 가끔 중단되어 선한 상태로 바뀌다가 다시 악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동일하게 악하다.22) (5)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은 이성으로 신존재 증명은 할 수 있어도, 이성이나 그 이외의 어떠한 기능으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도 없고 사귈 수도 없다: "우리가 이성을 사용하게 됐을 때 피조물들을 보고 하나님의 불가시적인 것들, 즉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배우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와의 사귐은 없었던 것이다. ... 우리의 천연적 기능 가운데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23).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산 자',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서 무신론자'였다는 것을 보게 된다"24). 그러므로 "우리는 천연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고, 하나님과의 사귐도 없었던 것이다"25).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사귀게 되는
것은 오로지 계시를 통해서이다. 웨슬리는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7절을 근거귀절로 인용한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6). (6) 원죄 하의 인간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27) 이성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성은, 아무리 계발하고 발전시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생산할 수 없다"28). (7)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원죄 하의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도 없다.29) (8) 그러나 이러한 무신론적 상태가 인간을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자연적 상태에서는 우상숭배자다"30).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는 뜻이다. 이것이 교만이요,
"모든 교만은 우상숭배다"31). (9) 태어날 때부터 원죄 하에서 교만 가운데 있는 인간은 '자기의지'(self-will)라는 사단의 형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오직 교만만이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책을 져야하는 유일한 우상숭배의 형태가 아니다. 사탄은 그 자신의 형상을 자기의지라는 형태로 우리의 가슴에 인쳐 놓았다"32). (10) 그리고 교만과 자기의지는 '세상 사랑' (love of the world)이라는 형태의 우상숭배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나면서부터 붙어 있는 악의 형태로서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에게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지를 사랑하는 것이 천연적인 것처럼 세상 사랑도 모든 사람에게 천연적인 것이다"33). (11) 인간을 이 원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오로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우리의 무신론을 하나님 자신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을 알게 하심으로써 치유하신다. 즉,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특히 그리스도가 바로 나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바로 나를 위하여 그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하는 이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확실한 증거와 확신(a divine evidence and conviction), 즉 믿음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이 무신론을 치유하신다"34). 그렇다면, 이것은 웨슬리가 말하는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는 칭의를 어떠한 제한도 없이 모든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따라서 칭의에 의하여 인간은 (이 때 비로소!) 원죄로부터도 구원받는다고 말한다.35)
그래서 "종교강령" "제7조 원죄" 항목은 원죄상태의 인간을 이렇게 규정한다: "원죄는(펠레지인들의 망령된 말같이) 아담을 따라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요, 아담의 자손으로는 각 사람의 천연적 성품이 부패한 것을 가르침인데 대개 인류가 근본적으로 의에서 멀리 떠나 그 성품이 늘 죄악으로 치우치는 것이다."36)
여기서 "천연적 성품이 부패한 것"이라는 표현은 "the corruption of the nature"37)인 바, 인간의 본질이 부패했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웨슬리에 의하면, 위에서 말한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본질적 형상(the natural image of God)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본질적 형상은 영혼의 불멸성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 보는 이해력과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의지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따라서 기뻐할 수 있는 감정과 이 세 가지 기능을 스스로 선한 쪽으로 쓸 수 있는 자유로 구성되어 있다.38)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이러한 상태를 "원래의 의"(original righteousness)39)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이 부패했다는 것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은 상태요, 타고 난 이해력으로는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없어 우상숭배로 빠지며, 타고 난 의지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자기의지(self-will)를 따르며, 타고난 감정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반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 즉 육신의 정욕(the lust of the flesh)만을 추구한다는 뜻이다.40) 그래서 이런 상태를 "근본적 의에서 멀리 떠나 그 성품이 늘 죄악으로 치우치는 것"(whereby man is very far gone from original righteousness, and of his own nature inclined to evil, and that continually)41)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늘(=continually) 죄악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이 원죄 상태에서는 결코 인간의 이런 악한 상태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어 잠시라도 "선한 상태로 바뀔 수가 없다"42)는 것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원죄상태의 인간의: 필자) 영혼 안에서 때때로 행하시는 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을 배제한다면"43) 그런 악의 일시적 중단상태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 자신이 은혜로써, 즉 인간 편에서의 어떤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생각과 능력으로써, 원죄상태의 인간에게 일시적으로 선한 상태가 있게 하신다. 그런데 이것은 그 인간의 완전 부패한 본질에 일어난 어떤 종류의 변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완전 부패한 인간의 본질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오로지 칭의와 중생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칭의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원죄로부터 건짐을 받는다고 말한다.44) 그렇다면 인간은 칭의 이전에는 원죄 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죄라는 것은 그 성격 상 인간 본질의 전적 부패 상태다. 그러므로 칭의 이전에는 부패한 본질의 일부, 예컨대 양심이나, 이성이나 자유의지 같은 것이 약간이라도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본다면, 그것은 원죄의 정의와 칭의의 정의에 모순되는 자가당착이다. 그러므로 칭의 전에는 원죄상태의 인간의 본질 자체가 악한 상태에서 선한 상태로 잠시라도 변화되는 일은 없다. 즉, 전적으로 부패한 본질이 잠시라도 개선되는 일이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때때로 그의 영혼 안에 행하시는 일"로서 원죄 하의 인간 안에 때때로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선행하시는 은혜'(preventing or prevenient grace)라는 (인간의 부패한 본질과 구분되고 분리되는) 하나님 자신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적 양심'이라는 말은 이 말 자신이 지칭하고자 하는 현상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즉, 그 현상은 인간 자체 속에 내재하는 어떤 기능의 활동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활동하고 계시는 현상이기 때문에), '양심'이라는 말은 '선행하시는 은혜'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45)
그리고 여기 "제7조 원죄"에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망령된 말"이라 함은 다음과 같다: 펠라기우스(Pelagius)가 주장한 대로, 인간은 이미 그 본성이 부패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의 상태로 태어나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지 않은 본성과 선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나나, 각인이 그것을 활용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각인이 자유의지로써 악을 택하여 행하는 개개의 행동이요, 따라서 자유의지로써 선을 택하여 선을 행할 수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므로, 구원받기 이전의 자연인의 존재 전체가 그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전적무능의 상태에 있는 죄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46) 이것은 아담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경우에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강령" 제7조는 바로 이러한 펠라기우스 식의 원죄의 부인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대신 이 조항은 중생 이전의 인간은 그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그가 갖추고 있는 인식 능력인 이성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과47)
그의 자유의지가 선을 지향하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하여 인간이 갖추고 있는 자신의 의지로써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강령" "제8조 자유의지" 항목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인류의 정형이 그와 같이 되어 자기의 천연적 능력과 사업으로써 마음으로 돌이키며 준비하여 신앙에 이르러 하나님을 경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선한 의지를 얻게 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선한 사업을 행할 능력이 없고 선한 의지가 우리에게 있을 때에는 그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한다."48) 이 항목은 영어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The condition of man after the fall of Adam is such that he cannot turn and prepare himself, by his own natural strength and works, to faith, and calling upon God; wherefore we have no power to do good works, pleasant and acceptable to God, without the grace of God by Christ preventing us, that we may have a good will, and working with us, when we have that good will."49)
여기서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가 그러하기 때문에"라는 것은 제7조에서 규정한 원죄의 상태가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천연적 성품이 부패"하여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행위로써 돌이키고 준비하여 믿음에 이르며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달라고: 역자 주) 간구하지 못한다"50)는 것이다. 이 명제의 뜻은 다음과 같다: 믿음에 의한 칭의와 중생 이전의 자연인은 그의 자유의지가 항상 죄악으로 치우치기 때문에(제7조), 즉 때로는 악을 택하고 때로는 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악을 택하기 때문에, 이런 자유의지로써는 스스로 선을 택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능력으로써 선을 행하여 그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믿음에 이르며 자신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서 구원을 요청하여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강령 제8조 자유의지' 교리는 바로 펠라기우스주의의 왜곡된 자유의지관을 거부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말하기를 "비기독교인들은 심판과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자유의지로써 믿음에 이르며 (이 자유의지로써 행한 선행의 대가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히 요구하여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 notwithstanding their free will, by which they are able to attain unto faith and to deserve God`s grace; 위에 각주 50에서 말한 "ad fidem et invocationem Dei"와 흡사한 구조와 내용에 주목하라 - 필자), 이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자유를 악용하기 때문이다."51) 펠라기우스의 이 명제는 비기독교인들도 근본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믿음에 이르며 선행을 행하여 하나님께 그 대가로서 구원의 은혜를 당연히 요구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종교강령 '제8조 자유의지' 교리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역시 왜곡된 자유의지관을 거부하는 것이다: 半펠라기우스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은혜의 도움 없이는 구원도 얻지 못하며 선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 안에 선의 맹아를 이미 지니고 있는 바, 이것이 은혜에 의하여 일깨워져 꽃피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은혜를 거부하든지 아니면 노력하여 받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이 먼저 역사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의지를 결단하도록 기다리시면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을 앞서도록 하시는 경우도 있다"52).
그러므로 半펠라기우스주의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하나님 형상'과 자유의지가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다만 약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그의 구원에 있어서 자기의 타고난 능력만으로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어느 정도 회복된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앞서서 스스로 돌이키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협동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53) 다시 말해서, 원죄로 인하여 다만 약화된 본성과 의지는 믿음에 의한 칭의와 중생 이전에도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되므로, 그 다음부터는 인간 편에서도 선을 택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며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행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대가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半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만 펠라기우스주의와 구별될 뿐 그 이하의 주장은 펠라기우스주의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칭의 이전의 인간은 전적으로 위에 묘사한 의미대로 원죄 하에 있다고 보는 웨슬리의 원죄 이해는 半펠라기우스주의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중생 이전에 인간이 원죄 하에 있다고 인정하나, 그 원죄의 상태를 인식 및 도덕기능이 약화된 상태라고 보고, 이것이 하나님의 先行은혜에 의하여 회복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인간이 자신의 인식 및 도덕기능으로써 스스로 응답하며 하나님과 협동할 수 있다고 보는 여하한 인간이해는 웨슬리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54)
그렇다면, 웨슬리의 원죄 이해와 종교강령의 제7조 및 제8조의 원죄 이해는 또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의 5대 원리 가운데 제4조 "인간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므로 인간은 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스스로 준비할 수 있다"55)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은 믿음에 의한 칭의 이전에는 그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전적으로 무능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스스로 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웨슬리가 자신을 알미니안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펠라기우스주의나 半펠라기우스주의식으로 인간은 (자연적이든 또는 은혜에 의해 회복되었든 간에)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그것이 '선행의 축적'으로 표현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의 협동'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스스로 준비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에 웨슬리가 그런 뜻으로 자신을 알미니안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일 것이다.
오히려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한다」56)라는 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7) ...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누구누구만을 구원하기로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구원하지 않기로 영원부터 작정하셨다고 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고, 그 이외의 사람들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은 하나님이 '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그리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 범죄와 죄들로 인하여 죽은 모든 자들,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자가 죽었다'고 하므로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위해 죽었다' 라는 기록된 말씀을 가진 모든 사람에 관하여 그 말씀대로 되도록 영원부터 작정하셨다고 주장한다. (8) 둘째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불가항력적이다, 즉 아무도 번개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하는 순간들이 있기는 할지라도,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누구라도 그가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그 은혜에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9) 셋째로,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참 신자는 은혜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은 참 신자라도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할 수 있되, 불결한 죄로 인하여 떨어져나가는 정도뿐만 아니라, 완전히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떨어져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57)
여기서 웨슬리가 자신을 알미니안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칼빈주의의 절대적 이중예정설과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설을 거부하고, '누구든지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고 따라서 '만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를 하나님이 영원부터 예정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누구에게든지 이신칭의가 적용된다고 할 때,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칭의하시는 은혜'(Justifying grace)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즉, 웨슬리는 이신칭의 이전의 인간에게도 양심과 이성과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있어서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은 갖고 있고 그래서 구원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지 않다.58) (2)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시기로 뜻하고 베푸시는 은혜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누구든지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저항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그 반대로 구원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인간이 스스로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을 웨슬리는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기 때문에 웨슬리는 이에 대하여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선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말 이외에 우리는 할 말이 없다"59)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여기서 하는 말은 단지 구원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은 저항하는 당사자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잘못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칭의 이전에 악만을 택하여 가도록 되어 있는 자유의지의 역기능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죄로 인한, 인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3) 칼빈주의의 견인설을 거부하고, 참 신자라 할지라도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다시 타락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은 칭의 이전이나 이후나 공히 그의 구원을 위해서는 철저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존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웨슬리는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칭의 이후라도 참 신자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으면, 그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곧 다시 타락하되, 멸망에 이르기까지 타락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60)
그러므로 웨슬리가 자신을 알미니안이라고 부른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나 이성이나 양심에 인간의 구원을 위한 어떤 순기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칼빈주의의 절대적 이중예정설의 오류와 거기서 비롯되는 구원론의 몇 가지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우리는 종교강령 제8조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앞에 先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곧 우리가 선한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役事하시며, 또한 우리가 그 선한 의지를 가지면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그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선한 행위들을 행할 능력이 없다". 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써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아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다. 인간이 선한 의지를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앞서서 선한 의지를 갖도록 역사하셨고 인간은 거기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한 의지를 가진 후에도 인간은 자신의 이성이나 양심이나 자유의지나 아무튼 여하한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일치하는 善行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한 의지를 갖게 됐을 때에도 善行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이 앞서 가시면서 도우시는 은혜가 있어야 인간은 善行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에 일치하는 善行을 한다면, 그것은 앞서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즉, 先行은혜)이라는 현상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에 일치하는 善行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앞서서 선한 의지를 갖게 하시며, 또한 그런 후에 善行을 하도록 앞서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즉, 先行은혜)에 거역하기 때문이다.61)
(3) 웨슬리의 원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짓게 하는 세력'(the power of si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처음 인간 아담으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범죄하도록 유혹한 악의 세력(the power of sin)은 본래 영적 피조물인 천사들의 일부로서, 그의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타락한 천사인데, 악을 세상에 초래한 최초의 범죄자요 죄의 창시자 "아침의 아들, 루시퍼"(사14:12), 즉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요일 3:8)이다.62)
(4) 이제 아담이 이 범죄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하는 순간에(창 3:1-6) 죄의 존재(Being of sin)가 세상에 들어왔고, 인간은 이 죄짓게 하는 세력의 종노릇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 죄를 통하여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롬 5:12). 그리하여 죄의 지배와 죽음의 지배가 온 인류에게 임하되 지속적으로 임하게 되었다.63)
(5)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 자신에게는 원초적인 저주가 내리고(창 3:16-19)64), 그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에 대한 대리 통치자인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피조물 전체가 고통받기 시작하였다(롬 8:19-22)65).
(6)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전가된다: (1) 우리의 몸은 가멸적이 되었다. (2)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3) 우리 모두는 죄악되고 악마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4)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이며,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롬 5:18, 엡 2:3)66).
(7)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범죄하는 것은 악한 습관과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 죄의 존재와 세력의 지배 하에 종노릇하는 존재로 태어나는 까닭에 그 기질과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여 본성상 악으로 향하기 때문이다.67) 그리고 인간은 이 죄짓게 하는 세력의 종노릇 하는 상태에서 절대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8) 모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의 부패라고 하는 이와같은 원죄는 모든 자범죄의 뿌리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과 자기고집이 나오고, 여기서 허영, 야심, 탐욕, 정욕이 나오고, 여기서 다시 분노, 증오, 악의, 복수, 선망, 질투, 시기가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어리석음과 해로운 욕망이 나온다(롬 1:18-31).68)
3. 회개(悔改)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 자신의 원죄 하에 있는 상태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는 영원한 죽음에 해당되는 죄들을 스스로 범했음을 자인하고, 이 죄책의 대가를 스스로 지불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씻기움을 받고, 그의 성령에 의하여 정결케 되는 것을 기대하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신다.69)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죄인에게 칭의를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을 줄 수 있고, 성화를 통하여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안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마 11:28).70)
3.1. 선행(先行)하시는 은혜 (preventing or prevenient grace)
(1) 죄인인 인간을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선행하시는 은혜다. '선행하시는 은혜'라는 말의 뜻은 인간이 먼저 스스로 구원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원죄 하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닌 듯이 착각하며 하나님 없이 살고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오셔서 역사하심으로써(이와 같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먼저 사랑으로써 값없이 손수 행하시는 하나님의 役事를 '은혜'라고 부른다) 비로소 인간이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닌가?' 하고 희미하게나마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2)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오다가 어느 때에 뜻하지 않게 일시적으로나마 자기의 죄에 대하여 어느 정도라도 느낌이 있다든지, 혹은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그것을 전혀 모르고 또는 무시하고 살아 온 것이 아니가 하는 느낌이 최초로 동터오듯이 생긴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눈멀고 무딘 마음, 즉 하나님과 그 하시는 일을 전혀 모르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하여 건짐을 받기 시작하는 아주 초기 단계이다.71) 즉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아오다가 이런 마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또는 어떤 환경의 영향도 아니고, 또는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임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있게 되는 현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자연적 양심', 즉 누구나 태어날 때 갖추고 태어나는 일종의 도덕적 기능이라고 흔히 이해하나, 웨슬리는 이것을 명백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라고 말한다.
(3)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많건 적건 간에 이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역사를 느끼게 되는 것인데, 여기에 응하며 나가면 전도라든가 교회라든가 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응하지 않고 소위 이 '양심'의 빛, 정확히 말하여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거역했을 때는, (다소간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불안을 느끼게 된다.72)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아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활용하지 않는 까닭에 범죄하는 것이다".73)
(4) 그러나 양심의 현상이라 하는 이 '선행하시는 은혜'에 응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양심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양심적으로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하며 복음에 대하여 완악하여 질 수 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3.2.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convincing grace)74)
(1) 사람이 선행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이제 처음으로 막연하나마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은 그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계시된 뜻, 특히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시는 율법을 알도록 하신다.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임(롬 7:12)을 알게 하시고, 이 율법을 지킬 때 약속하신 복을 이루시되(신 28:1-14), 이 율법을 어기면 정죄와 처벌이 임한다는 것(신 28:15-68)을 알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장 선한 마음과 최선의 능력으로도 결코 이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따를 수 없고, 그래서 결코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에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결국 율법으로는 죄를 알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롬 3:20)을 알게 하신다. 그리하여 이제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몸둘 바를 모르게 되며, 죄인을 불사르시는 하나님의 영벌의 처벌을 알게 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이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간절하게 되고, 그러나 내 힘으로는 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알므로 나를 죄에서 건져내실 유일한 분, 하나님에게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신다.75)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웨슬리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 즉 회개시키시는 은혜라고 부른다.
4. 칭의하시는 은혜(Justifying grace)76)
(1)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칭의와 중생 前에) 회개로 인도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와 같은 말씀에 기대를 걸게 된다. 즉, 믿음 받기를 사모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고 이 믿음을 통하여 칭의와 중생을 받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칭의하시는 은혜"77)라고 부른다.
(2) 칭의의 은혜와 믿음에 의해서만 칭의하시는 이유: 만물의 창조와 보존과 섭리는 모두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므로, 만물 중의 하나인 인간 자신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안에 어떤 선이나 의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손수 행하신 것이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행위로써는 자신의 죄를 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78) 그리고 이러한 상황 하에 있는 "인간에게서 교만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79)
(3)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라는 말씀은 인간의 행위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손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다."80)
(4) 그런데 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다음의 세가지 '소위 믿음'과는 구별된다81): (a)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고, 선악간의 행위에 대하여 이성의 도덕을 따라 보상하는 하나님을 말하는 이성종교의 믿음과 다르다. (b)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지적으로는 인정하되, 그의 구속의 능력이 자신에게는 현실이 되지 못하는 머리로만 믿는 생명이 없는 믿음, 곧 그 당시 영국국교회의 구원관이 말하는 믿음과도 구별된다. (c)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동안의 제자들의 믿음처럼 복음전파에 헌신적이고, 마귀를 제어하며, 치유의 능력도 있으나, 아직 십자가도 부활도 모르는 믿음, 즉 회심 이전에 웨슬리 자신이 오로지 헌신과 선행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인정받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던 그런 믿음과도 구별된다.
(5)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를 진리로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우리 안에 살아 계시도록 하신 바 우리의 속죄와 생명으로 알고 그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존하여 기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나의 자범죄들이 다 용서되었으며, 따라서 내가 하나님에게 화해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확신이다. 그 결과로 내가 우리의 '지혜요, 의요, 성화요, 구속'이신 , 한마디로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에게 연합되어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82).
(6) 이 믿음을 통하여 오는 구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현재적 구원이다. 이 땅위에서 이미 지금 구원을 얻었다. (b)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즉, 자범죄로부터의 해방이며(롬 3:25), 원죄로 인하여 나를 지배하고 있던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다(롬 6:2,18). (c)자범죄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제 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d) 따라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과 화해된 자녀로서(롬 5:1) 하나님의 영광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롬 5:2). (e) 이 구원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이기 때문에, 믿음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범죄하지 않는다.
(7)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그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이루어지는 죄책의 용서와 형벌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 이것을 칭의(稱義)83)라고 부른다.
(8) 이렇게 칭의된 사람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즉 거듭난 자이다. 나의 중심이 믿음의 상태로 변화되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하나님은 나를 죄없다고 인정하시며(칭의), 이와 동시에 역시 즉각적으로 나의 중심에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가 중생이다. 이와같이 칭의는 믿음을 갖는 순간에 나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형식면에서의 변화(나를 죄인으로 여기시던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시지 않게 된 것)이고, 거듭남은 칭의와 동시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면에서의 변화(죄의 세력에게 종노릇하던 내가 이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칭의와 중생은 이제 내가 해방되어 벗어난 바의 죄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본격적인 성도의 삶(성화: 聖化)의 첫출발이다.
5. 거듭남(重生)84)
(1) 거듭난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a) 믿음, (b) 소망, (c) 사랑이 그것이다.
(2) 믿음은 소망과 사랑의 기본바탕이다. 이 믿음은 칭의 받을 때의 그 믿음과 같은 내용이나, 이제 중생하여 성화(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점점 더 죄를 이기며 거룩하여지는 것)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는 이 믿음은 이제 점점 더 자라가야 하는 특징을 갖게 된다. 이 믿음의 열매는 (a) 죄를 이기는 것과 (b) 하나님과의 화평 안에서 인생의 온갖 환란곤고를 이기는 평안이다.85)
(3) 소망은 (a) 예수님 재림 시에 주님을 직접 뵐 것을 기다리며 지금의 고난 앞에서 죄짓지 아니하고 자기를 성결케하는 것이요, (b) 중생한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기다리며, 받는 바 성령을 이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시험과 시련과 핍박 앞에서도 영광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이다(벧전 1:3-12).86)
(4) 사랑은 먼저 (a)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나의 마음에 부으신 바 된 것을 깨달아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것이요, (b)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바 이웃사랑이다.87)
(5)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그 중심에 이와 같은 믿음, 소망, 사랑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생겨서 생동적으로 운동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 운동의 방식은 이렇다: 믿음을 가지면 죄를 용서받으므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담대함을 얻게 되고(롬5:2; 히3:6),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마지막에 일어날 심판을 기다리는 담대함을 갖게 된다. 이것이 소망이다. 이 소망이 있으면, 마지막 심판 때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신 대로(계 22:14),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쓰게 되는데, 말씀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므로, 이것이 곧 사랑이다. 사랑하고 살면, 하나님 앞에 더욱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자 하는 믿음을 더 크게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재림 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뵐 때 주님이 나에게 '충성된 종아, 네가 참 잘하였도다' 하고 칭찬하시리라는 소망을 더욱 크게 하고, 이 소망은 사랑을 더욱 북돋우게 된다. 이렇게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은 중생한 사람 속에서 생명력있는 운동을 지속하게 된다.
6. 성화(聖化)시키시는 은혜(sanctifying grace)
(1) 중생한 사람들 가운데는 당분간은 아무 시험도 느끼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주님께서는 한동안, 즉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저들을 높은 곳에 두시고 죄의 세력이 건들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육신에 계실 동안 시험 당하신 것처럼, 그의 종들도 시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88)
(2) 중생한 사람들은 물론, 믿음 안에 굳건히 거하며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한, 외적인 죄들은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중생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서로 대적하는 두 가지 세력이 있다. 즉,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하느니라"(갈 5:1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라고 부르나, 또한 이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고전 3:1)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이 믿음을 버리고 다시 중생 전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중생한 사람들에게도 그릇된 성질이나 소행이 있으니, 이런 것들과 싸워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의 힘으로 정복하라는 권고이다.
(3) 중생한 자들 안에 있는 이런 갈등의 원인은, (a) 죄의 세력은 마지막 심판 때 재림 주 예수의 발아래 멸망당하기까지는(고전 15:23-28), 여전히 모든 인간을 유혹하여 죄짓게 하는 활동을 계속하기 때문이고, (b) 중생한 자의 믿음이 약해지면, 그때 이 죄의 세력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고, (c) 하나님께서 특별히 중생한 자들에게 죄의 세력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즉 믿음으로만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시기 위하여 죄의 세력의 정체를 드러내시기 위함 때문이다(롬 7:13). 웨슬리는 중생한 자 안에 있는 이런 죄의 세력과 성령의 소욕의 갈등의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죄의 세력이 나를 더 이상 지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죄의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 죄의 세력은 싸움을 일으키지만, 그 세력은 나에 대하여 점점 약해진다. 중생한 자는 계속 승리하면서 점점 강하여지고, 마침내는 그 죄의 세력을 쓰러뜨리고 그가 지배하던 곳을 완전히 정복한다.89)
(4) 중생한 자 안에 작용하는 죄의 세력의 활동방식은, 믿음이 약해지는 것, 교만, 자기고집, 세상사랑, 안목의 정욕이요, 정욕, 분노, 원망, 불평과 같은 내적인 죄들이다.
(5) 중생한 자가 이러한 내적인 죄를 정복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90): (a) 중생한 자가 믿음이 약해지면 이러한 내적인 죄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생한 자의 회개의 첫째 단계이다.91) (b) 이 회개의 두 번째 단계는 중생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도 자신의 내적인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 전과는 달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지옥의 저주를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가 자기 위에 임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를 위한 대언자로 가졌기 때문이다.92) (c) 이 회개의 세 번째 단계는 중생한 자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선을 생각할 수도, 원할 수도,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내적인 죄에서 스스로 자신을 구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93)
이렇게 회개할지라도 이런 회개로써 죄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직 아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위를 죽이며 암과 밖의 죄를 정복하여서 우리의 원수를 매일매일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성화의 점진적인 과정), 우리 자신이 그것들을 완전히 내어 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칭의를 얻을 때 받은 은혜를 가지고 그것들을 근절시킬 수도 없다. ......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 번 곧 두 번째로 '깨끗하여져라!' 하고 말씀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 때에만 그 문둥병은 깨끗하여진다. 그 때에만 그 악의 뿌리, 육신의 마음은 멸절된다"94). 이런 두 번째 변화는 칭의와 중생처럼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런 변화는 중생한 자가 회개하며, 동시에 나를 온전케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이 약속을 지금 여기서 이루신다는 것을 기대하는 믿음을 갖는 순간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죄의 세력을 매일같이 약화시키는 점진적인 과정이 물론 있으면서, 또한 주님이 손수 말씀으로 "깨끗하여져라" 하실 때 일어나는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두 번째 변화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7. 그리스도인의 완전( the Christian Perfection)95)
(1) 중생한 사람은 이와 같은 성화의 과정 가운데 온전한 성화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감리교의 믿음이다. 온전한 성화는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치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이웃에 대한 온유하고 겸손하고 오래 참는 사랑이 나의 기질과 언행심사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이다"96). 이 완전의 필연적인 열매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한마디로 완전한 사랑,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사랑이다.
(2) 이 완전은 칭의 뒤에 가능하며, 우리가 죽기 이전에,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97)
(3) 완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완전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완전한 신자라도 무류할 수 없다.98)
(4) 완전에 도달하여도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향상하며, 전 보다 더 빨리 은혜에 자랄 수 있다.99)
(5) 이 완전은 잃어 질 수도 있다.100)
(6) 완전의 전후에는 항상 점진적인 선행이 있다. 그런 과정 중에 위에 말한 즉각적인 변화, 즉 두 번째 변화들이 있고, 이것을 통하여 완전에 도달한다.101)
8. 영화(榮化=Glorification)
(1) 그리스도 재림 시에 죽은 자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 때 이 세상은 폐하여지고, 땅의 몸이 하늘의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중생하여 성화의 길을 간 성도들은 약속된 영생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이다.
B. <교리와 장정(1997년 개정판)> "제 2 장 교리"에 대한 웨슬리신학적 검토
0.1. 본 신학적 검토에 있어서 진위판별의 준거는 일차적으로 존 웨슬리의 신학에서 찾으며, 최종적 준거는 성경에서 찾는다.
0.2. 본 신학적 검토의 범위는 <교리와 장정(1997년 개정판)> "제 2 장 교리" 가운데 "제 1 절 신앙과 교리의 유산" 중 "2. 감리교 신앙의 강조점"(p.35-38)과 "제 2 절 한국감리회 신학을 위한 지침"(p.39-42)에 국한한다.
1. "제1절 2. 감리교 신앙의 강조점"
1.1. 서문(35쪽)
1.1.1 "웨슬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 칭의,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검토: 웨슬리는 구원의 순서를 말할 때, 구체적으로 (1) "preventing grace"(선행하시는 은혜), (2) "convincing grace"(회개시키시는 은혜), (3) "justifying grace"(칭의하시는 은혜), (4) "sanctifying grace"(성화시키시는 은혜), (5) "glorification"(영화)라는 순서로 표현한다.102) 그러므로 본문에 '회개시키시는 은혜'와 '영화'가 첨가되어야 한다.
1.1.2.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충만하고 온전한 구원은 타락한 인간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검토: 웨슬리에 의하면, 구원은 예컨대 "인간을 하나님의 총애의 대상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로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단지 인간을 죄로부터 건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으로써 가득 채워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a restoration of man, ...... a restoration not only to the favour, but likewise to the image of God; implying not barely deliverance from sin but the being filled with the fullness of God.)"103)라고 표현된다. 그렇다면 구원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에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단순히 "타락한 인간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 기독교 바깥의 도덕철학이나 윤리학이 말하는 인간성 회복과 구별되지 않는다.
1.1.3.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경륜은 개인적 성화, 사회적 성화, 그리고 창조의 완성을 포함한다."
검토: (a) 여기서 "새 창조"라는 표현은 문맥상 웨슬리가 말하는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새 창조가 아니라, 이미 창조하신 것,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b) 여기서 "사회적 성화"라는 표현은 문맥상 그 뜻을 아직 알 수 없으나, 2의 "6) 선교와 봉사"(p.38) 항목에 "구원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성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개인적 경건은 사회적인 봉사와 참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동참의 행위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회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의 은혜에 의존한다."라고 한 것을 볼 때, (1) 사회적 봉사와 참여, (2)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동참의 행위, (3) 사회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이 각각의 표현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각기 다른 경향의 신학들에서 마다 그 뜻하는 바가 다른데,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또한 여기서 의미하는 "개인적 성화"가 소위 "사회적 성화"와 구별된다면 이 각각의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만약 "개인적 성화"가 웨슬리가 말하는 구원의 순서에서 한 개인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칭의 받고 중생하여 성화의 길을 가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하여 가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미의 성화는 당연히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웨슬리가 말하는 이웃사랑의 의미에서의) 사회적 봉사와 참여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구태여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구분한다면, (1) 웨슬리가 말하는 의미의 구원, 즉 개인이 칭의 받고 중생하여 성화의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의 구원에는 아직 이웃사랑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니면 (2) 웨슬리가 말하는 구원에 이웃사랑을 포함하지 않는 '개인적 성화'라는 것과 이웃사랑을 포함하는 '사회적 성화'가 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두 웨슬리의 구원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 웨슬리에게는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기까지 성화의 길을 간다는 의미의 구원이 있을 뿐이요, 이런 의미의 구원은 이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갖춘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여기에 사회라고 하는 구조와 상관없이 개인만 따로 성화된다는 소위 "개인적 성화"라는 상상은 웨슬리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병적이고 기괴한 상상일 뿐이다.
또한 (2) 소위 "사회적 성화"라는 단어는 마치도 사회가 하나의 인격체처럼, 웨슬리의 구원론에 따라 말한다면, 선행의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회개의 은혜에 따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인하며 후회하면서 영벌에 처해질 것을 지극히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복음에 기대를 걸고 칭의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며, 그리하여 칭의의 은혜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고, 이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칭의되어 중생해서, 중생한 자의 징표인 믿음, 소망, 사랑이 충만하여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되, 즉 성화의 길을 가되, 성화의 완전한 단계인 그리스도인의 완전, 즉 웨슬리의 표현대로, 항상 기뻐하며, 기도를 쉬지 않으며 범사에 감사하는 상태에 도달한다고 믿는 기괴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사회적 성화"라는 것이 이러한 웨슬리의 구원론대로 묘사할 때 기이하게 되는 무엇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근사하게 말이 되는 무엇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 "사회적 성화"라는 것이 웨슬리의 성화의 개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무엇이라는 증거다. 이런 류의 개념은 커다란 맥락에서 볼 때 대개 사회주의적 계열의 사상에서 온 개념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이 된지 오래다.
웨슬리가 물론 그의 설교 "Scriptural Christianity"(성경적 기독교)에서 "a Christian world"(기독교적 세계)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소위 "사회적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위의 "사단이 하나님의 진리로 하여금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까? ...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기독교가 모든 사람들 위에 편만하며 온 땅을 덮을 때가 올 것이다(Can Satan cause the truth of God to fail? ...... If not, the time will come when Christianity will prevail over all, and cover the earth.)"104)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지구상의 온 인류가 기독교화 되어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통치, 하나님나라)이 밝히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 설교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 웨슬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의 순서를 따라 개인이 구원받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초대 기독교 즉, "기독교가 각 개인 안에 존재하기 시작했던 발생기의 기독교(Christianity in its rise, as beginning to exist in individuals)"(I.0)로부터 시작하여 "이 기독교가 개인에서 개인에게로 전파되고 이런 식으로 점진적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this Christianity as spreading from one to another, and so gradually making its way into the world)"(II.1), 이 단계를 거쳐서 드디어 구약과 신약에 예언되고 약속된 지상에서의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 곧 "이렇게 하여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이제 그의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시는 곳에서,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키시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랑으로 흘러 넘치게 하시며 모든 사람의 입을 찬송으로 채우신다(Thus, where 'the Lord God omnipotent taketh to himself his mighty power, and reigneth', doth he 'subdue all things to himself', cause every heart to overflow with love, and fill every mouth with praise.)"105)는 상태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봉사와 참여 내지는 "사회를 변혁시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권능으로 실현하신 상태다. 이것은 구원론을 넘어서서 종말론의 테마이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말하는 신학 전체의 핵심주제다. 소위 "사회적 성화"의 테마가 아니다.
(c) "창조의 완성"이라는 개념은 2의 "7)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p.38)라는 항목에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장래에 영광 중에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 모든 신자들의 몸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가져오는 세상의 종말을 말한다."라고 한 것과 "성화의 삶은 인간과 사회에서 출발하여 자연과 창조세계 전체에까지 미친다.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결국 만물의 회복과 갱신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아 종말론적인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웨슬리의 설교 "The Great Assize"(대심판)에 나타난 그의 종말론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에 뒤따르는 일반적 현상은 다음과 같다: "1. 셋째로 우리는 만민의 심판 뒤에 따라올 몇 가지 상황을 더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악인들과 선인들에게 선언된 판결을 집행하는 것이다. 악인들은 영벌로 들어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생으로 들어 갈 것이다. ... 2. 그런 다음에 하늘이 양피지 두루마리처럼 말릴 것이며 큰 소리를 내면서 떠나갈 것이다. ... 하늘이 이렇게 떠나가리라는 것은 베드로 사도에 의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해체될 것이다'(1. We may, in the third place, consider a few of the circumstances which will follow the general judgment. And the first is the execution of the sentence pronounced on the evil and on the good. 'These shall go away into eteranl punishment, and the righteous into life eternal.' ...... 2. Then the heavens will be shrivelled up 'as a parchment scroll', and 'pass away with a great noise'; ...... The very manner of their passing away is disclosed to us by the Apostle Peter: 'In the day of God the heavens, being on fire, shall be dissolved.')"(III.1-2).
그렇다면, 웨슬리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에 뒤따르는 현상은 만물의 회복과 갱신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아는 만물의 폐지이며 영원한 형벌과 영생의 상태일 뿐이다. 이 영생의 상태를 웨슬리는 성경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태라고 표현한다: "마지막 심판에 뒤따르는,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상황이 하나 더 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우리는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했다'(There is one circumstance more which will follow the judgement that deserves our serious consideration. 'We look', says the Apostle, 'according to his promise, for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herein dwelleth righteousness.')"(III.5). 즉,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사 65:17)고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상태인데, 이것이야 말로 말 그대로 새 창조요, "(현재 우리가 아는 그리고 이상화되기를 염원하는 그런 의미의) 만물의 회복과 갱신"이 아니다.
1.2. "1) 선행적 은혜"
1.2.1. "우리는 모든 인간 속에 이미 선행(先行)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음을 믿는다."
검토: 이 명제에 관련된 웨슬리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의 영혼이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것을 이유로 어떤 사람도 변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순히 자연적 상태 그대로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성령을 억누르지만 않았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결하고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살아 있는 인간 가운데 속칭 '자연적 양심'이라는 것을 완전히 결하고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이 '자연적 양심'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더 정확히 말해서 '선행하시는 은혜'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것을 가지고 있다. 이 은혜는 사람의 요청을 기다렸다가 요청에 의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다(For allowing that all the souls of men are dead in sin by nature, this excuses none, seeing there is no man that is in a state of mere nature; there is no man, unless he has quenched the Spirit, that is wholly void of the grace of God. No man living is entirely destitute of what is vulgarly called 'natural conscience'. But this is not natural; it is more properly termed 'preventing grace'. Every man has a greater or less measure of this, which waiteth not for the call of man.)"106) 선행하시는 은혜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선행의 은혜가 "모든 인간 속에" 있다 라고만 표현하면 마치 선행의 은혜는 인간 안에 선재하는 인간학적인 요소처럼 오해된다.
1.2.2. "이 선행적 은혜 때문에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만민에게 값없이 주어진다고 믿었다."
검토: 본 「교리와 장정」 제 2 장 1. 종교의 강령 제 8 조 자유의지 항목에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선한 의지를 얻게 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선한 사업을 행할 능력이 없고 ......" 그렇다면, 위의 검토할 문장은 그 신학적인 논리에 있어서 정확히 도치되었다. 옳게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 때문에 이 선행적 은혜가 만민에게 값없이 주어진다고 믿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그의 설교 "On Conscience"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기능은 우리의 최고의 저술가들 가운데 일부가 흔히 사용하는 그 용어, 즉 '자연적 양심'이라는 말을 보통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미하는 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양심은 모든 사람에게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자연적으로 갖추고 태어난 기능들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아니,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시다. ... 그래서 네가 그 분이 네게 주신 그 빛에 한 순간이라도 거역하여 행할 때, 너에게 내적 점검을 하게 하시며 너로 하여금 께름칙하게 느끼게 하시는 분이 바로 그의 성령이시다(This faculty seems to be what is usually meant by those who speak of 'natural conscience', an expression frequently found in some of our best authors, but yet not strictly just. For though in one sense it may be termed 'natural', because it is found in all men, yet properly speaking it is not natural, but a supernatural gift of God, above all his natural endowments. No, it is not nature but the Son of God that is 'the true light, which enlightenth every man which cometh into the world.' ...... And it is his Spirit who giveth thee an inward check, who causeth thee to feel uneasy, when thou walkest in any instance contrary to the light which he hath given thee.)"(I,5).107)
1.2.3. "그러나 선행적 은혜는 구원의 여명이며 준비로서 복음에 의한 회개와 구원의 은혜로 나아가야 한다."
검토: "복음에 의한 회개"만을 언급하면, 웨슬리가 말한 "율법적 회개"(legal repentance)와 "복음적 회개"(evangelical repentance)108)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문장으로는 마치도 율법적 회개는 이미 선행적 은혜의 단계에 속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율법적 회개는 선행의 은혜 다음에 오는 '회개시키시는 은혜'(convincing grace)에 속하는 것이다.109)
1.3. "2) 칭의와 확증"
1.3.1.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해 죄를 용서하시고, 회개하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은혜를 말한다."
검토: 칭의는 오로지 (특정한 의미의) 믿음을 통해서만 받는 것이다: "그러면 전적으로 경건치 못 한자, 그 때까지 공로가 없는 자가 무엇으로 칭의를 받는가? 오직 한가지로, 즉 믿음으로 칭의를 받는다(But on what terms then is he justified who is altogether 'ungodly', and till that time 'worketh not'? on one alone, which is faith."110) 그러므로 "회개하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1.3.2. "...... 화해가 이루어진다. 이 관계의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통해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 우리는 회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확증을 얻는다. ...... 이와 같은 중생과 회심은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검토: (a) 웨슬리에 의하면, 칭의와 중생은 동시적인 사건으로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런데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서는 칭의가 중생 앞에 전제된다. 그 이유를 웨슬리는 그의 설교 "Salvation by Faith"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죄책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은 것이다. ... 누구든지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다. ... 6.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짓지 아니 한다(through this faith they are saved from the power of sin as well as the guilt of it. ...... 'Whosoever believeth is born of God. ...... 6. He that is by faith born of God sinneth not,"(II, 5-6). 즉, 칭의가 중생에 앞서는 이유는 믿음에 의하여 죄책이 용서되고, 이로 인하여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세력 하에 종으로 있던 죄인이 이렇게 해방되어 하나님 밑으로 자녀로 들어온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라고 표현하며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정확히 표현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통해"서가 아니라, 칭의받게 하는 믿음(justifying faith)을 통해서 받는 것이며, 중생은 하나님이 나를 전체적으로 주관하시므로 죄짓지 않는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미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지 "새로운 창조"가 아니다.
(b) "회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확증을 얻는다"고 하고 "중생과 회심은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간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고,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중생 다음에 회심이 오는 것으로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중생한 다음에 회심한다는 이해는 개혁주의, 즉 장로교의 구원론의 관점이다.111) 오히려 웨슬리는 칭의가 곧 회심(conversion)이라고 말한다: "회심(즉, 나는 칭의를 의미한다)이 즉각적인 역사라는 것을 나에게 확신시킨 것은 페터 뵐러가 아니었다(Yet it was not Peter B hler who convinced me, that conversion <I mean, justification> was an instantaneous work.)"112).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칭의와 중생의 사건이 곧 회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회심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라면,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런 사건이 칭의와 중생이요, 이 둘은 동시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113)
1.4. "3) 성화와 완전"
1.4.1.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로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시는 순결하고 완전한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 죄와 정욕의 권세는 서서히 정복된다."
검토: (a) 여기서는 "죄와 정욕의 권세"라고 표현하였는 바, 웨슬리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권세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요, 영어로는 authority다. 이것은 지금 죄의 테마에 있어서는 죄의 존재, 즉 사단이 인간을 종으로 삼고 죄짓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용어다. 그런데 웨슬리에 의하면, 성화에 있어서 믿는 자를 죄짓게 하는 것은 "죄의 존재"(the being of sin)로부터 나오는 "죄짓게 하는 세력"(the power of sin)이다.114) 죄의 존재는 성경의 표상으로는 사단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멸망되는 것으로 웨슬리는 생각했다.115) 이것은 고린도 전서 15장 23-28절의 표상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죄짓게 하는 세력"은 믿는 자를 죄짓도록 유혹하고, 믿는 자가 이 유혹에 넘어간다면, 그에게는 '은혜 안에 거하는 것'과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이 약화된 것이다. 믿음이 강하면, 유혹을 느낄지라도 나는 죄짓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유혹(temptation)'과 '정욕(the lust of the flesh) 또는 심령의 부패(the corruption of the heart)'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116) 한마디로, 죄는 능력을 갖고 인간을 유혹하여 죄짓게 할 수 있는 실재요, 정욕은 권세와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의 권세와 능력의 영향을 받고 인간이 짓는 죄의 상태, 특히 내적인 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117) 그러므로 "죄와 정욕의 권세"라는 표현은 '죄의 세력과 정욕(믿는 자의 내적인 죄의 의미에서의 정욕, 즉 웨슬리의 용어로서는 "the lust of the flesh")'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영어로 표현한다면, 'the power of sin and the lust of flesh'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재 표현대로 "죄와 정욕의 권세"를 영어로 번역하면 'the authority of sin and the authority of the flesh'라고 할 수 있는 바, 이것은 웨슬리의 죄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b) "죄와 정욕의 권세는 서서히 정복된다"라고 한 바, 이것은 웨슬리의 성화론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웨슬리는 "The Repentance of Believers"라는 설교에서 성화가 되는 본래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써 육신의 행실을 죽일 수 있을지라도, 또 우리가 우리의 적들을 매일매일 약화시킬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몰아낼 수는 없다. 칭의 때 받은 모든 은혜로도 그들을 박멸할 수가 없다. ......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다시 한번, 두 번째로 '깨끗하여져라'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기 전에는 절대로 우리는 그들을 박멸할 수가 없다. 오로지 그 때에만 '그 문둥병은 깨끗하여지는 것이다'. 오로지 그 때에만 그 악한 뿌리, 육적인 마음은 파멸되고, 타고난 죄는 더 이상 존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두 번째 변화(second change)가 없는 것이라면, 만약 칭의 이후에 오는 즉각적인 건지심이 없다면, 만약 하나님의 점진적인 활동(이런 점진적인 활동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만이 있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로 가득 찬 채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요, 또한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I,20).
그렇다면, 믿는 자에게 있어서 죄의 세력이 정복되는 것은 서서히 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되는 성화의 과정으로는 죄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는 있다고 보았다), '깨끗하여지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되는 것인데, 이것은 믿는 자를 완전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성화의 약속을 신뢰하고, 이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이런 믿음을 보시면 그 약속을 지금 여기서라도 이루신다는 믿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즉각적인" 두 번째 변화를 통하여 되는 것이다.118) 그런데 웨슬리는 이런 즉각적인 변화 이전에 완전히 성화되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의 과정이 있고, 이것이 완전한 성화를 위한 진정한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한다고 말한다.119)
1.4.2. "웨슬리는 이 세상에서 순간적인 완전을 인정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소망과 기대를 통해 목표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검토: 위 (1.4.1.)에 인용한 웨슬리의 주장을 본다면, 완전한 성화가 언제나 목표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로 가득 찬 채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요, 또한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 웨슬리는 완전한 성화가 이 지상에서 우리가 죽기 전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고, 또 이루어지도록 따라 가라고 권고한다. 그는 또한 완전성화에 도달한 신자의 예를 자세히 소개하기도 한다.120) 만약 완전성화가 목표로만 남아 있는 것이라면, 웨슬리의 완전성화를 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비판한 개혁교회(즉, 칼빈주의, 장로교회 등)의 성화론121)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1.5. "4) 믿음과 선행"
1.5.1.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훈련과 실천을 통해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한다."
검토: 위 (1.4.1.)과 (1.4.2.)에 인용하고 설명한 웨슬리의 성화사상에 비추어 볼 때, 이 명제는 그의 성화사상의 반쪽만을 말했을 뿐이다. 옳게 말하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을 실천하는 훈련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성장하나, 즉각적인 두 번째 변화가 있음으로써만 완전한 사랑의 삶에 들어 갈 수 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1.6. "5) 은혜의 수단과 교회"
1.6.1. "거기서 예배와 기도회, 절제와 금욕, 선행과 자비의 행위 등 개인과 사회를 성화시키는 복음적 삶의 훈련이 이루어진다."
검토: "사회를 성화시킨다"는 표현은 위 (1.1.3.의 b)에서 지적한 의미에서 웨슬리의 신학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기독교적 세계"(a Christian World)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신학적으로 더욱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세계"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이 지상이 완전히 기독교화되어 "전능하신 주가 그의 강한 능력을 행사하여 친히 통치하시는" 상태인데, 이것이 "예배와 기도회, 절제와 금욕, 선행과 자비의 행위 등 .... 복음적인 삶의 훈련"을 통하여 된다는 말인가? 웨슬리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인데,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 우리의 행위가 아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인간의 행위로써 끝낼 수 있다고 보는 신학은 웨슬리의 것이 아니다.
1.7. "6) 선교와 봉사"
1.7.1. "구원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성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섬김을 통해 이 세상에서 평화와 정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
검토: 위 (1.6.1.)에 지적한 문제점을 역시 갖는 주장으로서 웨슬리의 신학에 일치하지 않는 사상이라고 판단된다. "역사와 사회를 성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 이 세상에서 평화와 정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는 표현은 한 때 유행하던 소위 "Missio Dei"라는 민중신학의 개념에 오히려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1.8. "7)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
1.8.1. "감리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창조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다."
검토: 본 <교리와 장정>에서는 부록으로 밀려난 "2. 연합속회 총칙(영국감리교회), 총칙"에 이렇게 되어 있다: "이 회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가지 조건뿐이니 곧 '장래의 노하심을 피하고 자기들이 죄에서 구원함을 얻고자 하는 소원'이다." 그렇다면, 감리교인들이 믿는 것은 "장래의 노하심", 즉 마지막 심판 그것도 위 (1.1.3.의 c)에서 인용하고 설명한 그런 의미의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사실과 거기서 구원을 얻으려면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도록 성화의 길을 가야한다는 사실뿐이다. 이 심판은 "만물의 회복과 갱신을 통한 완성"이 아니라, 지금의 피조세계의 폐지와 영벌과 영생 뿐이다. 영생의 상태로 이어지는 세상은 지금의 이 세상이 회복된 만물이 아니라, 웨슬리도 성경을 따라 표현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늘의 몸이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세상이다 (고전 15장 35-58 참조). "창조의 완성"이 아니라, 하늘의 몸, 신령한 몸으로써 새롭게 창조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새창조이다.
2. "제 2 절 한국감리회 신학을 위한 지침"
2.1. "1. 성경"
2.1.1. "한국 감리교인들은 ...... 성경이 기독교 교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이요 표준임을 믿는다"
검토: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는 표현은 그 다음으로 중요한 원천이 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웨슬리의 성경관에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그의 설교집 1권 머리말에서 "어떠한 대가라도 좋으니 나에게 하나님의 그 책을 주시오. 나는 여기에 그 책을 갖고 있다. 여기에 나에게는 알아야 할 지식이 충분히 들어 있다. 나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이 되게 하라(At any price give me the Book of God! I have it. Here is knowledge enough for me. Let me be homo unius libri."122)라고 말한 바, 이것의 의미는 구원을 위한 성경의 필수성과 충족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리에게 성경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유일무이하고 충족한 원천'이다. 이점에서 한국 감리교인들도 웨슬리를 따른다고 본다.
2.1.2.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성경은 최우선적이다. 그리고 전통, 체험, 이성, 토착문화는 성경연구에 필수적이다."
검토: 이 명제는 성경이 전통, 체험, 이성, 토착문화가 없이는 연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책이다: "나는 하늘로 가는 길을 발견하려는 이 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의 책을 열고 읽는다. 내가 읽는 구절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모호한 점이 있는가? 어떤 내용이 애매하고 난해한가? 그러면 나는 나의 마음의 눈을 들어 빛의 아버지를 바라본다. ...... 누구든지 당신의 뜻을 행하고자 원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알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오니 당신의 뜻을 알게 하옵소서. ...... 그런 다음에 나는 성경의 병행구들을 찾아내어 찬찬히 숙고하고 영적인 내용들을 영작인 내용들끼리 비교한다. 그리고 나서 온 마음을 다하여 정신을 집중시키고 자세를 진지하게 가다듬어 명상한다. 그런 연후에도 의심스러운 점이 남아있으면 하나님의 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다. 그렇게 하면 글자 그 자체로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성경의 글자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배운 것, 그것을 나는 가르치는 것이다"123)
이런 성경해석 방법이 또한 루터 이래로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 방법이다. 이런 방법을 그들은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한다'든지 또는 같은 뜻에서 '성경은 스스로 말한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그의 회심 간증문에서도 그가 성경에서 칭의론을 확인할 때, 바로 이러한 성경해석 방법을 활용한 것을 간증하고 있으며, 그는 이것을 심지어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이라고 표현했다.124) 한국의 감리교인들도 웨슬리를 따라 이러한 종교개혁의 성경해석 방법에 서 있다. 이 방법 외에 다른 성경해석 방법은 웨슬리적이지도 않고 감리교적이지도 않다.
2.1.3. "우리 신학의 과제는 성경본문의 축자적 반복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말씀으로 새롭게 해석하는데 있다."
검토: 위에 말한 웨슬리의 성경해석 방법이 성경본문의 축자적 반복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성경해석 방법을 따르는 감리교인은 '성경본문의 축자적 반복이라는 비난'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웨슬리는 "신자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어떤 교리든지 새로운 교리라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에 틀림없다. 저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Old Religion)가 유일한 참 종교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교리도 그것이 처음부터 있었던 그 교리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으면 올바른 교리일 수가 없다"(III, 9).
2.2. "2. 전통"
2.2.1. "기독교 전통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복음의 능력이 행사됨으로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것이 되기 위한 도전을 받고 있다."
검토: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교 전통은 어떤 새로운 시대적 경향성(예컨대 해방신학 같은 것)으로써 보충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교리든지 새로운 교리라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에 틀림없다. 저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Old Religion)가 유일한 참 종교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교리도 그것이 처음부터 있었던 그 교리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으면 올바른 교리일 수가 없다"("신자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 III, 9).
2.3. "3. 체험"
2.3.1. "기독교 복음의 증언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전통에 의해 전달된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체험하기 전에는 아무 효력이 없다."
검토: 웨슬리에게 있어서 체험(experience)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몇가지 의미를 갖는다:
(1)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받고 중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면서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내 자신이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가, 지금 편안한가 아니면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의식하지 않는냐("immediatly conscious of it")?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이 지금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면, 이 사실을 나는 즉각적인 의식으로써 안다("By the same immediat consciousness, you will know if your soul is alive to God.")'125) 여기서 체험은 나 자신의 칭의, 중생, 성화의 사실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직관적 인식과 확신을 의미한다.
(2) 웨슬리의 회심 간증문에 보면,126) 회심 얼마 전에 웨슬리는 이신칭의가 진리인 것을 성경과 체험("Scripture and experience")에 비추어 검토해 보자고 뵐러에게 부탁한다. 웨슬리는 성경이 이신칭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이 성경의 이신칭의 가르침대로 믿음으로만 칭의받는 사람들을 보여달라고 웨슬리는 요구한다. 그 다음날 뵐러는 세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왔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따라 (of their own personal experience)" 성경의 이신칭의 내용 그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살아 있는 믿음은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의 확신과 현재의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과 불가분리이다"라고 증언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철저히 설득되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믿음을 끝까지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여기서 웨슬리가 말하는 경험이라는 것은 이신칭의가 성경에 언어로만 주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증언된 내용 그대로 현실로서 실현되는데, 이 실현된 상태는 더 이상 언어가 아니라 실재(reality)인 바, 이 실재를 이신칭의를 받은 당사자들은, 위에 (1)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이성적 추론(reasoning)으로써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내적의식(the direct, immediat and inward consiousness)으로써 인식하고 확신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웨슬리가 말하는 경험이라는 것은 경험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인식주체로서의 개인이 외적 데이터를 감관을 통하여 수용하고 이성적 추론을 통하여 개인 안에서 형성하는 개인적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경의 증언내용과 그 약속이 외부세계에서 실현된 실재 사이의 일치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내적의식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확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과 확인은 개인간에 전혀 다른 것이거나 소통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성경의 증언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즉, 문자 그대로 인정하고: "literal interpretation"!) 그 성경의 증언이 실현된 실재를 사심(私心)없이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재에 일치하는 합의적 인식(consensus)', 즉 웨슬리적 의미의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뵐러 및 그 세 사람의 증언을 듣고, "이제 나는 철저히 설득되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3) 웨슬리에게 있어서 경험이라는 것이 이와 같이 개인의 직접적 의식을 통한 직관적 인식이면서도 '실재에 일치하는 합의적 인식'이 될 수 있는 근거는 경험주체로서의 개인의 직접적 의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실재(reality)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외부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성취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교리적 차원의) 기독교가 약속한 것은 나의 영혼 안에서 성취된다. 그리고 내적 원리 차원의 기독교는 그러한 모든 약속들의 성취다. 그것은 곧 거룩과 행복, 피조된 영에 각인된 하나님의 형상, 영생에 이르기까지 솟아 나오는 평안과 사랑의 샘물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진리라고 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What Christianity (considered as a doctrine) promised is accomplished in my soul. And Christianity, considered as a inward principle, is the completion of all those promises. It is holiness and happiness, the image of God impressed on a created spirit, a fountain of peace and love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 And this I conceive to be the strongest evidence of the truth of Christianity.)"127) 여기서 "holiness, happiness, the image of God impressed on a created spirit, a fountain of peace and love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라고 한 것이 바로 믿음에 의한 칭의, 중생, 성화, 영화를 말하는 것이니, 이 구원이 현실적 실재라고 직접적 의식을 통하여 인식하고 확신할 수 있는 최종적 근거는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하시고(즉, 현실이 되게 하겠다고 결정하여 우리에게 선언하시고), 그 약속을 실제로 성취하여 현실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원의 실재를 직접적이며 내적인 의식(직관)을 통하여 인식하고 확신하는 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경험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의 진리를 입증하는 가장 강한 증거"(the strongest evidence of the truth of Christianity)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곧 이어서 말하기를 "나는 전통의 증거를 낮추어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종류와 정도 안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는 전통을 이것(즉, 경험: 필자)과 같은 등급에 두지 않는다. 전통의 증거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수많은 손을 필히 거쳐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약화된다. 그러나 어떠한 시간의 흐름도 내적 증거의 힘에 영향을 줄 수가 없다. 내적 증거는, 그것이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지금도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자의 영혼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I do not undervalue traditional evidence. ...... It is highly serviceable in its kind and in its degree. And yet I cannot set it on a level with this. ...... traditional evidence is weakend by length of time, as it must necessarily pass through so many hands in a continued succession of ages. But no length of time can possibly affect the strength of this internal evidence. ...... It passes now, even as it has done from the beginning, directly from God into the believing soul)"128)라고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전통의 증거능력은 경험의 증거능력과 같은 등급에 놓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전통은 간접적이기 때문이고,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증거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경험(내적증거)의 증거력은 직접적인 것이고, 또한 시간의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에 인용한 교리와 장정의 문장에서 "기독교 복음의 증언은 전통에 의해 전달되고 우리가 그것을 체험한다"라고 말한 것은 웨슬리의 경험개념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말하는 경험이라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약속(즉, 복음)과 그것의 실현에 대한 '직접적 내적의식을 통한 직관적 확증'이라고 하는 것인데, 전통에 의하여 전달된 복음이 개인에게 체험된다고 하는 것은 그 반대로 전통이라는 간접적 증거를 근거로 하여 개인이 복음의 진리다움을 인식하고 확신한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경험주의가 말하는 의미의 경험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구태어 경험의 확증(내적 확증)과 전통의 확증을 비교하면서, 경험주의가 말하는 의미의 경험이 가졌다 하는 시공의 영향에 따라 좌우되는 증거력을 경계했던 것이다.
2.3.2. "성경에 계시되고 전통에 의해 조명된 복음의 진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살아 움직이게 된다."
검토: 복음의 진리가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살아 움직이게 된다"는 것은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경험이라는 개념 하의 테마가 아니라, 성화(sanctification)라는 개념 하의 테마다. 왜냐하면 성화라는 것이 바로 중생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외적, 내적 죄를 약화시키고 끊어내며, 또한 말씀을 따라 의와 선을 실천하는, 즉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말씀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 살아 움직이는', 한마디로 거룩하여져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구태어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경험이라는 개념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인식과 확증이라는 인식론(theory of knowedge)의 개념이고, 성화라는 개념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의 존재와 행동 안에서의 말씀의 실현이라는 행동이론(theory of act)의 개념이다.
2.3.2. "...... 체험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 특히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포와 기아, 고독과 절망, 그리고 잘못된 경제구조, 핵 시대가 초래한 인류와 생태계의 위기 등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체험은 성서적 규범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성경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검토: 위에서 지적한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경험은 인식론의 개념이지 행동이론의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처럼 윤리적 테마는 경험개념 하에서 언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리교의 사회신경과 같은 윤리적 실천의 문제와 원리와 목표를 피력하는 곳에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2.4. "4. 이성"
회심 후의 웨슬리가 말하는 이성(reason)이라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됐을 때의 최초의 직관적 이해력이 그의 타락으로 인하여 육에 의하여 둔화된 이후 추론적 인식(reasoning)의 기능으로서, 말하자면 타락에 의하여 초래된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129). 여기서 직관적 인식이라는 것은 오류의 가능성이 없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명료하고도 확신있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추론적 인식이라는 것은 간접적인 인식이요 그래서 오류의 가능성과 불명료성과 불확실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인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성의 기능은 인간사회 안에서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 관계의 핵심 부분에서 완전히 무능한 것으로 웨슬리는 이해하고 있다. 즉, "이성은 믿음을 생산하지 못한다(reason cannot produce faith)"130), "이성 혼자서는 어떤 인간에게 있어서도 소망을 생산하지 못한다. 즉, 성경적 소망을 생산하지 못한다(reason alone cannot produce hope in any child of man; I mean scriptural hope)"131), "이성은 아무리 계발되고 개선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reason, however cultivated and improved, cannot produce the love of God)"132), "이성은 또한 모든 사람에 대한 온유하고 관대하며 무사공평한 박애를 의미하는 이웃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so neither can it produce the love of our neighbour, a calm, generous, disinterested benevolence to every child of man", "so it cannot give happiness)"133)
그러나 웨슬리가 신앙생활에서 이성의 추론하는 논리적 기능을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순전히 자연인에게도 있는 인간 사이의 이성의 이해능력과 의사소통의 기능 때문이다 . 이 이성의 기능은 타락 이후 모든 자연인에게 있는 타고난, 즉 자연적 기능의 현상이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의 한 현상이 아니다.
2.4.1.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고 그 메시지를 광범위한 지식의 세계와 연관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신학은 이성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적어도 두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1) 성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웨슬리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가 읽는 것의 의미에 관해 의문이 있는가? 어떤 것이 모호하고 뒤얽혀 있는가? 나는 나의 마음을 빛의 아버지께로 들어 올린다. '주님, 누가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께 여쭈어라 하신 말씀, 이 말씀은 당신의 말씀이 아닙니까! ... 누가 당신의 뜻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면, 그에게 알게 하겠다고 당신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뜻을 기꺼이 행하고자 합니다. 나로 당신의 뜻을 알게 하소서"134) 그러므로 성경의 진정한 이해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우리의 이성 그 자체만이 아니라, 마음을 빛의 아버지에게로 들고,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 뜻을 알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뜻을 행하기를 열망하며 하나님께 알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이 우리의 이성을 도우시므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웨슬리는 "이성이 성령에 의하여 조력을 받아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Is it not reason (assisted by the Holy Ghost) which enables us to understand what the Holy Scriptures declare concerning the being and attributes of God?"135)
(2) "그 메시지를 광범위한 지식의 세계와 연관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신학은 이성을 필요로 한다"는 자유주의 신학적 주장에 대하여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장은 그 스스로 웨슬리 신학을 전제했다고 하므로, 나는 묻기를 웨슬리는 성경의 메시지를 그 당시의 광범위한 지식의 세계와 연관시키려고 했는가? 그렇다면, 그 증거는?
만약 그가 전통을 중요시 한 것이 그것이라 한다면, 나는 대답한다: 웨슬리가 전통을 중요시 한 것은 메시지를 광범위한 지식의 세계에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반영한 전통이라면, 그 안에서 성경 메시지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재확인했다는 의미에서다. 성경 메시지는 전통이나 소위 "광범위한 지식의 세계"에 의하여 보충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말한다: "I want to know one thing - the way to heaven; how to land safe on that happy shor. God Himself has condescended to teach the way; for this very end He came from heaven. He hath written it down in a book. O give me that book! At any price, give me the book of God! I have it: here is knowledge enough for me. Let me be homo unius libri."136) 성경론적으로 표현하면, 이것은 성경의 필수성과 충족성에 대한 신념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만을 따른다고 말한다: "나의 근거는 성경이다. 그렇다, 나는 성경-고집통이다. 나는 큰 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간에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을 따른다(My ground is the Bible. Yea, I am a Bible-bigot. I follow it in all things, both great and small."137)
2.4.2. 그 다음에, "성경, 전통, 체험으로부터 발전된 기독교 교리는 비판적 이성에 의해 그것의 일관성과 명료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1) "성경, 전통, 체험으로부터 발전된 기독교 교리" 라는 표현은 교의학적으로 볼 때 정확하지 않다. 교의학적으로 정확하며 웨슬리의 신학에 일치되게 표현하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전통에 의하여 확인되며, 경험에 의하여 확증되는 기독교 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웨슬리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교리의 근거는 오로지 성경의 하나님 말씀 밖에 없다. 전통은 그 자신이 일종의 교리요, 그 자체가 성경의 하나님 말씀과 동등시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전통은 교리의 근거도 아니고 그 스스로 교리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경험도 교리의 근거가 아니고, 그 자신이 교리도 아니다. 그래서 경험은 교리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경험은 단지 성경의 하나님 말씀이 약속일 뿐만 아니라 실현되는 현실인 것을 인식하고 확신하는 인간의 인식작용일 뿐이다. 하나의 교리가 형성되는 확정되는 과정은 너무도 복잡하여 그 차원을 신학이 다 드러낼 수 없을 정도다. 단지 신학은 그 내용을 드러낸 어떤 교리가 진리다운 교리인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인데, 그 확인의 과정을 웨슬리 신학에서는 '성경에 근거를 두었는가, 전통에 일치하는가, 우리의 경험 안에서 이 진리가 나에게도 실현된 사실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138)
(2) "비판적 이성"에 의하여 기독교 교리는 "일관성과 명료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도 기독교 교리는 이성의 도움 없이는 그 자체상으로는 일관성도 명료성도 없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하면, 이성은 추론의 기능으로서 진리에 대한 간접적 인식이요 그래서 불명료하며 오류의 가능성을 늘 동반하는 인식현상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성은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가르침(명제, 신조)의 형태로 정리한 것이 교리이니, 다시 말해 이성은 교리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성은 교리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에 관한 일에 있어서 일관성과 명료성을 얻게 된다. 이것이 중생한 자의 이성이다. 그런 다음에 이 이성은 하나님에 관한 일에 있어서 논리적인 기능으로 조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 그 자체가 비판적 능력만으로 교리를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 이성"이라는 용어는 오히려 소위 '프랑크프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의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 또는 다른 이름으로 '新맑스주의'(Neomarxismus)에서 말하는 '비판적 이성'을 연상시킬 뿐이다.139)
2.5. "5. 토착문화"
"한국감리교회가 진정한 한국교회가 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성경, 전통, 체험, 이성과 더불어 한국의 문화를 중시하는 신학의 수립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주장은 한국교회가 '한국'교회로서 "진정한"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한국 문화를 중시하는 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한 가지만을 묻고 싶다: 만약 웨슬리가 진정한 영국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영국문화를 중시하는 신학을 수립했다면, 오늘날 과연 우리가 구태여 그래도 웨슬리안이고자 했을까? 아니면, 영국문화를 중시한 신학은 한국문화를 중시해야 하는 한국교회에 필요없다고 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그래도 웨슬리안이고자 하는 이유는 웨슬리가 영국문화를 중시한 신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만을 중시하는 기독교, 그의 말대로 Bible Christianity140)를 말했기 때문이다.
결 론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교리와 장정」(1997년판)의 제2장 "교리"의 제1절의 "2. 감리교 신앙의 강조점"이 제시하는 감리교 교리개요와 같은 장의 제2절 "한국감리회 신학을 위한 지침" 가운데 존 웨슬리의 신학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성경과 웨슬리 신학에 일치되도록 수정보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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